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체계와 전쟁전후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2008/12/25

유라시아체계와 전쟁전후 강화 민간인 희생 사건

한국전쟁 전후 강화 민간인 희생자 추모조형물 건립을 위한
창작의 관점에 대하여

이시우
오랫동안 나의 뇌리속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까를 고민하다가 유경근이란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강화민간인 학살의 가해주체로 확인된 강화특공대의 고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제시기 강화에서 가장 견결한 이동휘의 동지였다. 이동휘가 기독교도로서 두각을 나타내던 강화에서도 사회주의자로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만주와 러시아에서도 한결 같이 함께 했다. 또한 강화학살기의 쉰들러리스트라 불린 화도의 윤재근, 윤성근 역시 이동휘와 함께 했던 윤명삼의 아들들이었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이들의 커다란 변신의 폭을 이해하기 위해 이동휘로부터 출발할 필요를 느꼈다.

첫 번째 유라시아 의제의 출현-민족자결주의
우연성과 국지성을 극복하고 본격적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하나의 지정질서의 틀로 인식하는 전략의제가 출현한 것은 1919년이다. 그것은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던져진 민족자결주의이다. 미국의 참전을 이루어냄으로서 1차대전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은 1918년 1월8일 행한 국회연설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앙세력들이 받아들여야할 14개조항(14 Points)을 발표했다. 그가 요구한 것은 외교협약의 공개성, 항해의 자유, 무역에 있어서의 장애제거, 군비축소, 소수민족의 해방등 일반원칙을 언급한 한편,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등 나라들로부터의 독일군철수에 관한 문제도 언급했으며 또 전쟁이 끝난후에 국제연합(League of Nations)의 설립도 요구했는데, 특히 전후의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에 관한 문제와 소수민족의 해방에 관한 문제는 유라시아 지정학 질서를 재편할 최초의 의제로 떠올랐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억압하고 있던 발칸반도의 여러민족들의 해방과 자주독립, 독일에게 흡수되어 있던 폴란드의 독립등을 주장함으로써 세계 각처의 소수민족들의 해방을 부추겨 준 것이었다. 그리고 나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민족들도 흥분시켰는데 이는 그의 연설 5항 때문이었다.

“모든 식민지에 관해서 자유롭고, 마음이 열리고,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조정을 해야하며, 이과정에 있어서 연관된 민족의 주권과 요구가 완벽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이 조항은 결국 호치민과 주은래와 김규식을 파리 성라자르역 주변으로 모여들게 했고, 열정적인 외교활동 벌이게 한 동력이었다.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게 했던 계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주중미대사 크레인(Charles Crane)의 연설을 듣고서였다. 여운형은 연설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제 프랑스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는 각국 모두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며 그 영향이 미치는 바가 매우 심대하다. 특히 각국의 국제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미국윌슨대통령이 14개조의 주의를 제창하였는데 그중에서는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약소민족으로서는 해방을 도모하기에 절호의 기회이므로 중국도 대표를 파견하여 피압박상황을 잘 알려서 여러나라로부터의 해방에 노력해야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규식의 외교활동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고, 미국대표단이 한국의 입장에 동정하기도 했으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계였다. 일본이 패전국이 아닌 엄연한 승전국이었고 만일 파리강화회의가 일본의 국익을 훼손한다면 윌슨이 주창해 온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윌슨은 국제연맹을 통해서 국제평화를 이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의 편을 들어주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중국과 베트남등도 대동소이했다. 결국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큰 실망과 심지어 배신감을 안고 파리를 떠나야 했다. 더불어 윌슨이 아시아를 통해 유라시아대륙의 지정학 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던 시도도 결국 좌절되었다.

두번째 유라시아 의제의 출현-민족과 식민지문제에 대한 테제
1920년 레닌이 코민테른 대회에 제출한 유명한 “민족과 식민지문제에 대한 테제”는 향후 2차대전까지 소비에트를 유라시아지정질서의 주도자로 만든 의제였다. 순박한 애국자였던 호치민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로 변모시킨 결정적 계기도 이 문서였다.

“나는 감정에 복받쳤다.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었으며 가슴에는 열의와 자신감이 가득찼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방안에 혼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많은 군중에게 연설하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열사들이여. 동포들이여!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방에 이르는 길이다.”

