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와 미국의 자기최면-북방한계선(105매)2004/03/01

서해교전과 관련 인터넷 통일뉴스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글입니다. 급히 쓰느라 이전글에서 발췌한 부분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통일뉴스에서도 보실수가 있습니다.

국방부와 미국의 자기최면 – 북방한계선

이시우

1. 두 서해교전의 핵심-북방한계선
또다시 서해교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서해교전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 할 것이다. 국방부가 자기 최면을 풀지 않는 한.
이번 사건에서 국방부가 가장 신경 써서 홍보한 부분은 선제공격이었고, 이를 패스 받은 언론이 가장 민감하게 다룬 부분은 의도성이었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도 언론에 등장해서는 모두 의도성 논쟁에 한몫 거들었다. 내가 아는 한 단체와 전문가들이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을 리 없다. 나는 방송의 편집이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이번 사건에서도 ‘의도성’ ‘누가 먼저 쐈는가’ 등은 전혀 본질이 아니다. 맥락 일뿐이다.
북에서는 남이 영해를 침범했기 때문에 쏘는 것이고, 남에서는 북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했기 때문에 쏘는 것이다. 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각자에겐 있는 것이다. 과연 북방한계선 침범이 맞는가? 영해침범이 맞는가? 계속되는 서해교전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남과 북의 꽃다운 청춘들은 억울하게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역사가 인간에게 내주는 문제치고는 그래도 쉬운 문제에 속한다. 객관적인 진실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의도’ 찾기 게임에 골몰하기 보다 있는 현실만 정확히 알아도 이 문제는 쉽게 풀린다. 96년까지는 심지어 국방부장관과 미국에서도 정답을 알고 있었다. 96년 당시 아직 이 사건이 서해교전이라고 불리지 않던 시절 이양호 국방장관은 국회에서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으로부터 지난 4·11총선 후 북한 함정의 서해상 도발에 대한 정부 대응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질문 받고, 정확히 다음과 같이 답했다.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은 어선 보호를 위해 우리가 그어놓은 것으로, (북한측이) 넘어와도 정전협정 위반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장관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의원들간에 소란이 일자, 『해상의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상에 규정된 지상의 군사분계선과는 다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조선일보96.7.16)

이양호 국방장관이 북방한계선에 대해 정확하고도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980년대 공군대령으로 유엔사군사정전위 한국연락장교단장으로 상당기간 복무하며 군정위회의에 수없이 참가해온 정전협정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조차도 원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정전협정문서를 그는 날마다 협상의 기초자료로 암기하다시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함께 근무한 유엔사직원중 1983년 유엔군 사령관 정전담당특별고문이었고 현재 미국무성 외교연구원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제임스 리(한국명 이문항-80년대 노조 파괴범으로 악명 높았던 제임스리와는 다른 인물이다)라는 인물이 있다. 1980년 그는 유엔군총사령관과 전 유엔사작전참모장인 로버트세네월드소장, 그리고 유엔사와 한미연합사작전참모들에게 미8군 지하벙커에서 북방한계선과 서해5도 영해문제에 관한 쟁점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으며 99년 서해교전 발생때 워싱턴의 미정부에도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바 있다. 그가 말하는 북방한계선의 진실이다.

유엔사는 1953년 7월28일에 있었던 제 1차 본회의에서 정전위의 마지막 회의인 91년 2월 13일에 있었던459차 본회의까지 40여 년간 판문점에서 있었던 본회의, 비서장회의, 그리고 직통전화메세지, 서한 등 그 어디에도 서해해상 침투사건, 도발사건등 해상위반사건들을 다루면서 단 한번도 ‘북방한계선침범’이니 ‘북방한계선위반’이니 한 적이 없었다. (….)
저자는 1966년 4월 미국 워싱턴 국방성에서 분석관으로 근무하다가 서울 유엔사 군정위 분석관으로 부임한 뒤 군정위 작전과 지도중에 서해5개 도서군 3해리를 잉크로 표시한 선과, 이들 5개 도서군과 북한 연안이나 섬의 중간선을 잉크로 그리고, 북방한계선을 써놓은 지도를 보았는데 그 지도의 위와 아래에 3급 비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군정위의 모든 기록을 찾아보아도 북방한계선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주한 미해군사령부로 찾아가 기록을 들여다보니 북방한계선은 1958년에 설정한 해군의 작전통제선(Operational Control Line)이라는 것을 알았고 북방한계선은 (한국)해군선박 뿐만 아니라 한국어선들도 통제하는 한계선이란 것을 알았다.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유엔사측은 북한측 함선이 우리의 서해5도 도서군의 3마일 수역 이내에 들어오면 ‘영해침범’이니 3해리 안으로 침입했느니 하지 않고 정전협정 제15항에 규정한 우리측 ‘인접해면(waters contiguous to)’을 침입한 협정위반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 이유는(유엔사의 상부기관인) 미합참본부의 지시는 어로저지선이나, 북방한계선이나, 영해가 3해리니 12해리니 논의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엔사는 항상 함선이나 사건의 위치가 이들 5개도서의 3해리 밖일 때는 공해상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같은 정전협정 제 15항은 “…한국(조선)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봉쇄(naval blockade)도 하지 못한다”라고 합의했으니, 북방한계선이 해상분계선이라고 주장하면 해주항을 포함한 북한의 황해도 연안을 모두 봉쇄하는 것이 된다.(JSA-판문점 91쪽~92쪽 이문항. 소화출판사)

