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파병론 이시우 2004/07/17 450

http://www.dema.mil.kr/jour/jour01.html

[기 고]
한국 전략가치 주변국에 인식
- 한국사 속의 파병과 군사외교의 교훈

우리 정부의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자 ‘이라크 평화·재건 사단’인 자이툰부대가 창설돼 파병지역의 종교·문화·역사 등을 익히면서 오는 8월 파병을 앞두고 강도 높은 막바지 훈련이 한창이다.
21세기 들어 최대 규모인 자이툰부대의 이라크 파병이 과연 우리의 국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파병을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신뢰구축은 국가 위상을 어떻게 제고시켜 줄 것인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군사외교의 실리적 모델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 한국사 속의 선조들이 수행했던 파병과정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 선조들은 다양한 파병의 경험을 한국사 속에서 생생히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몽골과의 일본 원정군 파병이나 조선시대 명나라 요청에 의한 여진·후금 정벌군 파병, 청나라의 나선(러시아) 정벌군에 파병한 경우가 우리 역사상 주목되는 해외 파병의 선례일 것이다. 이 같은 파병 역사에는 타율적 강요에 의한 파병도 있었지만, 자율적 파병을 통한 군사외교로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주변국에 인식시킴으로써 국익을 증진시킨 사례도 있다.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 파병의 경험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또 다른 파병을 위해 소중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외교의 성패는 국익 직결
한국사를 통해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파병은 13세기 후반 두 차례 전개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먼저 눈에 띈다. 1274년 전개된 몽골군과의 제1차 일본 원정에 고려는 전투병 8000명과 지원인력 6700명을 파병하고, 전선 900척을 투입했다. 국내에 들어온 외국군 2만5000명의 군량까지 부담했다. 그리고 6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친 1281년의 제2차 원정에는 전투병 1만명과 지원인력 1만5000명을 파병하고, 역시 전함 900척을 동원하면서 외국군 1만5000명에 대한 군수지원을 전담했다. 당시 원의 부마국(駙馬國)이었던 고려가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파병의 부담은 너무나 컸다.

그러나 새로 출범한 조선의 경우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면서 고려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조선은 몽골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킨 신흥 강국 명(明)과 정치·외교적으로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과거 고려가 몽골의 무력에 굴복해 강압적으로 수교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은 명의 파병 요청을 국내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 후로 조선은 세조 때인 1460년 두만강 대안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압록강 대안 지역 토벌을 계획하던 중 명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았다. 1467년 조선군 1만명이 출병했으나 앞서 고려 때 연합군 형태로 파병한 것과는 달랐다. 즉, 조선군은 명군과는 별도로 압록강 대안의 건주(建州) 여진 지역에서 독자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추장 이만주를 참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비밀리에 추진된 관계로 파병의 전말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종 때의 제2차 파병도 명의 요청에 의한 것이며,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점에서는 1차 파병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러나 조선 조정 내부에서 파병 반대 여론이 일어난 것은 커다란 차이점이다. 결국 건주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조선군 1만명은 압록강이 결빙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명과의 우호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변방 수비부대 3000명을 긴급 편성해 재파병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와 같이 세조·성종 때의 파병부대는 여진 근거지 후방에서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한 특징이 있다. 그 중에서 성종 때의 파병은 무력시위와 흡사한 작전을 전개했으며, 따라서 아군의 피해도 없었다. 조·명 관계를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진족에는 조선 군사력의 우위를 과시하는 성과를 동시에 거둔 실리적 군사외교의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간의 군사동맹에 입각한 파병 요청은 아니었으나 임진왜란에 명군을 파병해 지원한 것에 대한 보답의 형식으로 요청해왔기 때문에 다른 파병 사례와 차이가 있다. 당시 명의 국력은 점차 쇠퇴하고 있는 반면, 후금의 군사력은 일취월장해 명을 압박하고 있었다. 새로운 군사 강국으로 등장한 후금을 적대시하는 정책은 곧 후금의 침공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후금을 적대시할 수도 없었으며,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국가 최고 지도자의 고민이었다.
광해군은 찬반 여론을 수렴한 결과, 명의 요청에 따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도원수 강홍립이 지휘하는 1만3000의 조선군은 1619년(광해군 11)에 만주로 진입하자 명의 유정이 파견한 감독관의 통제를 받았다. 일부 조총수는 본대에서 분리돼 아예 다른 부대에 배속되기도 했다. 앞서 추진된 파병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흥경 근교의 심하(深河) 전투에서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후금군에 투항했다. 이때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과 화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조선은 후금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렸다는 의혹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어쨌든 명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후금을 자극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군사외교의 또 다른 성공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라크 파병 전략적 가치 높아
그러나 1623년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仁祖)가 친명정책으로 전환하자 곧바로 후금의 침공 위협에 직면했다.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을 정묘화약(丁卯和約)으로 미봉했으나 동북아의 질서변화와 군사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인조는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조선은 이후 나선 정벌전에 정예 포수를 파병해달라는 청(淸·1636년 4월 후금에서 청으로 변경)의 일방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654년(효종 5)의 제1차 정벌에 조총병 100명을 포함한 152명을 파병하고, 1658년의 2차 정벌에 조총병 200명을 포함한 265명을 파병했다.
이들 정벌군의 파병 규모는 비교적 소수 인력이었으나 청군에 비해 많은 전과를 올림으로써 조선군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장거리 군량 수송과 가혹한 작전 통제 등의 문제는 앞서 고려 때의 일본 원정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이와 같은 우리 파병 역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베트남 참전이었다. 우리의 군사동맹국인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추진된 파병은 먼저 국회의 동의를 거쳤다. 1964년 9월 제1차로 이동 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되고, 뒤따라 전투부대가 파병됐다. 1973년 철수 완료까지 8년반 동안 육·해·공군 연인원 32만5500여명이 참전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우리 역사상 최장기간, 최대 규모의 기록을 남기면서 국군의 전투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실전경험을 축적하는 성과를 거뒀다. 정치·외교·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창출함으로써 국위 선양과 국력 신장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국가와 국군의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크게 고양되고, 우방국과 군사외교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우리의 대외파병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 1990년 쿠웨이트를 무력 합병한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제재 조치가 단행되는 가운데 미국이 국군의 파병을 요청해온 것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우리는 유엔의 회원국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방국의 요청과 유엔의 결의를 존중해 1991년 의료지원단 154명을 사우디아라비아에, 공군수송단 160명을 항공기(C-130) 5대와 함께 아랍에미리트연합에 ‘다국적군’으로 파병했다. 불과 1∼2개월의 단기간에 복귀했으나 중동 특유의 지형 및 기상조건에서 초현대전을 체험하고 대한민국과 국군의 위상을 아랍권에 새롭게 각인시키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우리 국군의 대외파병은 1991년 9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돼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파병 규모와 지역, 파병기간도 한층 다양해졌다. 비록 단기간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경찰과 민간인들도 파병부대의 PKO에 참여한 것은 새로운 파병 모델의 선례다.
당시 파병부대는 소말리아, 서부 사하라, 앙골라, 그루지야, 인도, 파키스탄, 동티모르, 키프로스 등지에서 유엔군의 자격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동맹국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을 한층 고양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다양한 군사경험을 축적하고 세계 군사대국들과 연합작전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도 20세기 후반 베트남 참전 이래로 대외파병을 통해 거둔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파병사의 교훈을 되돌아볼 때 작금의 이라크 파병도 국제사회에 우리의 신뢰를 축적해 국익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전략적 가치를 더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