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화우라늄무기금지를 위한 국제대회 참가기2006/08/08 1000

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ainflag=Y&menuid=203000&articleid=67006

큰 반향을 일으킨 열화우라늄탄 대회

열화우라늄무기금지를 위한 국제대회 참가기
이시우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8월 3일과 6일 사이 히로시마국제회의장에서 우라늄무기반대국제연합 ICBUW(International Coalition to Ban Uranium Weapons)이 주최하는 3차회의가 있었다. 나는 이 회의에 발제자로 초청되어 참석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속한 섹션은 아시아의 열화우라늄탄에 대한 운동사례를 소개하는 비교적 비중이 적은 자리였던 것 같다. 처음 섭외가 들어온 것도 녹색연합간사였던 석광훈씨였고 일면식이 없는 석광훈씨가 통일뉴스에 실렸던 나의 열화우라늄탄에 대한 기고문을 읽고 소개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자료집 제작을 위해 미리 요약문과 16쪽에 달하는 발표전문을 보내고 난 뒤 얼마되지 않아 마이니치신문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주최측이 신속히 언론보도 요청을 각 신문사에 했던 것이다. 마이니치의 엔도기자가 주목한 것은 카데나기지에 열화우라늄탄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였다. 주일미군 당국이 1995년 오끼나와의 도리지마 열화우라늄탄 오발사건이후 열화우라늄탄을 일본 영외로 이전했다는 발표를 일본에서는 믿어왔기에, 이번 기밀해제문서를 통해 밝혀진 명백한 사실 앞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8월 2일 히로시마에 도착해서 히로시마 평화박물관을 관람하고 있을 때 주최단체의 대표인 카자시(Kazashi)박사가 달려와 마이니치신문을 내게 보여주었다. “카데나기지에 열화우라늄탄 40만발 저장”이라는 1면 톱 헤드라인이 눈에 띄였고 관련기사등이 전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형특종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끝으로 8월 4일 회의에서 한국 평화운동가가 자세한 내용을 발표한다는 소개를 해주고 있었다. 오끼나와 타임스에서도 기사가 실렸다.

http://www.mainichi-msn.co.jp/kokusai/america/usa_c/news/20060802k0000m040167000c.html

http://www.okinawatimes.co.jp/day/200608031300_06.html

카자시박사는 회의가 크게 알려지게 되어서 너무 잘됐다며 연신 감사를 표시했다. 3일 사회민주당 당수인 후쿠시마(福島Mizuho)여사는 히로시마시장에 이은 귀빈연설에서 카데나기지의 열화우라늄탄 저장 문제를 언급하고, 연설이 끝난 뒤 내자리까지 직접 찾아와 깊은 감사의 표시와 함께 자신들이 좀 더 깊은 연구를 하고 싶다며 자료원본과 연설문을 요청했고, 나는 수락했다.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인 디베르티토(Stefania Divertito) 역시 이탈리아 미디어에 발표전문게재를 요청했고, 수락했다. 이미 열화우라늄탄을 다량 보관하고 있는 미국등 다른나라에서야 큰 관심을 가질 주제가 아니었지만 일본에서는 큰 반향이 있었고, 한일간 평화운동의 교류와 연구가 필요함을 많은 활동가들과 공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세계석학들이 참가하다

원래 이 회의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초청인사는 이라크 과학자 바르타니안(Khajak V.Vartanian: Green Land Association 대표)이었다. 그는 1991년 걸프전 당시 100톤의 열화우라늄탄 공격을 받은 이라크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지방과 3,700발의 탱크 열화우라늄탄과, 1400발의 공군열화우라늄탄이 사용된 바스라시 서쪽과 2003년 이라크전 당시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 모든 장소에 대한 토양과 야생식물, 물과 공기에 대한 방대한 방사능오염도 조사작업을 벌였다. 이중에서 가장 심각한 방사능오염치가 기록된 것은 토양이었다. 이를 통해 열화우라늄탄폭발 후 아주 오랜 기간 방사능이 잔류하게 된다는 것이 완벽히 입증된 셈이다. 이외에 우라늄의 독성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과학자들의 발표와 토론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열화우라늄탄에 관한 한 최고의 석학들이었지만 구체적인 연구자료를 가지고 나온 것은 이탈리아였다. 발칸전쟁에 참가하여 열화우라늄탄에 노출되었던 이태리 병사들은 298명이 병에 걸려있고, 37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과학자인 가티(A.M Gatti:모대나&레지오에밀리아 대학 생명물질 연구소)와 몬타나리(S Montanari:모대나 나노분석학)는 엑스레이 마이크로 분석을 통해 생체막 안에 있는 열화우라늄탄의 마이크로,나노 입자를 찾아내고 그 영향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발칸지역에서 돌아온 군인들중 병을 얻었거나 죽은 사람들의 병리학적 샘플을 받아서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모든 병리학적 견본에서 미립자형의 우라늄과 소량의 방사능을 확인했다. 한편 분석된 이들 파편은 중금속으로 구성된 나노크기의 입자이다. 이들 파편들은 미생물에 의해 무해물질로 분해되지도 않고, 생체에 적합하지도 않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너무나 당연히 병원체가 된다. 폐포나 위벽을 쉽게 그리고 빨리 뚫고 나가는 이들 먼지가 유기체계의 모든 부분과 생리적인 방벽까지도 사실상 혈액에 의해 전달되고 퍼져나가는 것을 그들은 관찰했다. 우라늄 먼지는 1미크론 보다 작아서 유기체계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필터와 같이 물리적, 화학적 독성을 지탱하는 생체막도 뚫고 들어가 응축될 수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은 열화우라늄탄신드롬에 의해 신장이 손상된 군인의 몸 안에서 이러한 미세한 파편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주변 생체조직이 파괴되거나 왜곡된 징후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라크와 발칸전 참전군인들도 참가하다

