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하나 평화통일기행서 만난 시 3편-통일뉴스2006/12/11 1183

철원에서 금강산 가는 길을 찾다
겨레하나 평화통일기행 동행기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2006-12-11 오전 2:37:45

▶철원 대위교. 금강산전기철도가 지나던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9일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이사장 최병모)’ 평화통일기행을 따라나섰던 기자는 10일 오전 철원 대위교에서 ‘금강산 가던 철길’이라 쓰인 표지판을 만났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연결됐던 금강산전기철도의 흔적이다.

1924년 개통 당시, 이 철도는 관광목적과는 거리가 군수용이었다. 창도에서 채굴된 유황을 철원까지 운반했으나 창도의 유황이 바닥나자 1931년 내금강까지 연장, 최초의 관광열차가 운행하게 된 것이다.

▶이시우 씨가 기행해설가로 동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기행해설차 동행한 사진가 이시우 씨는 “서울역을 출발해 철원, 창도를 거쳐 내금강까지 가는 비용이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쌀 40말이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명산 금강산을 간다’는 감흥 때문에 조선인들의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고 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1942년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의 영업실적은 여객 90여만 명에 화물 23만여t으로, 연 125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 회사의 전신인 철춘주식회사의 초기 자본금이 500만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강산관광사업은 그야말로 ‘노다지’ 였던 셈이다.

화려한 날도 잠시, 2차대전 말인 1944년 10월 군수물자 징발 이유로 일본 당국이 궤도를 전부 뜯어가면서 금강산 철길은 끊기고 말았다.

▶금강산 철길. 궤도는 없지만 노반석은 남아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대위교를 지나 북쪽으로 이어진 옛 철길에는 궤도 대신 노반석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돌위를 걷다 잠시 멈추고 돌아보니 당시 금강산 협궤열차와 나란히 달렸던 5번 국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1944년 금강산 철길이 끊긴다는 소식을 듣고 생애 마지막 탑승 기회를 잡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들었던 조선인들의 영상이 손에 잡힐 듯 했다. 객실에 빈자리가 없자, 일부는 열차 지붕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같은 ‘금강산 열정’에 대해, 이시우 씨는 “금강산이 민족의 명산이라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게 된 데는 자연적 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2번에 걸쳐 미학적 정리작업이 됐던 역사적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첫번째 정리작업은 금강산을 현세의 불국정토로 이상화했던 통일신라시기에 행해졌다고 이 씨는 주장했다. 금강산이나 비로봉 등의 명칭이 통일신라시기 ‘산천만다라’ 불교사상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정리작업은 송강 정철 등이 강렬한 반청의식에 입각, 한자가 아닌 한글로 시를 쓰고, 겸재 정선이 청이 지배하는 중원이 아닌 소중화 조선의 산천을 화폭에 담으면서 발흥한 민족주체의식과 관련있다고 지적했다.

’3번째 금강산미학 정리작업 필요’

▶삼부연폭포. 물길이 세번 꺾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그는 동시에 “정철의 관동별곡에 나온 금강산 유람길이나 정선의 금강산 화폭 기행은 치밀한 정치적 고려에 따라 정형화된 기행코스를 설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병자호란 당시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의 사당이 유람코스에 들어온 것은 ‘반청의식 고취’ 목적이라는 것이다.

정철 이후 금강산 유람객들은 반드시 철원을 거쳐 갔다. 정선도 철원에서 삼부연폭포를 화폭에 담은 뒤, 스승격인 김창흡이 살았던 용화동 마을을 지났다. 멀지 않은 곳에 홍명구가 전사했던 ‘화강백전(주-현재 김화)’이 있었다.

창도(주-북측에 있다)를 지나면 모든 시름을 잊고 머리 깎고 출가하고 싶다는 단발령에 이르고, 나아가 잡힐듯 다가선 내금강으로 들어가면 불국정토 또는 소중화의 이상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금강산천기철도는 협궤로 돼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어떻게 해야지?” 한 참가자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 대위교로 돌아왔다. “(금강산 가던 철길을) 금강산 가는 철길로 바꾸면 돼요.” 과천에서 왔다는 김강혁(10살)군이 명쾌하게 답했다.

철길 복원에 더해, 이시우 씨는 “3번째로 금강산 미학을 정립할 것”을 촉구하면서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주장했다.

숨차게 달려가서 허겁지겁 돌아올 것이 아니라 선현들의 금강산유람길을 여유를 갖고 반추하면서, 오늘 우리민족에게 ‘금강산을 간다’는 의미가 뭔지, 새롭게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승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왼쪽 산비탈 밑으로 흐르는 하천이 남대천이고 그
오른쪽 사선이 금강산철길이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남방한계선상의 해발 459M 승리전망대를 오르면, 대위교를 거쳐온 금강산 철길이 군사분계선상(MDL)의 남대천교를 스쳐, 북 군인들이 운영하는 하소리협동농장 중앙을 관통해 창도로 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옛 금강산 기행길이 현재의 분단과 비무장지대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씨는 “조선후기 금강산미학 정립작업이 반청의식으로 비롯되었다면 3차작업은 분단과 비무장지대의 비극을 걷어내는 일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금강산은 남과 북이 모두 민족의 명산으로 일치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면서, “3차 금강산 미학 정립은 남북이 함께 해야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9일 장단콩 마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9-10일 겨레하나 평화통일기행에는 겨레하나 회원과 그 가족 등 총 32명이 참가했다. 기행사업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겨레하나 조미애 국장은 “이번이 16번째 기행이다. 올해 한번 더 남았다”고 전했다.

