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키나와평화기행 서평

누구신지 긴 서평글을 올려주셨네요.

http://www.scjtv.co.kr/won/link/?item_no=827365

대한항공 황제의 딸, 공주 조현아는 직원들에게 온갖 폭언을 일삼다 못해 수백명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되돌려 쫓아내 버리기까지 한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니 무슨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타면 소리치고 지적하고 혼내고 벌벌 떨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초췌한 얼굴의 수염이 거친 이창근 님은 쌍용자동차의 70미터 굴뚝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외치며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지고 강풍이 분다.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해를 넘긴 1월 11일 현재까지 그는 여전히 굴뚝 위에 있다.

지난 주부터 동백꽃 눈물이 부제로 붙은 사진작가 이시우 님의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읽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행 비행기표를 끊고 무엇을 읽으며 여행준비를 할까 하다가 한울빛 도서관에서 검색했더니 따끈한 새 책이 나와 있었다. 서문이 이렇게 시작된다.

“바람이 분다. 왠지 마음이 설레어 빨래를 했다. 빨랫줄에 빨래를 널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하다. 빨래들이 제각가 펄럭인다. 바람은 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여서만 저를 느끼게 한다.” (10쪽)

온통 가볍지 않은 일상들로 둘러쌓여 있는데, 내 일상은 가볍고 설렌다. 간혹 죄스럽기까지 하다. 왜 이렇게 나만 평화롭고 즐거우며 아름답고 행복한가. 그런 평화와 행복이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친구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 갈 길 가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해결책을 찾아내어, 달걀로 바위치기가 아닌, 선녀의 옷자락으로 바위를 닳게 하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해결책들이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이야기들이 선의든 악의든 전부 평행선을 그으며 나아가 버리니 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하겠다. 언제나 ‘무엇을 할 것인가(Chto Delat)’다.

동의할 수 없지만 많은 생각과 공부를 통해 얻은 그의 생각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다. 재미도 없다. 글을 잘 써서 읽기에는 좋으니 단점과 장점이 마구 섞여 나오는 책이다.

“빛을 보는 것이 관광이다. 그러나 빛보다는 어둠이, 쾌락보다는 고통이, 시각보다는 통각이 여행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행의 旅는 나그네란 뜻 이전에 군대란 뜻을 가지고 있다. 금석문에 旅는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군인들의 모습으로 상형되어 있었다. 군대와 나그네의 무슨 공통점이 하나의 단어 속에 녹아들어 간 것일까? 그 둘은 성 밖을 나서서 개척하는 존재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난 군대는 개척한 땅에 다시 성을 쌓고 보수화되고 반동화 된다. 그러나 나그네는 성에서 쫓겨나 성 밖에서 새로운 주체를 만나고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을 예감하는 자이다. (중략) 주체란 아래(sub)로 던져진(ject) 자이다. (중략) 나그네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자에서 만드는 자로 바뀐 (중략) 프랑스혁명에 참여했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자연에의 몰입이라는 종교를 만들어낸 시인 워즈워드가 고원과 평원을 혼자 걸어 다니며 부랑아나 거지, 석방된 수인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면을 연상하며, 새로운 여행문화에 흐르기 시작한 혁명의 피를 읽을 수 있다.” (15~6쪽)

서문에 해당하는 글 뒤에는 세계체제, 평화, 군사기지, 미사일 방어체제, 평화운동 등이 쭈욱 이어진다. 그리고 표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새로운 이야기다. 그저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것이 표류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역사 속에 실재한다.

“조선 성종대의 학자 최부는 부친상을 통보받고 나주 고향 집을 향해 배를 띄웠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끝에 중국 강남의 뭍에 닿아 여섯 달 만에 귀국하여 다시 돌아온 곳 (제주)조천관 터. (중략) 제주와 오키나와 사람이 가장 많이 교류한 것은 교류할 목적이 전혀 없었던 난파와 표류와 표착이라는 목숨을 건 항해를 통해서였다. (중략) 1475년 2월 초 제주도에서 서울로 보내는 귤을 싣고 배 한 척이 떠났다.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14일이나 표류하던 끝에 요행히 류큐 남단에 있는 윤이도에 닿았다. 그들을 오키나와로 이끈 것은 구로시오 해류였다. 제주에서 표류하면, 난류를 따라서 서남쪽으로 흘러가서 오키나와나 중국 남부해안으로 흘러들어 간다. (중략) 오키나와에서 표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대마 난류 쪽으로 흘러가면서 제주도를 거쳐가게 된다. 구로시오 해류가 한반도와 류큐를 연결해 온 교섭로 역할을 한 것이다. 류큐 왕국은 제주도 표류민에 대해 대체로 융숭히 대접한 후 조선으로 송환시켜 주는 것이 관례였다.” (109~112쪽)

