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땅에 평화를 싹 틔우다.  사진가 이시우  [예산밖 예산사람] 3

분단의 땅에 평화를 싹 틔우다. 사진가 이시우 [예산밖 예산사람] 3

분단의 땅에 평화를 싹 틔우다 [예산밖 예산사람] 3. 사진가 이시우

장선애 기자 jsa7@yesm.kr
승인 2017.06.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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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정보신문

‘평화운동하는 사진가’ 이시우(51). 예산읍 주교리 출생, 예산중앙초 졸업, 예산중 1학년 때 서울로 유학. 예산이 그를 다시 소환했다. 그에게 고향 예산은 어떤 의미일까?

이시우는 이론가다. 그는 사진의 주제가 정해지면 피사체를 만나기 전, 당대의 지식수준을 독파할 정도로 공부하고, 그것을 다시 이론서로 정리해낸다. 책 한권에 1000개 안팎의 주석이 달릴 정도로 전문적인 그의 저서를 보며 그를 학자라 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책 <민통선평화기행>은 2004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출품될 정도로 수준을 인정받았고, 독일어와 영어로 번역돼 해외에서도 읽히고 있다.

이시우는 평화운동가다. 그가 사진의 주제로 삼은 민통선 비무장지대, 한강하구, 유엔사사령부, 제주4·3 오키나와 등은 모두 ‘평화’로 연결되며, 그는 평화의 실현을 위한 행동에 주저하지 않는다. ‘한강에서 서해로 평화의 배띄우기’ 운동 같은.

이시우는 사진가다. 앞서 언급한 사색과 탐구, 집필과 실천 그 모든 과정은 사진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사진가’다. 국내 유명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고, 여러 차례 국내 전시가 열렸다. 그는 비무장지대 지뢰밭에서 목숨 걸고 찍은 <지뢰꽃>(1997) 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 국제전에도 다수 초대됐다.

2007년 미군을 주제로 한 사진 작업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된 그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그러나 ‘무죄’보다 억울하게 씌워졌던 ‘국가보안법’의 굴레가 더 뇌리에 남는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시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은 쉽지만, 과정을 겪어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이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것이라면 더욱 더.


이시우의 <한강하구> 연작 사진 중 ‘철산리’. 작가는 이 사진에 대해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던 코스모스가 한들거립니다. 꽃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바람이 부는 것을 압니다”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 이시우

하지만 그는 주눅 들지 않았다. 더 넓고 깊게 본질을 탐구하고, 더 치열하게 성찰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 여정을 책으로, 사진으로, 평화의 발자취로 기록하면서.

유배를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학예를 갈고 닦아 끝내 경지에 오른 추사 김정희와 초야에 살면서도 학문에 정진해 사상의 완성을 이룬 녹문파(조선시대 신양 녹문리에서 일어난 학문계보)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그는 예산사람이다.

지난 5월 28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석모도, 폐업한 민박집을 빌려 만든 그의 작업실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었다. 긴 직사각형 공간 사방 벽엔 주제별로 정리된 책과 자료들이 빽빽히 꽂혀 있고, 칠판인 듯 유리창마다엔 판서해 놓은 탐구의 흔적들이 본질을 투사하고 있었다. 사진 한 장에 세상을 현상(現像)하기까지 그가 들이는 정성과 노고가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는 어떤 질문에도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조곤조곤한 그의 말투에서 ‘투철한 사람이 너그러운 것’이라는 그의 책 <제주오키나와 평화기행> 속 구절이 떠올랐다.

- 언제, 어떤 계기로 이곳에 정착하게 됐나?

“여기는 작업실이고, 집은 강화도에 있다. 서울에서 살다가 2000년에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비무장지대와 정전협정에 대한 고민과 활동을 해오면서 한강하구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정전협정 1조 5항에는 ‘한강하구는 민간선박의 항행에 이를 개방한다’고 돼 있다. 법률적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한강하구를 평화지대로 만들면 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다. 마침 예술가들과 함께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할 때였고, 실패도 있었지만, 여기서 살면서 숙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서해배띄우기는 정전협정을 깨자는게 아니라 지키자는 운동이다. 당시 국방부는 민간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난감해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인정했다. 그 뒤 2005년에 본격적으로 유엔사를 찾아가 그쪽에서도 좋다는 사인을 받았다. 이틀만에 번복해서 그렇지. 그 뒤로 이명박 정부 때까지도 계속 됐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 힘이 빠져버렸다. 이제 내가 아니어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능할 거라고 본다”

- 중1때 서울로 전학한 뒤 예산과 인연은 끊어진 것인가?

