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의 궁예주의


들어가며
지역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지역을 이루는 요소는 크게 일곱가지로 구분된다. 1.지역의 사상인 지역주의 2. 지역의 전략,지역의 전술 3. 이를 수행해가는 조직체계 4.지역의 운영또는 경영방식 5. 지역체계의 지도자나 지도층 6. 그리고 주체인 지역민 7. 지역의 문화와 정서이다. 지역을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사람은 보통 이같은 순서로 작업하며 지역을 관찰하는 사람은 반대의 순서로 지역을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글의 전개는 지역의 정서로부터 시작해서 지역주의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철원 지역의 궁예주의에 주목하는 첫 번째 이유는 역사상 최초로 민중국가인 태봉국을 건설한 지역이란 점 둘째는 분단으로 인해 지역의 전통과 뿌리가 가장 크게 흔들린 지역이란 점 셋째는 궁예주의가 철원에만 머물지 않고 강원 충청지역에도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어 영호남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가능성 때문이다.


철원의 정서
이번 98지방선거에서 철원사람들도 놀라는 일중의 하나는 농민회장 출신이 군의원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례적인 일이다. 우선 이번 승리에 대한 농민회의 자평을 들어보자
장용기씨(철원군 농민회 2대 회장)는 ‘이번 승리 원인을 농민회가 투쟁뿐 아니라 구체적 삶의 대안까지 마련해 가면서 환경농업을 기치로 고급 쌀 생산과 유통에서 농민들의 신임을 얻었고 UR반대 싸움 때부터 영농후계자협회 등 다른 농민단체와 함께하여 지지층을 넓혔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농민회의 힘만으로 철원지역의 문제를 풀어가기엔 넘어야 할 벽이 많아 보인다.철원에 요양차 몇 개월을 살아보았다고 하는 서울 사람 양진영씨는 외지 사람이 살기엔 뭔가 답답함이 느껴지는 곳으로 기억한다. 이런 정서는 비단 외지 사람만이 느끼는 정서는 아니었다. 철원문학회 회원인 정춘근씨는 그 답답함의 근거가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포천은 이한동의원 ‘빽’ 때문인지 포천의 상수취수장이 철원과의 접경지대에 설치됐어요 그러면 철원쪽의 상류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묶여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데도 이것에 관심갖고 항의를 조직하는 사람이 없어요 또 통일을 대비해서 경원선과 금강산 철도를 복구하고 있는데 철원을 거쳐가야 할 철로가 포천에서 직접 연결되고 있다구요. 근데 사람들이 이걸 잘 몰라요 아니 관심이 없는거예요 답답한거죠!” 그러나 일반군민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정서의 변화를 농민회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89년 고대학생들이 농활을 들어오면서 엄청난 마찰 속에서도 바꿀 건 바꿔야 한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군의원 정연규씨도 이를 긍정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철원은 젊은이들이 많아요 농토가 크기 때문에 왠만한 직장생활 보다 낳은 셈이죠. 이런 젊은이들이 중심에 서도록 노력할 것입니다.(주1)


철원사람들
현재의 철원 사람들은 민통선 뿐아니라 민통선 바깥지역까지도 전쟁 후 각 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정춘근씨의 얘기이다. “실향민이나 사라 태풍이 왔을 때 피해를 입은 울진등의 지역민들이 집단이주 해 와서 마을을 형성했다던지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토착민으로서의 애향심이 부족하고 자기 잘 사는 문제 이외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관계는 주도층이 있기 마련인데 재력가를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주로 장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철원 고등학교 정태수 선생님의 지적은 이런 것이다. 대마리는 현역중령의 지휘로 지뢰밭을 개간하여 만든 동네이다. 500여명이 들어와서 지뢰만으로 50여명이 죽거나 다쳤으니 거의 10%가 지뢰피해자인 동네이다. 73년 땅을 9천평씩 공동 분배 했는데 지금은 단 몇 명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가진 사람만 갖게 되는 소유의 편중 현상이 심하다. 또한 농협과의 관계도 이 지역 농민들과는 편한 것이 아니었다. 토지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농협은 기계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철원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어서 일을 열심히 할수록 빚이 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지역내의 갖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를 책임져야할 주도집단이 없고 제도권의 사회단체들도 위계가 서 있질 않다. 결국 책임지려는 집단이 형성되지 않고 있는게 문제다. 농민회와 전교조는 이에 비해 나름대로의 체계를 갖춘 조직으로 보여진다. 열악한 상황에도 지역의 대안세력으로 나서고 있는 과정으로 보인다. 아쉬운 것은 서로간의 지역적 연대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철원문학회와 같은 지역애호집단과도 적극 교류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결국 이런 문제는 어떤 전략 전술적 사업을 배치하느냐의 문제로 모아진다.