이런 상황이라면 서로를 위해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노동자가 고대에서 환생한 노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누가 선을 악으로 갚을 수 있느냐고 하는데, 선을 악으로 갚으면서도 할 말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 때는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일본이 망하지 않을 줄 알았다.

“오키나와인이 조선 표류민을 극진히 대접하여 청나라를 통해 송환한 데 비해, 조선은 잔혹하게도 표류한 오키나와인을 약탈하거나 학살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광해군 3년(1611) 3월에 류큐국 왕자가 제주에 표착한 것을 못된 관원들이 살해한 사건이 벌어진다. (중략)부왕을 만나러 가던 왕자 형제들이 풍파를 만나 표류한 것인데, 목사 이기빈이 판관 문희현과 포위하고 모조리 죽인 뒤 그 재화를 몰수했다. (중략) 1782년 정월 9일, 류큐에 표류해 왔던 조선 제주 백성들이 북경에 도착하였다. (중략) 우리나라(류큐) 사람이 너희 나라(조선)로 표류해 갈 때마다 너희 나라에서는 항상 이들을 죽여 송환해주지 않는다. 예부터 지금까지 죽어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나라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이렇게 구조하여 보호해서 송환하고 있다. 조선 표류민들은 이 말을 듣고 ‘수치스러워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112~6쪽)

일본이 노략질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국가 차원의 침략 전쟁을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때부터다. 1592년.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약탈과 원주민 살육이 시작된 지 꼭 100년 만의 일이다. 그들이 그들에게 배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침략의 열매는 달콤했던 모양이다. 끊임없이 침략하고 침략한다. 김남희의 글에 의하면 류큐 왕국은 임진왜란 당시 왜의 요구를 거절하고 조선 침략에 가담하지 않았다. 조선은 예로부터 그들의 이웃국가이기 때문에 침략은 부당하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한 보복은 1609년에 이루어진다. 평화롭던 류큐 왕국은 에도바쿠후의 침략을 받아 정복되고 만다. 안타까운 역사의 시작이다.

“표류가 국제관계 변화에 가장 큰 변수로 활용된 예는 1871년 11월 타이완 사건이다. 타이완 동남부에 표착한 류큐국의 미야코지마 사람들이 타이완 현지인들에 의해 54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략, 일본은) 청국 측에 타이완 사건의 책임을 추궁한다. 이에 대해 청국은 타이완이 중국 이외의 지역이라고 답하자 1874년 5월 타이완에 출병한다. (중략) 영국의 조정하에 이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메이지 정부는 청국이 류큐민을 일본인으로 인정한 것이며, 이는 류큐가 일본 영토임을 인정한 것이라는 근거로 해석하였다. 결국, 1879년 류큐는 일본에 병합되었다. 이는 일본이 표류민 살해사건을 중화체계의 허점을 예리하게 치고 들어가는 계기로 활용한 예이다.” (121~2쪽)

풍부한 사료를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는 지루하고도 재미있다. 놀랍기도 하다. 듣도 보도 못한 책들이 기행문을 위해 등장한다. 부끄럽기도 하다. 사소한 에피소드로 삶의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깊이가 느껴진다. 표류에 대한 마지막 기록을 ‘목민심서’로 정리한다.

“다산은 표류선을 문정하는 일은 기미가 급하고 행하기가 어렵다며 지체하지 말고 시각을 다투어 달려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방관이 자신의 관할 지역에 표선이 도착했을 때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점을 다섯 가지로 설명해놓았다.

