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해체 정리를 겸해서2004/09/11 1747

유엔사해체 정리를 겸해서

이시우
집에 돌아온 뒤 몇주가 지났다. 지난 두달간의 걷기 명상의 리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처럼 4시 반이면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두세시간 새벽을 걷고 돌아온다. 그러나 왠일인지 그때의 영감과 지혜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여유가 있으면 더 많은 사유와 글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던 기대는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듯 나는 일상으로 너무 빨리 돌아오고 있었다. 글 한줄을 쓰기가 어렵기만 하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발로 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다. 역사 또한 해석이 아니라 실천임 다시 또 알겠다.
이제 서늘해진 날씨라 여름옷을 정리한다. 흰옷4벌이 가지런히 접혀있다. 천천히 옷을 펼쳐본다. ‘유엔사해체에 대한 걷기 명상’ 두달간 나의 삶을 규정했던 글귀가 낡은 유서처럼 씌어져 있다. 떠나기 전날 마루에서 흰옷에 먹물을 찍어 글씨를 쓰던 장면이 생각난다. 옷에 글씨를 쓰기 전까지도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유엔사해체’는 북이 계속 주장해온 구호이기에 나는 다른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내가 쓰고 싶었던 말은 ‘유엔사 재조정’이었다. 한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질 그 어떤 분을 위하여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호를 개인이 임의로 바꾸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하는 것이 뒤이어 고민되었다. 결국 역사를 건드릴 자신없음과 이것이 개인의 행동일 뿐이라는 의미를 담아 유엔사해체‘를 위한’ 대신에 ‘에 대한’으로 글귀는 정해졌다. 글씨도 인쇄대신 직접 붓글씨로 쓰는 것이 좋았다. 사실은 붓글씨를 쓰면서 최종적으로 글귀가 정해졌다. 어떻게 보이게 할 것 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려는가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유엔사해체라는 구호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나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진실로 관심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유엔사해체가 진보적구호가 아니라 상식적 구호임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유엔사해체에 대한 나의 시도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편도 잃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만큼 유엔사문제가 좌파나 친북파의 구호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기본문제
그 첫 번째 이유는 보수세력, 나아가 호전세력조차도 유엔사의 북에 대한 점령통치권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에 의하면 1.유엔은 전체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2.한국에 ‘통일,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한다. 3.조선통일부흥위원단(UNCURK)를 설치하여 기존의 유엔조선위원단(UNCOK)의 한국통일에 관한 업무를 계승하고 한국에 대한 구제와 부흥에 관련된 일을 담당토록 한다고 되어 있다. 미국은 10월7일의 유엔결의안에 의거해 북 점령시 유엔군이 점령과 통치의 주체임을 주장했다. 즉, “한국의 역할은 인정하나 총선실시 전에 주권이 확대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면서 북한점령계획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평화적으로든, 무력으로든, 북의 붕괴든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국제법적으로 북쪽 지역에 대한 통치주체가 된다.
대한민국헌법 3조는 ‘大韓民國의 領土는 韓半島와 그 附屬島嶼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모순을 담고 있어 그 문제점이 심각히 제기 될 수 있으나 유엔사의 존재는 이 조항마저도 성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만일 통일헌법에 의해 ‘통일한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영토조항에 변화가 오게 되면 남측정부의 주권 포기와 북의 점력통치를 전제하고 있는 유엔사야말로 가장 큰 반국가단체가 될 것이다. 북의 점령을 상정하고 있는 남측의 호전세력조차도 북 점령후 유엔사가 군정주체가 된다는 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두 번째 이유는, 유엔사는 어떤 절차도 필요없이 당장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대통령이 전쟁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기회는 이미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사령관이 행사한다. 형식적으로는 군통수권자인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합의하여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는 1978년 유엔사해체에 대비하여 창설된 한미연합사창설 공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문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직을 겸임함으로써만 그 효력을 발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한미연합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은 동일인물이다. 국제법학회의 김명기교수에 의하면 여전히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유효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한미연합사체계가 아닌 유엔사체계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1994년 6월 14일 한반도 전쟁위기 때 한국의 대통령과 전혀 상의가 없는 상태에서도 북에 대한 3가지 침공 시나리오는 작성되었고, 그중 하나에 클린턴 대통령이 최종결정 사인을 하고 있었으며, 이미 오끼나와 해병대 병력이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사체계로 전쟁을 일으켜도 아무런 법적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안보리결의 때문에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미 1950년 안보리결의에 의해 창설된 유엔사가 아직도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이라크 보다 훨씬 전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군사주권조차도 차단시키는 유엔사에 대해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문제를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된다.

