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에서의 지휘 이시우 2004/09/26 140
p379 핵무기가 출현한 1945년 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강대국이 직접 개입되지 않은 분쟁에서는 이론적으로 볼 때,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에 제한이 없었다. 소련을 침공할 때 히틀러는 소련에게, 그리고 2차대전 당시 연함국은 히틀러에게 상대방에대한 서멸과 다름없는 개념인 ‘총체적 항복(Total Surrender)’을 요구한바 있다. 추분할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처럼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정도를 크게 높여 잡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약자가 취할 수 있는 방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강자의 권한이 높아져 있었다. 이점에서 볼 때 전쟁이란 정치적수단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치의 명언은 그 의미가 없었다.
p380 제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제 2차 대전이 종료된 1945년 사이에는 근대적 의미의 ‘총력전(Total War)’이란 개념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정치‘가 한쪽 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그러나 제2차대전이후 등장한 핵무기로 인해 ’정치‘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월남전은 단순한 군사적 측면의 갈등이 아니고, 개개 단계에서 저치란 요소가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 분쟁이었다. 당시 지휘를 구사하던 모습을 파악해보려면 월남의 정글뿐아니라 최고위 차원에서의 의사결정 체계를 살펴보아야 한다…(또한)무기의 성능이 너무나 강력하여 그 사용이 불가능해짐에 따라서 인류역사이래 오랜동안 지속되어 왔던 대규모 차원의 재래식 전쟁은 그 설땅을 잃은 듯이 보였다..핵무기의 암영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핵무기의 사용이 전혀 p381필요없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점차 관심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간접침략전 또는 대간접침략전이다.전쟁에는 뚜렸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는데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간접침략전은 바람직한 형태의 전쟁은 아닐 것이다. 월남전은 지금까지 수행된 대간접침략전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기록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경우다.**핵전의 대안이 간접침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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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성의 시대
1945년 이후의 20여년동안에는 군관련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군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다양한 형태의 무기 및 장비가 군에 도입되었을뿐 아니라 새로 도입된 무기 및 장비의 경우는 예전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몇배나 더 복잡해졌다. 그결과 다양한 형태의 다수의 부품이 군에 요구되었다. 이같은 장비와 무기를 운영 및 유지하는 과정에서 관리 및 병참의 문제또한 매우 복잡해졌는데 이는 이들에 대한 소요비용을 보면 잘 이해될 것이다. 예를들면 1965년도 당시의 전투용탱크 및 전투기는 제2차대전에서 사용되던것의 10배에서 20배에 달할 정도로 고가였다. 군이 복잡해짐에 따른 현상은 인력분야에 그대로 나타났다.
제2차대전이 종료될 당시 미군은 970만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1407군데의 서로다른 ‘특기양성소(MOS:Military Operrational Specialties)’에서 교육 및 훈련을 받았다.즉 개개 특기양성소에서는 평균 6,894명의 병사들이 교육 및 훈련을 받았다. 군의 병력이 감축되면서 특기양성소의 숫자도 줄어드는데 1952년도를 기점으로하여 이들 숫자는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63년도 당시, 미군은 250만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1559개의 특기양성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따라서 개개 양성소를 거쳐간 사람은 평균 1427명으로 줄어들었다…몇 몇 대형의 특기양성소에서 동일한 형태의 훈련을 받는 비율은크게 줄어든 반면, 여러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곳의 비중이 크게 증대되었다….특수화가(전문화)가 강조되면서 군이 복잡성을 더해가게 되었다고 말할수도 있지만, 복잡성의 결과로 인해 특수화가 조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오늘날 군의 조직원들은 직속상관뿐이니라 부서장 또는 특기분야의 장과도 교류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수행 과정에서 보다 많은 규모의 정보가 요구되고 있다. 1963년도 당시의 미군은 1945년도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업무수행 과정에서 대략 20배정도의 정보가 요구되었다….전문화는 임무수행을 목적으로 특정조직을 통제하고자 할때 필요한 정보의 규모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요인이다. 그러나 전문화란 요인 못지 않게 군의 조직구조는 정보의 소요정도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변수이다. 군조직의 안정성이 높을수록, 조직원들간의 친밀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조직원상호간에 신뢰성이 클수록 규정.‘표준화된 윤영절차’.명령문 보고문이 크게 줄어들게 되며, 군의 구성요원 및 부대에 보다 쉬운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월남전 당시 미군은 안정성의 측면에서 크게 미흡한 집단이었다.(R.A.Gabriel and P.L. Savage, Crisis in Command: Management in the Army(New york,1978에 소개되어 있음) 월남에 파병되어 있던 미군들을 매년 그리고 4명 단위로 미 본토의 병사와 순환시켰으며, 중대장 및 대대장의 경우 또한 한 곳에 체류하고 있는 시간이 6개월이 채 안되었다. 때문에 개개 군인들은 친숙해 질 수가 없었다…전문화가 된 조직에서는 특정 임무를 수행하려면 끊임없이 ‘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하고, 임무종료와 동시에 이들 임무부대를 해체해야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지나칠 정도의 전문화는 군의 안정성에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들이 상호 협조해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려면 엄청날 정도의 정보가 교류될 필요가 있다. 전문화로 인해 군에 권력의 중앙집중화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정조직의 구성원 및 이들의 단위 부서가 전문화될수록, 이들 개개인이 조직 전반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주요의사를 독자적으로 p386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은 보다 더 저하되며, 최상위 차원에서 전반적으로 지시해야 하는 경우는 보다 더 증대된다. 1945년도 이후의 20여년 동안 다음과 같은 다수의 요인들로 인해 미군의 조직은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중앙집중화 되었다.
첫째, 전자통신과 자동화 데이터처리 분야가 혁신적으로 발전하면서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워싱턴에서도 효율적으로 지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1950년대 당시 미국은 미소간 우발적인 사고로 인해 핵전쟁이 유발되는 경우를 철저히 방지하겠다는 일념에서 그 해결 방안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범세계적 지휘통제체제(WWMCCS: World Wide Military Command and Control System)’가 1962년도에 출현한 것은 이같은 배경에 근거하고 있다. 이들 체계는 최초 의도된 바인 ‘전략 공군을 위한 지휘(Strategic Air Command)’의 차원을 넘어 재래식 전쟁에서도 사용될 수 있도록 기능이 확장되었다. 행정적 차원에서는 ’비용 대 편익분석(Cost-Benifit Analysis)’이란 깁ㅂ의 등장이 눈에 뜨이는데, 이는 군의 모든 자원을 한곳에 모아놓고, 필요에 따라서 개개 사업에 자원의 일부를 할당해야 함을 강조하는 기법이었다. 이같은 기법이 군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요소인 컴퓨터와 같은 데이터처리체계뿐만 아니라 이들 기법이 군에 도입됨에 따라서 국방을 중앙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보다 더 높아졌다.
국방을 중앙에서 통제하기 위한 수단들이 등장하게 되자, 워싱턴의 의사결정자들은 그 기회를 신속히 포착하였다.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지 18개월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동안 맥나마라는 개별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각군의 정보조직을 대체할 목적에서 국방정보부(DIA)를 2개군 이상이 사용하는 장비의 획득을 감독할 목적에서 국방보급청(DSA:Defence Supply Agency)을 그리고 국방부에서 중앙집권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는 일부통신시설을 인수할 목적에서 국방통신부(DCA:Defence Communication Agency)를 설치하였다. 더욱이 국방연구공학실(ODER:Office of Defence Reserch and Engineering)의 기능을 확장해 국방부가 지원하는 모든 형태의 연구프로그램을 감독할 수 있도록 하였다.(맥나마라 당시의 국방부재조직에 대한 내용은 C.W.Borklund, Men of the Pentagon(New york,1966), p 215, and J. Raymond, Power at the Pentagon(New york,1964)p.293에 나와 있다)
이들 일련의 조치로 인해 원거리에서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의사결정권자들이 이들 유혹을 뿌리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6년도부터 1975년도 사이에는 전세계적으로 200여개의 위기가 발생하였는데, 이들 중 73% 이상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직접 관여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법적 측면에서 미국 대통령이 관여해야 할 부분은 22%도 채되지 않았다.(L.Hazlewood.J.J.Hayes,and J.R.Bronwell, “Planning for Problems in Crisis Management:An Analysis of Post 1945 Behavio in the US Department of Defence” Internatioal Studies Quarterly 21,1977,pp.75~106)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대통령 케네디는 쿠바 봉쇄에 참여하고 있던 미 해군함정의 위치를 일일이 감독하였는데, 쿠바사태로 인해 권력의 중앙집중화는 보다 더 심화되었다. (Gissin, “Commmand, Control and Communication” pp 196-200)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군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엄청날 정도의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p388 동일한 의미이지만, 특정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각군의 개개부대에 엄청날 정도의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같은 정보수요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에서 육해공군 각군은 자군의 통신병과를 몇 배로 확장시켰다…1943년도에는 38.6명당 통신장비 1대가 있었던 반면 1971년도에는 4.5명당 1대에 달할 정도로 통신장비의 보급률이 늘어났다. 즉 통신장비보급률이 857%정도 급증하였는데 이는 여타장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에따라 개개 사단본부에 연결되어 있는 통신채널의 수 또한 4배정도 증대되었다. 예를들면 한국정쟁 당시에는 사단본부에 8채널이 할당되었던 반면 월남전에서는 32채널이 배당되었다.( T.M.Rienzi, Vietnam Studies: Communications-Electronics 1962-1970[Washinton.D.C.1972],p57.)
