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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eesiwoo.net &#187; 역사 자료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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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기다림이 간절한 자는 먼 곳을 본다.  평화가 간절한 자는 유라시아를 본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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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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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6 Jun 2017 12:57:53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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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 등록 :2017-06-06 19:30수정 :2017-06-06 19:47 조강 하구는 한반도의 탯자리였다. 황해도 연안반도와 김포반도로 이어지는 만곡의 해안선은 자궁을 닮았고,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는 강화도는 태아였으며, 그곳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한강 예성강 임진강은 탯줄이었다. 조강 중립수역은 남북 합의만...]]></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p>
<p>등록 :2017-06-06 19:30수정 :2017-06-06 19:47</p>
<p>조강 하구는 한반도의 탯자리였다. 황해도 연안반도와 김포반도로 이어지는 만곡의 해안선은 자궁을 닮았고,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는 강화도는 태아였으며, 그곳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한강 예성강 임진강은 탯줄이었다.<br />
조강 중립수역은 남북 합의만 이뤄지면 압록강이나 두만강처럼 다리도 놓고, 유람선도 띄울 수 있고, 강 위에서 교역도 할 수 있다. 시인 신동엽이 오래전 꾸던 꿈은 어쩌면 그곳에서 아쉽게나마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p>
<p>“~(아차산에 이르러) 광진이 되고 삼전도가 되고 도모포가 되니, 한양 남쪽에서 드디어 한강 나루를 형성한다. 여기서 서쪽으로 나가 서강이 되고, 금천 북쪽에서 양화도가 되고, 양천 북쪽에서 공암진이 되고, 교하 서쪽에서 임진강과 합하여 통진 북쪽에 이르러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br />
이제는 기호로만 남아 있는 지명들 가운데 특히 생소한 건 조강이다. 지도상에도 없고, 교과서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 대운하 수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존재를 부정당한 강, 무관심과 망각을 강요당한 강이다.<br />
한반도의 대하천 한강과 임진강이 합수했으니 조강은 ‘할아버지 강’ 조강(祖江)이다. 남북의 대치는 조강을 따라 계속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조강 수역은 군사분계선으로 나뉘지 않았고, 따라서 비무장지대도 없다. 군사분계선은 동쪽의 강원도 고성 북단에서 시작해 조강이 시작되는 경기도 파주 탄현면 만우리에서 끝난다. 조강은 놀랍게도 중립수역으로 설정돼 있다. 정전협정상 그곳에선 남북 어느 쪽 민간선박도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다.<br />
2000년 6월25일 사진작가 이시우 등의 주도로 민예총, 문화연대, 국제평화예술인연대 문화예술인들은 서울 마포에서 평화의 배를 띄웠다. 6·15 남북공동선언 10일 뒤요, 6·25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들은 남북, 좌우도 없는 바로 그 조강 중립지대로 가려는 것이었다. 배는 그러나 김포대교 아래 신곡수중보를 넘지 못하고 좌초했다. 유엔사의 저지를 받을 기회도 없었다.<br />
2005년 7월27일 그들은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강화도에서 조강을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이번엔 유엔사의 협조를 구했다. 비록 중립수역이었지만 유엔사는 이곳을 항행하려는 선박에 대해 등록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강 진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수로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다만 접근까지 막지는 않았다. 이들을 태운 35톤짜리 작은 배는 창후리 선착장을 출발해 강화도 북단 조강 문턱에서 항해를 멈춰야 했다.<br />
그곳에서 본 조강 하구는 한반도의 탯자리였다. 황해도 연안반도와 김포반도로 이어지는 만곡의 해안선은 자궁을 닮았고, 다소곳이 웅크리고 있는 강화도는 태아였으며, 그곳으로 흘러드는 예성강, 한강, 예성강, 임진강은 탯줄이었다. 그 모태의 신비를 앞에 두고 물러서야 했지만,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으로 조강을 더듬고 살피고 꿈꿨다.<br />
오두산 전망대에서 한강 건너는 김포반도요 임진강 건너는 장단반도다. 두 반도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강은 차원 변화를 일으켜 한강·임진강은 조강으로, 군사분계선은 중립수역으로 바뀐다. 남의 방송탑, 북의 선전마을이 강안에 늘어서 제각각 체제 자랑과 비난을 쏟아내지만 조강은 평화롭게 제 갈 길을 간다.<br />
애기봉을 지나면 조강은 몰라도 그 이름은 제법 귀에 익은 섬, 유도가 지척이다. 1996년 여름 임진강 일대에 큰물이 났다. 소 한 마리가 떠내려오다가 구사일생 유도에 걸렸다. 남쪽 초병들이 소를 발견하고 유엔사 허락을 받아 데려왔다. 남은 북에 송환의 뜻을 전했지만 북은 거절했다. ‘우리에겐 소가 많습네다.’ 소는 제주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짝을 만나 새끼도 낳고 가정을 이뤘다.<br />
2년 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 1천마리를 데리고 북으로 갔다. 누구도 밟지 못했던 휴전선을 가로질러 소들이 넘어간 것이었다. 그때 보내진 것은 1000마리가 아니라 1001마리였다. 유도의 소가 낳은 새끼 한 마리가 일행에 보태졌다. 그로부터 휴전선엔 사람도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br />
유도에서 조강은 두 갈래로 나뉜다. 본류는 강화도 북단과 연안반도 사이로 서진해 강화만을 이루고, 지류는 남쪽으로 꺾여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로 흐르며 염하가 된다. 수운이 성했을 때 남쪽에서 올라온 배는 염하를 통해 한양으로 갔고, 북쪽에서 온 배들은 조강을 거슬러 올라갔다.<br />
유도와 마주 보고 있는 강화도 쪽 둔덕엔 연미정이 있다. 갈라진 물줄기가 제비 꼬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의 인조가 금나라의 침략을 받아 평복 차림으로 피신한 곳이 강화도였고, 100여일 만에 두 손 들고 나오면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던 곳이 연미정이다. 연미정 남쪽엔 강화도의 관문 승천포가 있고, 포구를 지키는 갑곶돈대가 있었다. 인조는 물론 고려의 고종이 몽골의 침략을 받아 피신할 때 일행을 태운 배가 정박한 곳이다.<br />
염하는 그렇게 무능한 왕조의 굴욕과 애꿎은 민중의 피눈물을 안고 흘렀다. 몽골과 금, 청의 침략만이 아니었다. 조선 말 쇄국을 고집하다가 당한 병인,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건도 그곳에서 일어났다. 1866년 프랑스 함대는 갑곶진에 상륙해 궁궐을 불태웠고,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했으며 1871년 미국 함대는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유린했으며, 일제는 1875년 초지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이듬해 병자수호조약을 강제했다.<br />
본류는 강화도 월곶리와 북쪽의 개풍군 해창리 사이를 흐르다 해창리 돌출 절벽을 만난다. 조강·한강·임진강 하구에서 강폭이 가장 좁은(1.8㎞)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개성공단이 조성되면서 그곳에 남북을 잇는 다리를 놓으려 했다. 개성까지 불과 18㎞였고, 비무장지대와 달리 지뢰도 없으며, 게다가 군사분계선이 아닌지라 유엔사의 간섭을 최소한도로 받는 곳이어서 민족의 혈맥을 잇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그 ‘평화의 다리’는 실현되지 않았고, 도면으로만 남아 있다.<br />
강화도 북단 철산리 평화전망대가 우두커니 북녘을 향하고 있다. 망원경에 눈을 대면 북쪽 원정리 낡은 집단주택 마당에서 담배를 나눠 피우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맨눈으로도 헐벗은 산, 퇴락한 가옥, 웅크린 사람 등 온통 무채색뿐인 북한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br />
북쪽에서 또 하나의 강이 흘러든다. “예성강 푸른 물에 물새가 울면/ 말하라 강물이여 여기 젊은 이 사람들/ …겨레 위해 쓰러져간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 이제는 김원중의 흘러간 노래로만 전해지는 예성강이다.<br />
예성강을 받아들인 조강 하구는 달걀 모양의 강화만을 이룬다. 고려조 중국은 물론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교지국(베트남) 섬라곡국(타이)의 무역선으로 붐비던 곳이다. 예성강 안쪽의 벽란도는 세계로 열린 개성의 관문이었다. ‘코리아’는 그때 이곳을 드나들던 코 큰 외국인들의 고려 발음이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대외적인 국호가 되었다. 고려의 창업자 왕건은 강화만의 해상권을 쥐고 재력과 무력을 기른 호족이었다. 삼국 통일은 바로 그 강화만의 실력자에 의해 성취됐다.<br />
조강 중립수역은 정전위원회 당사국들의 태만이 준 선물이었다. 강원도 고성 북단에서 경기도 파주 만우리까지 육상경계선(군사분계선)을 획정한 정전위는 조강 수역에 대해서는 옥신각신하기 귀찮았던지 유럽의 다뉴브 강 관리 모델을 그대로 적용했다. 남북 민간선박은 강안 100m 밖에서 자유로이 통행하되, 군정위에 등록한다! 그러나 남쪽 군정위를 관할하는 유엔사는 부속합의서의 등록 조항을 빌미로 민간선박의 통행을 원천 차단했다.<br />
그렇다고 남도 북도 없고, 좌도 우도 없는, 정전협정상 중립수역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곳은 남북 합의만 이뤄지면 압록강이나 두만강처럼 다리도 놓고, 유람선도 띄울 수 있고, 강 위에서 교역도 할 수 있다. 시인 신동엽이 오래전 꾸던 꿈은 어쩌면 그곳에서 아쉽게나마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러움을 빛내며/ 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 유도건 조강 67㎞ 수역이건 아사달과 아사녀가 하나가 될 ‘중립의 초례청’이 될 수 있다. ‘껍데기’와 ‘쇠붙이’가 문제일 뿐이다.<br />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p>
<p>원문보기: </p>
<p>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7739.html?_fr=mt5#csidx8e62fcad9774c0fa00decfb2716e6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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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봉암선생의 비서였던 90세 김제영선생님의 글 몇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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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3 Dec 2016 06:31:13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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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20세기초반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중심 축이었던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작품 ‘어머니’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여명기에 대지에 가득 고여 내 귓전에 소용돌이치던 쇼팽의 장송곡도 베를리오즈의 레퀴엄( Requiem)도 아스라히 멀어지면서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Ich wil l den Kreuzstab gerne tragen.] “사람이 먼저다.” 대한 정치적...]]></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
<p> 20세기초반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중심 축이었던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작품 ‘어머니’는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여명기에 대지에 가득 고여 내 귓전에 소용돌이치던 쇼팽의 장송곡도 베를리오즈의 레퀴엄( Requiem)도 아스라히 멀어지면서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Ich wil l den Kreuzstab gerne tragen.]    </p>
<p> “사람이 먼저다.” 대한 정치적 각오가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의 추악한 밑바닥까지는 들어나지 않았을 것이다.***********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br />
                             ( 헌재에 제출하기위한 나의 증언) </p>
<p>“박대통령 세월호 당일 정상근무&#8230;신속하게 현장 지휘”</p>
<p>2016년12월19일 자 경향신문 종합판 머리기사의 제목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은 오늘까지도 유족만이 아니라. 온 국민의 가슴에 앙금으로 가라앉아있다. 이번 대통령 탄핵에 세월호 참사가 포함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청와대를 대통령의 사저 공간으로 착각하고 있음에 국민의 공분을 샀다. 세월호 참사 당일 김장수 국가 안보실장은 대통령이 어데 게신지를 몰라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 양쪽에 서면 보고서를 보내야 했다고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했다. 늘 대통령의 위치를 체크해야할 비서실장 김기춘은  근무시간인데도 대통령이 어데 게신지 모른다고 답변을 했다가 힐책을 당하자 “관저에 게시면 일일이 대통령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고 꽁무니를 뺐다. 청와대의 공공 기강이 해이되어 있음을 이번 탄핵에서 국민들은 감지했다. 김기춘은 박정희 대통령의 충복이었다. 그의 영애 박근혜 대통령이 오로지 ‘짐(朕)이 법이요 국가 이니라’  중세적 권위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취해 있음을 김기춘 실장은 즐기는 것 같다.  김기춘 뿐이겠는가. 물론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 하라는 해경에 건 전화도 박 대통령의 그 날의 근무이기는 할 터이다. 세웛호가 304명의 건강한 어린학생들을 가두고 수심 깊은 바다속으로 떠나는 그 시간에 대통령은 전속 미용사를 관저로 불러 노닥거리며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세월호가 기울고 있는 오전에는 청와대 의무실 간호장교를 관저로 불러 안약과 가글액을 받았다고 한다.   대통령이 팽목항 사고현장에 얼굴을 내민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팽목항에서 곧바로 관저로 돌아온 대통령은 혼자서 저녁을 드셨다는 게 요리사의 증언이다. 전국의 국민이 사고 당일의 대통령 박근혜의 행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데 국회의 탄핵 소추 의결서에 반발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대통령탄핵 사건답변은 “박대통령 세월호 당일 정상근무&#8230;신속하게 현장 지휘” 이다.<br />
 정상 근무를 했는데 어째서 국가 위기를 관리해야하는 책임자가 대통령의 위치를 몰라 시간을 낭비했나. 신속하게 현장 지휘를 한게 움직이지 말라 였 나. 왜 그 음모를 막지 못했나. 어째서 국방부로 하여금 한국주둔 미 해군에 SOS를 타전하여 도움을 요청하지 안았나. 해경구조대가 할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할 일이 있다. 아직도 국민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이비 대리인을 모아 도도한 국민의 횃불에 맞서겠다는 것인가. 박근혜는 이제라도 늦지않다. 교도소 생활을 체험하겠다고 청해보라. 그리고  가정사를 정리하는 책을 쓰라.</p>
<p>참사 당시 써놓은 글을 찾아냈다.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부분만 음악저널에 내보내고 묻어두었다. 박근혜를 지키겠다는 모든 분들게 일독을 권한다.</p>
<p>세월호 참사</p>
<p>세월호는 순식간의 전복도 폭파도 아니었다. 세월 호는 서서히 기울어졌다.   2014년4월16일 오전8시48분에 사고가 발생 오전 10시 31분에 완전히 뒤집혔다. 전남 진도군 병풍도 해상에서 였다.  참변 현장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나는 전복에서 침몰까지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속 지켜봤다. 당연히  승객들로 아비규환이어야 할 세월호 갑판에는 다른 용무의 요원인지 후리후리 큰 키의 사나이가 누군가와 여유롭게(그렇게 느껴졌다.) 통화를 하고 있을 뿐 정물화(靜物畵)인 듯 고요했다.  승객을 갑판으로 안내하여 대기시켜야할 위급한 상황에서 느긋하게 긴 통화를 하고 있는 그 사나이의 정체가 궁굼해서 견딜 수가 없다. 승객이나 선원이 가라앉는 배에서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앞으로 내놓고 종로나 명동의 건달같이 삐딱한 자세로 긴 시간 전화를 한다는 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고당일 선장과 선원이 탈출하기 이전의 영상이다. 그가 누구인지 누구와 통화를 했고  통화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 공연한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승무원임에 틀림없는 한 여자가 기계실인지 기관실인지에 쭈그리고 앉아 무슨 부품인가를 손보는 것 같았다. 누구이며 무엇을 손보았는지  그 것도 밝히라. 단원고 2학년 박예슬 양이 헬기소리를 듣고 “이제 살았구나 ”서로 다독이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은 동영상등을 언급한 시간이 오전9시38분이다. 탈출 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한 시간하고도 넉넉 했 는데 한사람도 구하지 못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생명이 졸아붙는 운명의 시간에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었으면서 300여 어린이의 생명보다 더 중한 무슨 일을 했는지  시간 대 별로 7시간의 작업을 국민에게 보고하라, 그러지 못하면 집단 학살로 심판을 받아야함을 명심하라. 박근혜는 절대 권위의 초자연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하치않은 일로 탄핵을 받은 고 노무현 대통령과 性이 다를 뿐이다.<br />
.<br />
 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 씨가 단식을 할때 문재인이 동참을 했다. 참 고마웠다. 한명의 희생도없이 전원 구명할 수있었음에도 국가 구조의 잘못과  대통령의 인명 경시 타성으로 초래된 재앙이다. 온 국민이 유족을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처지에 새누리당을 비롯 보수 논객들이 문재인을 정치적 꼼수라고 l비하하고  비방하면서 별의별 불량배나 할 짓이 유족들의 행사장 마다 따라붙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살릴 수있는 자식을 죽인 고통에 살아도 사는게 아닌 유족들이 왜 짐승과 싸워야하나 그래서 추도를 겸해서 쓴 글을 1주기를 맞아 꽃향기가 감미롭고 새들이 함께 노니는 낙원에서 단워고 동문동기가 둘러앉아 행복하게 수다를 떠는 풍경을 바라보며 뒤늦게 1년전 글을 이제 싣는다. 끝. 2015. 4. 15. 김제영</p>
<p>하늘이시여 우리의 어린천사들을 보듬어 주소서. </p>
<p>차갑고 검은 바닷물이 몰고 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 내 걱정 말고 어서  너부터 나가.” 제가 입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입혀주며 의연히 죽음을 택한 정차웅군 (17세). “언니도 어서 나가야 지요.” “너희들 다 구하고 나중에 나갈게 물이 차오른다. 빨리 나가. 선원의 차례는 마지막이야.” 역시 구명조끼를 벗어서 학생에게 입혀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나가게 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선장과 선원들의 몫까지 수행 승객들을 바다로 뛰어 내리게 하여 살려낸 나이 어린 박지연(22세) 승무원.<br />
본능적인 SOS의 감각으로 배의 침몰을 해당 기관에 신속하게(맨 처음)알려 172명을 살려놓고 저승으로 떠나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다보았을 다원고 2학년 최덕하군.<br />
“통장에 돈이 좀 있으니 큰 아들 학비 내라. 난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 침묵으로 이어진 멀고 어둡고  냉냉한 초행길을 어린 제자들 만 보내기가 불안하여 학생들과 동행한 김민규 교감, 박육규, 이해봉. 남윤철, 최혜정, 이지혜, 김초원 선생님들.<br />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가슴이 쓰리고 아파 미칠 것만 같다.<br />
승객 구조에 전력을 다한 양태홍 세월호 사무장. 달콤한 선박여행에 올랐다가 어린 학생들을 이승으로 올려놓고 영원한 수중관광을 떠난 한쌍의 연인 정현선, 김기웅, 가장 험난한 수중 작업에서 희생된 잠수부들 이 모든 분들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시라 하니라&#8230;”마태복음 제 일장 22절의 말씀을 받히겠습니다.</p>
<p>세월호 침몰은 예상된 재앙이다. 처음부터 오늘 까지 수습경위를 지켜보면서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왜 학생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p>
<p>2014년4월16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일반 승객을 태우고<br />
운항하던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접하고 크게 가슴을 쓰러 내렸으나 2시간도 채 안 되서 오보라는 정정 보도가 나왔다. 청천벽력의 비보에 하늘은 노랗게 변했고 세상은 벌집 쑤셔놓은 양상이었고 온 국민은 분노에 주먹을  움켜줬다. 인력으로 대처할 수없는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고현장을 생방송한 TV.화면에는 배 갑판에서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는 선원?의 여유로운 모습이 보였다. 제복이 아닌 허벅지를 들어낸 반바지 차림의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는 모습은 온종일이다 싶게 방영 돠었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선박과 운명을 함께  해야할 선장과 선원들이 해경 구명정에 올라탄 첫 번째 구조 자들이었다. 배의 이상 징후가 감지되자 이들은 조타실에 모여 탈출을 의논 구명정을 기다렸다. 선실도 지나다니고 제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이들이 “여러분 갑판으로 올라가 대기 하십시오. 구명정이 오고 있습니다.” 승객들에게  이 한마디만 방송을 했다면(그 시각에는 방송이 가능)승객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시사IN348호(2014.5.17.)에서  단원고 2학년? 임현진군의 부모님과의 대화와 저승으로 떠나기 직전 상황을  몇 대목 발췌했다.<br />
 [-전략-현진이는 8시52분 친구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냈다. ..배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출근하는 아빠가 걱정할까봐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아침 8시50분쯤에 현진이와 통화를 했다...배가 기운다고 했다. 놀라서 구명조끼를...입고 지시를 따르라고 했는데 현진이는...이미 구명조끼를 입었다면서 사고 상황을...이야기하다가 전화가 끊겼다...오전9시4분 아내한테 소식을 들은 아빠가 현진에게 전화를 했다...“구명조끼를 챙겨 입어라.”...입었다고 답했다. 아들과 통화하는 사이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9시15분 구명조끼를 입은 사진(기울어진 배의 바닥에 등을 붙이고 벽에 발을 대고 선 모습)을 보내왔다...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에 따라 현진이는 친구들과 질서정연하게 추가 지시를 가다리고 있다.] 아들이 보내온 마지막 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후지TV등에 소개되었다. 현진이는 임희민 씨의 장남이고 외아들이다. 임현진군의 시신이 저승으로 떠나든 발인날이 현진군의 열여덟 번 째 생일이었단다.  </p>
<p>5월1일 자 한겨레 목포 안관옥 기자는 헬기소리 들렸다고 학생들이 “살았다” 고 안도했건만&#8230;제목의 기사에서 사고현장에 맨 먼저 도착한 구조대는 해경의B-511 팬서 헬기였음과 단원고 2학년 박예슬 양이 헬기소리를 듣고 서로 다독이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은 동영상(9시38분)등을 언급했고 선체가 뒤집혀 침몰한 시각인 오전10시31분 까지 64분의 여유가 있었음을 환기 시키고 있다.<br />
5월 16일 현재 구조 172명 사망 밑 실종자 304명임이 발표 되었다</p>
<p>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어선을 발동 현장에 당도한 한 어부는 구조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갑판이 아비규환이려니 했는데 쥐죽은 듯 고요한 갑판에는 누구 하나 그림자도 없었다는 것이다.</p>
<p>박근혜정부가 노무현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아 일반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위기관리 부서를 청와대에 두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재변은 없었을 것이다. 구조작업에 동원된 도구가 다 미국산이라고 들었다.<br />
어째서 국방부로 하여금 미 연합사에 SOS를 타전하게 하지 않았나. 한미동맹은 합동군사훈련으로 북한을 겁주는 역할만이 미 연합사의 사명인가. 청와대에 있었으면서 어째서 끔적을 안했나. 민족의 미래인<br />
300명 우리의 건강한 어린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에 잠기고 있을 때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미용사를 불러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게 정신에 고장이 나지않고서야 있을 수 있는 일인가.<br />
                                             끝    김제영   2014.5.6.                          </p>
<p>기적을 바라며 </p>
<p>전국의 낚시 동호인, 산악인 여러분 해상 조난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다니엘 디포(1659?~1731)의  장편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배가 난파하여 표류하다가 무인도에서 생명을 구했습니다. 고립된 섬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개척 자연에 적응하였습니다. 때가 되어서였는지 반란을 일으킨 영국의 선박이 무인도에 기착하였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선장을 구출 28년 만에 무인도에서 고국 영국으로 귀환 했습니다.<br />
여러분께서는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훈련도감 군대에서 공을 세운(총포 제작으로)  박연(朴淵)이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그 분은 네덜란드인 이었습니다. 본명은 벨테브레이(J.J Weltevree)이구요. 1627년(인조5.)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항해 중 풍랑에 표류하다가 제주도에서 구조되어 서울로 이송되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귀화인으로 인조는 박연의 능력을 인정 1648년  그를 무과시험에서 발탁했습니다. 이밖에도 널조각에 간신히 목숨을 걸고 조류에 떠내려가다가  암초에 걸려 지나가던  선박에 구조된 기적의 예(例)도 많습니다.<br />
낚시 동호인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낚시대회를 가끔 개최하시지 않습니까.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해역 도서에서 낚시인들의 집회를 소집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세월 호 실종자 구명보트가 섬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TV.에서 보았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낚시터를 물색하느라고 섬 기슭 바위나 바닷물이 빠진 암초를 건너 뛰어보신 일이 있으시겠지요. 섬 주변을 둘러보는 것과 직접 바위를 샅샅이 뒤지는 것은 정성부터 다릅니다. 파도에 떠밀린 실종자가 거기 어디 바위 틈새에 끼어 빈사상태로 숨이 붙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진도 해역 부근에는 무인도가 없습니까. 무인도 바다가 산 기슬 고목이나 바위에 걸려 살아있음을 깨닫고 간신히 움직여 동굴이나 숲에 쓰러져 고립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거미줄 같은  간절함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산악회 회원 여러분 세월 호 실종자 0 명이 되 기 까지 등산 행선지를 진도 인근 무인도의 산으로 잡아 주십사 간곡히 호소합니다. 진도 인근 섬마을 여러분께도 각별히 주변을 살펴 주십사 손자 손녀를 거느린 노파로서 무릎 꿇고 애원합니다. 세월 호 침몰 5km 상거한 해상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시신을 수습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실낱같은 명줄을 놓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가슴을 조이게 하는 이들도 필시 구명조끼를 입었을 것 이라는 생각에 체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을 치고 데굴데굴 굴으며 엉엉 울고 싶습니다.  우리국방의 미래였던 건강하고 씩씩하고 미끈한 수병들 46명이 함정에 갇히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 발버둥 쳤을 그 천안함의 긴박했던 상황을 잊었단 말입니까. 조난사고 보고를 접한 즉시 선박 내부의 구조 작업에 총력을 집중  민활하게 움직였다면 왜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이승을 등지고 서둘러 떠났겠습니까.</p>
<p>“앞으로 통화 못하게 될 지도 몰라 엄마 사랑해요.”<br />
낚시  동호인. 산악인, 여러분 섬마을 여러분 배가 기울며 몰려오는 죽음을 밀어내려고 버등거리며 부모하고의 끈을 놓지 않으려던 어린 학생(부모가 걱정 할까바 흔연스럽게)의 성숙함을 보십시오. 가슴이 찢기는 듯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로빈슨이나 박연의 경우와 상황이 다르기는 합니다. 하지만 유족이나 실종자 가족의 여한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지요. 다만 기대가 허물어졌을 때의 낙담을 고려하여 떠벌리지 않고 조심스럽고 조용히 여러분의 작업이 지속되기를 빕니다. 끝 김제영.  2014.6.10******************************************************************************하늘이시여 fina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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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제영 선생님의 글 두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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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5 Dec 2015 10:48:35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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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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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문재인 타도의 &#8216;책임론&#8217;과 내 아버님 김관회의 천직론(天職論)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도구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 칼을 꽂지 말고&#8230; 김제영 소설가 ㅣ 기사입력 2015/12/14 [09:49] 안철수(존칭생략)는 갖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복이 넘치면 짐이 되는 수도 있다. 나눔에는 가난의 구제(금전 물질)에만 있는 게 아니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문재인 타도의 &#8216;책임론&#8217;과 내 아버님 김관회의 천직론(天職論)</strong> </p>
<p>이이제이(以夷制夷)의 도구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 칼을 꽂지 말고&#8230; </p>
<p>김제영 소설가  ㅣ   기사입력  2015/12/14 [09:49]  </p>
<p>안철수(존칭생략)는 갖고 있는 게 너무 많다. 복이 넘치면 짐이 되는 수도 있다. 나눔에는 가난의 구제(금전 물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명예 권력 재능도 나눌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한결 윤택하고 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p>
<p>언젠가 내 컴퓨터를 손봐주고 있던 청년이 “선생님 이게 안철수 교수가 발명한 거 에요.” “그래” 반색을 했지만 컴맹인 나는 청년의 설명을 못 알아들었다. 어쨌든 수학이나 과학에 맹물인 나는 안철수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여겨졌다. </p>
<p>안철수의 탈당 소식애 나는 마음이 놓였다. 안철수가 있어야 할 곳은 대학이고 연구소고 실험실이다. 분당하여 만고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본업으로 돌아가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도구가 되어 민족의 가슴에 칼을 꽂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서 젊음이 환호하는 갈 곳으로 가라.</p>
<p>[야당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고 가는 두 사람]. 2015 년12월8일자 한겨래 사설제목이다.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저는 지금 문 대표 개인과 권력싸움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집권할 수 있는 야당을 만들자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하다. </p>
<p>그동안 안철수는 별나라에 가있었나. 김한길과 공동대표일 때는 어째서 수권정당으로 키우지 못했나. 불과 총선4개월을 앞두고 집이 허물어 질 것을 빤히 알면서 대들보를 흔들어 대는 의도가 무엇인가. 비단 안철수뿐이겠는가. </p>
<p>서울대 명예교수 한상진은 대선 직후였는지 4.29보선 직후였는지 패배일로에서 진이 빠져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향해 “ 이 동내에는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어요.” 마치 시비를 거는 건달의 말투로 한마디 하고는 휭 하니 지나가는 모습을 TV에서 보여주었다. 거명은 안했지만 문재인을 꼬집은 비아냥이었다. </p>
<p>도토리 멜방 지고도 10리길은 너끈히 갈만큼 뺀질뺀질한 새정치 민주연합 조경태의원은 또 어떠했나. 문재인대표의 정계 퇴진을 진군 (進軍)나팔 처럼 불어댔다. 이상하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국가기관을 동원한 싸움에서는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이길 수 없음을 이들이 모를 리가 없는 데&#8230; </p>
<p>2012년 12월16일 (18대 대선 투표일 나흘 전)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후보 사퇴로  박근혜 문재인 양자대결 토론이 전개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던진 첫 질문은 ‘인권 변호사가 어찌 국정원의 나약한 여자릍 감금했느냐’ 였다. 토론이라기 보다는 준엄한 질타였다. TV를 지켜보든 나는 깜작 놀랐다. </p>
<p>다음날 민주당 쪽에 전화를 걸었다. “정당이 깡패 집단입니까. 사람을 감금하다니. 어디로 납치를 했습니까.”  “누구십니까. 납치라니요.” “누구긴 누구에요 시민이지 아파트  밖앗 쪽에는 잠금장치가 없지요.” “네 없 읍니다.” “그러니까 장소를 옴겨서 감금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내 생각이 아니라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을 규탄한 내용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요. 본래 천성이 착한 문재인 후보의 이미지에 위선의 탈을 씌우려는 저들의 음모에요.” “왜 가만있습니까.” “유치해서 무시했는데. 국정원이 문제인을 떨어뜨리기 위한 댓글 작업을 하고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경찰직원을 대동 우리 당원이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국정원이 경찰보다 상위라는 인식에서 인지 경찰 직원이 신분증을 내밀어도 막무가내로 문을 안 열어 줬습니다. 국정원의 불법 여당 선거운동의 증거를 지우느라고 자신들이 안에서 문을 잠그고는 갇혔다는 거에요.” </p>
<p>다음날(17일) TV조선?에 윤창중(청와대 대변인?)이 등장했다. 문재인의 위선 부도덕 안보불안 등 박근혜의 주장을 판박이로 한자도 빼지않고 피력하는데 어찌나 설득력이 있던지 좌고우면하는 중립지대의  투표권자들을 박근혜 지지로 빨아드렸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박근혜의 당선은 따놓은 당산이었다.</p>
<p>향응, 금품제공. 관광동원 등은 선거철에 흔히 불거지는 선거사범이다. 허지만 박근혜 후보가 ‘감금’이라는 단어를 악용 문재인에게 덤턱이를 씌웠음은 서부활극 시대에 등장하는 총잡이의 행패나 다름 아니다. 아파트의 구조는 현관 출입문 외부 면에는 잠금장치가 없다. 밖에서 판때기로 못을 박지 않으면  사람을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이 사실을 눈 한번 깜작 안하고 날조하여 대담하게 인권을 들먹여 투표권 자들에게 사기(詐欺)를 친  박근혜의 소름끼치는 음모에는 말 한마디 못 한 자들이 뻔뻔스럽게 개혁을 떠들고 문재인 책임론으로 당을 갈갈이 찢고있다.</p>
<p>1910년8월29일의 한일병합조약 체결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박탈했다. 한말의 암담한 정국에서 김관회의 천직론(天職論)은 탄생했다. 105년 전 23세에 쓰신 논설이 오늘의 환란을 언급한듯 여실하여 번역과 본문을 다 내보낸다. </p>
<p>(1906년부터 공주를 떠나실 때(1924년?)까지의 내 아버님의 활동이 언급된 신문자료와 천직론(天職論)을 광산에서 광맥을 찼듯 발굴해낸 사학자 윤용권(공주영명학교 역사과담당)선생의 정성과 열정 그리고 중노동에 버금가는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p>
<p>天職論  (金寬會) (1887년~1948년) 와세다대학 (早稻田大學정경학부졸업)<br />
대한흥학보 제9호(1910년 1월 20일 발행)</p>
<p>溯究往古 推想將來 吾人類 莫非歷史的聯鎖環也 何謂也 有壽定限 人生通則 以秦皇漢武不死藥之靈 埃及古代木乃伊之術 不能變其通則 自肉體的個個人而觀之則古之人與今之人 不同世 今之人與未來之人不同世 彼爲彼此爲此 若＜40＞相無關然統觀古今自精神上論之則 有不然者存焉 卽因果關係是也. 蓋因果關係者系統之本源而萬有之歸納也 若無是關係則天下事物 片片散散 莫能想像其系統而推究其歸結也 故生養收藏 興替隆衰 互相循環而莫逃乎此因果二前也人也亦然 其來也歸也 決非偶然無意味 渺然無法則也 其來也必有所受 其歸也必有所遺 所謂受者何也 爲古之人受其果也 所謂遺者何也 爲未來之人 遺其因也故吾人不啻與今之人 有互相的關係 亦與古之人及未來之人 有密接關係互相連鎖而繼續乎無窮者也 自是而觀之則吾人之爲歷史的聯鎖環昭然無疑若使吾人 超脫乎此連鎖關係則無以幷列於人類同班也.</p>
<p>然則試問古之人今之人未來之人 互相聯鎖而爲之者果何事耶 爲衣食歟 曰否 不止是也 爲防禦歟 曰不止是也 爲敎育學問歟 曰不止是也 爲家族社會歟 曰不止是也 是皆非不爲之 不過 其 一部分也 未可謂之全體也 然則所謂其全體之事 爲果何事歟 衣食防禦不違是人類生活之基礎也 敎育學問 不違是人智發達之橋梁也 家族社會 不違是人生平和之根底也 若欲使此數者 得其完全 保其善美 不待此數者以上之包括的大要件 不可得以期之矣 所謂包括的大要件者果何也.</p>
<p>嗚呼非國家而何也 請看世界古今之人類 無國家而能保其衣食 防禦學問 家族社會者 有歟無歟 否無國家而能保其生命者亦希矣＜41＞</p>
<p>蓋國家者 吾人最高理想之現實也 本能之反射也 安寧幸福焉以之而亨有 自由利權焉以之而確保 是以 逸外乎國家而吾人之完全生活 未可得以想像也 故希臘大哲아리스로펄네쓰氏 有言 曰人者其天性也政治的動物也國家之建設豈偶然也哉 其天性也 脫於國家的生活而能自足無憾者 必也非人類以下之禽獸則抑非人類以上之鬼神乎 以是觀之 國家者自吾人之天性中出來者而吾人之所以爲天職者 亦不外乎率天性而爲國家也是則古之人猶今之人 今之人猶未來之人 而古之人今之人未來之人 相結歷史的連鎖而務圖協同 發揮天性者也 然則失其本能 忌其天性 不修天職者 是不保國家也 不保國家者 世界之罪人也人類之惡孼也 擧世界而攻之滅之 彼被攻被滅者 夫何怨尤嗚呼白頭山下 愛我二千萬同胞今做何事 爲欲結歷史的連鎖環歟 抑亦斷絶其連鎖環歟.</p>
<p>國家之創立建設 過去祖先之天職也 國家之維持鞏固 今日裔族之天職也 檀箕四千載國家之名稱 南北三千里國家之疆土 祖先之所以遺我也 祖先之於我可謂至矣盡矣而奈之何逮我四千三百年之今日 萎靡板蕩 殆乎滅絶 若是之甚耶 嗚呼爲我韓今日民族者윤용권(공주영명중학교 역사교사, 영명100년사 편찬위원장)</p>
<p>之靈 埃及古代木乃伊之術 不能變其通則 自肉體的個個人而觀之則古之人與今之人 不同世 今之人與未來之人不同世 彼爲彼此爲此 若相無關然統觀古今自精神上論之則 有不然者存焉 卽因果關係是也. 蓋因果關係者系統之本源而萬有之歸納也 若無是關係則天下事物 片片散散 莫能想像其系統而推究其歸結也 故生養收藏 興替隆衰 互相循環而莫逃乎此因果二前也人也亦然 其來也歸也 決非偶然無意味 渺然無法則也 其來也必有所受 其歸也必有所遺 所謂受者何也 爲古之人受其果也 所謂遺者何也 爲未來之人 遺其因也故吾人不啻與今之人 有互相的關係 亦與古之人及未來之人 有密接關係互相連鎖而繼續乎無窮者也 自是而觀之則吾人之爲歷史的聯鎖環昭然無疑若使吾人 超脫乎此連鎖關係則無以幷列於人類同班也.</p>
<p>然則試問古之人今之人未來之人 互相聯鎖而爲之者果何事耶 爲衣食歟 曰否 不止是也 爲防禦歟 曰不止是也 爲敎育學問歟 曰不止是也 爲家族社會歟 曰不止是也 是皆非不爲之 不過 其 一部分也 未可謂之全體也 然則所謂其全體之事 爲果何事歟 衣食防禦不違是人類生活之基礎也 敎育學問 不違是人智發達之橋梁也 家族社會 不違是人生平和之根底也 若欲使此數者 得其完全 保其善美 不待此數者以上之包括的大要件 不可得以期之矣 所謂包括的大要件者果何也.</p>
<p>嗚呼非國家而何也 請看世界古今之人類 無國家而能保其衣食 防禦學問 家族社會者 有歟無歟 否無國家而能保其生命者亦希矣 蓋國家者 吾人最高理想之現實也 本能之反射也 安寧幸福焉以之而亨有 自由利權焉以之而確保 是以 逸外乎國家而吾人之完全生活 未可得以想像也 故希臘大哲아리스로펄네쓰氏 有言 曰人者其天性也政治的動物也國家之建設豈偶然也哉 其天性也 脫於國家的生活而能自足無憾者 必也非人類以下之禽獸則抑非人類以上之鬼神乎 以是觀之 國家者自吾人之天性中出來者而吾人之所以爲天職者 亦不外乎率天性而爲國家也是則古之人猶今之人 今之人猶未來之人 而古之人今之人未來之人 相結歷史的連鎖而務圖協同 發揮天性者也 然則失其本能 忌其天性 不修天職者 是不保國家也 不保國家者 世界之罪人也人類之惡孼也 擧世界而攻之滅之 彼被攻被滅者 夫何怨尤嗚呼白頭山下 愛我二千萬同胞今做何事 爲欲結歷史的連鎖環歟 抑亦斷絶其連鎖環歟.</p>
<p>國家之創立建設 過去祖先之天職也 國家之維持鞏固 今日裔族之天職也 檀箕四千載國家之名稱 南北三千里國家之疆土 祖先之所以遺我也 祖先之於我可謂至矣盡矣而奈之何逮我四千三百年之今日 萎靡板蕩 殆乎滅絶 若是之甚耶 嗚呼爲我韓今日民族者 將默然無爲 任其滅亡 不顧天職 斷絶歷史的連鎖而獲罪於祖先 流毒於子孫可乎 抑將奮然有爲 扶護維持 修我天職 繼續歷史的連鎖而獻功於祖先 遺榮於子孫可乎 是誠擧國之人合同一致 有死之氣 無生之心之秋也 嘻彼欲自破其國 自逐其君 奴隷於人 犬馬於人 汲汲然唯恐不及者 抑復何心哉.<br />
(번역= 윤용권 사학자 영명100년사 편찬)</p>
<p>지난 옛 것을 생각해 보거나, 미래를 짐작해 볼 때 우리 인류의 역사는 서로 연결된 둥근 고리가 아닐 수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인간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것은 인간 삶의 보편적 법칙이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구한 불사약의 신령함도, 이집트 고대 미이라의 술법도 그 보편적 법칙을 어쩌지 못하였다. 육체를 가진 개개인은 옛 사람과 지금의 사람이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고, 지금의 사람과 미래의 사람이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도 어차피 같은 인간이다. 옛과 지금이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다고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한 즉 인과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 </p>
<p>대개 인과 관계라는 것은 계통의 본원이고 만물의 귀납이다. 만약 이러한 관계가 무시되면 천하사물(天下事物)은 산산조각이 나서 그 계통을 상상(想像)할 수도 없고, 그 결말을 추구(推究)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생양수장(生養收藏), 흥체융쇠(興替隆衰)는 서로 순환하는 것이고, 인과 관계에서 도망갈 수는 없는 것이니,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미래의 사람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묘연한 법칙이 없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사람은 반드시 받는 것이 있고, 돌아갈 사람은 반드시 남기는 것이 있다. </p>
<p>소위 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옛 사람이 남긴 결과를 받는다. 소위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 원인을 남긴다. 고로 우리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상호 관계에 있어 역시 옛 사람과 미래 사람에게도 줌으로서 그 밀접한 관계가 상호 연쇄적이고 계속적이라서 무궁한 것이다. 이렇게 바라본 즉 우리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연결된 둥근 고리임을 분명히 알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이 연쇄 관계에서 벗어난다면 곧 인류의 같은 반열에 나란히 서지 못할 것이다.</p>
<p>그러한 즉 시험 삼아 문제를 내보자. 옛 사람과 지금의 사람, 미래의 사람이 상호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것에는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입는 것과 먹는 것일까? 대답은 아니다. 이것 뿐만 아니다. 그럼 방어일까? 이것뿐만 아니다. 교육과 학문일까? 이것뿐만 아니다. 가족사회일까? 이것뿐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이것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일부분에 불과하고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다. </p>
<p>그런 즉 과연 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의식, 방어는 인류 생활의 기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교육, 학문은 인류 사회의 지식이 발달하는 교량 역할에 벗어나지 않는다. 가족, 사회는 인간 생활의 평화의 근저에서 멀지 않다. 만약 이런 논리로 그 완전함을 얻고 그 선미(善美)를 보존하려고 한다면 이 논리 이상의 포괄적 대 요건을 기대하지 못하고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소위 포괄적 대 요건이란 과연 무엇일까?</p>
<p>오호라! 국가가 없다면 어떠할까? 바라건대 세계 고금의 인류를 보자. 국가 없이도 의식(衣食), 방어(防禦), 학문, 가족 사회를 보존할 수 있었다.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 없이도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음은 역시 희박한 것인가?</p>
<p>대개 국가가 우리들의 최고 이상을 이루는 현실이라는 생각은 본능적 반사이다. 국가를 통해 보다 더 안녕과 행복함을 향유하고, 자유이권(自由利權)을 더욱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벗어나서 우리가 완전한 생활을 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옛 그리스의 대철학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그 천성이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국가의 건설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국가를 벗어난 생활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국가에 관심이 없는 자는 필연코 인류가 아닌 그 이하의 금수(禽獸)이거나 그 이상의 귀신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보건데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천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우리의 천직이 되는 까닭이다. </p>
<p>또한 천성에 따름을 벗어나지 말고 국가를 위해야 한다. 이것은 곧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 똑같고, 지금 사람이 미래의 사람과 똑같은 것이니 옛 사람, 지금 사람, 미래의 사람은 서로 역사적으로 둥근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어 힘써 협동을 도모하는 것이 천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한 즉 그 본능을 잃어버리면 그 천성을 기망하는 것이요, 천직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국가를 보존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를 보존하지 못하는 것은 세계의 죄인이며 인류의 재앙이다. 세계 여러 나라가 어떤 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또 공격 받고, 멸망당함은 어떤 원한이 심해서 그러는 것인가?</p>
<p>오호라! 백두산 아래 사랑하는 우리 이천만 동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역사의 둥근 고리를 연결하는데 힘쓰고, 그 연결된 둥근 고리가 단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p>
<p>국가의 창립 건설은 과거 선조의 천직이었다. 국가를 유지하고 공고히 함은 금일 후손의 천직이다. 단기 4천년동안 이어온 국가의 명칭과 남북 삼천리 국가 강토가 선조께서 나에게 남겨준 유산인 까닭이다. 선조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왔구나! 다 끝났도다. 이를 어찌할꼬? 4천3백년 금일에 이르러 나라가 피폐하고 형편이 어지러움이 어찌 이리 심한가!”</p>
<p>오호라! 지금의 우리 한민족이 된 자들이 묵묵히 아무 노력도 없이 멸망에 임해 천직을 돌아보지 않고 역사의 연결된 둥근 고리를 끊으려 함은 선조께 죄를 짓는 것이니 후손들에게 독을 전해 줘야 옳겠는가 아니면 분연히 나라를 돕고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천직을 수행하여 역사의 둥근 고리를 계속 이어감으로써 선조에게 헌공(獻功)하고 자손들에게 영광스러움을 물려줘야 옳겠는가? 지금은 참으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합동일치하여 죽을 기세만 있고, 살겠다는 마음은 버려야 할 때이다.</p>
<p>아! 저들이 스스로 그 나라를 파괴하고자 하여, 그 임금을 끌어내리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고자 하고, 개·말이 되고자 하는데 급급하면서도 오직 관직에 오르지 못함을 두려워하는 것은 도리어 무슨 마음인가?</p>
<p>대한흥학보에 게재된 대부분의 글은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는데 김관회의 천직론은 순 한문으로 쓰여 있다. 개화 지식인답게 구어체 형식의 대중적 문체인 ‘백화문’(白話文)을 사용하였다. (윤용권언급)</p>
<p>소설가 김제영</p>
<p>http://www.amn.kr/sub_read.html?uid=22605&#038;section=sc22&#038;section2=</p>
<p>세월호를 뒤돌아보니 온 몸둥이가쓰리고 아프다.  </p>
<p>김제영 소설가  ㅣ   기사입력  2015/12/14 [16:09]  </p>
<p><em>4·16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1차 공개 청문회가 14일 서울 명동 YWCA 대강당에서 사흘간의 일정으로 시작됐다.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문위원들이 증인으로 출석한 이춘재 해양경찰청 경비안전국장과 유연식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상황담당관 등에 대해 증인심문을 하고 있다. @에너지 경제신문</em></p>
<p>우리가 어떻게 을미년을 그대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살릴 수 있는데 방치했다면 그것은 살인이다. 살인죄를 비는 마음으로 세월호 침몰을 메모한 그때 그때의 상황을 정리했다.</p>
<p>하늘이시여 우리의 어린천사들을 보듬어 주소서.</p>
<p>차갑고 검은 바닷물이 몰고 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 내 걱정 말고 어서  너부터 나가.” 제가 입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입혀주며 의연히 죽음을 택한 정차웅군 (17세).</p>
<p>“언니도 어서 나가야 지요.” “너희들 다 구하고 나중에 나갈게 물이 차오른다. 빨리 나가. 선원의 차례는 마지막이야.” 역시 구명조끼를 벗어서 학생에게 입혀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나가게 하고 배를 버리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선장과 선원들의 몫까지 수행 승객들을 바다로 뛰어 내리게 하여 살려낸 나이 어린 박지연(22세) 승무원.</p>
<p>본능적인 SOS의 감각으로 배의 침몰을 해당 기관에 신속하게(맨 처음)알려 172명을 살려놓고 저승으로 떠나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다보았을 다원고 2학년 최덕하군.</p>
<p>“통장에 돈이 좀 있으니 큰 아들 학비 내라. 난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 침묵으로 이어진 멀고 어둡고  냉냉한 초행길을 어린 제자들 만 보내기가 불안하여 학생들과 동행한 김민규 교감, 박육규, 이해봉. 남윤철, 최혜정, 이지혜, 김초원 선생님들.</p>
<p>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가슴이 쓰리고 아파 미칠 것만 같다.</p>
<p>승객 구조에 전력을 다한 양태홍 세월호 사무장. 달콤한 선박여행에 올랐다가 어린 학생들을 이승으로 올려놓고 영원한 수중관광을 떠난 한쌍의 연인 정현선, 김기웅, 가장 험난한 수중 작업에서 희생된 잠수부들 이 모든 분들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이시라 하니라&#8230;”마태복음 제 일장 22절의 말씀을 받히겠습니다.</p>
<p>세월호 침몰은 예상된 재앙이다. 처음부터 오늘 까지 수습경위를 지켜보면서 ‘탈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왜 학생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p>
<p>2014년4월16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과 일반 승객을 태우고 운항하던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접하고 크게 가슴을 쓰러 내렸으나 2시간도 채 안 되서 오보라는 정정 보도가 나왔다. 청천벽력의 비보에 하늘은 노랗게 변했고 세상은 벌집 쑤셔놓은 양상이었고 온 국민은 분노에 주먹을  움켜줬다. 인력으로 대처할 수없는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p>
<p>사고현장을 생방송한 TV.화면에는 배 갑판에서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는 선원?의 여유로운 모습이 보였다. 제복이 아닌 허벅지를 들어낸 반바지 차림의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는 모습은 온종일이다 싶게 방영 되었다. </p>
<p>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선박과 운명을 함께  해야할 선장과 선원들이 해경 구명정에 올라탄 첫 번째 구조 자들이었다. 배의 이상 징후가 감지되자 이들은 조타실에 모여 탈출을 의논 구명정을 기다렸다. 선실도 지나다니고 제 방으로 가 맥주도 마시고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p>
<p>이들이 “여러분 갑판으로 올라가 대기 하십시오. 구명정이 오고 있습니다.” 승객들에게  이 한마디만 방송을 했다면(그 시각에는 방송이 가능)승객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시사IN348호(2014.5.17.)에서  단원고 2학년? 임현진군의 부모님과의 대화와 저승으로 떠나기 직전 상황을  몇 대목 발췌했다.</p>
<p>[-전략-현진이는 8시52분 친구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냈다. ..배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8230;출근하는 아빠가 걱정할까봐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8230;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아침 8시50분쯤에 현진이와 통화를 했다&#8230;배가 기운다고 했다. 놀라서 구명조끼를&#8230;입고 지시를 따르라고 했는데 현진이는&#8230;이미 구명조끼를 입었다면서 사고 상황을&#8230;이야기하다가 전화가 끊겼다&#8230;오전9시4분 아내한테 소식을 들은 아빠가 현진에게 전화를 했다&#8230;“구명조끼를 챙겨 입어라.”&#8230;입었다고 답했다. 아들과 통화하는 사이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8230;</p>
<p>9시15분 구명조끼를 입은 사진(기울어진 배의 바닥에 등을 붙이고 벽에 발을 대고 선 모습)을 보내왔다&#8230;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에 따라 현진이는 친구들과 질서정연하게 추가 지시를 가다리고 있다.)</p>
<p>아들이 보내온 마지막 사진은 일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후지TV등에 소개되었다. 현진이는 임희민 씨의 장남이고 외아들이다. 임현진군의 시신이 저승으로 떠나든 발인날이 현진군의 열여덟 번 째 생일이었단다. </p>
<p>9월1일 자 한겨레 목포 안관옥 기자는 헬기소리 들렸다고 학생들이 “살았다” 고 안도했건만&#8230;제목의 기사에서 사고현장에 맨 먼저 도착한 구조대는 해경의B-511 팬서 헬기였음과 단원고 2학년 박예슬 양이 헬기소리를 듣고 서로 다독이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은 동영상(9시38분)등을 언급했고 선체가 뒤집혀 침몰한 시각인 오전10시31분 까지 64분의 여유가 있었음을 환기 시키고 있다.</p>
<p>5월 16일 현재 구조 172명 사망 밑 실종자 304명임이 발표 되었다</p>
<p>사고 소식을 듣고 급히 어선을 발동 현장에 당도한 한 어부는 구조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갑판이 아비규환이려니 했는데 쥐죽은 듯 고요한 갑판에는 누구 하나 그림자도 없었다는 것이다. 박근혜정부가 노무현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아 일반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위기관리 부서를 청와대에 두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재변은 없었을 것이다. 구조작업에 동원된 도구가 다 미국산이라고 들었다.</p>
<p>한미동맹은 합동군사훈련으로 북한을 겁주는 역할만이 미 연합사의 사명은 아닐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정 민족의 미래인 어린 학생들의 생명을 존중했다면 국방부에 통보를 하고 직접 미군 연합사에 전화를 하여 우리의 학생들을 구해달라고 간청을 했을 것이다.</p>
<p>소설가 김제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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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9차개정헌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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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1:21:3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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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전 미군 수훈자 명단 2002/12/01  54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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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1:10:5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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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한국전 미군 수훈자 명단 2002/12/01 543 KOREAN WAR MEDAL OF HONOR RECIPIENTS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R S T U V W-X Y Z More than 130 American...]]></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한국전 미군 수훈자 명단 2002/12/01  543  </p>
<p>KOREAN WAR MEDAL OF HONOR RECIPIENTS<br />
A B C D E F G H I J K L<br />
M N O P Q-R S T U V W-X Y Z<br />
More than 130 American servicemen were awarded the Nation&#8217;s highest honor for actions during the Korean War. Today many of those honored names have been bestowed on camps and facilities throughout the Republic of Korea. This is an alphabetical  list of those hero&#8217;s and their stories. </p>
<p>&#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1;</p>
<p>*ABRELL, CHARLES G.</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Marine Corps, Company E, 2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Hangnyong, Korea, 10 June 1951. Entered service at: Terre Haute, Ind. Born: 12 August 1931, Terre Haute, Ind.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fire team leader in Company E,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ile advancing with his platoon in an attack against well-concealed and heavily fortified enemy hill positions, Cpl. Abrell voluntarily rushed forward through the assaulting squad which was pinned down by a hail of intense and accurate automatic-weapons fire from a hostile bunker situated on commanding ground. Although previously wounded by enemy handgrenade fragments, he proceeded to carry out a bold, single-handed attack against the bunker, exhorting his comrades to follow him. Sustaining 2 additional wounds as he stormed toward the emplacement, he resolutely pulled the pin from a grenade clutched in his hand and hurled himself bodily into the bunker with the live missile still in his grasp. Fatally wounded in the resulting explosion which killed the entire enemy guncrew within the stronghold, Cpl. Abrell, by his valiant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certain death, served to inspire all his comrades and contributed directly to the success of his platoon in attaining its objective. His superb courage and heroic initiative sustain and enhance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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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AMS, STANLEY T.</p>
<p>Rank and organization: Master Sergeant (then Sfc.), U.S. Army, Company A, 19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Sesim-ni, Korea, 4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Olathe, Kans. Born: 9 May 1922, DeSoto, Kans. G.O. No.: 66, 2 August 1951. Citation: M/Sgt. Adams,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enemy. At approximately 0100 hours, M/Sgt. Adams&#8217; platoon, holding an outpost some 200 yards ahead of his company, came under a determined attack by an estimated 250 enemy troops. Intense small-arms, machinegun, and mortar fire from 3 sides pressed the platoon back against the main line of resistance. Observing approximately 150 hostile troops silhouetted against the skyline advancing against his platoon, M/Sgt. Adams leaped to his feet, urged his men to fix bayonets, and he, with 13 members of his platoon, charged this hostile force with indomitable courage. Within 50 yards of the enemy M/Sgt. Adams was knocked to the ground when pierced in the leg by an enemy bullet. He jumped to his feet and, ignoring his wound, continued on to close with the enemy when he was knocked down 4 times from the concussion of grenades which had bounced off his body. Shouting orders he charged the enemy positions and engaged them in hand-to-hand combat where man after man fell before his terrific onslaught with bayonet and rifle butt. After nearly an hour of vicious action M/Sgt. Adams and his comrades routed the fanatical foe, killing over 50 and forcing the remainder to withdraw. Upon receiving orders that his battalion was moving back he provided cover fire while his men withdrew. M/Sgt. Adams&#8217; superb leadership, incredible courag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so inspired his comrades that the enemy attack was completely thwarted, saving his battalion from possible disaster. His sustained personal bravery and indomitable fighting spirit against overwhelming odds reflect the utmost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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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ARBER, WILLIAM E.</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Marine Corps, commanding officer, Company F, 2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Chosin Reservoir area, Korea, 28 November to 2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West Liberty, Ky. Born: 30 November 1919, Dehart, Ky.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commanding officer of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ssigned to defend a 3-mile mountain pass along the division&#8217;s main supply line and commanding the only route of approach in the march from Yudam-ni to Hagaru-ri, Capt. Barber took position with his battle-weary troops and, before nightfall, had dug in and set up a defense along the frozen, snow-covered hillside. When a force of estimated regimental strength savagely attacked during the night, inflicting heavy casualties and finally surrounding his position following a bitterly fought 7-hour conflict, Capt. Barber, after repulsing the enemy gave assurance that he could hold if supplied by airdrops and requested permission to stand fast when orders were received by radio to fight his way back to a relieving force after 2 reinforcing units had been driven back under fierce resistance in their attempts to reach the isolated troops. Aware that leaving the position would sever contact with the 8,000 marines trapped at Yudam-ni and jeopardize their chances of joining the 3,000 more awaiting their arrival in Hagaru-ri for the continued drive to the sea, he chose to risk loss of his command rather than sacrifice more men if the enemy seized control and forced a renewed battle to regain the position, or abandon his many wounded who were unable to walk. Although severely wounded in the leg in the early morning of the 29th, Capt. Barber continued to maintain personal control, often moving up and down the lines on a stretcher to direct the defense and consistently encouraging and inspiring his men to supreme efforts despite the staggering opposition. Waging desperate battle throughout 5 days and 6 nights of repeated onslaughts launched by the fanatical aggressors, he and his heroic command accounted for approximately 1,000 enemy dead in this epic stand in bitter subzero weather, and when the company was relieved only 82 of his original 220 men were able to walk away from the position so valiantly defended against insuperable odds. His profound faith and courage, great personal valor, and unwavering fortitude were decisive factors in the successful withdrawal of the division from the deathtrap in the Chosin Reservoir sector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Capt. Barber, his intrepid officers and men, and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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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ARKER, CHARLES H.</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then Pvt.), U.S. Army, Company K, 17th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kkogae, Korea, 4 June 1953. Entered service at: Pickens County, S.C. Born: 12 April 1935, Pickens County, S.C. G.O. No.: 37, 7 June 1955. Citation: Pfc. Barker, a member of Company K,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ile participating in a combat patrol engaged in screening an approach to &#8220;Pork-Chop Outpost,&#8221; Pfc. Barker and his companions surprised and engaged an enemy group digging emplacements on the slope. Totally unprepared, the hostile troops sought cover. After ordering Pfc. Barker and a comrade to lay down a base of fire, the patrol leader maneuvered the remainder of the platoon to a vantage point on higher ground. Pfc. Barker moved to an open area firing his rifle and hurling grenades on the hostile positions. As enemy action increased in volume and intensity, mortar bursts fell on friendly positions, ammunition was in critical supply, and the platoon was ordered to withdraw into a perimeter defense preparatory to moving back to the outpost. Voluntarily electing to cover the retrograde movement, he gallantly maintained a defense and was last seen in close hand-to-hand combat with the enemy. Pfc. Barker&#8217;s unflinching courage, consummate devotion to duty, and supreme sacrifice enabled the patrol to complete the mission and effect an orderly withdrawal to friendly lines, reflecting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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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AUGH, WILLIAM B.</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G, 3d Battalion, 1st Marine,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Along road from Koto-ri to Hagaru-ri, Korea, 29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Harrison, Ohio. Born: 7 July 1930, McKinney, Ky.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member of an antitank assault squad attached to Company G, during a nighttime enemy attack against a motorized column. Acting instantly when a hostile handgrenade landed in his truck as he and his squad prepared to alight and assist in the repulse of an enemy force delivering intense automatic-weapons and grenade fire from deeply entrenched and well-concealed roadside positions, Pfc. Baugh quickly shouted a warning to the other men in the vehicle and, unmindful of his personal safety, hurled himself upon the deadly missile, thereby saving his comrades from serious injury or possible death. Sustaining severe wounds from which he died a short time afterward, Pfc. Baugh, by his superb courage and valiant spirit of self-sacrifice, upheld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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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ENFORD, EDWARD C.</p>
<p>Rank and organization: Hospital Corpsman Third Class, U.S. Navy, attached to a company in the 1st Marine Division. Place and date: Korea, S Sept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Philadelphia, Pa. Born: 15 January 1931, Staten Island, N.Y. Citation: For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in operations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en his company was subjected to heavy artillery and mortar barrages, followed by a determined assault during the hours of darkness by an enemy force estimated at battalion strength, HC3c. Benford resolutely moved from position to position in the face of intense hostile fire, treating the wounded and lending words of encouragement. Leaving the protection of his sheltered position to treat the wounded when the platoon area in which he was working was attacked from both the front and rear, he moved forward to an exposed ridge line where he observed 2 marines in a large crater. As he approached the 2 men to determine their condition, an enemy soldier threw 2 grenades into the crater while 2 other enemy charged the position. Picking up a grenade in each hand, HC3c. Benford leaped out of the crater and hurled himself against the on-rushing hostile soldiers, pushing the grenades against their chests and killing both the attackers. Mortally wounded while carrying out this heroic act, HC3c. Benford, by his great personal valor and resolute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saving the lives of his 2 comrades. His exceptional courage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other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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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ENNETT, EMORY L.</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B, 15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bangsan, Korea, 24 June 1951. Entered service at: Cocoa, Fla. Born: 20 December 1929, New Smyrna Beach, Fla. G.O. No.: 11, 1 February 1952. Citation: Pfc. Bennett a member of Company B,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At approximately 0200 hours, 2 enemy battalions swarmed up the ridge line in a ferocious banzai charge in an attempt to dislodge Pfc. Bennett&#8217;s company from its defensive positions. Meeting the challenge, the gallant defenders delivered destructive retaliation, but the enemy pressed the assault with fanatical determination and the integrity of the perimeter was imperiled. Fully aware of the odds against him, Pfc. Bennett unhesitatingly left his foxhole, moved through withering fire, stood within full view of the enemy, and, employing his automatic rifle, poured crippling fire into the ranks of the onrushing assailants, inflicting numerous casualties. Although wounded, Pfc. Bennett gallantly maintained his l-man defense and the attack was momentarily halted. During this lull in battle, the company regrouped for counterattack, but the numerically superior foe soon infiltrated into the position. Upon orders to move back, Pfc. Bennett voluntarily remained to provide covering fire for the withdrawing elements, and, defying the enemy, continued to sweep the charging foe with devastating fire until mortally wounded. His willing self-sacrifice and intrepid actions saved the position from being overrun and enabled the company to effect an orderly withdrawal. Pfc. Bennett&#8217;s unflinching courag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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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LEAK, DAVID B.</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Medical Company 223d Infantry Regiment, 40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Vicinity of Minari-gol, Korea, 14 June 1952. Entered service at: Shelley, Idaho. Born: 27 February 1932, Idaho Falls, Idaho. G.O. No.: 83, 2 November 1953. Citation: Sgt. Bleak, a member of the medical company,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s a medical aidman, he volunteered to accompany a reconnaissance patrol committed to engage the enemy and capture a prisoner for interrogation. Forging up the rugged slope of the key terrain, the group was subjected to intense automatic weapons and small arms fire and suffered several casualties. After administering to the wounded, he continued to advance with the patrol. Nearing the military crest of the hill, while attempting to cross the fire-swept area to attend the wounded, he came under hostile fire from a small group of the enemy concealed in a trench. Entering the trench he closed with the enemy, killed 2 with bare hands and a third with his trench knife. Moving from the emplacement, he saw a concussion grenade fall in front of a companion and, quickly shifting his position, shielded the man from the impact of the blast. Later, while ministering to the wounded, he was struck by a hostile bullet but, despite the wound, he undertook to evacuate a wounded comrade. As he moved down the hill with his heavy burden, he was attacked by 2 enemy soldiers with fixed bayonets. Closing with the aggressors, he grabbed them and smacked their heads together, then carried his helpless comrade down the hill to safety. Sgt. Bleak&#8217;s dauntless courage and intrepid actions reflect utmost credit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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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ITTIN, NELSON V.</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I, 19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Vicinity of Yonggong-ni, Korea, 7 March 1951. Entered service at: Audubon, N.J. Birth: Audubon, N.J. G.O. No.: 12, 1 February 1952. Citation: Sfc. Brittin, a member of Company I,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Volunteering to lead his squad up a hill, with meager cover against murderous fire from the enemy, he ordered his squad to give him support and, in the face of withering fire and bursting shells, he tossed a grenade at the nearest enemy position. On returning to his squad, he was knocked down and wounded by an enemy grenade. Refusing medical attention, he replenished his supply of grenades and returned, hurling grenades into hostile positions and shooting the enemy as they fled. When his weapon jammed, he leaped without hesitation into a foxhole and killed the occupants with his bayonet and the butt of his rifle. He continued to wipe out foxholes and, noting that his squad had been pinned down, he rushed to the rear of a machinegun position, threw a grenade into the nest, and ran around to its front, where he killed all 3 occupants with his rifle. Less than 100 yards up the hill, his squad again came under vicious fire from another camouflaged, sandbagged, machinegun nest well-flanked by supporting riflemen. Sfc. Brittin again charged this new position in an aggressive endeavor to silence this remaining obstacle and ran direct into a burst of automatic fire which killed him instantly. In his sustained and driving action, he had killed 20 enemy soldiers and destroyed 4 automatic weapons. The conspicuous courage, consummate valor, and noble self-sacrifice displayed by Sfc. Brittin enabled his inspired company to attain its objective and reflect the highest glory on himself and the heroic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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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OWN, MELVIN L.</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D, 8th Engineer Combat Battalion. Place and date: Near Kasan, Korea, 4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Erie, Pa. Birth: Mahaffey, Pa. G.O. No.: 11, 16 February 1951. Citation. Pfc. Brown, Company D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ile his platoon was securing Hill 755 (the Walled City), the enemy, using heavy automatic weapons and small arms, counterattacked. Taking a position on a 50-foot-high wall he delivered heavy rifle fire on the enemy. His ammunition was soon expended and although wounded, he remained at his post and threw his few grenades into the attackers causing many casualties. When his supply of grenades was exhausted his comrades from nearby foxholes tossed others to him and he left his position, braving a hail of fire, to retrieve and throw them at the enemy. The attackers continued to assault his position and Pfc. Brown weaponless, drew his entrenching tool from his pack and calmly waited until they 1 by 1 peered over the wall, delivering each a crushing blow upon the head. Knocking 10 or 12 enemy from the wall, his daring action so inspired his platoon that they repelled the attack and held their position. Pfc. Brown&#8217;s extraordinary heroism, gallantry, and intrepidi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was in keeping with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 Reportedly missing in action and officially killed in action, September 5, 19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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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URKE, LLOYD L.</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G, 5th Cavalry Regiment, 1st Caval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ong-dong, Korea, 28 October 1951. Entered service at: Stuttgart, Ark. Born: 29 September 1924, Tichnor, Ark. G.O. No.: 43. Citation: 1st Lt. Burk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Intense enemy fire had pinned down leading elements of his company committed to secure commanding ground when 1st Lt. Burke left the command post to rally and urge the men to follow him toward 3 bunkers impeding the advance. Dashing to an exposed vantage point he threw several grenades at the bunkers, then, returning for an Ml rifle and adapter, he made a lone assault, wiping out the position and killing the crew. Closing on the center bunker he lobbed grenades through the opening and, with his pistol, killed 3 of its occupants attempting to surround him. Ordering his men forward he charged the third emplacement, catching several grenades in midair and hurling them back at the enemy. Inspired by his display of valor his men stormed forward, overran the hostile position, but were again pinned down by increased fire. Securing a light machinegun and 3 boxes of ammunition, 1st Lt. Burke dashed through the impact area to an open knoll, set up his gun and poured a crippling fire into the ranks of the enemy, killing approximately 75. Although wounded, he ordered more ammunition, reloading and destroying 2 mortar emplacements and a machinegun position with his accurate fire. Cradling the weapon in his arms he then led his men forward, killing some 25 more of the retreating enemy and securing the objective. 1st Lt. Burke&#8217;s heroic action and daring exploits inspired his small force of 35 troops. His unflinching courage and outstanding leadership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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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URRIS, TONY K.</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L, 38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vicinity of Mundung-ni, Korea 8 and 9 October 1951. Entered service at: Blanchard, Okla. Birth: Blanchard, Okla. G.O. No.: 84, 5 September 1952. Citation: Sfc. Burris, a member of Company L,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On 8 October, when his company encountered intense fire from an entrenched hostile force, Sfc. Burris charged forward alone, throwing grenades into the position and destroying approximately 15 of the enemy. On the following day, spearheading a renewed assault on enemy positions on the next ridge, he was wounded by machinegun fire but continued the assault, reaching the crest of the ridge ahead of his unit and sustaining a second wound. Calling for a 57mm. recoilless rifle team, he deliberately exposed himself to draw hostile fire and reveal the enemy position. The enemy machinegun emplacement was destroyed. The company then moved forward and prepared to assault other positions on the ridge line. Sfc. Burris, refusing evacuation and submitting only to emergency treatment, joined the unit in its renewed attack but fire from hostile emplacement halted the advance. Sfc. Burris rose to his feet, charged forward and destroyed the first emplacement with its heavy machinegun and crew of 6 men. Moving out to the next emplacement, and throwing his last grenade which destroyed this position, he fell mortally wounded by enemy fire. Inspired by his consummate gallantry, his comrades renewed a spirited assault which overran enemy positions and secured Hill 605, a strategic position in the battle for &#8220;Heartbreak Ridge,&#8221; Sfc. Burris&#8217; indomitable fighting spirit, outstanding heroism,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glory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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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AFFERATA, HECTOR A., JR.</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F, 2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8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Dover, N.J. Born: 4 November 1929, New York, N.Y.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rifleman with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en all the other members of his fire team became casualties, creating a gap in the lines, during the initial phase of a vicious attack launched by a fanatical enemy of regimental strength against his company&#8217;s hill position, Pvt. Cafferata waged a lone battle with grenades and rifle fire as the attack gained momentum and the enemy threatened penetration through the gap and endangered the integrity of the entire defensive perimeter. Making a target of himself under the devastating fire from automatic weapons, rifles, grenades, and mortars, he maneuvered up and down the line and delivered accurate and effective fire against the onrushing force, killing 15, wounding many more, and forcing the others to withdraw so that reinforcements could move up and consolidate the position. Again fighting desperately against a renewed onslaught later that same morning when a hostile grenade landed in a shallow entrenchment occupied by wounded marines, Pvt. Cafferata rushed into the gully under heavy fire, seized the deadly missile in his right hand and hurled it free of his comrades before it detonated, severing part of 1 finger and seriously wounding him in the right hand and arm. Courageously ignoring the intense pain, he staunchly fought on until he was struck by a sniper&#8217;s bullet and forced to submit to evacuation for medical treatment Stouthearted and indomitable, Pvt. Cafferata, by his fortitude, great personal valor, and dauntless perseverance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saved the lives of several of his fellow marines and contributed essentially to the success achieved by his company in maintaining its defensive position against tremendous odds. His extraordinary heroism throughout was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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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HAMPAGNE, DAVID B.</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Marine Corps, Company A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8 May 1952. Entered service at: Wakefield R.I. Born: 11 November 1932, Waterville, Md.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fire team leader of Company A,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dvancing with his platoon in the initial assault of the company against a strongly fortified and heavily defended hill position, Cpl. Champagne skillfully led his fire team through a veritable hail of intense enemy machinegun, small-arms, and grenade fire, overrunning trenches and a series of almost impregnable bunker positions before reaching the crest of the hill and placing his men in defensive positions. Suffering a painful leg wound while assisting in repelling the ensuing hostile counterattack, which was launched under cover of a murderous hail of mortar and artillery fire, he steadfastly refused evacuation and fearlessly continued to control his fire team When the enemy counterattack increased in intensity, and a hostile grenade landed in the midst of the fire team, Cpl. Champagne unhesitatingly seized the deadly missile and hurled it in the direction of the approaching enemy. As the grenade left his hand, it exploded blowing off his hand and throwing him out of the trench. Mortally wounded by enemy mortar fire while in this exposed position, Cpl. Champagne, by his valiant leadership, fortitude, and gallant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undoubtedly saved the lives of several of his fellow marines. His heroic actions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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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HARETTE, WILLIAM R.</p>
<p>Rank and organization: Hospital Corpsman Third Class, U.S. Navy Medical Corpsman serving with a marine rifle company. Place and date: Korea, 27 March 1953. Entered service at: Ludington, Michigan. Birth: Ludington, Mich.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during the early morning hours. Participating in a fierce encounter with a cleverly concealed and well-entrenched enemy force occupying positions on a vital and bitterly contested outpost far in advance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HC3c. Charette repeatedly and unhesitatingly moved about through a murderous barrage of hostile small-arms and mortar fire to render assistance to his wounded comrades. When an enemy grenade landed within a few feet of a marine he was attending, he immediately threw himself upon the stricken man and absorbed the entire concussion of the deadly missile with his body. Although sustaining painful facial wounds, and undergoing shock from the intensity of the blast which ripped the helmet and medical aid kit from his person, HC3c. Charette resourcefully improvised emergency bandages by tearing off part of his clothing, and gallantly continued to administer medical aid to the wounded in his own unit and to those in adjacent platoon areas as well. Observing a seriously wounded comrade whose armored vest had been torn from his body by the blast from an exploding shell, he selflessly removed his own battle vest and placed it upon the helpless man although fully aware of the added jeopardy to himself. Moving to the side of another casualty who was suffering excruciating pain from a serious leg wound, HC3c. Charette stood upright in the trench line and exposed himself to a deadly hail of enemy fire in order to lend more effective aid to the victim and to alleviate his anguish while being removed to a position of safety. By his indomitable courage and inspiring efforts in behalf of his wounded comrades, HC3c. Charette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saving many lives. His great personal valor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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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HARLTON, CORNELIUS H.</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C, 24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ipo-ri, Korea, 2 June 1951. Entered service at: Bronx, N.Y. Born: 24 July 1929, East Gulf, W. Va. G.O. No.: 30, 19 March 1952. Citation: Sgt. Charlton, a member of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is platoon was attacking heavily defended hostile positions on commanding ground when the leader was wounded and evacuated. Sgt. Charlton assumed command, rallied the men, and spearheaded the assault against the hill. Personally eliminating 2 hostile positions and killing 6 of the enemy with his rifle fire and grenades, he continued up the slope until the unit suffered heavy casualties and became pinned down. Regrouping the men he led them forward only to be again hurled back by a shower of grenades. Despite a severe chest wound, Sgt. Charlton refused medical attention and led a third daring charge which carried to the crest of the ridge. Observing that the remaining emplacement which had retarded the advance was situated on the reverse slope, he charged it alone, was again hit by a grenade but raked the position with a devastating fire which eliminated it and routed the defenders. The wounds received during his daring exploits resulted in his death but his indomitable courage, superb leadership,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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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HRISTIANSON, STANLEY R.</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E, 2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Seoul, Korea, 29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Mindoro, Wis. Born: 24 January 1925, Mindoro, Wis.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with Company E,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t Hill 132, in the early morning hours. Manning 1 of the several listening posts covering approaches to the platoon area when the enemy commenced the attack, Pfc. Christianson quickly sent another marine to alert the rest of the platoon. Without orders, he remained in his position and, with full knowledge that he would have slight chance of escape, fired relentlessly at oncoming hostile troops attacking furiously with rifles, automatic weapons, and incendiary grenades. Accounting for 7 enemy dead in the immediate vicinity before his position was overrun and he himself fatally struck down, Pfc. Christianson, by his superb courage, valiant fighting spirit, and devotion to duty, was responsible for allowing the rest of the platoon time to man positions, build up a stronger defense on that flank, and repel the attack with 41 of the enemy destroyed, many more wounded, and 3 taken prisoner. His self-sacrificing actions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sustain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Pfc. Christianson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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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OLLIER, GILBERT G.</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then Cpl.), U.S. Army, Company F, 223d Infantry Regiment, 40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Tutayon, Korea, 19-20 July 1953. Entered service at: Tichnor Ark. Born: 30 December 1930, Hunter, Ark. G.O. No.: 3, 12 January 1955. Citation: Sgt. Collier, a member of Company F,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Sgt. Collier was pointman and assistant leader of a combat patrol committed to make contact with the enemy. As the patrol moved forward through the darkness, he and his commanding officer slipped and fell from a steep, 60-foot cliff and were injured. Incapacitated by a badly sprained ankle which prevented immediate movement, the officer ordered the patrol to return to the safety of friendly lines. Although suffering from a painful back injury, Sgt. Collier elected to remain with his leader, and before daylight they managed to crawl back up and over the mountainous terrain to the opposite valley where they concealed themselves in the brush until nightfall, then edged toward their company positions. Shortly after leaving the daylight retreat they were ambushed and, in the ensuing fire fight, Sgt. Collier killed 2 hostile soldiers, received painful wounds, and was separated from his companion. Then, ammunition expended, he closed in hand-to-hand combat with 4 attacking hostile infantrymen, killing, wounding, and routing the foe with his bayonet. He was mortally wounded during this action, but made a valiant attempt to reach and assist his leader in a desperate effort to save his comrade&#8217;s life without regard for his own personal safety. Sgt. Collier&#8217;s unflinching courage, consummate devotion to duty,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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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OLLIER, JOHN W.</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C, 27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Chindong-ni, Korea, 19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Worthington, Ky. Born: 3 April 1929, Worthington, Ky. G.O. No.: 86, 2 August 1951. Citation: Cpl. Collier,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While engaged in an assault on a strategic ridge strongly defended by a fanatical enemy, the leading elements of his company encountered intense automatic weapons and grenade fire. Cpl. Collier and 3 comrades volunteered and moved forward to neutralize an enemy machinegun position which was hampering the company&#8217;s advance, but they were twice repulsed. On the third attempt, Cpl. Collier, despite heavy enemy fire and grenade barrages, moved to an exposed position ahead of his comrades, assaulted and destroyed the machinegun nest, killing at least 4 enemy soldiers. As he returned down the rocky, fire-swept hill and joined his squad, an enemy grenade landed in their midst. Shouting a warning to his comrades, he, selflessly and unhesitatingly, threw himself upon the grenade and smothered its explosion with his body. This intrepid action saved his comrades from death or injury. Cpl. Collier&#8217;s supreme, personal bravery, consummate gallantry, and noble self-sacrifice reflect untold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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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OMMISKEY, HENRY A., SR.</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then 2d Lt.), U.S. Marine Corps, Company C, 1st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Yongdungp&#8217;o, Korea, 20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Hattiesburg, Miss. Birth: 10 January 1927, Hattiesburg, Miss.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platoon leader in Company C,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Directed to attack hostile forces well dug in on Hill 85, 1st Lt. Commiskey, spearheaded the assault, charging up the steep slopes on the run. Coolly disregarding the heavy enemy machinegun and small arms fire, he plunged on well forward of the rest of his platoon and was the first man to reach the crest of the objective. Armed only with a pistol, he jumped into a hostile machinegun emplacement occupied by 5 enemy troops and quickly disposed of 4 of the soldiers with his automatic pistol. Grappling with the fifth, 1st Lt. Commiskey knocked him to the ground and held him until he could obtain a weapon from another member of his platoon and killed the last of the enemy guncrew. Continuing his bold assault, he moved to the next emplacement, killed 2 more of the enemy and then led his platoon toward the rear nose of the hill to rout the remainder of the hostile troops and destroy them as they fled from their positions. His valiant leadership and courageous fighting spirit served to inspire the men of his company to heroic endeavor in seizing the objective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1st Lt. Commiskey and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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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OURSEN, SAMUEL S.</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C 5th Caval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Kaesong, Korea, 12 October 1950. Entered service at: Madison, N.J. Born: 4 August 1926 Madison, N.J. G.O. No.: 57, 2 August 1951. Citation: 1st Lt. Course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While Company C was attacking Hill 174 under heavy enemy small-arms fire, his platoon received enemy fire from close range. The platoon returned the fire and continued to advance. During this phase 1 his men moved into a well-camouflaged emplacement, which was thought to be unoccupied, and was wounded by the enemy who were hidden within the emplacement. Seeing the soldier in difficulty he rushed to the man&#8217;s aid and, without regard for his personal safety, engaged the enemy in hand-to-hand combat in an effort to protect his wounded comrade until he himself was killed. When his body was recovered after the battle 7 enemy dead were found in the emplacement. As the result of 1st Lt. Coursen&#8217;s violent struggle several of the enemies&#8217; heads had been crushed with his rifle. His aggressive and intrepid actions saved the life of the wounded man, eliminated the main position of the enemy roadblock, and greatly inspired the men in his command. 1st Lt. Coursen&#8217;s extraordinary heroism and intrepidi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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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RAIG, GORDON M.</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Reconnaissance Company, 1st Caval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asan, Korea 10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Brockton, Mass. Born: 1 August 1929, Brockton, Mass. G.O. No.: 23, 25 April 1951. Citation: Cpl. Craig, 16th Reconnaissance Company,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During the attack on a strategic enemy-held hill his company&#8217;s advance was subjected to intense hostile grenade mortar, and small-arms fire. Cpl. Craig and 4 comrades moved forward to eliminate an enemy machinegun nest that was hampering the company&#8217;s advance. At that instance an enemy machine gunner hurled a handgrenade at the advancing men. Without hesitating or attempting to seek cover for himself, Cpl. Craig threw himself on the grenade and smothered its burst with his body. His intrepid and selfless act, in which he unhesit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mrades, inspired them to attack with such ferocity that they annihilated the enemy machinegun crew, enabling the company to continue its attack. Cpl. Craig&#8217;s noble self-sacrifice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s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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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RUMP, JERRY K.</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L, 7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orwon, Korea, 6 and 7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Forest City, N.C. Born: 18 February 1933, Charlotte, N.C. G.O. No.: 68, 11 July 1952. Citation. Cpl. Crump, a member of Company L,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During the night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launched an assault against his platoon on Hill 284, overrunning friendly positions and swarming into the sector. Cpl. Crump repeatedly exposed himself to deliver effective fire into the ranks of the assailants, inflicting numerous casualties. Observing 2 enemy soldiers endeavoring to capture a friendly machinegun, he charged and killed both with his bayonet, regaining control of the weapon. Returning to his position, now occupied by 4 of his wounded comrades, he continued his accurate fire into enemy troops surrounding his emplacement. When a hostile soldier hurled a grenade into the position, Cpl. Crump immediately flung himself over the missile, absorbing the blast with his body and saving his comrades from death or serious injury. His aggressive actions had so inspired his comrades that a spirited counterattack drove the enemy from the perimeter. Cpl. Crump&#8217;s heroic devotion to duty, indomitable fighting spirit, and willingness to sacrifice himself to save his comrades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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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AVENPORT, JACK A.</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Marine Corps, Company G, 3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Vicinity of Songnae-Dong, Korea, 21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Mission, Kans. Born: 7 September 1931, Kansas City, M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in Company G,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early in the morning. While expertly directing the defense of his position during a probing attack by hostile forces attempting to infiltrate the area, Cpl. Davenport, acting quickly when an enemy grenade fell into the foxhole which he was occupying with another marine, skillfully located the deadly projectile in the dark and, undeterred by the personal risk involved, heroically threw himself over the live missile, thereby saving his companion from serious injury or possible death. His cool and resourceful leadership were contributing factors in the successful repulse of the enemy attack and his superb courage and admirable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enhance and sustain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Cpl. Davenport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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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AVIS, GEORGE ANDREW, JR.</p>
<p>Rank and organization: Major, U.S. Air Force, CO, 334th Fighter Squadron, 4th Fighter Group, 5th Air Force. Place and date: Near Sinuiju-Yalu River area, Korea, 10 February 1952. Entered service at: Lubbock, Tex. Born: 1 December 1920, Dublin, Tex. Citation: Maj. Davis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leading a flight of 4 F-86 Saberjets on a combat aerial patrol mission near the Manchurian border, Maj. Davis&#8217; element leader ran out of oxygen and was forced to retire from the flight with his wingman accompanying him. Maj. Davis and the remaining F-86&#8242;s continued the mission and sighted a formation of approximately 12 enemy MIG-15 aircraft speeding southward toward an area where friendly fighter-bombers were conducting low level operations against the Communist lines of communications. With selfless disregard for the numerical superiority of the enemy, Maj. Davis positioned his 2 aircraft, then dove at the MIG formation. While speeding through the formation from the rear he singled out a MIG-15 and destroyed it with a concentrated burst of fire. Although he was now under continuous fire from the enemy fighters to his rear, Maj. Davis sustained his attack. He fired at another MIG-15 which, bursting into smoke and flames, went into a vertical dive. Rather than maintain his superior speed and evade the enemy fire being concentrated on him, he elected to reduce his speed and sought out still a third MIG-15. During this latest attack his aircraft sustained a direct hit, went out of control, then crashed into a mountain 30 miles south of the Yalu River. Maj. Davis&#8217; bold attack completely disrupted the enemy formation, permitting the friendly fighter-bombers to successfully complete their interdiction mission. Maj. Davis, by his indomitable fighting spirit, heroic aggressiveness, and superb courage in engaging the enemy against formidable odds exemplified valor at its highes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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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AVIS, RAYMOND G.</p>
<p>Rank and organization: Lieutenant Colonel, U.S. Marine Corps commanding officer,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Vicinity Hagaru-ri, Korea, 1 through 4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Atlanta, Ga. Born: 13 January 1915, Fitzgerald, G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commanding officer of the 1st Battalion,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lthough keenly aware that the operation involved breaking through a surrounding enemy and advancing 8 miles along primitive icy trails in the bitter cold with every passage disputed by a savage and determined foe, Lt. Col. Davis boldly led his battalion into the attack in a daring attempt to relieve a beleaguered rifle company and to seize, hold, and defend a vital mountain pass controlling the only route available for 2 marine regiments in danger of being cut off by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s during their re-deployment to the port of Hungnam. When the battalion immediately encountered strong opposition from entrenched enemy forces commanding high ground in the path of the advance, he promptly spearheaded his unit in a fierce attack up the steep, ice-covered slopes in the face of withering fire and, personally leading the assault groups in a hand-to-hand encounter, drove the hostile troops from their positions, rested his men, and reconnoitered the area under enemy fire to determine the best route for continuing the mission. Always in the thick of the fighting Lt. Col. Davis led his battalion over 3 successive ridges in the deep snow in continuous attacks against the enemy and, constantly inspiring and encouraging his men throughout the night, brought his unit to a point within 1,500 yards of the surrounded rifle company by daybreak. Although knocked to the ground when a shell fragment struck his helmet and 2 bullets pierced his clothing, he arose and fought his way forward at the head of his men until he reached the isolated marines. On the following morning, he bravely led his battalion in securing the vital mountain pass from a strongly entrenched and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carrying all his wounded with him, including 22 litter cases and numerous ambulatory patients. Despite repeated savage and heavy assaults by the enemy, he stubbornly held the vital terrain until the 2 regiments of the division had deployed through the pass and, on the morning of 4 December, led his battalion into Hagaru-ri intact. By his superb leadership, outstanding courage, and brilliant tactical ability, Lt. Col. Davis was directly instrumental in saving the beleaguered rifle company from complete annihilation and enabled the 2 marine regiments to escape possible destruction. His valiant devotion to duty and unyielding fighting spirit in the face of almost insurmountable odds enhance and sustain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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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EAN, WILLIAM F.</p>
<p>Rank and organization: Major General, U.S. Army, commanding general, 24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Taejon, Korea, 20 and 21 July 1950. Entered service at: California. Born: 1 August 1899, Carlyle, Ill. G.O. No.: 7, 16 February 1951. Citation: Maj. Gen. Dea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epeated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command of a unit suddenly relieved from occupation duties in Japan and as yet untried in combat, faced with a ruthless and determined enemy, highly trained and overwhelmingly superior in numbers, he felt it his duty to take action which to a man of his military experience and knowledge was clearly apt to result in his death. He personally and alone attacked an enemy tank while armed only with a handgrenade. He also directed the fire of his tanks from an exposed position with neither cover nor concealment while under observed artillery and small-arm fire. When the town of Taejon was finally overrun he refused to insure his own safety by leaving with the leading elements but remained behind organizing his retreating forces, directing stragglers, and was last seen assisting the wounded to a place of safety. These actions indicate that Maj. Gen. Dean felt it necessary to sustain the courage and resolution of his troops by examples of excessive gallantry committed always at the threatened portions of his frontlines. The magnificent response of his unit to this willing and cheerful sacrifice, made with full knowledge of its certain cost, is history. The success of this phase of the campaign is in large measure due to Maj. Gen. Dean&#8217;s heroic leadership, courageous and loyal devotion to his men, and his complete disregard for personal safet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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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ESIDERIO, REGINALD B.</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Army, commanding officer, Company E, 27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Ipsok, Korea, 27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Gilroy, Calif. Born: 12 September 1918, Clairton, Pa. G.O. No.: 58, 2 August 1951. Citation: Capt. Desiderio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epeated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His company was given the mission of defending the command post of a task force against an enemy breakthrough. After personal reconnaissance during darkness and under intense enemy fire, he placed his men in defensive positions to repel an attack. Early in the action he was wounded, but refused evacuation and despite enemy fire continued to move among his men checking their positions and making sure that each element was prepared to receive the next attack. Again wounded, he continued to direct his men. By his inspiring leadership he encouraged them to hold their position. In the subsequent fighting when the fanatical enemy succeeded in penetrating the position, he personally charged them with carbine, rifle, and grenades, inflicting many casualties until he himself was mortally wounded. His men, spurred on by his intrepid example, repelled this final attack. Capt. Desiderio&#8217;s heroic leadership, courageous and loyal devotion to duty, and his complete disregard for personal safety reflect the highest honor on him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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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EWERT, RICHARD DAVID</p>
<p>Rank and organization: Hospital Corpsman, U.S. Navy. Hospital Corpsman attached to Marine infantry company, 1st Marine Division. Place and date: Korea, 5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Taunton, Mass. Birth: Taunton, Mass.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HC,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en a fire team from the point platoon of his company was pinned down by a deadly barrage of hostile automatic weapons fired and suffered many casualties, HC Dewert rushed to the assistance of 1 of the more seriously wounded and, despite a painful leg wound sustained while dragging the stricken marine to safety, steadfastly refused medical treatment for himself and immediately dashed back through the fireswept area to carry a second wounded man out of the line of fire. Undaunted by the mounting hail of devastating enemy fire, he bravely moved forward a third time and received another serious wound in the shoulder after discovering that a wounded marine had already died. Still persistent in his refusal to submit to first aid, he resolutely answered the call of a fourth stricken comrade and, while rendering medical assistance, was himself mortally wounded by a burst of enemy fire. His courageous initiative, great personal valor, and heroic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C Dewert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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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EWEY, DUANE E.</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E, 2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Panmunjon, Korea, 16 April 1952. Entered service at: Muskegon, Mich. Born: 16 November 1931, Grand Rapids, Mich.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gunner in a machinegun platoon of Company E,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en an enemy grenade landed close to his position while he and his assistant gunner were receiving medical attention for their wounds during a fierce night attack by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s, Cpl. Dewey, although suffering intense pain, immediately pulled the corpsman to the ground and, shouting a warning to the other marines around him. bravely smothered the deadly missile with his body, personally absorbing the full force of the explosion to save his comrades from possible injury or death. His indomitable courage, outstanding initiative, and valiant efforts in behalf of others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Cpl. Dewey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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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ODD, CARL H.</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then 2d Lt.), U.S. Army, Company E, 5th Infantry Regiment, 24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ubuk, Korea, 30 and 31 January 1951. Entered service at: Kenvir, Ky. Born: 21 April 1925, Evarts, Ky. G.O. No.: 37, 4 June 1951. Citation: 1st Lt. Dodd,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First Lt. Dodd, given the responsibility of spearheading an attack to capture Hill 256, a key terrain feature defended by a well-armed, crafty foe who had withstood several previous assaults, led his platoon forward over hazardous terrain under hostile small-arms, mortar, and artillery fire from well-camouflaged enemy emplacements which reached such intensity that his men faltered. With utter disregard for his safety, 1st Lt. Dodd moved among his men, reorganized and encouraged them, and then single-handedly charged the first hostile machinegun nest, killing or wounding all its occupants. Inspired by his incredible courage, his platoon responded magnificently and, fixing bayonets and throwing grenades, closed on the enemy and wiped out every hostile position as it moved relentlessly onward to its initial objective. Securing the first series of enemy positions, 1st Lt. Dodd again reorganized his platoon and led them across a narrow ridge and onto Hill 256. Firing his rifle and throwing grenades, he advanced at the head of his platoon despite the intense concentrated hostile fire which was brought to bear on their narrow avenue of approach. When his platoon was still 200 yards from the objective he moved ahead and with his last grenade destroyed an enemy mortar killing the crew. Darkness then halted the advance but at daybreak 1st Lt. Dodd, again boldly advancing ahead of his unit, led the platoon through a dense fog against the remaining hostile positions. With bayonet and grenades he continued to set pace without regard for the danger to his life, until he and his troops had eliminated the last of the defenders and had secured the final objective. First Lt. Dodd&#8217;s superb leadership and extraordinary heroism inspired his men to overcome this strong enemy defense reflecting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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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UKE, RAY E.</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C, 21st Infantry Regiment, 24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Mugok, Korea, 26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Whitwell (Marion County), Tenn. Born: 9 May 1923, Whitwell, Tenn. G.O. No.: 20, 19 March 1954. Citation: Sfc. Duke, a member of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Upon learning that several of his men were isolated and heavily engaged in an area yielded by his platoon when ordered to withdraw, he led a small force in a daring assault which recovered the position and the beleaguered men. Another enemy attack in strength resulted in numerous casualties but Sfc. Duke, although wounded by mortar fragments, calmly moved along his platoon line to coordinate fields of fire and to urge his men to hold firm in the bitter encounter. Wounded a second time he received first aid and returned to his position. When the enemy again attacked shortly after dawn, despite his wounds, Sfc. Duke repeatedly braved withering fire to insure maximum defense of each position. Threatened with annihilation and with mounting casualties, the platoon was again ordered to withdraw when Sfc. Duke was wounded a third time in both legs and was unable to walk. Realizing that he was impeding the progress of 2 comrades who were carrying him from the hill, he urged them to leave him and seek safety. He was last seen pouring devastating fire into the ranks of the onrushing assailants. The consummate courage, superb leadership, and heroic actions of Sfc. Duke, displayed during intensive action against overwhelming odds,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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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WARDS, JUNIOR D.</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E, 23d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angbong-ni, Korea, 2 January 1951. Entered service at: Indianola, Iowa. Born: 7 October 1926, Indianola, lowa. G.O. No.: 13, 1 February 1952. Citation: Sfc. Edwards,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en his platoon, while assisting in the defense of a strategic hill, was forced out of its position and came under vicious raking fire from an enemy machinegun set up on adjacent high ground, Sfc. Edwards individually charged the hostile emplacement, throwing grenades as he advanced. The enemy withdrew but returned to deliver devastating fire when he had expended his ammunition. Securing a fresh supply of grenades, he again charged the emplacement, neutralized the weapon and killed the crew, but was forced back by hostile small-arms fire. When the enemy emplaced another machinegun and resumed fire, Sfc. Edwards again renewed his supply of grenades, rushed a third time through a vicious hail of fire, silenced this second gun and annihilated its crew. In this third daring assault he was mortally wounded but his indomitable courage and successful action enabled his platoon to regain and hold the vital strongpoint. Sfc. Edwards&#8217; consummate valor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utmost glory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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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SSEBAGGER, JOHN, JR.</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A, 7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Popsudong, Korea, 25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Holland, Mich. Born: 29 October 1928, Holland, Mich. G.O. No.: 61, 24 April 1952. Citation: Cpl. Essebagger, a member of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Committed to effect a delaying action to cover the 3d Battalion&#8217;s withdrawal through Company A, Cpl. Essebagger, a member of 1 of 2 squads maintaining defensive positions in key terrain and defending the company&#8217;s right flank, had participated in repulsing numerous attacks. In a frenzied banzai charge the numerically superior enemy seriously threatened the security of the planned route of withdrawal and isolation of the small force. Badly shaken, the grossly outnumbered detachment started to fall back and Cpl. Essebagger, realizing the impending danger, voluntarily remained to provide security for the withdrawal. Gallantly maintaining a l-man stand, Cpl. Essebagger raked the menacing hordes with crippling fire and, with the foe closing on the position, left the comparative safety of his shelter and advanced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firing his weapon and hurling grenades to disconcert the enemy and afford time for displacement of friendly elements to more tenable positions. Scorning the withering fire and bursting shells, Cpl. Essebagger continued to move forward, inflicting destruction upon the fanatical foe until he was mortally wounded. Cpl. Essebagger&#8217;s intrepid action and supreme sacrifice exacted a heavy toll in enemy dead and wounded, stemmed the onslaught, and enabled the retiring squads to reach safety. His valorous conduct and devotion to duty reflected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was in keeping with the noblest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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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FAITH, DON C., JR.</p>
