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전략사상사 이시우 2004/03/17 279

http://www.airforce.mil.kr:7010/air_pds/01_warhistory/warhistory_01_09.htm

항공전략 사상의 태동 ▒▒▒▒▒▒▒▒▒▒▒▒▒▒▒▒▒▒▒▒▒▒▒

항공력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 항공전략사상은 선각자들의 혜안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전쟁으로부터의 교훈을 통하여 발전하였다. 인류 최초의 열기구(Smoke-filled Balloon) 비행은 프랑스의 몽골피에르(Mongolfier)형제가 1782년 11월에 이룩하였다. 다음해인 1783년 8월에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수소기구(Hydrogen-filled Balloon)로 45분간 비행한 기록이 있고, 그해 11월에 로지에르(de Rozier)는 500ft, 20분간의 기구비행에 성공하였다. 군사작전에서 처음으로 기구를 사용한 것도 프랑스로서 1794년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사용하였다. 1870∼1871년 보불 전쟁시에는 전보배달 및 승객수송 작전에 기구가 이용되었다. 항공전략사상은 1893 년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영국 과학성의 J. D. Fullerton 육군소령이「항공전에 관한 소고」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서 태동을 예고하였다. 10년 후인 1903년 드디어 라이트 형제의 동력기 비행이 성공하면서 항공기 역할에 대한 기대는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항공기술 발달의 유아기적인 상황으로 개척자들의 이론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1908년 웰스(H.G. Wells)는 그의 공상소설「공중전쟁 : War in the Air」에서 항공력(Air Power)이란 개념을 사용하면서 “공중에는 길도, 수로(해협)도 없으며 고정된 적의 요새도 없기에 만일 적이 우리 수도에 도착하려 한다면 틀림없이 올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늘이라는 3차원에서의 무한한 군사 잠재력을 매우 정확히 예측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1910년 이태리 군사이론가 줄리오 두헤가「항공 전략의 기초」라는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항공전략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두헤는 “하늘을 정복 하기 위해서는 적이 보유한 모든 비행수단을 공중, 작전기지 혹은 생산기지에서 격파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사상에 익숙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라는 항공사상을 역설하였다.
항공전략사상의 의의는 항공력이 국가 이익과 군사목표 달성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전력 선택을 국가에 제공한다는데 있으며, 항공력을 필요한 수준으로 건설해야하는 당위성에 대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다는데 있다.

앞으로의 세력판도는 공중을 누가 먼저 장악하는냐에 달려 있다.
우리같이 일제의 강제지배를 받고 있는 한민족은 지상전보다
공중전을 통해 광복을 쟁취해야 한다.
-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린 장군 –
공중을 지배하는 자가 지·해상을 지배한다.

두헤는 “공중지휘권을 보유하는 것은 곧 승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존 와든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한 이래 적이 공중우세를 확보한 상황하에서 전쟁에 이긴 나라는 없다. … 역으로 공중우세를 확보하고 있는 동안에 전쟁에 패배한 나라도 없다.”라고 쓰고 있다. 공중우세 확보에 관한 이 같은 강조는 때로는 안전에 치중하는 지상군 지휘관들에게 문제를 일으킨다. 공중우세 확보를 위해 항공기로 적의 비행장이나 항공기 공장을 공격하 기보다는 그들은 적의 공중공격에 대비하여 항공전력을 비상대기 시키거나 곁에 두기를 좋아한다. 이 욕구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항공력을 정체시키거나 방어역할만 하도록 묶어두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방공에 대한 요구는 해상작전에도 마찬가지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 한복판을 정복했던 함대는 전함이 아닌 항공모함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 이후의 미 해군력 구조는 이 점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항공이론가들의 저술에서 명백한 사실은 공중우세를 획득하는 것은 승리로 직결될 만큼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공중우세는 그 자체로 결말이 될 수 있다.
위와 같은 항공전략사상의 핵심적인 개념들은 두헤, 트렌차드, 미첼, 세바스키 등의 저작들 속에서 발견되며 또한 군 장교들의 전문적 연구(특히 1930년대의 미 항공단전술학교:ACTS)와 각국의 교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항공전략 사상의 시조 두헤 ▒▒▒▒▒▒▒▒▒▒▒▒▒▒▒▒▒▒▒▒▒

