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상의 뿌리를 찾아서-담양호남유학주의2004/11/28

담양의 호남유학주의
사진작가 이시우
들어가는 글
여름 담양가는 길에 고속버스에서 본 나뭇잎과 풀잎들은 마침 북상하는 태풍으로 부산스레 흔들리고 있었다. 옥수수는 비장하게, 풀잎은 장엄하게, 포플라는 아양을 떨듯이, 아카시아는 환호성을 지르듯 나부끼고 있었다. 숲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나무들은 바람을 맞아 비로소 자기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산은 나무의 연대로 보이기 보다는 숲 그자체로 보인다. 늦가을이 되어 다시 보는 길가의 가을산은 역시 여름산과는 달랐다. 바람불지 않아도 눈부시게 자기의 색채를 뿜어내 놓으며 나무와 나무가 어울어진 숲으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여름산이 성장의 숲이라면 가을산은 성숙의 숲이다. 성장과 발전의 시기에 보이지 않던 차이와 통일이 성숙의 시기에는 저렇게 가을산 처럼 보인다. 담양,창평은 조선성리학의 디딤돌이 됐던 호남유학의 고향이다. 광주보다 더 융성했던 담양은 현재의 쇄락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적 맥은 면면히 흐르고 있어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호남사림으로부터 5.18까지의 기나긴 성장기로부터 정권교체로 그 숙원을 풀고 성숙기로 들어서는 전라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역사상의 차이와 통일의 가능성을 보기 위해 나는 담양으로 가고 있다.

담양의 자부심과 저항적 정서
담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 않다 하더라도 눈빛이 빛나는 사람들이었다. 전라도 특유의 강렬함과 걸죽함이 약간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 자부심과 저항적 정서가 담양을 지배하는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의 뿌리가 깊은 이곳에서 월북인사인 비날론의 창시자 이승기 박사나 주1),
해방공간 최대의 화학자.남북을 통털어 그의 제자들은 제 1의 화학자들이다. 그는 장전 이씨로 창평군 장화리 출신이다.
명창 박동실에 주2)
서편제로 유명한 김소희 명창의 스승이다. 일제시대 담양 지실 마을에서 박동실을 중심으로 일어난 애국음악운동의 주역으로 판소리 안중근가등을 창작한 인물이다. 월북했음에도 김소희 안숙선등 대를 이은 제자들의 그에 대한 존경은 변함이 없다.
대해 어떻게 생각되고 있을까 창평면 장화리와 남면 지곡리의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반응은 생각과 달리 이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좌우익을 떠나 ‘우리지역을 빛낸 사람들’로 존경받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송강 정철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의외 였다. 담양의 한편에서 정철은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또 한편에서는 담양과 호남을 흙탕물로 만들어 버린 ‘미꾸라지 같은..’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주3)
역사에선 예술가로서의 그의 문학적 성취 때문에 엄청난 정치적 과실을 눈감아주고 있다. 기축옥사로 표현되는 호남 사림의 대 숙청이 그것이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모반사건 조작을 통해 서인 정권을 굳히고자 했던 사건이다.
그래서 무등산 개발계획의 정신문화적 근거지로 추진되던 송강의 가사문학관 개발은 심한 반대에 부딪쳐 있었다. 군청직원은 아예 담당자를 서로 미루어가며 즉답을 회피 했다. 주4) 94년부터 추진되던 가사문화권 관광개발 계획은 97년 광주와 담양의 환경단체등을 중심으로 심한 반발에 부딪친다.몇차례의 공개 토론 끝에 가사문학관은 공사중에 있지만 논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송강을 내세워 호남을 예향으로 만들어 온 것은 호남사람들의 의지만은 아니었다. 역대 정권에서 호남을 예향으로 만들어 온데에는 이조시대 기호지방의 노론정권과 현대 영남정권등 당시 패권지역의 호남문화 추켜세우기가 있었다. 주5) 기호지방의 서인정권은 가사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진경문화를 완성한 송강을 정승의 자리에 앉히고 서인 정권의 영수가 되게 한다.