지역의 전술과 전략
농민회 장용기 2대 회장은 앞으로의 지역사업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동송읍을 중심으로는 청정 환경의 오대쌀을 부각시키고 김화읍을 중심으로는 축산 등을 상품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정연규 군의원은 철원 관광상품의 개발사업으로 눈썰매장을 추진 중에 있으며 공무원들의 책임행정 실현이 자치행정의 과제로 나서고 있다. 전략적으로는 통일도시를 준비하면서 통일물류센터와 농업전문대 또는 남북청소년들의 통일연습을 위한 통일대학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부분은 정부의 협조와 공조가 필요한 것이어서 부지만이라도 임기 중에 잡도록 결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더 정확하고 총괄적인 전략기획이 나와야 할 것이며 한편으로 지역민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지역의 뿌리를 발견 공유해야 한다. 우선 사람들의 마음이 더 이상 동요하지 않고 뿌리부터 박고 시작한다는 결의를 유도해 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전략적 과제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구조를 총동원하는 사업이며 그 핵심은 지역의 사상을 세우는 일이다.


지역주의
철원문화원 사무국장의 말에 의하면 철원은 82년부터 지역문화 축제로 태봉제를 해 오고 있다. 처음에는 지역민들의 통합력을 높이기 위한 행사로 시작되었으나 94년부터는 궁예에게 제례를 올리는 등 제대로 된 태봉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초기의 기능적 행사에서 철원 전체를 묶어 세우기 위한 전략적 차원으로 고민이 이동중인 것이다. 궁예는 역사적으로 폭군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진행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향토사학자 김영배씨는 강하게 부정하며 궁예의 이미지는 조작된 것이며 다시 정립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얘기는 비단 향토사학자의 견해만은 아니었다. 경로당이나 노인정에 가면 궁예 얘기를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고 확신있게 얘기하는 것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포천에 속하지만 원래는 철원에 속했던 포천 관인면 중리의 정균씨는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면서 쌓았다는 궁예성지와 궁궐터를 자청해서 관리하고 있다. 정씨는 궁예가 만약 폭군으로 인심을 잃어 쫓겨 간 것이었다면 이런 거대한 성벽을 쌓아 몇 년을 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성벽 흔적이 보개산에 33곳이나 됩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병사가 최소 한 수 천 명은 되어야지 이 정도 성벽을 쌓을 수 있을 겁니다. 궁예는 배반을 당한 것이지 인심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같은 동네 김애성씨는 “당시 이 성의 병사가 하도 많아서 계곡에서 씻는 쌀뜨물이 흘러 내려간 것을 보고 왕건의 병사들이 공격하게 된 것이다” 라고 얘기한다. 이런 정서적 토대는 가설이나 희망이라 해도 이데올로기화 할 때 힘을 발휘 한다. 궁예주의는 단순히 철원에 한정되는 주제는 아닌 듯 싶다. 강원일보 김영기 논설위원이 궁예에 대한 재평가 의의를 얘기하며 세미나 등을 개최한 것을 보면 강원도의 힘은 어쩌면 궁예주의에서 나올지 모른다. 지역의 제도권이 진보단체와 시민단체를 지역의 틀거리로 묶기 위해 서서히 준비하고 있는 궁예주의를 과연 진보진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궁예의 역사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에 처한다. 그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신라말 왕족간의 정권쟁탈전 때문이었다. 신라 하대는 김경신이 김주원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비롯되었고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김주원은 강원도 명주 지방으로 밀려나게 되나 신라말까지 원성왕계의 왕위 계승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중앙반대 세력은 경문왕대에 와서 경문왕의 후비인 궁예의 모친에게로 결집된다. 그녀의 위험성은 그 아들인 궁예에 대한 위험성으로 번져가게 되고 태어나자마자 타살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궁예를 구출한 그의 유모는 피신해 살다가 궁예가 10대에 이르자 출생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 궁예는 그 후 절로 들어가 20년간 승려로 생활한다. 그의 이같은 승려 생활에서 불교에 대한 인식도 결코 미신적인 믿음이 아닌 정통적인 불교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춘추전국시대라 할 정도로 다양한 사상이론이 토론되고 전수되고 있었다. 특히 지방의 사찰은 농민반란세력이 지방 호족세력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면서 화엄종 중심의 중앙불교에 반대하는 새로운 불교사상을 전개하고 있었다. 궁예가 후에 미륵불을 자처하였다거나 당시로는 기록적 양인 20여권의 불경을 저술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그의 초기 세력기반은 세달사(강원도 영월)를 중심으로 한 사원 세력이 된다. 그의 새로운 국가 건설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절로 돌아오다가 까마귀가 자기 바라에 떨어뜨리고 간 숫대에 새겨진 [왕]자 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는 기훤과 양길 등 농민 반란이 후 생겨난 유민들의 무장 게릴라 부대인 적당세력에 참여하면서 세력기반을 넓혀간다.(주2) 기훤은 죽주에서 양길은 북원에서 활동한다. 원주의 석남사에서 본격적인 점령사업을 시작하여 강릉에 이르고 그 뒤 명주에 입성한다. 신라하대의 명주는 이미 김주원세력에 의해 장악되면서 반신라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명주지방은 그의 반란을 지원하게 된다.(주3) 또한 청주지방은 왕건에 비해 지역기반이 약했던 궁예가 태봉국을 세울 때 철원으로 집단 이주시켜 자신의 핵심세력으로 키우게 되고 왕건에게 쫓겨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 하는 친궁예지역이 된다.(주4) 초기 세력을 바탕으로 경기지역으로 진출한 궁예는 송악의 왕건세력과 연합하면서 경기 및 대동강 일대까지 그의 영역을 확보하여 신라의 영토을 왜소하게 만들어 버리고 대제국으로 급성장한다. 이렇듯 강원 경기 황해 충북 전라 하의도까지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자 궁예는 905년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청주사람들을 옮겨와 태봉국을 세운다. 그러나 왕건의 배신과 그의 추대세력에 의해 추출당하고 만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지 27년 왕이 된 지 17년만에 태봉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궁예주의
궁예는 불교사상에 정통했다. 미륵불을 자처하고 미륵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든지 한 것은 그의 사상에 대한 확신을 증명한다. 그가 가진 사상이론은 정확히 어떤 것일까? 우선 전제할 것은 미륵사상은 언제나 민중의 신앙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 미륵사상이 전래되었을 때 그것은 지배세력의 것이었다.(주5) 그러나 농민들의 혁명적 진출은[미륵출현 때의 세계가 완전 무결한 현실적 이상세계]라는 점과 접맥되면서 혁명적 사상으로 선택된다.
그렇다면 궁예의 미륵사상이 다른 미륵사상과 다른점을 알아보자 신라법상종(法相宗)이 미륵을 주존으로 하므로 법상종과의 연관하에 궁예의 미륵사상을 살펴 볼 수 있다.(주6) 법상종은 크게 미륵과 아미타를 모시는 계파와 미륵과 지장을 모시는 계파로 나눠진다. 궁예는 이들 중 미륵과 아미타를 모시는 계파에 속한다. 궁예가 큰 아들을 청광보살(淸光)이라 칭한 것은 관음을 상징한 것이며, 둘째 아들을 신광보살(神光)로 칭한 것은 아미타에 비견한 것이다. 큰 아들을 관음보살의 상징인 청색으로 불러서 청광이라 한 것은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으로 등장할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궁예가 자신을 미륵, 장남을 관음, 차남을 아미타로 한 것에서 미륵과 아미타를 모시는 법상종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미륵과 아미타를 모시는 계파로는 태현과 경흥을 꼽을 수 있다.(주7) 그러나 이 계파와 궁예의 사상은 일치하진 않는다. 경흥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승려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하는 대목이 있다. 미륵은 말탄 비구승을 경계한다고 적고 있으므로 궁예가 백마를 타고 다닌 것도 이 계파의 계율에서 어긋남을 알 수 있다.(주8)