<p>Rank and organization: Lieutenant Colonel, U.S. Army, commanding officer, 1st Battalion, 32d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Vicinity Hagaru-ri, Northern Korea, 27 November to 1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Washington, Ind. Born: 26 August 1918, Washington, Ind. G.O. No.: 59, 2 August 1951. Citation: Lt. Col. Faith, commanding 1st Battalion, distinguished himself conspicuously by gallantry and intrepidity in action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the area of the Chosin Reservoir. When the enemy launched a fanatical attack against his battalion, Lt. Col. Faith unhesitatingly exposed himself to heavy enemy fire as he moved about directing the action. When the enemy penetrated the positions, Lt. Col. Faith personally led counterattacks to restore the position. During an attack by his battalion to effect a junction with another U.S. unit, Lt. Col. Faith reconnoitered the route for, and personally directed, the first elements of his command across the ice-covered reservoir and then directed the movement of his vehicles which were loaded with wounded until all of his command had passed through the enemy fire. Having completed this he crossed the reservoir himself. Assuming command of the force his unit had joined he was given the mission of attacking to join friendly elements to the south. Lt. Col. Faith, although physically exhausted in the bitter cold, organized and launched an attack which was soon stopped by enemy fire. He ran forward under enemy small-arms and automatic weapons fire, got his men on their feet and personally led the fire attack as it blasted its way through the enemy ring. As they came to a hairpin curve, enemy fire from a roadblock again pinned the column down. Lt. Col. Faith organized a group of men and directed their attack on the enemy positions on the right flank. He then placed himself at the head of another group of men and in the face of direct enemy fire led an attack on the enemy roadblock, firing his pistol and throwing grenades. When he had reached a position approximately 30 yards from the roadblock he was mortally wounded, but continued to direct the attack until the roadblock was overrun. Throughout the 5 days of action Lt. Col. Faith gave no thought to his safety and did not spare himself. His presence each time in the position of greatest danger was an inspiration to his men. Also, the damage he personally inflicted firing from his position at the head of his men was of material assistance on several occasions. Lt. Col. Faith&#8217;s outstanding gallantry and noble self-sacrific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reflect the highest honor on him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Army. (This award supersedes the prior award of the Silver Star (First Oak Leaf Cluster) as announced in G.O. No. 32, Headquarters X Corps, dated 23 February 1951, for gallantry in action on 27 November 19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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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ARCIA, FERNANDO LUIS</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I, 3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5 Sept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San Juan, P.R. Born: 14 October 1929, Utuado, P.R.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member of Company I,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ile participating in the defense of a combat outpost located more than 1 mile forward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during a savage night attack by a fanatical enemy force employing grenades, mortars, and artillery, Pfc. Garcia, although suffering painful wounds, moved through the intense hail of hostile fire to a supply point to secure more handgrenades. Quick to act when a hostile grenade landed nearby, endangering the life of another marine, as well as his own, he unhesitatingly chose to sacrifice himself and immediately threw his body upon the deadly missile, receiving the full impact of the explosion. His great personal valor and cool decision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sustain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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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EORGE, CHARLES</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C, 179th Infantry Regiment, 4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ngnae-dong, Korea, 30 Nov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Whittier, N.C. Born: 23 August 1932, Cherokee, N.C. G.O. NO.: 19, 18 March 1954. Citation: Pfc. George, a member of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on the night of 30 November 1952. He was a member of a raiding party committed to engage the enemy and capture a prisoner for interrogation. Forging up the rugged slope of the key terrain feature, the group was subjected to intense mortar and machinegun fire and suffered several casualties. Throughout the advance, he fought valiantly and, upon reaching the crest of the hill, leaped into the trenches and closed with the enemy in hand-to-hand combat. When friendly troops were ordered to move back upon completion of the assignment, he and 2 comrades remained to cover the withdrawal. While in the process of leaving the trenches a hostile soldier hurled a grenade into their midst. Pfc. George shouted a warning to 1 comrade, pushed the other soldier out of danger, and, with full knowledge of the consequences, unhesitatingly threw himself upon the grenade, absorbing the full blast of the explosion. Although seriously wounded in this display of valor, he refrained from any outcry which would divulge the position of his companions. The 2 soldiers evacuated him to the forward aid station and shortly thereafter he succumbed to his wound. Pfc. George&#8217;s indomitable courage, consummate devotion to duty, and willing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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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ILLILAND, CHARLES L.</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then Pfc.), U.S. Army, Company I, 7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Tongmang-ni, Korea, 25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Yellville (Marion County), Ark. Born: 24 May 1933, Mountain Home, Ark. G.O. No.: 2, 11 January 1955. Citation: Cpl. Gilliland, a member of Company I,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launched a coordinated assault against his company perimeter, the brunt of which was directed up a defile covered by his automatic rifle. His assistant was killed by enemy fire but Cpl. Gilliland, facing the full force of the assault, poured a steady fire into the foe which stemmed the onslaught. When 2 enemy soldiers escaped his raking fire and infiltrated the sector, he leaped from his foxhole, overtook and killed them both with his pistol. Sustaining a serious head wound in this daring exploit, he refused medical attention and returned to his emplacement to continue his defense of the vital defile. His unit was ordered back to new defensive positions but Cpl. Gilliland volunteered to remain to cover the withdrawal and hold the enemy at bay. His heroic actions and indomitable devotion to duty prevented the enemy from completely overrunning his company positions. Cpl. Gilliland&#8217;s incredible valor and supreme sacrifice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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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OMEZ, EDWARD</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E, 2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Hill 749, 14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Omaha, Nebr. Born: 10 August 1932, Omaha, Nebr.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n ammunition bearer in Company E,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Bolding advancing with his squad in support of a group of riflemen assaulting a series of strongly fortified and bitterly defended hostile positions on Hill 749, Pfc. Gomez consistently exposed himself to the withering barrage to keep his machinegun supplied with ammunition during the drive forward to seize the objective. As his squad deployed to meet an imminent counterattack, he voluntarily moved down an abandoned trench to search for a new location for the gun and, when a hostile grenade landed between himself and his weapon, shouted a warning to those around him as he grasped the activated charge in his hand. Determined to save his comrades, he unhesitatingly chose to sacrifice himself and, diving into the ditch with the deadly missile, absorbed the shattering violence of the explosion in his body. By his stouthearted courage, incomparable valor, and decisive spirit of self-sacrifice, Pfc. Gomez inspired the others to heroic efforts in subsequently repelling the outnumbering foe, and his valiant conduct throughout sustained and enhanced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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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OODBLOOD, CLAIR</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D, 7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Popsu-dong, Korea, 24 and 25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Burnham, Maine. Born: 18 September 1929, Fort Kent, Maine. G.O. No.: 14, 1 February 1952. Citation: Cpl. Goodblood, a member of Company D,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Cpl. Goodblood, a machine gunner, was attached to Company B in defensive positions on thickly wooded key terrain under attack by a ruthless foe. In bitter fighting which ensued, the numerically superior enemy infiltrated the perimeter, rendering the friendly positions untenable. Upon order to move back, Cpl. Goodblood voluntarily remained to cover the withdrawal and, constantly vulnerable to heavy fire, inflicted withering destruction on the assaulting force. Seeing a grenade lobbed at his position, he shoved his assistant to the ground and flinging himself upon the soldier attempted to shield him. Despite his valorous act both men were wounded. Rejecting aid for himself, he ordered the ammunition bearer to evacuate the injured man for medical treatment. He fearlessly maintained his l-man defense, sweeping the onrushing assailants with fire until an enemy banzai charge carried the hill and silenced his gun. When friendly elements regained the commanding ground, Cpl. Goodblood&#8217;s body was found Iying beside his gun and approximately 100 hostile dead lay in the wake of his field of fire. Through his unflinching courage and willing self-sacrifice the onslaught was retarded, enabling his unit to withdraw, regroup, and resecure the strongpoint. Cpl. Goodblood&#8217;s inspirational conduct and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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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UILLEN, AMBROSIO</p>
<p>Rank and organization: Staff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F, 2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Songuch-on, Korea, 25 July 1953. Entered service at: El Paso, Tex. Born: 7 December 1929, La Junta, Col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platoon sergeant of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Participating in the defense of an outpost forward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S/Sgt. Guillen maneuvered his platoon over unfamiliar terrain in the face of hostile fire and placed his men in fighting positions. With his unit pinned down when the outpost was attacked under cover of darkness by an estimated force of 2 enemy battalions supported by mortar and artillery fire, he deliberately exposed himself to the heavy barrage and attacks to direct his men in defending their positions and personally supervise the treatment and evacuation of the wounded. Inspired by his leadership, the platoon quickly rallied and engaged the enemy in fierce hand-to-hand combat. Although critically wounded during the course of the battle, S/Sgt. Guillen refused medical aid and continued to direct his men throughout the remainder of the engagement until the enemy was defeated and thrown into disorderly retreat. Succumbing to his wounds within a few hours, S/Sgt. Guillen, by his outstanding courage and indomitable fighting spirit,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success of his platoon in repelling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His personal valor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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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MMOND, FRANCIS C.</p>
<p>Rank and organization: Hospital Corpsman, U.S. Navy, attached as a medical corpsman to 1st Marine Division. Place and date: Korea, 26-27 March 1953. Entered service at: Alexandria, Va. Birth: Alexandria, V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HC serving with the 1st Marine Division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on the night of 26-27 March 1953. After reaching an intermediate objective during a counterattack against a heavily entrenched and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occupying ground on a bitterly contested outpost far in advance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HC Hammond&#8217;s platoon was subjected to a murderous barrage of hostile mortar and artillery fire, followed by a vicious assault by onrushing enemy troops. Resolutely advancing through the veritable curtain of fire to aid his stricken comrades, HC Hammond moved among the stalwart garrison of marines and, although critically wounded himself, valiantly continued to administer aid to the other wounded throughout an exhausting 4-hour period. When the unit was ordered to withdraw, he skillfully directed the evacuation of casualties and remained in the fire-swept area to assist the corpsmen of the relieving unit until he was struck by a round of enemy mortar fire and fell, mortally wounded. By his exceptional fortitude, inspiring initiative and self-sacrificing efforts, HC Hammond undoubtedly saved the lives of many marines. His great personal valor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enhances and sustain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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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MMOND, LESTER, JR.</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A, 187th Airborne Regimental Combat Team. Place and date: Near Kumwha, Korea, 14 August 1952. Entered service at: Quincy, Ill. Born: 25 March 1931, Wayland, Mo. G.O. No.: 63, 17 August 1953. Citation: Cpl. Hammond, a radio operator with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Cpl. Hammond was a member of a 6 man reconnaissance patrol which had penetrated approximately 3,500 yards into enemy-held territory. Ambushed and partially surrounded by a large hostile force, the small group opened fire, then quickly withdrew up a narrow ravine in search of protective cover. Despite a wound sustained in the initial exchange of fire and imminent danger of being overrun by the numerically superior foe, he refused to seek shelter and, remaining in an exposed place, called for artillery fire to support a defensive action. Constantly vulnerable to enemy observation and action, he coordinated and directed crippling fire on the assailants, inflicting heavy casualties and repulsing several attempts to overrun friendly positions. Although wounded a second time, he remained steadfast and maintained his stand until mortally wounded. His indomitable fighting spirit set an inspiring example of valor to his comrades and, through his actions, the onslaught was stemmed, enabling a friendly platoon to reach the beleaguered patrol, evacuate the wounded, and effect a safe withdrawal to friendly lines. Cpl. Hammond&#8217;s unflinching courag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uphold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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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DRICH, MELVIN O.</p>
<p>Rank and organization: Master Sergeant, U.S. Army, Company C, 5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Sobuk San Mountain, Korea, 25 and 26 August 1950. Entered service at: Manawa, Wis. Born: 26 January 1919, Manawa, Wis. G.O. No.: 60, 2 August 1951. Citation: M/Sgt. Handrich,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His company was engaged in repulsing an estimated 150 enemy who were threatening to overrun its position. Near midnight on 25 August, a hostile group over 100 strong attempted to infiltrate the company perimeter. M/Sgt. Handrich, despite the heavy enemy fire, voluntarily left the comparative safety of the defensive area and moved to a forward position where he could direct mortar and artillery fire upon the advancing enemy. He remained at this post for 8 hours directing fire against the enemy who often approached to within 50 feet of his position. Again, on the morning of 26 August, another strong hostile force made an attempt to overrun the company&#8217;s position. With complete disregard for his safety, M/Sgt. Handrich rose to his feet and from this exposed position fired his rifle and directed mortar and artillery fire on the attackers. At the peak of this action he observed elements of his company preparing to withdraw. He perilously made his way across fire-swept terrain to the defense area where, by example and forceful leadership, he reorganized the men to continue the fight. During the action M/Sgt. Handrich was severely wounded. Refusing to take cover or be evacuated, he returned to his forward position and continued to direct the company&#8217;s fire. Later a determined enemy attack overran M/Sgt. Handrich&#8217;s position and he was mortally wounded. When the position was retaken, over 70 enemy dead were counted in the area he had so intrepidly defended. M/Sgt. Handrich&#8217;s sustained personal bravery, consummate courage,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untold glory upon himself and the heroic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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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SON, JACK G.</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F, 31st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Pachi-dong, Korea, 7 June 1951. Entered service at: Galveston, Tex. Born: 18 September 1930, Escaptawpa, Miss. G.O. No.: 15, 1 February 1952. Citation: Pfc. Hanson, a machine gunner with the 1st Platoon, Company F,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The company, in defensive positions on two strategic hills separated by a wide saddle, was ruthlessly attacked at approximately 0300 hours, the brunt of which centered on the approach to the divide within range of Pfc. Hanson&#8217;s machinegun. In the initial phase of the action, 4 riflemen were wounded and evacuated and the numerically superior enemy, advancing under cover of darkness, infiltrated and posed an imminent threat to the security of the command post and weapons platoon. Upon orders to move to key terrain above and to the right of Pfc. Hanson&#8217;s position, he voluntarily remained to provide protective fire for the withdrawal. Subsequent to the retiring elements fighting a rearguard action to the new location, it was learned that Pfc. Hanson&#8217;s assistant gunner and 3 riflemen had been wounded and had crawled to safety, and that he was maintaining a lone-man defense. After the 1st Platoon reorganized, counterattacked, and resecured its original positions at approximately 0530 hours, Pfc. Hanson&#8217;s body was found Iying in front of his emplacement, his machinegun ammunition expended, his empty pistol in his right hand, and a machete with blood on the blade in his left hand, and approximately 22 enemy dead lay in the wake of his action. Pfc. Hanson&#8217;s consummate valor, inspirational conduct, and willing self-sacrifice enabled the company to contain the enemy and regain the commanding ground, and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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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RTELL, LEE R.</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Battery A, 15th Field Artillery Battalion,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obangsan-ni, Korea, 27 August 1951. Entered service at: Danbury, Conn. Birth: Philadelphia, Pa. G.O. No.: 16, 1 February 1952. Citation: 1st. Lt. Hartell, a member of Batter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During the darkness of early morning, the enemy launched a ruthless attack against friendly positions on a rugged mountainous ridge. 1st Lt. Hartell, attached to Company B, 9th Infantry Regiment, as forward observer, quickly moved his radio to an exposed vantage on the ridge line to adjust defensive fires. Realizing the tactical advantage of illuminating the area of approach, he called for flares and then directed crippling fire into the onrushing assailants. At this juncture a large force of hostile troops swarmed up the slope in banzai charge and came within 10 yards of 1st Lt. Hartell&#8217;s position. 1st Lt. Hartell sustained a severe hand wound in the ensuing encounter but grasped the microphone with his other hand and maintained his magnificent stand until the front and left flank of the company were protected by a close-in wall of withering fire, causing the fanatical foe to disperse and fall back momentarily. After the numerically superior enemy overran an outpost and was closing on his position, 1st Lt. Hartell, in a final radio call, urged the friendly elements to fire both batteries continuously. Although mortally wounded, 1st Lt. Hartell&#8217;s intrepid actions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stemming the onslaught and enabled his company to maintain the strategic strongpoint. His consummate valor and unwavering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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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RVEY, RAYMOND</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Army, Company C, 17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Vicinity of Taemi-Dong, Korea, 9 March 1951. Entered service at: Pasadena, Calif. Born: 1 March 1920 Ford City, Pa. G.O. No.: 67, 2 August 1951. Citation: Capt. Harvey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When his company was pinned down by a barrage of automatic weapons fire from numerous well-entrenched emplacements, imperiling accomplishment of its mission, Capt. Harvey braved a hail of fire and exploding grenades to advance to the first enemy machinegun nest, killing its crew with grenades. Rushing to the edge of the next emplacement, he killed its crew with carbine fire. He then moved the 1st Platoon forward until it was again halted by a curtain of automatic fire from wellfortified hostile positions. Disregarding the hail of fire, he personally charged and neutralized a third emplacement. Miraculously escaping death from intense crossfire, Capt. Harvey continued to lead the assault. Spotting an enemy pillbox well camouflaged by logs, he moved close enough to sweep the emplacement with carbine fire and throw grenades through the openings, annihilating its 5 occupants. Though wounded he then turned to order the company forward, and, suffering agonizing pain, he continued to direct the reduction of the remaining hostile positions, refusing evacuation until assured that the mission would be accomplished. Capt. Harvey&#8217;s valorous and intrepid actions served as an inspiration to his company, reflecting the utmost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heroic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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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NRY, FREDERICK F.</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F, 38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Vicinity of Am-Dong, Korea, 1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Clinton, Okla. Birth: Vian, Okla. G.O. No.: 8, 16 February 1951. Citation: 1st Lt. Henry, Company F,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His platoon was holding a strategic ridge near the town when they were attacked by a superior enemy force, supported by heavy mortar and artillery fire. Seeing his platoon disorganized by this fanatical assault, he left his foxhole and moving along the line ordered his men to stay in place and keep firing. Encouraged by this heroic action the platoon reformed a defensive line and rained devastating fire on the enemy, checking its advance. Enemy fire had knocked out all communications and 1st Lt. Henry was unable to determine whether or not the main line of resistance was altered to this heavy attack. On his own initiative, although severely wounded, he decided to hold his position as long as possible and ordered the wounded evacuated and their weapons and ammunition brought to him. Establishing a l-man defensive position, he ordered the platoon&#8217;s withdrawal and despite his wound and with complete disregard for himself remained behind to cover the movement. When last seen he was single-handedly firing all available weapons so effectively that he caused an estimated 50 enemy casualties. His ammunition was soon expended and his position overrun, but this intrepid action saved the platoon and halted the enemy&#8217;s advance until the main line of resistance was prepared to throw back the attack. 1st Lt. Henry&#8217;s outstanding gallantry and noble self-sacrific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reflect the highest honor on him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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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RNANDEZ, RODOLFO P.</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G, 187th Airborne Regimental Combat Team. Place and date: Near Wontong-ni, Korea, 31 May 1951. Entered service at: Fowler, Calif. Born: 14 April 1931, Colton, Calif. G.O. No.: 40, 21 April 1962. Citation: Cpl. Hernandez, a member of Company G,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is platoon, in defensive positions on Hill 420, came under ruthless attack by a numerically superior and fanatical hostile force, accompanied by heavy artillery, mortar, and machinegun fire which inflicted numerous casualties on the platoon. His comrades were forced to withdraw due to lack of ammunition but Cpl. Hernandez, although wounded in an exchange of grenades, continued to deliver deadly fire into the ranks of the onrushing assailants until a ruptured cartridge rendered his rifle inoperative. Immediately leaving his position, Cpl. Hernandez rushed the enemy armed only with rifle and bayonet. Fearlessly engaging the foe, he killed 6 of the enemy before falling unconscious from grenade, bayonet, and bullet wounds but his heroic action momentarily halted the enemy advance and enabled his unit to counterattack and retake the lost ground. The indomitable fighting spirit, outstanding courage, and tenacious devotion to duty clearly demonstrated by Cpl. Hernandez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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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UDNER, THOMAS JEROME, JR.</p>
<p>Rank and organization: Lieutenant (j.g.) U.S. Navy, pilot in Fighter Squadron 32, attached to U.S.S. Leyte. Place and date: Chosin Reservoir area of Korea, 4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Fall River, Mass. Born: 31 August 1924, Fall River, Mass.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pilot in Fighter Squadron 32, while attempting to rescue a squadron mate whose plane struck by antiaircraft fire and trailing smoke, was forced down behind enemy lines. Quickly maneuvering to circle the downed pilot and protect him from enemy troops infesting the area, Lt. (j.g.) Hudner risked his life to save the injured flier who was trapped alive in the burning wreckage. Fully aware of the extreme danger in landing on the rough mountainous terrain and the scant hope of escape or survival in subzero temperature, he put his plane down skillfully in a deliberate wheels-up landing in the presence of enemy troops. With his bare hands, he packed the fuselage with snow to keep the flames away from the pilot and struggled to pull him free. Unsuccessful in this, he returned to his crashed aircraft and radioed other airborne planes, requesting that a helicopter be dispatched with an ax and fire extinguisher. He then remained on the spot despite the continuing danger from enemy action and, with the assistance of the rescue pilot, renewed a desperate but unavailing battle against time, cold, and flames. Lt. (j.g.) Hudner&#8217;s exceptionally valiant action and selfless devotion to a shipmate sustain and enhance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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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MAN, EINAR H., JR.</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then Cpl.), U.S. Army, Company E, 17th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Maltari, Korea, 26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Tomahawk, Wis. Born: 6 October 1929, Milwaukee, Wis. G.O. No.: 68, 2 August 1951. Citation: Sgt. Ingman, a member of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The 2 leading squads of the assault platoon of his company, while attacking a strongly fortified ridge held by the enemy, were pinned down by withering fire and both squad leaders and several men were wounded. Cpl. Ingman assumed command, reorganized and combined the 2 squads, then moved from 1 position to another, designating fields of fire and giving advice and encouragement to the men. Locating an enemy machinegun position that was raking his men with devastating fire he charged it alone, threw a grenade into the position, and killed the remaining crew with rifle fire. Another enemy machinegun opened fire approximately 15 yards away and inflicted additional casualties to the group and stopped the attack. When Cpl. Ingman charged the second position he was hit by grenade fragments and a hail of fire which seriously wounded him about the face and neck and knocked him to the ground. With incredible courage and stamina, he arose instantly and, using only his rifle, killed the entire guncrew before falling unconscious from his wounds. As a result of the singular action by Cpl. Ingman the defense of the enemy was broken, his squad secured its objective, and more than 100 hostile troops abandoned their weapons and fled in disorganized retreat. Cpl. Ingman&#8217;s indomitable courage, extraordinary heroism, and superb leadership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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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ECELIN, WILLIAM R.</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C, 35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aga, Korea, 19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Baltimore, Md. Birth: Baltimore, Md. G.O. No.: 24, 25 April 1951. Citation: Sgt. Jecelin,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is company was ordered to secure a prominent, sawtoothed ridge from a well-entrenched and heavily armed enemy. Unable to capture the objective in the first attempt, a frontal and flanking assault was launched. He led his platoon through heavy enemy fire and bursting shells, across ricefields and rocky terrain, in direct frontal attack on the ridge in order to draw fire away from the flanks. The unit advanced to the base of the cliff, where intense, accurate hostile fire stopped the attack. Realizing that an assault was the only solution, Sgt. Jecelin rose from his position firing his rifle and throwing grenades as he called on his men to follow him. Despite the intense enemy fire this attack carried to the crest of the ridge where the men were forced to take cover. Again he rallied his men and stormed the enemy strongpoint. With fixed bayonets they charged into the face of antitank fire and engaged the enemy in hand-to-hand combat. After clubbing and slashing this force into submission the platoon was forced to take cover from direct frontal fire of a self-propelled gun. Refusing to be stopped he leaped to his feet and through sheer personal courage and fierce determination led his men in a new attack. At this instant a well-camouflaged enemy soldier threw a grenade at the remaining members of the platoon. He immediately lunged and covered the grenade with his body, absorbing the full force of the explosion to save those around him. This incredible courage and willingness to sacrifice himself for his comrades so imbued them with fury that they completely eliminated the enemy force. Sgt. Jecelin&#8217;s heroic leadership and outstanding gallantr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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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OHNSON, JAMES E.</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J,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Yudam-ni, Korea, 2 December 1950 (declared missing in action on 2 December 1950, and killed in action as of 2 November 1953). Entered service at: Washington, D.C. Born: 1 January 1926, Pocatello, Idah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in a provisional rifle platoon composed of artillerymen and attached to Company J,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Vastly outnumbered by a well-entrenched and cleverly concealed enemy force wearing the uniforms of friendly troops and attacking his platoon&#8217;s open and unconcealed positions, Sgt. Johnson unhesitatingly took charge of his platoon in the absence of the leader and, exhibiting great personal valor in the face of a heavy barrage of hostile fire, coolly proceeded to move about among his men, shouting words of encouragement and inspiration and skillfully directing their fire. Ordered to displace his platoon during the fire fight, he immediately placed himself in an extremely hazardous position from which he could provide covering fire for his men. Fully aware that his voluntary action meant either certain death or capture to himself, he courageously continued to provide effective cover for his men and was last observed in a wounded condition single-handedly engaging enemy troops in close handgrenade and hand-to-hand fighting. By his valiant and inspiring leadership, Sgt. Johnson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successful completion of the platoon&#8217;s displacement and the saving of many lives. His dauntless fighting spirit and unfaltering devotion to duty in the face of terrific odds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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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ORDAN, MACK A.</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K 21st Infantry Regiment, 24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umsong, Korea, 15 Nov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Collins, Miss Born: 8 December 1928, Collins, Miss. G.O. No.: 3, 8 January 1953 Citation: Pfc. Jordan, a member of Company K,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s a squad leader of the 3d Platoon, he was participating in a night attack on key terrain against a fanatical hostile force when the advance was halted by intense small-arms and automatic-weapons fire and a vicious barrage of handgrenades. Upon orders for the platoon to withdraw and reorganize, Pfc. Jordan voluntarily remained behind to provide covering fire. Crawling toward an enemy machinegun emplacement, he threw 3 grenades and neutralized the gun. He then rushed the position delivering a devastating hail of fire, killing several of the enemy and forcing the remainder to fall back to new positions. He courageously attempted to move forward to silence another machinegun but, before he could leave his position, the ruthless foe hurled explosives down the hill and in the ensuing blast both legs were severed. Despite mortal wounds, he continued to deliver deadly fire and held off the assailants until the platoon returned. Pfc. Jordan&#8217;s unflinching courage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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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ANELL, BILLIE G.</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U.S. Army, Company I, 35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Pyongyang, Korea, 7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Poplar Bluff, Mo. Born: 26 June 1931, Poplar Bluff, Mo. G.O. No.: 57, 13 June 1952. Citation: Pvt. Kanell, a member of Company I,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had launched a fanatical assault against friendly positions, supported by mortar and artillery fire, when Pvt. Kanell stood in his emplacement exposed to enemy observation and action and delivered accurate fire into the ranks of the assailants. An enemy grenade was hurled into his emplacement and Pvt. Kanell threw himself upon the grenade, absorbing the blast with his body to protect 2 of his comrades from serious injury and possible death. A few seconds later another grenade was thrown into the emplacement and, although seriously wounded by the first missile, he summoned his waning strength to roll toward the second grenade and used his body as a shield to again protect his comrades. He was mortally wounded as a result of his heroic actions. His indomitable courage, sustained fortitude against overwhelming odds,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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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AUFMAN, LOREN R.</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G, 9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Yongsan, Korea, 4 and 5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The Dalles, Oreg. Born: 27 July 1923, The Dalles, Oreg. G.O. No.: 61, 2 August 1951. Citation: Sfc. Kaufma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On the night of 4 September the company was in a defensive position on 2 adjoining hills. His platoon was occupying a strong point 2 miles away protecting the battalion flank. Early on 5 September the company was attacked by an enemy battalion and his platoon was ordered to reinforce the company. As his unit moved along a ridge it encountered a hostile encircling force. Sfc. Kaufman, running forward, bayoneted the lead scout and engaged the column in a rifle and grenade assault. His quick Vicious attack so surprised the enemy that they retreated in confusion. When his platoon joined the company he discovered that the enemy had taken commanding ground and pinned the company down in a draw. Without hesitation Sfc. Kaufman charged the enemy lines firing his rifle and throwing grenades. During the action, he bayoneted 2 enemy and seizing an unmanned machinegun, delivered deadly fire on the defenders. Following this encounter the company regrouped and resumed the attack. Leading the assault he reached the ridge, destroyed a hostile machinegun position, and routed the remaining enemy. Pursuing the hostile troops he bayoneted 2 more and then rushed a mortar position shooting the gunners. Remnants of the enemy fled to a village and Sfc. Kaufman led a patrol into the town, dispersed them, and burned the buildings. The dauntless courage and resolute intrepid leadership of Sfc. Kaufman were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success of his company in regaining its positions, reflecting distinc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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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ELLY, JOHN D.</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C,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8 May 1952. Entered service at: Homestead, Pa. Born: 8 July 1928, Youngstown, Ohi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radio operator of Company C,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his platoon pinned down by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employing intense mortar, artillery, small-arms and grenade fire, Pfc. Kelly requested permission to leave his radio in the care of another man and to participate in an assault on enemy key positions. Fearlessly charging forward in the face of a murderous hail of machinegun fire and handgrenades, he initiated a daring attack against a hostile strongpoint and personally neutralized the position, killing 2 of the enemy. Unyielding in the fact of heavy odds, he continued forward and single-handedly assaulted a machinegun bunker. Although painfully wounded, he bravely charged the bunker and destroyed it, killing 3 of the enemy. Courageously continuing his 1-man assault, he again stormed forward in a valiant attempt to wipe out a third bunker and boldly delivered pointblank fire into the aperture of the hostile emplacement. Mortally wounded by enemy fire while carrying out this heroic action, Pfc. Kelly, by his great personal valor and aggressive fighting spirit, inspired his comrades to sweep on, overrun and secure the objective. His extraordinary heroism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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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ELSO, JACK WILLIAM</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I,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Caruthers, Calif. Born: 23 January 1934, Madera, Calif.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rifleman of Company I,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en both the platoon commander and the platoon sergeant became casualties during the defense of a vital outpost against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attacking at night under cover of intense small-arms, grenade, and mortar fire, Pfc. Kelso bravely exposed himself to the hail of enemy fire in a determined effort to reorganize the unit and to repel the onrushing attackers. Forced to seek cover, along with 4 other marines, in a nearby bunker which immediately came under attack, he unhesitatingly picked up an enemy grenade which landed in the shelter, rushed out into the open and hurled it back at the enemy. Although painfully wounded when the grenade exploded as it left his hand, and again forced to seek the protection of the bunker when the hostile fire became more intensified Pfc. Kelso refused to remain in his position of comparative safety and moved out into the fire-swept area to return the enemy fire, thereby permitting the pinned-down marines in the bunker to escape. Mortally wounded while providing covering fire for his comrades, Pfc. Kelso, by his valiant fighting spirit, aggressive determination, and self-sacrificing efforts in behalf of others,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His heroic actions sustain and enhance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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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ENNEMORE, ROBERT S.</p>
<p>Rank and organization: Staff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E, 2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 Rein ). Place and date: North of Yudam-ni, Korea, 27 and 28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Greenville, S.C. Born: 21 June 1920, Greenville, S.C.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leader of a machinegun section in Company E,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the company&#8217;s defensive perimeter overrun b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during a savage night attack north of Yudam-ni and his platoon commander seriously wounded, S/Sgt. Kennemore unhesitatingly assumed command, quickly reorganized the unit and directed the men in consolidating the position. When an enemy grenade landed in the midst of a machinegun squad, he bravely placed his foot on the missile and,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personally absorbed the full force of the explosion to prevent injury to his fellow marines. By his indomitable courage, outstanding leadership and selfless efforts in behalf of his comrades, S/Sgt. Kennemore was greatly instrumental in driving the enemy from the area and upheld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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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ILMER, JOHN E.</p>
<p>Rank and organization: Hospital Corpsman, U.S. Navy, attached to duty as a medical corpsman with a Marine rifle company in the 1st Marine Division. Place and date: Korea, 13 August 1952. Entered service at: Houston, Tex. Born: 15 August 1930, Highland Park, Ill.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his company engaged in defending a vitally important hill position well forward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during an assault by large concentrations of hostile troops, HC Kilmer repeatedly braved intense enemy mortar, artillery, and sniper fire to move from 1 position to another, administering aid to the wounded and expediting their evacuation. Painfully wounded himself when struck by mortar fragments while moving to the aid of a casualty, he persisted in his efforts and inched his way to the side of the stricken marine through a hail of enemy shells falling around him. Undaunted by the devastating hostile fire, he skillfully administered first aid to his comrade and, as another mounting barrage of enemy fire shattered the immediate area, unhesitatingly shielded the wounded man with his body. Mortally wounded by flying shrapnel while carrying out this heroic action, HC Kilmer, by his great personal valor and gallant spirit of self-sacrifice in saving the life of a comrade,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His unyielding devotion to duty in the face of heavy odds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anothe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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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NIGHT, NOAH O.</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F, 7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owang-San, Korea, 23 and 24 Nov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Jefferson, S.C. Born: 27 October 1929, Chesterfield County, S.C. G.O. No.: 2, 7 January 1953. Citation: Pfc. Knight, a member of Company F,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e occupied a key position in the defense perimeter when waves of enemy troops passed through their own artillery and mortar concentrations and charged the company position. Two direct hits from an enemy emplacement demolished his bunker and wounded him. Disregarding personal safety, he moved to a shallow depression for a better firing vantage. Unable to deliver effective fire from his defilade position, he left his shelter, moved through heavy fire in full view of the enemy and, firing into the ranks of the relentless assailants, inflicted numerous casualties, momentarily stemming the attack. Later during another vicious onslaught, he observed an enemy squad infiltrating the position and, counterattacking, killed or wounded the entire group. Expending the last of his ammunition, he discovered 3 enemy soldiers entering the friendly position with demolition charges. Realizing the explosives would enable the enemy to exploit the breach, he fearlessly rushed forward and disabled 2 assailants with the butt of his rifle when the third exploded a demolition charge killing the 3 enemy soldiers and mortally wounding Pfc. Knight. Pfc. Knight&#8217;s supreme sacrific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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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OELSCH, JOHN KELVIN.</p>
<p>Rank and organization: Lieutenant (j.g.), U.S. Navy, Navy helicopter rescue unit. Place and date: North Korea, 3 July 1951. Entered service at: Los Angeles, Calif. Birth: London, England.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with a Navy helicopter rescue unit. Although darkness was rapidly approaching when information was received that a marine aviator had been shot down and was trapped by the enemy in mountainous terrain deep in hostile territory, Lt. (j.g.) Koelsch voluntarily flew a helicopter to the reported position of the downed airman in an attempt to effect a rescue. With an almost solid overcast concealing everything below the mountain peaks, he descended in his unarmed and vulnerable aircraft without the accompanying fighter escort to an extremely low altitude beneath the cloud level and began a systematic search. Despite the increasingly intense enemy fire, which struck his helicopter on 1 occasion, he persisted in his mission until he succeeded in locating the downed pilot, who was suffering from serious burns on the arms and legs. While the victim was being hoisted into the aircraft, it was struck again by an accurate burst of hostile fire and crashed on the side of the mountain. Quickly extricating his crewmen and the aviator from the wreckage, Lt. (j.g.) Koelsch led them from the vicinity in an effort to escape from hostile troops, evading the enemy forces for 9 days and rendering such medical attention as possible to his severely burned companion until all were captured. Up to the time of his death while still a captive of the enemy, Lt. (j.g.) Koelsch steadfastly refused to aid his captors in any manner and served to inspire his fellow prisoners by his fortitude and consideration for others. His great personal valor and heroic spirit of self-sacrifice throughout sustain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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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OUMA, ERNEST R.</p>
<p>Rank and organization: Master Sergeant (then Sfc.) U.S. Army, Company A, 72d Tank Battalion. Place and date: Vicinity of Agok, Korea, 31 August and 1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Dwight, Nebr. Born: 23 November 1919, Dwight, Nebr. G.O. No.: 38, 4 June 1951. Citation: M/Sgt. Kouma, a tank commander in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is unit was engaged in supporting infantry elements on the Naktong River front. Near midnight on 31 August, a hostile force estimated at 500 crossed the river and launched a fierce attack against the infantry positions, inflicting heavy casualties. A withdrawal was ordered and his armored unit was given the mission of covering the movement until a secondary position could be established. The enemy assault overran 2 tanks, destroyed 1 and forced another to withdraw. Suddenly M/Sgt. Kouma discovered that his tank was the only obstacle in the path of the hostile onslaught. Holding his ground, he gave fire orders to his crew and remained in position throughout the night, fighting off repeated enemy attacks. During 1 fierce assault, the enemy surrounded his tank and he leaped from the armored turret, exposing himself to a hail of hostile fire, manned the .50 caliber machinegun mounted on the rear deck, and delivered pointblank fire into the fanatical foe. His machinegun emptied, he fired his pistol and threw grenades to keep the enemy from his tank. After more than 9 hours of constant combat and close-in fighting, he withdrew his vehicle to friendly lines. During the withdrawal through 8 miles of hostile territory, M/Sgt. Kouma continued to inflict casualties upon the enemy and exhausted his ammunition in destroying 3 hostile machinegun positions. During this action, M/Sgt. Kouma killed an estimated 250 enemy soldiers. His magnificent stand allowed the infantry sufficient time to reestablish defensive positions. Rejoining his company, although suffering intensely from his wounds, he attempted to resupply his tank and return to the battle area. While being evacuated for medical treatment, his courage was again displayed when he requested to return to the front. M/Sgt. Kouma&#8217;s superb leadership, heroism, and intense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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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RZYZOWSKI, EDWARD C.</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Army, Company B, 9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Tondul, Korea, from 31 August to 3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Cicero, Ill. Born: 16 January 1914, Chicago, Ill. G.O. No.: 56, 12 June 1952. Citation: Capt. Krzyzowski,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s commanding officer of Company B. Spearheading an assault against strongly defended Hill 700, his company came under vicious crossfire and grenade attack from enemy bunkers. Creeping up the fire-swept hill, he personally eliminated 1 bunker with his grenades and wiped out a second with carbine fire. Forced to retire to more tenable positions for the night, the company, led by Capt. Krzyzowski, resumed the attack the following day, gaining several hundred yards and inflicting numerous casualties. Overwhelmed by the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he ordered his men to evacuate the wounded and move back. Providing protective fire for their safe withdrawal, he was wounded again by grenade fragments, but refused evacuation and continued to direct the defense. On 3 September, he led his valiant unit in another assault which overran several hostile positions, but again the company was pinned down by murderous fire. Courageously advancing alone to an open knoll to plot mortar concentrations against the hill, he was killed instantly by an enemy sniper&#8217;s fire. Capt. Krzyzowski&#8217;s consummate fortitude, heroic leadership, and gallant self-sacrifice, so clearly demonstrated throughout 3 days of bitter combat, reflect the highest credit and lasting glory 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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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YLE, DARWIN K.</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Army, Company K, 7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amil-ni, Korea, 16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Racine, W. Va. Born: 1 June 1918, Jenkins, Ky. G.O. No.: 17, 1 February 1952. Citation: 2d Lt. Kyl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en his platoon had been pinned down by intense fire, he completely exposed himself to move among and encourage his men to continue the advance against enemy forces strongly entrenched on Hill 185. Inspired by his courageous leadership, the platoon resumed the advance but was again pinned down when an enemy machinegun opened fire, wounding 6 of the men. 2d Lt. Kyle immediately charged the hostile emplacement alone, engaged the crew in hand-to-hand combat, killing all 3. Continuing on toward the objective, his platoon suddenly received an intense automatic-weapons fire from a well-concealed hostile position on its right flank. Again leading his men in a daring bayonet charge against this position, firing his carbine and throwing grenades, 2d Lt. Kyle personally destroyed 4 of the enemy before he was killed by a burst from an enemy submachinegun. The extraordinary heroism and outstanding leadership of 2d Lt. Kyle, and his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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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E, HUBERT L.</p>
<p>Rank and organization: Master Sergeant, U.S. Army, Company I, 23d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Ip-ori, Korea, 1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Leland, Miss. Born: 2 February 1915, Arburg, Mo. G.O. No.: 21, 5 February 1952. Citation: M/Sgt. Lee, a member of Company I,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en his platoon was forced from its position by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and his platoon leader wounded, M/Sgt. Lee assumed command, regrouped the remnants of his unit, and led them in repeated assaults to regain the position. Within 25 yards of his objective he received a leg wound from grenade fragments, but refused assistance and continued the attack. Although forced to withdraw 5 times, each time he regrouped his remaining men and renewed the assault. Moving forward at the head of his small group in the fifth attempt, he was struck by an exploding grenade, knocked to the ground, and seriously wounded in both legs. Still refusing assistance, he advanced by crawling, rising to his knees to fire, and urging his men to follow. While thus directing the final assault he was wounded a third time, by small-arms fire. Persistently continuing to crawl forward, he directed his men in a final and successful attack which regained the vital objective. His intrepid leadership and determination led to the destruction of 83 of the enemy and withdrawal of the remainder, and was a vital factor in stopping the enemy attack. M/Sgt. Lee&#8217;s indomitable courage, consummate valor, and outstanding leadership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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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IBBY, GEORGE D.</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C, 3d Engineer Combat Battalion, 24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Taejon, Korea, 20 July 1950. Entered service at: Waterbury, Conn. Birth: Bridgton, Maine. G.O. No.: 62, 2 August 1951. Citation: Sgt. Libby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While breaking through an enemy encirclement, the vehicle in which he was riding approached an enemy roadblock and encountered devastating fire which disabled the truck, killing or wounding all the passengers except Sgt. Libby. Taking cover in a ditch Sgt. Libby engaged the enemy and despite the heavy fire crossed the road twice to administer aid to his wounded comrades. He then hailed a passing M-5 artillery tractor and helped the wounded aboard. The enemy directed intense small-arms fire at the driver, and Sgt. Libby, realizing that no one else could operate the vehicle, placed himself between the driver and the enemy thereby shielding him while he returned the fire. During this action he received several wounds in the arms and body. Continuing through the town the tractor made frequent stops and Sgt. Libby helped more wounded aboard. Refusing first aid, he continued to shield the driver and return the fire of the enemy when another roadblock was encountered. Sgt. Libby received additional wounds but held his position until he lost consciousness. Sgt. Libby&#8217;s sustained, heroic actions enabled his comrades to reach friendly lines. His dauntless courage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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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ITTLETON, HERBERT A.</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C,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Chungchon, Korea, 22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Blackhawk, S. Dak. Born: 1 July 1930, Mena, Ark.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radio operator with an artillery forward observation team of Company C,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Standing watch when a well-concealed and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launched a violent night attack from nearby positions against his company, Pfc. Littleton quickly alerted the forward observation team and immediately moved into an advantageous position to assist in calling down artillery fire on the hostile force. When an enemy handgrenade was thrown into his vantage point shortly after the arrival of the remainder of the team, he unhesitatingly hurled himself on the deadly missile, absorbing its full, shattering impact in his body. By his prompt action and heroic spirit of self-sacrifice, he saved the other members of his team from serious injury or death and enabled them to carry on the vital mission which culminated in the repulse of the hostile attack. His indomitable valor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Pfc. Littleton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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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NG, CHARLES R.</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M, 38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Hoengsong, Korea, 12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Kansas City, Mo. Born: 10 December 1923, Kansas City, Mo. G.O. No.: 18, 1 February 1952. Citation: Sgt. Long, a member of Company M,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When Company M, in a defensive perimeter on Hill 300, was viciously attacked b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at approximately 0300 hours and ordered to withdraw, Sgt. Long, a forward observer for the mortar platoon, voluntarily remained at his post to provide cover by directing mortar fire on the enemy. Maintaining radio contact with his platoon, Sgt. Long coolly directed accurate mortar fire on the advancing foe. He continued firing his carbine and throwing handgrenades until his position was surrounded and he was mortally wounded. Sgt. Long&#8217;s inspirational, valorous action halted the onslaught, exacted a heavy toll of enemy casualties, and enabled his company to withdraw, reorganize, counterattack, and regain the hill strongpoint. His unflinching courage and noble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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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PEZ, BALDOMERO</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Marine Corps, Company A, 1st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During Inchon invasion in Korea, 15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Tampa, Fla. Born: 23 August 1925, Tampa, Fl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marine platoon commander of Company A,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his platoon 1st Lt. Lopez was engaged in the reduction of immediate enemy beach defenses after landing with the assault waves. Exposing himself to hostile fire, he moved forward alongside a bunker and prepared to throw a handgrenade into the next pillbox whose fire was pinning down that sector of the beach. Taken under fire by an enemy automatic weapon and hit in the right shoulder and chest as he lifted his arm to throw, he fell backward and dropped the deadly missile. After a moment, he turned and dragged his body forward in an effort to retrieve the grenade and throw it. In critical condition from pain and loss of blood, and unable to grasp the handgrenade firmly enough to hurl it, he chose to sacrifice himself rather than endanger the lives of his men and, with a sweeping motion of his wounded right arm, cradled the grenade under him and absorbed the full impact of the explosion. His exceptional courage, fortitude, and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1st Lt. Lopez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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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RING, CHARLES J., JR.</p>
<p>Rank and arganization: Major, U.S. Air Force, 80th Fighter-Bomber Squadron, 8th Fighter-Bomber Wing. Place and date: Near Sniper Ridge, North Korea, 22 Nov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Portland, Maine. Born: 2 October 1918, Portland, Maine. Citation: Maj. Loring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leading a night of 4 F-80 type aircraft on a close support mission, Maj. Loring was briefed by a controller to dive-bomb enemy gun positions which were harassing friendly ground troops. After verifying the location of the target, Maj. Loring rolled into his dive bomb run. Throughout the run, extremely accurate ground fire was directed on his aircraft. Disregarding the accuracy and intensity of the ground fire, Maj. Loring aggressively continued to press the attack until his aircraft was hit. At approximately 4,000 feet, he deliberately altered his course and aimed his diving aircraft at active gun emplacements concentrated on a ridge northwest of the briefed target, turned his aircraft 45 degrees to the left, pulled up in a deliberate, controlled maneuver, and elected to sacrifice his life by diving his aircraft directly into the midst of the enemy emplacements. His selfless and heroic action completely destroyed the enemy gun emplacement and eliminated a dangerous threat to United Nations ground forces. Maj. Loring&#8217;s noble spirit, superlative courage, and conspicuous self-sacrifice in inflicting maximum damage on the enemy exemplified valor of the highest degree and his actions were in keeping with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Air For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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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YELL, WILLIAM F.</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F, 17th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up&#8217;a-ri, Korea, 31 August 1951. Entered service at: Old Hickory, Tenn. Birth: Hickman County, Tenn. G.O. No.: 4, 9 January 1953. Citation: Cpl. Lyell, a member of Company F,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en his platoon leader was killed, Cpl. Lyell assumed command and led his unit in an assault on strongly fortified enemy positions located on commanding terrain. When his platoon came under vicious, raking fire which halted the forward movement, Cpl. Lyell seized a 57mm. recoilless rifle and unhesitatingly moved ahead to a suitable firing position from which he delivered deadly accurate fire completely destroying an enemy bunker, killing its occupants. He then returned to his platoon and was resuming the assault when the unit was again subjected to intense hostile fire from 2 other bunkers. Disregarding his personal safety, armed with grenades he charged forward hurling grenades into 1 of the enemy emplacements, and although painfully wounded in this action he pressed on destroying the bunker and killing 6 of the foe. He then continued his attack against a third enemy position, throwing grenades as he ran forward, annihilating 4 enemy soldiers. He then led his platoon to the north slope of the hill where positions were occupied from which effective fire was delivered against the enemy in support of friendly troops moving up. Fearlessly exposing himself to enemy fire, he continuously moved about directing and encouraging his men until he was mortally wounded by enemy mortar fire. Cpl. Lyell&#8217;s extraordinary heroism, indomitable courage, and aggressive leadership reflect great credit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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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ARTINEZ, BENITO</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A, 27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atae-ri Korea, 6 Sept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Fort Hancock, Tex. Born: 21 March 1931, Fort Hancock, Tex. G.O. No.: 96, 29 December 1953. Citation. Cpl. Martinez, a machine gunner with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ile manning a listening post forward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his position was attacked by a hostile force of reinforced company strength. In the bitter fighting which ensued, the enemy infiltrated the defense perimeter and, realizing that encirclement was imminent, Cpl. Martinez elected to remain at his post in an attempt to stem the onslaught. In a daring defense, he raked the attacking troops with crippling fire, inflicting numerous casualties. Although contacted by sound power phone several times, he insisted that no attempt be made to rescue him because of the danger involved. Soon thereafter, the hostile forces rushed the emplacement, forcing him to make a limited withdrawal with only an automatic rifle and pistol to defend himself. After a courageous 6-hour stand and shortly before dawn, he called in for the last time, stating that the enemy was converging on his position His magnificent stand enabled friendly elements to reorganize, attack, and regain the key terrain. Cpl. Martinez&#8217; incredible valor and supreme sacrifice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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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ATTHEWS, DANIEL P.</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F, 2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Vegas Hill, Korea, 28 March 1953. Entered service at. Van Nuys, Calif. Born: 31 December 1931, Van Nuys, Calif. Award presented: 29 March 19S4.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of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Participating in a counterattack against a firmly entrenched and well-concealed hostile force which had repelled 6 previous assaults on a vital enemy-held outpost far forward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Sgt. Matthews fearlessly advanced in the attack until his squad was pinned down by a murderous sweep of fire from an enemy machinegun located on the peak of the outpost. Observing that the deadly fire prevented a corpsman from removing a wounded man Iying in an open area fully exposed to the brunt of the devastating gunfire, he worked his way to the base of the hostile machinegun emplacement, leaped onto the rock fortification surrounding the gun and, taking the enemy by complete surprise, single-handedly charged the hostile emplacement with his rifle. Although severely wounded when the enemy brought a withering hail of fire to bear upon him, he gallantly continued his valiant l-man assault and, firing his rifle with deadly effectiveness, succeeded in killing 2 of the enemy, routing a third, and completely silencing the enemy weapon, thereby enabling his comrades to evacuate the stricken marine to a safe position. Succumbing to his wounds before aid could reach him, Sgt. Matthews, by his indomitable fighting spirit, courageous initiative, and resolute determination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and was directly instrumental in saving the life of his wounded comrade. His great personal valor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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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AUSERT, FREDERICK W., III</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B,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Songnap-yong, Korea, 12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Dresher, Pa. Born: 2 May 1930, Cambridge, N.Y.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in Company B,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his company pinned down and suffering heavy casualties under murderous machinegun, rifle, artillery, and mortar fire laid down from heavily fortificd, deeply entrenched hostile strongholds on Hill 673, Sgt. Mausert unhesitatingly left his covered position and ran through a heavily mined and fire-swept area to bring back 2 critically wounded men to the comparative safety of the lines. Staunchly refusing evacuation despite a painful head wound sustained during his voluntary act, he insisted on remaining with his squad and, with his platoon ordered into the assault moments later, took the point position and led his men in a furious bayonet charge against the first of a literally impregnable series of bunkers. Stunned and knocked to the ground when another bullet struck his helmet, he regained his feet and resumed his drive, personally silencing the machinegun and leading his men in eliminating several other emplacements in the area. Promptly reorganizing his unit for a renewed fight to the final objective on top of the ridge, Sgt. Mausert boldly left his position when the enemy&#8217;s fire gained momentum and, making a target of himself, boldly advanced alone into the face of the machinegun, drawing the fire away from his men and enabling them to move into position to assault. Again severely wounded when the enemy&#8217;s fire found its mark, he still refused aid and continued spearheading the assault to the topmost machinegun nest and bunkers, the last bulwark of the fanatic aggressors. Leaping into the wall of fire, he destroyed another machinegun with grenades before he was mortally wounded by bursting grenades and machinegun fire. Stouthearted and indomitable, Sgt. Mausert, by his fortitude, great personal valor, and extraordinary heroism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had inspired his men to sweep on, overrun and finally secure the objective. His unyielding courage throughout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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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GOVERN, ROBERT M.</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A, 5th Cavalry Regiment, 1st Caval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amyangjan-ni, Korea, 30 January 1951. Entered service at: Washington, D.C. Birth: Washington, D.C. G.O. No.: 2, 8 January 1952. Citation: 1st Lt. McGovern, a member of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As 1st Lt. McGovern led his platoon up a slope to engage hostile troops emplaced in bunker-type pillboxes with connecting trenches, the unit came under heavy machinegun and rifle fire from the crest of the hill, approximately 75 yards distant. Despite a wound sustained in this initial burst of withering fire, 1st Lt. McGovern, assured the men of his ability to continue on and urged them forward. Forging up the rocky incline, he fearlessly led the platoon to within several yards of its objective when the ruthless foe threw and rolled a vicious barrage of handgrenades on the group and halted the advance. Enemy fire increased in volume and intensity and 1st Lt. McGovern realizing that casualties were rapidly increasing and the morale of his men badly shaken, hurled back several grenades before they exploded. Then, disregarding his painful wound and weakened condition he charged a machinegun emplacement which was raking his position with flanking fire. When he was within 10 yards of the position a burst of fire ripped the carbine from his hands, but, undaunted, he continued his lone-man assault and, firing his pistol and throwing grenades, killed 7 hostile soldiers before falling mortally wounded in front of the gun he had silenced. 1st Lt. McGovern&#8217;s incredible display of valor imbued his men with indomitable resolution to avenge his death. Fixing bayonets and throwing grenades, they charged with such ferocity that hostile positions were overrun and the enemy routed from the hill. The inspirational leadership, unflinching courage, and intrepid actions of 1st Lt. McGovern reflected utmost glory on himself and the honored tradition of the military service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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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LAUGHLlN, ALFORD L.</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L, 3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4 and 5 Sept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Leeds, Ala. Born: 18 March 1928, Leeds, Al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machine gunner of Company L,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on the night of 4-5 September 1952. Volunteering for his second continuous tour of duty on a strategic combat outpost far in advance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Pfc. McLaughlin, although operating under a barrage of enemy artillery and mortar fire, set up plans for the defense of his position which proved decisive in the successful defense of the outpost. When hostile forces attacked in battalion strength during the night, he maintained a constant flow of devastating fire upon the enemy, alternately employing 2 machineguns, a carbine, and handgrenades. Although painfully wounded, he bravely fired the machineguns from the hip until his hands became blistered by the extreme heat from the weapons and, placing the guns on the ground to allow them to cool, continued to defend the position with his carbine and grenades. Standing up in full view, he shouted words of encouragement to his comrades above the din of battle and, throughout a series of fanatical enemy attacks, sprayed the surrounding area with deadly fire, accounting for an estimated 150 enemy dead and 50 wounded. By his indomitable courage, superb leadership, and valiant fighting spirit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Pfc. McLaughlin served to inspire his fellow marines in their gallant stand against the enemy and was directly instrumental in preventing the vital outpost from falling into the hands of a determined and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His outstanding heroism and unwavering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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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ENDONCA, LEROY A.</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B, 7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ich-on, Korea, 4 July 1951. Entered service at: Honolulu, T.H. Birth: Honolulu, T.H. G.O. No.: 83, 3 September 1952. Citation: Sgt. LeRoy A. Mendonc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fter his platoon, in an exhaustive fight, had captured Hill 586, the newly won positions were assaulted during the night by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When the 1st Platoon positions were outflanked and under great pressure and the platoon was ordered to withdraw to a secondary line of defense, Sgt. Mendonca voluntarily remained in an exposed position and covered the platoon&#8217;s withdrawal. Although under murderous enemy fire, he fired his weapon and hurled grenades at the onrushing enemy until his supply of ammunition was exhausted. He fought on, clubbing with his rifle and using his bayonet until he was mortally wounded. After the action it was estimated that Sgt. Mendonca had accounted for 37 enemy casualties. His daring actions stalled the crushing assault, protecting the platoon&#8217;s withdrawal to secondary positions, and enabling the entire unit to repel the enemy attack and retain possession of the vital hilltop position. Sgt. Mendonca&#8217;s extraordinary gallantry and exemplary valor are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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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ILLETT, LEWIS L.</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Army, Company E, 27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Vicinity of Soam-Ni, Korea, 7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Mechanic Falls, Maine. Born: 15 December 1920, Mechanic Falls, Maine. G.O. No.: 69, 2 August 1951. Citation: Capt. Millett,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While personally leading his company in an attack against a strongly held position he noted that the 1st Platoon was pinned down by small-arms, automatic, and antitank fire. Capt. Millett ordered the 3d Platoon forward, placed himself at the head of the 2 platoons, and, with fixed bayonet, led the assault up the fire-swept hill. In the fierce charge Capt. Millett bayoneted 2 enemy soldiers and boldly continued on, throwing grenades, clubbing and bayoneting the enemy, while urging his men forward by shouting encouragement. Despite vicious opposing fire, the whirlwind hand-to-hand assault carried to the crest of the hill. His dauntless leadership and personal courage so inspired his men that they stormed into the hostile position and used their bayonets with such lethal effect that the enemy fled in wild disorder. During this fierce onslaught Capt. Millett was wounded by grenade fragments but refused evacuation until the objective was taken and firmly secured. The superb leadership, conspicuous courag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demonstrated by Capt. Millett were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successful accomplishment of a hazardous mission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the heroic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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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ITCHELL, FRANK N.</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Marine Corps, Company A,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Hansan-ni, Korea, 26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Roaring Springs, Tex. Born: 18 August 1921, Indian Gap, Tex.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leader of a rifle platoon of Company A,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Leading his platoon in point position during a patrol by his company through a thickly wooded and snow-covered area in the vicinity of Hansan-ni, 1st Lt. Mitchell acted immediately when the enemy suddenly opened fire at pointblank range, pinning down his forward elements and inflicting numerous casualties in his ranks. Boldly dashing to the front under blistering fire from automatic weapons and small arms, he seized an automatic rifle from one of the wounded men and effectively trained it against the attackers and, when his ammunition was expended, picked up and hurled grenades with deadly accuracy, at the same time directing and encouraging his men in driving the outnumbering enemy from his position. Maneuvering to set up a defense when the enemy furiously counterattacked to the front and left flank, 1st Lt. Mitchell, despite wounds sustained early in the action, reorganized his platoon under the devastating fire, and spearheaded a fierce hand-to-hand struggle to repulse the onslaught. Asking for volunteers to assist in searching for and evacuating the wounded, he personally led a party of litter bearers through the hostile lines in growing darkness and, although suffering intense pain from multiple wounds, stormed ahead and waged a single-handed battle against the enemy, successfully covering the withdrawal of his men before he was fatally struck down by a burst of small-arms fire. Stouthearted and indomitable in the face of tremendous odds, 1st Lt. Mitchell, by his fortitude, great personal valor and extraordinary heroism, saved the lives of several marines and inflicted heavy casualties among the aggressors. His unyielding courage throughout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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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IYAMURA, HIROSHI H.</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H, 7th Infantry Regiment, 3r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Taejon-ni, Korea, 24 and 25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Gallup, N. Mex. Birth: Gallup, N. Mex. G.O. No.: 85, 4 November 1953. Citation: Cpl. Miyamura, a member of Company H,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On the night of 24 April, Company H was occupying a defensive position when the enemy fanatically attacked threatening to overrun the position. Cpl. Miyamura, a machinegun squad leader, aware of the imminent danger to his men unhesitatingly jumped from his shelter wielding his bayonet in close hand-to-hand combat killing approximately 10 of the enemy. Returning to his position, he administered first aid to the wounded and directed their evacuation. As another savage assault hit the line, he manned his machinegun and delivered withering fire until his ammunition was expended. He ordered the squad to withdraw while he stayed behind to render the gun inoperative. He then bayoneted his way through infiltrated enemy soldiers to a second gun emplacement and assisted in its operation. When the intensity of the attack necessitated the withdrawal of the company Cpl. Miyamura ordered his men to fall back while he remained to cover their movement. He killed more than 50 of the enemy before his ammunition was depleted and he was severely wounded. He maintained his magnificent stand despite his painful wounds, continuing to repel the attack until his position was overrun. When last seen he was fighting ferociously against an overwhelming number of enemy soldiers. Cpl. Miyamura&#8217;s indomitable heroism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utmost glory on himself and uphold the illustrious traditions on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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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IZE, OLA L.</p>
<p>Rank and organization: Master Sergeant (then Sgt.), U.S. Army, Company K, 15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urang-ni, Korea, 10 to 11 June 1953. Entered service at: Gadsden, Ala. Born: 28 August 1931, Marshall County, Ala. G.O. No.: 70, 24 September 1954. Citation: M/Sgt. Mize, a member of Company K,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Company K was committed to the defense of &#8220;Outpost Harry&#8221;, a strategically valuable position, when the enemy launched a heavy attack. Learning that a comrade on a friendly listening post had been wounded he moved through the intense barrage, accompanied by a medical aid man, and rescued the wounded soldier. On returning to the main position he established an effective defense system and inflicted heavy casualties against attacks from determined enemy assault forces which had penetrated into trenches within the outpost area. During his fearless actions he was blown down by artillery and grenade blasts 3 times but each time he dauntlessly returned to his position, tenaciously fighting and successfully repelling hostile attacks. When enemy onslaughts ceased he took his few men and moved from bunker to bunker, firing through apertures and throwing grenades at the foe, neutralizing their positions. When an enemy soldier stepped out behind a comrade, prepared to fire, M/Sgt. Mize killed him, saving the life of his fellow soldier. After rejoining the platoon, moving from man to man, distributing ammunition, and shouting words of encouragement he observed a friendly machinegun position overrun. He immediately fought his way to the position, killing 10 of the enemy and dispersing the remainder. Fighting back to the command post, and finding several friendly wounded there, he took a position to protect them. Later, securing a radio, he directed friendly artillery fire upon the attacking enemy&#8217;s routes of approach. At dawn he helped regroup for a counterattack which successfully drove the enemy from the outpost. M/Sgt. Mize&#8217;s valorous conduct and unflinching courage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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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ONEGAN, WALTER C., JR.</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F, 2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Sosa-ri, Korea, 17 and 20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Seattle, Wash. Born: 25 December 1930, Melrose, Mass.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rocket gunner attached to Company F, and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Dug in on a hill overlooking the main Seoul highway when 6 enemy tanks threatened to break through the battalion position during a predawn attack on 17 September, Pfc. Monegan promptly moved forward with his bazooka, under heavy hostile automatic weapons fre and engaged the lead tank at a range of less than 50 yards. After scoring a direct hit and killing the sole surviving tankman with his carbine as he came through the escape hatch, he boldly fired 2 more rounds of ammunition at the oncoming tanks, disorganizing the attack and enabling our tank crews to continue blasting with their 90-mm guns. With his own and an adjacent company&#8217;s position threatened by annihilation when an overwhelming enemy tank-infantry force bypassed the area and proceeded toward the battalion command post during the early morning of September 20, he seized his rocket launcher and, in total darkness, charged down the slope of the hill where the tanks had broken through. Quick to act when an illuminating shell lit the area, he scored a direct hit on one of the tanks as hostile rifle and automatic-weapons fire raked the area at close range. Again exposing himself, he fired another round to destroy a second tank and, as the rear tank turned to retreat, stood upright to fire and was fatally struck down by hostile machinegun fire when another illuminating shell silhouetted him against the sky. Pfc. Monegan&#8217;s daring initiative, gallant fighting spirit and courageous devotion to duty were contributing factors in the success of his company in repelling the enemy, and his self-sacrificing efforts throughout sustain and enhance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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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ORELAND, WHITT L.</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C, 1st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wagch&#8217;i-Dong, Korea, 29 May 1951. Entered service at: Austin, Tex. Born: 7 March 1930, Waco, Tex.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n intelligence scout attached to Company C,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Voluntarily accompanying a rifle platoon in a daring assault against a strongly defended enemy hill position, Pfc. Moreland delivered accurate rifle fire on the hostile emplacement and thereby aided materially in seizing the objective. After the position had been secured, he unhesitatingly led a party forward to neutralize an enemy bunker which he had observed some 400 meters beyond, and moving boldly through a fire-swept area, Almost reached the hostile emplacement when the enemy launched a volley of handgrenades on his group. Quick to act despite the personal danger involved, he kicked several of the grenades off the ridge line where they exploded harmlessly and, while attempting to kick away another, slipped and fell near the deadly missile. Aware that the sputtering grenade would explode before he could regain his feet and dispose of it, he shouted a warning to his comrades, covered the missile with his body and absorbed the full blast ??of the explosion, but in saving his companions from possible injury or death, was mortally wounded. His heroic initiative and valiant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certain death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Pfc. Moreland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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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OYER, DONALD R.</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E, 35th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Near Seoul, Korea, 20 May 1951. Entered service at: Keego Harbor, Oakland, Mich. Born: 15 April 1930, Pontiac, Mich. G.O. No.: 19, 1 February 1952. Citation: Sfc. Moyer assistant platoon leader,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Sfc. Moyer&#8217;s platoon was committed to attack and secure commanding terrain stubbornly defended b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emplaced in well-fortified positions. Advancing up the rocky hill, the leading elements came under intense automatic weapons, small-arms, and grenade fire, wounding the platoon leader and platoon sergeant. Sfc. Moyer, realizing the success of the mission was imperiled, rushed to the head of the faltering column, assumed command and urged the men forward. Inspired by Sfc. Moyer&#8217;s unflinching courage, the troops responded magnificently, but as they reached the final approaches to the rugged crest of the hill, enemy fire increased in volume and intensity and the fanatical foe showered the platoon with grenades. Undaunted, the valiant group forged ahead, and as they neared the top of the hill, the enemy hurled a grenade into their midst. Sfc. Moyer, fully aware of the odds against him, unhesitatingly threw himself on the grenade, absorbing the full blast of the explosion with his body. Although mortally wounded in this fearless display of valor, Sfc. Moyer&#8217;s intrepid act saved several of his comrades from death or serious injury, and his inspirational leadership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contributed significantly to the subsequent seizure of the enemy stronghold and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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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URPHY, RAYMOND G.</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A, 1st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3 February 1953. Entered service at: Pueblo, Colo. Born: 14 January 1930, Pueblo, Col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platoon commander of Company A,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lthough painfully wounded by fragments from an enemy mortar shell while leading his evacuation platoon in support of assault units attacking a cleverly concealed and well-entrenched hostile force occupying commanding ground, 2d Lt. Murphy steadfastly refused medical aid and continued to lead his men up a hill through a withering barrage of hostile mortar and small-arms fire, skillfully maneuvering his force from one position to the next and shouting words of encouragement. Undeterred by the increasing intense enemy fire, he immediately located casualties as they fell and made several trips up and down the fire-swept hill to direct evacuation teams to the wounded, personally carrying many of the stricken marines to safety. When reinforcements were needed by the assaulting elements, 2d Lt. Murphy employed part of his unit as support and, during the ensuing battle, personally killed 2 of the enemy with his pistol. With all the wounded evacuated and the assaulting units beginning to disengage, he remained behind with a carbine to cover the movement of friendly forces off the hill and, though suffering intense pain from his previous wounds, seized an automatic rifle to provide more firepower when the enemy reappeared in the trenches. After reaching the base of the hill, he organized a search party and again ascended the slope for a final check on missing marines, locating and carrying the bodies of a machinegun crew back down the hill. Wounded a second time while conducting the entire force to the line of departure through a continuing barrage of enemy small-arms, artillery, and mortar fire, he again refused medical assistance until assured that every one of his men, including all casualties, had preceded him to the main lines. His resolute and inspiring leadership, exceptional fortitude, and great personal valor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2d Lt. Murphy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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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YERS, REGINALD R.</p>
<p>Rank and organization: Major, U.S. Marine Corps, 3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Hagaru-ri, Korea, 29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Boise, Idaho. Born: 26 November 1919, Boise, Idah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executive officer of the 3d Battalion,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ssuming command of a composite unit of Army and Marine service and headquarters elements totaling approximately 250 men, during a critical stage in the vital defense of the strategically important military base at Hagaru-ri, Maj. Myers immediately initiated a determined and aggressive counterattack against a well-entrenched and cleverly concealed enemy force numbering an estimated 4,000. Severely handicapped by a lack of trained personnel and experienced leaders in his valiant efforts to regain maximum ground prior to daylight, he persisted in constantly exposing himself to intense, accurate, and sustained hostile fire in order to direct and supervise the employment of his men and to encourage and spur them on in pressing the attack. Inexorably moving forward up the steep, snow-covered slope with his depleted group in the face of apparently insurmountable odds, he concurrently directed artillery and mortar fire with superb skill and although losing 170 of his men during 14 hours of raging combat in subzero temperatures, continued to reorganize his unit and spearhead the attack which resulted in 600 enemy killed and 500 wounded. By his exceptional and valorous leadership throughout, Maj. Myers contributed directly to the success of his unit in restoring the perimeter. His resolute spirit of self-sacrifice and unfaltering devotion to duty enhance and sustain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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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BREGON, EUGENE ARNOLD</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G, 3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Seoul, Korea, 26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Los Angeles, Calif. Born: 12 November 1930, Los Angeles, Calif.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with Company G,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ile serving as an ammunition carrier of a machinegun squad in a marine rifle company which was temporarily pinned down by hostile fire, Pfc. Obregon observed a fellow marine fall wounded in the line of fire. Armed only with a pistol, he unhesitating dashed from his covered position to the side of the casualty. Firing his pistol with 1 hand as he ran, he grasped his comrade by the arm with his other hand and, despite the great peril to himself dragged him to the side of the road. Still under enemy fire, he was bandaging the man&#8217;s wounds when hostile troops of approximately platoon strength began advancing toward his position. Quickly seizing the wounded marine&#8217;s carbine, he placed his own body as a shield in front of him and lay there firing accurately and effectively into the hostile group until he himself was fatally wounded by enemy machinegun fire. By his courageous fighting spirit, fortitude, and loyal devotion to duty, Pfc. Obregon enabled his fellow marines to rescue the wounded man and aided essentially in repelling the attack, thereby sustaining and enhancing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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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8217;BRIEN, GEORGE H., JR.</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H,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7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Big Spring, Tex. Born: 10 September 1926, Fort Worth, Tex.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rifle platoon commander of Company H,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his platoon subjected to an intense mortar and artillery bombardment while preparing to assault a vitally important hill position on the main line of resistance which had been overrun by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on the preceding night, 2d Lt. O&#8217;Brien leaped from his trench when the attack signal was given and, shouting for his men to follow, raced across an exposed saddle and up the enemy-held hill through a virtual hail of deadly small-arms, artillery, and mortar fire. Although shot through the arm and thrown to the ground by hostile automatic-weapons fire as he neared the well-entrenched enemy position, he bravely regained his feet, waved his men onward, and continued to spearhead the assault, pausing only long enough to go to the aid of a wounded marine. Encountering the enemy at close range, he proceeded to hurl handgrenades into the bunkers and, utilizing his carbine to best advantage in savage hand-to-hand combat, succeeded in killing at least 3 of the enemy. Struck down by the concussion of grenades on 3 occasions during the subsequent action, he steadfastly refused to be evacuated for medical treatment and continued to lead his platoon in the assault for a period of nearly 4 hours, repeatedly encouraging his men and maintaining superb direction of the unit. With the attack halted he set up a defense with his remaining forces to prepare for a counterattack, personally checking each position, attending to the wounded and expediting their evacuation. When a relief of the position was effected by another unit, he remained to cover the withdrawal and to assure that no wounded were left behind. By his exceptionally daring and forceful leadership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2d Lt. O&#8217;Brien served as a constant source of inspiration to all who observed him and was greatly instrumental in the recapture of a strategic position on the main line of resistance. His indomitable determination and valiant fighting spirit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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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ELLETTE, IOSEPH R.</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H, 9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 Yongsan, Korea, from 31 August to 3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Lowell, Mass. Birth: Lowell, Mass. G.O. No.: 25, 25 April 1951. Citation: Pfc. Ouellett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in the Makioug-Chang River salient. When an enemy assault cut off and surrounded his unit he voluntarily made a reconnaissance of a nearby hill under intense enemy fire to locate friendly troop positions and obtain information of the enemy&#8217;s strength and location. Finding that friendly troops were not on the hill, he worked his way back to his unit under heavy fire. Later, when an airdrop of water was made outside the perimeter, he again braved enemy fire in an attempt to retrieve water for his unit. Finding the dropped cans broken and devoid of water, he returned to his unit. His heroic attempt greatly increased his comrades&#8217; morale. When ammunition and grenades ran low, Pfc. Ouellette again slipped out of the perimeter to collect these from the enemy dead. After collecting grenades he was attacked by an enemy soldier. He killed this enemy m hand-to-hand combat, gathered up the ammunition, and returned to his unit. When the enemy attacked on 3 September, they assaulted his position with grenades. On 6 occasions Pfc. Ouellette leaped from his foxhole to escape exploding grenades. In doing so, he had to face enemy small-arms fire. He continued his resistance, despite a severe wound, until he lost his life. The extraordinary heroism and intrepidity displayed by Pfc. Ouellette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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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AGE, JOHN U. D.</p>
