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을 둘러싼 근현대사의 교훈 2006/08/21 1009

2006년 8월 19일 겨레하나 강의 원고

민통선을 둘러싼 근현대사의 교훈
  사진가 이시우
현재의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지역은 공교롭게도 한반도의 허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역사상 한반도 역사상 가장 특징적인 사상과 문명이 발생하고 발전한 곳이다. 한탄강의 미륵사상이 그렇고, 임진강의 조선성리학이 그러하며, 한강의 실학과 개화사상, 다소 과장되었지만 강화도의 단군사상이 그렇다. 한편 강화도와 한강하구 임진강은 한반도가 유라시아체계와 교섭하고 충돌하던 관문이기도 했다. 역사상 한반도는 4번의 계기를 겪으며 유라시아체계에 대응했다. 첫 번째는 고인돌등으로 대표되는 선사문명 교류를 통해서이고, 두 번째는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이었던 몽골 침략기이며, 세 번째는 병인, 신미양요를 거쳐 동양의 서구인 일본의 식민지가 된 시기이며, 네 번째는 한국전쟁기이다. 분단과 통일의 변증법도 유라시아지정학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병인,신미양요
우선 조선이 어떻게 유라시아체계에 대응했는지를 살펴보자. 1885년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공식적인 ‘점령’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앞선 양대양요보다 훨씬 노골적인 침략이었고, 영국과 러시아제국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연장선에서 2차 격돌을 예고하며 세계대전으로 발전될 소지마저 가지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조선의 군사적 대응은 전무했다.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조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의 요충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었으며, 영국으로서는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공격지로서 더 없이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거문도는 당시 유라시아 양대 제국 해군력의 지정학적 충돌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에 대한 판단이 전무했다. 조선의 유라시아지정학의 지식이 미치는 범위는 강화도와 한강하구 서울로 이어지는 한강축선 이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국내에선 민주주의를 선사했지만 다른 나라에 대해선 제국주의전쟁을 선사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지정전략은 지금의 베트남인 코친차이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코친차이나가 중요했던 것은 유럽에서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통하는 가장 짧은 노선인 말라카해협 때문이었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나폴레옹 3세는 적극적인 식민지개척정책을 펼침으로서 집권 전반10 년간 국내적 번영을 구가했다. 아프리카에서 세네갈을 병합하고 이태리-오스트리아전쟁을 통해 니스와 사보이를 취했으며 청나라, 모로코, 시리아, 알제리, 인도차이나 및 북미에 진출하였다. 또한 수에즈운하건설에도 많은 자본을 투입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에도 개입하였고 멕시코 원정도 단행했다. 극동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적 초점은 코친차이나 즉, 지금의 비엩남 중부로 모아졌다. 프랑스는 극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해군거점이 필요했고 이 거점을 획득하려는 생각은 귀조에 의해 표명되었으며 이 거점은 상업기지로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1848년 11월 9일의 훈령에서 귀조는 ‘해군기지는 청나라가 아니라 청제국 인근에 설치되어야 할 것’ 이라고 하면서 파울로콘도르섬을 생각했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바로 옆에 있어 영국과의 충돌을 우려하게 됐고 이를 피해 다낭에 착목했다. 그는 다시 필리핀 남쪽의 바실란 섬에 주목했다. 이 섬은 청나라와 미주를 연결하는 해로에 위치하였으며 광동에서 계절풍을 피해 유럽으로 가는 항로에 위치하고 있어 적절하다고 보았으나 이번에는 스페인이 항의를 제출했다. 결국 귀조는 상업적인 동시에 군사적인 극동진출의 거점을 안남 즉 비엩남으로 굳힌 것으로 보인다.