두헤는 1869년 이탈리아의 타셀타에서 태어났으며 청년시절 직업군인의 꿈을 품고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포병장교 훈련을 받았고 그후부터 과학과 기술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1913년에는 “전시 항공기 사용을 위한 법칙”이라는 제목의 군사교범을 만들었고, 전쟁에서 야전의 육군기동문제는 이제 끝났으며 그 보다는 전쟁이전 화면체 국가와 국가사이의 분쟁으로 발전했다는 전쟁관을 세우게 되었다. 분쟁이 교전국 자원에 의하여 지속되기 때문에 두헤는 적국의 자원고갈을 가속시키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자원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현대전의 성격은 후에 두헤의 항공력 개념의 핵심적인 기본 전제가 되었다. 두헤는 군 관계자는 물론 정부관리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으며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결국 1916년 허위사실 유포 및 기밀정보 누설, 군의 위신 실추 등으로 1년 징역을 언도 받았다. 1917년 카포레토 (Caporetto)전투에서 이탈리아는 육군 30만명 이상의 손실을 가져 온 패배를 당하고 나서야 두헤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1918년 그는 공식적인 명예회복과 함께 일반비행위원회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구에 전념키 위해 “이탈리아는 올바른 방향으로 항공자원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것이 안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한 무관심한 채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군을 떠났다. 비록 두헤는 중령으로 퇴역하였지만 1921년 다시 장군으로 승진되었으며 항공총감을 역임하고 퇴역하였다. 그는 1930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군인으로서, 사상가로서 조국 이탈리아가 제한된 가용자원을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항공력이 미래전쟁을 지배할 것 이므로 이에 대비케 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의 주요저서에는 제공권(Command of the Air, 1921/1927), 미래전 양상(The Probable Aspects of the War in the Future, 1928), 1900년대의 전쟁(The War of 19C, 1930 : 마지막 저서) 등이 있다. 항공전 기초에 관하여 처음으로 종합적인 기술을 시도한 제공권(Command of the Air)에서는 그는 제공권의 획득이 곧 승리를 의미하며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서는 전시에 제공권을 획득 할 수 있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항공력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는 제공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을 공중이나 작전기지, 생산지 등 어떤 곳에서든지 공격하여 적의 모든 항공 수단을 박탈해야 하며 이러한 종류의 파괴는 오직 공중이나 적국 내부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지상군이나 해군의 무기가 아닌 오직 항공 무기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지상군 및 해군의 점차적인 축소로서 제공권을 획득하기에 충분할 만큼 상대적인 항공력을 증강시킬 수 있으며 국가방위는 오직 적절한 힘을 가진 독립적 공군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을 기술하였다.
미래전 양상(The Probable Aspects of the War in the Future)에서는 과거 역사의 교훈과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한 장차전의 전쟁성격에 대하여 상세히 논의하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은 종전의 전쟁과는 달리 병력만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국가의 생사를 건 투쟁이었으며 승리는 독일군을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일국민의 정신적 및 물질적 여유를 고갈시킴으로써 달성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전통적 전쟁관에 항공력을 추가하였으며, 이러한 항공력은 전쟁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고 전쟁종결을 앞당길 것임을 주장하였다.
1900년대의 전쟁(The War of 19C)에서는 가상의 항공전(프랑스 대 독일)에서 프랑스 방어망을 독일 전투기가 파상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극화(劇化)한 것으로, 지상목표물에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하여 공격항공기를 대량으로 운용하고 화력집중 원리에 따라 단 한번의 공격으로 최대의 손실을 가할 수 있도록 항공력을 운용하였으며 프랑스 도시의 폭격을 “접근할 수 없는 화로”로 표현하였다. 즉 그는 항공기에 의한 폭격이 가공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적의 항복을 강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헤는 항공전략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한 이탈리아의 군인으로서 공중을 「제3의 전장」으로 표현하고 육.해군 전력에 대한 공군력의 우수성을 정당화 시켰으며 새로운 전략으로 획기적 전환을 마련하였다. 세계 열강이 두헤의 사상을 따랐으며 특히 영국공군(RAF), 미 육군 항공대 그리고 독일공군 교리에 항공력의 기초와 이론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공군의 독립에 관한 군 조직 및 운용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공군이 타군으로부터 독립되고 항공력이 장차전 승리의 결정적 수단이 될 것”이라 예언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몇몇 오류에도 불구하고 1, 2차 세계대전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 타당성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항공력은 본질적으로 전략적이며 공세적인 전력이다.

전쟁과 평화는 전쟁의 전략적 수준에서 결정되고 조직, 기획, 지원 및 지휘된다.
육군은 전투승리의 누적이 그들을 결정적이며 전략적인 작전위치로 격상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적 육군에 집착함으로써 전술적인 수준으로 전락되었다. 해군도 또한 어느 정도는 전쟁의 전술적 수준에서 싸운다고 비판되어진다.
항공력은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수준의 전선을 압박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왔다. 항공기는 통상 전략적 수준의 효과를 달성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육·해군과 지상 장애물 위를 비행하여 상대국가의 핵심부를 강타할 수 있는 능력은 치열하고 장기적인 지상전투와 치명적인 해군 봉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준다. 전략적 수준에서의 폭격을 주장하였고, 세계 최초의 독립된 공군인 영국공군(RAF : Royal Air Force)의 초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냈던 휴 트렌차드를 소개하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영국 공군의 아버지 휴 트랜차드 ▒▒▒▒▒▒▒▒▒▒▒▒▒▒▒▒▒▒▒▒

