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6일째-유엔사는 없었다. 2004/06/26 1180


유엔사 경비대의 험비차량. 판문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엔사는 없었다

이시우

유엔사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6월25일 이라고 한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전쟁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안보리의 결의 어디에도 유엔군사령부란 말은 없다. 흔히 유엔군사령부설립의 근거로 제시되는 1950년 7월7일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S/1588)제 3항을 살펴보자.

`3.전기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의거하여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모든 가맹국은 이런 군대와 원조를 미국의 통합군사령부하에 제공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선 분명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d)가 아닌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를 말하고 있다. 즉 안보리는 <유엔군>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엔회원국들이 <제공>하는 <군사력>을 미국이 통솔하는 통합사령부가 사용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어디에도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한다는 표현은 없다.`

또한 이 결의안은 `권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권고(recommend)는 요청(Request)보다 훨씬 약한 표현이다. 그리고 통합군사령부에 제공하는 군대와 원조의 내용은 전적으로 회원국들에게 일임되어 있다. 게다가 한국은 유엔 가맹국이 아니었으므로 7월7일 결의에 권고적 또는 법적 구속력을 받지 않았다. 안보리의 결의의 효력은 유엔헌장 제25조의 규정에 의해 가맹국에 대해서만 법적 구속력이 있다. 제25조의 안보리의 결정(decision)은 모든 결의(resolution)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헌장 규정에 의한 `결정`에 한한다고 해석된다.

국제연합군이라는 명칭은 국제연합 헌장상에는 없는 것이다. 굳이 해석을 한다면 유엔헌장제43조 `모든 유엔회원국은 안보리의 요청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 혹은 그 이상의 특별 협정에 따라 …… 필요한 병력, 원조, 통과권을 포함한 편의를 안보리에 이용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에 의해 안보리의 지시를 받는 무장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43조의 전제조건은 `특별협정`이다. 특별협정은 1946∼47년의 체결준비 단계에서 미·소(美蘇)의 대립으로 답보상태에 빠진 채 성립되지 않아 본래의 국제연합군은 설치되지 않고 있었다. 실제에 있어 특별협정에 의한 국제연합군의 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제연합군의 창설은 어느 것이나 총회 또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에 입각하여 조직되었다.
한국전쟁에 있어서의 국제연합군은 안보리의 권고에 따라 15개국의 군대와 국제연합 결의에 앞서 군사행동을 취한 미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유엔헌장에 근거한 국제연합군이 아니라 이사회의 권고에 임의로 응한 가맹국의 강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유엔가맹국이 아니므로 이 결의는 명백히 가맹국 또는 미국에 권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결의가 한국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점을 눈치채고 맥아더에게 군작전지휘권을 재빨리 이양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통령 자신의 군통수권 일부를 포기하므로서 국가의 군사주권을 포기한 굴욕적인 사례가 되었다. 7월 25일 미국은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를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 Command)란 이름으로 명칭을 바꾸어 설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로서 7월7일의 결의는 갑자기 유엔군사령부 설립으로 둔갑되고 말았다. 이는 미국이 유엔의 결의를 일방적으로 왜곡한 과정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이다. 이같은 사실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50년 동안이나 국민적 차원에서 이런 문제점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가 이성에 기초한 최소한의 계몽시대도 거치지 못한 채 분단이란 이름의 신화에 사로 잡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한국전쟁에 대한 정당한 검토는 우리 시대의 이성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자이다.

유엔의 결의는 모순투성이

유엔의 참전결의에는 유엔헌장에 기초하여 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첫째, 유엔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의 적법성에 대한 문제이다.
유엔의 1950년 6월 25일의 결의(S/1501)에 의해 유엔은 당시의 한반도 사태를 내란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결의에서 북을 `북한`(the North Korea) 또는 북한당국(the authorities of North Korea)이라 표기한 반면 남은 `대한민국`(the Republic of the Korea)이라고 표기함으로서 남을 합법정부로 인정함과 동시에 북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엔 스스로도 한반도분쟁을 내란 사태로 파악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내란에의 개입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남북미국이 그들의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내란으로 투쟁할 때에 남북미국간에 침략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남북한간에도 침략에 관한 규칙이 적용될 수 없다. 일반 국제법상 내란은 국제법의 지배 밖에 있는 국내문제(Domestic affairs)이며 이에 대한 개입은 위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승인된다. A.V.W.Thomas와 A.J.Thama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란은 국제법의 지배 밖에 있는 국내문제라는 것은 일반 국제법에 의해 확립된 법칙이다.”