한 편 당시 또다른 법상종 승려라는 진표가 유명하다. 진표는 미륵과 지장을 모시는 계파로서 점을 치는 점찰계법을 중시하며 실천행을 앞세우는 계파로 경전을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 진표는 현세에서의 개혁의지는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나 장차 도솔천에 태어나리라 라고 한 것을 봐서는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서라도 지상에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당위는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미묘한 입장의 차이는 궁예가 정치적으로 확실한 입장을 표하는 시기에 갈등의 요소로 작용한다. 나중에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 궁예의 자술경 20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궁예의 신하 승려 석총은 진표계 법상종파이다.(주9) 그렇다면 이들 법상종파 승려들과 궁예의 사상이론은 어떻게 다른가? 궁예는 법상종파를 계승하였으며 사상에서 보이는 특징은 관음을 강조한 것과 정토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이는 궁예가 기반으로 했던 강원도 태백산 지역에서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백제불교에서 융성한 미륵적 성격에서 보면 궁예의 사상은 법상종을 한 층 더 발전시킨 모습이라 보여진다.
진표계가 개혁의지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반면,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면서 현사회를 개혁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 궁예의 저술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궁예의 저술이라 하여 전해오는 함흥무가가 그것이다. ‘지나간 세상에 미륵이 석가와 함께 수행중 누가 먼저 도를 이루어 이 세상에 나가 교화하는가를 내기 했다. 한방에 자면서 누구의 무릎에 먼저 모란꽃을 피는지 먼저 핀쪽이 나가 이 세상을 다스리기로 하자’하고 잠들었다. 그런데 석가가 거짓으로 잠든체 하고 미륵을 보니 그의 무릎에 먼저 꽃이 피어난다. 석가가 도둑의 마음으로 그 꽃을 꺾어 제 무릎에 꽂았다. 미륵은 이 사실을 알고 석가를 더럽다하여 네가 먼저 세상을 맡아라 해서 석가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도둑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미륵 곧 나의 때이다.(주10) 석가는 당시 신라 왕실을 상징한다. 미륵은 궁예자신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혁명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상이론적인 면에서 궁예의 미륵사상은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궁예의 미륵사상의 방법적 측면을 살펴보자. 진표계의 법상종의 간자를 던져 점을 보는 점찰계법 대신에 미륵관심법이란 독심술을 사용한다는 것이 궁예미륵사상의 방법론적 특징이 되고 있다. 미륵관심법은 정확한 내용이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우선 그 전의 미륵사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을 관찰할 수 있고, 왕건이 나주를 정벌하고 와서 보고하자 배반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미륵관심법으로 읽고 철퇴를 내리려 했다는 기록에서 미륵불의 권력에 반대하는 자를 냉정히 분리하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궁예가 자신의 비법을 직간하는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상대방의 마음을 훤히 비춰볼 줄 아는 미륵관심법을 터득했다며 이를 빙자해 무고한 백성들을 마구 잡아죽였다는 통설이 궁예의 포악성과 폭정의 증거로 흔히 인용돼 왔다. 그러나 경남대 사학과 조인성 교수는 강씨로 대표되는 반궁예세력이 두 왕자를 앞세워 궁예의 신정적 전제주의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났기 때문인 것이라고 말한다. 또 궁예가 내세운 미륵관심법도 주로 지배층을 겨냥한 것으로 자신에 대한 호족들의 반발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주11)
그러나 이런 사실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륵관심법 자체이다. 마음을 보는 법으로 해석되는 미륵관심법은 다른 종파의 방법론과 비교된다. 원효의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는 ‘염불정진’이나 이를 계승한 선종의 ‘돈오점수’(주12)론과는 달리 미륵관심법은 일반 중생과는 다른 탁월한 존재인 미륵불에게만 실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방법은 강력한 독재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그 독재는 중생의 완전한 구제인 미륵세상에서의 독재로 민중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방법론적 특징은 대외관게에서 강력한 자주정신으로 표출된다. 왕건이 친신라적 정책을 펴면서 세력확보에 몰두하는 모습과 달리 궁예는 당나라의 군대를 끌여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약속으로 타락 부패하고 정쟁이나 일삼던 신라 왕실에 대한 대안세력임을 자처했다. 이런 궁에의 약속은 신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정치적 포섭 이데올로기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품었던 고구려 고토 회복의 의지와 자주정신을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주13)
정리하면 궁예의 미륵불 사상은 불교적으로 보면 법상종 중에서도 당시 주류를 이루던 진표계와는 달리 미륵과 아미타불을 믿는 계파였으며 여기에 밀교의 대중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을 가미하고 신라말의 혁명적 농민의 진출을 반영하여 독자적인 불교사상을 창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원효나 진표의 미륵사상과는 달리 민중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미륵불=왕이란 개념을 통해 현실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현실에 존재하는 적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사상과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종교와 정치를 일치시키고 있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고구려 고토회복의 자주정신을 갖고 있었다. 궁예의 사상은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의 시대적 한계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기 전 철원에는 여러 계파의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다. 궁예의 미륵불 사상은 왕으로서의 권력에 의해 뒷받침 되었겠지만, 왕권이 약화되고 계파의 성격이 뚜렸해지는 시점에서 갈등의 요소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철원의 도피안사와 심원사의 성격을 통해 당시 상황을 파악해 보자. 도피안사는 선종의 비조 도선 국사가 창립한 절로 알려져 있다.(주14) 선종은 신라말 지방호족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해 간다. 도피안사의 창립 연대로 볼 때 궁예의 아버지인 경문왕 집권초기로서 궁예가 세상에 나기 전이다. 따라서 철원에는 궁예의 천도 이전부터 상당한 호족농민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궁예 또한 이런 지역기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친궁예세력인 청주지방의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다. 호족들과의 연합정권을 만들어가던 궁예 초기에 이런 선종사찰은 갈등의 소지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며 강력한 집중체제을 호족들에게 요구하면서, 선종세력은 갈등세력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도피안사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심원사이다. 심원사는 647년 진덕여왕 때 영원조사가 개창한 것으로 6·25전까지 굉장한 거찰이었던 심원사는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것을 한 무당이 폭격을 피해 지장보살을 피신시켜 모시다가, 현재는 포천군 관인면 현재의 자리에 절을 중창할 때 기증하여 명주전에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상 하나만을 가지고 이 절의 사상적 계파를 단정지을 수 없으나 당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같이 모시는 전통으로 봐서 진표계 승려 석총등과의 연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초기 궁예의 셰력확장에서 이 절 또한 갈등의 소지는 없었을 것이나 태봉국 후기에 갈수록 갈등은 커지고 왕건이 권력을 잡고 궁예세력을 하나 둘씩 제거해나가던 시점에서는 궁예의 사상을 미륵사상의 입장에서 통렬히 비판하는 세력의 근거지 중 하나 였을 것이다. 결국 궁예는 선종 등 분권주의세력들과 선을 긋고 강력한 민중권력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점에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으나,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 간 나머지 어제의 동지와 충신으로부터 배반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됐던 것이다.