조선과 몽골 중국의 독립운동가들도 호치민과 비슷한 전율을 경험했다. 다른 점에 있었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레닌의 테제를 만들어낸 숨은 이론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동휘와 함께하고 있던 박진순과 인도의 공산주의자인 로이가 이 테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 로이보다는 박진순의 노선이 채택되어 레닌에 의해 정식화된 것이다. 이동휘는 레닌과 만나 조선독립운동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그전에 그의 비서였던 한형권등은 이미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금화 200만루블을 받게 된다. 이 돈은 임시정부에서 사용되었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에도 흘러 들어갔으므로 아시아민족해방운동세력에게 큰 돈줄이 되었던 셈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통해 국제적인 지원체계도 완벽히 구비된다. 즉 레닌의 의제는 과학적이론을 주었고, 자금을 주었으며, 국제지원조직을 주었다. 말뿐이었던 윌슨의 의제와는 달리 의제를 실행할 주체를 결집시키는데도 성공한 것이다. 결국 2차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이 의제의 영향력은 유라시아의 질서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경우, 임시정부요원들의 거의 대다수가 1920년대에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할 정도였던 것에서 레닌의제의 영향력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유라시아의 두 번째 의제 설정을 결정적 주도했던 이동휘의 상해파 노선은 이르크츠크파와의 갈등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좌절한다. 이동휘의 좌절과 유라시아의 세 번째 의제가 제출되는 시기를 거치면서 역사가 개인을 어떻게 바꿔가는지를 보고자 할 때 강화에서는 유경근을 주목하게 된다.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동휘와 보조를 맞춰가며 강화에서 이동휘노선을 주도했던 유경근의 극적 인생반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경근은 1877년 10월 강화 출생으로 강화도진위대 참령으로 있던 이동휘가 참령직을 버리고 보창학교 설립을 호소하러 다니기 시작하자, 월곶의 유경근劉景根,김광찬,이규의,김남수,김동수, 화도면 유지 윤명삼등이 의형제를 맺고 1872년 보창학교를 세우는데 함께했다. 유경근이 1896년 월곶등 강화 김포 5개소에 광창학교를 세우고 1897년 보창학교 분교로 하였다가 1912년까지 광명학교로 개칭하여 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국일관 집회에 참석하여 독립운동 강화, 김포 책임자로 활약하며,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에서 유봉진이 주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서울에 체류하던 중 마침 전협이 조직한 대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노령에서 이동휘가 군인양성소를 설립하고 국내에서 군관 지원병을 모집하라는 연락을 받고 지원병을 노령으로 보내면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의 옥고를 치루었다. 유경근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그는
1. 조선을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하여 독립국을 형성케 할 것.
2. 세계평화를 확보할 것.
3.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이상의 3대 강령을 제창하고 널리 동지및 자금을 모집하고 비밀로 출판물등을 반포하여 그 사상을 고취하여 조선의 현정치를 변혁시킬 목적으로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를 대동단大同團이라 명명하였다. 유경근은 1919년 5월 김진상金鎭相이라는 자와 보신각앞에서 만나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이동휘가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있으며 또 조선독립에 대한 내외정세를 붙여 말하고 독립이 달성하였을 때에는 모국정부의 친병이 되므로 한국안에서 지원하는 청년을 모집하여 신의주 김성일등의 손을 거쳐 러시아에 파견하라는 권유를 받고 그 취지에 찬동하고 그후 고경진외 2명에게 권유하여 서울 관철동 조선여관에서 피고 유경근과 회견하고 동 피고는 암호로 된 소개장을 주어 남대문역으로부터 신의주로 향발하기 위한 절차를 주선함으로써 안녕질서를 방해하려고 한자이다.’ 라고 되어 있다. 3년의 옥고를 치룬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사재를 희사하여 군관학교를 설립운영 하던 중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강릉 ,춘천, 함흥,서울 형무소에서 3년반 동안 다시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과 모진 고문에도 굽힘없이 활동하여 종손 유용갑劉用甲을 비롯 박길양, 최성창, 정인섭등과 구국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이동휘의 사망소식은 일본영사관을 출입하던 기자가 이동휘가 고령과 피로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망하였다는 <프라우다>지 신문의 기사소식을 전함으로써 국내에도 알려졌다. 박모이세이교수는 특히 “술을 마시고 공원에 가서 고려 청년들아, 울어라, 울어야 한다” 라든지 “조선사람들은 조선정신을 잃지 말고 조선과 관계를 가져라”며 학생들에게 호소하였다. 이동휘와 인연이 깊은 강화도의 친지들도 유경근씨등을 중심으로 추도회를 가지려 하였으나, 일제당국의 불허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한효석씨등 지기를 함게하는 친지와 교우하였는데 6.25사변 당시에는 강화특공대 작전에 있어 자문역할을 하였고 강화군 보민회 회장으로서 난중에도 구휼활동을 한바 있는 명사이다. 1955년 12월 4일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세 번째 유라시아 의제의 출현-유엔
2차대전의 승전연합국이었던 영국,미국,소련이 전후체제를 논의하는 얄타회담에서 미국무부가 제출한 유엔헌장 초안은 국제연맹의 실패를 만회하고, 다시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의도로 그로티우스의 집단안보론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강대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강대국중심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외형상의 차이점으로 드러났다. 스탈린은 미국의 의도를 끝없이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유엔헌장 초안의 수정을 요구했지만 결국 합의를 이루었고 유엔이 창설되었다.
2차대전동안 미국은 전쟁의 마지막까지 점증하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키워나가는 동시에 네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독일에 대항하는 전쟁이었고 둘째는 태평양에서의 일본과의 전쟁이었다. 세 번째는 영국과의 싸움으로 미국의 용어에 의하면 “식민주의를 패퇴”시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느세력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통제하는지 결정하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러시아 볼세비키주의에 대한 장구한 이념투쟁으로 이는 전쟁중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투쟁은 소련이 강대국들과의 세력다툼을 함으로써 그 초점과 강도가 지속화되었다.
미국의 정책은 주로 대서양헌장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 원칙들은 대개 미국의 계획에 영향을 미칠 영국과 소련의 위협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이 협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소련에게 몇 번의 “기회”를 주었다. 결정적인 기회가 1942년에 도래하였는데 그것은 루즈벨트대통령이 몰로토프를 그해에 제2전선을 계획하기 위해 워싱턴에 초청했을 때이다. 아울러 루즈벨트는 소련을 부추기기 위해 발트해의 여러나라를, 소련중심으로 협력하도록 하는 조항을 영-소조약에 삽입토록 했다. 몰로토프가 이에 동의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랑스를 침략해도 좋다는 문서로 된 확답을 얻었다. 이것을 처칠이 반대하자 루즈벨트가 기각했다. 동시에 루즈벨트는 전후협력관계를 보장받으려는 소련의 요구에 대해 주도권을 잡았다. 즉 루즈벨트는 유엔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동맹국들이 주도했던 국제연맹을 좀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얄타회담에서 미대표는 국제연합이 회담의 결정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후 평화를 유지하려면 세계적인기구를 만들자는 미국의 제안 즉 강대국들 사이에 요구되는 안정과 약소국가가 요구하는 권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 대표는 유엔에 대한 계획이 다음 세가지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토론에서의 모든 국가의 평등, 강대국간의 단결유지 그리고 해방된 국가및 식민지의 자결권보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첫 번째 원칙과 두 번째 원칙사이에 모순되는 점이 있음을 간파했으며 이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즉 만약 강대국이 유엔의 집행부서를 과도하게 지배한다면 약소국가들은 불쾌감과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미국의 투표제도가 고안되었으며 약소국가는 강대국의 거부권에 방해를 받지 않고 안보리에서 발언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면에서 안보리, 회원자격,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제안은 연합국의 원칙과 세계정치의 긴급한 사안간의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제안중에서 몇몇 원칙들은 세계기구에 대해서 서방의 통제를 확실히 하려는 전략이 담겨 있었다. 이런 것들은 세계여론을 달래고 약소국가들의 권리를 보장해 준다는 구실하에 숨어 있었다. 예컨대 해방된 식민지를 위한 민족자결이 신탁통치이사회를 통해 수행되도록 한 것이 그 한예로서 미국의 반식민주의를 드러내지 않고 반영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의 식민지 지배는 옳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미국식의 경제적 지배에 문호를 개방하는 조건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 국가사이의 세력균형이 옮겨지고 있는 것을 숨겨주고 있었다. 연합국의 전쟁에 기여한 여섯 개 라틴아메리카의 “우호국가”를 포함한 모든 국가들은 총회에 대표로 참석되어야한다. 이와 상응하게 이같은 사실은 서방이 최초로 구성된 총회에서 결정적인 다수를 확보하게 해 주었다. 또한 반 주축국연합에서 프랑스와 중국을 포함한 주요 동맹국들은 안보리에서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에게 이사회에서 각각 내실은 없지만 투표권을 하나씩 주는 결과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소련을 고립시켰으며 4:1이라는 숫자의 열세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투표원칙에 대한 조건은 얄타회담 개최 당시에 미국무성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납득할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이 원칙에 근거하여 안보리가 소련에 반대하는 안을 가결시키거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염려하고 있었다. 세 강대국의 만장일치안은 원칙을 뿐 사실은 아니었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에 깔려있는 현실을 명백히 인식했으며,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러시아사람들은 소련의 16개 공화국 모두에게 총회에서 회원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총회를 자기편 일색으로 만들려는 서방의 시도에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덤버튼 오우크스에서 총회는 강력한 힘을 갖지 않는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항상 실질적인 것을 강조했던 스탈린은 폴란드에 관한 동의안과 같은 어떤 확고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요구를 기꺼이 철회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투표제로 인해 생길지도 모르는 분파작용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안보리는 전반적으로 서방에 유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소련의 이익을 보호하는데 꼭 필요한 절대적인 거부권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투표제도가 각 강대국으로 하여금 자국의 이익에 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제안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나서야 스탈린은 자신의 반대를 거두었다. 소련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총회의 구성처럼 안보리에서 토론할 권리는 스탈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45년 2월6일 얄타에서 루즈벨트는 안보리 투표방식에 대해 말을 꺼냈다. 만약 미국의 투표방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연합국은 미국의 도움없이 독일의 평화를 지키게 될 것이라고 했다. 스테티니우스는 미국이 유엔헌장에 포함시키기 위해 제안한 조항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조항에는 안보리가 결정을 내리고 이에 맞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이것이 연합국의 단결에 대해 의심을 갖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 그는 서방에 의존하는 약소국가에 대해서는 힘을 불균등하게 배분하도록 인정하였다. 하지만 스테티니우스와 미국은 약소국가를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만약 보장이 없다면 유엔조직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다. 스테티니우스는 이 제안을 두 개의 대립하는 책임자간의 공정한 타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한편으로는 강대국간의 만장일치를 통해서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미국인들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문제인” 이 조직에 속한 모든 회원들의 공정한 처우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7개국 회원들이 찬성투표를 해야하고 상임이사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설명하므로서 끝을 맺었다.
처칠은 세 강대국들이 약소국가에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권리를 주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통치하려는 의도에 취약하다고 논박했다. 스탈린은 처칠이 이 말을 하는데는 소련이 그 첫 번째가 될 가능성이 잇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세 강대국이 “세계를 통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제도는 루즈벨트가 제안하고 처칠이 보증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처칠이 유엔에서의 토론의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대영제국, 특히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반환받고 싶으면 총회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었다. 이런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익집단으로서 영국은 안보리의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스탈린에게는 여러나라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는 처칠의 주장에 근거해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였다. “이 권리는 그다지 가치가 없으며”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스탈린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권리에 도전하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실행가능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달려 있다.
스탈린은 오우크스의 제안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 사과하면서, 그는 유엔헌장에 대한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의가 세나라 사이에 최소한의 의견차이라고 보증해 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소련의 주요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계속해서 현재의 제안에 의하면 안보리가 다뤄야할 2개의 범주로서 강압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는 것과 평화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것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맞다는 대답을 듣자, 그는 안보리에 의하여 제재가 고려되고 있을 때 어느 한 회원국이 분쟁의 당사자일지라도 상임이사국이 모두 투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맞는 지 물었다. 또한 무력이 개입되지 않은 평화적 문제해결이 고려될 경우 분쟁당사국은 비록 상임위이사국일지라도 반드시 투표를 자제해야 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다시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다. 스탈린은 서방에게 “결국 결정은 투표에 의해 채택되어지며, 아무런 결정을 보지 못한 채 토론이 100년간 계속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결정’임을 상기시켰다. 스탈린은 처칠이 제시한 예를 가지고 투표방식을 시험했다. 스탈린이 안보리 회원직을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는 중국은 홍콩을 요구할 수 있다. 이 나라들은 그들을 찬성하는 회원국들을 확보할 것이고 투표에서는 이 사실을 반영해 주기도 할 것이다. 스탈린은 처칠이 자기나라의 이익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경우, 거부권을 사용할 것이며 유엔조직의 권위는 세 강대국에 대항해서는 사용될 수 없다고 확언했을 때 몹시 어리둥절해 했다. 스탈린은 이런 일이 가능한지 미심쩍어하면서 물었다. 영국외상 이든이 모든 회원국들은 토론을 할 수 있으되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스테티니우스는 심지어 경제적인 제재조치도 상임이사국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지 않을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몰로토프가 끼어들었다. 그는 이 만장일치 원칙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적용되는지에 대해 물었다. 즉 스테티니우스가 평화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결정유형이라고 열거한 5개 항목은 결정이 취해질 수 있는 항목인가? 혹은 토론을 위한 항목들인가? 이에 대해 스테티니우스는 토론을 해야하는 항목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세 강대국을 위하여 독단적으로 유보되지 않는 어떠한 권한도 그들의 단결을 해칠 것이라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더욱이 단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특정 강대국을 세계공동체로부터 추방하기 위해 특정강대국에 대항하는 세계여론이 동원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핀랜드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대항하여 국제연맹을 동원하는데 성공하였고,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축출했다고 상기시켜 주었다. 스탈린은 유사한 일의 방지를 위해 무엇이 강구되고 있는가를 물었다. 이든과 처칠은 미국이 제시한 원칙하에서 소련의 고립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처칠은 소련이 국제연맹에서 축출된 것처럼 국제연합에서 추방될 수는 없다고 설명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추방을 하려면 만장일치가 되어야하고 강대국중에 하나라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정말로 놀랐다. 루즈벨트는 이것이 거부권이 의미하는 바라고 확인했다.
2월7일 다음 본회의가 열리자 소련대표는 미국의 투표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폴란드에 대한 위기감이 맴돌자, 그 와중에 몰로토프는 소련이 투표방식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오랜 동안 준비해 온 유라시아의제인 ‘국제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전략의제는 그것을 주도할 동력이 없으면 한갓 구상에 그치고 만다. 미국은 새로운 질서를 주도할 지정전략을 구사할 곳은 유럽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전선의 주도권은 누가보아도 소련이 행사하고 있었다. 서방의 노르망디상륙전을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을 스탈린그라드 전투등에서 보여준 소련군의 간고성과 저력은 베를린에 먼저 입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독일 분할점령으로 상징되는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충분한 지분을 확보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에비해 태평양전선은 미국의 주도권이 압도하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분할점령을 거부하고 단독점령을 고수하면서부터 일본은 유라시아체계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한다. 미국은 전후 점령정책을 통해 얄타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냉전체제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발견한다. 오끼나와는 섬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본토 전체와 맞먹는 지군사적 가치를 증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섬, 제주에서 국제냉전이 국내냉전으로, 국가에서 이웃간의 냉전으로 고착되는 냉전체제의 완전한 일치를 경험한다. 이는 얄타체제로부터의 완전한 일탈이었으며, 미국이 유라시아의제를 이끌어갈 동력이었다. 표방된 것은 국제주의였으나 실현된 것은 지역주의였으며, 선포된 것은 집단안보론이었으나 집행된 것은 세력균형론이었고, 합의된 무게중심은 유엔안보리였으나 추진된 무게중심은 유엔총회였다. 처음부터 의도된 음모였는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모순이었는지 아니면 그 둘다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선 세 번째 유라시아의제로서의 유엔이 발생 발전해간 과정 즉 역사를 탐색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단계마다 어떤 구조로 고착화되어갔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구조가 다른 체계에 또는 체계내부에 미친 영향으로서의 기능을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하나의 체계는 역사와 구조와 기능의 통일체란 전제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이 체계의 형성과 발전에 주도적인 요소였던 지도자들의 연구 역시 중요하다. 스탈린과 루즈벨트 처칠과 트루먼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요시다시게루와 이승만등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의 정점에 오끼나와와 제주의 역사가 있다.