첫째, 이국 사람은 예로써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중략) 둘째, 표류선 가운데 문자가 있을 경우 인본이나 사본 할 것 없이 모두 베껴서 보고하게 되어 있다. (중략) 셋째, 문정관은 눈을 똑바로 뜨고 엄하게 살펴 문정한답시고 백성을 수탈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중략) 넷째, 매번 표류선 한 척을 만날 때마다 그 배의 제도를 그림으로 설명하며 각각 상세하게 기술해야 한다. (중략) 다섯째, 표류인과 더불어 얘기할 때는 마땅히 불쌍히 여기는 기색을 보여야 한다. 신선하고 깨끗한 것으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내주고, 저들이 기쁘게 돌아가 좋은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123~4쪽)

류큐 왕국의 역사는 오래된 독립왕국에서 시작하여 에도 바쿠후의 침략을 받아 왜의 지배와 청나라의 지배를 동시에 받던 시대, 제국주의 일본을 받던 시대, 미군정의 지배를 받던 시대와 다시 일본으로 귀속된 1964년으로 나뉘어진다. 명확하게 류큐 왕국이 사라진 것은 1879년의 일로, 일본 제국주의 메이지 정부가 슈리 성을 무장 봉쇄하고,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 현’을 세워 450년 지속된 왕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왜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살육의 역사는 한반도와 류큐 왕국을 공통으로 관통한다. 그 침략의 역사가 저 멀리 남양군도 – 필리핀 동쪽의 태평양 위의 섬들로 괌과 사이판을 포함한다 – 에서 만나는데, 먼저 한반도의 조선 백성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의 살육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본이 1914년부터 1945년 8월 종전시까지 점령했던 중서태평양 남양군도(현, 미크로네시아-Micronesia)에 강제 동원된 한인은 5800여명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기 남양군도 지역 한인노무자 강제동원 실태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피해처리와 진상규명을 위해 2006년 12월 직권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남양군도에 한인의 이주가 대폭 증가한 1939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간을 중심으로 실태조사를 했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인의 남양군도 이주는 1910년대 말 사이판과 코스라에의 일본인 농장으로 수백 명의 노무자들이 송출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1938년 까지 이주한 한인의 수는 704명으로 남양군도 전체 인구의 1% 정도에 불과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태평양 공략의 전진기지로 지정학적 입지를 갖춘 남양군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위한 인력을 충당할 목적으로 한인의 강제 동원을 단행하였다.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결과를 보면, 일본은 국가가 개입해 난요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와 1936년 11월 설립된 난요척식주식회사(南洋拓殖株式會社) 등을 통해 한인 노무자들을 강제 동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1938년 704명에 불과하던 한인은 1939년 1264명이 증가한 1968명으로 불어났다. 1941년에는 5824명에 이른다. 이는 남양군도 전체 방인(邦人)이주자의 42%를 차지하였다. 1939~1941년 사이 증가한 한인 인구는 약 5,000명에 달한다. 이는 당시 변화된 태평양방면의 정세 및 일본의 전쟁 수행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한인 동원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39~1941년 시기 한인의 이주는 우연한 인구이동이 아니라 전쟁수행과 관련한 일본당국의 전반적인 인력수급정책 하에 수행된 것으로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1942년부터 해방까지 더 많은 한인들이 강제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어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세계한인신문(2010년 2월 25일)”

그리고, 류큐인들의 역사

평화는 지키고 가꾸어져야 한다. 보수주의자가 되어 가면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금보다 10%만 더 인권이 존중되고, 10%만 더 자유가 보장되며, 10%만 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생활을 지키는데 90%의 힘과 노력을 기울이고, 오로지 10%의 노력과 관심과 열정을 인권, 자유, 경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한다. 그 정도로 될까.

“이해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언더스탠드(understand)이다. 이는 아래에 선다는 뜻이다. 상대보다 위에 서서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 백 보 양보하여 상대와 같은 자리에 서더라도 역시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 (중략)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무기를 막기 전에 무시를 막아야 한다. 상대방의 위에 서서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와 그를 뒷받침하는 사상이야말로 무기를 들어야 할 상황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무기를 막을 수 있는 궁극의 무기는 ‘이해’이다.” (250쪽)