궁예 이후
궁예의 성공과 좌절은 철원의 역사 뿐 아니라 전역사를 통해 관철되었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려 이후의 역사에서 현재까지 남이나 북한의 역사에서 궁예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때 민간에서는 미륵신앙이 민간에게 전파되어 향나무를 잘라 땅에 묻는 매향 풍습이 성행하게 되었다.(주15)
철원지역에서 흥미로운 것은 고석성의 임꺽정 전설이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철저한 고증으로 유명한데 소설 어디에도 임걱정이 고석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얘기는 없다. 철원 사람들은 어쩌면 임꺽정을 또 다른 미륵으로 보고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철원 사람들의 정서 밑바닥에 흐르는 미륵사상이 근현대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순 없지만 노동당사 유적과 관련지어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 노동당 이전에 삼일운동 당시로 돌아가 보면 철원에서 삼일운동을 불붙인 세력은 천도교와 개신교로 나타난다.(주16)
철원 사람들이 천도교나 개신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이들 사상에 내재된 근대성이란 측면도 있지만, 포천 등 인접지역에 비해 조선조 유학세력이 이 지역에서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조건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천도교나 개신교 등이 계속해서 항일과 진보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동해 가는 것에서도 그 양상을 관찰해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은 러시아나 개신교의 영향이 컸던 평안도 등의 지역과 교통이 발달한 동해안의 양양이나, 기차역의 중심지인 철원역, 도로의 중간지점인 김화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철원에서는 대대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진다. 공산당은 통일전선의 확대를 위해 애국적이고 변혁적인 세력을 규합하여 노동당으로 개편하고 철원군당을 건설한다. 철원은 강원도의 중심지로서 기능했기 때문에 강원도 도당이 건설되었다가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강원도당은 원산으로 옮겨간다.


