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정7월호2002/06/02

통일기행
철원역을 찾아서
이시우
비포장길을 달리던 버스 창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 안 사람들의 입김으로 금새 창안쪽은 김이 서린다. 앞에 앉은 여학생이 소매를 잡아올려 서리를 지운다. 그러나 밖에 덕지가 된 흙먼지 때문에 그 노력은 무위가 되고 말았다. 밖을 보고 싶은 간절함 때문인지 학생은 지우고 또 지우고를 몇 번 더 반복한다. 창밖 흙먼지를 닦기 전에 소용없는 일임을 모를리 없건만 안쪽에 서린 김만을 지우는 것이었다. 창은 하나지만 안과 바깥이 있어 모두가 닦이지 않으면 우리는 바깥을 볼 수 없다. 밖을 닦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나만의 결백함을 넘어 진흙탕길 위의 역사를 만나려고 오는 것은 아닌가? 어느새 버스는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합쳐지는 철원역 폐허지에 닿았다. 철원의 민통선관광에서도 소외된 철원역 터.
지나온 길 돌아보니 비 그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다. 푸른 대지에 구멍 뚫린 듯 하늘이 비춰지고 잇는 것을 보니 아마도 하늘은 제 얼굴이 보고 싶어 비를 내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물 고여 길은 끊어져 있었다.(사진75) 바로 옆 웅덩이엔 들풀들에 섞이여 벼 잎이 올라와 있다. 드높은 하늘과 그보다 더 깊은 물의 마음이 기르지도 않은 벼를 키워가고 있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깨닫는다. 지나온 여름과는 다른 새로운 여름 속에 서 있음을 (사진80)
허리를 낮춰 레일을 보고 있노라니 1911이란 제작연도가 양각되어 있다. 러시아혁명 후 추방당한 러시아인들을 동원하여 부설한 철도가 경원선이다. 그 경원선이 이제 다시 러시아에 의해 비무장지대를 가로질러 유라시아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이상에 도취하기 앞서 과거의 고난에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했던가, 미래로 나아갈수록 과거가 절실해지는 것은 시간이 과거로도 흐르기 때문이다. 침목에 박힌 레일 못이 눈에 들어온다. 못은 90여년 동안 철로를 부여안고 자신을 박아 놓고 있었다.
때론 포화와 싸우며, 때론 무관심과 싸우며,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과 싸우며.(사진홈페이지빔장지대사색5)
누워 있는 침목은 이젠 아주 풀속에 묻혀 있었다. 풀보다 낮게, 풀보다 깊게, 풀보다 오래.(사진72세로사진)
기다림이 간절한 자는 먼 곳을 본다. 그리하여 기다림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사진 홈페이지비무장지대사색46)
이들의 기다림이 있어 경원선은 단순한 차선이 아니라 전선일 수 있었다. 분단과 통일, 반도의 울타리와 유라시아의 광야, 그리고 전쟁과 평화를 가르는 전선. 운이 좋으면 금강산선이 갈라지는 갈대숲에서 인기척에 놀라 유연한 허리를 날래게 퉁기며 달아나는 노루가족을 만날지 모른다. 금강산선은 철원에서 시작하여 정연.유곡과 지금은 북이 된 창도를 지나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철길이다. 이 길은 정철이 서울에서 금강산을 거쳐 관동팔경을 노래하던 금강산 산유코스와 일치한다. 조선후기 기행문양식의 전형을 이루었던 ‘금강산 산유록’류의 가사는 거의 예외없이 정철의 관광코스를 따르고 있다. 누구인들 독특한 길을 찾아가 보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디로 가봐도 정철의 길만한 코스가 없었던 모양이니 금강산철도는 조선식 금강산 유람코스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로 에돌아가는 지금의 금강산관광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제대로 된 금강산 관광은 폐허가 된 금강산 철도의 복원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을 막고 있는 것이 있으니 정전협정문서이다. 1953년 종전이 아닌 정전을 선언한 문서. 이 문서하나로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공식적으로 전쟁상태에 있다. 분단이란 끝나지 않은 전쟁의 다른 이름이다. 때문에 영롱한 일출마저 철책선을 통해 봐야하고, 관광이 곧 역사의 과제가 되고만다. (사진 홈페이지 비무장지대사색 60)
내가 처음 이런 깨달음을 얻은 곳이 철원평야여서 그런지 통일기행의 1번지를 권하라면 나는 아직도 철원이다. 90년대 ‘역사의 종말’과 ‘잔치는 끝났다’는 말이 그리도 마음을 짓누르던 시설 친구들도 모두 떠나고 사치로만 생각되던 여행을 떠난다고 온 곳이 하필 철원이었다. 눈 내린 들판의 태허. 설원도 하늘도 잿빛이었다. 그 사이로 허허로이 날아가는 철새. 아련한 아름다움도 잠깐. 세찬 바람이 아프도록 몰아쳐 왔다. ‘그래 아프지 않은 아름다움도 있다더냐.’ 나는 문득 직감했다. 내 마음의 풍경과 철원평야의 풍경이 닮아 있음을…(사진 홈페이지 비무장지대사색58) 그리고 두 번째 찾은 곳이 신탄리와 철원역 사이, 전쟁때 인민군이 몰살당했다는 폐터널이었다. 옛 철길터로 1시간을 걸었지만 10분쯤 가면 나올 거라던 터널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마을로 되돌아와 물으니 어쨌든 계속가면 나타난단다. 다시 1시간 10분쯤을 걸어 탈진할 때쯤 과연 터널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콘크리트 벽은 지하수에 트고 부서져 자갈돌을 비죽비죽 드러 내놓고 있는 것이 마치 동굴 벽 같았다. 무척 길게 느껴지는 터널을 걷고 또 걸으니 터널은 시멘트를 쏟아 부어 막혀진 채 끝이 나 있었다. 뭔가가 있을 것 같았는데… 막막한 마음에 문득 고개를 돌려 들어왔던 터널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터널에선 눈부신 광선이 쏟아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터널을 찾기까지 탈진하도록 지치게 했던 빛이 이토록 눈부신 것인 줄이야. 빛은 밝았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만이 가장 밝은 빛을 볼 수 있다.”
세상이 빛을 잃은게 아니라 내가 빛 속에 빠져있어 잊고 있었던 것이다.(사진 홈페이지 비무장지대 사색59)
자유의 반대는 관성이다. 자유의 반대가 구속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구속은 저항할 수 있는 자유까지 어찌하진 못한다. 그런 점에서 관성은 내면화된 구속이다. 내가 구속되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자유롭다고 판단하는 상태. 모든 생동함을 지리한 일상으로 환원시키고야 마는…
매마른 관성에 소나기의 해갈이 필요해서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을 찾아가는 기행로가 생겨났는지 모른다.

추신
글을 쓰다보니 CD하나를 더 드리고 왔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제가 빨리 서둘러도 6일이나 되어야 귀국을 할텐데…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홈페이지의 사진을 대용할 수 있을까 해서 그 번호를 적어 놓았습니다. 만일 무리가 있을 것 같으면 이메일을 주시겠습니까? 가하면 OK라고 쓰시고 불가하면 NO라고 써주세요. 혹시라도 중국에서 메일을 확인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겟습니다.

그리고 사진선택을 비롯하여 편집은 편집장님께서 알아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편집을 하면서 사진을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선택한 사진은 글에 맞추어 놓은 것이니 참고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