비극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면 더욱 쉽게 비극이 일어난다. 현재의 어려움이 미래의 더 큰 어려움 보다도 낫기 때문이다. 큰 일이다. 농사짓고 여행하고 즐기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미래에 대한 비관 때문이다. 역사가 계속 진보했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더욱 아름답게 바뀌고 있는데도 꿈이 너무 커서인지 미래가 암담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행복한 지금을 충분히 즐기려고 한다. 조금 더 힘들게 현재를 준비하면 미래는 더욱 멋있고 아름다우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시절에는 이런 슬픈 전망이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는 힘이 되지만 암담한 현실에서는 지옥만을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 결론은.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에 공격을 개시한 미군이 본섬에서 처음 점령한 곳이 바로 요미탄 마을이다. 이 마을 주민 139명이 미군을 피해 이곳 ‘치비치리’ 동굴로 피신하자마자 미국이 그들을 포위하였다. (중략, 미군은) ‘밖으로 나오면 죽이지 않고 살려 주겠다’라는 일본어로 된 종이를 전달했다. (중략, 두 명의 사나이가) 옥쇄를 거론하였다. 디들은 참전경험이 있는 재향군인이었다. (중략) 우에치 하루라는 18세의 한 처녀가 자기 어머니에게 ‘아직 깨끗한 몸일 때 어머니가 죽여주세요’라는 말을 하였고, 종군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칼로 딸을 죽인 뒤, 독극물이 든 주사기로 나머지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 (중략) 순식간에 82명이 서로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중 47명이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중략)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오키나와는 100% 희생해도 괜찬다’는 전략이 짜여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본토, 나아가 천황제를 지킨다는 이른바 ‘고쿠타이고지(國體護持)’의 철저한 도구가 된 것이다.” (306~9쪽)

전쟁은 이성을 잃게 한다. 신분과 지위, 빈부, 인종, 남여, 학력, 외모 등등 무수한 차별이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식민지를 많이 가진 것이 위대한 나라이고, 제국주의 전쟁이 위대함의 상징이었던 시대에는 차별 그 이상의 악행이 거리낌 없이 저질러졌다. 게다가 전쟁이었다. 한 명의 군인이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모인 군대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선은 사라지고, 악함만이 남는 것이 전쟁이다.

“그들은(일본 군인들) 아이들이 있으면 적군에게 들켜 폭파될 우려가 많다, 그러니 세 살짜리 이하는 처치해 버려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세 살짜리 이하가 다섯 있었소. 주사를 놓아 죽였소. 그중에는 내 아우와 조카도 있었다오. 처음에 다섯 아이를 죽인다고 할 때 우리가 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겠다고 대장에게 간청했소만, 네놈들이 스파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안 된다고 하고는 입구 앞에 보초를 세워 두고 모두 꼼짝 못 하게 해놓구서, 대여섯 명이 덤벼들어서 아이를 하나씩 집어 들고 주사를 찔렀다구요. 그 다음날 아침이었죠. 민간인으로서 살아 있는 건 당신들뿐이니까 미군에게 잡혀서 탱크 바퀴에 깔려 죽느니 차라리 우리 처분을 받아라, 그러더군요. 우리를 처치해 버리고 남은 양식을 차지하려는 게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었죠.” (316쪽)

일왕은 군부의 꼭두각시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일제의 악행에도 책임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록도 있는 모양이다. 왕실을 동원하여 군부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뭉그러뜨리고, 군부를 이용하여 왕실의 부귀영화를 지킨다는 면에서 살륙 군부와 탐욕 왕실의 결합은 아수라 백작이고, 근대 일본은 아수라 백작이 지배했고, 지금도 그 잔재들이 일본의 권력을 잡고 있다. 그와 그의 결합체인 아수라 백작이 역사의 심판대에 서 있는데도, 인간들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지만, 여러 신들께서 분명하고 가혹하게 물으실 것으로 생각한다.

“1945년 2월 (중략, 총리가) 화평의 결단을 해야 한다고 진언한 데 대해 천황이 ‘그것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린 후가 아니면 어렵지 않겠느냐’고 거부하여 오키나와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318쪽)

전후 처리가 제대로 되어야 하고, 독일과 일본이 다시는 침략 전쟁에 나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정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과 중국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확장하는 것까지 방어해야 했으니 미국의 군부는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3월 미 군부 측이 적도 이북의 모든 일제 치하의 섬들을 ‘전략지역’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루스벨트는 ‘이 지역에 대한 해군의 태도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말인가?’라며 불만을 표출했다. (중략) 군부 측이 일부 지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요구했다고 지적했으며, (중략) 오키나와와 남한에서의 점령 정책은 점령 혹은 정복으로 회귀해 버렸다. (중략) 통치의 책임자인 초대 민정 장관은 도쿄의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였으며, (중략) 1957년 6월 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류큐 군사령관은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이 되었다. (중략) 고등판무관은 (중략)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권을 행사했다.