신탁통치
미국의 전통적 안보관심에 비추어볼 때 한국을 추가시키는 것은 미국 팽창주의의 일대약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극동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전략적 정세를”조성한 것은 소련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소련은 수십년간 그러했다.-미국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44년 3월의 미국무성 계획은 미군의 한국진주를 구상했으며 전후 미국의 목적을 위하여 한국에서 일어나는 어떤 군사작전에도 미국이 참여해야 하는 중요성을 지적했다. ‘한국내 혹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군사작전에 있어서의 미국의 참여는 대민업무와 과도정부의 국제적 감독에 있어서 미국이 취하게 될 중요한 역할을 크게 증진시킬 것이다.’ 이 문서는 또한 군사정부의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짧은 기간이 되기를 바라지만 잠재적으로 ‘상당한 기간’의 것을 구상하였다. 문서작성자들은 소련이 ‘한국의 상당한 부분을 점령하게 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행정에 있어서 소련측과 협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분석은 소련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든지 혹은 그들이 ‘철저히 교육된’ 한인들을 이용한 경우를 예상하여 실제적인 점령이 보다 믿음직한 길이기 때문에 우선 점령을 하고 다음에 신탁통치를 추천했다. 이보다 2개월 후의 다른 문서는 만약 소련이 단독으로 한국을 점령한다면 “미국은 이러한 사태발전을 금후 태평양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고 언급했다. 소련의 배신에 대한 이런 조기예상은 이후의 소련행위에 대한 미국의 편견을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얄타회담을 위해 작성한 중요한 연구보고서에서 미국무성계획관들은 한국이 분할된 지역이 아닌 단일체로 통치되어야하며 미국의 힘이 능률을 보장할 정도로 커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미국은 점령 및 군사정부에 있어서 영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의 포츠담회의를 위한 계획문서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한국문제의 지배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강력히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러한 요구가 소련이외의 국가는 형식적인 발언권을 갖게 될 행정체제의 수립을 뜻할 경우에는 한국을 신탁통치지역으로 규정하여 유엔기구 자체의 권한 밑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상은 ‘한국문제의 지배’라는 주된 문제를 간명하게 지적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가지 수단을 제시했다. 즉 행정적 권력(점령), 신탁통치, 신생유엔기구를 통한 미국의 정치적 목적 달성이었다. 1945년 미군의 한국 점령시까지 국무성의 정책은 극단을 오갔으며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점령주체인 미군정이 취한 조치들은 경쟁적 견해들 사이에서 선정된 것이었다. 특히 군정의 총책임자인 하지의 개인적인 성향과 경험, 그가 기준으로 삼은 군정에 대한 야전교범의 영향은 컸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책임져야 할 미국의 고위정책책임자가 야전사령관을 충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데 문제가 잇었다. 미국무성 극동담당관들은 “한국문제에 있어서 주된 요소는 신탁통치를 위한 후견의 필요성이 아니라 수련주도하의 정부수립을 방지하는데 있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갑작스런 명령으로 준비없이 카데나로부터 인천항에 상륙하게 된 하지는 1943년 12월 22일 간행된 야전교범27-5(FM27-5)를 토대로 5개월 전 오끼나와 상륙과 함께 진행된 군정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해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민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으며 그것은 다시말하면 벗으로 볼 것인가, 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맥아더는 8월말 24군단 하지중장에 대해 한국인들을 ‘해방된 인민’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했다.
“한인은 적국민이지만 해방된 인민으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나 9월4일 하지는 자신의 장교들에게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따라서 “항복의 조례와 규정의 작용을 받는다”라고 지시 하였다. 미군정의 공식소식통은 후에 “정부와 그의 행동은 적국에서의 경험에 의하여 정해졌으며 적대국 내에 있는 군의 지시 및 훈련방침에 다르도록 되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남한은 적국영토에 진주한 승자의 모든 권세들로 무장한 적대적 점령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점령군은 1948년 8월15일까지 이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군정의 법률전문가 어니스트 프랑켈(Ernst Frankel)은 1948년 초 미군정이 주권정부, 군사점령자(군정), 자치정부의 3중 정부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주장했다.
1945년 9월6일 상륙에는 야전교범27-3(FM27-3)이 적용되었는데 여기에서 민사업무의 목적은 세가지로 규정되었다.

1.군사작전의 지원 2.국가정책의 추진 3.점령군으로서의 의무완수이다.

이 세가지 가운데 첫번째의 중요성은 다른 두사안을 능가하는 것으로 계속 강조되었다.

‘언제든지 첫 번째 고려해야 할 점은 성공적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군사적 필요는 군정의 운영보다 기본적으로 우선하는 원칙이다.’

1945년 9월경에는 미점령군이 보기에 한국민들은 준적국민으로 변한 반면 일본인들은 벗으로 변해 있었다. 더구나 일본점령을 위해 구상되었던 점령의 대우를 오히려 한국이 받게 된것이다.

