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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eesiwoo.net &#187; 미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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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기다림이 간절한 자는 먼 곳을 본다.  평화가 간절한 자는 유라시아를 본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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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글 신 심도기행 두 세계의 경계, 예술로 잇다- 전시회를 열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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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2 Sep 2025 12:36:35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category><![CDATA[사진가 이시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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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 전시명 : ‘신(新)심도기행 &#8211; 두 세계의 경계, 예술로 잇다’ 2. 전시의 형태 : (설치 중심의) 전시 3. 전시장 : 강화 전쟁박물관(강화 갑곶진) 내 잔디마당 4. 전시기간 : 2025. 10.24(금) &#8211; 11. 6(목) 14일간 (작품설치 10.23(목), 작품철수 11. 7(금)) 5....]]></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5/09/10883_19062_3048.png" alt="" title="10883_19062_3048" width="288" height="669"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9361" /></p>
<p>1. 전시명 : ‘신(新)심도기행 &#8211; 두 세계의 경계, 예술로 잇다’<br />
2. 전시의 형태 : (설치 중심의) 전시<br />
3. 전시장 : 강화 전쟁박물관(강화 갑곶진) 내 잔디마당<br />
4. 전시기간 : 2025. 10.24(금) &#8211; 11. 6(목) 14일간<br />
             (작품설치 10.23(목), 작품철수 11. 7(금))<br />
5. 전시 일정<br />
   1) 열림식<br />
      2025. 10. 24(금) 오후 4시<br />
   2) 열림식 내용<br />
     (1) 강연 / 이시우(평화운동가, 사진 작가)<br />
     (2) 퍼포먼스 / 양혜경 외 3-4인<br />
     (3) 뒤풀이<br />
6. 전시 주최 및 주관 : 강화민예총(인천민예총 강화지회)<br />
&#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8212;<br />
글 전문은 첨부된 pdf화일을 열어 보실 수 있습니다.</p>
<p>신 심도기행<br />
두 세계의 경계, 예술로 잇다<br />
전시회를 열며</p>
<p>사진가 이시우</p>
<p>이념<br />
강화의 논은 대몽항쟁을 위해 간척된 것이다. 800여년 동안 강화의 논에서 생산된 쌀에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유라시아제국 몽골의 조공체계에 대한 항쟁이념이 서려있다. 강화쌀은 청정미이자 민족정신을 품은 민족미이다. 박현채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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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글 헤겔을 통해 라캉 읽기 2024.6.1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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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2 Jun 2024 08:19:40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category><![CDATA[사진가 이시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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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초기라캉은 무의식의 증상을 이상 증상으로 보고 상징계를 강화함으로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는 초기 라캉의 무의식 이론을 헤겔 논리학의 구조와 비교해보자. 억압과 부인은 달리 말하면 고집‧고착과 부정이고 헤겔 논리학으로 표현하면 직접성과 매개성이다. 나의 개념을 적용하면 결과 안기이다. 고집‧고착을 위해서 억압이라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4/06/art_15106877607706_e6cf0f.jpg" alt="" title="art_15106877607706_e6cf0f" width="500" height="331"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9143" /><br />
초기라캉은 무의식의 증상을 이상 증상으로 보고 상징계를 강화함으로서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는 초기 라캉의 무의식 이론을 헤겔 논리학의 구조와 비교해보자. 억압과 부인은 달리 말하면 고집‧고착과 부정이고 헤겔 논리학으로 표현하면 직접성과 매개성이다. 나의 개념을 적용하면 결과 안기이다.<br />
고집‧고착을 위해서 억압이라는 의지행위가 작용한다. 은유는 기표연쇄의 정지상태이고 이는 의지에 의한 억압의 산물이다. 은유의 폭력이 환유의 무한대체를 정지시킨다. 헤겔의 직접성개념자체가 매개의 배제라는 강제‧억압에 근거한다. 매개의 내용은 부정적 매개이다. 부정만이 쉼 없는 매개의 대체를 만들어낸다.<br />
헤겔논리학은 라캉을 통해 직접성과 매개를 의지행위로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규정성에서부터 잠재되어 있던 헤겔의 의지적 요소이다. 규정성은 논리규칙이 아니라 의지규칙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결은 고착, 고정, 고립을 통해 형성되는 의미이고 내용이다. 안기는 비안기의 계기와 무한히 전개되는 장치이다. 안기는 고착된 의미를 부정함으로서 모순에 이른다. 모순은 결의 성립불가능성이다. 그러나 모순의 필연적계기인 종합을 통해 결이 생성되므로 결의 내용과 의미는 바로 모순안기의 종합과정에서 발생한다.<br />
라캉은 은유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제할 뿐 환유로부터 은유가 내재적으로 생성되는 과정을 밝히지 못했다. 이는 분석법의 한계이다. 변증법은 라캉이 기계적으로 분류해 놓은 은유와 환유의 외적차이만이 아니라 내재적 차이와 동일성의 계기를 동시에 밝힐 수 있다. 즉 은유와 환유는 별개의 기능이 아니라 한 기능의 두 계기일 뿐이다.<br />
증상‧은유‧해석이 상상계이자 실재계의 피부라는 것은 외적관찰과 외적전제를 통한 분석법이다. 모순을 실재‧대상의 증상이자 표상이라고 하면 모순은 그 발전과정을 통해 해소되는 게 아니라 누적되고 결국은 붕괴되는 것이다. 이는 증상의 누적을 통해, 증상의 발전을 통해, 증상의 첨예화, 대상화, 현실화를 통해 실재가 변하는 과정이 된다. </p>
<p>* 전체글을 보시려면 아래 첨부된 pdf화일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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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글 메를로-퐁티의 ‘살’개념 비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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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03 Apr 2024 06:55:30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category><![CDATA[사진가 이시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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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메를로-퐁티의 ‘살’개념 비판 사진가 이시우 글의 전문은 아래 첨부된 pdf화일을 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를 깊이 알진 못하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그의 ‘살’개념이 흥미로워 관심을 갖고 읽었다. 지각을 대상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점과 지각의 전개를 내재적, 변증법적 방법으로 추진한다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메를로-퐁티의 ‘살’개념 비판</p>
<p>사진가 이시우</p>
<p>글의 전문은 아래 첨부된 pdf화일을 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p>
<p>메를로-퐁티를 깊이 알진 못하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그의 ‘살’개념이 흥미로워 관심을 갖고 읽었다. 지각을 대상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점과 지각의 전개를 내재적, 변증법적 방법으로 추진한다는 점이 관심을 끈 대목이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그를 비판할 능력은 없으므로, 헤겔 &#8216;대논리학&#8217;의 관점에서 그것을 기준으로 비교하며 읽어본 감상을 몇 자 적어본다&#8230;.<br />
비유를 들어보자.<br />
거대데이터센터에 인류의 지식전체가 저장되어 있다고 치자. 내가 정보를 검색하는 과정은 정보를 나의 것으로 출력하여 가져오는 과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검색정보를 흔적으로 남기고 입력하는 과정이다. 데이터센터의 지식을 보는 것은 나의 보기를 데이터센터에 보이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정보가 데이터센터로부터 나에게로 출력되어 분화되는 원심성과, 나의 정보가 데이터센터에 입력되어 데이터로 합쳐지는 구심성이 동시에 작용한다. 데이터센터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용자는 이용대상인 정보를 구별해서 분리시키지만 이용자행위 또한 이용대상으로서의 정보가 된다는 점에서 정보로의 수렴‧동일화일 뿐이다.<br />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br />
벌은 자기 먹이를 꽃에서 찾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꽃가루를 묻혀 다른 꽃에 수분한다. 벌은 꽃으로부터 꽃가루를 빼앗겨 원심성을 갖지만, 벌이 묻혀온 가루를 자기가 다시 빼앗아 이용하기에 구심성을 갖는다. 이처럼 순환체계는 구별과 동일, 원심과 구심이 통일된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에 따르면 이러한 순환체계전체가 살이다. 그러나 비유의 적절성은 여기까지다.<br />