트렌차드는 영국의 독립된 공군을 창설하고 유지시킨 진정한 항공인이었으며 항공전략사상의 개척자였다. 그는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독립된 군으로서 영국공군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신적인 열정과 뛰어난 전략적 식견을 가지고 육·해군성과 경제부처 등의 강력한 반대자들과 투쟁하였다. 1924년 영국은 어떤 대규모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을 것을 가정한 10년 규정(10 Year Rule)을 적용하여 영국공군을 1/10로 감축하였으며 빈약한 국방예산의 17%만을 공군에 배정하였다. 더구나 해군과 육군은 다시금 공군을 폐지하고 자군 내에 항공부대를 가지려고 하였다. 트렌차드는 이에 대해 과거의 고정관념을 과감히 탈피한 공중통제(Air Control) 개념을 고안하여 대처하였다. 핵심은 “평시에 있어서 공군력은 어느 군보다 가장 경제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새로운 전력이 된다.”는 것이었 다. 트레차드의 지지자인 쳄버린 하원의원은 “우리는 공군이 지· 해상군과 다른 독자적인 임무나, 이들과 관련되는 매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무한한 잠재력과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자적 활동 능력을 갖고 있음을 믿고 있다. 우리는 공군의 능력을 절대로 얕보아서는 안될 것이며 장차 영국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육·해군보다 공군력에 의해서 국토가 보존되어질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현시점에서 공군을 폐지하여 육·해군성이 다시 항공기를 가지게 한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견해를 같이 해 주었다. 리델하트도 결국은 “만약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강해지려 노력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방면에서도 충분히 강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절한 육군과 지상의 전술공군을 보유해야 하지만 우리들의 최선의 승부처는 공군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 트렌차드가 권고한 방침에 맞는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면 나는 침략자들을 저지시키는 일을 아주 기쁘게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공군력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어느 정도 수정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트렌차드의 주요 항공전략사상은 전략적 폭격사상으로 그의 이론은 공군 참모총장 재직시 더욱 원숙해졌다. 그의 사상을 종합해 보면 첫째,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제한된 방어는 국민의 사기를 위해 유용하다. 즉 “영공의 완전한 방어는 불가능하므로 방공임무에 전념하여 항공력을 운용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며 항공력 운용의 부정적 측면이다. 따라서 항공력은 지속적으로 공격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공중우세는 승리를 위하여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항공력은 고유의 특성상 전략적이며 공격적인 무기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육· 해·공 3군의 목표는 모두 동일하여 적국을 패배시키는 것이며, 단지 육·해·공군 중 어느 한 군대의 힘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의 육군도 이러한 일을 하려면 적의 육군을 패배시키는 사전 단계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나 공군은 적국을 패배시키기 위해 반드시 전선의 적 군사력을 먼저 격멸시킬 필요는 없다. 공군력은 이런 중간 단계 없이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적 해군과 육군의 상공을 가로질러서 적의 방공망을 침투하여 적의 전쟁의지를 유지시키는 생산 중심지와 교통·통신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 넷째, 전략폭격의 목적은 적의 전쟁능력 및 적국 국민과 정부의 사기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항공력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으나 항공력은 지상군을 위한 진격과 전투경계선의 확장에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 여섯째, 전략폭격은 국제법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트렌차드는 전략폭격의 도덕성도 아울러 강조하였다.

트렌차드가 비난을 받았던 이론은 핵시대에서는 진리로서 받아 들여졌으며, 그의 항공전략사상의 핵심인 전략폭격 이론은 이후 세대의 ‘전략억제’ 개념 등장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트렌차드는 최초의 독립된 공군의 아버지로서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전략폭격은 평시에도 국가를 지켜 주는 정치적 기술로 헤아릴 수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항공력의 십자군 빌리 미첼 ▒▒▒▒▒▒▒▒▒▒▒▒▒▒▒▒▒▒▒▒▒

오늘날과 같이 냉소적인 세상에서 과거의 영웅을 추모하는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빌리미첼(Billy mitchell)의 이름을 회상하는 것에 대해 관련성, 정확성 및 목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약 80년 전에 미 공군력 개혁운동을 시작하였고 70년 전에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 상징적인 의미 이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또한 그러한 상징이 정확한 것일까? 미첼은 실제로 미래를 예측했었던 것인가?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그의 전성기 이후의 시간과 발생한 사건 그리고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및 정치적 개혁을 생각해 볼 때 미첼의 행동과 말은 오늘날의 공군에게 있어 유용한 것일까?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해 미 공군은 “YES”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미첼이 수많은 방법들을 통해 세계 최강인 오늘날의 미 공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끝난 이후 미첼이 가지고 있던 미래 군용 항공기에 대한 생각은 미국의 방위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미첼의 관심은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대항하여 미국의 해안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영구적인 문제에 돌려졌다. 미첼이 결정한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적절한 방위는 항공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미첼은 자신이 직접 몸담았던 미 육군과 해군에게도 환영 받지 못하는 여러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1921년 버지니아(Virginia)에서 옛 독일 군함에 대한 항공단의 폭격실험을 실시하였다. 미첼은 항공단의 폭격에 의해 잠수함을 침몰시킨 후 구축함과 순양함의 성공적인 폭격 과 “불가침”의 오스트프리스란드(Ostfriesland)호의 파괴 실험을 보여주었다. 또한 낡은 전투함인 알라바마(Alabama)호에 대한 폭격을 실행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고, 1923년에는 버지니아 (Virginia)와 뉴저지(New Jersey)에 대한 공격으로 해군을 당황스럽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해군은 항공모함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항공력을 무시하였던 미 행정부는 미첼을 점차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를 택사스 샘 기지(Fort Sam Houston, Texas)의 항공장교로 좌천시켜 버렸다. 1925년 해군 해상기(Navy seaplanes)와 비행선(Navy dirigible)의 사고가 있었는데 이때 미첼은 공식적인 행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 일련의 사고는 육군성과 해군성의 무능, 범죄적 무관심, 그리고 국가방위에 반역적인 행정부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다.” 이 발언으로 미첼은 군법회의에 올려지게 되었고, 결국 1926년 군에서 퇴임하게 되었다. 당시 미첼은 태평양에서 항공력을 통한 미국의 전략적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의 공격에 대한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은 것 뿐만 아니라, 정확한 시간과 지역 그리고 공습에 의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선이 무너졌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어적 혹은 공격적 행동에서 항공력의 영향은 의미가 큰 평가였고 본질적으로 옳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공권은 모든 태평양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증명되었다. 미첼이 놓친 점은 단지 항공모함에 대한 평가절하였다.