둘째, 유엔은 전쟁선언을 하지 않았다. 전쟁선포의 적법성문제는 1907년 `전쟁개시에 관한 조약`이 기준이 된다. 미 야전교범(FM27-10)도 헤이그 3협약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국제군사재판소는 독일의 주요 전범자들에 대한 기소장에서 독일의 조약의무 위반의 사실의 하나로서 동조약 1조의 위반을 들고 있다. 따라서 유엔의 결의와 권고는 전쟁선포에 해당하는 법적 조문으로서의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셋째, 유엔헌장에는 군사참모위원회가 유엔안보리의 재량에 맡겨진 병력의 전략적 지시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유엔사는 유엔도 아닌, 또한 유엔사령관인 맥아더도 아닌, 미국합참의 작전통제를 받았다. 7월7일의 결의를 다시 살펴보자.

`3. 전기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의하여 군대와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여사한 군대와 기타 원조를 미국 관할 통합사령부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며
4. 미국이 동 군대의 사령관을 지명할 것을 요청하며

이 결의가 유엔헌장에 보장된 군사참모위원회의 기능을 어떻게 무력화 시켰는지를 살펴보자. 유엔헌장 제46조와 제47조를 인용한다.
`제46조 ; 병력사용계획은 군사참모위원회의 도움을 얻어 안전보장이사회가 작성한다.
제47조3항 ; 군사참모위원회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감독하에 안전보장이사회의 재량에 맡겨진 병력의 전략지시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그러한 병력의 지휘에 관한 문제는 추후에 해결한다.`
여기서 전략지시(strategic direction)는 지휘(command)의 상위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유린하고 유엔으로 가야할 모든 권한을 미국정부에 귀속시켰다. 유엔군사령관은 유엔안보리의 전략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미 합참의 지시를 받게 되었고, 맥아더는 실질적으로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았다. 누가 봐도 유엔군사령부가 아닌 미군사령부로 비치어진다. 이는 미 합참본부의 전사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미 합참이 유엔군사령부와 직접 의사소통을 갖게 될 안전보장이사회 소속의 위원회 설치를 반대한 것은 유엔이 전략과 전술에 관계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유엔에서 초유의 일인 유엔사 구성 문제를 놓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치열한 음모를 진행했다. 미 합참의 전사기록은 그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50년 6월 마지막 주에 미국, 유엔 및 주한군사지휘부 간 3자 관계에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전쟁의 목표는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 누가 유엔사령관에게 전략지침을 제공할 것인가? 유엔군사령관은 유엔과 직접 의사소통을 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을 통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와 이와 유사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군사적 정치적 고려사항들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서로 뒤섞이었다.`

결국 이 모든 비정상적인 고려사항들은 유엔헌장의 원칙을 벗어나 미국이 이익에 충실하게 결정되었고, 미국에 의해 장악된 유엔안보리의 체제에서 유엔헌장이 보장한 군사참모위원회는 유명무실화되었다. 미국이 군사참모위원회를 통해 지휘한다는 것은 소련과 함께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미국으로서는 원치 않는 사항이었다. 미, 소등 5대 강국의 유엔 대표들에 의해 이 위원회 소속 관계자들의 급료를 지불하고는 있지만, 군사참모위원회는 지금까지도 유명무실한 단체로 전락되어 있다.
또한, 통합군사령부의 설치권고(1588호) 6항에 의하면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안보리에 대해 가지는 유일한 의무인 보고마저 `정기적인 보고서`가 아닌 `적절한 보고서`로 되면서 사실상 보고 의무마저 미국이 임의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유엔군사령부를 지휘하는 책임단위로서의 유엔안보리의 권한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엔사가 과연 유엔의 보조기관, 행정기관으로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가에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유엔사 탄생과정에서의 불합리성은 정전이후에도 한반도에서 불합리한 구조를 생산하는 원인이 된다.

유엔사는 한반도의 정전상태를 관할하며, 남과 북을 분할통치하는 실질적인 무력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정전후 유엔사의 존재는 민족과 외세라는 대립구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유엔이 책임있는 국제기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과거 불합리한 유엔의 결정에 대해 그 실수를 반성하고 유엔사의 위법성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외교부 조약국자료에 의하면 유엔사해체문제는 국제법의 한국적 과제 중 중요의제가 되고 있다.

유엔사는 미국의 국내법을 기준으로 해서도 위법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미국은 한국전에 대한 참전 결정도, 유엔사 설치에 대해서도 미의회의 비준이나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전쟁선포권을 가진 의회가 선전포고한 적이 없고,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전쟁권`은 1973년이나 되어서 제정되었으므로 향후 북미평화협정체결시 이를 의회에서 비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의회조사국(CRS)의 최근 보고서에서 내리고 있는 결론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의 대거 유엔가입으로부터 비롯된 75년 유엔사 해체 결의가 유엔사 탄생과정의 모순과 문제점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로부터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가장 쉬운 유엔사 해체의 수순은 미국이 유엔사 해체를 결의해서 유엔에 통보만 하면 된다.
오늘은 유엔안보리의 첫 번째 한국전 참전 결의가 있었던 날이다. 유엔사 해체의 그 모든 논의도 바로 이날의 모순에 찬 결정으로부터 비롯된다. 유엔사. 우리의 모든 현재를 50년전의 오늘이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