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제작한 달력입니다. 강화는 한반도 역사의 자궁으로 비유됩니다. 강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며 서로의 힘을 모아 강화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참 의미 잇는 작업이었습니다. 사진과 사진글은 제가 맡았습니다.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제작한 달력입니다. 강화는 한반도 역사의 자궁으로 비유됩니다. 강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며 서로의 힘을 모아 강화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도 참 의미 잇는 작업이었습니다. 사진과 사진글은 제가 맡았습니다.

밤하늘에 음각된 듯 초지돈대가 조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 빛날때 만이 역사는 자신의 것이 됩니다. -초지돈대 1875년 9월 일본의 운요호가 강화해협에 나타나 초지진에 포격을 하고 물러갔습니다. 이듬해 일본은 운요호사건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1876년 2월2일 강화조약이 체결됩니다.

외규장각 치미에 걸린 빛이 눈부셨습니다. 계몽은 역사의 빛입니다. 신화와 혼돈을 역사로 바꾼 힘입니다. -외규장각 정조는 즉위 즉시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이는 왕실 도서관이자 최고연구기관이었습니다. 정조는 강화에 규장각의 분원인 외규장각을 짓게 합니다. 1782년 2월의 일입니다.

회담을 통해 평화조약을 체결한 연미정이 자리한 곳은 어쩌다가 다시 정전의 현장이었습니다. 평화만이 진정한 역사의 승리입니다. -연미정 1627년 1월 여진족이 일으킨 후금의 군사 3만이 조선을 칩니다. 정묘호란입니다. 인조는 1월29일 조정을 이끌고 강화로 피난을 오게되고 한달간의 이견조정을 거쳐 3월3일 화의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교동의 한 폐가에서 고단했을 유배생활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있어 역사는 더 어두운 곳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동폐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3월23일 강화에 유폐됩니다. 그뒤 강화와 교동에서 15년을 살았습니다.

정렬된 기왓장 틈새로 이름모를 풀들이 피고 집니다. 스스로 일군 대지가 아닌 이상 기왓장 틈에 튼튼한뿌리를 내릴 순 없는 일입니다. -용흥궁 1849년 6월6일 강화도령 원범이 왕이되어 강화를 떠납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벽에 막혀 뜻을 펼 수 없었습니다.

몽골의 유라시아제국과 고려의 경계선이었던 승천포는 여전히 유라시아지정학의 표현입니다. 철조망사이로 흐르는 바다가 유달리 푸른 것은 하늘이 푸른 때문입니다. -승천포 1232년 7월 최우정권에 의해 강화로의 천도가 단행됩니다. 유라시아제국인 몽골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로서 한강하구는 광폭하게 유라시아체계에 편입되는 순간을 맞게됩니다. 갯벌로 흙탕물인 한강하구가…

석상과 함께 비를 맞으며, 수백년동안 비바람 맞을 것을 알면서도 부동의 표정을 조각한 이유를 알듯 했습니다. 신념이란 어둠에서 밝음을 볼줄아는 열린 마음입니다. -정제두묘 문인석 1709년 8월 하곡리에 정제두선생이 이사왔고 제자들이 그의 뒤를 따라 왔습니다. 그의 학문은 이광명, 신대우, 이광사, 신작, 이긍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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