현재의 노동당사의 안내 표지판에는 [이 건물을 짖기 위해 성금이란 구실로 1개 리당 백미 200가마씩을 착취하고 인력을 강제 동원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객관적 조사와 검증이 필요하리라 본다. 당시 철원군당 간부를 했던 장기수의 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군당회의를 할 장소가 조차 없는 형편이었단다. 지주들 중에는 백성들의 원성이 무서워 도망간 사람도 있었고, 당에서 인민들의 습격을 받을 것이 예상되는 지주들은 미리 피신시켜 빈집이 마을에 몇 개씩 있었다고 한다. 비어있는 지주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회의를 했어야 했단다. 그러다가 평당원 중 하나가 우리도 우리의 건물을 갖자고 제안하여 당원들이 쌀과 곡식, 목재 등을 모아서 손수 간부들의 노동을 중심으로 건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백성들이 ‘어버이 당’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십시일반 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의 극단적인 설명이 노동당사를 보는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정확한 실사가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철원의 상황을 볼 때 후자의 신빙성이 높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역주민들이 마르크스나 레닌주의를 공부했거나 알고 있어서 노동당의 지지자가 됐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에겐 ‘못살겠다 엎어보자’라는 절박한 변혁적 요구를 실현해 줄 수 있는 중심이 필요했고 조선시대에는 임꺽정이, 해방 이후에는 노동당이 되었을 것이다. 노동당은 철원 사람들에게는 현대의 미륵이었던 것이다.