내가 출력한 정보와 내가 남긴 입력정보는 전혀 다른 질의 정보이다. 전자가 내용이라면 후자는 과정이다. 동일시간이지만 동일관점‧동일내용은 아니다. 따라서 둘이 모순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의 또 다른 한계는 데이터센터가 아무리 거대해도 인간이 만든 동일성의 체계라고 할 수 있지만 세계는 영원한 인간의 타자이다.<br />
 만짐/만져짐 역시 한번은 왼손의 관점에서 성립하고 한번은 오른손의 관점에서 성립하므로 동일시간‧동일관점‧동일내용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p>
<p>글 메를르-퐁티의 ‘살’철학 비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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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글 반트슈나이더의 헤겔 변증법 수정에 대한 비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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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3 Mar 2024 14:27:27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category><![CDATA[사진가 이시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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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반트슈나이더의 헤겔 변증법 수정에 대한 비판 사진가 이시우 반트슈나이더는 헤겔의 변증법을 화용론을 이용해 새롭게 재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도에서 가장 중요한 논증은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비존재이다’가 동시에 성립하는 이율배반구조이다. 이렇게 되면 ‘존재는 비존재이며, 비존재가 아니다’가...]]></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반트슈나이더의 헤겔 변증법 수정에 대한 비판</p>
<p>사진가 이시우</p>
<p>반트슈나이더는 헤겔의 변증법을 화용론을 이용해 새롭게 재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도에서 가장 중요한 논증은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비존재이다’가 동시에 성립하는 이율배반구조이다.<br />
이렇게 되면 ‘존재는 비존재이며, 비존재가 아니다’가 된다.<br />
반트슈나이더는 의미론의 영역을 화용론의 영역으로 우회 이동시키는 전략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분야에 낯선 사람들에겐 많은 배경설명이 필요하지만 이는 정식논문이 아니므로 친절한 설명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p>
<p>반트슈나이더는 6단계도식을 통해 검증을 진행한다. </p>
<p>(｢존재｣를 ｢S｣로 ｢비존재｣를 ｢N｣으로 하며, ‘의미론적으로 대등하다’를 ‘=’로 약어 표기한다)</p>
<p>(1) ｢S｣=｢N이 아니다｣<br />
(2) ｢S｣는 ｢N｣에 대응하는 것이다.<br />
(3) ｢S｣는 ｢N｣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br />
(4) ｢N｣=｢｢N｣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br />
(5) ｢S｣=｢N｣<br />
(6) (｢S｣=｢N이 아니다｣) ⊕ (｢S｣=｢N이다｣)</p>
<p>(6)에서 이같은 시도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으로 입증된다.<br />
이 도식에서 가장 중요한 도식은 (2)이다. (1) ｢S｣=｢N이 아니다｣는 의미영역이다. 의미상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2)에서 화용론적 대응개념이 적용하면서 (1)의 ‘아니다’는 ‘이다’로 바뀐다. 이후에 전개되는 ‘이다’ ‘아니다’ ‘이다’ ‘아니다’의 끝없는 교체는 이율배반구조를 만들어내는 핵심과정이다. 만약 (2)단계 도식이 성립되지 않으면 이후 과정 전체는 불성립한다.</p>
<p>반트슈나이더는 화용론을 끌어와 ‘대응’시키고 있지만 여기서 사실상 ‘대응’은 중요한 역할이 없다. 오직 (1)의 ‘아니다’를 (2)의 ‘이다’로 바꾸기 위한 매개역할로서만 의미가 있다.<br />
의미론적 구별이 대등‧대응규정을 거쳐 존재론적으로 동일속성을 구성한다는 것은 검은 공과 흰 공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면서 주머니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공통속성을 갖게 되어 두 공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br />
이 부분에서 그의 설명은 모호하고 납득하기 어려웠다. </p>
<p>주석을 포함한 원문은 아래 pdf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br />
<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4/03/Dieter-Wandschneider.jpg" alt="" title="Dieter-Wandschneider" width="512" height="512"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9067" /></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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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item>
		<title>글 보기드문가족사진집 &#8211; &#8216;구연우구동훈가족사진집1&#8242; 서평</title>
		<link>https://www.leesiwoo.net/?p=8913</link>
		<comments>https://www.leesiwoo.net/?p=8913#comments</comments>
		<pubDate>Mon, 30 Jan 2023 00:32:59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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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글이 길이 일부만을 발췌해서 올렷습니다. 전체 글은 아래 PDF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보기 드문 가족사진집 이시우 사람의 뛰어난 능력은 변화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매번 찾아오는 계절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지만 우리는 어떤 시간을 가을이란 한 단어로 통칭한다....]]></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글이 길이 일부만을 발췌해서 올렷습니다. 전체 글은 아래 PDF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p>
<p>                                                                  보기 드문 가족사진집</p>
<p>                                                                                                                                               이시우</p>
<p>사람의 뛰어난 능력은 변화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매번 찾아오는 계절은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지만 우리는 어떤 시간을 가을이란 한 단어로 통칭한다.<br />
‘가을 어느날’에서 ‘가을’은 변하지 않음이며, 동일성이자, 일자이고, ‘어느 날’은 변화함이며, 다양성이자, 차이이다. 우리는 이 사진집에서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동훈의 모습을 만난다. 그와 더불어 변치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동훈의 동일성을 발견한다.</p>
<p>포유류는 육지에 살거나 바다에 살거나 생존장소로 구분되지 않는다. 태어나서 상당기간 가슴에 안긴 채 살아야 한다면 모두 포유류다.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행위로 구분되는 류인 것이다. 쥐와 고래가 전혀 다른 외형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같은 포유류인 것은 가슴 때문이다. 가슴에서 자라나 가슴으로 키우기에, 가슴의 기억이 유전된다.<br />
무엇인가를 가슴으로 끌어안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만을 대상으로 한다. 안는 그 순간만큼, 안은 것은 오직 하나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안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 만큼 가슴은 나머지 것을 등져야 한다. 가슴의 반대편엔 등이 있기 때문이다. 안는 주체는 흔히 자기이기에 안기란 통상 소유하기이다. 그러나 안기위해 자기마저 포기하면 순수한 안기만이 남는다. 주체는 내가 아니라 안기자체인 것이다. 명사인 나는 실체일 뿐 동사인 ‘안다’만이 주체이다. 나를 포기해야하는 안기란, 즉 주체되기란, 안정되고 영원하길 바라는 실체에겐 공포이다. 실체인 나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내가 무엇을 안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마저 포기하고 끌어안는다.</p>
<p>이웃인 김정택목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p>
<p>‘어린 아이들과 잠들어 있는 집에 원인모를 화재가 나서 엄마는 큰아들을 안고 나오고 시력이 많이 좋지않은 아빠는 작은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심한 화상을 입어 중환자실에서 3주간 치료후 주님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그 당시 작은 아들 동훈이에게 화상의 흔적은 살짝 보였다. 분명 아버지는 자식들이 불에 데이지 않도록 가슴에 안고 화염을 뚫고 나왔을텐데, 그래도 아이들에게 화마의 열이 전달될 정도였다면 아버지는 그 열을 어떻게 견뎠을까’</p>
<p>아버지는 불 속에서 동훈을 끌어안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가장 중요한 것을 안기위해 자신마저 등졌듯이, 어머니 역시 아이들을 끌어안고 자신을 등지며 살아온 징후가 이 사진집에서도 드러난다.</p>
<p>사진은 동사를 존재사로 만드는 매체이다. 존재사란 내가 붙인 이름이다. 움직임을 표시한다는 동사 중에 오직 ‘있다’ ‘be’ ‘sein’ ‘etré’만이 움직임을 표시하지 않는다. 움직임을 표시하지 않는 동사이기에 존재사인 것이다. 사진은 ‘연주하다’를 ‘연주하고 있다’로, ‘울다’를 ‘울고 있다’로, ‘웃다’를 ‘웃고 있다’로 ‘걷다’를 ‘걷고 있다’로 만든다.</p>
<p>동훈이 걷고, 울고, 웃고, 연주하는 것을, 사진은 걷고 있고, 울고 있고, 웃고 있고, 연주하고 있는 것으로 만든다. 수많은 다양함과 변화가 사진에서는 오직 있을 뿐이다.</p>