이문항씨는 북방한계선에 대해 한국사회에 1차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의 말처럼 북방한계선은 남과 북 또는 미국과 북이 전혀 합의한 적이 없는 미군의 작전통제선이었고 그것도 군기밀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방한계선을 어긴 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북방한계선을 합법적인 것처럼 주장하는 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월29일자 국방부의 성명을 보면 중대한 오류가 발견된다.

2002년 6월29일 오전 9시54분께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1)북방한계선을 침범, 퇴거를 요구하는 우리 해군 경비정에 대해 악랄하게도 선제 기습사격을 가해왔다. 이 과정에서 아측에 심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북한군의 이와 같은 행위는 명백한 2) 정전협정 위반이며, 제1차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남북군사당국자간 긴장완화를 위해 공동노력키로 합의한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이러한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엄중 항의하며,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강력히 요구한다. 우리는 북한군의 북방한계선 침범 및 도발 행위의 중지를 거듭 촉구하며 이번 사태에 대한 3)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이다.

첫째,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는 남측의 판단으로부터 이 사건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방한계선은 미국이 만들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일방적인 지침이지 북과 단 한번도 합의된 적이 없는 선이다. 남측이 침범이라고 하든 월선이라고 하든 그것은 남측의 입장일 뿐 북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둘째, 첫 번째 사실로부터 정전협정 위반이란 주장도 잘못된 것이다. 정전협정에서 북방한계선이란 단어는 등장한 적도 없고 합의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한쪽이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약속위반이 되는 경우도 있는가? 한국전쟁에서 제네바협정에도 없는 포로교환 원칙을 미국이 주장하면서 전쟁은 2년을 끌어야 했다. 합의되지 않은 사실을 상대방이 합의하도록 하는 최악의 방법이 전쟁이다. 과연 국방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정전협정 위반이란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정전협정 위반이란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이유는 두가지다. 정전협정을 모르고 있든지, 북이 정전협정 위반이란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있든지이다. 전자라면 무책임한 것이고, 후자라면 무모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 전쟁까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의도가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첫번째와 두번째 사실로부터 역설적으로 모든 책임은 북이 아니라 남에 있다는 사실이다. 북과 합의된 적도 없는 북방한계선 침범은 어떤 경우에도 그 혐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정전협정 위반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군사정전위가 소집되어야 하는데 94년 이후 군정위 기능은 마비된 상태이다. 정전상태를 관리할 어떤 기구나 체계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 정전협정 위반을 주장하며 일방적인 책임을 묻기 시작하고, 그결과 긴장이 확대된다면 폭력적 해결의 방법을 선택할 가능성은 급속히 증가할 것이다. 99년 서해교전 직후부터 2000년 6월8일까지 북은 모든 방송과 언론을 통해 남측도발의 책임을 물으며 날마다 각계 각층에서 500여 회에 달하는 경고와 응징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6월8일 박지원특사가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고서야 북의 성명전은 중단 됐다. 서해교전의 연속선상에서 보면 남북정상회담 같은 최고위급의 정치적 결단 외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해 5도지역에서의 영해문제나 북이 제안한 조선서해해상 군사분계선에 대한 논의는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의 낡은 논리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국방부는 자신들의 주장에 침묵하고 있으면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대세속에서도 국방부는 서해교전 이후의 대결적 논리를 포기하기는커녕 계속 정교화해 놓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화를 불러일으킨 원인이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99년 서해교전의 숙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의 본질이 오늘에도 그대로 본질인 것이다. 때문에 국방부나 일부 언론이 상황을 몰아가면 몰아갈수록 그 책임은 북이 아니라 남이 지게 될 것이다. 국방부와 일부언론이 무모한 질주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1. 국방부의 자기최면
국방부는 99년 서해교전이후 북방한계선에 대한 입장을 바꿔 북도 이미 북방한계선을 인정해왔기 때문에 실효성의 원칙에 따라 북방한계선을 인정해야한다는 주장을 편다. 이때 북이 역사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인정한 7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해 하나 하나 살펴보자.