그러나 담양의 지고한 학문과 예술의 세계는 외지인들의 말 칭찬과 90년대들어 만들어진 관광문화에 의해 빛과 그늘을 함께 갖고 있었다. 주6))
소쇄원 주인 양재영씨의 말은 그래서 담양의 단면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 했다. ” 술취한 관광객들에게 맞아서 이빨이 5개나 부러 졌어요. 소쇄원에 150만명의 관광객이 왔다 가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 집에서 관리하기에는 이젠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관광객의 발길이 소쇄원의 둑과 길을 허물어가고 있어요.”이는 비단 소쇄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호남을 예향이라고 추켜세우면서도 그 정신을 형성케 했던 영산강이 오염되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 정부에선 15년 넘게 침묵하고 있다. 담양에서 발원하여 광주천을 거쳐 목포 앞바다로 흘러가는 영산강은 담양광주지역의 사양산업유치에 의해서 소독을해도 먹지못 할 만큼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결국 지역차별정책에 의한 수직적 분업구조는 호남을 예향이라고 추켜세워 왔던 대신 사양산업지대로 몰아간 것이다.주7) 영남에 의한 호남의 차별을 황태연교수는 헤치터의 내부식민지론을 적용하여 분석하고 있다. 한 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지역문제는 본질적으로 식민지적 과정이란 해석이다. 영남에 대한 호남의 지역감정은 민주주의를 향한 저항적 근거가 있으나, 호남에 대한 영남의 지역감정은 패권주의일 뿐이다.
예향이란 자부심과 경제적 차별구조에서오는 저항적 정서, 자부심이 사람들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저항의 구조가 극복되어야 했다. 담양의 정서가 한 동네에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담양을 중심으로한 무등산지역의 지역전략은 이것을 극복하는 방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담양군의 지역 발전 전략
[죽세품의 고장」인 담양군은 전남도내 대표적 산간지로 경제규모는 도내에서 중하위권을 맴도는 등 열악한 편이다.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고령화 되고 있다. 특히 96년도의 경제자립도 17.4%가 보여 주듯 산업시설이 아주 빈약해 이농현상을 부추겨 지역경제가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담양군은 그러나 이같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를위해 도­농­공 복합형신도시 육성 등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었다. 하지만 담양군의 농공단지에 입주한 40여개 업체중 일부 업체는 휴업이나 미가동 상태에 있다.
또 이지역이 가사문학의 본고장임을 감안,가사문학을 복원하고 천연기념물인 관방제림,추월산 담양호 등 각종 문화유적지 등을 한데 묶은 관광종합권 개발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현재 담양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는 시설원예 단지의 딸기 특화사업이다.내가 갔을 때도 군수가 일본에 딸기쥬스,쨈 수출문제로 출장중이었다. 그러나 WTO체제 출범때부터 쌀 등 기초농산물이 위축되고 특용작물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과잉생산 등으로 가격 폭락이 우려돼 시설의 현대화와 함께 업종전환을 요구 하고 있었다.
그동안 영남중심의 패권적 권력은 광주에 대한 장미빛 공약과는 달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전략과 전술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 해 왔다. 정권 교체와 함께 담양의 새로운 발전을 기대도 해봤지만 IMF로 포기 상태였다. 전체예산 500억중 91억이 삭감된 상태에서 모든 계획은 긴축상태 였다. 그래도 젊은 사람과 광주의 지식인등을 중심으로한 푸른 21이나 무등산권 문화유산 보존회등의 시민단체들이 뛰고 있으며, 한편에선 광주민노총등을 중심으로 정치세력화의 문제등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지역권 전체를 내다보는 전망은 없는 듯 하다. 그렇다면 담양 지역전략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잡혀져야 할까?

전략수립의 우선순위
전략수립의 우선순위 즉 전선은 어디에 형성되어 있는가? 전선은 안팎의 모순이 집중된 지점이자 각 세력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지점이다. 담양을 비롯한 호남죽이기는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오기도 했고, 교묘하게 진행되어 오기도 했다. 노골적인 탄압은 5.18광주의 저항을 짓밟는 폭력으로 나타나서 인식의 혼란 같은 것이 존재할 틈을 주지 않았다. 또한 강준만씨등의 치밀한 분석으로 교묘한 전선의 실체도 많이 벗겨진 셈이다. 그후는 어떠한가?