<p>그렇다면 반대로 사진을 보며 하모니카를 불어보자. 있음을 연주하자. 하나의 있음을 연주할 때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색의 연주가 나올 것이다. 연주하다는 동사이기 때문이다. 이번엔 있음을 사진으로 찍어보자. 있음을 색으로, 형태로, 의미로, 찍고, 해석하고, 편집한다. 있음은 존재사이지만 ‘찍다’와 ‘편집하다’는 온전히 동사이다.</p>
<p>오직 하나의 있음은 동사와 만나 다양함으로, 변화함으로 자신을 드러낸다.</p>
<p>‘가을 어느날’로 돌아가 보자. 많은 ‘어느 날’을 하나의 ‘가을’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의 ‘가을’에서 많은 ‘어느 날’을 찾아낼 수 있는 것 역시 사람이다. 이 땅의 부모들이 다 그렇지만, 이 땅의 어느 부모도 같은 부모는 없다. 가을로 환원되지 않는 어느 날이 있듯이 부모의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나도 있다.</p>
<p>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4)</p>
<p>많은 ‘어느 날’은 ‘가을’ 한 단어로 수렴된다. ‘가을’은 수많은 ‘어느 날’로 확산된다. 그리하여 숙명적으로 가을만 있거나 어느 날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가을도 어느 날도 ‘가을 어느 날’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p>
<p>대상화란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다. 동물도 의식을 갖는다. 그러나 사람은 의식을 바라보는 의식을 갖는다. 자기의식이다. 의식이 만든 집착을 깰 수 있는 반성이다. 주체다. 동물도 자기를 실체로 인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체를 깨는 주체가 되긴 어렵다. 대상화란 자기가 깰 자기를, 자기의식이 깰 의식을, 물건처럼 외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대상화시킬 수 있을 때 주체가 된다. 그것이 남이 아닌 나에 대한 대상화일 때는 더욱 그렇다.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글과 사진의 위대함은 나를 나로부터 거리두기에 있다. 저자의 사진집 작업이 성공했다면 이전의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닐 것이다. </p>
<p>가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혹은 가족사진집의 성공을 위해 저자는 200쪽으로 기획했던 책을 100쪽이나 초과하게 되었다고 했다. 모든 증명은 강박이다. 증명불가능한 것에 대한 증명의 시도는 더더욱 강박이다. 성공을 목적함은 강박이다. 성공불가능한 것을 목적함은 더더욱 강박이다. 증명하려 할수록 반박되고 성공하려 할수록 실패한다.</p>
<p>실패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은 실패가 목적일 때가 있다. 떠나보내기 싫고, 내려놓기 싫고, 분리하기 싫을 때, 그럴 용기가 없을 때 창작자는 실패를 의도한다. 의도된 실패는 주체의 균열‧흔들림을 보여주는 징후요 증상이다. 창작자는 당연히 성공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를 의도한다.</p>
<p>그러나 성공을 목적할 때만 진정한 실패가 가능해진다. 최선을 다해 간절하게 정성들이는 자만이 참된 실패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실패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p>
<p>이 사진집의 제목은 가족사진집1이다. 가족사진집2의 참된 실패를 기원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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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글 나의 미학관2 &#8211; 강화시선 14호 2022 pp.72-8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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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2 Dec 2022 09:32:20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category><![CDATA[사진가 이시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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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나의 미학관2 사진가 이시우 바벤하우젠 미포병부대 훈련장에 다연장로켓(MLRS)의 발사관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핵무기의 파괴력을 대신할 무기로 제작되었다는 MLRS. 이젠 관만이 남아 가을빛에 묻혀 있었습니다. -독일 바벤하우젠 자기소개서를 써달라는 청탁이 있었다. 나도 내가 궁금했다. 15년 전 국가보안법재판에서 ｢나의 미학관｣을 법원에 제출해야할 일이...]]></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나의 미학관2</strong></p>
<p>                                                                                                                                                        사진가 이시우</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2/12/3.jpg" alt="" title="A-121" width="2270" height="1498"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8888" /><strong>바벤하우젠 미포병부대 훈련장에 다연장로켓(MLRS)의 발사관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핵무기의 파괴력을 대신할 무기로 제작되었다는 MLRS. 이젠 관만이 남아 가을빛에 묻혀 있었습니다. -독일 바벤하우젠</strong></p>
<p>자기소개서를 써달라는 청탁이 있었다. 나도 내가 궁금했다. 15년 전 국가보안법재판에서 ｢나의 미학관｣을 법원에 제출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의 미학관｣을 다시 써보기로 했다. 변한 게 뭐고 변치 않은 게 뭔지 나도 알고 싶어졌다. </p>
<p><strong>원숭이 똥구멍</strong><br />
어렸을 때부터 부르던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다. </p>
<p>‘원숭이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p>
<p>이것을 다시 정리해보자.<br />
원숭이똥구멍은 빨갛다. 빨간 것은 사과다.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 것은 바나나다. 바나나는 길다. 긴 것은 기차다.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비행기다. 비행기는 높다. 높은 것은 백두산이다. 그러므로 원숭이똥구멍은 백두산이다.</p>
<p>원숭이똥구멍과 사과와 바나나는 존재다. 빨갛다와 맛있다와 길다는 속성이다. 이 노래는 ‘존재는 속성이고 속성은 존재다’라는 논리의 연쇄이다. 그 속성은 수많은 존재의 속성 중 우연적으로, 자의적으로 선택된 한 속성이다. 원숭이똥구멍의 여러 구조, 기능, 속성 중 빨강이란 색은 중요한 속성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우연히 선택된 속성이다. 그런 빨강이 주어가 되자 이번엔 사과라는 존재가 우연적, 자의적으로 선택된다. 사과가 빨강을 대표하지 않아도 크게 어긋난 것 같지 않다. 맛있는 것과 바나나의 관계도 억지스럽지 않다. 검정과 하양이란 색으로부터 사과가 선택되기는 어렵고, 쓰고 짠 것으로부터 바나나가 선택되기는 어려우므로 이 선택은 조건의존적이다.<br />
연緣하여 일어난다는 불교의 연기설이라고 해도 좋고,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라고 해도 좋고, 스피노자의 변용(affectus)이라 해도 좋고, 니체의 수동적 종합이라 해도 좋고, 들뢰즈의 배치라고 해도 좋다.<br />
그러나 이러한 우연의 연쇄는 한 단계만 건너가도 금방 이상해진다. ‘원숭이똥구멍은 맛있다’거나 ‘사과는 길다’고 하면 수긍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유사성, 우연성, 자의성, 외부의존성으로 이어지는 선택의 연쇄는 결국 ‘원숭이똥구멍은 백두산’이란 결말에 이른다. 이는 한바탕 웃음을 주지만 논리적으로는 크게 잘못된 것임이 드러난다. 이 연쇄는 새로운 조건과 연결될 때마다 무한히 진행된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사상이 된 이 노래는 논리가 아니라 놀이다.</p>
<p><strong>쥐사위찾기</strong><br />
귀한 딸을 둔 아버지 쥐는 자기 딸 만큼은 찌질한 쥐와 혼인시키기 싫어서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위감을 찾아 나선다. 해에게 찾아가니 “잘 왔다. 내가 제일 강하다. 그런데 구름이 나를 가리면 그 땐 나도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구름을 찾아갔다. 구름을 만나니 “잘 왔다. 내가 태양도 단번에 가릴 수 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그 땐 나도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람을 찾아갔다. 바람을 만나니 “잘 왔다. 내가 구름을 단번에 날릴 수 있다. 그런데 돌부처 앞에서는 나도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돌부처를 찾아갔다. “잘 왔다. 아무리 강한 바람도 나를 쓰러뜨리진 못한다. 그런데 쥐들이 내가 선 땅 밑에 구멍을 파면 나도 쓰러지고 만다.” 결국 쥐가 제일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쥐아버지는 쥐구멍으로 돌아와 쥐사위를 맞아 딸과 혼인시켰다.</p>
<p>단순반복되는 이 이야기의 시작은 자기부정이다. 자기세계에 갇혀 살던 쥐가 자기 세계 밖을 향해 나아갈 결심을 하면서 시작된다. 강함이라는 하나의 속성만을 추구하며 여러 존재를 만나는 과정은 끝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다. 해가 제일 강할 것이라던 신념을 해를 만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강해보이던 해에게도 대립되는 속성, 즉 구름이란 외부조건에 의존하는 속성이 있음을 파악한다. 기존을 신념을 버리며 새로운 반성에 따라 구름과 바람과 돌부처를 찾아간다. 구름은 해에게 제약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구름과 해, 바람과 구름은 유사관계가 아닌 대립관계를 형성한다. 그런데 바람과 해, 돌부처와 해는 아무런 대립관계도 형성하지 않는다. 한 단계만 건너뛰면 무관함이 드러난다. 그런데 오직 하나, 강함을 찾는 쥐 주체만은 어떤 조건의 변화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기부정하며 떠났던 자기에게로 복귀한다. 자기에게로 돌아왔을 때 자기도 모르던 측면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발견한다. 애초 그런 자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볼 줄 알았다면 굳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행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부정의 과정은 결국 자기로 돌아오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p>