9일 기행코스는 파주 오두산전망대와 장단콩마을, 비무장지대 내 캠프 보니파스, 도라전망대, 화석정, 철원 도피안사였다. 대마리 두루미평화관에서 여장을 푼 기행단은 10일 백마고지와 대위교, 삼부연폭포, 승리전망대, 철원 노동당사를 거쳐 서울로 귀환했다.

겨레하나 평화통일기행서 만난 시 3편
율곡의 화석정, 모윤숙의 백마의 얼, 우리의 소원

[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2006-12-11 오전 11:29:44

▶파주 임진강변에 서 있는 화석정.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수풀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었는데, 나그네 정은 다함이 없구나
먼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내린 단풍은 해를 향해 붉었다.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었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울음소리 저녁 구름속에 그쳐라.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율곡 이이의 花石亭)

율곡 이이 선생이 8살 때 지었다는 이 시를 9일 오후 파주 임진강변 화석정에서 만났다.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이사장 최병모)’ 평화통일기행 도중이었다.

▶화석정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변.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좋아하는 풍경은 그 사람의 내면을 닮기 마련이다. 임진강변에 서 있는 화석정은 깊은 산속 여느 정자들과는 시야가 달랐다. 탁 트인 시원한 광경은 율곡 선생과 기호학파의 활달함을 웅변하는 듯 했다.

율곡은 성리학에 통달했으면서도 불교를 이해했고, 고위관료 출신이면서도 천민을 친구로 두었으며, 한 때 대장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정밀하나 치우친 바가 있었던 퇴계의 이기론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켰으며, 시중(時中)을 강조했던 경세가였다.

현실과 이상이 균형있게 조화를 이뤘던 그의 사상은 후대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 사상 가장 보수적인 송시열에서 혁신적인 기일원론으로 나아갔던 임성주까지 다양하게 분화된다.

기행해설가로 동행했던 사진가 이시우 씨는 “심지어 동학농민전쟁 때는 농민군 지도자와 토벌군 지도자로 만나게 된다. 율곡의 문하는 그처럼 넓게 갈라졌다”고 평했다. 녹두장군과 양호초토사였던 홍계훈을 지칭하는 것이다.

▶화석정의 옥의 티는 박정희가 쓴 현판이다. 뒷쪽 걸린 액자는 율곡의 시 ‘화석정’.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율곡학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업적으로 이씨는 ‘금강산 미학’ 정립을 꼽았다. 율곡은 관동별곡으로 금강산 유람 코스를 정리한 송강 정철과 교분을 나눴다. 금강산을 화폭에 담았던 진경산수의 대표자 겸재 정선은 그의 문도를 자처했다.

‘율곡 선생과는 대화하기 참 편했을 것 같다’는 지적에, 이씨는 “그랬을 것”이라고 답했다. 학문만큼 현실에 대한 통찰도 깊었고, ‘파사현정’을 내걸고 사상탄압을 자행했던 후학들과는 달리 다른 사상(불교와 선교)까지 이해했던 포용력있는 보수주의자였다.

화석정에서 옥의 티는 박정희가 썼다는 현판이다.

▶백마고지 위령비 뒷면에 새겨진 모윤숙의 ‘백마의 얼’.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풀섶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산과 강에서
우리는 끊는 피로 용솟음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후략.) – 모윤숙의 ‘백마의 얼’

10일 아침 철원 대마리 백마고지 위령비에서 발견한 시다.

정전협정을 앞둔 1952년 유엔군과 한국군은 철의 삼각지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해발 395M 백마고지에서 영웅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국방부 전사자료는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사정은 좀 다르다는 것이 이시우 씨의 설명이다. “철의 삼각지대의 진짜 요충지는 지금 북측이 점령하고 있는 오성산이었고, 백마고지는 몰리고 있었던 미군이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언론을 불러 그 앞에서 연출한 전투”라는 것이다. 그는 “미군의 대언론용 연출은 베트남전에서 그대로 반복된다”고 덧붙였다.

▶이시우 씨가 백마고지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야산이 백마고지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모윤숙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비롯한 수많은 전선시를 써내며 한국전쟁을 ‘숭고한 반공전쟁’으로 미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죽음의 공포에 떨며 죽어갔던 어린 병사에게 울림있는 시로 ‘조국의 품’을 부여한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정작 그 병사가 목숨 바쳤던 조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장본인들이 모윤숙 자신을 비롯한 ‘친일파’들이었다는 사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묻혀졌다. 정의감에 불타는 어린 병사가 살아 남았다면 모윤숙의 헌정시를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뒤틀린 분단의식의 편린은 9일 장단콩 마을 부녀회관 식당 앞에서도 발견됐다. 장모 씨가 ‘무진년(1988년) 초겨울에 썼다’는 ‘우리의 소원’ 가사를 적은 액자였다.

장씨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결같이 품고 있는 통일염원이 이 노래에 모두 표현되었다’고 지적하고, ‘반공 강연에 감명을 받고 제3땅굴에서 채취한 통일수로 먹을 갈아 이 글을 썼다’고 자랑스럽게 적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