<p>Rank and organization: Lieutenant Colonel, U.S. Army, X Corps Artillery, while attached to the 52d Transportation Truck Battalion. Place and date: Near Chosin Reservoir, Korea, 29 November to 10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St. Paul, Minn. Born: 8 February 1904, Malahi Island, Luzon, Philippine Islands. G.O. No.: 21, 25 April 1957. Citation: Lt. Col. Page, a member of X Corps Artillery,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in action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 series of exploits. On 29 November, Lt. Col. Page left X Corps Headquarters at Hamhung with the mission of establishing traffic control on the main supply route to 1st Marine Division positions and those of some Army elements on the Chosin Reservoir plateau. Having completed his mission Lt. Col. Page was free to return to the safety of Hamhung but chose to remain on the plateau to aid an isolated signal station, thus being cut off with elements of the marine division. After rescuing his jeep driver by breaking up an ambush near a destroyed bridge Lt. Col. Page reached the lines of a surrounded marine garrison at Koto-ri. He then voluntarily developed and trained a reserve force of assorted army troops trapped with the marines. By exemplary leadership and tireless devotion he made an effective tactical unit available. In order that casualties might be evacuated, an airstrip was improvised on frozen ground partly outside of the Koto-ri defense perimeter which was continually under enemy attack. During 2 such attacks, Lt. Col. Page exposed himself on the airstrip to direct fire on the enemy, and twice mounted the rear deck of a tank, manning the machinegun on the turret to drive the enemy back into a no man&#8217;s land. On 3 December while being flown low over enemy lines in a light observation plane, Lt. Col. Page dropped handgrenades on Chinese positions and sprayed foxholes with automatic fire from his carbine. After 10 days of constant fighting the marine and army units in the vicinity of the Chosin Reservoir had succeeded in gathering at the edge of the plateau and Lt. Col. Page was flown to Hamhung to arrange for artillery support of the beleaguered troops attempting to break out. Again Lt. Col. Page refused an opportunity to remain in safety and returned to give every assistance to his comrades. As the column slowly moved south Lt. Col. Page joined the rear guard. When it neared the entrance to a narrow pass it came under frequent attacks on both flanks. Mounting an abandoned tank Lt. Col. Page manned the machinegun, braved heavy return fire, and covered the passing vehicles until the danger diminished. Later when another attack threatened his section of the convoy, then in the middle of the pass, Lt. Col. Page took a machinegun to the hillside and delivered effective counterfire, remaining exposed while men and vehicles passed through the ambuscade. On the night of 10 December the convoy reached the bottom of the pass but was halted by a strong enemy force at the front and on both flanks. Deadly small-arms fire poured into the column. Realizing the danger to the column as it lay motionless, Lt. Col. Page fought his way to the head of the column and plunged forward into the heart of the hostile position. His intrepid action so surprised the enemy that their ranks became disordered and suffered heavy casualties. Heedless of his safety, as he had been throughout the preceding 10 days, Lt. Col. Page remained forward, fiercely engaging the enemy single-handed until mortally wounded. By his valiant and aggressive spirit Lt. Col. Page enabled friendly forces to stand off the enemy. His outstanding courage, unswerving devotion to duty, and supreme self-sacrifice reflect great credit upon Lt. Col. Page and are in the highest tradition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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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ENDLETON, CHARLES F.</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D, 15th Infantry Regiment, 3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oo Gung-Dong, Korea, 16 and 17 July 1953. Entered service at: Fort Worth, Tex. Born: 26 September 1931, Camden, Tenn. Citation: Cpl. Pendleton, a machine gunner with Company D,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fter consolidating and establishing a defensive perimeter on a key terrain feature, friendly elements were attacked by a large hostile force. Cpl. Pendleton delivered deadly accurate fire into the approaching troops, killing approximately 15 and disorganizing the remainder with grenades. Unable to protect the flanks because of the narrow confines of the trench, he removed the machinegun from the tripod and, exposed to enemy observation, positioned it on his knee to improve his firing vantage. Observing a hostile infantryman jumping into the position, intent on throwing a grenade at his comrades, he whirled about and killed the attacker, then inflicted such heavy casualties on the enemy force that they retreated to regroup. After reorganizing, a second wave of hostile soldiers moved forward in an attempt to overrun the position and, later, when a hostile grenade landed nearby, Cpl. Pendleton quickly retrieved and hurled it back at the foe. Although he was burned by the hot shells ejecting from his weapon, and he was wounded by a grenade, he refused evacuation and continued to fire on the assaulting force. As enemy action increased in tempo, his machinegun was destroyed by a grenade but, undaunted, he grabbed a carbine and continued his heroic defense until mortally wounded by a mortar burst. Cpl. Pendleton&#8217;s unflinching courage, gallant self-sacrific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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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HILLIPS, LEE H.</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Marine Corps, Company E, 2d Battalion, 7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4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Ben Hill, Ga. Born: 3 February 1930, Stockbridge, Ga. Cpl. Phillips was killed in action 27 November 1950.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of Company E,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Assuming the point position in the attack against a strongly defended and well-entrenched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occupying a vital hill position which had been unsuccessfully assaulted on 5 separate occasions by units of the Marine Corps and other friendly forces, Cpl. Phillips fearlessly led his men in a bayonet charge up the precipitous slope under a deadly hail of hostile mortar, small-arms, and machinegun fire. Quickly rallying his squad when it was pinned down by a heavy and accurate mortar barrage, he continued to lead his men through the bombarded area and, although only 5 members were left in the casualty ridden unit, gained the military crest of the hill where he was immediately subjected to an enemy counterattack. Although greatly outnumbered by an estimated enemy squad, Cpl. Phillips boldly engaged the hostile force with handgrenades and rifle fire and, exhorting his gallant group of marines to follow him, stormed forward to completely overwhelm the enemy. With only 3 men now left in his squad, he proceeded to spearhead an assault on the last remaining strongpoint which was defended by 4 of the enemy on a rocky and almost inaccessible portion of the hill position. Using 1 hand to climb up the extremely hazardous precipice, he hurled grenades with the other and, with 2 remaining comrades, succeeded in annihilating the pocket of resistance and in consolidating the position. Immediately subjected to a sharp counterattack by an estimated enemy squad, he skillfully directed the fire of his men and employed his own weapon with deadly effectiveness to repulse the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By his valiant leadership, indomitable fighting spirit and resolute determination in the face of heavy odds, Cpl. Phillips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and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the destruction of the enemy stronghold. His great personal valor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s and sustains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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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ILILAAU, HERBERT K.</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C, 23d Infantry Regiment, 2n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Pia-ri, Korea, 17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Oahu, T.H. Born: 10 October 1928, Waianae, Oahu, T.H. G.O. No.: 58, 18 June 1952. Citation: Pfc. Pililaau, a member of Company C,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The enemy sent wave after wave of fanatical troops against his platoon which held a key terrain feature on &#8220;Heartbreak Ridge.&#8221; Valiantly defending its position, the unit repulsed each attack until ammunition became practically exhausted and it was ordered to withdraw to a new position. Voluntarily remaining behind to cover the withdrawal, Pfc. Pililaau fired his automatic weapon into the ranks of the assailants, threw all his grenades and, with ammunition exhausted, closed with the foe in hand-to-hand combat, courageously fighting with his trench knife and bare fists until finally overcome and mortally wounded. When the position was subsequently retaken, more than 40 enemy dead were counted in the area he had so valiantly defended. His heroic devotion to duty, indomitable fighting spirit,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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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ITTMAN, JOHN A.</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C, 23d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ujangdong, Korea, 26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Carrolton, Miss. Born: 15 October 1928, Carrolton, Miss. G.O. No.: 39, 4 June 1951. Citation: Sgt. Pittma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e volunteered to lead his squad in a counterattack to regain commanding terrain lost in an earlier engagement. Moving aggressively forward in the face of intense artillery, mortar, and small-arms fire he was wounded by mortar fragments. Disregarding his wounds he continued to lead and direct his men in a bold advance against the hostile standpoint. During this daring action, an enemy grenade was thrown in the midst of his squad endangering the lives of his comrades. Without hesitation, Sgt. Pittman threw himself on the grenade and absorbed its burst with his body. When a medical aid man reached him, his first request was to be informed as to how many of his men were hurt. This intrepid and selfless act saved several of his men from death or serious injury and was an inspiration to the entire command. Sgt. Pittman&#8217;s extraordinary heroism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is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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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OMEROY, RALPH E.</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E, 31st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umhwa, Korea, 15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Quinwood, W. Va. Born: 26 March 1930, Quinwood, W. Va. G.O. No.: 97, 30 December 1953. Citation: Pfc. Pomeroy, a machine gunner with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ile his comrades were consolidating on a key terrain feature, he manned a machinegun at the end of a communication trench on the forward slope to protect the platoon flank and prevent a surprise attack. When the enemy attacked through a ravine leading directly to his firing position, he immediately opened fire on the advancing troops inflicting a heavy toll in casualties and blunting the assault. At this juncture the enemy directed intense concentrations of artillery and mortar fire on his position in an attempt to neutralize his gun. Despite withering fire and bursting shells, he maintained his heroic stand and poured crippling fire into the ranks of the hostile force until a mortar burst severely wounded him and rendered the gun mount inoperable. Quickly removing the hot, heavy weapon, he cradled it in his arms and, moving forward with grim determination, raked the attacking forces with a hail of fire. Although wounded a second time he pursued his relentless course until his ammunition was expended within 10 feet of the foe and then, using the machinegun as a club, he courageously closed with the enemy in hand-to-hand combat until mortally wounded. Pfc. Pomeroy&#8217;s consummate valor, inspirational actions and supreme sacrifice enabled the platoon to contain the attack and maintain the integrity of the perimeter, reflecting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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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ORTER, DONN F.</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Army, Company G, 14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Mundung-ni Korea, 7 September 1952. Entered service at: Baltimore, Md. Born: 1 March 1931, Sewickley, Pa. G.O. No.: 64, 18 August 1953. Citation: Sgt. Porter, a member of Company G,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dvancing under cover of intense mortar and artillery fire, 2 hostile platoons attacked a combat outpost commanded by Sgt. Porter, destroyed communications, and killed 2 of his 3-man crew. Gallantly maintaining his position, he poured deadly accurate fire into the ranks of the enemy, killing 15 and dispersing the remainder. After falling back under a hail of fire, the determined foe reorganized and stormed forward in an attempt to overrun the outpost. Without hesitation, Sgt. Porter jumped from his position with bayonet fixed and, meeting the onslaught and in close combat, killed 6 hostile soldiers and routed the attack. While returning to the outpost, he was killed by an artillery burst, but his courageous actions forced the enemy to break off the engagement and thwarted a surprise attack on the main line of resistance. Sgt. Porter&#8217;s incredible display of valor, gallant self-sacrific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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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OYNTER, JAMES I.</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A,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Near Sudong, Korea, 4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Downey, Calif. Born: 1 December 1916, Bloomington, Ill.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in a rifle platoon of Company A,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during the defense of Hill 532, south of Sudong, Korea. When a vastly outnumbering, well-concealed hostile force launched a sudden, vicious counterattack against his platoon&#8217;s hasty defensive position, Sgt. Poynter displayed superb skill and courage in leading his squad and directing its fire against the onrushing enemy. With his ranks critically depleted by casualties and he himself critically wounded as the onslaught gained momentum and the hostile force surrounded his position, he seized his bayonet and engaged in bitter hand-to-hand combat as the breakthrough continued. Observing 3 machineguns closing in at a distance of 25 yards, he dashed from his position and, grasping handgrenades from fallen marines as he ran, charged the emplacements in rapid succession, killing the crews of 2 and putting the other out of action before he fell, mortally wounded. By his self-sacrificing and valiant conduct, Sgt. Poynter inspired the remaining members of his squad to heroic endeavor in bearing down upon and repelling the disorganized enemy, thereby enabling the platoon to move out of the trap to a more favorable tactical position. His indomitable fighting spirit, fortitude, and great personal valor maintained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sustain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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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MER, GEORGE H.</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I,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12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Lewisburg, Pa. Born: 27 March 1927, Meyersdale, P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leader of the 3d Platoon in Company I,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Ordered to attack and seize hostile positions atop a hall, vigorously defended by well-entrenched enemy forces delivering massed small-arms mortar, and machinegun fire, 2d Lt. Ramer fearlessly led his men up the steep slopes and although he and the majority of his unit were wounded during the ascent, boldly continued to spearhead the assault. With the terrain becoming more precipitous near the summit and the climb more perilous as the hostile forces added grenades to the devastating hail of fire, he staunchly carried the attack to the top, personally annihilated 1 enemy bunker with grenade and carbine fire and captured the objective with his remaining 8 men. Unable to hold the position against an immediate, overwhelming hostile counterattack, he ordered his group to withdraw and single-handedly fought the enemy to furnish cover for his men and for the evacuation of 3 fatally wounded marines. Severely wounded a second time, 2d Lt. Ramer refused aid when his men returned to help him and, after ordering them to seek shelter, courageously manned his post until the hostile troops overran his position and he fell mortally wounded. His indomitable fighting spirit, inspiring leadership and unselfish concern for others in the face of death,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2d Lt. Ramer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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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D CLOUD, MITCHELL, JR.</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 S. Army, Company E, 19th Infantry Regiment, 24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onghyon, Korea, 5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Merrilan Wis. Born: 2 July 1924, Hatfield, Wis. G.O. No.: 26, 25 April 1951. Citation: Cpl. Red Cloud, Company 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From his position on the point of a ridge immediately in front of the company command post he was the first to detect the approach of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and give the alarm as the enemy charged from a brush-covered area less than 100 feet from him. Springing up he delivered devastating pointblank automatic rifle fire into the advancing enemy. His accurate and intense fire checked this assault and gained time for the company to consolidate its defense. With utter fearlessness he maintained his firing position until severely wounded by enemy fire. Refusing assistance he pulled himself to his feet and wrapping his arm around a tree continued his deadly fire again, until he was fatally wounded. This heroic act stopped the enemy from overrunning his company&#8217;s position and gained time for reorganization and evacuation of the wounded. Cpl. Red Cloud&#8217;s dauntless courage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s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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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EM, ROBERT DALE</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Marine Corps, Company H,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Vicinity Chinhung-ni, Korea, 6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Elizabethtown, Pa. Born: 20 October 1925, Lancaster, P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platoon commander in Company H,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Grimly determined to dislodge a group of heavy enemy infantry units occupying well-concealed and strongly fortified positions on commanding ground overlooking unprotected terrain. 2d Lt. Reem moved slowly forward up the side of the ridge with his platoon in the face of a veritable hail of shattering hostile machinegun, grenade, and rifle fire. Three times repulsed by a resolute enemy force in achieving his objective, and pinned down by the continuing fury of hostile fire, he rallied and regrouped the heroic men in his depleted and disorganized platoon in preparation for a fourth attack. Issuing last-minute orders to his noncommissioned officers when an enemy grenade landed in a depression of the rocky ground in which the group was standing, 2d Lt. Reem unhesitatingly chose to sacrifice himself and, springing upon the deadly missile, absorbed the full impact of the explosion in his body, thus protecting others from serious injury and possible death. Stouthearted and indomitable, he readily yielded his own chance of survival that his subordinate leaders might live to carry on the fight against a fanatic enemy. His superb courage, cool decisiveness, and valiant spirit of self-sacrifice in the face of certain death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2d Lt. Reem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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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RIGUEZ, JOSEPH C.</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then Pfc.), U.S. Army, Company F, 17th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Munye-ri, Korea, 21 May 1951. Entered service at: California. Born: 14 November 1928, San Bernardino, Calif. G.O. No.: 22, 5 February 1952. Citation: Sgt. Rodriguez,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Sgt. Rodriguez, an assistant squad leader of the 2d Platoon, was participating in an attack against a fanatical hostile force occupying well-fortified positions on rugged commanding terrain, when his squad&#8217;s advance was halted within approximately 60 yards by a withering barrage of automatic weapons and small-arms fire from 5 emplacements directly to the front and right and left flanks, together with grenades which the enemy rolled down the hill toward the advancing troops. Fully aware of the odds against him, Sgt. Rodriguez leaped to his feet, dashed 60 yards up the fire-swept slope, and, after lobbing grenades into the first foxhole with deadly accuracy, ran around the left flank, silenced an automatic weapon with 2 grenades and continued his whirlwind assault to the top of the peak, wiping out 2 more foxholes and then, reaching the right flank, he tossed grenades into the remaining emplacement, destroying the gun and annihilating its crew. Sgt. Rodriguez&#8217; intrepid actions exacted a toll of 15 enemy dead and, as a result of his incredible display of valor, the defense of the opposition was broken, and the enemy routed, and the strategic strongpoint secured. His unflinching courage under fire and inspirational devotion to duty reflect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uphold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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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SER, RONALD E.</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Heavy Mortar Company, 38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Vicinity of Ponggilli, Korea, 12 January 1952. Entered service at: Crooksville, Ohio. Born: 24 October 1929, Columbus, Ohio. G.O. No.: 67, 7 July 1952. Citation: Cpl. Rosser,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assaulting heavily fortified enemy hill positions, Company L, 38th Infantry Regiment, was stopped by fierce automatic-weapons, small-arms, artillery, and mortar fire. Cpl. Rosser, a forward observer was with the lead platoon of Company L, when it came under fire from 2 directions. Cpl. Rosser turned his radio over to his assistant and, disregarding the enemy fire, charged the enemy positions armed with only carbine and a grenade. At the first bunker, he silenced its occupants with a burst from his weapon. Gaining the top of the hill, he killed 2 enemy soldiers, and then went down the trench, killing 5 more as he advanced. He then hurled his grenade into a bunker and shot 2 other soldiers as they emerged. Having exhausted his ammunition, he returned through the enemy fire to obtain more ammunition and grenades and charged the hill once more. Calling on others to follow him, he assaulted 2 more enemy bunkers. Although those who attempted to join him became casualties, Cpl. Rosser once again exhausted his ammunition obtained a new supply, and returning to the hilltop a third time hurled grenades into the enemy positions. During this heroic action Cpl. Rosser single-handedly killed at least 13 of the enemy. After exhausting his ammunition he accompanied the withdrawing platoon, and though himself wounded, made several trips across open terrain still under enemy fire to help remove other men injured more seriously than himself. This outstanding soldier&#8217;s courageous and selfless devotion to duty is worthy of emulation by all men. He has contributed magnificently to the high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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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CHOONOVER, DAN D.</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A, 13th Engineer Combat Battalion,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kkogae, Korea, 8 to 10 July 1953. Entered service at: Boise, Idaho. Born: 8 October 1933, Boise, Idaho. G.O. No.: 5, 14 January 1955. Citation: Cpl. Schoonover,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e was in charge of an engineer demolition squad attached to an infantry company which was committed to dislodge the enemy from a vital hill. Realizing that the heavy fighting and intense enemy fire made it impossible to carry out his mission, he voluntarily employed his unit as a rifle squad and, forging up the steep barren slope, participated in the assault on hostile positions. When an artillery round exploded on the roof of an enemy bunker, he courageously ran forward and leaped into the position, killing 1 hostile infantryman and taking another prisoner. Later in the action, when friendly forces were pinned down by vicious fire from another enemy bunker, he dashed through the hail of fire, hurled grenades in the nearest aperture, then ran to the doorway and emptied his pistol, killing the remainder of the enemy. His brave action neutralized the position and enabled friendly troops to continue their advance to the crest of the hill. When the enemy counterattacked he constantly exposed himself to the heavy bombardment to direct the fire of his men and to call in an effective artillery barrage on hostile forces. Although the company was relieved early the following morning, he voluntarily remained in the area, manned a machinegun for several hours, and subsequently joined another assault on enemy emplacements. When last seen he was operating an automatic rifle with devastating effect until mortally wounded by artillery fire. Cpl. Schoonover&#8217;s heroic leadership during 2 days of heavy fighting, superb personal bravery, and willing self-sacrifice inspired his comrades and saved many lives, reflecting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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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CHOWALTER, EDWARD R., JR.</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A, 31st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umhwa, Korea, 14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Metairie, La. Born: 24 December 1927, New Orleans, La. G.O. No.: 6, 28 January 1954. Citation: 1st Lt. Schowalter, commanding,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Committed to attack and occupy a key-approach to the primary objective, the 1st Platoon of his company came under heavy vicious small-arms, grenade, and mortar fire within 50 yards of the enemy-held strongpoint, halting the advance and inflicting several casualties. The 2d Platoon moved up in support at this juncture, and although wounded, 1st Lt. Schowalter continued to spearhead the assault. Nearing the objective he was severely wounded by a grenade fragment but, refusing medical aid, he led his men into the trenches and began routing the enemy from the bunkers with grenades. Suddenly from a burst of fire from a hidden cove off the trench he was again wounded. Although suffering from his wounds, he refused to relinquish command and continued issuing orders and encouraging his men until the commanding ground was secured and then he was evacuated. 1st Lt. Schowalter&#8217;s unflinching courage, extraordinary heroism, and inspirational leadership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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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EBILLE, LOUIS J.</p>
<p>Rank and organization: Major, U.S. Air Force, 67th Fighter-Bomber Squadron, 18th Fighter-Bomber Group, 5th Air Force. Place and date: Near Hanchang, Korea, 5 August 1950. Entered service at: Chicago, Ill. Born: 21 November 1915, Harbor Beach. Mich. Citation: Maj. Sebill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During an attack on a camouflaged area containing a concentration of enemy troops, artillery, and armored vehicles, Maj. Sebille&#8217;s F-51 aircraft was severely damaged by antiaircraft fire. Although fully cognizant of the short period he could remain airborne, he deliberately ignored the possibility of survival by abandoning the aircraft or by crash landing, and continued his attack against the enemy forces threatening the security of friendly ground troops. In his determination to inflict maximum damage upon the enemy, Maj. Sebille again exposed himself to the intense fire of enemy gun batteries and dived on the target to his death. The superior leadership, daring, and selfless devotion to duty which he displayed in the execution of an extremely dangerous mission were an inspiration to both his subordinates and superiors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the U.S. Air Force, and the armed forces of the United Nation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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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HEA, RICHARD T., JR.</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A 17th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kkogae, Korea, 6 to 8 July 1953. Entered service at: Portsmouth, Va. Born: 3 January 1927, Portsmouth, Va. G.O. No.: 38, 8 June 1955. Citation: 1st Lt. Shea, executive officer, Company A,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On the night of 6 July, he was supervising the reinforcement of defensive positions when the enemy attacked with great numerical superiority. Voluntarily proceeding to the area most threatened, he organized and led a counterattack and, in the bitter fighting which ensued, closed with and killed 2 hostile soldiers with his trench knife. Calmly moving among the men, checking positions, steadying and urging the troops to hold firm, he fought side by side with them throughout the night. Despite heavy losses, the hostile force pressed the assault with determination, and at dawn made an all-out attempt to overrun friendly elements. Charging forward to meet the challenge, 1st Lt. Shea and his gallant men drove back the hostile troops. Elements of Company G joined the defense on the afternoon of 7 July, having lost key personnel through casualties. Immediately integrating these troops into his unit, 1st Lt. Shea rallied a group of 20 men and again charged the enemy. Although wounded in this action, he refused evacuation and continued to lead the counterattack. When the assaulting element was pinned down by heavy machinegun fire, he personally rushed the emplacement and, firing his carbine and lobbing grenades with deadly accuracy, neutralized the weapon and killed 3 of the enemy. With forceful leadership and by his heroic example, 1st Lt. Shea coordinated and directed a holding action throughout the night and the following morning. On 8 July, the enemy attacked again. Despite additional wounds, he launched a determined counterattack and was last seen in close hand-to-hand combat with the enemy. 1st Lt. Shea&#8217;s inspirational leadership and unflinching courage set an illustrious example of valor to the men of his regiment, reflecting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ing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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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HUCK, WILLIAM E., JR.</p>
<p>Rank and organization: Staff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G,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3 July 1952. Entered service at: Cumberland, Md. Born. 16 August 1926, Cumberland, Md.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squad leader of Company G,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en his platoon was subjected to a devastating barrage of enemy small-arms, grenade, artillery, and mortar fire during an assault against strongly fortified hill positions well forward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S/Sgt. Shuck, although painfully wounded, refused medical attention and continued to lead his machinegun squad in the attack. Unhesitatingly assuming command of a rifle squad when the leader became a casualty, he skillfully organized the 2 squads into an attacking force and led 2 more daring assaults upon the hostile positions. Wounded a second time, he steadfastly refused evacuation and remained in the foremost position under heavy fire until assured that all dead and wounded were evacuated. Mortally wounded by an enemy sniper bullet while voluntarily assisting in the removal of the last casualty, S/Sgt. Shuck, by his fortitude and great personal valor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His unyielding courage throughout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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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IMANEK, ROBERT E .</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Marine Corps, Company F, 2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17 August 1952. Entered service at: Detroit, Mich. Born: 26 April 1930, Detroit, Mich.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with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hile accompanying a patrol en route to occupy a combat outpost forward of friendly lines, Pfc. Simanek exhibited a high degree of courage and a resolute spirit of self-sacrifice in protecting the lives of his fellow marines. With his unit ambushed by an intense concentration of enemy mortar and small-arms fire, and suffering heavy casualties, he was forced to seek cover with the remaining members of the patrol in a nearby trench line. Determined to save his comrades when a hostile grenade was hurled into their midst, he unhesitatingly threw himself on the deadly missile absorbing the shattering violence of the exploding charge in his body and shielding his fellow marines from serious injury or death. Gravely wounded as a result of his heroic action, Pfc. Simanek, by his daring initiative and great personal valor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and upheld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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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ITMAN, WILLIAM S.</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Company M, 23d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Chipyong-ni, Korea, 14 February 1951. Entered service at: Bellwood, Pa. Birth: Bellwood, Pa. G.O. No.: 20, 1 February 1952. Citation: Sfc. Sitma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an armed enemy of the United Nations. Sfc. Sitman, a machinegun section leader of Company M, was attached to Company I, under attack b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During the encounter when an enemy grenade knocked out his machinegun, a squad from Company I, immediately emplaced a light machinegun and Sfc. Sitman and his men remained to provide security for the crew. In the ensuing action, the enemy lobbed a grenade into the position and Sfc. Sitman, fully aware of the odds against him, selflessly threw himself on it, absorbing the full force of the explosion with his body. Although mortally wounded in this fearless display of valor, his intrepid act saved 5 men from death or serious injury, and enabled them to continue inflicting withering fire on the ruthless foe throughout the attack. Sfc. Sitman&#8217;s noble self-sacrifice and consummate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uphold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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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ITTER, CARL L.</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Marine Corps, Company G, 3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Hagaru-ri, Korea, 29 and 30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Pueblo, Colo. Born: 2 December 1921, Syracuse, Mo.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commanding officer of Company G,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Ordered to break through enemy-infested territory to reinforce his battalion the morning of 29 November, Capt. Sitter continuously exposed himself to enemy fire as he led his company forward and, despite 25 percent casualties suffered m the furious action, succeeded in driving through to his objective. Assuming the responsibility of attempting to seize and occupy a strategic area occupied by a hostile force of regiment strength deeply entrenched on a snow-covered hill commanding the entire valley southeast of the town, as well as the line of march of friendly troops withdrawing to the south, he reorganized his depleted units the following morning and boldly led them up the steep, frozen hillside under blistering fire, encouraging and redeploying his troops as casualties occurred and directing forward platoons as they continued the drive to the top of the ridge. During the night when a vastly outnumbering enemy launched a sudden, vicious counterattack, setting the hill ablaze with mortar, machinegun, and automatic-weapons fire and taking a heavy toll in troops, Capt. Sitter visited each foxhole and gun position, coolly deploying and integrating reinforcing units consisting of service personnel unfamiliar with infantry tactics into a coordinated combat team and instilling in every man the will and determination to hold his position at all costs. With the enemy penetrating his lines in repeated counterattacks which often required hand-to-hand combat, and, on one occasion infiltrating to the command post with handgrenades, he fought gallantly with his men in repulsing and killing the fanatic attackers in each encounter. Painfully wounded in the face, arms, and chest by bursting grenades, he staunchly refused to be evacuated and continued to fight on until a successful defense of the area was assured with a loss to the enemy of more than 50 percent dead, wounded, and captured. His valiant leadership, superb tactics, and great personal valor throughout 36 hours of bitter combat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Capt. Sitter and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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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KINNER, SHERROD E., JR.</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Marine Corps Reserve, Battery F, 2d Battalion, 11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6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East Lansing, Mich. Born: 29 October 1929, Hartford, Conn.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n artillery forward observer of Batter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on the night of 26 October 1952. When his observation post in an extremely critical and vital sector of the main line of resistance was subjected to a sudden and fanatical attack by hostile forces, supported by a devastating barrage of artillery and mortar fire which completely severed communication lines connecting the outpost with friendly firing batteries, 2d Lt. Skinner, in a determined effort to hold his position, immediately organized and directed the surviving personnel in the defense of the outpost, continuing to call down fire on the enemy by means of radio alone until his equipment became damaged beyond repair. Undaunted by the intense hostile barrage and the rapidly-closing attackers, he twice left the protection of his bunker in order to direct accurate machinegun fire and to replenish the depleted supply of ammunition and grenades. Although painfully wounded on each occasion, he steadfastly refused medical aid until the rest of the men received treatment. As the ground attack reached its climax, he gallantly directed the final defense until the meager supply of ammunition was exhausted and the position overrun. During the 3 hours that the outpost was occupied by the enemy, several grenades were thrown into the bunker which served as protection for 2d Lt. Skinner and his remaining comrades. Realizing that there was no chance for other than passive resistance, he directed his men to feign death even though the hostile troops entered the bunker and searched their persons. Later, when an enemy grenade was thrown between him and 2 other survivors, he immediately threw himself on the deadly missile in an effort to protect the others, absorbing the full force of the explosion and sacrificing his life for his comrades. By his indomitable fighting spirit, superb leadership, and great personal valor in the face of tremendous odds, 2d Lt. Skinner served to inspire his fellow marines in their heroic stand against the enemy and upheld the high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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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MITH, DAVID M.</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E, 9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Yongsan, Korea, 1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Livingston, Ky. Born: 10 November 1926, Livingston, Ky. G.O. No.: 78, 21 August 1952. Citation: Pfc. Smith,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outstanding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Pfc. Smith was a gunner in the mortar section of Company E, emplaced in rugged mountainous terrain and under attack b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Bitter fighting ensued and the enemy overran forward elements, infiltrated the perimeter, and rendered friendly positions untenable. The mortar section was ordered to withdraw, but the enemy had encircled and closed in on the position. Observing a grenade lobbed at his emplacement, Pfc. Smith shouted a warning to his comrades and, fully aware of the odds against him, flung himself upon it and smothered the explosion with his body. Although mortally wounded in this display of valor, his intrepid act saved 5 men from death or serious injury. Pfc. Smith&#8217;s inspirational conduct and supreme sacrifice reflect lasting glory 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noble traditions of the infantry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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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EICHER, CLIFTON T.</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Army, Company F, 223d Infantry Regiment, 40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Minarigol, Korea, 14 June 1952. Entered service at: Gray, Pa. Born: 25 March 1931, Gray, Pa. G.O. No.: 65, 19 August 1953. Citation: Cpl. Speicher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ile participating in an assault to secure a key terrain feature, Cpl. Speicher&#8217;s squad was pinned down by withering small-arms mortar, and machinegun fire. Although already wounded he left the comparative safety of his position, and made a daring charge against the machinegun emplacement. Within 10 yards of the goal, he was again wounded by small-arms fire but continued on, entered the bunker, killed 2 hostile soldiers with his rifle, a third with his bayonet, and silenced the machinegun. Inspired by this incredible display of valor, the men quickly moved up and completed the mission. Dazed and shaken, he walked to the foot of the hill where he collapsed and died. Cpl. Speicher&#8217;s consummate sacrifice and unflinching devotion to duty reflect lasting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noble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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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ONE, JAMES L.</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U.S. Army, Company E 8th Cavalry Regiment, 1st Caval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kkogae, Korea, 21 and 22 Nov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Houston Tex. Born: 27 December 1922, Pine Bluff, Ark. G.O. No.: 82, 20 October 1953. Citation: 1st Lt. Stone,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en his platoon, holding a vital outpost position, was attacked by overwhelming Chinese forces, 1st Lt. Stone stood erect and exposed to the terrific enemy fire calmly directed his men in the defense. A defensive flame-thrower failing to function, he personally moved to its location, further exposing himself, and personally repaired the weapon. Throughout a second attack, 1st Lt. Stone; though painfully wounded, personally carried the only remaining light machinegun from place to place in the position in order to bring fire upon the Chinese advancing from 2 directions. Throughout he continued to encourage and direct his depleted platoon in its hopeless defense. Although again wounded, he continued the fight with his carbine, still exposing himself as an example to his men. When this final overwhelming assault swept over the platoon&#8217;s position his voice could still be heard faintly urging his men to carry on, until he lost consciousness. Only because of this officer&#8217;s driving spirit and heroic action was the platoon emboldened to make its brave but hopeless last ditch stan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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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ORY, LUTHER H.</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A, 9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Agok, Korea, 1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Georgia. Born: 20 July 1931, Buena Vista, Ga. G.O. No.: 70, 2 August 1951. Citation: Pfc. Story,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 savage daylight attack by elements of 3 enemy divisions penetrated the thinly held lines of the 9th Infantry. Company A beat off several banzai attacks but was bypassed and in danger of being cut off and surrounded. Pfc. Story, a weapons squad leader, was heavily engaged in stopping the early attacks and had just moved his squad to a position overlooking the Naktong River when he observed a large group of the enemy crossing the river to attack Company A. Seizing a machinegun from his wounded gunner he placed deadly fire on the hostile column killing or wounding an estimated 100 enemy soldiers. Facing certain encirclement the company commander ordered a withdrawal. During the move Pfc. Story noticed the approach of an enemy truck loaded with troops and towing an ammunition trailer. Alerting his comrades to take cover he fearlessly stood in the middle of the road, throwing grenades into the truck. Out of grenades he crawled to his squad, gathered up additional grenades and again attacked the vehicle. During the withdrawal the company was attacked by such superior numbers that it was forced to deploy in a rice field. Pfc. Story was wounded in this action, but, disregarding his wounds, rallied the men about him and repelled the attack. Realizing that his wounds would hamper his comrades he refused to retire to the next position but remained to cover the company&#8217;s withdrawal. When last seen he was firing every weapon available and fighting off another hostile assault. Private Story&#8217;s extraordinary heroism, aggressive leadership, and supreme devotion to du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we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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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UDUT, JEROME A.</p>
<p>Rank and organization: Second Lieutenant, U.S. Army, Company B, 27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Kumhwa, Korea, 12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Wisconsin. Birth: Wausau, Wis. G.O. No.: 31, 21 March 1952. Citation: 2d Lt. Sudut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is platoon, attacking heavily fortified and strategically located hostile emplacements, had been stopped by intense fire from a large bunker containing several firing posts. Armed with submachinegun, pistol, and grenades, 2d Lt. Sudut charged the emplacement alone through vicious hostile fire, killing 3 of the occupants and dispersing the remainder. Painfully wounded, he returned to reorganize his platoon, refused evacuation and led his men in a renewed attack. The enemy had returned to the bunker by means of connecting trenches from other emplacements and the platoon was again halted by devastating fire. Accompanied by an automatic-rifleman 2d Lt. Sudut again charged into close-range fire to eliminate the position. When the rifleman was wounded, 2d Lt. Sudut seized his weapon and continued alone, killing 3 of the 4 remaining occupants. Though mortally wounded and his ammunition exhausted, he jumped into the emplacement and killed the remaining enemy soldier with his trench knife. His single-handed assaults so inspired his comrades that they continued the attack and drove the enemy from the hill, securing the objective. 2d Lt. Sudut&#8217;s consummate fighting spirit, outstanding leadership, and gallant self-sacrifice are in keeping with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infantry and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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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HOMPSON, WILLIAM.</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24th Company M, 24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Haman, Korea, 6 August 1950. Entered service at: Bronx, N.Y. Birth: New York, N.Y. G.O. No.: 63, 2 August 1951. Citation: Pfc. Thompso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ile his platoon was reorganizing under cover of darkness, fanatical enemy forces in overwhelming strength launched a surprise attack on the unit. Pfc. Thompson set up his machinegun in the path of the onslaught and swept the enemy with withering fire, pinning them down momentarily thus permitting the remainder of his platoon to withdraw to a more tenable position. Although hit repeatedly by grenade fragments and small-arms fire, he resisted all efforts of his comrades to induce him to withdraw, steadfastly remained at his machinegun and continued to deliver deadly, accurate fire until mortally wounded by an enemy grenade. Pfc. Thompson&#8217;s dauntless courage and gallant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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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URNER, CHARLES W.</p>
<p>Rank and organization: Sergeant First Class, U.S. Army, 2d Reconnaissance Company,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Yongsan, Korea, 1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Massachusetts. Birth: Boston, Mass. G.O. No.: 10, 16 February 1951. Citation: Sfc. Turner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A large enemy force launched a mortar and automatic weapon supported assault against his platoon. Sfc. Turner, a section leader, quickly organized his unit for defense and then observed that the attack was directed at the tank section 100 yards away. Leaving his secured section he dashed through a hail of fire to the threatened position and, mounting a tank, manned the exposed turret machinegun. Disregarding the intense enemy fire he calmly held this position delivering deadly accurate fire and pointing out targets for the tank&#8217;s 75mm. gun. His action resulted in the destruction of 7 enemy machinegun nests. Although severely wounded he remained at the gun shouting encouragement to his comrades. During the action the tank received over 50 direct hits; the periscopes and antenna were shot away and 3 rounds hit the machinegun mount. Despite this fire he remained at his post until a burst of enemy fire cost him his life. This intrepid and heroic performance enabled the platoon to withdraw and later launch an attack which routed the enemy. Sfc. Turner&#8217;s valor and exampl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are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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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VAN WINKLE, ARCHIE</p>
<p>Rank and organization: Staff Sergeant,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B, 1st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Vicinity of Sudong, Korea, 2 Nov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Arlington, Wash. Born: 17 March 1925, Juneau, Alaska.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platoon sergeant in Company B,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Immediately rallying the men in his area after a fanatical and numerically superior enemy force penetrated the center of the line under cover of darkness and pinned down the platoon with a devastating barrage of deadly automatic weapons and grenade fire, S/Sgt. Van Winkle boldly spearheaded a determined attack through withering fire against hostile frontal positions and, though he and all the others who charged with him were wounded, succeeded in enabling his platoon to gain the fire superiority and the opportunity to reorganize. Realizing that the left flank squad was isolated from the rest of the unit, he rushed through 40 yards of fierce enemy fire to reunite his troops despite an elbow wound which rendered 1 of his arms totally useless. Severely wounded a second time when a direct hit in the chest from a hostile handgrenade caused serious and painful wounds, he staunchly refused evacuation and continued to shout orders and words of encouragement to his depleted and battered platoon. Finally carried from his position unconscious from shock and from loss of blood, S/Sgt. Van Winkle served to inspire all who observed him to heroic efforts in successfully repulsing the enemy attack. His superb leadership, valiant fighting spirit, and unfaltering devotion to duty in the face of heavy odds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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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VITTORI, JOSEPH</p>
<p>Rank and organization: Corporal,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F, 2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Hill 749, Korea, 15 and 16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Beverly, Mass. Born: 1 August 1929, Beverly, Mass.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n automatic-rifleman in Company F,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With a forward platoon suffering heavy casualties and forced to withdraw under a vicious enemy counterattack as his company assaulted strong hostile forces entrenched on Hill 749, Cpl. Vittori boldly rushed through the withdrawing troops with 2 other volunteers from his reserve platoon and plunged directly into the midst of the enemy. Overwhelming them in a fierce hand-to-hand struggle, he enabled his company to consolidate its positions to meet further imminent onslaughts. Quick to respond to an urgent call for a rifleman to defend a heavy machinegun positioned on the extreme point of the northern flank and virtually isolated from the remainder of the unit when the enemy again struck in force during the night, he assumed position under the devastating barrage and, fighting a single-handed battle, leaped from 1 flank to the other, covering each foxhole in turn as casualties continued to mount manning a machinegun when the gunner was struck down and making repeated trips through the heaviest shellfire to replenish ammunition. With the situation becoming extremely critical, reinforcing units to the rear pinned down under the blistering attack and foxholes left practically void by dead and wounded for a distance of 100 yards, Cpl. Vittori continued his valiant stand, refusing to give ground as the enemy penetrated to within feet of his position, simulating strength in the line and denying the foe physical occupation of the ground. Mortally wounded by the enemy machinegun and rifle bullets while persisting in his magnificent defense of the sector where approximately 200 enemy dead were found the following morning, Cpl. Vittori, by his fortitude, stouthearted courage, and great personal valor, had kept the point position intact despite the tremendous odds and undoubtedly prevented the entire battalion position from collapsing. His extraordinary heroism throughout the furious nightlong battle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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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ALMSLEY, JOHN S., JR.</p>
<p>Rank and organization: Captain, U.S. Air Force, 8th Bombardment Squadron, 3d Bomb Group. Place and date: Near Yangdok, Korea, 14 September 1951. Entered service at: Baltimore, Md. Born. 7 January 1920, Baltimore, Md. Citation: Capt. Walmsley,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flying a B-26 aircraft on a night combat mission with the objective of developing new tactics, Capt. Walmsley sighted an enemy supply train which had been assigned top priority as a target of opportunity. He immediately attacked, producing a strike which disabled the train, and, when his ammunition was expended, radioed for friendly aircraft in the area to complete destruction of the target. Employing the searchlight mounted on his aircraft, he guided another B-26 aircraft to the target area, meanwhile constantly exposing himself to enemy fire. Directing an incoming B-26 pilot, he twice boldly aligned himself with the target, his searchlight illuminating the area, in a determined effort to give the attacking aircraft full visibility. As the friendly aircraft prepared for the attack, Capt. Walmsley descended into the valley in a low level run over the target with searchlight blazing, selflessly exposing himself to vicious enemy antiaircraft fire. In his determination to inflict maximum damage on the enemy, he refused to employ evasive tactics and valiantly pressed forward straight through an intense barrage, thus insuring complete destruction of the enemy&#8217;s vitally needed war cargo. While he courageously pressed his attack Capt. Walmsley&#8217;s plane was hit and crashed into the surrounding mountains, exploding upon impact. His heroic initiative and daring aggressiveness in completing this important mission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pposition and at the risk of his life, reflects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the U.S. Air For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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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ATKINS, LEWIS G.</p>
<p>Rank and organization: Staff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I, 3d Battalion, 7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7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Seneca, S.C. Born. 6 June 1925, Seneca, S.C.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a guide of a rifle platoon of Company I,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during the hours of darkness on the morning of 7 October 1952. With his platoon assigned the mission of retaking an outpost which had been overrun by the enemy earlier in the night, S/Sgt. Watkins skillfully led his unit in the assault up the designated hill. Although painfully wounded when a well-entrenched hostile force at the crest of the hill engaged the platoon with intense small-arms and grenade fire, he gallantly continued to lead his men. Obtaining an automatic rifle from 1 of the wounded men, he assisted in pinning down an enemy machinegun holding up the assault. When an enemy grenade landed among S/Sgt. Watkins and several other marines while they were moving forward through a trench on the hill crest, he immediately pushed his companions aside, placed himself in a position to shield them and picked up the deadly missile in an attempt to throw it outside the trench. Mortally wounded when the grenade exploded in his hand, S/Sgt. Watkins, by his great personal valor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saved the lives of several of his comrades and contributed materially to the success of the mission. His extraordinary heroism, inspiring leadership, and resolute spirit of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enhance the finest traditions of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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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ATKINS, TRAVIS E.</p>
<p>Rank and organization: Master Sergeant, U.S. Army, Company H, 9th Infantry Regiment, 2d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Yongsan, Korea, 31 August through 3 Sept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Texas. Birth: Waldo, Ark. G.O. No.: 9, 16 February 1951. Citation: M/Sgt. Watkins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When an overwhelming enemy force broke through and isolated 30 men of his unit, he took command, established a perimeter defense and directed action which repelled continuous, fanatical enemy assaults. With his group completely surrounded and cut off, he moved from foxhole to foxhole exposing himself to enemy fire, giving instructions and offering encouragement to his men. Later when the need for ammunition and grenades became critical he shot 2 enemy soldiers 50 yards outside the perimeter and went out alone for their ammunition and weapons. As he picked up their weapons he was attacked by 3 others and wounded. Returning their fire he killed all 3 and gathering up the weapons of the 5 enemy dead returned to his amazed comrades. During a later assault, 6 enemy soldiers gained a defiladed spot and began to throw grenades into the perimeter making it untenable. Realizing the desperate situation and disregarding his wound he rose from his foxhole to engage them with rifle fire. Although immediately hit by a burst from an enemy machinegun he continued to fire until he had killed the grenade throwers. With this threat eliminated he collapsed and despite being paralyzed from the waist down, encouraged his men to hold on. He refused all food, saving it for his comrades, and when it became apparent that help would not arrive in time to hold the position ordered his men to escape to friendly lines. Refusing evacuation as his hopeless condition would burden his comrades, he remained in his position and cheerfully wished them luck. Through his aggressive leadership and intrepid actions, this small force destroyed nearly 500 of the enemy before abandoning their position. M/Sgt. Watkins&#8217; sustained personal bravery and noble self-sacrifice reflect the highest glory upon himself and is in keeping with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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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EST, ERNEST E.</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L, 14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ataeri, Korea, 12 October 1952. Entered service at: Wurtland Ky. Born: 2 September 1931, Russell, Ky. G.O. No.: 7, 29 January i954. Citation: Pfc. West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He voluntarily accompanied a contingent to locate and destroy a reported enemy outpost. Nearing the objective, the patrol was ambushed and suffered numerous casualties. Observing his wounded leader Iying in an exposed position, Pfc. West ordered the troops to withdraw, then braved intense fire to reach and assist him. While attempting evacuation, he was attacked by 3 hostile soldiers employing grenades and small-arms fire. Quickly shifting his body to shelter the officer, he killed the assailants with his rifle, then carried the helpless man to safety. He was critically wounded and lost an eye in this action. but courageously returned through withering fire and bursting shells to assist the wounded. While evacuating 2 comrades, he closed with and killed 3 more of the foe. Pfc. West&#8217;s indomitable spirit, consummate valor, and intrepid actions inspired all who observed him, reflect the highest credit on himself, and uphold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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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ILSON, BENJAMIN F.</p>
<p>Rank and organization: First Lieutenant (then M/Sgt.), U.S. Army Company I, 31st Infantry Regiment, 7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Hwach&#8217;on-Myon, Korea, 5 June 1951. Entered service at: Vashon, Wash. Birth: Vashon, Wash. G.O. No.: 69, 23 September 1954. Citation: 1st Lt. Wilso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domitable courag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Company I was committed to attack and secure commanding terrain stubbornly defended by a numerically superior hostile force emplaced in well-fortified positions. When the spearheading element was pinned down by withering hostile fire, he dashed forward and, firing his rifle and throwing grenades, neutralized the position denying the advance and killed 4 enemy soldiers manning submachineguns. After the assault platoon moved up, occupied the position, and a base of fire was established, he led a bayonet attack which reduced the objective and killed approximately 27 hostile soldiers. While friendly forces were consolidating the newly won gain, the enemy launched a counterattack and 1st Lt. Wilson, realizing the imminent threat of being overrun, made a determined lone-man charge, killing 7 and wounding 2 of the enemy, and routing the remainder in disorder. After the position was organized, he led an assault carrying to approximately 15 yards of the final objective, when enemy fire halted the advance. He ordered the platoon to withdraw and, although painfully wounded in this action, remained to provide covering fire. During an ensuing counterattack, the commanding officer and 1st Platoon leader became casualties. Unhesitatingly, 1st Lt. Wilson charged the enemy ranks and fought valiantly, killing 3 enemy soldiers with his rifle before it was wrested from his hands, and annihilating 4 others with his entrenching tool. His courageous delaying action enabled his comrades to reorganize and effect an orderly withdrawal. While directing evacuation of the wounded, he suffered a second wound, but elected to remain on the position until assured that all of the men had reached safety. 1st Lt. Wilson&#8217;s sustained valor and intrepid actions reflect utmo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 the honor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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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ILSON, HAROLD E.</p>
<p>Rank and organization: Technical Sergeant, U.S. Marine Corps Reserve, Company G, 3d Battalion, 1st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Korea, 23-24 April 1951. Entered service at: Birmingham, Ala. Born: S December 1921, Birmingham, Ala. Citation: For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while serving as platoon sergeant of a rifle platoon attached to Company G,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on the night of 23-24 April 1951. When the company outpost was overrun by the enemy while his platoon, firing from hastily constructed foxholes, was engaged in resisting the brunt of a fierce mortar, machinegun, grenade, and small-arms attack launched by hostile forces from high ground under cover of darkness, T/Sgt. Wilson braved intense fire to assist the survivors back into the line and to direct the treatment of casualties. Although twice wounded by gunfire, in the right arm and the left leg, he refused medical aid for himself and continued to move about among his men, shouting words of encouragement. After receiving further wounds in the head and shoulder as the attack increased in intensity, he again insisted upon remaining with his unit. Unable to use either arm to fire, and with mounting casualties among our forces, he resupplied his men with rifles and ammunition taken from the wounded. Personally reporting to his company commander on several occasions, he requested and received additional assistance when the enemy attack became even more fierce and, after placing the reinforcements in strategic positions in the line, directed effective fire until blown off his feet by the bursting of a hostile mortar round in his face. Dazed and suffering from concussion, he still refused medical aid and, despite weakness from loss of blood, moved from foxhole to foxhole, directing fire, resupplying ammunition, rendering first aid, and encouraging his men. By his heroic actions in the face of almost certain death, when the unit&#8217;s ability to hold the disadvantageous position was doubtful, he instilled confidence in his troops, inspiring them to rally repeatedly and turn back the furious assaults. At dawn, after the final attack had been repulsed, he personally accounted for each man in his platoon before walking unassisted l/2 mile to the aid station where he submitted to treatment. His outstanding courage, initiative, and skilled leadership in the face of overwhelming odds were contributing factors in the success of his company&#8217;s mission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T/Sgt. Wilson and the U.S. Naval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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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ILSON, RICHARD G.</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 1, Medical Company, 187th Airborne Infantry Regiment. Place and date: Opari, Korea, 21 October 1950. Entered service at: Cape Girardeau Mo. Born: 19 August 1931, Marion, Ill. G.O. No.: 64, 2 August 1951. Citation: Pfc. Wilson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s medical aid man attached to Company I, he accompanied the unit during a reconnaissance in force through the hilly country near Opari. The main body of the company was passing through a narrow valley flanked on 3 sides by high hills when the enemy laid down a barrage of mortar, automatic-weapons and small-arms fire. The company suffered a large number of casualties from the intense hostile fire while fighting its way out of the ambush. Pfc. Wilson proceeded at once to move among the wounded and administered aid to them oblivious of the danger to himself, constantly exposing himself to hostile fire. The company commander ordered a withdrawal as the enemy threatened to encircle and isolate the company. As his unit withdrew Private Wilson assisted wounded men to safety and assured himself that none were left behind. After the company had pulled back he learned that a comrade previously thought dead had been seen to be moving and attempting to crawl to safety. Despite the protests of his comrades, unarmed and facing a merciless enemy, Pfc. Wilson returned to the dangerous position in search of his comrade. Two days later a patrol found him Iying beside the man he returned to aid. He had been shot several times while trying to shield and administer aid to the wounded man. Pfc. Wilson&#8217;s superb personal bravery, consummate courage and willing self-sacrifice for his comrades reflect untold glory up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military servic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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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INDRICH, WILLIAM G.</p>
<p>Rank and organization: Staff Sergeant, U.S. Marine Corps, Company I, 3d Battalion, 5th Marines, 1st Marine Division (Rein.). Place and date: Vicinity of Yudam-ni, Korea, 1 December 1950. Entered service at: Hammond, Ind. Born: 14 May 1921, Chicago, Ill. Citation: For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t the risk of his life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as a platoon sergeant of Company I, in action against enemy aggressor forces the night of 1 December 1950. Promptly organizing a squad of men when the enemy launched a sudden, vicious counterattack against the forward elements of his company&#8217;s position, rendering it untenable, S/Sgt. Windrich, armed with a carbine, spearheaded the assault to the top of the knoll immediately confronting the overwhelming forces and, under shattering hostile automatic-weapons, mortar, and grenade fire, directed effective fire to hold back the attackers and cover the withdrawal of our troops to commanding ground. With 7 of his men struck down during the furious action and himself wounded in the head by a bursting grenade, he made his way to his company&#8217;s position and, organizing a small group of volunteers, returned with them to evacuate the wounded and dying from the frozen hillside, staunchly refusing medical attention himself. Immediately redeploying the remainder of his troops, S/Sgt. Windrich placed them on the left flank of the defensive sector before the enemy again attacked in force. Wounded in the leg during the bitter fight that followed, he bravely fought on with his men, shouting words of encouragement and directing their fire until the attack was repelled. Refusing evacuation although unable to stand, he still continued to direct his platoon in setting up defensive positions until weakened by the bitter cold, excessive loss of blood, and severe pain, he lapsed into unconsciousness and died. His valiant leadership, fortitude, and courageous fighting spirit against tremendous odds served to inspire others to heroic endeavor in holding the objective and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S/Sgt. Windrich and the U.S. Naval Service. He gallantly gave his life for his countr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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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OMACK, BRYANT E.</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Medical Company, 14th Infantry Regiment, 25th Infantry Division. Place and date: Near Sokso-ri, Korea, 12 March 1952. Entered service at: Mill Springs, N.C. Birth: Mill Springs, N.C. G.O. No.: 5, 12 January 1953. Citation: Pfc. Womack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against the enemy. Pfc. Womack was the only medical aid man attached to a night combat patrol when sudden contact with a numerically superior enemy produced numerous casualties. Pfc. Womack went immediately to their aid, although this necessitated exposing himself to a devastating hail of enemy fire, during which he was seriously wounded. Refusing medical aid for himself, he continued moving among his comrades to administer aid. While he was aiding 1 man, he was again struck by enemy mortar fire, this time suffering the loss of his right arm. Although he knew the consequences should immediate aid not be administered, he still refused aid and insisted that all efforts be made for the benefit of others that were wounded. Although unable to perform the task himself, he remained on the scene and directed others in first aid techniques. The last man to withdraw, he walked until he collapsed from loss of blood, and died a few minutes later while being carried by his comrades. The extraordinary heroism, outstanding courage, and unswerving devotion to his duties displayed by Pfc. Womack reflect the utmost distinction up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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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OUNG, ROBERT H.</p>
<p>Rank and organization: Private First Class, U.S. Army, Company E, 8th Cavalry Regiment, 1st Cavalry Division. Place and date: North of Kaesong, Korea, 9 October 1950. Entered service at: Vallejo, Calif. Born: 4 March 1929, Oroville. Calif. G.O. No.: 65, 2 August 1951. Citation: Pfc. Young distinguished himself by conspicuous gallantry and intrepidity above and beyond the call of duty in action. His company, spearheading a battalion drive deep in enemy territory, suddenly came under a devastating barrage of enemy mortar and automatic weapons crossfire which inflicted heavy casualties among his comrades and wounded him in the face and shoulder. Refusing to be evacuated, Pfc. Young remained in position and continued to fire at the enemy until wounded a second time. As he awaited first aid near the company command post the enemy attempted an enveloping movement. Disregarding medical treatment he took an exposed position and firing with deadly accuracy killed 5 of the enemy. During this action he was again hit by hostile fire which knocked him to the ground and destroyed his helmet. Later when supporting tanks moved forward, Pfc. Young, his wounds still unattended, directed tank fire which destroyed 3 enemy gun positions and enabled the company to advance. Wounded again by an enemy mortar burst, and while aiding several of his injured comrades, he demanded that all others be evacuated first. Throughout the course of this action the leadership and combative instinct displayed by Pfc. Young exerted a profound influence on the conduct of the company. His aggressive example affected the whole course of the action and was responsible for its success. Pfc. Young&#8217;s dauntless courage and intrepidity reflect the highest credit upon himself and uphold the esteemed traditions of the U.S. Army.</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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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국유사번역본 4권-해제 2002/08/31  48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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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1:06:47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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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번호:6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8 15:50 길이:225줄 삼국유사 제 4 권 의해(義解) 제 5 원광서학(圓光西學) 당 속고승전 제 13권에 실려 있다. 신라 황룡사의 중 원광의 속성은 박씨이다. 본디 변한,진한,마한의 삼한에 살았 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에 살아 조상의 풍습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번호:6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8 15:50 길이:225줄 </p>
<p>삼국유사 제 4 권 </p>
<p>의해(義解) 제 5 </p>
<p>원광서학(圓光西學) </p>
<p>당 속고승전 제 13권에 실려 있다. </p>
<p>신라 황룡사의 중 원광의 속성은 박씨이다. 본디 변한,진한,마한의 삼한에 살았 </p>
<p>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에 살아 조상의 풍습이 오래 계승되어 </p>
<p>도량이 넓고 컸으며 또한 글을 즐겨 읽었고, 현유(玄儒-현학과 유학, 현학은 노장의 </p>
<p>학문, 유학은 공맹의 학문)를 두루 섭렵하여 배우기도 했으며, 자사(子史-諸子의 書 </p>
<p>와 史記)도 연구하니 그 문명이 삼한에 크게 크게 떨쳤다. 그러나 중국의 폭넓은 학문 </p>
<p>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중국으로 유학하기로 작정했다. 그리 </p>
<p>하여 배를 타고 금릉(중국 남경)으로 건너가니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때는 陳나라 </p>
<p>시대로서 문명국이라 일컬었다. 그러므로 그전에 의심스러웠던 점들을 묻고 道를 물어 </p>
<p>서 그 뜻을 해득할 수 있게 되었다. </p>
<p>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로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간의 전적을 읽었기 </p>
<p>대문에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과 같았는데, 불교의 진리를 깨닫자 이전 것은 한낱 </p>
<p>지푸라기와 같이 여겨졌다. 명교(名敎-불교이외의 다른 교리)를 헛되이 찾은 것은 생 </p>
<p>애에 지극한 두려움이 된다 하여 이에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道法에 돌아갈 것을 </p>
<p>청하니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p>
<p>그리하여 중이 되어 곧 구족계를 받고, 강석을 두루 찾아 좋은 도리를 모두 배웠 </p>
<p>으며, 미묘한 글들을 해득하게 되어 세월을 헛되이 보냄이 없었다. 그런 중에 성실(경 </p>
<p>전의 이름),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쌓아 간직하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연구했다. 나 </p>
<p>중에는 또 오나라 호구산에 들어가 염정(念定)을 서로 따랐으며 각관(覺觀)을 경계하 </p>
<p>여 잊음이 없으니 중의 무리가 구름같이 임천에 모였다. 아울러 4아함경을 종합하여 </p>
<p>읽으매 그 공효(功效)가 8정에 들어갔으며,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p>
<p>어그러짐이 추호도 없었다. 본래 품었던 마음과 잘 맞았으므로 드디어 평생을 이 곳에 </p>
<p>서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를 단절하고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면 </p>
<p>서 생각을 청소(하늘, 즉 세상밖)에 두고 영원히 속세를 사절했다. </p>
<p>이때 어떤 신사(信士)가 산밑에 살고 있어서 원광에게 와 강의해 주기를 청했다. </p>
<p>그러나 원광은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마침내 </p>
<p>그의 뜻에 따랐다. 처음 성실론을 말하고 나중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해석이 </p>
<p>뛰어나고 명철하여 가문(嘉聞-좋은 명예)을 얻었으며, 또 아름다운 수사로 엮어내니 </p>
<p>듣는 자가 모두 기뻐하며 모든 거에 흡족해 하였다. </p>
<p>이로 하여 예전의 법에 따라 중생을 계도하고 교화함을 임무로 삼으니, 법륜이 </p>
<p>한번 움직일 때마다 언제나 일순에 강호(江湖-세상)를 불법으로 기울게 하였다. 비록 </p>
<p>이역에서의 전교(傳敎)이지만 도에 묻혀 싫어하고 꺼림이 없는 탓에 명망이 널리 퍼져 </p>
<p>영표(嶺表-중국 남방)에까지 퍼졌다. 이에 가시밭을 헤치며 바랑을 매고 찾아오는 사 </p>
<p>람이 마치 고기비늘처럼 잇달았다. 때는 마침 수나라 문제가 천하를 다스렸고 그 위엄 </p>
<p>은 남국(南國-陣나라)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p>
<p>그후 진나라의 역수(曆數-운수)가 다해 수나라 군사들이 양도(楊都-진나라 서울) </p>
<p>에까지 들어가니 원광도 마침내 난병에 잡혀 바야흐로 살해되려는 참이었다. 이 때 수 </p>
<p>의 대장이 절의 탑이 불타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 구하려 했다. 다가가니 불타던 광경 </p>
<p>은 온 데 간 데 없고 단지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된 채 죽음을 당하려 할 따름이었다. </p>
<p>이상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긴 대장은 즉시 그의 결박을 풀고 놓아보냈다. 위기에 부딪 </p>
<p>쳤을 때 원광이 영감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p>
<p>원광은 학문이 오월에서 통달하였으나 문득 중국의 북쪽 지방인 주와 秦의 문화 </p>
<p>를 보고자 하여 개황 9년(589)에 수나라의 서울로 유학 갔다. 때는 마침 불법의 초회 </p>
<p>(初會)를 맞아 섭론(攝論-불교의 종파)이 비로소 일어나니 文言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p>
<p>미서(黴緖-경전의 미묘한 실마리)를 떨치게 했다. 또 혜해(慧解-지혜의 작용으로 법을 </p>
<p>잘 해득함)를 달려 그 이름을 수나라 서울에 떨쳤으며 이제 공업이 이루어지니 신라로 </p>
<p>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황제 </p>
<p>에게 돌려보내 주기를 자주 청하였다. 이에 수나라 황제는 칙령을 내려 그를 후하게 </p>
<p>위로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수년만에 돌아오자 노소가 서로 기뻐했다. </p>
<p>신라왕 김씨(진평왕)는 그를 만나고는 공경하며 성인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천성 </p>
<p>이 허휴하고 정이 많아 범애(汎愛-박애)에 이르렀으며 말할 때에는 항상 미소를 잃지 </p>
<p>않았고, 결코 노기를 나타냄이 없었다. </p>
<p>전표(중국과의 외교문서)나 계서(啓書)등 오가는 國命은 모두 그에 의하여 쓰여 </p>
<p>졌다. 일우(一隅 &#8211; 온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그에게 맡겼으며 道로 교 </p>
<p>화하는 일을 물었다.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한 사람과 달랐어도 실제는 중국의 문물을 </p>
<p>익혀 돌아옴은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기회를 보아 훈계를 베풀었으니 오늘에까지 그 </p>
<p>모범이 되고 있다.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니 왕이 손수 의복과 </p>
<p>약,음식을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혼자서만 복을 받으 </p>
<p>려 했다니 그 감복하고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려 하자 왕은 친히 그 </p>
<p>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것을 물으니 징상(徵祥)을 남겨 바다 </p>
<p>구석에까지 미쳤다. </p>
<p>신라 건복 58년(건복은 진평왕의 연호로 49년에서 그쳤다.)에 몸이 약간 불편함 </p>
<p>을 느꼈다. 그후 7일이 지나 간절한 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룡사 안에 단정히 앉 </p>
<p>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 99세로 때는 당나라 정관 4년이었다. 임종할 때 절의 동북 </p>
<p>쪽 허공에 으악 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안에 가득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들 </p>
<p>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겼으며 그의 영감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교외에 장사 </p>
<p>지내니 나라에서 우의(羽儀-의식때 장식으로 쓰던 새의 깃)와 장구를 내려 임금의 장 </p>
<p>례와 다름없이 하였다. </p>
<p>그 후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을 때 세간에 퍼진 말로, </p>
<p>&#8216;복있는 사람의 묘에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8217; </p>
<p>하여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벼락이 사 </p>
<p>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 일로 인해 평소 그를 공경하지 않던 이들도 그를 </p>
<p>우러러 보게 되었다. </p>
<p>그의 제자 원안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기를 좋 </p>
<p>아하였으며 그윽한 곳에서 도를 구하면서 스승을 앙모했다. 이에 마침내 북으로는 구 </p>
<p>도(九都-고구려의 옛수도)로 가고, 동으로는 불내(不耐-동예의 옛땅)를 보고, 또 서로 </p>
<p>북쪽 북쪽 중국인 연과 위로 갔으며, 후로는 장안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각 지방의 </p>
<p>풍속을 자세히 알았으며, 여러 가지 경론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익히고 미세한 뜻 </p>
<p>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야 심학(心學-불교)에 귀의했는데 광진(光塵-세속에 모습을 </p>
<p>나타내어 중생을 계도하는 것)하는 자취가 높았다. 장안의 절에 있을 때 처음으로 도 </p>
<p>가 높다고 소문이 나자 특진 소우(簫瑀-사람이름)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 땅에 지은 </p>
<p>진량사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복 등 네가지를 공급하는 방법)의 공급이 6시(하루) </p>
<p>에 변함이 없었다. </p>
<p>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이렇게 말하여 기록했다. </p>
<p>&#8216;본국의 임금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어서 원광을 청해 궁중 </p>
<p>에 들여 별성(別省)에 있게 했다. 매일 밤 두 시간씩이나 심오한 법을 말하며 계를 받 </p>
<p>게 하여 참회케 하더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날 초저녁 원광의 머리에 금빛이 찬 </p>
<p>란하고 일륜의 상이 그의 몸을 따라다님을 왕이 보았다. 왕후며 궁녀들도 이를 보았다. </p>
<p>이후 더욱 승심(勝心-뛰어난 행실을 닦는 마음)을 발하여 원광을 병실에 머물게 하니 </p>
<p>오래지 않아 병이 드디어 나았다. 원광은 진한과 마한에 정법(正法-부처의 교법)을 널 </p>
<p>리 펴고 해마다 두 차례씩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또 보시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p>
<p>짓는데 충당했으므로 남은 것은 오직 가사와 바리때 뿐이었다.&#8217; </p>
<p>또 동경(경주)의 안일호장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에 원광법사전이 실려 </p>
<p>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p>
<p>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왕경(경주)사람이다. 중이 되자 처음에 불법을 배웠는데 </p>
<p>나이 30이 되자 한가이 지내면서 수도하려고 삼기산에 홀로 살았다. </p>
<p>그후 4년이 지나자 한 중이 와서 가까운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p>
<p>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그는 주술을 배우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밤 법사가 혼자 </p>
<p>앉아 불경을 외는데 문득 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p>
<p>&#8220;그대의 수행은 장하고 훌륭하십니다. 대체로 수행하는 자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p>
<p>이는 드뭅니다. 지금 이웃의 중을 보니 주술을 성급히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p>
<p>것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오히려 다른 이의 정념조차 괴롭히니 그가 거주하는 곳은 </p>
<p>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므로 지날 때마다 매양 미운 생각이 날 지경입니다. 나를 </p>
<p>위해 법사가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그가 그 </p>
<p>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내 문득 죄업을 저질를는지도 모릅니다.&#8221; </p>
<p>이에 이튿날 법사가 찾아가 말했다. </p>
<p>&#8220;어젯밤 내가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 좋을 것 같습니다. </p>
<p>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8221; </p>
<p>그러자 중이 대답했다. </p>
<p>&#8220;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악귀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의 말에 근심 </p>
<p>하시오?&#8221; </p>
<p>그날 밤에 또 신이 나타나 말했다. </p>
<p>&#8220;지난 밤 내가 한 말에 중이 무어라 대답했습니까?&#8221; </p>
<p>신이 노여워 할까 두려워 법사가 말했다. </p>
<p>&#8220;아직 말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8221; </p>
<p>&#8220;이에 내 다 들었는데 어찌하여 법사는 말을 꾸미십니까? 이제 그대는 잠자코 내 </p>
<p>하는 것만 보십시오.&#8221; </p>
<p>신은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밤중이 되어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법사 </p>
<p>가 그 곳에 가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또 신이 나타나 말했다. </p>
<p>&#8220;법사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8221; </p>
<p>&#8220;심히 놀랍고 두렵습니다.&#8221; </p>
<p>&#8220;내 나이 거의 3천세에 이르고 神術 또한 무한하지요. 이런 일이야 지극히 작은 </p>
<p>일인데 무엇이 놀랄 게 있겠습니까. 나는 앞으로의 일도 모르는게 없으며 온 천하의 </p>
<p>일에 다 통달해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법사가 오직 이 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신 </p>
<p>을 이롭게는 하겠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니, 이제 높은 이름을 내지 </p>
<p>못한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취하 </p>
<p>여 이 나라의 혼미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지 않습니까?&#8221; </p>
<p>&#8220;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가 멀 </p>
<p>리 막혀 있으므로 스스로 가지 못할 따름입니다.&#8221; </p>
<p>법사가 대답하자 신은 중국으로 가는 길과 여행에 필요한 사항을 자세히 일러 주 </p>
<p>었다. 법사는 그에 의해 중국에 갈 수 있었으며 11년을 그 곳에 머무르며 삼장에 널리 </p>
<p>통달하였고, 유교의 학술도 아울러 배웠다. </p>
<p>진평왕 22년 경신(660)에 법사는 행장을 갖춰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 </p>
<p>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신께 감사를 드리고자 법사는 전에 거주했었던 삼기산의 절로 </p>
<p>갔다. 밤이 되자 역시 신이 나타나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p>
<p>&#8220;해륙의 먼 노정에 왕복이 어떠하였습니까?&#8221; </p>
<p>&#8220;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8221; </p>
<p>&#8220;내 또한 스님에게 계를 드리겠습니다.&#8221; </p>
<p>하고는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그리고 법사는 청했다. </p>
<p>&#8220;신의 진용을 뵐 수 있습니까?&#8221; </p>
<p>&#8220;만일 법사가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십시오.&#8221; </p>
<p>이튿날 아침이 되어 법사가 동쪽 하늘을 보니 커다란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p>
<p>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이 되자 신이 나타나 또 물었다. </p>
<p>&#8220;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습니까?&#8221; </p>
<p>&#8220;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8221; </p>
<p>이 때문에 삼기산을 속칭 비장산이라고도 한다. </p>
<p>&#8220;비록 이 몸이 있다 하여도 무상의 害는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 </p>
<p>로 얼마 후에 그 고개에 사신(捨身-자기몸을 버림)할 것입니다. 그러니 법사는 거기 </p>
<p>와서 영원히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십시오.&#8221; </p>
<p>그리고 신은 그 날짜를 일러 주었다. </p>
<p>약속한 날이 되자 법사는 그 곳에 갔다.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옻칠한 것처럼 검 </p>
<p>게 변해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기리기만 하더니 마침내 죽었다. </p>
<p>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때 신라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 </p>
<p>으로 모시자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범하 </p>
<p>였다. 이에 왕은 몹시 걱정하였고 수나라(당나라)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p>
<p>걸병표(乞兵表-구원병을 청하는글)를 짓게 했다. 그 글을 본 수나라 황제는 친히 30만 </p>
<p>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쳤다. 이로 하여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함을 세상 </p>
<p>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명활성 서쪽에 장사했다. 또 삼국 </p>
<p>사 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귀산이란 어진 선비는 사량부 사람인데 한 마을의 취향 </p>
<p>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p>
<p>&#8220;우리들이 사군자들과 교유하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 처신하지 않는 </p>
<p>다면 필경 모욕당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 도를 묻지 </p>
<p>않겠는가.&#8221; </p>
<p>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 </p>
<p>은 찾아가 아뢰었다. </p>
<p>&#8220;저희들 속사(俗士)는 우매하여 아는 바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주시어 평생의 </p>
<p>지표가 되게 해주십시오.&#8221; </p>
<p>&#8220;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조항이 열 가지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남의 신 </p>
<p>하요 자식일 것이므로 필경 이르 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에는 5계가 있다 </p>
<p>. </p>
<p>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요,셋 </p>
<p>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일이요,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을 것이요,다섯 </p>
<p>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이니,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여서 </p>
<p>는 아니 되느니라.&#8221; </p>
<p>귀산과 그의 친구는 말했다. </p>
<p>&#8220;다른 말씀은 알아듣겠습니다만, 다섯 번째의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말 </p>
<p>씀만은 아직 이해되지 않습니다.&#8221; </p>
<p>&#8220;육재일(매월 8,14,15,23,29,30일)과 봄 여름에는 죽이지 않는것인데 이는 시기 </p>
<p>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닭,개등의 가축을 죽이지 말며, 고기가 한점도 없는 細物을 </p>
<p>죽여서도 아니되는 것이니, 이것은 物을 가리는 것이다. 이도 또한 소용될 만큼만 죽 </p>
<p>이지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이다.&#8221; </p>
<p>&#8220;지금부터는 이 말씀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8221; </p>
<p>하고 둘은 말하였다. 그 후 두사람은 전쟁에 나갔는데 모두 나라에 큰공을 세웠다. </p>
<p>또 건복 30년 계유(613)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으로 왕세의가 왔다. 이에 황룡사 </p>
<p>의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 불경을 강의했는데, 이때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p>
<p>앉았다. 논평하여 말한다. </p>
<p>&#8220;원종(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킨 후 비로소 진량(津梁-불교의 토대)이 설치되었지 </p>
<p>만 아직 당오(堂奧-진리의 경지)에는 도달함이 없엇다. 그리하여 마땅히 귀계멸참(歸 </p>
<p>戒滅懺-불교에 귀의하는 것)의 법으로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8221; </p>
<p>그렇기 때문에 원광은 자신이 살던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법회를 뒷받침하기 </p>
<p>위한 재단)를 두고 이것을 상규로 삼았다. 이때 어떤 여승이 시주하다 밭을 점찰보에 </p>
<p>바쳤는데, 지금의 동평군에 있는 밭 100결이 바로 이것으로 그때의 기록대장이 아직도 </p>
<p>남아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늘 웃음 띤 얼 </p>
<p>굴이었고 노한 빛은 없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p>
<p>그당시의 덕의(德義)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이 있었으나 감히 그보다 뛰어난 자가 </p>
<p>없었다. 그리고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나라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 80여 </p>
<p>세가 되어 정관 연간에 세상을 떠났는데 부도가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서는 황 </p>
<p>룡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했는데,그 장소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마 황룡사의 </p>
<p>잘못인 듯한데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라 한 예와 같을 것이다. </p>
<p>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 두전기에 따르면 그의 성씨는 박과 설로 되어있고, 출가 </p>
<p>또한 동과 서로 되어 마치 두사람을 말한 것 같으나, 감히 상세하고 명확하게 단정할 </p>
<p>수가 없다. 그러므로 두 전기를 다 적어둔다. 그리고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 이목 </p>
<p>과 운문(모두 절이름)의 사실은 없다. 그런데 향인 김척명이 그릇 되이 항간의 말들을 </p>
<p>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함부로 운문사의 개조 보앙스님의 사적과 뒤섞어 하 </p>
<p>나의 전기로 만들어 놓았다. 그후 해동승전을 엮은 이도 이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기 </p>
<p>록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때문에 이르 분별하고자 항 한 글자도 </p>
<p>가감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둔다. 진,수의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 </p>
<p>를 거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적었으며 설혹 있었다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시는 못 </p>
<p>했다. 원광의 후에는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계속하여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p>
<p>바로 길을 연 셈이 되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바다 건너 한나라 땅 구름 헤치고, </p>
<p>몇 사람이 오가며 밝은 덕 배웠던가. </p>
<p>오직 푸르른 산만이 옛 자취를 남겼지만 </p>
<p>금곡(金谷)과 가서(嘉西-둘다 절이름)의 일 들을 수 있네. </p>
<p>번호:6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0 08:26 길이:70줄 </p>
<p>보양이목(寶壤梨木) </p>
<p>중 보양전에는 그의 향리와 씨족은 싣고 있지 않다. 청도군청의 문적을 살펴보면 </p>
<p>이렇게 적혀있다. </p>
<p>&#8216;천북 8년 계묘(943)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 심사순영 대내말 수문 등의 주첩(柱 </p>
<p>貼-명단) 공문을 보면, 운문산선원 장생표(長生표-사원의 경계를 표시한 것)남쪽은 아 </p>
<p>니점,동쪽은 가서현이라 했다. 절의 삼강의 典主人은 보양화상이요,院主는 현회장로, </p>
<p>貞座는 현량상좌,直歲는 신원선사다.&#8217; </p>
<p>또 개운 3년 병진(946)의 운문산선원 장생표 탑에 관계되는 공문서에 보면 &#8216;장생 </p>
<p>이 11이니 아니점, 가서현, 묘현, 서북매현, 북저족문 등이다.&#8217; 했다. </p>
<p>또 경인년의 진양부첩에는 <5도안찰사가 각 도의 선종과 교종이 처음 세워진 연 </p>
<p>월과 그 실제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때에 차사원 동경장서기 이선이 자 </p>
<p>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하였다. </p>
<p>정풍 6년 신사(1161)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에 의하면 이렇다. 청도군 전 부호장 </p>
<p>어모부위 이칙정의 집에있는 옛사람들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는 치 </p>
<p>사 상호장 김양신,치사 호장 민육,호장 동정 윤웅,前 기인(其人-중앙에 볼모로 잡혀 </p>
<p>있는 지방호족의 자제) 진기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등의 말이 기재되어 있다. 그 때에 </p>
<p>태수 이사로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70세 이상 </p>
<p>이었다. 오직 용성만이 나이가 60세이상이었다. </p>
<p>신라시대 이래로 이 청도 군의 절로서 작갑사와 그 밖의 크고 작은 사원인 대작 </p>
<p>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다섯 갑사가 모두 후삼한난(후삼국의 난리)에 없 </p>
<p>어졌는데 이 다섯 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p>
<p>조사 지식-보양-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중간 </p>
<p>에 이르자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이고,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의 비단 가사 </p>
<p>한 벌을 주고, 또 아들 이목을 주면서 조살르 모시고 돌아가게 했다. 그러면서 용왕은 </p>
<p>부탁했다. </p>
<p>&#8220;지금 삼국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한 임금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p>
<p>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서 작갑에 절을 짓고 지내면 능히 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요, </p>
<p>또한 몇 해 후에는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것이오&#8221; </p>
<p>용왕이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였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 다다르자 갑자기 늙은 </p>
<p>중이 스스로를 원광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준후 이내 사 </p>
<p>라졌다. </p>
<p>이에 보양법사는 허물어진 절을장차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에 올라가 바라보노라 </p>
<p>니 뜰에 누런 5층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와 보니 그 자취가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 </p>
<p>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p>
<p>그러자 서해의 해룡이 작갑이라 하던 말이 생각나 그 곳을 찾아가서 땅을 파보니 </p>
<p>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는 벽돌이 없 </p>
<p>으므로 이곳이 전대의 절터임을 알았다. 이 곳에 절을 세우고 거주하며 절의 이름을 </p>
<p>작갑사라고 했다. </p>
<p>그리고 얼마 안되어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 곳에 절을 짓고 </p>
<p>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의 밭 5백 결을 합하여 이 절에 바쳤다. </p>
<p>그리고 청태 4년 정유(937)에는 절 이름을 내리어 운문선사라 하고 가사의 신령스러운 </p>
<p>음덕을 받들게 했다. </p>
<p>이목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서 살며 법화를 음으로 도왔다. 어느 해에 </p>
<p>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모두 타서 마르매 보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p>
<p>지방이 흡족하였다. </p>
<p>천제는 이목이 월권하였다 하여 죽이려 하매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자 </p>
<p>법사는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조금 후 천사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아라고 청하 </p>
<p>자, 법사는 뜰의 배나무를 가리키므로 천사는 그것에 벼락을 때린 후 하늘로 올라갔 </p>
<p>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나 용이 그것을 어루만지자 곧 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 </p>
<p>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느 사람이 빗장 뭉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에 두 </p>
<p>었다. 그 뭉치 자루에는 銘이 있다. </p>
<p>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이 때 </p>
<p>는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에 모 </p>
<p>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p>
<p>물리칠 방법을 묻자 법사가 말했다. </p>
<p>&#8220;대개 개란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만 지킬 뿐 그 뒤는 </p>
<p>잊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8221; </p>
<p>태조가 그 말을 좇았더니 적은 과연 패하여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신통한 꾀 </p>
<p>를 가상히 여겨 매년 주변고을의 租 50석을 주어 향화를 받들게 했다. 이로 인하여 2 </p>
<p>성(二聖-고려태조, 보양법사)의 진용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라고 했다. 후에 법사 </p>
<p>는 진용을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p>
<p>법사의 행장은 고전에는 실리지 않았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전한다. <석굴사의 </p>
<p>비허사 혹은 비허와 형제가 되어 봉성,석굴,운문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p>
<p>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p>
<p>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신라수이전-고려 박인량의 설화집)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 </p>
<p>사의 탑과 이목의 사실을 원광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하였다. 또 견성의 사실을 비허 </p>
<p>사의 전기에 넣은 것도 벌써 잘못인 데다가 또 더욱이 해동승전을 지은 사람도 여기에 </p>
<p>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의 전기를 빠뜨렸기 때문에, 뒤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거나 </p>
<p>잘못 알게 했으미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p>
<p>번호:6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2 16:09 길이:60줄 </p>
<p>양지사석(良志使錫) </p>
<p>중 양지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 </p>