<p>원숭이똥구멍 노래에서는 오직 과정만이 중요하다. 쥐사위찾기 이야기에서는 오직 결과만이 중요하다. 전자가 무한반복 한다면 후자는 자기복귀 한다. 전자를 악무한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진무한이라고 한다.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오딧세이의 서사라고해도 좋고, 규정은 곧 부정이라는 스피노자의 사상이라해도 좋고,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이라고 해도 좋겠다.</p>
<p><strong>가슴</strong><br />
등의 반대편에 가슴이 있다. 우리 몸에는 많은 등이 있다. 눈등, 귓등, 콧등, 입증, 손등, 발등이 그것이다. 그 반대편을 가슴이라고 해보자. 눈가슴, 귀가슴, 코가슴, 입가슴, 손가슴, 발가슴이 된다. 가슴은 안는 것이다. 세계를 끌어안음으로서 세계는 몸이 된다. 끌어안지 못한 세계는 몸이 되지 않는다. 자외선이나 적외선은 눈가슴으로 끌어안을 수 없다. 그래서 시각이미지로 우리 몸에 기억‧저장되지 않는다. 기억은 가슴의 품이다. 기억되지 않은 것은 지각되지 않는다. 기억없이는 감정도 없다. 품의 크기만큼 세계를 안을 수 있기에 그 나머지의 세계는 모두 등지는 것이다. 안음은 곧 등짐의 반대편이다. 등진세계는 크고 안은 세계는 작다. 안음으로서 규정되고 등짐으로서 부정된다.<br />
자외선과 적외선은 눈가슴에 안기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 몸의 보존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이다. 등진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을 끝없이 가슴으로 안기위해 가슴의 품을 넓힌다. 눈가슴만으로는 자외선을 안을 수 없지만 자외선탐지기를 이용하면 눈가슴으로도 안을 수 있다. 가슴의 매개물인 한에서 자외선탐지기 역시 가슴이다. 가슴자체가 매개이기에 매개는 가슴이다. 가슴의 기능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가슴은 주체이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결이다. 실체는 주체에 의해 끝없이 재구성된다. 결은 가슴에 의해 재구성된다. 가슴으로 끌어안은 것만이 결이 된다.</p>
<p><strong>결</strong><br />
물결은 물을 눈가슴으로 끌어안아 생긴 상이다. 물을 눈가슴으로 끌어안는다는 것은 감정과 지각과 욕망과 반응행동이 거의 총체적‧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눈가슴은 끝없이 변형된다. 물은 눈을 통해 뇌의 감각피질에 보내져 임시로 저장되고 이는 다시 해마로 보내져 이전에 기억된 물정보와 비교되어 공통특성을 추출하여 물이라는 신호정보를 형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보가 표상(imago)이다.<br />
물 자체를 복사해오는 게 아니라 갈증으로 욕망하고, 갈증해소후의 상태를 기억해내고 자신만의 물의 표상을 만들어낸다. 표상은 물 자체와는 다른 변형된 물이다. 물은 물의 표상으로만 눈가슴에 안긴다. 안기지 못한, 즉 표상되지 않은 물은 등진다. 그러나 갈증이 아니라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고자할 때, 먹는 물은 보는 물로 또다시 변형된다. 변하지 않고 고착된다면 살아있는 주체가 아니다. 임시로 고착되고 고정화되고 대상화되는 것이 실체로서의 결이다.<br />
결은 가슴에서 탄생한다. 물결은 물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가슴들이 만들어 낸 표상이다. 결은 나의 가슴에 안긴 것의 다른 이름이다. 안는 동사가 선행되어야 안긴 것으로서의 결이 명사로 인식된다. 가슴이 주체라면 결은 실체이다. 실체는 주체에 의해 부정된다.</p>
<p>디지트(digit)를 기본단위로 하여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메타버스라고 한다면, 신경(neuron)을 기본단위로 하여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뉴로버스라고 할 수 있겠다. 고골안경을 쓰는 순간 메타버스의 세계가 열리듯, 가슴으로 끌어안는 순간 뉴로버스의 세계가 열린다. 이 세계는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세계이다. 꿈이 바로 독립된 채로 작동하는 뉴로버스의 세계이다.<br />
착시를 이용한 매직아트는 우리의 뇌가 세계를 조작해서 바라보는 증거이다. 그러나 달리보면 조작해서라도 세계를 사실대로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세계와 세계상이 차이 날 때 사람은 절대 가만있지 않는다. 자기를 바꾸든 세계를 바꾸든 일치시키려고 의식‧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세계와 세계상이 같을 수 없음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칸트라면, 같아질 수 있다고 도전하는 것이 헤겔이다. </p>
<p><strong>< 글 후반부는 첨부화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strong><br />
글 나의 미학관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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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글 고길천의 강정기록화 &#8216;붉은 구럼비&#8217; 서평- 통일뉴스 22.8.2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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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9 Aug 2022 08:32:22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category><![CDATA[사진가 이시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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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길천 『붉은 구럼비』, 새 예술장르의 문을 열다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56 글 서평 고길천의 붉은구럼비 고길천 작가가 『붉은 구럼비』 화집을 보내왔다. 8월 26일까지 제주시 중앙로 예술공간 이아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붉은 구럼비』는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의 전 과정을 기록한 역사화이다.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화란 점에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고길천 『붉은 구럼비』, 새 예술장르의 문을 열다<br />
<a href="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56">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56</a></p>
<p>글 서평 고길천의 붉은구럼비 </p>
<p>고길천 작가가 『붉은 구럼비』 화집을 보내왔다. 8월 26일까지 제주시 중앙로 예술공간 이아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붉은 구럼비』는 강정해군기지 반대투쟁의 전 과정을 기록한 역사화이다.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화란 점에서 강요배 작가의 『동백꽂지다』와 같으면서 다르다.</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2/08/205956_90466_2940-300x200.jpg" alt="" title="205956_90466_2940" width="300" height="2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735" /><br />
『붉은 구럼비』 책표지. [사진 제공 - 이시우]<br />
내가 보기에 고길천 작가는 거대체계에 맞추어 하나씩을 완성해가는 작가가 아니라, 하나씩을 완성하다보니 어느새 거대해지는 작가다. 그는 양식에 대한 집착이 없다. 조각, 사진, 그래피티, 설치, 회화등 닥치는 대로다.</p>
<p>양식과 표현의 다양성과 반대로 그에게 일관되는 것이 있다. 현장에 발딛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간혹 현실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가 창조해낸 섬뜩한 감동의 세례와 조우하곤 했다. 2010년작 ｢60년만의 외출｣을 보자.</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2/08/60년만의-외출-204x300.jpg" alt="" title="OLYMPUS DIGITAL CAMERA" width="204" height="3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728" /></p>
<p>작품 ｢60년만의 외출｣. [사진 제공 - 이시우]<br />
2009년 제주공항 정뜨르 학살터 4.3발굴현장에서 유일하게 남은 희생자의 옷가지가 발견되었다. 작가는 그리거나 사진 찍는 대신 옷 위에 얇은 종이를 얻고 연필로 베꼈다. 연필탁본을 한 것이다. 프로타쥬(Frottage)라고도 한다. 그리기는 머리를 거쳐 손기술로 재현되어 다시 머리로 이해되지만, 이 작업은 옷에서 손으로 느낌이 직접 전달되어 손에 각인된다. 작가가 느낀 질감이 보는 나에게도 그대로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해되어 기억되는 게 아니라 감각 속에 새겨져 있다가 툭툭 걸린다. 물질과 물질로, 현실과 현실로 직접 만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창안한 기법으로 그는 가장 현실적인 물질성을 획득했다.</p>
<p>고길천의 ‘붉은 구럼비’는 강요배의 ‘동배꽃지다’의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두 작업의 형식은 다르다. 강요배의 ‘동백꽃지다’가 경험하지 못한 사건을 마치 연극처럼 연출해낸 작품이라면, 고길천의 ‘붉은 구럼비’는 경험 속 사건을 마치 노동처럼 생산해낸 작품이다.</p>
<p>‘붉은 구럼비’의 첫 작품은 ｢1948년 강정｣이다. 그는 제주해군기지반대운동의 출발을 4.3으로 늘려 잡는다. 강정과 4.3의 인연은 범상치 않다. 1947년부터 4.3운동에 이르기까지 몇 번의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47년 12월 강정리의 당원 김석천과 48년 1월 강정리 세포 Y모씨가 체포된 뒤 발생한 제주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었다.</p>
<p>당연히 군경의 이목이 강정에 집중되었고 강정리에서만 174명이나 희생되었다. ｢1948년 강정｣은 시체로 누워있는 주민과 총 들고 서있는 군인을 대비시킨다. 해군기지 반대운동 과정에서 체험한 모든 형태의 폭력이 4.3에 가해진 국가폭력과 본질상 같은 것임을 이 그림은 화두로 제시한다.</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2/08/205956_90467_303-300x200.jpg" alt="" title="205956_90467_303" width="300" height="2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736" /><br />
작품 ｢투표함 탈취｣. [사진 제공 - 이시우]<br />
