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으로 주조한 활자-’이정희.다시 시작하는 대화’ -민중의소리 서평


항쟁으로 주조한 활자-이정희.다시 시작하는 대화

여기 항쟁의 복판에서 한권의 책이 태어났다. 항쟁이 아니었으면 신원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아니 항쟁 속에서도 배제의 눈초리와 싸워야 했던 통진당 대표의 저술이란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돋보인다. 프랑스 혁명의 한계선은 혁명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은 외국인노동자, 성소수자들 앞에서 그어졌다. 만약 이석기, 한상균, 이정희가 항쟁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이 항쟁의 한계선도 그들 앞에서 그어질 것이다. 따라서 그 경계에 선 자가 던져온 대화제의는 항쟁의 경계획정과 관련하여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

대화
그러나 저자의 대화시도는 상처받은 자들이 그러하듯 여전히 조심스러움이 배어있다.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시간에 비하면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오늘은 무척이나 감사한 날이다.’(p.22)

대화란 공동체 안에서가 아니라 공동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대신 불평등을 전제한다. 가라타니 코진은 대화란 가르치고-배우기의 관계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평등한 대화란 없다. 가르치기 위해 배워야 하고, 배우기 위해 가르쳐야 한다. 대화는 시작하기가 어렵다. 남보다 위에 서서, 심지어 남과 같은 자리에 서서도 대화는 어렵다. 저자는 오직 ‘아래에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p.195)고 말한다. 자발적 불평등으로 남보다 아래에 설 때만이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서울대병원 간병인들과 함께 창가에 숨어서 밥을 먹으며 ‘은근히 서러워졌던’(p.115)경험을 말한다. 서러운 마음으로 창밖의 세상을 바라본 경험이 있기에 그의 대화시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배우는 자세만으로는 대화가 안된다. 가르침이 없다면 그 또한 대화가 아니다. 가르침의 방편일 진보정치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정치의 역할은 이 길로 가자고 말하고,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 장애물은 어떻게 치울 것인지 방법을 말해주고 좀 더 빨리 갈수 있게 돕는 것뿐이다.’(p.255)

가르치는 자세가 아닌 ‘돕는’자세에서 저자는 코진의 방법을 극복한다. 내가 내려서는 것은 상대가 올라서게 하기 위함인데 그것이 가르치는 자세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한편 개인 간의 대화조차 그 밑바탕에 사회적 장벽 있음을 발견하는데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이 있다. 이제 저자는 노동자가 대화의 주체로 올라서기 위해 대등한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대등한 지위에 올라서는 유일한 방법이 노동3권 행사다.’(p.155)

노동3권. 말로는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냉혹하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결코 평등한 대화를 할 수 없는 법적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자는 30년 전에 유행한 노동법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노동3권은 노동자가 대화의 주체로 인정받기위한 전제이다. 그러나 내가 준비되었다고 대화가 가능해지지 않는다. 대화상대를 찾기가 어렵다. 인정의 대상이 없다는 것은 내가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의점 알바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이다. 알바는 자신의 노동3권을 주장할 상대를 찾는 것부터가 어렵다. 저자는 경제적・조직적 종속성이란 새로운 개념을 적용하여 이 문제를 푼다. 그리하여 가맹점 사장님이 고용한 알바라는 외형의 틀에 갇히지 말고 알바들의 노동조건을 실제로 바꿀 수 있는 경제적 결정권을 가진 존재, 프랜차이즈본부를 진짜 사장으로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p.226) 저자가 사회적 묵언기간동안 노동문제에 얼마나 깊이 천착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은 이 책의 백미이다.
인정주체는 반드시 노동자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지 않는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은 계급이 아니라 계층이다. 저자가 노동자계급 내 계층에 주목하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 착취 받지만 바로 그래서 현행법의 틀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키기를 갈망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행법의 틀도 뛰어넘을 수 있다. 그것이 진보적 상상력이다.(p.191)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뀌는 것은 구체성을 갖는 것이다. 구체적이란 대립하고 모순되는 모든 측면과 계기를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정규직과 청년노동에 노동계급과 사회전체의 문제들이 집약되어 있다. 그것이 한명의 노동자에 이르면 구체성은 더 많은 복잡함을 포함하게 된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 다친 고3의 공 모군,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온 대학생 시영씨에게서 저자는 새로운 주체를 발견한다. ‘주권자’이다.

주권자인 국민은 헌법을 통해 연소자의 노동을 특별히 보호하도록 명하였지만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기 어려운 청소년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특별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p.209)

평상시 우리는 소비자, 근로자, 대중으로 불린다. 그러나 저자가 항쟁의 시대에 불러낸 주체는 ‘주권자’이다.

