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에서 밤을 지새웠다 필사적으로 몸을 비볐다-제주오키나와평화기행서평 강신천

동굴에서 밤을 지새웠다 필사적으로 몸을 비볐다-제주오키나와평화기행서평 강신천

학살 벌어진 동굴서 홀로… 조명은 랜턴과 촛불뿐

힘든 작업 멈출 수 없는 까닭, 이시우 작가가 기록하는 4·3 항쟁의 현장

강신천(mumu)

사진작가 이시우의 신간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서문에는 제주의 큰곶검흘굴(대림 동굴) 이야기가 나온다. 폭설을 배경으로 동굴 사진을 찍고 싶었던 이 작가는 제주에 곧 폭설주의보가 내려질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서둘러 강화에서 제주로 날아갔다. 그리고 원하던 그림의 사진을 건졌다. 촬영 후 작가는 폭설이 내리고 있는 산을 내려갈 방법이 없어 동굴에서 밤을 지새웠다. 서문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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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을 촬영 중인 이시우작가. 2014년 4월 제주에서 동굴을 촬영했다. 그는 휴대가 간편한 작은 ‘똑딱이’카메라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 날은 필자의 카메라를 함께 사용했다.
ⓒ 강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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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상황에 맞서는 작가정신
“나(이시우 작가)는 배낭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바닥에 깔고 배낭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잠이 들면서 이러다가 너무 추우면 동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곤은 그 걱정을 감당하지 못했다.

추위에 잠이 깼다… 눈을 떴지만 동굴의 완벽한 어둠은 눈을 뜬다는 것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피곤이 몰려왔지만 한기에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필사적으로 몸을 비볐다. 비비는 손을 떼는 순간 한기가 나를 덮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좀 여유가 생긴 때문일까? 비상용으로 준비해온 발열 팩이 생각났다. 발열 팩의 위치를 기억해낸 뒤 비비던 손을 신속히 날려 발열 팩을 꺼내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심장에, 두 번째로 허리에 갔다 댔다. 발열 팩의 온기가 다 사라질 때쯤 한기가 가신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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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표지. 자신을 평화사진가라 소개하는 이시우 작가가 글이라는 매체를 활용하여 만든 이 기행문은 사진작업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인화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와 통찰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 도서출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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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이런 극한의 한계에 맞선 작가 정신이 구절구절 배어있다. 나는 화가고, 이시우 작가는 사진작가다. 강화에 사는 우리는 2006년부터 ‘강화민족예술인총연합회(강화민예총)’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관계를 맺어왔다. 그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한 날이 생각난다. 깨끗하게 정돈된 낡은 책방 같은 인상이었다.

벽마다 온통 책이 빼곡했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거의 없고 근현대사, 정치, 사회과학, 한국전쟁 및 동아시아 역사 자료집으로 채워져 있었다. 멋진 카메라와 다양한 인화지, 암실을 기대하고 간 나는 그가 여느 작가와는 작업 방식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시우 작가와 함께한 제주 4·3 유적지 동굴 답사는 총 세 번이다. 첫 번째는 2013년 봄이었는데, 20여 명이 함께 한 ‘사진작가 이시우와 함께 하는 제주 4.3 평화기행’ 코스 중에는 동굴 답사가 있었다. 지난 2014년 4월의 두 번째 방문은 내가 그의 촬영 도우미를 자원해서 따라갔다. 2014년 여름에는 책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에 삽입할 제주 4·3 동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함께 갔다. 동굴 지도는 이번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에 넣을 계획이었는데, 보완 작업이 필요해서 다음 기회에 완성하기로 했다.

동굴 촬영은 혼자 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이시우 작가는 혼자서 수십 차례 동굴촬영을 했다. 혼자 동굴 촬영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도우미로 두 차례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의 촬영 도우미를 자처해 간 날 우리는 김밥과 물을 사 들고 동굴로 갔다. 동굴 안에서 용변을 볼 수 없으니 억지로라도 큰일을 보고 들어가야 했다.