맺음을 대신하여
궁예주의는 보수와 자유주의와 진보의 입장 중에 진보의 편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궁예의 미륵불사상은 살아있는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 빠질 때 관성화된 종교와 역사의 벽을 넘기 어려울 것이다. 철원군은 통일과정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인근의 포천지역이 역사적으로나 현재의 정치구조상 보수의 벽이 높은데 비해, 철원은 이렇다할 보수세력의 발전이 미약하다. 철원군에서 주최하는 태봉제를 통한 궁예주의 만들기는 오히려 진보의 입장에서 환영되어야 할 행사이다.
철원에서의 새로운 지역주의인 궁예주의를 형성발전시키는 것은 서울의 민족운동이 펼쳐나갈 지역적 활로를 개척하는데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판문점 중심의 통일운동은 자칫 파주, 문산의 견고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전통에 포위될 위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철원을 통한 통일국가의 동선은 분단 이전 시대 진보적 민족사상의 심장역할을 해온 금맥이다. 통일의 지역적 전략을 수립하는데서 철원에 주목하길 제안한다.

각주

1) 비옥한 농토야 말로 철원의 역사가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다. 구조곡을 따라 흐르는 한탄강은 범람을 모른다. 철원 평야의 기반암인 현무암은 땅을 파보면 70미터가 안 되어 나타나는 널개을 형성하는데 현무암질의 특성상 배수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강원도에서는 드문 너른 평야를 형성하면서 땅을 둘러싼 치열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2) 통일 신라 골품제의 모순은 왕위쟁탈전으로 이어졌고 혼란과 봉건제의 모순과 진성여왕 때의 극심한 흉년은 백성들으 기아로 이어져 광범위한 농민반란의 원인이 된다. 이 과정에서 지역공동체를 떠나 유랑하는 유민이 생기게 되고 더 이상 몰락할 게 없는 이들을 중심으로 도적떼의 형태를 띤 무장세력들이 곳곳에 생겨난다.

3) 명주를 중심으로 한 강원지역은 경주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을 심했지만 체제 자체를 전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왕건의 고려 성립 이후 명부지방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인사들이 회유되는 데서도 나타난다.

