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 (VUNC) 순회 기자 김명도신학..이시우 2009/04/21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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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협정 54주년을 맞으며

전쟁 발발에서 휴전까지

오는 7월 27일은 6.25 사변의 정전협정 54주년을 맞는 날이다. 지금은 6.25 사변이 대부분의 국민들이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정전협정에 별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역사는 바로 알아야 한다. 잠시 역사를 더듬어 보자, 북의 김일성은 1950년 2 월에 Moscow 에 가서 Stalin 을 방문하고 남침을 허가 받고, 이윽고 중국 모택동의 지원 다짐을 받아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주일 아침 4시를 기해서 당시 남북 간의 경계선이던 38도선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어 피비린내 나는 3년간의 <한국전쟁> 이 일어났다. 어떤 분들은 김일성을 찬양하기도하고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이 모택동 이라고 하지만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깊이 물든 공산주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에서도 수십만의 소시민 지주, 종교인들 학자들과 인테리를 무참하게 죽였다. 그의 외가 친척되는 강량욱을 <조선 기독교 연맹 위원장> 에 앉혀 놓고 기독교신자들을 가혹하게 핍박했고, 주일에 학교에 등교하는 제도를 만들어 학생들이 주일에 종교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데 앞장섰다. 사탄의 사주 노픗을 단단히 해낸 인물이다.

당시 남한의 병력은 해방직후에 조직된 “국방경비대” 가 “국군” 으로 막 개편된 터라서 무기도 제대로 없었다. 항공기나 장갑차등은 말할 것도 없고 수년간 집중적으로 군사작전을 위해서 준비해온 북한 공산군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열악했다. 또 그 날은 주일이라서 장병은 대개 휴가를 나가고 병영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사정속의 북의 김일성은 남을 침공한 것이다. 북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남으로 내려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그 유명한 <인민제판> 으로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그들이 원칙없는 <인민재판> 이 얼마나 무서운가는 내가 경험해서 잘 알고 있다. 수 많은 남한의 인재들이 공산당에게 살해되거나 북으로 납치되었다. 이광수도 이기영도 홍명희도 모두 자의이던 타의이던 북으로 갔다. 정부는 대전으로, 다시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여 부산은 그야말로 전국 작지에서 피난 온 사람들과 3부 정부 공무춴들로 북쩍 거렸다.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에서는 긴급 안전보장이사회 (UN Security Council)를 소집하여 북의 인민군이 적대행위 (hostile action) 을 즉시 중지하고 원위치로 물러가도록 명령했으나 분한이 불순종하자 6월 27일 소련대표가 결석한 가운데 유엔 안보리는 북의 공산군을 격퇴하고 자주국가인 대한민국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국전에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우방 세계 16개국에서 한국전쟁에 참가했는데 그 16개국 참전국가란 호주, 베르기, 카다나. 콜럼비아, 에디오피아. 프랑스. 희랍, 룩셈불크, 화란, 뉴질란드, 필립빈, 태국, 터키 남아공화국, 영국 그리고 미국 등 16 개국이었고 그 외에도 Sweden Denmark 등이 부상병 치료를 위해서 병원선 (病院船)을 한국 전재에 지원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파병된 세계 16개국의 군병력을 지휘할 총책입자를 임명하였다.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지 불과 5년 후에 일어난 6.25 전쟁에 미국의 Harry S. Truman 대통령은 당시 일본의 항복을 받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세워진 <미 극동사령부> 사령관이던 Douglas MacArthur 장군을 주한 연합군 총사령관 (Supreme Commander of Allied Forces) 의 중책에 임명하였고 MacArthur 장군은 1960년 6월 30일 처음으로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유엔군의 참전이 시작되었다.

북한 공산군은 계속 남진하여 전라도가 모두 점령당하여 적색 공산분자들이 준동하며 여기저기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양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경상도 일부만 겨우 공산군이 침투하지 못한 지대로 남아 있는 정황에서 낙동강을 필사로 건너려는 인민군과 유엔군 사이에 치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낙동강은 문자 그대로 <피바다> 로 변했다. 국민들은 안절부절했고 교회에서는
날마다 새벽기도회에서 나라가 공산화되지 않고 북의 공산군이 물러가기를 열심히 기도했다.

1950년 9월 15일 MacArthur 장군은 인천 앞바다 월미도 (月尾島)에서 기습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공산군을 물리치고 9월 28일에 서울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서울은 수복되어 숨어 살던 서울 시민이 유엔군의 입성을 환영했다. 공산군은 패주하면서 또 다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들이
북에서 반공 인사들을 처형할 때처럼 잔인하게 양민들을 학살하고 북으로 도주하여 많은 생명이
공산군에게 희생되었다.