그날 밤 동굴에서 함께 잠을 잤다. 동굴 벽과 바닥 사이에 길게 이어진 용암두루마리 위에 가져간 접이식 비닐 방석을 깔고 간신히 누워 두 시간가량 잠들었다. 바닥은 온통 물과 뾰족한 용암돌기 뿐이어서 몸을 뒤척일 수도 바로 눕기도 어려웠다. 종일 몸을 쪼그려 사진을 찍고 조명을 옮기면서 녹초가 됐지만 잠이 쉬 오지 않았다. 이 작가는 곧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깰 것을 염려해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어둠 외에 아무것도 없는 바로 옆이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랜턴과 초만 사용해 혼자서 동굴 사진 찍기도

동굴 촬영 작업은 둘이 하기에도 고된 일이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굴의 반대 방향에서 불을 밝힌 다음 노출을 확인하고, 다시 반복하는 일이었다. 랜턴과 초 외에는 가져간 조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굴이 너무 좁고 낮아서 늘 허리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가끔 장소를 옮겨 허리를 펼 수 있었고, 그때마다 “에구”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작가가 “혼자 작업할 때보다 좋아요. 혼자 작업하면 왔다 갔다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데…” 하며 좋아했다. 새로 발견한 유물을 촬영하던 중 카메라 배터리가 방전됐다. 이 작가는 “카메라가 우릴 밖으로 나가라고 하네요” 하며 순박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러게요”하며 함께 웃었다. 동굴 촬영 작업은 절반도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함덕 해변으로 갔다. 하얀 모래 해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유채가 만발한 해안을 따라 걸었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미군을 기습 공격하는 보트를 숨기기 위해 만든 동굴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의 가미가제 보트 특공대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마치 전투기처럼 군함으로 돌격해서 자폭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어요” 라고 동굴에 대해 설명했다.

그날 바다는 태평했다. 돌고래는 삼삼오오 해안을 따라 유영하고, 동굴 뒤 벼랑 위에는 군락을 이룬 이름 모를 잡목들이 줄지어 서서 반짝이는 이파리들을 흔들었다. 다음날 강화로 돌아온 뒤 내 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몇 주 후에 기행문에 들어갈 동굴 지도를 제작하러 가자는 말에 내 맘은 이미 제주의 동굴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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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사진 조명은 작은 양초와 휴대용 랜턴이 전부였다. 동굴 천장이 낮아 촬영하는 내내 허리를 숙여야했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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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에서 발견한 역사의 상흔

영화 <지슬>의 무대였던 동광리 큰넓궤에는 유물이 많았다. 거리 측정기와 나침반을 사용해 동굴 지도를 제작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전날 도틀굴에서 이미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빨리 적응됐다. 거리를 측정하면서 새로운 유물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단추, 삼각자, 깡통, 병 등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물건이었다.

유물이 발견될 때마다 이 작가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 이건 왜 못 봤지? 이 단추는 처음 보는 건데” “이건 4·3 박물관에 전시해야 할 정도의 유물인데, 강 선생은 정말 잘 찾네요”하면서 유물을 살폈다. 필자가 유물을 또 찾으면 “아 또 발견했군요”하며 밝은 얼굴로 다가와 살핀 후 사진을 찍었다. 발견한 유물을 보고 “여기 동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네요”하고 전하자 이 작가는 유물을 요모조모 살핀 후 자세히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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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섯알오름 학살터 이 곳에서 일어난 사실을 방관한 채 바라보면 한가롭고 무심한 풍경이다. 이곳에서는 1950년 8월 20일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357명 중 252명을 새벽 2시경과 5시경 2차에밤중에 총살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하였다.
ⓒ 강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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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 만든 단추는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어요. 이 문양은 벚꽃 문양이군요. 이화 문양은 아닌 것 같아요. 벚꽃 문양은 일제 강점기 때 군복에 있었던 거예요. 여기에 이 단추가 있다는 것은 학병 출신이거나 혹은 일제에 관계했던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는 일제강점기의 국내 산업 시설과 상품 유통은 물론이고 일본의 산업 구조가 어떻게 대한 제국의 소비 생활 전반에 영향을 줬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안경 제작자와 조선 최초의 안경 제작자, 단추의 재질과 문양에 따른 사회 변천사는 물론이고 고무신, 통조림 캔, 지퍼 같은 공산품 외에 뼈의 특징을 구분해 발굴된 뼛조각들이 어느 동물의 뼈인지도 구분하고 있었다.

