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즈벨트의 대한정책 이시우 2004/06/20 118
http://mahan.wonkwang.ac.kr/nonmun/00/9515.htm
제2차 世界大戰中 美國 行政府의 對韓政策
담당교수명 : 이 주 천교수님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4년
학번 : 95305015
성명 : 김 형 근
圓 光 大 學 校
Ⅰ. 서 론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한반도의 분단문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개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로 도출된 해답은 대체로 한반도의 분단은 외재적인 요인과 내재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야기된 하나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한반도의 분단 자체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분단의 고착화는 한국인의 내부 분열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존의 연구 결과에 동의할 경우 한반도 분단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분단의 외재적인 요인과 내재적인 요인을 함께 고찰할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글의 주제의 성격상 한반도 분단의 외재적인 요인만을 그 분석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므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규명하는데에 초점을 맞추도록 할 것이다. 첫째는, 전시에서 미․영․중․소로 대표되는 연합국은 한국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시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이들 국가의 이해관계는 어떻게 표출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카이로회담을 비롯한 일련의 전시회담에서 전후 한국 문제 처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미국이 제시한 한국 문제의 해결 방안과 이를 통해 미국이 추구하려고 했던 바는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셋째는, 당시 소련이 설정한 한반도에서의 기본적인 목표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군사 전략이 한반도의 분단에 어떠한 작용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넷째는, 트루먼의 원폭 전략으로 인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존 구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는, 한반도의 분단이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나 우리 나라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과 같이 과연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만이 한반도 분단의 성격이나, 전후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전개된 미․소간의 협상에서 양측이 취한 기본 입장 및 협상 전략, 나아가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의 기본 방향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논문은 〈한국외교사Ⅱ〉와 이주천 교수님의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과 대한정책〉을 위주로 하여 작성하였다.
Ⅱ. 본 론
1. 루즈벨트 행정부의 한국 신탁통치안
한국 신탁통치안은 루즈벨트 행정부의 전후 식민지 처리에 대한 정책의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 원칙의 단순한 적용이라는 차원을 넘어 한국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고려의 결과로 인해 나타난 하나의 정책이었다.
1)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로서의 신탁통치안과 한국에 대한 인식
전시에서의 한국은 미국의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국 문제가 주축국의 여타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일반 정책 속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루즈벨트는 전후 세계의 모든 식민지와 낙후된 국가에 국제적인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를 희망했다. 루즈벨트의 이러한 구상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꿈꾸는 신윌슨주의자로서의 그의 이상과 인도주의정신, 식민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 확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 및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권을 전 인류의 기본권으로 천명한 윌슨 대통령은 반 제국주의의 기치를 내세워 영토의 합병을 타도하는 전통적인 착취적 제국주의, 군비 증강, 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전쟁 등을 반대하였다. 윌슨 행정부 하에서 해군성 차관보를 지낸 루즈벨트는 당시 윌슨의 이와 같은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였으며, 실제로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무렵 국가의 최고정책결정자로서 전시의 여러 국제문제들을 처리함에 있어 윌슨의 이상주의적 노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 루즈벨트의 이러한 태도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유럽식민주의를 착취적 제국주의의 전형이라고 신랄히 비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비난은 1943년 카사블랑카 회의 (Casablanca Conference)에 참석하러 가는 도중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영국령 감비아의 참상에 대한 충격과,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인들의 행위에 대한 분노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유럽 식민주의가 착취적 제국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인 한, 식민지 문제는 루즈벨트가 해결해야 될 중대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여기에서 그가 강구해 낸 해결 방안이 바로 신탁통치안이었다.
그런데 신탁통치안 역시 윌슨의 위임통치안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당시 윌슨은 “모든 자치 능력과 권리를 갖지만, 식민지 인민들은 장기간의 자치 수습 기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위임통치안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루즈벨트도 이점에 착안하여 신탁통치 실시 지역의 주민들을 일정 기간 훈련시켜 자치 능력을 배양토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신탁통치를 통해 식민지 인민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맛보게 하고, 그들을 열강의 착취로부터 보호하여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며, 그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정의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게 볼 때 신탁통치안은 식민지 인민들을 돕겠다는 욕구, 다시 말해서 루즈벨트의 인도주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신탁통치안을 구상하면서 미국의 이익 추구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신탁통치안이 단순히 식민지 인민들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전후 미국이 국제 경찰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전략적인 기지를 제공하고, 무역에서 더 자유로운 상품의 왕래를 촉진시키며, 신탁통치 실시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를 통제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미 국무성에서는 신탁통치의 역점이 경제적인 이익 추구에 두어져야 되며, 식민지 인민들의 자치 능력 배양은 두 번째 역점 사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신탁통안의 근저에는 미국식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루즈벨트의 신탁통치안은 그의 인도주의 정신과 미국식의 제국주의적 발상이 결합된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이중 구조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루즈벨트가 전후 식민지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신탁통치안을 선호한 또 다른 이유는 필리핀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1942년 11월 15일에 행한 연설에서 필리핀에서의 사례가 여타 식민지에 대한 모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지 인민에게는 교육을 보급하고 물질적․사회적․경제적 궁핍을 충족시킬 준비 기간과, 독립 주권 국가에 이르는 자치 훈련 기간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한국은 여타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루즈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이 적용되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42년 2월 미 국무성 극동문제담당국의 랭던(William R. Langdon)이 작성한 한국에 대한 전시 정책자료는 루즈벨트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신탁통치 실시는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는 보고서에서 “한국인의 상당수가 문맹이고 가난하며 정치적으로 미숙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한 세대 동안 한국은 강대국들에 의해 보호되고 지배를 받으며 근대 국가의 지위를 갖도록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이라고 기술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한국에 대한 국무성 관리들의 논의에서도 “한국이 해방 후 즉시 자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므로, 한국은 국제적인 원조나 후견의 형태를 거쳐야만 할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국무성 관리들이 한국에 대해 이와 같은 인식을 갖게 된 주요한 원인은 당시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벌이고 있던 한국인 집단들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 때문이었다. 1942년 4월 중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대해 당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하자고 제의하였지만, 미국 정부는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한국 독립운동 집단들 사이의 통일성 결여, 이들 집단과 본국 대중과의 불연계성, 임시정부의 승인의 아시아의 여타 식민지의 독립 운동에 미칠 영향, 임시정부의 승인으로 인한 소련의 감정 손상 방지, 나중에 더 유용하고 중요하다고 판명되는 다른 집단들을 적대시하는 결과의 초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 무렵 중국 주재 영국대사로 있던 커(A. J. K. C. Kerr)역시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 상당한 분열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또한 1943년 8월 미 해군성 분석가들이 한국 상황을 분석하면서 내린 평사 보고서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서로 음모를 꾸미는 욕구불만으로 가득찬 실업자 집단”으로 혹평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이승만과 한길수의 관계를 ‘기름과 물’로 비유해 그들의 분열상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한 국민에 대한 이미지와 그 국가에 대한 강대국의 정책 결정 사이에 연계가 있다면,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미국의 외교정책 방향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은 한국의 독립운동 집단들이 분열되어 있어 설령 한국이 독립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국가 건설을 위해 서로 협력해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따라서 자치를 위한 훈련 기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 1국 지배 방지를 위한 선택
흔히 한국의 역사는 폴란드와 벨지움의 역사처럼 지정학적 조건과의 함수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한국 문제는 동북아시아의 지도상에 나타나는 한국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원칙적으로 강대국이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일찍이 미국 오래곤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모어스 (Wayne L. Morse)는 “아시아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한국은 주요한 전략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지적하여, 아시아 대륙의 전략적 근거지로서의 한반도의 중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전략적 삼각관계의 중심에 있었으므로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사이에 경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이처럼 동북아시아에서 차지하는 한반도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1943년 11월 작성된 ‘국무성 영토 소위원회(Department of State Territorial Subcommittee)문서는 “북태평양의 안보는 미국의 관심사이며, 한국의 정치 발전은 이 지역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한국이 미국의 관심 지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때문에 루즈벨트 행정부는 한국에 대해 전통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소련이 전후에 한국을 지배할 것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장개석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미국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되자 이를 적극 환영하였다. 동시에 그는 전쟁이 끝날 것에 대비한 내부적인 개혁과 재건의 문제들을 무시한 채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의 꿈을 재생시키기 위해 미국과의 친선을 이용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장개석이 관심을 기울인 곳이 바로 한국인데, 그는 한국에 대한 이전의 영향력을 다시 확립하기 위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이 임정을 지원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시베리아에서 소련의 후원을 받고 있는 한국인 망명 집단이 새로 독립된 한국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재정적, 정신적으로 북중국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인 게릴라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한 후에 한국의 전후 발전을 통제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 망명객들을 이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되면 중국은 전후 한국에서의 유리한 위치를 상실하게 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임정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전후에 한국을 중국의 영향권 내에 두려는 장개석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실제로 아시아 대륙에 속한 소련 영토에는 약 20만 명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이들 중 약 2개 사단 규모의 한국인들이 적군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으므로, 소련이 전후 한국에 우호적인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이들을 이용할 가능성은 매우 컸다.