헌편 지금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 남하하던 인민군은 유엔군의 급습을 당하여 보급로가 끊기어 일부는 북으로 도주하고 북으로 도주할 수 없었던 인민군의 일부는 전라도 지리산으로 은신했다. 지리산으로 도주한 패잔병은 나중에 Viet Cong 같은 <빨치산> 이 되어 그 지방의 양민들을 밤마다 괴롭혔고 전투경찰은 <공비토벌> 에 여넘이 없었다. 당시 신문들은 늘 <전투경찰의 공비토벌> 소식을 전하고 있엇다. 그 때만해도 비록 국민의 생활은 가난했지만 온 국민이 투철한 <반공정신> 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북으로 도주하는 인민군을 추격하는 미 8군 (EUSA) 과 Ned Almond 중장이 이끄는 미제10사단 (US X Corps) 과 미제1해병사단 (First US Marine Division) 은 파죽지세로 인민군을 추격하여 계속 북진하여 1950년 10월 19일에는 드디어 평양을 탈환하여 평양시민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며칠 후 북진하는 유엔군의 선발대는 드디어 압록강에 도달했다. 헤산진 (惠山鎭) 과 초산(楚山) 을 탈환한 백선엽 장군의 휘하 장병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증정했고 철두철미한 반공인사였던 국부 (國父) 이 대통령은 감격했다.

<실지 회복>이 다되어 북에서는 통일을 앞에 놓고 축제분위기였으나 한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군인도 민간인도 상당히 많이 죽었다. 내무서원들 (북의 경찰관의 호칭) 이 반공주의자들을 잡아다 목에 무거운 돌을 달아매고 동리 우물에 넣어 죽이기도 했다. 황해도에서는 과수원 사과나무에 사람을
묶어 도끼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했고, 광산이 가까운 마을에서는 사람을 광산의 갱도(坑道)에 넣고 폭파시켜 죽이기도 했다. 저의 선친(先親) 의 경우는 더욱 가혹하게 처형되었는데 반공분자를 20명씩 무명으로 묶어서 방공호 안에 생매장하여 버렸다. 나중에 평양이 탈환되고 유엔군 CID (Criminal Investigation Division 범죄 수사부대) 가 수사한 결과 방공호을 발굴하니 시체 80여구가 발견되었다. 무서운 세상이었다.

<유엔군이 만일 38 선을 넘어오면 우리 중공군이 전투에 개입한다> 라고 협박했던 모택동은 유엔군이 압록강에 이르자 드디어 그의 100만 군사를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투입시켰고 인해 전술 (人海戰術)로 닥아 오는 중공군과 또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추운 날씨에 유엔군은 후퇴했다. 1950년 11월 초의 일이다. <인해전술> 이란 무엇인가? 중공군은 매번 3중으로 공격해 왔다. 처음 최전방에서 밀려오는 병사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굉과리를 치며 피리를 불며 공격한다. 이들이 전멸하면 제2선이
또 몰려온다. 이들은 먼저 앞에 갔던 병사들이 놓고 죽은 무기를 집어 들고 공격해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2선이 무너지면 제3선도 같은 방법으로 공격한다는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종공군은 계속 달려 들었다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 인해 전술이었다. 제2선이나 제3선에 투입된 병사들은 무기가 없이 뒤에서 따라 올뿐이다. 이렇게해서 죽은 중공군의 전사자는 50 만이 넘는다. 유엔군의 10배 이다. 계속 후퇴하는 유엔군은 옛 38선 근처에 까지 물러가 그 근방에서 공산군과 싸우고 있었다.

한국전에서 가장 비참했던 전투는 함북 <청진호> 에서 유엔군이 중공군 10개 사단에게 포위되어 싸우다가 극적으로 퇴각에 성공한 일이다. 1950년 10월 중순부터 시작된 17일간의 전투 기간에 유엔군 미 해병대 제1사단 과 미 보병 제7사단을 중심한 다른 유엔군 도합 20,000 명이 함북 청진호(湖) 에서 중공군 7개 사단과 지원병력 200,000 명에게 포위되어 고투했는데 나중에 중공군 중원부대 까지 함하여 10개 사단이 포위에 가담하여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11월 26일 그 지방부대에게 흥남으로 철수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흥남으로 유엔군 부대가 이동하여 철수가 시작되어 12월 11일에 저 유명한 <흥남철수 작전> 이 완성되어 많은 피난민이 군인과 같이 배를 타고 철수했다. 이때의 광경을 노래한 것이 세속음악 가운데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노래이다. 이 작전에서 유엔군은 사상자 2,500명, 부상자 5,000 명, 동상 7,600명이라는 아주 엄청난 손실을 보았고, 한편 공산군은 사상자 25,000명 부상자 12,500명 동상자 3 만명 이라는 피해를 보았다.