다 채널 초고주파(VHF:Very High Frequency)를 이용해 육군의 포대와 같은 단위부대까지도 지원할 수 잇게 되었으며, 제1 보병사단의 경우는 통신장비를 보완할 목적에서 사단 작전실에 35선의 전용회선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AN/PRC-25 및 AN/VRC-12처럼 특수목적으로 설계된 초고주파의 무선장비를 이용하게 되면 상황이 매우 복잡한 정글 지역에서도 단거리 통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월남전을 염두에 두고 5억불 예산으로 1966년도와 1968년도사이에 개발한 통합광대역통신체계(IWBCS: Integrated Wide Band Comunication System)에서는 ‘Topographic Scatter’라는 신기술로 인해 기존의 유선을 이용하지 않고도 음성과 전신타자기(Teletypewriter)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Teleprinter의 전송속도가 분당 100단어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몇 년간 머물던 기간을 거친후 1960년대말에는 분당 3000단어를 전송할 수 있는 신장비가 출현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지역의 한종단에서 다른종단으로 데이터를 전송하고자 할 때 필요한 중계소의 역할 뿐아니라 자동으로 전화를 연결해주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 기능은 예전의 전구에는 배치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것이었다. 태평양상에 위치한 괌, 필리핀, 호놀롤루, 샌프란시스코를 워싱턴과 연결할 목적에서 해저케이블 뿐아니라 인공위성을 중계소로 활용하는등 다수의 방법이 강구되었다. 통신체계의 품질과 적응성이 크게 향상되면서 통신부품에 관한 병참의 문제가 복잡해졌을 뿐아니라 이들 통신장비를 설치, 운영 및 유지하기 위한 다수의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p390 1963년동 당시 통신체계와 관련된 특기양성소는 대략 400여군데에 달했는데 이는 미군이 운영하고 있던 특기양성소의 25%에 해당하는 수치였으며, 그 수치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Wool, The military Speciaist, p 42) 월남내의 군지원사령부 (MACV:Military Assistance Command in Vietnam)에 통신을 지원하고 있던 전략통신사령부(Strategic Communication Command)소속의 제1 통신여단은 23.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1통신여단의 규모는 보병사단보다도 컸는데, 이는 월남에 파병되어 있던 미군병력의 5%에 해당한다.(T.M.Rienzi, Vietnam Studies: Communications-Electronics 1962-1970[Washinton.D.C.1972],p159에 근거함)
개개 사단의 경우는 병력의 20%정도가 무선통신 장비를 운영하는 요원이었는데, 이들중 절반은 통신만을 담당하는 요원이고 나머지 절반은 통신외에 여타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월남으로 반입된 주요물품의 1/3정도는 전자통신장비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 장비를위해 근 50만 종류의 전자부품을 유지해야만 했다. 전자장비를 유지할 목적에서 제 1통신여단은 월남내의 150군데에 관련시설을 설치하였다. 통신의 조직과 장비가 복잡성을 더해감에 따라 사단 통신대대장의 경우는 통신장비의 운영에 90%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간단히 말해, 기술혁신으로 인해 그리고 군의 전문화와 복잡성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에서 군의 통신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같은 통신체계의 발전으로 인해 군의 전문화와 복잡성은 더 가속화되었다. 통신체계의 경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인데 거꾸로 문제를 야기한 경향도 없지 않았다.
군 통신체계의 규모와 이들의 우수성 정도에 상관없이 이들만으로는 ‘군사기술혁신(MTR:Military Technology Revolution)’에 의해 유발된 문제들 중 일부만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분석 및 이해하기 위한 신기술, 즉 전쟁의 복잡성을 고려하고 과거의 정성적(定性)인 판단이 아니라 정량적으로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였다. 우연히도 이같은 기술은 체계분석이란 이름으로 1960년대 초에 그 첫선을 보였다. 생산의 흐름을 예측하고 조정하기 위해 기업가 및 경제학자들이 오랜기간동안 사용해온 모델에서 기인히고 있는 체계분석을 미 국방부에 도입한 사람은 맥나마라국방장관이었다. 그는 체계분석 방법을 통해 상위 차원에서의 의사결정에 보다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미국방부 체계분석실(OSA: Office of System Analysis)소속의 신동들(이들 대부분은 대학 및 첨단연구소에서 차출된 전문경제학자들이었다)이 사용하던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이는 보다 큰 문제의 일부분으로서 개개 문제에 영향을 끼치는 매개변수들을 정의하고, 이들중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변수들을 규명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국가안보문제와 국방성에 근무하는 아가씨가 입고 있는 스커트의 길이를 이론적 측면에서 연계시킬 수 있을 정도의 일련의 함축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둘째, 체계분석이란 몇몇의 구체적인 가정을 하고 그 가정에 근거해 다수의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셋째, 여기서는 가능한 한 정량적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당시 미국방부에서 사용한 체계분석에 관한 기술과 이들 기술이 가정하고 있던 사항에 관해서는 A.Enthoven and K.Wayne Smith, how much is enough? Shaping the Defence Program,1961-1969(New york,1971)pp10-30and 45-47)
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체계분석에 의해 얻어진 결과는 결코 세련된 형태가 아니었다. 이는 통계적 증거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도출된 결과를 종종 방정식의 형태로 표현하였다. 체계분석방법론을 이해할 능력이 없거나, 이해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체계분석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p392 여타기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체계분석기법에는 나름대로의 한계가 있다.(G.Palmer, the Mcnamara Strategy and the Vietnam War(westportm Ct,1978),pp3-18) 첫째 모델을 설정하고 정량화를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체계분석은 군작전에 관한 문제보다는 회계 및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에 보다 적합할 것이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의지는 보유수단에 따라서 전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는 지상전보다는 하늘 또는 바다에서의 전쟁에, 대규모 복잡한 형태의 전쟁보다는 소규모의 전쟁에, 그리고 사회정치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형태의 전쟁보다는 순수군사적 성격의 전쟁에 보다 더 적합하다.(이는 월남에서 이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출처: J.Ewell and A.Hunt, Sharpening the Combat Edge: The Use of Analysis to Reinforce Military Judgements(Washington,D.C,1974,p.233) 둘째, 체계분석에서는 수많은 수식을 열심히 계산할 필요가 있는데, 이들 방법론에서는 쉽게 계량화 할 수는 없지만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정신 및 윤리적 요소들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단순히 수를 세는것과 이해하는 것 간에는 다수의 차이가 있다. 월남전에서 적의 시체 그리고 민주화시킨 마을의 수를 세었는데, 이는 거의 의미 없는 행위였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월남전은 셈과 이해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전쟁이었다…p393
월남전당시 미국방부 체계분석실이 비공식적으로 발간한 ‘동남아시아분석보고서(Southeast Asia Analysis Report)’란 월간지를 워싱턴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즐겨 읽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월남전 수행과정에서 체계분석실의 영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A.Enthoven and K.Wayne Smith, how much is enough? pp270-306. OSA의 역할에 대해선 T.C.Thayer, How to Analyze a War Without Fronts,:Vietnam,1965-1972(Washington,D.C,1972를 참조하시오) 더욱이 야전을 방문해 상황을 직접 파악하는것외에 이들 요원들은 별도의 정보수집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국방부 체계분석실장인 엔토벤(A.Enthoven)이 지적하고 있듯이 체계분석실이 대통령 및 국방장관을 위한 ‘방향성있는 망원경’의 역할을 담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체계분석실 요원들은 ‘방향성 있는 망원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할 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전문군사지식을 구비하고 있지 못했다…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체계분석실에 가해지고 있는 비난 중 많은 부분은 전혀 근거 없는것으로 일축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계의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한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인해 월남전에서는 ‘정보병리(Information Pathology)’란 현상이 생겨났다. 이는 전쟁의 결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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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필요한 정보의 규모