군정계획
미군정은 포고1호에서 3.8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밝히고, 6항의 점령조건을 발표했다. 포고2호는 법규위반에 대한 처벌규정으로 미군정하에서 4.3사건 연루자들을 처벌할 때 적용한 법규도 바로 이 포고령2호였다. 당시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남에 속해 있었는데, 전남도지사는 10월25일 린트너(Julius H. Lintner)중령이 발령되었다. 그때야 일본인 도지사도 면직된 것이다. 광주시사에는 1945년 10월27일 오전 10시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정식으로 군정실시 선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군정은 11월9일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하면서 비로소 실시되었다. 전남지역을 담당한 제101군정중대 요원이었던 미드는 “도착지에 대한 어떤 브리핑도 받지 못했으며 도착해서 해야 할 의무도 부여받지 못했었다. 장교들은 각자 카이로선언과 맥아더의 조선민에 밝힌 3가지 선언, 24군단과 7함대의 합동참모회의에서 성급히 작성된 군정실시비밀계획, 군정에 의해 인쇄된 열서너가지의 법령, 일반규칙, 주의문등의 사본을 휴대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미군정이 얄타체제에서 냉전체제로, 신탁통치에서 점령으로, 민주화에서 반공, 반소대립노선으로 색깔을 분명히 해가면서 국내 지도자 중에서도 냉전, 반공, 반소의 성향을 갖는 지도자가 부각되어 갔다. 이승만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일본의 요시다시게루가 극단적인 군국주의나 반공이데올로기를 오히려 회피하며 실용주의적인 자세를 보인 반면 이승만의 리더십은 가장 극단적인 반공이념으로 자기 색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서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한 유라시아냉전체제의 중요인물로 부각되었다. 이승만이 유라시아적 의제로서의 ‘반공’을 던진 것은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승부수였으며 적중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는 반공이란 의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서도 그 위력은 증명된다. 의제설정능력은 의제를 실현시킬 능력을 수반해야 한다. 이승만에게 이러한 능력을 부여할 세력의 결집은 군대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군대는 거센 숙청 바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직전까지도 좌익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승만에게 있어 군대는 주체이기보다 대상일 때가 많았다. 그에 비해 경찰은 친일파의 기운이 여전히 강했고 친일파들에게 반공은 친일파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기에 가장 적합한 기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진정으로 자신의 반공정책을 이끌어갈 화신으로 삼은 것은 반공청년단이었다.

반공청년단
반공청년단들에게 국가주의가 투사되는 과정과 반공청년단들에 의해 국가주의가 발산되는 과정을 보면 그 핵심에 빨갱이란 단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947년 4월경부터 서북청년단의 테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테러에는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다. 부산에서는 정수복 검사와 박경영 사장을 빨갱이로 지목하여 암살했다. 이러한 서청의 반공테러로 인해 1949년 6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서청이 지목되기도 했다. 47년 3.1절 시위이후 유해진제주지사는 이미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그는 제주로 부임하면서 경호원으로 서청단원을 데리고 왔다.
서청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1947년 11월 훨씬 이전부터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서청단원 가운데는 태극기나 이승만대통령사진을 들고 다니며 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4·3이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는 이때 물건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 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다. 그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고 설사 죽더라도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었다. 이러다 보면 잡혀간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빨갱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법적인 폭력을 합리화하는 백지수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1947년 11월의 미군 정보보고서는 서청의 의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이 지난 주 제주 CIC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CIC에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8년 1월 남한 각 도의 공산주의자 활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며 정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우익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고 주로 청년단체나 관공서에서의 좌익 축출을 통해 섬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적이 아니며 최근의 테러사태는 우익에 의해 선동된 것이다.

미군정도 인정한 빨갱이 공포는 제주에서 유라시아체계의 변환을 감지할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주제였다. 4.3당시 제주도민들이 빨갱이란 말을 쓰지 말아줄 것을 공식결의하기까지 했다는 기사는 그 정도를 짐작케 한다.

통탄의 제주도는 드디어 사태의 수습 움지김을 보이고 있다. 관은 관, 민은 민대로 상극적입장에서 반복하든 이곳 제주도에서는 탄압정책을 벗어나 귀순하는 도민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한편 반역의 낙인과도 같이 사용하든 [빨갱이]라는 말은 일체 쓰지 않기로 결정하여 실시 중에 있다. 즉 지난 1일에 개최된 도내 군읍면장 합동회의 석상에서 각 읍면장은 무고한 도민의 감정을 저해하는 [빨갱이]라는 말을 각관청에서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겟다고 건의한 것을 임지사는 즉석에서 채택 실시키로 하여 관하에서 말하였다 한다.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빨갱이’란 말에 시달렸으면 단어하나 때문에 회의를 열어 쓰지 말자고 결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일까. 빨갱이란 말이 곧 ‘반역의 낙인’과 같았다는 말에서 빨갱이에 담긴 ‘공산당’보다 더 강력한 적대개념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이 이렇게 까지 한데에는 빨갱이란 이름만 붙이면 어떤 학살과 만행도 가능했던 서북청년단과 군,경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당시를 정신병리학적으로 분석한 한 의사의 글을 보자.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그동안 죽어야할 자, 더 나아가 죽여야 할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므로 그에게는 어떤 만행도 가능하다. 차마 짐승에게도 할 수 없는 짓이 허용된다. 그러기에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 시키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문둥이는 나병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빨갱이는 실체조차 없는 말이다. 좌익사상을 가진자라는 뜻이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우리사회에서 그동안 쓰여 온 빨갱이의 어의는 그것과 크게 다르다. 한마디로 인간파괴와 동의어인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는 애당초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문둥이보다 훨씬 파괴적이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라는 협박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빨갱이를 만들어내고 탄압하는 길 이외에는.

제주의 많은 청년들은 나중에 귀신잡는 해병이 되어 빨갱이 소탕에 앞장섰다고 한다. 또 4.3 당시에도 빨갱이의 누명을 쓰지 않거나 벗으려고 ‘빨갱이’를 고발하는 등 빨갱이사냥꾼들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빨갱이를 둘러싼 우리 역사는 그런 노력조차 때론 부질없는 짓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함정토벌이란 말을 만들어낸 제주 도평리 집단학살의 경우가 그렇다.

1949년 1월 3일 이른아침 허름한 갈중의를 입고 총을 든 무리가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했고, 어떤이는 인공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주민들을 학교운동장으로 집결시켰다. 그런데 인공기를 들고 갈중의를 입은 이 무리는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로서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주민들 중 일부는 그 무리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경하(22)는 “빨갱이면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마을 유지인 김병해(58)는 외도지서 주임 김영철에게 욕을 하면서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주민 70명 가량이 총살당했다.

빨갱이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 말고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것은 유일한 투항이자 결백의 주장이었지만 경찰과 특공대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사람은 빨갱이라는 논리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죽은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죽음으로서 빨갱이가 된 것이다.
말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의미를 만드는 그릇이기도 한다. 빨갱이란 단어가 좌익이나 공산주의자라는 의미를 넘어 자유주의자나 중도우파에게도 적용되어지는 것은 객관적 실체를 지시하는 단어로서 오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빨갱이다’라는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는 그의 실체와 관계없이 빨갱이가 되며 의미가 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의미를 지시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는 한 철학자의 이론처럼 내가 ‘빨갱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란 단어가 나를 통해 집행되고 있는 데서 오히려 인간의 소외를 발견한다. 빨갱이란 말을 쓰는 화자는 이러한 소외현상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
빨갱이를 잡겠다고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역사에서 오히려 빨갱이를 만들어왔던 역설이 발생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단어의 의미는 단어자체의 정의가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빨갱이란 단어가 법을 초월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역사의 맥락을 제주4.3에서 발견한다. 물론 4.3의 경험이 국가와 국가보안법등 모든 문제에 대한 완전한 설명일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숙제가 그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빨갱이와 국가
반공이 시대를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들에게 정부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가 아니라 빨갱이를 잡기위한 폭력에 의한, 폭력을 위한, 폭력의 정부로 비추어졌다. 폭력이 주체이고 국민은 대상일 뿐이었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국민’으로 대접받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절박한 문제제기와 실낱같은 희망을 건 호소마저 간단없이 묵살되고, 학살되는 현실 앞에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설명할 무슨 단어를 찾아 낼 수 있었을까? 설명될 수 없는 현실의 압도에 대해 인간이 갖는 감정은 공포이다. 미군정이 보고한 제주도에서의 ‘빨갱이 공포’란 단어에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국가나 폭력의 합법성은 물론이고 민주주의절차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빨갱이란 단어가 지금까지도 4.3당시와 큰 차이 없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도와 폭은 분명히 달라졌지만 ‘빨갱이 공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체는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상징기호의 도움을 받는다. 이 기호라는 매개 수단 때문에 정작 자기 주체성을 잃어야 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아이가 젖을 달라고 말할 때 아이가 원하는 것은 더 풍부한 것일 수 있지만 ‘젖’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자기의 요구를 일견 성취함과 동시에 자기의 나머지 요구를 포기하게 된다.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표현과 기호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해도 이같은 역설은 피해갈 수 없다. 따라서 충분한 설명과 소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이다. 개인이 합의하여 국가를 세우고 스스로 국민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국가가 있었고 국가에 종속된 국민으로서만 존재하기를 요구받아야 했던 우리에게 개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강화특공대가 하부조직으로 소년단을 조직할 때 소년단에 가입하지 않거나 소극적인 소년들에게는 빨갱이로 간주하겠다며 위협하거나 매일 밤 훈련한다는 명복으로 불러내어 구타하였다. 개개인들이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국민이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틈이 어떻게 메꾸어지는가에 대해 강화도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미 제주도에서 예고되었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다.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다.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다.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다.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이다.