한국에서의 걷기명상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일본의 많은 평화운동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염이 허옇게 자란 원로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평화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왠만한 주제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선문제, 즉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문제나 해저탄광등에서 사망한 강제징용조선인들의 숨겨진 역사를 헌신적으로 발굴하고 추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외로 그분들은 유엔사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주한유엔사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놀라움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이 놀라움을 표시한 첫 번째 사실은 주한유엔사의 7개 후방기지가 일본의 중요 미군기지라는 사실이었다. 7개기지에는 도쿄와 그 주변의 요코다공군사령부기지, 요코스카해군사령부기지, 캠프자마 그리고 사세보의 미해군기지, 오끼나와의 후템마미해병대사령부기지, 카데나공군기지, 화이트비치해병대기지로 가장 중요한 주일미군 시설들이 포함된다. 이것은 1951년 9월 당시 수상이었던 요시다 수상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사이에 체결된 ‘유엔군지원에 관한 교환공문’ 일명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이라는 것에 의해 규정되었다. 애치슨-요시다 교환공문을 통해 한국내 유엔행동에 참여하는 군대에 대해 시설 및 역무를 제공키로 합의한데 기초하여 이들 기지를 유엔사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기지는 [일미안보조약]에 묶여 작전출동시 사전협의가 필요한 여타 주일미군기지와 달리 사실상 자유사용이 보장되어 있다. 일반적인 주일미군기지에는 일장기와 성조기만이 게양되지만 이들 7개 기지에는 유엔기가 게양되기 위해 마련된 세 번째의 깃대가 있고, 여기에 푸른색 유엔기가 게양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들 세 개의 깃발이 게양되어 있는 사진들을 제시하자 혹시나 했던 의혹은 온전히 해소가 되었다.
그들이 놀란 두번째 사실은 일본 자위대가 유사법제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유엔사통제 아래 한국전쟁에 자동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 역시 요시다 애치슨교환공문에 의해 규정된다. 일본은 유엔군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시설 뿐아니라 역무까지도 제공하도록 되어 있고 현재 7개기지에는 일본 자위대가 거의 예외없이 상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군의 요청에 언제든지 응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원산상륙작전에 일본의 소해부대를 파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유사법제가 논쟁 될 당시 일본국회 공청회에 참석한 관방장관은 한의원이 요시다-애치슨공문은 아직 유효한가라고 질문하자 “여전히 유효하다”고 대답함으로써 유사법제와는 관계없이 자위대가 유엔사에 의해 작전통제됨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활동가들에게 희망을 준 사실도 있었다. 유엔사가 해체되면 유엔사에 편제된 7개 후방기지는 90일 이내에 철수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954년 2월 19일, 미국과 일본은 ‘유엔군 지위협정’을 체결하여“유엔군의 합동회의를 통하여 일본정부의 동의를 얻어 미·일안보조약을 근거로 미국은 일본의 시설 및 구역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유엔사에 대한 기지제공의무는 유엔군철수 90일 이내에 종료하도록 되어있어 유엔사가 해체되면 유엔군의 일본내 기지 사용권도 소멸된다. 75년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사해체가 결의된 이후 미국으로서는 일본내 기지사용권의 문제를 심각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언젠가는 닥칠 유엔사해체에 대비하여 일본과 함께 유사법제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유사법제 이전에 유엔사가 해체되었더라면 일본의 주일미군기지반환운동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이 그들에게 다시 아쉬움을 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도 유엔사해체는 일본 평화운동에 큰 의미를 던진다. 평화헌법9조의 사수를 최고의 목표로 싸우고 있는 현재 일본 평화운동의 상황에서 유엔사는 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한일간 평화운동이 그간 국경을 전제로 한 연대운동이었다면, 유엔사해체운동은 연합운동으로 발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위
유엔사해체운동이 갖는 포와 폄 즉 범주에 대해 누군가 물어 왔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다음과 같다. 현재 미국이 해체를 결심해서 유엔안보리에 통보하면 가장 간단하게 마무리 된다. 이것이 만만치 않을 때 혹은 이와 달리 병행해서 추진해야 할 길이 있다면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이끌어내는 방법과 유엔총회 결의를 재확인 하는 방법 두가지가 가능하다.
지금까지 유엔사관계자들에게 75년 유엔총회의 해체 결의를 왜 이행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면 ‘유엔총회 결의는 원래 권고적 성격이지 구속력은 없다. 유엔안보리 결의만이 구속력이 있다’고 이야기 해왔다. 그러나 유엔총회 결의 또한 유엔헌장상에 구속력이 인정되고 있으며, 유엔은 그 설립 당초부터 일반적인 규범내용을 가지는 총회결의를 선언의 형식으로 채택하여 왔다. 이러한 결의 중에는 그 후 실질적으로 똑 같은 내용의 조약이 채택되어 조약화된 것이 있다. 요컨대 일단 총회결의로서 채택되고 나서 그 규범내용을 확대, 보완하는 2단계 절차를 거쳐 조약이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예로는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의 상호관계가 있다. 국제인권규약은 전문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우주의 법적 지위에 관한 선언과 우주조약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조약도 전문에서 동 선언을 언급하고 있고 양자의 규범내용도 거의 중첩된다. 심해저원칙선언과 유엔해양법협약 제11부의 상호관계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심해저원칙선언의 내용의 대부분은 유엔해양법조약의 일부로서 수용된 것이다. 따라서 75년 유엔총회의 결의에 참여했던 국가들을 설득하여 유엔사무총장이 이를 재해석, 실행하도록 청원하는 방법이 있고, 아예 유엔안보리국가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여 안보리 결의로 채택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범위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은 주체문제이다.