<p>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p>
<p>석장의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그 지팡이는 저절로 날아가 시주의 집에 가 </p>
<p>서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는 또 이를 알고서 재에 쓸 비요을 여기에 넣었 </p>
<p>고, 포대가 다 차면 이 석장은 다시 날아서 돌아온다. 그런 때문에 그가 거주한 곳을 </p>
<p>석장사라고 했다. </p>
<p>양지는 신기하고 특이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으며, 여러 </p>
<p>가지 技藝에도 두루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원래는 편지 </p>
<p>라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서화 조각등의 손재주)에도 능하여 영모사 장육삼존상과 천왕 </p>
<p>상, 또는 전탑의 기와와 천왕사 탑 밑의 8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 삼존과 좌우 금강신 </p>
<p>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고, 벽돌로 탑을 하나 만들 </p>
<p>었으며,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 </p>
<p>의 장육상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마음을 바르고 밝게하여 잡념에서 </p>
<p>벗어나 法心만이 있는 경지)의 자세로 만드니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p>
<p>들였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p>
<p>오라 오라 오라. </p>
<p>오라 인생은 슬프더라. </p>
<p>서러워라 우리들은, </p>
<p>공덕 닦으러 왔네 </p>
<p>지금까지도 시골에서는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모두 이 노래를 부 </p>
<p>르고 있는데, 대개 이 때에 시작된 것이다. </p>
<p>장육상을 처음 만들떼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천 7백석이었다. </p>
<p>논평해 보면. </p>
<p>&#8216;양지스님은 가히 재주가 구비되고 덕이 풍부하였다. 여러 방면의 대가로서 하찮 </p>
<p>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겠다.&#8217; </p>
<p>기리어 읊는다. </p>
<p>재 마치니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p>
<p>노압(爐鴨-향로)에 손질하여 홀로 단향(檀香)피우네. </p>
<p>남은 불경 다 읽어 할일 없으니, </p>
<p>소상의 둥근 얼굴 합장하고 쳐다보네. </p>
<p>귀축제사(歸竺諸師) </p>
<p>광함의 구법고승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중 아리나 발마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 </p>
<p>政敎(불교)를 구하려 하여 일찍이 중국으로 갔는데 성인의 자취를 두루 찾아 보고픈 </p>
<p>마음이 더했다. 그래서 정관 연간(627-649)에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을 떠나 오천에 이 </p>
<p>르러 나란타寺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만이 읽고 패겹에 베껴썼다. 고국에 돌아오고 </p>
<p>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뜨니 그의 나 </p>
<p>이 70여세였다. </p>
<p>그의 뒤를 이어 혜업,현태,구본,현각,혜륜,현유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 </p>
<p>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관화(觀化-교화를 보는것)를 </p>
<p>보기 위해 중천축에 갔다. </p>
<p>그러나 혹은 도중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 남아서 그 곳 절에서 거주한 이도 있 </p>
<p>었지만, 마침내는 다시 게귀(鷄貴-신라)와 당나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오 </p>
<p>로지 현태스님만이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도 역시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없 </p>
<p>다. </p>
<p>천축국 사람이 해동을 불러 &#8216;구구탁 예설라&#8217;라 하는데, 이 구구탁은 계(鷄-닭)를 </p>
<p>말함이요, 예설라는 귀(貴)를 말한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이렇게 서로 전하여 말했다 </p>
<p>. </p>
<p>&#8216;신라에선는 계신(鷄神)을 받들어 못시는 까닭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8217; </p>
<p>기리어 읊는다. </p>
<p>천국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일세. </p>
<p>가련한 유사(遊士)들 힘써 오르느냐. </p>
<p>몇 번인가 저 달이 보내 외로운 배는, </p>
<p>구름 따라 돌아옴을 한 사람도 못 보았네. </p>
<p>번호:6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3 21:16 길이:102줄 </p>
<p>2혜동진(二惠同塵) </p>
<p>중 혜숙이 화랑이 호세랑의 무리 중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황권(黃卷-화 </p>
<p>랑도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년이나 되 </p>
<p>었다. </p>
<p>그때 국선 구담공이 일찍이 적선촌 들에 가서 사냥을 하는데 혜숙이 길가로 나가 </p>
<p>말의 고삐를 잡고 청했다. </p>
<p>&#8220;용승(庸僧-중이 자기를 낮추는 말)도 함께 가기를 원하옵는데 어떠하온지요?&#8221; </p>
<p>공이 이를 허락하니 혜숙은 옷을 벗어 젖히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서로 앞을 </p>
<p>다투니 이를 보고 공이 기뻐했다. 앉아서 쉬며 피로를 푸는데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 </p>
<p>로 먹기를 권하니 혜숙도 함께 먹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다. 이윽고 공의 앞 </p>
<p>에 나아가 말했다. </p>
<p>&#8220;지금 싱싱하고 맛있는 고기가 있으니 좀더 드시렵니까?&#8221; </p>
<p>공이 좋다고 하자,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소반에 놓아 </p>
<p>올리니, 옷 위로 붉은 피가 어리어 줄줄 흘렀다. 공이 깜짝 놀라 물었다. </p>
<p>&#8220;왜 이런 짓을 하느냐?&#8221; </p>
<p>&#8220;내가 처음에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라, 자기 몸에 통해서 능히 物에까지 </p>
<p>미치리라 하여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로지 죽 </p>
<p>이는 것만을 몹시 즐기어 남을 해치고 자기 몸만 기를 뿐이오니 어찌 이것이 어진 자 </p>
<p>나 군자의 행할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뜻이 맞는 무리가 아닙니다.&#8221; </p>
<p>하더니 옷을 뿌리치고 가벼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 하여 혜숙이 먹던 것을 보 </p>
<p>니 소반 위의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서 조정에 이 </p>
<p>를 아뢰었다. </p>
<p>진평왕이 듣고 사자를 보내었다. 사자가 그를 맞으러 가자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p>
<p>서 자는 것을 보이니 중사(中使-내시 또는 사자)는 이를 더럽게 여기고 그대로 돌아갔 </p>
<p>다. 7,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다시 만났다. 사자가 혜숙에게 어디서 오느냐고 </p>
<p>물으니 혜숙이 대답했다. </p>
<p>&#8220;성 안에 있는 시주 집에서 7일제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8221; </p>
<p>중사가 돌아와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 시주집을 조사했으나 또한 사실이 </p>
<p>었다. 그 얼마 후 혜숙이 돌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p>
<p>그 마을의 어떤 사람이 이현 서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는데 </p>
<p>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p>
<p>&#8220;이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이제 다른 지방으로 유람 간다.&#8221; </p>
<p>하고 서로 인사하고 혜어진 후 반리쯤 가더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이 </p>
<p>고개 동쪽에 이르니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지라, 그 까닭을 자세히 </p>
<p>말하고 무덤을 파헤쳐 보니 다만 한 짝의 짚신만 있었다.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사 </p>
<p>라는 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혜숙이 살던 집이라 하며, 또한 부도도 있다. </p>
<p>중 혜공은 천진공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인데 어릴 적 이름은 우조였 </p>
<p>다. 일찍이 공이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이 때 </p>
<p>우조의 나이 7세였는데 그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p>
<p>&#8220;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까?&#8221; </p>
<p>&#8220;가공(家公&#8211;자기집의 주인을 말함)이 몹쓸 병에 걸려 장차 죽게 되었는데 너는 </p>
<p>아직 모르고 있었느냐?&#8221; </p>
<p>어머니의 대답에 우조가 말했다. </p>
<p>&#8220;제가 그 병을 고치겠습니다.&#8221; </p>
<p>그 말을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공에게 알리니 공은 그를 불러오게 했다. 그는 침 </p>
<p>상 밑에 앉더니 한마디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공의 종기가 터지게 되었다. 공 </p>
<p>은 우연한 일이거니 하여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p>
<p>이에 장성하여 그는 공을 위하여 매을 길렀는데 공의 마음에 퍽 들었다. 공의 아 </p>
<p>우로서 처음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준 좋은 매를 얻 </p>
<p>어서 임지로 갔다. </p>
<p>어느날 밤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므로 다음날 새벽이면 우조를 보내어 그 </p>
<p>매을 가져오게 하려고 생각했다. 우조는 이를 미리 알고 금시에 그 매를 가져다가 새 </p>
<p>벽녘에 공에게 바쳤다. 공은 크게 놀래어 깨닫고 그 때서야 전일에 몹쓸 종기를 치료 </p>
<p>한 일들이 모두 측량하기 어려운 일임을 알고서 말했다. </p>
<p>&#8220;나는 지극한 성인이 내집에 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친 말과 예의에 벗어 </p>
<p>난 짓으로 욕을 보였으니 어찌 그 죄를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제부터 도사가 </p>
<p>되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8221; </p>
<p>마침내 공은 내려가서 예를 했다. </p>
<p>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들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드디어 출가하여 이름을 바 </p>
<p>꾸어 혜공이라 했다. 항상 그는 조그만 절에 살면서 늘 미친 듯이 술에 취하여 삼태기 </p>
<p>를 지고 거리를 헤매며 크게 노래하고 춤추니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p>
<p>그리고 극 있는 절을 부개사라고 했으니 이 말은 우리말로 삼태기를 의미한다. </p>
<p>그는 또 절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을 따서 우 </p>
<p>물 이름도 지었다. </p>
<p>그가 우물 속에서 나올 때는 반드시 먼저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솟아나왔으므로 </p>
<p>절의 중들은 이로써 그가 나올 조짐을 알았으며, 그가 우물에서 나와도 옷은 젖어 있 </p>
<p>지 않았다. </p>
<p>만년에는 항사사에 가 있었다. 이때 원효가 여러 가지 불경의 소(疏)를 찬술하고 </p>
<p>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하기도 했다. 어느 날 혜공 </p>
<p>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었는데 돌 위에 대변을 보니 혜 </p>
<p>공이 그것을 보고 희롱했다. </p>
<p>&#8220;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8221; </p>
<p>이런 일이 있은 까닭에 이 절을 오어사라 했다. 혹 어떤 이는 이 말을 원효대사 </p>
<p>의 말이라 하지만 잘못이다. 민간에서는 그 시내를 그릇 되이 불러 모의천이라고한다. </p>
<p>구담공이 어느 날 산으로 놀러 갔다가 산길에서 죽어 쓰러져서 살이 부어터지고 </p>
<p>구더기가 생긴 혜공의 시체를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했다. 그리고는 말고삐를 돌려 </p>
<p>성에 돌아오니 혜공은 몹시도 술에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 </p>
<p>았다. 또 어느 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서 가지고 영묘사에 들어가서 금당과 좌우에 있 </p>
<p>는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묶어 놓은 후 강사에게 말했다. </p>
<p>&#8220;이 새끼줄을 사흘 후에 풀도록 하라.&#8221; </p>
<p>이상히 여긴 강사가 그 말에 따르니, 과연 3일만에 선덕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다. </p>
<p>그때 지귀(志鬼-선덕왕때의 사람)의 심화가 나와 그 탑을 불태웠지만 단지 새끼로 맨 </p>
<p>곳만은 화재를 면했다. </p>
<p>또 신인(神印- 불교의 종파, 신인종)의 조사 명랑이 새로 금강사를 세우고 낙성 </p>
<p>회를 열었는데, 고승들은 모두들 모였지만 오직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p>
<p>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하였더니 잠시 후 그가 왔다. 이 때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불 </p>
<p>구하고 그의 옷은 젖지 않았으며 신발에도 진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p>
<p>말했다. </p>
<p>&#8220;초청이 은근하여 왔소이다.&#8221; </p>
<p>이와 같이 그는 신령스러운 자취가 매우 많았으며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p>
<p>마쳤느데, 사리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p>
<p>그가 언젠가 조론(肇論-후진의 승조가 지은 책이름)을 보고 말하기를 </p>
<p>&#8220;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글이다.&#8221; </p>
<p>하였으니 이로써 혜공이 승조의 후신임을 알겠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초원에서 사냥하고 침상 위에 누웠으며, </p>
<p>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속에 잠을 잤네. </p>
<p>척리(-혜공이 죽은 후에 무덤에 남아있던 신발 한짝)와 부공(혜공이 </p>
<p>죽은후 공중에 떠서 사라진 것을 이름)은 어디로 갔는가. </p>
<p>한 쌍의 보배로운 화중련(火中蓮-불속에서 연꽃이 핌)일세. </p>
<p>번호:6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4 14:44 길이:133줄 </p>
<p>자장정률(慈藏定律) </p>
<p>대덕 자장은 김씨이니 본래 진한의 진골 소판 무림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p>
<p>청관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3보(三寶-佛, 法, 僧)에 마음 </p>
<p>을 돌려 천부관음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축원했다. </p>
<p>&#8220;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의 진량으로 삼겠습니다.&#8221; </p>
<p>홀연히 그 어머니의 품 안으로 별 하나가 떨어져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바로 태 </p>
<p>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석존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량이라 했다. 그는 정 </p>
<p>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날로 문사에 풍부해지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p>
<p>두 부모를 일찍 여의자 이 후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문득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p>
<p>전원을 내어 원녕사라는 절을 세웠다. </p>
<p>홀로 깊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p>
<p>닦았는데 조금 피곤함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치고 그 속에 발가벗 </p>
<p>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혼미한 </p>
<p>정신을 없앴다. </p>
<p>때마침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자장이 문벌로서 물망에 올랐다. </p>
<p>왕이 여러번 불렀으나 그는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이에 왕이 칙령을 내렸다. </p>
<p>&#8220;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8221; 이를 듣고 자장이 말했다. </p>
<p>&#8220;내 차라리 하룻동안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라도 백년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p>
<p>것을 원치 않는다.&#8221; </p>
<p>이 말을 듣고 왕은 그가 출가함을 허락했다. 이에 자장이 여러 바위 사이에 깊숙 </p>
<p>이 숨어서 사니 아무도 양식 한톨 돌봐 주는 이가 없었다. 이 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p>
<p>물어와서 바쳤으므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다. 마침내 天人이 꿈에 나타나 5계를 </p>
<p>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의 남녀가 다투어 찾아와 계를 받 </p>
<p>았다. </p>
<p>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던 자장은 중국으로 가 대화(大化)하기를 </p>
<p>구했다. 인평 2년 병신(636)에 왕명을 받아 문인인 실 등 중 10여명과 더불어 서쪽 당 </p>
<p>나라 청량산에 가서 성인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문수보살)의 소상이 있었는데 </p>
<p>그 나라 사람들은 전하여 서로 말했다. </p>
<p>&#8220;제석천이 공인들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8221; </p>
<p>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기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 </p>
<p>며 범어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나 생각하니 알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p>
<p>중이 나타나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는 또 말했다. </p>
<p>&#8220;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소.&#8221; </p>
<p>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 자장은 자신이 이미 성별(성불할 것을 </p>
<p>예언한것)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에서 내려와 태화지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로 들어가 </p>
<p>니, 태종이 칙사를 보내어 그를 위무하고 승광별원에 거처하도록 했다. </p>
<p>태종의 은총과 하사한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그 번거로움을 꺼린 자장은 표문을 </p>
<p>올리고 종남산 운제자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동안 </p>
<p>을 수도하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으니 그 영검이 날로 많아졌다. 그 내용은 말이 </p>
<p>번거로워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p>
<p>이윽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황제는 칙사를 보내 그를 위문하고 또 비단 2백필 </p>
<p>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도록했다. </p>
<p>정관 17년 계묘(643)에 신라의 선덕왕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줄것을 청 </p>
<p>했다. 이에 태종이 허락하고 궁중으로 그를 불러드린 다음 비단 1령과 잡채 5백단을 </p>
<p>하사했으며, 또 동궁도 비단 2백 단을 내려주고, 그 밖에 많은 물건을 예물로 주었다. </p>
<p>본국에는 아직도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않았으므로 자장은 대장경 1부와 여러 </p>
<p>가지 번당 화개 등에 이르기까지 복리가 될만한 것은 청해서 모두 이것을 싣고 돌아왔 </p>
<p>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니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하니 </p>
<p>급여와 시위는 많고 극진했다. </p>
<p>어느 해 여름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을 강의하게 하고, 또한 황룡사에서 </p>
<p>보살계본을 7일 낮 7일 밤 동안 강연하게 하니 이 때에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p>
<p>과 안개가 자욱하게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본 사중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감탄했다. </p>
<p>이에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p>
<p>&#8220;불교가 우리 동방에 들어온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주지를 수봉하는 규범 </p>
<p>이 없으므로 이것을 통괄하여 다스리지 아니하면 바로잡을 수 없다.&#8221; </p>
<p>이에 왕이 자장을 대국통으로 임명하여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에게 위임하여 </p>
<p>이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를 상고해 보면 이렇다. 북제의 천보 연간에는 전국에 10통 </p>
<p>을 두었는데 유사가 아뢰기를, </p>
<p>&#8220;마땅히 직위를 분별하여야 하옵니다.&#8221; </p>
<p>라 하였다. 이에 문선제는 법상법사로 대통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으로 삼았다. </p>
<p>또 양,진의 시대에는 국통,주통,국도,주도,승도,승정,도유내 등의 명칭이 있었는데 </p>
<p>모두 소현조에 소속되었다. 소현조는 승니를 거느리는 관명이다. </p>
<p>당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을 장하게 여김이 있었고, 신라 진흥왕 11년 경오에는 </p>
<p>안장법사로 대서성을 삼았는데 이것은 한사람뿐이었고, 또 소서성은 두사람이 있었다. </p>
<p>그 이듬해 신미년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를 국통으로 삼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p>
<p>보량법사 한 사람은 대도유내로 삼고 주통 9인과 군통 18인을 두었다. 자장 때에 와서 </p>
<p>다시 대국통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이 </p>
<p>대각간이 되고, 김유신이 태대각간이 된 것과 같다. </p>
<p>후에 원성대왕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을 두고 정법전이라 하여 大舍 1인과 史 2 </p>
<p>인을 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이 뛰어난 자를 뽑아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한 때 </p>
<p>에는 바꾸었는데 연한은 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p>
<p>율종과 다르다. </p>
<p>자장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아가서 불교를 널리 전파했다. 그러나 </p>
<p>승니의 5부에 각각 구학을 더 증가시키고 보름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 </p>
<p>는 이들을 모아 시험해서 지범(持犯-계율을 지니는 지계와 계율을 범하는 범계)을 알 </p>
<p>게 하고 관원을 두어 이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 순사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p>
<p>검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히 정비하여 일정한 법으로 삼았 </p>
<p>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함이 이때가 가장 성하였다. 이것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p>
<p>노나라로 돌아와서 음악을 바로잡자 아송(雅頌)이 각각 그 당위성을 얻었던 일과 같다 </p>
<p>고 하겠다. 이때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집에 여덟, 아 </p>
<p>홉은 되었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나 </p>
<p>니 이에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 또 자신이 </p>
<p>태어난 집을 원녕사로 고치고 낙성회를 열어 잡화(雜花-화엄경) 1만偈를 강의하니 52 </p>
<p>녀가 감동하여 현신해 와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게하 </p>
<p>여 그 상서로운 자취를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라고 이름했다. </p>
<p>일찍이 그는 우리나라의 복식이 제하(諸夏-중국)와 같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건의 </p>
<p>하였는데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 3년 기유(649)에 처음으로 중국 衣冠을 입게 </p>
<p>하고, 다음 해인 경술(650)에 또 정삭(正朔-정월초하루)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의 연호 </p>
<p>를 썼다. 이 후부터는 중국에 조근할 때마다 상번(上蕃-상위의 번국, 번국은 제후의 </p>
<p>나라.)에 열(列)하였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p>
<p>만년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는데, 북대에 </p>
<p>서 본것과 같은 형상의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했다. </p>
<p>&#8220;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8221; </p>
<p>놀라 일어난 자장은 일찍 나가서 송정에 이르니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와서 </p>
<p>법요를 물으니 대답하였다. </p>
<p>&#8220;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8221; </p>
<p>하고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송정에는 지금까지도 가시나무 </p>
<p>가 나지 않으며, 매와 새매 같은 새들도 와 깃들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이 태백산으로 </p>
<p>가 그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p>
<p>&#8220;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다.&#8221; </p>
<p>이에 석남원 지금의 정암사를 세우고 대성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것사 한 사 </p>
<p>람이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오더니 시자 </p>
<p>에게 말했다. </p>
<p>&#8220;자장을 보려고 한다.&#8221; </p>
<p>&#8220;내가 건추(건은 수건, 추는 빗자루로 어른을 받든다는 뜻)를 받든 이래 우리 스 </p>
<p>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느냐?&#8221; </p>
<p>&#8220;다만 너희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여라.&#8221; </p>
<p>이에 시자는 들어가서아뢰니 미처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8221; </p>
<p>&#8220;필시 미친 사람이겠지.&#8221; </p>
<p>문인이 나가 꾸짖어 내쫓으니 거사가 말했다. </p>
<p>&#8220;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자기의 학문이나 지위를 자랑하여 남을 업 </p>
<p>수히 여김) 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8221; </p>
<p>말을 마치고 삼태기를 거꾸로 들어 터니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어 그 </p>
<p>위에 올라 앉더니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이를 들은 자장이 그제야 위의를 갖추고 빛 </p>
<p>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로 올라갔지만,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마침내 몸을 </p>
<p>던지니 목숨이 끊어졌다. 시체는 화장하여 유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p>
<p>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무려 10여곳인데 세울 적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 </p>
<p>瑞)가 나타났으므로 그르 받드는 포색(蒲塞-출가하지 않고 속가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 </p>
<p>는 남자)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되어 완성되었다. 자장이 쓰던 도구 </p>
<p>옷감, 버선과 태화지의 용이 바친 목압침과 석존의 유의(油衣-가사)들은 모두 통도사 </p>
<p>에 있다. 또 헌양현에 압유사가 있는데 침압이 일찍이 이 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 </p>
<p>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p>
<p>또 원승이란 중이 있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하여 함께 고향으로 돌아 </p>
<p>와서 자장을 도아 널리 율부(律部)를 폈다고 한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일찍이 청량산으로 가 꿈깨고 돌아오니, </p>
<p>7편 3취(七篇三聚)가 같이 열렸네. </p>
<p>치소(緇素-승려와 속인)의 옷을 부끄러이 여겨 </p>
<p>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처럼 만들었네. </p>
<p>번호:7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5 12:15 길이:69줄 </p>
<p>원효불기(元曉不羈) </p>
<p>성사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다. 조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 </p>
<p>적대연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내내말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 </p>
<p>군의 남쪽 지금의 장산군밑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은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이라고 </p>
<p>도 한다. 사라수란 명칭에 대하여는 민간에서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p>
<p>&#8216;스님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아기를 가져 이미 </p>
<p>만삭인데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밤나무 밑에서 문득 해산하게 되었다. 몹시 급하였으 </p>
<p>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누워 아기를 낳았기 </p>
<p>때문에 사라수라고 한다.&#8217; </p>
<p>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이를 사라율이라고 하고 있다. </p>
<p>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p>
<p>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니 괴상히 여긴 관리는 그 밤 </p>
<p>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는데, 한 알이 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 </p>
<p>고 판결했다. 이런 까닭에 밤나무골이라고 했다. </p>
<p>스님은 출가하자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라고 했다. 또 사라 </p>
<p>수나무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라 했다. 스님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p>
<p>이것은 할아버지의 본거를 따른 것이고, 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사람이라고 했다. </p>
<p>살펴보건대 인덕 2년 사이에 문무왕이 上州와 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를 두었 </p>
<p>는데,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이요,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현이다. 상주는 지금의 尙 </p>
<p>州이니 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에 속해 있으며 바로 압량군에서 나누 </p>
<p>어진 곳이다. 스님의 아명은 서당(새돌이)이요,또 다른 이름은 신당이다. </p>
<p>처음에 유성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태기가 있었으며, 해산 </p>
<p>할 때는 오색구름이 온 땅을 덮었다. 때는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617)이었다. </p>
<p>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이 없이 혼자 공부했다. 그의 유방(遊 </p>
<p>方&#8211;중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행함)의 시말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자취들은 당승전과 </p>
<p>그의 행장에 자세히 올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쓰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가 </p>
<p>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p>
<p>스님은 어느날 풍전(風顚-상례를 벗아난 행동)을 하여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p>
<p>어느날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는가 </p>
<p>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p>
<p>사람들은 누구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노래를 듣고, </p>
<p>&#8220;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 </p>
<p>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8221; </p>
<p>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지내고 있었으므로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 </p>
<p>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이미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p>
<p>문천교를 지나오고 있어 만나게 되엇다. 원효는 이때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적셨다. </p>
<p>궁리가 스님을 궁으로 데리고 그 곳에서 묵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p>
<p>설총을 낳았다. 설총은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여 신 </p>
<p>라 10현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방언으로 중국과 외이의 각 지방 풍속, 물건이름등에 </p>
<p>도 통달하고 이회하여 6경과 학문을 훈해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명경을 업으로 </p>
<p>삼는 사람이 이를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p>
<p>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여 총을 낳은 후에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p>
<p>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p>
<p>괴상했다. 스님은 그 모양에 따른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한 구절인 </p>
<p>&#8216;일체의 無애人(부처를 이름)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8217; </p>
<p>는 문귀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했다. 이 </p>
<p>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 </p>
<p>아오니 이로 말미암아 상추옹유(가난한사람의 집),확후(몽매한 사람)의 무리들도 다 </p>
<p>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부을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p>
<p>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p>
<p>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원효 </p>
<p>란 이름도 역시 방언이며 당사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원효를 일러 새벽이라고 했다. </p>
<p>그는 일찍이 분항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을 끝으로 </p>
<p>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訟事로 말미암아 몸을 百松(몸이 백개의 소나무로 나 </p>
<p>뉨)으로 나누었으므로 모든사람들은 이를 位階의 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 </p>
<p>유로 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를 지었으며, 붓과 벼루를 소의 두뿔위에 놓 </p>
<p>은 연유로 각승이라했다. 이것은 또한 本始二覺(본각과 이각)의 숨어 있는 뜻을 나타 </p>
<p>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 또한 知音하여 서로 唱和한것이다. </p>
<p>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진용을 만들고 분황사 </p>
<p>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사모하여 終天(한평생 슬픔을 품음)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곁 </p>
<p>에서 예배할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 본 그대로 있다. </p>
<p>원효가 일찍이 거하던 穴寺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다. </p>
<p>각승이 삼매경의 축을 처음으로 폈고, </p>
<p>무호는 종내 1만거리를 바람으로 걸었네 </p>
<p>달 밝던 봄 요석궁에 잠이 깊더니 </p>
<p>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모습만 비었네. </p>
<p>번호:7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6 09:50 길이:68줄 </p>
<p>의상전교(義湘傳敎) </p>
<p>법사 의상은 아버지가 한신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에 </p>
<p>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부처의 교화를 </p>
<p>보고자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변방의 순라군이 첩자로 여겨 잡아 가둔 지 수 </p>
<p>십일 후에야 간신히 풀려나서 돌아왔다. 영휘 초년때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p>
<p>본국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어 그 배를 타고 중국에 갔다. 처음 양주에 머물렀는데 주 </p>
<p>장 유지인이 의상을 청하여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성대하게 대접했다. 얼마 후에 </p>
<p>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 </p>
<p>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신주까지 와서 덮으니, 그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p>
<p>집이 있어 올라가 보자 마니보주가 하나 있었으며 그 빛이 먼 곳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p>
<p>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절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오므로 지엄 </p>
<p>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했다. </p>
<p>&#8220;어젯밤 내가 꾼 꿈에 그대가 올 징조였구려.&#8221; </p>
<p>하며 입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隱微한 부분까지 해석했 </p>
<p>다. 지엄은 영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터득하게 되니, 이것은 깊이 숨 </p>
<p>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이 그 본색을막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때에 본국의 승상 김흠순 </p>
<p>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갇혀있었다. 당나라 황제 고종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 </p>
<p>라를 치려 하매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하여 먼저 돌아가도록 하였다. 함형 원 </p>
<p>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 일을 조정에 알리니, 신인종의 고승 명랑에게 </p>
<p>명하여 밀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기도해서 국난을 면하게 할 수있었다. </p>
<p>의봉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 </p>
<p>고 대승을 폈더니 많은 영감이 나타났다. 종남문인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서 부본을 의 </p>
<p>상에게 보낸 뒤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p>
<p>&#8216;서경 승복사 중 법장은 해동신라 화엄법사의 시자에게 글을 드립니다. 한번 작 </p>
<p>별한 지 20여년이 되었으니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 속에서 잊겟습니까. 더욱이 연기 </p>
<p>와 구름이 1만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1천겹이나 쌓였으니,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 </p>
<p>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오며 회포에 연연함을 어찌 말로 다하리이까. 전생에 인연을 </p>
<p>같이했고, 금세에 함께 학업을 닦은 탓으로 이 과보를 얻어서 대경에 함께 목욕하고, </p>
<p>특별하신 선사의 은혜로 깊은 경전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 </p>
<p>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무애한 연기를 선양하여, 겹 </p>
<p>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줌이 크고 넓다고 하니 기쁜 마음 </p>
<p>더합니다. 이로써 여래가 돌아가신 후로 불교를 빛나게 하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불법을 </p>
<p>오래 머물게 할 분은 오로지 법사이심을 알겟습니다. 법장은 발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 </p>
<p>고 주선함도 더욱 모자라니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매 선사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 </p>
<p>직 분수에 따라 받은 것을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p>
<p>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p>
<p>다만 스님의 장소는 뜻은 풍부하오나 글이 간결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p>
<p>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그러하와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 </p>
<p>를 이루었습니다. 요즈음 이를 승전법사가 옮겨 써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p>
<p>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께서는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시어서 가르쳐 주시면 </p>
<p>행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기는 마당히 내세에선느 捨身受信하여 함께 노사나불의 </p>
<p>이와 같이 끝없는 묘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한 보현보살의 원행을 수행한다면 남은 </p>
<p>나의 악업은 하루 아침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바라는 바 상인께서는 옛 일을 잊지 마 </p>
<p>시고 諸趣 한가운데서 정도로써 가르쳐 주시옵소서. 인편이 있거든 때때로 안부 전해 </p>
<p>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불비하나이다.&#8217; </p>
<p>의상은 이에 영을 내려 열 곳의 절에서 교를 전파했다. 태백산의 부석사,원주의 </p>
<p>비마라사,가야산 해인사,비슬산 옥천사,금정산의 범어사,남악의 화엄사등이 이것이다. </p>
<p>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짓고 1승의 요점을 모두 실어 천년의 귀감이 되게 하였 </p>
<p>으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보배롭게 지녔다. 이 밖에는 달리 지은 것이 없지만, 온 </p>
<p>솥의 고기 맛을 알고자 하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한 것이다. </p>
<p>법계도는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선사도 입적했다. 이 </p>
<p>것은 마치 공자가 획린의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는 의상 </p>
<p>은 금산보개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는 오진,지통,표훈,진정,진장,도융,양원,상원 </p>
<p>능인,의적 등 10명의 대덕들이 영수가 되니, 그들은 모두 亞聖들이며 모두 전기가 있다. </p>
<p>오진은 일찍이 하가산 골암사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팔을 뻗쳐서 부석사의 석등에 </p>
<p>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를 지었는데,그는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문사가 </p>
<p>정묘한 지겨에 달했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살았으며,항상 천궁을 오고갔다. 의상 </p>
<p>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과 함게 탑을 돌았는데, 언제나 층계를 밟지 않고 허 </p>
<p>공을 밟고 올라갔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무리들도 층계에서 3척 </p>
<p>이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기 때문에 그 무리들을 돌아다 보며 의상이 말했다. </p>
<p>&#8220;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필시 괴이하다 할 것이니 가르기가 어렵다고 하겠다.&#8221; </p>
<p>이 나머지는 최치원이 지은 의상의 본전과 같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덤불 인진(絪塵) 무릅쓰고 바다 건너니, </p>
<p>지상사의 문 열려 귀한 손님 대접했네. </p>
<p>雜花를 采采(채취)하여 고국에 심었으니, </p>
<p>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이 봄빛일세. </p>
<p>번호:7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7 01:55 길이:44줄 </p>
<p>사복불언(蛇福不言-사복이 말하지 않다.) </p>
<p>서울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없이 아이를 배어 낳았는데 </p>
<p>그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도록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사동 </p>
<p>-아래에서는 혹 사복이라고도 하고, 또 사과,사복이라고 썼다. 이것은 모두 사동의 </p>
<p>이름이다.- 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효가 고선사에 있었 </p>
<p>는데 사복이 찾아왔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없이 말했 </p>
<p>다. </p>
<p>&#8220;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 </p>
<p>냄이 어떻겠는가?&#8221; </p>
<p>원효는 좋다고 하고 같이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 </p>
<p>(布薩-불교의식의 하나로 출가한 이에게 중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戒經을 들려주고 죄 </p>
<p>를 참회시켜 선을 기르고 악을 없애는 일)시켜 계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 </p>
<p>서 빌었다. </p>
<p>&#8220;세상에 나지 말 것이다. </p>
<p>그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 </p>
<p>죽지 말 것이니라. </p>
<p>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8221; </p>
<p>사복이 너무 길어 번거롭다고 하자 원효가 고쳐 말했다. </p>
<p>&#8220;죽는 것도 사는 것도 괴로움이로다.&#8221; </p>
<p>그리고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p>
<p>&#8220;지혜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냄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8221; </p>
<p>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읊었다. </p>
<p>그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p>
<p>사라수 사이에 열반하셨네. </p>
<p>그같은 이 지금 또 있어 </p>
<p>연화장 세계로 들려고 하네. </p>
<p>읊기를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한 세계가 있었고, </p>
<p>칠보로 장식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한데 아마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같았다. 사복이 시 </p>
<p>체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자 문득 땅이 합쳐졌다. </p>
<p>이것을 보고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p>
<p>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금강산의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장사라 </p>
<p>했다. 해마다 3월 14일이 되면 점찰회(占察會-점찰경에 의한 법회)를 여는 것을 항규 </p>
<p>(恒規)로 삼았다. 사복이 세사에 영검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뿐인데, 세간에서는 황 </p>
<p>당한 얘기를 덧붙엿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잠잠히 자는 용이 다 등한할까, </p>
<p>임종에 부른 한 곡 간단하기도 해라. </p>
<p>고통스러운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 어니, </p>
<p>연화장(蓮花藏) 세계 넓게 보이네. </p>
<p>번호:7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2 길이:86줄 </p>
<p>관동풍악발연수(關東楓岳鉢淵藪-강원도,금강산, 발연寺) 石記 </p>
<p>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출가할 </p>
<p>뜻을 가지니 아버지는 이를 허락했다. 율사는 금산수 순제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p>
<p>중이 되었다. 순제는 사미계법을 전해 주고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p>
<p>주며 말했다. </p>
<p>&#8220;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聖前에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 </p>
<p>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펴도록 하라.&#8221; </p>
<p>가르침을 받은 율사는 작별하고 물러나와 명산을 두루 다녔는데 나이 이미 27세 </p>
<p>가 되었다. 상원 원년 경자(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고 보안현에 가서 </p>
<p>변산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절이름)으로 들어갔다. 쌀 다섯 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p>
<p>삼고 그 중 한 홉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 </p>
<p>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授記(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알리는 일)를 얻지 못했다. 이 </p>
<p>에 발분하여 바위아래 몸을 던지니 문득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로 올려 놓았 </p>
<p>다. 율사는 다시 분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고 돌로 몸을 두 </p>
<p>드리면서 참회했더니 3일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이 되는 날 밤에 </p>
<p>지장보살이 손에 金杖을 흔들면서 나타나 그를 도와주니 손과 팔뚝이 다시 전과 같이 </p>
<p>되었다. 그에게 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p>
<p>더 정진했다. 21일이 다 되니 곧 天眼을 얻고 도솔천중(도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p>
<p>수 있었다. 이 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앞에 나타나더니 율사의 이마를 만지며 말했 </p>
<p>다. </p>
<p>&#8220;착하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기를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간절 </p>
<p>히 참회하는구나.&#8221; </p>
<p>지장은 戒本을 주고, 미륵이 또 목간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p>
<p>다른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쓰여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했다. </p>
<p>&#8220;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곧 始와 本의 두 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 </p>
<p>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鍾子)이다. 이것으로써 </p>
<p>마땅히 果報(인과응보)를 알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니라.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p>
<p>대궁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8221; </p>
<p>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곧 사라졌다. 때는 임인년 4월 27일이었다. </p>
<p>율사가 교법을 받은후에 금산사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도중에 대연 </p>
<p>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용왕이 나오더니 옥가사를 바치고 8만 眷屬(8만은 아주 많은 </p>
<p>수를 말하고, 권속은 처자등을 말함)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해서 금산수로 가니 사람들 </p>
<p>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며칠 내로 절이 완성되었다. </p>
<p>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오더니 율사에게 계법을 주 </p>
<p>었다. 이에 율사는 시주를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만들고 또한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 </p>
<p>법을 주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像은 갑진(764) 6월 9일에 완성하여 병오 </p>
<p>(766) 5월 1일에 금당에 모셔졌으니 이해가 대력 원년이다. </p>
<p>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향해 가다가 도중에서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p>
<p>만났다. 그런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탔던 사람 </p>
<p>이 내려와 물었다. </p>
<p>&#8220;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 </p>
<p>는 분입니까?&#8221; </p>
<p>&#8220;나는 금산수의 중 진표요,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서 미륵,지장 </p>
<p>보살 앞에서 계법진생(戒法眞생-증과 간자)을 받았으므로 절을 지어 오랫동안 불법을 </p>
<p>지키고 길이 수도할 곳을 찾으려고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나 </p>
<p>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받음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p>
<p>것입니다.&#8221; </p>
<p>이 말을 다 듣고 난 그 사람이 말했다. </p>
<p>&#8220;짐승도 이러한 信心이 있는데 저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8221; </p>
<p>그는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p>
<p>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다시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p>
<p>길상초가 있는 곳을 보고 표를 해두었다. 그들이 명주 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물 </p>
<p>고기며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으로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드니, </p>
<p>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고성군에 이르러 </p>
<p>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p>
<p>그 곳에 거주한지 7년만에 이 곳 명주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 </p>
<p>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들이 받들어 지켜 3보에 공경을 다했다. </p>
<p>이때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죽어서 밀려왔다. 이것을 팔아다 사람 </p>
<p>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p>
<p>율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 방에 도착했다. 그 뒤에는 고향으로 가사 </p>
<p>아버지도 찾아뵙고 혹은 진문대덕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 </p>
<p>대덕 융종,불타등이 율사를 찾아와 청했다. </p>
<p>&#8220;우리들은 불원천리 하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을 주시기 원합니다.&#8221; </p>
<p>율사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는지라, 세 사람은 복숭아 나무에 올라가 </p>
<p>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했다. 그러자 율사가 敎를 전하여 관정(灌頂) </p>
<p>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과 간자 189개를 </p>
<p>주었다. 다시 미륵진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하기를, </p>
<p>&#8220;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인데 내 이미 너희에게 </p>
<p>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가 난 곳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 </p>
<p>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 널리 펴도록 하라.&#8221; </p>
<p>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곧바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 </p>
<p>을 세우고 길상사라고 했다. 영심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p>
<p>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도업을 닦으며 끝까지 효도했다. 율 </p>
<p>사는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입적했다. </p>
<p>제자들이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니 비로소 </p>
<p>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내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났는데 세울이 오래 지나 </p>
<p>자 말라 죽었다. 다시 한 그루 났는데 뿌리는 하나지만 지금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p>
<p>있다. </p>
<p>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는 자도 있으 </p>
<p>나 얻지 못한 자도 있었다. 이에 나는 율사의 뼈가 아예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1 </p>
<p>197)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 속에 담았는데 세 홉 가량 되었다. </p>
<p>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 밑에 뼈를 모시고 돌을 세웠다고 했다. </p>
<p>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같지 않다. 때문에 영잠 </p>
<p>의 기록만 추려서 싣는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p>
<p>무극이 기록하였다. </p>
<p>번호:7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3 길이:32줄 </p>
<p>승전촉루(勝詮촉루 -촉루는 해골, 여기서는 石촉루) </p>
<p>중 승전의 내력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 </p>
<p>의 강석 아래서 현언(玄言-현묘한 말, 여기서는 불법을 말함)을 받아 정미(精微)한 것 </p>
<p>을 연구항 생각을 쌓으니, 보는 것이 슬기롭고 빼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내니 </p>
<p>그 묘함과 깊음을 구하는데 진력했다. 이에 그는 인연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으 </p>
<p>로 돌아올 생각을 하였다. </p>
<p>현수는 처음에 의상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p>
<p>스승의 학설에 대한 글의 뜻과 과목을 연술했다. 승전법사가 고향에 돌아갈때 글을 보 </p>
<p>냈는데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고 한다. 그 별폭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탐현기(探玄記)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미완성이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 </p>
<p>장등잡의 1권, 화엄범어 1권, 기신소 2권, 12문소 1권,법계무차별론소 1권을 모두 옮 </p>
<p>겨 썼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지난 번에 신라의 중 효충이 金 9分을 갖다주 </p>
<p>면서 上人(의상)께서 보낸 것이라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으나 고맙기 이를 데 </p>
<p>없습니다. 지금 서국의 군지조관(軍持조灌-중이 가지고 다니는 물병과 대야) 한 개를 </p>
<p>올려 작은 정성이나마 표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8221; </p>
<p>승전법사는 현수의 글을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의 이 글을 </p>
<p>대하자 마치 지엄의 가르침을 천히 듣는 것 같았다. 수십일 동안을 탐구 검토하여 제 </p>
<p>자들에게 주었으며 이 글을 널리 연술 시켰다. 이 말은 의사의 전기에 실려 있다. </p>
<p>살펴보면 이러하다. 이 원활하고 융통하는 가르침이 청구에 널리 펴진 것은 오로 </p>
<p>지 승전법사의 공로이다. 그 뒤에 중 범수가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이 번역된 후분 </p>
<p>화엄경, 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연술 했다고 한다. 이 때가 정원 </p>
<p>기묘(799)이었다. 이 또한 불법을 구해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고 하겠다. </p>
<p>승전은 상주 영내의 개녕군 경계에 절을 새로이 짓고 돌들을 관속(官屬)으로 여 </p>
<p>겨 화엄경을 개강했다. 그 후에 신라의 중 가귀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전등(傳 </p>
<p>燈-스승이 제자에게 교법을 전해주는 것)을 계속하더니 이에 심원장을 편찬했는데, 그 </p>
<p>대략을 보면 승전법사는 돌의 무리들과 더불어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하였다고 한다. </p>
<p>그 곳은 지금의 갈항사다. 그 염촉 80여매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 </p>
<p>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이 있었다. </p>
<p>그 밖의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 속에 있는 것과 </p>
<p>같다. </p>
<p>번호:7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5 길이:91줄 </p>
<p>진표전간(眞表傳簡) </p>
<p>중 진표는 완산주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는 길보랑이며 성은 井씨이 </p>
<p>다. 나이 12살 때에 금산사의 숭제법사의 강석 밑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배우 </p>
<p>기를 청했다.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p>
<p>&#8220;일찍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서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배운 뒤에 오대산에 들 </p>
<p>어가 문수보살 현신에게서 5계를 받았다.&#8221; </p>
<p>이에 진표가 아뢰었다. </p>
<p>&#8220;부지런히 수행하면 얼마나 되면 계를 얻게 됩니까?&#8221; </p>
<p>&#8220;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8221; </p>
<p>스승의 말을 들은 진표는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선계산 불사의암에 머물면서 </p>
<p>3업(신체의 동작과 언어 의지의 작업을 말함)을 닦아서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 </p>
<p>시키는 참회법)으로 계를 얻었다. 그는 처음 7일 밤을 정하여 5륜(두 무릎,두손,머리) </p>
<p>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낭떠러지로 피가 비오듯했다. 그래 </p>
<p>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정하였다. 14일이 </p>
<p>되는 날 마침내 지장보살을 뵙고 정계를 받았으니 바로 개원 28년 경진(740) 3월 15일 </p>
<p>진시요, 진표의 나이 이 때 23세였다. </p>
<p>그러나 그의 뜻은 자씨(慈氏-미륵보살)에게 있는지라 감히 중지하려 하지 않고 </p>
<p>영산사로 옮겨가서 또 처음처럼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했는데, 과연 미륵보살이 감 </p>
<p>응하여 나타나더니 점찰경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果, 간자는 점을 </p>
<p>치는 대쪽) 1백 89개를 주면서 말했다. </p>
<p>&#8220;이 가운데서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를 비유한 것이고, 제 9간자는 구족계를 </p>
<p>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과단향 </p>
<p>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이것들은 모두 번뇌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세 </p>
<p>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도록 하라.&#8221; </p>
<p>진표는 성별을 받자 금산사로 와서 살았으며 해마다 정성껏 단석(壇席)을 열어 </p>
<p>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함이 이 말세에는 일찍이 볼 수 </p>
<p>없었던 일이었다. 풍교(風敎)와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아 </p>
<p>슬라주에 이르렀다.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 속으로 그르 맞아들 </p>
<p>였으므로 진표가 이 곳에서 불법을 강의하니 그 물고기와 자라들까지도 계를 받았다. </p>
<p>그때가 곧 천보 11년 임진(752) 2월 15일이었다. 어던 책에서는 원화 6년(811)이라 했 </p>
<p>는데 잘못이다. 원화는 헌덕왕 때이다.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 </p>
<p>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만7천석을 내렸다. 초정(椒庭-왕후의 대궐)과 열악(列岳-왕 </p>
<p>의 외척)들도 모두 계품을 받았으며, 비단 5백단과 황금 50냥을 보시했다. </p>
<p>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다가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 </p>
<p>는 지금도 발연사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하여 계를 주던 곳이다. </p>
<p>그의 제자 가운데 불법을 얻은 영수로는 영심,보종,신방,체진,진해,진선,석충등 </p>
<p>이 있으며 모두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바로 간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 </p>
<p>에 살면서 진표의 법통을 계승한 제자인데, 그 단을 만드는 법은 점찰 6윤과는 약간 </p>
<p>다르나 수행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와 같았다. </p>
<p>당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개황 13년(593) 광주(광동)에 참법을 행하는 중이 </p>
<p>있었는데, 가죽으로 첩자 두 장을 만들고 선과 악 두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해 </p>
<p>서 善字를 얻는 자는 길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가 박참법(撲懺法-육신을 학대하 </p>
<p>는참회법)을 행하여 지은 죄을 없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함 </p>
<p>부로 그 법을 받아들여 비밀하게 행하니 이 일이 청주(산동성의 동쪽지역)에까지 알려 </p>
<p>졌다. 동행했던 官司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그들이 말했다. </p>
<p>&#8220;이 탑참법(搭懺法-위의 선과 악 두글자를 던져 선자를 얻으면 길하다는 참회법) </p>
<p>은 점찰경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에 있는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오쳰흽지하 </p>
<p>여 마치 온 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한다.&#8221; </p>
<p>그때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는 내사시랑 이원찬을 시켜 대응사로 가서 여러 대덕 </p>
<p>들에게 묻게 했다. 대사문 법경과 언종 등이 대답했다. </p>
<p>&#8220;점찰경은 두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책머리에 보제 등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 </p>
<p>라고 했으니 근래에 나온 것 같습니다.&#8221; </p>
<p>그리고 사본으로 전해 오는 것도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어느 곳에 </p>
<p>도 올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 시일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은 여러가지 </p>
<p>경과는 다르므로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8221; </p>
<p>이리하여 칙령으로 이것을 금지시켯다. </p>
<p>이제 이것을 시험삼아 논해본다. 청주거사, 탑참 등의 일은 마치 대유가 시서발 </p>
<p>총(詩書發塚-말세의 유학자가 학문을 빙자 악용하여 무덤을 파는 악행까지 행한다고 </p>
<p>풍자한 것)하는 것과 같으므로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가 되었다.> 고 할수 </p>
<p>있으니, 불타가 미리 방비한 것도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을 번역한 사람 </p>
<p>이나 그 시일과 장소가 없다고 하여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 또한 삼(麻)을 취하기 </p>
<p>위하여 금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단(悉 </p>
<p>壇-부처님이 중생을 교화시키는 방법)이 길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p>
<p>깨끗이 씻어주고 게으른 자를 격앙시킴이 이 경전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p>
<p>대승참이라 했다. 또한 6근(六根)이 모인 가운데서 나왔다고도 했다. 개원,정원에 나 </p>
<p>온 두 석교록 속에는 정장으로 편입되었으니 비록 性宗은 아니나, 그 상교(相敎-법상 </p>
<p>종)의 대승으로는 또한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이나 박참의 두 참과 함께 말할 수 </p>
<p>있겠는가. 사리불문경에는 불타가 長者의 아들 빈야다라에게 말했다. </p>
<p>&#8220;네가 7일낮 7일밤 동안에 너의 전죄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8221; </p>
<p>다라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정성껏 밤낮으로 행하니 제 5일 저녁이 되자 그 방안 </p>
<p>의 여러 가지 물건이 비오듯이 내리더니, 수건,把,총채,빗자루,칼,송곳,도끼와 같은 </p>
<p>물건들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다라가 기뻐하며 부처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 </p>
<p>답했다. </p>
<p>&#8220;이것은 네가 물욕을 벗어날 징조니라, 모두 베고 쓸고 터는 물건이다.&#8221; </p>
<p>이 말에 따르면 점찰경에서 輪을 던져 相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 </p>
<p>으로 진표공이 참회를 일으켜서 간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것이 허망한 일이 </p>
<p>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해서 미륵 </p>
<p>보살이 진표 스님에게 친히 전수했겠는가? 만일 이 경을 금한다면 사리불문경도 또한 </p>
<p>금할 것인가? 언종의 무리야말로 확금불견인(攫金不見人-남의 금을 훔칠때 금만 보이 </p>
<p>고 사람은 보이지 않음)이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p>
<p>이기어 읊도다. </p>
<p>요계에 현신해서 용롱를 일깨우니 </p>
<p>영악과 선계에 감응해서 통했네 </p>
<p>정성 다해 탑참전했다 말하지 말라, </p>
<p>동해에 다리를 놓은 어룡도 감화하였네. </p>
<p>번호:7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7 길이:67줄 </p>
<p>심지계조(心地繼祖-심지가 진표조사의 뒤를 계승함) </p>
<p>중 심지는 진한(신라를 말함) 제 41대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 </p>
<p>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지학지년(志學之年-학문에 뜻을 둔 15세) </p>
<p>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불도에 근면히 임했다. 중악(中岳-팔공산)에 가서 살고 </p>
<p>있엇는데, 마침 속리산에 있는 심공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과정(果訂)법 </p>
<p>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뜻을 세우고 찾아 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난 뒤여서 참례를 </p>
<p>허락 받지 못하였다. </p>
<p>이에 땅에 앉아 마당을 치면서 여러 무리들과 함께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 </p>
<p>나자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러나 심지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휘날리면서도 </p>
<p>내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신기하고 이상스러움을 보았다. 堂에 들어오기를 </p>
<p>허락했으나 사양하고 거짓 병을 핑게하고 방안으로 물러앉아 당을 향하여 조용히 예배 </p>
<p>했다. </p>
<p>그러자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이 일찍이 선계산에 </p>
<p>서 피를 흘리던 때와 같았다. 그리고 매일 지장보살이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자 </p>
<p>산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보니 옷깃 사이에 두개의 간자가 끼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p>
<p>가지고 돌아와 심공에게 아뢰니 영심이 말했다. </p>
<p>&#8220;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8221; </p>
<p>하고 검사해 보니 함은 그대로 봉해 있었다. 그러나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p>
<p>심공이 심히 이상히 여겨 간자를 다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 </p>
<p>는데간자가 또 옷깃 속에 있었다. 다시 돌아와 아뢰니 심공이 이렇게 말하며 간자를 </p>
<p>그에게 주었다. </p>
<p>&#8220;부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8221; </p>
<p>심지가 간자를 받아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仙子 둘을 데리고 </p>
<p>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더니 그를 인도하여 바위위에 앉게했다. 그는 바위 밑으로 내 </p>
<p>려가 엎드려서 삼가 正戒를 받았다. 심지가 말했다. </p>
<p>&#8220;이제 땅을 가려서 간자를 모시고자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 만으로 정할 일이 아 </p>
<p>니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쳐 보기로 하자.&#8221; </p>
<p>하여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자, 간자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 </p>
<p>이었다. 이 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p>
<p>막혔던 바위 저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p>
<p>낙엽이 날아 흩어지므로 앞길이 밝아지네. </p>
<p>불골(佛) 간자를 구해 얻어서, </p>
<p>정결한 곳 찾아 정성 드려 바치네. </p>
<p>노래부르기를 마치고 간자를 숲 속 샘에서 찾았다. 곧 그 곳에 당을 짓고 간자를 </p>
<p>모셨는데, 지금의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p>
<p>본조 예종이 일찍이 부처님의 간자르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예배했는데, 문득 아 </p>
<p>홉번째 간자 하나를 잃고 대신 牙簡으로 본사에 돌려 보냈다. 이것이 점점 변하여서 </p>
<p>지금은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가리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牙도 아니 </p>
<p>고 玉도 아니다. </p>
<p>점찰경 상권을 살펴보면 189개 간자의 이름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p>
<p>1은 上乘을 구해서 不退二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果가 마땅한 證을 보이는 </p>
<p>것이며,제 3과 제 4과는 中下乘을 구해서 不退位를 얻은 것이고, 5는 신통력을 구해서 </p>
<p>성취함이다. 6은 4梵을 구해서 성취하는 것이요,7은 世禪을 닦아 성취함이라, 8은 받 </p>
<p>고 싶은 妙戒를 얻는 것이요, 9는 일찍이 받은 具戒를 다시 얻음이고 10은 下乘을 구 </p>
<p>하며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p>
<p>다음은 中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렇게 하여 제 172까지는 모 </p>
<p>두 과거세나 현세 사이에 착하기도 하고 혹 악하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혹은 잃기도 </p>
<p>한 일들이다. 제 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 제 174는 죽은 후에 축생( </p>
<p>畜生)이 이래서 아귀,수라,인,인왕,천,천왕,문법,출가,성승을 만나 보는 것, 도솔천에 </p>
<p>나는 것, 정토에 태어남,부처를 찾아뵙,하승에 사는것,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p>
<p>득해탈의 제 189 등이 이것이다. 이들은 모두 3世의 선악과보의 차별의 모습이다. </p>
<p>이것으로 점 쳐보고 내 마음이 행하고자 하는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하고 </p>
<p>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라고 한다. 그렇다면 </p>
<p>이 8과 9의 두 간자는 다만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宋傳에는 이르기를 </p>
<p>단지 108첨자라고만 했는데 어찌된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p>
<p>듯하다. 그리고 또 경문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것 같다. </p>
<p>또 살펴보건대, 본조 문사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 2권에 신라 말기의 대덕 석충 </p>
<p>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 189개를 드렸다고 쓰여있다. 이것 </p>
<p>이 지금 동화사에 전해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금규(金閨)에 자라나서 속박을 일찍 벗고, </p>
<p>근검 총명함은 하늘이 주었네 </p>
<p>눈 쌓인 뜰에서 간자를 뽑아, </p>
<p>동화산 최상봉에 갖다 놓았네. </p>
<p>번호:7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8 길이:55줄 </p>
<p>현유가(賢瑜伽), 해화엄(海華嚴) </p>
<p>유가종의 조사인 고승 대현은 남산 용장사에 살고 있었다. 그 절에는 돌로 만든 </p>
<p>미륵보살의 장육상이 있었다. 대현은 항상 이 장육상을 돌았는데, 이 장육상도 역시 </p>
<p>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함과 분별 </p>
<p>함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의 전량은 드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으므로 해석이 매우 </p>
<p>어렵다. 그러므로 중국의 명사 백거이도 일찍이 이것을 연구하다가 다 알지는 못했었 </p>
<p>다고 그는 말했다. </p>
<p>유식(唯識)은 그 뜻이 그윽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인명(因明-인도의 논리학)은 쪼 </p>
<p>개도 열리지 않는다.) </p>
<p>이 때문에 학자들이 배우고 깨우쳐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진이는 혼자 </p>
<p>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짧은 시일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터득하여 회회유인(자 </p>
<p>유로이 칼을 놀림. 모든 사리에 통달하여 쉽게 이치를 분석하는 모양)하였다. 이리하 </p>
<p>여 동국의 후진들 모두가 이 가르침에 따랏고, 중국의 학사들도 간혹 이것을 얻어 안 </p>
<p>목(眼目)으로 삼았다. </p>
<p>경덕왕 때인 천보 12년 계사(753) 여름에 가뭄이 심했다. 이에 대현을 내전으로 </p>
<p>들여 금광경을 강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하루는 재를 드리는대 바리때를 벌려놓고 정 </p>
<p>수 올리기를 가다렸지만, 공양하는 이가 정수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가 꾸짖으니 공양 </p>
<p>하는 자가 말했다. </p>
<p>&#8220;대궐 안의 우물은 말라버렸기 때문에 먼 곳까지 가서 또오느라고 늦었습니다.&#8221; </p>
<p>그 말을 듣자 대현이 말했다. </p>
<p>&#8220;왜 진작 이르지 않았는가?&#8221; </p>
<p>낮에 경을 강할 때 대현이 향로를 받들고 묵묵히 있었더니 잠시 후에 우물물이 </p>
<p>솟아오르는데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절에 세우는 장대)과 높이가 같 </p>
<p>게 되었다. 이에 궁중에서 모두 놀라워 했으며 이 우물을 금광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p>
<p>대현은 일찍이 스스로를 청구사문이라 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도 또한 따라서 돌더니 </p>
<p>청구의 불교가 다시 중천에 이뤘네 </p>
<p>宮井의 맑은 물 솟아오르니 </p>
<p>향로의 한 줄기 香烟인 것 그 누가 알리 </p>
<p>그 이듬해 갑오(754) 여름 왕은 또 고승 법해를 황룡사로 청해 화엄경을 강하게 </p>
<p>하고, 친히 나아가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하기를, </p>
<p>&#8220;지난해 여름, 대현법사는 금광경을 강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구치게 하였 </p>
<p>는데, 스님의 법도는 어떠하오?&#8221; </p>
<p>&#8220;그것은 극히 작은 일이온데 무얼 그다지 칭찬하시옵니까? 이제 창해를 기울여 </p>
<p>동악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8221; </p>
<p>그러나 왕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p>
<p>있노라니 잠시 후에 궁중에서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가 달려오더니 고하기를, </p>
<p>&#8220;동쪽 연못이 넘쳐서 이미 내전 50여간이 떠내려 갔습니다.&#8221; </p>
<p>왕이 놀라 망연자실하므로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p>
<p>&#8220;동해를 기울이고자 먼저 수맥을 불린 것 뿐입니다.&#8221; </p>
<p>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더니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에서 아뢰었다. </p>
<p>&#8220;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쳐서 불전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 때 물러갔습 </p>
<p>니다.&#8221; </p>
<p>이 일로 하여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법해의 물결을 보니 법계를 보는 것 같구나, </p>
<p>四海를 늘이고 줄임도 어렵지 않네. </p>
<p>높은 수미(須彌) 크다고 말하지 말라. </p>
<p>모두가 우리 스님 손 끝에 있네 </p>
<p>번호:8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30 10:18 길이:60줄 </p>
<p>삼국유사 제 5 권 </p>
<p>신주(神呪) 제 6 </p>
<p>밀본최사(密本催邪-밀본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침) </p>
<p>선덕왕 덕만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다. 홍륜사의 중 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p>
<p>병을 치료했지만 오래되어도 효험이 없었다. 이 때 밀본법사가 덕행이 나라 안에 소문 </p>
<p>나 있었으므로 좌우 신하들이 왕께 법척을 밀본법사와 바꾸기를 청했다. 왕이 그를 궁 </p>
<p>안으로 불러 맞이했다. 밀본은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 읽기를 지극히 하더니, 가지 </p>
<p>고 있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서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을 찔러 뜰 </p>
<p>아래로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 때 밀본의 이마 위로 오색의 신비 </p>
<p>스러운 빛이 비치니, 보는 사람이 보두 몰랬다. </p>
<p>또 승상 김양도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 말도 못하고 수족도 </p>
<p>움직이지 못했다. 김양도가 보면 항상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거느리고 와서 집 </p>
<p>안에 있는 모든 음식을 맛보는 것이었다.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떼지어 온 귀신 </p>
<p>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모욕했다. 양도가 귀신들을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싶었지만 입이 </p>
<p>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도의 아버지가 법류사의 중을 청해 와서 불경을 읽게 했 </p>
<p>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중의 머리를 때려 넘어뜨리자 중은 피 </p>
<p>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뒤 사자를 보내어 밀본을 찾아오게 하니 사자가 돌아와서 말 </p>
<p>했다. </p>
<p>&#8220;밀본법사께서 우리 청을 받아들여 오시겠다고 했습니다.&#8221; </p>
<p>여러 귀신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p>
<p>&#8220;법사가 오면 불리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8221; </p>
<p>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p>
<p>&#8220;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8221; </p>
<p>조금 후에 사방에서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한 대력신이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 </p>
<p>들을 잡아 묶어가지고 갔다. 그러더니 수많은 천신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후에 </p>
<p>밀본이 도착하였는데, 그가 경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다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p>
<p>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그는 지나간 일을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이 있은 </p>
<p>후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고 독실히 불교를 믿었다. 홍륜사 오당(吳堂-법당)의 주불인 </p>
<p>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을 소상으로 만들고 또 그 당안에 금빛으로 벽화를 그렸다. </p>
<p>밀본은 일찍이 금곡사에서 살았다. 또 김유신은 늙은 거사 한 분과 교분이 두터 </p>
<p>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유신공의 친척인 수천이 나 </p>
<p>쁜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공이 거사를 보내 진찰해 보도록 했다. 때마침 </p>
<p>수천의 친구 인혜사가 중악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겨 말했다. </p>
<p>&#8220;그대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남의 병을 고치 </p>
<p>겠는가?&#8221; </p>
<p>그러자 거사는 말했다. </p>
<p>&#8220;나는 김공의 명을 받고 마지 못해 왔을 뿐이오.&#8221; </p>
<p>인혜가 말했다. </p>
<p>&#8220;그대는 내 신통력을 좀 보아라.&#8221; </p>
<p>그리고는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는 주문을 외었다. 이윽고 오색 구름이 이마 </p>
<p>위를 둘러싸고 天花가 흩어져 날렸다. </p>
<p>거사는 말했다. </p>
<p>&#8220;스님의 신통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저에게도 역시 변변치 못하나마 재주 </p>
<p>가 있으니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잠깐만 제 앞에서 계십시오.&#8221; </p>
<p>인혜는 그의 말에 따랐다. 거사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기자 인혜는 공중으로 거꾸로 올 </p>
<p>라가는데 그 높이가 한 길이나 되었다. 한참 후에야 천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 </p>
<p>에 박혀 말뚝처럼 우뚝 섰다. </p>
<p>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밀고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사가 그 곳에 </p>
<p>서 나가므로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 밤을 세웠다. 이튿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 </p>
<p>을 알리자, 김공은 거사에게 가서 인혜를 풀어주게 했다. 그후 인혜는 다시는 재주를 </p>
<p>부리는 체 하지 않았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홍자(紅紫)가 분분해 자꾸만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니, </p>
<p>슬프다, 어목(魚目-물고기의 눈은 구슬같지만 실제 구슬은 아님)도 어리석은 </p>
<p>사람 속였구나. </p>
<p>거사가 손가락 가볍게 튀긴일 없었다면, </p>
<p>건상(巾箱-상자)속에 무부(옥과 비슷하나 옥이 아닌 돌)를 얼마나 담았을까. </p>
<p>번호:8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30 12:02 길이:97줄 </p>
<p>혜통항룡(惠通降龍) </p>
<p>중 혜통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다. 白衣(속인)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p>
<p>서쪽 기슭 은천동 동구에 있었다. 하루는 집 동쪽의 시내에서 놀다가 한 마리의 수달 </p>
<p>을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안에 버렸다. </p>
<p>그런데 그 이튿날 새벽에 가보니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 </p>
<p>았더니, 뼈가 자기가 살던 본래의 굴속으로 되돌아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안고 쭈그리 </p>
<p>고 있었다. 혜통은 그것을 바라보고 한참동안 놀라와하고 이상히 여겼다. 감탄하고 망 </p>
<p>설이던 끝에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고 고쳤다. </p>
<p>당나라로 가서 무외삼장을 찾아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은 말했다. </p>
<p>&#8220;우이(隅夷-신라)의 사람이 어찌 法器가 될 수 있으랴.&#8221; </p>
<p>하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p>
<p>좇았다. 그래도 무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혜통은 분하고 얘가 타서 뜰에 서서 </p>
<p>불(火)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지는데 우뢰와 같은 소리가 </p>
<p>났다. 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더니 불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 </p>
<p>지며 神呪를 외우니 상처가 아물어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王자 무늬와 같은 흉터 </p>
<p>가 생겨졌다. 이로 말미암아 왕화상이라 불렀으며, 그의 깊은 인품을 인정하여 삼장은 </p>
<p>그에게 인결(印訣-이심전심하는 心法의 비결)을 전해 주었다. </p>
<p>이 때 당나라 황실에서 공주가 병이 나서 고종은 삼장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자 </p>
<p>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명령을 받고 다른 곳에 거처하면서 흰 콩 </p>
<p>한 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자, 그 콩이 변해서 흰 갑옷 입은 神兵이 되어 병 </p>
<p>마들을 쫓으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넣고 주 </p>
<p>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 검은색과 흰색의 신병이 합하여 병마를 </p>
<p>쫓으니 마침내 교룡(蛟龍)이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p>
<p>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본국 문잉림으로 가서 인명을 몹시 해 </p>
<p>쳤다. 그 때 정공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혜통을 만나 말했다. </p>
<p>&#8220;스님이 쫓아낸 독룡이 본국으로 와서 해가 심하니 속히 가서 독룡을 없애 주십 </p>
<p>시오.&#8221; </p>
<p>이에 혜통은 정공과 함께 인덕 2년 을축(665)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용을 쫓아버 </p>
<p>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하여 정공의 문 밖에 나서 자 </p>
<p>랐다. 정공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아꼈었다. 신문 </p>
<p>왕이 세상을 뜨자, 효소왕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임금의 무덤)을 닦고 장례길을 트는 </p>
<p>데 정공집의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으므로 유사가 버드나무를 베려했다. 정 </p>
<p>공은 노해 말하기를, </p>
<p>&#8220;차라리 내 머리를 베었지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8221; </p>
<p>유사가 이 말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은 몹시 노해 사구에게 명령했다. </p>
<p>&#8220;정공이 왕화상의 신술을 믿고 장차 불손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거스리며 </p>
<p>제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제가 원하는대로 해주어야 할 것이다.&#8221; </p>
<p>이리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집을 흙으로 묻어 버렸다. 그리고 조정에서 논 </p>
<p>의했다. </p>
<p>&#8220;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였으므로 반드시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땅 </p>
<p>히 그를 먼저 도모해야 합니다.&#8221; </p>
<p>이에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그를 잡게 했다. </p>
<p>혜통은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는 지붕 위로 올라가 </p>
<p>사기병과 붉은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외쳤다. </p>
<p>&#8220;내가 하는 것을 보라.&#8221; </p>
<p>하고 병목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말했다. </p>
<p>&#8220;너희들 목을 보아라.&#8221; </p>
<p>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서로 쳐다보며 놀랐다. 혜 </p>
<p>통은 또 소리쳤다. </p>
<p>&#8220;만약 내가 이 병 목을 자르면 너희들 목도 잘라질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8221; </p>
<p>병사들은 궁궐로 돌아가 붉은 획이 그어진 목을 임금에게 보이며 사실을 아뢰니 </p>
<p>임금은 말했다. </p>
<p>&#8220;화상의 신통력을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겠느냐.&#8221; </p>
<p>하며 내버려 두었다. </p>
<p>왕녀에게 갑자기 병이 났다. 임금이 혜통을 불러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다. </p>
<p>임금은 크게 기뻐했다. </p>
<p>그러자 혜통은 말했다. </p>
<p>&#8220;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 억울하게 나라의 형벌을 받았습니다.&#8221; </p>
<p>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뉘우쳐서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해 주고, 혜 </p>
<p>통은 국사로 삼았다. </p>
<p>용은 정공에게 원수를 갚고 나자 기장산으로 갔다. 거기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 </p>
<p>독을 끼침이 더욱 심하니 백성들이 몹시 괴로와했다. 혜통은 그 산속에 들어가 용을 </p>
<p>달래고 부살계(不殺戒)를 가르치니 웅신의 해가 그제야 그치었다. </p>
<p>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해 그가 와서 주문을 외 </p>
<p>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p>
<p>그러자 혜통은 말했다. </p>
<p>&#8220;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서 장인(藏人- 양민을 말함) 신충이란 자를 잘 </p>
<p>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어 윤회환생할 때마다 보복하옵니 </p>
<p>다. 지금 이 등창 또한 신충의 탓입니다. 마땅히 신충을 위해 절을 세우시고 명복을 </p>
<p>빌어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8221; </p>
<p>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했다. 절이 다 완성되 </p>
<p>자 하늘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p>
<p>&#8216;임금이 절을 세워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p>
<p>이미 풀렸습니다.&#8217; </p>
<p>또 노래소리 나는 곳에서는 절원당을 지었는데 그 당과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p>
<p>이보다 먼저 밀본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있었다. 용궁에 들어가 神印을 얻어 </p>
<p>신유림을 처음 세우고 여러번 이웃 나라가 쳐들어 오는 것을 기도로써 물리쳤다. 이에 </p>
<p>화상은 무외삼장의 중심 골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 </p>
<p>을 감화시켰다. 또 숙명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를 풀게 해주니 밀교(진언밀교) </p>
<p>의 교풍이 그 때에 크게 떨쳤다. </p>
<p>천마산 총지암과 모악의 주석원등이 모두 거기에서 갈라나온 것이다. </p>
<p>어떤 사람은 혜통의 속세 이름을 존승각간이라 한다. 각간은 곧 신라의 재상이다. </p>
<p>그러나 혜통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 </p>
<p>아 잡았다 하나,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치는데, </p>
<p>한 지경 봄 깊어 두 언덕에 꽃이 피네. </p>
<p>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음으로, </p>
<p>마외(魔外)를 가르쳐 서울에서 멀리했네. </p>
<p>번호:8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30 12:03 길이:40줄 </p>
<p>명랑신인(明朗神印-명랑법사의 신인종) </p>
<p>금광사 본기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p>
<p>법사 명랑이 신라에 정생(挺生- 태어남)하여 당나라로 건너마 도를 배우고 돌아 </p>
<p>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하고, 황금 천량을 보시받 </p>
<p>아 몰래 땅 밑으로 와서 자기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어 자기집을 희사해서 절 </p>
<p>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했는데 광채가 빼어나게 빛났다. </p>
<p>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라 했다. </p>
<p>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이며, 신라의 사간 재량의 아들이다. 어머니 </p>
<p>는 남간부인이며 혹 법승량이라고도 하는데, 소판 무림의 딸 김씨로서, 즉 자장의 누 </p>
<p>이동생이다. 재량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국교 대덕이요, 그 다음은 의안 </p>
<p>대덕이요, 법사는 그 막내아들이었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푸른빛 나는 구슬을 입에 </p>
<p>삼키는 꿈을 꾸고서 태기가 있었다. </p>
<p>신라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 을미(635)에 본국으로 </p>
<p>돌아왔다. </p>
<p>총장 원년 무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p>
<p>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그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게 하고 장차 신라를 쳐 멸망시 </p>
<p>키려고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이 이 </p>
<p>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설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 </p>
<p>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p>
<p>이로 인해서 그는 신인종의 시조가 되었다. </p>
<p>우리 태조(왕건)가 나라를 세울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했으므로 이에 안혜,낭 </p>
<p>융의 후예인 광학,대연 두 고승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시켰는데 </p>
<p>이들은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런 연유로 법사를 합하여 위로 인도의 고승 용수에 </p>
<p>이르기까지를 9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그들을 위해 현성사를 세워 한 종파의 근거로 </p>
<p>삼았다. </p>
<p>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리 되는 곳에 원원사란 절이 있는데 세간에는 이렇게 </p>
<p>전한다. </p>
<p>&#8216;이 절은 안혜 등 4대덕이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 </p>
<p>며, 4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8217; </p>
<p>그렇다면 4대덕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고 하겠다. </p>
<p>돌백사 주첩주각에 쓰여 있는 것을 상고해 보면 이렇다. 경주 호장 거천의 어머 </p>
<p>니는 아지녀이고 이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의 아들 </p>
<p>은 광학 대덕과 대연 삼중이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신인종에 귀의했다. 장흥 2년 신 </p>
<p>묘(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 수도하니, 태조 </p>
<p>는 그 노고를 포상하여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기일의 제사와 공양을 위한 보)로 전 </p>
<p>답 몇 결을 돌백사에 주었다. </p>
<p>그렇다면 광학 대연 두 사람은 성조(태조)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안혜 </p>
<p>법사)등은 김유신과 더불어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광학 등 두 사람 </p>
<p>의 뼈는 여기에 와서 안치되었을 뿐이며, 4대덕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거나, 모두 성 </p>
<p>조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p>
<p>번호:8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2 01:29 길이:53줄 </p>
<p>감통(感通) 제 7 </p>
<p>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선도성모가 불교를 좋아함) </p>
<p>진평왕 때에 지혜란 이름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홍사에 살 </p>
<p>았는데, 불전을 새로이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런 어느 날 꿈 속에 구슬로 </p>
<p>머리를 장식한 아름다운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p>
<p>&#8220;내가 바로 선도산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이 기쁘므로 금 </p>
<p>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존 삼상(三像)을 장 </p>
<p>식하고 벽 위에는 53불 육류성중 및 모든 천신과 5악의 신군(神君)을 그리고 해마다 </p>
<p>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 </p>
<p>법회를 베풀므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8221; </p>
<p>지혜가 놀라 깨어나 무리를 데리고 신사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백60냥을 파내어 </p>
<p>불전 수리를 완성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모가 이르는 대로 따랐던 때문이다. 그러나 </p>
<p>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는 폐지되었다. </p>
<p>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 </p>
<p>워 신라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은 편지를 소리개의 발에 </p>
<p>매달아 그에게 보냈다. </p>
<p>&#8216;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8217; </p>
<p>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날려보내자, 이 선도산에 날아와 멈추므로 마침내 </p>
<p>그 곳에서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했다. 신모는 </p>
<p>오랫동안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를 진호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p>
<p>그러므로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 </p>
<p>제(望祭)의 위에 있게 하였다. </p>
<p>제 54대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겨 했는데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p>
<p>잃어버렸다. 이것 때문에 신모에게 기도했다. </p>
<p>&#8216;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8217; </p>
<p>얼마 안되어 매가 날아와서 걸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으로 봉작하였다. 그 </p>
<p>가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 </p>
<p>두 성군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이 </p>
<p>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p>
<p>빛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신비스 </p>
<p>러운 영검을 알게 되었다. </p>
<p>또 국사에 보면 사신이 말하기를, </p>
<p>김부식이 정화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에 나갔더니 한 </p>
<p>堂에 여선(女仙)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p>
<p>&#8220;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8221; </p>
<p>했다. 이어서 말하기를 </p>
<p>&#8220;옛날에 어던 중국 제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 </p>
<p>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습니다. 이것이 </p>
<p>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8221; </p>
<p>라고 했다. </p>
<p>또 송나라 사신 왕양은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를 제사지낼 때 그 제문에 <어 </p>
<p>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p>
<p>불타를 만들게 하고, 중생을 위하여 향화법회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다. 어찌 다 </p>
<p>만 오래 사는 술법만을 배워 저 아득한 것에만 얽매일 것이냐. </p>
<p>기리어 읊는다. </p>
<p>서연산에 온 지가 몇 십년가, </p>
<p>천제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신선의 옷)을 짰네. </p>
<p>길이 사는 것 이상할 리 없지는 않지만, </p>
<p>금선(金仙-부처)을 뵙고 옥황이 되었네라. </p>
<p>번호:8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2 01:30 길이:51줄 </p>
<p>욱면비 염불서승(郁面婢 念佛西昇-계집종 욱면이 염불하다 서쪽으로 가서 </p>
<p>하늘로 올라감) </p>
<p>경덕왕 때 강주의 남자 신자 수십명이 서방정토를 정성껏 구하여 주의 경계에 미 </p>
<p>타사란 절을 세우고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그 때 아간 귀진의 집 </p>
<p>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욱면이라 불렀다. 욱면은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 마당에 </p>
<p>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녀가 자신의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못 </p>
<p>마땅히 여겨 곡식 두 섬을 하룻밤 동안에 다 찧게 했는데,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p>
<p>놓고 절에 가서 염불했으며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p>
<p>그녀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위에 </p>
<p>매고는 합장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신을 스스로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p>
<p>&#8216;욱면랑은 堂에 들어가 염불하라.&#8217; </p>
<p>는 소리가 들렸다. </p>
<p>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정진하게 했 </p>
<p>다. 그러자 미구에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은 몸이 솟구쳐 집 </p>
<p>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로 가더니 해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 </p>
<p>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오랫동안 하늘에서 그치 </p>
<p>지 않았다. 그 당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 </p>
<p>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동량 팔진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무리들을 모으 </p>
<p>니 천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하고, 한패는 정성껏 도를 </p>
<p>닦았다. 그 노력하던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 </p>
<p>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일찍이 소가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p>
<p>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했다. 욱면은 일이 있어 하 </p>
<p>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을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 </p>
<p>사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햇으므로 </p>
<p>계집종인 욱면도 따라갔고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p>
<p>이와 같이 9년 동안을 했는데, 을미년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 </p>
<p>들보를 뚫고 올라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 곳에 보리사 </p>
<p>란 절을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 곳에는 제2보리사를 지었다 </p>
<p>그 전당에는 표시하기를 욱면등천지전이라 했다. 집 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p>
<p>되었는데도, 폭우나 세찬 눈이 아무리 내려도 집안이 젖지 않았다. </p>
<p>후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 1좌를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위에 모시고 </p>
<p>그 이적(異跡)을 기록했는데, 지금도 그 방과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p>
<p>욱면이 간 후 귀진도 또한 그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하여, </p>
<p>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어 이름을 법왕사라 했으며 전민(田民)을 바쳤다. 오랜 후 절은 </p>
<p>허물어져 쓸쓸한 빈터가 되었다. 후에 대사 희경이 승선,유석,소경,이원장과 함께 발 </p>
<p>원하여 절을 중건하였는데, 이 때 희경이 친히 토목공사를 맡았다. 재목을 처음 운반 </p>
<p>하던 날 희경의 꿈에 노부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례씩 주었 </p>
<p>다. 또 희경은 옛 신사 옆 재목을 베어다가 5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까지 더하 </p>
<p>여 이 절은 매우 융성해졌으며 이 후 동남지방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희 </p>
<p>경을 일컬어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p>
<p>논평하여 본다. 고을 안의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경덕왕 시대의 사실이다 </p>
<p>징(徵)의 본전에 따르면 원화 3년 무자(808) 애장왕 때의 일이라 했다. 경덕왕 이 후 </p>
<p>에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년이나 된다. 귀 </p>
<p>징이 먼저가 되고 욱면이 뒤가 되므로 그 차례가 향전과 어긋난다. 여기에다 이 두 가 </p>
<p>자를 다 실어 의심을 없앤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서편 이웃 옛 절에는 불등 밝은데 </p>
<p>방아 찧고 갔다 오면 밤은 깊어 이경이네. </p>
<p>한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어지고, </p>
<p>손바닥 끈을 꿰니 그 몸 바로 잊음이네. </p>
<p>번호:8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3 00:22 길이:39줄 </p>
<p>광덕과 엄장 </p>
<p>문무왕 때에 중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했다. </p>
<p>&#8220;먼저 안양으로 돌아가는 이는 마땅히 서로 알리도록 하자.&#8221; </p>
<p>광덕은 분황 서리에 숨어서 신 삼는 것을 업으로 하면서 처자와 함께 살았으며, </p>
<p>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대종도경(大種刀耕)하면서 살았다. </p>
<p>어느 날 해그림자가 붉게 노을지고 솔그늘이 고요히 저무는데 창 밖에서 소리가 </p>
<p>들렸다. </p>
<p>&#8216;나는 이제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지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8217; </p>
<p>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은 </p>
<p>땅까지 드리웠다.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 </p>
<p>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광덕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지냈다. 그리고 그 부 </p>
<p>인에게 말했다. </p>
<p>&#8220;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8221; </p>
<p>광덕의 아내가 승낙하므로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밤에 잘때 관계하려 하니 그 </p>
<p>부인은 함부로 하지 않고 말했다. </p>
<p>&#8220;스님께서 서방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 </p>
<p>습니다.&#8221; </p>
<p>엄장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p>
<p>&#8220;광덕도 이미 그랬는데 어찌 거리끼는가?&#8221; </p>
<p>광덕의 아내는 말했다. </p>
<p>&#8220;남편은 나와 십여년을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함께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이 </p>
<p>제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 </p>
<p>불을 불렀습니다. 혹은 16관을 만들어 미혹을 깨치고 달관하여 밝은 달빛이 창에 비치 </p>
<p>면 때때로 그 빛 위에 올라 가부좌 하였습니다. 정성을 쏟음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 </p>
<p>방정토에 가지 않으려 한들 어디 갈 데가 있겠습니까?&#8221; 대체로 천리 길을 가고자 하는 </p>
<p>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이 하는 짓은 동방으로 가는 것 </p>
<p>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8221; </p>
<p>엄장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며 물러 나왔다. 그 길로 원효법사의 처소 </p>
<p>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 </p>
<p>장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뜻으로 도를 닦았으므 </p>
<p>로 또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따.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과 해동고승전 속에 있다. </p>
<p>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19응신 가운데 하나였다. 광 </p>
<p>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p>
<p>달아, 이제 서방까지 가시려오. </p>
<p>무량수불 앞에 알리어 사뢰소서. </p>
<p>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두 손 모두어 </p>
<p>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리는 사람있다고 아뢰소서. </p>
<p>아아, 이 몸 두고 48대원(大願) 이루실까? </p>
<p>번호:8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3 00:24 길이:42줄 </p>
<p>경흥우성(憬興遇聖- 경흥이 대성 문수보살을 만남) </p>
<p>신문왕 때의 고승 경흥은 성이 水씨이며 웅천주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 </p>
<p>장에 통달하니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개요 원년(681)에 문무왕이 장차 승하하려 </p>
<p>할 때 신문왕에게 고명(顧命)하기를, </p>
<p>&#8220;경흥법사는 국사가 될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8221; </p>
<p>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노(國老)로 삼고 삼랑사에서 살게 했다. </p>
<p>경흥이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이나 되었다. 이 때 여승이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p>
<p>화엄경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말을 얘기했다. </p>
<p>&#8220;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8221; </p>
<p>이렇게 말하더니 열 한 가지 모습을 지어 각각 익슬스럽기 짝이 없는 춤을 추게 </p>
<p>하니 그 모습은 뾰죽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모습은 이루 다 형용할 수 </p>
<p>없었다. 모두 너무 우스워 턱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법사의 병은 자신도 모르는 사 </p>
<p>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자 여승은 문을 나가 남항사에 들어가 숨었고, 그가 가졌던 </p>
<p>지팡이는 새로이 꾸며 놓은 佛畵 11면원통상 앞에 있었다. </p>
<p>경흥이 어느 날 대궐에 들어가고자 했다. 시종하는 이들은 동문 밖에서 먼저 채 </p>
<p>비를 했는데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였고, 신발과 갓 또한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가 </p>
<p>던 행인들은 모두 길을 비켰다. 그런데 그 때 거사 한사람이 몹시 엉성한 모습에 지팡 </p>
<p>이를 짚고 있었다.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위에서 쉬고 있는데, 그 </p>
<p>광주리 속에는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기를, </p>
<p>&#8220;너는 중의 옷을 입고서 어찌 부정한 물건을 짊어지고 있느냐?&#8221; </p>
<p>거사는 말했다. </p>
<p>&#8220;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 </p>
<p>고 있는 것을 싫어할 게 있다는 말인가?&#8221; </p>
<p>말을 마치자 그는 일어나 사라졌다. 경흥이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p>
<p>시켜 그를 뒤쫓게 했다. 그는 남산 문수사 문 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p>
<p>그가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고 마른 고기는 소나무 껍질로 변해 </p>
<p>있었다. 사자가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자 경흥은 이르 듣고 탄식하였다. </p>
<p>&#8220;문수보살이 와서 내가 말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구나.&#8221; </p>
<p>그 후 경흥은 종신토록 말을 타지 않았다. </p>
<p>경흥이 뿌린 덕의 향기와 맛은 석(釋) 현본이 엮은 삼랑사 비문에 자세히 실려 </p>
<p>있다. 일찍이 보현장경을 보고, 미륵보살이 이르기를 </p>
<p>&#8220;나는 내세에는 염부제(閻浮提)에 나서 먼저 석가의 말법(末法)제자들을 제도할 </p>
<p>것이다. 그러나 다만 말탄 비구승만은 제외시켜서 그들이 아예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p>
<p>것이다.&#8221; </p>
<p>하니 어찌 경계치 아니할 것인가. </p>
<p>기리어 읊는다. </p>
<p>옛 어진이가 보인 모범 뜻 더욱 많았는데 </p>
<p>어찌하여 아손(兒孫)들은 절차(切嵯)하지 않는가. </p>
<p>마른 고기 등에 진 건 오히려 괜찮으나 </p>
<p>다음 날 용화(龍華)의 짐 어찌 하리오. </p>
<p>번호:8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4 00:01 길이:41줄 </p>
<p>진신수공(眞身受供) </p>
<p>장수 원년 임진(692)에 효소왕이 즉위하여 망덕사를 세우고 장차 당나라 제실의 </p>
<p>복을 받들려고 했다. 그 후 경덕왕이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 </p>
<p>사지난(安史之亂)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p>
<p>&#8220;당나라 제실을 위해 세운 절이니 마땅히 그 감응이 있다.&#8221; </p>
<p>8년 정유에 낙성회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나가 공양하는데, 몹시 허술한 모습의 </p>
<p>한 비구가 몸을 구부리고 뜰에 서서 청햇다. </p>
<p>&#8220;빈도도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8221; </p>
<p>왕은 그에게 말석에 참석하도록 허락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조로 말했 </p>
<p>다. </p>
<p>&#8220;그대는 어디 사는가?&#8221; </p>
<p>&#8220;비파암에 있습니다.&#8221; </p>
<p>&#8220;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는 말을 하지 </p>
<p>말라.&#8221; </p>
<p>중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p>
<p>&#8220;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8221; </p>
<p>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하늘로 떠서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왕은 놀라웁고 부 </p>
<p>끄러움에 동쪽 언덕으로 달려 올라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절하고 사람을 </p>
<p>시켜 찾게 했다. 그는 남산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돌 위에 지 </p>
<p>팡이와 바리때를 벗어놓고 숨어버렸다. 사자가 돌아와 복명하자 왕은 즉시 석가사를 </p>
<p>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p>
<p>두 곳에 각각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 </p>
<p>졌다. </p>
<p>지론 제 4에는 이렇게 적혔다. </p>
<p>옛날에 계빈국 삼장법사가 아란약법을 행하여 일왕사에 이르렀더니 절에서는 커 </p>
<p>다란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옷이 누추하다 하여 문지기는 문을 막고 그 </p>
<p>를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여러 번 들어가려 했으나 추한 옷 때문에 번번히 들어가지 </p>
<p>못하자, 그는 다른 방편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가니 문지기는 막지 않고 들어 </p>
<p>가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 자리에 참례하게 되자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 그것을 </p>
<p>옷어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p>
<p>&#8220;왜 그렇게 하는가?&#8221; </p>
<p>그는 대답했다. </p>
<p>&#8220;내가 여러번 왔으나 매번 들어올 수 없었는데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어 </p>
<p>여러가지 음식을 대했으니 이 옷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8221; </p>
<p>이것도 같은 사례인 것 같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부처님께 향 사르고 새 불화를 보았고, </p>
<p>음식을 공향하고 옛 친구를 불렀네. </p>
<p>이제 좇아 비파암 저 달은, </p>
<p>때때로 구름 속 더디 못에 비치니라. </p>
<p>번호:8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4 00:03 길이:62줄 </p>
<p>월명사의 도솔가 </p>
<p>경덕왕 19년 경자(760) 4월 초 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동안이나 사 </p>
<p>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p>
<p>&#8220;인연있는 중을 청해서 산화공덕(散花攻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 </p>
<p>입니다.&#8221; </p>
<p>이에 조원전에 정결히 단을 만들고 임금이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있는 중이 오 </p>
<p>기를 기다렸다. 이 때 월명사가 천맥(阡陌)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p>
<p>왕은 사라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p>
<p>아뢰었다. </p>
<p>&#8220;신승(臣僧)은 그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겨우 향가만 알 뿐이오며 성범 </p>
<p>(聲梵)에는 익숙치 못하옵니다.&#8221; </p>
<p>왕은 말했다. </p>
<p>&#8220;이미 인연이 닿은 중이니 향가만 하여도 좋소.&#8221; </p>
<p>월명은 이에 도솔가를 지어 바쳤는데 그 가사는 이렇다. </p>
<p>오늘 이에 산화가를 불러, </p>
<p>뿌린 꽃아 너는 </p>
<p>곧은 마음의 명령을 심부름하여, </p>
<p>미륵좌주를 모시도다. </p>
<p>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p>
<p>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p>
<p>한 송이 꽃 청운에 뿌려 보내네. </p>
<p>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 쓰는 것은, </p>
<p>멀리 도솔대선을 맞이하리. </p>
<p>지금 세간에서는 이를 산화가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라고 해야 할 </p>
<p>것이다. 산화가는 달리 또 있는데, 그 글은 많아서 싣지 않는다. </p>
<p>조금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은 이것을 가상하게 여겨 품다(品茶) </p>
<p>한 봉과 수정염주 108개를 하사했다. </p>
<p>그런데 이 때 갑자기 한 명의 동자가 나타났다. 모양이 곱고 깨끗한 동자가 공손 </p>
<p>히 차와 염주를 받들고 대궐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가버렸다. 월명은 이 동자를 내궁 </p>
<p>의 사자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로 알았다. 그러나 서로 알고 보니 모두 잘못이었다. </p>
<p>그러자 왕은 심히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뒤를 쫓게 했더니 동자는 내원의 탑 </p>
<p>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리고 차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 미륵상 옆에 있었다. 이 </p>
<p>와 같이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격(昭假, 가는 格과 같다. </p>
<p>밝게 감동시킴)시킬 수 있었다. 조정이나 세간에 널리 퍼져 이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 </p>
<p>다. 왕은 더욱 그를 공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했다. </p>
<p>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제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 </p>
<p>다. 그러자 문득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지전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졌다. 향가는 이렇다. </p>
<p>생사의 길은, 이승에 있으매 두려워 지고 </p>
<p>나는 가네 말도 못이르고 가느냐. </p>
<p>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p>
<p>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누나. </p>
<p>아, 미타찰에서 너늘 만날 나는 </p>
<p>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p>
<p>월명은 늘 사천왕사에서 지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피리를 불면서 문 </p>
<p>앞의 큰 길을 기나는데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멈추었다. 이로 인해 그곳을 월명리라 </p>
<p>했고, 월명사란 이름도 이 일로 해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p>
<p>월명사는 곧 능준대사의 제자이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p>
<p>이것은 대개 시, 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p>
<p>한두가지가 아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바람은 지전 날려 죽은 누이 노자를 삼게 했고, </p>
<p>피리소리 밝은 달 흔들어 항아가 머무르네. </p>
<p>도솔천이 하늘같이 멀다 마오. </p>
<p>만덕화 (萬德花) 한 곡으로 즐겨 맞았네. </p>
<p>번호:8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4 00:04 길이:37줄 </p>
<p>선율환생(善律還生) </p>
<p>망덕사의 중 선율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공사 </p>
<p>가 아직 끝나기 전에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잡혀 명부(冥府)에 이르렀다. 명사(冥司) </p>
<p>가 묻기를 </p>
<p>&#8220;너는 인간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였느냐?&#8221; </p>
<p>&#8220;빈도는 만년에 대품반야경을 만들다가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8221; </p>
<p>&#8220;너의 수록에 의하면 네 수명은 이미 다했지만, 무엇보다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 </p>
<p>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 보전을 이루어 끝내도록 하라.&#8221; </p>
<p>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데 도중에 한 여자가 울면서 그의 앞으로 와서 절을 </p>
<p>하며 말했다. </p>
<p>&#8220;나도 역시 신라의 남염주 사람입니다. 부모가 금강사의 논 1묘를 몰래 빼앗은 </p>
<p>일에 연루되어 명부에 잡혀와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p>
<p>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저희 부모님께 알려 속히 그 논을 돌려 주도록 해주시어요. 그 </p>
<p>리고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를 침구 사이 </p>
<p>에 감추어 두었으니 부디 법사께서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 </p>
<p>아 경폭(經幅)으로 써주시어요. 그리 하시오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 </p>
<p>를 벗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8221; </p>
<p>선율은 말했다. </p>
<p>&#8220;그럼 네 집은 어디 있는가?&#8221; </p>
<p>&#8220;사량부 구원사의 서남쪽 마을이옵니다.&#8221; </p>
<p>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되살아났다. </p>
<p>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열흘이 지나 남산 동족 기슭에 장사지냈으므로 무덤 속 </p>
<p>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쳤다. 지나가던 목동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그러 </p>
<p>자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냈다.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p>
<p>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다. 여자가 죽은 지는 15년이나 되었는데 참기름과 베는 영 </p>
<p>락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그 여자의 말대로 하여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 </p>
<p>혼이 찾아와서 말했다. </p>
<p>&#8220;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8221; </p>
<p>그 때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놀라와 하며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 </p>
<p>었다. 이리하여 서로 도와서 반야경을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 승사서고 안에 </p>
<p>있다.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씩 그것을 펴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부럽구려, 우리 스님 인연좋아서, </p>
<p>영혼이 되돌아와 옛 고장에 노니시네. </p>
<p>혹여나 부모님이 저의 안부 물으시면, </p>
<p>날 위해 그 논 한 묘 돌려주라 하소서. </p>
<p>번호:9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5 00:01 길이:130줄 </p>
<p>김현감호(金現感虎-김현이 범을 감동시킴) </p>
<p>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에서 보름날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자들은 </p>
<p>홍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 원성왕때에 낭군(郎君)김현이 있었는데 </p>
<p>밤이 깊도록 쉬지 않고 홀로 탑을 돌았다. 그 때 한 처녀도 염불을 외면서 따라 돌다 </p>
<p>가 서로 마음이 움직여 눈을 주었다. 돌기를 마치자 그는 구석진 곳으로 처녀를 데리 </p>
<p>고 가 정을 통했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 </p>
<p>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가다가 서산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에 들어가니 늙은 </p>
<p>할미가 처녀에게 물었다. </p>
<p>&#8220;함께 온 이가 누구냐?&#8221; </p>
<p>처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p>
<p>&#8220;비록 좋은 일이긴 하나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므로 나무 </p>
<p>랄 수도 없다.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려우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어라.&#8221; </p>
<p>잠시 후에 범 세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들어오더니 사람과 같이 말을 했다. </p>
<p>&#8220;집에서 비린내가 나는구나. 요깃거리가 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닐꼬?&#8221; </p>
<p>늙은 할미와 처녀는 꾸짖었다. </p>
<p>&#8220;너희 코가 잘못됐지, 무슨 미친 소리냐&#8221; </p>
<p>이 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p>
<p>&#8220;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함이 너무도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 </p>
<p>겠노라.&#8221; </p>
<p>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p>
<p>&#8220;세 분 오빠들이 멀리 피해 가셔서 스스로를 징계하신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 </p>
<p>겠습니다.&#8221; </p>
<p>하고 처녀가 말하자,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p>
<p>처녀가 김현에게 돌아와 말했다. </p>
<p>&#8220;처음에 낭군이 저희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으나 이제 </p>
<p>는 숨김없이 감히 진실을 말씀드리겟습니다. 또한 저와 낭군은 비록 유는 다르지만 하 </p>
<p>루 저녁의 즐거움을 함께 했으니 중한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세 오빠의 악은 이 </p>
<p>제 하늘이 미워하시니 저희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p>
<p>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가 내일 </p>
<p>시가(市街)에 들어가 사람을 심히 해하면 나라 사람들로서는 저를 어찌할 수 없으므로 </p>
<p>반드시 임금께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 </p>
<p>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의 북쪽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 </p>
<p>다.&#8221; </p>
<p>김현이 말했다. </p>
<p>&#8220;사람이 사람과 관계함은 인륜의 도리이지만, 다른 유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 </p>
<p>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잘 지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함인데 어찌 차마 배필 </p>
<p>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랄 수 있겠소.&#8221; </p>
<p>&#8220;낭군은 그런 말 마시어요. 이제 제가 일찍 죽게 됨은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제 </p>
<p>소원입니다. 낭군께는 경사요, 우리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번 </p>
<p>죽어 다섯 가지의 이로움이 오는데 어찌 그것을 어기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p>
<p>짓고 불경을 강하여 좋은 과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해주신다면 낭군의 은혜는 이보 </p>
<p>다 더 큰 것이 없겠습니다.&#8221; </p>
<p>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 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 </p>
<p>사람을 해함이 너무 심하니 감히 당해 내지 못했다.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 </p>
<p>렸다. </p>
<p>&#8220;범을 잡는 사람에게는 2급의 벼슬을 주겠다.&#8221; </p>
<p>이에 김현이 대궐로 나가 아뢰었다. </p>
<p>&#8220;소신이 범을 잡겠습니다.&#8221; </p>
<p>왕은 벼슬부터 먼저 주고 그를 격려하였다. </p>
<p>김현이 칼을 쥐고 숲 속으로 들어가자 범은 낭자로 변하여 반가이 웃으면서 말했 </p>
<p>다. </p>
<p>&#8220;어젯밤 낭군이 저와 마음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p>
<p>상처입은 사람들은 전부 홍륜사의 孼)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이내 </p>
<p>나을 것입니다.&#8221; </p>
<p>말을 마치고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니 곧 범이었다. </p>
<p>김현이 숲에서 나와 말했다. </p>
<p>&#8220;방금 내가 쉽사리 범을 잡았다.&#8221; </p>
<p>그리고 그 사유는 숨긴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범이 시킨대로 상처를 치료했더니 </p>
<p>다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그 방법을 쓴다. </p>
<p>김현은 벼슬하자 서천가에 절을 짓고 호원사라 이름하였다. 항상 범망경을 강하 </p>
<p>영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맛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한 은혜에 보답 </p>
<p>했다. 김현이 죽을 때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것을 붓으로 적어 전하 </p>
<p>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일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글 이름을 논호림(論虎 </p>
<p>林)이라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칭한다. </p>
<p>정원 9년에 신도징이 야인으로서 당의 한주십방현위에 임명되어 진부현의 동쪽 </p>
<p>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 </p>
<p>했다. 그 때 길 옆에 초가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불이 피워져 있어 매우 </p>
<p>따뜻했다. 등불 곁으로 나아가니 늙은 부모와 한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p>
<p>그 처녀의 나이는 십사,오세쯤 되어 보였다. 비록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 </p>
<p>었지만, 눈처럼 흰 살결에 꽃같은 얼굴로써 동작이 아주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 </p>
<p>징이 온 것을 보자 급히 일어나 말했다. </p>
<p>&#8220;손님이 차가운 눈을 무릅쓰고 오셨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쪼이시지요.&#8221; </p>
<p>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고 눈보라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청 </p>
<p>하기를, </p>
<p>&#8220;서쪽의 현까지 가려면 길이 아직 멉니다. 부디 여기 좀 재워 주십시오.&#8221; </p>
<p>&#8220;누추한 집안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감히 명을 받겠습니다.&#8221; </p>
<p>부모의 대답에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방에 들어 침구를 폈다. 처녀는 </p>
<p>손님이 유숙함을 보자 얼굴을 씻고 곱게 단장하고 장막 사이로 나오는데 그 한아한 태 </p>
<p>도는 처음 볼 때보다 더 나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p>
<p>&#8220;소낭자는 총명하고 스릭로움이 남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아직 미혼이면 혼인을 </p>
<p>청하오니 어떠신지요.&#8221; </p>
<p>그 아버지는 대답했다. </p>
<p>&#8220;뜻밖의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좋은 연분이 아니겠습니까.&#8221; </p>
<p>마침내 신도징이 사위의 예를 청했다. 그리고는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워 길을 </p>
<p>떠났다. 임지에 도착해 보니 봉록이 너무 적었다. 그러나 아내가 함써 집안 일을 돌보 </p>
<p>았으므로 모두들 마음에 즐거움 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p>
<p>1남1녀를 두었는데,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와 그는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p>
<p>그가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하다. </p>
<p>벼슬길에 나아가니 매복(梅福-사람이름)에게 면목없고, </p>
<p>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에게 부끄럽구나. </p>
<p>이 정을 내 어디에 비유할까, </p>
<p>냇물 위에 원앙새는 떠 있는데. </p>
<p>그의 아내는 이 시를 읊으며 잠잠히 화답할 듯하였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p>
<p>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아내는 문득 슬퍼하 </p>
<p>며 말했다. </p>
<p>&#8220;전번에 주신 시에 화답할 것이 잇습니다.&#8221; </p>
<p>그리고는 읊었다. </p>
<p>금슬의 정이 비록 중하나, </p>
<p>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다. </p>
<p>시절이 변할까 늘 근심하며, </p>
<p>백년해로 저버릴까 걱정하누나. </p>
<p>그 후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가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 </p>
<p>음이 깊어 하루종일 울었다. 홀연 벽 모퉁이에 있는 한 장의 호피를 보고 크게 웃으면 </p>
<p>서 말했다. </p>
<p>&#8220;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걸 내 몰랐구나&#8221; </p>
<p>하더니 곧 그것을 뒤집어 쓰니 변하여 마침내 범이 되었는데, 어흥거리며 할퀴더 </p>
<p>니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간 길을 </p>
<p>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크게 울었으나 간 곳을 끝내 알지 못했다. </p>
<p>슬프다! 신도징과 김현 두 분이 짐승과 접했을 때 그것이 변해 사람의 아내가 된 </p>
<p>것은 똑같다. </p>
<p>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그를 배반하는 시를 주고 어흥거리며 할퀴다 돌아난 점이 </p>
<p>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는 했으나 처방을 일러줘 사람 </p>
<p>들을 구해 주었다. 짐승도 어질기가 이와 같은데 사람으로서 짐승만도 못한 자가 지금 </p>
<p>도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p>
<p>이 사적의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p>
<p>불러 악을 징계하려고 하자 자신이 대신했으며, 신령한 약 방문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p>
<p>구하고 절을 세우고 불게를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짐승의 본질이 어진탓 </p>
<p>에 그런 것이 아니고,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었으므로 능히 김현공 </p>
<p>이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한 것 뿐이다. 그 때 </p>
<p>복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p>
<p>기리어 읊는다. </p>
<p>산가(山家)의 세 오라비 많은 죄악에 </p>
<p>고운 입의 한번 응낙 어찌하리오 </p>
<p>다섯 가지 의로우니 만번 죽음은 가벼워라. </p>
<p>숲속에서 맡긴 몸 낙화(落花)마냥 져갔구나. </p>
<p>번호:9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5 00:02 길이:26줄 </p>
<p>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p>
<p>제 5 거열랑 제 6 실처랑 제 7 보동랑 등 화랑의 무리 세 사람이 풍악에 놀러가 </p>
<p>려는데 혜성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했다. 낭도들은 이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여 그 여 </p>
<p>행을 중지하려 했다. 이 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서 부르니 별의 변괴는 사라지고 일 </p>
<p>본 군사가 저희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임금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 </p>
<p>악에 보내서 놀게 했다. </p>
<p>노래는 이렇다. </p>
<p>옛날 동해가의 건달바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p>
<p>&#8216;왜군이 왔다.&#8217; 고 훼를 든 변방이 있어라. </p>
<p>세 화랑이 산구경 오심 듣고 달도 부지런히 빛을 펴는데, </p>
<p>살 별을 바라보며 &#8216;혜성이여!&#8217; 하며 알린 이가 있구나 </p>
<p>아아, 달은 저 아래로 지누나. 이봐 무슨 혜성이 있을까. </p>
<p>정수사 구빙녀(正秀師 救氷女-정수스님이 얼어죽게 된 여인을 구함) </p>
<p>제 40대 애장왕 때에 중 정수는 황룡사에 우거해 있었다. 눈이 많이 쌓인 겨울 </p>
<p>어느 날,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삼랑사에서 돌아오다가 천엄사 문밖을 지나게 되었다. </p>
<p>그 때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는 누어 얼어 죽게 되었다. </p>
<p>스님이 이들을 불쌍히 보고 그녀을 안아주었더니 한참 있따 깨어났다. 그러자 옷 </p>
<p>을 벗어 덮어주고 벌거벗은 채 절로 달려와서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세웠다. 한밤 </p>
<p>중 궁정 뜰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p>
<p>&#8220;황룡사의 중 정수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으로 봉하라.&#8221; </p>
<p>왕은 급히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하니 그 사실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p>
<p>왕은 위의를 갖추어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고 국사로 삼았다. </p>
<p>번호:9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02:35 길이:84줄 </p>
<p>피은(避隱) 제 8 </p>
<p>낭지승운(朗智乘雲) 보현수(普賢樹) </p>
<p>삽량주 아곡현의 영취산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서 수십년을 살았으나 고 </p>
<p>을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며, 스님도 또한 자기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p>
<p>늘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신통력이 있었다. </p>
<p>용삭 초년에 지통이란 중이 있었는데 본디 이량공 집의 종이었다. 일곱살에 출가 </p>
<p>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했다. </p>
<p>&#8220;영취산에 들어가 낭지의 제자가 되라.&#8221; </p>
<p>지통은 이 말을 듣고 그 산을 찾아가서 골짜기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가 문득 </p>
<p>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p>
<p>그 사람은 말했다. </p>
<p>&#8220;나는 보현보살인데 네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한다.&#8221; </p>
<p>하더니 계를 베푼 후 숨어 버렸다. 그 때 지통은 마음이 두루 넓어지고 지증(智 </p>
<p>證)이 문득 두루 통해졌다. 다시 길을 걷다가 한 중을 만났다. 그가 낭지 스님은 어디 </p>
<p>계시느냐고 묻자 중이 되물었다. </p>
<p>&#8220;왜 낭지를 묻느냐?&#8221; </p>
<p>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중은 빙그레 웃으면서, </p>
<p>&#8220;내가 바로 낭지인데 지금 집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거룩한 아이가 </p>
<p>바야흐로 스님께로 오고 있으니 마땅히 나가 영접하라고 하여 이렇게 나와 맞이하는 </p>
<p>것이다.&#8221; </p>
<p>하며 손을 잡고 감탄하고 말했다. </p>
<p>&#8220;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내게로 오게 했고, 또 내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p>
<p>하니 정녕코 상서로운 일이다. 아마 산령(山靈)의 은밀한 도움인가 보구나. 전하는 말 </p>
<p>에 산의 주인은 변재천녀(辯才天女)라고 한다.&#8221; </p>
<p>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며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했다. 이윽고 계를 주려 하니 </p>
<p>지통이 말했다. </p>
<p>&#8220;저는 동구 나무 밑에서 보현보살에게 이미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8221; </p>
<p>낭지는 감탄하고, </p>
<p>&#8220;잘했구나. 너는 이미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친히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p>
<p>후 조석으로 조심하고 은근히 지성(보현보살)을 만나기를 염원했지만 오히려 정성이 </p>
<p>감동되지 못했는데, 이제 너는 이미 계를 받았으니 내가 네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 </p>
<p>나.&#8221; </p>
<p>하며 도리어 지통에게 예했다. 이로 인해 그 나무를 보현수라 했다. </p>
<p>&#8220;법사께서 이 절에 계신 지가 오래 된 듯합니다.&#8221; </p>
<p>지통이 말하자 낭지는 대답했다. </p>
<p>&#8220;법흥왕 정미(527)에 처음으로 여기 와서 살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되었는지 잘 </p>
<p>모르겠다.&#8221; </p>
<p>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 즉위 원년(661)이니 계산해 보면 135년이나 된 </p>
<p>다.&#8221; </p>
<p>지통은 후에 의상의 처소에 가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불교의 교화에 이 </p>
<p>바지하엿으니, 이가 곧 추동기(錐洞記)의 작자이다. </p>
<p>원효가 반고사에서 잇을 때 늘 낭지를 찾아가 뵈니 그는 원효에게 초장관문과 안 </p>
<p>신사심론을 저술하게 했다. 원효가 저술을 끝마친 후에 은사 문선을 시켜 책을 받들어 </p>
<p>보내면서 그 편미에 싯귀를 적었는데 이러하다. </p>
<p>서쪽 골짜기 사미는 공손히, </p>
<p>동쪽 봉우리 상덕 고암 전에 예하노라 </p>
<p>가는 티끌 불어 보내어 영취산에 더하고, </p>
<p>용연에 잔 물방울 던지도다. </p>
<p>산의 동쪽에 대화강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대화지의 용의 복을 빌기 위해 만든 </p>
<p>것이므로 용연이라 했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이었다. 이런 두 성인으로서도 </p>
<p>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섬기었으니 낭지 스님의 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알 수 있다. </p>
<p>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의 청량산에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는 </p>
<p>잠시 후 곧 돌아왔는데, 그 곳 중들은 아무도 그가 사는 곳을 모르면서도 이웃에 사는 </p>
<p>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청량산 절에서 하루는 여러 중들에게 명령했다. </p>