1) 59.11 북한발행 황해남도지도에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
1959.11.30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발행 조선중앙년감(국내편)황해남도 지도(254쪽)에 NLL이 개략적으로 그려져 있고, 이를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였음(…) 북한이 ’59.11.30. 발행한 정기간행물의 지도에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은 “59년에 이미 북방한계선을 인지,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북방한계선의 존재에 대해 모르며, 인정할 수 없다는 북한의 기존 주장은 허구임.(한반도군비통제 242쪽-국방부)

국방부의 주장은 북이 59년 조선중앙연감의 지도에 북방한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북이 이미 북방한계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고 지난 46년간 실질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준수해왔다는 것이다.
이문항씨의 말에 따르면 북방한계선은 58년 미군이 자체적으로 정한 군사기밀이고 60년에야 기밀해제가 되었는데 국방부 주장은 59년판 지도에 북이 이 선을 그대로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북도 이미 인정하고 준수해 왔다는 것이다. 59년 지도는 국방부의 표현대로 ‘개략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을 ‘NLL을 개략적으로 그렸다’고 확신하는 것은 NLL을 일단 옳다고 전제하고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선험적 인식오류이다. 설령 그 선이 북방한계선과 비슷할 수도 있고 아예 똑같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하고 준수해 왔다는 논리는 인식오류를 넘어 선험적 판단오류이다. 예를들어 북의 김정일화가 베고니아 꽃이라는 것을 아닌 사람은 조용필의 ‘서울서울서울’이란 노래에 ‘베고니아 꽃 향기’ 운운하는 가사가 김정일화를 의미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의 자유이고 상상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조용필의 노래를 인식 판단한다고 해서 조용필이 곧 베고니아 꽃을 통해 김정일화를 인정하고 찬양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60년 이전엔 남쪽에서도 북방한계선의 존재는 군사기밀이었는데, 이말이 사실이라면 59년 북이 북방한계선을 만들어서 남에 알려줬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닌가?

2) 63.5 서해 북한 간첩선 격퇴 사건시 북측은 NLL월선 부인
1963년 5월 11일 NLL을 월선하여 연평도 서방으로 침투한 북한 간첩선을 남측 경비함정이 격퇴시킨 사건과 관련하여 개최된 군정위 제168차 본회의에서 북측은 그 선박이 NLL을 월선 남하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NLL의 존재 사실을 인정했으며, 북측도 NLL을 준수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군정위 회의록이다.

유엔사: 이 지도에는 우리측이 초계하여 온 것을 표시하는 푸른줄이 있다. 이는 쌍방이 인정하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우리측 선박들은 이 선의 이북으로 이동해 가지는 않는다. 당신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지도를 보시오! 당해 선의 북쪽으로 있는 홍색 가위표로 표시된 것은 당신의 발언에 의해서 주장된 사건 발생위치이다. 그러나 당해 사건은 그 위치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당해 선의 남쪽, 청색 가위표로 표시된 곳에서 발생했다. 당신측 선박이 얼마나 정확성을 가지고 그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어떠한 방도를 가지고 있느냐, 대답해 보라
북측: 당신이 이 지도를 보시오. 우리측 어선이 있었던 곳은 북위 37도42분, 동경125도28분 부근이다. 그래 이 지점이 당신 측 해역이란 말인가?