미첼은 본래 사상가는 아니었으나 실전 경험 및 선진 유럽의 항공전략 사상과 지식을 습득하여 미국의 방위 문제를 근간으로 전략적 사고를 통해 그가 지녔던 이상을 구현하였다. 미첼의 항공력 사상은 전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1918년 중반 ∼ 1920년)에는 미래의 전쟁은 공중에서 시작되고 지상에서 종료되며 여기에 해군과 보조적 항공대 역할이 있으며, 공중우세를 획득하기 위하여 격렬한 공중전투를 치러야 함을 주장하였다. “핵심 중심부(Vital Center)”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전투기 엄호가 필요하며 공격 우선 순위는 적군-군수시설-산업시설-국민의 의지라고 하였다. 후기(1920년 후반 ∼ 1936년)에는 전략적 항공력은 주된 지상군 작전 없이도 승리를 보장하는 전력이며, “점진적으로 적의 전력을 감소 시켜 적을 기진맥진하게 만들기보다는 핵심 중심부를 강타함으로써 가능한 최소의 손실로 적에게 자국의 의지를 강요하는 수단”임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임무에는 보조적 항공대 또는 항공모함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핵심 중심부(Vital Center)” 공격순위는 적군의 의지-산업시설-군수시설-적군 순서로 변경하였다.
미첼은 미국 항공계의 개척자이며 항공력의 십자군 용사로서 그리고 항공사상의 가장 중요한 대변가로 추앙 받고있다. 짧은 군 경력동안에도 미첼은 새로운 경로를 채택하고 새로운 기준을 세웠으며 후대의 주요 지휘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첼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을 제안했을 때 그는 20년 이상 앞서 있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첼이 다가올 위험에 대한 해답이 공군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미국의 항공발전을 위하여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항공전략사상을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당시 권력층에 있는 보수세력과 투쟁을 계속함으로서 현재 세계를 이끄는 미국의 원동력이 된 미 공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미첼이 육군성, 해군성과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언론은 “공군력이 현재의 지배적인 군사요소이고 육군 및 해군은 그 아래에 있다.”는 그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미첼리즘(Mitchell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사고의 단전성, 예측의 정확성 그리고 그가 기꺼이 감수한 위기와 희생은 공군력의 발전을 이끌어 내었고, 후계자들은 “미첼리즘(Mitchellism)”에 새롭고, 더 차원 높은 그리고 전체적으로 동시대적인 의미를 부여 하고 있다.

“핵심 중심부에 신속하게 도달하여 그 목표들을 무력화시 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항공력의 도래는
과거의 전쟁수행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양상을 가져왔다. 이제 전쟁 터에 있는 적의 주력
육군부대는 일시적인 목표이고 실직적인 목표는 핵심 중심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William Mitchell, Skyways, 1930)

