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넷째날-유엔총회의 유엔사 해체 결의2004/06/23 1084


하늘은 제 얼굴이 보고 싶어 비를 내렸습니다. 물 고여 길은 끊어져 있었습니다.

*어제 새벽 우울한 전설같던 잿빛 안개가 자꾸 마음에 잡힙니다. 김선일님. 평화의 땅으로 상천하시길….

유엔총회의 유엔사 해체 결의

관심

걷기 명상을 시작하기 전 사람들로부터 목표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유엔사해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했다. 관심이란 사람이 대상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초기 형태이다. 관계의 시작을 관물. 즉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 즉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생각한 것이다. 관물이 아닌 관심. 마음을 보는 것에서부터 관계는 시작된다. 관심 이후에 관물이 가능한 까닭이다.

6월항쟁 때의 일이다.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전경차에 실려 용인경찰서까지 호송됐다. 이미 유치장에 수용할 인원이 넘어섰기에 우리는 강당으로 모셔져 귀빈 대접을 받게되었다. 반장이 나와서 이렇게 모시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전경차에 발길질로 쳐넣을 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분위기에 오히려 우리가 어리둥절 했다. 함께 끌려온 사람중에 ‘도대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이란 무엇입니까?’라며 토론을 해보자는 식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 반장님께서 분필로 칠판에 물수변에 갈거자를 멋지게 쓰더니 돌아서서 말하는 것이었다. “저의 개똥철학의 견지에서 말씀드리면 물 흐르는 대로 가는 것. 이것이 법입니다. 자! 지금은 여러분을 풀어드리는 것이 물 흐르는 방향이니 귀가하십시오. 차비는 못 드립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 반장의 개똥철학이 참으로 일리가 있었다. 법은 그 단정적 언어체계 때문에 객관 진리인양 생각되기도 하지만 엄연한 가치형태일 뿐이다. 사람들의 가치관계를 반영한다. 상품이 사람들의 가치의 교환적 형태라면 법률 또한 사람 사이의 가치관계를 규정할 뿐이다.
김포대교를 건너다 내려본다. 한강하구로 향하는 황토물이 수중보에 걸려 용트림하고 있다.그 격동치며 흘러가는 물을 따라 법도 문명도 역사도 흘러가야 하리라.

유엔사해체 결의

유엔사 해체를 둘러싼 법리 논쟁 중 가장 큰 화제거리가 1975년 유엔총회의 유엔사 해체 결의에 대한 해석여부 일 것이다. 유엔헌장에는 국제법의 실효성 있는 법원에 대해 두가지 모호한 조항이 있다. 유엔안보리와 유엔총회의 결의가 그것이다. 경의선 지뢰상호검증단에 대한 유엔사의 갑작스런 개입에 대해 미국은 75년 유엔총회의 유엔사 해체결의를 이행하라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유엔사는 유엔안보리에서 결의해야지 해체될 수 있다며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엔총회 결의는 권고적 성격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그렇지 않다.

유엔은 그 설립 당초부터 일반적인 규범내용을 가지는 총회결의를 선언의 형식으로 채택하여 왔다. 유엔의 이러한 활동은 본래 권고적 성격을 가지는데 그치는 총회결의의 법적 효과에 대한 문제의식을 낳았다. 또한 국제법의 형식적 법원의 유형에 관한 재검토에 관한 논의도 초래하였다. 이러한 결의 중에는 그 후 실질적으로 똑 같은 내용의 조약이 채택되어 조약화된 것이 있다. 요컨대 일단 총회결의로서 채택되고 나서 그 규범내용을 확대`충실히 한 조약의 형성이 이루어지는 2단계의 절차를 취한다.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입법의 하나의 형태로서 주목된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로는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의 상호관계가 있다. 국제인권규약은 전문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우주의 법적 지위에 관한 선언과 우주조약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조약도 전문에서 동 선언을 언급하고 있고 양자의 규범내용도 거의 중첩된다. 심해저원칙선언과 유엔해양법협약 제11부의 상호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심해저원칙선언의 내용의 대부분은 유엔해양법조약의 일부로서 수용된 것이다.
그러나 총회결의와 그 후에 형성된 조약의 내용은 반드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재산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국제인권규약에서는 관련조항은 없다. 또한 국제인권규약에 공통하는 제1조에서 민족자결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세계인권선언에는 없다.1960년경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가 독립하고 유엔에 가입하였다. 이들 국가는 자신들이 독립을 하기 전에 형성된 전통적 국제법에 비판적이었고 유엔총회결의를 통하여 기존의 국제법의 변혁 및 수정을 구하였다.
유엔총회 결의를 매개로 한 국제법의 형성의 형태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제시한 것은 1966년의 남아프리카사건에 관한 국제사법재판소판결이었다. 남아프리카는 구남서아프리카를 유엔의 신탁통치제도 하에 이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국으로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디오피아 및 리베리아는 구연맹회원국으로서 남아프리카를 고소하였다. 식민지독립부여선언에 관한 유엔총회 결의 1514(XV)는 제2차 대전후의 비식민지화의 과정에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했다. 이 결의의 의미는 나중에 국제사법재판소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한국전쟁의 경우에는 소련을 배제하기 위해 일부러 유엔안보리가 아닌 유엔총회 결의를 이용하기도 했다.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중간선거를 승인하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설치했다. 유엔의 이 결정은 소련이 이미 복귀한 안전보장이사회에서가 아니라 유엔 총회에서 내려졌다.
1973년 11월 21일 제 28차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한국문제에 관한 합의 성명을 채택하였는데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의 해단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총회결의에 따라 해체되었다. 이처럼 유엔총회 결의도 단순히 권고적 성격만 갖는게 아니다.

우방측 결의
유엔군사령부가 1976.1.1을 기하여 해체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동 일자로 남한에는 유엔 기치하의 군대는 잔류하지 않도록 상기 협의가 완결되고 정전협정 유지를 위한 대안이 마련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공산측결의
1.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기치 아래남한에 주둔하는 모든 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유엔총회 결의는 미국으로서도 거부할 수 없는 대세였기에 키신저도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를 인정한다.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제 31차 유엔총회 연설문(1976.9.30)
(…) 미국은 한국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법적 장치인 정전협정이 계속 유지되거나 혹은 다른 조치로 대치되는 것을 전제로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75년 유엔사 해체에 대한 유엔총회 결의는 당시 큰 나라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국제무대에 당당하게 나서기 시작한 제3세계 국가들의 역사적 승리였다. 유엔총회결의가 효력이 있는가 유엔안보리의 결의가 구속력이 있는가 하는 법리 논쟁은 이 경우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의 가치가 이미 그 법의 효력과 형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물의 흐름이었다. 미국도 이러한 기세에 밀려 언젠가는 유엔사가 해체 될 것이라는 예상 속에 군작전통제권문제가 고민되었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미연합사와 같은 기형적인 군사구조를 만들어 작통권을 이양시키는 편법을 쓴 것이다. 이때야 말로 보슬비가 아닌 폭풍우가 필요한 시기였다. 민중의 역사적 진출은 항상 승리로만 장식되는 건 아니다. 실기하여 뜻한 바 목적을 달성치 못할 수도 있고, 능력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상대방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주도권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의 첫 대면을 관물이 아닌 관심으로부터 시작하라는 것도 그래서 의미 있다. 내가 주도하고 이끌어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