여기서 유엔사가 말하는 유엔사의 초계선인 푸른줄이 국방부의 설명으로는 현재의 NLL이다. 유엔사측은 초계선을 쌍방이 인정해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초반의 발언을 할애했다. 그러나 북은 유엔측 초계선에 대해 아무런 언급없이 ‘해역’ 문제를 주장한다. 여기서 북이 주장한 ‘해역’은 관례상 두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영해로서의 ‘해역’이거나 정전협정상의 ‘인접해면’으로서의 ‘해역’이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유엔사는 초계선이란 기준을 강조하고 있으며 북은 영해문제나 정전협정상의 인접해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이 NLL을 인정했다는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가?
1978년 남측해군이 어로작업하던 북측어선을 간첩선으로 판단하여 격침시킨 사건을 다루기 위해 열린 군정위 390차 본회의를 보자. 이는 국방부가 주장한 사건과 거의 똑같은 성격의 사건이었다. 이 회의에서 회의실 안에 전시한 이 사건의 요도의 표제는 “1978년 6월27일 1척의 북한선박이 대한민국수역에 침입한 사건…”이라고 씌어 있고 붕방한계선 침범이라는 말은 전혀 쓰지 않았고 제시한 챠트의 서해지도에는 NLL이 그려져 있지 않다. 단지 백령도연해에서의 선박들의 항해, 추적로만 그려져 있다. 유엔사군정위원들이 판문점 회의에서 사용한 모든 서해 도서군 부근의 지도나 약도 어디에도 북방한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국방부가 주장하는 방식을 따른다면 63년까지는 북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했고, 78년 이후엔 남이 북방한계선을 포기한 것이 되는 셈이다.
더구나 미해군 작전통제선 설정의 목적은 ‘북방한계선’이란 말의 의미에서와 같이 남측이 북으로 올라가는 한계선을 말한 것이지 북측이 남으로 내려오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북의 남하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남방한계선’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때문에 국방부의 주장대로 유엔사의 초계선이 곧 NLL이었다면 군정위의 미군 대표는 미군이 임의로 정한 NLL설정의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군정위 회의에 나와 자의적인 해석을 북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군정위는 정전협정 위반사건에 대해 회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과는 아무 연관이 없이 미군이 일방적으로 정한 선이므로 이것을 군정위의 안건으로 삼았거나 논쟁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스스로가 회담 규칙도 모르는 문외한임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국방부의 이런 자의적 발췌 해석을 유엔사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 회의록에서 북이 북방한계선을 인정하고 준수까지 해왔다는 근거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지 나로선 의문이다. 이는 국방부의 분석관들이 결론을 미리 염두에 두고 억지로 증거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3) 77.8 북측의 [해상군사경계선] 선포에 대한 남측의 불인정 성명에도 특이행동 무
1977년 8월1일 조선인민군최고사령부는 보도를 통해 동해에 대해서는 영해기산선으로부터 50마일, 서해에 대해서는 경제수역의 경계선, 즉 인접국간 200해리가 되지 않는 수역에서의 바다 반분선, 또는 중간선을 해상군사 경계선으로 선포한다. 이는 남이 주장하는 NLL의 이남에 해당한다. 이에 남측 정부는 대변인의 반박성명을 통해 북측의 [해상군사분계선]인정을 불가한다고 발표한 사실이 있다. 이 발표후 북이 특이 행동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국방부는 이를 곧 NLL을 인정한 것이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 국방부식으로는 침묵은 곧 인정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침묵은 곧 무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실제 북은 남측 정부의 반박성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NLL을 무시하고 수없이 월선을 감행해왔고 몇 번의 총격전까지 이르면서까지 문제제기를 해왔다. 과연 이런 사례도 북이 NLL을 인정해왔다는 근거가 될만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4) 84.9 북한 수해물자 수송시, 수송선박을 NLL선상에서 상봉 호송
1984년 남쪽에 홍수피해 일어나자 그해 9월 북은 인도적 차원에서 쌀등 수해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 남쪽정부가 이를 수용하므로서 북의 수해물자가 남에 전달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간이 고위급 비밀회담이 진전되고 이산가족 상봉등 남북 대화분위기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남북 적십자사가 북측 수송선박과 남측 호송선단의 상봉점을 NLL선상으로 합의한다. 그러나 북에서 곧 대남통지문을 통하여 상봉점을 NLL남방으로 수정제기 한다. 이에 남측해군에서는 NLL확보의지를 확고히 하며 NLL선상에서의 상봉을 끝까지 고집했고, 북은 인도적 이유 때문이었는지 더는 따지지 않고 남측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국방부는 이를 근거로 북이 NLL을 남북간의 실효적인 해상경계선임으로 간접 인정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암흑같던 시절 북이 인도적 지원을 실현하고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사업이었다. NLL선상의 상봉에 대해 북이 무조건 수용한 것도 아니고 강력한 문제제기를 했다. 만약 NLL문제로 서로 트집잡기가 시작됐다면 북의 인도적 지원도 남북대화의 물꼬트기도 물 건너갔을 것이다. 과연 북이 NLL을 인정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한 것일까? 인도적 의도가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양보한 것일까? 당시의 이 사건은 기성의 정치군사적 관례를 뛰어넘는 남북정부의 정치적 결단이 대 전제로서 작용하고 있었다. 국방부는 이러한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부분적인 사례를 파내어 왜곡과장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북이 이 사건을 두고 총한방 쏘지 않고 남에 무혈 입성하여 굶주린 남의 인민들을 해방시킨 사건이라고 선전이라도 한다면 남에서는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뒷덜미치기는 남북간의 대화와 신뢰의 기반마저 무너뜨리는 옹졸한 처사가 아닌가 한다.