또한 중국으로서는 한국에 군사적인 기지를 설치하는 배타적인 권리를 소련에게 빼앗길 경우, 이것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우월한 이해관계를 인정하는 셈이고, 더 나아가 자국의 산업 중심지들과 가까운 동쪽 해안까지 소련 세력을 남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므로 이를 사전에 방지할 필요도 있었다.
반면 소련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한국은 전략적으로 소련에게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극동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가 한국의 국경으로부터 70마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한국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이와 같은 중요한 기지를 공격할 위치에 있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에게 한국은 부동항이라는 매력이 있었다. 한국은 쿠릴 열도, 일본, 쓰시마 해협의 섬들과 더불어 소련의 태평양 진입을 봉쇄하거나 보장할 수 있는 그물을 함께 형성하였으므로, 소련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게 보였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소련의 이해관계 역시 확고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물러날 때까지 러시아는 일본과 함께 한국의 자원․식량, 그리고 노동력 등을 이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소련이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전후 중국과 소련이 한국에서 경쟁을 벌일 것은 분명해졌고, 그것은 아마도 이데올로기적인 이질성 때문에 더욱 첨예화될 것으로 예측되었다. 1943년 10월 미 국무성의 극동문제 담당국장이었던 혼백(Stanley K. Hornbeck)이 국무장관이었던 헐(Cordell Hull)에게 제출한 보고서에도 전후 한국에서 중․소 간의 경쟁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언급되었다.
이처럼 예견된 상황에서 루즈벨트 행정부는 전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야기될 정치적 마찰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중국과 소련의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면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그 해결책으로 신탁통치안을 채택했다. 이렇게 볼 때 루즈벨트 행정부의 신탁통치 구상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한 한국의 지배를 가급적 억제하면서, 한국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극대화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는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3) 대일전 전략의 변경과 신탁통치안
미국의 대일전 전략과 한국의 신탁통치안과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이것이 규명될 때, 한국의 신탁통치안에 내포되어 있는 미국의 의도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미국의 대일전 전략은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전쟁초기에 미국은 중국을 기점으로 하여 대륙을 통해 일본을 공략하는 전략을 세웠다.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수립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지정학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당시 미 해군총사령관이었던 킹(Ernest J.King)제독은 “유럽 전선에서 소련은 지정학적 위치와 인력 동원이라는 경기에서 독일을 다루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고, 태평양전쟁에서는 중국이 일본에 대해 소련과 유사한 위치에 있다. 소련군과 중국군에게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정책이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하여, 대륙을 발판으로 하는 초기 전략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둘째는, 중국에 대한 루즈벨트의 편견 때문이었다. 루즈벨트는 전후 중국이 강대국으로 등장하여 일본의 패배에 따른 아시아에서의 힘의 공백을 메워 주기를 희망하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아시아는 지역구조상 독립되고 자치적인 국가들의 중심이 될 만한 국가를 필요로 하였고, 중국이 강대국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백인이 세계를 지배하였다는 비난의 소리는 물론, 아시아인이 열등하다는 서구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국 국민 역시 중국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대일전을 수행하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바람직한 전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미국이 초기의 이러한 전략을 부득이하게 변경시켜야 될 두 가지 요인이 발생했다. 첫째는, 장개석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었다. 미국이 보기에 장개석은 복잡하고 완고한 동맹자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는 일본군을 패배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군을 견제하고, 국내 패권을 확보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일본을 공략할 전초기지로서의 중국은 점차로 미국의 군사입안자들에게 비실용적인 존재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 무기의 개발이었다. 당시 미 해군은 전함 대신에 기동성이 뛰어난 항공모함을, 그리고 공군은 B-29라는 장거리 폭격기를 새로 개발하였기 때문에 굳이 중을 거점으로 한 작전을 전개하지 않아도 태평양의 섬들을 통해 일본으로의 진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43년 말 미국과 영국의 군사 참모들로 구성된 ‘연합참모부’는 초기 전략 대신, 해상과 공중 봉쇄 및 공중 폭격에 의해 일본을 공격하는 새로운 전략을 승인하였다. 이 전략은 뉴기니아 – 네델란드령 동인도제도 – 필리핀을 연결하는 축을 따라 동시에 진격하되, 일본의 위임통치 섬들을 통과해 태평양 중앙을 가로지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번째 전략은 1944년 봄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에 의해 재검토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해상과 공중 봉쇄 및 집중적인 공중 폭격이 일본의 저항력을 둔화시킬 것이지만, 일본으로부터 조속한 기간 내에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해상을 통해 일본 본토를 침입할 필요성이 새롭게 제기 되었으며, 마침내 미합동참모부는 그 해 6월 11일 일본의 산업 중심지에 침입하여 그 곳을 점령한다는 수정된 전략을 승인했다. 연합참모부 역시 같은 해 9월 ‘퀘백 회담’에서, 그리고 루즈벨트와 처칠 또한 이와 같은 수정된 전략 계획안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미국이 아시아 대륙보다는 태평양을 통해 일본을 공략한다는 전략은 확정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미군이 한국에 진주할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더욱이 미국은 대일전에의 소련 참전을 계속 원했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실현될 경우 한국은 소련군이 일본군과 교전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대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소련은 한국의 상당 부분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루즈벨트 행정부가 우려한 1국에 의한 한국 지배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미국은 한국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상실함을 의미했다.