1862년 원정군을 파견하여 그해 6월 비엩남 남부지역을 할양받았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 3세가 “조선에 하나의 거점을 점령할 수 없음을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 사실은 본질적으로 프랑스가 조선에 한 거점을 확보하려고 생각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1860년대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멕시코원정에도 실패하고 나폴레옹 3세 자신이 병약해져 갔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점증하는 독일연합세력에 대처하기 위해 그의 주된 관심은 유럽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프랑스측에 대해 대조선공동원정을 제의했을 때도 프랑스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남북전쟁을 끝낸 뒤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조선과 미국간의 1차 전쟁이었다. 병인양요를 승리로, 신미양요를 패배로 구분하는 상식에 더해져 남북전쟁은 미국군대를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간혹 통용되나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군사력은 오히려 더욱 후퇴했으며 다른 열강에 비하면 대체로 후진상태를 면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이 처한 사회적 고립상태를 거꾸로 군의 기본을 세우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정치적 암흑기이면서 군사적 황금기였던 시기에 미군사에서 가장 기록할 만한 전쟁의 하나가 신미양요였다. 병인양요 후 조선은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웠지만 병인양요에서 작용한 ‘전쟁터의 안개’는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초지진 야영지에 대한 이렴의 기습작전은 양헌수의 그것과 비견되나 미해병대는 기습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상륙기세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860년대는 미국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기이면서 경제적 제국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시기이다. 군국주의를 거부하던 산업평화주의 사조는 그것이 제국주의의 모습을 갖추어 가면서 군사력을 적극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1861년부터 1869년까지 국무장관 자리에 있었던 윌리암 시워드(Wiliam H, Seward)는 역대국무장관 중에 가장 제국주의적 색채가 강한 팽창주의자였다. 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북미대륙에서의 강력한 신제국을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조선은 미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조선인에게는 러시아인이나 프랑스인이나 영국인이나 모두 동일한 양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양이들은 하나같이 천주교도로 생각했고 천주교도는 조상을 모르는 야만인으로 그들과의 접촉은 오로지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칠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은 1866년 대동강에서 소각시킨 제너럴셔먼호도 미국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며, 1880년 5월 슈펠트Shufeldt 제독의 요청으로 콘도近藤영사가 동래부사를 방문했을 때도 부사 심동신은 콘도의 설명으로 미리견美利堅과 미국이 같은 나라임을 알았다. 조선인의 이같은 태도는 ‘서프라이즈Suprise’호 사건과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에 대해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서프라이즈호처럼 난파선과 그 선원에 대하여는 인도주의적 후대를 아끼지 않은 반면 제너럴셔먼호처럼 의도적 침략이라고 생각됐을 때는 자위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일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실패에 의해 근대민족국가를 개혁할 주체를 마련하지 못하면서 이를 계기로 조선에 다시 들어온 청일간의 전쟁으로부터 1904년 러일전쟁까지 10년간은 유라시아대륙의 제국열강 뿐 아니라 미국까지 참여함으로서 조선반도가 세계적 차원의 지정학적 각축장이 된 시기이다. 청이 안정되길 바랐던 영국은 청이 일본에 패하자 일본에게 접근하고 영국을 경계하던 러시아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그 사이의 독일과 함께 각축전에 끼어들고 미국이 중립을 지키는 듯 하면서 일본을 편드는 형편이었다. 이들 열강의 지정전략적 각축전은 결국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표면화되고 러일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10년간의 지정학 싸움은 일본의 패권으로 귀착되면서 민족 대 외세의 구도로 결론난다. 근대의 상징인 철도를 예로들어 유라시아 지정학질서가 어떻게 관철되었는지 보자
이때의 경의선은 6대 열강의 지정학적 쟁투를 일제의 단일패권으로 매듭짓는 역할을 했다.
1884 갑신정변 실패 후 청의 종주권강화정책과 이에 반발한 조선 내 친러세력의 대두,1885년 영국의 거문도점령과 1886년 영국의 거문도 철수와 함께 일기 시작한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건설계획에 대해 명치정부의 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7년 ‘조선은 일본의 울타리이다’라는 신문사설을 통해 조선을, 일본을 서구열강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어선으로 삼을 것과 시모노세키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산양철도山陽鐵道의 신속한 완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청일전쟁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유키치는 1894년 청일전쟁 후 일본군 주둔을 기회로 경인, 경부선철도를 일본자본으로 건설할 것을 제안한다. 이와함께 그는 청일전쟁의 기원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옹호한다.
일본인과 일본 앞에는 支那人 支那國은 없고, 단지 세계문명의 진보를 목적으로, 그목적에 반대 방해하는 것을 타도하려는 것으로, 사람과사람,국가와 국가와 국가의 일이 아니고 일종의 종교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시사신보 사설1894.7.29 日淸戰爭은 文野의 戰爭이다.)
참고로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이 ‘냉전’대신 사용한 ‘문명’충돌의 개념이 초기 제국주의침략 정책의 개념에서 빌려 온 것 같은 암시를 받는다.