5) NLL기준으로 변경된 비행정보구역(FIR)에 대한 이의 불 제기
남측 정부는 63년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대구비행정보구역(FIR:Flight Information Region)을 설정한바 있다. 그러나 남측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구역이 포함됨에 따라 오래전부터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FIR은 해당국가의 영토나 영해를 규정하는 의미는 없고 다만 조난 항공기에 대한 탐색 및 구조지원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에 남측은 93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항공항행 계획에 군사분계선과 NLL기준의 대구/평양FIR을 공고하였다. 그러나 북이 이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국방부는 북이 NLL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처구니없는 해석이다. FIR의 법적 성격이 조난항공기에 대한 탐색과 구조지원까지 포함하므로 이는 해당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의미한다는 것도 편파적인 해석이다.뿐만아니라, 93년 이후에 남북이 NLL을 기준으로 한 FIR을 인정했다면 그 이전 38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는 남북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가 3.8선이라는 결론이 된다. 정전협정에 의해 현재의 군사분계선이 확정된 것이 53년인데 40년간 남측은 3.8선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 주권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38선 이북에 속하는 동부산악지역에서 일어난 제4땅굴이나 군사분계선상의 충돌에서 남측 정부의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가? 한번만 뒤집어 보면 당장 모순에 부닥치는 사례이다.

6)북한 함정 NLL월선시 아함정의 퇴각 경고에 순응
1973년 10월 서해5도 사건이후 북방한계선 월선 행위를 대폭 증가시켰으나 99년 서해교전사태전까지는 아측 함정이 접근하여 경고를 하면 즉각 퇴각하였다는 근거를 들어 북이 NLL을 인정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의 계속된 월선과 무력행사 자체가 NLL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이는 국방부가 고의적으로 한측면만을 보려하는데서 생기는 필연적인 오류이다.

7)남북 고위급회담시 NLL을 중심으로 양측 관할수역 합의
1991년과 1992년 진행된 남북고위급회담시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 11조에 의하면,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고 명시되었으며, 불가침부속합의서 10조에서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은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 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고 되어있다.
국방부는 여기서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이라 함은 곧 46년간 남측이 실효적으로 지배해온 NLL이남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국방부의 근거는 피해갈 수 없는 덜미를 잡힌다.
정전협정에 의하여 설치된 군사분계선은 고성과 장단까지의 육지에만 존재하며, 서해안의 해상에 “쌍방”이 설치하여 공동으로 관할하여 온 “구역”은 “한강하구수역”뿐이다.
따라서 국방부의 주관적 해석은 정전협정준수를 그토록 외치면서도 정전협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소치이다. 또한 국방부 분석관들이 찾아낸 앞서의 많은 사례에서 주장된 궁색한 실효성의 논리는 지난 50여년간 거듭된 북쪽 해군의 주기적 “침범”행위와 1999년 6월 15일과 올해 6월28일 연평도 근해에서 발생한 북쪽 해군의 실력행사를 통한 공개적 부인을 미루어보더라도 국제법적으로 “북방한계선”의 실효성이 “응고” 또는 “인정”됐다고 볼 수 없다.

국방부가 96년까지 북방한계선의 존재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인식을 갖고 있다가 갑자기 몇 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근거를 찾아내며 당황스런 인식에 이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99년 서해교전 이후였다. 서해교전을 연평대첩이라고까지 칭하면서 승전가를 부른 뒤 북방한계선을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 것처럼 왜곡하는 논리가 만들어 졌다. 이들 논리는 이미 국방부 일각에서 자기최면을 걸어놓고 찾아낸 논리들이기에 하나같이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게 된 것이다. 국방부는 자체 기록 중 ‘북방한계선-관련규정 및 공문’이란 제목의 문서를 다시 찾아보라. 여기에는 ” NLL은 유엔사/연합사 교전규칙 S항 ‘자’ 세항: 북방한계선은 유엔사/연합사 해군 및 항공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한정짓기 위해 유엔군총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설정함.” 이라고 정확히 적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국방부의 집단적 자기 최면이 그저 인식오류에서 끝나는 문제라면 이렇게 심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곧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에 결코 사소하게 취급될 수 없는 일이다. 북방한계선의 합법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불법이 된다는 사실을 국방부는 알아야 한다.

3. 언론의 자기최면
진실을 사회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임의로 해석하고 적용해온 고질적인 풍토는 일부 언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조선일보는 96년 국민회의 의원들의 이양호국방장관 발언 파문이 확산되는 시점에서 북방한계선에 대한 해설기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선 논란이 된 해상의 북방한계선(NLL)은 지상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MDL)과 개념상으로나 법적으로나 의미가 다르다. 휴전선으로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은 1953년 7월27일 남­북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 규정된 남북간의 지상경계선을 말한다. 때문에 서로간에 상대방 지역을 침범하면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다.
그러나 바다의 경우는 남­북간에 의견이 엇갈려 지금까지 정해진 경계선이 없다. 바다에 말뚝을 표시할 수도 없는 입장으로 각기 양측에서 관행적으로 인정해온 수역을 경계로 교통을 통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은 휴전 한달이 지난 1953년 8월30일 유엔사측이 최접경수역인 백령도 연평도 등 6개 도서군과 이를 마주하는 북한측 지역과의 중간지점 해상에 임의로 설정한 것이다.
때문에 서로간의 수역을 침범했을 경우 정전협정 위반사항이나 국제법상으로 제소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무력충돌을 우려해 양측이 「힘의 균형」을 통해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이국방장관이 『NLL침범이 정전협정 위반사항은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는 것이다.(96.7.18 조선일보)

2002년 6월28일 연평교전사건이 있고 난 직후의 조선일보 사설이다.