과학자들의 발표와 토론을 누구보다 심난하게 경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폭발물처리반(EOD)장교 출신인 몬타페르토(Filippo Montaperto)와 미군출신 데니스카인(Dennis Kyne), 부평의 캠프마켓에 근무한 적이 있던 허버트리드(Herbert R Reed), 영국군 브리스토(Ray Bristow)였다. 이들은 모두 걸프전과 발칸전쟁의 참전군인들이었으며 사진에서 보여지는 바로 그런 생리학적 변화가 자신의 몸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머지않아 다른 동료들처럼 변해갈 것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때론 기형아로 출산된 딸을 가진 아버지이기도 했다. 몬타페르토는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하지 않은 발표자였는데 그의 가쁘게 달려가던 연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암으로 사망한 친구사진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그만 참았던 눈물을 터트림으로서 잠시 중단됐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울음으로 하여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데니스카인은 미국정부가 자신의 몸에서 받아간 샘플조사 결과를 아직까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열화우라늄탄 피해를 부정하는 태도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이들 참전군인들은 역시 이번 대회 내내 주목을 받은 인사들이었다. 열화우라늄탄 운동의 인간적 출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열화우라늄탄은 핵무기인가

과학자들간에 전문용어가 오가며 논쟁이 진행될 때 일반참가자들은 그저 멍할 뿐이었다. 우선 듣도보도 못한 용어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Nanopathology란 말은 나노병리학 정도로 억지 해석이 될듯한데 2002년에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말은 있어도 나노페솔로지란 말은 없었다. 그래서 과학자들만을 위한 토론자리가 만들어졌다. 영어로만 진행되어 일본인들은 극소수만이 참가한 이 자리는 그러나 역시 중요한 자리였다. 우선 열화우라늄탄과 핵무기는 같은가 다른가라는 문제가 토론되었다. 8월4일 나의 발표가 끝난 직후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마이니치신문의 엔도(遠藤孝康)기자는 ‘열화우라늄탄은 핵무기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핵분열을 기준으로 할 때 핵무기는 아니지만 우라늄무기임은 분명하다.’고 답했다. 열화우라늄탄과 핵무기의 관계는 역시 가장 큰 논쟁거리이다. 우선 일본의사인 마쭈이에이수케(松井英介)선생은 내부피폭(inner exposure)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피폭은 신체가 방사선에 쬐이는 것을 말한다. 피폭의 형태에는 신체 밖에 있는 방사성물질이나 X선 발생장치로부터 방사선을 받는 “외부피폭”과, 방사성물질이 부착한 식물을 먹거나 공기 중에 존재하는 방사성물질을 호흡하여 몸안으로 들어온 물질의 방사선에 피폭되는 “내부피폭”의 두 종류가 있다. 외부피폭은 방사선을 받고 있는 동안만으로 한정되나, 내부피폭은 방사성물질이 체내에 존재하는 한 피폭은 계속된다.

열화우라늄탄과 핵무기의 효과는 같다

그의 주장은 공기흡입이나 섭취등을 통해 신체내에서 일어나는 방사능노출이야말로 방사능 오염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핵무기에 의한 방사능 피폭과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피폭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침 일본 피폭자들의 집단소송이 대회기간 중에 승소함으로써 그동안 논란을 빚어왔던 방사능피폭은 법적으로 인정받았고 역사적으로 승리한 셈이 되었다. 미국등 열화우라늄탄 사용국가들이 걸프전 참전 군인들의 질병 및 사망원인과 열화우라늄탄의 인과관계가 명확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판례는 귀중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과학자와 활동가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잔류 방사선을 조사하고 내부 피폭의 영향과 피폭자 집단소송을 벌여온 결과이다. 토론자리에는 유엔에서 참석한 직원이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피해라는 구체적증거를 대라며 반론했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사회자인 베버스톡((Dr. Keith Baverstock)은 논쟁의 합의를 위해 두가지점을 지적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 첫 번째는 ‘열화우라늄탄이 핵분열과 같이 3000도 이상의 고열에서 연소되며 산화된 우라늄 먼지와 가스를 방출한다.’ 두 번째는 ‘우라늄은 독성물질이다’ 라는 것이다.

