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제주,이라크 그리고2008/04/15

오끼나와,제주,이라크 그리고

이시우

제주시청 마당에선 젊은사람의 귀엔 한없이 지루하게 들릴 무당의 굿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지전이 쓰석쓰석 날리고 혼이 서성이듯 제가 걸린 줄에 매달려 하릴없이 빙빙 돈다. 바람불면 흩어지고 비가 오면 씻겨가니 어디한곳 머물곳이 없다고 혼들은 무당의 입을 빌어 흐느끼고 있었다. 시왕맞이가 끝났다. 사회자는 차사영맞이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니 손님네덜은 자리뜨지 마시고 뒤켠에 마련한 국수도 드시면서 기다려 달라한다. 구천 떠도는 혼백들, 나비가 놓은 다리 밟고 좋은 세상으로 보내려고 땅에 꼽혀 있는 종이나비다리들이 불빛에 긴 그림자를 만들며 무당이 떠난 자리를 정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굿판에서 모두 고개를 돌린 그 순간에서야 나는 정작 혼백의 결이 느껴졌다. 선선한 바람에 실연기처럼 흩어지고 모이는 혼백이 그 나비다리위를 건너 오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아침마다 오르던 도두봉의 동백꽃에 맺혀있던 이슬이 생각났다. 그랬다. 바람에도 빗물에도 흩어지고 씻기고야마는 혼백이 꽃잎에 숨어 있다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 그것이 내가 본 동백꽃의 이슬이었다.

오끼나와보다 더 익숙하면 익숙하고 더 알면 안다고 할 수 있는 제주가 왠지 내겐 떠나는 날까지 정리되지 않은 채 오리무중이었다. 분명 제주엔 거리를 두고 볼 수 없는 나의 문제까지도 얽혀 있었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지 몇일이 지나서야 그것은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에선 보이지 않던 것이 제주를 떠나서야 보였다. 제주는 그런 곳이었다.