99년 연평해전 이후에도 북한은 연간 평균 12~15회 정도 NLL을 침범했다. 올해들어 발생한 11건의 북한 경비정 NLL 침범 때마다 우리 군이 단호하게 대응했더라면 오늘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2002.6.29)

이 두기사를 합쳐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NLL침범이 정전협정 위반도 아니고 국제법상으로 제소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데도 우리군은 침범때 마다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전쟁광이 아니고서야 위반한 것도 제소할 것도 없는 일에, 그때마다 단호하게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비단 조선일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월드컵의 열기를 전쟁의 광기로 바꿔버리고도 남을 언론의 여론몰이는 항상 기초적인 사실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는 불성실함에서 비롯된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매년 6월이면 연례행사처럼 크게 작게 반복되어 온 연평도 사건을 정치적 맥락에 슬쩍 끼워넣기 전에 언론은 국민에 대한 계몽의 임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4. 미국의 자기 최면
1989년6월3일 유엔군총사령관이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정전협정에는 유엔군사령부가 북측선박들이 단순히 북방한계선을 월선한 데 대해 항의할 권한이 없음.” 이것이 99년 교전까지 미국의 공식 입장이었다. 미국정부는 99년 서해교전 직후 즉각적인 반응을 피하고 긴장을 몰고가는 분위기에 우려까지 표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발로 규정하고, 특사파견마저 취소했으며, 서해해상에서의 교전수칙을 바꾸었다. 교전수칙은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주한미군의 합의 없이는 개정이 불가능한 사안이다. 이로서 미국은 서해5도 문제와 관련된 정전협정 당사자로서 서해교전의 전면에 나타났다. 99년 서해교전과 2002년 서해교전의 다른 점은 99년은 존 틸럴리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미국군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했다면 2002년은 미국정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99년 서해교전에서 미군은 북방한계선을 이전과 다른 맥락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 과정 역시 미군의 자기최면에서 비롯된다. 99년 서해교전에 미군이 개입하게된 과정을 알아보자.
연평도 문제는 연례행사였다. 96년에 최다 월선사태가 있었다. 97년에는 이번처럼 북의 함포사격까지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구나 98년 판문점 무력시위와 동해안 잠수정사건때 국방부와 합참은 존 틸럴리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전쟁준비단계인 데프콘의 격상을 요청하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존 틸럴리 사령관은 서해5도를 비롯한 한반도 상황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해왔다. 그런데 99년 서해교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입장이 변화하며 상황을 주도한다.
6월 10일전까지 국방부의 반응을 보면, 교전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다.
6월 9일 남북의 해군함정이 충돌하는 우발적인 접촉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남(한국)의 합동참모본부는 “북한 경비정의 영해침범은 무력시위보다는 수출용 꽃게를 잡는 어선을 보호하기 위한 ‘생계형 월선’으로 보인다. 무력사용을 자제하는 대신 경고방송 등을 통해 자진 귀환을 유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방부가 6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서도 “북한 경비정이 해마다 20-30차례 북방한계선을 넘었다가 돌아가 심각한 상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자. 그 당시 클린턴 행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하게 소집하지 않았고 대결을 원하지도 않았다. 미국 국가안보회의의 또 다른 대변인 해머가 “잘못은 북한에 있다”는 논평을 냈던 사실에 대해서도 국가안보회의 대변인 크롤리는 “북한이 잘못했다는 논평은 해머의 견해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6월 10일부터 갑자기 사태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였다. 6월 9일 틸럴리사령관과 김진호합참의장의 만남이 있고 난 뒤였다. 11일 첫 충돌이후 소집된 용산 한미연합사령부 위기조치반은 교전 직후 즉각 연합사 예하 군의 경계수위를 워치콘3에서 2로 격상시켰다. 워치콘은 통상 4단계로, 위기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높아져 정찰기 등 첩보수집 수단이 강화되고 정보분석요원도 늘어난다. 워치콘2는 국가이익에 현저한 위험이 초래될 징후가 보일 때 내려지며, 북의 도발이 명백할 때 발령되는 워치콘 1의 전 단계다.
한미연합사는 이와 함께 이날 오전 용산 사령부내 지하의 「CC벙커」에 수뇌부가 모여 교전확대 가능성과 남북한 해군 대치상황 등을 검토했다.