김영삼 대통령시절에 이루어진 광주비엔날레는 광주를 국내속의 지역에서, 세계속의 지역으로 발돋음시켰다고 한다. 세계속의 광주가 문화로 그 출구를 마련한 것은 진출한 것인가? 포섭된 것인가? 그 대답과 관련하여 광주비엔날레에서 상징적인 한가지 사건이 있었다. 리옹 비엔날레의 5천평 공간을 연출한 관록과 권위의 하랄드 제만은 「속도관」의 커미셔너를 맡았는데 그의 중심 아이디어는 놀랍게도 소쇄원이었다.지역문화의 상징과 현대미학을 접목시키는 절묘한 구상을 내놓자 전시기획실 멤버들은 환호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속도와 연결되는 동양적 개념은 물이다.나는 계곡과 정원,정자가 잘 가꿔진 소쇄원의 물굽이를 보고 동양적 에너지의 표현방식을 확보했다』고 밝혔다.본전시 전체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속도전의 입구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근법적 그림과 소쇄원 목판도를 나란히 걸어 동·서양 문화의 만남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서구인들은 스스로의 근대이성주의 비판을 동양의 비합리적 신비주의 문화에서 구할 때가 많다. 하랄드 제만의 경우도 그랬다.주9) 그러나 1755년 소쇄원목판도가 그려진 시점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조선성리학의 영향으로 진경산수가 그려지고 100년전 정선에 의해 세지점에서 바라보는 삼원근법등이 창안된 때였다.소쇄원 목판도는 공간성을 평면으로 도해하여 돌려가면서 보도록 되어 있다. 당시의 소쇄원도는 조선성리학을 창출한 서인 정권의 기반이었음에도 정작 정권장악후에는 서인,노론 정권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음으로해서 그들의 독자적 문화인 진경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예외적인 문화 였던 것이다. 당시의 전형적 문화는 서양보다 앞선 풍속화가 김홍도에 의해 그려지고 있던 완성기의 진경문화 였다.
제만은 속도라는 서구의 근대적 개념을 동양의 물 개념에서 찾아냈다고 감격 했다. 속도는 과학과 시민혁명의 적극적 낭만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소쇄원의 계곡물은 사화를 피해 정치론에서 심성론으로 침잠하던 시기 소극적 낭만주의의 산물이다. 제만은 여느 서구지식인 처럼 동양적인 것에 근거 없이 감격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근대혁명에 가까운 이미지를 찾는다면 망월동의 이미지가 논리적으로 가깝다. 광주의 미술인들이 광주비엔날레를 비판하면서 통일비엔날레를 기획한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하는바가 크다.
제만에 의해 담양은 문화적으로 세계화 되는 듯 하지만 그것은 서양이 한국을, 특히 호남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전제로 한 무의식적 키쳐세우기 일뿐이다. 주10) 서양인들중엔 노골적으로 지배의식에 빠진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양심적 지식인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무의식적으로 지배에 동의하는 경우가 있다. 미와 정치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은 칸트이래 서양지성의 뿌리깊은 사고 방법이다.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는 정치경제적으로 지배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북한의 문화는 한국의 경우와 달리 추악하고 유치한 것으로 표현되기 일쑤이다.
세계가 담양을 보는 시각이나, 패권지역인 영남이 담양을 보는 시각에서 [교묘한 전선]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미를 통한 지배]이다. 주10)
이와 관련하여 가장 적절한 예는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 그는 일제때 양심적일본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는 당시 오키나와등을 돌면서 일본국이 조선국을 병합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은, 한국은 위대한 미를 낳은 나라이며, 위대한 미를 가진 민중이 생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라고 조선을 칭송한다. 그러나 야나기는 조선이 폭력에 의해 독립을 획득하는 것엔 적극 반대 했다. 그것은 일본인의 방식이지 조선의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이다. 이는 호남의 저항적 지역운동에 대해 지역감정이라고 혹독히 비판하면서 호남의 미를 한서린 서편제의 예향으로 부르는 영남의 논리와 마찬가지이다. 결국 외부식민지나 내부식민지나 그 지배의 논리는 일관된 것이다.