“어머니께서 고향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명절 때마다 예산에 간다. 친구들도 만나고. 역전시장 안 쌀집 아들로 태어나 거기서 컸다. 리사무소 앞이 우리집이었는데, 바로 옆이 생선전이라 장날만 되면 생선냄새와 새우젓 냄새에 늘 젖어 살았다. 서울로 간 뒤에도 방학에는 자주 고향집에 갔다. 사춘기 때라 집에 안있고 헤매고 돌아다녔다. 제일 많이 갔던게 무한천, 그땐 그냥 냇갈이라고 했는데 거기 가서 그냥 괜히 헤매고 다니고 그랬다”


그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유일한 사진기. 한손에 들어가는 작은 똑딱이카메라다. ⓒ 무한정보신문

- 똑딱이 카메라로 작업하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좋은 사진기로 찍어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건 일종의 허식이다. 정말 어떤 기능이 필요할 때 장비를 구해야지, 처음부터 갖출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핸드폰사진기, 똑딱이카메라도 이미 굉장히 좋은 사진기다. 사진역사에서 기라성 같은 사진가들이 쓰던 사진기에 비하면 열배, 스무배 좋은 카메라다. 수동식카메라는 기술을 배워야 했지만,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뒤로 기술적인 것은 기계가 완벽하게 해결해주기 때문에, 어떻게 내용을 담을 것인가가 사진의 중요한 기준이다. 만년필 좋은 것 쓴다고 좋은 시인이 되는게 아니라, 시적 영감이 중요한 것처럼 사진이 거의 그 상태에 왔다”

-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한다고 하는데, 펴낸 책들을 보면 엄청난 두께의 이론서더라.

“사진작업하는 전단계에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책들이다. 남들이 보지 못한 걸 찍는 게 사진가의 일이다. 우리가 찍는 사진은 거의 다 남들이 찍어놓은 사진을 자신도 모르게 반복해서 찍고 있는게 많다. 대상에 대한 연구나 공부가 돼 있지 않으면 남들이 보지 않는 관점을 찾아서 찍는 게 불가능하다. 물론 우연히, 운이 좋아서, 혹은 천재적 감각이 있어서 남다른 사진을 찍을 수는 있다.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문 경우고, 일반적으로는 알고 있는 만큼 볼 수 있고, 찍을 수 있다. 대상을 연구하고 전문가 못지 않게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학자들이 알고 있는 이론 뿐만 아니라 직접 현장에 가서 부딪혀보고 느껴보고 그래야 사진이 나온다. 오히려 이론하는 사람보다 더 전문적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뿐만 아니라 예술은 지식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론은 틀 같은 거라면, 사진이나 예술은 살아있는 자체로 이념이나 이론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가 ‘위대한 예술가이면서 위대한 사상가 아닌 사람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예술가들을 ‘딴따라’라고 부르는데 인도말 ‘탄트라’(깨달은 자)에서 나왔다.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딴따라가 될 수 없다”


이시우의 <한강하구> 연작 사진 중 ‘월곶’. 작가는 이 사진에 대해 “마디마다 가시인 철조망을, 마디마다 이슬인 거미줄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가르는 철가시마저 제 몸에 끌어안아 비추는 이슬의 작은 승리를 봅니다”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 이시우

- 이야기를 듣다보니 추사선생의 ‘학예일치’가 떠오른다.

“어려서 추사선생 이야기를 듣고, 대단한 분이니까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타고 주교리에서 신암 추사고택까지 손에 물집이 나면서 찾아 갔다. 여름철이었던 것 같은데, 고택에 걸려있던 편액 속 글씨를 홀린 것처럼 봤던 기억이 있다. 윤곽선 하나하나가 눈으로 들어오더라. 획이 보이는게 아니라, 획이 만든 선이 눈에 들어오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게 꽤 오래갔다. 이후에 추사의 예술론 중 하나가 ‘문이재도(文以載道)’ 즉 ‘글(예술)에는 도가 들어가야 한다. 도가 없으면 문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됐다. 조선시대 때 꽤 논쟁이 됐는데,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는 파와 ‘도가 안담기면 예술이 아니다’는 파로 나뉘었다. 나는 ‘문이재도’가 맞다고 생각한다. 천재적 예술가가 있긴 하지만, 난 일찍부터 생각이 굳어져서 그런지 공부하지 않고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 그 뒤로 추사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진 않았나?