｢투표함 탈취｣는 국가가 폭력의 가해자이고 주민이 그 피해자인 과거의 구도가 아니라 국가에 포섭된 주민이, 즉 주민의 신체를 가진 국가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림 왼쪽하단에 흘긴 눈의 남자초상은 사건 자체의 기록이 아닌 사건의 본질을 재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 배경을 이루는 사건소묘가 저울에 올린 물건이라면 이 인물의 표정은 이 사건 전체의 무게를 다는 저울추이다.</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2/08/205956_90468_3019-300x200.jpg" alt="" title="205956_90468_3019" width="300" height="2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737" /><br />
작품 ｢습격(늑대)｣. [사진 제공 - 이시우]<br />
｢습격(늑대)｣는 늑대들에게 공격받는 농성자들을 표현하고 있다. ｢폭력｣, ｢고착｣, ｢용역깡패｣에서는 폭력의 주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다가 ｢습격(늑대)｣에서는 사람 대신 늑대가 등장한다. 늑대는 악당, 폭력에 대한 통속적 상징이다.</p>
<p>라깡에게 있어 환유는 기표에서 기표로 이어지는 무한정한 미끄러짐의 연쇄이다. 그에 비해 은유는 하나의 기표가 다른 하나의 기표를 대체하는 것인데, 한 번만 대체되는 것이다.</p>
<p>‘용역도 먹고 살려는 노동자이고, 여기 나와 있는 것은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나와 있는 것이고, 여기 이장이 우리 삼촌이고, 당신은 내 조카뻘이고, 알고 보면 나도 불쌍한 사람이고’ 등등 이야기는 끝없이 다른 이야기로 연장되며 미끄러진다. 이것이 환유이다.</p>
<p>그러나 용역깡패가 내뱉는 ‘개새끼’, ‘씹새끼’는 다른 이야기로의 연쇄가 불가하다. 단 한 번만 대체될 뿐이다. 이것이 은유이다. 환유에서는 변명이나 설득이 가능하지만 은유에서는 불가하다. 은유는 분출될 뿐이다.</p>
<p>서민들의 욕처럼 회사나 관공서의 매뉴얼과 규정도 은유이다. ‘우리는 매뉴얼 대로만 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매뉴얼에 대한 토론이나 대화가 불가능하다. 매뉴얼과 욕은 단 한 번만 대체된다는 점에서 은유이다. 은유는 한 번 이상 대체할 수 없기에 의미를 고착시킨다. 그래서 은유는 폭력이다. ｢습격(늑대)｣에서의 늑대는 그런 의미에서 은유이다. 고상한 예술이 아니다. 욕이다. 습격받는 동지들을 대신하여 국가폭력에 날리는 한 마디 쎈 욕이다.</p>
<p>작품 ｢거짓말｣. [사진 제공 - 이시우]<br />
｢거짓말｣에서 ‘주민동의 없이 군관사 추진은 없다’고 말하는 해군 뒤로 늑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욕이 세련되거나 심오할 필요가 없기에 그의 은유는 통속적이다.</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2/08/205956_90465_2430-300x200.jpg" alt="" title="205956_90465_2430" width="300" height="2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738" /><br />
작품 ｢구상금테러｣. [사진 제공 - 이시우]<br />
｢구상금테러｣는 제목으로 말한다. 구상금 청구가 곧 테러라고. 직접폭력이 집단으로 동지들과 함께 겪는 폭력이라면, 매개를 이용한 폭력은 철저히 개인으로 나누어 파편화시키는 폭력이다. 그림속의 단 두 사람조차 어깨 걸었던 손을 풀고 고립된 개인이 되어 손을 모으고 있다. 폭력행사의 목적이 집단을 해산하고 개인들의 손을 묶어 고착시키는데 있었기에 이는 진정한 폭력이다. 구상금 청구가 테러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국가폭력의 진면목은 눈에 보이는 직접폭력이 지난 뒤 합법성으로 치장한 문서들로 이루어진다.</p>
<p>용역깡패의 폭력은 행위와 주체가 일치한다. 주먹을 쓴 자가 처벌받는다. 경찰기동대의 폭력은 행위와 주체가 구별된다. 명령한 자가 처벌받는다. 구상금 청구서의 폭력은 행위만 있고 주체가 없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다.</p>
<p>법과 원칙과 매뉴얼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공무원들이 양심의 가책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은 공무원 개인이 책임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시민을 호소하고, 절규하고, 가련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사람이 아니라, 매뉴얼에 나온 집행대상으로만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다.</p>
<p>고길천 작가에겐 사람이 주인이고 국가는 대상이다. 그는 국가를 폭력기구로 인식하는 국민의 존재를 증언한다. 당파적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데올로기 밖에 서있다는 믿음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1)고 한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사용하는 전유물이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보자면 그 보편적인 진실은 철저히 당파적인 입장으로만 분명해질 수 있다. 진실은 정의상 일방적이다.’2)</p>
<p>국가폭력에 대한 민감도는 직관에서 통찰로 발전되어야 한다.<br />
국가폭력은 애국심의 논리로 합리화되고 시민의 저항은 양심의 논리로 옹호된다. 이 구도는 매우 호소력 있어 보이지만 금방 한계에 직면한다.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임이 확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나 경찰은 자신의 행위가 공무원으로서 진정한 양심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양심은 있다. 그래서 애국심 대 양심의 대결은 애초 잘못 설정된 대결이다.</p>
<p>개인의 양심은 가족 차원에선 사랑으로, 사회 차원에선 연대의식으로, 국가 차원에선 애국심으로 전화한다. 국가 차원에서 양심이 논의되기 위해서는 애국심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공권력의 애국심과 시민의 애국심 중 어떤 애국심이 헌법적 가치로서의 진정한 애국심인가를 따져야 한다. 예를 들면 4.3희생자가 피해자‧보호대상자를 넘어 헌법제정주체인 주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4.3의 핵심구호였던 ‘단독정부수립반대 통일정부수립’이 헌법적 가치로서의 애국인가 반역인가를 따져봐야 한다.</p>
<p>위르겐 하버마스는 유럽헌법논쟁과 함께 애국주의논쟁을 주도했다. 유럽헌법조약을 통해 유럽은 연합에서 연방으로의 길로 향하고 있으며 헌법에 기초한 헌정적 애국주의로 유럽인들의 마음을 통합하기 위한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애국심은 지배이데올로기 생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시민 스스로의 것이다. 양심만 개인의 것이고 애국심은 국가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우리를 실패로 이끈다. 양심이 추상적이라면 애국심은 국가차원에서 구체화된 양심이다. 우리가 국민으로 사는 한 우리의 양심은 곧 애국심으로 발현된다. 우리는 시민적 애국심을 발굴하고 정립해야 한다.</p>
<p>작품 ｢죽음의 그림자｣. [사진 제공 - 이시우]<br />
｢죽음의 그림자｣는 2017년 기항한 미핵추진잠수함을, ｢똥차출동｣은 그 잠수함에서 쏟아낸 오물을 처리하는 차량을, ｢침탈2｣은 2018년 기항한 미핵추진항공모함을 그리고 있다. ‘미군이 사용할 일은 없다’던 해군기지건설사업단의 약속이 거짓말이었음을 이들 그림은 폭로한다.</p>
<p>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순간 물 맑고 평화로웠던 작은 마을이 전 세계 전쟁망의 거점으로 포섭되는 현실을 이들 그림은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폭력을 넘어 세계패권의 폭력 앞에 노출되자 전혀 다른 차원의 피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p>
<p>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가해자가 되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강정과 깊이 연대하고 있는 부르스 개그논의 관점에 주목해보자. 그는 말하길 ‘우리가 메인주에서 이지스구축함의 세례식에 반대하는 항의시위를 벌일 때마다 나는 이 죽음의 배들 중 일부가 강정에 입항할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그는 미국내에선 군사주의의 피해자이지만 피해국에겐 부득이하게 가해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국내 양심적평화운동가와 노골적인 제국주의자 사이의 개인적 차이는 너무도 크지만 피해국에게 그들 모두는 미국이고 미국은 가해자일 뿐이란 점에서 양심은 언제나 정치적 문제이다.</p>
<p>식민지피해가 채 청산되지도 않은 한국이 제국주의적 가해국가라는 감각을 갖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피해자로서의 감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강정해군기지의 함정이 호르무즈해협으로 진출해있고 태평양에서 림팩훈련에 참여한다. 부르스 개그넌이 강정에 대해 갖는 부채의식을 이젠 우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p>
<p>해군기지를 평화대학으로 바꾸어 전쟁이 아닌 평화를 전파하자는 강정평화활동가들의 계획은 이러한 자각위에 서있다. 한편 활동가들은 제주 ‘평화의 섬’이라는 의제설정은 주도했으나 제주특별자치도법이 통과된 것과 이것을 연결시키진 못했다. 특별자치도는 독자적 입법권부여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연방을 향한다.</p>
<p>여러 한계와 부작용도 있겠지만 연방수준의 자치가 실현되면 제주특별자치도 스스로 군사주의반대, 평화의 섬 건설을 입법화 할 수 있을 것이다. 넝쿨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거목을 타고 올라 거목을 뒤덮고 결국 숲을 지배한다. 상대가 만든 거목을 타고 올라가는 지혜가 필요하다.</p>
<p>｢습격(늑대)｣는 그림만 보아서는 진짜 늑대가 덤벼드는 사건 같고, ｢구상금테러｣도 그림만 보아서는 시무룩한 농성장 묘사 같다. 오인될 수 있고 모호하다. 제목을 보고서야, 그림설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림 밖의 현실에 의존한다. 예술만으로 모든 게 완성되는 닫힌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의존해야하는 열린 세계이다.</p>
<p>의식속의 기억을 화면에 재현시킨다는 것은 현실의 흐름을 절단‧채집‧변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절단되어야 단위화 할 수 있고, 채집되어야 교환가능해지며, 변형되어야 조작된다. 예술적 요소, 예술적 소통, 예술적 기호로 이룩된 세계가 예술계이다.</p>
<p>그러나 미술치료는 자기가 그린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림을 설명하며 상담받고 토론하며 그림을 가지고 놀면서 진행된다. 절단‧채집‧변형이 다시 흐름으로 현실에 연장된다. 치료가 목적일 때 미술의 경계는 중요치 않다. 예술언어를 최고수준으로 다룰 수 있는, 그래서 최고의 조형력을 가진 작가가 예술의 경계를 열어버렸다.</p>
<p>작품만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현실과 경계를 두지 않고 현실에 뛰어들어 행동하고 있다. 예술을 수단으로 현실을 바꾸는데 여념이 없을 때도 있다. 전시장에 초대한 사람들도 강정지킴이활동가들이다. 작가는 이번 작업을 그저 소박하게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예술장르의 문을 연 것이다.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인 작업의 감각이 자꾸 작업을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서는 화면 밖의 현실에 접붙이기를 한다.</p>