국민의 형성과정이 이같은 폭력의 공포아래서, 폭력에 가담함으로서 이루어진 경우, 그것은 분명 범죄이며 죄의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국가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합법이고 국가의 이름으로 면죄되었다. 국가의 명령이지만 그것이 인간양심의 명령과 충돌할 때,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 수정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이 설자리가 없을 때, 국가는 무조건 추종하고 동일시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국가에 무조건 추종하고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비판과 조절의 공간이 없을 때 개인들은 더욱 더 강력하게 국가와 자신을 동화시키고 합리화 할 수 있는 수단을 찾게 된다. 그것은 국가의 적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신성성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시켜야 하는 국가의 적은 모두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결국 국가와의 동일시과정에서 생기는 틈과 불화를 해소하지 않으면 국가는 개인을 국민으로 만드는 데 실패하게 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의 지적처럼 대립물을 찾지 못하면 주체는 상징기호와 동일시하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내가 곧 국가라는 일체감을 가지려는 서북청년단에게 국가에 대한 대립물, 즉 국가 아닌 것은 빨갱이였다. 빨갱이란 적대의식에 기대어 세워진 애국주의는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호와 상징 같은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통찰 할 필요가 있다. ‘주인없는 구조’가 주체를 규정하는 과정을 통찰하지 않고 그 구조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다.
사람은 저마다 결핍을 안고 있고, 자기의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도 각자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서 채우려고 한다. 내게 없는 반쪽을 찾는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쟈크 라깡은 성관계를 맺는 주체들이 서로를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익숙한 양희은의 노래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한사람 곁에 또 한사람 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 이 노래의 미덕은 서로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상대방에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핍을 채우고자 관심과 애정을 조작하고 의무를 강요할 때, 이를테면 부부이기 때문에 부부의 의무를 다하라고만 강요할 때 부부관계는 분열된다. 스스로 선택한 부부관계조차 이렇다.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할 때,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분열한다. 국민과 국가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주어진 상태란 점에서 더 불화 할 수밖에 없다. 반성하고 성찰하며 조절할 기회와 능력이 없을 때 추종과 동일시의 요구는 폭력으로 다가오며 다시 폭력으로 표출된다.
미군정, 이승만대통령 등 집권세력은 서청에게 “사상이 건전하고 철저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고 ‘점잖게’ 독려하고 한껏 추켜세우면서 ‘제주도진압’의 최선봉에 세웠다. 서청대원들에게 하루아침에 경찰복과 군복을 입힌 것은 그들에게 빨갱이 사냥의 합법성을 부여해주었고, 또한 그것은 서청원들에게 확실하게 빨갱이 사냥을 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국가는 무소불위의 폭력을 위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행정부의 권능조차 초월하는 것이었다. 제주 4.3을 거치면서 경찰에 합법적으로 진출한 서청으로 인하여 좌익군대라는 의심을 벗지 못하던 군대대신 경찰이 이승만의 행동대가 될 수 있었다. 1950년 당시 강화경찰서 사찰과 박00형사의 고향은 평양으로 서북청년단 서울회원이었으며 47년 김포경찰서에 있다가 48년 강화경찰서로 전근하여 홍종택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박형사가 주도하여 우익비밀단체를 만들고 향후 이것이 강화특공대가 되었다. 박형사는 홍종택의 친구들인 우익청년들을 모아놓고 “경찰관 입장에서 사람을 직접 처단할 수 없으니 신변을 보호해줄 테니 보도연맹에 들었던 놈들, 그러다 다시 빨갱이 짓을 한 놈들을 처치해 달라”는 요구를 했고 1950년 12월말경 특사령자들이 출소하여 인천에서 강화로 들어오자 이들은 박형사가 마련해준 양조장 건물에 근거지를 두고 비밀단체를 결성했다. 이들 우익청년들은 소총과 야간통행증을 경찰로부터 지급받고 “경찰에서 취조를 받고 한밤중에 나오는 부역자들을 경찰서 정문 앞에서 다시 붙잡아 바닷가에서 살해하였다. 1.4후퇴 직전 강화경찰서장이었던 김병구(경감,당시 57세)는 평북 진남포 출생이며 일제시기 사찰계형사를 역임한 바 있었다. 그는 월남전 진남포에서 일본 미곡공출을 하던 김동환부친의 일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최중석의 진술에 의하면 1950년 12월 28일 이 단체의 정체가 알려지면서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자 야간에 근거지를 양조장에서 강화청년방위군 지대장 송정헌이 마련해 준 곡물검사소로 옮겼다. 1.4후퇴직전 김병구와 강화쳥년방위군 지대장 송정헌에게 경찰서로 불려갔는데 “지금 사태가 안 좋다. 중공군이 밀려와서 또 한번 후퇴바람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그런데 젊은 아이들이 저러고 있는데 이끌어주든지 같이 후퇴 하든지 하라”하였다. 그 후 철수하는 청년방위군으로부터 소련제 경식 기관총 2정, 총18정을 인수받았다. 애초에는 권력기관으로부터 공식적인 권한 위임없이 만들어진 사설단체인 강화특공대가 국가기관인 경찰과 청년방위군으로부터 야간통행증을 발급받고, 무기지원과 장소등 실질적인 후원과 지시를 받음으로서 사실상의 공식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북청년단을 위시한 서북출신세력이 있었다.
빨갱이라는 대립물이 국가에 대한 추종과 동일시에 존재하던 틈을 메꾸어주고, 폭력의 합법성을 부여해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주었다면, 어느순간부터 폭력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하게 된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빨갱이 척결을 위해서 합법성의 기준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광기가 시작된 것이다.
한 사람이 왕인 것은 오로지 타인들이 그에게 신하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들은 왕이 왕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하인 듯이 상상한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출한 것인데 대통령은 대통령이기에 국민은 대통령에게 굴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진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은폐하려는 국가의 결핍은 국가 안에 실재하는 사회적 적대이다. 친일파, 토지개혁, 통일정부의 수립등 해방 후 제기된 굵직한 건국의제들을 둘러싼 실재의 적대관계를 빨갱이란 대립물을 통해 이승만대통령은 은폐하고자 한 것이며 이것은 완벽히 성공했다.
전체주의자도 상징적 허구를 믿지 않는다. 그는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음을 잘 안다. 또 전체주의자는 실제로 체제가 타락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 권위에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just because’를 보탠다. ‘바로 임금님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빨갱이를 척결해야한다는 목적 앞에서 국민은 죽음조차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존재처럼 되어 버렸다. 이웃과 가족의 죽음에 대해 항의하기는커녕 죽은 가족과 달리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과 이웃을 버려야했다. 더 광폭한 폭력에 가담해야 했다. 그러한 폭력은 국가가 보장해 주었기에 국가의 적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담보였던 것이다. 정의가 폭력 뒤로 숨었다.
제주에서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고, 미군에 의한 지원으로 서북청년단과 경찰등의 물리력이 증강된 시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강화에서도 청장년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공백상태의 시기, 부녀자와 어린이,노약자들에 의해 조직적 저항을 생각할 수없었던 시기에 특공대의 무장이 강화되고 한국군과 미군의 지원이 증강하는 시점에서 학살이 증가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던 것이다. 베버의 표현대로 국가권력이 합법적 폭력이라면 왜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의 폭력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지 않고 그와 정반대였을까? 이같은 현실이 반성되지 않을 때 그것은 극복할 수 없다.
근대 초 한 독일철학자의 말을 응용하면 “의사는 세상사람들이 환자인지 아닌지로만 보이고, 경찰은 세상사람들이 도둑인지 아닌지로만 보이며, 군인은 세상사람들이 적인지 아닌지로만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앨빈토플러의 “우리는 전쟁을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를 고민한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군인은 적과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근대화가 진전될수록 폭력이 증가하고 지능화한다. 예를들어 유태인 대량학살을 일으킨 나치즘의 폭력은 근대사의 일탈사태가 아니라 오히려 중심사건이며, 이후에 나타나는 인종말살이나 주민에 대한 국가폭력의 표본이 되었다.