담양지역전략의 우선순위는 [미와 정치의 분리를 통한 지배]에 의해 형성된 전선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럴 때 전략 우선순위는 미를 통해 분리된 채 소외되어 왔던 정치적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권교체는 전략수립의 조건이 바뀐 획기적 사건이다. 정권교체의 의미가 결코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정권교체는 이제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지역차별의 잔재를 청산하고 지역평등을 이룰 수 있는 전략의 시작인 것이다. 지역차별의 완전한 청산은 지역평등발전을 실현함으로서 해결된다. 영남패권에 의해 소외됐던 지역의 차별이 해소되고 지역등권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위해 차별잔재에 대한 비판투쟁과 함께 지역의 고유한 본성에 입각한 자기 발전의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주11)
모순의 대립과 투쟁은 물질의 여러 가지 속성중의 하나이다. 물질은 투쟁의 속성도 있지만 단합하고자 하는 속성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속성을 일으키는 동력은 본질적인 속성 .즉 본성이다. 지역은 외부로부터 차별 받기 이전에 자기의 본성이 있고 이 본성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차별일때는 투쟁을 통해 극복하려하고, 조화일 때는 단합,통일하려고 한다.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중요한 대안임에는 분명하지만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정권교체이후 지역전략의 오류는 쿠데타로 지역패권주의를 부활시킬 수도 있고, 호남 스스로 패권주의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담양의 지역전략은 담양의 본성을 올바로 확인 하고 실천하는 자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지역의 본성을 구성하는 핵심은 지역의 사상이며, 그 완성은 문화이다.

담양의 지역사상
1) 담양에서의 호남유학 성립과정
영남의 퇴계학파는 교조적인 주자학파로서의 성격을 뚜렸이 가지고 있고, 경기,충청지방의 율곡학파는 조선성리학의주12) 퇴계는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복잡한 주자학 원래의 체계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며, 어려서 금강산에 출가 했던 경험이 있는 이이는 불교의 체계를 이용한 주자학을 이황의 성과에 기초하여 새로운 논리로 발전 시킨다. 중국에는 없는 유학이 조선에 출현했으므로 이를 조선 성리학이라 부르게 된다.기치를 뚜렷이 내걸고 있다. 그에 비해 호남유학은 고유한 학파나 정신적 색깔이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호남 유학은 사실상 새로운 유학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정몽주를 시조로 한 조선유학은 조광조대에 이르러 개혁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하나 가혹한 탄압에 부닥치게 된다. 사림들은 죽거나 귀향가는 화를 입게된다. 이것이 사화다. 사화는 유림들을 산림처사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화순 능주에서 조광조의 죽음을 지켜본 사림들은 무등산 주변에 모여든다. 주13)당시 담양은 광주보다 중심지 였으며 대나무와 죽세품을 중심으로한 상권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처사노릇을 하더라도 물적토대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호남유학의 초기 인물인 하서 김인후는 대지주 출신 이었다. 그리고 소쇄원 식영정 같은 정자를 짓고 학문과 시가에 몰두한다.주14)초기의 정자문화를 잘 보여주는 소쇄원은 주돈이의 무이구곡으로 상징되는 유교문화를 이해,심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부터 몇대에 걸쳐 만들어진다.참고로 무이구곡은 주돈이가 중국 무이현의 골짜기를 유람하고 골까기 하나하나가 유교의 이상을 성취해가는 단계를 잘 상징하고 있어 무이구곡가를 짓게 된데서 유래된 것으로 도교의 무릉도원에 해당한다. 무이구곡은 공자이래 불교,도교를 흡수한 주자대, 신유학의 특징으로 유교는 비로서 형상적 문화를 갖게 되는 셈이다.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로마문화를 버렸다가 르네상스때 다시 기독교의 형상수단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조광조대까지 다소 정치적이었던 유학은 이 시기를 거치며 우주와 심성등 학문의 근본적 문제로 화두가 옮겨지면서 철학적 체계를 완성해 간다. 초기 호남사림의 종장이었던 김인후의 고민도 유교를 어떻게 도,학,예의 통합체계로 인식할것인가 하는데 있었다. 사상적으로 교조적인 주자학 신봉자 였던 그에 비해 그의 다음세대인 기대승은 사제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여러 학문을 섭렵하고, 이전엔 제기된 적이 없던 나름대로의 논리의 경지를 개척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논쟁이 그 유명한 퇴계와의 사단칠정 논쟁이다. 주15)간혹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를 오해하여 영호남의 숙명적 대립을 상상하기 쉬우나 둘의 관계는 너무나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 였다. 여기에서부터 지역성을 찾는일은 무모한 비약이다. 이 논쟁은 이후에 펼쳐지는 당쟁시대에 각종 논쟁의 씨앗을 제공하는데 이 논쟁을 통해 유학은 비로서 조선식의 논리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조선성리학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사화의 시대는 마감되고 드디어 사림이 중앙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율곡을 총애한 선조때의 일이다.주16 지역적으로는 한강을 끼고 있던 파주등 경기지역과 비옥한 평야를 가진 충청지역.즉 기호지방이 해당된다.