유엔사문제는 한국민 뿐아니라 일본인들도 직접적 이해 당사자이기에 일본과 연대를 넘어선 연합의 관계를 형성하여 풀어가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의 주체가 한일 양국민인것이다. 민족적 주제인 통일에 기여 하지만 국제정치학적 주제인 평화문제를 자기 범주로 명확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유엔사해체 운동에서 확인된 주체의식은 향후 동아시아의 평화연대를 형성하는데 민족을 뛰어넘는 귀중한 평화운동주체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실천
관심 즉 마음을 본다는 것이 이번 걷기명상의 화두였다. 이제 돌아와보니 세상은 관심 그 이후를 요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걷기가 아닌 새로운 실천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또 그 일을 행할 당사자들의 의견을 구해보지도 않고 나는 허겁지겁 무책임할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저 참고가 될 상상력으로만 이해된다면 좋겠다.
하나는 한강하구수역에 배가 오가도록 하는 일이다. 한강하구수역은 유엔사의 행정적 관할구역이지만 군사분계선도 비무장지대도 존재하지 않는 남북민간공용수역이다. 정전협정 상에 보장된 이것만이라도 성사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인천 강화 김포 파주시민들이 주체로 서야 힘을 받을 일이다.
둘째는 비무장지대안에 있는 유일한 민간인 마을인 남측의 대성동과 북측의 기정동에 게양되고 있는 태극기와 인공기 대신 한반도 단일기를 게양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대성동은 한국민이 살지만 관할권은 역시 유엔사에 있기에 유엔사와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깃발은 깃대 높이가 100m에 이르고 깃발의 면적 또한 대단하기 때문에 깃발을 한번 교체할 때마다 200만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고, 이는 대성동 주민들이 부담하고 있다. 단일기 깃발은 국민들이 모금을 해서 제작과 관리를 하는 것으로 하고 유엔사에는 이것의 허용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역에 관계없이 벌일 수 있는 운동이란 점에서 폭넓은 참여가 가능하다.
셋째는 유엔사와 한미연합사가 이전하기로 결정된 팽성주민들이 수동적으로 기지 이전 반대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엔사해체를 주장하며 이미 해체가 되었어야 할 유엔사가 다시 자리를 옮겨 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이 있다. 유엔사가 해체된다면 한미연합사의 위상 또한 크게 흔들릴 것이므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8군사령부 정도만이 이전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실천의 현장이란 점에서 그리고 일본과의 실천적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팽성에서 울리는 구호는 어디보다 힘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는 의회에서 유엔사해체 결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반미문제나 한미동맹 해체와 다른결로서 유엔사해체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분리해내는 데 성공한다면, 즉 유엔사해체가 반미구호가 아닌 상식적 구호로 자리잡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유엔사문제는 외교,군사적으로 전략의 중심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엔사해체는 곧 반미라는 지금까지의 도식이 유지되는 것은 미국에게 유리하고 우리에게 불리하다. 의회에서의 유엔사해체 결의과정은 여기에 핵심이 있다고 본다. 미국과 외교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미국의 약한 고리를 쥘 수 있는 가능성이 유엔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합리적 관계의 정립이란 차원에서 유엔사 해체문제는 미국으로서도 거부하기 힘든 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오끼나와 후템마기지철수 운동과의 연대이다. 최근 후템마기지에서는 헬기가 인근 대학교 건물에 부딪쳐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 현장 방사능 측정결과 높은 방사능 수치가 계기판에 기록됐는데 미군이 실토한 바에 의하면 이는 스트론튬90이란 방사능 물질임이 밝혀졌다. 스트론튬90은 비키니수소폭탄 실험 때 발생된 물질로 유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몸살을 앓아온 후템마기지 철수를 반대해온 미해병대는 이번 사건으로 거의 결정적인 철퇴를 맞은 꼴이 되었다. 후템마기지는 유엔사후방기지중 하나이다. 만약 후템마기지가 폐쇄된다면 유엔사 후방기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즉 유엔사체계가 아래로부터 무너지는 첫 사건이 될 것이다. 이는 사령부의 해체요구보다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거리는 멀지만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입장에서 후템마기지 폐쇄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그저 엉성하기만 할뿐인 예술가의 상상력이란 이 정도밖에 안된다. 체계가 서고 계획이 있고 주체가 설 때쯤이면 이 모든 것은 휴지조각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런 때가 온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