<p>&#8220;항상 이 절에 사는 자는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중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난 </p>
<p>꽃과 진귀한 식물을 가져다 도량에 바쳐라.&#8221; </p>
<p>낭지는 이튿날 산속의 이상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 바쳤다. 그 곳의 중이 그것 </p>
<p>을 보고 말했다. </p>
<p>&#8220;이 나무는 범명으로 달제가라 하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하는데, 오직 서천축과 </p>
<p>해동의 두 영취산에만 있다. 이 두산은 모두 제 10법운지로서 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 </p>
<p>사람은 반드시 성자일 것이다.&#8221; </p>
<p>마침내 그 행삭을 살펴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p>
<p>스님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그 이름이 나라 안팎에 나타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 </p>
<p>자를 혁목암이라 불렀다. 지금 혁목사의 북쪽 산등성이에 옛 절터가 있는데 그 곳이 </p>
<p>그 절이 있던 자리다. </p>
<p>영취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p>
<p>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p>
<p>&#8220;이 암자 자리는 가섭불 당시의 절터였으므로 땅을 파서 등항 두개를 얻었다.&#8221; </p>
<p>고 하였다. 원성왕 때에는 대덕 연희가 이 산 속에 와 살면서 낭지스님의 전기를 </p>
<p>지었는데, 이것이 세상에 퍼졌다고 했다. </p>
<p>화엄경을 살펴보면 제 10은 법운지라 했으니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p>
<p>부처가 삼지로 꼽고, 원효가 1백몸으로 나누는 것 같은 것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생각하니 산에 숨어 수도한 지 백년간에, </p>
<p>높은 이름 일찍이 세상에 아니 나고, </p>
<p>산새의 한가한 지저귐 못 금하는가, </p>
<p>구름타고 오가는 것 속절없이 알게 되었네. </p>
<p>번호:9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02:36 길이:36줄 </p>
<p>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p>
<p>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취산에 숨어 살면서 항상 연경을 읽어 보현보살의 관행법 </p>
<p>을 닦았다. 뜰의 연못에는 늘 연꽃 두 세 송이가 있었는데 사시 시들지 않았다. </p>
<p>원성왕은 그 상서롭고 기이한 말을 듣자 그를 불러 국사로 삼으려 했다. 스님은 </p>
<p>그 소식을 듣자 암자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가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고 있는데 </p>
<p>한 노인이 밭을 갈다가 스님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자 스님이 말했다. </p>
<p>&#8220;내 듣자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관작으로 얽매려 해 피해 가는 중입니다.&#8221; </p>
<p>노인은 이 말을 듣자 말했다. </p>
<p>&#8220;이 곳에서 팔 것이지 왜 먼 데서만 팔려고 수고하십니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팔 </p>
<p>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8221; </p>
<p>그러나 연회는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행각하여 듣지 않고 마침내 몇 리를 더 갔다. </p>
<p>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연회는 아까와 같이 대답하 </p>
<p>자 노파는 말했다. </p>
<p>&#8220;아까 앞에서 사람을 만났습니까?&#8221; </p>
<p>연회는 대답했다. </p>
<p>&#8220;한 노인이 있었는데 나를 심히 업신여기기에 기분이 불쾌하여 그만 와 버렸습니 </p>
<p>다.&#8221; </p>
<p>노파가 말했다. </p>
<p>&#8220;그 분이 문수보살이온데 그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어쩌시겠습까.&#8221; </p>
<p>그 말을 듣자 연회는 놀랍고 또한 송구하여 급히 그 노인에게로 되돌아가서 머리 </p>
<p>를 숙이고 사과햇다. </p>
<p>&#8220;성인의 말씀을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냇 </p>
<p>가의 노파는 누구이옵니까?&#8221; </p>
<p>노인은 말했다. </p>
<p>&#8220;그는 변재천녀이다.&#8221; </p>
<p>말을 마치자 즉시 숨어 버렸다. 이에 연회가 암자로 돌아오니, 조금 후에 왕의 </p>
<p>사자가 명을 받들고 와서 그를 불렀다. 연회는 진작 받았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임금 </p>
<p>의 명대로 대궐로 가자 왕은 그를 국사로 봉했다. </p>
<p>연회 스님이 노인에게 감응받은 곳을 이름하여 문수점이라 하고, 여인을 만나본 </p>
<p>곳을 아니점이라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저자에선 어진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p>
<p>주머니의 송곳끝을 감추기 어렵네. </p>
<p>뜰 아래 연꽃으로 세상에 나갔지. </p>
<p>깊지 않은 운산이 탓은 아닐세. </p>
<p>번호:9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37 길이:61줄 </p>
<p>혜현구정(惠現求靜) </p>
<p>중 혜현은 백제 사람이다. 일찍이 어려서 출가하여 힘써 뜻을 모아 법화경을 외 </p>
<p>는 것으로 업을 삼아서봤낫途 기도하여 복을 청하므로 부처의 영험한 감응이 실로 </p>
<p>많았다. 삼론을 다 배우고 수도를 시작하니 신명에 통하였다. </p>
<p>처음에는 북부 수덕사에 살았다. 그 곳에서 신도가 있으면 불경을 강론하고 없으 </p>
<p>면 불경을 외웠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도 그 품격을 흠모하여 문 밖에는 항상 신발 </p>
<p>이 가득했다. </p>
<p>차차 번거롭고 시끄러우므로 마침내 강남의 달라산에 가서 살았다. 그 산은 매우 </p>
<p>험준하여 사람의 내왕이 힘들어 찾아보기 어려웠다. 혜현은 고요히 앉아 세상을 잊고 </p>
<p>산 속에서 생을 마쳤는데, 동학들이 그 시체를 운구하여 석실 속에 모셨다. 그㉣쨉 </p>
<p>범이 그 유해를 먹어치우고 해골과 혀만 남겼는데, 추위와 더위가 세번 지나가도 혀는 </p>
<p>오히려 붉고 부드러웠다. 그 후 차차 변하여 자주빛이 되더니 돌과 같이 단단해졌다. </p>
<p>중과 속인들이 이를 공경하여 석탑에 간직했다. 그의 나이 58세에 운명하였으니 즉 정 </p>
<p>관 초년이었다. 혜현은 일찍이 중국에 유학간 일도 없거니와 물러가 고요히 일생을 마 </p>
<p>쳤으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까지 쓰여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p>
<p>또 고구려의 중 파약은 중국 천태산에 들어가 지자의 교관(敎觀)을 받았다. 다 </p>
<p>만 신이한 사람으로 알려졌을 뿐 산중에서 죽었다. 당승전에도 실려있는데 자못 영험 </p>
<p>한 교훈이 많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주미로 설법함도 한바탕 수로로울 뿐, </p>
<p>지난 날 독경소리 구름 속에 잠들었네. </p>
<p>세간에 이름을 날려, </p>
<p>죽어서도 꽃다운 혀 연꽃 같아라. </p>
<p>신충괘관(信忠掛冠) </p>
<p>효성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 </p>
<p>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p>
<p>&#8220;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8221; </p>
<p>그러자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했다.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 </p>
<p>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깜빡 잊고 명단에 넣지 않았다. 이에 신충이 원망스런 노래를 </p>
<p>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랐다. 왕이 이상히 여겨 여러 사람을 </p>
<p>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p>
<p>&#8220;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 뻔 했구나.&#8221; </p>
<p>하며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자 잣나무는 그 때야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p>
<p>뜰의 잣나무는 가을에도 아니 이울어져 너를 어찌 잊을꼬. 하시던 </p>
<p>우러러 보던 얼굴은 계시건만, </p>
<p>옛 못의 달 그림자 가는 물살 원망하듯, </p>
<p>너의 모습 바라보나, 누리는 싫어라. </p>
<p>이렇듯 전귀는 있으나 후귀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왕, 경덕왕 두 왕조 </p>
<p>에 벼슬하여 그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p>
<p>경덕왕 22년 계묘(763)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p>
<p>들어갔다. 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그 곳에서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p>
<p>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며 </p>
<p>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했다. 임금의 진영을 모셔 두었는데 금 </p>
<p>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남쪽으로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현재는 와전되 </p>
<p>어 소화리라 한다. </p>
<p>또 별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p>
<p>나이 50이 되면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자신도 </p>
<p>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고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p>
<p>이는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실음으로 의심하는 점 </p>
<p>을 덜고자 한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공명은 다하지 못하고 귀밑 털이 먼저 세니, </p>
<p>임금의 총애야 비록 많아도 바쁘고 바쁜 한 평생이네. </p>
<p>언덕 저편의 푸른 산 꿈결에 자주 보이니 </p>
<p>내 가서 향화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라. </p>
<p>번호:9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39 길이:50줄 </p>
<p>포산 2성(包山 二聖) </p>
<p>신라 때에 관기와 도성이란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수는 없 </p>
<p>다. 둘이 함께 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도성은 </p>
<p>북쪽 굴에서 살았다. 서로 10여리쯤의 거리였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서로 </p>
<p>늘 왕래하였다. </p>
<p>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 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굽혀 영접하는 </p>
<p>것 같았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 </p>
<p>면, 역시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이 관기에게 오게 되었다. 이처럼 지내기 </p>
<p>를 몇 해, 항상 그렇듯 도성은 그가 거주하는 뒷산의 높은 바위에 좌선하고 있었다. </p>
<p>하루는 바위 사이로부터 몸을 빼어 나와 몸을 허공에 날리며 떠나갔는데 간 곳은 알 </p>
<p>수가 없었다. 혹자는 수창군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자 관기도 또한 뒤를 따 </p>
<p>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두 성사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살던 곳의 이름을 붙였는데 </p>
<p>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 </p>
<p>에 절을 지었다. </p>
<p>태평흥국 7년 임오(982)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그는 만일 </p>
<p>미타도량을 열어 부지런히 50여년을 전념했는데 특이한 상서가 여러번 있었다. 이 때 </p>
<p>현풍의 신도 20여명이 결사(結社)하여 해마다 향나무를 주워다 절에 바쳤다. 산에 가 </p>
<p>서 향나무를 주워다 절에 바쳤다. 산에 가서 향나무를 채취하다가 쪼개고 씻어서 발 </p>
<p>위에 펼쳐두면 그 향나무가 밤이 되면 촛불처럼 빛을 발했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은 </p>
<p>그 향나무에게 보시하고 빛을 얻는 해라고 하며 축하했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이거나 </p>
<p>산신의 도움 같았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이로 일찍이 가섭불 때에 부처님의 부탁 </p>
<p>을 받았는데 그 본서에 말하기를, </p>
<p>&#8216;산 속에서 1천명의 출세를 기다려 남은 과보를 받겠습니다.&#8217; </p>
<p>라고 했다. </p>
<p>산속에서 일찍이 9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 </p>
<p>은 관기,도성,반사,첩사,도의,자양,성범,금물녀,백우사들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달빛를 밟고 서로 찾아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p>
<p>두 노인의 풍류 몇 백 년이 되었는고, </p>
<p>연하(烟霞) 가득한 구렁 고목만 무성한데. </p>
<p>찬 그림자 어긋버긋 서로 맞는 모양일레. </p>
<p>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고 하며, 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 </p>
<p>말로는 떡갈나무라 한다. </p>
<p>이 두 성사 반사,첩사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서 지내므로 인간 세상과는 사귀지 </p>
<p>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을 대신하여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 </p>
<p>를 가릴 뿐이었다. 그러므로 반사,첩사로 호를 삼았던 것이다. 듣자니 일찍이 풍악에도 </p>
<p>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날의 은자들의 세속을 떠난 운치가 이와 같음이 </p>
<p>많으나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p>
<p>내가 일찍이 포산에 우거할 때에 두 스님의 미덕을 기린 글 한 수를 쓴 일이 있 </p>
<p>는데, 이것을 아울러 여기 적는다. </p>
<p>자모와 황정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p>
<p>누에 쳐 짜낸 베가 아닐세. </p>
<p>찬바람 쌩쌩 불고 돌은 험한데, </p>
<p>해저문 숲 속으로 나무해 돌아오네. </p>
<p>밤깊어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으면, 반신은 바람따라 삽연히 나는 듯. </p>
<p>떨어진 포단에 자노라면, 속세엔 꿈 속에도 아니 가네라. </p>
<p>운유는 가버리고 두 암자는 폐허인데, 인적 드문 산 사슴만 뛰노누나. </p>
<p>번호:9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0 길이:57줄 </p>
<p>영재우적(永才遇賊) </p>
<p>중 영재는 천성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향가를 잘했다. 만년에 </p>
<p>장차 남악에 은거하려고 대현령에 이르렀을 때 60여명의 도둑떼를 만났다. 도둑들이 </p>
<p>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화기로운 태도로 그 </p>
<p>들을 대하였다. 이상히 여긴 도둑들이 그의 이름을 묻자 영재라 대답했다. 평소 도둑 </p>
<p>들도 들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노래를 짓게 햇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 </p>
<p>내 마음의 시늉을 모르던 날은, </p>
<p>멀리 ()()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소. </p>
<p>오직 그릇된 파계주를 만나 두려워할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랴. </p>
<p>이 칼이야 지나고 나면 좋은 날이 새려니만, </p>
<p>아아, 오직 이만한 善은 아니 좋은 일 되느니라. </p>
<p>도둑들은 이 노래에 감동하여 비단 2단을 주자 영재는 웃으면서 이를 사양하고 </p>
<p>말했다. </p>
<p>&#8220;재물이 지옥으로 가는 근본임을 알고 바야흐로 깊은 산속으로 피해가서 여생을 </p>
<p>마치려 하는데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8221; </p>
<p>하며 그것을 땅에 던졌다. 도둑들은 그 말에 다시 감동되어 가졌던 칼과 창을 모 </p>
<p>두 버리고 머리를 깎고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p>
<p>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90이었으니 원성대왕의 시대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지팡이 짚고 산으로 들어가니 그 뜻 한결 깊은데, </p>
<p>비단과 구슬로 어찌 마음 다스릴까. </p>
<p>녹림의 군자들아, 그거일랑 주지마라. </p>
<p>지옥은 다름 아닌 寸金이 근본이다. </p>
<p>물계자(勿稽子) </p>
<p>제 10대 내해왕이 즉위한 지 17년 임진(212)에 보라국,고자국,사물국 등 여덟 나 </p>
<p>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은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 </p>
<p>를 이끌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다. 이 때 물계자의 군공이 으뜸이 </p>
<p>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사 그 공을 상받지 못했다. 그러자 어느 사람이 물계자 </p>
<p>에게 물었다. </p>
<p>&#8220;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 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내려지지 않았으니 태자께서 </p>
<p>당신을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시오?&#8221; </p>
<p>물계자는 대답했다. </p>
<p>&#8220;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8221; </p>
<p>&#8220;그렇다면 이 일을 임금께 사뢰는 게 좋지 않겠소?&#8221; </p>
<p>그가 말하자 물계자는 대답했다. </p>
<p>&#8220;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림은 지사가 할 바가 아 </p>
<p>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8221; </p>
<p>내해왕 20년 을미(215)에 골포국등 세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를 </p>
<p>쳤다. 그러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이 때 </p>
<p>도 물계자가 죽인 적병의 시체는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거론치 않았다. </p>
<p>물계자는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p>
<p>&#8220;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만나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 </p>
<p>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고 했소. 보라와 </p>
<p>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런데도 나는 일 </p>
<p>찍이 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 어찌 불충이 아니겠소. 이미 불 </p>
<p>충으로서 임금을 섬겨 아버님께 그 누가 미쳤으니 어떻게 효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p>
<p>충과 효의 도를 잃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에 설 수 있겠소.&#8221; </p>
<p>이에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는 사체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대나무 </p>
<p>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 </p>
<p>냇물 소리에 비겨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붙이고 하였다. 그는 그 곳에 숨어 다시는 세 </p>
<p>상에 나오지 않았다. </p>
<p>번호:9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1 길이:30줄 </p>
<p>영여사(迎如師) </p>
<p>실제사의 중 영여의 족속과 성씨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덕과 행실이 모 </p>
<p>두 높았다. 경덕왕은 그를 맞아 공양을 드리기 위해 사자를 보내서 불렀다. 영여가 대 </p>
<p>궐에 들어가 제를 마치고는 돌아가려 하자, 왕은 사자를 보내 그를 절에까지 모셔 드 </p>
<p>리도록 했다. 그는 절에 들어서자마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숨어버렸다. 사자가 와 </p>
<p>서 아뢰니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겼고, 그를 국사에 추봉했다. 또한 그 후로 다시는 세 </p>
<p>상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 절을 국사방이라 부른다. </p>
<p>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 </p>
<p>삽량주의 동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포천산이 있다. 그 곳에는 석굴이 있었는데, </p>
<p>그 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와 마치 사람이 깎아놓은 것같았다. 그 곳에 성명 </p>
<p>이 자세하지 않은 다섯 비구가 와서 아미타불을 염하고 서방정토를 구하고 있었다. 그 </p>
<p>러기를 몇 십년만에 서쪽으로부터 홀연히 성중(聖衆)이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p>
<p>다섯 비구는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오랄가다가 통도사 문밖에 이르러 머물 </p>
<p>렀는데, 그 때 간간이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절의 중이 나와보니 다섯 </p>
<p>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버리더니 큰 광명을 발하면 </p>
<p>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절의 중이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정자를 짓고 치루(置 </p>
<p>樓)라 이름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p>
<p>염불사(念佛師) </p>
<p>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p>
<p>절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중이 있었다. 늘 아미타불을 염하였는데 그 소리가 </p>
<p>성 안에까지 들려 360방 17만호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높고 낮음이 </p>
<p>없는 소리는 하결같이 낭랑하였다. 그로써 그를 이상히 여기며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p>
<p>없었으며 그를 모두 염불사라 불렀다. </p>
<p>그가 죽자 그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 </p>
<p>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라 했으니 마을 이름 </p>
<p>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p>
<p>번호:9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2 길이:50줄 </p>
<p>효선(孝善) 제 9 </p>
<p>진정사(眞定師) 효선쌍미(孝善雙美) </p>
<p>법사 진정은 신라 사람이다. 속인으로 있을 때는 군대에 예속해 있었는데 집이 </p>
<p>가난하므로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에 복역하면서도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 </p>
<p>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집안에 재산이라고는 단지 다리 부러진 솥 하나가 있을 뿐 </p>
<p>이었다. </p>
<p>하루는 어떤 중이 문전에 와서 절 지을 쇠붙이를 구하자 어머니는 중에게 솥을 </p>
<p>보시했다. 이어서 진정이 밖에서 돌아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사실을 말하고 또한 아들 </p>
<p>의 의사가 어떤가를 살폈다. 진정은 기쁜 얼굴로 어머니께 말했다. </p>
<p>&#8220;불사에 시주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솥은 비록 없으나 무엇이 걱정되 </p>
<p>겠습니까.&#8221; </p>
<p>그러고는 솥대신 와분(瓦盆)으로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p>
<p>일찍이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을 하여 이로움을 준다 </p>
<p>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이내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 어머니께 말햇다. </p>
<p>&#8220;효도를 다한 후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겠습니다.&#8221; </p>
<p>&#8220;불법은 마난기 어려웁고, 인생은 너무도 빠르느니라. 허니 효도를 다한후에라면 </p>
<p>또한 늦을 것인데 어찌 내 죽기 전에 네가 불도를 깨달음만 하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p>
<p>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야.&#8221; </p>
<p>어머님이 말씀에 진정은 말했다. </p>
<p>&#8220;어머님 만년에 옆에 있을 이는 오로지 저 뿐인데, 어머님을 버리고 차마 출가할 </p>
<p>수 있겠습니까?&#8221; </p>
<p>&#8220;아! 이 어미 때문에 네가 출가하지 못한다면 너는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p>
<p>것이다. 비록 생전에 삼로칠정(매우 풍성한 음식물)으로 날 봉양한다 해도 어찌 효도 </p>
<p>가 되겠느냐. 나는 비록 남의 문전에서 의식을 얻더라도 또한 천수를 누릴 것이니, 네 </p>
<p>가 기어이 효도를 하려 한다면 그런 말을 말아라.&#8221; </p>
<p>어머니의 간곡한 말씀에 진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말씀을 마치자 즉 </p>
<p>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털었다. 모두 일곱되였다. 그날 이 쌀로 모두 밥을 짓고서 어머 </p>
<p>니는 말했다. </p>
<p>&#8220;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네 길이 더딜까 두렵다. 내 보는 아파에서 한되 밥 </p>
<p>을 먹고 나머지 여섯 되 밥을 싸가지고 어서 떠나거라. 어서.&#8221; </p>
<p>진정은 흐느껴 울며 굳이 사양했다. </p>
<p>&#8220;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만도 자식된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p>
<p>며칠간의 미음거리마저 모두 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어라 하겠습니까?&#8221; </p>
<p>하며 세번을 사양하자 어머니는 세 번 연거푸 권했다. </p>
<p>진정은 차마 그 뜻을어기기 어려웠다. 집을 떠나 밤낮으로 걸어 3일만에 태백산 </p>
<p>에 도착했다.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 깎고 제자가 되었는데 진정이라 이름하였다. 그 </p>
<p>곳에 있은 지 3년후 어머니의 부고가 이르렀다. 진정은 가부좌로 선정에 들어갔다가 </p>
<p>7일만에 일어났다. </p>
<p>설명하는 이는 말했다. </p>
<p>&#8216;추모와 지극한 슬픔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다.&#8217; </p>
<p>고 했다. 혹은, </p>
<p>&#8216;선정으로 어머님이 환생하신 곳을 관찰하였다.&#8217;고 햇으며 또 어떤이는, </p>
<p>&#8216;이것은 실리와 같이하여 명복을 빈 것이다.&#8217; 고 했다. </p>
<p>선정을 마치고 나온 뒤 그 일을 의상에게 고했다.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 </p>
<p>산 추동에 가서 초가를 짓고 3천명의 제자를모아 화엄대전을 약 90일 동안 강론했다. </p>
<p>문인 지통이 강론하는데 따라 그 요지를 뽑아 2권의 책을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라 하 </p>
<p>여 널리 세상에 폈다. 강을 다 마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p>
<p>&#8216;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하였다.&#8217; </p>
<p>번호:9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3 길이:60줄 </p>
<p>대성(大城) 효(孝) 2세부모(二世父母) 신문왕대 </p>
<p>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p>
<p>성과 같아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p>
<p>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무자인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여 그 </p>
<p>집에서 준 약간의 밭으로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그 때 개사 점개가 6륜회(六輪會)를 </p>
<p>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와 보시할 것을 권하자 , 복안은 베 50필을 주었다. 점개는 </p>
<p>주문을 읽어 복을 빌었다. </p>
<p>&#8220;단월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p>
<p>만배를 얻게 되오니 안락하고 장수하실 것입니다.&#8221; </p>
<p>대성이 이 말을 듣자 뛰어 들어가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p>
<p>&#8220;졔가 문간에 오신 스님의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배를 얻 </p>
<p>는다고 합니다. 생각하니 저에겐 숙선이 없어 지금에 와서 곤궁한가 합니다. 그러니 </p>
<p>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곤란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 </p>
<p>을 법회에 보시해서 후일의 응보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8221; </p>
<p>어머니도 좋다고 하여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후 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p>
<p>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렸다. </p>
<p>&#8216;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8217; </p>
<p>집안 사람들은 매우 놀라서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했다. 대성이 과연 </p>
<p>죽었는데 그날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 </p>
<p>이를 낳았다. 아이는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만에야 폈는데 손바닥에 대성이 </p>
<p>라고 새겨진 금간자가 있었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모량리의 어머니를 모셔다 </p>
<p>함께 봉양했다. </p>
<p>이제 장성하니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마리를 잡았는데 그 </p>
<p>날 밤 산밑의 마을에서 유숙했다. 그날 밤 꿈을 꾸는데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 </p>
<p>어 말했다. </p>
<p>&#8220;어찌하여 네가 나를 죽였느냐? 내 환생하여 너를 잡아 먹으리라.&#8221; </p>
<p>대성이 두려움으로 용서해 달라고 청하자 귀신은 물었다. </p>
<p>&#8220;그럼 네가 나를 나를 위해서 절을 세워 주겠느냐?&#8221; </p>
<p>대성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꿈에서 깨어보니 땀이 흥건히 나서 자리를 적시었 </p>
<p>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기를 그치고 곰을 위해서 곰을 잡은 자리에다 장수사를 </p>
<p>세웠다. 그로 인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원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이승 </p>
<p>의 양친을 의해 불국사를 세웠으며,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워 신림,표훈 두 </p>
<p>성사를 청해서 각각 거주하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우며 부모의 양육한 수고에 </p>
<p>답했으니 한 몸으로 2세(전세, 현세)의 두 부모에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보기 드 </p>
<p>문 일이었다.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8221; </p>
<p>장차 석불을 조각하려고 커다란 돌을 다듬어 감개를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조 </p>
<p>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해 하다가 어렴풋이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p>
<p>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잠이 깨어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p>
<p>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p>
<p>이로써 그 곳 이름을 향령이라 했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 </p>
<p>한 기공이 동도(경주)의 여러 절 중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p>
<p>옛 향전에 기재된 것은 이상과 같은데 절 안의 기록은 이렇다. </p>
<p>&#8216;경덕왕 때에 대상,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751)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 </p>
<p>공왕 때를 거쳐 대력 9년 갑인(774)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 </p>
<p>다. 처음에 유가교의 고승 항마를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하게 했고 이를 계승하여 오 </p>
<p>늘에 이르렀다.&#8217; </p>
<p>이렇듯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알 수 없다. </p>
<p>기리러 읊는다. </p>
<p>모량 봄날에 3묘전을 보시하고 </p>
<p>향령 가을이 되니 만금을 거두었다. </p>
<p>훤실은 백년 사이에 빈과 부와 귀를 보았고 </p>
<p>괴정은 한 꿈 사이 2세를 오고 갔네. </p>
<p>향득사지하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 경덕왕대 </p>
<p>능천주에 향득이란 사지가 있었다. 혹독한 흉년으로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p>
<p>되자 향득은 다리살을 베어 봉양했다. 고을 사람들이 자세히 이 사실을 상주하니 이에 </p>
<p>경덕왕은 상으로 조 5백석을 하사했다. </p>
<p>번호:10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7 길이:53줄 </p>
<p>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 </p>
<p>손순은 모량리 사람이며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 </p>
<p>께 남의 집 품팔이로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p>
<p>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이를 </p>
<p>민망히 여긴 손순이 그 아내에게 말햇다. </p>
<p>&#8220;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 그런데 아이가 어 </p>
<p>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기 때문에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오. 허니 아이를 매장시 </p>
<p>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려야겠소.&#8221; </p>
<p>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석종을 얻었는데 기이하 </p>
<p>였다. 그들 부부는 놀래고 괴이하게 여겨 나무 위에 잠깐 걸어놓고 두드렸더니 은은한 </p>
<p>소리가 듣기에 퍽 좋았다. </p>
<p>아내는 말했다. </p>
<p>&#8220;이 이상한 물건을 얻음은 필경 아이의 복인 듯 합니다. 허니 이 아이를 묻어서 </p>
<p>는 아니 되겠습니다.&#8221; </p>
<p>남편은 아내의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p>
<p>종을 들보에 매달아 두드렸더니 대궐에까지 종소리가 들렸다. </p>
<p>이 소리를 흥덕왕이 듣더니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p>
<p>&#8216;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맑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니 보통 종소 </p>
<p>리와는 다르다. 빨리 가서 조사해 오라.&#8221; </p>
<p>임금의 사자가 그 집에서 조사하더니 사실을 임금에 아뢰자 임금은 말했다. </p>
<p>&#8216;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다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p>
<p>아이를 묻으려 하매 땅속에서 석종이 솟아 나왔으니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p>
<p>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8221; </p>
<p>하시며 집 한채를 내리고 매년 벼 50석을 주어 극진한 효성을 숭상했다. 손순은 </p>
<p>예전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홍효사라 하였으며 석종을 모셔 두었다. </p>
<p>진성왕 때에 횡포한 후백제의 도적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p>
<p>남아 있다. 그 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이라 햇는데 잘못 전해져 지금은 지량평이라 한 </p>
<p>다. </p>
<p>빈녀양모(貧女養母) </p>
<p>효종랑이 남산의 포석정에서 놀고자 하니 문객들은 모두 달려 왔으나 두 사람이 </p>
<p>뒤늦게 왔다. 이에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p>
<p>&#8220;분황사 동쪽 마을에 20세 가량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이 먼 어머니를 </p>
<p>껴안았는데 서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까닭을 물었습니 </p>
<p>다. 그들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 그여자는 양식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여러 해 동안 </p>
<p>봉양해 왔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의문자수(걸식하여 살아감)도 어렵게 되자 남의 집 </p>
<p>품팔이를 해서 곡식 30석을 모아 주인집에 맡겨놓고 일해 왔었답니다. 날이 저물면 쌀 </p>
<p>을 사와서 밥을 해 먹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집에 가서 일을 했다 </p>
<p>나요. </p>
<p>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거친음식)을 먹을 때 </p>
<p>는 마음이 편하더니 오새 향갱(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p>
<p>편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가 통곡하 </p>
<p>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이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 </p>
<p>란(색양을 하지 못함. 색양은 부모의 마음을 편하 하는것)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 </p>
<p>로 껴안고 울고 있다는 것이엇습니다. 이걸 구경하느라고 늦었습니다.&#8221; </p>
<p>이 말을 듣고 효종랑은 측은하여 곡식 1백곡을 보냈다. 낭의 양친도 옷 한 벌을 </p>
<p>보냇으며, 수많은 낭들도 조 1천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p>
<p>왕에게 이 일이 알려지자, 진성왕은 곡식 5백석과 집 한채를 내려주고 군사를 보 </p>
<p>내어 그 집을 호위하여 도둑을 막게 했다. 또 그 방리를 표창해서 효양리라 했다. 그 </p>
<p>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고 양존사라 했다. </p>
<p>번호:10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16 15:15 길이:143줄 </p>
<p>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p>
<p>이 기 백 </p>
<p>1. 머리말 </p>
<p>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그러하긴 하지만, 특히 사학서의 경우에는 그것이 지니는 </p>
<p>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는 크게 다르다. 가령 저술 당시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p>
<p>의미를 지니던 것이라도 현대에는 이렇다 할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p>
<p>가 하면 이와 정반대 되는 경우도 또한 있는 것이다. 물론 저술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 </p>
<p>늘에도 중요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또 단일한 역사서에 </p>
<p>있어서도 저술 당시에 중요시되던 측면이 현대에는 도리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오히 </p>
<p>려 그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던 측면이 도리어 현대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 </p>
<p>한 점을 분명히 가려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강조해 말하자면 그러한 </p>
<p>사고방법은 역사학의 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고방식을 역사가들 자신이 무 </p>
<p>시하고 양자를 뒤범벅해서 사람들을 혼란 속에 몰아넣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p>
<p>필자는 이점을 분명히 가려서 삼국유사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도록 노력해 볼까 한다. </p>
<p>그리고 삼국유사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필 </p>
<p>자는 이를 주로 역사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역사적 의의나 </p>
<p>현대적 의의는 곧 사학사에 있어서는 역사적 의의요 현대적 의의가 된다. 이러한 점을 </p>
<p>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서로서의 성격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p>
<p>2. 史書로서의 삼국유사 </p>
<p>삼국유사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는것이 하나의 좋은 방 </p>
<p>법이다. 이 두 사서는 150년 가량의 간격을 두고 저술된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사서 </p>
<p>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p>
<p>우선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 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 </p>
<p>였던 데 대해서,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였다. 이 점은 </p>
<p>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재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는 중 </p>
<p>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p>
<p>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 </p>
<p>를 갖추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를 무어라 불러야 좋은 것인지를 필자는 잘 모 </p>
<p>르지만,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p>
<p>사서류 인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우선 삼국유사가 지니는 첫째 특징이다. </p>
<p>삼국유사의 편목(篇目)중에는 중국의 양,당,송 3고승전의 체재를 방불케 하는 것 </p>
<p>들이 있다. 이에 근거해서 삼국유사가 중국의 3고승전의 체재를 따른 것으로 보는 견 </p>
<p>해가 있다. 일연이 중국의 3고승전에서 편목을 취해온 대목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p>
<p>러나 탑상(塔像)과 같은 편목은 중국 고승전에는 없다. 게다가 불교관계가 아닌 史話 </p>
<p>를 편집해 놓은 편목이 王曆과 杞異의 둘이 있으며, 그 분량은 전체의 반이나 된다. </p>
<p>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중국의 고승전들의 체재를 기본으로 하고, 역경(譯經)같은 편목 </p>
<p>이 빠지기 때문에 10科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왕력이나 기이를 첨가했을 것으로 보는 </p>
<p>견해는 따르기 힘들다. 삼국유사는 일반사화나 불교사화를 가리지 않고, 저자 일연의 </p>
<p>관심이 가는 사화들을 수집하여 이를 적절히 분류 편집하였다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 </p>
<p>물론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 </p>
<p>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 </p>
<p>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민중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p>
<p>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 </p>
<p>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 </p>
<p>록하였다. 이 점에서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 </p>
<p>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p>
<p>둘째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p>
<p>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 </p>
<p>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p>
<p>원칙적으로 삼국사기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 </p>
<p>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修正可筆)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 </p>
<p>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p>
<p>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고 있다. 가령 기이 </p>
<p>편의 첫 조목인 고조선조를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위서(魏書), 고기(古記),구당서 </p>
<p>배구전(裵矩傳)의 세 인용문으로 되어있다. </p>
<p>(1) 위서에 이르기를 &#8220;지금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도를 아사달에 세 </p>
<p>우고&#8230;&#8230;&#8221; </p>
<p>(2) 고기에 이르기를 &#8220;옛적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8230;&#8230;&#8230;&#8221; </p>
<p>(3) 당 배구전에 이르기를 &#8220;고려는 본래 고죽국인데&#8230;&#8230;..&#8221; </p>
<p>즉 고조선조를 구성하는 (1),(2),(3)의 세 부분은 곧 세 인용문이다. 일연은 자 </p>
<p>신의 의견을 협주(挾註)로 기입하여 인용문과는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p>
<p>양자를 혼동할 가능성은 없다. </p>
<p>이러한 원칙은 대개 관철되고 있다. 그러나 때로 일연은 자기의 의견을 본문 속 </p>
<p>에서 말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그것이 협주로써 만족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경우 </p>
<p>에 특히 그러하다. 이러 때에도 일연은 그것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밝혀두곤 했다. </p>
<p>그 하나의 예를 권 3 흥법편의 아도기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p>
<p>(1) 신라본기 제 4에 이르기를 &#8220;제 19 눌지왕 때에 사문 묵호자가 고려로부터 일 </p>
<p>선군에 이르렀는데 군인 모례가 집안에 굴실(堀室)을 만들고 안치하였다&#8230;&#8221; </p>
<p>(2) 아도본비를 살피건대, 이르기를 &#8220;아도는 고려인이다. 어머니는 고도령인데.&#8221; </p>
<p>(3) 이에 의하건대 본기와 본비의 이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p>
<p>(4) 일찌기 이를 시론하건대 양,당의 이승전(二僧傳)및 삼본국사가 모두 고루려, </p>
<p>백제 2국의 불교의 시작을 실었는데&#8230;. </p>
<p>(5) 또 원위(후위)의 석담시전을 살피건대 이르기를 &#8220;始는 관중인인데 출가한 이 </p>
<p>후 많은 이적(異迹)이 있었다&#8230;&#8230;.&#8221; </p>
<p>(6) 논의하여 말하건대 담시는 대원 말에 해동에 와서 의회 초기에 관중으로 돌 </p>
<p>아갔은즉 여기에 머물기 10여년 이었으니 어찌 동사에 기록이 없겟는가&#8230; </p>
<p>(7) 찬하여 이르기를&#8230;&#8230; </p>
<p>이에 의하면 (1)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부터의 인용이고, (2)는 지금은 망실된 </p>
<p>아도본비의 인용이다. 그리고 이어 (3)에서 위의 두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 </p>
<p>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연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일연은 자기의 견해 </p>
<p>를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차이의 지적보다도 (4)이하는 바로 일연 </p>
<p>이 신라 불교 초전(初傳)의 인물과 시대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나타낸 당당한 고증이 </p>
<p>고, 그 결론은 현대의 역사가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명쾌한 탁설(卓說)이다. 이어 일 </p>
<p>연은 석담시전을 인용하고(5), 또 그 내용에 대해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6) </p>
<p>마지막 찬(讚)(7)은 역시 일연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때에 </p>
<p>그는 항상 <상시론지><議曰> 등으로 분명히 자기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삼 </p>
<p>국유사의 편찬은 전거(典據)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기의 </p>
<p>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p>
<p>다만 유감인 것은 본문의 인용문 중에는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들도 상당히 </p>
<p>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연의 편찬방침과 어긋나는 이러한 대목들이 상당히 </p>
<p>있다는 것을 근거로 위의 원칙이 처음부터 일연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할 사 </p>
<p>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당시에는 거의 출처를 밝힐 필요가 없 </p>
<p>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고, 따라서 너무 자주 출처를 밝혀야 한느 번거로움을 피한 때 </p>
<p>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p>
<p>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데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 </p>
<p>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세째 특징이다. 그가 수집한 사료들 중에 </p>
<p>는 감산사조상기 같은 금석문이 있다. 그 협주에 &#8220;글은 그 뜻이 분명히 않으나 단지 </p>
<p>고문을 보존할 뿐이다.&#8221;라고 한 것을 보면, 남이 베껴놓은 조상기를 다시 베낀 느낌도 </p>
<p>있기는 하지만 아마 그가 직접 조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직접 각처의 </p>
<p>유적을 답사한 관찰기가 나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가령 일연이 경주 황룡사지에 </p>
<p>있었다는 가섭불연좌석에 대하여, </p>
<p>일찌기 한번 보았는데, 돌의 높이가 5,6척이나 되었고, 둘레는 겨우 세발이었다. </p>
<p>우뚝히 섰는데 위는 편편하였다.(권 3 탑상) </p>
<p>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불국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감산사에도 그는 직접 가 보았 </p>
<p>을 것으로 생각된다. </p>
<p>또 고문서도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경종때 경순왕 김부에 대한 책 </p>
<p>상부고(冊尙父誥)를 들 수 있다.(권2 기이편, 김부대왕조) 이 책상부고는 원문을 처음 </p>
<p>부터 끝의 서명부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베껴놓았으며, 서명을 한 것과 안한 것 또 </p>
<p>관직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경우까지도 밝혀놓고 있다.비록 이 고문서 자체는 다시 대할 </p>
<p>길이 없겠지만 이 인용만으로써도 훌륭한 고문서 자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p>
<p>고문서 중에는 많은 사지(寺誌)들이 포함되며, 그 밖에 도전장(都田帳)같은 관청의 공 </p>
<p>문서도 있다. </p>
<p>일연이 삼국유사에 향전(鄕傳)과 같은 민간 전승기록을 전하여준 것은 특기할 만 </p>
<p>한 일이다. 이 향전은 바로 민중의 견해를 말하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 </p>
<p>컨대 법흥왕이 이차돈을 사형에 처한 것을 흔히는 법흥왕의 위신을 손상하지 않은 방 </p>
<p>향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향전은, </p>
<p>촉이 왕명이라 하여 공사를 일으켜 절을 세울 뜻을 전하였는데, 군신이 와서 간 </p>
<p>하였으므로 왕은 이에 촉에게 책임지어 노하고 왕명을 거짓 전햇다는 이유로 처형하였 </p>
<p>다.(권3, 흥법) </p>
<p>고했다. 이를 보면 마치 법흥왕이 이차돈에게 배신한 것 같은 느낌을 풍겨주고 있다. </p>
<p>이것은 향전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면이고, 또 아마 이것이 진실이었을 것이다. </p>
<p>요컨대 일연은 현대 역사가들의 사료수집을 연상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 </p>
<p>한 노력은 물론 자기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p>
<p>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짧은 기간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삼국유사의 </p>
<p>저술을 위하여 오랜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말하여 준다. 일연은 여러 사료를 </p>
<p>널리 수집하여 그들 사료 사이에 개재되는 차이점을 가리고 나아가서 자기의 고증을 </p>
<p>첨가함으로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p>
<p>3. 역사적 위치 </p>
<p>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삼국유사의 특색은 저자 일연이 어떤 강한 목적의식을 </p>
<p>갖고 이를 저술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일연은 자기가 하고 싶은 </p>
<p>이야기의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선택된 주제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전거 </p>
<p>에 의하여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p>
<p>다. <유사(遺史)>라는 겸손한 책제(冊題)로 인하여 이를 한낱 한가한 여업(餘業)의 성 </p>
<p>과로서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적어도 삼국유사의 저술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하는 </p>
<p>데 소요되었을 때 노력만도 적은 일이 아니었을 것임은, 그런 작업을 해본 사람이면 </p>
<p>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p>
<p>그러면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를 통하여 저자가 하고 싶은 이 </p>
<p>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점은 삼국유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격을 통해서 짐작할 </p>
<p>수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데 대해서 비합 </p>
<p>리적인 사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삼국유사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 서술 </p>
<p>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된 관심은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에 놓 </p>
<p>여있었다. 가령 태종무열왕에 관한 대목에서, </p>
<p>왕이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먹더니,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뒤에는 점심을 </p>
<p>그만두고 단지 조석뿐이었는데, 그러나 계산함ᄂ 하루에 쌀 6말, 술 6말, 꿩 10 </p>
<p>마리였다.(권 1 기이편) </p>
<p>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는 따위이다. 더욱 재미있는 경우는 김유신에 관한 기사이다. </p>
<p>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전기가 무려 3권에 걸쳐 있고, 그 대부분이 통일을 위한 전쟁 </p>
<p>기사로 메워져 있는 데 대해서, 삼국유사에는 다만 가족관계와 출생에 대한것, 삼산여 </p>
<p>신과의 관계, 재매부인과 송화방에 대한 이야기, 홍무대왕 추봉과 그의 무덤의 소재만 </p>
<p>이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분량의 대부분을 삼신여신과의 이야기를 기록하는데 </p>
<p>소비하고 있다. </p>
<p>이 점을 일연 자신은 신이(神異)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의 다음과 같은 </p>
<p>말로써 알 수 있다. </p>
<p>그런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p>
<p>그 신이가 제편의 처음에 실린 까닭은 그 뜻이 여기에 있다.(권 1 기이) </p>
<p>이에 의하면 기이라는 편명은 <신이를 기록한다>는 뜻인 것임이 분명하게 된다. </p>
<p>그러나 비단 기이편만이 아니라 &#8220;삼국유사&#8221; 전체가 바로 이러한 방침 아래 저술되었던 </p>
<p>것이다. </p>
<p>삼국유사는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의 9편으로 되어있다. </p>
<p>이를 크게 분류하여 보면 연표인 왕력과, 역사적인 신이사를 적은 기이와,그 밖의 불 </p>
<p>교 관계 기사를 실은 7편과로 3대분할 수가 있다. 만일 왕력이 원래 독립된 1서이던 </p>
<p>것이 삼국유사의 일편으로 첨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두번째와 세번째의 둘 </p>
<p>로 양대분되는 셈이다. 그런데 기이편과 같이 그 내용에 대한 풀이를 저자 스스로가 </p>
<p>해주지는 않고 있지만, 종교적인 신앙을 북돋아주기를 바라고 잇는 불교 관계 기사 </p>
<p>들도 바로 신이의 기록 그것인 것이다. 이차돈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순교함으로써 </p>
<p>여러 기적을 낳게 하여 불교를 공인하게 하였다. 혜숙이 죽어서 촌인들이 이현 동쪽에 </p>
<p>장사를 하였는데, 고개 서쪽으로부터 오던 사람이 도중에 혜숙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 </p>
<p>다. 또 욱면이라는 여비(女婢)는 신앙의 힘에 희하여 산 육신의 몸으로 지붕을 뚫고 </p>
<p>하늘을 날아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김대성은 자기집 용전을 법회에 보시함으로써 가 </p>
<p>난한 집으로부터 재상가에 전생(轉生)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 </p>
<p>세번째 부분이 곧 신이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일 수가 </p>
<p>없다. </p>
<p>이렇게 보면 결국 삼국유사 전체가 신이의 기록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삼 </p>
<p>국유사의 기사 내용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신이란 바로 비합리적인 사실 </p>
<p>들을 말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였다고 </p>
<p>하겠다. 그러면 일연이 이렇게 신이만을 적고자 한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 </p>
<p>까. </p>
<p>그것은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고려후기에 </p>
<p>접어들면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이 풍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관은 특히 관찬 </p>
<p>사서(官撰史書)를 중심으로 지배적인 풍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항하고 </p>
<p>나선 것이 삼국유사 였던 것이다. 일연이 유교의 합리주의에 비판적 이었던 것은 그가, </p>
<p>대체로 옛날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교(敎)를 베푸는 데 있어 </p>
<p>서 괴력난신(怪力亂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 함 </p>
<p>에 있어서는 부명을 받고 도록를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 후에 </p>
<p>야 능히 대변(大變)을 타고 대기(大器)를 쥐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p>
<p>라고 하여,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데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써 알 수가 있다. 다 아 </p>
<p>는 바와 같이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며, 이 정 </p>
<p>신은 후대의 유교에 일관된 정신이었다. </p>
<p>이 동일한 입장은 효선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일연은 현실적으로 효할 </p>
<p>뿐만 아니라 신앙면에서 선하기도 해야, 즉 효선쌍미해야 내세에 가서도 효할 수 있는 </p>
<p>것이 되며, 그럼으로써 가장 지극한 효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 </p>
<p>므로 진정사가 가난한 홀어머니를 버리고 입산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효가 아니었 </p>
<p>다. 진정산느 의상에게 부탁하여 화엄경을 강하게 함으로써 그 어머니를 천상계에 전 </p>
<p>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불교적 입장은 분명히 유교의 현세주의 합리주의에 비 </p>
<p>판적이라고 할 밖에 없다. 이 같은 입장이 앞서 지적한 두 가지 주제로 나타났던 것이 </p>
<p>다. </p>
<p>첫째 주제인 일반적인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요컨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 </p>
<p>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 </p>
<p>는 중국이 아닌 천(天)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이 천상에 계 </p>
<p>신 환인의 손자였다든가, 신라 호국삼보의 하나인 옥대는 천사가 주었다든가, 또 통일 </p>
<p>신라의 평화의 상징인 만파식적이 문무왕의 변신인 해룡과 김유신의 후신인 천신이 합 </p>
<p>심하여 만들어준 것이었다든가 한데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p>
<p>그리고 일연은 한국사의 기원에 대하여 고조선-> 위만조선->마한으로 이어지는 </p>
<p>체계를 세움으로써, 그것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또 신이한 것임을 자랑스 </p>
<p>러이 기술하였다. 원의 정치적 간섭이 불가피했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p>
<p>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p>
<p>둘째 주제인 불교적 신이에 대한 서술은 요컨대 신앙의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 </p>
<p>불교 관계 기록은 우선 양적으로도 전체의 반을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뿐만 </p>
<p>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적 잘 정리된 불교문화사인 것이다. 흥법편은 일종의 불교 미 </p>
<p>술자료집이며, 의해편은 고승전이며, 신주편은 밀교사이며, 감통편은 신앙상의 기적기 </p>
<p>이며, 피은편은 신앙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효선편은 신앙과 가정과의 문제에 대한 </p>
<p>기록들이다. 이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은 모두 현실세계의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 </p>
<p>가능한 신앙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의 세계는 석가불 이전의 가섭불과도 </p>
<p>연결되고, 혹은 또 미래불인 미륵불과도 연결되는 세계였다. </p>
<p>이같이 신이의 설화로써 합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설화들이 틀림없 </p>
<p>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술이 전거를 중요 </p>
<p>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p>
<p>삼국유사의 세계는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의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였다. 이 세계 </p>
<p>는 당시의 사학계가 이루어놓은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진적인 자세와는 다른 복 </p>
<p>고적인 것이었다.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볼때에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성격을 지닌 </p>
<p>삼국유사의 위치는 이같이 규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p>
<p>4. 혀대적 의의 </p>
<p>삼국유사가 사서로서 지니는 여러가지 측면들을 검토해본 결과, 그가 지니는 역 </p>
<p>사적인 위치를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p>
<p>삼국유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의까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는 반 </p>
<p>대인 것이다. 그러면 삼국유사가 현대 한국사학에서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이는 다 </p>
<p>음의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p>
<p>첫째는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전거를 밝 </p>
<p>혀주었음으로 해서 그러하다. 전거를 제시한 인용문은 일연이 이를 자의로 변경하고 </p>
<p>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는 달리 소박한 표현들이 </p>
<p>그대로 남아서 전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무한한 가치 </p>
<p>를 제공해주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원전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 </p>
<p>히 그러하다. </p>
<p>다만 일연은 반드시 원사료의 전문을 충실히 인용하는 방법을 스고 있지를 않다. </p>
<p>가령 &#8220;감산사조상기&#8221;는 원문의 몇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오독(誤讀)으로 인 </p>
<p>한 많은 잘못이 있다. 또 고조선조에 인용된 구당서 배구전의 글도 완전히 문장이 일 </p>
<p>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인용문의 자구의 변탈(變脫)에 별로 개의치 </p>
<p>않음이 삼국사기와 취재표준이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분명히 일련의 인용문에는 자 </p>
<p>구의 탈락과 변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탈락이거나 오독이나 </p>
<p>필사의 잘못에 의한 것이지, 내용의 변개는 아니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기사가 삼 </p>
<p>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 나올때 삼국유사가 흔히 원사료의 본 모습을 더많이 전해주 </p>
<p>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이전의 원사료명의 제시는 그 사료적 가치를 크게 </p>
<p>더해주는 것이다. </p>
<p>둘째로는 유교의 더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이것은 근대사 </p>
<p>학도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던 과제였다. 근대사학은 정치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사회 </p>
<p>적 경제적 및 문화적인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 </p>
<p>적인 정치사관의 극복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폭넓은 문화사적 측면을 </p>
<p>제시해준 삼국유사는 특히 문화사가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될 수 밖에 없었다. 가령 위 </p>
<p>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 민속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 </p>
<p>다. 삼국유사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국 원시문화의 숲을 헤쳐가는 듯한 기분을 누구 </p>
<p>나 맛보게 된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이들 신화와 민속의 세계는 근대사학의 보고와 같 </p>
<p>이 비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또 문학적 측면이 중하게 다루어지고 </p>
<p>있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에는 단 한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는 향가가 10여편이나 수 </p>
<p>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국유사가 불교문화사로서 독자적 지위를 </p>
<p>갖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였다. 그러므로 도덕의 선악과 정치의 흥망과를 직결시켜 </p>
<p>생각하는 좁은 안목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 </p>
<p>사학은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따라서 삼국유사는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p>
<p>세째로는 삼국유사가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지적한 </p>
<p>바와 같은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존중은 곧 그것이 민족적 자주성의 표시였다. 더구 </p>
<p>나 우리나라 역사의 시발점을 고조선에 두고, 단군왕검의 건국신화를 적음으로써 한국 </p>
<p>의 역사가 天과 연결되는 독자적인 것임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위씨 </p>
<p>조선,마한을 거쳐 삼국으로 연결되는 민족사 발전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p>
<p>근대에 민족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배외적인 경향을 띤 중국 중심의 사관에 대한 비판 </p>
<p>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점도 근대사학과 삼국유사는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p>
<p>따라서 근대사학에서 삼국유사가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p>
<p>삼국유사에 대한 이와 같은 근대사학의 평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러 </p>
<p>나 이와 같은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는 점을 잊을 수는 없다. 우선 사료적 가치는 그것 </p>
<p>이 애초에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연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에 속 </p>
<p>한다. 만일 원사료들이 망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 </p>
<p>는 거론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감산사의 두 조상명(造像銘)은 실물이 남아 있 </p>
<p>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略記)되었을 뿐만 아니 </p>
<p>라 잘못된 판독조차 섞여 있는 삼국유사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도덕적 </p>
<p>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사학이 궤를 같이하지만, 그렇 </p>
<p>다고 삼국유사에서 제시된 신이사관(神異史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가 없다 </p>
<p>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이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새로이 시도 </p>
<p>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반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대사학에서 삼국유사가 </p>
<p>지니는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기가 힘들 것이다. </p>
<p>5. 끝맺는 말 </p>
<p>필자는 위에서 주로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삼국유사를 생각하여 보았다. 보는 사 </p>
<p>람의 현재적 입장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비추어서 삼국유사를 평가하는 것에 필자는 비 </p>
<p>판적이었다. 그 결과 삼국유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를 구분하여 고찰 </p>
<p>하게 되었다. 본고의 제 3장과 제 4장이 각기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p>
<p>접근방법이 역사가가 취해야 할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p>
<p>그런데 이러한 방법이 역사가들에 의해서조차 종종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p>
<p>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다. </p>
<p>이러한 이해를 위하여는 사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는 삼국 </p>
<p>유사의 사서로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작업이 본고의 제 </p>
<p>2장에 해당한다. 이에 더하여 사학사의 조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이는 제 3장과 </p>
<p>제 4장에서 각기 언급되었다. </p>
<p>이러한 작업의 결과, 삼국유사가 사학사에서 지니는 역사적 위치가 전진적이기보 </p>
<p>다는 복고적이었지만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도리어 크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떻 </p>
<p>든 삼국유사도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소산이요 또 현재에도 그 생염이 살아 있는 하나 </p>
<p>의 사서인 만큼, 그 긍정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이 아울러 학문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p>
<p>것으로 믿는다. </p>
<p>번호:10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22 00:03 길이:100줄 </p>
<p>삼국유사에 보이는 일연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p>
<p>김 태 영 </p>
<p>1. 서언 </p>
<p>&#8220;삼국유사&#8221;는 고려후기의 충렬왕 7년(1281)경에 완성된바 승 일연의 사찬(私撰) </p>
<p>이다. 그리고 이는 대체로 김부식의 &#8220;삼국사기&#8221;보다는 140년 뒤에 각훈의 해동고승전 </p>
<p>보다는 70년 뒤에 편찬된 불교신앙 관계를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이다. </p>
<p>&#8220;삼국사기&#8221;는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유신(儒臣)이 왕명에 따라 당시까지의 전존사 </p>
<p>료(前存史料)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사관(史官)의 위치에서 삼국 및 통일신라의 역 </p>
<p>사를 편찬한 이른바 정사이다. 해동고승전 역시, 경북오관산 영통사 주지 교학사자사 </p>
<p>문이란 직계를 가진, 당시의 대표적인 교학승(敎學僧)이 역시 왕명에 의하여 가능한 </p>
<p>편의를 제공받아 편찬한 일종의 불교사이다. 그러니 이 두 사서는 각기 삼국시대의 사 </p>
<p>회일반과 불교계에 관한 두 가지 정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사가 엄존하는 </p>
<p>데도 일연은 어째서 다시 승,속의 사실을 혼성하여 &#8220;삼국유사&#8221;를 새로이 찬하게 되었 </p>
<p>던 것일까. </p>
<p>그야말로 선열(禪悅)의 여가에 &#8220;다만 일사유문&#8221;을 편의해 찬집(纂集)&#8221;한 것이었 </p>
<p>을까. 그러나 그처럼 <불용의(不用意)한 일만록(一漫綠)>이기에는 너무나 광박(廣博) </p>
<p>한 고증의 각고가 여기에 기울여져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8220;삼국유사&#8221; 불과 5권 </p>
<p>에 인용된 고증서목(考證書目)은, 오히려 &#8220;삼국사기&#8221; 50권의 것보다 그 다양함이나 치 </p>
<p>밀함에 있어서 전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p>
<p>더구나 이 가운데에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목도점검(目覩點檢)한 것도 상 </p>
<p>당수에 달한다. 이같이 광범한 사료의 수집은 싸 장기간에 걸친 용의주도한 노력을 </p>
<p>요한다. 이 노력이 더구나 30년의 처절한 대몽항전과 화맹에 잇대어진 난세 속에서 경 </p>
<p>주되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p>
<p>이 같은 여러움을 딛고 선 서사는 필연코 어떤 새로운 인식의 산물이었으리라 할 </p>
<p>밖에 없다. 결국 &#8220;삼국유사&#8221;는 저 &#8220;삼국사기&#8221;나 &#8220;해동고승전&#8221;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자 </p>
<p>국의 역사전통에대한 찬자 일연 자신의 어떤 새로운 인식에서 우러난 의돛岵 서사였 </p>
<p>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이 새로운 인식은 어디서 발원한 것이었을까. </p>
<p>2.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p>
<p>고려 의종연간에 와서 폭발한 무인정변은 전통적인 문벌중심,문치편중의 귀족정권 </p>
<p>을 붕괴시킴으로써 고려사회의 전개방향을 크게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제 이 </p>
<p>른바 고려후기 사회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후기의 학자적 </p>
<p>관료인 신진 사인(士人)층이 역사 추진세력으로서의 새로운 의의를 지니면서 등장하는 </p>
<p>것이다. 또한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 불교에는 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창 </p>
<p>도한 바 교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선종의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는 사실을 주목할 필 </p>
<p>요가 있다. </p>
<p>고려중기에 와서 극성을 보이게 된 문신 귀족정권은 왕도중심,중앙귀족 중심의 </p>
<p>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지배체제는 지방저 호족적인 사회세력의 정치참여를 </p>
<p>거부하는 방향의 독선을 자행함으로써 점차 기층사회와의 괴리를 크게 해갔는데, 이에 </p>
<p>복무한 것이 유교적 전제정치의 이념이었다. 유교이념에 의거한 중앙 귀족정치의 전제 </p>
<p>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사이의 유리가 보다 크게 초래된 것이다. 뿐아니 </p>
<p>라 이러한 유리의 필연의 귀결은 오히려 그 지배체제 내부의 반목과 전통적인 자주의 </p>
<p>식의 상실이었다. 귀족 지배체제는 사회와 민중으로부터의 이질적인 유리에 따른 자체 </p>
<p>의 취약성을 도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체제내의 반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 야 </p>
<p>만시해온 여진에 대한 신사(臣事)도 부득이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비록 현실성에 있어 </p>
<p>서는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여진을 제압한다고 표방하고 나선 묘청 등의 칭제건 </p>
<p>원 운동과 이 운동의 가능지반이었던 전통적인 자주의식마저 잔해하는 독선을 자행하 </p>
<p>였다. 김부식의 &#8220;삼국사기&#8221;는 이러한 유교적 전제적 문신 귀족정권의 독선적인 승리 </p>
<p>의 기념물과 같은 것으로 편찬되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의할 바는 이러한 문 </p>
<p>신귀족의 지배체제와 공생공영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것이 화엄,천태로 대표되는 귀 </p>
<p>족적인 교종의 불교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뒷날 화엄종사 각훈의 &#8220;해동고승전&#8221;도 이 </p>
<p>러한 번영의 여광의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p>
<p>이제 무인의 정변과 집권은 이러한 문신귀족의 지배체제를 도되시키기는 하였다. </p>
<p>그러나 무인정권의 폭압 역시 사회와 역사의 바른 질서의 회복을 실현하는 길과는 거 </p>
<p>리가 멀었다. 새로운 무단의 살육과 독재가 계속하는 가운데 문화의 암흑기를 초래한 </p>
<p>것은 물론이요, 중기 문신귀족의 횡행이래 발달하기 시작한 사적대토지 횡탈에 따른 </p>
<p>농장은 이에 이르러 한층 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남북 각처에서는 농민 노예의 </p>
<p>반란이 잇따르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에 강포한 이민족의 침략이 닥쳐왔다. 고종 18 </p>
<p>년(1231)이래 계속된 몽고의 야만적인 침랴과 지배는 참절무비의 민족적 분노와 좌절 </p>
<p>을 체험케 한 것이었다. </p>
<p>그런데 여기에는 이 같은 문무의 독선적인 정권이 자행한 폭압을 겪으면서 그리 </p>
<p>고 몽고와의 30년 항쟁을 치르면서 그 체험의 최전선을 직접 담당하였던 민중 속에서 </p>
<p>직접 양성될 수 밖에 없는 분노와 저항의 의식이 축적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p>
<p>돌파구를 봉쇄당한 민중의 분노와 저항의식은 곧 역사전통에 대한 민족적 의식으로 심 </p>
<p>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화된 민족적 의식이, 보다 지방적이며 보다 </p>
<p>민중 속에서 성장해온 신진 사인층이나 신흥의 선승들에게서 더욱 구체적인 인식을 보 </p>
<p>이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p>
<p>이미 몽고의 침략 이전, 고려 조계종의 2세종주 혜심(1178-1234)은 &#8220;선문염송집&#8221; </p>
<p>을 찬하면서, &#8220;더구나 怡나라는 조성의 삼한 통합이래 선도로써 국운을 떨치고 교학 </p>
<p>으로써 인병을 진압해왔으니, 여기 종지(宗旨)를 깨치고 도를 논구할 전자(典資)가 지 </p>
<p>금과 같이 절급할 수가 없다. 종문학자들이 목마름에 마실 것을 바라며 배고픔에 먹을 </p>
<p>것을 생각하듯 함이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학도들의 역청(力請)을 입고 조성의 본회 </p>
<p>(本懷)를 생각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불법에 보비(補裨)함이 있게 하기 위하여&#8221;라 </p>
<p>고 그 편찬의 동기를 밝히었다. </p>
<p>경도에의 요치를 위한 최씨 무인정권의 갖가지 역청에는 불응한 채 평생을 산간 </p>
<p>에서만 마쳤던 그로서도 여기 그다지 절급하게 의식되었던 것이 조성(祖聖)에서 전승 </p>
<p>되어 온 역사전통의 새로운 발견과 그 회복을 위한 국가사회적인 요청이었음을 주의할 </p>
<p>일이다. </p>
<p>동시대의 신진 사인 이규보(1168-1241)는 저 고구려 창국의 영웅 동명왕의 사적 </p>
<p>을 읊으면서 &#8220;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려 함이라.&#8221;고 </p>
<p>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자국의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의식의 체현이었다 할 것 </p>
<p>이다. 문신 무인을 막론하고 사회와 민중으로부터 유리된 독선적인 귀족정권의 파벌적 </p>
<p>인 체질과는 달리, 이들 신흥의 지식층은 보다 넓은 국가적인 차원의 민족의식, 자기 </p>
<p>의 역사전통에 대한 긍정의 새로운 인식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p>
<p>&#8220;삼국유사&#8221;는 곧 이러한 의식의 전승에서 빚어진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p>
<p>그것은 단순한 전승에서가 아니라, 흉포한 몽고를 상대로 한 30년 민족의 대항전 속에 </p>
<p>서 더욱 발전적으로 심화되고, 마침내 뿌리칠 수 없게 된 이민족의 압제라는 현실의 </p>
<p>제약하에서, 신흥의 고려 조계종과 일체 관계에 있던 선승 일연(1206-1289)의 손을 빌 </p>
<p>어 민족의 역사에 관한 일대 서사를 낳게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대의 소 </p>
<p>산인 &#8220;제왕운기&#8221;가 현실사회에서는 좌절을 면치 못하고 마침내 벽지로 은둔할 수 밖에 </p>
<p>없었던 신진 사인 이승휴(1224-1300)의 손에서 이루어진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할 것이 </p>
<p>다. </p>
<p>3. 전통의식의 내연(內燃)과 그 발전적 부활 </p>
<p>&#8220;삼국유사&#8221;의 편목은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동,피은,효선의 9편으로 </p>
<p>나누어져 있다. </p>
<p>왕력은 간단한 제왕의 연대기이다. 기이는 불교신앙에 관한 서사를 다소 포함하 </p>
<p>고는 있으나 주로 국가와 사회에 관한 역사를 싣고 있는데, 이 한편의 내용이 무척 커 </p>
<p>서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흥법 이하 효선에 이르는 7편은 불교신앙의 사실 </p>
<p>이 중요한 바탕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신앙 그 자체보다는 국가사회 속에서의 그것 </p>
<p>으로 파악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래서, &#8220;삼국유사&#8221; 전편에 담겨진 내용은, 국가사회 </p>
<p>의 것과 불교신앙관계의 것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며, 더구나 양자는 혼융(渾融)의 </p>
<p>일원적인 사안(史眼)으로 파악되고 있음이 큰 특징이다. </p>
<p>&#8220;삼국유사&#8221;의 편목이 저 중국의 3고승전의 그것과 다소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p>
<p>는 하나, 이가 그와 같은 한갓 불교문화사이기에는 국가사회의 역사를 너무나 크게 다 </p>
<p>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8220;삼국유사&#8221;는 그 선행의 &#8220;해동고승전&#8221;과는 기본적으 </p>
<p>로 입장을 달리한 편찬이었다 하겠다. </p>
<p>그러나 &#8220;삼국유사&#8221;는 물론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었 </p>
<p>다. 이는 어디까지나 산승(山僧)으로서의 일연이 당시의 현실의식에서 출발하여 새로 </p>
<p>이 인식한 바 자국의 역사전통에 관한 선택적인 기록이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아니된 </p>
<p>다. 그리고 선택적인 기록이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찬자 자신의 의식이 좀더 크게 반영 </p>
<p>되어 있다고도 할 것이다. </p>
<p>그래서 우선 &#8220;삼국유사&#8221; 전편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불국토 사상이다. 가령 </p>
<p>그 기이편의 초두에 실린 바 국사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의 출처부터가 불국천인 환인 </p>
<p>제석으로 되어 있음이 그것을 말한다. 신라의 왕통이 불타의 종성인 찰리종이라는 설, </p>
<p>신라의 고도에 남아 있다는 가섭불연좌석의 전불시대 유허설, 황룡사 장육상의 조성에 </p>
<p>보이는 불국유연설등은 모두 신라가 곧 전세불시대 이래의 불국토였음을 긍정하는 기 </p>
<p>사다. 그리고 진신사리의 감응에 따라 요동성의 아육왕탑이 출현하였다거나, 신인의 </p>
<p>지시에 의하여 평양성 서쪽에서 영탑을 찾아내었다는 설화는 고구려가 유연의 불국토 </p>
<p>였음을 말하는 기사이다. &#8220;삼국유사&#8221;에 의하면, 지리상으로는 일찌기 우리 민족의 생 </p>
<p>활무대였던 남북 각지가, 역사상으로는 단군 이래의 고대사 전체가 곧 유연의 불국토 </p>
<p>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p>
<p>그런데 여기 불국토는 단지 부처의 독선과만 유연한 곳은 아니었다. 가령 신도성 </p>
<p>모는 원래 도가류의 소양을 지닌 자였지만, 그러나 이는 다만 장생하는 신선의 술법을 </p>
<p>배워 아득한 독선 속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산신이 되어 국가를 진호하고, </p>
<p>한 가난한 여자의 소원을 들어 불상의 조성을 성취시킴으로써 널리 민중을 위한 제도 </p>
<p>의 길을 열어 놓기에도 이른, 보살행을 다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 또 원래 불국토인 </p>
<p>아유타국의 공주 황옥이 황천상제의 명에 따라 도가의 선물인 반도를 예물로 가지고 </p>
<p>와서 마침내 수로왕비가 되고 치세를 이루었다는 설화도 불,선,혼융의 불국토사상을 </p>
<p>말해준다. 뿐 아니라 &#8220;삼국유사&#8221;에는 거의 전편에 걸쳐 귀천,빈부,승속의 인간은 물론 </p>
<p>천지 산천의 자연이나 용호(龍虎),신귀(神鬼), 나아가서는 조수(鳥獸) 초목의 미물에 </p>
<p>이르기까지, 모두가 성분을 달리하는 대립투쟁의 존재로서보다는, 다 함께 선량한 이 </p>
<p>웃으로서 불국토 질서의 실현에 참여하는 존재로 파악되어 있다. 일연에 의하면 자국 </p>
<p>의 고대사는 이들 다양한 존재들의 혼융의 총화로 엮어지는 장엄한 대행진으로 의식되 </p>
<p>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같은 의식은, 고려중기에 와서 경화되었던 유교적 </p>
<p>인 귀족주의의 독선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바였다할 것이다. </p>
<p>다음으로 &#8220;삼국유사&#8221;는 그 서술의 차례부터가 국가와 왕권의 비중을 크게 말하고 </p>
<p>는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강렬한 서민적 생활의식으로써 그 내용을 점철하고 있음이 </p>
<p>큰 특징이다. 가령 무진주의 상수리인 안길이 왕제요 재상인 차득공과 직접 연결을 가 </p>
<p>졌다는 기사는 지방세력의 중앙진출을 긍정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또 분황사의 천수 </p>
<p>관음은 한 이름없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 그 먼 눈을 뜨게 하며, 민장사의 관음보살은 </p>
<p>한 가난한 여자의 소원을 들어 만리 밖에 표류해간 그 아들을 데려다준다. 황룡사의 </p>
<p>승 정수는 눈 깊은 겨울밤의 길가에서 아이를 낳고 일어죽어가는 거지 모자를 자신의 </p>
<p>체온으로 살려내고 자기의 옷으로 구해주고는 하늘의 지시에 따라 국사가 된다. 이량 </p>
<p>공의 가노였던 지통이나 아간 귀진 집의 비녀였던 욱면은 그 주인인 귀족이나 혹은 </p>
<p>사장(師丈)보다도 먼저 성불의 길에 오른다. 그리고 가난한 품팔이 생활로 어머니를 </p>
<p>봉양하던 대성이 마침내는 재상으로 환생한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효선 전편의 내용은 </p>
<p>비록 빈곤 무탁의 신분으로써도 그 효선에 따라 대성을 응보받는다는 서민들의 생활설 </p>
<p>화로 되어있다. </p>
<p>삼장을 통달한 고승이요 신문왕대의 국로로 존숭받던 경흥이 말을 타고 의장을 </p>
<p>갖추어 예궐(詣闕)하는 도중, 건어(乾魚)가 든 광주리를 짊어진 거지 행색의 한 거사 </p>
<p>를 만나자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8220;너는 승의를 입고서 어찌 부정한 물건을 짊어지고 </p>
<p>다니느냐&#8221; 늙은 거지는 말한다. &#8220;두 다리 사이에 생육을 끼고 다니는 것보다 시장에서 </p>
<p>파는 마른 고기를 등에 짊어진 것이 뭐 잘못이냐.&#8221; 반계급적 의식의 서민설화라 할 것 </p>
<p>이다. 이 같은 반계급의 의식에서 귀납되는 것은 벌거숭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엄 </p>
<p>의 염이다. 의식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의 가치를 자국의 역사전통 속의 서민생활에서 </p>
<p>도출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8220;삼국유사&#8221;는 이러한 서민설화를 고려후기의 </p>
<p>것 까지도 아울러 채록하고 있다. 가령 무식했으나 본성이 순수한 중생사의 점숭은, </p>
<p>&#8220;이 절은 국가에서 기은봉복(祈恩奉福)하는 곳이므로 마땅히 文,疏를 해독하는 자가 </p>
<p>맡아야 한다.&#8221;는 유식승의 간계를, 관음대성의 호위를 받아 물리치고 만다는 설화와 </p>
<p>같다. 또 수백년을 전승해온 낙산사의 보주를 고종 41년(1254) 몽고군의 침략 앞에서 </p>
<p>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켜낸 자는 그 주지승이 아니라 사노인 걸승이었다는 설화도 마 </p>
<p>찬가지다. </p>
<p>뿐아니라 &#8220;삼국유사&#8221;에는 비록 왕공 귀족의 일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서민 </p>
<p>생활과의 일체의 정조(情調)위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통일을 완수한 문 </p>
<p>무왕이 세간의 영화를 싫어하고 호국을 위해서는 축생도에 떨어지는 것도 사양치 않았 </p>
<p>다는 사례가 그 하나다. 강릉태수 순정공의 부인이요 자용이 절대한 수로가 해룡의 약 </p>
<p>거(掠去)한 바 되었을 때에 이를 구해낸 자는 어느 영웅적인 개인 혹은 귀족적인 권력 </p>
<p>이 아니라, 바로 &#8220;쇠도 녹인다.&#8221;는 뭇 서민들의 의사를 함께 하는 입에서 나온 가창의 </p>
<p>힘이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8220;삼국유사&#8221;가 소박하며 기본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p>
<p>영탄인, 그리고 뭇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전승되어온 향가를 특히 채록하고 있는 것도 </p>
<p>그 한 사례가 될 것이다. </p>
<p>결국 &#8220;삼국유사&#8221;는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사회와 민중생활과 인간의 옹호라는 </p>
<p>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양자간의 조화를 역설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려 </p>
<p>중기 이래 문,무 귀족정권의 독선적인 지배와 횡포에 대한 반발의 의식을 내포한 것이 </p>
<p>었다고 생각된다. </p>
<p>&#8220;삼국유사&#8221;에는 다음으로 민족사의 자주성과 그 문화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관념 </p>
<p>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다. 우선 국사의 시작을 단군의 고조선으로 잡아 중국역사의 시 </p>
<p>조라는 요와 동시대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이를 또한 직접 천에 연결시키고 있음은 </p>
<p>주지하는 바와 같다. 국조로서의 단군에 관한 설화는 &#8220;삼국유사&#8221;이전의 오래전부터 전 </p>
<p>승되어 온 바라 생각되지만, 이는 고려 지배층의 공인하는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p>
<p>지배층은 이른바 유교적인 예교의 시초를기자에서 찾고, 그럼으로써 국사의 시작을 은 </p>
<p>연중 중국에 연결시키려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8220;삼국유사&#8221;의 국사인식은 이와는 </p>
<p>아주 대조적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기자를 단군의 고조선 속에 흡수시켜 놓고 있는 것 </p>
<p>이다. 즉 기이편에서 삼국이전의 여러 국가들을 각기 별개의 조항으로 기술하고 있지 </p>
<p>만, 기자에 관한 조항은 따로 없고, 다만 단군의 고조선조 말미에서 약간 언급하고 있 </p>
<p>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단군 이후 동족국가들의 계승관계나 그 편년을 분명히 밝히지 </p>
<p>는 않았으나, 대체로 고조선-위만조선-부여,마한으로 연결되는 국사의 계통을 잡고, </p>
<p>삼국시대를 대체로 이 뒤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국의 역사가 하늘과 </p>
<p>직결된 신성한 것이며, 또 그 자주의 전승이 유원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는 의식의 소산 </p>
<p>이었다 하겠다. 이 같은 의식은 일연과 동시대의 신진 사인 이승휴에 있어서는 한층 </p>
<p>더 포괄적이며 구체화하고 있다. 즉 &#8220;제왕운기&#8221;에 있어서는 단군이 요와 동시대의 대 </p>
<p>등한 국조로 파악되고 있음은 물론 나,여,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 등 동방의 모든 동 </p>
<p>족국가가 이 단군을 공통의 시조로 하는 국사의 체계속에 들어 있으며 종래 도외시 되 </p>
<p>어온 발해까지도 국사의 권내로 맞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8220;삼국유사&#8221;나 &#8220;제 </p>
<p>왕운기&#8221;가 다 같이 중국에 대한 자국의 역사의 대등성, 그 유원한 자주성을 역설하고 </p>
<p>있음은, 이 민족의 압제를 뿌리칠 수 없게 되어 있던 당시의 현실하에서는 곧 저항적 </p>
<p>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p>
<p>특히 &#8220;삼국유사&#8221;에 있어서 이 같은 저항의식은 갖가지로 나타난다. 삼국통일의 </p>
<p>과정에서 신명을 바친 장춘랑과 파랑의 혼은 당수 소정방의 위세에 핍박을 받아 항상 </p>
<p>남의 뒤에만 쫓겨다님을 국왕에게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동맹이라는 이름아래 자행되 </p>
<p>고 있던 당군의 유형 무형의 자세와 횡포를 말함이다. 그래서 &#8220;삼국유사&#8221;는 <장차 신 </p>
<p>라마저 쳐서 멸망시키려> 하는 당군을 상대로 신라는 명랑법사의 비법까지 동원하는 </p>
<p>거국의 항전끝에 드디어 격퇴하고 말았음을 또 전한다. 원래 33천의 1인으로서 하강한 </p>
<p>김유신의 위훈을 하늘이 당제에게 계시함으로써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간섭 못하게 하 </p>
<p>였다는 기사는 신라의 자주성이 불국천과 바로 연결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문 </p>
<p>무왕은 현세간의 왕자로서, 김유신은 33천의 한 아들로서 태어나, 살아서는 통일을 끝 </p>
<p>내었고 죽어서는 다시 각기 동해의 용과 천신이 되어 만파식적을 후세에 남겼으니, </p>
<p>&#8220;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8221; 한우(旱雨), 풍랑이 고르게 되었다 </p>
<p>는 기사는 포란의 현실속에서 자주와 평온을 갈구하는 염원의 표현이다. 금관성의 파 </p>
<p>사석탑은 아유타국의 공주 황옥이 유연의 땅에 항도하는데 수신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p>
<p>싣고 온 것이었지만, 이 탑은 다만 황옥을 도와 수로왕비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p>
<p>&#8220;천년 동안 남으로 왜의 침략을 막아 왔다.&#8221;고 일연은 찬하고 있다. 또 황룡사의 장육 </p>
<p>상과 9층탑은 외적의 진압을 위한 무상의 대보로서 수백년을 우뚝히 보존해왔으나, 마 </p>
<p>침내 몽고의 병화가 이들을 모조리 소신시켜 버렸음을 &#8220;삼국유사&#8221;는 밝히고 있다. 국 </p>
<p>가사회의 자주와 평화를 수호해온, 그리고 야만인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이들 무상의 </p>
<p>문화재를 파괴해버린 이민족의 잔학에 대한 간접의 지척인 것으로 이해된다. </p>
<p>나아가, &#8220;삼국유사&#8221; 전편에 실린 사실에는 신이가 또한 그 바탕이 되어 흐르고 </p>
<p>있다. 우선 그 기이편의 서두에서부터 일연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합 </p>
<p>리주의를 반대하여, &#8220;장차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부명과 도록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p>
<p>남보다 다른 일이 있음&#8221;을 전제하고, 중국 고대 제왕들의 신이한 일들을 소개한 후 &#8221; </p>
<p>그런즉 우리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에서 탄생한 일이 무엇이 괴이하랴&#8221;고 하여, 중 </p>
<p>국에 비한 자국의 역사전통의 독자적인 대등성을 말하고 있다.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한 </p>
<p>새로운 인식의 표현이었다 할 것이다. </p>
<p>그리고 이같이 새로운 인식이 일연과 거의 동시대의 신진 사인들에 있어서도 공 </p>
<p>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특히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바다. 이규보는 그의 &#8220;동명왕편 </p>
<p>서&#8221;에서, 내외의 사책(史冊)에 기재되고 세인들이 흔히 말하는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 </p>
<p>을 처음에는 귀(鬼)와 환(幻)인 줄로 여겨 믿기 어려웠으나, 깊이 탐미하여 그 근원에 </p>
<p>젖어들어 보매, 마침내 귀가 아니라 신(神)이요 환이 아니라 성(聖)이었음을 새로이 </p>
<p>인식하게 되고, 이 창국의 영웅의 신성한 사적을 천하에 알려 자국이 본래 성인의 도 </p>
<p>읍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8220;동명왕편&#8221;을 짓는다고 하였다. 이승휴에 있어서도 마찬가 </p>
<p>지였다. 그는 고래의 사적 가운데에서 <부사(浮辭)를 제거하고 정리(正理)>로 인식되 </p>
<p>고 있음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p>
<p>이규보나 이승휴는 기본이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유학의 전공자였다. 이 같은 유 </p>
<p>자에 있어서도 역사 속의 신이는 실재와 결코 모순되지 아니하는 혼융의 일체로 인식 </p>
<p>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8220;삼국유사&#8221;의 경우 더욱 현저하다. &#8220;삼국유 </p>
<p>사&#8221;는 창국의 시조들뿐만 아니라 그 수성의 군왕, 나아가서는 일반 서민의 일에 이르 </p>
<p>기까지, 기이에서 효선에 이르는 전편의 서사를 기본적으로 신이의 바탕 위에서 전개 </p>
<p>하고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소박하나마 민족의식에 충만하였던 이들 고려후기의 신 </p>
<p>흥계층에 있어서 자국의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하 이해와 인식이 거의 공통이었다는 사 </p>
<p>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p>
<p>이들은 이 신이한 사실들이야말로 자국의 역사를 전개시켜온 큰 추진력이었다고 </p>
<p>인식하였음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문신,무인을 막론하고 중 </p>
<p>기 이래 합리를 표방하면서도 폭압을 자행하며 혹은 일종 역사의 암흑을 초래하는, 그 </p>
<p>러면서도 고식과 경화 속에서 사회와는 유리된 독선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귀족정권에 </p>
<p>대한 반발에서도 나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보다 더 외세의 제압에 대한 민족적인 저 </p>
<p>항의식의 소산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실의 합리적인 물리력으로써는 당하기 어려 </p>
<p>운 강포한 외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의식, 그 강렬한 극복의 의욕이 이들로 하여금 </p>
<p>자국의 역사 속의 신이한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케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p>
<p>4. 결언 </p>
<p>&#8220;삼국유사&#8221;는 현실의 세계와 불교신앙의 세계, 국가정치와 서민의 생활, 그리고 </p>
<p>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천지자연의 혼연일체의 조화 속에서 자국의 역사가 전개되어 오 </p>
<p>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설하여 전한다. 또한 그 역사전통의 유구성과 신성함에 대한 새 </p>
<p>로운 인식을 통하여 시대적인 난파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찾아내고자 </p>
<p>한다. 그래서 권력의 독선과 야만인 이민족의 횡포에 저항하는 전통적인 자주와 인간 </p>
<p>의 회복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p>
<p>&#8220;삼국유사&#8221;는 그러한 전통의 원형을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원형 그대로의 소박한 </p>
<p>표현을 많이 빌려쓰고 있다. 이것이 사서로 편찬된 글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정사가 </p>
<p>외면해버린 여러 사실들-단군기, 여러 동족국가들, 가락국기 그리고 향가 등-을 널리 </p>
<p>채록하고 있는 사실이라든가, 그밖에도 이 책에 실은 모든 사실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p>
<p>그 세밀한 인증도, 바로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서의 전통의 원형을 그대로 전하기 위한 </p>
<p>각고의 노력에서 나왔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p>
<p>&#8220;삼국유사&#8221;가 호소하는 바 전통적인 자주성과 인간의 회복은 어느 면에서는 복고 </p>
<p>적인 자세와도 통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복고적인 자세가 단순한 전통의 묵수 </p>
<p>(墨守)를 지향한 것이었다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 자주와 인간의 회복에 </p>
<p>대한 열망은, 앞서 말한 대로 고려중기 이래의 지배체제가 자행해온 바 사대와 모방과 </p>
<p>독선에의 접근에 저항하는, 그리고 미증유의 외세의 압제에 저항해야 하는, 새로운 힘 </p>
<p>의 원천으로서의 자기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상통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규 </p>
<p>보나 이승휴와 같은 유자가 이른바 그 유교적인 합리로써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국의 </p>
<p>역사적인 신이를 새로이 인식하고 서사하게 된 사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보여진다. 그 </p>
<p>리고 이런 점에서 &#8220;삼국유사&#8221;는 저 &#8220;삼국사기&#8221;의 역사인식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 </p>
<p>리하였다 할 것이다. </p>
<p>&#8220;삼국유사&#8221;가 말하는 바 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그 후에 물론 그대로 계승되 </p>
<p>어지지는 아니하였다.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국내에 있어서는 우선 사회의 지배이 </p>
<p>념으로서의 불교의 시대가 점차 지나고 유교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외적인 요인으로 </p>
<p>서는 100년에 걸치는 원(元)제국의 압제가 고려사회의 전통적인 독자성을 그 의식의 </p>
<p>면에 있어서까지 크게 위축시켜 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 </p>
<p>운 인식이 그냥 사라져버리게 된 것은 물론 아니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 </p>
<p>려후기에 있어서의 신흥계층의 인식이었으며, 이들의 계기적인 성장이 장차 사회의 지 </p>
<p>배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사대부층의 성장 </p>
<p>인 것이다. 이들의 성장은 급기야 원제국의 압제를 물리쳐내는 주체적인 요인이 되는 </p>
<p>것이며, 또 이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성리학은 전통 유교에 비하여 보다 이지적이며 민 </p>
<p>족적인 경향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활용되는 것이다. 일연과 같은 선승과 성리학을 하 </p>
<p>는 사대부층과는 사회 체질상으로 많은 상이한 속성을 지녔다 하겠지만, 그러나 양자 </p>
<p>가 등질의 시대적인 요청의 선상에 살면서 자기 역사에 대하 인식면에 있어서도 상통 </p>
<p>하는 바가 많았다고 보여진다. 그것은국조 단군 이래의 자기 역사의 유원성과 독자성 </p>
<p>에 대한 긍정의 민족의식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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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국유사번역본 견훤-3권 2002/08/31  48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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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0:57:1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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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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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후백제의 견훤 삼국사기 본전에 이르기를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 8년 정해(867) 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질그릇 견)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 지 아자게는 농사를 지어 생활했었으나, 광계 연간에 사불성-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넷으로 모두 세상에...]]></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후백제의 견훤 </p>
<p>삼국사기 본전에 이르기를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 8년 정해(867) </p>
<p>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질그릇 견)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 </p>
<p>지 아자게는 농사를 지어 생활했었으나, 광계 연간에 사불성-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p>
<p>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넷으로 모두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이 </p>
<p>훤씬 뛰어났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하였다. </p>
<p>이제가기(이제의 家기록)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의 시호는 백융부인인데 </p>
<p>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 파진간 선품의 아들인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 </p>
<p>로 맞아 각간 원선을 낳았는데, 바로 이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 </p>
<p>인이며,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부 </p>
<p>훤이요, 둘째아들이 능애장군이며,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이며, 넷째 아들이 보개이며 </p>
<p>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이고, 딸은 대주도금이라고 하고 있다. </p>
<p>또 고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光州 북촌에 살았는 </p>
<p>데, 하나 있는 딸의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p>
<p>&#8220;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에 들어와 관계를 하곤 합니다.&#8221; </p>
<p>&#8220;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꿰어 두어라.&#8221; </p>
<p>아버지가 말하자, 그 딸은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그 실이 간곳을 찾아보니 </p>
<p>북쪽 담 밑의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있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사내아이를 낳 </p>
<p>았다. 아이는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일컬었다. 경복 원년 임자(862)에 </p>
<p>왕이라 하였으며 완산군에 도읍을 정했다. 왕위에 오른지 43년 청태 원년 갑오(934)에 </p>
<p>견훤의 아들 셋, 즉 신검,용검,양검이 반역하므로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가서 항복했 </p>
<p>다. 아들 금강(신검에게 살해되어 즉위하지 못했음, 신검의 잘못)이 즉위한 후 천복 </p>
<p>원년 병신(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에서 싸워 패하므로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고 </p>
<p>한다. </p>
<p>처음에 견훤이 나서 젖먹이일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는 </p>
<p>아버지에게 음식을 나르느라고 아기를 수풀 아래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주었다. 이 </p>
<p>말을 듣자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는데, 아이는 장성할수록 모습이 건장했으며, 뜻 </p>
<p>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햇다. </p>
<p>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으로 가서 창(戈)을 베개삼아 적군을 </p>
<p>기다렸다. 그의 용기는 늘 사졸의 선두에 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p>
<p>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신라의 진성왕 재위 6년인데 이때 왕의 총애를 받은 신 </p>
<p>하가 있어 국권을 농간하므로 기강이 문란해졌다. 거기다 흉년이 겹치므로 백성들은 </p>
<p>이 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 </p>
<p>할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 주현을 쳤다. </p>
<p>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려 5천의 무리가 되었다. 드디 </p>
<p>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 </p>
<p>로 신라서남도통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이라 했으니, 이 때는 용 </p>
<p>화 원년 기유(889)였다. 이 때를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의 일이라고 한다. </p>
<p>이때 북원의 도적 양길의 세력이 강성하니 궁예는 자진하여 그 부하가 되었다. </p>
<p>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 </p>
<p>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자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며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p>
<p>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p>
<p>&#8220;백제가 개국한 후 600여년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을 보내니, </p>
<p>수군 13만명이 바다를 건너왔으며, 신라의 김유신은 모든 군사를 다 거느리고 황산을 </p>
<p>지나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내가 어찌 나라를 세워 옛 </p>
<p>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8221; </p>
<p>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했는데 때는 광 </p>
<p>화 3년이요, 신라 효공왕 4년(900)이었다. </p>
<p>정명 4년 무인(918)에 철원경의 민심이 삽시간에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p>
<p>왕위에 오르게 햇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사자를 보내 경하하고, 공작선과 지리산 </p>
<p>의 죽전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표면상으로는 화친하는 체햇으나 속으로는 </p>
<p>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를 바치더니 3년 겨울 10월에는 3천의 기병을 거느리 </p>
<p>고 조물성까지 이르렀으므로 태조도 역시 정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견훤의 </p>
<p>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낼 수 없었다. </p>
<p>그래서 태조는 잠정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로 하여금 시일을 끌어 지치기 </p>
<p>를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요구했다. 종제 완신을 인질로 보내자 </p>
<p>견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를 보내어 교환했다. </p>
<p>12월에 견훤은 거서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에 사자를 보내어 번신(속국의 </p>
<p>신하란 말)이라 일컬었다. 이에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의 벼 </p>
<p>슬을 주고, 그전대로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이라 하고 </p>
<p>식읍을 2500호로 했다. </p>
<p>4년에 갑자기 고려에 인질로 보낸 진호가 죽자, 견훤은 고려가 고의로 죽였다고 </p>
<p>의심하여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청했 </p>
<p>다. 태조는 웃으며 돌려보냈다. 천성 2년 정해(927)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쳐서 뺏고 </p>
<p>그 성에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p>
<p>태조가 장차 출병하려는데 견훤은 고울부-울주-를 쳐서 차지하고 족시림으로 진 </p>
<p>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p>
<p>신라왕은 이 때 부인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 더욱 낭패를 당 </p>
<p>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끌어다 강제로 욕보이고, 족제 김부로 하여금 왕위에 앉게 </p>
<p>하였다. 그 뒤에 왕의 아우 효림과 재상 영경을 사로잡고 또 신라의 진귀한 보물이며 </p>
<p>자제들과 여러 종류의 공인중에서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p>
<p>태조는 정예한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 </p>
<p>의 장수인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모든 군사들이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했 </p>
<p>을 뿐 대항하지 못했으므로 그로 하여금 낳은 죄악을 범하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 </p>
<p>다. 전쟁에 이긴 기세를 몰아 견훤은 대목성과 경산부, 그리고 강주를 노략질하고 부 </p>
<p>곡성을 곡역했는데, 의성부의 태수 홍술은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 </p>
<p>을 듣자 태조가 말했다. </p>
<p>&#8220;나는 이제 오른쪽 손을 잃었구나.&#8221; </p>
<p>다음날 군사를 거둔 견훤이 순주성을 습격하자 이를 막지 못한 성주 원봉은 밤에 </p>
<p>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이에 몹시 노한 태조는 그 고을을 격을 낮추어 하지현이라 고 </p>
<p>쳤다. </p>
<p>신라의 군신들은 쇠망해 가는 사태에서 다시 부흥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 태조 </p>
<p>를 끌어들여 사아좋게 의를맺어 후원을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이 신라의 </p>
<p>서울로 쳐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p>
<p>보냈다. </p>
<p>&#8216;지난 번에 국상 김웅렴 등이 족하를 장차 서울로 불러들이려 함은 별응원성(鼈 </p>
<p>應원聲-작은 자라는 큰자라가 울면 거기에 호응하여 운다는 뜻, 큰자라는 견훤)과 같 </p>
<p>으며 또한 안피준익(안披準翼-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는다는 뜻으로 고려를 종달새에 </p>
<p>비유, 어림없는 일이라는 뜻) 과 같습니다. 고로 필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며 </p>
<p>종묘 사직을 폐허로 만들 것입니다. 나는 이런 까닭에 먼저 조편(祖鞭-진나라 사람인 </p>
<p>조적의 말채찍)의 채찍을 쥐고, 단신으로 한월(韓鉞-수나라 장수 한금호의 도끼)을 휘 </p>
<p>둘러 백관들에게 백일처럼 맹세했고, 6부를 의리 있는 풍토로써 설유(說諭)했더니 뜻 </p>
<p>밖에 간신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나셨소. </p>
<p>이에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위태로운 </p>
<p>나라를 다시 세우니 없던 임금이 이제 있게 되었소. 그런대도 족하는 나의 충고를 자 </p>
<p>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유언을 믿고서 온갖 계책으로 왕위를 노리고 여러 곳으로 나라 </p>
<p>를 침범햇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 </p>
<p>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항복했고, 또 그 달 안에 좌장 김락 </p>
<p>이 미리사 앞에서 폭해(전사)하였소. 이밖에도 죽인 것과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p>
<p>이렇게 강함과 약함이 분명하니 누가 이기고 질 것인가는 알만한 일이오. 내가 목적하 </p>
<p>는 일은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을 내 말에게 먹이는 일이오. 그러나 지난 </p>
<p>달 7일에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와서 국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p>
<p><경은 오랫동안 고려와 和好를 통하고, 서로 이웃 나라의 맹약을 맺은걸로 알았 </p>
<p>었소. 그런데 볼모가 죽은 것을 보고 마침내 화친하던 옛 마음을 잃어 버리고 서로 국 </p>
<p>경을 침범하고 전쟁을 멈추지 않으므로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本道로 가게 하고 </p>
<p>또한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친목하여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할 것이오> </p>
<p>했소. </p>
<p>나는 왕실을 높이려는 의리가 두텁고,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소. 이제 오월 </p>
<p>왕의 조칙을 듣고 즉시 받들려고 하지만, 족하가 그만두지 않으므로 그만둘 수가 없고 </p>
<p>하여 국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요. 이제 그 조서를 베껴 보내니 </p>
<p>유의하여 자세히 살피기 바라오. 토끼와 사냥개가 함께 지치면 마침내는 필시 남의 조 </p>
<p>롱을 받을 것이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남의 조롱거리 밖에 아니 됩니다. </p>
<p>끝까지 미복(迷復-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잘못을 거듭함)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p>
<p>스스로 부르지 않도록 하시오.&#8217; </p>
<p>천성 2년(927)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p>
<p>&#8216;삼가 오월국의 통화사 반상서가 전하 조서 1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가 준 편 </p>
<p>지도 받아 보았소. 화초부사(오월국의 사신을 말함)가 조서를 가지고 왔으며 척소호음 </p>
<p>(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과 겸해서 가르침도 받았소. 지검(芝檢-오월왕의 조서)을 받 </p>
<p>아서 비록 감격은 더했으나 편지를 펴보니 의심스러운 마음을 금하기는 어려웠소. 이 </p>
<p>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해오. </p>
<p>나는 위로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p>
<p>직권을 맡아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지난번에 삼한이 액운을 당하고, </p>
<p>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 많은 백성들이 황건(黃巾-황건적)에 들어가고, 전 </p>
<p>답은 적토(赤土-흉년으로 거둘 곡식이 없는 땅.)가 아닌 곳이 없었소. 풍진의 소란함 </p>
<p>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려고 이에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 </p>
<p>천리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을 즐기고, 사졸은 7,8년동안은 한가로이 쉬웠소. 그 </p>
<p>후 계유년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기므로 곧 교전하게 되었소. 족하는 처음에는 적을 </p>
<p>가벼이 여겨 곧장 전진함이 마치 당랑거철(당랑즉 버마재미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p>
<p>수레를 막으려 한다는 뜻)하는 것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급히 퇴진함이 마 </p>
<p>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도 같았소. 그리고 손을 모아 공손히 맹세하기를,<오늘 이 </p>
<p>후로는 길이 화록하리라. 혹여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 하였소. </p>
<p>이에 나도 또한 전쟁을 하지 않는 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仁을 기약 </p>
<p>하여 드디어 여러 겹으로 포위했던 것을 풀고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냄도 </p>
<p>거절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소. 이것은 내가 남쪽의 사람들에게 </p>
<p>큰 덕을 베풀었는데 어찌 맹약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봉채 </p>
<p>지독(벌과 전갈은 독이 있어 미물이면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生民을 침해 </p>
<p>하고, 미친 이리와 호랑이가 서울 땅을 가로막아서 금성이 궁색하고 黃屋(궁궐)을 몹 </p>
<p>시 놀라게 할 것으로 생각했소. </p>
<p>대의에 의거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임에 그 누가 환문(중국 오패시대의 제나라 환 </p>
<p>공과 진나라 문공)의 패업과 같을 수 있으며 기회를 타서 한나라를 도모함은 오로지 </p>
<p>망탁(왕망과 동탁)의 간사람을 볼 뿐이요. 지존이신 왕으로서 몸을 굽혀 족하에게 子 </p>
<p>라고 하게 하였으니, 높고 낮음의 지위를 잃게 되어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원보의 충 </p>
<p>순이 아니면 어찌 다시 나라를 편안케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소. 나의 마음에는 악이 </p>
<p>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 </p>
<p>해내려 했소. 그런데 족하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좇아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 </p>
<p>고,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고 대신들을 죽였으며, 士民을 도륙하였소. 궁녀들을 </p>
<p>잡아 수레에 싣고 보물은 모두 빼앗아 짐 속에 넣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주왕보다 </p>
<p>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이란 짐승과 올빼미보다도 오히려 심했었소. </p>
<p>나는 붕천(崩天-임금의 죽음)의 원한과 각일(却日-노양공이 싸움할때 창을 휘둘 </p>
<p>러 해를 뒤로 돌렸다는 고사) 의 지극한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 나라에 대한 견 </p>
<p>마지근(犬馬之勤)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하였소. 그리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켜 두 해가 </p>
<p>자났는데, 육로로 진격함은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리고, 수로를 치는 데는 범이나 </p>
<p>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세우며 거사하여 늘상 헛일을 하지 않았소. </p>
<p>윤경을 해안에서 쫓았을 때는 갑옷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추조를 성 주변에서 잡았을 </p>
<p>때는 시체가 들판을 덮었소. 연산군 부근에서는 길환을 진전에서 베었고, 마리성가에 </p>
<p>서는 수오를 깃발 아래서 죽였소. 임존성을 함락시키던 날은 형적 등 수백명의 목숨을 </p>
<p>버렸고 청주현을 부셨을 때는 직심등 4,5명이 머리를 바쳤소. 동수는 깃발만 바라보고 </p>
<p>도망했소. 경산은 구슬을 입에 머금고 항복했소. 강주는 남으로부터 귀순했고, 나부는 </p>
<p>서로부터 와서 소속되었소. 공략함이 이와 같으니 수복될 날이 어찌 멀다 하겠소. 기 </p>
<p>필코 저수(중국의 강이름)의 진중에서 장이(초한때 사람으로 저수에서 진여를 죽임)의 </p>
<p>묵은 원한을 씻고, 오강(항우가 자결한 강)의 기슭에서 漢王의 일전 승리의 소원을 이 </p>
<p>루어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그치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말게 할 것이오. 이는 하늘이 돕 </p>
<p>는 일이니 천명은 어디로 돌아가겠소! 더욱이 오월왕 전하의 덕은 포황(包荒-멀리 있 </p>
<p>는 사람을 포섭함)에도 흡족하고 仁은 字小(조그만 나라 백성들까지도 잘 키움)에도 </p>
<p>깊은 바, 특히 주금(舟禁-대궐)에서 윤음을 내려 청구(우리나라)에서의 난리를 그치라 </p>
<p>고 개유(開諭)하셨소.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으리요. 만약 족 </p>
<p>하도 이 조서를 받들어 흉악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 </p>
<p>아니라, 또한 동방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p>
<p>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어찌 좋겠소?&#8217; </p>
<p>장흥 3년(932)에 견훤의 신하 공직은 옹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항복했 </p>
<p>다.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잡아다가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p>
<p>가을인 9월에 견훤은 일길을 보내어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예성강으로 들어와 3일동 </p>
<p>안 머물면서 염주,백주,진주 3주의 배 1백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한다. </p>
<p>청태 원년 갑오(934)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였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 </p>
<p>은 군사를 뽑아 욕식(새벽일찍 밥을 먹는다는 뜻)을 시켜 빨리 이르도록 하였는데, 미 </p>
<p>처 진영을 설치하기도 전에 태조의 장군 유금필이 날랜 기병으로 쳐서 3천여명의 목을 </p>
<p>베이니, 웅진 이북의 30여성들이 이 소문을 듣자 자진하여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 </p>
<p>였던 술사 종훈과 의사 지겸, 용장 상봉, 작필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p>
<p>병신(936)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p>
<p>&#8220;내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를 세월 지금까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 </p>
<p>려군사의 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해 가수(假 </p>
<p>手-하늘이 돕는다는 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어찌 고려왕에게 귀순을 하여 생명을 보 </p>
<p>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8221; </p>
<p>그의 아들 신검,용검,양검 셋은 모두 이에 응하지 않았다. </p>
<p>이제가기에는 그 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
<p>&#8216;견훤에게는 9명의 자식이 있었다. 맏아들은 신검, 둘째는 태사 겸뇌, 셋째는 좌 </p>
<p>승 용술, 넷째는 태사 총지, 다섯째는 대아간 종우, 여섯째는 이름을 알수 없으며, 일 </p>
<p>곱째는 좌승 위홍, 여덟째는 태사 청구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인데 모두 상원부인의 </p>
<p>소생이다.&#8217; </p>
<p>견훤은 처첩이 많아서 아들을 열명이나 두었다. 넷째인 금강은 키가 크고 지혜가 </p>
<p>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 했다. 그의 형들(신검, </p>
<p>양검,용검)잉 그것을 알고 매우 근심했다. 이 때 양검은 강주도독으로 있었고,용검은 </p>
<p>무주도독으로 있었으며, 신검만이 혼자 견훤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강주와 무주 </p>
<p>에 사람을 보내어 양검등과 모의했다. 청태 2년 을미(935) 3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 </p>
<p>에게 권유하여 견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은 스 </p>
<p>스로 대왕이라 일컬으며 나라 안의 모든 죄수를 사면해 주었다고 한다. </p>
<p>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p>
<p>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께 아뢰었다. </p>
<p>&#8220;임금께서는 연로하셔서 軍國의 정무에 어두우시므로 장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p>
<p>대리하게 되었다고 하여 여러 장수들이 기뻐서 축하하는 소리입니다.&#8221; </p>
<p>잠시 후 아버지를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을 시켜 지키게 했 </p>
<p>다. 이 때 이런 동요가 나왔다. </p>
<p>가련한 완산의 아이, </p>
<p>아비 잃고 계속 우네. </p>
<p>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2명, 시비 고비녀, 나인 능예남 등과 함께 갇혀 </p>
<p>있었다. 그 후 4월에 이르러 술을 빚게 하여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한 후 </p>
<p>고려로 도망해 왔다. 이 때 태조는 소원보향우,오담,충질 등을 보내 수로로 가서 맞아 </p>
<p>오게 했다. 고려에 이르니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자기보다 10년 위라 尙父라 하고, 남 </p>
<p>궁에 편안히 거하도록 했으며, 양주의 식읍,전장과 노비 40명과 말 아홉 필을 주고, </p>
<p>먼저 항복하여 와 있는 신강으로 아전을 삼았다. </p>
<p>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가 비밀히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p>
<p>&#8220;대왕께서 애쓰신 지 40여년에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 했는데 하루 아침에 가족 </p>
<p>간의 불화로 나라를 잃고 고려로 가셨소. 대체로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p>
<p>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 </p>
<p>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대한단 말이오. 더구나 듣자니 고려의 왕공은 인 </p>
<p>후근검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아마 하늘의 계시로 반드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p>
<p>어찌 글을 보내어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하여 왕공에게도 은근하게 하여 뒷날의 복 </p>
<p>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8221; </p>
<p>&#8220;당신의 말은 바로 저의 뜻입니다.&#8221; </p>
<p>그의 아내가 말했다. 이에 천복 원년 병신(936)2년에 사람을 보내어 태조에게 자 </p>
<p>기의 뜻을 전했다. </p>
<p>&#8220;왕께서 의기를 드시면 저는 내응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8221; </p>
<p>태조는 기뻐하여 그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를 치하했다. </p>
<p>&#8220;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 번 합세하여 가는 길에 막힘이 없도록 한다면, 즉 </p>
<p>시 먼저 장군을 뵙고, 다음에 堂에 올라가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 </p>
<p>들어 반드시 끝까지 장군께 후히 보답하겠소. 천지신명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8221; </p>
<p>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p>
<p>&#8220;노신이 전하께 항복해 온 까닭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 </p>
<p>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神兵을 빌어 賊子와 亂臣을 벌하신다면 </p>
<p>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8221; </p>
<p>태조가 말했다. </p>
<p>&#8220;그들을 치지 않으려 함이 아니고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8221; </p>
<p>이에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회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p>
<p>가게 했다. 가을 9월에 태조는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 </p>
<p>으로 진군하자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막았다. 갑오일에 일이천을 사이에 두고 </p>
<p>서로 대치했는데, 고려군은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방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p>
<p>함께 관병(觀兵)하는데 문득 칼과 창 모양으로 된 흰 구름이 일어나 적진을 향해 갔다. </p>
<p>이에 북을 치며 나가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덕술,애술,명길 등은 고려 군병의 형세가 </p>
<p>크고 질서가 장연함을 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진 앞으로 와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을 </p>
<p>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말했다. </p>
<p>&#8220;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8221; </p>
<p>태조는 장군 공훤 등에게 명령을 내리니, 삼군이 일시에 진격하여 협공하니 후백 </p>
<p>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 탄현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능환등 40 </p>
<p>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와 </p>
<p>함께 서울로 올라와 살도록 했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p>
<p>&#8220;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일은 네 계책 </p>
<p>인데 신하된 의리로서 그래도 마땅하단 말이냐?&#8221; </p>
<p>능환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했다. 태조는 그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p>
<p>신검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고 남의 위협때문이었다. 그는 항복하여 죄 </p>
<p>를 빌므로 그의 죽음을 면하게 했더니, 분하게 여긴 견훤은 등창이 나서 수일 후에 황 </p>
<p>산 佛舍에서 죽었는데, 때는 9월8일로 그의 나이 70이었다. </p>
<p>태조는 군령이 엄하고 분명하여 군사들이 추호도 범하지 않으므로 주현이 편안하 </p>
<p>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에게 말했다. </p>
<p>&#8220;전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 </p>
<p>었는데, 오직 경의 부부만은 천리 밖으로 글을 보내 성의를 보내고, 겸하여 나에게 아 </p>
<p>름다운 명예를 돌렸으니 그 의를 잊을 수 없소.&#8221; </p>
<p>태조는 그에게 좌승이란 벼슬과 밭 1천경을 내리고,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가족 </p>
<p>들을 맞아 오게 했으며,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p>
<p>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건국하여 진나라 천복 원년(936)에 이르 </p>
<p>니 45년만인 병신년에 멸망하였다. </p>
<p>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20;신라는 운수가 다 되고 도를 잃어버려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 </p>
<p>게 되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되었다. 그 </p>
<p>중에서도 가장 강한 도적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는 </p>
<p>데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선조의 화상을 칼로 베기까지 했으니 그가 어질지 </p>
<p>못함이 너무 심했다. </p>
<p>견훤은 신라의 평민으로 일어나 신라의 국록을 먹으면서도 나쁜 마음을 품고 나라 </p>
<p>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들을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p>
<p>실로 천하의 원흉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 </p>
<p>에게 화근이 발생했으니 모두 스스로 만든 일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항우나 이밀 </p>
<p>(수나라사람)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과 당이 일어남을 막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 </p>
<p>와 견훤과 같은 흉인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으랴!&#8221; </p>
<p>견훤은 여기서 끝입니다. </p>
<p>제목에 &#8220;1&#8243;이라고 햇는데 1밖에 없습니다.. 한꺼번에 올렷거든요.. </p>
<p>번호:4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1 16:50 길이:302줄 </p>
<p>가락국기 </p>
<p>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 </p>
<p>었다. 이 때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등 아 </p>
<p>홉 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는데 모두 1백호로 7만5천명이었다. </p>
<p>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 </p>
<p>었다. </p>
<p>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A.C.42)3월 계욕일(액땜을 하는 날로 목욕을 </p>
<p>하고, 물가에서 술을마심)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산봉우리의 이름)에서 </p>
<p>이상한 기운이 일며,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3백명이 그 곳에 모였는데 </p>
<p>사람 소리와 같기도 하지만 그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만 들려왔다. </p>
<p>&#8220;이 곳에 누가 있는가?&#8217; </p>
<p>구간(九干)들이 대답했다. </p>
<p>&#8220;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8221; </p>
<p>&#8220;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8221; </p>
<p>&#8220;龜旨입니다.&#8221; </p>
<p>이에 또 말했다. </p>
<p>&#8220;하늘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 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므로, </p>
<p>이를 위하여 여기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뿌리며 </p>
<p>거북아 거북아 </p>
<p>머리를 내 밀어라. </p>
<p>만약 내밀지 않으면 </p>
<p>구워 먹겠다. </p>
<p>하고 노래를 부르고 뛰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너희들은 대왕을 맞이하여 기 </p>
<p>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8221; </p>
<p>구간들은 이 말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p>
<p>얼마후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한 줄기 자주색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 </p>
<p>었다. 줄끝을 찾아가 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p>
<p>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다 함께 수없이 절 </p>
<p>을 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걸상 위에 놓아 두고 </p>
<p>무리는 제각기 흩어졌다가하루가 지나가고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셔 </p>
<p>그 합을 열자, 여섯개의 알은 화하여 아기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했으며 </p>
<p>이내 평상 위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p>
<p>나날이 자라더니 10여일을 지나자 키가 9척으로 은나라 천을(天乙-은나라 탕왕)과 같 </p>
<p>고, 얼굴이 용안임은 하나라 고조와 같았다.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순임금 </p>
<p>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 </p>
<p>라 하거나 혹은 수릉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했으니 </p>
<p>곧 여섯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가서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 </p>
<p>었다. 가야는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p>
<p>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였는데, 질박하고 </p>
<p>검소할 따름이니 집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겨우 3척이 </p>
<p>었다. </p>
<p>즉위한 2년 계묘(A.B. 43)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p>
<p>&#8220;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8221; </p>
<p>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이 남쪽 신답평에 나가서 사방의 산악을 두루 바라보다가 </p>
<p>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p>
<p>&#8220;이 땅은 여뀌잎처럼 협소하기는 하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이 살만 </p>
<p>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3을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므로 七聖(성이란 진리를 깨친사람 </p>
<p>이라는 뜻)이 살곳으로도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여 마침내 </p>
<p>좋은 곳을 만듦이 어떻겠느냐?&#8221; </p>
<p>이에 1500보 둘레의 외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 창고를 </p>
<p>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널리 나라 안의 장정과 인부 공장들을 불러 </p>
<p>모아서 그 달 20일에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궁궐과 屋舍 </p>
<p>만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하여 갑진(44)2월에 이르 </p>
<p>러서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으로 옮겨가서 모든 정사를 다스리며 서무에 </p>
<p>도 부지런하였다. 홀연히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므로 알을 낳았 </p>
<p>는데 그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는데 이름을 탈해라 했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 </p>
<p>국에 왔는데 키는 3척이요,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그는 혼연히 대궐로 나아가 </p>
<p>왕에게 말했다. </p>
<p>&#8220;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8221; </p>
<p>이에 왕이 대답햇다. </p>
<p>&#8220;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함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 </p>
<p>하게 하려 함이다. 나는 감히 천명을 어기고 왕위를 너에게 줄 수 없으며, 또한 이 백 </p>
<p>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8221; </p>
<p>&#8220;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보자.&#8221; </p>
<p>이에 왕이 승낙하였다. 순ᄀ나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자, 왕은 변하여 독수리가 </p>
<p>되었다. 탈해가 또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그 변하는 시간은 </p>
<p>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탈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또한 본래 모습으로 </p>
<p>돌아왔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하며 말하기를 </p>
<p>&#8220;술법을 다투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서,참새가 새매에게서 잡히기를 </p>
<p>면한것은 대저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인덕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p>
<p>왕위를 다툰다 해도 이기기는 실로 어렵겠습니다.&#8221; </p>
<p>탈해는 곧 왕께 하직하고 교외에 나가 가까운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 배가 와서 </p>
<p>닿는 수로로 해서 떠났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p>
<p>급히 수군을 실은 배 5백척을 보내어 쫓게 했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달아나므 </p>
<p>로 수군은 이내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적힌 기사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p>
<p>건무 24년 무신(48)7월27일에 구간등이 왕을 조알할 때 말씀을 올렸다. </p>
<p>&#8220;대왕께서 강람하신 후로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 </p>
<p>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 왕비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8221; </p>
<p>그러나 왕이 말했다. </p>
<p>&#8220;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로 삼게함도 역 </p>
<p>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8221; </p>
<p>왕은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에 가서 기다 </p>
<p>ᄅ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경기안에 </p>
<p>있는 나라-에 가도록 했다. 문득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p>
<p>휘날리며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 </p>
<p>니 </p>
<p>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와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 </p>
<p>궐로 달려와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듣고 매우 기뻐했다. 아내 구간등을 보내어 </p>
<p>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p>
<p>대궐로 들어가려 하자(배 안에 탔던) 왕후가 말했다. </p>
<p>&#8220;나는 너희들과 본디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라 수가 있겠느냐?&#8221; </p>
<p>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유사를 </p>
<p>데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 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p>
<p>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p>
<p>와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는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p>
<p>바쳤다. 또 시종해 온 잉신(시집갈때 따라가는 시신)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 </p>
<p>보,조광이었다. 그들의 아내는 모정,모량이라고 했으며, 또 노비까지 있었는데 모두 </p>
<p>합하여 20여명이엇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의 옷과 필단,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 </p>
<p>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이제 왕이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 </p>
<p>니 왕은 친히 나아가 맞아 함께 장막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p>
<p>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p>
<p>&#8220;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p>
<p>6명씩 있게 하라.&#8221; </p>
<p>그리고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 </p>
<p>는 자리에서 자도록 했으며,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많은 군인들을 모아 </p>
<p>그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앙후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말했다. </p>
<p>&#8220;저는 아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의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p>
<p>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지난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 </p>
<p>씀하시기를 </p>
<p>&#8220;우리가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p>
<p>&#8216;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p>
<p>분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p>
<p>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8217; </p>
<p>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꿈을 깨었으나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 </p>
<p>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 </p>
<p>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열리는 좋은 과일)를 찾고, 하 </p>
<p>늘로 가서 번도(3000년에 한번씩 열리는 복숭아)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p>
<p>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8221; </p>
<p>왕이 대답했다. </p>
<p>&#8220;나는 태어나서부터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p>
<p>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p>
<p>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오.&#8221; </p>
<p>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p>
<p>돌려 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씩과 베 30필씩을 주 </p>
<p>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p>
<p>8월 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타고 대궐로 돌아왔다.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 </p>
<p>히 수레를 탓으며, 중국에서 나는 갖가지 물품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 </p>
<p>어오니 시간은 오정이 가까웠다. 왕후는 궁중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p>
<p>노비들에게는 비어있는 두 집에 나누어 살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칸 되 </p>
<p>는 빈관 한채를 주어 사람 수를 보아 적당히 나누어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 </p>
<p>마다 물품을 풍부하게 주었으며,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 </p>
<p>서 왕후의 사시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p>
<p>&#8220;구간들은 모든 벼슬의 으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다 소인이나 농부의 칭호이니 </p>
<p>이는 높은 벼슬의 호칭이 못된다. 만약 외국 사람들이 듣게 되면 필시 웃음거리가 될 </p>
<p>것이다.&#8221; </p>
<p>이리하여 아도를 고쳐서 아궁이라 하고,여도를 여해,피도를 피장,오도를 오상이 </p>
<p>라 했으며, 유수와 유천은 윗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 유공,유덕이라 하 </p>
<p>고 신천을 고쳐서 신도, 오천을 고쳐서 오능이락 했다. 신귀(神鬼)는 음을 바꾸지 않 </p>
<p>고 훈만 고쳐 신귀라 하였다. 계림의 직제를 취해서 각간 아질간 급간의 품계를 두었 </p>
<p>고, 그이하의 관료는 주나라 규례와 한나라 제도로써 나누어 정했다. 이것은 옛것을 </p>
<p>고치고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와 집안을 </p>
<p>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p>
<p>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더불어 사는 것을 비유하면 </p>
<p>마치 하늘에 대하여 땅이 있고, 해에 대하여 달이 있으며, 陽에 대하여 陰이 있는 것 </p>
<p>과 같지 않겟는가? 그 내조의 공은 도산(도산의 딸이 우왕에게 시집감)씨가 하나라 우 </p>
<p>왕을 돕고 당원(요임금의 딸 아황, 여영으로 순임금에게 시집감)이 순임금을 도와 교 </p>
<p>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웅비지조(곰의 꿈을 꾸면 사내아이를 낳는 </p>
<p>다는 속설)의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p>
<p>영제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 왕후가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157세였다. </p>
<p>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했다. </p>
<p>그리고 앞으로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왕후가 처 </p>
<p>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언덕을 능현이라 했으며, </p>
<p>붉은 기를 단 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 했다. </p>
<p>잉신 천부경 신보와 종점감 조광 등은 가락국에 온지 30년만에 각각 두 딸을낳았 </p>
<p>는데 그 후 그들 부부는 12년을지나 세상을 떠났다. 그밖에 노비들은 가락국에 온 지 </p>
<p>7,8년이 지났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로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세상 </p>
<p>을 떠나갔으니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은 텅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p>
<p>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며 몹시도 슬퍼하다가 25년 후인 헌제 입안4년 기묘( </p>