주권자

좀 낯선 시각으로 주권문제를 접근해보기 위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첫 장을 펼쳐보자. 그는 ‘주권자란 예외를 결정하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주권자란 독재자를, 예외란 헌법의 적용이 정지되는 비상사태를 말한다. 헌법은 헌법 스스로의 한계를 결정할 수 없다. 그 한계를 정하는 자는 헌법 밖에 있다. 그래서 헌법의 예외는 주권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 쿠데타가 그렇고 통진당해산과 더불어 진행된 국회의원직 박탈이 그렇다. ‘계엄령만이 답’이라고 외치는 이들의 의지를 이론적으로 표현하기에 나치전범재판정에 섰던 슈미트의 정의처럼 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시민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근거 역시 있다. 도노소 코르테스는 부르주아지를 ‘토론하는 계급’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그의 사상을 더 정확한 표현으로 만들기 위해 한글자만 추가하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부르주아지는 ‘토론만하는 계급’이다.” 자유주의의 본질은 결전의 순간에 결정을 하는 대신, 토론을 개시하려는 데에 있다. 결정대신 토론을 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이다. 이같은 비판은 코르테스만의 것은 아니다.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저자 역시 토론만 잘하는 소위 ‘합리적 진보정치’란 이름의 자유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정치인이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면 지지자들이 만들어지고 박수가 쏟아진다.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 기대를 모은다. 거기까지다.’(p.127)

저자가 말한 ‘거기까지’란 토론만 하는 자유주의의 한계선이다. 정치적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헌법안의 진보’(p.126)역시 본질은 자유주의이다. ‘정치적현실주의는 진보정치의 영토를 넓히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는 수구세력의 자기장 확대로 나타났다’(p.125)는 저자의 통찰은 자유주의가 수구를 강화시키는 역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토론권이 아닌 저항권이 독재주권을 대체할 수 있는 민중주권의 수단임을 말한다.

민중이 주권자로서 지위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저항권의 행사로서 헌법과 법률의 틀을 넘어 합법으로 시인되게 하는 것, 이것이 진보정치에 필요한 상상력이다.(p.142)

주권자는 법밖에 있으면서 법안에 있는 자이다. 법 밖에서 법의 한계를 결정하되 다시 그 주권을 법안으로 끌고 들어가 합법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권력의 축적체계이다. 그리고 축적된 권력의 성과는 일상이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주권자는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읽기에 저자는 이것을 ‘헌법을 통한 주권자의 명령’(p.209)이라고 표현했다.

명령
11월 5일 촛불집회에서 김영호전농의장은 11월 12일 정오까지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국민의 이름으로 명령했다. 그 뒤 ‘국민의 명령’이란 말이 항쟁의 언어로 정착되었다. 주권자인 민중이 ‘명령자’로서의 지위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버티는 박근혜에 대해 탄핵결정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공권력을 장악한 독재주권과 달리 민중주권은 명령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단이 미흡한 것이다. 저자는 그 수단을 조직에서 발견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조직을 이루는 것이다. 조직 중에서도 노동조합과 정당이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pp.251-252)

노조나 정당의 가장 중요한 일상은 토론과 결정이다. 이들 조직이 일사불란한 수구단체들과 다른 점은 ‘토론’에 있고,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결정’에 있다. 토론만하는 조직이 아니라 토론하여 결정하는 조직이었기에 오늘날 민중주권의 성취는 가능했다. 전원참여, 전원발언, 전원실천의 원리가 조직의 일상으로 더욱 뿌리내려야 한다. 그것이 명령자로서의 주권자가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제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9장에서 ‘귀족들은 지배하고 명령하기 원하며, 인민들은 지배받지 않고 명령받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한다면, 인민은 지배받지 않게 해 줄 지도자에 대해 그의 명령을 따를 용의를 가진다. 독재주권자는 지배와 명령을 원한다. 민중주권자는 비지배와 비명령을 원한다. 그러나 민중은 비지배를 실현시킬 지도자라면 그 명령을 따를 용의를 가진다. 명령자는 주권자의 힘을 표현하는 지위이다. 검증된 지도자와 실천하는 민중의 유기적 조직이야말로 ‘주권자로서의 힘을 발휘’(p.196)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리하여 조직된 비폭력은 폭력보다 힘이 세고, 조직된 폭력은 비폭력보다 평화적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모순을 해결하는 근거가 바로 조직력인 것이다.

공산당선언이 고전이 된 것은 저자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 상식을 집약했기 때문이다. 항쟁이 진행되는 생생한 순간, 항쟁의 용광로에서 날 것 그대로의 살아 꿈틀거리는 ‘상식’을 집약하는 것은 모든 주권자들의 의무이고 기쁨이다. 만일 이 책이 항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면 항쟁의 경계를 확장할 기회는 아직도 우리 손에 남아 있다.

http://www.vop.co.kr/A000011305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