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헌법3조에 대한 명상을 시작하며.., 이시우 2008/01/01 1837

국가보안법과 헌법3조에 대한 삼보일배 명상을 시작하며

처음 시작은 이랬다.
지난 월요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삼보일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엔 학생들이 삼보일배를 하다가 강제연행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 시경에서는 집회허가가 필요 없다고 통보를 해왔다는데 관할서인 영등포경찰서는 서장까지 직접나와 삼보일배도 집회니 신고 되지 않은 집회는 불법집회라며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을 전경들로 포위하고 학생과 행사를 기획한 단체의 간부까지 강제 연행한 것이었다.
국가보안법만이 아니라 그것을 집행하는 기관들의 몰지각과 비상식이 날이 갈수록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삼보일배에 함께 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바쁜 일정 때문에 하루에 두시간씩만 시간을 낼 수 있다며 돌아갔다. 나는 더 하다 가겠노라고 했고 귀가하려던 일행중 유일한 어르신인 오철근선생님이 함께 남겠다고 했다. 보석으로 출소하면서 감옥에 남아있던 분들께 마음의 빚을 진 것 같아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삼보일배를 하며 마음에 남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리다보니 땅을 가장 가깝게 끌어안는 것이 바로 절이란 형식임을 알았다. 1배1사. 절 한번에 따라오는 사색의 고리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힘들어하던 몸이 이미 내 몸 같질 않다.

사람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존재였다는 이유로, 땅이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의 터전이자 원천이었다는 이유로 땅은 사람관계에 따라 이러저런 척도로 재어지고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땅은 토지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먹고사는 관계의 눈, 경제의 눈으로 볼 때 따라오는 이름이다. 또한 땅은 영토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국가권력의 눈으로 볼 때 따라오는 이름이다.
나는 손에 흙과 먼지를 묻히며 한걸음씩 나아가지만 누군가는 이 한걸음을 위해 피를 묻히며 나아갔을 것이고, 누군가는 손에 눈물을 떨구면서 나아갔을 것이다. 땅 한뼘을 더 갖기 위해 음모와 술수로 배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력과 폭력으로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영토란 이름은 피어린 전쟁의 개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어제는 한나라당에서 농성하던 박근혜지지자분들이 나타나 학생들의 삼보일배 행렬을 가로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온갖 폭설과 비난을 쏟아 붓기도 하면서 국가보안법사수 주장을 넘어 학생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피어린 영토의 개념을 마음속 한가운데 하나씩 담고 있는 이들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경찰의 무전기 소리, 어디론가 뛰어가는 마음 바쁜 사람의 구둣발 소리, 비아냥과 욕설소리가 눈감으면 귓전에 웅성거리지만 정작 마음속에 크게 구멍을 내고 가는 것은 들리지 않는 소리, 무관심이다.
산사람끼리 만나면 1배를 한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2배를 하고 반배를 더한다. 신성한 것에 대해서는 3배를 한다. 3배를 넘으면 그땐 대상이 아닌 스스로를 향해 하는 절이란 생각이다. 누군가를 염두에 둘수록 더 크게 돌아오는 무관심은 대상을 향해 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삼보일배는 스스로에게 하는 절이다. 진지하게 절 할수록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고, 경건하게 절 할수록 세상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땅에 내뱉어진 가래침을 지나며, 누군가 비벼 끈 담배꽁초와 담뱃재를 지나며, 그리고 껌자국과 우유곽과 신문지 쓰레기를 지나며 나는 느꼈다. 땅이야말로 가치를 다한 인간의 욕망과 배신마저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끌어안는 가슴임을, 가장 큰 가슴이었음을… 내가 땅을 끌어안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옹색한 근시안과 선입견의 소치였던가를 반성하게 된다. 땅에 머리를 조아리자 땅바닥을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뒹군다. 그 바람이 머리를 풀어헤치며 쓸고 간다. 땅마다에는 제 나름의 향기가 있다. 제 나름의 빛깔이 있다. 그 향기와 빛깔을 다듬고 가꾸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사람이 있다. 소유의식이 땅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이자 폭력의 시작점이다.

국가보안법의 근원이 바로 이 ‘땅’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새삼 느낀다. 대한민국 헌법3조는 영토조항이다. 땅에 대한 최고의 배타적 개념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유엔총회 결의와 혈맹인 미국조차 인정하지 않은 영토조항을 인정받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두 번이나 미국의 제거계획에 직면해야 했고, 군사정권은 헌법4조 통일조항을 신설하여 북의 실체를 인정하는 모순을 노정시켰다.
우리는 무관심마저 안아주는 땅에 대해 소유와 전쟁과 관성의 힘으로 헌법의 영토조항을 지켜왔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통일을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자면서도 국가보안법과 함께 헌법3조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는 어제 삼보일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땅’으로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시 땅으로 공손히 돌아가 사색하고자 마음먹었다. 늦은 밤 먹을 갈아 붓으로 흰옷 위에 썼다. ‘국가보안법과 헌법3조에 대한 명상’.
땅이 짓밟고 디뎌서기 위한 대상인지, 끌어안고 보듬어야 할 대상인지를, 점령하고 수복할 대상인지, 존중하고 통일해야 할 대상인지를 사색하고자 한다. 우성이에게 이제 아빠가 집을 떠나게 됨을 말했고, 아내와 아들은 다시 한번 아빠의 결심을 감당하기로 했다. 한없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문고리에 걸어두고 집을 나선다.

2007.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