피식민지의 고통은 끝이 없다. 이 끝없는 고통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받아야 할까. 분노와 증오로 마음을 태울 수는 없다. 내가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알 것은 알아야 하니 차분하게 사실을 기억해 둔다. 우리 조상들의 피와 고통의 기억이다. 일제의 만행이며, 미국의 무관심이다. 독립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애국. 전도되지 않은 순수한 애국심은, 나와 우리의 이웃들이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핍박과 대우를 받지 않도록 건강한 정부에 의해 보호되는 국가를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다. 나와 이웃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와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국가를 구성하는 기관이 될 수 없다.

“제주도민에 대한 일본군의 행패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 측으로부터 허용받은 무기를 들고 곧잘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모리배들과 전쟁물자에 대해 뒷거래를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군의 천인공노 할 짓이 이어졌다. 미군 보고서에 의하면 ’10월 1일 현재 제58군은 4개월 분량의 군량미를 보유하고 있다. 이 군량미는 주로 쌀인데 도민들이 50일 동안 소비할 수 있는 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군은 철수 직전에 제주비행장에 산더미처럼 비축했던 군량미를 모두 불태웠다.” (359쪽)

“맥아더는 8월 말, 24군단 하지 중장에게 한국인들을 ‘해방된 인민’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중략) 9월 4일 하지는 자신의 장교들에게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따라서 ‘항복의 조례와 규정의 작용을 받는다’라고 지시한 것이다. (중략) 남한은 적국영토에 진주한 승자의 모든 권세로 무장한 적대적 점령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점령군은 1948년 8월 15일까지 이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362~3쪽)

“미국패권과 유엔체계를 봉합하기 위한 미국외교의 발명품이었던 ‘신탁통치’는 그야말로 가장 복잡한 국제정치 쟁점이었다. (중략) 반탁운동의 시발은 ‘동아일보’의 1945년 12월 27일 자 기사였는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였다. 이같은 명백한 오보이자 왜곡기사를 제공한 배후에 미군정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루스벨트와 합참의 갈등은 이미 오키나와 점령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미국의 공식정책인 신탁통치가 스탈린의 정책으로 둔갑하는 조작을 통해 미군정은 드디어 복잡한 해방정국을 찬탁과 반탁, 적과 아로 나누는 데 성공한다. 미 국무부 극동 담당관들은 슬그머니 ‘한국 문제에 있어서 주된 요소는 신탁통치를 위한 후견의 필요성이 아니라 소련 주도하의 정부수립을 방지하는 데 있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363~4쪽)

제주 4.3의 역사는 참으로 가슴 아프다. 잘 정리해서 미래에는 이런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두가 희생자가 되고, 적어도 두 세대는 커다란 상처로 인해 고통받는다. 죽였든 죽임을 당했든.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제도가 여러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발전시켜야 할 제도다. 시민에게 권력이 주어지고 시민에 의해 정치가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단 한 표의 권력이지만 동등한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에 결과가 원하는 것이 나오지 않더라도 수긍할 수 있다. 내 생각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더 열심히 선거를 위해 뛰고 공약 이행을 위해 노력하는가를 지켜보고 다시 평가하여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공공선택이론을 창시하여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뷰캐넌은 투표로 뽑은 대리인이 주인의 뜻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는 대의제가 항상 합리적이지 않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했다. ‘총탄에서 투표용지로(from bullet to ballot)’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근대국가의 핵심수단인 선거제도는 혁명으로 유발된 사회갈등이 ‘내전’으로 전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461쪽)

미국을 정점으로 해서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는 동북아 지역의 군사력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세계 체제다. 10월 24일 UN 탄생 기념일을 놀지 않은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UN에 대한 개념이 많이 희박해졌고, 그래서 한미 군사동맹 또는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가 요즘의 단어다. 그런데도 미국은 여전히 UN의 깃발을 필요로 한다. 그 깃발 아래에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이 세계의 승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까. 한반도는 휴전상태다. 남과 북이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이 아니라 북과 UN사가 서명하였다. 만일 UN사라고 하는 실체가 사라져 버리면 한반도의 휴전협정은 사라지고 만다. 그리되면 휴전협정을 대신해서 남북의 평화를 유지할 근거가 되는 조약이 맺어져야 한다. 남북사이에 체결되든, 6국의 합의든, 미국과 남북한이 참여하는 삼국 협정이 되든.