<p>기록은 아무리 잘해도 자꾸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는 의미들이 정박할 닻이 필요해진다. 이념은 언어로 표현될 때 가장 빛나지만 정념은 언어로 표현될 때 가장 초라해진다.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고 비를 직접 맞듯이 정념은 직접 맞아야 한다. 겉보기에 사실적인 그의 소묘작품들보다 더 사실적인 것은 추상적으로 보이는 ｢붉은 구럼비｣이다.</p>
<p>그가 기록이라고 말한 소묘의 극적 장치가 상징의 연쇄라면 ｢붉은 구럼비｣는 상상적 동일시이다. 거울 앞에 선 순간 나의 모습 전체가 보이듯이 모든 이야기와 서사는 ｢붉은 구럼비｣라는 거울 앞에서 닻을 내린다. 구럼비는 출발점이고 도착점이다. 그러나 도착점의 구럼비는 이전의 구럼비가 아니다. 그것은 푸른색 좌절과 우울이 아니라 붉은색 실패와 저항이다. 구럼비는 저항하고 절규하는 그의 마음속에 더욱 생생하게 더욱 크게 살아있다.</p>
<p>시대가 예술가를 만들지만 예술가 또한 시대를 만든다. 그런 예술가와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p>
<p>주)</p>
<p>1) 사라카이, 슬라보예 지젝 저, 정현숙 역, 슬라보예 지젝, (경성대학교출판부 2006), p.200</p>
<p>2) 슬라보예 지젝 저, 이서원 역, 혁명이 다가온다, (길 2006), p.50</p>
<p>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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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8216;분단의 지시대명사&#8217; 남북사진문화교류위원회사진전2021.11.20(토)~26일(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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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0 Nov 2021 04:50:37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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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이시우 오키나와캠프화이트비치 유엔기 내리기 박종면 서치라이트, 2021 엄상빈 용치1, 2021 전시 제목: 분단의 지시대명사 기획의 글: 이번 전시 < 분단의 지시대명사>는 남한의 생활, 문화, 사회풍경에 잔재하는, 또는 (재) 생성되는 분단의 상태를 지치지 않고 지시하며 환기하려는 남북사진문화교류위원회의 2번째 회원전이다. 전시 행보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1/11/오키나와-캠프화이트비치-미해병대기지-1-195x300.jpg" alt="" title="오키나와 캠프화이트비치 미해병대기지 1" width="195" height="3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603" /></p>
<p>이시우 오키나와캠프화이트비치 유엔기 내리기</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1/11/noname01-ㅔ.png" alt="" title="noname01 ㅔ" width="144" height="96"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8600" /><br />
박종면 서치라이트, 2021</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21/11/noname01-.png" alt="" title="noname01--" width="145" height="97" class="alignright size-full wp-image-8601" /><br />
엄상빈 용치1, 2021</p>
<p>전시 제목: 분단의 지시대명사</p>
<p>기획의 글:</p>
<p>이번 전시 < 분단의 지시대명사>는 남한의 생활, 문화, 사회풍경에 잔재하는, 또는 (재) 생성되는 분단의 상태를 지치지 않고 지시하며 환기하려는 남북사진문화교류위원회의 2번째 회원전이다. 전시 행보는 언제가 이루어질 남북 사진가들의 예술 문화 교류와 공동 전시회의 마중물이 되려는 작가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는 점에는 의미가 있다. 참여한 작가들은 사진적 행위가 가진 지표적 속성이 점점 추상화되는 통일의 사안을 현실의 가시거리 안으로 잡아당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이미지의 예술적 해석 보다 사회적인 역할에 가치를 두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남북문제를 화두로 담는 소재주의적인 작업에 대한 작업자로서의 자기 검열을 실천으로 옮겨오는 장이기도 하다. 전시작품들은 공동체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풍경에서 부터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삶의 일부로 자리하는 일상의 모습까지, 분명한 시대의 증후와 증표들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이미지로 모아진 분단 기억법, 남북문제 접근법, 통일 희망법의 단상들이 공동체 의식을 가장한 분단의 사건, 사연, 사안 이면의 파편화된 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의미한 단서로 활용되길 바란다.    (기획: 이영욱/ 임안나)</p>
<p>    항목<br />
 세부 내용<br />
전시 제목<br />
분단의 지시대명사<br />
전시 일정<br />
2021년 11월 20(토) ~ 11월 26일(금)<br />
전시 장소<br />
아지트갤러리(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5-4 마루 2층)<br />
tel. 0507-1468-8915<br />
주최<br />
남북사진문화교류위원회<br />
위원장 엄상빈<br />
전시 작품수<br />
약 50여점<br />
참여작가<br />
김성민, 김용철, 김전기, 마동욱, 문진우, 박종면, 박찬호<br />
엄상빈, 유별남, 이규철, 이시우, 이영욱, 임안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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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평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나는 이렇게 읽었다. &#8211; 민중의소리2019.12.17</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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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8 Dec 2019 01:50:26 +0000</pubDate>
		<dc:creator>leesiwoo</dc:creator>
				<category><![CDATA[미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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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서평]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나는 이렇게 읽었다 혐오란 화두 하나를 들고 주체를 찾아가는 여정 이시우 사진가 발행 2019-12-17 21:58:05 수정 2019-12-17 21:58:05 이 기사는 54번 공유됐습니다 https://www.vop.co.kr/A00001455374.html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표지이미지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표지이미지ⓒ민중의소리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는...]]></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strong>[서평]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나는 이렇게 읽었다</strong></p>
<p>혐오란 화두 하나를 들고 주체를 찾아가는 여정</p>
<p>이시우 사진가 </p>
<p>발행 2019-12-17 21:58:05 </p>
<p>수정 2019-12-17 21:58:05 </p>
<p>이 기사는 54번 공유됐습니다<br />
https://www.vop.co.kr/A00001455374.html<a href="https://www.vop.co.kr/A00001455374.html" target="_blank"></a></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2/17093744_001-200x300.jpg" alt="" title="17093744_001" width="200" height="300"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216" />  </p>
<p>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표지이미지  </p>
<p>‘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표지이미지ⓒ민중의소리</p>
<p>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깊은 우물이란 넓은 우물인 것이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신간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를 읽고 나는 그 깊이에 놀랐다. 그리고 그 깊이가 넓이에 기반한 것임을 발견하고 또 놀랐다. 이 책의 주제인 혐오는 2016년 출간된 「진보를 복기하다」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었다(pp.250-275). 그때 나는 이 주제를 여러 주제 중의 하나로만 읽었다. 그러나 저자는 한번 던진 문제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기는커녕 심연의 구렁텅이까지 자신을 몰고 가 우리에게 마침내 진주를 꺼내 보여준다. ‘혐오’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넓고 깊게, 게다가 중심을 잃지 않고 일관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저자의 학문적 천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나에게 처음엔 법학으로 읽히다가 어디쯤엔가는 정치학으로 읽혔고, 마지막에선 윤리학으로 읽혔다. </p>
<p><strong>법학 </strong><br />
 저자는 ‘철학적·정치학적 논점들이 매우 많은 주제인데다 실무가일 뿐인 필자로서는 이 논점들을 깊게 탐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p.33)고 겸손을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의 발견은 저자가 철학적 사유를 치열하게 전개했기에 얻은 발견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긴 쉽지만 나에게 없는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자기의 안이 아니라 밖까지 보았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는 이처럼 법학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우선 저자는 역사주의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순수법학의 한계를 넘어선다.  </p>