“조선시대 학문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그러면서 예산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게 굉장히 진보적인 역사를 가진 고장이라는 것이다. 추사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 유일한 유물론철학을 했던 녹문학파도 있다. 임성주라는 사람이 일으킨 학파인데, 학계에서도 거의 안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이단시돼서 취급받지 못했지만, 임성주-임정주 형제에 이어 여동생 임윤지에 와서 완성이 됐다. 임윤지를 임윤지당이라고 부른다. 사임당이나 난설헌이 유명하지만, 사상의 높이와 깊이를 볼 때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철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문광부 이달의 인물로도 한 번 소개된 적이 있는데, 임성주와 임정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학자들의 연구자료가 더 많다”

- 녹문학파에 대해서는 예산지역에서도 잘 모르는 이야기다.

“옛 문헌에는 녹문학파가 활동한 녹문리가 공주로 돼 있어서 찾아봤는데, 아무리 뒤져도 없더라. 그러다 우연히 이회창 선영 관련한 기사에서 예산군 신양면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녹문학파가 율곡학파에서 가지쳐 나왔고, 당시에는 예산이 기호학파의 중요한 근거지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1990년대 후반에 전국의 지역사상을 주제로 글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보수적인 고장으로 꼽히는 예산, 대구 등지를 찾아다니며 연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산도 대구도 굉장히 진보적인 역사가 있는 곳이더라.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바뀌게 된 거지. 나 개인적으로는 고향 예산에 관한 집필이 첫 번째 학문적 글쓰기였다”


칠판이 돼버린 유리창. 경제학과 철학, 역사… 탐구와 사색의 과정이 오롯이 담긴 글씨들이 햇빛을 만나 바깥세상과 하나가 돼 가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 그밖에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준 예산에서의 시간들을 꼽는다면?

“정확히 몇 살 때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역전시장에서 읍내까지 걸어가본 적이 있다. 새로운 세상의 끝을 본 거다. 또 한 번 영나다리를 건넜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게는 무한천 건너가 세상의 끝이었는데 거기를 건너서 신원리까지, 내 발로 걸어서 ‘다른 세상’을 처음 느낀 엄청난 일이었다. 그때의 경험들이 ‘내가 끝없이 걸어가면 새로운 세상이 나온다’ 그런 무대뽀의 신념 같은 걸 만든 것 같다. 유엔사 책이 강화도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내려간 다음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나와까지 두 달을 걸은 뒤 나왔다. 그게 무슨 이론적 계산을 한게 아니라, 어느날 여름태풍이 몰려오는데 바람을 맞다가 문득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걸었다. 걸으면서 유엔사에 관련된 생각이 거의 다 정리가 됐다”

- 고향과 관련한 작업계획은 없나?

“어머니도 ‘강화도에서 할거면 예산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을텐데 왜 안내려오냐’고 말씀하시는데, 앞서 말한대로 첫 글쓰기 할 때 예산을 객관화시켜서 처음 바라보게 됐다. 마치 아버지 품에서 떨어져 성인이 되듯, 예산이라는 곳을 새롭게 보는, 화두가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기회가 되면 임성주와 관련해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동서양이 따로 있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녹문학파도 당시의 세계적 사상과 연관해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지역을 잘, 깊이, 넓게 봐야 세계적으로 보고 통사적으로 볼 수 있다. 얻을 수 있는 교훈도 참 많고. 지역이라는 관념에 고립돼 있기 때문에 ‘나는 예산사람’, ‘나는 강화사람’ 같은 관념에 갇혀있는 거지, 실제로는 다 세계 속의 한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문득 갖게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고, 내가 살고 있는 것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사진기라는 기계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어딘가가 아니라, 그런 관점, 시야만 열리면 얼마든지 자기 지역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을 것이다”

#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다. 구속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항하지만,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찰해야 한다. 나에게 사진은 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사색의 도구이다 (중략) 우리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다. 세상의 중심도 아픈 곳이다. 아픈 곳에 서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유엔군사령부> 작가의 말 중에서

# 저서 <민통선 평화기행>(2003), <한강하구>(2009), <유엔군사령부>(2013),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2014)

# 사진집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1999), <끝나지 않은 전쟁, 대인지뢰>(1999), <정전협정의 틀, 유라시아의 창 한강하구>(2008)

# 수상 박종철인권상(2007), 사월혁명상(2008), 늦봄통일상(2010)

http://www.yesm.kr/news/articleView.html?idxno=35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