원한체제
정전체제와 분단체제가 사회의 구조적 측면을 위주로 구분하는 개념이라면 원한체제는 구조와 사회구성원의 심리가 결합된 개념으로, 사회가 사람의 육체, 심리적 활동을 통해 맺는 관계란 점에서 구조와 심리의 결합을 설명할 틀이 필요하다. 원한은 개인적 감정이지만, 원한체제는 그 감정이 사회구조로부터 수렴되어 고착되고 다시 사회구조를 향해 발산되어 만들어진 체제이다. 북에서 원쑤라고 하거나 남에서 웬수라고 하며 원수란 발음이 된소리, 겹소리로 강조된다. 오랜 식민지동안 친일과 반일이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갈라지고 해방이 됐는데도 친일파가 척결되지 않음으로서 사회체제로서의 원한체제는 형성되기 시작한다.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사회적 원한관계는 해방전 후 미국과 소련등 외부의 체제를 유도, 흡수하고 결국 외세의 개입을 초래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냉전체제와 함께 강화되었다. 그리고 외세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체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확고한 관성이 되었다. 원한관계로 압축되는 온갖 가치체계가 그것의 법적 표현으로 나타났고, 1948년 4.3항쟁과 국가보안법은 원한체계형성기의 한 절정을 이루었다. 한국전쟁은 원한체제를 되돌릴 수 없는 체제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원한체제는 국가에 의해 강요되었지만 민간인은 스스로 체화한 원한에 기초하여 체제생산의 행동자이면서 생산자가 되어 이웃을 학살하고, 학살을 전염시켰다. 원한이 정부의 이데올로기로서 뿐아니라 하부단위에 까지 이르는 국가전체의 이데올로기로서 체화된 것이다. 국제차원와 국가차원에 의한 피해 뿐아니라 동네사람과 가족내에서까지 원한관계가 전사회구조화 된 것이다. 원한체제의 기본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이며, 주목할 점은 이들이 서로 가해와 피해를 교환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한의 교환이 공평한 원한의 해소나 소멸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정전 후 정전체제는 원한체제를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는 커녕 더욱 공고한 체제로 발전시켰다. 이런 체제는 46년 반공체제형성기, 48년 단정수립기, 50년 한국전쟁초기 6개월간에 집중된 살육의 역사를 통해 강화되어 왔다. 거장 학살사건의 시점에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는 사건 당시 군인들에게 무고를 통해 많은 주민들을 무참히 죽게하였다하여 1960년 4월 혁명이후 유족들에 의해 타살되어 불태워지고 말았다.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박영보에 대한 주민들의 소살은 민주주의 공간이 열렸을 때 절제와 이성을 압도하고도 남는 그들의 분노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같은 심리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법망을 피해 단죄를 면한 범죄자에 대해 피해자들이 집단으로 공모하고, 심지어 사건 담당 수사관까지 합세하여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을 교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장면에서 확인된다. 이성과 그 합의의 제도로서의 법이 사람의 원한을 치유하거나 위로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법과 제도로부터 이탈함으로서 스스로 앙갚음을 실천하고자 하며, 그같은 실천의 능력이 마련되었을 때 실행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한을 갚으려는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다. 이 능력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음이 소통되어야 하고, 역할이 분담되며,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실현을 방해하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춰져야 한다. 원한의 충격과 기억이 더 강했을 사건직후가 아니라 10년이 지난 뒤 박영보에 대한 복수를 결행한 것은 피해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법과 제도가 아닌 원한체계가 만들어지며 그것이 제도에 의해서든 원한의 상대방에 의해서든 위협받는다고 생각될 때 더욱 강하게 결집한다. 이러한 결집의 특징은 이성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법과 제도의 준수는 자신의 원한체제에 대한 소통이 보장되거나 최소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와 합의가 허용되는 선까지 이다. 그것이 호용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은 비밀리에 소통하거나 심지어 비밀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주체를 방어하고자 한다. 앞서 본 ‘박영보’나 ‘친절한금자씨’의 사례에서처럼 원한을 갚으려는 주체가 복수의 능력을 구비했을 때와 달리 미처 그러한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을 때 복수의 방식은 더욱 복잡해 진다. 그리스비극에 모순과 부조리를 대표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신전의 여사제였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왕인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죽이고 그의 나라로 건너가 아이들을 낳고 헌신한다. 그러나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하자 남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한다. 원수가 된 남편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죽이다. 남편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분신이기조차 한 아이들을 죽이는 메데이아의 심리에서 원한은 자기주체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파괴하는데 방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주체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결핍으로 하여 원한은 자신마저 파괴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테러의 심리에는 국가적 제도에 대항할 수 있는 국가적 능력을 구성하지 못한 주체들이 원래 목표로 해야 할 국가대신 국가체제 자체를 혼란과 위협에 빠뜨려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구상하게 된다. 묻지마 살인, 무작위테러가 발생하는 근저에는 복수의 능력을 구성하지 못한 채 복수를 실행하고자 하는 나약한 주체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전체제의 해체만으로는 우리사회의 불행을 치유하기에 역부족이란 생각이다. 정전체제의 심저에 있는 원한체제의 해체를 위해서는 친일파 청산에 이어 과거사의 진실규명, 국보법의 폐지와 같은 제도적 해결 뿐아니라 역사적 심리까지 치유될 수 있는 더 큰 역사적 전략을 심각히 고려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쟁에서 우리는 적을 전쟁법상 교전자와 다른 개념으로 쓰고 있었다. 교전자중 하나인 중국에 대해 갖는 감정과 북에 대해 갖는 감정이 너무 다른 것은 정전체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요소이다. 또 북의 인민군보다 간첩에 대해 갖는 감정은 더욱 극단적이다. 전쟁법상 간첩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며 전쟁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간첩은 군인보다 더 치명적인 감정을 원한체제에 부여했고 정전체제하에서 실제 간첩사건보다 조작간첩사건이 훨씬 많이 발생한 것은 원한체제의 확대재생산과정과 연관을 갖는다. 적이란 말에는 법적 교전자라는 개념이외에 원한의 개념이 숨어 있다. 북의 원수라는 용어에선 이같은 개념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북이 내세우는 원한의 대상은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서로 원한의 대상이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원한체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은 역설이다. 남북한의 원한의식의 눈높이로 본다면 북에 비해 남은 원한체제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원한에는 대상이 있다. 원한은 자신보다 대상이 중요한 체제이다. 대상에의 의존도가 심한 점에서 그렇다. 국가보안법 같은 수단은 북이란 국가를 적대시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의 원한체계가 해체되거나 느슨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식에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하는 것이다. 1949년에서 1950년 초까지 4개월에 이르기까지 국가보안법에 의한 피체 숫자는 실로 엄청난 것으로 약 15만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발발하고 급속한 속도로 후퇴할 수박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급박한 후퇴로 이동시킬 수 없는 무기와 식량은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소각처분해야 하는 것은 전쟁의 상식이다. 적에게 들어가면 오히려 적을 이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경우, 국가보안법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봄으로서 국가체제에 원한을 가졌을 것이라고 예단되는 상황이었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건설된 원한체제의 기제들이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역설에 직면한 것이다. 이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더 극단적인 원한체제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그리고 예상대로 가공할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가해능력이 있는 진영에게 법과 제도를 초월하여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이들의 관계가 역전되었을 때 즉, 1950년 9월 이후 인민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정반대의 모습으로 재연되었다. 원한과 복수를 공평하게 교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해원이 아니라 더 극심한 원한체제의 고착화였다.
원수를 대신해서 자기아들을 죽이듯 적으로 설정한 인민군을 대신하여 국민을 탄압하는 역설을 논리적인 구조틀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원한체제에서 주체가 원한을 갚기 위한 행위는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주체가 빠져있고 원한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빨갱이를 둘러싼 체제의 중심에 인민도 국민도 국가도 없이 폭력을 위한 폭력만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주인없는 구조이다. 빨갱이공포가 만들어 낸 원한체제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위기를 가린다는데 문제가 있다. 즉 진짜 위기의 신호를 보내야 할 때 국가를 양치기소년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한체제의 극복도 그 시원인 유라시아체계의 변화와 함께 가능해질 것이다. 유라시아의 세 번째 의제인 ‘유엔’은 그 탄생에서 표방된 이상주의와는 달리 실행과정을 거치며 왜곡, 변형되기 시작했고, 어느시점에서는 그러한 이상주의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심되기에 이르렀다. 오끼나와와 제주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지듯 점령과 군정통치를 통해 유엔의 이상은 완전히 왜곡되었다. 얄타체제는 냉전체제로 교체되어 갔을 뿐아니라 원한체제로까지 내면화, 구조화 되었다.