<p>‘「인간의 존엄론」은 이미 근대 헌법형성기부터 활발하게 제기된 견해이다. 권력의 전횡과 종교의 틀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존재를 확보하는 것이 당시의 과제였다’(p.189)</p>
<p>「인간의 존엄론」을 「권리」라는 말로 바꾸면 법의 형성과 함께 권리역시 형성되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소위 천부인권론은 몰역사적이고 근거를 댈 수 없기에 논리가 아니라 주장이다. 법과 권리는 역사 속에서 발생했다. 대담한 가설을 적용하면 발생했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의미이기도하다. 역사·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화와 함께 생성·발전·소멸한다. 역사적 방법론이란 법학내부의 완결되고 폐쇄된 순환논리를 추구하는 순수법학이 아니라 법 밖에서도 법의 관계를 설명하는 객관적이고 열린 방법론이다. 따라서 저자는 법의 발전을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근거의 변화를 통해서도 설명한다.  </p>
<p>‘혐오표현이 확대되지 않게 하려면 다수 시민들이 처한 불안을 줄일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개혁이 진전되어야 한다.’(pp.302-303) </p>
<p>또한 저자는 자유주의법학의 논리 틀을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부딪친다. 자칫하면 이들의 긍정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책 전편에 흐르는 혐오에 대한 주제는 저자가 이들 법철학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저자는 우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p>
<p>‘민주주의 헌법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p.83)<br />
‘현대 헌법이 기본권의 주체로 전제한 인간은…상호인정의 원리에 따른 인간이다’(p.190)</p>
<p>이 정도의 논리마저 주류법학은 외면해 온 사실을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다원성과 상호인정조차 차이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차이는 대립에서, 대립은 모순에서 자신의 진리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노랑과 파랑이 있다. 노랑과 파랑은 서로 무관심하고 다르다. 이런 전제에서 차이의 인정은 당연하다. 그러나 노랑과 파랑이 보색관계로 연관될 때 두 색은 대립한다. 보색이란 동일성과, 노랑과 파랑이라는 차이성의 통일에서 차이는 대립이 된다. </p>
<p>다원성은 상호무관심을 유지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원성의 인정상태란 이미 무관심한 상태가 아니다. 인정이란 상호간의 인정관계이고 이 관계자체가 하나의 동일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동일성만 인정하고 차이는 부정하거나 차이만 인정하고 동일성을 부정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대립관계에 있는 일방이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자립성을 유지하려면 상대를 배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적대적인 상대를 제거하면 자신의 존립기반도 무너진다. 주인은 주인이기 위해 노예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은 노예가 제거되는 순간 자신을 주인으로 모실 노예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종북과 동성애자의 다원성을 제거하려 한다면 그 다원성의 제거와 함께 자유주의자체도 붕괴시키게 된다. 상대를 배제함으로서 자신도 배제되는 대립관계가 바로 모순이다. </p>
<p>이 책 전체에서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혐오란 상대를 배제하고 심지어 제거하려는 대립관계의 다른 표현이다. 결국 저자는 차이의 인정만이 아니라 배제하기의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원성의 인정만으로는 이 대립을 완화할 순 있으나 해결할 순 없다. 인정을 통한 해결은 혐오표현의 가해자들이 이런 완화와 지연에 동의·동참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대립과 배제로 관계를 몰고 가는 주동자들이다.  </p>
<p>‘혐오표현’이란 용어의 정의에서 부터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의 자유’가 왜 대립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너무 흥미진진하다. 반론을 충분히 소개하고 근거를 대며 재반론하기에 진영논리에 선다는 불편함이 없이 우리는 진리에 다가서는 즐거움을 선사받는다. 또한 이 과정에서 법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는 저자의 집요함과 성실함을 만나게 된다. 단 1그램의 라듐을 얻기 위해 수만톤의 광물을 정제하는 퀴리부인처럼 저자는 광범위한 참고자료를 동원하고 걸러낸다. 그러나 성실함에 더해 창의적이고 탁월한 정치적 안목이 없었다면 이 책은 평범한 법해설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p>
<p><strong>정치</strong><br />
 저자는 종북이란 단어를 혐오라는 개념에 융합함으로서 종북좌파란 틀에서 혐오피해자란 틀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배제대상일 뿐이었던 피해자들은 그 배제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로 새로이 탄생한다. 전체를 위해 배제되어야할 ‘부분’에서 ‘전체자체’로, 보편을 방해하므로 제거해야할 ‘특수집단’에서 보편적 인권을 가진 ‘보편자체’로, 주동과 피동이 뒤바뀐 것이다. </p>
<p>혐오표현을 주도하는 가해자들은 ‘종북게이’ ‘종북페미’(p.107)처럼 다양한 소수자를 하나의 적으로 주조해내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 피해자들은 이들 가해자들에 대항하는 주체로 단결하지 못했다. ‘나는 동성애자이지만 종북은 아니야’이런 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혐오표현’의 피해자란 개념을 통해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가장 억압받은 피해자가 자기의 억울함을 뛰어넘어 덜 억압받거나 다르게 억압받는 피지배자와 단결할 보편의 논리를 찾아냈다. 그 점만으로도 이 책은 법률문제를 넘어 정치주체를 확장하고 통일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의 정치적 천재를 발견한다.  </p>
<p>또한 저자는 혐오자체가 가진 정치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구분해낸다.</p>
<p>‘혐오표현은 사상의 자유시장이 없어도 표출되는데 아무지장이 없다. 오히려 과잉이 문제다…사상의 자유시장이 있다면 그곳에서 보호되어야 할 것은 「혐오표현」이 아니라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하는 표현」이다’(p.206) </p>
<p>저자는 ‘과잉’으로서의 혐오표현이 권리가 아니라 권력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축적된 권리는 산술적이 아닌 기하급수적 권력으로 등장한다. 헤겔은 사면권에서 이같은 권력을 발견한다. 사면권은 인민이 지배자에게 위임한 적이 없는 권한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법밖에 있다. 권리 대 권리가 아닌 권리 대 권력관계에서 평등한 상호인정관계란 성립되지 않는다. 혐오자체가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혐오가 관념의 표시에 불과한 표현자체라면 그 관념의 인정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권력관계에 혐오표현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바로 현실의 힘으로 전화한다. 언어의 물질성이다. 혐오표현과 혐오행동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p>
<p>한편 저자는 ‘더 가난한 자가 덜 가난한 자를 끌어내리는’ ‘약자의 항변’(p.101)에서 전가되는 모순, 심화되는 모순을 발견한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친위대가 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러시아 이반4세의 오프리치니나, 이승만의 서북청년단은 당시 사회의 최하층민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예를 제거하면 주인 자신도 제거된다는 원리를 깨달은 자들은 노예를 제거하는 대신 노예를 상층노예와 하층노예로 분리하여 대립하게 한다.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인은 노예를 제거하지 않고도 노예가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일시나마 유지할 수 있다. 약자의 항변은 전가된 모순관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저자는 질문을 아예 바꿀 것을 제안한다.</p>
<p>‘누가 더 큰 피해를 입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누구도 이런 피해를 입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pp.313-314) </p>
<p>인정관계의 불평등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을 넘어서 불평등을 만든 조건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상대가 처한 조건을 바꾸지 않고 사상만을 바꾸겠다는 것은 사상의 도둑질이다. 칼 슈미트는 정치가 ‘적과 동지’를 나누는 일이라고 했다. 아감벤은 슈미트의 정치론이 결국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를 만드는 배제와 제거의 철학임을 폭로했다. 아렌트는 적과동지구분론은 정치실패의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p>
<p>정치성공사례에서 정치의 정의로 찾고자 하는 학자들은 비스마르크를 인용한다. 어떤 대립상황에서도 공통점이라는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에게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러나 ‘적·동지구분론’과 ‘가능성의 예술’론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가능성의 예술이 대립관계 해소라는 관념적 처방에서 그치지 않고 적대관계를 해결할 수 있으려면 대립관계의 근거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저자는 바로 객관적 근거자체의 변화에서 모순의 해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근거가 모든 모순을 해소하진 않는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시킨다. 상품교환의 모순이 화폐의 출현으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과 같다. 모순해소책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p>