항공인의 세계적 전략관을 제시한 세바스키 ▒▒▒▒▒▒▒▒▒▒▒▒▒▒▒▒▒

세바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의 조종사로서 활약하였고, 미국에서는 미 항공계의 개척자이며 항공력의 십자군 용사라고 일컬어지는 미첼의 후계자로서 제공권, 장거리 전략폭격, 대량보복, 공군 독립사상 등 항공전략사상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항공력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 1918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 육군성 특별 기술고문 및 시험비행 조종사로 근무하였다. 세바스키는 세계 최초의 완전자동식 폭격조준기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으며, 1931년 세바스키 항공회사를 창설하고 P-47 항공기를 직접 설계·제작하여 시험비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항공력에 관한 관점은 그의 저서, 항공력을 통한 승리(Victory Through Air Power, 1941)에 담겨져 있으며, 항공력에 관한 대부분의 관점은 미첼의 것을 따르고 있다고 그 스스로가 서문 속에서 밝히고 있다.
주요한 세바스키의 항공전략사상은 다음과 같다. – 제공권의 확보없이 육군과 해군의 작전은 불가능하다. – 공군력의 공격반경은 작전지역의 최대 범위와 같아야 한다. – 공군력은 독자적인 수송력을 가져야 한다. -항공전에 있어서 질적 요소는 양적 요소보다 상대적으로 결정적이다. – 항공기의 형태는 일반전략 뿐만 아니라, 특정한 작전에도 전술적인 적용이 가능하도록 특수화되어야 한다. – 공습에 의한 적 사기의 파괴는 정확한 표적선정에 의해서만 달성되며, 지상과 해상에서 종래 인식되어 온 지휘통일의 원칙은 공군에도 적용된다. – 평화는 힘에 의해 지켜져야 하고, 획득 되어져야 하며 이 평화를 보장하는 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군사력이고, 군사력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항공력이다.

세바스키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과 아울러 전쟁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항공력의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공군만이 자체의 전투 자원으로 공중을 통해 자기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군만이 전 화면략군으로서 국가 군사력의 기본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적절한 크기와 능력을 가진 공군은 평화시에 국가정책을 이행하기 위해 사용되어지며, 전시에는 제공권을 확보한다.” 이는 세바스키가 갖고 있던 공중우세의 중요성에 대한 사고를 극명하 게 보여주는 것이다. 억제력으로서 항공력이 갖는 특성을 간파한 그는 적의 전쟁수행 의지의 파괴와 평화시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항공력의 중요성과 제공권 확보가 필수적임을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 세바스키는 두헤와 미첼의 사상을 이어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폭격에 있어 무차별 폭격보다는 정밀폭격을 통한 공격이 적의 전쟁의지를 꺾는데 더욱 효과적임을 주장하였다. 세바스키는 두헤의 전략폭격 이론을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략폭격 목표에 대해서는 도시나 인구를 목표로 공격하는 것보다 산업시설 및 군사시설에 중점을 두어야 함을 주장하여 두헤의 도시폭격사상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즉, “전략폭격을 위한 폭격수단은 대량 파괴무기이나 대량 살상무기는 아니다. 그러므로 최소의 인명 피해로써 적의 생산 시설을 파괴하여 전쟁의지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는 독일이 영국에 대해 성공적인 항공작전을 수행하여 승리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패배한 예를 들면서 미첼의 항공전략사상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이러한 사상은 정확하게도 걸프전에서의 전략폭격을 위한 하나의 원칙으로 기여하였다.
또한, 세바스키는 ‘항공세력설’을 ‘결정지역 이론’이라고 하는지 정학설로까지 발전시켜 소위 항공인의 세계적 전략관을 제시하였다. 즉, 미국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미 공군의 지배권을 원으로 표시하고 구소련 공군의 지배권은 모스코바를 초점으로 하는 타원으로 표시한후 양국 공군의 지배권이 서로 중복되는 부분을 “결정지역”이라고 하였다. 이 지역에서 어느 편이 제공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다. 그는 “세계는 대륙과 공중과의 싸움이며, 공중을 지배하는 자는 대륙을 지배하고, 대륙을 지배하는 자는 해양과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 였다. 다음으로 세바스키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은 미래전에 있어서 미사일의 시대를 예견한 것이었다. 즉, 세바스키는 소위 단추 누르기 전쟁을 예견하였다. 당시는 대륙간탄도탄이 출현하기 전이 었지만 미첼의 미사일에 대한 예측을 수용하면서 과거 V-1, V-2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의 미사일)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항속거리의 증가, 목표 파괴의 정확성, 속도 문제의 해결 가능성과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장차전은 미사일간의 전쟁이 되며 이러한 대륙간 미사일은 반드시 항공세력에 포함시켜 운용하는 우주세력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미사일은 전자화 되어 지하통제실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에 지휘·통제·통신·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특히 전자적 패권이전 화면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이러한 세바스키의 예측은 이후 미·소간 전략적 핵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세바스키는 자신의 책을 ‘항공력을 통한 승리’라고 이름지었다. 세바스키가 이 책을 쓸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에 있었으므로 전략폭격이 더 이상 전쟁의 승패를 신속하게 결정짓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략폭격이 이제는 완전한 결정을 약속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곧 사실이 되었다. 세바스키에 있어서 항공력은 국가 전면전을 달성하기 위한 진정한 도구였다. 항공력 자체는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었으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적의 능력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하늘을 지배하지 않고 적을 정복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며, 꾸어서도 안된다. 오직 항공력만이 다른 항공력을 격파할 수 있다. – 세바스키-