<p>199)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p>
<p>듯 슬퍼함이 왕후가 돌아가시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세웠는 </p>
<p>데 높이가 한 길이며 둘레가 300보로서 그곳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라 했다. </p>
<p>그의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인 구형왕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정월 3일 </p>
<p>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는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으로 제사 지냈는데, 대대 </p>
<p>로 끊어지지 않았다. </p>
<p>신라 제 30대 법민왕 용삭 원년 신유(661) 3월 어느 날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p>
<p>&#8216;가야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의 </p>
<p>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다. 그러므로 시조 수 </p>
<p>로왕은 나에게는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했으나 그 묘는 아직 남아 있으 </p>
<p>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라.&#8217; </p>
<p>이에 사자를 그 옛터에 보내어 묘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을 바치게 하여 제사 </p>
<p>를 마련할 토지로 삼고,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부속시켰다. 수로왕의 </p>
<p>17대손 갱세급감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을 주관하여 매년 명절이면 술과 단술 </p>
<p>을 만들고 떡과 밥,차,과일 등 여러가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한 해도 거르지 </p>
<p>않았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잉 정한 연중 5일을 변동하지 않아, 이에 비로소 그 정성 </p>
<p>어린 제사는 잇게 되어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후부 </p>
<p>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p>
<p>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 원년 신유(661)에 이르는 60년 동안에 </p>
<p>는 가끔 이 묘에 지내는 제사가 빠지기도 했다. 이름답도다! 문무왕-법민왕의 시호- </p>
<p>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내니 효성스럽기도 하여라! </p>
<p>신라 말기에 충지잡간이라는 자가 있었다. 금관성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신라 </p>
<p>말기에 지방호족이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스스로 일컬던 칭호)이 되었다. 이에 영 </p>
<p>규아간이 장군의 위세를 빌어 묘향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날 제사를 </p>
<p>지내던 중 까닭없이 대들보가 부러짐에 치어 죽었다. 이에 장군은 혼자 중얼거리기를 </p>
<p>&#8220;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이 계시던 국성에 제사를 드리게 되 </p>
<p>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는 그 영정을 그려 모시고 향과 등으로 받들어 신의 은혜를 </p>
<p>갚아야 하겟다.&#8221; </p>
<p>마침내 교견(남해지방에서 나는 비단) 3척에 진영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p>
<p>저녁으로 촛불을 켜놓고 공손히 받들었다. 그런지 3일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 </p>
<p>이 흘러 땅위에 고였는데 그것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너무도 두려워서 그 </p>
<p>진영을 모시고 묘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즉시 수로왕의 직계손인 규림을 불러 말했 </p>
<p>다. </p>
<p>&#8220;어제도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거듭 일어나는 것일 </p>
<p>까? 이는 필경 묘의 위령이 내가 영정을 그려 공양함이 불손하다고 크게 노하신 것 같 </p>
<p>다. 영규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괴이하게 생각되고 두려워, 화상을 이미 불살 </p>
<p>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손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 </p>
<p>사를 드림이 좋겠다.&#8221; </p>
<p>이에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더니 나이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아들 간 </p>
<p>원이 아버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 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친 </p>
<p>증세가 일어나니 사당에 와서 간원에게 차려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려 </p>
<p>제사를 지내더니 삼헌(三獻-제사때 술잔을 세번 올리는 일)이채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 </p>
<p>레 병이 일어나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p>
<p>&#8216;음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재앙을 받는다.&#8217; </p>
<p>전에는 영규의 일이 있었고, 후에는 준필의 일이 있었으니 이들부자를 두고 이른 </p>
<p>말인가? </p>
<p>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도둑 </p>
<p>질하려고 왔다. 도둑들이 처음 이곳에 이르자, 몸에 갑옷과 투구를 쓰고 활에 화살을 </p>
<p>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이들 중 7, </p>
<p>8명을 맞추어 죽였다. 이에 도둑들은 모두 달아나 버렷다. 도둑들은 며칠이 지나서 다 </p>
<p>시 왔는데, 길이가 30여척에 눈이 번개같은 커다란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오더니 8, </p>
<p>9명을 물어 죽이므로 겨우 살아 남은 자들도 모두 엎어지면서 도망갔다. 이로 보아 능 </p>
<p>원 안팎에는 필히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겠다. </p>
<p>건안 4년 기묘(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의 임금께서 즉위하신 </p>
<p>지 31년 만인 대강 2년 병진(1076)까지 대개 878년이나 되었는데도 제단을 쌓은 아름 </p>
<p>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p>
<p>않았으며, 더욱이 그 곳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또한 부서진 것이 없었다. 이 </p>
<p>로 인한다면 신체부(辛替否-당나라 사람)가 </p>
<p>&#8216;옛날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느 </p>
<p>냐?&#8217; </p>
<p>했지만, 가락국의 경우만은 옛날에 나라가 망했음은 그 말이 맞다고 할수도 있지 </p>
<p>만 수로왕의 사당이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체부의 말은 모두 믿 </p>
<p>을수는 없다 하겠다. </p>
<p>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에 이 지방사람들 </p>
<p>과 서리,군졸들은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논다. 이 </p>
<p>들은 동편과 서편으로 서로 눈짓하면 건강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져, 망산도에서 </p>
<p>말발굽을 급히 하여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에서 서로 밀면서, </p>
<p>북쪽 고포를 향해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는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 </p>
<p>는 것을 바라보고 황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다. </p>
<p>가락국이 망한 후에는 대대로 이 곳의 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신라 제 31대 정 </p>
<p>명왕-신문왕-이 즉위한 개요 원년 신사(681)에는 금관경이라 이름하고 태수를 두었다. </p>
<p>그 후 259년에 우리 고려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여러 대를 지나오면서 임해현이라 하 </p>
<p>고 배안사를 두어 48년 동안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 혹은 김해부라하여 도호부를 </p>
<p>두어 27년을 지냈다. 또 방어사를 두어 64년 동안을 지내왔다. </p>
<p>순화 2년(991)에 김해부의 양전사(量田使-토지의 측량을맡은 관리)로 있던 중대 </p>
<p>부 조문선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p>
<p>&#8216;수로왕의 능묘에 딸린 밭의 면적이 많으므로 마땅히 15결로 그전대로 제사를 지 </p>
<p>내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府의 역정(役丁-부역을 맡은 戶丁)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p>
<p>좋겠습니다.&#8217; </p>
<p>소관 관서에서 그 장계를 전해서 보고하자, 조정에서 명령을 내렸다. </p>
<p>&#8216;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하여 성군이 되었고, 왕위에 계시어 나이 158세나 누리 </p>
<p>었으니 저 3皇 이후로 이에 견줄 자가 드물다. 수로왕께서 세상을 떠난 후 선대로부터 </p>
<p>능묘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이르러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의구스러운 일이므로 허락 </p>
<p>하지 않는다.&#8217; </p>
<p>양전사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옳게 여겨 그 절반은 능묘의 소속으로 하고 </p>
<p>나머지는 그 곳의 역정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절사-양전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 </p>
<p>에 그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府의 부역하는 호정에게 주었다. 이 일이 거의 끝 </p>
<p>나갈 무렵에 이르러 양전사는 심히 피곤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을 꾸니 7,8명의 귀신 </p>
<p>이 보이는데 밧줄과 칼을 가지고 와서 말했다. </p>
<p>&#8220;너에게 큰 죄가 있으니 목을 베어 죽여야겠다.&#8221; </p>
<p>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잠이깼다. 이내 병이 나서 남들에게 그 사 </p>
<p>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 죽었다. 이 때문 </p>
<p>에 양전도장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후에 사신이 내려가 그 밭을 검사하 </p>
<p>여 보았더니 1결 12부 9속뿐으로 3결 87부 1속이 모자랐다. 이에 모자라는 밭의 가로 </p>
<p>챈 것을 조사해서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능묘에 </p>
<p>주도록 했으니, 또한 고금에 탄식할 일이었다. </p>
<p>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부지런히 정치를 했으며, 참된 일을 지극히 숭상하여 </p>
<p>시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 29년 임진 (452)에 수로 </p>
<p>왕과 허황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했다. 또 사자를 보내어 절 근 </p>
<p>처의 평전 10결을 측량하여 3寶(佛,法,僧)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p>
<p>이 절이 생기고부터 500년 후에 또 장유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 </p>
<p>가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3綱(상좌,사주,유나의 세가지 승적)은 왕후 </p>
<p>사가 장유사의 시지(柴地) 동남쪽 지역 내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하고 장사(莊舍) </p>
<p>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와 마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p>
<p>슬픈 일이다. </p>
<p>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 명은 이러하다. </p>
<p>천지가 처음 열리니, 비로소 이안이 밝았네, </p>
<p>인륜은 비록 생겼다 하나,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네 </p>
<p>이미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둥국에서는 아직도 서울이 갈려 있었네 </p>
<p>계림은 먼저 정해졌고,가락국은 후에 경영되었도다. </p>
<p>스스로 맡아서 다스릴 자 없다면, 백성을 보살필 이 누구이뇨, </p>
<p>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들을 돌보았도다. </p>
<p>부명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내셨다니. </p>
<p>산중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속에 그 모습 감추었다네. </p>
<p>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바깥도 역시 캄캄하네. </p>
<p>바라보매 형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귀 기울이면 소리가 있으니 </p>
<p>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이고, 춤을 추어 바치었네 </p>
<p>7일이 지나매, 일시에 조용해졌네 </p>
<p>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p>
<p>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매, 한 오라기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p>
<p>낯설은 땅에 집과 집이 연이어 있네. </p>
<p>줄줄이 구경꾼들 이어지고, 우글거리며 사람들 바라보네. </p>
<p>다섯 분은 각 읍으로 흩어지고, 한 분만 이 성에 남아 있었네. </p>
<p>한 때에 나와 닮은 모습들, 아우와 형이매 한가지로다. </p>
<p>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도다. </p>
<p>처음 왕위에 오르니, 세상은 이내 맑아질 듯 하였네. </p>
<p>궁전 구조는 옛 법을 따랐고, 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p>
<p>비로소 정사에 힘쓰고, 서정을 보살폈으니, </p>
<p>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매, 오로지 하나이고 오로지 세밀햇네. </p>
<p>길손은 서로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농토를 서로 사양하니 </p>
<p>사방은 모두 안정을 찾고, 만민은 태평을 맞이했도다. </p>
<p>풀밑의 이슬과 같아라. 문득 大椿(16000년을 산다는 나무)의 수명을 보전치 </p>
<p>못하였네. </p>
<p>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가 모두 슬퍼하였네. </p>
<p>그의 발자취 금과 같으며, 그이 이름 옥과 같이 빛나라. </p>
<p>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매, 영묘의 제전은 향기롭기도 하여라. </p>
<p>비록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p>
<p>번호:4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1 16:53 길이:65줄 </p>
<p>거등왕 </p>
<p>아버지는 수로와, 어머니는 허황후, 건안 4년 기묘(199) 3월 13일에 즉위, 치세 </p>
<p>는 39년인데 가평 5년 계유(253) 9월 17일에 붕함.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며 </p>
<p>태자 마품을 낳음. 개황력에는 </p>
<p>&#8216;성은 김씨이니 대개 시조가 금란에서 난 까닭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8217; </p>
<p>고 한다. </p>
<p>마품왕 </p>
<p>마품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253)에 즉위, 치세는39년으로 영평 원 </p>
<p>년 신해(291) 1월 29일에 붕함. 왕비는 종정감 조광의 손녀 호구로 태자 거즐미를 낳 </p>
<p>음. </p>
<p>거즐미왕 </p>
<p>금물이라고도 하며, 김씨. 영평 원년에 즉위, 치세 56년 영화 2년 병오(346) 7월 </p>
<p>8일에 붕함. 왕비는 아궁아간의 손녀 아지로 왕자 이시품을 낳음. </p>
<p>이시품왕 </p>
<p>김씨. 영화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회 3년 정미(407) 4월 10일에 붕함. 왕비 </p>
<p>는 사농경 극충의 달 정신으로 왕자 좌지를 낳음 </p>
<p>좌지왕 </p>
<p>김즐이라고도 함. 의회 3년(407)에 즉위, 용녀에게 장가가서 그 여자으 무리로 </p>
<p>관리를 등용시키니 나라가 시끄러웠다. 계림이 끼를 내서 가락국을 치려했다. 이 때에 </p>
<p>신하인 박원도가 간하기를 </p>
<p>&#8220;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 이겠 </p>
<p>습니까! 질서가 무너지면 사람이 어디에서 보존되오리까? 또 복사가 점으 쳐서 해궤를 </p>
<p>얻었는데 그 궤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이다.> 했으니 왕께선 주역의 </p>
<p>궤를 살피시옵소서.&#8221; </p>
<p>이에 왕은 사례하여 옳다 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p>
<p>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 2년 신유(421)5월 12일 </p>
<p>에 붕함. 왕비는 도녕 대아간의 딸 복수로 아들 취희를 낳음. </p>
<p>취희왕 </p>
<p>즐가라고도 함. 김씨. 영초 2년에 즉위 치세는 31년으로 원가 28년 신묘(451) 2 </p>
<p>월 3일에 붕함. 왕비는 전사각관의 딸 인덕, 왕자 질지를 낳음 </p>
<p>질지왕 </p>
<p>김질왕이라고도 함. 원가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와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p>
<p>빌기 위해 시조와 왕후가 처음 만나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라 하고 밭 10결을 바쳐 </p>
<p>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 10년 임신(492)10월 4일에 붕함. 왕비는 금상사간 </p>
<p>의 딸 방원이며 왕자 겸지를 낳음. </p>
<p>겸지왕 </p>
<p>김겸왕이라고도 함. 영명 10년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 2년 신축(521)4월 7일에 </p>
<p>붕함. 왕비는 출중각관의 딸 숙, 왕자 구형을 낳음 </p>
<p>구형왕 </p>
<p>김씨, 정광 2년에 즉위, 처세는 42년 보정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 24대 진 </p>
<p>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아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p>
<p>많고 이쪽은 적으므로 대전할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 탈지이즐금을 보내어 본국에 </p>
<p>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진흥왕 </p>
<p>때가 아니고 법흥왕 19년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김구해 충왕이 왕비 및 장 </p>
<p>남 노종,중남,무덕 계남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왕비는 분즐수이 </p>
<p>즐의 딸 계화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간, 둘째는 무도각간, 셋째는 무득 </p>
<p>각간이다. 개황록에 보면, </p>
<p>&#8216;양의 무제 중대통 4년 임자(532)에 신라에 항복했다.&#8217; </p>
<p>고 했다. </p>
<p>논평하여 본다. 삼국사를 살펴보건대, 구형왕은 양의 무제 중대통 4년 임자에 땅 </p>
<p>을 바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 </p>
<p>18년 임인(42)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p>
<p>기록으로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보정 2년 임오(562)에 해당한다. 그런 </p>
<p>까닭에 30년을 더하게 되면 도합 520년이나 되는 셈이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 둔 </p>
<p>다.-법흥왕 10년(532)의 일이니 490년의 계산이 맞다.- </p>
<p>번호:4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4 20:04 길이:160줄 </p>
<p>삼 국 유 사 제3권 </p>
<p>興法 제 3 </p>
<p>순도조려(順道肇麗) </p>
<p>고구려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p>
<p>&#8216;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은 곧 동진 힘안 2년이며 효뮤제가 즉위한 해이다. </p>
<p>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시켜서 불경과 경문을 보내고, 또 4년 갑술(374)에는 </p>
<p>아도가 동진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375)2월에는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있게 하고 또 </p>
<p>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그곳에 있게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이다.&#8217; </p>
<p>해동고승전에는 순도와 아도가 위나라에서 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 </p>
<p>은 전진에서 온 것이다. 또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 </p>
<p>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이다. </p>
<p>살펴보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다른 이름은 안정홀이니 요수의 북쪽에 </p>
<p>있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이때의 국도는 국 </p>
<p>내성으로 일연의 지리고증은 모두 틀리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송경(개성)흥국사의 </p>
<p>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p>
<p>기리어 읊는다. </p>
<p>압록강에 봄이 깊으니 물풀은 곱고, </p>
<p>백사장의 갈매기들 한가로이 조네, </p>
<p>문득 저 멀리 들리는 노 젓는 소리, </p>
<p>어는 곳 고깃배인지 길손이 벌써 당도했네. </p>
<p>난타벽제(難陀闢濟) </p>
<p>벡제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p>
<p>&#8216;제 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384)에 胡의 중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맞아 </p>
<p>들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8217; </p>
<p>이듬해 을유(385)에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나라에서 도첩을 </p>
<p>내린 중 또는 도통한 중) 열사람을 두었는데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이다. </p>
<p>또 아신왕은 즉위한 대원 17년(37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 복을 </p>
<p>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를 번역하면 동학(童學)이 된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하늘의 조화는 옛부터 아득하니, </p>
<p>대개 잔재주의 솜씨 뵈기 어려워라. </p>
<p>어른들은 스스로 노래와 춤으로 </p>
<p>옆 사람을 이끌어 눈뜨게 했네. </p>
<p>아도기라(阿道基羅)-아도 또는 아두라 한다.- </p>
<p>신라본기 제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p>
<p>&#8216;제 19대 눌지왕 때 사문(沙門-머리깍고 불문에 들어가 도를 닦는 중) 묵호자가 </p>
<p>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오니 그 고을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그를 </p>
<p>편안히 있게 하였다.&#8217; </p>
<p>이 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보내왔는데, 신라의 군신들은 그 </p>
<p>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 </p>
<p>루 돌아다니며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더니 말했다. </p>
<p>&#8220;이것은 향이라고 하는데 태우면 향내가 진하게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한 </p>
<p>곳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3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p>
<p>축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8221; </p>
<p>이 때 왕녀의 병이 위중해서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하니 이내 병 </p>
<p>이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잠시 후 그의 간 곳을 알수가 없었 </p>
<p>다. </p>
<p>또 21대 비처왕때에 이르러 아도 화상이 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 </p>
<p>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이곳에서 몇 해를 지내더니 별다른 병도 </p>
<p>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가끔 믿는 사람이 </p>
<p>생겼다. </p>
<p>아도본비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며, 어머니는 고도령이다. </p>
<p>정시 연간(240-248)에 조위사람인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 </p>
<p>(私通)하고 돌아갔는데 이 때문에 아이를 가졌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니 그의 어머니 </p>
<p>는 그를 출가시켯다. 나이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이 강독하는 곳 </p>
<p>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다시 돌아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말했다. </p>
<p>&#8220;이 고구려는 아직까지도 불법을 모르지만 앞으로 3천여 달이 되면 신라에서 성 </p>
<p>왕이 나와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의 서울에는 일곱군데의 가람터가 있는 </p>
<p>데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이요, 둘째는 3천의 갈래요 셋째는 용궁의 남쪽이요,넷 </p>
<p>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사천의 신유림이요,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이것은 모 </p>
<p>두 전불(前佛-석가모니 이전에 성불한 부처)때의 가람터이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 </p>
<p>질 곳이다. 그러하니 너는 그 곳으로 가서 대교르 전파하면 마땅히 불교의 개조가 될 </p>
<p>것이다.&#8221; </p>
<p>어머니의 가르침을 들은 아도는 계림으로 가 왕성 서쪽마을에 살았는데 지금의 </p>
<p>엄장사이며, 때는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였다. 아도가 대궐로 들어가 불교를 전하 </p>
<p>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라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 </p>
<p>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미추왕 3년에 성국 공주가 병이 </p>
<p>깊어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자 칙사를 보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이에 법사가 </p>
<p>급히 대궐로 들어가 공주의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 </p>
<p>는 대답했다. </p>
<p>&#8220;빈도에게는 아무런 청도 없사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크게 일 </p>
<p>으켜 국가의 복을 빌 수 있기만 바랄 따름입니다.&#8221; </p>
<p>왕은 이를 허락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그 때의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 </p>
<p>하므로 법사는 모옥을 지어서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 </p>
<p>다. 그래서 그 절을 홍륜사라고 이름했다. 모록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인데,법사에 </p>
<p>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지에 절을 짓고 살았다. 그 절을 영흥사라 했다. </p>
<p>얼마 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했다. 그래서 </p>
<p>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든후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하여 다 </p>
<p>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p>
<p>제 23대 법흥대왕이 소량(중국남조의 양나라) 천감 13년 갑오(514)에 왕위에 올 </p>
<p>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이로 보면 고도령이 말한 </p>
<p>3천여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p>
<p>여기서 보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가지 설이 서로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p>
<p>이와 같다. 내가 생각하건대 양과 당의 두 승전 및 삼국본사에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p>
<p>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동진 말년인 태원 연간(376-396)에 있었다고 했는데 순도,아도 </p>
<p>두 법사가 소수림왕 갑술(374)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므로 이 전기는 잘못되지 않 </p>
<p>았다. </p>
<p>만약에 비처왕 때에 처음으로 신라에 왔다면, 그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백년이 </p>
<p>나 머물렀다 온 것이 되므로, 비록 대성의 행동이나 동작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는 </p>
<p>하지만 모두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신라에서 불교를 믿은 것이 이처럼 </p>
<p>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만약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이는 고구려에 온 갑술(3 </p>
<p>74)보다 백여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이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이나 예교(禮敎)가 있지 </p>
<p>않았다. 나라의 이름조차도 아직 정하지 않을 때이니 어느 틈에 아도가 아서 불법을 </p>
<p>믿기를 청했겠는가? 그리고 고구려에도 닿지 않았는데 건너 뛰어 신라로 왔다는 말은 </p>
<p>맞지 않는 말이다. 설령 불교가 잠시 일어났다가 폐해졌다고 한대도 어찌 그 중간에 </p>
<p>아무 소문도 없이 잠잠했으며, 향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었겠는가? 또 하나 연대는 </p>
<p>어찌 그다지 뒤졌으며 또 한쪽은 어찌 그리 앞섰단 말인가? </p>
<p>생각해 보건대, 불교가 동방으로 점점 퍼지던 형세는 틀림없이 고구려, 백제에서 </p>
<p>시작하여 신라에서 그쳤을 것이다. 신라의 눌지왕과 고구려의 소수림왕 시대가 서로 </p>
<p>잇대어 있으므로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p>
<p>그리고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란 이름 </p>
<p>도 참 이름이 아니고 그 자의 별칭이엇을 것이다. </p>
<p>이는 양나라 사람이 달마를 가리켜 벽안호라 하고, 진나라에서 중 도안을 조롱하 </p>
<p>여 칠도인이라 한 것과 같을 것이다. 아도는 높은 행동으로 세상을 피하면서 자기 이 </p>
<p>름을 말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이로써 대개의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니 아도니 </p>
<p>하는 두가지 이름으로 불러 마치 한사람이 두 사람인냥 전해 내려왔을 뿐이다. 더구나 </p>
<p>아도의 겉모습이 묵호와 같다고 했으니 이것으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p>
<p>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돌며 말한 것은 바로 절을 처음 세운 선후의 순서로써 </p>
<p>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전기는 잃었기 때문에 이제 여기서는 사천의 끝을 다섯 </p>
<p>번째로 실은 것이다. 그리고 3천여달이란 것도 반드시 전부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 </p>
<p>지왕 때부터 정미(527)까지는 무려 백여년나 되니 만일 1천여달이라 했다면 거의 비슷 </p>
<p>했을 것이다. 성씨를 아라고 하고 외자 이름을 쓴 것은 거짓인 듯하나 자세히는 알수 </p>
<p>가 없다. </p>
<p>또 원위(元魏)의 중 담시의 전기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담시는 관중사람이다. 출 </p>
<p>가 후 이적(異迹)이 많았다. 동진의 효무제 태원 9년(384)말에 경장과 율장 수십부를 </p>
<p>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여기에서 삼승(三乘-성문,연각,보살의 열반에 </p>
<p>이르는 세가지 교법)을 가르쳐 즉시 불계에 귀의하게 했는데, 대개 이것이 고루려에서 </p>
<p>불교를 접한 시초일 것이다. </p>
<p>의회 초년(406)에 담시는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삼보(한나라때 장안부근을 일컫 </p>
<p>던 말)에 불교를 전파시켰다. 그는 발이 얼굴보다 더 희고 아무리 진흙탕 물 속을 지 </p>
<p>나쳐도 더러워지거나 젖는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백족화상이라 불렀다 </p>
<p>한다. 동진 말년에 북방의 흉노 혁련발발이 관중을 함락시키고 죽인 사람이 수없이 많 </p>
<p>았다. 이 때 역시 담시도 화를 당했지만, 칼날이 그를 상하게 하지 못하자 발발이 탄 </p>
<p>식하며, 중들을 모두 놓아주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비밀히 산택으 </p>
<p>로 도망가서 두타의 행실을 닦았다. 척발도가 다시 장안을 쳐서 이기고 그 위세를 관 </p>
<p>중과 낙양에까지 떨쳤다. 이 때 박릉에 최호란 사람이 있었는데 좌도를 조금 익혀서 </p>
<p>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그는 지위가 위보의 재상에 올라 척발도의 신임을 받게되 </p>
<p>자 천사(도교의 교주) 구겸지와 함께 척발도를 달래 말했다. </p>
<p>&#8220;불교는 아무런 이익도 없으며 오히려 백성들의 생업에 해로울 따름입니다.&#8221; </p>
<p>그리고는 불교를 폐하도록 전했다고 한다. </p>
<p>태평 말년에 담시는 비로소 척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이에 정월 </p>
<p>초하룻날 돌연 지팡이를 짚고 대궐문에 이르렀다. 이말을 들은 척발도는 그를 베어 </p>
<p>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도 상함이 없자 척발도가 직접 베었지만 역시 상 </p>
<p>하지 않았다. 이에 북원에서 기르던 범에게 주었지만, 범도 역시 감히 가까이 하지 못 </p>
<p>했다. 이로써 척발도는 매우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문득 역 </p>
<p>질에 걸리었다. 또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까지도 잇달아 나쁜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p>
<p>이 죄과가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하여, 이에 두 집의 종족을 모두 죽여 업애고 나라 </p>
<p>안에 선언해서 불교를 크게 퍼뜨리게 했다. 담시는 그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알수없다. </p>
<p>논평하여 말한다. </p>
<p>담시는 태원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회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 </p>
<p>지만 여기에서 10여년이나 머물렀는데 어찌 동국역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단 말인가. </p>
<p>담시는 이미 괴이하고 휼계가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인데, 아도,묵호,난타와 연대 </p>
<p>나 사적이 모두 같으므로 필경 이들 셋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그의 변명이 아닌가 한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금교에 눈 쌓이고 얼어 풀리지 않고, </p>
<p>계림의 봄빛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네 </p>
<p>어여뻐라, 봄의 신 재주 많구나, </p>
<p>모랑의 집 매화꽃 먼저 피게 했네. </p>
<p>번호:4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6 17:27 길이:141줄 </p>
<p>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厭촉(해골촉)滅身) </p>
<p>&#8216;눌지왕 때로부터 백여년이나 된다.&#8217; </p>
<p>신라본기에 보면 법흥대왕이 즉위한 지 14년(527)에 소신 이차돈이 불법을 위하 </p>
<p>여 자기의 몸을 죽였다. 이 때가 소량으로서는 곧 보통 8년 정미(527)로서 서천축의 </p>
<p>달마대사가 금릉에 온 해이기도 하다. </p>
<p>또 이해에는 낭지법사가 또한 처음으로 영추산에서 법장을 열었던 해이기도 하다. </p>
<p>이로 보면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 </p>
<p>을 알 수가 있다. 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중 일념이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지었 </p>
<p>는데 여기에 이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대강은 이러하다.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 </p>
<p>극전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 동쪽 부상지역을 살펴보고 말했다. </p>
<p>&#8220;예전에 한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불법이 동쪽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내가 왕위 </p>
<p>에 오른 뒤로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고자 한다.&#8221; </p>
<p>이에 조신들은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로지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 </p>
<p>을 지키고 절을 세우겠다는 신령한 생각을 따르지 않으므로 대왕은 탄식했다. </p>
<p>&#8220;아아! 나는 덕이 없는 자로서 왕업을 이어 받았도다. 그래서 위로는 음양의 조 </p>
<p>화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워함이 업음이니라. 정사를 닦는 틈틈이 불교에 </p>
<p>마음을 두었으니 누가 나와 더불어 일을 할꼬.&#8221; </p>
<p>이때 소신이 있었는데 성은 박씨요 자는 염촉인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p>
<p>없다. 조부는 아진 종으로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다. </p>
<p>그는 죽백과 같은 자질에 수경(水鏡)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한 집안의 증손 </p>
<p>으로서 궁안의 조아(爪牙-왕을 보좌하는 무신)가 되기를 희망했고 성조의 충신으로서 </p>
<p>하청(河淸-황하가 맑아지면 聖王이 나와 나라가 태평해짐)에 등시(登侍)할 것을 기대 </p>
<p>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로서 사인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 </p>
<p>심정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p>
<p>&#8220;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추요(짐승먹이는 꼴과 땔나무)에게도 계교를 물었다 </p>
<p>하오니 신은 큰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8221; </p>
<p>&#8220;네가 할 일이 아니다.&#8221; </p>
<p>왕의 말에 사인이 말했다. </p>
<p>&#8220;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오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 </p>
<p>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하여 신의 목을 치시면 만민이 </p>
<p>굴복하여 왕의 말씀을 감히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8221; </p>
<p>왕이 말하기를 </p>
<p>&#8220;해육평구(解肉枰軀) 장속일조(將贖一鳥)하려 했고 쇄혈최명(灑血최命)자령칠수 </p>
<p>(自怜七獸)를 불상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없는 사 </p>
<p>람을 죽이겟느냐? 너는 오직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8221; </p>
<p>왕의 만류에 사인이 말했다. </p>
<p>&#8220;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p>
<p>아침에 행해지면 불일(佛日)은 다시 일어나고 성주께서는 편안하실 것입니다.&#8221; </p>
<p>&#8220;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하늘을 뚫을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고니의 </p>
<p>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헤칠 기세를 품었다 하더니, 만약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 </p>
<p>면 가히 대사(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으리라.&#8221; </p>
<p>이에 대황은 일부러 위의를 갖추고 동서쪽과 남북쪽에 풍도상장(風刀霜仗-무시 </p>
<p>무시한 형구)을 벌여놓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p>
<p>&#8220;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이를 지체시키지 않았느냐?&#8221; </p>
<p>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며 두려워 하여서 황망하게 맹세하고 손으로 <동쪽과 </p>
<p>서쪽>을 가리키자 왕은 사인을 부러 꾸짖었다.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아무런 대답 </p>
<p>도 하지 못했다. </p>
<p>대왕이 크게 노하여 그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하니 유산느 그를 묶어 관아로 끌고 </p>
<p>갔는데, 사인이 맹세하는 글을 짓고, 옥리가 그의 목을 베었다. 이 때 흰젖이 한 길 </p>
<p>이나 솟아 올랏으며 하늘은 어두워져 사양이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 </p>
<p>어졌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셨고, 재상들은 근심되어 진땀이 선면(蟬 </p>
<p>冕-신하들이 쓰는 관)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문득 마르니 물고기와 자라가 갑자 </p>
<p>기 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긴 팔 원숭이들이 떼지어 가며 울었다. </p>
<p>춘궁(春宮-태자가 거처하는 궁)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 </p>
<p>리면서 서로 바라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 듯 이 </p>
<p>별을 쓸퍼했다. 관을 쳐다보며 우는 소리는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모 </p>
<p>두 말했다. </p>
<p>&#8220;개자추가 다리의 살을 벤 일도 염촉의 고절함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춘추 </p>
<p>시대 위나라 사람, 적인이 위를 공격하여 의공을 죽이고 간만 남겨놓고 살은 다 먹었 </p>
<p>는데, 홍연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이를보고, 자신의 배를 갈라 의공의 간을 자기 </p>
<p>배에 넣고 죽었다고 함.)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그의 장렬함에 비할 수 있으리오. 이 </p>
<p>것은 바로 대앙의 신력을 붙들어서 아도의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니 참으로 성자로다!&#8221; </p>
<p>드디어 북산 서쪽 고개에 장사지냈다. 내인들은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서 난야 </p>
<p>(蘭若-한가롭고 고요하여 수행에 적당한 곳, 즉 절)를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라고 했다 </p>
<p>. </p>
<p>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공경하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 </p>
<p>를 행하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 14년(527)이지 </p>
<p>만 불교의 공인은 이듬해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조 참조) </p>
<p>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544)에 대흥륜사가 이룩되었다. </p>
<p>대청초년에 양나라의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져오고, 천가 6년(565)에 진라라 사 </p>
<p>신 유사가 중 명관과 함께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과 탑이 </p>
<p>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 법당을 세우고 범종도 달았다. 용상의 중들은 천하의 복전 </p>
<p>(福田-복을낳게 하는 밭)이 되고, 대승 소승의 불법은 서울의 자운(慈雲-자비로운 마 </p>
<p>음이 구름처럼 일어남)이 되었다. 다른 지방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서역의 이름난 </p>
<p>중들이 이 땅에 오니, 이로 하여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가 합하여 한 집 </p>
<p>이 되었다. 그러므로 덕명은 천구의 나이에 쓰이고, 신적은 성하의 물에 그림자를 비 </p>
<p>추니 이것은 어찌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랴-세성인은 아도 법흥 염촉 </p>
<p>을 말함- 그 뒤에 국통(신라때의 가장 높은 승직) 혜륭과 법주(고승) 효원 김상랑, 대 </p>
<p>통(승직의 하나) 녹풍, 대서성 진서, 파진찬 김의 등이 사인의 옛 무덤을 수축하고 큰 </p>
<p>비석을 세웠다. </p>
<p>원화 12년 정유(817)8월 5일은 곧 제 41대 헌덕대왕 9년이니 흉륜사의 영수선사 </p>
<p>는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들을 모아 매달 5일에 영혼의 묘원을 위해서 단을 쌓고 법회 </p>
<p>를 열었다. </p>
<p>또한 향전에는 이렇게 적었다. </p>
<p>&#8220;그 제삿날이 되면 언제나 고을의 노인들이 사(社)를 만들어 흉륜사에서 모임을 </p>
<p>가졌다.&#8221; </p>
<p>즉, 이 달 초닷새는 곧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에 순응한 날이다. 아아! 이러 </p>
<p>한 임금이 없었던들 이런 신하도 업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던들 이러한 공덕도 </p>
<p>없었을 것이니, 마치 유비라는 물고기가 제갈량이란 물을 만남과 같으며, 구름과 용이 </p>
<p>서로 감응해 모인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p>
<p>법흥왕이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을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이룩되자 면류관을 벗고 </p>
<p>가사을 입었으며, 궁중에 잇는 친척들을 내어 절의 종으로 삼게 하고 그 절의 주지가 </p>
<p>되어 몸소 널리 교화시켰다. </p>
<p>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계승한 성군으로서 임금의 직책을 이어 받고 95(임금 </p>
<p>의 자리,역경 건괘의 95효(爻)가 인군의 상이라 함)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 </p>
<p>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다. 이내 이 절에 대왕홍륜사란 이름을 하사했다. 전황 법흥왕 </p>
<p>의 성은 김씨요, 출가한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p>
<p>책부원귀(冊府元龜-송나라의 양흠약등이 역은 역대 군신의 사적을 모은 책)에 보 </p>
<p>면 법흥왕이 성을 모, 이름은 진이라 했다. 처음 역사를 일으켰던 을묘(535,법흥왕 22 </p>
<p>년)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를 셍고 모록의 누이동생인 사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법흥왕 </p>
<p>과 더불어 낙채(落彩)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묘법이라 했다. 역시 영흥사에 살더니 몇 </p>
<p>해 후에 세상을 떠났다. 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무너지더 </p>
<p>니 얼마 되지 않아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고 했다. 살펴보건대 진흥왕은 법흥왕 </p>
<p>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 박씨는 모량리 영실각간의 딸이며, 역시 출가하여 중은 되 </p>
<p>었지만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면 진(眞)자를 마땅히 법(法)자로 고치면 </p>
<p>필경 이것은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중이 되었다가 죽은 것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p>
<p>이것은 그가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p>
<p>법흥,진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이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다 </p>
<p>스리는 교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대통 원년 정미(527)에는 양의 무제를 위하 </p>
<p>여 웅천주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라 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성인의 지혜는 종래 만세를 꾀하니, </p>
<p>구구한 여론은 지극히 하찮아라. </p>
<p>法輪이 풀리고 金輪이 구르니, </p>
<p>요순이 시절이 불교로 인해 이루어지네 </p>
<p>이것은 원종을 찬미하여 지은 것이다. </p>
<p>의을 좇아 생을 버림이 놀라운 일이네, </p>
<p>천화(天花)와 흰 젖의 이적(異蹟) 더욱 다정해라. </p>
<p>어느덧 한 칼에 몸은 비록 죽었으되, </p>
<p>절마다 울리는 종소리 서울을 뒤흔드네. </p>
<p>이것은 염촉을 찬미하여 지은 것이다. </p>
<p>법왕금살(法王禁殺) </p>
<p>백제 제 29대 법왕의 이름은 선인데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왕 10년 기미(599)에 </p>
<p>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응전의 종 </p>
<p>류를 놓아주게 하고, 또한 어렵의 기구를 불살라서 살생을 일체 금지시켰다. 다음해 </p>
<p>경신년에는 30명의 도승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창건하려 했으나 겨우 </p>
<p>터를 닦고서는 세상을 떠났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이 일 </p>
<p>으켜 수기를 지나서 완성했다. 그 절을 또한 미륵사라고도 한다. </p>
<p>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곳이었는데, 화목의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움을 </p>
<p>다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와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 </p>
<p>를 구경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짐승을 보호하는 너그러움은 그 은혜 천구에 미치고, </p>
<p>돈어(돼지,물고기)에까지 흡족하니 덕택과 어짐이 사해에 미치네. </p>
<p>성군이 돌아가심 말하지 마오. </p>
<p>상방(천상) 도솔(도솔천)에는 이제 봄이 한창이리 </p>
<p>번호:4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7 15:48 길이:83줄 </p>
<p>보장봉노 보덕이암(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절을 옮김) </p>
<p>고구려 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 말기인 무덕 정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p>
<p>다투어 오두미교(후한 때 발흥한 종교, 삼국지에 나오지요)를 신봉했다. 이 말을 전해 </p>
<p>들은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시켜 천존상(도교에서 모시는 최고의 신)을 보내고, 또 가 </p>
<p>서 도덕경을 강술케 하여 왕이 백성들과 함께 그것을 들었다. 때는 곧 제 27대 영류왕 </p>
<p>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p>
<p>불교와 도교를 배우기를 청하자, 당나라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 </p>
<p>그 뒤에 보장왕이 즉위하자-정관 16년 임인(642)- 또한 유불도의 세교를 같이 </p>
<p>일으키려 했다. 그 때 왕의 총애를 받던 재상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p>
<p>&#8220;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황관(도사)은 성하지 못합니다. </p>
<p>그러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8221; </p>
<p>그 때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이 도교가 불교와 맞서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 </p>
<p>질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여러번 왕에게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으므로 신력으로 방장 </p>
<p>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영휘 원년 경술 </p>
<p>(650) 6월 이었다. 또 본전에는 건봉 2년 정묘(667) 3월 3일의 일이라 했다. 총장 원 </p>
<p>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셈해 보면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에 날아온 </p>
<p>방장이 있다는데 바로 이것이라 한다. 진락공(고려 이자현의 시호)은 그를 위해 시를 </p>
<p>써서 당(堂)에 남겨두었고, 문열공(김부식의 시호)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 </p>
<p>했다. </p>
<p>또 당서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에 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 양명이란 </p>
<p>자가 있어서 전쟁에서 불리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p>
<p>&#8220;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 것이다.&#8221; </p>
<p>개(蓋)씨가 정권을 잡고 독재하자 개로 성을 삼으니 곧 양명이 이에 부합된다. </p>
<p>또 고구려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 임신(612)에 30만명의 </p>
<p>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처들어 오매, 10년 갑술 (614)10월에 고려왕-영양왕-이 </p>
<p>표문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이 때 한 사람이 비밀리에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p>
<p>표문을 가진 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안으로 들어갔다. 양제가 표문을 들어서 읽고 있 </p>
<p>는데 소노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이에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p>
<p>사람들에게 말했다. </p>
<p>&#8220;천하의 군주가 된 내가 이 조그만 나라를 친정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에 웃 </p>
<p>음거리가 되었도다.&#8221; </p>
<p>이때 우상 양면이 아뢰었다. </p>
<p>&#8220;신이 죽으면 고구려 대신이 되어 필연코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 </p>
<p>겠사옵니다.&#8221; </p>
<p>그 후 양제가 죽은 뒤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가 되니 총명하였 </p>
<p>으며 신기한 무용이 있었다. 그때 무양왕-확실하지는 않다.-이 그의 어질다는 말을 듣 </p>
<p>고 불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p>
<p>지위는 소문에까지 이르렀다. 소문은 바로 시중의 벼슬이다. </p>
<p>개금이 아뢰었다. </p>
<p>&#8220;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가 있는 법이다. 신이 보건대 </p>
<p>이 나라에는 불교와 유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8221; </p>
<p>왕은 이를 옳게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청했다. 이에 태종이 서달 등 도사 8명을 </p>
<p>보내주었다. </p>
<p>왕은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만들고 도사를 존경하여 유사(儒士)위에 앉게했다. </p>
<p>도사들은 나라 아의 이름난 산천을 돌아다니며 이를 진압시키는데, 평양성의 지세가 </p>
<p>신월성(半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은 주문을 외워 남하의 용에게 명령해서 만월성을 더 </p>
<p>늘려 쌓아 용언성이라 했으며, 참기(讖記-앞날의 길흉에 대해 적은 글)를 지어 용언도 </p>
<p>또는 천년보장도라고 했다. 여기에 혹 영석을 파서 깨뜨리기도했다. </p>
<p>개금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쪽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이 역사는 16년 </p>
<p>만에야 끝났는데,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보 </p>
<p>장왕 때에 이르니 친히 6군을 거느린 당나라 태종이 쳐들어 왔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p>
<p>돌아갔다. 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 무진(668)에 우상 유인궤, 대장군 이적과 신라 김인 </p>
<p>문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이에 보장왕의 서 </p>
<p>자(안승)가 4천여가(家)를 인솔하여 신라에 항복했다. 대안 8년 신미(1092)에 고려의 </p>
<p>우세승통(대각국사 의천)잉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 가서 보덕성사의 영정을 뵙고 </p>
<p>시를 지었다. </p>
<p>열반의 평등한 가르침 </p>
<p>우리의 스승들로부터 전해졌다고 이르네. </p>
<p>애석해라 승방을 날려온 후, </p>
<p>동명왕의 고국이 위태로웠네. </p>
<p>그 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p>
<p>&#8220;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미혹하여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이에 보덕법사는 승방 </p>
<p>을 날려서 남쪽의 마이산으로 옮겨 놓았다.&#8221; </p>
<p>그 후에 신인이 고구려 마령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 </p>
<p>이 얼마 남지 않았다.> </p>
<p>이런 것은 모두 국사와 같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본전과 승전에 적혀 있다. 보덕법 </p>
<p>사에게는 11명의 덕이 높은 제자가 있었다. 그 중 무상화상은 제자 김취등과 함께 금 </p>
<p>동사를 세웠고, 적멸, 의융 두 법사는 진구사를 세웠으며, 지수는 대승사를 세웠고, </p>
<p>일승은 심정,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를 세웠고, 수정은 유마사를 세웠으며, 사대는 계 </p>
<p>육 등과 함께 중대사를 세웠고,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세웠고, 명덕은 연구사를 세웠다. </p>
<p>개심과 보명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불교는 드넓은 바다처럼 끝이 없어라. </p>
<p>백천의 유도교 다 바 받아들이네 </p>
<p>가소롭다. 저 여왕(麗王) 웅덩이를 막으니 </p>
<p>와룡(초야의 큰인물)이 바다로 옮겨감을 알지 못하네. </p>
<p>번호:5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8 00:05 길이:126줄 </p>
<p>탑상(塔像) 제 4 </p>
<p>동경홍륜사 금당 10성 </p>
<p>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니소(泥塑-진흙으로 만든상)는 아도,염촉,혜숙, </p>
<p>안함,의상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니소는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이다. </p>
<p>가섭불연좌석(가섭불은 부처 이름, 연좌석은 좌선하던 돌) </p>
<p>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있다. </p>
<p>&#8216;신라 월성 동쪽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 곳은 바로 前佛때의 </p>
<p>절터이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절 중 하나다.&#8217; </p>
<p>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553)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p>
<p>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왕은 의아스럽게 여겨 신궁을 고쳐서 황룡 </p>
<p>사로 삼았다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 </p>
<p>이는 5,6척이나 되었으며 그 둘레는 겨우 세 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뚝 서 있는 그 </p>
<p>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p>
<p>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그 곳에 쇠르 붙여 보호했다. 기려서 시를 짓는다. </p>
<p>불교의 침체함이 아득하여 기억할 수 없으니, </p>
<p>오로지 연좌석만 그대로 남았구나 </p>
<p>몇 번인가, 桑田이 변하여 滄海가 됨이, </p>
<p>애달파라, 그 자리에 의연히 있구나. </p>
<p>이윽고 서산대병(고려 고종때의 몽고의 침입)이후에 불전과 탑은 모두 불타버렸 </p>
<p>다. 또한 이 돌 역시 흙에 파묻혀서 지면과 함께 편편해진 것이다. </p>
<p>아함경(소승불교의 경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가섭불은 바로 賢劫(3劫의 하나 </p>
<p>로 1천여불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함)의 세번째 부처다. 그는 사람의 나이로 따 </p>
<p>지면 2만세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 의거하여 증감법으로 계산한다면 언 </p>
<p>제나 成劫(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긴 시간의 하나, 4겁이 있는데 성겁, 주겁, 공겁, 괴 </p>
<p>겁이다.)의 시초에는 모두 無量歲(끝이 없는 시간)를 누렸다. </p>
<p>이것이 점점 감해져서 8만세에 이르면 그 때가 바로 住劫(세계가 성립되었다가 </p>
<p>파괴되어 空으로 돌아가는 오랜 시기를 넷으로 나눈 것의 하나)의 초가 된다. 이때부 </p>
<p>터 또 백년마다 1세씩 감하여 10세가 되면 1減이 된다. 또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p>
<p>세가 되면 1增이 된다. 이렇게 하여 20번 감하고, 20번 증하면 주겁이 된다. 이 한 </p>
<p>주겁 동안에 1천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인 석가불은 네 번째의 부처 </p>
<p>가 된다. 이 네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 9감중에 나타나게 된다. </p>
<p>석가세존이 1백세의 수르 누린 때로부터 가섭불의 2만세를 누렸던 때까지는 벌써 </p>
<p>2백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 시초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과거 7불중의 하나)시 </p>
<p>대까지 이르면 또 몇만세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올라가 劫初(태초)의 무량 </p>
<p>세를 누리던 때까지는 또한 얼마나 될 것인가? </p>
<p>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 18년 신사(1281)까지가 이미 2천2백30년이 </p>
<p>고 보면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 만년이나 된다. </p>
<p>본조(고려)의 명사 오세문이 역대가(歷代歌)를 지었다. 이에 의하면 大金의 정우 </p>
<p>7년 기묘(319)에서 거슬러 올라가 4만9천6백여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가 천지를 개벽 </p>
<p>한 무인년이 된다고했다. </p>
<p>또 연희궁 녹사 김희령이 지은 대일역법에 의하면, 천지 개벽한 上元갑자로부터 </p>
<p>원풍 갑자(1084)에 이르기까지는 193만7천6백41세라고 했다. </p>
<p>그리고 찬고도(중국의 역사책)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획린(춘추시대 노 </p>
<p>나라의 애공이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사로잡은 때)에 이르기까지가 276만세라고 했다. </p>
<p>여러 경문을 살펴보면 또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p>
<p>하였으니, 오히려 겁초의 천지가 개벽한 때와는 어린애가 될 정도다. 이런 三家의 설 </p>
<p>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천지개벽의 설에 있어서는 무 </p>
<p>척 소홀했던 것이다. </p>
<p>요동성의 육왕탑(육왕은 아쇼카왕) </p>
<p>삼보감통록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p>
<p>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 </p>
<p>옛날 고구려 성왕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오 </p>
<p>색 구름이 당을 뒤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곳에는 중 한 </p>
<p>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보면 중은 없어지고 멀리서 보 </p>
<p>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곁에는 삼중으로 된 토탑이 있었는데, 위는 솥을 덮은 </p>
<p>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p>
<p>그래서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만 무성할 따름이었다. 그리 </p>
<p>하여 그 곳을 파보게 하였더니 한 길쯤 되는 곳에서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보니 </p>
<p>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산스크리트어 책)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 </p>
<p>글을 알아보고 불탑이라고 말했다. 왕이 자세히 묻자 시신은 대답했다. </p>
<p>&#8220;이것은 한나라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하늘에 제사지내는 부처- </p>
<p>이라합니다.&#8221; </p>
<p>성왕은 이로 인하여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이내 7重의 목탑을 세웠으며, 그뒤 </p>
<p>비로소 불법이 전해 오자 그 시종(始終)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 </p>
<p>이를 줄이다가 본 탑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이 통일했다는 염부제주(불교에서 말하 </p>
<p>는 4대주의 하나로 인도를 이렇게도 부름)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이할 것 </p>
<p>이 없다. </p>
<p>또 당나라 용삭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있었다. 행군 설인귀는 수양제가 </p>
<p>토벌한 옛 땅에 이르렀다가 이 곳에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p>
<p>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古老에게 물었더니 말했다. </p>
<p>&#8220;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난 것입니다.&#8221; </p>
<p>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 </p>
<p>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p>
<p>유주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고구려의 성왕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 </p>
<p>명성제라고 하나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동명제는 전한의 원제 건소 2년(B.C. 37)에 </p>
<p>즉위하여 성제 홍가 임인(B.C.19)에 승하했으므로 그 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 </p>
<p>(貝葉-인도에서 종이대신에 글씨를 쓰던 나뭇잎, 즉 불경을 말함)을 볼 수 없었는데, </p>
<p>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佛을 포도왕이라 했으 </p>
<p>니, 서한 때에도 필경 서역문자를 아는 자가 있었으므로 범서라 했을 것이다. </p>
<p>고전을 살펴보건대,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들에게 명하여 인구 9억명이 사는 곳마 </p>
<p>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염부계(인도) 안에 8만4천개를 세워서 큰 </p>
<p>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번 나타난 </p>
<p>것이 아니므로 대개 진신(眞身-부처님의 영원한 본체)의 사리란 그 감응됨을 헤아리기 </p>
<p>가 어려운 것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아육왕의 보탑은 진환(속세) 곳곳에 세워져, </p>
<p>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어 이끼 껴서 무늬 졌네. </p>
<p>회상하노니 그 때 길손의 눈은, </p>
<p>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다. </p>
<p>금관성의 파사석탑 </p>
<p>금관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시조 수로 </p>
<p>왕이 왕비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48)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로 </p>
<p>싣고 온 것이다. </p>
<p>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p>
<p>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께 그 까닭을 아뢰자 부 </p>
<p>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때서야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 </p>
<p>착하여 배를 댔다.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으며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 </p>
<p>기 때문에 지금 그 곳을 주포하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곳을 </p>
<p>능현이라 하며, 붉은 기가 처음으로 해안으로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이라 한다. </p>
<p>수로왕이 황후를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린 세월은 150여년이나 된다. 하지만 그 </p>
<p>때까지도 해동에는 아직 절이 세워지지 않았으며, 불법을 신봉함도 없엇으니, 대개 상 </p>
<p>교(像敎-불교의 다른 이름)가 전해오지 않았으므로 이곳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p>
<p>그렇기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 </p>
<p>대 질지왕 2년 임진(452)에 이르러 그 곳에 절을 세우고, 또한 왕후사를 세워 지금에 </p>
<p>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아울러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p>
<p>실려있다. </p>
<p>탑은 모난 사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하게 </p>
<p>붉은 무늬가 있는데, 품질이 매우 좋으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 </p>
<p>草-藥을 상중하 삼품으로 분류한 책)에 말한-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것이 </p>
<p>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나,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있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염(厭-석탑)을 실은 붉은 돛배 깃발도 가벼워라, </p>
<p>신령께 빌고 빌어 거친 바다 헤쳐 왔네. </p>
<p>어찌 황옥만을 도와 이 언덕에 왔으리오. </p>
<p>왜국의 천년 노경(努鯨-고래가 작은고기를 통째로 삼키는 것을 말함) </p>
<p>막고자 함일세. </p>
<p>번호:5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30 20:04 길이:68줄 </p>
<p>고려의 영탑사 </p>
<p>고승전에 보면, </p>
<p>&#8220;중 보덕의 자는 지법이요, 전 고려 용강현 사람이다.&#8221; </p>
<p>고 했다. 이것은 아래 본전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보덕은 항상 평양성에 살고 </p>
<p>있었는데, 산방의 늙은 중이 와서 불경을 강의해 주기를 청했다. 스님은 굳이 사양했 </p>
<p>으나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 40여권을 강의하였다. </p>
<p>강의를 마치자 성의 서쪽 대보산 바위굴 밑에 이르러 선관(禪觀-좌선)했다. 이때 </p>
<p>神人이 와서 말했다. </p>
<p>&#8220;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8221; </p>
<p>하고는 석장을 그의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p>
<p>&#8220;이 속에 8면으로 된 7층 석탑이 있을 것이다.&#8221; </p>
<p>그래서 땅을 파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이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 </p>
<p>사라 하고 그 곳에서 살았다. </p>
<p>황룡사장육(丈六-황룡사에 있는 1장 6척되는 불상) </p>
<p>신라 제 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 2월에 용궁 남쪽에 장차 대궐을 지으 </p>
<p>려 하였는데, 황룡이 나타나므로 고쳐 절을 지었다.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기축(569) </p>
<p>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하였다. 그 얼마 후에 바다 남쪽에서 커다란 한 척 </p>
<p>의 배가 오더니 하곡현 사포- 울주 곡포- 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이 있 </p>
<p>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p>
<p>&#8216;서축 아육왕이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장차 석가의 존상 셋을 부 </p>
<p>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p>
<p>땅으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주기 바란다.&#8217; </p>
<p>그리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두 개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의 관리가 문서 </p>
<p>를 갖추어서 보고하니, 왕은 사자를 보내어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 </p>
<p>서 동축사를 세우고, 세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보 </p>
<p>네서 태건(남조 진 선제때의 시호) 6년 갑오(574) 3월에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p>
<p>공사는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5천7근으로 황금 1만1백 9푼이 들었고, 두 </p>
<p>보살상은 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백 36푼이 들었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모셨 </p>
<p>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의 눈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 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다. </p>
<p>이것은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 불상이 진평왕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p>
<p>그릇된 말이다. </p>
<p>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대향화국(고대 인도의 나라이름)에 </p>
<p>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백년 되는 해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 </p>
<p>한 것을 한스러이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p>
<p>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 왕의 태자만이 혼자 그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은 시종을 </p>
<p>시켜 그 이유를 물은 즉 태자가 아뢰었다. </p>
<p>&#8220;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8221; </p>
<p>그 말을 옳게 여긴 왕은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었다. 그 배는 남염 </p>
<p>부제(남인도)의 16개의 큰 나라와 5백의 중국,10千의 소국, 8만의 촌락, 두루 돌아다 </p>
<p>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 </p>
<p>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완성하니 좋은 모습이 </p>
<p>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에 근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p>
<p>후에 대덕(大德) 자장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헌 </p>
<p>신해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였다. </p>
<p>&#8220;너희 나라의 황룡산은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의하던 곳이며 연좌석이 지금도 </p>
<p>있다. 그런 까닭에 인도의 무우왕(아쇼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으니, </p>
<p>1천3백여년 후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던 것이니 </p>
<p>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p>
<p>불상이 다 완성된 후에 동축사의 3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서 안치했다. 사기 </p>
<p>(寺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진평왕 5년 갑진(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 때에 이 절의 초 </p>
<p>대 주지는 진골 환희사였고, 제 2대 주지는 국통 자장, 그 다음은 국통 혜훈, 그 다음 </p>
<p>은 상률사였다.&#8217; 고 했다. </p>
<p>이제 병화(兵火-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입)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 </p>
<p>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이 세상 어느 곳 참 고향 아니랴만, </p>
<p>향화의 인연은 이 나라가 으뜸이다. </p>
<p>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p>
<p>월성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음일세. </p>
<p>번호:5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1 11:11 길이:76줄 </p>
<p>황룡사 9층탑 </p>
<p>신라 제 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p>
<p>하여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수법(授法)을 감응해 얻었는데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p>
<p>&#8220;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의 찰리종(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으로 이미 불기 </p>
<p>(佛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중국강화지방에 살았던 종 </p>
<p>족, 여기서는 동이가 야만이라는 뜻)의 종족과는 같지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기 때 </p>
<p>문에 성품이 추솔하고 패려하여 사견(邪見)을 많이 믿는다. 그런 까닭에 간혹 천신이 </p>
<p>내리기도 하나, 다문비구(多聞比丘-법문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비구)가 나라 안에 있 </p>
<p>기 때문에 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하다.&#8221; </p>
<p>말을 끝내자 이내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의 변화인줄 알고 슬피 울면서 </p>
<p>물러갔다. 법사가 중국 대화지 옆을 지나는데 문득 신인이 나타나 물었다. </p>
<p>&#8220;무엇 하러 이곳에 오셨소?&#8221; </p>
<p>&#8220;보리(불타에 이르는 길)를 구하려 합니다.&#8221; </p>
<p>자장이 대답하자 신인은 그에게 절한 다음 또 묻는다. </p>
<p>&#8220;그대의 나라에 무슨 이려운 일이라도 있소?&#8221; </p>
<p>&#8220;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인접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p>
<p>두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의 침입이 종횡으로 심합니다. 이것이 백성들 </p>
<p>의 걱정입니다.&#8221; </p>
<p>&#8220;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소. 그렇기 때 </p>
<p>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시오.&#8221; </p>
<p>이에 자장이 물었다. </p>
<p>&#8220;그럼 고국에 돌아가서 이익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8221; </p>
<p>&#8220;황룡사의 호법용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에 가서 보 </p>
<p>호하고 있으니, 고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p>
<p>항복할 것이고, 9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우고 나거든 </p>
<p>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또한 나를 위해 경기 남 </p>
<p>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하리다.&#8221; </p>
<p>말을 마치자 드디어 옥을 바친 후 이내 사라지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사중기에 </p>
<p>이르기를 종남산 원향선사에게서 탑을 세워야 하는 따닭을 들었다고 했다. </p>
<p>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 </p>
<p>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을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여러 신 </p>
<p>하들에게 이일을 의논하자 신하들은 말한다. </p>
<p>&#8220;工匠을 백제에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8221; </p>
<p>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 청하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라는 공장이 </p>
<p>명을 받고 왔다.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 용춘이 그 역사를 주관했다. 거느린 小匠이 2 </p>
<p>백명이나 되었다. 이에 마음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 </p>
<p>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 </p>
<p>우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공장은 곧 자신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엔 </p>
<p>이렇게 적혔다. </p>
<p>&#8216;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8217; </p>
<p>자장이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백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스님이 戒를 </p>
<p>받는 단)과 또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 이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탑을 세우 </p>
<p>고 나니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감이 아니겠는가. 그후 </p>
<p>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계획을 세우다 말했다. </p>
<p>&#8220;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 </p>
<p>인가?&#8221; </p>
<p>&#8220;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입니다.&#8221; </p>
<p>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이 있는 까 </p>
<p>닭에 초나라에서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귀신이 부축한 듯 제경(帝京)을 누르니, </p>
<p>휘황한 금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p>
<p>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의 항복만을 보랴, </p>
<p>건곤이 특히 편안한 것 </p>
<p>깨닫기 시작했네. </p>
<p>또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p>
<p>&#8220;신라 제 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되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이 침 </p>
<p>범하게 되었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재 </p>
<p>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1층은 일본,2층은 중화,3층은 오월,4 </p>
<p>층은 탁라,5층은 응유,6층은 말갈,7층은 거란,8층은 여진,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8221; </p>
<p>또 국사및 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이허게 되어 있다. </p>
<p>&#8216;진흥왕 14년 계유(553)에 황룡사를 처음 세운 후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6 </p>
<p>45)에 탑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이 즉위한 7년 성력 원년 무술(698)6월에 </p>
<p>벼락을맞았다. 제 33대 성덕왕 경신(720)에 다시 이를 세웠으나 48대 경문왕 무자(868 </p>
<p>)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그 임금 때에 세번째로 중수하였다. 본조 고려 광 </p>
<p>종의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 신유(1021)에 </p>
<p>네번째 중수했다. 또 정종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 </p>
<p>갑진(1064)에 다섯 번째 중수했다. 또 현종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으 </p>
<p>므로 숙종 원년 병자(1096)에 여섯번째로 중수했는데, 또 고종 16년(고종 25년이 맞다) </p>
<p>무술(1238) 겨울에 몽고의 병화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 </p>
<p>었다.&#8217; </p>
<p>번호:5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2 10:34 길이:115줄 </p>
<p>생의사 돌미륵 </p>
<p>선덕여왕 때 중 생의는 언제나 도중사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중이 </p>
<p>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놓게 하더니 남쪽 골짜기로 와서 말 </p>
<p>했다. </p>
<p>&#8220;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를 파내다 고개 위에 편히 묻어 주시오.&#8221; </p>
<p>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p>
<p>파보니 거기에 석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진(644) </p>
<p>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절 이름을 생의사라고 했다. </p>
<p>홍륜사의 벽화, 보현(普賢) </p>
<p>제 54대 경명왕 때 홍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가 불에 탔는데 아직 수리하지 못 </p>
<p>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화,홍계 두 중이 시주를 받아 장차 수리를 하려 했다. 정명 7 </p>
<p>년 신사(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 </p>
<p>니 전탑과 풀,나무,흙,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 </p>
<p>쪽 연못의 어룡들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며 전에는 없던 </p>
<p>일이라 경탄하여 옥과 비단과 곡식을 시주하니 산더미를 이루었다. 장인들도 저절로 </p>
<p>모여들어 하루가 안되어 완성됐다. 역사를 마치고 천제가 바야흐로 돌아가려 하매 이 </p>
<p>두 중이 아뢴다. </p>
<p>&#8220;천제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 </p>
<p>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소서! 또한 이로 인하여 영상을 여기에 모셔 두게 </p>
<p>항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8221; </p>
<p>이에 천제가 말했다. </p>
<p>&#8220;나의 원력(願力)은 저 보현보살이 현화(玄化-깊고 묘한 조화)를 두루 펴는 것만 </p>
<p>못하다. 그러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 </p>
<p>이다.&#8221; </p>
<p>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 </p>
<p>금까지도 이 화상은 남아 있다. </p>
<p>삼소관음과 중생사 </p>
<p>신라 고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중국 천자에게 총애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 </p>
<p>기 짝이 없으므로 천자가 말했다. </p>
<p>&#8220;고금의 그림으로도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 것이다.&#8221; </p>
<p>이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에게 명해 그 실제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 </p>
<p>그 화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나라 </p>
<p>사람으로, 양나라 천감 연간에 무릉왕국의 시랑 직비각지화사가 되었고, 우장군과 오 </p>
<p>흥태수를 지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천자는 중국 양,진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傳 </p>
<p>에 당나라 황제라 한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이라 하는 까닭에서 </p>
<p>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를 모두 옮긴 </p>
<p>다. 그 화공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완성했다. 그 때 잘못으로 붓을 떨어뜨려 </p>
<p>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다. 고쳐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 </p>
<p>각하기를, 그 붉은 점은 필시 낳을 때부터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하고 그림을 바쳤다. </p>
<p>그 그림을 보고 난 황제는 말했다. </p>
<p>&#8220;모양은 실물과 똑 같으나 속에 감추어진 배꼽 밑의 점은 어떻게 알고 이것까지 </p>
<p>그렸느냐.&#8221; </p>
<p>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에 처하려고 하자, 승상이 아 </p>
<p>뢰었다. </p>
<p>&#8220;저 사람은 마음이 무척 곧은 자입니다.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8221; </p>
<p>&#8220;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어젯밤 꿈에 내가 보았던 사람을 그려서 바치게 </p>
<p>하라. 만일 그림이 꿈과 같다면 용서해 줄것이다.&#8221; </p>
<p>이에 화공이 십일면관음보살의 상을 그려 바치니 꿈과 같았다. 황제는 그제야 마 </p>
<p>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 분절과 약속했다. </p>
<p>&#8220;내가 들은 바 신라국에서는 불법을 우러러 신봉한다 하므로 그대와 함께 배를 </p>
<p>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를 닦아 인방(仁邦-동방, 곧 신라)을 널리 </p>
<p>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겟소.&#8221; </p>
<p>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나라 사람들 </p>
<p>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p>
<p>신라 말년 천성 연간(926-929)에 정보 최은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p>
<p>이 절의 관음보살앞에 나아가 기도했더니 태기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석달이 채 못되 </p>
<p>어 후백제의 견훤이 서울로 쳐들어와 성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최은함은 그 아이를 안 </p>
<p>고 이 절에 와서 말했다. </p>
<p>&#8220;이웃 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하여 누 </p>
<p>가 겹친다면 부자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대성께서 이 아이를 주 </p>
<p>셧다면 원컨대 큰 자비의 힘을 내리시고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나게 해 주 </p>
<p>십시오.&#8221; </p>
<p>슬피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의 예좌(猊座-부처 </p>
<p>가 앉아 있는 자리)밑에 감추고는 못 잊어 하며 떠났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가 </p>
<p>자 돌아와 아이를 찾았다. 아이의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더 예뻐졌는데 </p>
<p>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p>
<p>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는데 자라면서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은 아니었 </p>
<p>다. 이 사람이 바로 승로인데 벼슬이 정광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 최숙을 났았으며, </p>
<p>숙은 낭중 제안을 낳았다.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 </p>
<p>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대성(大姓)이 되었다. </p>
<p>또 통화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는 보살 앞에 꿇어앉아서 말했다. </p>
<p>&#8220;제자는 이 절에 오랫동안 살면서 정성을 다해 향화를 부지런히 받들어 밤낮으로 </p>
<p>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의 토지에서 나는 것이 없으므로 향사를 계속할 수 </p>
<p>없으매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와 하직하는 바입니다.&#8221; </p>
<p>이 날 성태는 언뜻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이 말했다. </p>
<p>&#8220;법사는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p>
<p>제사에 쓸 비용을 넉넉히 마련해 주겠다.&#8221; </p>
<p>중이 깨달아 기뻐하며 마침내 그 곳에 머물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 후 </p>
<p>13일째 되는 날 문득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닿았다. 절의 중이 나 </p>
<p>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대답했다. </p>
<p>&#8220;우리들은 금주 지방 사람입니다. 지난번 한 스님이 우리를 찾아와 말하기를, 나 </p>
<p>는 동경 중생사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4사(四事-북,음식,침구,탕약등 제사에 쓰는 네가 </p>
<p>지 물건)가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러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 </p>
<p>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 입니다.&#8221; </p>
<p>&#8220;이 절에서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시 잘못 들은 것 같 </p>
<p>소.&#8221; </p>
<p>스님이 말하자, 그 사람들이 또 말했다. </p>
<p>&#8220;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와서 질이 여기서 </p>
<p>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 </p>
<p>다.&#8221; </p>
<p>이에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관음대성을 쳐다 </p>
<p>보고 절하며 저희끼리 말했다. </p>
<p>&#8220;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모습입니다.&#8221; </p>
<p>하며 놀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 까닭에 이 절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p>
<p>끊어지지 않았다. </p>
<p>또 어느 날 저녁에 절 문간에 화재가 나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 </p>
<p>런데, 법당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었다. 밖 </p>
<p>으로 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그런 자가 없었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p>
<p>관음대성의 신령스러운 힘임을 알았다. </p>
<p>또 대정 13년 계사(1173) 연간에 중 점숭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 </p>
<p>록 글은 알지 못햇으나 성질이 본래 순수하여 향화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이 때 어떤 </p>
<p>중이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에게 호소했다. </p>
<p>&#8220;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p>
<p>자를 뽑아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8221; </p>
<p>그 말을 옳게 여긴 천사는 그 사람을 시험하려고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 </p>
<p>다. 그러자 점숭은 그것을 받자마자 줄줄 읽었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고는 </p>
<p>방 가운데로 물러 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읽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한 </p>
<p>자도 읽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했다. </p>
<p>&#8220;상인(上人-지혜와 덕을 갖춘 스님)은참으로 관음대성이 지켜주시는 이로구려.&#8221; </p>
<p>그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과 함께 이 절에 살던 처사 </p>
<p>김인부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주고 또 전기로도 적었다. </p>
<p>번호:5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3 00:10 길이:74줄 </p>
<p>백율사 </p>
<p>계림 북쪽 산을 금강령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는 백율사가 있다. 이 절에는 부처 </p>
<p>의 상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못 영험이 뚜렸하다. </p>
<p>어떤 이는 말하기를, </p>
<p>&#8220;이것은 중국의 신장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을 만들때 함께 만든 것이다.&#8221; </p>
<p>고하였다. 또 속전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p>
<p>&#8216;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p>
<p>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8217; </p>
<p>또 어떤 사람은 </p>
<p>&#8220;부처님이 부례랑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의 자취다.&#8221;라고 했다. </p>
<p>천수 3년 임진(692) 9월 7일에 효소왕은 대현살찬(살찬벼슬의 대현이라는 사람) </p>
<p>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고, 주리(원래는 구슬장식을 단 신발인데, 여기서는 </p>
<p>화랑의 뜻으로 쓰임)의 무리가 1천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상과는 더욱 친했 </p>
<p>다. 천수 4년 계사(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으로 놀러갔다. 그런 </p>
<p>데, 북명(원산만)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말갈)에게 사로잡혀 갔다. 이에 문객(門 </p>
<p>客)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하여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상은 홀로 그를 쫓아갔는 </p>
<p>데 이때는 3월 11일이었다. 이 말을 듣자 대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p>
<p>&#8220;선왕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 </p>
<p>(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어쩐 연유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p>
<p>을 어찌하면 좋겠는가?&#8221; </p>
<p>이 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다. 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 하며 조사하 </p>
<p>게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사라졌다. 이에 왕은 말했다. </p>
<p>&#8220;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8221; </p>
<p>왕은 즉시 창고를 맡아 관리하던 김정고 등 5명을 가두었다. 그리고 4월에 나라 </p>
<p>안의 사람을 모집하여 말했다. </p>
<p>&#8220;현금과 신적을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다.&#8221; </p>
<p>5월 15일 부례랑의 부모가 백율사로 나가 불상 앞에서 여러 날 저녁을 기도했다. </p>
<p>그러자 갑자기 향탁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p>
<p>불상 뒤에 와 있었다. 매우 기뻐하며 부모가 부례랑에게 묻자 부례랑이 대답했다. </p>
<p>&#8220;적에게 잡혀간 후 저는 적국의 대도구라의 집에서 말치는 일을 하였습니다.&#8221; </p>
<p>그런데 대조라니 들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문득 용모가 단정한 스님 한 </p>
<p>사람이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면서, </p>
<p>&#8220;고향 생각을 하느냐?&#8221; </p>
<p>하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 앞에 꿇어 앉아서 </p>
<p>&#8220;임금과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8221; </p>
<p>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p>
<p>&#8220;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8221;하여 저 바닷가까지 갔더니 그 곳에서 안상과 만나게 </p>
<p>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고 우리 두사람에게 각기 한짝 씩을 타게 </p>
<p>했습니다. 그러자 바다 위로 날아서 순식간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8221; </p>
<p>이 일을 왕에게 황급히 보고했다. 왕은 무척 놀라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부 </p>
<p>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금은 그릇 다섯 개씩 두 벌, 각 </p>
<p>50량 중과 마납가사 다섯 벌, 대초 3천필, 밭 1만경을 백율사에 바쳐서 부처님의 은덕 </p>
<p>에 보답했다. </p>
<p>또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놓아 주고, 관리들에게는 벼슬을 3계급씩 높여 주었으 </p>
<p>며,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절의 주지를 봉성사로 옮겨 살도 </p>
<p>록 했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을 삼고, 그아버지 대현아찬은 태대각간을 삼고, 어 </p>
<p>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의 경정궁주를 삼았다. 안상을 대통으로 삼고 창고를 맡았던 </p>
<p>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 5급을 주었다. </p>
<p>6월 12일에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p>
<p>이에 일관이 아뢰었다. </p>
<p>&#8220;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8221; </p>
<p>이에 신적을 만만파파식적이라 책호 했더니 혜성은 이내 사라졌다. 그 후에도 신 </p>
<p>령스럽고 이상스러운 일이 많았으나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 </p>
<p>영랑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 </p>
<p>번완등의 이름만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p>
<p>민장사 </p>
<p>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에게 장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 </p>
<p>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에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 관음보살 앞에 </p>
<p>나가 7일동안 기도했더니 돌연 장춘이 돌아왔다. 그동안의 연유를 묻자 장춘이 대답했 </p>
<p>다. </p>
<p>&#8220;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는 깨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못 </p>
<p>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널판쪽을 타고 가다 오나라의 바닷가에 닿았습니다. 오나라의 </p>
<p>한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상 </p>
<p>한 스님 한 분이 마치 고향에서 온 듯이 따뜻하게 위로를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저를 </p>
<p>데리고 같이 가는데, 문득 앞에 깊은 도랑이 있어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뛰 </p>
<p>어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우리 시골의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 </p>
<p>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이 곳에 와 있었습니다.&#8221; </p>
<p>신시(오후 3-5시)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 곳에 도착한 것이 술시(오후 5-7시) </p>
<p>초였다. 이 때가 바로 천보 4년 을유(745) 4월 8일이었다. 경덕왕이 이를 듣고 민장사 </p>
<p>에 밭을 시주하고 또 재물도 바쳤다. </p>
<p>번호:5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4 00:05 길이:195줄 </p>
<p>전후소장(前後所將) 사리 </p>
<p>국사에 이르기를, </p>
<p>&#8216;진흥왕 때인 대청 3년 기사(549)에 양나라에서 심호를 시켜 사리 몇 알을 보내 </p>
<p>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 </p>
<p>금니와 부처의 사리 1백알, 그리고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p>
<p>벌을 가지고 왔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사 </p>
<p>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 </p>
<p>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 </p>
<p>을 안치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8217; 고 했다. </p>
<p>속설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옛날 본조에서 전후로 염사(안렴사-고려때의 지방장관)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p>
<p>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큰 구렁이가 돌 함속에 있는 </p>
<p>것을 보았고, 다음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는 감히 </p>
<p>이 돌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요사이 상장군 김공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령 </p>
<p>을 받아 강동(낙동강 동쪽)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 </p>
<p>하려고 하니 절의 중이 지난 일 때문에 이를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p>
<p>돌을 들게 하자 그 속에 작은 돌함이 있는데, 함속에도 유리통이 들어있고, 통 속에는 </p>
<p>사리가 겨우 네 알 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 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속에 약간 상한 </p>
<p>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 </p>
<p>게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 때는 강도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12 </p>
<p>35)였다.&#8217; </p>
<p>고기에 이렇게 적혔다. </p>
<p>&#8216;사리 1백개를 세곳에 나누어 간수해 두었는데, 이제는 오직 네 개 뿐이다. 그것 </p>
<p>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므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p>
<p>적음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8217; </p>
<p>또 속설에 이르기를, </p>
<p>&#8216;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돌솥 동쪽면에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p>
<p>도 남아있다.&#8217; </p>
<p>그 때가 바로 요의 응력 3년 계축(953)이요, 본조 광종 5년으로 탑이 세번째로 </p>
<p>불타던 때였다. 조계의 무의자(고려의 진각국사)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p>
<p>&#8216;듣건대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쪽에도 틈이 없었네.&#8217; </p>
<p>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p>
<p>지원 갑자(1264)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사신)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 </p>
<p>에 절했으며, 사바의 운수(雲水-행각승)들도 몰려들어 참례했으며, 혹 돌함을 들어보 </p>
<p>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진신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서 </p>
<p>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기서는 이상한 향기가 강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p>
<p>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p>
<p>당나라 대중 5년 신미(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 </p>
<p>의 어금니와 후당 동광 원년 계미(923) 즉, 본조 태조 즉위 6년에 당나라로 보냈던 사 </p>
<p>신 윤질이 가지고 온 5백나한의 상은 지금 북승산 신광사에 있다. 송나라의 선화 기묘 </p>
<p>(1119)에 입공사(入貢使)정극영,이지미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p>
<p>모셔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p>
<p>전하는 얘기는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의 지상사 지 </p>
<p>엄존자(중국 화엄종의 2대교주)에게 가서 있었다. 이웃에 선율사가 있는데 항상 하늘 </p>
<p>의 공양을 받고 제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부엌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어느 날 선율사 </p>
<p>가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p>
<p>내리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릿대만 가지고 돌아가자 그 때 </p>
<p>서야 천사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왜 이다지 늦었느냐고 묻자 천사가 대답했다. </p>
<p>&#8220;온 동네에서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으므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8221; </p>
<p>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따름을 알고는 그의 도의 힘이 자기보다 </p>
<p>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 이튿날 또 지엄과 의상 </p>
<p>두 법사를 재올리는 데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말했다. </p>
<p>&#8220;율사는 이미 천제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p>
<p>이 40개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 </p>
<p>에게 내려 보내어 복이 되게 함이 어떨까요?&#8221; </p>
<p>율사는 그 후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자, 천제는 7일을 기한 이 </p>
<p>를 보내 주었다. 의상은 예를 마친 뒤에 이것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 그 후 송나 </p>
<p>라 휘종 때에 이르러 좌도를 받드니 그 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을 퍼뜨렸다. </p>
<p>&#8216;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8217; </p>
<p>황건(도교를 가리킴)의 무리들이 일관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었다. </p>
<p>&#8220;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8221; </p>
<p>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죽이고, 경전을 불태우고, 따로 </p>
<p>조금나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 </p>
<p>려 했다. 이 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p>
<p>천화(하눌타리)의 싹) 50령과 저포(苧布) 3배필을배를 호송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p>
<p>아무도 모르게 부처의 어금니만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 </p>
<p>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니 예종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을 십원전 </p>
<p>왼쪽에 있는 소전에 모시어 항상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밝혀 왕이 친히 거동 </p>
<p>하는 날에만 소전 문을 열고 예를 올렸다. </p>
<p>임진(1231)에 서울을 강화로 옮길때 내관들은 총망한 가운데 잊어버리고 이를 거 </p>
<p>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 4월에 어원당(왕실의 명복을 빌던 곳)인 신효사의 중 온 </p>
<p>광이 부처의 어금니에 예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을 시켜 궁중을 두 </p>
<p>루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 때 백대 시어사 최충이 설신에게 명하여 급히 </p>
<p>여러 알자(고려의 벼슬이름)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고 했다. 내신 김 </p>
<p>승노가 아뢰었다. </p>
<p>&#8220;임진년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궁중일기)를 조사해 보십시요.&#8221; </p>
<p>그 말대로 조사해 보니 일기에 이렇게 써 있었다. </p>
<p>&#8216;입내시대부경 이백전이 불아함을 받다.&#8217; </p>
<p>이백전을 불러 물으니 대답했다. </p>
<p>&#8220;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게 해주십시오.&#8221; </p>
<p>그는 집에 가서 찾아보고는 좌번알자 김서룡이 불아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아내 </p>
<p>어 이를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하였다. 또 김승노가 아뢰 </p>
<p>는 대로 임진년에서 현재 병신년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과 경령전의 수직한 자들을 잡 </p>
<p>아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밤에 김서룡의 </p>
<p>집 담안으로 무엇인가 던지는 소리가 나매 불을 켜고 조사해 보니 불아함이었다. 함은 </p>
<p>본래 속 한 겹은 침향합이고, 다음 한겹은 순금합이며, 그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함이고 </p>
<p>그 다음 바깥겹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합으로 각 함의 폭은 서로 꼭 맞게 </p>
<p>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에 들 </p>
<p>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산느 죄를 물어 김서룡과 어불당과 경령전에 수직하는 사람 </p>
<p>들을 모두 죽이려 하므로 진양부(최우의 막부)에서 아뢰었다. </p>
<p>&#8220;불사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8221; </p>
<p>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고 다시 십원전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을 지 </p>
<p>어 불아함을 모시게 하고 장사들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좋은 날을 가려 신효사의 상 </p>
<p>방(선종에서 주지를 이르는 말) 온광을 청해다가 승도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p>
<p>정성껏 재를 올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했던 승선 최홍과 상장군 최공연,이영장과 내시 </p>
<p>다방 관원들은 불아전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p>
<p>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나타나는 사리는 그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았다. 진양 </p>
<p>부에서는 백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 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p>
<p>&#8220;내가 불아를 잃은 후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의 7일 </p>
<p>기한이 다해 하늘로 올라 갔을까 하는 것이요, 둘째 의심은 국난이 이러하니 불아는 </p>
<p>신물이므로 인연 있는 무사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요, 셋째 의심은 </p>
<p>재물이 탐난 소인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요, 넷째 </p>
<p>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 집 안에 감추어 두 </p>
<p>었으리라는 의심을 했는데 네번째 의심이 들어맞았소.&#8221; </p>
<p>하고 이내 소리를 크게 내어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헌수 </p>
<p>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는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p>
<p>이 실록은 당시 내전에서 향를 피우며 기도하던 전 지림사 대선사 각유에거서 얻은 것 </p>
<p>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며 날더러 기록하게 한 것이다. </p>
<p>또 경오(1270)에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의 난리는 날패함이 심하여 임진년 </p>
<p>보다 더 했다. 십원전의 감주였던 선사 심감은 자신의 위태로움도 관여치 않고 불아함 </p>
<p>을 가지고 나와 적난(賊難-삼별초의 난)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대궐에 </p>
<p>알려지니 왕은 그 공을 크게 포상하고 큰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에 살고 있 </p>
<p>다. 이것도 역시 각유에게 친히 들은 것이다. </p>
<p>신라 진흥왕 때인 천가 6년 을유(565)에 진나라에서는 사신 유사와 중명관을 시 </p>
<p>켜 불경의 경,논 1700여권을 보내 왔다. 또 정관 17년(643)에는 자장법사가 삼장(경장 </p>
<p>율장,논장) 4백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에 안치했다. 흥덕왕 때인 태화 원년 </p>
<p>정미(827)에 당에 간 고구려 학승 구덕이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오므로 왕은 여러 절 </p>
<p>의 승도 등과 함께 홍륜사 앞길까지 나가 맞이하였다. 대중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 </p>
<p>낸 사신 원홍이 불경과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羅末)에는 보요선사가 두 번이나 </p>
<p>오월국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의 개산조(절이나 종파를 새 </p>
<p>로이 연 사람)이다. </p>
<p>송나라 원우 갑술(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의 진영을 기리어 읊었다. </p>
<p>거룩하여라, 개조 스님이시여! </p>
<p>우뚝 빼어났어라, 저 참모습 </p>
<p>두 번이나 오월에 가시어, </p>
<p>대장경을 무사히 가져오셨네. </p>
<p>보요라는 직함을 내리시고, </p>
<p>네번이나 조서를 내리셨으니, </p>
<p>만일 그 덕을 묻거든, </p>
<p>밝는 달 맑은 바람과 같다 일러라. </p>
<p>또 금의 대정 연간(1161-1189)에 한남의 관기(管記-벼슬이름) 팽조적이 시를 지 </p>
<p>어 남겼다. </p>
<p>물 구름 고요한 곳 부처님 계시는데, </p>
<p>더욱이 신룡이 이 지경을 보호하네 </p>
<p>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것이 이와 같으랴, </p>
<p>불교는 처음 남쪽에서 전해 왔네. </p>
<p>그 발문은 이러하다. </p>
<p>옛날 보요선사가 처음으로 남월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오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 </p>
<p>어 조각배는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했다. </p>
<p>&#8220;이것은 혹시 신룡이 대장경을 이곳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8221; </p>
<p>그리고 드디어 주문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p>
<p>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p>
<p>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문득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p>
<p>보고 이에 수제자 홍경과 같이 연사(蓮社-절)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p>
<p>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p>
<p>한남 관기 팽조적은 제(題)하다. </p>
<p>이 해룡왕사에는 용왕당이 있는데 자못 신령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 </p>
<p>은 대장경을 따라와 이 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p>
<p>또 천성 3년 무자(928)에 묵화상이 후당에 들어가서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 </p>
<p>며, 본조 예종 때에는 혜조국사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요본(遼本)대 </p>
<p>장경 3부를 가지고 왔다. 그 한 본은 지금 정혜사에 있다. </p>
<p>대안2년(1086) 본조 선종 때에는 우세승통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 </p>
<p>(천태종의 교조,관심)에 대한 책을 많이 가지고 왔다. 이밖에도 방책(方冊-서적)에 실 </p>
<p>리지 않은 고승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며 가지고 온 것은 아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p>
<p>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올 때 그 앞길이 양양했으니 경사로운 일이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중국과 동방은 연진(烟塵)으로 막혔는데, </p>
<p>녹원(鹿園-녹아원)의 학수(鶴樹-학림)는 2천년이네. </p>
<p>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경하롭다, </p>
<p>동진(東震-우리나라)과 서건(西乾-인도)이 한 세상 되었네. </p>
<p>여기에 기록된 의상전을 살펴보면, </p>
<p>&#8216;의상은 영휘 초년(650)에 당나라에 가서 지엄선사를 뵈었다.&#8217; 고 했다. </p>
<p>그러나 부석사 본비(本碑)에 의하면 이렇게 적혀있다. </p>
<p>&#8220;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태어나 소년시대에 출가했으며, 영휘 원년 경술(650)에 </p>
<p>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려고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 그대로 돌아왔다. </p>
<p>그 뒤 용삭 원년 신유(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아가 배웠다. 총장 원년 </p>
<p>(668)에 지엄법사가 천화(遷化-고승의 죽음)하자 함형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 </p>
<p>와 장안 2년 임인(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8221; </p>
<p>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의 불아를 청하던 </p>
<p>일은 신유(661)에서 무진(668)까지의 7,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 고종이 강화도로 </p>
<p>들어간 임진(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되었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 </p>
<p>리천의 1주야는 인간세계의 1백세에 해당하는데,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갔던 신유 </p>
<p>(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 고종 임진(1232)까지는 693년-571년, 다음의 730년도 60 </p>
<p>9년-이다. 고종의 경자(124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7백년이 차며, 7일 기한이 되는 것 </p>
<p>이다. 개경에 환도하던 지원 7년 경오(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약 천제의 말처럼 7 </p>
<p>일 후에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가 환도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아마 진짜 </p>
<p>불아가 아니었을 것이다. </p>
<p>이해 봄, 왕은 환도하기 전에 대궐안 제종(諸宗)의 유명한 중들을 모아 불아와 </p>
<p>사리를 빌어 구하기에 정성과 성심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7일 기한이 되 </p>
<p>어 하늘로 올라간 듯하다. 지원 21년 갑신(1284)에 국청사의 금탑을 보수했다. 이에 </p>
<p>충렬왕은 장목왕후와 함께 묘각사에 행차하여 신도들을 모아 경하하고 찬미했다. 끝나 </p>
<p>자 심감이 바친 불아와 낙산의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군신과 여러 신도들이 모두 함께 </p>
<p>경배한 뒤에 금탑 안에 넣었다. </p>
<p>나도 또한 이 모임에 참여하여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 </p>
<p>이는 3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일연의 제자)이 기록한다. </p>
<p>번호:5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5 04:22 길이:76줄 </p>
<p>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p>
<p>신라 제 24대 진흥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종이라고도 한다. </p>
<p>양나라 대동 6년 경신(540)에 즉위하였다. 백부 법흥왕의 뜻을 사모해서 한결같이 불 </p>
<p>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도록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 </p>
<p>이 멋스러워서 크게 신선(원화,화랑의 도)을 숭상하여 민가의 처녀중에 아름다운 자를 </p>
<p>선발하여 원화를 삼았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와 충신을 </p>
<p>가르치려 함이었다. 이는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大要이기도했다. 이에 남모랑과교정랑 </p>
<p>의 두원화를 뽑았는데 모여든 사람이 3,4백명이었다. 교정이 남모를 질투해서 술자리 </p>
<p>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마시게 한후 아무도 모르게 북천으로 데리고가서 큰돌 </p>
<p>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곳을 알지 못하므로 슬피울면서 </p>
<p>헤어졌다.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로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부르 </p>
<p>게했다. 이에 남모의 무리들이 듣고 그 시체를 북천 바위속에서 찾아내고는 교정랑을 </p>
<p>죽여버렸다. 그러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제도를 폐지했다. 그후 여러해가 지났다. </p>
<p>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한다고 생각한 왕은 또다시 영을내 </p>
<p>렸다. 양가의 남자중에서 덕행이 있는자를 뽑아 그 명칭을 고쳐 화랑이라했다. 처음으 </p>
<p>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다.그래서 명주에 비를세우 </p>
<p>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일을 하게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p>
<p>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五常(인,의,예,지,신) 六藝(禮,樂,射,御,書,數)와 三師(태 </p>
<p>사,태부,태보) 六正(성신,양신,충신,지신,정신,직신)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p>
<p>진지왕 때에 와서 홍륜사의 중 진자가 언제나 堂의 주인인 미륵상 앞에 나가 발 </p>
<p>원하여 맹세를 했다. </p>
<p>&#8220;우리 대성께서는 화랑으로 화해 이 세상에 나타나 내가 항상 수용(미륵불의얼굴) </p>
<p>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8221; </p>
<p>그 정성스러운 간절한 기원의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니, 어느날 밤 꿈속에 </p>
<p>한 중이 나타나 말했다. </p>
<p>&#8220;네가 웅천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8221; </p>
<p><당시 신라와 백제는 적대관계에 있었으며, 또 웅천은 백제의 구도로서 신도인 </p>
<p>사비성 부여와 인접한 곳임을 감안하면 공주 수원사였는지 의심이다.> </p>
<p>진자는 꿈에서 깨자 놀라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가는데 열흘 동안 발자국마다 절 </p>
<p>을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밖에서 복스럽고 섬세하게 생긴 한 반천(눈매가 어여쁘고 </p>
<p>아름다운 남자)이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했다. 진자는 올라 </p>
<p>가면서도 읍하며 말했다. </p>
<p>&#8220;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대접함이 이렇듯 은근한가?&#8221; </p>
<p>&#8220;나도 또한 서울사람입니다. 스님이 먼곳에서 오심을 보고 위로했을 따름입니다.&#8221; </p>
<p>잠시 후 소년은 문밖으로 나가더니 그 간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 </p>
<p>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는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이 자기가 이곳 </p>
<p>에 온뜻과 지난 밤의 꿈을 얘기하고는 말했다. </p>
<p>&#8220;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려고 하는데 어떻겠소?&#8221; </p>
<p>절의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으 보고 </p>
<p>말했다. </p>
<p>&#8220;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이 살고 있으므로 명 </p>
<p>감(冥感)이 많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보는게 좋을게요.&#8221;　 </p>
<p>그말을 좇아 진자가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며 말 </p>
<p>했다. &#8220;여기에 무엇하러 왔는가?&#8221; </p>
<p>&#8220;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8221; 진자가 대답하자 노인이 또 말했다. </p>
<p>&#8220;저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으면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 것인 </p>
<p>가?&#8221; 진자는 이말을 듣고 놀라 깨달아 이내 달려서 본사로 돌아왔다. 그 후 한달이 </p>
<p>넘어 진지왕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르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p>
<p>&#8220;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은 거짓말을 안할텐데 어찌 성 안 </p>
<p>을 찾아보지 않았소?&#8221; </p>
<p>이에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았다. 그때 </p>
<p>영묘사 동북쪽 길가 나무밑에서 파사(편안히 앉은 모양)한 소년을 만났다. 단홍(화장) </p>
<p>을 갖추었는데 얼굴이 수려했다. 진자는 그를 보자 놀라며 말했다. </p>
<p>&#8220;이분이 미륵선화다&#8221; 이에 그는 나가서 물었다. </p>
<p>&#8220;낭의 집은 어디 있으며, 성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8221; </p>
<p>&#8220;내 이름은 미시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잃어 성은 무엇인지 모릅니다.&#8221; </p>
<p>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 </p>
<p>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는 화랑도들이 서로 화목하게 하였으며, 예의와 風敎가 보통 </p>
<p>사람과 달랐다. 근느 풍류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수 </p>
<p>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며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p>
<p>입었고, 맑은 덕활르 입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해 도를 닦았는데 만년에는 그 </p>
<p>또한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p>
<p>설명하는 이는 말했다. </p>
<p>&#8220;未와 彌는 음이 서로 같고 尸는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 </p>
<p>운 것을 택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 </p>
<p>뿐만 아니라 이땅에 인연이 있었으므로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8221; </p>
<p>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을 미 </p>
<p>시라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이다. 노방수(路傍樹)를 지금까지도 見朗이라하고 또 </p>
<p>우리말로는 사여수라고 한다. </p>
<p>기리어 읊는다. </p>
<p>선화 찾는 한걸음 그 모습 쳐다보네 </p>
<p>도처에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인데, </p>
<p>문득 봄은 가고 찾을 곳 없으매, </p>
<p>누가 알랴, 상림원(上林苑)한 대의 봄을. </p>
<p>번호:5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7 21:11 길이:151줄 </p>
<p>南白月二聖, 努힐夫得과 달달朴朴 </p>
<p>백월산 양성 성도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p>
<p>&#8216;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그산 </p>
<p>줄기는 수백리에 연무(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는 모양)하니 참으로 큰 진산이다.&#8217; </p>
<p>옛 노인들은 서로 전해 말했다. </p>
<p>&#8216;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팟는데, 매월 보름 전이면 달 빛이 밝 </p>
<p>으며, 못가운데는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하게 비쳐서 </p>
<p>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에게 명하여 그 모양을 그려 사자를 보내 </p>
<p>천하를 돌며 찾게 했다. 그 사자가 해동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암이 있고 산 </p>
<p>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이 화산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 </p>
<p>다. 그러나 그 산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므로 신발 한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p>
<p>걸어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발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p>
<p>여겨 그 산의 이름을 백월산이라고 햇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가운데 나타났던 산 그 </p>
<p>림자가 없어졌다.&#8217; </p>
<p>이 산의 동남쪽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 </p>
<p>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 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미 </p>
<p>승이었다. 또 한사람은 달달박박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이라고 불렀고, 어머 </p>
<p>니는 범마라 했다. </p>
<p>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으며 역외하상(域外遐想-속세를 초월한 </p>
<p>높은 사상)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생의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p>
<p>법적방(法積房-절이름)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 </p>
<p>법종곡 승도촌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정신을 수련함)할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p>
<p>가서 대불전과 소불전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 </p>
<p>을 양사라고도 했다. 모두 처자를 거느리고 와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였으며, 서로 왕 </p>
<p>래하며 정신을 수양하여 방외지지(方外之志-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 방외는 세상밖) </p>
<p>를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p>
<p>&#8220;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으나, 의식이 생각대로 생기고 저절로 배부 </p>
<p>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한 부녀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蓮池花 </p>
<p>藏-비로사나불이 있는 功德無量 廣大莊嚴의 세계)에서 여러 부처나 앵무새 공작새와 </p>
<p>함께 놀며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도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p>
<p>것을 닦으면 필연코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이제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p>
<p>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터 </p>
<p>인데, 이 풍진속에 파묻혀서 세속 무리들과 함께 지내서야 되겠는가?&#8221; </p>
<p>이들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떠나 장차 깊은 산골에 숨으려 했다. 그런 어느날 밤 </p>
<p>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 </p>
<p>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똑같은 꿈을 꾼지라 이들은 </p>
<p>모두 오랫동안 감탄하더니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 갔다. 박박사는 북쪽 고개 </p>
<p>에 있는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자집 8자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이라고 하고, 부득 </p>
<p>사는 동쪽 고개의 돌 무더기 아래 물이 있는 곳에서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 </p>
<p>방이라 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으며, 박박은 </p>
<p>미타불(아미타불)을 경례 염송(念誦)했다. </p>
<p>3년이 채 못되어 경룡 3년 기유(709) 4월 8일은 성덕왕 즉위 8년이다. 바야흐로 </p>
<p>날은 저무는데 나이 20세에 가까운 한 낭자가 매우 아름다운 얼굴에 난초와 사향의 향 </p>
<p>기를 풍기면서 문득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며 그녀는 글을 지어 바쳤다. </p>
<p>갈 길은 아득한데 해지니 온 산이 저물고, </p>
<p>길 막히고 성은 먼데 사바이 고요하네. </p>
<p>오늘 밤 이 암자에 자려 하오니, </p>
<p>자비하신 스님이시여 노하지 마오. </p>
<p>박박은 말했다. </p>
<p>&#8220;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이곳에서 지체하지 </p>
<p>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보시오&#8221; </p>
<p>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는 남암으로 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자 부 </p>
<p>득은 말했다. </p>
<p>&#8220;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8221; </p>
<p>&#8220;담연(湛然-정적의 경지, 즉 우주의 근원)함이 태허(太虛-역시 우주의 근원)와 </p>
<p>같은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p>
<p>굳다는 말을 들었기로 장차 도와서 보리를 이루고자 해서일 따름입니다.&#8221; </p>
<p>그리고는 게(偈-불교에서 가요 성가등을 말함) 하나를 주었다. </p>
<p>깊은 산길 해는 저문데 </p>
<p>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p>
<p>松竹의 그늘은 한층 그윽하고, </p>
<p>골짜기의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 </p>
<p>길 잃어 갈 곳을 찾음이 아니라, </p>
<p>尊師의 뜻 인도하려 함일세. </p>
<p>부디 나의 청만 들어 주시고, </p>
<p>길손이 누군지는 묻지를 마오. </p>
<p>부득사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p>
<p>&#8220;이 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름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p>
<p>것이오. 더욱이 깊은 산골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8221; </p>
<p>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가라앉 </p>
<p>히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날이 새려 할 때 </p>
<p>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p>
<p>&#8220;내가 불행히도 마침 산고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 </p>
<p>오.&#8221; </p>
<p>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서 은근히 대했다. 낭자는 이미 </p>
<p>해산을 끝내고 또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나, </p>
<p>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 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하였다. 낭자를 통 </p>
<p>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는데 잠시 후에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풍기면서 </p>
<p>그 물이 금액(金液)으로 변했다. 이에 부득은 크게 놀라니 낭자가 말했다. </p>
<p>&#8220;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8221; </p>
<p>마지못해 부득이 그 말에 좇았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짐을 느끼게 되고 </p>
<p>피부가 금빛으로 변했다. 그 옆을 보니 문득 연대(蓮臺)가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p>
<p>앉기를 권하며 말했다. </p>
<p>&#8220;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8221; </p>
<p>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은 생각했다. </p>
<p>&#8216;부득이 지난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므로 가서 비웃어 주리라.&#8217; </p>
<p>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금빛으로 단장된 몸에서 </p>
<p>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다. </p>
<p>&#8216;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8217; </p>
<p>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자 박박은 탄식하며 말했다. </p>
<p>&#8220;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불행히도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만나지 못 </p>
<p>한 것이 되었습니다. 큰 덕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군요. </p>
<p>부디 지난 날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나도 함께 도와 주셔야겠습니다.&#8221; </p>
<p>&#8220;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8221; </p>
<p>부득이 말하자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이 같이 무량수를 이루니 두 부처가 엄연 </p>
<p>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다투어 달려와 우러러 </p>
<p>보며 감탄하였다. </p>
<p>&#8220;참으로 드문 일이로다!&#8221; </p>
<p>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명하고는 온 몸이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p>
<p>천보 14년 을미(755)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일을 듣고 정유(757)에 사자를 </p>
<p>보내어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라 했다. 광덕 2년 갑진(764) 7월 15일에 </p>
<p>절이 완성되므로,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당금에 모시고 액자를 <현신성도미륵지전> </p>
<p>이라했다. 또 아마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다. 그러나 남은 금액이 모자라 몸에 </p>
<p>골고루 바르지 못한 탓으로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에는 < </p>
<p>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p>
<p>논해 말한다. </p>
<p>&#8216;낭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 섭화(攝化-중생을 자비심을 가지고 보호하여 교화함) </p>
<p>하였다 할만하다. 화엄경이 마야부인 선지식(善知識-부처님의 교법)이 십일지(十一地 </p>
<p>- 十地와 等覺을 말함.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位중 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십지라 </p>
<p>한다. 이 10위는 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住持하여 흔들리지 않고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p>
<p>교화 이익되게 함이 땅이 만물을 낳고 키움과 같아서 地라고 한다. 등각은 보살이 수 </p>
<p>행하는 순서로서 그 지혜가 부처님과 거의 같으므로 등각이라 한다. 여기서는 보살을 </p>
<p>마야부인과 비교하고 있다.)에 살며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환은 여 </p>
<p>러 방법으로 코끼리 말 인물등을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살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느끼 </p>
<p>게 하는 것.)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각산(順産)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녀가 준 </p>
<p>글은 슬프고 간곡하며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之趣)가 있다. 아, 만일 낭자 </p>
<p>가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를해득할 줄 몰랐다면 과연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그 글 </p>
<p>의 끝에는 당연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오.>라고 했어야 할 것이지만, </p>
<p>그렇게 하지 않음은 대개 세속의 말처럼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8217; </p>
<p>기리어 읊는다. </p>
<p>푸른 빛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드드리는 소리, </p>
<p>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 </p>
<p>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p>
<p>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p>
<p>이것은 북암을 기린 글이다. </p>
<p>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p>
<p>南窓 빈 자리에 머물고 가오. </p>
<p>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p>
<p>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드려워라. </p>
<p>이것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p>
<p>솔그늘 10리를 한 길로 헤매다가 </p>
<p>밤되어 招提(중들을 쉬게 만든 절)로 중앙 찾아 시험했네 </p>
<p>세 통에 목욕 끝나 날 새려 할 때, </p>
<p>두 아이 낳아 두고 서쪽으로 갔네. </p>
<p>위의 성랑(聖娘)을 기린 것이다. </p>
<p>번호:5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8 22:01 길이:157줄 </p>
<p>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盲兒得眼) </p>
<p>경덕왕 때에 한기리에 희명이란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태어난 지 5 </p>
<p>년 만에 문득 눈이 멀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 </p>
<p>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 앞에 나가 노래를 지어 아이를 시켜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p>
<p>마침내 보이게 되었다. </p>
<p>그노래는 이러하다. </p>
<p>무릎 꿇고 두 손 모아, </p>
<p>천수관음 앞에 비옵나니 </p>
<p>1천손 하나를 내어 1천눈 중 하나를 덜고 </p>
<p>둘 다 없는 이 몸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옵소서. </p>
<p>아아! 나에게 주오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크리오. </p>
<p>기리어 읊는다. </p>
<p>竹馬에 총생(蔥笙-파로만든 호드기)으로 맥진(陌塵-시장거리)에 뛰놀더니, </p>
<p>하루 아침에 두 눈 잃어버렷네. </p>
<p>대사의 자비로움, 눈 아니 돌렸다면 </p>
<p>버들꽃도 못 본채 몇 사춘(社春-입춘후 다섯번째의 戊日) 지냈을까. </p>
<p>洛山二大聖 관음.정취,조신 </p>
<p>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 </p>
<p>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 곳을 낙산이라 이름했다. 이는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관 </p>
<p>세음보살이 있다는 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의 진 </p>
<p>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p>
<p>의상은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새벽 일찍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불법을 </p>
<p>수호하는 여러 神將)의 시종들이 그를 굴 속으로 안내했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p>
<p>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또한 여 </p>
<p>의보주 한 알을 바치니 의상이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이에 관 </p>
<p>음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했다. </p>
<p>&#8220;좌상의 산 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당에 불전을 마땅히 </p>
<p>지어야 한다.&#8221; </p>
<p>법사가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 </p>
<p>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p>
<p>것 같았다. 그리고 대나무는 즉시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인 </p>
<p>줄을 알았다. 이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가지 </p>
<p>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떠났다. </p>
<p>그 후에 원효 법사가 뒤이어 와서 여기에 예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p>
<p>이르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 벼를 </p>
<p>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앗다고 대답했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p>
<p>이르자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월경때 입었던 옷)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 </p>
<p>고 청하니 여인을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p>
<p>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 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를 </p>
<p>불러 말했다. </p>
<p>&#8220;제 (醍 -원문에 한글자가 빠져있음)화상은 가지 마십시오.&#8221; </p>
<p>그리고는문득 숨어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p>
<p>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으므로 그제 </p>
<p>야 하까 만난 성녀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p>
<p>관음송이라 했다. 또 법사가 성굴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 했으나 풍랑이 </p>
<p>크게 일어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p>
<p>그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p>
<p>이르니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중이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더니 조사에게 말했다. </p>
<p>&#8220;저도 또한 고향사람입니다. 집은 명주의 경계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 </p>
<p>사께서 후일 고향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내 집을 지어주어야 합니다.&#8221; </p>
<p>이윽고 조사는 총석(叢席-많은 승려들이 모여있는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 </p>
<p>(중국 항주 염관현 진국해창원에 있었던 제안禪師)에게서 법을 얻고 회창(會昌-당나라 </p>
<p>무종의 연호, 841-846년) 7년 정묘(847, 당나라 선종 대중원년이 맞다)에 본국으로 돌 </p>
<p>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세워서 불교를 전했다. </p>
<p>대중 12년 무인(858) 2월 보름날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미티에 와서 말 </p>
<p>했다. </p>
<p>&#8220;지난 날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약속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는데, 어찌 이리 늦 </p>
<p>는 것입니까?&#8221; </p>
<p>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들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경계로 가 그가 사는 곳 </p>
<p>을 찾았다. 낙산 아랫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으므로, 이름을 묻자 덕기라고 했다. </p>