군현대화의 정도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에 복잡성이란 요소가 있다면 월남전 당시의 미군의 조직은 복잡성의 측면에서 전혀 나무랄데가 없었다. 국방장관의 입장에서 보면 월남전은 다수의 문제중 하나에 불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조직에 국가안전보장회의와 합참의장실이 있었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번디(Mcgeorge Bundy)와 로스토우(Walt Rostow)가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은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1965년 이후에는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월남전 당시 전구사령관(Theater Commander)이 있었다면 이는 해군제독 샤프(Ole Sharp)인데, 그는 동시에 태평양사령관이었다. 그는 웨스트 몰랜드 장군 휘하에 있던 군지원사령부의 직속상관이었으며, 미 7함대와 괌 및 태국에 주둔해 있던 전략공군사령부 소속의 B-52 폭격기를 지휘하였다. 합참의장실과 미 태평양사령관은 월맹에 대한 항공전을 담당하였는데, 항공전을 계획하면서 이들은 국방장관, 국방관료 그리고 그들의 조언에 근거해 행동하고 있던 대통령으로부터 철저히 감독을 받았다. 월남의 미군은 웨스트몰랜드장군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그는 태국,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내의 부대 및 시설뿐아니라 이들 국가에 대한 침공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이들 문제는 은밀한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이들 국가에 상주하고 있던 미 대사관과의 주기적인 회합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인해 웨스트몰랜드장군은 월남군 및 한국군에 대해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으며, 이들 군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군을 파견하였던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군에 대해서도 제한적 성격의 권한만을 행사했다. 월남에 상주하고 있던 미국의 민간조직은 법적 측면에서 그의 재량권 밖에 있었으며, 이들의 협조가 요구되는 경우는 미 대사관이 중재해야만 하였다. 정보 및 첩조조직에 대해서도 그는 명령을 내릴수가 없었다. 이들은 월남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샇고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워싱턴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B.M.Jenkins, “The Unchageable War”, RAND Paper RM-6278-ARPA(SantaMonica, Cal. 1972 pp8-9) 겉모습과 달리 웨스트몰랜드장군은 휘하군에 대해서도 자신이 마땅히 행사해야할 수준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던 전투부대인 미제 7함대와 전략공군사령부에 대해서도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육군출신인 웨스트몰랜드장군은 공군 뿐아니라 해군 및 해병대도 지휘해야만 했다. 이들 p396중에서 특히 해병대와의 관계가 항상 문제였다. 미 해병대는 해안을 벗어난 지역에 대한 작전을 거부하였으며, 해병대 소속의 항공력을 군지원사령부가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탐탁치않게 생각하고 있었다.(해병대 소속 항공기를 해병대와 베트남군수지원사령부 MACV가 30:70의 비율로 사용하기로 합의를 본 것은 1968년도 5월인데 이는 끊임없는 논쟁의 결과였다.) 웨스트몰랜드는 이들에 대해 명령을 내릴 때는 워싱턴에 위치해 있던 해병대사령부의 눈치를 살폈는데, 이는 가능한한 이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전쟁에서 해군과 공군은 기꺼이 육군과 상호 협조하였는데, 이는 높이 평가해야할 부분이다.(D.Kinnard, The War Managers(Hanover,N.H,1977)pp59-63. 그럼에도불구하고, 공지협조에 관한 운영절차에 따르면 다음날 요청할 사항을 당일 오전 10시까지 육군이 상세히(표적의 위치, 표적의 형태,아군상황등을 포함) 제출해야만 하였다. 이처럼 장시간의 선행시간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기획은 명목에 그쳤으며, 항공기의 소티는 마지막 순간에 임의로 전용되었다.)
지원사령부 휘하 조직에 대해 개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해도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자가 필요 하였으며, 이들 휘하 조직들간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임무 및 기능을 설명하려면 수만페이지의 책자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더우기 지원사령부는 월남전에 관여하고 있던 무수히 많은 미국의 조직중 하나에 불과 하였다. 때문에 이들 조직간에 셀 수 없을 정도의 다수의 견해를 조정하고 정보를 교환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형태의 통신망으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권한의 축(Line of Authority)’이 분산되어 있었으며, 종종 불확실한 경우가 있었다는 점으로 인해 명령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를 간단한 ’요구‘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는데 이는 월남전의 전형적인 특질이었다…대통령, 체게분석실, 태평양사령부를 포함한 수많은 조직에서 논평 내지는 구체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각서를 생산해 내거나 배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의사결정권자들에게는 엄청날 정도의 서류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 서류중 전체를 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실제로 시행된 경우는 보다 적었다.(웨스트몰랜드에 의해 매달 전역기획에 대한 소감을 질문 받은 바 있는 한 군단장은 “ 이들을 읽은적이 없다. 읽게되면 혼란만 가중된다”고 답변하였다 출처: Kennard, The Wat Manager, p58)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서류에 목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웨스트몰랜드는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p398 그 결과 장군이 한사람과 수분이상 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월남주둔 미군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양의 문구류(연필, 지우개등)를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합참은 고위급장교들이 이들 문구류를 제한적으로 주문해야 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같은 상황에서 보통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군은 중앙집중화를 보다 더 강화하였다. 월남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날 정도의 정보가 필요하게 된 이면에 ‘조직의 복잡성’이란 요인이 있었다면, 당시 권력이 중앙집중화 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여기에 일조하였다.
..당시는 적의 공격을 받고 있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던 기지를 워싱턴이 직접지휘하였다는 내용의 글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이론적으로 워싱턴에서 전선의 기지를 직접 지휘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이처럼 지휘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전쟁에서 권력이 크게 중앙집중화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적어도 두가지는 있다. 첫 번째는 월맹에 대한 공습의 경우인데, 항공력을 이용한 이같은 공격을 국방정보부. 합참 그리고 태평양사령부가 제공하는 정보 및 표적목록에 근거해 맥나마라와 그의 참모들이 지휘하였다…월맹 내에 위치해 있던 표적 중 항공력을 이용해 공격해야할 부분, 임무수행에 적합한 기상, 그리고 임무에 참가하는 개개 조종사의 요건등에 대해 국방장관실이 직접 지시하였다. p399 공격에 의한 성과를 ‘비용 대 편익’ 그리고 ‘자원의 효율적 활용’ 등과 같은 통계적 측면에서 판단하였기 때문에 야전의 전투원들은 작전지역의 전술상황을 간과하는 경향이 매우 높았다.(조종사들은 보다 안전한 경로가 아니고 최단 경로를 통해 표적으로 접근해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Gissin,”Command, Control, and Communication” p 297-300)
더욱이 공격결과에 대한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항공모함을 통해 태평양사령부, 합참, 국방장관 그리고 대통령에 보내야만 했다. 월남전 당시 중앙집중화가 절정에 달하면서 엄청날 정도의 정보가 요구되었던 분야에 병참체계가 있다.. 최단 시간내에 가능한 많은 규모의 전투원을 월남에 파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65년도 당시 웨스트몰랜드 장군은 병참 지원체계를 떼어 내었다. 월남전이 비교적 정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비용 대 편익’을 강조하던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중앙집중화와 자원의 집중화가 조장되었다. 그 결과 병참체계가 복원될 수 없었다. 월남전에서의 보급 및 유지는 월남 전역에 걸쳐서 지역별로 설치되어 있던 군수사령본부(Logistics Command Center)가 지원하였다. 이 같은 체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군수사령본부와 야전부대간에 지속적이고도 상세한 수준의 통신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더욱이 이들 체계에서는 야전부대에서의 소요에 대한 통계적 모델을 군수사령본부가 개발 및 유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특정 전술지역에서 여타지역으로 수많은 형태의 부대가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인해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요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으로 인해 보다 많은 규모의 보급물자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태평양 한구석에 위치한 보급창의 특정 항목을 주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컴퓨터로 인해 군수지원체계가 자동화되고, 전례가 없을 정도로 첨단화되었지만 업무처리 과정에서 요구되는 방대한 규모의 자료를 제대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정보를 이용해 수요와 공급간의 관계를 적절히 조정하기보다는 오키나와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보급창에 사람을 보내 필요한 물자를 직접 가져오도록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필요한 항목이 저장되어 있는 곳을 확인은 하였지만, 이들 항목에 들어가는 부품을 해당부서에서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제1병참사령부의 부서장을 역임한바 있는 하이스터(Heister)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래전에서는 중앙집중화된 방식으로 병참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지원부대를 원소속의 단위부대로 환원시킴으로서 방대한 규모의 정보가 빈번히 교류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단위 부대가 특정 물자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는 현상은 묵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지휘체계에서는 매우 사소한 문제에 관해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조차 고위급 지휘부가 관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들 중 두가지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그중 하나는 1967년도 당시 미 합참과 체계분석실간에 있었던 설전의 경우인데 이들은 월남에 파병되어 잇던 미군전력을 보강할 목적에서 C-141 수송기 두대를 파견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최종결정하는 과정에서 맥나마라장관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이같은 형태의 문제에 대해 의사를 결정하려면 초안에 부로가한 수없이 많은 형태의 비망록을 주고받아야만 하였는데, 이들 개개는 사이공에 위치해 있던 웨스트몰랜드장군 휘하의 지원사령부에서 상세검토한 후 내용에 대한 논평과 검토를 위해 다수의 상급본부를 거쳐서 워싱턴으로 올라갔다. 오늘날의 첨단 통신수단을 이용하게 되면 지구상 곳곳을 어렵지 않게 섭렵할 수 있다는 점과 월남전당시 지휘에 관한 미군의 관행으로 인해 권한이 단일 인물에게 집중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과로로 인해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월남전 당시 정보의 규모