조광조와 기대승으로부터 이어진 호남 사림의 염원이 실현된 것이다.
2) 호남유학세력의 주변부화
그러나 호남사림은 서인정권 창출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했지만 서인의 집권후에는 주변부화 된다. 기호지방과 같이 클 수 있었던 가능성이 배제되게 된 데는 기축옥사로 드러난 서인정권의 지배전략 때문이었다.주17) 기축옥사는 정여립모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사건을 잠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신의 정권에 끊임없이 도전해오는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서인정권은 나주의 정여립이 벼슬에서 쫒겨난후 군사를 모아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하여 이와 연루된 수천명의 사림을 죽이거나 숙청한 사건이다. 호남에서 서인에 속해 있던 사제관계를 제외하곤 예외없이 화를 입는다. 훈구파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사림으로부터 입은 화도 뼈골에 사무치는 것이었지만 더욱 큰 충격은 호남이 이때부터 역모의 고향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사화의 시대에 빛나던 호남의 저항과 절의정신은, 당쟁의 시대에서는 가혹하게 진압되고 만다 주18) 민속학계 일부에서는 정여립이 실제 모반을 준비했다는 설도 있다. 정치적 탄압의 빌미가 된 근거 이기도 하지만 모악산에서 기도를 하며 미륵사상등에 심취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호남이 다시 빛나는 정신사를 장식하게 되는 것은 오랜 잠복기 끝에 조선성리학 시기를 지나 실학시대이다. 실학의 시대에서 호남의 저항과 절의 정신은 잠시 수면으로 떠올랐다가. 주19) 유형원같은 경우는 변산반도에 자리 잡으면서 당시의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땡초라 불리던 승려결사조직 ‘당취’의 영향이나 반란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농민들의 분위기로부터 개혁적 사상을 감지하고 실학의 길을 펼친다.
동학에서 전면 부상한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주변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심으로 육박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호남의 한과 함께 자부심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것이다.

3) 호남유학주의의 특성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우선 영남의 보수적 학풍이건, 기호의 자유주의적 학풍이건 타 지역에 배타적 성격을 갖는다. 이에비해 호남은 정철이 이이와 동기로 서인정권의 영수가 됨에도 불구하고 호남사림은 뚜렷한 학파나, 사승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반대로 사상에 있어서 스승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적 사고가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주20) 이러한 전통은 이미 기대승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나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제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독자적 사상체계를 만들어가던 전통과도 맞닿아 있었다. 영남과 경기충청과는 달리 개혁적분위기와 교조적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학풍등의 영향으로부터 개혁적으론 다양하고 교조적 유학으로부터는 느슨한 사상적 풍토가 동학때까지 이어진다. 정철에 대한 반감과는 상반되게 호남은 서인 뿐아니라 소론의 윤증,북인의 반계 유형원이나, 남인의 정약용까지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는 노론의 사승관계에 있으면서도 동학의 지도자로 변신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주21) 예를 들면 동학의 지도자중 하나인 이방언의 경우는 장흥지방의 토반이자 지주출신으로 젊은나이에 멀리 충청도 예산 노론학파인 임헌희에게로 가서 배운다 임헌희는 대사헌에 천거되고 철저한 중화의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방언은 그후 가문의 전통대로 향약계를 이끌었는데 한번은 흉년이 들었는데도 조세를 독촉하는 장흥부사와 담판하여 조세를 탕감케 하는등 노론계열의 토호로서보다는 백성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인사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흥선대원군과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그가 1891 동학에 입도 하면서 그는 열렬한 변혁 운동가로 변한다. 동학사에 보면 장성전투의 이장태 장군이 등장하는데 이장태가 바로 이방언이다. 장태란 동학군이 발명한 무기인데 소총을 뚫고 적진에 접근하기위해 만든 대나무와 볏짚으로 만든 둥근 다발모양의 무기이다(금성정의록).이 신무기의 위력이 알려지자 그의 이름이 이장태 장군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통 노론의 사제관계에 있으면서도 개혁적, 변혁적 사상으로 변화 될 수 있었던 사실이나, 경주최씨이면서 영남지방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호남의 은적암에 와서 사상을 펴게 되는 최시형의 예등에서도 증명된다.