1943년에서 1945년 초까지 중국 – 버마 – 인도 전선 사령부에 배속되었던 미국의 극동문제 전문 외교관들은 본국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을 포함한 극동에 대한 소련의 의도는 분명히 침략적”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곤 하였다. 당시 중국의 힘이 점차 쇠퇴해 가고 있었으므로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 극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리라는 것 또한 거의 확실하였다. 이러한 분석 및 전망은 전후 아시아에서의 힘의 공백을 중국과 공유하려는 루즈벨트 행정부의 극동 전략을 수정케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루즈벨트 행정부는 한국 문제에 있어 소련과의 타협점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타협점이 바로 신탁통치안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신탁통치안은 한국의 독립을 지연시켰을 것이지만, 한국에 대한 소련의 이해관계를 인정하면서 다국을 통해 소련의 팽창주의적인 충동을 저지하고 구속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4). 전시회담과 한국문제
① 신탁통치안을 둘러싼 미국과 영국의 갈등
한국에 대한 전후 처리 방안으로 신탁통치안을 채택한 루즈벨트 행정부는 이제 연합국에게 이 문제를 정식 제기하여 이들 국가의 동의를 얻어 낼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루즈벨트가 한국 신탁통치 문제를 연합국과의 회담에서 처음 거론한 것은 1943년 3월, 영국 외상 이든(Anthony Eden)이 전후 문제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의사를 타진할 목적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루즈벨트와 이든과의 회담은 3월 27일에 열렸는데, 이 때 루즈벨트는 이든에게 “인도차이나는 신탁통치 실시를,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의 반환을 한국은 중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한두 국가가 참여하는 국제 신탁통치 실시”를 각각 제안하였다. 이든은 루즈벨트의 이와 같은 제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신탁통치안이 미래 UN의 수탁국들의 서로 다른 국가 이익 때문에 실제로 가동되기 어렵고, 더욱이 그 구상이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영국의 식민지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신탁통치 문제에 있어 미국과 영국의 입장은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신탁통치안이란 결국 미국의 식민지 탈취 전략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것이 식민지에 일률적으로 적용될 경우 자국의 식민지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영국으로서는 식민지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기존 입장이란 자국의 식민지들이 전후에라도 대영제국의 틀 내에서 자치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은 바로 이와 같은 기본 입장 위에서 한국 문제를 포함한 식민지의 전후 처리 문제를 다루려고 하였다. 사실 극동에서의 영국의 주요한 이해관계의 범주가 북회귀선이 남쪽 지역이었기 때문에 한국은 영국의 관심 대상 지역이 아니었지만, 한국 역시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영국은 한국 문제의 해결방식에 대해서 만큼은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던 것이다.
반면에 전쟁 수행 과정에서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으로서는 전후에 신탁통치안을 실현시킴으로써 식민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다. 특히 루즈벨트는 반식민주의 정책을 통해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식민제국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앞으로 창설될 UN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도처의 모든 지역을 일련의 전략 기지로 만들어 이를 미국의 영향권 내에 두려고 하였다. 이러한 루즈벨트의 계획은 자연히 영국의 입장과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미국과 영국은 공동의 적을 패배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서로 연합하였지만, 자국의 국가 이익을 손상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피차간에 결코 양보할 수 없었다. 때문에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영국의 갈등은 양국간의 전시 회담에서 계속 표출되었고, 심지어 중국 – 버마 – 인도 전선과 같이 양국의 군대가 공동작전을 전개하는 곳에서도 공공연하게 나타나 작전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② 전시회담(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 모스크바군사회의, 얄타회담)
한국의 독립 문제에 연합군의 첫 공식 결정은 카이로 회담에서 내려졌다. 1943년 12월 1일 미․영․중 3대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킬 것”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유의할 구절은 바로 ‘적당한 절차를 거쳐’라는 구절이다. 원래 카이로 선언문의 초안은 홉킨스(Harry Hopkins)에 의해 작성되었는데, 그는 ‘가능한 빠른 시기에’ 한국이 독립될 것이라고 기술하였었다. 그러나 이 문구는 루즈벨트에 의해 ‘적당한 시기에’로 고쳐졌고, 처칠이 수정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최종적 형태인 ‘적당한 절차를 거처’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문구의 수정은 처칠의 경우 식민지의 즉시 독립에 반대한다는 영국의 입장을, 그리고 루즈벨트의 경우에는 전후 한국에 신탁통치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완곡한 표현으로나마 명문화시키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루즈벨트가 처칠이 수정한 최종 문구에 동의한 것은, 그러한 문구 역시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장개석은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는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부각을 원하는 그의 개인적인 욕망과, 미래의 한국 정부에 중국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그의 정치적인 계산 때문인 듯했다.
카이로 회담이 폐막되자 루즈벨트와 처칠은 이 회담에 참석하지 않은 스탈린에게 회담 결과를 알리고 이에 대한 그의 동의를 얻기 위해 테헤란으로 향했다. 3자 간의 회담에서 처칠이 스탈린에게 카이로 선언문을 읽었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하자, 스탈린은 “그 내용을 완전히 지지하며, 특히 한국이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한편 루즈벨트는 스탈린과의 공식 회담에서 한국 신탁통치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인들은 아직 독립 정부를 수립하거나 유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40년 동안 훈련 기간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으며, 스탈린도 이 제안에 동의하였다.
스탈린이 어떤 의도에서 루즈벨트의 제안에 동의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경우 한국에서의 소련의 이권은 최소한 보장되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스탈린은 극동의 인접국인 한국이 전후 소련에 적대적인 국가가 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빼앗긴 한국에서의 이권을 되찾길 원했으므로 신탁통치를 통해 이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스탈린은 한국에서의 소련의 이익 보장에 대한 루즈벨트의 묵계를 그의 신탁통치 제안에서 간파하고 이를 수락했는지도 모른다.
소련의 극동 군사 계획의 개략적인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1944년 10월 14일에서 1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3대국 군사 회담에서였다. 물론 이 회담은 처칠의 소련 방문으로 인해 성사되었으므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소련 주재 미국대사인 해리만(W.Averell Harriman)과 모스크바 주재 미 군사사절단인 딘(John O.Deane)장군이 대신 참석하였다. 10월 15일에 열린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이 패망한 후 2~3개월 이내에 일본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발언함으로써 테헤란 회담에서의 대일전 참전 시사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한국에서의 작전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논의는 10울 17일 미․소 간의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헤리먼에게 미 합동참모부가 극동에서 소련군과의 합동 지상작전을 고려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헤리먼은 “그러한 계획은 잡혀 있지 않으며, 단지 소련군이 만주에서 군사 적전을 전개하는 것만이 고려되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우리가 일본군을 폐퇴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를 만주 지역에만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여러 방면을 연계해 만주를 공격하는 측면 공격을 시도해야 된다”고 반박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모든 해상의 작전 태세는 강화되어야만 하며, 한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항구들은 소련의 지상군과 해군에 의해 점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미 해군은 ‘동해’에 머무르기를 원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 소련군의 작전 영역은 만주에 국한되지 않고, 한반도의 북쪽 지역까지 확장될 것임이 분명해졌다. 특히 한반도의 북쪽 항구들을 소련군이 점령하겠다는 의사를 미국 측에 분명히 밝힌 것은 극동에서의 부동항 확보라는 소련이 오랜 숙원을 기어코 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미군의 작전 영역이 ‘동해’로 한정되기를 원한 것은 극동에서의 미․소의 세력 범주를 ‘동해’를 거점으로 나누어 일본에 대해서는 미국의 지배권을, 그리고 한반도에 대해서는 소련의 지배권을 쌍방이 서로 인정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한반도의 일부 내지 전체에 대한 소련의 점령 가능성을 상당히 점증시킬 것임이 틀림 없었다.