p402 지원사령부의 정보 담당 부서에서는 적에 관한 자료를 매달 100만 페이지 정도 입수하였는데, 이들 중 10%에 해당하는 부분은 당연히 번역되었다. 1967년도 초에는 지원사령부에서 오는 자료중 매일 0.5톤 정도를 인쇄하였는데, 이는 향후 이 같은 수치가 크게 증가할 것임을 보여주는 징조였다.(J.A.Tolson, Vietnam Studies:Airmobility(Washington,D.C.1973)pp128,200) 1965년도 당시 월남에 파병되어 있던 미군의 규모는 전성기의 1/3 수준이었는데, 당시에도 푸람(Phu Lam)에 위치해 있는 육군 전략통신부대에서는 매일 8,000여 건의 메시지를 송수신하고 있었다. 그 후 이들 정보의 양은 끊임없이 증가해 당 년 11월에는 나짱에 새로운 형태의 정보처리소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1966년도 말경에 들어서면서 이들 두 정보처리소에서는 매달 50만건의 메시지를 처리하고 있었는데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수치가 두배로 늘어났다. 당시는 매달 500만장의 컴퓨터 카드를 이용해 자료를 입력하고 있었는데, 이들 수치는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당시 정보에 대한 소요는 너무나 엄청나서 첨단의 통신 및 컴퓨터 장비를 통해서도 이들 요구사항을 제대로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이같은 현상은 특히 적 정보에서 뚜렷이 나타났는데, 패튼 장군의 말을 빌면 p403 “달걀과 마찬가지로 적에 관한 정보는 신선할수록 좋았다.“ 월남전 당시 미군은 부대 선두에서 차를 몰고 시찰하던 정찰병이 직접 확인한 사실에서부터, 농부를 심문해 얻은 결과, 그리고 미공군이 운영하던 첨단의 시각장비를 이용해 수집한 결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이들 수단 중 일부는 대대와 중대 단위에서도 활용하였지만, 그 운영이 복잡하거나, 운영비용이 고가인 경우에는 고위급 사령부에 또는 육해공군 각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정수단을 주앙에서 관리하는 정도가 높을수록 적시에 정보를 수집 및 처리해 관련부대에 신속히 전파하기 위한 통신수단이 절실히 요구된다.. 월남전에서처럼 상황이 매우 어려운 경우, 그리고베트콩과 같이 신출귀몰한 모습을 q였던 적에 대항해 싸우는 경우에는 관련 정보를 적시에 전송 할 수 없다면 사단에서 나온 정보조차도 거의 의미가 없게된다.(J.A.Tolson, Vietnam Studies:Airmobility(Washington,D.C.1973)pp128,200)
월남전 당시 통신체계를 이용해 정보에 대한 수요를 적시에 충족시킬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정보에 대한 분류를 너무나 높게 책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944-45년도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 상주하고 있던 미 육군의 제1통신사령부에서 처리하는 정보중 최상급으로 분류된 것은 대략 1/3정도였다.(FUSA after Action Report, 23.2-9.5.1945, annex 8) 그러나 월남전 당시에는 ‘초특급 도는 즉시’로 분류된 정보의 비율이 50%이상이 되면서 전송과정에서 엄청날 정도의 병목현상이 유발되었다. 그결과 최하급으로 분류된 메시지의 경우는 정시에 도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인식이 군인들 간에 팽배하였다. 따라서 합참의장은 함참이 보내는 메시지는 항상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초초특급’ 이란 등급을 매겼다.
p404 ‘최우선이라고 분류된 메시지의 야이 폭증햇던 것이 ‘정보병리’현상을 보여준 단명이라면, 보내고자 하는 정보를 ‘최상급비밀’로 분류한 경우가 크게 증가한 당시의 현상은 ‘정보병리’ 현상의 또다른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정보병리현상이란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특정조직이 자신의 주변 및 기능에 대해 분명하고도 시의 적절한 형태의 형상을 받아 볼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H.L.Wilensky, Organizational Inteligence: Knowledge and Police in Government and Industr(New York 1967)Chap.3) 월남전에서는 특급비밀로 분류되어서 전송을 위한 별도의 시설이 필요한 명령 및 보고서가 엄청날 정도로 많았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처럼 비밀 등급을 크게 높여 책정했던 이유중 하나는 고질적으로 미군이 양민과 베트콩을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월남에 파병된 미군을 매우 자주 순환시킴으로써 병사들 뿐아니라 지휘관들도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신뢰할 수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비밀등급을 높여 책정함은 ‘정보병리’의 증상일 뿐 아니라 ‘정보병리’를 유발하는 요인이기도 하였다.(비밀등급이 높은 통신이 폭주하면서 보안에 취약한 무전기를 야전에서 빈번히 사용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정보병리’ 현상을 타개할 목적에서 일선부대가 벌인 본능적인 자구책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p405정보병리현상을 보여주는 또다른 단면은 개개 차원의 부대에서 사용하는 ‘전용통신망’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사단본부의 경우는 35회선 이상의 전용통신망을 운영하고 있었다.. 특정부서 및 사람들만이 전용통신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전용망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이들 통신망은 여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었다..전용선을 통해 유통되는 통신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체 통신망에서 전용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날수록 여타 통신망에서 유통되는 통신량은 크게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말해 통신망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정보유통 과정에서 체증현상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보병리 현상이 유발됨에 따라 지휘 과정이 크게 지연되었는데, 이는 월나전 당시 작전을 계획.준비 및 집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날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결과로 인해 대략 2개 사단의 규모가 참여했던 196년도 가을의 ‘Ceder Falls’ 및 ’Junktion City’ 작전에서는 의사를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과정에서 대략 4개월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 라오스를 침공해 호지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의 경우는 개념 발전에만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다.(w.scott Thompson and D.D. Frizzel, The Lessons of Vietnam (New York 1977)p179-180) 또한 특정기지에서 케산을 수복하기 위한 작전에 2개월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Tolson, Airmobility, p165-179) 1970년도 당시 미군은 손테이에 위치해 있던 포로수용소를 공격하였지만, 그곳은 이미 철수하고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이는 작전 계획과정에서 시간의 지연으로 인해 작전이 실패로 끝난 대표적인 경우이다./
p407 미군의 조직이 복잡했다는 점 그리고 현대 통신의 특징으로 인해 이들 두가지 (계획과 집행)측면에서 미군보다 결코 뛰어나지 않은 적보다도 의사결정주기가 훨씬 더 길어지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오늘날의 전쟁에서 이 같은 정도의 준비기간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몇 몇 반대되는 사례를 들어보자. 1941년도 당시 독일은 2개사단을 동원(공수특전단과 항공 및 수륙양용 팀이 참여)해 크레타 섬을 공격하였는데, 당시의 작전은 계획에서 집행까지 3주도 채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항공기가 엔테베공항으로 납치된 1976년도 이스라엘은 사건 발생 후 1주일만에 구출작전을 감행했다.(엔테베구출작전을 실제 기획한 분은 당시의 총참모장인 Gur 장군이었다.:Y.Rabin, Memoris(Tel aviv, 1977), Vol.2,p 525-526)
p409 군사전략의 경우 또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다. 클라우제비치가 언급한 바와 같이 18세기 이전에는 전략에 관한 작품중에서 그의 저서인 ‘전쟁론’과 같은 정도의 수준 높은 것은 없었다. 전략차원의 교리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인류 최초의 대상은 포위전(包圍戰:Siege Warfare)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전략을 이해하려면 기하학에 친숙해야만 했다. 즉 전략에 관한 서적이 유클리드의 기하학논문과 유사하였다. 그후 내선(Internal Lines), 외선(External Lines), 수적우위, 정신력 그리고 포위기동(Outflanking Movement)이란 개념이 출현하였는데, 이들 개념이 등장할 당시 이들 개개는 전쟁 승리의 관건으로 인식되고 있 1914년도에서 시작해 1918년도에 종료된 제 1차대전에서 포위전이 일대 실패로 끝나게 되자 간접접근(Indirect Approach)이란 개념이 부상하였는데, 이것 또한 역사적 사실을 p410 근거로 하여 개념화되었다. 그 후 인적요소와 기술적 요소간에 엎치락 뒤치락 하며 갈등을 보이다가 오늘날에는 전쟁이란 전쟁수행도구의 부산물이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경향도 없지 않게 되었다.(전쟁을 이같이 이해하고자 한 최초의 경우는 J.F.C.Fuller, Armament and History(New york 1945)이다) 월남전 당시 미국방은 통계학의 관점에서 전쟁을 이해,계획 및 집행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미 주목한 바처럼 군사력의 구조 및 예산에 관한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체계분석방법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여타분야에서도 수량화를 선호하게 되었다. 당시의 의사결정권자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맥나마라국방장관과 웨스트 몰랜드장군은 한때 하버드 대학의 경영학과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이점에서 이들은 통계학을 맹목적으로 선호하였을 뿐아니라 자신들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주위에 포진시켰던 듯 생각된다…월남전 당시 통계학을 선호하던 이면에는 읽어서 그 내용을 파악하기보다는 단순히 그 수를 셀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메세지가 군에 유통되었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없지 않다. 월남전 당시 통게학을 선호하게 된 일면에는 지휘체계에 의한 요인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선이 불분명한 게릴라전 양상을 보였던 당시의 전쟁은 통계학적 바업을 이용하지 않고는 그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통계학처럼 간접적인 형태의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들면 ‘HAMLET’평가체계(Hamlet Evalution System)’를 이용해 표시한 월맹 치하롭터 수복된 지역주민의 비율, 교통이 가능한 도로 또는 수로의 길이, 그리고 시장에서 유통되는 쌀의 규모에 근거해 국가의 경제활동 정도를 측정함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적의 사상자 숫자를 파악해 이들의 활동 정도를 측정하였으며(월남전 당시 언론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MACV의 보도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MACV이 베트콩 전사자의 수를 계산한 것은 이같은 불신을 해소할 목적에서였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MACV에 대한 신뢰는 증진되지 않았으며, 다양한 형태의 비난과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Kinnard, The War Managers,p68-75), 적을 죽인 비율에 근거해 아군의 실적을 평가하였다. 