한강하구에서 사회, 국가, 세계체계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준 사건은 한국전쟁이다. 해방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 냉전의 대립구도는 정확히 남북의 대립구도로 나타났고, 그것은 결국 바로 이웃한 사람과의 적대적인 분열로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남북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은 6월 25일 본격화 하자마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엔안보리의 결의와 함께 세계전쟁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계로부터 개인생활로의 구심력이 이렇게 강력하게 작용한 예가 없고, 개인으로부터 세계로의 원심력이 이토록 정확히 작용한 예가 없다. 한강하구에서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세계와 유라시아지정학질서의 진행형이다. 한강하구에서 세계전쟁으로서의 한국전쟁이 내재되어 있다가 표면으로 폭발하며 결정적으로 부상한 시점은 인천상륙작전이다. 전쟁 초기 북의 한강하구 도하에 대해 완전히 무방비였던 남측군대의 준비상태에 비해 인천상륙작전에서의 인민군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놀라운 경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론에 있어 미군의 기습은 실패한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상륙에 성공한 것은 압도적인 화력과 그것의 집중 때문이었다. 상륙일자가 며칠만 지연되었어도 상륙전의 결과는 정반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6.25와 9.15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세 번에 걸쳐 한강하구는 전쟁의 중심이 되었다. 한강하구 전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의 하나는 남측 군대의 미군의존성이 타지역에 비해 결정적으로 심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반도란 한 지역에서 치러졌지만 그것은 제한전쟁이 아니었고, 무조건 항복과 절멸주의를 강요하는 전면전쟁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이었다. 우리민족은 6.25부터 9.15까지의 3개월과 9.15부터 1.4후퇴까지의 3개월 사이의 짧은 기간에, 집약되고 처절한 경험을 강요받았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에 국가문제와 세계냉전체제라는 복잡한 모순과 갈등을 모두 짊어지우게 했다. 우리 사회에 새겨진 수많은 모순들은 국가와 세계의 모순이 정리될 사이 없이 우리에게 내던져진 결과이며, 우리 스스로를 찾으려는 성찰과 반성 또한 이러한 모순을 외면하고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유라시아체계로서의 한강하구의 가장 비극적인 마지막 완결판은 한국전쟁과 함께 만들어졌다. 전쟁 전 1946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에 대한 미국측의 발표가 국내에 보도되면서 탁치에 대한 찬반대쟁은 해방정국에서 분단정국으로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임시정부 수립과 미․소의 후견으로 요약되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해방 1년을 맞이하는 조선인에게 신탁통치라는 굴욕적인 뉘앙스의 단어로 전달되면서 정치지도자들은 그 진위를 확인해보려는 약간의 신중함도 없이 탁치대쟁정국을 만들어냈다. 대몽항쟁기와 양대 양요기를 경험하면서 반성되었던 유라시아 정세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역사의 재연이었다. 언제나 문제를 놀랍게 단순화하는 능력을 가진 김구는 ‘반공’으로 이 모든 의제를 수렴시켰고 위기에 처해있던 친일파는 반공을 무기로 수세국면을 공세국면으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해방직후 최대의 국가의제였던 ‘친일파 척결’은 탁치대쟁을 통해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민족세력의 척결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분단과 전쟁의 기원은 바로 탁치대쟁이었다. 해방의 혁명적 열기는 친일파 척결에서 반공으로 목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민족과 외세 사이에 형성되었던 전선 대신 방법론의 차이 정도에 불과했던 이념전선이 친구와 이웃과의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것은 국가와 세계차원에서 진행되고 완성된 분할구도의 정확한 반영이었다. 전쟁의 원인이 갈등이라고 했을 때 1946년은 세계적 갈등의 구조가 거의 여과 없이 사회내 갈등의 구조로 관통된 해였다. 해방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있던 강화지역도 탁치문제로 다시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강화사에 의하면 “강화의 좌익계 인사 등은 도시의 궐기대회에 참석화고 귀향하여 집회상황과 지지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당시에는 찬탁입장을 가진 좌익에 비해 친일파세력의 행동이 아직 활발히 조직되지 않았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좌익계열은 신속히 조직화 되어 있던 반면, 친일파는 아직 우익을 결집할 구심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군 교동주민들의 구술기록을 보자.
“하여튼 내가 볼 때는 뭐 그 이렇게 저렇게 얽힌 사람 한 팔십프론(80%) 돼. 한 팔십 프로는, 내가 볼 때는 87% 이상 될 꺼여.”
‘종철’의 증언에서 유념에 둬야 할 것은 종철의 기억에 교동에서 좌익적 분위기가 80% 이상이 되는 것은 ‘리’를 가로 질러 친인척 집안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후에 보게 될 한국전쟁 당시 만연되는 ‘학살’과 갈등 문제를 둘러싼 교동의 특수성에 반영된다. 해방이 되면서 교동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증언은 접하지 못하였으나 양갑리나 다른 지역의 이장들도 대체로 친일파들은 정리되어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사람들로 새롭게 구성 되었고, 사회주의자가 아니어도 좌익세력이 확산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차원에서 좌익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고, 국가의 기능으로서 합법적 폭력의 행사가 인정되기 시작한 단정수립기에는 강화도 어쩔 수 없이 예리한 갈등의 구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단정에 반대하여 전국에 걸쳐 파업과 암살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이를 좌파의 행동이라 규정, 1947년 3월에 좌익요원 총검거를 단행하였다. 강화경찰서장 한천수는 1947년 8월 15일 예비검속이라 하여 ‘포고령’ 제2호를 근거로 좌파세력을 대량 검거하였다. 강화는 지역내 좌파세력의 강성으로 한때 ‘제2의 모스크바’라는 호칭까지 얻고 있었다. 예비검속을 집행한 강화경찰서장 한천수를 비롯, 당시 남측의 경찰은 군대보다도 친일과 반공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고 이승만과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사상과 지도체제를 가장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남측의 군대가 좌파의 침투에 의해 극도의 혼란상을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45년미군정이 군 최고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대문구 감리교신학교에 창설한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는 좌익계는 물론 광복군도 불참하였다. 그것은 군정당국이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2/3나 대거 기용한데 따른 실망 때문이었다. 북에서는 1945년 말에서 46년 초 보안국 시절,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은 전부 숙청당하거나 월남하였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1946년 1월 21일 군정법령 28호에 근거하여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리자 오히려 좌익 무장단체 성원들이 군대로 대거 입대하여 군대는 좌익의 은신처로 변하고 말았다. 남에서는 군대가 좌파의 피신처가 되었던 반면, 북에서는 군대가 친일파의 피신처 역할을 해줄 수가 없었다. 1946년에 이미 북은 놀라운 속도로 그들이 목표한 혁명을 완성했다.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이 그것이었다. 인민군 고위장교에까지 승진한 임헌일에 따르면 연안계열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군 출신의 학병과 장교들을 보강하였지만 김일성 계열은 일본군 출신이 중요 간부직에 등용되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일본군 출신 간부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사단 같은 경우 별도친목회를 결성하여 단결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연속적인 숙정으로 실패했다. 임헌일에 따르면 1차 숙청 대상자는 해방 당시 자본가 출신, 일본경찰 및 헌병에 복무한 자, 일본군 장교출신, 가정성분이 불량한 자, 근무태만자 및 불평불만자 등이었다. 이러한 경력이 있더라도 기술계통 전문가들은 숙청을 모면하였다. 숙청에 직면하여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은 대부분 월남하였다. 이들은 남측 군대에 들어가 고위 장교그룹을 형성하였다. 이로 인해 남북 양군 간부들의 친일, 항일 경력은 뚜렷이 대비되었다. 남측 군대 고위 장교들은 누구보다도 공산주의와 북에 대한 증오와 타도의지가 높았다. 그러나 친일파 일색의 남측 군대가 봉착한 태생적인 정통성의 결여는 오히려 좌파가 득세할 수 있는 온상이 되었다. 장교들에 대한 좌파의 침투기도는 특히 치밀하고 뿌리 깊었다. 남측 군대 최고지도부를 형성한 감신대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초기 군 최고 지도자들인 군번 1번부터 100번까지의 개인경력을 추적해보면 100명중 28명이 파면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 전 좌파 혐의나 반란가담, 반란기도로 파면되거나 처형되었다. 최고급 간부 1/4이 좌파였던 것이다. 이들의 영향으로 이들이 교육한 육군사관학교 출신과 그 간부들도 상당수가 연쇄적으로 좌파 지휘관이었다. 육사 3기는 여수반란을 주도한 김지회, 홍순석, 제주도 4.3진압차 출동한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등이 좌파였다. 3기가 이렇게 고위 좌파장교들을 많이 보유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재학 중,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 김종석 등의 좌파지휘관이 생도대장, 구대장 등으로서 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6기는 아예 281명의 임관중 258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60명이 좌파로 숙청될 정도였다. 결국 부대 집단월북, 여수반란(14연대), 대구반란(6연대) 등 국가형성 이후, 이남의 주요 저항이 대부분 군내에서 발생한 것임을 볼 때 이남내 좌파는 핵심 국가기구인 군대 내에 가장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었음이 증명된다. 여수반란사건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군내 좌파의 치밀함을 읽을 수 있다. 군내의 좌파 조직은 침투공작의 특성상 횡적으로는 조직 상호 간에는 인지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14연대가 최초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김지회는 14연대내 핵심 좌파장교였으나 반란군 사병과 하사관들이 그가 좌파장교임을 몰라보고 그를 감시했던 것만 봐도 이 침투가 얼마나 비밀스러운 침투였는지를 알 수 있다.
1947년 미군정관 핑클대위가 양사면에 미곡수집 독려차 방문하여 당시 철산리 면사무소에서 개최된 환영식에서 승기룡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지역민사이에 반미정서가 형성되었고 청년좌익운동이 강하여 철산리 청년 30여명은 축구시합을 하거나 마을일을 도모하였다. 승기룡의 아들 승배웅은 양사면 좌익계 청년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다. 양도면 인산리의 안순등 4~5명은 1947년 5월 하순경 해당 경찰서장의 허가없이 미소공위에 제출할 토지개혁에 관한 진정서 작성과 농민조합개편,농지공동경작들을 토론했다는 이유로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으나 1948년 9월28일 서울지검 인천지청의 공소취하로 기각 결정된 바 있다. 단정수립기 강화에서는 제헌 국회의원으로 윤재근이 선출되었고, 좌익계의 위세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다.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서봉준
1924년 서봉준을 회장으로 이상필, 고성우, 조구원, 윤은구, 주시관, 최인식, 최명식, 강흥석, 박영묵, 홍영진등 백여명의 회원이 강화중앙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민족운동의 선구가 되어 청년지도 육성에 주력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공식적 활동은 하지 못하고 지하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항일투쟁을 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이후에는 감시가 더욱 심하여 자동 해산되고 말았다.
1926년 5월15일 강화전인구 7만4천의 지도적 기관이 없어 늘 유감으로 생각하던 끝에 군내유지들의 발기로 강화진흥회를 창립하였다. 회장에 최상현, 부회장에 황우천, 이사에 서봉준등이었으며 주목적과 강령은 지방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1926년 강화읍 신문리에 신간회 강화지회를 설치하고 지회장에 서봉준을 선출하여 전군적으로 회원 규합중에 당국의 감시가 심하여 활발히 전개치 못하고 말았다.