미 항공단 전술학교 ▒▒▒▒▒▒▒▒▒▒▒▒▒▒▒▒▒▒▒▒▒▒▒

항공전략사상의 발전단계에서 인물이 아닌 군사학교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미 항공단 전술학교(ACTS : Air Corps Tactical School)는 이탈리아의 카프로니 백작(Gianni Caproni), 두헤 장군(Giulio Douhet), 남아메리카 출신의 스므츠 장군(Jan Smuts), 영국의 트렌차드경 (卿)(Hugh Trenchard), 리델하트(Liddell Hart) 그리고 빌리 미첼 (Billy Mitchell)과 같은 개척자들의 전략개념을 기초로하여 항공력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을 개발하였고, 미국에 적합한 항공교리를 개발함으로써 미 공군을 탄생시킨 지식의 본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30년대 미국의 전략적 항공력 교리는 이 학교에서 구체화되었으며, 미국의 경제공황시기였던 1930년대 프랭클린 루 스벨트 대통령이 대대적인 항공력 건설을 결심하게 되는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우리의 현시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교관들은 육군 장교로서 기존 육군교리에 기초를 두어야 했으며, 게다가 각 군간의 경쟁과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조종사가 아닌 사람들에게 연구과제를 납득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1933∼1934년 ACTS는 항공전술(Air Tactics), 지상전술 (Ground Tactics) 그리고 기초 및 특수교육 등 세 분야로 나뉘어 있었다. 항공전술과는 공군(Air Force), 공격(Attack), 폭격 (Bombardment), 수행 및 감시분야로 분류되었고 항공전략, 폭격, 공격 및 수행의 통합운용 등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조직은 구성되어 있었지만 각 부분들 사이에는 어떠한 조정이나 공군요소들의 발전과 적용을 위한 지배적인 개념이 없었으며, 공군력의 합의된 철학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항공전술과(후에 항공전술 및 전략과 로 개칭)는 이 같은 철학들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항공전략사상의 핵심을 제공하였다. 이 시기부터 미국의 공군력 운용 원칙과 교리는 점차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ACTS 교관들은 지상군의 피비린내 나는 정면대결로 엄청난 인명손상과 비용이 소모된 1차대전의 체험과 공중공격에 취약한 선진국의 산업조직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즉 전략폭격을 내용으로 한 “Industrial Web”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론의 핵심은 산업체계의 주요 표적을 폭격함으로써 적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 들면, 만일 뉴욕(New York) 도시내 수송, 상·하수도 및 전력체계(Eletric system) 중 17곳이 파괴된다면 뉴욕은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매우 정확한 폭격만 가능하다면 이와 같은 성과는 대량파괴나 대량희생을 수반하지 않고도 달성되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육군 항공단(Army Air Corps)은 여전히 육군의 한 부분이었고 항공단의 장군급 참모들은 항공단의 임무를 해안방어 및 지상군 작전지원에 한정하고 있는 지상군 장교들에 의해 지배 되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ACTS에서 개발된 전략개념과 공군력 교리는 전쟁계획에 수용되어지지 못했다.
GHQ(General Headquarter: 미 육군 항공총본부)가 설립된 1935 년 이후에도 공군력을 사용한 독립적인 전략임무는 묵시적으로는 인정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수용되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어온 모군(母軍 : 육군)의 임무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사상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신념과 비전, 그리고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1년, 연합 대전략(Grand strategy)을 포함한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해 연합군 육·해군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육군과 해군은 공군력을 통한 특별한 전략에는 동의할 수 없었고, 합동전 계획 무지개-5(Joint War Plan Rainbow-5)의 일반지침에 따라 각 군은 각자의 소요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대서양전역(戰役)을 최우선적인 작전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독일에 대한 지속적이고 무자비한 공습, 유럽 서부지역 방어, 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방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군대는 기초적인 산업동원까지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전쟁계획처(War Plan Division)는 거대한 임무에 직면하게 되었었다. 전쟁계획처는 전통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때 ACTS의 교관 출신인 해롤드 조오지(Harold George) 는 공군력이 육군 지원에만 국한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항공전 계획처에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의견은 받아들여졌으며 항공전 계획처-계획. 1(Air War Plans Division-Plan No.1) 즉, AWPD-1이 작성되게 되었다. 계획 작성에 허용된 시간은 단지 7일이었다. 이 계획을 작성하기 위해 ACTS 교관출신 (Laurence Kuter, Haywood Hansell, Harold George, Kenneth Walker)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이 계획에는 전례 없는 규모가 허용되어졌으며 4가지 원칙이 주어졌다. 그것은 유럽 서부지역 방어를 위한 공중작전, 독일지역 및 독일군 점령지역에 대한 공중공격, 유럽대륙에서의 지상군 공중지원작전 및 차후작전 에서의 공중지원작전, 태평양 전략방어를 위한 공중작전이었다. 7 일만에 완성된 이 계획은 ACTS에서 이미 발전되었던 교리에 근거하였으며 곧바로 미국의 공군력 교리(American Air Power Doctrine)가 되었고 현재 세계 최강인 미공군 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ACTS 교관 출신인 이 계획의 입안자들이 공군력의 전략적 사용에 대한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았었다면 이 계획은 그렇게 짧은 기간동안 완성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ACTS는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어떠한 군사력을 건설하는 것이 진정으로 경제적이고 가장 효율적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며,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면서 항공전략의 사상적 무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승리의 여신은 전쟁의 성격변화를 예견한 이들에게 미소를 짓지만 가만히 앉아서 변화가 일어난 후에 적용하려는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 두헤 -