<p>그 여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 겨우 여덟살이 되자 마을 남쪽 돌다리 가 </p>
<p>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p>
<p>&#8220;나와 같이 노는 아이 중에 금빛이 나느 아이가 있습니다.&#8221; </p>
<p>아이의 어머니는 그 말을 조사에게 했다. 조사는 놀래고 기뻐하며 그 아이가 함 </p>
<p>께 놀았다는 다리 밑으로 갔다.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었다. 꺼내보니 왼 </p>
<p>쪽 귀가 끊어져 있고 전에 만난 중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정취보살의 불상이었다. 이 </p>
<p>에 간자(簡子-점치는 대나무 조각)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가장 </p>
<p>좋으므로 그 곳에 불전 3간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 </p>
<p>그후 백여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졌으나 오직 관음,정취 두 성인 </p>
<p>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으며, 나머지는 전부 다 타버렸다. 몽고의 병란 이후 </p>
<p>계축 갑인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모습과 두 보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몽고 군 </p>
<p>사가 심히 급하게 공격하므로 성이 바야흐로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주지인 선사 아행 </p>
<p>이 은으로 만든 함에 두 보주를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고 했다. 이것을 절에 있는 중 </p>
<p>걸승이 빼앗아 땅속 깊이 묻고 맹세했다. </p>
<p>&#8216;내가 만일 이 병란에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아는 사람이 없어 </p>
<p>인간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 </p>
<p>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8217; </p>
<p>갑인(1254) 10월 22일에 이 성은 함락되었다.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 </p>
<p>은 살아났다.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그는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에게 바쳤다. </p>
<p>이때 낭중 이녹수가 감창사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 안에 간직해 두고 교대할 때마 </p>
<p>다 서로 이어받았다. 무오(1258) 11월에 이르자 본업의 늙은 중 지림사 주지인 대선사 </p>
<p>각유가 임금께 아뢰었다. </p>
<p>&#8220;낙산사의 두 보주는 국가의 신보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중 걸승이 성 </p>
<p>안에 묻었다가 적군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 창고에 간직하여 </p>
<p>왔습니다. 이제는 명주성도 지킬 수 없사오니 마땅이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p>
<p>옳겠습니다.&#8221; </p>
<p>임금은 이를 허락했다. 야별초 10명과 걸승이 명주성에 가서 두 보주를 갖다가 </p>
<p>내부에 안치해 두었다. 그 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섬씩을 주었다. </p>
<p>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寺)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중 조신을 </p>
<p>보내어 장원을 맡아 관리하도록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김혼공의 딸을 좋아하여 그 </p>
<p>녀에게 아주 반했다. 그느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 </p>
<p>고 남몰래 기도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 이미 배필이 생겼다. 이에 그는 </p>
<p>또 불당에 나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p>
<p>슬피 울다가 지쳐서 옷을 입은 채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문득 김씨 낭 </p>
<p>자가 기쁜 얼굴로 찬연계치(입을 활짝 벌리고 웃음)하여 말했다. </p>
<p>&#8220;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 </p>
<p>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갔었습니다. </p>
<p>이제 동혈지우(同穴之友-부부)가 되고자 하여 왔사옵니다.&#8221; </p>
<p>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p>
<p>그녀와 40여년간 같이 살며 다섯 자녀까지 두었다. 집은 단지 네 벽뿐인데 粗食 </p>
<p>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낙탁(사람의 꼴이 보잘것 없어짐, 영락)하여 식구 </p>
<p>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 </p>
<p>이니 갈갈이 찢어진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했다. </p>
<p>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15세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통곡하 </p>
<p>며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에 이르러 길 가에 모옥 </p>
<p>을 짓고 살았다. 그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p>
<p>10세된 계집아이가 이릉 보다 못해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픔을 부 </p>
<p>르짖으며 앞에 와서 눕자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인은 눈물을 씻으며 </p>
<p>창졸히 말했다. </p>
<p>&#8220;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 </p>
<p>끗했습니다. 한가지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으며, 작은 의복이나마 당신과 나 </p>
<p>누어 입으면서 함께 살아온 것이 어언 50년입니다. 그동안 정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 </p>
<p>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하겟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쇠약하여 생 </p>
<p>기는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남의 집 곁방살이나 </p>
<p>보잘것 없는 음식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천문 만호에 걸식하는 부끄러 </p>
<p>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이것도 미처 돌보지 </p>
<p>못하였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p>
<p>풀잎에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 </p>
<p>가 있어 더욱 근심이 됩니다. 조용히 옛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p>
<p>시작이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왔을까요? 뭇 새가 다 함께 </p>
<p>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p>
<p>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행하고 그침은 </p>
<p>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원컨대 </p>
<p>이제부터 헤어지기로 합시다.&#8221; </p>
<p>조신이 이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장차 떠나려 </p>
<p>하니 부인이 말했다. </p>
<p>&#8220;저는 고향으로 가겟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8221; </p>
<p>이리하여 서로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p>
<p>하늘거리고 어느덧 희뿌옇게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 </p>
<p>두 하얗게 세고 망연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이미 괴롭게 살아감도 싫어지고,마치 </p>
<p>한평생의 고새을 다 겪고 난 듯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사라졌다. 이 </p>
<p>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도 누를 길이 없었다. </p>
<p>그는 돌아와 해현에 묻는 아이를 파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이었다. 물로 씻어서 </p>
<p>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장원을 맡은 소임을 내놓고 사재를 기울여 정토 </p>
<p>사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p>
<p>論해 말한다. </p>
<p>&#8216;이 전기를 읽소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어찌 조신사의 꿈만 그렇겠 </p>
<p>느냐?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을 알고서 기뻐하며 애쓰고 있으나 이것은 </p>
<p>단지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8217; </p>
<p>이에 시를 지어 경계한다. </p>
<p>잠시 즐거운 일 마음에 맞아한가롭더니 </p>
<p>근심 속에 어느덧 남모르게 늙어졌네 </p>
<p>모름지기 황량(黃梁-부귀와 공명이 더없음)이 다 익길 기다리지 말고 </p>
<p>인생이 한 꿈임을 깨달을 것을 </p>
<p>修身의 잘잘못은먼저 성의에 달린 것 </p>
<p>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p>
<p>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p>
<p>때때로 눈만 감아 청량(淸凉-청량산,)에 이르리 </p>
<p>번호:5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9 21:35 길이:90줄 </p>
<p>어산불영(魚山佛影-어산에 있는 부처님의 영상) </p>
<p>고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p>
<p>&#8216;만어산(萬漁山)은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이나, 그 곁에 가라국이 있었다. </p>
<p>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곧 수로왕 </p>
<p>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속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 </p>
<p>다. 또 만어산에는 다섯명의 나찰녀(사람을 잡아먹는 악귀)가 있었는데 독룡과 왕래하 </p>
<p>며 사귀었다. 그런 까닭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이나 오곡이 익지 </p>
<p>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것을 금해 보려고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부처를 청하여 설 </p>
<p>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는 5戒(살생,도적질,음행,거짓말,음주를 금함)를 받아 그후로 </p>
<p>는 재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화하여 고을 속에 돌이 가 </p>
<p>득차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를 냈다&#8217; </p>
<p>또 살펴보면 대정 12년 경자(1180)는 바로 고려 명종 11년인데 이 때 만어사를 </p>
<p>세웠다. 동량(불교에서의 고승) 보림이 위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서 말하기를, </p>
<p>&#8216;이 산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 가라국 부처의 영상과 서로 같은 것 셋이 있다 </p>
<p>. </p>
<p>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 경계의 옥지인데 여기에도 또한 독룡이 살고 있다는 </p>
<p>것이고,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운기(雲氣)가 일어나 산마루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속 </p>
<p>에서 음악 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항상 물이 </p>
<p>고여 마르지 않는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8217; </p>
<p>이것은 모두 보림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참례하고 보니 분명히 공경하고 믿 </p>
<p>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고을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 </p>
<p>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이고, 두 번째는 멀리서 보면 나타났다가 가까이 보면 보 </p>
<p>이지 않으므로, 혹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것이다. 북천축의 글 </p>
<p>을 다음에 자세히 갖추어 기록했다. </p>
<p>가자함의 관불삼매경 제 7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p>
<p>부처가 야건가라국 고선산, 첨복화림 독룡의 옆이요, 청련화천의 북쪽인 나찰혈 </p>
<p>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 남쪽에 이르렀다. 이 때 그 구멍에는 나찰 다섯이 있어서 이 </p>
<p>것이 女龍으로 변하여 독룡과 사귀고 있었다. 이에 독룡이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은 </p>
<p>못된 행동을 하니 기근과 역질이 4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 </p>
<p>지(천신과 지지)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그 때 총명하고 지혜 </p>
<p>가 많은 범지(바라문)가 대왕께 아뢰기를, </p>
<p>&#8220;가비라국 정반왕의 왕자가 지금 도를 이루어 호를 석가문이라고 합니다.&#8221; </p>
<p>이 말을 듣자 왕은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 예를 하면서 말했다. </p>
<p>&#8220;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어찌하여 이나라에는 오시지 않으십니까? </p>
<p>&#8221; </p>
<p>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에게 명하여 六神通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 </p>
<p>라왕의 불파부제의 청을 들엊기로 했다. 그 때 세존의 이마에서 빛이 솟아나와 1만이 </p>
<p>나 되는 여러 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과 나찰녀는 온 몸을 땅에 </p>
<p>던져 부처에게 戒룰 벋가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三歸五戒를 설법했 </p>
<p>다. 다 듣고 난 용왕은 꿇어앉아 합장하고 세존이 항상 그곳에 머물기를 청했다. </p>
<p><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아니 계시면 저에게 또 악한 마음이 생길 것이므로 아 </p>
<p>누보리(일체의 것을 아는 경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p>
<p>이때 범천왕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하고 청했다. </p>
<p>&#8220;파가파(석가)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위하시고, 이 작은 용만을 </p>
<p>위하지 마옵소서&#8221; </p>
<p>그러자 百千 梵王들도 모두 이와 같은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를 내어 여 </p>
<p>래에게 바치자 부처는 용왕에게 말했다. </p>
<p>&#8220;이 대는 나에게 필요 없ᄋ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이 있는 석굴을 가져다가 나 </p>
<p>에게 시주하도록 하라.&#8221; </p>
<p>이말에 용왕은 기뻐했다고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외로했다. </p>
<p>&#8220;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속에서 1500년을 지내겟다.&#8221; </p>
<p>말을 마치자 부처가 몸을 솟구쳐 돌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p>
<p>같아지므로 사람들이 그 용모를 볼수 있었다. 모든 용이 다 나타나고,부처는 돌속에 </p>
<p>있으면서 밖으로 빛을 나타냈다. 이때 모든 용은 합장하면서 기뻐하여 그곳을 떠나지 </p>
<p>않고 언제나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세존이 결가부좌하고 석벽 속에 </p>
<p>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때 멀리서 바라보면 보였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않 </p>
<p>았다. 諸天이 부처의 영상을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했다. </p>
<p>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p>
<p>&#8216;부처가 바위 위를 밟으니 문득 금옥의 소리가 났다.&#8217; </p>
<p>고승전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p>
<p>&#8216;혜원(중국 동진때의 고승)이 들으니 천축국에 부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 </p>
<p>날에 용을 위해서 남겼던 부처의 영상으로, 북천국 월지국 나갈가성의 남쪽 古仙人의 </p>
<p>석실속에 있었다 한다.&#8217; </p>
<p>또 법현의 서역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나갈국의 국경에 다다르면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인도의 거리단위)되는 </p>
<p>곳에 석실이 있는데, 그 곳은 박산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10여 </p>
<p>보 떨어져 바라보면 부처의 참모습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 </p>
<p>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의 왕들이 화공을 보내어 이것을 모사하려 했지만 비슷하게 </p>
<p>도 그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로는 현겁(賢劫-3劫의 하나)의 1천불이 모두 다 </p>
<p>마땅히 이곳에 영상을 남길것이다. 그 영상의 서쪽 1백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 </p>
<p>에 살 적에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8217; </p>
<p>[A 성함(星函)의 서역기 제 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옛날에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젖을 바 </p>
<p>쳤었다. 어느 날 잘못하는 바람에 꾸지람을 듣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 </p>
<p>는데,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에게 공양했다.&#8217; </p>
<p>그리고는 솔도파(사리나 경전등을 안치하는 축조물)에 수기(授記)하였다. </p>
<p><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주시오.> </p>
<p>마침내 석벽에 가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그리고 대용왕이 되어 이 굴에 살면서 악 </p>
<p>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가 이것을 보자 신통력을 내어서 이곳에 이르렀다. 이 용이 </p>
<p>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지고, 불살계(不殺戒)를 받으면서 청하였다. </p>
<p>&#8220;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항상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8221; </p>
<p>이에 부처가 말했다. </p>
<p>&#8220;나는 장차 적멸(寂滅-열반)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하여 내 영상을 남겨둘 것 </p>
<p>이니 네가 혹여 독하고 분한 마음이 일거든 꼭 내 영상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독한 마 </p>
<p>음이 사라질 것이다.&#8221; </p>
<p>그리고 부처는 이내 석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보면 즉시 나타나지만 가까이서 </p>
<p>바라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위에 발자국을 내어 칠보로 삼았다한다. </p>
<p>이상은 모두 경문으로서 그 내용에는 대략 위와 같았다. </p>
<p>해동 사람들은 이 산을 아나사라고 이름하였으나 마땅히 마나사라고 해야 할 것 </p>
<p>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p>
<p>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p>
<p>번호:6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0 22:09 길이:125줄 </p>
<p>대산 오만진신(臺山 五萬眞身) </p>
<p>산중의 고전을 살펴보면 이런 말이 있다. </p>
<p>&#8220;이산은 진성, 즉 문수보살이 살던 곳이라고 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p>
<p>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때인 정 </p>
<p>관 10년 병신(636)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p>
<p>처음에 중국 태화지 못가의 돌부터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p>
<p>동안 기도했더니, 문득 꿈에 부처가 네 귀(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이 깬뒤 </p>
<p>그 네 귀의 글을 기억할 수는 있었지만 모두가 범어이므로 그 뜻을 전혀 알수가 없었 </p>
<p>다. 이튿날 아침 문득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 </p>
<p>리때 하나, 부처의 머리뼈 한조각을 가지고 부처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어찌하여 무료 </p>
<p>(無聊-수심에 쌓여 있는 것)하게 있는가고 물었다. 이에 법사가 대답했다. </p>
<p>&#8220;꿈에 네 귀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이므로 풀지 못해 그럽니다.&#8221; </p>
<p>그러자 중이 게를 듣더니 번역하여 말했다. </p>
<p>&#8220;가라파좌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다거야란 본래의 성품은 </p>
<p>가진 것이 없다는 말이요, 낭가사가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알았다는 말이요, </p>
<p>달예노사나란 노사나불(부처의 진신에 대한 존칭)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8221; </p>
<p>이어 자기가 가지고 온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며 부탁했다. </p>
<p>&#8220;이것은 본사 석가세존이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보관해 가지십시오.&#8221; </p>
<p>그는 이어서 말했다. </p>
<p>&#8220;그대의 조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문수보살 1만이 항상 그곳에 </p>
<p>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돌아가거든 뵙도록 하시오.&#8221; </p>
<p>말을 마치자 이내 사라졌다. 법사는 보살의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는 본국으로 돌 </p>
<p>아오려 했다. 그런데 태화지의 용이 현신하여 제를 청하고 7일동안 공양을 하더니 법 </p>
<p>사에게 말했다. </p>
<p>&#8220;지난번에 게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8221; </p>
<p>하면서 다시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일은 별 </p>
<p>전에 자세히 적혀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p>
<p>진신을 보려했다. 그러나 3일동안이나 계속 날이 어둡고 그늘이 져서 보지 못하고 돌 </p>
<p>아갔으며, 다시 원녕사에 가서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보살이 법사에게 말 </p>
<p>했다. </p>
<p>&#8220;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가라.&#8221; </p>
<p>법사가 그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가 바로 이곳이다. 이거도 역시 별전에 </p>
<p>실려있다. </p>
<p>그후 두타(중의 칭호)신의는 범일대사의 문인으로서 이 산을 찾아와 자장법사가 </p>
<p>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세상을 뜬 후로는 암자도 역시 오랫동안 헐어 </p>
<p>져 있었다. 그리고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지금의 월정사가 </p>
<p>바로 이것이다. </p>
<p>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때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효명 두형제에 이르자 세헌 </p>
<p>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 </p>
<p>고 성오평에 닿았다. 여러날 유람하다가 갑자기 어느날 저녁에 두형제가 속세를 벗어 </p>
<p>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니 그의 </p>
<p>시위들은 갈바를 알지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p>
<p>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자 문득 푸른 연꽃이 땅위에 피므로 형이 그곳에 암자를 </p>
<p>짓고 살았는데 이곳을 보천암이라 했다.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6백여보를 가니 북쪽 대 </p>
<p>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효명이 또한 암자를 짓고 살 </p>
<p>면서 저마다 부지런히 업을 닦았다. </p>
<p>어느날 형제가 나란히 다서 봉우리로 참례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 만월산에는 1만 </p>
<p>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p>
<p>지장보살이 나타나 있으며, 서쪽 대 장령사나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대세지 </p>
<p>보살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나한이 </p>
<p>나타나 있으며, 중앙의 대 풍로산은 혹은 지로산이라 하는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p>
<p>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보살의 진신에 일일이 참례 </p>
<p>했다. </p>
<p>매일 이른 아침이면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인 진여원에 이르러 36가지의 모양으 </p>
<p>로 변하여 나타났다. 어느 때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나타났고, 어느 때는 보주 모양 </p>
<p>이었으며, 혹은 부처의 눈모양이기도 하고, 혹은 손또는 보탑 모양이기도 했으며, 혹 </p>
<p>은 만불두 모양이 되기도 하거나, 만등(萬燈-부처에게 공양드리기 위한 조명기구)모양 </p>
<p>이 되거나, 혹은 금교 모양이 되고, 혹은 금고(金鼓-여러사람을 부를때 사용하는 악기) </p>
<p>모양, 혹은 금종 모양, 혹은 신통 모양, 혹은 금루 모양, 혹은 금륜(金輪)모양 혹은 </p>
<p>금강저(金剛杵-승려들이 授法할때 쓰는 도구)모양,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 </p>
<p>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오색 광명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의 </p>
<p>모양이거나, 혹은 길상초(吉祥草-풀이름)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모양, 혹은 금전(金 </p>
<p>田-절)모양으로도 되고, 은전(銀田-도량)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발 모양으로, </p>
<p>혹은 뇌전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이 솟아나 </p>
<p>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모양으로, 혹은 금오(金烏)모양으로, 혹은 말이 사자 </p>
<p>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었으며, 혹은 닭이 봉을 낳는 모양으로, 혹은 청룡의 모양으로, </p>
<p>혹은 백상의 모양으로 혹은 까치 모양이거나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었 </p>
<p>으며, 혹은 유저(遊猪)모양으로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모양으로도 나타나기도 하였다. </p>
<p>두 태자는 항상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기 자 </p>
<p>기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p>
<p>이때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p>
<p>네명의 장군을 보내어 산에 가서 이들 두 태자를 맞아 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먼저 효 </p>
<p>명의 암자 앞에 닿아 만세를 불렀다. 그때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었다. 나라 </p>
<p>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서 노부(임금의 儀仗)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 </p>
<p>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은 울며 이를 사양했으므로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서 왕위에 오 </p>
<p>르게 했다. 그는 여러해 나라를 다스렸다. </p>
<p>신룡 원년 을사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을 고쳐 세웠다. 이때 왕은 배관들을 </p>
<p>친히 데리고 산에 와서 전당을 세우고, 또한 문수보살의 소상을 만들어서 당에 모셧다. </p>
<p>이 곳에 지식, 영변등 다섯명으로 하여금 화엄경을 오래 전독(轉讀)하게 하고, 화엄사 </p>
<p>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비용을 대었는데,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으 </p>
<p>로부터 창조(倉租) 1백석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도록 규칙으로 정했으며, 진여원 </p>
<p>에서 서쪽으로 6천보쯤 되는 모니점 고이현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 </p>
<p>나무밭 6결, 좌위(坐位) 2결을 내어서 장사를 세웠다. </p>
<p>보천은 항상 그 영동의 물을 길어다가 마셨으므로 만년에는 몸이 허공을 날아서 </p>
<p>유사강 밖 울진국 장천굴에 이르러 그 곳에 머물어 수구다라니경을 외는 것으로써 밤 </p>
<p>낮의 과업을 삼았다. 장천굴의 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다. </p>
<p>&#8220;내 이굴의 신이 된지 이미 2천년이나 되었으나 오늘 처음으로 수구다라니경의 </p>
<p>진리를 들었습니다.&#8221; </p>
<p>그리고 신은 보살계를 받기를 청했다. 계를 받고 난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p>
<p>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 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 </p>
<p>로 돌아갔다. 이 곳에서 또 50년 동안이나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의 신이 三時로 </p>
<p>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성인이 사는 다섯가지 천국)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바쳤으며 </p>
<p>성인 40명은 10척위의 하늘을 날면서 그를 항상 호위해 주었으며, 그의 지팡이는 하루 </p>
<p>에 세번씩 소리를 내며 방을 세바퀴씩 돌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 </p>
<p>했다. 어느 때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부처가 제자들의 성불 </p>
<p>할것을 예언함)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원적(입적)하는 날, 후에 나라를 이롭게 할일 </p>
<p>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서 말했다. </p>
<p>&#8216;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인데, 각대에는 항상 진신이 있는 곳이다. 靑色(東) </p>
<p>방위인 동대 북각 아래와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을 두어 원상의 관 </p>
<p>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관음보살상을 그려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8권의 金經 </p>
<p>(나라를 수호하는 경전)과 인왕반야경,천수주를 읽고, 밤에는 관음경 예참(禮讖-삼보 </p>
<p>를 예배하고 그 경을 찬탄함)을 염송하고 그곳을 원통사라 일컬으라. </p>
<p>붉은빛 방위인 남대 남쪽 면에는 지장방을 두어 원상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 </p>
<p>린 8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지장보살을모셔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 </p>
<p>과 금강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점찰경 예참을 염송하고 그 곳을 금강사라 일컬으라. </p>
<p>백색방위인 서대 남쪽면에는 미타방을 두어 원상 무량수불과 흰바탕에 그린 무량 </p>
<p>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을 모시게 하라. 여기는 복전승 5명으로 하여 </p>
<p>금 낮에는 8권의 法華를 읽고, 밤에는 아미타불 예참을 염송하며 수정사라고 일컬으라. </p>
<p>검은빛 방위인 북대 남쪽면에는 나한당을 두어 원상 석가불과 검은 바탕에 그린 </p>
<p>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을 두고 낮에는 불보은경과 </p>
<p>열반경을 읽게하고, 밤에는 열반경 예참을 염송케 하며 백련사라 일컬으라. </p>
<p>황색 방위인 중대의 진여원에는 가운데에 니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不 </p>
<p>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문수보살 </p>
<p>을 모시고,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화엄경과 6백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문수 </p>
<p>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그 곳을 화엄사라 일컬으라. 보천암을 고쳐 세워서 화장사라 하 </p>
<p>고, 원상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문장경을 읽 </p>
<p>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염송케 할 것이며, 매년 백일 동안 화엄회를 베풀고 그 곳을 </p>
<p>법륜사라 일컬으라. 이 화장사를 5대사의 본사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p>
<p>정행 복전에게 명하여 향화를 길이 계속하게 하라. 그리하면 국왕은 오래사실 것이며. </p>
<p>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 </p>
<p>갑사를 배치하여 사의 도회로 삼게하라. 여기에는 복전승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 </p>
<p>엄신중의 예참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도내 8주 </p>
<p>의 조세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일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의 임금이 잊 </p>
<p>지 않고 준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8217; </p>
<p>고 하였다. </p>
<p>번호:6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2 22:50 길이:58줄 </p>
<p>명주 오대산 보즐도(寶叱徒) 태자 傳記 </p>
<p>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즐도-보천- 는 아우 효명태자와 함께 하서부의 세헌각간의 </p>
<p>집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대령을 넘어 각기 1천명씩 거느리고 성오평에서 </p>
<p>며칠을 놀다가 태화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왜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p>
<p>이때 무리들 중에서 시위하는 자들은 그들을 찾지 못한 채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p>
<p>형인 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의 진여원 자리 아래 산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 </p>
<p>고 그 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형제는 부처님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p>
<p>수행햇으며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에 나가서 공경하고 예배했다. 청색 방위인 동쪽대 </p>
<p>의 만월형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 1만이 항상 있었으며, 적색 방위인 남쪽 대 </p>
<p>의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항상 있었고, 또한 백색방 </p>
<p>위인 서쪽 대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이 항상 있었 </p>
<p>으며, 흑색방위인 북쪽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이 항 </p>
<p>상 있었다. 또 황색 방위인 중앙대의 풍로산은 한편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p>
<p>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있다. 그리고 진여원에는 문수보살 </p>
<p>이 매일 이른 아침에 36형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매일 이른 </p>
<p>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1만 진신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p>
<p>이때 정신태자의 아무 부군이 서울에 있어 왕위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했다. 나라 </p>
<p>사람들은 네 명의 장군을 보내니 그들은 오대산에 이르러 효명태자를 만나매 만세를 </p>
<p>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7야 동안 빛을 발 </p>
<p>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p>
<p>려 했다. 그러나 보즐도 태자는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 </p>
<p>아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20여년 있었다. 신룡 원년(705) 3월 8일에 처음 진 </p>
<p>여원을 세웠다 한다. </p>
<p>보즐도 태자는 언제나 골짜기의 신령한 물을 마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몸이 공중 </p>
<p>에 떠서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다 다시 오대산 신성굴 </p>
<p>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인데 각 </p>
<p>대에는 항상 진신이 있다고 한다. </p>
<p>대산 월정사, 오류성중(本物을 따라 다니는 다섯 성자) </p>
<p>절안에 전해 오는 고기를 살펴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자장법사는 처음 오대산에 </p>
<p>이르러 진신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을 짓고 살았으나 7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p>
<p>이에 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 그 후에 신효거사라는 이가 있었으며, 혹은 </p>
<p>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했다. 그의 집은 공주에 있었는데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여 </p>
<p>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기 위해 돌 </p>
<p>아다녔다.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자 활로 쏘았더니 한 마리의 깃 하나가 떨어졌을 </p>
<p>뿐, 학은 다 날아갔다. 거사는 그 깃을 주워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p>
<p>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그래서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의 살을 </p>
<p>베어서 어머니께 드렸다. </p>
<p>그후 그는 중이 되었는데,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효가원이다. </p>
<p>거사가 경주 경계에서 하솔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들을 보았더니 그제야 </p>
<p>사람들이 모두 인간의 평상이었다. 이에 그곳에 머물러 살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 </p>
<p>은 부인을 만나게 살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p>
<p>&#8220;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살만합니다.&#8221; </p>
<p>말을 마치자 이내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그것이 관음보살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p>
<p>즉시 성오평을 지나서 자장법사가 처음 모옥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잠시 후에 </p>
<p>다섯 명의 중이 오더니 말했다. </p>
<p>&#8220;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8221; </p>
<p>거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자 중이 또 말했다. </p>
<p>&#8220;그대가 주워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8221; </p>
<p>거사가 내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곳에 갖다 대니 꼭 맞았는데 그것 </p>
<p>이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다섯 성중의 </p>
<p>화신임을 알았다. </p>
<p>이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에는 모옥을 지었으며, 다음에는 신효거사가 와서 </p>
<p>살았고,그 다음에는 범일의 문인 신의 두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다. 후에 또 수 </p>
<p>다사의 장로 유연이 와서 살았다. 이로 하여 점점 큰 절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다섯 </p>
<p>성중과 9층으로 된 석탑은 모두 성자의 자취다. </p>
<p>상지자(相地者-지관)가 말했다. </p>
<p>&#8220;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 이 곳이 가장 좋은 곳으로 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8221; </p>
<p>번호:6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5 00:05 길이:139줄 </p>
<p>남월산 </p>
<p>이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금당주 미륵존상화광 </p>
<p>의 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p>
<p>&#8216;개원 7년 기미(719) 2월15일에 중아찬 전망성이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 </p>
<p>길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감사사의 돌미륵 하나를 </p>
<p>만들고, 이에 겸하여 개원 이찬과 아우 간성 소사 현도사, 누이 고파리, 전처 고노리 </p>
<p>후처 아호리와 서형(庶兄) 급한 일길찬, 일당 살찬, 총민 대사와 누이동생 수힐매 등 </p>
<p>에게까지도 미치게 하기 위해 이 선을 베풀었다. 돌아가신 어머리 관초리 부인이 고인 </p>
<p>이 되자 동해유우변산야라 했다.&#8217; </p>
<p>미타불화광 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p>
<p>&#8216;중아찬 김지전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관직명)와 집사시랑으로 있다가 나 </p>
<p>이 67세에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학로 물러남)하여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國主 대 </p>
<p>왕과 이찬 개원,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 양 </p>
<p>성, 사문 현도, 죽은 아내 고로리,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 또 아내 아호리 등을 위해 </p>
<p>서 감산의 장전을 내놓고 절을 세웠다. 또 석미륵 하나를 만들어서 돌아가신 아버지 </p>
<p>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받들었는데, 그가 고인이 되므로 동해유우변산야라 했다.&#8217; </p>
<p>천룡사 </p>
<p>東都(경주)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이를 사람들은 고위산 </p>
<p>이라부른다. 산의 남쪽에는 절이 있는데 속칭 고사 혹은 천룡사라고 한다. </p>
<p>토론삼한집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p>
<p>&#8216;계림에는 두 줄기의 客水(다른곳에서 흘러온 물)와 한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 </p>
<p>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p>
<p>재앙에 이른다.&#8217; </p>
<p>또 민가에서는 다음과 같ᄋ 전해지고 있다. </p>
<p>&#8216;역수는 이 주의 남쪽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시내인데 이 물은 그 근원이 천 </p>
<p>룡사이다.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귀가 와서 보더니 말하기를 <이절을 파괴하면 곧 나 </p>
<p>라가 망할 것이다.> 라 했다.&#8217; </p>
<p>또 서로 전하여 말해 오기를 </p>
<p>옛날 단월(시주하는 사람)에게 두딸이 있었는데 이름을 천녀,용녀라 하였다. 부 </p>
<p>모는 그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을 따서 천룡사라 이름했다.&#8217; </p>
<p>이곳은 경지가 이상하여, 불도를 닦는 도량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폐허 </p>
<p>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젖먹여 기른 최은함의 아들은이름이 </p>
<p>승로였다. 승로는 숙을 낳고 숙은 시중 제안을 낳았는데, 제안이 이 절을 중수하여 없 </p>
<p>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그리고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여,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다시 </p>
<p>신서와 원문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는데 </p>
<p>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들을 많이 나타내었다. </p>
<p>그 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p>
<p>&#8216;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주국 최제안은 쓴다. 경주 고위산의 천룡사 </p>
<p>는 쇠잔하여 파괴된지 몇 해가 지났다.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히 성수가 무강하시고 </p>
<p>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낭각과 방사,주고를 모두 이룩하고, 또 석조 </p>
<p>불과 이소불상 몇 구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새로이 설치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p>
<p>수리하여 세웠으므로 관가에서 절의 주지를 정해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p>
<p>그러나 이 주지를 교대할 경우는 도량의 중들이 안심할 수가 없었다. 희사한 토 </p>
<p>지로써 사원의 충족함을 보면, 팔공산의 지장사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백결이었 </p>
<p>고, 비슬산에 있는 도선사는 20결이었으며, 서경 사면에 있는 산사들도 각각 20결씩이 </p>
<p>었는데, 모두 유직 무직을 막론하고 모름지기 계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p>
<p>서 절의 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수도함을 상례로 삼았다. </p>
<p>제자 제안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또한 절의 중들 중에 </p>
<p>서 재주와 덕이 모두 뛰어난 고승으로 동량이 될만한 사람을 뽑아서 주지로 삼아 길이 </p>
<p>분향수도하게 하려 한다. 이를 문자로 갖추어 자세히 기록하여 강사(剛司-중의 직명) </p>
<p>에게 맡겨 두었으니, 지금 맡고 있는 주지를 처음으로 삼아 유수관의 공문을 받아 도 </p>
<p>량의 여러 승려들에게 이르 보일 것이며, 여러 승려들은 각자 모두들 알아두어야 할 </p>
<p>것이다. 중희 9년 6월 어느날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했다.&#8217; </p>
<p>살펴보건대 중희는 거란 홍종의 연호이며, 본조 정종 7년인 경진(1040)이다. </p>
<p>무장사 미타전 </p>
<p>서울(경주)의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암곡촌 북쪽에 무장사가 있었다. 신라 제 </p>
<p>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대아간 효양,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p>
<p>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는 너무도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듯하다. 그 곳은 깊숙 </p>
<p>하고 어두침침하므로 저절로 허백(虛白-마음이 비면 절로 순백이 일어남)이 생길 것이 </p>
<p>므로, 참으로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윗쪽으로는 아미 </p>
<p>타의 고전이 있다. 곧 소성대왕의 비 계화황후가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므로 왕후는 </p>
<p>근심이 가득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극도의 슬픔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상했 </p>
<p>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에 아미 </p>
<p>타라는 대성이 있는데 지성으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맞이해 준다는 말을 듣자, </p>
<p>&#8220;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자신을 속이겠는가!&#8221; </p>
<p>하고는, 아에 육의(六衣-왕후가 입던 여러가지 옷)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9부 </p>
<p>(九府-재화를 맡은 관청)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모두 내어 名匠들을 불러들여 아미 </p>
<p>타불의 상 1구를 만들게 하였으며 아울러 신중(神衆-신의무리)도 만들어 모셨다. </p>
<p>이보다 먼저 이 절에는 한 노승이 있었다. 어느 날 꿈에 진인이 석탑의 동남쪽 </p>
<p>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노승은, </p>
<p>&#8220;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8221; </p>
<p>라고 생각했으나,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않고 마음 속에 숨겨 두고 있었다. 그 </p>
<p>런데, 그 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시냇물을 물살이 급해서 工人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으 </p>
<p>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 </p>
<p>을 얻게 되어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도 같았다. 그래서 보는 이들 </p>
<p>은 깜짝 놀라며 좋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近古에 와서 미타전은 허물어졌으나 </p>
<p>절만은 아직도 홀로 남아있다. </p>
<p>세간에 전하는 말에는, </p>
<p>&#8216;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p>
<p>무장사라 했다.&#8217; </p>
<p>고도 한다. </p>
<p>백엄사 석탑사리 </p>
<p>개운 3년 병오(946) 10월 29일 강주계(진주) 임도대감주첩에 이렇게 적혀있다. </p>
<p>&#8216;선종의 백엄사는 초팔현에 있으며, 절의 중 간유 상좌는 나이 39세라 했다. 절 </p>
<p>을 처음 세운 때는 알 수 없다.&#8217; 고 했다. </p>
<p>그러나 고전에는 이렇다. </p>
<p>&#8216;전대인 신라 때에 북택청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지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헐 </p>
<p>려 폐지되었다가 지난 병인년 중에 사목곡 양부 화상이 고쳐 지어 그곳의 주지가 되었 </p>
<p>다가 정축(103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에 희양산의 긍양화상이 와서 10년 동안 살 </p>
<p>다가 을미년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p>
<p>그때 신탁 화상이 남원 백암수에서 이 절로 와 전에 정한 법대로 주지가 되었다. </p>
<p>또 함웅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 석수림이 절의 상규 10조를 </p>
<p>정했다. 또 새로이 5층 석탑을 세워서 진신 불사리 42알을 모셨다. 또 사재로 寶를 세 </p>
<p>워서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이었던 엄흔,백흔의 </p>
<p>두 명신과 근악 등 3위 앞에 보를 모아 공양할 일, 금당 약사여래 앞의 나무 주발에 </p>
<p>매달 초하룻날 공양미를 갈아 놓을 일 등을 정했다. 이하 조목은 기록하지 않는다.' </p>
<p>영취사 </p>
<p>절의 고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p>
<p>'신라 진골 제 31대 신문왕 때인 영순 2년(683)에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 온천에 </p>
<p>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쉬었다. 문득 한 사람이 매을 </p>
<p>놓아 꿩을 쫓으니, 꿩은 날아서 금악을 넘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방울 소리 </p>
<p>를 듣고서 찾아 굴정현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p>
<p>우물 속에 있는데 우물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p>
<p>안고 있는데 매도 또한 측은히 여겨서 인지 감히 꿩을 낚아채려 하지 않았다. 공이 이 </p>
<p>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았더니 가히 절을 세움직하다고 했 </p>
<p>다. </p>
<p>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뇌어 그 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곳에 </p>
<p>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취사라 했다.' </p>
<p>유덕사 </p>
<p>신라 대부각간 취유덕이 자기의 개인 집을 내놓아 절을 삼고 이름하여 유덕사라 </p>
<p>했다. 그의 원손 삼한공신 최언위가 유덕의 진영을 이곳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 </p>
<p>다고 한다. </p>
<p>오대산 문수사 石塔記 </p>
<p>뜰가의 석탑은 대개 신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그 제작기법은 비록 순박하여 정 </p>
<p>교하지는 못하지만 자못 영검이 있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여러 노 </p>
<p>인들에게 들은 한 가지만 기록해 둔다. </p>
<p>'옛날 연곡현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때 문득 탑 </p>
<p>하나가 배를 따라 오니, 그 그림자를 본 물고기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문에 </p>
<p>어부는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여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림자를 따라서 찾 </p>
<p>아가니 이 탑이 있었다. 이에 그 탑을 도끼로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 </p>
<p>이가 모두 떨어진 것이 이 까닭이다.' </p>
<p>나는 이 이야기를 듣자 놀라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그 탑의 위치가 동쪽 </p>
<p>에서 약간 당겨서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이에 현판을 쳐다보니 이렇게 </p>
<p>씌여 있었다. </p>
<p>'비구인 처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 </p>
<p>년 동안은 잠잠하게 아무 영검이 없었다. 일자(日者-지관)가 터를 구하여 이곳에 와서 </p>
<p>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자리가 아닌데 어찌하여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 </p>
<p>가?>하였다. 이에 중들이 깨닫고 다시 옛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p>
<p>곳이다.&#8217; </p>
<p>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의 위신이 그 자취를 나타내어 </p>
<p>만물을 이로베 함이 이처럼 빠른 것을 보고서 어찌 불자로서 잠잠히 말하지 않을 수 </p>
<p>있으랴! 때는 정풍 원년 병자(1156) 10월의 일인데 백운자(일연의 제자)는 기록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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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국유사번역본 1권-신라무왕  2002/08/31  48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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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0:45:30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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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박성봉 고경식이 번역한 삼국유사입니다. 박성봉-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경식-경희대 국문과 교수.. 이런 분들이네요.. 이 책은 85년에 처음나왔고, 이 글은 93년에 나온 제 2판입니다.. 번호: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2 17:04 길이:58줄 삼국유사 제 1 권 기이(紀異) 제 1 서술하여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들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박성봉 고경식이 번역한 삼국유사입니다. </p>
<p>박성봉-경희대 사학과 교수 </p>
<p>고경식-경희대 국문과 교수.. </p>
<p>이런 분들이네요.. </p>
<p>이 책은 85년에 처음나왔고, 이 글은 93년에 나온 제 2판입니다.. </p>
<p>번호: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2 17:04 길이:58줄 </p>
<p>삼국유사 제 1 권 </p>
<p>기이(紀異) 제 1 </p>
<p>서술하여 말한다. </p>
<p>대체로 옛날 성인들은 禮와 樂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仁과 義로써 가르침을 </p>
<p>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亂神)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p>
<p>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에는 부명(符命-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표)과 도 </p>
<p>록(圖서적 록-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여 기록한 책, 도참과 같은 말)을 받게 되므로 </p>
<p>반드시 보통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연후라야 큰 변화의 기회를 </p>
<p>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기도 하고, 또 대어을 이룰 수도 있었던 것이다. </p>
<p>그런 까닭에 河水에서 하도(河圖 &#8211; 옛날 중국의 복희씨 때 황하에서 길이 8자 </p>
<p>가 넘는 龍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주역의 팔괘의 근원이 됨)가 나오고 </p>
<p>낙서(洛書 &#8211; 옛날 중국의 우왕때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새겨져 있었다는 글씨 </p>
<p>로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기원이 됨)가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는 전설이 생 </p>
<p>긴 것이며, 또 무지개가 神母를 둘러싸 복희(중국 고대 삼황의 한사람으로 백성들에 </p>
<p>게 농업 어업 목축을 가르쳤다고 함) 를 낳았다든가, 용이 여등과 교접을 하여 염제 </p>
<p>(신농씨를 말함, 火德으로 제왕이 되었다고 함) 를 낳았으며, 궁상의 들판에서 황아가 </p>
<p>노닐 때 스스로 白帝의 아들이라 칭하는 신동이 황아와 사귀어서 소호를 낳았다는 이 </p>
<p>야기와 이밖에 간적은 알을 삼켜 설을 낳았고, 강원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기를 낳 </p>
<p>았으며, 요(堯 &#8211; 요순 시대의 그 요임금)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만에 요을 낳 </p>
<p>았고, 패공(沛公 &#8211; 한고조 유방)의 어머니는 큰 연못에서 용과 교접을 하여 패공을 낳 </p>
<p>았다는 등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를 어찌 다 기록할 </p>
<p>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로운 데에서 탄생하였다 </p>
<p>고 하여 이상할것이 없다. 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을 싣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잇는 </p>
<p>것이다. </p>
<p>고조선 &#8211; 왕검조선 </p>
<p>魏書(북제의 위수가 쓴 북위의 정사)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p>
<p>전에 단군왕검이 계셨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 </p>
<p>라 불렀는데 이때는 중국의 고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 </p>
<p>古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환인이 있었는데, 그 서자로서 환웅이 항상 천 </p>
<p>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p>
<p>내려다 본즉 그곳이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 곳이라, 이에 天符印 세개 </p>
<p>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이끌 </p>
<p>고 태백산- 지금의 묘향산?-에 있는 신단수 밑으로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神市라고 </p>
<p>한다. 이 분이 바로 환웅 천왕이라고 불리시는 분인데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 </p>
<p>리고, 곡식과 생명, 질병, 법률, 선악등을 위시한 인간의 360여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p>
<p>인간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p>
<p>이 때 곰 한마리와 범 한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사람되기를 </p>
<p>환웅에게 기원하였다. 환웅은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p>
<p>&#8216;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8217; </p>
<p>라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 먹고 세이레(21일)동안 忌하니 여자의 몸으로 되었다. </p>
<p>그러나 범은 忌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 </p>
<p>므로 날마다 단수 밑에 와서 잉태하기를 축수하였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사람으로 변 </p>
<p>하여 그와 혼인하였더니 이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바로 단군 왕검이다. </p>
<p>단군 왕검은 唐高(요임금)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 </p>
<p>년이니 즉위후 50년은 경인년이 아니고 정사년이다..)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 </p>
<p>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후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 그곳을 궁흘산이라 </p>
<p>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그는 이 곳에서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p>
<p>호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나중 </p>
<p>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p>
<p>당나라 배구전에 전하기를 고려는 본래가 고죽국-지금의 해주-이었는데 주나라를 </p>
<p>봉해 주으로써 조선이라 하였으며, 한나라가 이르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이를 </p>
<p>낙랑,현도,대방 이라 불렀다. 통전(通典 &#8211; 당나라의 두우가 편찬한 정치제도사) 에도 </p>
<p>또한 이와 같다. &#8211;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한사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 </p>
<p>서는 세군으로 되어 있다.?? &#8211; </p>
<p>번호: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3 08:24 길이:54줄 </p>
<p>위만조선 </p>
<p>전한서 조선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 연나라 때부터 진번, 조선을 침 </p>
<p>략하여 차지하고 이 곳에 관리를 두어 변방에 요새를 쌓았는데 이후 진나라가 연나 </p>
<p>라를 멸망시키고자 요동군 변방에 이 땅을 예속시켰다. </p>
<p>한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서 지킬 수가 없어 옛날의 요새를 다시 </p>
<p>고쳐 쌓고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예속시켰다. </p>
<p>연나라의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니, 연나라의 위만(衛 </p>
<p>滿)이 망명하여 무리 1천여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달아 요동의 변방요새를 지나 패 </p>
<p>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땅인 상하 변방 요새에 정착하였다. 이후 점차로 진번 조선의 </p>
<p>오랑캐와 옛날의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을 해온 자를 예속시켜 왕이 되고 도읍을 </p>
<p>왕검에 정했다. </p>
<p>위만이 군병의 위력으로써 주변의 조그만 읍들을 공략하자 진번과 임둔이 모두 </p>
<p>항복하여 이에 종속되었다. 이로써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에 이르게 되었다. 위만은 </p>
<p>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이후 손자 우거가 이를 계승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진번과 </p>
<p>진국이 한(漢)나라에 국서를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길을 막아 통 </p>
<p>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 2년(B.C. 109년)에 한나라에서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 </p>
<p>거를 타일렀는데 우거는 끝까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섭하는 교섭에 실패하고 돌 </p>
<p>아가게 되었는데, 그의 신하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는 책임자인 조선의 비왕(裨王=장 </p>
<p>수) 장(長)을 찔러 죽인 다음 이어 패수를 건너 변방 요새를 지나 한나라로 돌아가 보 </p>
<p>고를 했다. </p>
<p>이에 한나라의 천자가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섭 </p>
<p>하를 원망하여 불시에 군사를 내어 섭하를 쳐죽였다. 이에 한나라의 천자는 누선장군 </p>
<p>양복을 시켜 제나라의 병선을 거느리고 발해를 지나 조선을 치게 하니 군사는 5만이 </p>
<p>었고, 또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요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우거를 공격하게 하였다. 우 </p>
<p>거는 군사를 움직여 험한 곳에서 그들을 막았다. </p>
<p>누선장군은 제나라의 병력 7천을 거느리고 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우거는 성을지 </p>
<p>키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아가 공격을 하니 누선의 군사가 패해 도 </p>
<p>망을 했다.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속으로 몸을 피하여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좌장 </p>
<p>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쳤으나 능히 깨드리지 못했다. </p>
<p>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이 싸움에 패했기 때문에 위산을 시켜 군병의 위력으로 </p>
<p>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이에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馬)을 바 </p>
<p>치겠다고 했는데, 이 때 태자를 호송하는 군사의 무리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p>
<p>머두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패수를 건너려 할때 사자(위산)와 좌장군(순체)은 </p>
<p>혹시 이들이 무슨 변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p>
<p>&#8216;이미 항복한 것이니 병기를 가져오지 마시오.&#8217;하고 말하자 태자는 사신이 자기를 </p>
<p>속이는 게 아닌가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p>
<p>위산이 천자에게 이 일을 보고하니 천자는 위산의 목을 베었다. 좌장군은 패수 </p>
<p>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무찌르고 나아가 왕검성에 이르러 서북쪽을 에워쌌다. 누선 </p>
<p>장군 또한 와서 이에 호응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 </p>
<p>니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p>
<p>천자는 전쟁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고 지체되므로 옛날의 제남태수로 있던 공손수 </p>
<p>를 시켜 가서 치게 하고, 전권을 주어 편의에 따라 일을 자의대로 처리하게 하였다. </p>
<p>공손수는 조선에 이르러 누선장군 양복을 묶어 가두고 그의 군사를 합쳐 좌장군의 군 </p>
<p>사와 함께 급히 왕검성을 공격했다. 이 때 조선상(朝鮮相) 노인(路人)과 상(相) 한도 </p>
<p>그리고 이계상 삼과 장군 왕협은 서로 모의를 한 끝에 항복을 하려 했으나 왕은 그 말 </p>
<p>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도와 왕협, 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p>
<p>노인만이 중도에서 죽었다. </p>
<p>원봉 3년(B.C. 110년) 여름에 이 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p>
<p>항복을 했다. 그러나 이즈음에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거의 대신 성기 </p>
<p>가 한(漢)을 배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로 </p>
<p>하여금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르 쳐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조선은 평 </p>
<p>정되었다. 한은 이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네군을 두었다. </p>
<p>번호: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3 08:24 길이:52줄 </p>
<p>마한 </p>
<p>魏志에 기술한 바로 보면 &#8216;위만이 조선을 공격하니 조선왕 준은 궁인과 좌우에 </p>
<p>서 그를 모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p>
<p>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8217;고 기록하고 있다. </p>
<p>또한 견훤이 고려의 태조에게 올린 글에 &#8216;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 </p>
<p>가 일어났으며 백제는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8217;고 하였다. </p>
<p>최치원이 말하기를 &#8216;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8217;라고 하였다. 四夷- 동이 </p>
<p>서융, 남만, 북적 등 중국주위의 소위 오랑캐나라들-, 九夷- 동방에 있는 아홉이민족 </p>
<p>물론 중국기준의 이민족 즉 견이,어이,방이,황이,백이,적이,풍이,양이등-, 九韓, 예맥 </p>
<p>(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 주나라의 天,地,春,夏,秘,冬官의 6관제를 기술한 책 &#8211; </p>
<p>에 직방씨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하였다고 하는 것은 동이의 종족으로 곧 구이를 말하 </p>
<p>는 것이다. </p>
<p>삼국사에 기술하기를 명주는 옛날의 예국으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p>
<p>얻어 바쳤다고 하였으며, 또한 춘주는 예전의 우수주로 옛날의 맥국이라 하였다. 그리 </p>
<p>고 지금의 삭주를 맥국이라고 하였고, 또 평양성도 맥국이라 하였다. </p>
<p>회남자의 註에는 동이는 아홉종류나 된다고 하였으며, 논어정의(論語正義)에는 </p>
<p>구이란 것은 현도, 낙랑, 고려, 만식, 부유, 소가, 동도, 왜인, 천비라고 하였다. </p>
<p>해동안홍기에는 구한을 일러 일본, 중화, 오월, 탐라, 응유, 말갈, 단국, 여진, </p>
<p>예맥이라고 하였다. </p>
<p>2부(二府) </p>
<p>전한서에 보면 소제시원 5년 기해(B.C. 82년)에 두 外府를 두었다고 한다. 이는 </p>
<p>조선의 옛땅 평나와 현도군등을 합쳐서 만든 평주도독부와 또 임둔,낙랑, 등 두군의 </p>
<p>땅에 설치한 동부도위를 말함이다. </p>
<p>72국(七十二國) </p>
<p>통전에 이르길 조선 유민은 70여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이들은 사방이 백리였 </p>
<p>다고 한다. </p>
<p>그리고 후한서에는 西漢이 조선의 옛땅에 처음엔 네 군을 두었다가 나중에 二府 </p>
<p>를 두었는데 법령이 차츰 번거로와지자 78나라로 나누었다. 이 각 나라는 萬戶였다고 </p>
<p>한다. </p>
<p>낙랑국 </p>
<p>전한 때에 낙랑군을 처음으로 두었다. 응소가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이라 하 </p>
<p>였다. </p>
<p>신당서의 註에는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라 하였다. 國史에 이르길 혁거 </p>
<p>세 30년에 신라에 낙랑인들이 와서 항복을 하였으며, 3대 노례왕 4년에는 고구려의 </p>
<p>3대 무휼왕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 사람과 더불어 신라에 </p>
<p>와서 항복을 하였으며 무휼왕 27년에 광호제가 사신을 보내어 낙랑을 치고 땅을 빼앗 </p>
<p>아 군현을 삼으니 살수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고 한다. </p>
<p>북대방 </p>
<p>북대방은 원래가 죽담성으로 신라 노례왕 4년 (B.C. 27년)에 대방과 낙랑사람들 </p>
<p>이 신라에 항복을 해왔다. </p>
<p>남대방 </p>
<p>조위(曹魏)때 처음으로 남대방군을 설치하엿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하였다. 대방 </p>
<p>의 남쪽은 바다와 접한 면이 천리나 되나 그곳을 한해(瀚海)라고 하였다. </p>
<p>번호: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4 00:56 길이:59줄 </p>
<p>말갈(혹은 勿吉) 과 발해 </p>
<p>통전에 이르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그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 </p>
<p>고 스스로 진단이라고 하였다. </p>
<p>선쳔 연간(당의 현종때 712년)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 </p>
<p>해라고만 불렀다. 개원 7원(719년)에 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다. 이어 세 </p>
<p>자가 왕위를 계승하니 당현종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사 </p>
<p>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의 큰 나라로 발전하였다. 그 땅에 5京,15府,62州가 </p>
<p>있었는데 후당의 천성 초년에 거란이 공격하여 마침내 그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p>
<p>가탐의 군국지에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등 四府는 고구려의 옛땅으로서 </p>
<p>신라의 천정군에서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도합 39驛이 이에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삼 </p>
<p>국사에는 백제의 말년에 발해, 말갈, 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하였다. </p>
<p>신라사람들은 북엔 말갈이있고, 남엔 왜인이, 서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에 해가 </p>
<p>된다고 하였고, 또한 말갈은 그 땅이 아슬라주에 연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p>
<p>또한 동명기에는 졸본성은 땅이 말갈에 연접하였는데 신라의 6대 지마왕 14년 을 </p>
<p>축에 말갈의 많은 군사가 국경으로 들어와서 大嶺의 성책을 습격하고 이어 이하(泥河) </p>
<p>로 지나갔다고 하였다. </p>
<p>후한서에 이르기를, 말갈이 바로 물길이라고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와 물길은 </p>
<p>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p>
<p>흑수와 옥저에 대해서는 도파의 지장도를 살펴보면 진한의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p>
<p>있다고 하였다. </p>
<p>살피건대 동명제는 왕위에 오른 지 10년만에 북옥저를 멸하였고 온조왕 42년에 </p>
<p>남옥저의 20여집이 신라에 와서 투항을 하였으며 그리고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신 </p>
<p>라에 좋은 말을 바치고 있다. 이를 보면 동옥저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장도 </p>
<p>에는 흑룡강이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p>
<p>이서국(伊西國) </p>
<p>노례왕 14년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운문사에 예로부터 </p>
<p>전해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보면 정관 6녕 임진에 이서군의 금오촌 영미사( </p>
<p>寺)가 밭을 바쳤다고 하였다. 금오군은 지금의 청도땅이니 청도군이 곧 이서국이다. </p>
<p>5가야 </p>
<p>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벽진가야), 소가야 이다. 또한 본조사략 </p>
<p>에 의하면 태조 천복 5년(940년)에 다섯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바, 첫째는 금관, 둘째 </p>
<p>는 고령, 셋째는 비화이다. 나머지 두개는 아라와 성산이라고 했다. </p>
<p>북부여 </p>
<p>고기에 이르길, 前漢 선제 신작 3년 임술(58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에 </p>
<p>내려왔는데 오룡거(五龍車)를 탔었다.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북부여라 하고 스 </p>
<p>스로 이름하여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로서 성을 삼 </p>
<p>았다. 왕을 위해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p>
<p>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부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를 이룩하 </p>
<p>였으니 이가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p>
<p>동부여 </p>
<p>북부여 왕 해부루의 대신인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을 하였다. </p>
<p>&#8216;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 이 곳에 나라를 세울 것인 즉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p>
<p>가라.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만한 곳 </p>
<p>이다.&#8217; 고 하였다. </p>
<p>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 </p>
<p>고자 하였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 </p>
<p>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들추니 거기에 금빛 개 </p>
<p>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8216;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 </p>
<p>심이로다.&#8217; 하고 그 아이르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p>
<p>태자로 삼았다. 이후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왕위 </p>
<p>를 태자 대소에게 전했다. 그러나 지황 3년 임오에 이르러 고루려 왕 무휼이 이를 쳐 </p>
<p>서 대소를 죽이니 이로써 나라가 망하였다. </p>
<p>번호: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4 00:58 길이:57줄 </p>
<p>고구려 </p>
<p>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 또는 성주라고 말을 하나 이는 모 </p>
<p>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방면에 있었다. </p>
<p>국사 고려본기에 기술하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p>
<p>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해 갔으며, 후에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p>
<p>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은 </p>
<p>즉 여자가 말하기를 </p>
<p>&#8220;저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내가 여러 아우들과 노닐고 있을 때 </p>
<p>에, 남자 하나가 나타나 자기느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신산 밑 압록 </p>
<p>강가에 있는 집 속으로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해 놓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p>
<p>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으며 마침내 저를 이곳으로 귀양을 보냈습 </p>
<p>니다.&#8221; 라고 하였다. </p>
<p>금오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녀를 방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속을 비쳤 </p>
<p>다.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 </p>
<p>다. 크기가 닷되들이 말(斗)만 했다. </p>
<p>왕은 그것을 버려 개나 돼지에게 주려 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길에 내 </p>
<p>다 버리게 하였더니, 소와 말이 모두 그 알을 피해서 지나갔다. 또 들에 내다버리니 </p>
<p>새와 짐승이 오히려 덮어주었다. 이에 왕이 그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쪼갤 수가 없 </p>
<p>어 마침내 그 어머니게게 다시 돌려 주었다. </p>
<p>그 어머니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 </p>
<p>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살에 기골이 준수하니 일반 </p>
<p>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았다. </p>
<p>그 나라의 풍속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해서 그는 </p>
<p>주몽이란 이름을 얻었다. </p>
<p>금와에게는 아들이 일곱이나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가 </p>
<p>항상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에 장남인 대소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p>
<p>&#8220;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니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됩니 </p>
<p>다.&#8221; 그러나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곧 좋 </p>
<p>은 말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좋은 말은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p>
<p>말은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 </p>
<p>게 주었다. </p>
<p>왕의 여러 아들과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사 </p>
<p>실을 미리 알고 주몽에게 말하였다. </p>
<p>&#8220;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p>
<p>살지 못하겟느냐. 그러니 빨리 여기를 떠나라.&#8221; </p>
<p>그리하여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도망하였는데 마침 엄수에 이르 </p>
<p>렀다. 이에 그는 물을 향해 말을 했다. </p>
<p>&#8220;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p>
<p>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8221; </p>
<p>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솟아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그들을 건너게 한 다음 흩어 </p>
<p>졌다. 이로써 뒤쫓아 오던 기마병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은 무사히 졸본주에 다다라 </p>
<p>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p>
<p>그러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다만 비류수(沸流水)위에 집을지어 거처 </p>
<p>하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 인하여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이 때의 나이가 </p>
<p>12세 였는데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에 즉위하여 왕이라 하였다. 고구려가 제일 융성 </p>
<p>하던 때는 21만 5백 8호나 되었다. 주림전 21권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p>
<p>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을하였는데 상(相)을 보는 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p>
<p>&#8220;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8221; </p>
<p>라고 하였다. 왕은 내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겠다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p>
<p>&#8220;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임신을 한 것입니다.&#8221; </p>
<p>라고 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니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여 돼지 우리 </p>
<p>에 내다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 </p>
<p>여 죽지를 않았다. 이 아이가 자라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p>
<p>번호: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4 00:58 길이:41줄 </p>
<p>변한, 백제 </p>
<p>신라의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19년 임오에 변한 사람이 항복하여 왔다. 신당서 </p>
<p>와 구당서에 모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에 있었다고 하였고, 후한서에는 변한은 남쪽 </p>
<p>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었다고 했으며, 최치원은 변한이 바로 </p>
<p>백제하고 하였다. </p>
<p>본기를 살펴보면 온조왕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 4년(B.C.17년)이라고 </p>
<p>한다. 그러하다면 혁거세나 동명왕의 시대보다 40여년의 뒷일이 되는데, 당서에 변한 </p>
<p>의 후손들이 낙랑땅에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온 때문에 </p>
<p>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낙랑 출신으로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p>
<p>등과 서로 대치했던 일이 온조왕의 이전에 있었던 것 같고, 그 도읍지가 낙랑의 북 </p>
<p>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p>
<p>어떤 사람은 구룡산을 잘못 알고서 변나산이라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를 가지고 </p>
<p>변한이라고 말을 하나 이것도 그릇된 것일 것이다. 무릇 옛날 고현(古賢-최치원)의 </p>
<p>말을 따름이 당연하다.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고 하는 것이다. </p>
<p>백제의 융성기에는 호수가 1십5만2천3백호나 되었다. </p>
<p>진한 </p>
<p>후한서에 이르길,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韓國에 오니 마한이 동쪽 땅을 떼 </p>
<p>어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서로 도(徒)라고 불렀으며 마치 진나라의 말과 흡사했다. </p>
<p>그런 연유로 이곳을 秦韓이라고 하였다고 辰韓의 한 노인이 말을 했다고 하였다. </p>
<p>1만호씩 되는 12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각기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 </p>
<p>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시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을 하여 왔던 것으로 탁수의 이름을 </p>
<p>따서 그들이 사는 읍과 마을을 사탁,점탁이라고 불렀다. </p>
<p>신라의 전성기에는 서울에 17만8천9백36호, 1천3백60방, 55리, 서른 다섯개의 </p>
<p>金入宅- 부유한 큰 집 &#8211; 이 있었다. 이는 남택, 북택,오비소택, 본피택, 양택,지상택 </p>
<p>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p>
<p>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 </p>
<p>택, 사량택, 정상택, 아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교남택, 항질택, 누 </p>
<p>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이었다. </p>
<p>우사절유택(又四節遊宅) </p>
<p>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엔 구지택, 겨울엔 가이택에서 놀았는데 </p>
<p>이를 사절유택이라 일렀다. 제 49대 헌강왕 때에 성 안에 초가로 된 집은 하나도 없 </p>
<p>고 집의 처마와 담들이 이웃과 서로 붙어 있었다. 노래소리와 피리부는 소리가 길거 </p>
<p>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p>
<p>번호: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4 21:46 길이:63줄 </p>
<p>신라시조 혁거세왕 </p>
<p>진한 땅에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 </p>
<p>의 담엄사로서, 그 촌장은 알평이었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는데 이가 급 </p>
<p>량부 이(李)씨의 조상이 되었다. </p>
<p>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 </p>
<p>량부 정(鄭)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남사누라고 하는데 구량벌,마등오,도북,회덕 </p>
<p>등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p>
<p>셋째는 무산 대수촌이니 촌장은 구례마이다. 처음엔 이산에 내려오니 여기가 점 </p>
<p>량부 또는 모량부로 손(孫)씨의 고향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고 하는데 박곡촌 등 </p>
<p>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p>
<p>넷째는 자산 지지촌 이니 촌장은 지백호이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p>
<p>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통선부이다.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 </p>
<p>한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남쪽에 옛집터 </p>
<p>가 있는데 여기가 최후(최치원)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p>
<p>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이니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p>
<p>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는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 </p>
<p>촌이 여기에 속한다. </p>
<p>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니 촌장의 이름은 호진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 </p>
<p>니 이 사람이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로 물이촌,잉구미촌,궐 </p>
<p>곡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p>
<p>위의 글을 살피건대,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같다. </p>
<p>노례왕(유리왕) 9년에 비로소 여섯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 </p>
<p>었다. 지금의 풍속에느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 </p>
<p>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p>
<p>진한 지절 원년(B.C.69년) 3월 초하루에 여섯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 </p>
<p>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의논을 하였다. </p>
<p>&#8220;우리들은 아직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p>
<p>없소. 그러니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해야 하지 않 </p>
<p>겠소.&#8221; </p>
<p>이리하여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에 있는 나정(蘿 </p>
<p>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 백마 한 마리가 </p>
<p>꿇어 앉아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살펴본즉 자줏빛 알 </p>
<p>한개가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 </p>
<p>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p>
<p>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을 추니 </p>
<p>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여졌다. 그로 인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p>
<p>고 이름하였다. 위호는 거슬감이라고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치하를 하 </p>
<p>였다. </p>
<p>&#8220;이제 천자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당연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p>
<p>할 것이요.&#8221; </p>
<p>이 날 사량리에 잇는 알영정 주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의 갈비에서 계집아이를 </p>
<p>낳았다. 얼굴와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의 북천에 가서 </p>
<p>목욕을 시키니 그 부리가 떨어졌으므로 그 내를 발천이라고 하였다. </p>
<p>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사람을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가 </p>
<p>알에서 나왓는데 그 알이 박과 같았다. 향인들은 박을 박(朴)이라 하는 연유로 그 성 </p>
<p>을 박(朴)이라 하였다. </p>
<p>계집아이는 그녀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이름지었다. 두 성인이 나 </p>
<p>이가 열세살이 되자 오봉원년 갑자에 사내아이는 왕이 되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p>
<p>나라의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고 혹은 사라 또는 사로라고 하였다. </p>
<p>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탄생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계림국이라고도 하였다. </p>
<p>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탈해왕 때 김알지를 </p>
<p>얻을 때 숲속에서 닭이 울었다고 하여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p>
<p>서 신라라고 국호를 정한 것이다. </p>
<p>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후에 몸뚱 </p>
<p>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서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 </p>
<p>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 </p>
<p>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작기 장사지내어 5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p>
<p>하였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즉위하여 왕위를 계승하였 </p>
<p>다. </p>
<p>번호: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4 21:47 길이:41줄 </p>
<p>제2대 남해왕 </p>
<p>남해거서간을 일명 차차웅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존장이란 칭호로 오직 이 왕만 </p>
<p>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요,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비는 운제부인 </p>
<p>이다. 전한 평제원시 4년 갑자(A.D.4년)에 왕위에 올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 4년 </p>
<p>갑신(A.D.2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왕이 삼황의 첫째라고 한다. </p>
<p>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일컬었는데, 이는 곧 진한의 말 </p>
<p>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을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혹 차차 </p>
<p>웅 또는 자충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김대문이 말하기를 차차웅이란 원래 무당을 </p>
<p>일컫는 방언으로 세상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p>
<p>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되므로 마침내 존장이 되는 이를 불러 자충이라고 하엿다고 했 </p>
<p>다. 이사금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을 이른 말이라고 한다. </p>
<p>처음 남해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노례가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하자 탈해가 말하 </p>
<p>기를 </p>
<p>&#8220;나는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들었다.&#8221; </p>
<p>하고서 서로 시험하기를 청하였다. 두 사람은 떡을 물어 시험을 하였다. 옛날부 </p>
<p>터 이와 같이 해서 왕을 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금을 일러 마립간이라고 했다. </p>
<p>이를 김대문이 해석하기를 마립간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으로 궐표는 위에 따라 설치 </p>
<p>하고 임금의 궐은 그 주가 되고 신하의 궐은 그 아래가 되니 그래서 이렇게 이름을 한 </p>
<p>것이라고 하였다. </p>
<p>사론에 이르길, 신라의 왕으로서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이가 한분이고, 이사 </p>
<p>금이라 부르는 이는 열 여섯분이고, 마립간이라고 부르는 이는 모두 네 분이다. </p>
<p>신라 말기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지을 때 모두를 모왕(某王)이 </p>
<p>라고만 부르고 거서간 등으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말 자체가 혹 야비해서 </p>
<p>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함인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사실(史實)을 기록함에 있어서 </p>
<p>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도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모든 사람 </p>
<p>을 갈문왕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자세하게 알수 없다. </p>
<p>남해왕 대에 낙랑국의 사람들이 금성을 침범하엿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 </p>
<p>갔다. 또한 천봉 5년 무인에 고구려의 속국인 일곱나라가 항복을 해 왔다. </p>
<p>제 3대 노례왕(또는 유례왕) </p>
<p>박노례임금이 처음에 매부인 탈해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탈해가 말했다. </p>
<p>&#8220;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어서 잇금을 가지고 시험을 하여 봅 </p>
<p>시다.&#8221; </p>
<p>이에 떡을 물어 시험을 하여 보니 왕이 이가 많았으므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 </p>
<p>로 인하여 왕을 이질금이라고 한 것이다. 잇금의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 </p>
<p>성공 경시 원년 계미(23년)에 왕위에 올라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여서 성(姓)을 하사 </p>
<p>하였다. 이때에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p>
<p>얼음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 18년(42년)에 이서국을 쳐서 멸하였는데 이 해에 </p>
<p>고구려 군사가 와서 침범하였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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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제4대 탈해왕 </p>
<p>탈해 임금(탈해이사금)은 남해왕 때에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p>
<p>이를 보고 수로왕이 신하와 백성들과 북을 치고 떠들면서 머무르게 하려고 했으나 </p>
<p>배는 급히 달아나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이때 갯가에 한 늙은 </p>
<p>할멈이 있었는데 이름은 아진의선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 </p>
<p>할멈이었다. 그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p>
<p>&#8220;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8221; </p>
<p>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그 배 안에 궤 하나가 있었 </p>
<p>다. 길이는 스무자나 되고 넓이는 열 세 자였다. </p>
<p>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하 일인지를 몰 </p>
<p>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이윽고 궤를 열어보니 잘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p>
<p>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이레동안 잘 대접하였더닌 그 사내아이는 </p>
<p>말하였다. </p>
<p>&#8220;나는 본시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엔 일찌기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다 사 </p>
<p>람의 태에서 났으며,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p>
<p>하였습니다. 팔품의 성골이 있는데 그들은 선택하는 일이 없고 고루 왕위에 올랐습니 </p>
<p>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 </p>
<p>들이 없으므로 기도를 하여 7년만에 커다란 알 한개를 낳았으니 고금에 없는 일이며 </p>
<p>이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서 나를 그 속에다 넣고 일곱 가지 </p>
<p>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에 바다에 띄워놓고 간구하기를, </p>
<p>&#8220;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는 축원을 하였습니다. </p>
<p>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8221; </p>
<p>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 </p>
<p>어 그 곳에서 아레 동안 머물면서 성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를 바라보니 마치 초승 </p>
<p>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이내 내려와서 </p>
<p>그 곳을 찾아가 보니 바로 호공의 집이었다. </p>
<p>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아침 그 집 문 </p>
<p>앞에 가서 말했다. </p>
<p>&#8220;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집입니다.&#8221; </p>
<p>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므로 관가에 고했다. </p>
<p>관가에서 동자에게 물었다. </p>
<p>&#8220;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8221; </p>
<p>&#8220;우리의 선조는 대장장이었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 </p>
<p>아서 살고 있으므로 땅을 파서 조사를 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p>
<p>그 동자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빼앗 </p>
<p>아 살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은 그 어린이, 즉 탈해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p>
<p>맏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니 이가 곧 아니부인이었다. </p>
<p>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p>
<p>하였다. 백의는 물을 떠서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자기가 먼저 마시고 탈해에게 올 </p>
<p>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이로 인 </p>
<p>하여 꾸짖자 백의가 맹세를 하였다. </p>
<p>&#8220;이제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8221; </p>
<p>하고 말하자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 </p>
<p>여 감히 속이지를 않았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 하나가 있어 이르 세상사람들이 요내 </p>
<p>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p>
<p>노례왕이 세상을 떠나자 광호제 중원 6년(57년) 6월에 탈해는 왕위에 올랐다. </p>
<p>옛날에 자기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빼앗은 이유로 하여 성을 석(昔)씨라고 하였다. </p>
<p>혹은 까치로 해서 상자를 열게 하였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새 조(鳥)를 떼 </p>
<p>고 석(昔)씨로 성을 삼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궤를 열어서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에 </p>
<p>이름을 탈해라고 했다고 한다. </p>
<p>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인 건초 4년(79년)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 속에 장사를 </p>
<p>지냈는데 그 후 신이 명령하기를, &#8216;내 뼈를 조심해서 묻어라&#8217; 했다고 한다. 두골의 </p>
<p>둘레는 3자 2치나 되고 몸의 뼈의 길이는 9자 7치나 되었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p>
<p>서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 사이는 모두 연이어져 있었다. 이는 바로 천하에 짝이 없 </p>
<p>는 역사의 골격이었다. 이것을 다시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를 </p>
<p>하자 또 신이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해 두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 곳에 모시 </p>
<p>게 하였다. </p>
<p>번호:1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6 11:22 길이:66줄 </p>
<p>김알지 탈해왕대(代) </p>
<p>영평 3년(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 </p>
<p>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 </p>
<p>무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 닭이 </p>
<p>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p>
<p>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웠다가 곧 일 </p>
<p>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p>
<p>우리 말로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 </p>
<p>이 서로 기뻐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p>
<p>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p>
<p>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p>
<p>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金)씨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p>
<p>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p>
<p>낳았는데,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p>
<p>연오랑과 세오녀 </p>
<p>제 8 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4년(158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p>
<p>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에 나가 해조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p>
<p>바위 하나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연오를 보고 &#8216;이는 범 </p>
<p>상치 않은 사람이다.&#8217; 하고 그들의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안음을 괴 </p>
<p>이하게 여기고 여기저기를 찾아보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그곳에 있는 </p>
<p>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다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p>
<p>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래어 왕께 아뢰니 부부가 다시 서로 만나게 되고 </p>
<p>이로써 세오는 귀비가 되었다. </p>
<p>이즈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p>
<p>&#8220;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 </p>
<p>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8221; </p>
<p>고 하였다. </p>
<p>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기를 </p>
<p>&#8220;내가 여기 온것도 하늘잉 시킨 일이거늘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소. 나의 비 </p>
<p>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8221; </p>
<p>하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 </p>
<p>니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 </p>
<p>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 </p>
<p>기야(都祈野)라고 하였다. </p>
<p>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p>
<p>제 13대 미추임금은 김알지의 7대손으로 대대로 현달하였고 성덕이 있었으므로 </p>
<p>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보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세상을 </p>
<p>하직하였는데 능은 홍륜사의 동쪽에 있었다. </p>
<p>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공격을 하여 왔다. 신라에서는 군병을 동 </p>
<p>원하여 막으려고 했으나 장기간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도 </p>
<p>와주었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 </p>
<p>하였다. </p>
<p>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다만 </p>
<p>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주었 </p>
<p>음을 알았는데,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이라고 하였다. 제 37대 혜공왕 때인 대력 </p>
<p>14년(779년)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 </p>
<p>람은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그리고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p>
<p>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p>
<p>가 들리듯하고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호소를 하는 말에, </p>
<p>&#8220;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 </p>
<p>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 </p>
<p>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p>
<p>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8221; </p>
<p>왕이 대답하기를 </p>
<p>&#8220;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p>
<p>아무 소리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8221; </p>
<p>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 </p>
<p>내 돌아갔다. </p>
<p>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를 </p>
<p>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p>
<p>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의 </p>
<p>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 </p>
<p>릉의 위에 두어 대묘라고 불렀다. </p>
<p>번호:1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8 00:16 길이:72줄 </p>
<p>내물왕과 김제상 </p>
<p>제 17대 내물왕 36년(390년)에 왜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p>
<p>&#8220;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 </p>
<p>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 </p>
<p>게 성심을 나타내기 바립니다.&#8221; </p>
<p>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p>
<p>열 살이었다. </p>
<p>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못하였으므로 내신인 박사람(朴娑覽)을 부사로 삼아 함 </p>
<p>께보냈다. 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를 아니하였다. </p>
<p>눌지왕 3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p>
<p>&#8220;우리 임금이 대왕의 아우 보해가 지혜와 재주의 뛰어남을 듣고 서로 가깝게 지내 </p>
<p>기를 원하여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8221; </p>
<p>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이로 인하여 화친을 하기로 하고 </p>
<p>그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보냈는데 이때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삼아 함께 </p>
<p>보냈다. 그러나 장수왕도 이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p>
<p>눌지왕 10년(426년)에 왕이 친히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 호협한 사람들을 </p>
<p>모아 잔치르 베 풀었는데, 술이 세 순배 돌게 되자 모든 음악이 시작되었다. </p>
<p>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p>
<p>&#8220;옛날 아버님께서는 성심으로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p>
<p>동쪽의 먼 곳으로 보냈다가 다시 못 보시고 돌아가셨고 내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이웃 </p>
<p>나라의 군사가 강하여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고, 고구려가 화친을 맺자고 말했으므로 </p>
<p>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아우를 억류해 놓 </p>
<p>고 보내지를 않고 있으니, 내 아무리 부귀를 누린다 하여도 일찍이 그 하루라도 이 일 </p>
<p>을 잊지 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만일 두 아우를 만나보고 선왕의 사당을 보게 </p>
<p>된다면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소. 누가 능히 이 계책을 이룰 수가 있겠소.&#8221; </p>
<p>이 말을 듣고 백관이 말하기를 </p>
<p>&#8220;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합 </p>
<p>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의 태수로 있는 제상이 가할까 합니다.&#8221; </p>
<p>하였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묻자 그는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p>
<p>&#8220;신이 듣자옵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 </p>
<p>하면 그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어려움과 쉬운 것을 헤아려서 행한다 </p>
<p>면 이는 충성되지가 못하다 할 것이며,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여 행한다면 이는 용맹 </p>
<p>이 없다고 할것이온즉 신이 비록 불초하나 명을 받들어 행하겠나이다.&#8221; </p>
<p>왕은 그를 매우 가상스럽게 생각하여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했다. </p>
<p>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을 받고 바로 북해로 길을 항하여 변복을 한 다음 고구려로 들 </p>
<p>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도망할 날짜를 약속한 다음 먼저 고성의 수구(水 </p>
<p>口)에 와서 배를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 지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 </p>
<p>칠동안 조회에 나가지를 아니 하였다. 그러다가 야음을 틈타 도망하여 고성의 바닷가 </p>
<p>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 일을 알고 수십명의 군사르 시켜 뒤쫓게 하였다. 고성에 </p>
<p>이르러 따라붙었으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좌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p>
<p>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 </p>
<p>아올수 있었다. </p>
<p>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미해의 생각이 나서 한편으로 기쁘기 그지없고, 한편으로 </p>
<p>는 슬펐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다. </p>
<p>&#8220;마치 몸에 한쪽 팔뚝만 있고 얼굴에 한쪽 눈만 있는 것 같아서 비록 하나는 얻 </p>
<p>었으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8221; </p>
<p>이 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두번 절을 한다음 바로 율포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p>
<p>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의 갯가에 이르렀으나 남편은 벌써 배에 올 </p>
<p>라 있었다. 그 아내가 제상을 간절히 부르자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배는 </p>
<p>멈추지 않았다. </p>
<p>그는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p>
<p>&#8220;계림왕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제 부형을 죽였으므로 도망을 하여 온 것입니다.&#8221; </p>
<p>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안히 거쳐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p>
<p>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았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잡아서 </p>
<p>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은 매우 기뻐하여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p>
<p>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p>
<p>&#8220;지금 빨리 떠나십시오.&#8221; </p>
<p>&#8220;그럼면 같이 갑시다.&#8221; </p>
<p>하고 말을 했으나 제상은 </p>
<p>&#8220;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선들이 뒤를 쫓을까 염려가 됩니다. 신은 이 곳에 </p>
<p>남아서 뒤를 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p>
<p>하고 말했다. </p>
<p>&#8220;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만 돌아가겠소.&#8221; </p>
<p>제상이 말하기를 </p>
<p>&#8220;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써 왕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 </p>
<p>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8221; </p>
<p>라고 말을 하고는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p>
<p>이 때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를 미해에게 딸려 호송을 하게 </p>
<p>하였다. </p>
<p>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 </p>
<p>를 모시는 사람들이 방에 들어와 보려 하였으나 제상이 와서 말하기를 </p>
<p>&#8220;미해공이 어제 사냥하는데 쫓아다니느라고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못하십니다.&#8221; </p>
<p>그러나 저녁 때가 되자 좌우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 때야 제상 </p>
<p>이 말을하였다. </p>
<p>&#8220;미해공은 떠난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8221; </p>
<p>좌우의 사람들이 왜왕에게 달려가 이를 고했다. 왕이 기병을 시켜 그 뒤를 쫓게 </p>
<p>하엿으나 결코 따라가지 못하였다. 왜왕이 제상을 가두어 두고 나서 말했다. </p>
<p>&#8220;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보내었느냐?&#8221; </p>
<p>제상이 대답하기를 </p>
<p>&#8220;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나는 단지 우리 임금의 소원을 </p>
<p>이루게 했던 것 뿐이오. 어찌 이 일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겠소.&#8221; </p>
<p>왜왕은 노했다. </p>
<p>&#8220;이미 너는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p>
<p>반드시 오형(五刑 &#8212; 피부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는 벌, 코를 베는 벌, 발 뒤꿈치를 </p>
<p>베는 벌, 불알을 없애는 벌, 목을 베어 죽이는 벌을 일컬음)을 갖추어 모두 쓸것이되, </p>
<p>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후한 녹을 줄 것이다.&#8221; </p>
<p>그러나 제상이 대답하기를 </p>
<p>&#8220;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p>
<p>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다.&#8221; </p>
<p>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지금 </p>
<p>갈대의 붉은 빛깔이 나는 것은 제상의 피라고 함) 그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p>
<p>&#8220;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8221; </p>
<p>&#8220;나는 계림의 신하다.&#8221; </p>
<p>왜왕은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제상을 세워 놓고 말했다. </p>
<p>&#8220;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8221; </p>
<p>&#8220;나는 계림의 신하다.&#8221; </p>
<p>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p>
<p>미해는 바다를 건너와서 먼저 강구려를 시켜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p>
<p>놀라고 기뻐서 백관들에게 명하여 굴헐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아우 보해와 더 </p>
<p>불어 남교에 가서 맞이하였다. 대궐로 맞아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을 내리어 죄 </p>
<p>수를 풀어 주었다. </p>
<p>제상이 아내를 국대부인으로 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 </p>
<p>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p>
<p>&#8220;옛날 漢나라 신하인 주가가 영양땅에 있다가 초나라 군사에게 잡힌 일이 있습니 </p>
<p>다. 이때 항우가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에 </p>
<p>봉해 주겠다 하니 주가는 꾸짖으며 굴복치 않고 초왕 항우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p>
<p>번 제상의 죽음은 그에 못지 않습니다.&#8221; </p>
<p>처음 제상이 떠날때에 제상의 부인이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문 </p>
<p>남쪽 모래위에 이르러 거기서 주저앉아 울부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여 장사 </p>
<p>(長沙)라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을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을 때 부인 </p>
<p>이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p>
<p>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 </p>
<p>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라 </p>
<p>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p>
<p>제 18 대 실성왕 </p>
<p>의회 9년 계축에 평양주의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왕은 전왕의 태자인 눌지가 매 </p>
<p>우 덕이 있으므로 이를 꺼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군사를 충하여 </p>
<p>눌지로 하여금 이들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사들은 눌지의 어짐과 그 행동 </p>
<p>을 보고 창 끝을 위로 하여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였다. </p>
<p>번호:1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8 00:18 길이:65줄 </p>
<p>사금갑(射琴匣) </p>
<p>제 21대 비처왕(소지왕) 10년(488년)에 천천정으로 거동을 하였다. 이 때 까마귀 </p>
<p>와 쥐가 와서 울고 쥐가 사람말로 말하기를 </p>
<p>&#8220;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8221; 했다. </p>
<p>왕이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도록 하였다. 기사가 남쪽의 피촌에 이르러 </p>
<p>서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어 이를 한참 살펴보고 있는 동안 까마귀가 간 곳을 </p>
<p>잊어버리고 말았다. </p>
<p>이 때 한 늙은이가 못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을 살펴본 즉 </p>
<p>&#8220;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가만 두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8221; </p>
<p>라고 쓰여 있었다. </p>
<p>기사가 돌아와 비처왕에게 이것을 바치니, 왕이 보고 말하기를 </p>
<p>&#8220;두 사람이 죽느니 보다는 차라리 떼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8221; </p>
<p>고 하였다. </p>
<p>일관이 말하기를 </p>
<p>&#8220;두 사람은 서민을 말함이오, 한 사람은 왕을 말합니다.&#8221; </p>
<p>라고 한 즉 왕은 그를 옳게 여겨 떼어보니 </p>
<p>&#8220;거문고 갑을 쏘라!&#8221; </p>
<p>고 적혀있었다. </p>
<p>왕이 곧 궁에 돌아가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를 하 </p>
<p>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하게 간통을 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p>
<p>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 </p>
<p>는 모든 일을 조심히 하고 감히 움직이는 것을 삼가하였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 </p>
<p>忌日)이라고 하여 찬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행하고 있다. </p>
<p>이언에는 이것을 달도라고 하니 이는 곧 슬퍼하고 조심을 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p>
<p>꺼려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노인이 나온 못을 서출지라고 한다. </p>
<p>지철로왕 </p>
<p>제 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하였다. 시호는 </p>
<p>지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 때부터 시작하였다. 우리말로 </p>
<p>왕을 마립간이라고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였다.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 </p>
<p>다. </p>
<p>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힘이 들었다. </p>
<p>그래서 사자를 三道에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는데 어느 날 사자가 모량부에 이르니 동 </p>
<p>로수(冬老樹) 아래에서 개 두마리가 크기가 북만한 똥 한덩어리를 좌우 양쪽에서 물고 </p>
<p>다투는지라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했다. </p>
<p>&#8220;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여기에 눈 것입니다.&#8221; </p>
<p>그 집을 사자가 찾아가보니 그 여자의 신장이 일곱자 다섯치나 되었다. 이 사실 </p>
<p>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황후로 삼았다. </p>
<p>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를 경하했다. </p>
<p>또 아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가 있었다. 이 섬 </p>
<p>은 둘레가 2만6천7백30보였다. 섬에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 </p>
<p>하여 조공을 하지 아니하였다.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 </p>
<p>게 하였다. 박이종(신라장군 이사부)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했다. </p>
<p>&#8220;너희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8221; </p>
<p>섬의 오랑캐는 두려워서 항복을 하였다. 이에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그 주 </p>
<p>의 장관인 주백으로 삼았다. </p>
<p>진흥왕 </p>
<p>제 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p>
<p>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 갈문왕의 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p>
<p>입고 운명했다. </p>
<p>승성 3년(553년) 9월에 백제의 조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p>
<p>필을 빼앗아 갔다. </p>
<p>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 </p>
<p>기를 </p>
<p>&#8220;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 </p>
<p>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8221; </p>
<p>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p>
<p>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p>
<p>번호:1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9 23:41 길이:55줄 </p>
<p>도화녀와 비형랑 </p>
<p>제 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의 딸인 지 </p>
<p>도부인이다. 대건 8년(576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주색에 빠져 </p>
<p>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p>
<p>이보다 앞서 사량부 어느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p>
<p>도화랑이라고 불렀다. </p>
<p>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와서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p>
<p>&#8220;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대 </p>
<p>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만승(萬乘)의 위엄으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 </p>
<p>입니다.&#8221; </p>
<p>왕이 말하기를 </p>
<p>&#8220;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8221; </p>
<p>여인이 대답하기를 </p>
<p>&#8220;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다른 마음을 가지는 것은 원치를 않습니다.&#8221; </p>
<p>왕이 희롱으로 말하기를 </p>
<p>&#8220;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8221; </p>
<p>&#8220;되겠습니다.&#8221; </p>
<p>하였다. </p>
<p>왕은 그를 놓아 보내주었다. </p>
<p>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는데 2년 후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p>
<p>협순이 지난 어느날 밤중에 홀연히 왕이 평시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하길 </p>
<p>&#8220;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남편이 업으니 되겠느냐?&#8221; </p>
<p>여인이 쉽게 하락치를 않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부모가 말하기를 </p>
<p>&#8220;임금의 말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8221; </p>
<p>하고 딸을 왕의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이 7일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 구름이 </p>
<p>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후에는 왕의 자취가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 </p>
<p>은 아내 태기가 있어 달이 차매 해산을 하려 할 때에 천지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한 </p>
<p>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이라고 하였다. </p>
<p>진평대왕은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다. 나이가 15세 </p>
<p>가 되자 왕은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p>
<p>비형은 밤마다 멀리 나가서 놀곤 하였는데,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 </p>
<p>으나 번번히 월성을 날아 넘어서 서쪽 황천 언덕 위에 가서 귓니을 데기고 놀았다. </p>
<p>용사들이 숲속에 메복하여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를 </p>
<p>듣고 각각 헤어지매 비형랑도 또한 돌아가는 것이었다. </p>
<p>용사들이 이 사실을 왕께 보고하였다. 왕이 비형에게 불러 묻기를 </p>
<p>&#8220;네가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의 북쪽 개천에 다리를놓아 보도록 하여라.&#8221; </p>
<p>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를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 </p>
<p>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신다리라고 한다. </p>
<p>왕이 또 묻기를 </p>
<p>&#8220;귀신들 주에서 인간으로 출현하여 조정을 도울자가 업느냐?&#8221; </p>
<p>&#8220;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국정을 도울 만 합니다.&#8221; </p>
<p>&#8220;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8221; </p>
<p>이튿날 비형이 길달을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는 과 </p>
<p>연 충직하기가 더할 나위 없었다. 이 때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 </p>
<p>여 그를 아들로 삼게 하엿다. </p>
<p>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홍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였더니, 길달은 밤마다 </p>
<p>그 문루에 가서 잤으므로 그문을 길달문이라고 하였다. </p>
<p>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가니 비형이 귀신의 무리를 시켜 그를 잡아 </p>
<p>죽였다. 그러므로 그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 </p>
<p>시의 사람들이 글을 지어 말하기를 </p>
<p>&#8220;성제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 뛰는 잡귀의 무리 </p>
<p>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아락.&#8221; </p>
<p>향속에 이 글을 붙여서 잡귀를 물리친다. </p>
<p>번호:1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0 16:53 길이:65줄 </p>
<p>천사옥대(天賜玉帶) </p>
<p>제 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으로 성은 김씨인데, 대건 11년(579년) 8 </p>
<p>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p>
<p>내제석궁에 행차를 할때에 석제(石梯)를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 </p>
<p>이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p>
<p>&#8220;이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의 사람들이 보도록 하 </p>
<p>라.&#8221; </p>
<p>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 중의 하나이다. 왕이 즉 </p>
<p>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말하기를 </p>
<p>&#8220;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8221; </p>
<p>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으니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교묘(郊廟)의 큰 제 </p>
<p>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허리에 매었다. 그 후에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 하면서 말하 </p>
<p>기를 </p>
<p>&#8220;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엇인가?&#8221; </p>
<p>좌우가 말하기를 </p>
<p>&#8220;황룡사의 장육존상이 그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처사옥대 </p>
<p>가 그 셋째입니다.&#8221; </p>
<p>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찬(讚)하여 말한다. </p>
<p>구름 밖의 하늘이 준 긴 옥대는 </p>
<p>임금의 곤의에 마춤하네 </p>
<p>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이 더욱 무거우니 </p>
<p>다음에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 </p>
<p>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p>
<p>제 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 </p>
<p>년(632년)에 왕위를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가지 있었다. </p>
<p>그 첫째가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되 </p>
<p>를 보내왔다.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p>
<p>&#8220;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8221; </p>
<p>하였다. 그리고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과연 꽃이 피었따가 떨어질 때까지 </p>
<p>왕의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p>
<p>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대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 </p>
<p>댄 일이 있었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여 왕께 고한 즉 왕은 급히 각 </p>
<p>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교로 나아가 여근곡을 수색하면 필 </p>
<p>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p>
<p>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으니 부산 </p>
<p>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의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p>
<p>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오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밑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p>
<p>포위하고 활로 쏘아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를 않았다. </p>
<p>그리고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p>
<p>&#8220;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 </p>
<p>라.&#8221; </p>
<p>여러 신하들이 그 곳의 위치를 몰라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p>
<p>&#8220;낭산 남쪽이다.&#8221; </p>
<p>하였다. </p>
<p>그 달의 그 날에 이르니 과연 죽었으므로 ᄉ니하가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 </p>
<p>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아래에 세웠다. 불경 </p>
<p>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p>
<p>수 있었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이 죽기 전에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 우는 소리를 </p>
<p>듣고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를 묻자, 왕이 대답하기를 </p>
<p>&#8220;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당나라의 </p>
<p>임금이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 </p>
<p>상이며 옥문이란 곧 여자의 음부를 말하는 것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 </p>
<p>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니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말함이다. 또한 남근이 여자의 생식 </p>
<p>기에 들어가면 죽게 되므로 잡기가 쉬운 것을 알 수 있었다.&#8221; </p>
<p>여러 신하가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감복을 하였다. 꽃을 삼색으로 보냄은 선 </p>
<p>덕,진덕,진성으로 당제(唐帝)도 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p>
<p>세운 일은 양지사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잇는데 별기에서 이르기를 이 왕 때에 돌을 다 </p>
<p>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p>
<p>번호:1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0 16:54 길이:40줄 </p>
<p>진덕여왕 </p>
<p>제 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친히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태옆가로 그 가사 </p>
<p>를 수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이것을 바치게 하였다. </p>
<p>비단을 짜 무늬를 놓아 보냈다고 함은 청병을 한 때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p>
<p>진덕여왕 때라야 옳겠다. 대개 이 때는 김흠순을 석방하여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이다. </p>
<p>태평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p>
<p>큰 당나라가 왕업을 세우니 </p>
<p>외외(巍巍)한 황제의 계획 융성하여라. </p>
<p>전쟁이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p>
<p>수문(修文)하여 백왕의 뒤를 이었네 </p>
<p>하늘을 거느리니 우시(雨施)하였고 </p>
<p>만물을 다스리니 함장(含章)을 하네 </p>
<p>깊은 인덕은 해와 달 같고 </p>
<p>돌아오는 운수는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p>
<p>깃발은 번쩍이고 징소리와 북소리 웅장도 하다. </p>
<p>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 거역한 자는 </p>
<p>칼 앞에 엎드려 천벌을 받으리라 </p>
<p>순후한 풍속이 유현(幽現)하니 </p>
<p>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로움을 바치네 </p>
<p>사시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화(和)하고 </p>
<p>7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을 돌아드네 </p>
<p>악강(嶽降)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p>
<p>황제는 충량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p>
<p>오제삼황이 덕 하나로 이룩되니 </p>
<p>우리 당나라 황도가 밝게 빛나리. </p>
<p>왕의 시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 </p>
<p>은 남사나에 있는 오지암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때 대호(大虎) 한 마리 </p>
<p>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는데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 </p>
<p>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매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 </p>
<p>이 이처럼 세어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모든 공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을 하였 </p>
<p>다. </p>
<p>신라에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그곳에 </p>
<p>모여서 의논을 하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 </p>
<p>산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이다. 셋째는 서쪽의 피천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 </p>
<p>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하였고, 또한 시랑 이라는 칭호도 처음 </p>
<p>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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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김유신 </p>
<p>호력 이간의 아들인 서현각간 김씨의 장자는 유신이며 그 아우는 흠순이다. 맏누 </p>
<p>이는 보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해이다. 그 아래 누이의 이름은 문희이며 어릴 때 </p>
<p>의 이름은 아지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년)에 태어났는데 7요의 정기를 받고 </p>
<p>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p>
<p>나이가 18세가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다. 이 때 백석이란 자가 </p>
<p>있었는데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여러해 동안 낭도의 무리에 속 </p>
<p>해 있었다. 낭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백석이 그 모 </p>
<p>의를 알고 공에게 말하기를 </p>
<p>&#8220;제가 공과 함께 저들의 나라에 들어가 정탐을 한 연후에 일을 도모함이 어떻겠 </p>
<p>습니까?&#8221; </p>
<p>하였다. </p>
<p>낭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p>
<p>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낭이 세 여자와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낭에게 </p>
<p>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을 서로 허락하고 즐겁게 담소하면 </p>
<p>서 자신을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p>
<p>여인이 말하기를 </p>
<p>&#8220;공이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아오나, 원컨대 공이 백석을 잠시 떼어놓고 수풀속 </p>
<p>으로 함께 들어가시면 그 때 실정을 다시 말하겠습니다.&#8221; </p>
<p>하였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으로 변하고 나서 말을 하 </p>
<p>였다. </p>
<p>&#8220;우리들은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p>
<p>유인하여 데리고 가는데도 낭은 그것을 모르고 따라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말리 </p>
<p>려고 여기애 온 것입니다.&#8221; </p>
<p>말을 마치고 나서 자취를 감추었다. </p>
<p>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을 하고 나와 골화관에 유숙하였을 </p>
<p>때 백석에게 말하기를 </p>
<p>&#8220;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아 함께 집에 돌아가서 </p>
<p>가지고 오자.&#8221; </p>
<p>하였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서 백석을 고문하여 그 실정을 물었다. </p>
<p>백석이 말하기를 </p>
<p>&#8220;나는 본시 고구려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p>
<p>원래 고구려의 점장이 추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의 경계에 있는 하천물이 </p>
<p>거꾸로 흘러서 왕이 그에게 이에 대한 점을 치게 하였습니다. &#8221; </p>
<p>추남이 말하기를 </p>
<p>&#8220;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운이 나타난 것 입니 </p>
<p>다.&#8221; 하였습니다. </p>
<p>대왕이 놀라고 괴이쩍게 여겼으며 왕비도 몹시 노하여 이것은 필시 요사한 여우 </p>
<p>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께 고하기를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맞지 않으면 중 </p>
<p>형에 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쥐 한 마리를 함에 감추어 두고, &#8216;이것이 무슨 물 </p>
<p>건이냐?&#8217;고 하였습니다. 추남이 말하기를 </p>
<p>&#8220;이것은 반드시 쥐인데 그 수가 여덟마리입니다.&#8221; </p>
<p>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그 말이 틀린다 하여 죄를 씌워 죽이려하니 추남이 말 </p>
<p>하기를 </p>
<p>&#8220;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켜 버리겠소.&#8221; </p>
<p>라고 하였습니다.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마리가 있어 그제야 </p>
<p>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의 서현공 부인의 </p>
<p>품에 들어간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다 </p>
<p>&#8220;추남이 맹세를 하고 죽더니 과연 그렇습니다.&#8221; </p>
<p>고 하였습니다. </p>
<p>&#8220;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어 여기에 와서 이런 계획을 꾸미게 하였던 </p>
<p>것입니다.&#8221; </p>
<p>라고 하였다. </p>
<p>공이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모두 다 현신 </p>
<p>하여 흠향하였다. </p>
<p>김씨댁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의 상곡에 제사를지내고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p>
<p>해마다 봄철에는 그 종중의 남자와 여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p>
<p>하였는데, 이때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골 </p>
<p>짜기 어귀에 암자를 짖고 송화방이라 하였는데 이후에 원찰로 삼았다. </p>
<p>제 54대 경명왕 때에 공을 추봉하여 흥호대왕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 모지사 북 </p>
<p>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p>
<p>번호:1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16:29 길이:59줄 </p>
<p>태종춘추공 </p>
<p>제 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 </p>
<p>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비는 문명황후 문희이니 </p>
<p>곧 유신공의 끝누이이다. </p>
<p>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서울에 </p>
<p>가득찼다. 다음날 그 꿈 얘기를 문희에게 했더니 문희가 듣고 나서 말하기를 </p>
<p>&#8220;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8221; </p>
<p>하였다. 언니가 말하기를 </p>
<p>&#8220;무엇을 주겟느냐?&#8221; </p>
<p>하자 문희가 </p>
<p>&#8220;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8221; 하니 언니가 </p>
<p>&#8220;그래&#8221; </p>
<p>하며 승낙을 하였다. </p>
<p>문희가 치마폭을 벌리고 꿈을 받을 때 언니가 말하기를 </p>
<p>&#8220;어젯밤의 꿈을 너에게 준다.&#8221; </p>
<p>하였다. 문희는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p>
<p>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찻다. </p>
<p>이 때 유신이 짐짓 춘추공의 옷을 밟아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청하여 말하기를 </p>
<p>&#8220;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답시다.&#8221; </p>
<p>고 하니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에게 봉침(奉針)을 하라고 하니 </p>
<p>아해는 </p>
<p>&#8220;어찌 사소한 일을 해서 가벼이 귀공자와 가깝게 한다는 말입니까.&#8221; </p>
<p>하고 사양하였다. 이에 아지에게 명하였다. 공이 유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p>
<p>문희와 관계하였는데, 이후 춘추공이 자주 왕래를하였다. 유신이 그 누이가 임신한 것 </p>
<p>을 알고 꾸짖기를 </p>
<p>&#8220;네가 부모도 모르게 임신을 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8221; </p>
<p>하고서는 온 나라에 말으 퍼뜨려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p>
<p>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거동을 한 틈을 타서 뜰에 나무를 가득 쌓아 놓고 불을 </p>