그러나 경인선 부설권은 일본이 아닌 미국에게 넘어간다. 이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 정세와 연관된다. 그러나 미국은 1894년 청일전쟁부터 친일정책을 펴고 있었기에 모스에 의한 경인선 부설권 획득은 일제의 우회전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모스가 본국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실패하자 이를 재빨리 간파한 일제가 조선정부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을 체결하고 1898년 180만원에 경인선을 인도한다.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선부설권을 획득한데 자극되어 프랑스는 1896년 7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피브릴로회사의 대표 그릴르에게 경의선부설권을 획득하게 하였으나 그릴르의 재력부족으로 부설권을 상실하게 된다. 1899년 6월 23일의 일이다. 이에 고종은 당시 국내에서 일고 있던 애국계몽운동에 힘입어 반환된 경의선 부설권을 1899년7월8일 박기종이 주도하는 대한철도회사에 특허하였다. 그러나 재력이 없던 박기종이 실패하자 정부는 외세를 배격하기 위해 경의선, 경원선을 궁내부 직영으로 하게 된다. 1900년 9월 정부는 내장원內藏院에 서북 철도국을 두고 수구파였던 조병식을 총재로 임명하고 서울-개성간 선로 측량에 착수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과 러시아는 경의선 부설에 계속 관여한다. 그러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보름후인 1904.2.21 일본은 서울-신의주간의 군용철도부설을 위한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고 3월4일에는 이 감부소속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불법으로 경의선 부설에 착수한다. 그러자 3월12일 정부는 군사상 필요하다는 일본의 강요에 못이겨 50년간 임대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철도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군인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공사를 급속도로 진행.실제 답사도 하지 않고 5만분의 1지형도로 위치를 설정하고 측량. 하루평균 733m를 건설 733일만에 완공한다. 큰 터널은 파지 않고 우회했으며, 교량도 부실하여 공사비가 적게 든 반면 졸속공사가 된 것은 자명하였다. 특히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철도용 부지를 무료로 강점하고 공병대를 투입하여 급조된 경의선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필요했다.
1911년11월 압록강 철교의 개통으로 한국-만주간이 철도로 연결되고 각 열차의 운행을 만주 안동까지 연장하고 서울남대문과 만주의 장춘간을 주 3회씩 직통열차가 운행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환이 형성되게 된다. 유라시아 철도로의 비약에 드리워진 일제의 패권으로 경의선은 민족이 유라시아로 웅비할 가능성을 빼앗기는 대신 유라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지정학 쟁투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일제시기 유라시아 차원에서의 가장 큰 큰 변화는 러시아혁명이다. 이제 제국주의국가 간의 경쟁에서 사회주의국가와의 투쟁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사회주의의 출현에 위기의식을 가진 자본진영은 파시즘을 창안해내고 일제시기 이러한 세계의 조류는 고스란히 한반도에 반영된다. 그 중 철원제일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파시즘의 발전과정을 보자.
3.8선이 그어지면서 북측지역이 된 철원에 뿌리내리고 있던 세력은 감리교였다. 감리교는 창시자인 웨슬리의 표어대로 도덕적 완전보다 사랑의 완전을 추구한다. 또한 칼뱅의 예정설에 따른 조건부 구원관을 거부하며, 예수를 추상적 구세주로 믿지 않고, 자신의 체험 속에서 감격하는 체험신앙을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교회자체의 관심에 머물지 않고,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과 실천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3.1운동 전에도 철원 남감리교회는 아펜젤러가 서울에서 배제학당을 열었듯, 배영학교를 지어 민족교육 활동과 노동야학을 활발히 했고, 3.1만세운동에서도 배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대한 독립애국단활동에 박연서, 강대려등 남감리교의 지도급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까지 한 것은 평안도 장로교단이 근본신앙적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한 것과는 다른 사회적 참여의식의 발로였다. 그러나 옥고를 치른 후 박연서, 강대려의 행보는 크게 달라진다. 강대려는 철원양조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박연서는 서울로 올라온다. 당시 감리교회역사에서 두드러진 사건은 1930년 서울의 감리교계와 YMCA의 핵심인 신흥우를 중심으로 한 적극신앙단의 결성이다. 이승만계의 리더격이었던 신흥우는 1929년 세계공황과 유럽파시즘의 절대지도자론에 매료되어 파시즘을 제창하며 감리교의 사회복음주의와 조선적 기독교론 수립에 공감하는 기독교 인사들을 적극신앙단을 통해 결집시킨 것이다. 박연서목사는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기독신보의 주필을 맡고 있으면서 적극신앙단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경부터 일제는 신사참배와 한국기독교단의 통합과 일본화를 추진했다. 감리교는 1940년 10월 총리원 이사회에서 이러한 통합에 순응하기로 결정하고 일부 장로교 세력과 친일화를 추진했다. 이 운동은 결국 교단내부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지만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이 박연서목사가 속한 적극신앙단 세력이었다. 당시 친미 기독교 엘리트들은 안창호와 이승만을 정점으로 대립되어 있었는데 안창호는 보수적인 평안도 세력을 대표했고 이승만은 자유주의적인 기호세력을 대표했다. 적극신앙단은 이승만 계열이었다. 서울에서의 적극신앙단활동은 철원 교회사에 또다른 인물을 등장시키는 원인이 되는데 그가 김윤옥 목사이다. 그는 해방 이듬해인 46년 철원제일감리교회 부목사로 부임해온다. 부임이라기 보다는 잠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른다. 