TNT가 575도에서 연소되는 것과 비교하여 열화우라늄탄의 발화 온도는 핵분열시 발생하는 3000도와 거의 일치한다. 수소폭탄도 핵분열로 얻어지는 3000도 이상의 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원자탄이 먼저 터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열화우라늄탄의 파편화 과정과 거의 동시에 이온화 과정을 거치며 중금속가스, 세라믹 나노입자, 산화우라늄등 각종 유독성 물질이 생성된다. 이것은 주위의 토양과 물, 대기를 오염시키며, 이때 방출된 방사능은 아주 오랫동안 잔류하여 생태순환계를 통해 인체에 섭취되거나 직접 흡입된다. 문제는 소변과 대변으로 이들 물질이 완전 방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우라늄의 반감기가 45억년인 것을 감안하면 인체에 거의 영구적으로 남으며 내부 피폭을 통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고 기형의 자손을 출산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핵무기의 효과와 전혀 다르지 않다.

열정적인 일본 평화운동

토론 마지막 날인 5일에는 향후 우라늄무기금지협약을 관철시키기 위한 초안 마련 작업을 위한 토론과, 우선 미룰 수 없는 열화우라늄탄 희생자들에 대한 지원사업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1997년 대인지뢰전면금지를 선언한 오타와 조약이후 민간이 주도해서 국제협약을 이끌어내는 것은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이번 회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라크의 열화우라늄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의료등의 지원사업에 대한 계획의 철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라크 과학자들이 요구하는 구체적 요구가 이미 프리젠테이션자료로 정리되어 항목별로 필요한 모금 액수와 모금 방법, 기간등을 작전명까지 만들어 제시하고 있었다. 일본 평화운동의 주도면밀함을 다시 느낀 순간이었다.

–이모저모–

이라크군과 미군의 만남
회의장에는 이라크사람들과 과거 또는 현재까지도 서로의 적인 미국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일본인, 한국인이 열화우라늄이란 주제 하나로 같이 앉아 있었다. 나는 회의내내 이 불편한 관계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4일 저녁식사 자리에서 마침 나는 이라크 과학자인 바르타니안과 함께 앉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그가 걸프전 당시 특수부대인 낙하산 부대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기회다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군 출신인 카인과 리드와 같은 자리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어떤 느낌인가?” 그의 답변은 의외로 단호했다. “지금 같이 앉아서 회의하고 있지만 그들은 적이다. 미안하다라고 말하지만 그건 말이 안된다. 전쟁으로 내 동료와 아는 사람들이 이미 죽었다. 나는(이런 상황이) 매우 어렵다.” 나는 다시 물었다 “한국도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 역시 그의 답은 단호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국은 미국이다.”

다음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뒤늦게 내려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중에 또 한번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라크인 바르타니안이 내 앞에 앉아 있었고, 영국군출신의 비스트로우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미군출신의 데니스 카인이 의자를 끌고 와 같은 연합군이었던 비스트로에게 어디서 싸웠었나를 물었고, 비스트로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카인은 노먼슈와츠코프가 쓴 자서전의 복사본을 꺼내 작전지도를 하나하나 확인 시키며 비스트로우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했다. 그때 바르타니안이 끼어들었다. “거기는 내가 부대원들을 이끌고 가다가 탱크가 폭격으로 전소됐던 곳이다. 나는 몇일동안 사막을 걸어서 간신히 부대에 복귀했다. 나는 특수부대원으로 95년 전역했다,” 카인은 “내가 주둔했던 곳은 자세히 말하면 거기서는 조금 떨어진 캠프였다.”고 피해가려 하자 다시 바르타니안은 “그곳은 내 친구가 죽은 곳이다.”라고 하며 카인을 몰아갔다. 카인은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며 괴로워했다. 바르타니안은 전날 이탈리아군출신의 몬타페르토가 연설중 눈물을 터트린 것을 염두에 둔 듯 “군인은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침 뒤에 있던 카자시 교수가 늦었으니 출발하자고 하는 바람에 이 긴장되고 어색한 자리는 가까스로 끝이 났다.

데니스카인은 작은 사진 앨범을 가지고 있었다. 대화중에 그것을 펼쳐 보였다. 나는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아직도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열화우라늄탄을 맞아 폭파된 탱크 옆에 한 군인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는 죽기 전 고통에 심하게 뒤척인 듯 모로누워 있었고 땅에 닿아 있던 손을 펴 하늘을 향하고 있었는데, 간절함을 담은 손가락은 선명하건만 팔꿈치부터 땅에 닿아 있는 몸의 반쪽은 새까맣게 타다 못해 녹아 있었다. 카인에게 물었다. “이것은 너의 동료인가?” 그가 말했다 “No, Iraqi”…. 앨범을 돌려주고 나는 말없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