테헤란 회담 후 거의 13개월 만인 1945년 2월, 미․영․소 세 지도자는 소련의 영토인 얄타에서 다시 회합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한국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스탈린의 기존 동의를 재확인하였으며, 반면에 스탈린은 한국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여 루즈벨트로부터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영국을 참여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처럼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한국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의견 교환만 나누었을 뿐, 더 이상의 구체적인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대소 관계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그의 전시 정책 방침 때문이었다. 당시 미 합동참모부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더라도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에는 독일이 패망한 후 적어도 18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므로 루즈벨트는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추후 언제라도 스탈린과 자세하게 협의할 시간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또한 루즈벨트는 전시에서의 소련과의 협력 관계가 전후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으며, 누구보다도 스탈린을 잘 다룰 자신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전시 회담에서 국무성을 배제시킨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무렵 국무성은 대소 관계에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최대한 이용하는 강경 정책을 선호하였으므로 루즈벨트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따라서 국무장관은 얄타회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중요한 전시 회담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미국이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전후 처리문제에 대해 발언권을 갖게 될 것이지만, 발언권의 무게는 미국의 군사적인 연루에 정비례할 것이므로 미군이 특정 지역을 점령하기 전에 그 지역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루즈벨트는 얄타회담에서도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소련의 동의 그 자체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한편 스탈린이 한국 문제에 대한 논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모스크바 군사 회담에서 그가 한 발언 내용을 떠올리면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그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 한반도의 북쪽 항구들을 점령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의 구체적인 논의 자체가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 계획에 제약 조건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였다. 더욱이 한국은 소련과 인접한 관계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단지 두만강만 건너면 되었으므로, 한반도를 점령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만약 3~4국이 참여하는 신탁통치가 한국에 실시될 경우, 소련의 몫은 3분의 1 내지 4분의 1로 줄어들므로 현재 유리한 위치에 있는 스탈린으로서는 굳이 신탁통치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이 회담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어떠한 형태이든 한국에 대한 확고한 결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해 두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에 외국 군대가 주둔할 것인지,”그리고 회담 말미에 “만약 한국인이 만족할 만한 정부를 스스로 수립할 수 있다면, 신탁통치가 왜 필요한지” 질문한 스탈린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2. 트루먼 행정부와 신탁통치
루즈벨트의 사망과 트루먼의 대통령, 승계는 미국의 소련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루즈벨트는 전시 중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모색하면서 전후에도 그와 같은 관계가 지속될 것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타협적 자세에 불만을 가진 그의 참모들은 트루먼이 새로운 최고 정책결정자로 등장하자, 그에게 대소강경책을 건의하면서 소련과의 관계에 있어 미국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소련 미국 대사인 해리만도 일시 귀국하여 가진 정책 회의에서 “스탈린 주의의 일부에서는 우리의 관용과 협력 태도를 유약의 증거로 오인하고 있다”고 진술하면서 대소관계에서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1945년 4월 23일 트루먼이 주요 외교 및 군사 고문들과 가진 확대 회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1) 트루먼 행정부의 대소 강경정책과 한국 문제 해결 방안
전시중 유럽에서의 제2전선 형성 문제로 인해 야기된 미․영 두 나라와 소련의 알력은 얄타회담 이후 소련이 동유럽에서 팽창주의적인 형태를 노골화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일본의 붕괴 및 프랑스와 영국의 쇠퇴로 인해 생길 힘의 공백을 소련이 채워 주기를 희망하여 전시중 소련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루즈벨트의 사망과 이에 따른 트루먼(Harry S. Truman) 행정부의 출범은 미국의 대소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트루먼의 주요 참모들이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소련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대소 강경 정책을 강력히 건의했고, 트루먼 역시 이를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이러한 대소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고려해야 될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란 루즈벨트 행정부 시절 루즈벨트 자신과 미 군부 지도자들이 그토록 희망했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이 시점에서도 계속 필요한가 하는 점이었다. 이 점이 바로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트루먼의 참모들도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이를테면 트루먼의 참모장이었던 리하이(William D. Leahy) 제독은 “태평양전쟁은 이제 지구전의 문제로 그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에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에 스탈린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주재 미 군사사절단장인 딘 장국 역시 1945년 4월 16일, 업무 협의차 일시 귀국하여 제출한 보고서에서 “소련과의 군사적인 협력은 미국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합동기획참모부’(Joint Staff Planners: JSP)가 같은 달 25일 합동참모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합동기획참모부는 이 보고서에서 “소련의 조기 참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우리의 일본 침공을 가능케 하는 더 이상의 필요조건이 아님”을 역설함으로써,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육군성과 현지사령관 쪽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1945년 5월 스팀슨(Hen교 L. Stimson) 육군성장관은 그류(C. Grew) 국무장관 대리와의 서신 교환에서 “소련의 참전은 실질적으로 전쟁 기간을 단축시키고 많은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군사적인 영향력을 미칠 것” 이라는 육군성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사령관이었던 맥아더(D. MacArthur) 장군 또한 1945년 2월 워싱턴의 기획 장교 방문단의 일원이었던 링컨 준장과의 대담에서 “미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최대한 일본군이 아시아 대륙에서 발목이 잡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미국의 전략상 매우 중요한 일임을 시사하였다.
이처럼 의견이 양분된 상황에서 트루먼은 육군성과 현지사령관 쪽의 견해를 더 중시했다. 그것은 트루먼 역시 대소 강경 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못지 않게 태평양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트루먼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필요로 한 이상, 이제는 이로 인해 야기될지도 모를 정치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런데 당시 육군성은 미군이 사할린과 만주, 한국 그리고 북중국을 점령하기에 앞서 소련군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들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맥아더 또한 소련이 만주 전체와 한국 그리고 가능하다면 북중국의 일부까지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소련의 이와 같은 영토 점령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무성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야기 될 것을 가장 우려하였다. 특히 한국 문제에 있어 국무성은 소련의 일방적인 군사 점령을 결코 원치 않았다. 때문에 그류 국무장관 대리는 스팀슨 육군성장관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에 소련 정부로부터 카이로 선언의 준수와 한국에서의 4대국(미․영․소․중)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명백한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스팀슨은 “육군성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소련 주재 미 대사인 해리만 역시 일시 귀국하여 참석한 회의(1945년 5월 15일)에서 “얄타회담에서 소련측과 구두로만 논의된 두 가지 문제, 이를테면 중국의 통일 문제와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를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고 트루먼에게 권고하였다.
이와 같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도, 그리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정치적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도 모두 필요했던 트루먼 행정부가 이 두 가지 욕구를 함께 충족시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소련과의 협상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트루먼은 소련측과의 협상 대표로 홉킨스를 선정하였다.