이들 수치를 수천가지의 방법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컴퓨터가 적격이었다… 통계분석을 위한 자료가 정확한 경우에도 지역 상황을 완벽히 파악함에 따른 이점을 통계적 방법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인데, 월남에 주둔해 있던 미군은 이들 상황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1968년도까지만 해도 미국의 대학에는 월남에 정통한 학자가 30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이들 중에서 월남언어에 정통해 있는 사람은 12명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상황인식의 부재로 인해 정치 또는 군사적 성격의 문제를 기술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예를들면 적과의 교전횟수가 줄어든 것을 보고 적이 격파되었다고 p412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측이 제대로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사건을 아군이 주도한 경우와 적군이 주도한 경우로 분류)도 효과가 없었다. 그 이유는 적이 주도한 사건이 감소한 경우 이를 그가 너무힘이 없어서 공격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막강해 공격이 필요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통계적 방법을 이용해 분석해야 할 대상이 형체는 조직의 상층부에서만이 비교적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조직의 하층부에서는 수치 또는 그림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때문에 이 같은 분석방법에 의존함으로서 권력의 집중화가 조장되었으며, 권력의 중앙집중화로 인해 ’정보병리‘란 현상이 유발되었다. 통게학의 특성으로 인해 그 처리과정에서 이들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희석되고, 최소의 공통분모만이 남게 되었다. 통계학이란 인간이 알고 있는 정보중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다…특정지역에서 발생한 특정 사건과 이들 그림 또는 수치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는 설명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근거해 사이공의 지원사령부 또는 워싱턴에 위치해 있던 체계분석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도표를 생성하였을 것이다. 예를들면 1968년과 1972년에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는 점, 일년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전반기에 일어난다는 점,.. 연도별 대규모 및 소규모 전투의 횟수 그리고 테러. 사보타지. 흑색선전등의 정도, 베트콩의 전략을 분석해 보았더니 지속적으로 소규모 전투를 진행하다가 간간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 개개 지역에서 평정된 지역의 비율정도, 기간별 전투폭격기의 활동정도 등이 바로 그것이다.(이들 모든 사례는 Thayer, How to Analyze의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체계분석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결과는 월남전과 같은 소모전 형태의 전쟁에서는 미군이 승리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병력을 추가파견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일 것이라고 체계분석실의 활동을 옹호하던 어떤 분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병력을 파견할 수도 그리고 해서도 아니 된다는 점을 맥나마라장관은 체계분석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월남전 당시 체계분석실의 활동이 지휘체계에 끼친 효과는 무엇인가?..예를들면 전사자의 숫자 파악은 부대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이같은 형태의 데이터를 보다 많이 보내라는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리다 보니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부대원의 입장에서는 보고 내용의 진실성보다는 보고 건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결과는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수집한 데이터의 정확성과 타당성에 의문이 제기됨에 따라 군의 보고체계는 나름의 가지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또다른 형태의 정보수집 수단을 통해 이를 보완 또는 대체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p414 헬기를 통한 지휘
월남전을 지휘하는 과정에서 헬기가 수행한 독특한 역할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헬기는 미국국민의 성향인 조급성과 호전성을 크게 확장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 분석가는 글로 표현하였는데(R.Thompson, No Exit from Vietnam (London1969)p136) 아마도 이는 적합한 발언이긴 하지만 문제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을 것이다. 월남전 당시 군의 지휘과정에서 헬기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헬기란 신장비가 풍기는 우아한 인상과 이 같은 수단을 곁에 놓고 항상 호출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비행시간을 늘려서 항공메달을 수여받고 궁극적으로는 승진할 수도 있다는 점, 헬기를 타고 한 지역에서 여타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다는 점, 전장을 전반적으로 개관할 수 있다는 점이 지휘과정에서 헬기가 널리 애용되었던 이유들이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의 육군에서 지휘수단으로 헬기를 애용하는 이유는 헬기를 타고서 전장 전반을 개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남전의 성격으로 인해 당시의 전쟁에서는 부대규모에 상관없이 일정 순간에 휘하의 소규모 부대만이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지휘관이 보다 다수의 부하를 통제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결과 권한의 분산화와 계층구조의 단순화란 현상이 유발되었어야만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 초래되었다. 예를들면, 지상전투를 수행하고 있던 중대장 중에서 운이 나쁜 경우는 헬기를 타고 있던 대대장이 공중에서 전투상황을 직접 관찰하고, 대대장의 활동은 이보다 1,000여 피트 높은 상공에서 연대장이, 연대장의 활동은 보다 높은 상공에서 사단장이, 그리고 사단장의 활동은 보다 높은 상공에서 군단장이 감독하는 형국이 벌어졌다. 이들 지휘관들은 자신과 통화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맞추어 상황을 설명하라고 중대장에게 요구하였는데, 중대장의 입장에서 보면 다수의 정보를 교환해야 했다는 점으로 인해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중간 및 고급 지휘관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당시에는 통신장비를 통해서 정시에 제대로 보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웨스트몰랜드장군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은 특이하고도 강력한 형태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을 활용해야만 하였는데, 장군은 그 일환으로 휘하 제대를 불시에 방문하곤 하였다. 문제의 망원경의 성능이 너무나 뛰어나다는 점으로 인해 이들 망원경을 이용해 관찰해야 할 대상의 활동을 무력화시키는 경우도 없지 않았는데,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p416 방향성 없는 망원경-언론
지휘의 관점에서 보면 언론매체 특히 텔레비전이 월남전에서 적지 않은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이는 군의 정식보고체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의사결정권자 뿐 아니라 사이공에 있던 지원사령부의 요원들 또한 언론의 보도 내용을 참조하곤 하였는데, 그 이유는 군의 정보 지단이 간과하고 있는 사항을 언론매체가 다룰 수있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언론인뿐만 아니라 지휘관도 현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상황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들은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곳을 찾아서 헬기를 타고 분주히 돌아다녔으며, 그 과정에서 헬기에 함께 동승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휘관과 달리 언론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이란 통계자료에 근거할 필요없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파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군의 경우는 수집된 정보를 상부로 보고하는 과정에서 개개 중간사령부가 나름의 방식에 근거해 그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하는 반면, 언론인에 의한 정보는 이 같은 단계를 밟지 않아도 되었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다수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상황을 신속히 보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들에 의한 내용은 다량의 자료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경우와는 달리 상황을 보다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야전 또는 전쟁을 거의 이해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 운영하고 있을 뿐아니라 취재과정에서 어느 누구로부터도 감독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들 보도는 ‘방향성 없는 망원경’이 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이같은 강점이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방향성 없는 망원경’으로서 언론매체가 가장 지대하게 영향을 끼친 사례는 1968년 Tet 공세였다. 월남 주둔 미군기동대대의 85%는 언론인의 발길이 전혀 닫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들 지역의 넓이는 월남 국토의 90% 해당하였다.. 이같은 점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람들은 월남전이 사이공 후에 그리고 케산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고급 지휘관의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언론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예를들면 케산의 미 해병대기지에 대한 포위 작전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웨스트몰랜드 장군은 자신의 상황실에 상주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케산이 갖는 상징성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케산기지가 함락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서면 제출하라고 존슨대통령이 합참의장에게 요구할 정도였다. 이들은 백악관 지하에 케산기지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는 나름의 방안을 강구할 목적에서 심사숙고했다. 