한반도의 상황은 그대로 류큐의 땅 오키나와로 이어진다. 만일의 경우 남북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주한미군사령부가 주일미군사령부를 지휘하여, 다시 말해서 미국이 일본과 오키나와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고, 전시작전권을 이양받은 한국군까지 지휘하게 된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내 미군, 오키나와는 미군에 의해 통합지휘되는 것이다. 그런 전시상황이 오게 되면 러시와와 중국, 베트남, 대만까지 전쟁의 직간접 참여국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국제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래서 한반도는 위기 속의 평화가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 도쿄 천황궁 앞 맥아더사령부가 있던 다이이치 빌딩에서 창설되었다. 이는 7월 7일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안보리 결의 어디에도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를 창설한다는 문구는 없다. 단지 미국의 통합군사령부(Unified Command) 창설을 권고했을 뿐이다. (중략) 그러나 이 군대는 실제 유엔의 군대인 것처럼 행세했고, 지금도 ‘유엔의 군대’라고 하며, 유엔의 권위를 참칭하고 있다. 1994년 6월 24일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은 ‘유엔군사령부는 유엔의 기구가 아니다’라고 명확히 천명했다. (중략, 일본 내의) 이들 기지는 1954년 유엔사 행정협정에 서명한 유엔사 회원국에 의해 제한 없는 사용이 보증되었다. (중략) 유엔사에 참여한 회원국은 유엔에 어떤 통고도 없이 그들 병력을 철수했다. (중략) 태국이 1976년 7월 26일에 철수함으로써 미국만이 남게 되었다. (중략) 전시가 되면 주한미군 사령관과 동일인물인 유엔사령관은 미합참의장의 지휘로 들어가 주일미군사령부를 작전 통제한다.” (587~595쪽)

인류의 역사에서 평화란 존재하지 않았다. 강한 제국에 의한 약한 식민지와 노예국이 지배받는 시기의 연속이었다. 어느 나라가 되었든 강력해지면 나라 밖에서 노예와 식민지를 구하려고 나섰다. 어느 한 나라도 세계평화와 인권을 위해 나선 나라는 없다. 그런데, 오직 한반도에서만이 그런 성전이 가능한 것일까. 패전국인 일본을 미국의 군사기지화하여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데 성공한 미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그들의 국익에 합치하는 한 성군으로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성군의 개별 인자들인 미군들이 개인적으로 저지르는 온갖 범죄와 악행은 별도로 처리해야 한다. 평화는 평화로써 지켜지지 않는다. 평화를 지키려는 의지와 함께 강력한 군사력, 전쟁 억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군대가 없이 균형을 잡고 있는 코스타리카의 사례는 매우 훌륭하지만 모든 시민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에서 출발하여 뛰어난 외교력으로 내 땅의 평화를 지키고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책은 평화를 갈구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이시우가 추구하는 평화는 무엇일까.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는 멀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일까. 만일 그런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500년 장기 계획으로 실천해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아니 천년대계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200년 간의 현대 제국주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면서 지금은 국지전 개념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국지전 조차도 가라 앉혀야만 인류의 평화가 찾아오고, 내전 상태에 있는 나라들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 또 몇 십년의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평화가 오더라도 다시 위기가 찾아 오지 않도록 모든 인류가 풍요로울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굶주려서도 안되고 어느 계층에서 노예를 원해서도 안된다. 기술과 철학이 모두 필요하다. 그렇게 천 년의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한다면 다시는 동백꽃으로부터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1년이라도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이 책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100쪽에 달하는 참고문헌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의 사실, 한 줄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저술과 그 저술에 등장하는 모든 참고문헌을 섭렵한 것으로 보이고, 현장 확인과 사진 촬영 등 십 여 년이 넘는 땀과 노력이 병행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그가 받은 것은 진실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감옥에도 가야 했고, 재판도 여러 차례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평화로운 웃음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옛날을 돌이켜 보면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행복한 정치체제에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내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에서는 즐거움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짓눌린 진지하기만 한 어둠이 보인다. 평화 속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웃음을 짓고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독립과 민주주의는 끔찍한 희생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 그렇다 치고, 평화조차도 누군가의 고통스런 여정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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