이처럼 호남은 출사의 문화보다는 처사의 문화가, 지배의 문화보다는 민중저항의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몇몇사상가의 문제가 아니라 민중전체의 정서 였다는 데 호남사람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담양 향토문화연구원의 이해섭 선생은 담양의 정신은 한마디로 대나무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대나무는 풍요와 여유의 상징이며, 휠지언정 꺽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의 상징이며, 절대로 홀로 존재하는 법이 없는 집단성의 상징이란 것이다. 담양의 가마골에 있는 금성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 곳이자, 동학때는 500여명의 농민군이 끝까지 결사항전한 곳이며 항일의병때에도 이름모를 애국민중들이 장렬히 숨을 거둔곳이다. 기대승의 후손인 기우만 기삼연등이 의병에 기포 했고 임란때 7백의사의 지도자인 고경명의 후손 고광순이 의병기를 세우는등 대를 이어 절의 정신을 실천한다.주22) [담양.창평 의병사료집]을 쓴 이해섭선생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김대중 정권이 되고 나서 담양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내가 노인내들 한테 들은 얘기로는 말여요 만석군,천석군하면서 가사짓고 시가짖고 했던 양반들이 백성들 수탈한 것을 무시하면 안돼요. 나도 가사문학권 사업을 추진하지만 그보다도요, 정작 아무 이름없이 백성과 조국을 위해 싸우다 간 열사들을 위해 이곳이 전적지 였다는 푯말 하나 안세워져 잇어요.이들의 넋을 기리지 않고 호남의 정신을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사문학관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던 소쇄원의 양재영씨도 호남사림정신이 5.18의 정신적 뿌리였다고 주장하며 이 대나무의 정신에 대해선 동의한다. 호남사림의 정신은 조광조의 개혁사상을 계승한 전통위에서 기대승 이래로 민중의 역사적 진출과 깊이 교감하면서 독자적 사상세계를 만들어 왔다. 호남의 절의 정신은 영남의 왕권과 관념적 도에 대한 보수,교조적 의리정신이 아니며, 경기충청의 신(臣)권과 관성화된 개혁에 대한 자유주의적 의리도 아니다. 그것은 지식인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반성하며 백성의 삶과 요구를 끊임없이 자기화하려는 과정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던 백성에 대한 의리정신이었다. 위정척사운동이 존왕주의적 한계를 가지면서도 역사적 진보에 기여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변에 흐르는 민중성과의 교감 때문이었다. 호남의 사림정신과 민중성의 교류가 단절됐을 때 그것은 인촌 김성수로 고하 송진우로 나타났다. 호남유학주의가 정통 주자학으로도 조선성리학으로도 발전되지 못하고 이렇다할 학파나 세력을 만들어 내지 못했음에도 절의정신의 실천이란 일관성을 보여준 것은 민중성과의 교감때문이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은 호남유학주의란 기껐해야 노론계열의 조선성리학파로 환원될 뿐이다. 호남유학주의는 민중의 저항을 토대로 하고, 지식인 스스로의 반성적 자각을 줄기로 하여 세워진 대나무숲이었던 것이다.

맺는말
호남이 근현대사에서 유난히 진보사상의 근원지가 된 것은 사실 유학적 체계로 설명되기 보다는 비유학적 체계, 즉 미륵이나 동학, 민족종교사상등으로 더 잘 설명되어 지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지배사상으로서의 유학의 틀을 벗으면 벗어던질수록 호남유학문화는 새것으로 태어났다. 시가문학의 위기에서 가사문학으로 사설시조로 판소리와 소설로 가는 과정에서 민중문학의 수혈이 없었다면 예향으로 불리는 호남의 문화 또한 설명될 길이 없다. 김대중 정권하에서 추진되고 있는 백제, 견훤, 영정조,호남사림의 부각등 호남 살리기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항하여 쟁취한 저항적지역주의의 승리가 이끌어가는 자연스런 흐름이다. 이제 저항과 함께 건설의 대안을 마련해야하는 마당에 IMF는 김대중정부가 호남에서 지역등권을 실현할 수 있는 물적토대를 제약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호남이 쿠데타등에 의한 영남패권의 부활을 초래하든지 스스로 또다른 패권지역이되는 것을 막고 민중의 지혜와 힘으로 ‘호남이 아닌 전라도’주22) 호남, 영남, 기호는 봉건시대의 지명이다. 이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통용될 만큼 아직도 우리에겐 봉건의 잔재가 뿌리 깊은 것이다. 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힘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이 조건을 움직일려면 객관적 역사에 기초한 정신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담양과 무등산권을 중심으로 했던 호남사림정신의 정수와 만나야하는 절실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