스탈린과 홉킨스와의 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된 것은 1945년 5월 28일 제3차 회담에서 였다. 이 회담에서 두 사람은 한국에 미․영․소․중 4대국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과, 그 기간은 확실히는 5년 내지 10년 정도, 가장 길어야 25년일 것이라는 데에 서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도 홉킨스의 주장에 스탈린이 단순히 동의해 준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소련측은 이 회담에서도 한국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한 셈이다. 반면 미국측으로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점령 가능성이 높은 소련측으로부터 전후 한국엣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재확약을 받음으로써, 이를 통해 소련을 정치적으로 구속하는 데 일단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속 자체도 동유럽에서의 일련의 사태 전개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소련측의 약소 이행 여하에 따라 언제라도 무위로 돌아갈 소지가 컸기 때문에 매우 불완전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2) 분할․점령 정책과 신탁통치안의 의미 변질
소련 정부가 한국의 4대국 신탁통치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성은 한국에서 취할 소련의 행동에 대해 계속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국무성은 포츠담 회담을 대비해 마련한 보고 자료에서 “소련 정부는 1943년에 작성된 카이로 선언의 공약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한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소련 정부의 카이로 선언에 대한 준수 공약은 미국과 소련 정부가 극동과 태평양에서 취하게 될 행동 과정에 상세한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보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국무성은 “한국의 군사 점령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단일 연합군 사령부 아래서 공동 작전 지역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이와 같은 국무성의 우려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보고서가 트루먼에게 전해졌는데, 그것은 주소련 대사인 해리만에 의해 작성된 전문이었다. 해리만은 1945년 6월 30일에 이루어진 스탈린과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과의 회담 내용을 보고하였는데, 그 중 한국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 문제에 관해 스탈린은 4대국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에 대한 송자문의 동의를 다시 재확인하였다. 몰로토프가 이에 개입하여 이는 전례가 없는 이례적인 협약이며, 따라서 이에 관해서는 세부면에까지 양해에 도달함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스탈린은 한국에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거나 외국의 정책이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송자문이 알기에 소련은 시베리아에서 훈련된 한인군 2개 사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군대를 한국에 남겨놓게 될 것이며, 소련에서 훈련된 정치 요원들 또한 한국에 데려올 것으로 믿고 있다. 송자문은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4대국 신탁통치가 실시 된다고 하여도 소련이 한국 문제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이 전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발언이다. 그는 한국의 신탁통치가 “전례가 없는 이례적인 협약”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바꾸어 말해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소련으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방안이라는 것이다. 소련측은 전시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소련특이 신탁통치라는 방안 속에서 소련의 이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련이 자체적으로 양성한 2~3개 사단 규모의 한인군과 정치 요원들을 보유하고 있고, 한국을 단독으로 점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소련측으로서는 신탁통치가 주는 국제적인 구속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따라서 몰로토프가 주장한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세부면까지 양해가 되어야 한다”는 발언은 역으로 말해서 신탁통치의 세부 사항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소련은 신탁통치 협약을 언제라고 무시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몰로토프의 발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소련측의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는 이후 한반도 점령과정과 전후의 신탁통치 논쟁에서 그대로 입증되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할 것인지 여부가 논의된 것은 1945년 6월 18일, 트루먼이 직접 주재한 백악관 전략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마셜(George C. Marshall) 육군참모총장은 “한국을 침공하는 것은 일본의 규슈(九州)를 침공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피해도 더 클 것이므로 일본을 항복시키는 데 긴요한 규슈 침공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이 불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해군참모총장인 킹 제독 역시 마샬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만주와 한국에 있는 일본군을 소련군이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트루먼도 이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이처럼 이 시기에 미국의 주요한 군부 지도자들은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데 비해 그 효율성은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에서, 소련군에게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 일체를 떠맡기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트루먼 행정부의 주요 군사문제 정책 결정자들이 한반도의 중요성을 전혀 도외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들이 소련의 일방적인 한국 지배를 방지하기 위해 트루먼에게 건의한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스팀슨 육군성장관은 소련이 일찍부터 혼련시켜 온 1~2개 사단 규모의 한국인들로 하여금 전후 한국의 지배권을 장악하도록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트루먼에게 “한국에서의 신탁통치는 강력하게 추진되어야만 하며, 신탁통치 실시 기간중에 명목상으로나마 미 육군이나 해병대가 한국에 주둔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트루먼의 참모장인 리하이 제독도 한국 신탁통치안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전후 일정 기간 동안 한국에 신탁통치가 실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트루먼에게 권고하였다. 이렇게 볼 때 트루먼 행정부의 주요 군사문제 정책 결정자들은 비록 미군이 한반도에서 군사 작전을 전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소련군이 이 지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더라도, 신탁통치라는 장치를 통해 소련에 대한 한국의 예속화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무렵 소련의 군부 지도자들은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극동 작전 계획을 최종 마무리하고 있었다. 원래 소련군사령부는 얄타회담 직후인 1945년 초봄 ‘일반참모부’에 극동 작전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였으며, 그해 6월 27일 일반참모부로부터 작전 계획안을 보고 받고 다음 날 그것을 공식 승인하였다. 이 계획안의 골자는 서부․북부․동부 세 방면에서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 중 만주 작전 속에는 한반도에서의 작전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먼저 웅기, 나진, 청진 등과 같은 북동쪽에 위치한 항구들을 점령함으로써, 만주와 일본 사이의 통신망을 파괴하는 군사적인 목적과 극동에서의 부동항 획득이라는 소련의 오랜 숙원을 함께 달성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를 일단 달성한 후 소련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 할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작전 계획은 7월 5일 극동 전선 사령관들에게 하달되었으며, 이들은 7월 한달 동안 작전 지침에 따라 개별 작전 계획을 완성하고 수립된 작전 계획이 언제라도 실행에 옮겨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한반도 작전 계획은 1944년 10월 모스크바 군사 회담에서 이미 천명된 스탈린의 한반도 점령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소련에게 남은 일이란 계획대로 한반도를 점령해 이 지역에 자국의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과의 신탁통치 실시 약속이 소련의 행동에 제약 조건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문제까지 합의된 것이 아니므로 굳이 이에 구속될 필요는 없었다.
3) 포츠담 회담과 트루먼의 원폭전략
전시 회담 가운데 연합국의 마지막 회담인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잠시나마 제기된 것은 1945년 7월 22일 열린 제6차 회의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소련 외상 몰로토프은 신탁통치를 의제로 거론하면서 아프리카와 지중해의 이탈리아 식민지 및 국제연맹 하의위임통치 지역, 그리고 한국 문제에 대한 의견 교황을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몰로토프의 제안은 신탁통치 논의 자체에 대한 영국 측의 거부적인 태도와 이탈리아 식민지에 대한 처칠과 스탈린 간의 심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더 이상 논의의 진전을 보지 못한채, 트루먼의 중재에 따라 의제를 외상 회의에 넘기는 선에서 일단락 되고 말았다. 때문에 한국 문제는 세 정상 사이에서 토의도지 못하였고, 이후 포츠담 회담이 끝날 때까지 공식적인 의제로도 상정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트루먼이 신탁통치에 대한 처칠과 스탈린 간의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서 이렇다 할 만한 발언을 하지 않고 계속 침묵을 지켰다는 점이다. 분명히 그는 포츠담 회담이 열리기 직전에 국무성과 소련 주재 미국대사인 해리먼으로부터 “신탁통치는 한국에서의 소련의 지배를 방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일 지 모르므로 프츠담 회담에서 이에 관한 상세한 토의를 해야 할 것”이라는 건의 받았으며, 심지어는 스팀슨 육군성장관이나 자신의 참모장인 리하이 제독으로부터도 이와 유사한 건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소련측은 한국 신탁통치 문제에 관한 논의를 먼저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이 문제에 관한 논의를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영국측의 반대 때문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의 성공에서 찾아야만 한다.