월맹군 장군인 지압이 케산기지의 전복을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월맹군이 케산기지를 포위하고 있다는 점에 언론p418이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Tet 공세가 등한시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획책한 것이 월맹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월남전에서는 헬기를 이용한 지휘가 빈번하였다. 이것이 넘나 강력한 형태의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 되다보니 관찰 대상의 운영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야전용 무선통선 장비는 보안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고도 효율적이라는 점으로 인해 통신수단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처음부터 군의 정보채널에 문제가 없었다면 이들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월남전에 배치된 미군은 역사상 가장 복잡한 형태의 조직이었다. 당시는 군의 조직이 고위차원에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모두가 책임지고 있다고도, 그리고 책임질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도 말할 수 잇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정규전에 대비한 지휘구조를 이용해 게릴라전이라는 비정규전을 수행해야 했다는 점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군요원과 부대가 고도로 전문화되고,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조의 지휘계통을 고수하게 됨에 따라 지휘의 관점에서 옥상옥의 현상이 발생하였는데, 이들간을 조정하려면 엄청날 정도의 정보가 유통되어야만 하였다.(지휘계통의 측면에서 또 다른 방안이 S.L.Canby, B.Jenkins, and R.B.Rainy,”Alternative Strategy and Force Structure in Vietnam”, RAND Paper D 19073ARPA(Santa Monica,cal,1969),appendexA, p29-37에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대대 및 연대의 ‘통제의 폭(Span of Control)을 다섯으로 늘리고, 사단은 없애는 방식으로 보다 유연한 지휘구조를 구성해 정보의 유통을 줄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권력의 중앙집중화, 자원을 한군데 모아놓고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관행, 그리고 원거리에서 전쟁을 통제하는 행위(이는 병참의 경우, 그리고 항공전의 경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로 인해 정보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였다. 당시 미군이 월남에 설치한 통신망은 고가의 첨단체계로서 광범위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아브람스장군이 지적했듯 ‘밑 빠진 독’과 거의 다름없는 당시의 정보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p420 월남전에서는 수없이 많은 단위 부품들을 상호 연결하고, 우수한 수준의 관리자가 구상하는 바에 따라 이들 개개 요소가 적절히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비용대 편익’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는데, 결과를 보면 이 같은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예를들면 몇 명의 적을 살상할 목적에서 수십만톤의 포탄을 투하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몇몇 계산에 따르면 한명을 죽이기 위해 400,000$ 그리고 75발의 폭탄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Life magazine,27.1.1967. 물론 이 경우에서조차 사상자중 다수는 적이 아니었으며, 이들을 죽임에 따른 효과가 부정적인 경우도 없지 않았다.) 번개처럼 사라지는 상대방 적을 마 치 수술하듯이 선택적으로 정확히 공격함으로서 양민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는데, 당시의 전쟁은 그렇지가 못했다.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적이 숨어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격할 수가 없었다…정확성과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상급부대에서는 보다 많은 자료를 전송하라고 하급부대에 지시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부정확성과 불확실성만 높아지게 되었다. 즉 미군은 확신을 갖고 업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고, 결과의 측정을 통해 자신들이 확신하는 것만 수행하였다. p421 의심할 여지없이 이들 혼란중 일부는 근대전의 본질과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월남전의 본질을 보다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모면 할 수 있었던 부분도 없지 않았다.(웨스트몰랜드를 아브람스로 대체하고, 대규모의 수색 및 격파작전을 중단시킴에 따라 적 사살에 소요되는 폭탄의 규모는 크게 줄었다 D.S.Blaufarb, The Counterinsurgency Era:U.S.Doctrine and Performance(New York 1977),p254) 오늘날의 전쟁에서 첨단의 통신 및 정보처리 수단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만으로는 올바른 지휘체계를 구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이들 수단을 이해하고 올바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지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휘에 관한 또 다른 문제가 유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월남전 당시 군의 지휘분야에 미군이 투자한 자산의 규모는 엄청났다. 그러나 방대한 규모의 지휘도구가 구비됨에 따라서 이들의 유지가 쉽지 않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휘체계는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당시의 지휘체계를 설계 및 운영했던 사람들은 어느시대 어느 국가의 국방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사람들이었다…당시에는 여러 형태의 지휘체계가 등장하였는데, 최 말단 부대에서도 그 효과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 체계의 기술 능력은 매우 우수하였다. 그러나 이들 능력으로 인해 지휘과정에 도움이 된 만큼이나 지휘과정을 왜곡시킨 측면도 없지 않았다. 월남전 당시의 지휘를 연구하다보면 인간의 이성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p425 결론: 지휘에 대한 단상
통신기술, 데이터처리기술,조직,절차, 방법중 어느것 하나도 성공적인 또는 적합한 형태의 지휘체계를 보장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사를 보면 전혀 다른 형태의 지휘체계를 이용해 훌륭한 결과를 얻은 경우가 없지 않았다. 반면에 특정 시간 및 장소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지휘체계가 기술을 포함한 여타 상황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상황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p426 보다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정적인 형태의 방어에 적합한 지휘체계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신속히 기동해 들어가는 공세적 형태의 전쟁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징집된 육군에 적합한 지휘원칙을 훈련,규율 그리고 장교, 병 및 하사관간의 관계란 측면에서 이들과는 전혀 다른 정규군에 적용한다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대 간접침략전 상황에서는 군사적 요인보다는 심리 및 정치적 요인이 보다 중요한 요소다. 재래식전쟁에 대비한 지휘체계를 이들 전쟁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다수의 부분을 바꾸어야 하며, 전혀 반대방식으로 지휘의 문제를 접근해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군수지원을 염두에 둔 지휘체계는 작전 수행을 위한 지휘체계와는 다른 것이며,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합한 지휘체계가 전쟁 수행과정에서는 역기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핵무기에 의한 대재앙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에는 필요시 성공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지휘체계도 중요하지만, 지휘체계를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은 보다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지휘개념
이책에서 사례로 제시한 지휘체계들은 조직, 절차, 그리고 기술수단이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지휘란 지휘체계내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가장 단편적이고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곤 일반적인 경우에서 지휘절차가 실제 운영되는 모습을 파악하려면 지휘체계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정보의 규모, 유통방향, 그리고 형태에 관한 수치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계적 분석이 가능할 정도로 이같은 자료가 가용한 지휘체계사례를 필자는 아직 찾지 못했다. 더욱이 이들 자료가 가용한 경우에도 지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는 부분중 그 본질의 파악이 불가능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예를들면, 조직내에서 비공식적이고도 암묵적으로 주고받는 대화, 지휘체계와 관련된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분 할 수 있는 능력의 정도,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지휘관의 두뇌 속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 보고서나 명령을 내릴때의 음성의 강도, 이들 명령문을 전달할 당시의 얼굴 표정등은 기록이 불가능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잇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체계’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기술환경에는 적합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체계는 기술적 속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더욱이 이들 사람은 체계와 동일하지도 않고, 체계의 산물도 아니다. 그결과 동일한 조직,절차,기술을 이용해 운영하는 경우에도 이들을 활용하는 사람의 구성형태에 따라서 지휘의 성격이 전혀 달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마지막으로 모든요소들이 긴밀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지휘체계’란 표현에는 잘못도 없지 않다… 지휘관이라고 할지라도 작전을 계획하고 상황을 전달하는 것만은 아니며, 아무리 계급이 낮은 사병이라도 지시에 복종하는 것만은 아니다. p428 앞의 관점에서 볼 때 지휘의 성격과 기능을 일반화 하는 행위는 무모한 짓이다. 일반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먼저 연구범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재래전 형태의 지상전…야전군이다.