이승만 정부 정확히는 부통령으로부터 3.8선 이북인 철원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에 대규모 반공 조직을 꾸리라는 밀령을 받고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이승만이 주도한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김병조 목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병조목사의 가족중에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김병조 목사는 해방 후 북에서 반소투쟁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특히 이북지역의 전국적 무장 조직, 즉 광복단을 이끌고 있었고, 테러, 요인암살, 철도파괴등을 행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이창환(가명)이라는 사람은 조만식과 함께 활동을 했고 조만식은 그를 김병조 목사에게 소개했다. 조만식, 이창환(가명), 김병조 목사 이들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 김병조 목사가 있었다. 이후 이창환은 시베리아 유형을 당했고 91년 당시에도 소련비밀경찰의 사찰대상이었다. 김윤옥목사는 3.8선을 넘어 46년 3월 장흥교회를 중심으로 ‘신한 애국 청년회’를 결성하고 사경회와 교회행사를 통해 조직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5개월 뒤인 8월 이 단체는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었고 김목사는 평양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유득신목사도 비슷한 인연으로 철원에 파견되었다. 그는 1920년 항일무력단체인 암살단에 가입, 권총을 들고 다니며 부호를 위협, 군자금을 마련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을 하였다. 1946년 그도 교회로부터 철원에 파견되어 반공사업에 주력하다가 51년 전쟁당시 피신해 있던 곳에서 병을 얻어 사망한다. 공산당계열의 독립운동과 파시즘계열의 독립운동은 외세의 진주와 함께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해방
해방 바로 다음날부터 전국적으로 건준과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위원회가 건설되기 시작 했다.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시작됐다. 그것은 준비된 것이었고 새로운 조국건설의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해방이 그러했듯 우리민족의 운명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정해져 있었고 외세의 진주는 이 모든 것을 변형시켰다. 해방직후 김구와 김일성의 언급은 놀랄만큼 일치한다. 우리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 해방이 곧 우리에게 어떤 질곡이 될지를 예감하는 발언이었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지도자를 우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도자도 외세를 꿰뚫어보고 이용할 만큼 능숙하진 못했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 베트남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호치민과 비교된다.
일제시대 철원의 시가지는 억압과 치부와 향락을 위한 거리였다. 길의 주인은 곧 도시의 주인이다. 도시의 공간이란 그대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모형일 때가 많은데, 때문에 신작로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가난한 민중들은 거리를 활보 할 자유조차 없었다. 해방이 되자 철원에서 이 모든 상황은 바뀌었다. 만석군, 천석군하던 고진내농장을 비롯한 10개의 농장들은 토지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져 모두 자기 땅을 갖게 되었고, 금융조합과 은행에선 종자와 비료대금을 융자받아 ‘생산운동’에 들어갔으며, 방직공장은 노동자들의 것이 되었다. 일본인들의 별장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휴양소로 바뀌었다. 1947년 서방인으로서는 최초로 북을 방문, 김일성주석과 인터뷰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미국인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실제로 나는 ‘한국인민의 힘’에 대한 거의 신비할 만큼의 신념을 볼 수 있었다. 한 농부는 지주들이 토지몰수를 저항없이 받아들인 것은 붉은군대(소련군) 때문이 아니라 ‘정당한 법과 조선 인민의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공장 노동자는 ‘친일반역자들이 남쪽으로 달아난 것’은 러시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인민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라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정치에 있어서는 국제사회의 현실에 대해 좀 배워야 할 것이 있는 희망에 찬 젊은이들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자각된 의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북쪽사람들의 변화와 자주성에 대한 표현을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눈을 빌어보자. 그에게 자신이 직접 본 47년 3월의 읍단위 선거는 특별하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선거날은 대단한 축제분위기가 되었다. 성직자들은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사람들을 이끌고 투표장으로 갔다. 농부들은 ‘깨끗한 손으로 집행부를 선출하려고’ 진지한 태도로 손을 씻고 깨끗한 삼베옷을 입었다. 아파 누워있는 사람들에게는 투표상자를 보냈으며, 병간호하던 사람들은 ‘ 투표하는 동안에 등을 돌리고 있도록’교육 받았다. 어떤 죽어가는 환자는 투표하겠다는 의지로 투표때까지 버텨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투표함을 가져갔고 그는 마지막 힘을 내 투표하고는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북한 사람들이 첫 번째 선거에서 보여준 헌신과 열정은 다른 오래된 민주국가에서 경험한 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가 만나본 어떤 북한 사람도 자신이 ‘인민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해방조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한국전쟁의 경험, 특히 6.25부터 9.15인천상륙작전까지 반도 남쪽이 점령된 3개월과 다시 그로부터 1.4후퇴까지 북이 초토화 된 3개월 동안의 경험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념의 적을 향한 분노, 이념과 전혀 관계없는 양민의 학살등 사람마다의 인생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너무나 강한 충격과 공포 기억을 만들어 냈고, 이 시기를 경험한 세대에게 논리를 뛰어넘는 선체험과 같이 반공이념과 반자본주의 이념을 남과 북에 각각 형성시켰다. 