트루먼이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포츠담에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16일 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일본을 패배시키는데 소련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하였다. 트루먼의 이러한 확신은 원폭의 위력에 대한 그의 확실한 정보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한 날부터 원폭 실험에 성공하기까지 스틈슨 육군성장관과 번즈 국무장관, 그리고 원폭 개발위원회와 과학자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 등으로부터 원폭의 파괴력에 대한 보고를 자세히 받아 왔다. 이와 같은 보고들을 통해 트루먼은 원폭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만약 원폭 개발에 성공할 경우 이를 대일전에 사용할 뜻임을 분명히 시사하였다. 이렇게 볼 때 원폭의 위력을 소상하게 인지하고 있던 트루먼이 원폭 실험의 성공 소식에 접한 이후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불필요하다고 확신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문제가 지금까지 미국의 대일전 전략 수립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해 왔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군부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트루먼과 군부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은 원폭 실험의 성공 소식이 알려진 바로 그 다음 날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군부 지도자들은 기존 군사 계획의 지속적인 추진을 트루먼에게 건의하였다. 대체로 군부지도자들은 원폭의 사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음을 안 뒤에도 소련의 참전 필요성을 계속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의 힘에 대한 이들의 지나친 과대평가 때문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만약 소련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독립된 지휘권과 산업 기지를 보유한 관동군이 일본 본토가 점령된 이후에도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군부의 주장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 인물은 바로 번즈 국무장관이었다. 그는 “원폭이 성공적일 것이고 일본으로 하여금 우리의 조건대로 항복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불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처럼 소련 참전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자 트루먼은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계속 청취할 필요를 느꼈다. 트루먼이 처칠의 견해를 듣기 위해 그를 만날 것은 7월 22일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처칠은 “가능한 한 빨리 원폭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며 우리는 일본을 패배 시키는데에 소련을 필요로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처칠로부터 고무적인 답변을 들은 트루먼은 그 다음날인 7월 23일, 스팀슨 육군성장관에게 소련의 참전 필요성 여부에 대한 마샬 육군참모총장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에 대해 마셜은 “우리가 원폭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소련의 참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으며 실제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간주해도 된다”고 말함으로써, 원폭 실험의 성공 직후 소련의 참전 필요성을 역설하던 종래의 군부 입장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군부의 입장 변화는 군부 지도자들이 원폭의 위력을 올바로 인식한 결과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이 무렵 마셜 장군이 원폭의 충격가치를 열렬히 주장한 사실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이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불필요하다고 확실히 판명된 이상, 트루먼은 과감히 원폭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원폭 전략이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이전에 원폭을 사용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종결지음으로써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 그 대가를 지불하기로 명시한 협약 내용 자체를 사전에 무효화시키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우리가 길고도 쓰라린 고통을 극복하며 과감한 노력을 기울여 얻게 되는 결실을 소련이 힘도 들이지 않고 얻어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함으로써, 원폭 전략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트루먼의 원폭전략에 가장 동조적인 태도를 취한 번즈 국무장관도 “소련이 여순항과 대련항을 점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기를 원한다”고 말함으로써, 극동에서의 소련의 이권 배제가 원폭 전략의 주된 목적임을 다시 시사하였다. 결국 트루먼과 번즈는 원폭을 사용하게 되면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게 될 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소련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극동에서의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를 염두에 둔 트루먼이 7월 22일 포츠담 회담 제6차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회피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지도 모른다.
트루먼이 원폭 전략을 통해 달성하기를 원했던 또 다른 목적은 일본 본토 침공에 따른 엄청난 인명 손실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트루먼은 미국의 대일전 전략으로 최종 확정된 일본 본토 침공을 실제로 감행할 경우 약 50만에서 많게는 100만명 정도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때문에 그는 일본 본토 침공 계획이 반드시 바람직한 전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될 수 있는 한 이를 피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원폭 개발의 성공 소식은 트루먼으로 하여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가 택한 대체 전략이 바로 원폭 전략이었던 것이다.
4) 한반도의 분할과 신탁통치안의 의미 변질
트루먼이 원폭 투하 작전이 전개될 수 있는 예상 날짜를 스팀슨 육군성장관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은 7월 24일 오전이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워싱턴에서는 전략공군사령과 스파츠(Carl A. Spaatz) 장군에게 8월 3일 이후 기상 조건이 허락되는 대로 최초의 원폭을 투하하도록 지시하는 명령문 초안이 합동참모부 의장 대리 핸디(Thomas T. Handy) 육군대장 이름으로 작성되었고, 이 초안은 즉시 포츠담에 있는 스팀슨 장관과 마셜 장군에게 보내져 바로 그 날 트루먼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트루먼의 원폭 전략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문점이 뒤따른다. 첫째는, 트루먼이 이미 원폭 실험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 포츠담 회담 첫날인 7월 17일에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확약을 받아내었는가 하는 점이다. 트루먼의 자신의 회고록에서도 “내가 포츠담에 간 이유는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개인적인 재확약을 받는 데 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된다. 먼저 소련 참전에 대한 재확약을 받은 날인 7월 17일은 원폭 실험의 성공 소식에 접한지 만 하루가 지난날이다. 따라서 트루먼은 원폭 전략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 사이에 놓여 있는 복잡한 상관성을 파악하는 중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지도자들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절실히 요망하였기 때문에 취임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트루먼으로서는 이들의 의견을 전혀 도외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코 원치 않았다. 이것은 그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중소 협상을 지연시키라고 장개석에게 촉구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중소 협상의 원만한 타결이 대일전 참전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트루먼은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대일전을 끝내려고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원폭을 개발하는 데 처음부터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한 스팀슨 육군성장관이 원폭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 원폭 실험이 성공한 이후에 극동문제에 대한 소련과의 타협을 주장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대일전에서의 소련의 전략에 대한 그의 시각 때문이었다. 그는 “소련은 미국의 노력이 일본의 군사력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파괴할 때를 기다려, 초기에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치루어야 될 대가보다 훨씬 작은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이 바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이 원폭을 대일전에 사용할 경우에라도 소련은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대일전에 참전할 것이 확실시되므로, 소련의 점령 가능성이 매우 높은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해 소련과의 타협점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볼 때 그가 왜 포츠담 회담 직전에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예견은 한 달이 못되어 정확히 입증되었다.
트루먼이 원폭 전략을 실행에 옮기기로 단안을 내린 이상,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소련과의 구체적인 논의는 이제 그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트루먼에게 남은 것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킴으로써 한국을 점령하는 일 뿐이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을 전제로 한 기존의 신탁통치 실시 정책에서, 한국을 확실하게 자국의 세력권 내에 두기 위한 배타적인 점령 정책으로 그 방향이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한반도의 분할과 그 정치적 의미
트루먼의 원폭 전략이 확정된 가운데 7월 24일, 포츠담에서는 미․영․소 3국 군부 수뇌들 간의 군사 회담이 개최되었다. 바로 이 회의에서 한국에서의 작전문제가 미․소 군부 수뇌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는데, 소련의 적군참모총장인 안토노프(A. E. Antonov)는 미국이 한국에서 작전을 피려는 의도를 가졌는지 여부에 대해 특히 관심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한국에서의 육․해군 공동 작정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이틀 뒤인 7월 26일에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할 때 발효될 한국에서의 공중 및 해상 작전선에 대한 합의만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마셜은 7월 24일 회의 중에 육군성 작전국장인 헐(John E. Hull) 중장에게 “미군을 한국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헐과 그의 참모들은 지도를 검토한 끝에 38도선 부근이 미․소 양군의 군사 활동 경계선을 위한 육상 분할선으로 적합할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는데, 이들은 최소한 인천항과 부산항이 미군 지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미․소 대표들은 포츠담의 군사 회담에서 이 분계선에 대해 토의하지는 않았다.