p429확실성의 추구
플라튼 시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휘의 역사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과정이었다… 2300여년전 그리스의 지휘관이자 역사가인 폴리비우스(Polybius)는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전쟁에서 목격되는 여타의 의도적인 활동은 특정 시간에 시작되며, 특정 기간동안 그리고 특정지역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다. 이들 활동을 수행하려면 보안, 특정신호, 함께 행동해야할 사람 그리고 적절한 형태의 수단이 요구된다. 이들 개개의 요소를 자신의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잇는 지휘관은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전체구도에 먹구름이 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일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전체 구도가 와해 될 수 있는 반면, 모든 세부사항을 완벽히 준비한 경우에도 승리를 보장 할 수는 없는데, 이는 자연의 섭리다(The Historys ix 12.7-10)”.
p430 확실성이란 크게 두가지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의 가용정도와 수행하고자 하는 업무의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따라서 지휘의 역사는 정보의 수요와 지휘체계의 개선을 통해 이들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간의 경쟁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경쟁은 향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이는 모든 군조직에서 그리고 시간과 차원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현상이다…오늘날 자동화된 전장체계의 출현으로 인해 “존재하는 것은 모두 파악가능하며, 파악된 것은 공격이 가능하다”는 등 그럴듯한 말과 글이 분분하고 있지만 이같은 경쟁은 결코 종료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휘하에 휘황찬란한 수단을 보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군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또는 1000년전의 우리 선조와 비교해 볼 때 지휘과정에 필요한 정보를 보다 훌륭히 다루고 있다는 징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전쟁에서 수집된 정보의 많은 부분은 상호 모순적이며, 이보다 많은 부분은 거짓된 것이며, 이들보다 훨씬 많은 부분은 불확실한 것이라는 클라우제비치의 명언은 그가 생존할 당시인 160여년 전의 매우 단순한 환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고 있다…오늘날의 지휘체계를 갖고도 우리의 선조들과 비교해 볼 때 보다 큰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이유는 전쟁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 클라우제비치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전쟁에는 인간 내면의 가장 강력한 감성, 예를들면 두려움, 분노, 보복심, 증오 등이 내재해 있다.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다양한 p432방식으로 정보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더라도, 확실성에 대한 추구는 대부분의 경우 합리적인 방법으로 추진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J.D.Steinbrunner, The Cybernetic Theoyy of Decision:New Dimensions of Political Analsis(Princeton,N.J.,1974)p327-342) 둘째, 전쟁이란 상호 대립하는 의지간의 대결이다. 한편에만 의지가 있는 경우는 전쟁이 아니고 대학살이 존재할 뿐이다. 전쟁에 임하는 양측은 보유수단의 성격 그리고 작전환경에 의해 어느정도 제약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발휘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이들 요소에 의해 전적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대립하고 있는 양측이 자유의사에 근거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이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이들간의 투쟁은 거의 예측을 불허할 정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애초부터 확실성이란 달성이 불가능한 형태의 것이다.
이들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는 확실성을 추구하는 과정에는 해결이 거의 불가능한 논리적 형태의 장애물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인간 및 전쟁의 속성이 바뀌지 않는 한 이것의 타당성에는 전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확실성을 보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관련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가용한 정보가 많을수록 이들 정보의 처리에 소요되는 시간은 늘어나게 되며, 관련된 정보와 관련이 없는 정보간.. 구분이 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다.(몇몇 논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M.I.Handel, “Inteligence and Deception” Journal of Strategic Studies,5.1982 p164) 이같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나폴레옹의 말처럼 ‘놀라울 정도의 이해력’을 보유하는 것인데, 이는 훈련과 연습에 기반을 두지만 궁극적으로는 합리적인 계산보다 직관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형태의 것이다. p433 확실성을 보장하는 과정에는 실체 및 논리적 측면에서 다수의 난관이 놓여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인해 확실성을 보장하려면 엄청날 정도의 노력과 비용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홍수처럼 밀려오는 정보를 다루기 위해 참모위에 참모, 절차위에 절차, 그리고 장비위에 장비를 두어야만 하였다. 참모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들 개개 참모간의 그리고 전반적 차원에서 참모와 군간의 노력을 조정한다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겨났다. 잘 정의된 절차 또는 공식언어의 출현과 함께 신뢰성과 정교성의 측면에서 적지 않은 개선이 있었지만,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필수적 요소인 비공식 형태의 대화, 여분의 말, 그리고 융통성이 크게 줄어들면서 이들에 의한 효과는 반감되었다. 군에 장비가 추가되는 경우 이들이 자동운용 될 수 있도록 하려면 절차를 보다 엄격히 정의하고, 연구,개발,운영 및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을 크게 늘려야만 하였다. 이같은 과정은 비교적 서서히 진행되다가1870년대를 전후해 가속도가 붙게 되었는데, 특히 1945년도 이후에는 엄청날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1945년 이후 40us동안 전형적인 서구 육군의 경우 군전체에서 지휘관련 인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5배정도 증가하였다.(1939-1945년도 당시 독일군은 전체병력에서 3%규모의 참모를 갖고도 역사상 어느 군대 못지 않을 정도로 훌륭히 전투를 수행하였다. 1974년도 당시 서독군 참모의 비율은 14%로 급증하였다.) 그 기간동안 군전체 예산에서 지휘체계p434이 획득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은 보다 가파른 속도로 늘어났다. 지휘체계에 소요되는 비용이 이처럼 빠른속도로 1세대만에 더 늘어나게 된다면 군 예산 중에서 여타분야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은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다시말해 확실성이란 추구해야할 대상이 모두 사라진 뒤(지휘체계에 소요되는 비용이 너무나 방대하다 보니 여타의 것은 전혀 구입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나 추구할 수잇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수기신호에서 관측용기구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근대시대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소하거나 그 정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같은 희망은 매번 좌절되었다.
지휘의 본질
전략에 관한 클라우제비치의 명언을 이용하면,가장 훌륭한 형태의 지휘체계는 군사적 천재로 하여금 먼저 전반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그후 결정적인 지점에서 지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론적으로는 매우 훌륭하지만 실제로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그 이유는 군의 제도를 통해서 군사적 천재를 지속적으로 배출해낼 수 있는지가 의문이며, 또한 결정적인 지점의 규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군의 지휘구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불확실성이란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것이며, 실제로도 그러하다.(조직구조를 불확실성이 지배하게 된다는 개념을 조직에 관한 우연성이론(Contingency Thory)라고 부른다. J.Galbraith,Designing Complex Organzations(Reading,Mass.,1973)chaps 1and2)
다시말해 불확실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지휘구조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특정상황에서 기술보다는 인적요소의 비중이 커질수록, 그리고 상황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아측 행위보다는 적에 의한 행위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불확실성의 정도는 보다더 커지게 마련이다… 기능중심(병참)의 지휘체계가 결과중심(작전용)의 지휘체계보다 중앙집중화 되어 있으며, 기계화되어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지휘체계의 구조와 처리방식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불확실성의 정도를 고려해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업무 성격에 못지 않게 조직의 구조가 중요하다. 임의의 조직을 여러 다양한 형태로 나누어 편성할수록, 지휘제대의 수가 많을수록, 의사결정의 ‘문지방’이 높을수록 그리고 구성요원의 전문성이 높을수록 보다 많은 규모의 정보가 조직내에서 유통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확실성의 정도는 수행해야할 업무의 성격에 따라서 전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조직의 구조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업무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 조직에서 취할 수 있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정보처리 능력을 개선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업무 추진이 가능하도록 조직을 재 설계하는 것이다…이들 두 방법중 어느것도 취하지 않는 경우는 조직의 운영 성능이 자동 하락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조직의 정보처리 능력을 늘리는 방법과 조직의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방법은 역사를 통한 다수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조직의 기능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방법이다. 향후의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임무를 분할하고, 개개부분을 준 독립기구로 하여금 수행토록 하는 것이 보다 우수한 형태의 방안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 번째 방안이 우수한 형태의 대안(기원전 197년도 당시 이름을 알 수 없는 로마군 사령관은 10개의 보병중대-60명에서 120명으로 편성-를 이끌고 필립왕의 밀집대형을 후미에서 공격해 마케도니아 왕국을 붕괴시킨바 있다.) 이라고 입증된 상태에서, 이들이 지휘체계의 조직과 그 운영방식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1. 가능한 한 하급제대에서 의사가 결정될 수 있도록, 그리고 군구조의 최하위 차원에서 독자적 판단에 근거해 행동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2. 이처럼 하급제대에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어느정도의 하급제대에 독자적 능력이 잇는 단위 군을 편성할 필요가 있다.