반공, 반자이데올로기의 비논리성과 비합리성 선동성의 구조들은 바로 남북이 각각 겪은 3개월의 돌이킬 수 없는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이나 사회차원의 이러한 맹목성은 전쟁법이나 유엔헌장의 이성적 기준이 무시된 전쟁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내전으로 시작되어 국제전이 될 것이라는 예감은 이미 전쟁 전 해방 5년의 공간에서 충분히 형성되어 있었고, 유엔안보리에서 결의된바 없는 유엔사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칸트의 추측을 뒤집고 국제연합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유엔사는 유엔안보리에서 그 창설이 결의된 바가 없었다. 유엔안보리가 결의한 것은 미국이 중심이 되는 연합군사령부였다. 그러나 이 또한 유엔헌장상 그 결의의 효력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유엔헌장에는 유엔 차원의 모든 군사행동의 지휘는 유엔군사참모위원회를 통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장악하기 시작한 세계적 패권을 한국전쟁을 통해 투사하며, 한반도의 운명을 강제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운명도 강제 받는 계기가 된다. 한국전쟁에서의 체험은 비엩남 전쟁을 통해서 많은 부분 복제되었고, 다시 최근의 이라크전쟁에서 재현되었다. 한반도 정전협정은 이후 다른 정전협정의 모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종전 아닌 정전상태란 점에서 모본의 위력은 여전히 강력하며 유엔사는 유엔안보리 결의 없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법적 요건을 갖추고 있고 실제 이것이 시도되기까지 했다. 판문점 미루나무 벌채 사건 당시와 1994년 6월 15일 영변 핵을 둘러 싼 전쟁위기 등이 그것이다. 유엔사에 대해선 다른 자료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1975년 유엔사해체 결의까지
1968년은 비무장지대 역사상, 분단체제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한해로 기록된다. 67년 동해에서 전후 최대의 충돌이었던 당포함침몰 사건이 발생하더니 남북의 긴장은 살얼음 판을 걷듯 험악해졌다. 1968년 김신조부대의 청와대기습사건까지만 해도 그것은 남북사이의 냉전이 빗어낸 사건에서 결코 그 성격이 초과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뒤 일어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은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사건이었다. 한해 전인 1967년 이스라엘의 미국정보간첩선 리버티호에 대한 공격에 이어 미국 NSA의 정보자산이 거덜나는 사건이었지만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해 침묵했듯이 북에 대해서도 결국은 침묵하고 사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미국을 통제한다는 가설과 북은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립국으로서 언제든 미국에 자위권을 발동할 태세가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확인 시켰다. 푸에블로호에 실렸던 암호해독기는 미국으로서는 빼앗겨서는 안 될 자산이었지만 결국 북의 손에 들어가게 됐고, 그것은 다시 소련으로 보내져 분석되었으며, 미국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암호체계를 모두 바꾸었지만 소련스파이가 바뀌는 암호체계를 빼돌림으로서 소련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주요 교신내용을 거의 완벽히 도청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 승리의 배후에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었던 셈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북과 대치하고 있는 이상, 또한 북이 미국에 맞서 항상 대항할 자세를 굽히지 않는 이상 한반도의 사건은 유라시아적 사건이 된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패배는 제 3세계민족해방운동의 빛이 되었고 유엔은 미국무성의 하부기관 같은 이미지에서 제3세계국가의 결집과 단결을 표현하는 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75년 유엔총회에서의 유엔사해체결의는 그 절정이었다. 유엔사해체결의는 세계적 패권을 구축한 미국에 대항하는 반패권연대의 성취를 뚜렸이 보여주었으나 그 이후 공고한 틀로 유지되진 못했다. 그러는 사이 한반도에서는 연이은 땅굴소동과 긴급조치등 분단독재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전 세계의 반공전선이 무너지고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감은 한반도 남측에서의 성공적인 반공공세로 극복할 수 있었고 미국은 다시 회생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
1990년대는 미소대립구도가 해체되고 미국의 단일패권이 세계에 적용되는 준비기였다.
2000년대 대테러전략으로 전환되기까지 90년대 10년 동안의 미국은 유라시아지정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대테러전략의 잘못된 적용으로 평가받는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지듯 부시정부의 대테러전략은 지정전략의 수사학일 뿐이다. 클린턴에 의해 준비된 대테러전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90년대 내내 전쟁의 위기가 감돌던 한반도가 미국 지정전략의 틈을 깨고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6.15선언이다. 전략의 틀에서 봤을 때 6.15이후 미국의 유라시아 지정전략에서 한반도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6.15선언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해방전후 분단체제 형성기의 오류인 이념과 체제의 날선 경쟁 대신 유라시아지정전략에 대응할 민족자주의 원칙과 남북민간교류의 구체적인 장을 열어 놓은데 있다. 역사적으로 유라시아지정전략의 대응에서 터득한 경험인 유라시아차원의 전망을 갖춘 지도력과 민중역량의 결집이 실현될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중의 하나인 경의선을 다시 주목해보자.