존 보이드의 ‘전략적 마비’ 이론 ▒▒▒▒▒▒▒▒▒▒▒▒▒▒▒▒▒▒▒▒

초기 항공전략 사상가들은 적의 산업시설에 바탕을 둔 전쟁수행 능력의 마비를 통한 승리를 주장하였다. 이것을 발전시켜 전쟁의 통제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지휘·통제체제의 전략적 마비를 강조 한 현대 항공전략 사상가들이 있으니 바로 존 보이드(Jhon Boyd) 와 존 와든(Jhon Warden)이다. 먼저 존 보이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보이드 이론의 기틀은 30여년간 공군경력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한국전쟁 기간에 그는 F-86을 조종하였으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속한 기동능력”으로 표현되는 효율성에 대한 직관적 통찰력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공중전에서의 기동과 대응기동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한「공중공격 연구(Aerial Attack Study)」를 집필하였으며, 그의 동력기동이론을 바탕으로 한 전술적 아이디어의 기본적 개념들은 현재까지도 미국 조종사들의 바이블로 남아 있다. 또한 그는 국방부의 FX계획에도 참여하여 F-15와 F-16을 결정하는데 기여하였다.
보이드는 은퇴한 후에 항공기동에 대한 그의 전술적 개념을 분쟁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확대하였다. 보이드의 전략적 사고는 1976년 발간된「파괴와 창조(Destruction and Creation)」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10여 년에 걸쳐 발전되었으며「승리와 패배에 대한 담론(A Discourse on Winning and Losing)」으로 이어졌다. 보이드의 분쟁이론은 물리적이거나 공간적인 것이 아닌 심리적이고 시간적인 차원의 방법을 중요시한다. 그가 말하는 군사적 목적은 “기습적이며 위협을 줄 수 있는 작전적·전략적 차원의 상황을 선도하여 적 지휘부의 정신과 의지를 분쇄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신속한 작전의 구사가 요구된다. 달리 말하면 보이드에게 있어 전시행동의 목적은 급박하게 진행되는 불확실한 전쟁상황에 대해 적이 정신적으로 적절히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음으로써 적을 무기력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들을 종합하여 보이드는 개인이나 조직의 모든 합리적 행동은 “관찰(observation), 정향(orientation), 판단(decision), 행동(action)”의 네 가지 과정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보이드는 이 같은 의사결정과정을 “OODA Loop 모델”로 설명하였다. OODA 과정은 외부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상황을 「관찰」하고, 천성, 문화, 경험, 새로운 정보, 인식의 틀을 바탕으로 파괴 또는 창조의 「정향」과정을 거치며, 이에 따라 「판단」 하고 「행동」하는 개인이나 조직의 네 가지 의사결정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군 지휘부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첫째, 자발성과 조화를 통한 아측의 분열 최소화이다. 이를 위해 의사결정 시간을 줄이는 등의 아측 “OODA 과정”을 집약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둘째, 다양성과 신속성을 통한 적 분열의 극대화이다. 이를 위해 적의 의사 결정시간을 늦추는 등의 적 “OODA 과정”을 와해시켜야 한다. 이러한 “분열의 조성”으로 아군은 적의 “OODA 과정”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이를 통해 적을 혼란과 무질서에 빠뜨려 대처능력과 저항의 지를 동시에 마비시켜야 한다. 즉 적보다 OODA 과정을 신속·정확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측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보이드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보다 정확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요구하고 있으며, 전쟁에서 지휘관들이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후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는 전략적 마비 이론은 사실 최근의 것은 아니다. 이 개념의 역사적 기원은 손자의 저서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인명을 중시한 비살상적인 성격이나 군사력 사용의 경제적 측면의 강조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전략적 마비’는 전통적인 의미의 완전 섬멸이나 소모전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전쟁을 지속시켜 주는 중심점은 과거에는 산업기반, 현재에는 지휘체계, 그리고 미래에는 정보로 변화될 것이다. 보이드는 이러한 혁명적 과정에 역사적인 한 획을 그었으며, 기존의 항공력 사상에 대한 모든 이론들을 정당화시켜 주었고 우리 공군인에게 항공력에 대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틀을 제공해 주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기계도 영토도 아니다. 인간이전 화면쟁을 수행하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여야 한다. 전쟁의 승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 John Boyd –

존 와든의 ‘전략적 마비’ 이론 ▒▒▒▒▒▒▒▒▒▒▒▒▒▒▒▒▒▒▒▒▒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연합군 항공력에 적용된 4단계 전역구상의 주창자로서 널리 신임과 인정을 받고 있는 현대 항공전략 사상가가 있으니 바로 존 와든(John Warden)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한 보이드의 전략적 마비 이론은 과정적이고 심리적인 마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와든의 이론은 구체적이며 물리적 마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와든은 미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F-4, F-15 등 3,000여 시간의 비행기록을 가진 전투조종사로서 다양한 참모부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의 항공력에 대한 이론의 기 초는 Nation War College에서 닦아졌는데, 학문적 성과는「항공 전역(The Air Campaign)」으로 집대성되었다.