이에 앞서 미 합동참모부는 7월 21일 태평양지역사령관인 맥아더와 태평양함대사령관인 니미츠(C. W. Nimitz) 제독에게 보내는 전문(電文)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8월 15일에 이루어질 것이며, 가능하다면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방침 위에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장 필요할 것”이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마셜은 7월 25일 트루먼에게 제출한 건의서에서 “한국에 대한 어떤 지침을 내려주는 것이 합동참모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트루먼에게 권고하였다. 트루먼은 마셜의 건의를 받아들였으며, 트루먼의 지침을 받은 합동참모부는 7월 25일 날짜로 맥아더 사령관과 니미츠 제독에게 “일본 정부가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사태가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 그들의 점령 계획 속에 한국을 포함시키라”는 명령을 신속하게 하달했다. 맥아더는 합동참모부에 보내는 전문에서 도쿄(東京)와 서울을 점령 최우선 순위로, 부산을 두 번째 순위로, 그리고 군산을 세 번째 순위로 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와 같은 그의 제안은 한반도에 대한 미군의 점령이 상황 여하에 따라 현실화될 경우를 대비해 마련한 초기 점령 계획서의 점령 우선 순위를 변경한 것이었다. 당시 작성된 초기 점령 계획서의 점령 우선 순위를 변경한 것이었다. 당시 작성된 초기 점령 계획서에는 부산이 점령 최우선 순위로, 그리고 서울이 두 번째 순위로 되어 있었다. 한편 소련 주재 미 대사인 해리만이 트루먼에게 보내는 보고 전문에도 “포츠담에서 마셜 장군과 킹 제독은 소련군이 한국과 대련을 점령하기 전에 미군을 이 지역에 상륙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미국 군부는 원폭 전략이 사실상 확정된 직후부터 종래와 같이 한국 점령을 단순히 가능성 있는 계획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될 주요 임무로 간주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소련의 한국 점령을 당연시했던 맥아더와 같은 인물조차 초기 점령 계획에서 두 번째 순위로 되어 있던 서울 점령을 일본의 도쿄와 함께 최우선 순위로 바꿀 것을 스스로 건의함으로써 한국 점령에 커다란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6월 18일에 열린 백악관 전략 회의에서 한국에 있는 일본군의 처리를 소련군에게 맡길 것을 주장한 킹 제독이 겨우 한 달 남짓 경과한 시점에서는 미군의 우선적인 한국 점령을 역설한 사실 역시 한국 점령에 대한 미 군부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마셜 장군은 한국에 대한 미 군부의 입장이 원폭 전략의 확정 이후 이와 같이 급작스럽게 변화되었고, 원폭 전략의 단안이 내려진 상태에서 소련측과 한국에서의 작전문제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소련측과의 군사 회담에서 이를 간단히 일축하고 실제로는 한국 점령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한편 포츠담의 군사 회담에서 마셜로부터 미군이 한국에서 작전을 전개할 계획이 접혀 있지 않다는 정보를 얻어낸 소련의 군 수뇌들은 6월 28일에 최종 확정되어 7월 5일자 명령 지침서로 극동전선사령관들에게 이미 하달된 한반도에서의 작전 계획을 앞으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한국 점령은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포츠담의 군사 회담은 소련측에게는 기존의 한반도 군사 계획을 마지막으로 점거하는 중요한 회담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미․소가 각기 다른 속셈에서 한국 점령을 획책하고 있고, 이들 두 나라가 이러한 계획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미․소의 이와 같은 기도는 만약 성공할 경우 독점적인 한국 점령이라는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반대로 실패할 때에는 한반도의 일부 지역을 양국이 부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가 분할되는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대일전에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려는 트루먼의 원폭전략은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를테면 미 전략 공군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의 항복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트루먼의 이 전략은 8월 8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함으로써 본래의 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왔다. 원래 소련은 얄타 협정에 명시된 중국에서의 소련의 이권을 둘러싼 중․소 협상이 원만한 합의점에 도달하기 이전에는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대일전이 조속히 끝날 조짐을 보이자 얄타 협정에 따른 극동에서의 자국의 이권을 차지할 명분을 얻기 위해 서둘러 대일전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처럼 트루먼은 자신의 원폭 전략이 차질을 빚자 삼성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 SWNCC)나 합동참모부로부터 항복 준비에 대한 건의서를 받기 이전인 8월 11일, 합동참모부에 대해 “만약 소련군이 대련항이나 한국에 있는 항구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일본의 항복 즉시 이 지역들에 대한 점령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트루먼의 지시를 받은 합동참모부는 같은 날 맥아더에게 대통령의 이러한 지시 사항과 아울러, 한국의 서울을 비교적 빨리 점령해 이 지역에서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는 것이 일본 점령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책임임을 통보하였다.
트루먼과 군부 수뇌들 간에 이와 같은 서신들이 교환되고 있을 때, 펜타곤(Pentagon)의 한 사무실에서 본스틸(C. H. Bonesteel, Ⅲ)과 러스크(Dean Rusk), 그리고 맥코맥(J. McCormack, Jr.) 세 대령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미군의 지역을 설정하는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합동기획요원’이자 항복 문서 준비의 실무 책임자인 링컨(George A. Lincoln) 준장과 협의해 일반 명령에 들어갈 지리적인 경계를 결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명령문을 최초로 작성하는 작업은 본스틸 대령에게 맡겨졌는데, 그에게 할당된 시간은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합동기획요원들과 삼성조정위원회는 그의 작업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 때가 바로 8월 10일과 11일 사이였다.
일반 명령 작성 작업에 착수한 본스틸은 소련군이 이미 한반도의 북동 지역 접경까지 진격했다는 점과, 소련군의 군사적인 능력으로 보아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에 유의하면서 소련군의 남하를 적당한 선에서 저지하기 위한 항복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가 이 작업에 착수하기 바로 직전 맥클로이 육군성 차관보와 링컨 장군이 그에게 요청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극동 지도로 눈을 돌려 북위 38도선이 한반도를 가른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만약 트루먼과 스탈린이 38도선을 수락한다면, 이 선은 미군의 영역 안에 수도 서울과 전범 수용소를 두게 되고, 나중에 ’4국 분할 지배’의 형태가 될 경우 중국과 영국에게도 충분한 지역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작업에 함께 참여했던 러스크는 1950년 7월 12일자 비망록에서 “번즈 국무장관은 가능한 한 북쪽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군부는 우리가 제안한 38도선이 미군의 군사적 능력이 미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선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측이 우리의 제안을 수락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소련군의 남진 속도가 문제의 핵심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러스크의 발언 속에는 38도선 제안이 국무성의 정치적 욕구와 군부의 군사적 능력을 조화시킨 최상의 방안이었다는 의미가 짙게 내포되어 있으며, 그 자신도 비망록에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일반 명령 초안이 8월 11일 새벽 합동기획요원들에게 넘겨져 토의될 때, 가드너(M. B. Gardner) 제독은 항복선을 39도선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다. 그는 항복선을 39도선으로 긋게 될 경우 미군이 점령할 군사 지역에 대련이 포함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합동기획요원들은 해군성장관인 포레스털도 이 제안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링컨 장군은 소련군이 대련과 산동반도의 다른 지역에 진주할 수 없는 이와 같은 항복선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며, 미군이 소련군보다 앞서 만주에 있는 항구에 도달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던(J. C. Dunn) 국무성 차관보와 접촉해 그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던 차관보는 미국에게는 대련보다 한국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믿었고, 번즈 국무장관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토의를 거친 후 합동기획요원들은 삼성조정위원회에 38도선을 항복선으로 확정, 제출하였다.