4) 청주지방은 원래 백제영토였다는 점과 신라의 변방이었던 서원소경이었던 점 때문에 피정복민의 지배층과 중앙의 귀족을 외거시켜 집단적으로 회유감독코자 한 지역이다. 따라서 신라말에 중앙의 통제력 약화되면서 이 지방도 독립적인 지방호족으로 커간다. 후삼국시대 청주는 지방세력들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청주의 정치적 성향이 분명치 않아 궁예와 왕건은 이 지역경략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성립한 이후 반왕건 반란세력이 주로 이지역출신이란 점에서 왕건보다는 궁에의 추종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5) 신라 진자라는 승려가 흥륜사의 미륵불 앞에서 미룩불이 화랑으로 태어날 것을 빈 결과 미시라는 화랑이 나타났다거나 김유신이 그의 낭도를 용화낭도라고 불렀던 것이 그렇고 원효의[미륵상생경종요]를 통해 불교를 통합하려 했던 점에서 그렇다.

6) 법상종은 원래 유식종이라고도 하며 인도의 대승불교인 유가종에서 유래하여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창시했다. 삼상을 가지고 우주의 본질을 표현한다. 삼상이란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지하여 생겨난다는 의타기상(依他起相) 보통사람이 주관의 새안경을 끼고 실상을 보지 못하여 허된 집착을 만들어 낸 것이 편계소집상(遍計所執相)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된 본체의 모습을 가리키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의 셋을 말한다. 만물은 오직 심식(心識)이 변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유식관의 방법으로 심상을 통찰할 수 있으며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7) 이 계파는 원측이 중국으로부터 유식학을 가져와 태현과 경흥에게 전하면서 작된다. 태현과 관련된 일화로는 그가 용정사에 머물면서 미륵상을 돌며 기도하였다 한다. 태현의 정성에 감동하여 미륵상도 따라 돌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법상종의 교리에도 해박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태현이 화엄승려인 법해에게 밀려났다고는 하나 유가 대덕으로 불릴 만큼 높이 받들여 졌다고 보인다.

8) 삼국유사 3권 남월산조에 김지성이란 사람이 죽은 부모를 위해 미륵상과 아미타상을 세우고 그 뒤에다 기록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지성은 감산사에다가 미륵과 미타상을 tn고 있으므로 미륵과 미타를 중시하는 계파의 신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는 관음보살의 존재도 등장하므로 이 계파는 정토적 개념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보여진다. 궁예는 특히 밀교적 요소를 보이고 있는데 특징이 있다.

9) 궁예의 개혁사상은 관음의 정토적 성격과도 연관되어지기 때문에 궁예가 진표계 법상종파를 받아 들였어도 크게 괴리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잘 알기 때문에 더 혹독한 반대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10) 고은 미륵과 민중[한국근대민중종교사상] 학민사 263쪽

11) 철원 도읍 후 양민을 대규모 궁궐공사에 동원했다는 기록으로부터 그거은 지방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자체가 과정된 것으로 보인다. 분단 전 궁예궁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최소한의 규모였다고 기억하고 있다.(철원 향토사학자 김영배의 증언)

12) 중생의 본성이 부처임을 순간적으로 깨달음이며 이를 계기로 점차적인 수행을 통해 불성을 완성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 각자의 득도에 초점을 두어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 정신을 반영한다.

13) 궁예란 이름의 궁은 고구려 고주몽의 궁을 뜻한다

14) 주 동송읍 관우리에 있는 도피안사는 865년 통일신라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가 향도 천여명을 거느리고 풍수 좋은 곳을 찾던 중 피안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하여 도피안서로 이름을 짖고 철조 비로자니불 좌상을 봉인했다.

15) 갯벌에 묻은 향나무가 천년 뒤 물위로 떠오르면 미륵세상이 온다는 신앙으로서 고려 우왕대에 이르러서 자칭 미륵불이 출현하니 그가 곧 이금(伊金)이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숙종대의 여환(呂還)이 무당과 함께 미륵불이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신앙을 널리 퍼트려 무장세력을 준비하여 궁궐을 치려다가 역모자로 구속되어 처형되었다.

16) 주동인물에 있어서는 대체로 천도교인 일반지식인 청년학생 유생 기독교인 의병출신자의 순서인데 강원도에서 구한말 의병활동을 하던 사람드이 술장수나 화전민으로 숨어 살다가 3·1운동의 주동급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구한말 의병사와 3·1운동을 연결하는데 특히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담당자가 같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