1948년,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이다. 4.3항쟁이 있었고,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었으며, 헌법과, 국가보안법의 제정이 있었던 해이다.
1940년 간행된 이래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오끼나와에서 완성된 미군의 군정교범은 해방조선에서 큰 변형을 맞이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인을 적국민으로 규정했던 것과 달리, 조선인민은 해방민이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끼나와를 떠나 인천에 도착한 하지(J.R.Hodge)중장은 점령군으로서, 적대감에 가득 찬 포고문을 발표한다. 2차대전 전승국들에게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되었던 루스벨트(F.D.Roosevelt)의 국제주의와 신탁통치구상은 미국무부가 미군정에 부여한 일관된 정책이었으나 하지를 비롯한 군정관리들은 물론 이미 국무부에서 파견한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H.M.Benninghoff)나 랭던(W.R.Langdon)조차 조선의 현실에선 국제주의적인 미군정정책이 맞지 않음을 시인해 가고 있었다. 결국 미군정이 끝나가던 1948년 초 미군정의 법률전문가 어니스트 프랑켈(Ernst Frankel)은 미군정이 한국에서 주권정부, 군사점령자(군정), 자치정부의 3중정부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자인했다. 2차 대전의 목적이 식민지 정복이나 영토 합병이 아니었으므로 미국이 일시적 군정을 실시한다 해도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임의로 양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선 일본정부를 인정하고 정복이 아닌 점령정책이 행해졌지만 조선에선 자치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점령이 아닌 정복에 가까운 정책이 실행되었다. 미군정의 마지막 임무는 미국의 정책에 부합하는 민간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정된 전조선에 걸친 임시정부의 수립은 물 건너 간지 오래였고, 미국과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으로 기울었다. 이승만과 미군정의 단독정부는 곧 3.8선을 기준으로 분단이 고착화됨을 의미했고 조선에서 8명중 7명은 이를 반대했다. 8명중 1명의 지지만으로 단독정부 대한민국을 추진한 힘의 동력은 이승만이었으며, 그 원천은 미군정이었다. 이승만은 수동적인 미군정의 정책집행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냉전의 기획자로서 ‘반공’을 전세계의 의제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오끼나와 미군정과 한국 미군정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지에 미국보다 적극적인 반공지도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제주에 회복불능의 상처를 남긴다. 4.3항쟁에서 내가 가장 주목해 본 것은 1948년 4월 28일이었다. 좌익의 무장대 대장인 김달삼金達三과 토벌대 대장인 김익렬金益烈중령이 평화회담을 한 날이다. 그들은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한자리에 마주하게 되었고 마침내 무고한 학살을 중지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사흘도 지나지 않은 5월 1일, 이승만이 비호하는 서북청년단이 오라리마을을 방화하면서 평화합의는 단번에 파기된다. 미군정이 토벌과 회유의 이중정책을 포기하고 오직 무자비한 토벌로 선회한 것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뒤의 일이다. 모든 평화협정과 약속은 체제가 보장되지 않으면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렇게 확인시켜 주었다.
미군정이 조선민 대다수의 지지를 포기하고 극소수인 이승만과 손잡은 것은 미국의 정책과 미군정의 전략이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군정은 적극적으로 토벌과 학살의 전면에 나선다.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고, 미군에 의한 지원으로 서북청년단과 경찰등의 물리력이 증강된 시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 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던 것이다. 한라산이 몸서리치며 떨고 있을 때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다. 국가폭력은 이제 법적으로도 완성된 것이다. 4.3에서 시작된 국가폭력은 국가보안법을 분신으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는 것이 또 하나있다. 미군의 군정과 민정에 대한 야전교범이 그것이다. 민정 즉 ‘민사행정’은 1943년판 미 육해군 야전교범 27-3(FM27-3)에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민정은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며, 국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며, 국제법 아래에서 점령군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통해 지휘권을 행사함으로써 제주진압작전에 관여했다. 이라크의 비극은 전쟁보다 전쟁 이후에 가중되고 있으며 이라크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이같은 역사와 무관치 않다. 아프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의 미군정은 아프간과 이라크로 이어지는 미군정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오끼나와에서 계획으로서의 군정교범이 완성되어졌다면 한국에서는 실행지침으로서의 군정교범이 완성되어졌다. 우리는 전쟁을 전투로만 생각하고 이에 반대한다. 그러나 전쟁이후 점령단계에서의 군정과 민정은 전쟁보다 더욱 처참한 기록으로 얼룩져 왔다. 미국이 이라크전에서, 미래의 한국전장에서 생각하고 있을 군정교범의 교리는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전쟁의 목표라는 점에서, 재고 되도록 해야 한다. 제주에 대한 미군정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당시 군정장관이었던 안재홍安在弘의 글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1948년 5월초…당시 미 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Col. Roberts)는 ‘경무부장’ 조병옥과 ‘국방경비대사령관’ 송호성을 따로 불러놓고 “미국은 군사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제주도 모슬포에다가 비행기지를 만들어 놓았다. 미국은 제주도가 필요하지 제주도민은 필요치 않다. 제주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는 확보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미군정에게 있어 제주도는 자국의 이해에 필요한 군사기지였을 뿐이었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배려 대상이 아니었다. 제주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관심은 직간접적으로 여러번 표현되었다. 1946년 AP통신이 제주를 지중해의 전략요충지인 지브롤터에 비유했던 것이나 1947년 이승만이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발언, 1949년 10월 주한미대사관보고서에 제주도를 엄청난 전략적 가치를 가진 섬으로 언급한 점이 그러하다. 마침내1969년 8월 17일 박정희대통령은 미 유에스뉴스앤드 월드 리포트지와의 회견에서 제주도를 미국의 핵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박정희대통령의 언급은 오끼나와와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연관을 연상시킨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에서 휴전협상의 교착상태가 종결되지 않을 경우 원자탄을 사용하겠다는 트루먼의 위협을 뒤풀이했고 미공군은 오끼나와로 원자탄 몇발을 공수했다. 호이트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중국 동북부 선양이 전략적 공격목표가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암시했다.
1992년 필리핀에서 미군이 철수한 직후 미국은 다시금 모슬포에 미군비행장을 건설하려 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군은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들려 하고 있다. 한국군이 미해군도 함께 사용할 기지를 만든다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 계획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4.3을 통해 반공우익세력과 미군이 통렬하게 반성하도록 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60년전의 4.3을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재연하게 했다. 이라크전쟁에 대한 평가에서 또다시 4.3의 교훈을 찾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또다른 이라크를 보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끝나지 않은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