박용길 장로가 조문 차 방북 했을 때 김주석의 유훈중 하나가 경의선복원이란 사실이 처음 공개되었다. 남쪽에서는 평화학의 대부로 불리는 요한갈퉁 교수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의 추구’라는 차원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의선은 통일의 차원과 평화의 차원에서 모두 의미를 가진다. 통일은 민족의 차원이고 평화는 국제정치차원의 문제인데 경의선은 민족통일과 세계평화를 모두 가져다 줄 것이다.
역사를 단순화 시켜보면 100년이 지난 뒤 한반도의 역사는 우연처럼 반복된다.
1994년 6월 핵문제로 미국이 북과 전쟁을 일으키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김주석을 방문하던 카터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통화로 전쟁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약 10년 뒤 경의선 복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94년부터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유라시아대륙의 지정학싸움에 다시 끼어든다. 옐친정부의 한 관료는 이념의 시대에서 지정학의 시대로 변했음을 선언했다. 2001년 9.11사건은 ‘테러’라는 신개념을 통해 미국의 단일패권이 확립된 사건이다. 10년간의 지정전략은 이제 반테러를 앞세운 패권권략으로 바뀌었고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일, 북중러등 지정전략의 구도가 경의선복원을 전후하여 미국대 민족의 구도로 변해가고 있다. 경의선이 복원되고 남북의 합작이 강화되어 민족의 자주성이 커진다면 경의선 복원은 민족주체를 세운 결정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경의선이 100년 전의 경의선과 다른 것은 외세가 아니라 민족이 주인으로 될 가능성을 앞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운동의 모태는 민족운동인데 100년 동안의 민족적 과제가 달성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100년전 경의선은 오욕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경의선은 민족에겐 통일을 가져다 주고, 유라시아 대륙엔 평화를 가져다 준 통일과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이다. 과거 시베리아철도는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철도였으나 지금의 시베리아 철도는 미국의 일방적 침략정책에 대한 유라시아의 평화적 연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통일의 가능성도 전쟁의 가능성도 모두 상존한다. 때문에 우리는 통일의 희망도 준비해야겠지만 전쟁을 예방할 방법도 준비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이후 민족적 단합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미국의 전쟁구도에 말려들게 되면 우리는 근대민족국가형성의 기회를 또 한번 잃고 굴욕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
그런 점에서 19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형성되고 1975년 유엔사 해체 결의를 통해 표출된 반패권연대의 복원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 소재는 역시 유엔사문제이다. 전시작전통제권환수 뒤 미국이 연합사에 위임되어 있던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고 유엔사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려하고 있다. 전시작통권 환수는 연합사의 해체를 의미한다. 형식적으로는 주한미군사령부나 연합사가 아닌 유엔사가 전면에 부상할 것이다. 유엔사문제는 유라시아차원의 반패권연대와 압도적 대중역량의 결집을 가져올 전략소재이다.

2000년 11월 17일 정전협정 개정에 해당하는 유엔사와 북인민군간 합의가 있었다. 동,서해지구 철도 통과와 관련된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합의서이다. 이 합의서에 의해 철도와 도로가 통과하는 구역은 남과북의 군이 관리(Administration)한다라고 합의되었으나 2002년 남북지뢰검증단교환을 둘러싸고 유엔사는 이를 번복하고 유엔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유엔사가 제시한 근거는 관할권(Jurisdiction)은 여전히 유엔사에 있고 관리권(Administration)만 남북군대에 이양한 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전협정 어디에도 ‘관할(Jurisdiction)’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관리(Administration)’라는 말만 등장할 뿐이다. 군 사령관에게 부여된 관리권이 입법,사법,행정관할권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진 않기 때문에 법률을 정하고, 법적제재 조치를 가할 수는 없다. 공물 관리권에 의거 판단하면 비무장지대관리권의 위반자에 대한 최고의 제재수단은 비무장지대 출입으로부터의 배제이다.