이 자리에는 미군 첩보위성과 U2 정찰기 등 첨단 장비로부터 수집된 북한군 동향자료가 전달됐다. 이와 함께 미군측은 전투기와 이지스함.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와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한반도쪽으로 긴급 배치키로 한다.
9일과 11일의 이 회의는 한미군사위원회상설회의로 쉽게 말하면 전쟁을 결정하는 회의이다. 원래는 양국의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참여하는 회의를 해야하나 이를 대신하여 한미연례안보협의회가 1년마다 열리고, 상설적으로는 합참의장과 주한미군사령관이 용산벙커에서 하는 회의가 실제 전쟁결정기구가 된다. 따라서 긴급상황일때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사후에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때문에 대통령들은 보고만을 듣고 전쟁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다. 더구나 결정의 주도권은 모든 정보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군측에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작전계획은 대북 전투태세준비인 데프콘과 대북 정보감시태세준비인 워치콘이 평상시보다 한 단계씩 격상되면서 실행에 옮겨진다.
99년 서해교전사태 때에는 워치콘(평상시 3단계)은 2단계로 격상됐지만 데프콘은 평상시인 4단계를 그대로 유지했다. 데프콘4에서 데프콘3로 격상되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CFC)로 넘어간다.
전권을 이양받은 한미연합사령관은 미군의 시차별 증원계획(TPFDD)에 따라 미 항모를 한반도로 이동하고, 병력·장비·물자 등도 본격적으로 동원된다.
그런데 미행정부가 내린 결정과 한국에서의 결정이 약간 달랐다는데 문제가 있다. 미국에선 15일 국무-국방부가 브리핑에서 일제히 주한미군의 「평시 경계태세 유지」를 강조했다. 테프콘 4의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벌써 테프콘 3에 준하는 경계태세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차이가 서해교전의 최대 의혹이다.
94년6월15일의 전쟁위기때는 계획을 폐리국방장관이 수립해서 클린턴대통령의 사인을 받는 순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99년6월15일은 군부가 먼저 준테프콘3를 발령했고 백악관은 테프콘4를 유지하라고 하면서 신속억제전력에 해당하는 무기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백악관이 상황에 끌려가고 있었다. 국가안보회의에는 합참의장을 빼면 모두 민간인이다. 더구나 합참의장은 참관인자격으로 참가한다. 완벽한 문민통제 구성인 셈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이를 위해선 당시 군부와 백악관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잇다.
유고공습전인 3월 국방부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공습 전(3월20일) 휴 셸턴 합참의장 등 미군의 4성 장군들은 국방부 내 비밀회의실 「탱크」룸에서 난상토론 끝에 공습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이들이 내세운 반대 이유는 ▲코소보 개입이 미국의 이익에 직접 결부돼 있지 않은데다 ▲공습만으로는 유고를 굴복시킬 수 없고 지상군을 투입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국무부 관리들은 이에 반대, 공습 강행을 주장했다. 국무부측은 ‘코소보를 잃으면 발칸이 위험해지고 그러면 미국의 이익이 위협받는다’고 하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과 ‘ 나토에 대한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득에 마지못해 공습에 동의했다. 이는 월남전이후 91년 걸프전까지 군부가 수립한 전쟁의 원칙- ‘군대는 국가를 위해 싸우지 정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백악관의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의회를 통한 선전포고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전쟁을 한다는-일명 파웰 독트린의 수정이었다.
군 지휘부는 공습이 13일째 진행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공습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셸턴 합참의장과 조지프 랠스턴 차장만 매일 작전 지휘에 나서고 있고 데니스 라이머 육군총장 등 나머지 지휘관들은 정기적으로 자문만하고 있었다.
99년5월18일 웨슬리 클라크 NATO군 총사령관이 알바니아에 파견된 아파치 헬기 사용을 허가해 주도록 미 국방부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클라크장군과 미 국방부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이후 군부는 클린턴의 올브라이트독트린에서 다시 파웰독트린으로 회귀한다.
가까스로 유고전이 끝나고 나서 곧장 이루어진 전쟁이 서해교전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은 군부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한 시점이었고 군부가 주도하는 서해교전에 밀려서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서해교전은 두 개 지역에서의 전쟁에서 동시에 승리한다는 클린턴대통령의 윈윈전략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음을 증명한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와 유고에 파견됐던 항공모함키티호크를 다시 한반도로 귀환시킴으로서 클린턴대통령이 두 개지역이 아닌 세 개 지역에서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클린턴의 서해교전 병력배치 결정은 이미 윈-윈 전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 되었고, 결국 99년 말 군부는 윈윈전략을 내부적으로 폐기했다. 99년 서해교전을 주도한 사람이 존 틸럴리사령관이었다. 94년 6.15의 중심인물은 게리럭 사령관보다, 레이니 주한미대사였다. 99년 6.15의 중심인물은 존틸럴리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주한미군사령관으로 발령 받을 당시 야전과 기획에 뛰어난 장군으로 합참의장으로 까지 거론되고 있었던 인물로 다른 야전사령관과는 지위가 달랐다.