<p>대립관계를 계속 해체하며 지연시키는 길과, 대립의 격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길이다. 전자의 길이 상품에서 화폐로 전화하는 모순을 지연시키고자 화폐사용을 거부했던 푸르동의 길이었다면, 후자의 길은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하며 전가된 모순이 결국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붕괴시킬 것을 예측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한 맑스의 길이다.<br />
어느 경우에도 그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종북페미, 종북게이가 아닌 혐오피해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발견한 일이야말로 그래서 진정 정치적이다. </p>
<p><strong>윤리</strong><br />
 저자는 이 책을 종북표현에 대한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저자를 발견하게 된다. 정치적 지위의 정점에서 부당한 권력에 의해 패배한 지도자들은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비극적 영웅으로서도 남는다. 이름 없는 존재로 죽는 것보다 비극적 영웅으로서 최후를 마치고자 하는 것은 상징과 기호로서 자신을 남기려는 정치적 선택이다. 자신을 상징으로 적과동지의 대립관계를 지속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다른 선택의 길을 보여준다. </p>
<p>‘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바로 혐오표현의 피해다. 피해자가 그 피해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피해자 자신의 마음의 변화다. 당신의 피해가 이만큼 컸다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주변의 노력은 피해자를 지탱해 줄 수는 있어도 피해를 극복할 수는 없다.’(p.317)  </p>
<p>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왕으로서 죽는 정치적 선택 대신 최하층의 시민으로 돌아가 성찰하는 윤리적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왕이란 상징으로 물신화하는 길이 아니라 평등한 이웃으로, 관계자체로, 권력이 아니라 권리로, 연대하는 길을 택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혐오표현을 한 가해자를 적으로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또한 현실에서 자신을 정치적 희생자이자 비극의 영웅으로 만드는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저자는 법으로도 정치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문제영역에서 상징으로서의 정치대신 존재로서의 윤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윤리를 통해 새로운 정치, 새로운 법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법과 정치와 윤리를 전체라고 가정하면 헤겔의 말처럼 “전체는 주체”이다. 주체는 전체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 책은 혐오란 화두 하나를 들고 주체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을 함께 걸어볼만 한 가치가 충분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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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글 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 &#8211; 베네딕트수녀회 빛둘레 기고글 2019.9.20</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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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0 Sep 2019 13:56:1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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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미학]]></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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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베네딕트수녀회 소식지인 빛둘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지면제약상 전체글을 다 싣지는 못하게 되어 원문을 여기에 싣습니다. 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 사진가 이시우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쏘아댔다던 처절한 총성은 이제 이 골짜기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쏘아도 맞출 수 없었던 공포대신 처연한...]]></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베네딕트수녀회 소식지인 빛둘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지면제약상 전체글을 다 싣지는 못하게 되어 원문을 여기에 싣습니다.</p>
<p><strong>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strong></p>
<p>                                                                                                        사진가 이시우</p>
<p><img src="http://www.leesiwoo.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19/09/45-300x201.jpg" alt="" title="45" width="300" height="201" class="alignright size-medium wp-image-8131" /><br />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쏘아댔다던 처절한 총성은 이제 이 골짜기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쏘아도 맞출 수 없었던 공포대신 처연한 신록의 해일이 산하를 덮습니다. 그리하여 봄이면 새로이 태어나는 아! 연두빛 조국’</p>
<p><strong>적대</strong><br />
땅위에서 일어나는 적대행위는 대립관계에서 시작됩니다. +1과 –1은 대립됩니다. 그리고 이 경우 대립의 결과는 0입니다. 이는 마치 동쪽으로 한걸음을 간 뒤 다시 서쪽으로 한걸음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음과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로의 복귀입니다. 동쪽 일보와 서쪽 일보의 대립은 상쇄되어 사라지지만 그러나 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길 자체는 아무런 대립도 없습니다. 길 위에 선자들의 대립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서 일보의 대립은 길 자체의 무관심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엔 동·서 일보의 대립과 길의 무관심이 대립합니다. 땅은 전쟁에 무심하지만 전쟁의 대립관계에 의해 땅 역시 대립물이 됩니다. 그리고 땅은 영토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적 생명을 시작합니다. 전쟁과 무관했던 자연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구조입니다.     </p>
<p><strong>경계</strong><br />
경계는 한계입니다. 어떤 것의 성질은 한계에 의해 규정됩니다. ‘나’라는 규정은 곧 나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한계는 나 아닌 것, 나의 타자이기도 합니다. 나를 규정하면서 나를 부정하는 이중성이 한계입니다. 아픔은 생사의 경계입니다. 생명 속에 들어온 죽음, 죽음 속에 들어온 생명이 아픔으로 자기 존재를 나타냅니다. 아픔이 치유되면 생이고 아픔이 심화되면 죽음입니다. 그리하여 생·사의 중심은 아픔입니다. 경계가 중심입니다. 생사의 중심이 아픔이듯이 사회흥망의 중심도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무장지대는 우리의 경계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중심입니다. 경계는 남·북 그 자체이면서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타자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를 영토의 경계로 선포하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한민족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남북의 경계는 한반도가 아니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입니다.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삼지 않으면 북은 남을 수복해야 할 지역으로 볼 것이고, 남도 북을 수복해야할 지역으로 볼 것입니다. 수복이란 말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다는 것이고, 남이든 북이든 한편이 항복하고 투항하지 않는 이상 수복을 실현할 방법은 전쟁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통일을 수복으로 생각하는 한 땅은 가장 적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기간 경계를 인정하고 살아야할 운명입니다.<br />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비무장지대는 평화지대로 이름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경계로는 여전히 남습니다. 통일협정이 체결되면, 예를들어 연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연방제식으로 통일협정이 체결되더라도 평화지대는 다시 이름을 바꾸겠지만 경계로서는 여전히 남습니다. 따라서 연방제통일을 뛰어넘어 모든 체제와 제도가 통일되는 자주독립국가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가능할지 바람직할지를 별개로 하더라도, 이 경계선은 남북을 규정하면서 남북이 아닌 타자로 존재할 것입니다. 따라서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남북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상대를 대할 것인가의 모든 태도를 결정합니다&#8230;&#8230;.</p>
<p>글 베네딕트수녀회원고-비무장지대로부터의 사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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