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역사달력사진’05.3월 충렬사2005/02/18

순간은 남고 구름은 갑니다. 선택의 가치는 이利로움이 아니라 의義로움에 있습니다.

충렬사
청나라 병사들이 강화로 짓쳐들어옵니다. 해안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기세 오른 청군은 강화성 남문까지 들이닥쳤습니다. 남문이 열리면 강화는 끝입니다. 조선의 패배입니다. 성 안 백성들이 온 힘을 다해 청군을 막습니다만, 역부족. 항전을 독려하던 77세의 노 신하 김상용(1561-1637)은 화약더미에 불을 지펴 자신의 몸을 사릅니다. 적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 자결입니다. 적에게 잡혀 구차한 삶을 사느니 깨끗한 죽음을 택한 겁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몇 년 뒤인 1642년(인조20), 김상용 선생 등을 모신 사우 충렬사가 선생이 살던 선원면에 세워집니다. 충신들의 넋을 영원히 기리기 위함이었죠. 건립 당시 현충사(顯忠祠)라 했으나, 1658년에 효종 임금으로부터 충렬사(忠烈祠)로 사액을 받았습니다. 지금 충렬사에는 김상용 선생 외에 스물여덟 분이 배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