삼성조정위원회에서는 8월 11일과 12일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을 검토한 후 합동참모부에 의뢰해 그에 대한 군사적인 견해를 듣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소련군은 동해안 최북단의 옹기와 나진 근처에서 육․해군 합동 상륙 작전을 감행함으로써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소련군이 계속 남진한다는 보고가 워싱턴에 도달하자, 관련 인사들은 ‘일반 명령 제1호’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될 필요성을 인식했다. 8월 12일과 13일 삼성조정위원회는 명령문의 초안에 쓰여진 용어들을 재검토하였고, 14일 링컨 장군이 이끄는 실무진이 이를 재구성하자 같은 날 합동참모부와 삼성조정위원회는 재구성된 안을 곧바로 승인하였다. 그 다음날인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일반 명령 제1호’에 서명한 후, 그 전문을 영국과 소련의 수뇌에게 급송해 이들의 동의를 얻게 하였다. 미국측이 소련측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링컨 장군은 던 국무성 차관보에게 “내일 아침 우리는 소련군이 쓰시마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미국측은 ‘일반 명령 제1호’에 명시된 자신의 제안을 소련측이 거절할 것으로 예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국측의 예상과는 달리, 스탈린은 8월 16일 38도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일반 명령 제1호’에 완전히 동의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의문시되는 대목은 스탈린이 어떠한 이유에서 미국측의 38도선 제안을 수락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무렵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에 진입한 상태였고, 미군은 한반도에서 약 600마일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스탈린이 남한에 진주하는 것을 저지할 입장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미국측의 제안을 수락하였는데, 이에 대한 해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첫째는, 8월 10일에서 14일 사이에 워싱턴의 정책 입안가들에게 알려졌던 정보와는 달리, 소련군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전쟁이 종식된 8월 15일 당시에는 청진 근처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북위 41 ~ 42도 부근에 머물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반도에 진격한 소련군의 병력 또한 2개 보병 사단과 일부 해군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스탈린이 미국측의 제안을 거절했을 경우, 그는 트루먼이 오키나와로부터 서울까지 상징적인 임무 수행 병력을 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러한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일본군은 아마도 기꺼이 미군에게 항복하려고 할 것이고, 스탈린은 체면이 손상된 채 결국은 미국측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스탈린은 바로 이 점을 우려했지 때문에 미국측의 38도선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둘째는, 소련이 일본 점령에 참여함으로써 일본의 장래를 결정하는데에 미국과 동등한 발언권을 획득하기를 스탈린이 간절히 소망했다는 점이다.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부분적이나마 일본 점령에 참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므로, 스탈린은 일본 점령의 참여라는 보다 중요한 목화적인 태로를 취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트루먼에 의해 거절되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38도선을 항복선으로 하자는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면서 훗카이도의 북쪽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수 있도록 미국측이 배려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셋째는, 소련이 한반도의 북쪽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일찍부터 얻기를 희망하였던 부동항을 확실하게 확보하였다는 포만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그 당시 한반도에서의 소련의 주요 목표는 부동항 획득에 있었으므로 소련으로서는 이러한 목표가 일단 달성되었다고, 이와 같은 포만감이 결국 미국의 항복선 제안을 수락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이러한 포만감 역시 극동의 여타 지역의 전후 처리문제를 염두에 두고 미국과의 마찰을 가급적 자제함으로써 다른 정치적 실리를 취하겠다는 이해 타산적인 감정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흔히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이 군사적 편의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에 따르면, 한반도의 분할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으로 인해 야기될 한국에서의 힘의 공백 상태를 사전에 방지하고, 일본군에 대한 항복 접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임시 조치로 미․소 두 나라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트루먼 자신도 회고록에서 “38도선을 분할선으로 채택할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책임의 편리한 할당이라는 것 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과 술회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일 경우, 한반도의 분할은 단지 미․소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로 해석될 수 있으며, 두 나라의 정치적 책임 또한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분할선이 38도선으로 구체화되기까지 나름대로 치밀한 정치적 계산 하에서 한반도를 각기 자국의 영향권 내에 두려고 노력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반도에서 미․소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상충이 결국 한반도의 분할로 표출되었음을 뜻하며, 동시에 이제까지 한반도 분할의 정설로 받아들여진 군사적 편의주의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중요한 논거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군사적 편의주의설이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경우는 단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함으로 이해 38도선이 한반도의 분할선으로 확정되는 1945년 8월 8일에서 8월 16일까지를 국한시켜 당시 상황을 인식할 때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이전부터 미․소 두 나라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 점령 계획을 구체화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분할이 단지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아니면 문제 자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 점령으로 인해 전시 중 연합국간의 합의 사항이었던 한국 신탁통치안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 이것은 미․소가 점령이라는 수단을 통해 한반도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기본적인 목표를 달성하였으므로 굳이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연합국은 전후에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실시 방침을 재확인하여 이를 공식 천명하였지만, 이러한 합의는 단지 미․소가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지속적인 점령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상의 타협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양측은 신탁통치안의 폐기 명분을 찾는 데에만 몰두함으로써 그 동안 남․북한에서 각기 획득한 기득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와 같은 미․소의 기득권 고수 태도와 상대방에 대한 견제 및 불신의 자세는 한국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맞물려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Ⅲ. 결 론
전시에서의 한국은 연합국의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으나, 연합군은 한국문제의 처리 방향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먼저 영국은 자국이 설정한 극동에서의 주요한 이해관계의 범주 속에 한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한국의 미래에 특별한 주목을 하지 않았지만, 한국문제의 해결 방안이 전후 식민지 처리에 하나의 틀을 제공하고 이것이 결국에는 자국의 식민지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이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또한 한국의 인접 국가로서 한국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과 소련은 과거 일본과의 패권 다툼에서의 패배로 인해 상실된 이전의 권리를 회복하기를 원했으므로, 한국문제의 처리는 물론 전후 들어서게 될 한국의 미래 정부의 성격에 대해서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극동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한국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함은 물론, 한국을 둘러싼 중․소 두 나라의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을 예견하고 한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들 연합국 중 한국의 전후 처리문제에 대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당사국이 아닌 영국은 차치하고라도, 중국의장개석 정부는 공산당과의 세력 다툼과 대일전 등으로 인한 힘의 약화로 말미암아, 그리고 소련은 독일과의 치열한 전쟁과 일소 불가침조약이라는 정치적인 구속력 때문에 한국문제를 능동적으로 주도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일전의 직접적인 수행당사국이라는 위치와 주축과의 전쟁 과정에서 드러나 우월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국문제를 포함한 전후 처리문제들의 해결 방안을 적극 강구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루즈벨트 행정부가 여타 연합국에게 포괄적인 식민지 정책으로 제시한 것은 신탁통치안이었다. 루즈벨트는 이를 통해 착취적 제국주의의 전형인 유럽 및 일본의 식민주의를 척결하고, 식민지 인민들에게 문명의 혜택과 인간다운 삶을 맛보게 하며 이들이 자치 역량을 갖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도주의 정신에서 비롯된 그의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제국주의적 발상이 함께 내포됨으로써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루즈벨트가 한국 신탁통치안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바 역시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배양하고, 중국이나 소련 가운데에 어느 한 나라의 일방적인 한국 지배를 방지함으로써 미국이 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의 대일전 전략이 아시아 대륙 중심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을 공략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 소련의 한국 지배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한국 신탁통치안은 미국에게 매우 유효했다.
일련의 전시 회담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연합국의 동의를 얻으려는 루즈벨트의 노력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테면 영국은 식민지에 신탁통치를 적용하는 것이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한국이 자국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라는 점에서,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원했으나 군사적․경제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리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실시할 경우 한국에서의 자국의 이권은 최소한 보장되리라는 판단에서 미국의 신탁통치안 제안에 각각 동의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후 미국과의 군사 회담에서 대일전에 참전할 경우 한반도의 북쪽에 위치한 항구들을 점령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힘과 아울러, 얄타회담에서는 한국 신탁통치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신탁통치가 주는 정치적인 구속력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소련의 태도는 1945년 6월에 완료된 소련군의 극동 작전 계획 속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이 계획에 따르면 한반도에서의 군사 작전은 북동쪽에 위치한 항구들의 점령을 통해 부동항 획득이라는 소련의 오랜 숙원을 달성한 후 서울을 향해 진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점령 의지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의 성공과 트루먼의 원폭 전략으로 인해 무산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집권직후부터 대소 강경 정책을 원했으면서도 소련의 대일전 참전의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련과 타협한 트루먼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이전에 원폭을 사용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종결지음으로써 소련에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려고 획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의 원폭 전략은 소련이 얄타협정에 따른 극동에서의 자국의 이권을 차지할 명분을 얻기 위해 서둘러 대일전에 참전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미․소는 차선책으로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시킨 타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는 두 나라의 정치적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선에서 분할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한반도의 분할선은 미․소 정치적 이해 관계의 타협점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분할이 단지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이면 문제자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