3.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정규적으로 보고하고 정보를 전송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하다.
4.휘하부대에서 정규적으로 보고되는 내용을 보완할 수 있도록 본부차원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정보를 적극수집할 필요가 있다.
5.조직내에서 정규뿐만이 아니라 비정규형식의 통신망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육군의 경우는 휘하부대로 하여금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한 지휘관, 그리고 휘하지휘관의 ‘운신의 폭’을 크게 허락했던 지휘관들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로마시대의 백부장과 호민관,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 몵케 당시의 육군사령관, 루덴도루프 휘하의 ‘폭풍분견대’, 그리고 1967년 당시 가비쉬휘하의 사단장들은 당시의 기술상황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였다. 샤론호스트와 몰트케의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군들이‘ 임무형 전술이라고 지칭한 그러한 지휘체계에서 목격되는 주요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성이란 정보 뿐 아니라 시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간을 단축시킨다는 차원에서 일부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행동할 의향이 있다는 점, 고급 사령부가 최대가 아니고 최소 목표를 가정한다는 점, 현지 상황을 고려해 목표달성을 위한 나름의 방안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를 하급지휘관들에게 허락함으로서 정보의 유통을 줄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휘하부하의 행동에 지나칠 정도로 간섭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쟁에 내재해 있는 불확실성이란 요소로 인해 전쟁에는 어느 정도의 혼란과 낭비가 필수적이라는 점, 이같은 혼란은 의도하는 목표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면에서는 소기의 결과를 달성하려면 혼란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나름의 재량권 아래서 독창적으로 행동할 수있으려면, 적절히 훈련을 받아야하며, 올바른 형태의 조직수단이 구비되어야 할 것이다…이들은 응집력(이는 부하와 지휘관을 선별적으로 선택해 부대를 편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비교적 오랜 기간 같이 생활하도록 함에 따른 결과다.)과 고도의 자립능력을 유지하고 있던 조직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경우는 단위부대 내에서는 물론이고 부대와 부대간 그리고 부대와 상급사령부간의 교신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이 같은 조직 특성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도 특정범위내에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더욱이..전반적 차원에서의 조정을 위해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 결과 계획과정을 크게 단순화시킬 수 있었다. ‘비용대 편익’을 극대화한다는 차원에서 자원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 자원을 휘하 단위부대에 분배해주게 되면 계획.조정. 및 교신이 거의 필요 없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것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일 것이다. 교신체계가 와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에 따른 불확실성은 어느 전쟁에서나 목격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점 때문에 자원을 분배해 주는 것이 ‘비용 대 편익’을 극대화시킨다는 차원에서 보다 좋은 방법일 것이다. 상급사령부가 하급사령부를 지속적으로 통제 할 수 있으려면..정보전송을 위한 정규체계가 필수적인데..상황보고, 점검표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이들이 도움보다는 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몇 몇 유의해야 할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1. 보고 내용을 평가할 때는 그 결과에 못지 않게 내용의 진실성에도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군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상호 신뢰란 요소가 조속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2. 휘하본부에게 보고를 요구할 때는 그 횟수와 정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상급본부의 요구와 관련된 사항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편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관심 사항도 아닌 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보고하라고 요구하게 되면 이들은 보고 내용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곧 하게 될 것이다. 태만이나 무관심으로 인해 상급사령부가 이들 보고내용을 활용하지 않고, 이미 보낸바 있는 자료를 재차 독촉하는 경우 또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3. 하위계층에서 정규적으로 올라오는 정보에 무관하게 나름의 독자적 수단을 이용해 상층부에서 정보를 적극 수집함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형태의 정보를 본부에서 수집하게 되면 본부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휘하본부를 위해서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절약 할 수 있을 것이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을 사용하게 되면 정보의 적시성과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권한이 분권화 된 조직의 경우는 협상에 의거해 의사를 결정하는 준 독립적 형태의 다수의 부대로 전락할 소지가 다분한데, 이 같은 경향에 제동을 걸려면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 필수적이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 나름의 기능을 적절히 수행할 수있으려면 이것이 휘하 지휘관에 위압적인 형태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이들이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할것이다.휘하 부하의 독창성을 저해하거나 이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또는 형식에 그치는 형태가 되지 않도록 ‘방향성 잇는 망원경’을 설계할 때는 이것에 참여할 사람과 기술수단의 선택, 이것을 어떠한 방식으로어느정도 자주 활용할 것인기의 여부, 그리고 이것과 이것을 이용해 관찰하고자 하는 대상과의 조직 측면에서의 관계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단일의 망원경으로는 이들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조직의 다른 부분을 겨냥한 또 다른 형태의 망원경을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같은 망원경을 활용한 사람에 나폴레옹, 몰트케, 페튼 그리고 가비쉬가 있는데 여기에 웰링턴과 몽고메리의 경우를 추가할수 있을 것이다.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 부재한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솜므 전역에서 헤이그휘하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잘 알수있을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망원경’을 활용한 사례는 월남전 당시의 웨스트몰랜드장군의 경우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엔진이 지나치게 과열되어 달라붙는것과 같은 현상이 군 조직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공식적인 교신체계를 비공식적인 교신수단으로 보완해야 할것이다…비공식적인 교신체계와 비교해 볼 때 공식적인 교신체계에는 창의적인 아니디어의 전달이라는 측면, 즉 융통성 보장과 외부로부터의 간섭배제란 측면에서 나름의 문제가 없지 않다.(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창의성이란 사물을 새롭고도남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반면에 공식 대화체계에서 통상 목격되는 정교성이란 사물의 배열방법을 재현하고, 새로운 것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하므로서 달성된다고 본다.J.F.Crovitz, Calton’s Walk(New York1970)p98-102)… 군은 업무라인들 통해 유통되는 내용을 지인들간의 꾸밈없는 의견교환을 통해 보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p442 이같은 형태의 교류가 가능하려면 조직에 일정 수준의 안정성과 동질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안정성과 동질성의 정도가 일정수준을 초과하게 되면 동종 번식,퇴화 그리고 집단적 사고라는 바람직 하지 못한 현상이 초래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차원에서 통신규모를 줄이고, 통신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할 때 이는 최선의 방안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본부에서는 다수의 전자신호가 방출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이들 건물 이같은 신호를 따라서 공격해 들어오는 정밀유도무기에 매우 취약하다. 오늘날 이들 본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들 방법중 일부는 바람직 하지 않다. 개개 요원 들로 하여금 자동차를 타고 소위말해 분산된 상태에서 상호 교신하며 기동성을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청날 정도의 비용이 드는 발상일분아니라 상호간 직접접촉하지 못함에 따라 쓸데없는 일에도 수없이 많은 교신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방안이다. 본부의 주요 장교들이 단이르이 차에 근무하도록 함으로서 면전에서 교류가 가능하게 한 이스라엘군의 방안이 보다 더 바람직한 형태이다..여단규모의 이스라엘 군 전술본부는 중대규모의 미군전술본부보다 크지 않은데 전자의 경우는 눈에 뜨이지 않을 뿐아니라 전자파를 거의 방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부의 공격에 비교적 취약하지 않다.
p443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한 두가지 기본적 방안인 중앙집권화와 분권화로 되돌아가서 언급한다면, 이들 둘은 정면 대립하는 개념이기 보다는 뒤틀린 방식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는 관계라는 점이다… 상위차원에서의 확실성을 높이고자 한다면 하위 차원에서 느끼는 확실성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중앙집권화된 형태의 지휘에서는 전체측면에서의 확실성을 보장하게 되면 개개요소의 안정성이 보장될 수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분권화된 지휘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지난 2500여년간의 전쟁사가 “미래를 위한 길잡이‘ 가 될 수있다고 한다면 향후에도 분권화된 지휘는 중앙집중화된 형태의 지휘보다 우수한 형태의 것일 것이다. 달리표현하면 불확실성이란 요소를 해소시킬 수 잇을 정도의 결정적인 형태의 기술이 과거에도 없었지만 향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속에서 목격되는 지휘의 발전은 상대방과 비교할 때 기술이 우수하였기 때문이 아니고 이들 기술의 한계를 인지하고 이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방법(훈련, 교리 및 조직을 통해)을 창안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용한 기술을 이용해 할 수 있는 부분으로 행위를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이들 기술을 이용해 할 수 없는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훈련에서 추구해야할 사항일 것이다.
월남전에서의 지휘문제에 대한 분석글. 책에서 발췌한 사실들도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