현재 남측의 편법으로 북의 출입인원을 남측이 받아서 유엔사에 전달하고 유엔사의 승인을 얻어 다시 북에 전달하는 방법을 쓰다보니, 유엔사는 2002년의 문제제기로 유엔사의 입장이 관철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북은 2000.11.17일 합의가 유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엔사는 2004년 9월, 61년 이래 용산기지에 위치해 있던 군정위를 다시 판문점지역으로 이전했다. 평택지역으로 이전하기로 했던 남측정부와의 합의를 무효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조치이다. 이 조치로 인해 남북교류에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통과문제는 언제든 폭발할 가능성을 안게 되었다. 유엔사가 남북연결지점에 병력을 배치하기로 했으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더불어 유엔사를 강화할 뜻을 거의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이고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유엔사의 근본문제는 더 심각한데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사의 4가지 기본문제
첫 번째 문제는 전쟁에 의한 북 점령시 북에 대한 통치주체가 유엔사라는 점이다.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에 의한 10월12일의 유엔총회 임시위원회(the Interim Committe), 소총회(the Little Assembly)는 10월7일유엔총회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임시위원회는 “유엔은 한반도 전역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정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정부는 없다.”고 명백하게 천명한 뒤 한반도 통일과 이에 따른 남한정부의 통치권의 확대를 공식으로 부인하였다. 임시위원회는 또 통합지휘권을 행사하는 유엔군사령관이 북측지역의 통치와 행정면에서 유엔KOREA통일부흥위원단과 현안문제를 논의하여 모든 책임을 수행하여 줄 것을 미국에게 요청하였다.(James F.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220:한국전란1년지 ppC127-C128)
한국관계소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 1950년 10월 7일자로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규정하에 한국문제 소총회에서 동결의문에 포함된 바 결의에 따라 유엔통합군사령부와협의하고 조언하도록 요청할 것을 고려하며,

2. 주권국가 한국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위해 유엔주도하에 총선거실시를 포함한 모든 소요활동을 취할 것을 결의한 동총회 건의를 고려하며,

3. 대한민국정부는 유엔에 의해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이 감시 및 협의 할 수 있었던 한국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진 합법정부로서 승인되었음과, 또한 “결과적으로 한국의 기타지역에 대한 합법적이며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졌다고 유엔에 의해 승인된 정부는 없음을 상기하며”,

4. 전쟁행위의 발발시 대한민국 정부의 효과적 통치하에 있다고 유엔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았으며 또한 현재 유엔군에 의하여 점령되어 있는 한국지역의 정부와 민간행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이 이 지역의 행정을 고려하게 될 때까지는 통합군사령부가 임시로 담당할 것을 권고하고,

5. 통합군사령부가 본 결의에 의거하여 민간행정을 위하여 설치된 모든 기관과 주한 통합군사령부 휘하의 수개 유엔회원국 군대로부터의 장교와 협력하기 위한 조속한 조치를 취하도록 건의하고,

6. 통합군사령부에게 한국위원단이 도착할 때까지 본 결의에 응하여 취하여진 조치를 소총회에 계속하여 보고하도록 요청한다.

미국은 10월7일의 유엔결의안에 의거해 북 점령시 유엔군이 점령과 통치의 주체임을 주장했다. 즉, “한국의 역할은 인정하나 총선실시 전에 주권이 확대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면서 북점령계획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평화적으로든, 무력으로든, 북의 붕괴든 남북이 통일되었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국제법적으로 북쪽 지역에 대한 통치주체가 된다.
대한민국헌법 3조는 ‘大韓民國의 領土는 韓半島와 그 附屬島嶼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모순을 담고 있어 그 문제점이 심각히 제기 될 수 있으나 유엔사의 존재는 이 조항마저도 성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보수적 국제법 학자들은 이점을 우려하고 있다. 만일 통일헌법에 의해 ‘통일한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영토조항에 변화가 오게 되면 남측정부의 주권 포기와 북의 점령통치를 전제하고 있는 유엔사야말로 가장 큰 반국가단체가 될 것이다. 북의 점령을 상정하고 있는 남측의 호전세력조차도 북 점령후 유엔사가 군정주체가 된다는 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라고 판단된다. 유엔사문제가 진보진영이 아닌 보수진영에서 꾸준히 논의된 배경에는 앞선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보수세력, 나아가 호전세력조차도 유엔사의 북에 대한 점령통치권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이는 북을 대단히 자극할 내용이지만 남측으로서는 남측대로 주권의 문제로서 풀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작년 국감에서 문제가 됐던 통일부의 충무계획은 유엔사의 존재를 망각한 허구이다. 현재의 상태대로라면 북점령과 붕괴시 군정 또는 민정 주체는 통일부장관이 아닌 유엔사령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주국방이나 통치차원에서라도 정부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독도와 같은 영토주권의 논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비무장지대 남측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문제는 이 헌법이 유엔에서도 혈맹인 미국에서도 인정치 않고 잇는 조항이란 것이다. 따라서 유엔군사령관이 관리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 대한 주권의 문제가 제기된다. 하그 육전법에 의하면 정복이 아닌 점령상태를 타국주권의 획득으로 보지 않는다. 점령기간 동안 실질적인 주권의 행사가 중지되는 것은 사실이나 점령의 종료와 함께 주권은 해당국가로 환원된다. 점령이 아닌 정전은 군사 통제지역에 대한 일시적 관리 상태이기에 더군다나 주권의 적용을 훼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무장지대의 경우 출입을 통제함으로서 실질적인 주권의 행사를 제약한다. 미국 대사관터가 남측의 주권이 적용되는 영토이지만 치외법권 지대로서 남측의 주권행사가 일정기간 미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이는 유엔사문제가 독도문제보다 더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소재임을 암시한다.