제주 동광리 큰넓궤의 깊은 곳에서 이시우 작가와 단둘이 앉아 나누던 대화가 떠오른다. 어둠이 사방을 채운 고요한 공간에서 주고받은 말들은 바위에 새겨진 듯 생생하다.

“4·3 학살의 비극이 없었다면 정말 멋진 동굴이었을 텐데요. 수십 만 년 전에 만든 풍경 그대로잖아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요” 하고 그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또 “우리가 발견하고 촬영한 것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단서가 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렇게 돼야지요” 하고 짧게 대답하며 웃는다.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죠?”하고 질문을 던지자, 낮은 목소리로 길게 답했다.

“네. 토벌대에 동굴이 발견되자 주민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한 것으로 생각돼요. 저쪽 입구 돌담을 쌓은 곳에서 다량의 탄피를 발견했지요. 그러나 정확한 사실은 알지 못해요.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도망치다 토벌대에 붙잡힌 사람들은 정방폭포 부근에서 모두 총살당했어요. 모두 86명이나 되었고, 주민은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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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지에서 강의 중인 이시우 작가(사진 왼쪽)와 필자(오른쪽 두번째)
ⓒ 강신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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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시우 작가는 4·3항쟁에 관련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4·3의 발생 배경부터 진압 과정, 그리고 항쟁을 주도한 인물과 진압군 책임자의 행적까지 세밀하게 연구했다. 4·3 동굴 사진을 찍기 전에 그는 4.3항쟁의 전문가가 됐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작가들과는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다. 소위 사진작가라 불리는 사람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 작업보다는 근현대사 공부를 더 많이 하는 게 독특하고 새로웠다. 작가는 당연히 자기가 투사하려는 대상을 이해하고 이를 체화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지만, 이시우 작가가 실체를 이해하는 데 들이는 작업 시간과 강도, 깊이는 남달랐다.

그는 작업에 필요한 문제를 알기 위해 국회도서관을 수백 번 찾아갔고, 사라진 희귀 서적이나 고서를 구입해 읽으며 수십 년이 지난 신문, 잡지를 탐독한다. 그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현장을 직접 방문해 자료들을 취재한다. 미군을 주제로 사진 작업할 때는 주한 미군부대뿐만 아니라 일본과 독일의 거의 모든 미군 부대를 다 찾아다녔다. 이시우 작가는 지뢰, 민통선, 미군, 한강 하구를 주제로 몇 번의 사진 전시회를 열었는데, 사진전이 열리기 전에 그는 그 분야 전문가 수준의 해박한 지식을 쌓았고, 박사 논문 수준의 단행본을 펴냈다.

단추 하나 속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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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추와 탄피 제주 4.3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한 단추와 탄피. 작은 단추 하나라도 세계체계의 안목에서 관찰할 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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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쓴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그가 <민통선 평화기행>을 발간한 지 11년 만에 나왔다. 그동안 제주와 오키나와는 물론이고 시베리아, 캄보디아, 중국 등 단서가 될 만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기록을 모으고 증언을 채록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세계를 보는 그의 안목과 통찰은 <민통선 평화기행>을 쓸 때보다 더 깊어졌다.

이 책의 핵심어는 ‘체계’다. 세계 체계, 미군 패권 체계, 유엔사 등의 체계 속에서 우리의 운명을 조망하고 있다. 이 작가는 제주 동굴의 단추 하나, 오키나와의 사탕수수 하나라도 결국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유라시아는 물론 세계 체계 속에서 바라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우연이란 없다. 우연으로 보이는 일의 바탕에는 거대한 구조가 있다. 그것이 우연으로 비치는 것은 세계체계에서의 지위와 역할이 미미하고 그로 인해 강렬한 이해관계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도 세계체계와 대결하는 통찰과 기획력이 있을 때 우연은 필연으로 전화한다. 심지어 ‘산 위의 배’라도 말이다.”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중에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778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ss_pg.aspx?CNTN_CD=A0002047789&PAGE_CD=N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