1951년 6월 23 일 전쟁발발 1년이 다 되어가던 시절, 당시 유엔주재 소련대사 Jacob Malik 는 유엔에서 휴전을 제안했고 51년 7월 8 일에는 유엔군과 중공군 인민군 대표들이 서울 북방 35마일 지점인 개성에서 처음으로 모여서 정전(停戰) 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담은 2년이나 지루하게 성과 없이 지연되었다.

문제는 <포로교환> 안건이었다. 당시 유엔군은 거제도 장승포 하청 등지에 많은 중공군포로 와 인민군 포로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중공군 포로들 중에는 반공주의자들도 많았다. 북괴군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거제도 장승포에서 피난 생활할 때 들은 이야기 이지만, 인민군 포로수용소에서는 동료포로들이
동료포로들에게 맞아 죽어갔다고 한다. 한 막사 안에 친공포로가 많으면 그 안에 있는 반공포로들이
수난을 당했고 반대로 비록 포로로 잡혀왔지만 공산당을 싫어하는 반공포로들이 많으면 그 막사에서는 친공포로들이 숙청의 대상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처리된 시체는 식사 운반용 통이나 오물통에 넣어서 밖으로 버려졌다고 하다. 이것은 장승포나 하청의 그 많은 수용소의 그 많은 막사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일이었다. 낮에는 모두 POW 라는 흰 페인트로 쓴 글씨가 선명한 누런 외투를 입고
밖에 나와서 일을 했다. 밤에는 북의 군가도 들려왔다. 북에서 나를 인민 재판하던 그 날 밤, 평남 순천군 자산면의 어느 살골 짝에서 산비탈에 줄지어 앉은 인민군이 블러대던 기분 나쁜 노래였다.

이런 포로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유엔군측은 포로 송환하는 원칙과 절차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각별히 말이 많았다. 포로교환 문제는 심각한 문제여서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였다. 쌍방 포로를 개별적으로 포로 각 개인의 의사를 물어서 본국으로 송환을 원치 않은 사람들은 본인이 원하는 제3국으로 보내자는 것이 유엔군 측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그런 원칙을 인정하지 않고 전체를 일률적으로 교환하자는 것이어서 피차 의견이 엇갈려 세월이 무려 2년이나 걸렸다. 그간 쌍방은 계속해서 처음에는 개성에서 나중에는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이동하여 정전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1953년 그 악독하던 Stalin 이 죽자 북측은 우선 병든 부상병부터 먼저 송환하자고 제의하여 이를 받아 들여 쌍방 부상자 송환이 시작되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기 직전, 휴전 전야에 이승만 대통령은 극적으로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의 자격으로 <반공포로> 들을 자유대한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석방해 주었다. 27,000 명의 북한 인민군 포로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 역사에 남을 저 유명한 <6.18 포로석방> 사건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로 공산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유대한에 남아 생계를 꾸려가게 된 “인민군” 장병은 감격에 차 있었다. 이렇게 되자 포로교환에서는 중립국 포로교환 감시위원단 (UN POW Repatriation Commission of the Neutral Nations)의 감독을 받으며 1대 1로 모든 포로들을 각개인의 의사를 물어서 본국 송환 여부를결정했다.

이때 군사정정위원회(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를 만들어 포로를 관리했는데 북으로 송환을 거부한 인민군 포로의 수는 22,000명이었고, 유엔군 장병중 본국으로 돌아 가기룰 원치 않는 수는 350명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새로 설정한 비무장지대에 일시 수용하여 쌍방에서 설득하기로 했는데 유엔군은 모두 설득되어 각자 자기 본국으로 돌아갔고 인민군과 중공군은 겨우 600명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제3국 즉 인도 나 대만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석방한 반공포로 수에 가산되지 않은 인원들이었다.