이 책은 전시 작전적 수준에서의 공군 운용에 대한 영향력 있는 텍스트로서 항공력의 공헌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전구 전역 계획하에서 정치적 목표와 군사목적을 분석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미국의 독특한 항공이론과 실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항공전역(The Air Campaign)」의 주요 주제는 항공력은 극대화된 효과성과 최소의 비용으로 전쟁의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는 독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공력의 고유한 속도, 범위, 융통성은 유혈 낭자한 지상전장을 초월하여 신속하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적 능력을 초토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명제의 핵심은 전략적 중심이다. 전략적 중심의 구체적 판단과정은 「항공전역(The Air Campaign)」을 집필한 후 몇 년 뒤에 이루어졌다. 와든은 사막의 폭풍 작전시 공군 참모부장이었던 Michael Dugan 중장과 일하면서 항공력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이론이 부재함을 인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와든은 항공력과 관련하여 전략적 중심 개념을 탐구하게 되었고, 1988년 늦가을, 표적유형으로서 5개 동심원 모델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5개 전략동심원(Five Strategic Rings) 모델
하나의 체계로서 적을 분석하면서 와든은 모든 전략적 목표물들은 5개 구성 요소로 나뉘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가장 내부에 위치한 지휘부이다. 지휘부 바깥으로 체계의 작동에 있어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유기적 필수요소, 기반시설, 인구집단, 야전군사력 등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동심원내에는 동력의 중심을 나타내는 전략적 중심이 존재한다. 만약 파괴된다면 동심원의 기능은 정지되며, 그 중요성에 따라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와든은 각각의 동심원내의 중심을 보다 정확히 규정하려는 목적으로 다시 각각의 동심원을 5개의 하위 동심원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연속적인 동심원분석은 전략적 중심이 파악될 때까지 지속된다.
5개 동심원 모델의 핵심적인 주제는 전략 수립시 최우선적인 관심을 적 지휘부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가지는 의미는 지휘부의 파괴가 체계의 전체적인 물리적 마비를 가져옴은 물론, 여타 동심원의 전략적 중심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은 부분적인 전략적 마비뿐 아니라 지휘부에 견디기 힘든 심리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미군의 전략계획자들 이 가능한 대응방안을 모색할 당시 와든이 속해 있던 펜타곤 공군참모부내 Checkmate 분과는 항공전역 계획을 발전시켰다. 적 전략적 중심 타격의 효율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와든은 전략적 항공전역의 개발을 위한 5개 동심원 모델을 제시하였다. 와든은 이것을 “이론이 실제에 앞서며, 실제가 이론을 입증하는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사막의 폭풍작전 이후 와든의 전략적 항공이론 은 더욱 정밀해졌다. 와든은 걸프전으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얻었는데, (1) 전략적 공격의 중요성과 전략적 공격에 대한 국가의 취약성, (2) 전략적, 작전적 공중우세 상실의 치명적 결과, (3) 병행 전의 압도적인 효과, (4) 새롭게 정의되는 대량공격 및 기습작전에서의 스텔스와 정밀무기의 가치, (5) 핵심전력으로서의 항공력의 우위성 등이 그것이다. 와든은 21세기에 있어 전쟁의 승리는 동심원의 병행공격과 내·외부(중심 및 연결점)공격 원칙에 어느 정도로 충실하냐에 따라 판가름난다고 주장하였다.

마비이론이 갖는 함의(含意)
사실 어떤 이론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지는 않다. 실재로, 보이드와 와든의 마비이론은 상호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보이드가 적보다 빠른 작전을 주장하는데 반해 와든은 첨단기술을 통한 전략적/작전적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보이드가 적이 대응할 수 없는 매우 유동적이며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 것을 주장하는데 반해 와든은 적의 주요 전략적/작전적 요충지에 대한 병행 공격을 주장하였다. 또한 보이드가 적의 “OODA 과정”에 대한 작전을 통해 지휘통제 과정을 와해하는데 중점을 둔 반면, 와든은 5개 고리의 상호의존적 체계에 대한 공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호보완적인 보이드와 와든의 이론은 다른 모태로부터 태어난 쌍둥이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드와 와든, 이 두 명의 공군출신 사상가는 20세기 항공력 발전에 분명한 기여를 하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전략적 항공이론 의 근본적 변화- 경제적인 개념을 통한 마비이론으로부터 통제개념을 통한 마비개념으로 -를 이루어 놓았다.
보이드와 와든의 이론은 서로를 보완하며 통제전을 통한 전략적 마비이론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전략적 마비이론은 전쟁형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미래 정보시대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인 사상이 될 것이다. 보이드와 와든이 주장하는 통제전을 통한 전략적 마비의 추구는 우리 공군인들이 준비하는 미래 항공력의 조직, 준비, 적용에 대한 최선의 방책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