틸럴리의 서해교전 이전의 행적을 보면 99년 1월14일 한-미 군사위원회회의(MCM)에서 양국 합참의장이 「戰時(전시) 연합심리전사령부(CPOTF)」를 창설키로 한다.
코언장관은 이날(99.2.3) 미 상원 군사위에서 ‘지난달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때 존 틸럴리 한미 연합사령관으로부터 화학무기 전쟁 환경에서 작전할 수 있는 전력을 조직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셀턴의장은 ‘주한미군은 현재 탱크, 보병 전투용 차량, 대포, 공격용 헬기및 전투기등의 장비를 개선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했으며 정찰 능력을 제고시키고 한국군 전력 강화 작업을 지원해왔다. 한국에 배치된 미 해군력을 강화했고 병참 시설및 장비를 현대화했으며 미 본토에서 한국에 즉각 지상군을 증파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고시켰다’고 밝혔다.
2월 존 틸럴리 주한미사령관이 미 합참 간부들과 가진 비공개 회의내용을 흘렸다. 그는 ‘올 봄 한국에서 일종의 긴급상황(emergency)을 예상한다’고 밝혔다. 조지테닛 CIA국장도, 미 태평양지역 사령관 데니스블레어 제독도 응수했다.
4월 ‘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이 참석한 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 보유현황을 보고하고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전역미사일방위체제(TMD)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미국 국방부는 곧 주한미군을 비롯한 야전군에 효과적인 요격미사일 체제를 공급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서해교전 일어났다.
유고전을 정점으로 미국군부와 백악관의 갈등이 증폭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서해교전은 다른해에 일상적으로 처리되던 수준을 넘어 특수한 수준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 틸럴리사령관으로 하여금 ‘북방한계선’의 진실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게 했고, 상황은 전쟁의 수준으로 급진전 된 것이다. 서해교전은 유고전 수행방식에 불만을 품은 군부가 중심이 되었고 틸럴리사령관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서해교전을 기화로 틸럴리와 미군부는 동아시아 전역미사일방어체계 TMD의 추진을 현실화 했으며, 2001년에 와서 부시가 당선됐고 9.11사태로 국방예산은 레이건시절보다 더 많은 최고액수인 38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다시 2002년 서해교전을 맞이했다. 당시에는 일부군인이 주도했다면 지금의 상황은 테러전쟁을 선포한 미정부가 주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99년 국무부의 유보적인 논평대신 2002년 국무부는 북의 도발로 단정짓고 단호한 대처를 선포했다. 북미특사교환을 취소함으로서 긴장을 해결할 의지를 포기했다. 한미연합군은 교전수칙을 수정했다. 2001년 6월의 북상선 영해침범 운운했던 사건때에도 교전수칙개정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때는 교전수칙이 지나친 과잉대응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작년에는 미군이 교전수칙 개정에 응하지 않았는데 올해에는 즉각 응해서 교전수칙이 바뀌었다. 전쟁할 태세를 모두 갖춘 상태에서 북방한계선의 진실이 제대로 보일리 만무하다. 서해교전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북방한계선을 설정한 미국이며, 실행자는 99년 이후 자기최면을 걸고 원래의 설정의도조차 왜곡하며 ‘북방한계선’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미국군부와 한국군부이다. 그런데도 미국정부와 군부는 전쟁의 원인을 없애기보다는 전쟁을 준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5. 맺음말
자기 최면의 원인은 자신의 신념과 경험이 일단 옳다는 선험주의를 반성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자기최면에 걸리면 모든 상황을 자신의 선험적 기준에 맞추어 편향적으로 해석한다. 북방한계선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 본격적으로 왜곡된 것은 99년 서해교전 이후이다. 국방부의 주장처럼 59년부터 북방한계선을 둘러 싼 지금과 같은 논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99년에 억지로 찾아낸 59년의 자료일 뿐이다. 북방한계선을 합법적인 군사분계선인 것처럼 왜곡하고 이것을 침범하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왜곡된 열정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북방한계선을 진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국민여론에 의해 압박 통제되어야 한다. 국방부와 언론과 미국이 자기 최면을 풀 수 있도록 다시 민이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