<p>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p>
<p>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연기가 나는 까닭을 묻자 좌우에서 시중하는 신하들이 아 </p>
<p>뢰기를 </p>
<p>&#8220;유신이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이는가 봅니다.&#8221; </p>
<p>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p>
<p>&#8220;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하엿기 때문입니다.&#8221; </p>
<p>왕은 </p>
<p>&#8220;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냐?&#8221; </p>
<p>고 물었다.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p>
<p>왕이 말했다. </p>
<p>&#8220;그것은 너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구하도록 하여라.&#8221; </p>
<p>춘추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구후 </p>
<p>떴떳이 혼례를 올렸다. </p>
<p>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 5년(654년)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 </p>
<p>스린 지 8년째인 용삭 원년(661년)에 세상을 떠나니 그 나이가 59세였고 애공사 동쪽 </p>
<p>에 장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 </p>
<p>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육력(戮力)으로 삼국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p>
<p>공을 이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직에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p>
<p>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저, 지경, 개원등은 모두 문희가 낳 </p>
<p>은 아들로 당시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p>
<p>서자는 개지문 급간과 차득 영공, 마득 아간 이라 하는데 딸까지 합하면 다섯 명 </p>
<p>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660년 백제를 멸 한 후에는 </p>
<p>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들 뿐이었다. 그래도 하루를 계한하여 보면 쌀이 여섯 </p>
<p>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p>
<p>성안의 물건 값은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6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 </p>
<p>라고 말을 하였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 고구려를 치려고 당나라에 청병을 하러 들 </p>
<p>어갔다. 이때 당의 황제는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을 하여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p>
<p>기어이 머물러 있게 하여 사위를 삼으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고 본국으로 도아왔다. 삼 </p>
<p>국사기에 의하면 진덕왕 2년의 일로서 이 때 당제는 출사를 약속하였다. </p>
<p>번호:2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16:31 길이:65줄 </p>
<p>이 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는 호왕의 원자로 영웅스럽고 용맹하고 담력이 있 </p>
<p>었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해동 증자라고 불렀 </p>
<p>다. 그는 정관 15년 신축에 왕위에 올랐는데 얼마되지 않아 주색에 빠져서 정사가 어 </p>
<p>지럽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p>
<p>이 때 좌평 성충이 극력으로 이를 간하엿으나 왕은 듣지를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p>
<p>옥 안에 가두었다. 감옥에서 몸이 여위어 죽게 되었을 때 성충은 마지막으로 글을 올려 </p>
<p>&#8220;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나하옵니다.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고 싶은 것 </p>
<p>은 신이 일찍이 세상 돌아감을 살펴보니 반드시 큰 변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릇 용 </p>
<p>병을 함에 있어서는 그 지세를 잘 살펴야 할 것인즉 상류에 머물러서 적을 맞이한다면 </p>
<p>능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온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 </p>
<p>지 못하게 하옵시고 수군은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궁거해서 </p>
<p>적을 막아야만 할 것입니다.&#8221; </p>
<p>라 충언하엿으나 왕은 끝내 이르 듣지 아니하였다. </p>
<p>현경 4년( 659년)에 백제의 오회사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간을 </p>
<p>돌아다녔고, 2월에는 많은 여우 무리가 의자궁에 들어왔는데 그 중 흰 여우 한 마리가 </p>
<p>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고, 5 </p>
<p>월에는 사비수 언덕위에 큰 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고 그 고기 </p>
<p>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 </p>
<p>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궁의 남쪽 길에서 울부짖었다. 660년 2월에는 서울에 있는 우물 </p>
<p>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 바닷가에 많은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은 모두 이것을 </p>
<p>먹을 수가 없었으며, 또 사비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p>
<p>나무위에 몰려 들었고, 또 서울의 백성들이 이유없이 놀라서 달아나니 이는 마치 누가 </p>
<p>잡으러 오는 것처럼 보엿으나 이 때 놀라 자빠져 죽는 자가 백여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p>
<p>잃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p>
<p>6월에는 왕흥사 중들의 눈에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p>
<p>광경을 보았고, 들에 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p>
<p>향하여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더니 얼마 후에 그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귀신 하나가 </p>
<p>궁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p>
<p>&#8220;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8221; </p>
<p>하고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p>
<p>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가 석 자 가량 내려가 거북이 </p>
<p>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등에 글이 써 있기를 </p>
<p>백제는 온달(圓月輪) 이고 신라는 초승달(薪月)같다.&#8221; </p>
<p>하므로 왕이 무당을 불러 물은즉 무당이 말하기를 </p>
<p>&#8220;온달이란 가득찬 달이니 곧 기울게 되고 초승달은 아직 가득 차지를 못했으니 </p>
<p>점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p>
<p>라고 하였다. </p>
<p>왕이 노해서 그 무당을 죽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p>
<p>&#8220;온달은 가득 찬 것이니 성(盛)한 것이고 초승달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미약 </p>
<p>한 것입니다. 살피건대 우리 나라는 점점 더 성하여지고 신라는 점점 더 미약해진다는 </p>
<p>뜻이 아니겟습니까?&#8221; </p>
<p>하자 왕은 기뻐하였다. </p>
<p>태종(무열왕)은 백제국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5년(660년)에 인문을 사 </p>
<p>자로 하여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p>
<p>당나라의 고종은 좌호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으로 삼아 좌위장 </p>
<p>군 유백영과 좌호위장군 방효공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했다. </p>
<p>또 신라와 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신라의 군사로서 합세하게 하였다. </p>
<p>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에 다다르니 </p>
<p>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5만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p>
<p>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아가 아 </p>
<p>뢰기를 </p>
<p>&#8220;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에 약하고, 신라의 군사는 큰 나라 </p>
<p>만 믿고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군이 이롭지 못함을 안다면 두려 </p>
<p>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일전을 하는 것이 </p>
<p>가할까 하옵니다.&#8221; </p>
<p>달솔 상영 등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p>
<p>&#8220;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을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속전을 하려고 할 것인즉 그 예 </p>
<p>봉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군사는 우리의 군사들에게 여러번 패한 바 </p>
<p>가 있으므로 우리의 병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 </p>
<p>책으로서는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일 </p>
<p>부의 군사로써 신라군을 쳐 예기를 꺾은 후에 편의를 보아 합전을 한다면 군사를 하나 </p>
<p>도 죽이지 않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8221; </p>
<p>하였다. </p>
<p>번호:2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16:32 길이:64줄 </p>
<p>왕은 망설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비지현에 </p>
<p>귀양을 가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p>
<p>&#8220;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8221; </p>
<p>하고 의견을 청하자, 대답하기를 </p>
<p>&#8220;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8221; </p>
<p>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p>
<p>&#8220;흥수는 누설(죄인을 결박하는 끈)중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 </p>
<p>음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가하다고 쓸수는 없습니다. 당군으로 하여금 </p>
<p>백강을 따라 내려오게 하되 방주(方舟)치 못하게 할 것이며, 신라의 군사로 하여금 탄 </p>
<p>현을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되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이런 </p>
<p>때에 군사를 놓아서 적군을 치게 되면 닭장에 든 닭이며 그물에 든 고기와 같을 것입 </p>
<p>니다.&#8221; </p>
<p>라 하니, 왕이 </p>
<p>&#8220;그렇도다.&#8221; 하였다. </p>
<p>그러는 사이에 신라군과 당나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이 </p>
<p>전해졌다. 이에 왕은 장군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사나에 가서 신라 </p>
<p>병사와 싸우게 하였다. 그는 4번 싸워서 4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부족하고 마침내 힘 </p>
<p>이 다하여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p>
<p>당군과 신라군이 합세해 진군하여 진구에 이르러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 </p>
<p>때 홀연히 새 한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돌아다니니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p>
<p>&#8220;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8221; </p>
<p>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면서도 싸움을 그만두려고 </p>
<p>하니 유신이 소정방에게 말하기를 </p>
<p>&#8220;어찌하여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하여 천시를 어긴다는 말이오. 하늘에 응 </p>
<p>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하여 좋지못한 일이 따르 </p>
<p>겠소.&#8221; </p>
<p>하고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긴 채 발 아래로 떨 </p>
<p>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백강의 왼쪽 언덕에 나와서 산을 등진 채 진을 치고 싸우니 백 </p>
<p>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조수를 타고 배와 배가 꼬리를 물고 서로 잇달 </p>
<p>아서 북을 치고 고함지르며 쳐들어 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데리고 바로 도성으 </p>
<p>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 때 성중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 </p>
<p>들을 막았으나 또 패하고 죽은 자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p>
<p>당나라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몰아서 성에 들이닥치니 왕이 죽음을 면하지 못 </p>
<p>함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p>
<p>&#8221; 내 어찌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8221; </p>
<p>하고 마침내 태자 융과 함께 북비로 달아났다. </p>
<p>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남아있던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p>
<p>데리고 이를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가 태에게 말하기를 </p>
<p>&#8220;왕이 태자와 같이 성을 나가 달아나셨는데 숙부께서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 </p>
<p>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우리는 그 때 무사할수 있겠습니까?&#8221; </p>
<p>하고서 좌우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뒤를 따랐으나 태는 이 </p>
<p>를 막을 수는 없었다. </p>
<p>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의 깃발을 세우니 태는 매우 급하게 </p>
<p>되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p>
<p>이에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이 여러 성과 함께 항복을 하였다. 소정 </p>
<p>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및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2천8백7인을 </p>
<p>당나라의 서울로 보냈다. </p>
<p>백제에는 원래 5부37군200성76만호가 있었는데 이 때에 당나라는 여기에 웅진,마 </p>
<p>한,동명,금련,덕안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로 삼아 </p>
<p>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 왕문도로 </p>
<p>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 </p>
<p>끌고 당나라 황제를 뵈니 황제는 그를 꾸짖기만하고 죄를 면하여 주었다. </p>
<p>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이 들어서 죽었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증(贈)하고 옛 </p>
<p>신하들이 가서 조상을 하는 것을 허락하고 손호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게 하 </p>
<p>고 비도 세워 주웠다. </p>
<p>용삭 2년(662년)에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을 삼았 </p>
<p>다가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고쳐 고구려군을 치게 하였다. 그는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p>
<p>깨트리고 마읍산을 탈취하여 진영을 삼고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려 </p>
<p>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을 양주안집대사로 삼아 토번을 평정하였다. </p>
<p>번호:2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21:42 길이:64줄 </p>
<p>건봉 2년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매우 애도해 하며 좌효기대장군 유주도 </p>
<p>독을 증직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다. 신라별기에 이르기르 문호왕 즉위 5년(665 </p>
<p>년) 가을 8월 경자에 왕은 친히 대병을 이끌고 웅진성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 융과 </p>
<p>만나서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서 맹세를 할 때에 먼저 천신과 산천의 영에게 제사 </p>
<p>를 지낸 연후에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p>
<p>&#8220;지난번에 백제의 신왕이 순응함과 반역함에 어두워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지 </p>
<p>않고 인친(姻親)과 화목치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을 하고 또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 </p>
<p>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성과 읍을 파괴하고 그 백성을 무찔러 </p>
<p>죽임으로써 항상 편안함이 없었다. 천자는 한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 </p>
<p>기고 백성이 해를 입는 것을 가련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 </p>
<p>일렀는데도 지세가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기화로 천경(天經)을 모반하였다. 이에 황 </p>
<p>제가 크게 노해 삼가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에 한번 싸워 백제를 평정하였다. </p>
<p>마땅히 궁택(宮宅)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 내예를 경계하고 폐해의 근원을 아주 뽑 </p>
<p>아 자손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귀순하여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배반한 자를 정벌함은 </p>
<p>선왕의 영전이며,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함은 전철의 통규이다. 일은 </p>
<p>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이 사책에 전해옴으로 이로써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으 </p>
<p>로 웅진도독을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자를 보전하게 하노니 이후 신라 </p>
<p>에 의지하여 길이 여국이 되어 각기 묵은 감정을 풀고 호의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 </p>
<p>이다. 삼가 조명을 받들어 영원토록 번복이 될 것이다. </p>
<p>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권유시켜 나의 뜻을 자세 </p>
<p>히 선포하는 것이다. 혼인을 약속하고 맹세를 거듭하여 희생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p>
<p>시작과 끝을 같이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할 것이며, 은의를 형제처럼 할 </p>
<p>것이다. 삼가 윤언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한 다음에는 함께 </p>
<p>변하지 말도록 힘쓸것이다. 만일에 이를 어기거나 배반을 하여 그 덕이 변하여 군사를 </p>
<p>일으켜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것을 살려 백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p>
<p>자손을 기르지를 못하여 제사도 끊어지게 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 </p>
<p>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만대 감히 어기지 말 것이며 신은 </p>
<p>이를 들으시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8221; </p>
<p>맹세가 끝난 다음 폐백을 단의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을 신라의 대묘에 간직하여 </p>
<p>두었다. 이 맹세한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 </p>
<p>또한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668년)에 신라에서 청병을 한 당군이 평양의 교 </p>
<p>외에 주둔을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 </p>
<p>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p>
<p>&#8220;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 </p>
<p>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 </p>
<p>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8221; </p>
<p>하였다. </p>
<p>김유신이 아뢰었다. </p>
<p>&#8220;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8221; </p>
<p>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p>
<p>2만곡을 수송하여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p>
<p>합세를 하고자 윳니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나라 </p>
<p>장수 소정방이 난새(鸞)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 주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사람을 </p>
<p>시켜 원효에게 청해 물으니, 해석하여 말하기를 </p>
<p>&#8220;군사를 속히 돌이키라는 말이다.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것은 두 반절(反切)을 </p>
<p>이른 것이다.&#8221; </p>
<p>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이켜 패수를 건너려 할 적에 군령으로 말하기를 </p>
<p>&#8220;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8221; </p>
<p>하였다. </p>
<p>군사들의 반이 강을 건너갈 적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p>
<p>죽였다.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p>
<p>백제 고기에 이르길 </p>
<p>&#8220;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그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서로 전하 </p>
<p>여 이르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을 할지 </p>
<p>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가 이끌고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p>
<p>속칭 타사암이라 한다.&#8221; </p>
<p>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 </p>
<p>나 &#8220;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8221; 함은 당사(唐史)에 명문으로 전한다. </p>
<p>또한 신라 고전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또 신라도 치려고 </p>
<p>머물러 있었다. 이 때 유신이 그 모의를 알고 당나라 병사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 </p>
<p>고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의 상주 지경에 당교가 있는데 이것이 </p>
<p>그들을 묻은 땅이라고 한다. </p>
<p>번호:2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21:43 길이:50줄 </p>
<p>당나라의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산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p>
<p>백제의 잔적을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에 주둔을 하니 고구려,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p>
<p>와서 포위를 하여 서로 싸웠으나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는데, 5월 11일부터 6월 22일에 </p>
<p>이르니 우리 군사가 우험하게 되엇다. </p>
<p>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하여 묻기를 </p>
<p>&#8220;무슨 좋은 계책이 없느냐?&#8221; </p>
<p>하면서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p>
<p>유신이 달려와서 아뢰기를 </p>
<p>&#8220;형세가 위급하니 인력으로는 불가하고 오직 신술러써만 구할 수 있습니다.&#8221; </p>
<p>하였다. 이에 성부산에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자 홀연히 큰 독만한 광채가 나 </p>
<p>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p>
<p>한산성 안에 있는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아니하므로 원망을 하여 서로 바라보 </p>
<p>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적병이 이를 급히 치려고 하자 홀연히 광채가 남쪽의 하늘 끝 </p>
<p>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서 포석 30여곳을 때려부수었다. </p>
<p>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땅에 엎어지더니 한참 후에 깨어나 </p>
<p>흩어져 돌아갔다. 아군도 돌아왔다. </p>
<p>태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머리는 하나에 몸은 둘이고 다리는 여덟 개나 되는 </p>
<p>도야지를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의논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p>
<p>&#8220;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할 좋은 징조입니다.&#8221; </p>
<p>하였다. </p>
<p>이 임금 때에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장법사가 당 </p>
<p>나라 황제에게 청하여서 가지고 온 것이다. </p>
<p>신문왕 때에 당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p>
<p>&#8220;나의 성고는 어진 신하 위징, 이순풍 등을 얻어 마음을 다하고 덕을 같이하여 </p>
<p>천하를 통일하였던 고로 태종활제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 </p>
<p>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람히 하고 있으니 그 뜻이 불충하 </p>
<p>므로 속히 고치도록 하라.&#8221; </p>
<p>하였다. </p>
<p>신라왕이 글을 올려 답하기를 </p>
<p>&#8220;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성신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태 </p>
<p>종이라고 한 것입니다.&#8221; </p>
<p>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기를 그가 저이(儲貳= 태자)로 있을 때에 하 </p>
<p>늘에서 이르기를 </p>
<p>&#8220;3십3천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 김유신이 되었다.&#8221; </p>
<p>고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한 일이 있는데 이때 이것을 꺼내보니 과연 그러한 </p>
<p>지라 두려웁고 놀라웁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태종이라는 칭호 </p>
<p>를 고치지 아니하여도 좋다고 하였다. </p>
<p>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p>
<p>처음에 백제의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에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에서 죽었는데 </p>
<p>후에 백제를 공격할 적에 태종 임금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p>
<p>&#8220;신 등은 전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지금 백골이 다 되었으나 나라를 수호 </p>
<p>하려고 싸움터에 나가 태만하지가 않았는데,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남의 뒤만 쫓겨다 </p>
<p>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저희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주십시오.&#8221; </p>
<p>하거늘,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령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에서 불 </p>
<p>경을 외고 또한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서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p>
<p>번호:2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2 17:48 길이:81줄 </p>
<p>문호왕 법민(文虎王 法敏) </p>
<p>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661년)에 사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 </p>
<p>데 키가 73척이나 되고 발 길이가 6척 음장(陰長)이 3척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키가 </p>
<p>18척이라고 하였다. 건봉 2년(667년)의 일이었다. </p>
<p>총장(668년)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흠순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서 당군 </p>
<p>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의 장수 이적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 당나라로 </p>
<p>데리고 갔다.-왕이 성이 고씨이므로 고장이라고 했다.- 당서 고종기를 보면 현경 5년 </p>
<p>(660년)에 소정방등이 백제를 정벌한 다음에, 12월에는 대장군 계여하를 패(강)도행군 </p>
<p>총관으로 하고 소정방을 요동도대총관으로, 유백영을 평양도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p>
<p>치게 하였다. 또 다음해인 신유정월에는 소사업을 부여도총관으로 삼고 임아상을 패강 </p>
<p>도총관으로 삼아 3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도록 하였다. 8월 갑술에 소정 </p>
<p>방 등이 패강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쳤는데, 건봉원년 병인 6월에는 방동선,?고임, </p>
<p>설인귀, 이근행으로써 후원을 하게 하였으며, 9월에는 방동선이 고구려와 싸웠으나 패 </p>
<p>하였다. </p>
<p>12월 기유에 이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여섯 총관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 </p>
<p>려를 치게 하였다. </p>
<p>총장 원년 무진(668년) 9월 계사에 이적이 고장왕을 사로잡았으며 12월 정사에 </p>
<p>황제에게 포고를 바쳤다. 상원 원년 갑술(674년)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p>
<p>신라를 치게 하였다. 신라 고기의 기록에서는 육로장군 공공과 수로장군 유상으로 하 </p>
<p>여금 신라의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여기(당서고 </p>
<p>종기)에서는 인문과 흠순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의 일은 빠뜨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p>
<p>이 때 당나라의 유병(遊兵)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를 </p>
<p>치려고 했으므로 이를알고 발병을 하여 쳤다. </p>
<p>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p>
<p>&#8220;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다가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 </p>
<p>유이냐?&#8221; </p>
<p>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 </p>
<p>게 하였다. &#8211;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조에 당 고종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에 </p>
<p>임명하여 신라를 경략케하였으며, 또한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사실이 보 </p>
<p>인다.- 이 때 의상법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 </p>
<p>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p>
<p>의상이 곧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 </p>
<p>을 모아놓고 그 대책을 강구할 때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p>
<p>&#8220;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하고 돌아왔으니 청하여 물어보 </p>
<p>십시오.&#8221; </p>
<p>하였다. </p>
<p>명랑법사가 말하기를, </p>
<p>&#8220;낭산의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 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가할까 </p>
<p>합니다.&#8221; </p>
<p>하자, 그 때 정주에서 사자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p>
<p>&#8220;당병이 무수히 우리의 국경에 다가와서 바다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8221; </p>
<p>하였다. 이에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p>
<p>&#8220;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겟소?&#8221; </p>
<p>명랑이 말하기를 </p>
<p>&#8220;채백(彩帛)으로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8221; </p>
<p>라고 하였다. </p>
<p>이에 채백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신상을 만들고 유가의 명승 12사람으로 하 </p>
<p>여금 명랑을 상수(上首)로 하여 문두루의 비밀법을 쓰게 했다. </p>
<p>이 때 당병과 신라의 병사가 접전도 벌이기 전에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p>
<p>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후에 절을 고쳐서 다시 짓고 사천왕사라 이름하였 </p>
<p>는데, 지금까지도 단석이 없어지지를 않았다. </p>
<p>그 후 신미 &#8211; 신미년은 문무왕 11년(671)에 해당되는데 아마 착오인 것 같다. 문 </p>
<p>무왕이 당에 의해 파직되고 김인문이 신라왕에 봉해진 것은 문무왕 14년(674)의 일이 </p>
<p>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참조)- 에 당나라에서는 다시 조헌을 장수로 하여 5만의 군사 </p>
<p>로 쳐들어왔는데 역시 같은 비법을 썼더니 그 전과 같이 배가 침몰하였다. 이때 한림 </p>
<p>랑 박문준이 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었는데 당의 고종이 문준을 불러 물었다. </p>
<p>&#8220;너희 나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대병이 다시 갔어도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느냐?&#8221; </p>
<p>문준이 말하기를, </p>
<p>&#8220;배신들은 상국에 온지가 10여년이 되었기로 본국의 일은 알지못합니다. 다만, </p>
<p>멀리서 한 가지의 사실만 들었을 뿐인데, 그것은 상국의 은혜를 많이 입어서 삼국을 </p>
<p>통일하였으므로, 그 덕을 갚고자 낭산의 남쪽에 천왕사를 새로 지어 황제의 만년수명 </p>
<p>을 축원하며 법석(法席)을 깊이 열었다는 것입니다.&#8221; </p>
<p>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괴를 사자로 신라에 파견을 하여 </p>
<p>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p>
<p>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온다는 말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라 하 </p>
<p>고, 그 남쪽에 따로 새로운 절을 지은 다음 사신을 기다렸는데, 사신이 이에 이르러 </p>
<p>말하기를, </p>
<p>&#8220;먼저 황제의 수를 축수코자 천왕사에 가서 분향을 하겠습니다.&#8221; </p>
<p>하거늘,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인도하자 사신이 그 절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p>
<p>&#8220;이것은 천왕사란 절이 아니고 망덕요산의 절이오.&#8221; </p>
<p>하며 끝내 들어가지를 않았다. 나라 사람이 그에게 황금 1천냥을 주자 사자가 돌 </p>
<p>아가 말하기를, </p>
<p>&#8220;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축수를 새 절에서 할 뿐이었습니다.&#8221; 하였다. </p>
<p>번호:2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2 17:50 길이:78줄 </p>
<p>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새 절을 망덕사라 하였다. &#8211; 혹은 효소왕때의 일이라 </p>
<p>고도 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8211; </p>
<p>왕은 문준이 당나라 황제에게 말을 잘 하여 그 죄를 용서하여 줄 뜻이 있음을 알 </p>
<p>고 강수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표문을 짓게 하여 이것을 사인(舍人) </p>
<p>원우에게 주니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는데,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p>
<p>인문을 위로하고 죄를 사하여 놓아 보냈다. 인문이 옥에 있을 때에 신라 사람들은 그 </p>
<p>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라고 하고 관음도량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p>
<p>위에서 죽었으므로 미타도량이라 고쳤다. 그 절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p>
<p>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째인 영융 2년 신사(681)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 </p>
<p>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p>
<p>왕은 평시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말하기를 </p>
<p>&#8220;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려하오.&#8221; </p>
<p>하거늘, 법사가 아뢰길, </p>
<p>&#8220;용은 짐승의 응보이니 어찌 용이 되겠습니까?&#8221; </p>
<p>하였다. 이에 왕은, </p>
<p>&#8220;나는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가 오래니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 </p>
<p>라는 바이오.&#8221; </p>
<p>왕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남산에 장창을 설치하였는데 길이가 50보였으며 넓이가 </p>
<p>15보로서, 이 곳에다 미곡과 병기를 저장하였다. 이것이 우창이며, 또 천은사 서북쪽 </p>
<p>산위에도 장창이 있으니, 이것은 좌창이라 한다. </p>
<p>별본에는 건복 8년 신해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천8십보라 하였다. 이 </p>
<p>것은 진덕(평)왕 때에 처음 쌓았다가 이 때에 와서 중수를 한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p>
<p>부산성을 쌓았는데 3년만에 마쳤으며 안북하변에 철성을 쌓았다. </p>
<p>또한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를 갖추라고 명을 하였는데, 이를 의 </p>
<p>상법사가 듣고 글을 보내어서 아뢰기를, </p>
<p>&#8220;왕의 정치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들은 넘 </p>
<p>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을 오래할 수 잇습니다. 정치가 진실로 밝지가 </p>
<p>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는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8221; </p>
<p>라고 하였다. 왕이 이 글을 보고 역사를 중지시켰다. &#8211; 문무왕 21년(681)의 일- </p>
<p>인덕 3년 병인(666) 3월 10일에 길이라고 하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p>
<p>총장 3년 경오(670)정월 7일에는 한기부 일산급간-혹은 성산아간이라 함.- 의 여종이 </p>
<p>한꺼번에 네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일녀 삼자였다. 나라에서는 곡식 2백석의 상을 주 </p>
<p>었다. 또 고구려를 쳐서 그 나라의 왕손을 데리고 와서 진골의 지위에 두게 하였다. </p>
<p>왕이 하루는 서동생 차득공을 불러 말하기를, </p>
<p>&#8220;그대가 재상이 되어서 백관을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하게 하라.&#8221; </p>
<p>고 하니, 차득공이 말하기를, </p>
<p>&#8220;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 하여금 재상을 삼으시려거든 신은 원하옵건대, 나라 안 </p>
<p>팎을 잠행하며 민간무역의 괴롭고 편안함과 조세의 경중과 관리의 청탁을 알아본 연후 </p>
<p>에 직위를 맡을까 합니다.&#8221; </p>
<p>하였으므로 왕은 그 말을 들어주었다. </p>
<p>차득공은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모양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 </p>
<p>-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추- 북원경-지금의 충주- 을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 </p>
<p>에 이르렀다. </p>
<p>이한(里閑 -동리,마을) 을 돌아다니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이 그를 비범한 인물임 </p>
<p>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p>
<p>그날 밤에 안길은 아내와 첩 세 사람을 불렀다. </p>
<p>&#8220;오늘밤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것이오.&#8221; </p>
<p>두 아내가 말했다. </p>
<p>&#8220;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어찌 동침을 할 수 있갰습니까?&#8221; </p>
<p>한 아내가 말했다. </p>
<p>&#8220;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8221; </p>
<p>또 한 아내는 그대로 시행을 하였다. </p>
<p>&#8220;나는 서울 사람으로 집은 황룡사와 황성사의 두 절 가운데 있고 이름을 단오 &#8211; </p>
<p>속언에 이르길 단오를 차의라 한다.- 라고 하니, 주인이 서울에 오게 되면 찾아주기 </p>
<p>바라오.&#8221; </p>
<p>차득공은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p>
<p>나라에서는 매년 각 주의 향리 한 사람을 서울 안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 </p>
<p>어 지키게 하는 상수리라는 제도가 있었다. </p>
<p>안길이 서울에 올라와 지킬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다. </p>
<p>단오거사의 집을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p>
<p>안길이 오랫동안 길가에 서 있으니 늙은이가 지나갔다. </p>
<p>그의 말을 한참 듣고 서서 말했다. </p>
<p>&#8220;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궐이고 단오란 차득공인데 외군(外郡)에 잠행을 하였 </p>
<p>을 때에 어떤 인연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지.&#8221; </p>
<p>안길이 사실대로 말하자 노인이 말했다. </p>
<p>&#8220;그대가 궁성의 서쪽 귀정문으로 가서 출입을 하는 궁녀를 기다려 사실을 말하시 </p>
<p>오.&#8221; </p>
<p>안길이 그 말을 쫓아 아뢰었다. </p>
<p>&#8220;무진주에 사는 안길이 상공을 뵈오러 왔습니다.&#8221; </p>
<p>차득공이 그말을 듣고 쫓아 나와 손을 붙잡고 궁으로 들어가 공의 부인을 함께 </p>
<p>불러내어 잔치를 열었다. </p>
<p>차린 음식이 50여 가지나 되었다. 이사실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성손호산-밑의 </p>
<p>땅을 무진주의 상수리의 소목전(燒木田-궁중과 여러관청에 공출하는 연료를 채취하는 </p>
<p>토지)으로 삼아 사람들의 벌채를 금하였다. </p>
<p>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하고, 경향 각지의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였다. 산 밑에 </p>
<p>밭 30묘가 있는데 종자를 석 섬이나 뿌렸다. 이 밭이 풍작이 되면 무진주 또한 풍작이 </p>
<p>되고, 무진주도 또한 흉작이 되었다. </p>
<p>번호:2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3 16:31 길이:61줄 </p>
<p>만파식적 </p>
<p>제 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이다. 개요 원년 신사(681)7월7 </p>
<p>일 왕위에 올랐다. </p>
<p>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 &#8211; 경북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 </p>
<p>에 사지가 있다.- 를 세웠는데 &#8211; 절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 </p>
<p>여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한 </p>
<p>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치고 금당 뜰 아래 동 </p>
<p>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p>
<p>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 이름은 감은사라고 </p>
<p>하였는데 후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p>
<p>이듬해인 임오 5월 초하루 &#8211; 다른 책에는 천수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에 </p>
<p>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p>
<p>&#8220;동해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바다에 떠서 감은사를 향하여 왔다갔다. 합니다.&#8221; </p>
<p>왕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p>
<p>일관이 말하기를, </p>
<p>&#8220;대왕의 아버지께서 지금 해룡이 되어서 삼한을 진호(鎭護)하시고 또한 김유신공 </p>
<p>도 삼십 삼천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동덕(同德 </p>
<p>)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게 되면 값 </p>
<p>으로 칠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8221; </p>
<p>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 </p>
<p>보게 하였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 형상이었다. 그 윗켠에 한간(一竿)의 대나무가 있 </p>
<p>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8211; 혹자는 말하기를 대 </p>
<p>나무와 같이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왕은 </p>
<p>감은사에 나아가 머물렀다. </p>
<p>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하여져서 하나가 되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p>
<p>일어나며 7일동안이나 계속 캄캄하였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는 </p>
<p>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 </p>
<p>어서 왕에게 바치었다. 자리를 같이하여 왕이 묻기를, </p>
<p>&#8220;이 산에 있는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무슨 까 </p>
<p>닭인가?&#8221; </p>
<p>용이 대답하기를, </p>
<p>&#8220;비유를 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p>
<p>이치와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것은 합해진 연후라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p>
<p>는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좋은 징조니다. 왕께서 이 대 </p>
<p>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p>
<p>바닷속의 용이 되셨고 유신공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으로 </p>
<p>칠수 없는 보물을 저에게 주어 저로 하여금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8221; </p>
<p>왕은 놀라웁고 기쁘기 그지 없었다. 5색 비단과 금,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보 </p>
<p>내어 그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p>
<p>아니하였다. </p>
<p>왕은 감은사에 유숙하고 17일에 지림사의 서쪽 시냇가에 다다라 어가를 멈추고 </p>
<p>점심을 드시었다. </p>
<p>태자 이공 -즉 효소대왕- 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p>
<p>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였다. </p>
<p>&#8220;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진짜 용입니다.&#8221; </p>
<p>&#8220;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8221; </p>
<p>하고 왕이 말하자, 태자가 아뢰기를 </p>
<p>&#8220;눈금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이겠습니다.&#8221; </p>
<p>하였다. </p>
<p>이리하여 왼편의 둘째 눈금을 떼어 물에 넣으니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p>
<p>그리고 그곳은 곧 못이 되니 이러한 이유로 하여 용연이라고 불렀다. </p>
<p>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의 천존고레 보관하여 두었다. 이 </p>
<p>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때는 맑아 </p>
<p>지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하였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불렀다. </p>
<p>그리고 국보로 삼았다. </p>
<p>효소대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기 </p>
<p>이한 연유로 하여 다시 봉하여 말하기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자 </p>
<p>세한 것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p>
<p>번호:2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4 11:01 길이:68줄 </p>
<p>효소왕대(代) 죽지랑 </p>
<p>제 32대 효소왕대에 죽만랑(죽지랑)이라는 무리 가운데에 득오(득곡)급간이 있 </p>
<p>었다. </p>
<p>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사진(仕進)하더니 순일(旬日)동안 보이지를 </p>
<p>아니하였다. 죽만랑이 어머니를 불러, </p>
<p>&#8220;그대의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8221; </p>
<p>고 묻자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p>
<p>&#8220;당진 모량부의 익선아간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직(倉直)으로 임명을 하였습니 </p>
<p>다. 빨리 가느라고 미쳐 인사를 못하였을 것입니다.&#8221; </p>
<p>라고 하였다. </p>
<p>낭이 말하기를.. </p>
<p>&#8220;그대의 아들이 사사로이 그 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도 없지만, 공사로 갔다니 </p>
<p>마땅히 찾아가서 대접을 해야겠소.&#8221; </p>
<p>이에 설병(舌餠)한그릇과 술 한병을 가지고 좌인-우리말에 개질지라고 하니 곧 </p>
<p>노복을 말함이다.-을 거느리고 가니 낭의 무리 백 삼십 칠인이 예의를 갖추고 따랐다. </p>
<p>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p>
<p>&#8220;득오실이 어디에 있느냐?&#8221; </p>
<p>고 물으니, 문지기가 대답하기를 </p>
<p>&#8220;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8221; </p>
<p>하였다. </p>
<p>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배불리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 </p>
<p>여 함께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익선은 허락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사리(使吏)간진 </p>
<p>이 추화군 능절의 조(租) 30석을 거두어 성중으로 수송하다가 낭이 선비를 중히 여기 </p>
<p>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변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 </p>
<p>석을 익선에게 주고 득오실을 보내주도록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을 하지 아니하므로 </p>
<p>또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주니 그 때야 비로소 허락을 하였다. </p>
<p>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하고 더러움을 </p>
<p>씻어주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대신 그의 장자를 잡아갔다. </p>
<p>때는 엄동의 몹시 차가운 날이었으므로 성내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이내 </p>
<p>얼어죽었다. </p>
<p>대왕이 이를 듣고 명하기를,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을 한 사람은 모두 쫓아보내어 </p>
<p>다시는 관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검은 못을 입게 하였으며 중이 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p>
<p>만약 중이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엿다. </p>
<p>칙사가 간진의 자손을 올려서 평정호손으로 삼고 특별히 표창하였다. </p>
<p>이 때 원측법사가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인 까닭으로 승직을 주지 않 </p>
<p>았다. </p>
<p>처음에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그의 임지로 부임하러 가 </p>
<p>려하는데, 이때에 삼한(三韓)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삼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 </p>
<p>였다. </p>
<p>행렬이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길을 잘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매우 </p>
<p>탄미하자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놀라운 것을 보고 존대하게 되어 서로가 마음으 </p>
<p>로 존경하게 되었다. </p>
<p>공이 고을의 임소에 부임한 지 한달이 되었다.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p>
<p>보았다. 부부가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다음날 사람을 보내 </p>
<p>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p>
<p>&#8220;거사가 죽은지 며칠이 되었습니다.&#8221; </p>
<p>라고 하였다. </p>
<p>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하니 그 날이 꿈꾸었던 날과 같은지라, 공이 말하 </p>
<p>기를, </p>
<p>&#8220;아마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 같소&#8221; </p>
<p>라고 하였다. </p>
<p>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불 한 </p>
<p>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게 하였다. </p>
<p>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았는데 이런 이유로 죽지라 </p>
<p>이름지었다. </p>
<p>이 죽지랑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니 유신공을 따라 부수(副帥)가 되어 삼국을 통 </p>
<p>일하였다. </p>
<p>진덕,태종,문무,신문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p>
<p>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니 다음과 같다. </p>
<p>지난 봄 그리워 하매 </p>
<p>모든 것이 시름하는데 </p>
<p>아담하신 얼굴 주름살이 지시려는도다 </p>
<p>눈을 돌릴 사이에나마 뵙도록 하리라. </p>
<p>낭이여, 그리워 하는 마음에 오고 가는 길 </p>
<p>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까 </p>
<p>번호:3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4 11:02 길이:67줄 </p>
<p>성덕왕 </p>
<p>제 33대 성덕왕 때인 신룡 2년 병오(706)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매우 굶주렸다. </p>
<p>그 이듬해인 정미 정월 초하루부터 7월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주었 </p>
<p>는데, 한 사람에게 1일분을 3되로 하여 일을 마치고 계산하여 보니 삼십만 오백석이나 </p>
<p>되었다. </p>
<p>왕은 태종대왕을 위하여 봉덕사를 세우고 7일동안 인왕도량(仁王道場-국가의 안 </p>
<p>위를 기원하는 법회)을 설치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시중(恃中)의 관직을 두 </p>
<p>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p>
<p>수로부인 </p>
<p>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을 할 때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p>
<p>그 곁에 있는 바위의 봉우리가 바다를 병풍처럼 들러쳐서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p>
<p>높이는 천장(千丈)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엿다. </p>
<p>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를 둘러보고 말을 하였다. </p>
<p>&#8220;어느 누가 저 꽃을 꺾어다 나에게 주겠는가?&#8221; </p>
<p>종자들이 대답하였다. </p>
<p>&#8220;저 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8221; </p>
<p>그리고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p>
<p>그 때 한 노옹이 암소를 몰고 그 곳을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가 </p>
<p>지고 와 노래를 지어 바쳤다. </p>
<p>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수 없었다. </p>
<p>또 이틀을 순행하며 임해정에 다달아 점심을 먹을때 바다의 용이 나타나 홀연히 </p>
<p>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p>
<p>공이 땅을 치며 주저앉았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p>
<p>말했다. </p>
<p>&#8220;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구삭금(衆口삭(쇠녹일 삭)金)이라 하였으니 바닷속의 짐승 </p>
<p>이 어찌 여러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계내(界內)의 사람을 모아 노래 </p>
<p>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8221; </p>
<p>하였다. </p>
<p>공이 그 말을 좇아 행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바치었다. 공이 바닷속 </p>
<p>의 일을 물으니 부인이 대답하였다. </p>
<p>&#8220;7보(寶)로 장식된 궁전에 음식은 달고 향기로운 것이 인간의 음식은 아니었습니 </p>
<p>다.&#8221; </p>
<p>부인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기었는데 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다. </p>
<p>수로부인은 그 용모가 세상에서 견줄이가 없었으므로 번번히 깊은 산이나 큰 못 </p>
<p>을 지날때에는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림을 당하곤 하였다. </p>
<p>여러 사람들이 해가(海歌)를 불렀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p>
<p>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 놓아라 </p>
<p>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p>
<p>만약에 거역하여 놓지 않는다면 </p>
<p>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으리. </p>
<p>노인의 헌화가는 다음과 같다. </p>
<p>붉고 짙은 바위 가에 </p>
<p>잡은 암소 놓게 하고 </p>
<p>나를 부끄럽다 아니하시면 </p>
<p>꽃을 꺽어 바치오리라. </p>
<p>효성왕 </p>
<p>개원 10년 임술(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을 세웠다. 지금의 모화촌으 </p>
<p>로 경주의 동남경에 속했다. 이것은 일본을 방어하는 변방의 요새였다.-성덕왕 21년의 </p>
<p>일로서 효성왕 때는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고기나 지리지에도 모화군에 축성한 사실이 </p>
<p>확인된다. 지금의 경북 월성군 외동면에 일부의 관문지가 남아있다.- </p>
<p>주위는 6792보 다섯자인데, 소요된 역원(役員)은 3,9262인이요, 감독하는 사람은 </p>
<p>우너진 각간이었다. </p>
<p>개원 21년 계유(733)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적(北狄)을 치려고 신라에 청병을 요 </p>
<p>청하매 사객(使客) 604인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성덕왕 32년의 일로서 효성왕 </p>
<p>때가 아니다. 이 때 당나라 현종은 등주에 입구한 말갈을 공격하도록 당시 숙위하고 </p>
<p>있었던 김사란을 파견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 참조)- </p>
<p>번호:3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5 00:52 길이:79줄 </p>
<p>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p>
<p>당에서 덕경(德經-노자의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p>
<p>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만에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혹 모습을 나타내어 대궐의 뜰 </p>
<p>에서 왕을 모시었다. </p>
<p>3월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p>
<p>&#8220;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을 한 사람 데리고 올 수 있겠소.&#8221; </p>
<p>이 때 마침 큰 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엇다. </p>
<p>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이 말을 하였다. </p>
<p>&#8220;내가 말하는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8221; </p>
<p>하고 물리쳤다. </p>
<p>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納衣)를 걸치고 앵통(櫻筒)을 혹은 삼태기를 걸머지고 </p>
<p>남쪽에서 왔다. </p>
<p>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p>
<p>앵통의 가운데를 바라보니 다구(茶具)만이 가득하여서 왕이 물었다. </p>
<p>&#8220;그대는 누구인가?&#8221; 스님이 대답하였다. </p>
<p>&#8220;충담이라 하옵니다.&#8221; 왕이 물었다. </p>
<p>&#8220;어디에서 왔소&#8221; 스님이 대답하였다. </p>
<p>&#8220;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 </p>
<p>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8221; </p>
<p>왕이 말을 하였다. </p>
<p>&#8220;나에게 차를 한사발 주시겠소?&#8221; </p>
<p>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p>
<p>왕이 말하였다. </p>
<p>&#8220;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思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p>
<p>하는데 과연 그러한가요?&#8221; </p>
<p>&#8220;그렇습니다.&#8221; </p>
<p>왕이 말하였다. </p>
<p>&#8220;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8221; </p>
<p>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p>
<p>왕이 그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거듭 절하고 굳이 사 </p>
<p>양하고 받지 않았다. </p>
<p>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p>
<p>임금은 아버지이고 </p>
<p>신하는 사랑을 하실 어머니요 </p>
<p>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 지면 </p>
<p>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p>
<p>꾸물거리며 사는 物生에게 </p>
<p>이를 먹여 다스린다. </p>
<p>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 </p>
<p>나라 안의 유지됨을 알리라 </p>
<p>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p>
<p>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p>
<p>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는 이렇다. </p>
<p>헤치고 나타난 달이 </p>
<p>흰구름을 따라 떠가는 것이 아닌가 </p>
<p>새파란 시내에 </p>
<p>기파랑의 모습이 잠겼구나 </p>
<p>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p>
<p>낭이 지니신 뜻을 따르려 하노라. </p>
<p>아, 잣나무 가지 드높다. </p>
<p>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p>
<p>왕은 옥경(玉經)의 길이가 여덟치나 되었다. </p>
<p>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인 만월부인의 시호는 경 </p>
<p>수태후이며 의충 각간의 딸이었다. 왕이 어느날 표훈대덕에게 말하기를 </p>
<p>&#8220;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 </p>
<p>게 하여 주오.&#8221; </p>
<p>하였다. 표훈은 하늘에 올라가 청하고 내려와서 왕께 말했다. </p>
<p>&#8220;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라면 가능하고 아들이라면 불가하다 하였습니다.&#8221; </p>
<p>왕이 다시 말하기를 </p>
<p>&#8220;원하건대 뜰을 바꾸어서 아들로 점지해 주기 바라오.&#8221; </p>
<p>표훈이 다시 상제께 청하니 상제께서 말하기를 </p>
<p>&#8220;될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8221; 라고 하였다. </p>
<p>표훈이 하계로 내려오려고 할때 상제가 불러 말하기를 </p>
<p>&#8220;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대사께서는 이웃 마을을 왕 </p>
<p>래하듯이 천기를 누설하고 다니니 금후엔 아예 다니지 말라.&#8221; 하였다. </p>
<p>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태자가 여덟살 때 왕이 세상 </p>
<p>을 떠나니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혜공대왕이다. 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p>
<p>임조(臨朝)하였는데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막아낼 수 없 </p>
<p>었다. 표훈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 </p>
<p>에 오르는 날까지 언제나 여자의 놀이를 즐기며 자랐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p>
<p>도류(道流-도사)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과 김 </p>
<p>양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16년조에 의하면, 이찬 김지정 </p>
<p>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이를 진압하고 또한 혜공왕은 난병에게 화를 당 </p>
<p>하였다고 한다.- </p>
<p>표훈은 이후에 신라의 성인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p>
<p>번호:3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1:32 길이:26줄 </p>
<p>혜공왕 </p>
<p>대력 초년에 강주 관서 대당의 동쪽 땅이 점점 꺼져 못을 이루니-어떤 책에는 </p>
<p>대사(大寺)의 동쪽 작은 못이라 하였다.- 세로는 13척이고 가로는 7척이었다. </p>
<p>문득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계속하여 커지더니 못도 따라서 커졌다. </p>
<p>2년 정미에 또한 천구성(天狗星)이 동루의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처럼 </p>
<p>생겼고 꼬리는 3자 가량이나 되었으며 그 빛은 활활 타는 불과 같았으며 천지가 또한 </p>
<p>진동하였다. 또 이해에 김포현의 5경 가량의 논 속에서 쌀이 모두 이삭을 이루어 매 </p>
<p>달렸으며, 이해 7월에는 북궁의 뜰 가운데 별 두개가 떨어지고 또 한 개가 떨어져, 세 </p>
<p>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p>
<p>이보다 먼저 대궐의 북쪽 측간 속에서 두 줄기의 연(蓮)이 나고 봉성사의 밭 가 </p>
<p>운데에서도 연이 났다. </p>
<p>호랑이가 성 안에 들어온 것을 잡으려다가 놓쳐버렸다. </p>
<p>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수없이 모였다. </p>
<p>안국병법 하권에 이르기를 이러한 변괴가 있으면 천하에 대병란이 일어난다 하였 </p>
<p>는데, 이에 왕은 죄수를 사면하고 자숙 반성하였다. </p>
<p>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적도(賊盜)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와 5도주군의 96각 </p>
<p>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혜공왕 4년(768)의 일이다.(삼국사기 신라 </p>
<p>본기 참조)- 대공 각간이 죽고 그 집안이 망하니 그의 재산과 보물 등을 왕궁으로 옮 </p>
<p>겼다. </p>
<p>신성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므로 사량, 모량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p>
<p>재물과 곡식들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p>
<p>난리는 석달만에 그쳤는데, 상 받은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p>
<p>표훈의 말대로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이 이것이었다. </p>
<p>　 </p>
<p>번호:3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1:34 길이:85줄 </p>
<p>원성대왕 </p>
<p>이찬 김주원이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차재가 되었는데 복두(귀 </p>
<p>인이 쓰는 모자)를 벗고 흰갓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p>
<p>꿈이 깨자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니, </p>
<p>&#8220;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쓰게 될 조짐이 </p>
<p>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8221; 했다. </p>
<p>왕은 이 말을 듣자 심히 근심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 아찬 여삼이 와서 뵙기 </p>
<p>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빙자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아찬이 청하므로 왕이 이를 허 </p>
<p>락하자, 아찬이 물었다. </p>
<p>&#8220;공이 근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8221; </p>
<p>왕이 꿈을 점쳤던 사실을 자세히 얘기하니 아찬은 일어나 절을 하며 말했다. </p>
<p>&#8220;그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약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 </p>
<p>을 위해 꿈을 풀어보겠습니다.&#8221; </p>
<p>이에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아찬에게 해몽하기를 청하자 아찬은 말했다. </p>
<p>&#8220;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있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갓을 쓴것은 면류관을 쓸 </p>
<p>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의 왕위를 이어 받을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 </p>
<p>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소로운 조짐입니다.&#8221; </p>
<p>&#8220;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상위에 있을 수 있겠소?&#8221; </p>
<p>왕이 말하자 아찬이 말했다. </p>
<p>&#8220;비밀히 북천 신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8221; </p>
<p>왕은 이에 따랐다. 그 얼마 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p>
<p>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냇 </p>
<p>물이 갑자기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니 </p>
<p>모든 대신들이 따랐으며, 새 임금께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p>
<p>왕의 이름은 경신이요 성은 김씨이니 대개 길몽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주원은 </p>
<p>명주에 물러가 살았다. 그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 </p>
<p>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다섯 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혜충태자, 헌평태 </p>
<p>자,예영잡간,대룡부인,소룡부인 등이다. </p>
<p>대왕은 진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 </p>
<p>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간직해서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 </p>
<p>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p>
<p>정원 2년 병인(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했으 </p>
<p>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렸다. 그리고는 사자에게 금 50냥 </p>
<p>을 보내어 피리를 주기를 청했다. 이에 왕은 사자에게 일렀다. </p>
<p>&#8220;내 듣건대 상대 진평왕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p>
<p>알지 못한다.&#8221; </p>
<p>이듬해 7월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천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여 말했다. </p>
<p>&#8220;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보내겠습니다.&#8221; </p>
<p>왕은 지난번과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은 3천냥을 그 사자에게 </p>
<p>주고, 가져온 금은 받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p>
<p>내황전에 보관했다. </p>
<p>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795)에 당나라의 사자가 서울에서 한 달 동안 머물다 </p>
<p>돌아갔다. 그 다음날 두 여자가 내정에 나와 아뢰었다. </p>
<p>&#8220;저희들은 동지,청지-청지는 곧 동천사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에 보면 이 샘은 </p>
<p>동해의 용이 왕래하며 불법을 듣던 곳이요. 이 절은 진평왕이 지은 것으로서 5백성중 </p>
<p>(聖衆)과 5층탑과 전민(田民)까지 헌납했다고 함.- 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 </p>
<p>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남편들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p>
<p>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속에 넣어 가지고 돌 </p>
<p>아갔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그 두사람에게 명하시어 나라를 지키는 용인 우리 두 남편 </p>
<p>을 여기서 머무르도록 해 주시옵소서.&#8221; </p>
<p>이에 왕은 하양관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희를 베풀고는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p>
<p>&#8220;어찌하여 너희들은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여기까지 잡아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p>
<p>고하지 않으면 필히 사형에 처할 것이다.&#8221; </p>
<p>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세 마리의 고기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물 </p>
<p>속에서 제각기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며 뛰놀다가 가버렸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 </p>
<p>철함에 감복했다. </p>
<p>왕이 하루는 황룡사의 중 지해를 대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외게 했다. </p>
<p>사미 묘정이 매양 금광정(金光井)가에서 바릿대를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 </p>
<p>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p>
<p>법석(法席)이 바야흐로 끝날 무렵에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p>
<p>&#8220;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나에게 무엇으로 갚으려느냐?&#8221; </p>
<p>그런지 며칠이 지나 자라는 입에서 구슬 한 개를 토해 내더니 묘정에게 주려고 </p>
<p>하는 듯했다. 묘정은 그 구슬을 받아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은 묘정 </p>
<p>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 내전에 맞아들여 자기 옆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p>
<p>이때 잡간 한사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또한 묘정을 사랑하여 함께 </p>
<p>가기를 청하매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가자 당나라의 황제도 역시 </p>
<p>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었으며, 승상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 </p>
<p>했다. 관상 보는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p>
<p>&#8220;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한 상이 아닌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이는 </p>
<p>필시 이상한 물건을 지닌게 틀림없습니다.&#8221; </p>
<p>황제가 사람을 시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었다. </p>
<p>황제는 말하기를, </p>
<p>&#8220;내게는 네게의 여의주가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한 개을 잃었었다. 이제 이 </p>
<p>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은 구슬이다.&#8221; </p>
<p>하며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갖게 된 여유를 묻자,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p>
<p>말했다. 황제가 생각해 보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았 </p>
<p>다. 이에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고 묘정을 돌려보냈다. 그 후부터는 묘정을 사랑하고 </p>
<p>신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p>
<p>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는데 최치원의 지은 비가 있다. 왕은 보은 </p>
<p>사와 망덕루르 세웠으며, 할아버지 훈입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이라 하고, 증조 의 </p>
<p>관잡간을 신영대왕이라 하였으며, 고조 법선 대아간을 현성대왕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p>
<p>아버지가 바로 마질차갑간이다. </p>
<p>번호:3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8:51 길이:54줄 </p>
<p>조설(早雪) </p>
<p>제 40대 애장왕 말년 무자(808)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p>
<p>제 41대 헌덕왕 때인 원화 13년 무술(818) 3월 14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p>
<p>제 46대 문성왕 기미(839) 5월 19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8월 1일에는 천지가 어 </p>
<p>두웠다. </p>
<p>흥덕왕와 앵무새 </p>
<p>제 42대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이가 </p>
<p>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암놈이 죽 </p>
<p>으므로 홀로 남게된 수놈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 </p>
<p>에 거울을 걸어 놓도록 했다.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p>
<p>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깨닫고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p>
<p>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 </p>
<p>신무대왕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p>
<p>제 45대 신무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 궁파에게 말했다. </p>
<p>&#8220;내겐 이 세상에 함께 살아나갈수 없는 원수가 있다.-흥덕왕이 죽자 그의 부인 </p>
<p>균정을 왕에 추대하려 했으나, 김명 등에 의해 제륭 희강왕이 즉위하였다. 이에 우징 </p>
<p>은 희강왕 2년(837)에 청해진에 피신하였다. 여기에서 원수는 김명 즉 민애왕이다.- </p>
<p>만일 네가 나를 위해 원수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올라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 </p>
<p>다.&#8221; </p>
<p>궁파는 이를 허락했으며,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 </p>
<p>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후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여 </p>
<p>러 신하들이 극력 간하였다. </p>
<p>&#8220;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옳지않습니다.&#8221; </p>
<p>왕은 그 말에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진을 지키고 있었다. 왕이 약속 </p>
<p>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했다. 이때 장군 염장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 </p>
<p>뢰었다. </p>
<p>&#8220;궁파가 장차 불충한 일을 도모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고 오겠습니 </p>
<p>다.&#8221; </p>
<p>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명령을 받들고 청해진으로 가서 인도 </p>
<p>자를 통해 말했다. </p>
<p>&#8220;나는 왕께 조그만 원망이 있소. 그래서 명공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 </p>
<p>려하오.&#8221; </p>
<p>이 말을 듣고 궁파는 크게 노했다. </p>
<p>&#8220;너희들이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폐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8221; </p>
<p>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p>
<p>&#8220;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오. 나는 그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나를 혐의 </p>
<p>치 마십시요.&#8221; </p>
<p>이 말을 듣자 궁파는 청사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p>
<p>&#8220;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8221; </p>
<p>&#8220;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었으므로 공의 막하에 의탁해서 해를 면할까 하는 것 </p>
<p>이오.&#8221; </p>
<p>&#8220;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8221; </p>
<p>하고 궁파는 말하더니 무척 기뻐하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p>
<p>뽑아 그를 베어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렸다. 이에 염 </p>
<p>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왕께 복명하여 말하기를 </p>
<p>&#8220;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8221; </p>
<p>왕은 기뻐하여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의 벼슬을 주었다. 신라 제 46대 문서와 </p>
<p>8년(849)의 일이다. </p>
<p>번호:3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8:55 길이:67줄 </p>
<p>제 48대 경문대왕 </p>
<p>왕의 이름은 응렴이다. 나이 18세에 국선이 되었으며, 약관에 이르자 헌안대왕이 </p>
<p>그를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물었다. </p>
<p>&#8220;낭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무슨 이상한 일이라도 본 건 없는 </p>
<p>가?&#8221; </p>
<p>&#8220;신은 행실이 아름다운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8221; </p>
<p>&#8220;그 말을 나에게 들려 주게.&#8221; </p>
<p>&#8220;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이가 그 하나 </p>
<p>요,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은 검소하게 하는 사람이 둘이요, 본래부터 귀하 </p>
<p>고 세력이 있는데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8221; </p>
<p>그말을 들은 왕은 그들의 어짐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p>
<p>&#8220;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의 건즐(巾櫛-수건과 빗, 이것을 든다는 것은 남의 </p>
<p>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함.)을 들게 하겟네.&#8221; </p>
<p>낭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낭이 사실을 부모 </p>
<p>에게 고하자 그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며 그 자제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p>
<p>&#8220;왕의 첫째 공주는 얼굴이 무척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아름답다고 하는데 둘째 </p>
<p>를 아내로 맞이했으면 좋겠다.&#8221; </p>
<p>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리인 범교사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와서 낭에게 물 </p>
<p>었다. </p>
<p>&#8220;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는데 사실입니까?&#8221; </p>
<p>&#8220;그렇습니다.&#8221; </p>
<p>&#8220;어느 공주에게 장가 들 생각입니까?&#8221; </p>
<p>&#8220;부모님께서는 둘째 공주가 좋겟다고 하십니다.&#8221; </p>
<p>그러자 범교사가 말했다. </p>
<p>&#8220;낭이 만약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 </p>
<p>고, 첫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필시 세 가지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경계해서 하 </p>
<p>도록 하십시오.&#8221; </p>
<p>&#8220;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8221; </p>
<p>얼마 후 왕이 날을 가려서 낭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p>
<p>&#8220;두 딸 중에서 공의 의사대로 결정하도록 하라.&#8221; </p>
<p>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했다. </p>
<p>&#8220;첫째 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8221; </p>
<p>그 후 3개월이 지나자 왕이 병이 들어 외독하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p>
<p>말했다. </p>
<p>&#8220;내게는 아들이 없으니 내 죽은 뒤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남편 응렴이 이를 계승 </p>
<p>해야 할 것이다.&#8221; </p>
<p>그 이튿날 왕이 세상을 떠나매 유언을 받들어 낭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 </p>
<p>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p>
<p>&#8220;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공주에게 </p>
<p>장가를 드셨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첫째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공주 </p>
<p>에게 이제 쉽사리 자아드실수 있게 된 것이 그 둘째요,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으므로 </p>
<p>왕과 부인께서 매우 기뻐하심이 그 셋째입니다.&#8221; </p>
<p>그 말을 고맙게 여긴 왕은 대덕이란 벼슬을 내리고 금 1백30냥을 하사했다. 왕이 </p>
<p>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경문이라고 했다. </p>
<p>일찍이 왕의 침전에는 날마다 저녁이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 </p>
<p>라고 두려워 이를 쫓아내려 하자 왕은 말했다. </p>
<p>&#8220;만일 뱀이 없으면 내가 편히 잘 수 없으니 쫓아내지 말라.&#8221; </p>
<p>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들이 혀를 날름대며 온 가슴을 덮고 있었다. </p>
<p>왕위에 오른 후 왕은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왕후며 궁인 </p>
<p>들도 모두 이를 알지 못했으나 오로지 복두장 한 사람만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 </p>
<p>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죽으려 할 때 도림사 대밭 속 아무도 없는 </p>
<p>곳으로 가서 대나무를 보고 외쳤다. </p>
<p>&#8220;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8221; </p>
<p>그러 다음부터는 바람이 불면 대나무 밭에서 소리가 났다.&#8221; </p>
<p>&#8220;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8221; </p>
<p>왕은 이 소리를 싫어해서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 나무를 심었다. </p>
<p>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p>
<p>&#8220;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8221; 하는 소리만 났다. </p>
<p>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금란(강원도 통천)을 유람할 때 은근히 </p>
<p>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를 짓고, 다시 심필 사지(舍 </p>
<p>知)를 시켜서 공책을 주어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노래 세수를 짓게 했다. </p>
<p>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요, 셋째는 문군곡(文 </p>
<p>群曲)이었다. 대궐에 들어가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며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 </p>
<p>는 알려지지 않았다. </p>
<p>번호:3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7 23:44 길이:54줄 </p>
<p>처용랑과 망해사(寺) </p>
<p>제 49대 헌강대왕 때는 서울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었으 </p>
<p>며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소리가 길거리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바람과 비 </p>
<p>는 철마다 순조로왓다. 때마침 대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려고 </p>
<p>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이 괴이하 </p>
<p>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었다. </p>
<p>&#8220;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 </p>
<p>다.&#8221; </p>
<p>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도록 했다. 왕 </p>
<p>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는 걷혔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을 개운포라 이름했다. </p>
<p>동해 용왕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p>
<p>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에서 일곱째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가 왕 </p>
<p>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를 그의 아내로 </p>
<p>삼게하여 그를 치하했으며, 또한 급간이란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무 </p>
<p>척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그녀를 흠모하여 밤이면 사람으로 변하여 그 집에 가서 몰 </p>
<p>래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다른 남자가 잠자리를 같이하 </p>
<p>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p>
<p>그 노래는 이렇다. </p>
<p>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p>
<p>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p>
<p>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인고, </p>
<p>분디 내해지만, 앗겼으니 어이하리. </p>
<p>이 때 역신은 본디의 모습을 나타내며 처용 앞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p>
<p>&#8220;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p>
<p>않으니, 감동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하노니, 이제부터는 공의 모습이 그려진 것 </p>
<p>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8221; </p>
<p>이 일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 </p>
<p>고 경사로운 일을 맞아들이는 습속이 생겼다. </p>
<p>서울로 돌아오자 왕은 이내 영취산 동쪽 기슭에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우 </p>
<p>고 망해사라 이름했다. 혹은 이 절을 신방사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p>
<p>것이다. </p>
<p>왕이 또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p>
<p>왕에게만 보일 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신)이 나타나 춤을 추므 </p>
<p>로 왕 자신도 이를 따라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나타내었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심상 </p>
<p>이라고 했으며,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 </p>
<p>산신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와서 춤을 추엇으므로 그 모습을 </p>
<p>살펴 공인에게 명하여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이라고 </p>
<p>했다고도 한다.혹은 상염무(霜髥舞-상염은 흰수염이다.)라고도 하니 그것은 그 형상에 </p>
<p>따라 일컬은 것이다. </p>
<p>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 </p>
<p>했으며, 또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 신의 이름 </p>
<p>을 지백급간이라 했다. </p>
<p>어법집(語法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그 때 산신이 춤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했는 </p>
<p>데, 도파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많은 사람들이 미리 사태를 짐작 </p>
<p>하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8217; </p>
<p>즉, 지신과 산신은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 </p>
<p>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 </p>
<p>과 여색을 즐김이 더욱 심했으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한다. </p>
<p>번호:3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8 00:51 길이:62줄 </p>
<p>진성여대왕과 거타지 </p>
<p>제 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 위홍 </p>
<p>잡간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니 도적이 벌떼처럼 </p>
<p>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주문)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p>
<p>길에 던졌다. 왕과 권신들이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p>
<p>&#8220;이 글은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8221; </p>
<p>이에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p>
<p>옥에 벼락을 쳐 거인을 풀어 주었다. 이 때 지은 왕거인의 시는 다음과 같다. </p>
<p>연단(燕丹-전국시대 연나라의 태자인 단)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 해를 </p>
<p>뚫고, </p>
<p>추연(鄒衍-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의 품은 슬픔 여름 서리 내리네. </p>
<p>이제 나의 불우가 그들과 같거니. </p>
<p>어찌하여 황천(皇天)은 아무 상서로움도 아니 내리는가. </p>
<p>또 다라니의 은어는 이러했다. </p>
<p>찰니나제란 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한 </p>
<p>것이다. 소판은 관작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은 3,4명의 총신을 말한 것이며 부이는 </p>
<p>부호를 말한 것이다. </p>
<p>이 때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의 </p>
<p>해적들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궁수 50명을 뽑아서 그를 따르게 했다. </p>
<p>배가 곡도에 이르자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은 이를 근심 </p>
<p>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p>
<p>&#8220;이 섬에 신지(神地)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8221; </p>
<p>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았더니 못물이 한 길도 넘게 치솟았다. 그날 밤 꿈 </p>
<p>속에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이르기를 </p>
<p>&#8220;활을 잘 쏘는 한 사람을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으리라.&#8221; </p>
<p>하니, 공이 잠에서 깨어 그 일을 좌우에 알리며 물었다. </p>
<p>&#8220;누구를 남겨두는 것이 좋겠소?&#8221; </p>
<p>이에 여러 사람이 말하였다. </p>
<p>&#8220;나무 조각 50개에 각자의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혀 제비를 뽑으시면 좋겠습니 </p>
<p>다.&#8221; </p>
<p>공은 그 말에 따랐다. </p>
<p>군사 거타지의 이름을 쓴 나무 조각이 물에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자 문득 </p>
<p>순풍으로 바다가 잔잔해져 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근심에 싸여 섬위에 서 </p>
<p>있는데 문득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p>
<p>&#8220;나는 서해약(서쪽 바다의 신)이오. 해가 뜰 때면 항상 하늘로부터 중 하나가 내 </p>
<p>려와 다라니의 주문을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 </p>
<p>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어 먹는다오. 그래서 이제는 오로지 딸 하 </p>
<p>나와 우리 부부만 나마게 되었소. 내일 아침도 필시 올테니 그대가 활로 중을 쏘아 주 </p>
<p>시오.&#8221; </p>
<p>&#8220;활 쏘는 일은 저의 장기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8221; </p>
<p>노인은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물 속으로 사라지고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 </p>
<p>튿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과연 중이 내려와 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p>
<p>빼어먹으려 했다. 이 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순간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p>
<p>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서 치사를 했다. </p>
<p>&#8220;공의 덕을 입어 내 성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공에게 아내로 드리겠소&#8221; </p>
<p>&#8220;저에게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참으로 원하던 바입니다.&#8221; </p>
<p>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용에 </p>
<p>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어 사신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케 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 </p>
<p>록 했다. 신라의 배가 두 마리의 용이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본 당나라 사람은 이 사실 </p>
<p>을 황제에게 아뢰니 이에 황제는 말했다. </p>
<p>&#8220;신라의 사람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8221; </p>
<p>그리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히 주었다. </p>
<p>본국으로 돌아온 거타지는 가슴에서 꽃 가지를 꺼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p>
<p>번호:3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8 23:40 길이:145줄 </p>
<p>효공왕 </p>
<p>제 52대 효공왕 시대인 광화 15년 임신-실은 주량의 건화 2년(912)-에 봉성사 바 </p>
<p>깥 문 동서쪽 21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p>
<p>또 신덕왕 즉위 4년 을해(915)에 영묘사 안 행랑에 까치집 34개가 있었고, 까마 </p>
<p>귀집도 40개나 되었다. </p>
<p>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이나 내렸고,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의 물결이 3 </p>
<p>일동안 서로 싸웠다. </p>
<p>경명왕 </p>
<p>제 54대 경명왕 때인 정명 5년 무인(918)에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울므로 3일 </p>
<p>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한나절이 지나서 그 개가 다시 울어 댔다. </p>
<p>7년 경진(920) 2월에는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뜰 안에 한달 동안 </p>
<p>이나 거꾸로 서 있었다. </p>
<p>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다 끊어졌으며, 벽화속의 개가 뜰로 달 </p>
<p>려 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 </p>
<p>경애왕 </p>
<p>제 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 갑신(924) 2월 19일에 황룡사에서 백좌(百座 </p>
<p>-설법의 하나)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겸하여 선승 3백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대왕 </p>
<p>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를 세운 선교의 시초였다. </p>
<p>김부대왕-경순왕 </p>
<p>제 56대 김부대왕의 시호는 경순이다. 천성 2년 정해(927) 9월에 후백제의 견훤 </p>
<p>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자,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p>
<p>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했는데, 구원벼이 </p>
<p>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은 그해 겨울인 11월에 신라의 서울을 쳐들어 갔다. 이 때 왕 </p>
<p>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처들어 </p>
<p>오는 것도 모르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p>
<p>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 </p>
<p>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붙잡혔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 </p>
<p>기를 애원했다. </p>
<p>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그리고 </p>
<p>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도록 했는데,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 </p>
<p>를 군중으로 끌어다가 왕은 강제로 자결토록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p>
<p>왕의 빈첩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인 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 </p>
<p>운 것이 되었다. 이가 경순왕으로서 그는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아치하 </p>
<p>고 여러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 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조상했다. </p>
<p>이듬해 무자(928) 봄 3월에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자 왕 </p>
<p>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좌해서 정의와 예의를 다하고 </p>
<p>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왕은 말했다. </p>
<p>&#8220;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은 불의한 </p>
<p>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우리 나라를 망쳐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p>
<p>이내 눈물을 흘리며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태조도 역시 </p>
<p>눈물을 흘렸다. 이 후 태조는 수십일을 머무르다 돌아갔는데, 부하군사들은 엄숙하고 </p>
<p>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의 사녀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했다. </p>
<p>&#8220;지난 번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이제 왕공이 오 </p>
<p>니 마치 부모를 만난 것 같다.&#8221; </p>
<p>고 하엿다. </p>
<p>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어 금삼과 안장 얹은 말을 주고, 또한 여러 관료와 장 </p>
<p>사들에게도 그 서차에 따라 물건을 주었다. </p>
<p>청태 2년 을해(935) 10월에 사방의 땅이 모두 남의 나라 땅이 되고, 국력은 약해 </p>
<p>지고 형세가 외로우므로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p>
<p>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여러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하여 시끄럽고 논의 </p>
<p>는 끝나지 않았다. 황태자가 말했다. </p>
<p>&#8220;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민 </p>
<p>심을 수습하여 힘을 다해본 후에야 그만 둘 일입니다. 어찌 1천년의 사직을 남에게 쉽 </p>
<p>사리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8221; </p>
<p>이에 왕이 말했다. </p>
<p>&#8220;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므로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길도 </p>
<p>없고, 더 이상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참혹한 </p>
<p>죽음)케 함은 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8221; </p>
<p>이에 시랑 김봉휴를 시켜서 국서를 태조에게 보내 항복하기를 청했다. 태자는 울 </p>
<p>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바위로 집을 삼고 삼베 옷을 입고, 풀 </p>
<p>뿌리를 캐어 먹으며 지내다 세사을마쳤다. 그의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들 </p>
<p>어가 부도(중혹은 불교)가 되었는데 승명은 범공이라 했으며 후에 법수사와 해인사에 </p>
<p>있었다 한다. </p>
<p>신라의 국서를 받은 태조는 태상 왕철을 보내어 맞도록 했다.왕은 여러신하들을 </p>
<p>거느리고 우리 태조께로 귀순했다. 향차보마(수레와 말)가 30여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 </p>
<p>으로 꽉 막혔으며, 구경꾼들은 담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이들을 </p>
<p>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대궐 동쪽의 한 구역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의 아내로 </p>
<p>주었다.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하여 난조(鸞鳥)에 비유하 </p>
<p>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라 고쳤다. 시호를 효목이라 했다. 왕을 정승으로 삼으니 </p>
<p>자리는 태자의 위이며, 녹봉 1천석을 주었다. 시종 관원,장수들도 채용해 주었고 신라 </p>
<p>를 고쳐 경주라 하였으며, 이 곳을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다. </p>
<p>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며 후한 예로 대접하 </p>
<p>여, 사람을 시켜 말했다. </p>
<p>&#8220;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그 은혜를 받음이 매우 큽니다. 원하건대 왕의 </p>
<p>종실과 혼인하여 구생의 좋은 의를 계속하고 싶습니다.&#8221; </p>
<p>왕이 대답했다. </p>
<p>&#8220;내 백부 억렴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 </p>
<p>니면 내정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8221; </p>
<p>태조가 그녀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 김씨다. </p>
<p>태조의 손자 경종,주는 정승공 김부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이가 헌승황 </p>
<p>후이다. 이에 정승공을 봉하여 상부를 삼았다. 그리고 태평 흥국 3년 무인(978)에 세 </p>
<p>상을 뜨니 시호를 경순이라 했다. 상부로 책봉하는 고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p>
<p>&#8216;조칙을 내리노니 희주(주나라)가 나라를 연 초년에는 먼저 여망(강태공)을 봉했 </p>
<p>고 유한(한나라)이 나라를 세운 때에는 먼저 소하를 봉했다. 이로부터 대정환구(천하 </p>
<p>를 평정함)하고 널리 기업을 열었다. 용도(龍圖-제왕출현의 징조)는 30대를 세워서 섭 </p>
<p>린(攝麟-국운) 4백년을 이으므로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p>
<p>비록 무위(無爲- 덕으로 나라를 다스림)의 군주로서 시작하였으나 역시 보좌하는 </p>
<p>신하로 말미암아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p>
<p>8천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벼슬은 왕작을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속세를 </p>
<p>초탈하였으며, 문장은 땅을 진동시킬 만한 재주가 있었다. 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으 </p>
<p>며, 貴는 모토(茅土-제후를 봉할때 주는 땅, 봉토)에 거했으며, 육도삼략은 가슴에 들 </p>
<p>어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전략이 탁월하고 군기가 철저함을 말함)을 손바닥 안에서 </p>
<p>움직였다. </p>
<p>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니, 선대의 여풍(餘風) </p>
<p>을 이내 깨달아 부마의 인의를 맺으니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했다. 나라는 이미 통일 </p>
<p>되고 군신이 완전히 삼한에서 합쳤으므로 좋은 영예는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은 빛 </p>
<p>났다. 상부도성령의 호를 더해주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주어 훈봉은 전기같 </p>
<p>이 하고, 식읍은 전후를 합하여 1만호로 하였다. 유산느 날을 가려서 예를 갖추어 책 </p>
<p>명하노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 8년(975) 10월 일.&#8217; </p>
<p>&#8216;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격선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을 들고 직첩이 </p>
<p>도착하면 즉시 봉행하라.&#8217; 개보 8년 10월의 일. </p>
<p>시중 서명(이름을 씀),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무서(이름을 쓰지않음) </p>
<p>병부령 무서,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 무서, 내봉시랑 </p>
<p>서명, 군부경 무서, 군부경 서명, 병부경 무서, 병부경 서명. </p>
<p>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상주국 낙랑도왕식읍 1만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p>
<p>이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부신이 도착하는대로 봉행하라. </p>
<p>주사 무명, 낭중 무명, 서령사 무명, 공목 무명 개보 8년 10월 일에 내림. </p>
<p>사론(史論)에느 이렇게 말했다. </p>
<p>&#8216;신라의 박씨,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 상자 속에 들어서 하늘에 </p>
<p>서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도 하는데,이는 더욱 </p>
<p>황당하여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단 </p>
<p>지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위에 있는 자는 자신의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 </p>
<p>는 너그러웠다. 관직을 설치하는 것도 간략했으며 행사는 간소했다. 성심껏 중국을 섬 </p>
<p>겨 사신이 제항(육로와 수로)으로 서로 잇달아 끊어지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을 중국 </p>
<p>에 보내어 숙위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들여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 </p>
<p>도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p>
<p>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그 땅을 취하여 </p>
<p>군현을 삼았으니 성세라 이를만 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여 그 폐단을 깨닫지 못하 </p>
<p>고 마을마다 탑과 절이 즐비해져, 백성들은 치갈(승려를 말함)이 되니 군대와 농민이 </p>
<p>점점 줄어들었다. </p>
<p>그리하여 나날이 나라가 쇠퇴하여 가니 어찌 어지러워좋 않겠으며 망하지 않겠 </p>
<p>는가? 이런 때에 더욱이 경애왕은 함부로 음란한 짓을 하고 놀기에 급급하여 궁녀며 </p>
<p>좌우 근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이 오는 것도 알 </p>
<p>지 못햇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나 누각위의 장려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 </p>
<p>조께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하여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 있다. 만약 </p>
<p>힘껏 싸우다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 반항하였다면 힘은 꺾이고 기세도 다하여 필 </p>
<p>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무죄한 백성들에게까지 화가 미쳤을 것이다. </p>
<p>그런데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를 봉하고, 군현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하였 </p>
<p>으므로 조정에 대하여는 공로가 있고,백성에 대해서는 덕이 있음이 매우 컸던 것이다. </p>
<p>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송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은 그를 충신이라 하였는데 </p>
<p>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으며 그 자 </p>
<p>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p>
<p>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니겠는가&#8221; </p>
<p>신라는 이미 국토를 바치므로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 신회는 외직을 그만두고 돌 </p>
<p>아왔다. 이에 도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노래를 지었 </p>
<p>는데,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수 없다. </p>
<p>번호:4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9 00:07 길이:94줄 </p>
<p>남부여와 전(前)백제와 북부여 </p>
<p>부여군은 전백제의 도읍인데, 혹은 소부리군이라고도 한다. </p>
<p>삼국사기에 보면, </p>
<p>&#8216;백제의 성왕 26년-16년이 맞다- 무오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국호를 남부 </p>
<p>여라 했다.&#8217; </p>
<p>하고 주에 이렇게 말했다. </p>
<p>&#8216;그 지명은 소부리이다.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다. 소부리는 부여의 다른 이름 </p>
<p>이다.&#8217; </p>
<p>또 양전장적(토지대장)에 보면, </p>
<p>&#8216;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다.&#8217; </p>
<p>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백제왕 </p>
<p>이 성이 부여씨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p>
<p>혹 여주라고도 부르는 것은, 군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 고좌에 수놓은 장막이 있 </p>
<p>는데 그 수놓은 무늬에 쓰이기를, </p>
<p>&#8216;통화 15년 정유(997) 5월에 일 여주 공덕대사의 수장이다.&#8217; </p>
<p>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옛적에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그 때 도적(圖籍)중 </p>
<p>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 </p>
<p>라고도 한다. </p>
<p>백제 지리지에는 후한서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p>
<p>&#8216;삼한이 대개 78개 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8217; </p>
<p>북사(北史-북조 네나라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백제는 동쪽으로 신라가 끝이며 서남쪽에는 큰 바다가 끝이고, 북쪽은 한강을 </p>
<p>경계로 했다. 도읍은 거부성 또는 고마성이라고 하며 이밖에 오방성이 있다.&#8217; </p>
<p>통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경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p>
<p>바다에 닿았다.&#8217; </p>
<p>구당서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p>
<p>&#8216;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중국의 </p>
<p>강소성등)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 </p>
<p>이 거처하는 곳으로 동서의 두 성이 있다.&#8217; </p>
<p>신당서에는 이렇게 말했다. </p>
<p>&#8216;백제는 서쪽으로 월주와 경계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왜구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p>
<p>야 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8217; </p>
<p>삼국사기 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요, 그의 아버지는 추 </p>
<p>모왕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난리를 피하여 북부여에서 졸본부여에 이르렀 </p>
<p>다.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오직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 </p>
<p>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p>
<p>그 얼마 후 부여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두 </p>
<p>었는데 맏아들이 비류이며, 둘째 아들은 온조다. 그들은 후에 태자(주몽의 태자 유리) </p>
<p>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등 10여명의 신하들과 더불어 </p>
<p>남쪽으로 가니, 많은 백성들도 이들을 따랐다. 드디어 한산에 닿아 부아악에 올라가 </p>
<p>살 만한 곳으 찾아 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했다. 이에 10명의 신하들이 </p>
<p>반대하여 간했다. </p>
<p>&#8220;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했으며, 남 </p>
<p>쪽으로는 비옥한 못을 바라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놓여 있으므로 천험과 지리를 </p>
<p>쉽게 얻을 수 있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 </p>
<p>겠습니까?&#8221; </p>
<p>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p>
<p>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했다. </p>
<p>때는 한 나라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p>
<p>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그 곳은 도읍이 안정되고 </p>
<p>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었다. 이에 마침내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하여 죽으므로, 그의 </p>
<p>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왔다. 그 후 백성들이 올때에 기뻐했다고 하여 나라 </p>
<p>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p>
<p>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를 해(解)라고 했 </p>
<p>다. 그 뒤 성왕 때에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고 위 </p>
<p>례는 지금의 직산이다.(하지만 이 직산설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p>
<p>고전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B.C.18) </p>
<p>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겨 왕이라고 일컬었다. 14년 병진(B.C.5)에 </p>
<p>도읍을 한산-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낸 후 13世 근초고왕 때인 함안 </p>
<p>원년(371)에 고구려의 남평양(지금의 서울)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지금의 양주)으로 </p>
<p>옮기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이 즉위하던 원휘 3년 을묘(475)에는 도읍을 웅천 </p>
<p>(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63년이지난 후, 26세 성왕 때에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 </p>
<p>호를 남부여라 했다.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p>
<p>당나라 현경 5년(660)은 의자와 재위 20년이다. 이 때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p>
<p>백제를 쳐서 평정했다. 백제에는 우너래 다섯 부가 있어서 37군,200성,76만호로 나뉘 </p>
<p>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두고, 그 </p>
<p>추장들을 도독부의 자사로 삼았으나, 얼마 후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쳤다. 그런 다 </p>
<p>음 웅주,전주,무주 등에 세 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p>
<p>또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다. 이는 조정에서 재상의 후보들을 천거하 </p>
<p>여 장차 뽑힐 사람 3,4명의 이름을 적어 상자에 넣어 봉하여 바위 위에 올려 두었다가 </p>
<p>얼마 후 그 상자를 열어 이름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으므로 정사암이 </p>
<p>라 했다. </p>
<p>또 사비하 가에는 한 개의 바위가 있다. 일찍이 소정방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p>
<p>물고기와 용을 낚아 내었으므로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 앉았던 자리가 있다. 그래서 </p>
<p>그 바위를 용암이라 한다. </p>
<p>또 고을 안에는 세 개의 산이 있는데 각각 일산,오산,부산이라 한다. 백제가 번 </p>
<p>성하던 때에는 신들이 그 산에 살면서, 조석으로 날아서 서로 왕래함이 끊임없었다. </p>
<p>사비수 언덕에는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명이 앉을 만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p>
<p>가서 부처께 예를 드리려 할 때에는 먼저 그 돌위에서 부처를 향해 절을 하니 그 돌이 </p>
<p>저절로 따뜻해졌다하여 그 돌을 돌석(지금의 自溫臺)이라고 한다. </p>
<p>또 사비하를 양쪽 언덕은 흡사 그림 병풍 같았으므로 백제왕이 늘 그 곳에서 잔 </p>
<p>치를 열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까닭에 이 곳을 지금도 대왕포라고 한다. </p>
<p>또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몸이 건강하고, 효도와 우애가 있었 </p>
<p>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다. 또 다루왕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 </p>
<p>었다. 또 사비왕-혹은 사이왕- 은 구수왕이 세상을 떠 난 후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 </p>
<p>이가 어린 탓에 정사를 보살필 수 없었으므로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혹은 말 </p>
<p>하기를 낙초 2년 기미에 사비왕이 세상을 떠나니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p>
<p>번호:4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0 03:11 길이:47줄 </p>
<p>무왕 </p>
<p>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살 </p>
<p>았는데 그 못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게 되었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라 불렀 </p>
<p>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다 팔아 생계 </p>
<p>를 꾸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p>
<p>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p>
<p>먹이며 친하게 지냈다. 아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니 동요을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 </p>
<p>였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다. </p>
<p>선화공주님은 </p>
<p>남몰래 어러두고 </p>
<p>서동방을 </p>
<p>몰래 밤에 안고 간다. </p>
<p>동요가 서울에 널리 퍼져 대궐에까지 들리게 되므로 백관들이 임금에게 간곡히 </p>
<p>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도록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하자 왕후는 순금 한 말 </p>
<p>을 주어 노자에 쓰도록 했다. 공주가 얼마 후 귀양터에 다다르게 될 즈음 서동이 나타 </p>
<p>나 공주에게 절하며 모시기를 청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 </p>
<p>딘지 모르게 믿음직하겝 보였으므로 이를 허락했다. 서동은 공주를 따라가게 되었으며 </p>
<p>동요가 불리워진 연유를 알게 되었다. 서동과 함께 백제로 와 모후가 준 금을 꺼내놓 </p>
<p>고 살아갈 계획을 세우려 하는데, 서동이 껄껄 웃으며 물었다. </p>
<p>&#8220;이게 무엇이요?&#8221; </p>
<p>공주가 말했다. </p>
<p>&#8220;이것은 황금이니 평생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8221; </p>
<p>&#8220;내가 어렸을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두었소.&#8221; </p>
<p>이에 공주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p>
<p>&#8220;그것은 천하 제일의 보배이니 그대가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그것을 우리 </p>
<p>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게 어떻겠습니까?&#8221; </p>
<p>&#8220;좋소&#8221; </p>
<p>이에 금을 산더니처럼 쌓아놓고는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이것을 실 </p>
<p>어보낼 방법을 묻자 법사가 말했다. </p>
<p>&#8220;내가 신통한 도의 힘으로 보낼 터니 이리 가져오시오.&#8221; </p>
<p>이리하여 공주가 쓴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옮겨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p>
<p>힘으로 그 금을 하룻밤 동안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p>
<p>이상히 여겨 그를 더욱 존경했으며,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이로부터 서동 </p>
<p>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무왕) </p>
<p>어늘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닿으니 미륵 </p>
<p>삼존이 못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p>
<p>&#8220;이곳에 큰 절을 세우십시요. 진실로 저의 소원입니다.&#8221; </p>
<p>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했다. 이에 법사는 </p>
<p>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게 미륵삼존 </p>
<p>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p>
<p>했다.-國史에는 왕흥사라 햇다.- 진평왕이 여러 工人들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돕도록 했 </p>
<p>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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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국사기48-50권 2002/08/31  39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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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0:22:57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역사 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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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48卷-00-00-00 三國史記卷第四十八.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吏禮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奉宣撰. #48卷-列傳8-00-00 列傳第八. ․․․․․․․․孝女․氏․. #48卷-列傳8-向德-01 ○, 人也. 父名, 字,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亦以孝順, 爲時所稱. 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癰, 皆濱於死. 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癰,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宅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 人號其地云孝家(+里). #48卷-列傳8-聖覺-01 ○, 人. 史失其氏族....]]></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48卷-00-00-00<br />
三國史記卷第四十八.<br />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吏禮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金富軾>奉宣撰.<br />
#48卷-列傳8-00-00<br />
列傳第八.<br />
<向德>․<聖覺>․<實兮>․<勿稽子>․<百結先生>․<劒君>․<金生>․<率居>․孝女<知恩>․<薛>氏․<都彌>.<br />
#48卷-列傳8-向德-01<br />
○<向德>, <熊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癰,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癰,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宅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 人號其地云孝家(+里).<br />
#48卷-列傳8-聖覺-01<br />
○<聖覺>, <菁州>人. 史失其氏族. 不樂世間名官, 自號爲居士, 依止<一利縣><法定寺>. 後歸家養母, 以老病難於蔬食, 割股肉以食之. 及死, 至誠爲佛事資薦. 大臣角干<敬信>․伊湌<周元>等, 聞之國王以<熊川州><向德>故事, 賞近縣柤{租}三百石.</p>
<p>#48卷-列傳8-聖覺-02<br />
○論曰: <宋祁>『唐書』云: “善乎, <韓愈>之論也! 曰: ‘父母疾, 烹藥餌, 以是爲孝, 未聞毁支體者也. 苟不傷義, 則聖賢先衆而爲之. 是不幸因而且死, 則毁傷滅絶之罪, 有歸矣, 安可旌其門, 以表異之?’ 雖然, 委巷之陋, 非有學術禮義之資, 能忘身以及其親, 出於誠心, 亦足稱者, 故列焉.” 則若<向德>者, 亦可書者乎!<br />
#48卷-列傳8-實兮-01<br />
○<實兮>, 大舍<純德>之子也. 性剛直, 不可屈以非義. <眞平王>&#038;時{五十三年}, 爲上舍人. 時下舍人<珍堤>, 其爲人便倿{佞}, 爲王所嬖. 雖與<實兮>同寮, 臨事互相是非, <實兮>守正不苟且. <珍堤>嫉恨, 屢讒於王曰: “<實兮>無智慧, 多膽氣, 急於喜怒, 雖大王之言, 非其意則憤不能已. 若不懲艾, 其將爲亂, 盍黜退之? 待其屈服, 而後用之, 非晩也.” 王然之, 謫官<泠林>. 或謂<實兮>曰: “君自祖考, 以忠誠公材, 聞於時. 今爲倿{佞}臣之讒毁, 遠宦於<竹嶺>之外荒僻之地, 不亦痛乎? 何不直言自辨?” <實兮>答曰: “昔, <屈原>孤直, 爲<楚>擯黜, <李斯>盡忠, 爲<秦>極刑. 故知侫臣或{惑}主, 忠士被斥, 古亦然也, 何足悲乎?” 遂不言而往, 作長歌見意.</p>
<p>#48卷-列傳8-勿稽子-01<br />
○<勿稽子>, <奈解>尼師今時人也. 家世平微, 爲人倜儻, 少有壯志.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六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或謂<勿稽子>曰: “子之功莫大, 而不見錄, 怨乎?” 曰: “何怨之有?” 或曰: “盍聞之於王?” <勿稽子>曰: “矜功求名, 志士所不爲也. 但當勵志, 以待後時而已.”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乃語其婦曰: “嘗聞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難則志{忘}身, 前日<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 聞於人, 將何面目以出市朝乎?” 遂被髮携琴, 入<師彘山>, 不反{返}.<br />
#48卷-列傳8-百結先生-01<br />
○<百結先生>, 不知何許人. 居<狼山>下, 家極貧, 衣百結若懸鶉, 時人號爲東里<百結先生>. 嘗慕<榮啓期>之爲人, 以琴自隨, 凡喜怒悲歡不平之事, 皆以琴宣之. 歲將暮, 隣里舂粟, 其妻聞杵聲曰: “人皆有粟舂之, 我獨無焉, 何以卒歲?” 先生仰天嘆曰: “夫死生有命, 富貴在天. 其來也不可拒, 其往也不可追. 汝何傷乎? 吾爲汝, 作杵聲以慰之.” 乃鼓琴作杵聲, 世傳之, 名爲碓樂.</p>
<p>#48卷-列傳8-劒君-01<br />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梁宮>舍人. <建福>四十四{九}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 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不動心焉.” 時<大日>伊湌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復相見.”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br />
#48卷-列傳8-金生-01<br />
○<金生>, 父母微, 不知其世系. 生於<景雲>二年, 自幼能書, 平生不攻他藝,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隸書行草皆入神, 至今, 往往有眞蹟, 學者傳寶之.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汴京>. 時翰林待詔<楊球>․<李革>, 奉帝勅至館, 書圖簇. <洪灌>以<金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不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金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p>
<p>又有<姚克一>者, 仕至侍中兼侍書學士, 筆力遒勁, 得<歐陽>率更法. 雖不及<生>, 亦奇品也.<br />
#48卷-列傳8-率居-01<br />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畵, 嘗於<皇龍寺>壁畵老松, 體幹鱗皴,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蹭蹬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鳥雀不復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晋州><斷俗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br />
#48卷-列傳8-知恩-01<br />
○孝女<知恩>, <韓歧部>百姓<連權>女子也. 性至孝, 少喪父, 獨養其母. 年三十二, 猶不從人, 定省不離左右, 而無以爲養, 或傭作或行乞, 得食以飼之. 日久不勝困憊, 就富家請賣身爲婢, 得米十餘石. 窮日行役於其家, 暮則作食歸養之. 如是三四日, 其母謂女子曰: “向, 食麤而甘, 今則食雖好, 味不如昔, 而肝心若以刀刃刺之者, 是何意耶?” 女子以實告之. 母曰: “以我故使爾爲婢, 不如死之速也.” 乃放聲大哭, 女子亦哭, 哀感行路. 時<孝宗>郞出遊, 見之, 歸請父母, 輸家粟百石及衣物予之, 又償買主以從良. 郞徒幾千人, 各出粟一石爲贈. 大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復除征役. 以粟多恐有剽竊者, 命所司差兵番守. 標榜其里曰<孝養坊>, 仍奉表, 歸美於<唐>室. <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王謂雖當幼齒, 便見老成, 卽以其兄<憲康王>之女, 妻之.</p>
<p>#48卷-列傳8-薛氏-01<br />
○<薛>氏女, <栗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脩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眞平王>時, 其父年老, 番當防秋於<正谷>. 女以父衰病, 不忍遠別, 又恨女身不得待{代}行, 徒自愁悶. <沙梁部>少年<嘉實>, 雖貧且窶, 而其養志貞男子也, 嘗悅美<薛>氏, 而不敢言. 聞<薛>氏憂父老而從軍, 遂請<薛>氏曰: “　{僕}雖一懦夫, 而嘗以志氣自許, 願以不肖之身, 代嚴君之役.” <薛>氏甚喜, 入告於父. 父引見曰: “聞公欲代老人之行, 不勝喜懼, 思所以報之, 若公不以愚陋見棄, 願薦幼女子, 以奉箕箒.” <嘉實>再拜曰: “非敢望也, 是所願焉.” 於是, <嘉實>退而請期. <薛>氏曰: “婚姻, 人之大倫, 不可以倉猝. 妾旣以心許, 有死無易, 願君赴防. 交代而歸, 然後卜日成禮, 未晩也.” 乃取鏡分半, 各執一片云: “此所以爲信, 後日當合之.” <嘉實>有一馬, 謂<薛>氏曰: “此, 天下良馬, 後必有用. 今我徒行, 無人爲養, 請留之, 以爲用耳.” 遂辭而行.</p>
<p>#48卷-列傳8-薛氏-02<br />
○會, 國有故, 不使人交代, 淹六年未還. 父謂女曰: “始以三年爲期, 今旣踰矣. 可歸于他族矣.” <薛>氏曰: “向以安親, 故强與<嘉實>約. <嘉實>信之, 故從軍累年, 飢寒辛若{苦}. 況迫賊境, 手不釋兵, 如近虎口, 恒恐見咥, 而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父之命, 請無復言.” 其父老且耄, 以其女壯而無伉儷, 欲强嫁之, 潛約婚於里人, 旣定日引其人. <薛>氏固拒, 密圖遁去而未果. 至廐, 見<嘉實>所留馬, 大{太}息流淚. 於是<嘉實>代來, 形骸枯槁, 衣裳藍縷, 室人不知, 謂爲別人. <嘉實>直前, 以破鏡投之, <薛>氏得之呼泣, 父反{及}室人失喜. 遂約異日相會, 與之偕老.<br />
#48卷-列傳8-都彌-01<br />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不動心者, 鮮矣乎!” 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p>
<p>#48卷-列傳8-都彌-02<br />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人{入}室! 吾更衣乃進.” 退而雜餙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矐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 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 未死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䔉山>之下. <麗>人哀之, 丐以衣食. 遂苟活, 終於 羈旅.</p>
<p>三國史記卷第四十八.</p>
<p>#49卷-00-00-00<br />
三國史記卷第四十九.<br />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吏禮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金富軾>奉宣撰.<br />
#49卷-列傳9-00-00<br />
列傳第九.<br />
<倉助利>․<蓋蘇文>.<br />
#49卷-列傳9-倉助利-01<br />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 爲國相. 時<慕容廆>爲邊患. 王謂群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埸,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廆>不復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荐至, 年穀不登, 黎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br />
#49卷-列傳9-倉助利-02<br />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慍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不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 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p>
<p>冀無後{復}言.” <助利>知王之不悛, 退與群臣謀廢之. 王知不免, 自縊.<br />
#49卷-列傳9-蓋蘇文-01<br />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氷{水}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不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 嗣位而凶殘不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br />
#49卷-列傳9-蓋蘇文-02<br />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迸,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唐><穆宗{太宗}>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 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p>
<p><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並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 取浮屠寺館之. 會<新羅>入<唐>, 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 復與<高句麗>連兵, 謀絶入朝之路. 小國不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br />
#49卷-列傳9-蓋蘇文-03<br />
○於是, <太宗>命司農丞<相聖玄獎{相里玄獎}>賚璽書, 勅王曰: “<新羅>委眞{質}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戢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初<玄獎>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獎>宣勅,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釁,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獎>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遼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句麗>豈得必求故地?” <蘇文>不從. <玄獎>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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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국사기45-47권 2002/08/31  39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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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9 Dec 2012 10:15:44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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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45卷-00-00-00 三國史記卷第四十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吏禮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奉宣撰. #45卷-列傳5-00-00 列傳第五. ․․․․․․․․․. #45卷-列傳5-乙巴素-01 ○, 人也. 時, 沛者․評者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 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 王徵之, 委以國政. #45卷-列傳5-乙巴素-02 ○言於王曰: “微臣庸愚, 固不足以參大政. 西者, 大臣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45卷-00-00-00<br />
三國史記卷第四十五.<br />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吏禮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金富軾>奉宣撰.<br />
#45卷-列傳5-00-00<br />
列傳第五.<br />
<乙巴素>․<金后稷>․<祿眞>․<密友>․<紐由>․<明臨荅夫>․<昔于者{昔于老}>․<朴堤上>․<貴山>․<溫達>.<br />
#45卷-列傳5-乙巴素-01<br />
○<乙巴素>,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畀留{於卑留}>․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 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br />
#45卷-列傳5-乙巴素-02<br />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不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琉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禮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p>
<p>#45卷-列傳5-乙巴素-03<br />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 不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巴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巴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 上待我以厚意, 其可復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 庶績之凝, 子之功也.” 迺拜爲大使者. 至<山上王>七年秋八月, <巴素>卒, 國人哭之慟.<br />
#45卷-列傳5-金后稷-01<br />
○<金后稷>, <智證王>之曾孫. 事<眞平大王>, 爲伊湌, 轉兵部令. 大王頗好田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左右正士, 容受直諫, 孶孶矻矻, 不敢逸豫, 然後, 德政醇美, 國家可保. 今, 殿下日與狂夫獵士, 放鷹犬, 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老子>曰: ‘馳騁田獵, 令人心狂.’ 『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王不從, 又切諫, 不見聽.<br />
#45卷-列傳5-金后稷-02<br />
○後, 后稷疾病, 將死, 謂其三子曰: “吾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恐大王遊娛不已, 以至於亡敗, 是吾所憂也. 雖死, 必思有以悟君, 須瘞吾骨於大王遊畋之路側.” 子等皆從之.</p>
<p>他日, 王出行, 半路有遠聲, 若曰莫去. 王顧問: “聲何從來.” 從者告云: “彼<后稷>伊湌之墓也.” 遂陳<后稷>臨死之言, 大王潸然流涕曰: “夫子忠諫, 死而不忘, 其愛我也深矣. 若終不改, 其何顔於幽明之間耶.” 遂終身不復獵.<br />
#45卷-列傳5-祿眞-01<br />
○<祿眞>, 姓與字, 未詳. 父<秀奉>一吉湌.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 爲儲貳, 入<月池宮>. 時, <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脈,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br />
#45卷-列傳5-祿眞-02<br />
○於是, <祿眞>造而請見, 門者拒焉. <祿眞>日{曰}: “下官非不知相公移疾謝客, 須獻一言於左右, 以開鬱悒之慮, 故此來耳, 若不見, 則不敢退也.” 門者再三復之, 於是, 引見. <祿眞>進曰: “伏聞寶體不調, 得非早朝晩罷, 蒙犯風露, 以傷榮衛之和, 失支體之安乎?” 曰: “未至是也, 但昏昏嘿嘿, 精神不快耳.” <祿眞>曰: “然則公之病, 不須藥石, 不須針砭, 可以至言高論, 一攻而破之也, 公將聞之乎?” 曰: “吾子不我遐遺, 惠然光臨, 願聽玉音, 洗我胸臆.”<br />
#45卷-列傳5-祿眞-03<br />
○<祿眞>曰: “彼梓人之爲室也, 材大者爲梁柱, 小者爲椽榱, 偃者植者各安所施, 然後, 大廈成焉. 古者, 賢宰相之爲政也, 又何異焉? 才巨者, 置之高位, 小者授之薄任. 內則六官․百執事, 外則方伯․連率․郡守․縣令, 朝無闕位, 位無非人, 上下定矣, 賢不肖分矣, 然後, 王政成焉.</p>
<p>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則雖不材, 擬送於雲霄, 憎之則雖有能, 圖陷於溝壑. 取捨混其心, 是非亂其志, 則不獨國事溷濁, 而爲之者, 亦勞且病矣. 若其當官淸白, 蒞事恪恭, 杜貨賂之門, 遠請託之累, 黜陟只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 不可枉以輕重, 如繩焉, 不可欺以曲直. 如是, 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曰開<孫弘>之閤, 置<曹參>之酒, 與朋友故舊, 談笑自樂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br />
#45卷-列傳5-祿眞-04<br />
○角干, 於是, 謝遣醫官, 命駕朝王室.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以來朝?” 答曰: “臣聞<祿眞>之言, 同於藥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一一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直言如此, 何喜如焉? 不可使儲君不知, 宜往<月池宮>.” 儲君聞之, 入賀曰: “嘗聞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後, <熊川州>都督<憲昌>反叛, 王擧兵討之, <祿眞>從事有功, 王授位大阿湌, 辭不受.<br />
#45卷-列傳5-密友紐由-01<br />
○<密友>․<紐由>者, 並<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毌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頎>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劉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p>
<p>#45卷-列傳5-密友紐由-02<br />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不止. 王計窮勢屈, 不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犒<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諾.”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不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br />
#45卷-列傳5-密友紐由-03<br />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復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br />
#45卷-列傳5-明臨答夫-01<br />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菟郡>大守{太守}<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孰}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 <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嬰城固守.</p>
<p>#45卷-列傳5-明臨答夫-02<br />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師數千騎, 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禮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br />
#45卷-列傳5-昔于老-01<br />
○<昔于老>, <奈解>尼師今之子.[或云, 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湌爲大將軍, 出討<甘文國>, 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水{火}, 焚賊戰艦, 賊溺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舒弗邯}兼知兵馬事. 十六年, (+冬十月)<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　{槱}, 暖熱之, 群心感喜, 如夾纊. <沽解王{沾解王}>在位, <沙梁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br />
#45卷-列傳5-昔于老-02<br />
○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葛耶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戱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未鄒王{味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p>
<p>#45卷-列傳5-昔于老-03<br />
○論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兩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br />
#45卷-列傳5-朴堤上-01<br />
○<朴堤上>[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湌. <堤上>仕爲<歃良州>干.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王子{壬子},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千{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迺>․<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三人同對曰: “臣等聞<歃良州>千{干}<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br />
#45卷-列傳5-朴堤上-02<br />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 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柢{祗}承.” 遂以聘禮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隣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霸, 誠未{末}世之事也. 今, 寡君之愛第{弟}在此, 殆將十年. 寡君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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