두 번째 문제는, 유엔사가 어떤 절차도 필요없이 당장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50년전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전 처럼 골치아프게 유엔안보리 결의를 끌어내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남측 대통령이 전쟁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기회는 이미 구조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사령관이 행사한다. 형식적으로는 군통수권자인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합의하여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는 1978년 유엔사해체에 대비하여 창설된 한미연합사창설 공문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문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관직을 겸임함으로써만 그 효력을 발생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한미연합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은 동일인물이다. 국제법학회의 김명기교수는 여전히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이 유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엔사는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면서 작전통제권을 모두 위임(Reference)했다. ‘위임(Reference)’은 ‘이양(handover)’과 다르다. ‘권한의 위임’은 권한 귀속주체의 변경을 초래하나 이를 취소할 수 있는 지휘·감독권을 주체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반면에 ‘권한의 이양’은 권한 자체가 확정적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이양주체의 지휘·감독관계까지도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사에서 연합사로의 작전권의 이동에 대해 ‘위임’과 ‘이양’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1950년 이승만대통령은 맥아더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이양’했고, 1978년 유엔사는 한미연합사에 ‘작전통제권’을 ‘위임’했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가 연합사에 ‘위임’된 작통권을 일방적으로 해제하고 이동한 것으로 미국이 설명하는 논거가 바로 ‘위임’이다. 만일 작통권이 연합사에 이양된 것이라면 한미연합사는 정전협정의 서명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정전협정의 일방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 된다. 한미연합사창설 공문은 유엔사의 작통권을 한미연합사에 ‘위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유엔사가 연합사의 작통권 행사를 취소시킬 수 있는 지휘, 감독권을 가지고 있다. 결국 유엔사의 작통권은 언제든지 큰 장애 없이 복원될 수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 5조 61항은 ‘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및 증보는 반드시 적대쌍방 사령관들의 상호협의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연합사에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위임한 것은 정전협정의 상대방인 인민군이나 중공군과 전혀 합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연합사는 남측지역의 작전통제권을 위임 받았으므로 법적권리를 행사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는 남측지역을 통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언제든 유엔사에 의해 취소될 수 있으므로 명목상, 작전통제권에 대한 지휘권은 여전히 유엔사에 있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은 소멸되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6월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한 ‘전쟁권’과 10월 유엔총회 결의에 의한 ‘북측지역의 점령통치권’은 남측정부나 미국정부와는 무관한 권한이므로 여전히 존속되고 있으며, 주일미군 후방기지사용권과 자위대동원권도 위임 불가능한 권한이다.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서도 유엔사령관 자격으로는 미군은 물론 남측지역과 일본에 대해서도 군사통제하에 둘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얼마전 이임하는 라포트 유엔군겸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정부의 전시작전통제권이양계획에 대해 일침을 놓으며 “나는 주한미군사령관이면서 유엔사령관이기에 그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유엔사령관으로서의 작전권이 아직 유효함을 암시한 말이다. 결국 한미연합사체계가 아닌 유엔사체계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1994년 6월 14일 한반도 전쟁위기 때 한국의 대통령과 전혀 상의가 없는 상태에서도 북에 대한 3가지 침공 시나리오는 작성되었고, 그중 하나에 클린턴 대통령이 최종결정 사인을 하고 있었으며, 이미 오끼나와 해병대 병력이 부산에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사체계로 전쟁을 일으켜도 아무런 법적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번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안보리결의 때문에 고심할 필요가 없다. 이미 1950년 안보리결의에 의해 창설된 유엔사가 아직도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이라크 보다 훨씬 전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군사주권조차도 차단시키는 유엔사에 대해 상식이 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문제를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된다.

세 번째 문제는 유엔사의 작전통제아래 주한미군과 한국군 뿐아니라 주일미군까지 한국전쟁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2004년 여름 일본의 많은 평화운동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염이 허옇게 자란 원로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평화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왠만한 주제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이미 우리세대가 태어나기 전부터 조선문제, 즉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문제나 해저탄광등에서 사망한 강제징용조선인들의 숨겨진 역사를 헌신적으로 발굴하고 추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외로 그분들은 유엔사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주한유엔사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놀라움과 황당함 자체였다.
그들이 놀라움을 표시한 첫 번째 사실은 주한유엔사의 7개 후방기지가 일본의 중요 미군기지라는 사실이었다. 7개기지에는 도쿄와 그 주변의 요코다공군사령부기지, 요코스카해군사령부기지, 캠프자마 그리고 사세보의 미해군기지, 오끼나와의 후템마미해병대사령부기지, 카데나공군기지, 화이트비치해병대기지로 가장 중요한 주일미군 시설들이 포함된다. 이것은 1951년 9월 당시 수상이었던 요시다 수상과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사이에 체결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