이때 나는 <유엔군 총사령부의 방송(> VUNC, Voice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에서 순회기자 (roving reporter) 로 일하면서 고학하던 나이 어리고 꿈이 많은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당시 부산 제1부두 근처에 있던 미 8군 사령부 보도과에 가서 자료를 얻어서 UN 의 도움을 얻은 여러 한국 기관들, 이를테면, 병원, 고아원, 모자원, 학교, 사업체, 4-H Club 등지를 다니면서 15분짜리 인터뷰 녹음테이프를 만들어 대화 내용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번역한 원고와 테입을 일본 동경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 방송 본부에 보내면 동경에서는 위진록 홍양보 호기수 같은 아나운서가 편집하여 밤 1시에 북한으로 방송하는 심리전 방송이었다. 낮에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녹음하는 일을 밤에는 학교에 나가서 공부했고 저녁에 9시가 넘어 집에 들어와서는 부산시 초량동에 있던 하숙집에서 잡을 잤다. 나는 석방된 반공포로 6명을 당시 부산 광안동에 있던 studio 에 모시고 그날은 특별히 30분간의 대담을 나누었다. 모두 눈시울이 뜨거웠다. 자유를 찾게 되었으니 즉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4 Km 거리의 비무장지내들 설정해 놓고 상호 무력도발을 금하며, 한반도에 평화가 올 때까지 휴전의 계속 효과를 유지하도록 했다. 1953년 7월 26일의 밤은 유달리 요란했다. 밤 10시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쌍방은 휴전을 하루 앞두고 한 치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백병전을 벌였고 드디어 7월 27일 아침 10시에 정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는데 UN 군을 대표하여 유엔군 사령관 Mark W. Clark 중장이 서명했고, 인민군을 대표하여김일성이, 중국 인민 의용군 을 대표하여 팽덕회 중장이 각각 서명했다. 대한민국 국군측은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유는 휴전을 반대했으며 앞으로 인민군이 다시 도발해 올 경우 한국은 고립될 우려가 있으므로 서명을 거부했다. 이 휴전 협정은 1953년 8월 28일
유엔 총회에서 인준되었으며 한국과 미국은 그해 즉 1953년 10월 1일 북괴의ㅣ 도발을 우려하여
<한미 상호 방위 조약> (ROK-US Mutual Defense Treaty) 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김일성이 시작한 전쟁은 3년간 100 여 만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초래했고 많은 사람이 부모 친척을 잃었고, 가정과 고향을 잃어 실향민으로 전락했다. 김일성 한 사람의 적화 통일 욕심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지금 부산 대연동에 가면 유엔묘지가 있는데 참전 16 개국에서 온 젊은 장병들의 사체가 안장되어 있다. 미국의 Washington 근교에도 Koean War Memorial 이
있서어 비오는 날에 우비를 쓰고 전진하는 여러 미군 병사들의 늠늠한 모습이 서 있다. 눈길을 끄는 말은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글귀이다.

그 정정 협정 (Armistice Agreement) 이 발효된지 54년이 흘렀다 그간 북한은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Pueblo 호 납치 사건, 간첩남파, 청와대 습격하건, 서해교전 사건등 많은 정전협정을 위반했다. 한국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간첩들이 제멋대로 활동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어 버렸고 적화통일의 위태로운 시기에 와 있다. 나라의 위정자들 중에는 북의 공산당을 우방이라고 주장하고 우리가 공산당의 침공을 받을 때 우리를 구출해 준 혈맹인 미국에 등을 돌린다. 미국이 한국의 통일을 방해했다고 하지만 한국의 통일을 방해한 것은 모택동의 중공군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 기도의 제목

지금이야 말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 이다. 나라를 위해서 울자, 남한정부의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도록 기도하자. 나라의 위정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지 않는가?

또한 북한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기도하자. 북의 김정일은 오로지 개인의 영달만 생각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적화 통일하려고 온갖 술책을 다 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무서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압제받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2,300만 북한 동포들이 인간의 기본 권리를 무시 당한 채 노예처럼 살고 있지 아니한가? 300 만명이 굶어 죽었고 그 수 많은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r고 있지 않는가? 그 목숨들도 우리의 목숨과 같이 중요하고 김정일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목숨들이다 그런 목숨이 무참히도 정치범수용서에서 죽어가고 있다. 북의 동포들이 해방되는 날을 위해서 기도하자. 그들도 내 동포들이 아닌가? 히브리 13장에는 “우리도 몸을 가졌으니 갇힌 자를 생각하라” 라고 가르쳐 준다. 북의 동포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탈북 하여 중국 땅을 유리하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6.25 동란> 정전협정 54주년을 맞으면서 옷깃을 여미고 대한민국이 번영하고 자손만대에 참 자유 민주 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하자. 다시는 공산당의 마수가 대한민국을 침범 하여 백성을 유린하지 못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다니엘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기도했다. 우리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6.25 사변 정전 협정 54 주년을 맞으며, 끝-

사진 설명: 1950 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가 한국전쟁에 16개국 파병을 결정하고 있다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회장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전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 (VUNC) 순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