박길양
1921년 김환일등 4명의 동지와 함께 경기도와 삼남 지방을 순회하며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동년 10월31일 일경에 체포되어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한 후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한 그는 시대일보 강화지국장을 지내면서 강화 청년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8일 박헌영의 집에서 박헌영, 권오설, 주세죽, 김찬, 홍증식, 조봉암, 김단야등 17명의 동지와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회원양성을 위한 강습소의 설치를 계획하였으며 <조선지광>,<신흥청년>등의 잡지를 인수하여 동회의 기관지로 발간코자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같은 해 강화에서 박길양朴吉陽을 위원장으로 하여 서봉준, 이상필, 최명식등 수십명의 주동으로 무명회無名會를 조직하여 민족사회주의를 표방하고 강화읍 신문리 전 소방대에 강화중앙청년회와 함께 합법적인 활동을 하여오다가 일경의 탄압으로 표면활동을 못하고 몇몇 동지의 친목단체로 유지해 오다가 감시에 못 이겨 태평양전쟁 중 해산되고 말았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5년 1월부터 공산청년회 조직을 위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월1일 인천에서 열린 인천노동총동맹 제 2회 간친회에 조선청년총동맹의 대표로 참석하여 자신의 출신지역인 강화와 인천지역의 청년운동을 활성화 하고자 하였다.

신의주 사건은 1925년 11월22일 신의주의 신만청년회라는 단체가 회식을 갖던 도중 이 단체의 회원이 옆방에 있던 조선인 친일변호사와 일본인 순사를 폭행한 것에서 발단되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의주 경찰은 신만청년회원 김경서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중앙집행위원회 회원자격 심사표와 통신문 세통을 발견하였다. 이 문서들은 박헌영이 신의주에서 활동중이던 임형관을 통해 상해에 있는 조봉암에게 보내려던 것으로 임형관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신의주 사건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당국은 전 치안력을 이들의 검거에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11월30일 관철동 허헌의 집에서 임원근, 허정숙 부부를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마산에서 감상주가 강화에서는 박길양이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박길양은 예심이 진행되던 중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인해 병을 얻어 옥중순국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이미 1925년 5월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보고및 모스크바로부터의 승인을 위해 국내를 떠나 고려공산청년회의 국제부 책임으로서 국내와 모스크바사이의 연락임무를 맡아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조봉암은 신의주 사건으로 인한 체포를 피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1932년 말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기까지 약 7년간 상해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황우천
일본 중앙학교를 거쳐 게이오대학(慶應大學) 경제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황우천黃祐天, 서봉준徐鳳俊의 주선으로 지방유지 50여명으로 구성된 강화번영회는 문화사업의 하나로 강화의 전기동력시설과 전등, 전화가설등을 촉진하여 1935년에 그 실현을 보게 되었다. 기타 지방문제에서 이 번영회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매월회에서 각 분과위원장이 제의한 안건을 협의하고 이를 관계당국에 반영시켜 지방발전에 기여한 공이 적지 않으며 1937년 공설운동장 건설에 있어서도 그 역할이 컸었다.
강화번영회의 황우천, 김근호등이 한성은행 유치운동을 벌여 한성은행강화지점이 1930년 7월16일 인가되어 동년 11월4일 개점되어 강화 경제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 페점되었고 그 후1948년 조흥은행 강화지점이 설치되고 현 남궁의원자리에 점포도 신축하였으나 1958년 페점하였다.
강화산업조합은 1922년 강화 직물의 개척자이며 원조인 김동식이 하점면을 중심으로 일반가정에서 부업으로 생산하는 직물의 판매알선과 원사구입을 알선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던 산업조합이 일반가내직물의 부진으로 해산하게 되자, 황우천이 이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전군적으로 산업을 개발하기 위하여 강화읍을 중심으로 산업조합을 창설하였다. 동조합의 조합원수가 1만여명으로서 주로 원사구입 알선과 제품판매 알선을 해왔는데 성적이 매우 양호하여 조합이 날로 발전하였다. 최초에는 수직기로 일반가정에서 부녀자가 주로 면직물을 짜오다가 인견사를 구입하여 짜기 시작하였으며 수직기가 역직기, 족답기 가내작업이 공장으로 전환, 발전하여 견직물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황우천은 조합의 이익금 일부로 강화여중을 설립하였으나 6.25동란 당시 좌익사상을 품고 모든 사업이 쇠퇴일로에 서게 되어 마침내 1962년 해산되고 말았다.
강화여중은 원래 강화학원으로 강화향교 명륜당에 교실을 두고 학생을 모집하여 교수를 시작해 황범주가 원장이 되고 정태규가 원감이 되어 교수3명을 초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경영하다가 정태규가 원장이 되어 수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후 정태규의 후임으로 황우천이 원장이 되어 박승렬, 이종억등과 제휴 활동하여 교실 3개를 신축하고 중학교 인가를 받을 것을 목표로 교육방침을 쇄신하여 초대교장으로 허재후를 맞았다. 그리고 직물조합을 조직하고 원사구입과 생산품판매등으로 생기는 이윤을 저축하여 학교운영에 만전을 기하였다. 해방 후 일제 항일운동과정에서 투옥되었다가 전시 강화군인민위원장이 된 아들 황주익과 함께 좌익의 입장에서 활동하다 인민군 후퇴 시 허재후등 기타 교사와 월북하였다.

김이옥
1925년 김이옥金爾玉회장을 중심으로 회원50여명이 규합하여 강화여자청년회를 결정하고 여성지도계몽에 노력하였고 토론회등을 열어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향토여성운동에 공헌한 바가 컸다. 김이옥은 조봉암과 결혼한 뒤 남편이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 투옥된 후 1936년 병으로 강화친가에서 세상을 떠났고 단체도 곧 해체되었다.
김이옥은 원래 조봉암과 같은 강화도 출신인데 부농의 딸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를 마쳤고 상해로 조봉암을 찾아올 당시에는 이화여전 음악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때 고향에서 조봉암과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다섯 살 위인 조봉암을 매우 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3.1운동때 조봉암의 선전문서 작성, 배포일을 도와주면서 급격히 가까워졌고 3.1운동 참가로 인해 조봉암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는 자주 면회도 갔다. 그러나 조봉암의 출옥 후 결혼까지 생각했던 이들은 김이옥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실 완고한 부모의 입장에서는 집안 배경이나 학벌등 모든면에서 조봉암을 사위로 맞아들일 생각이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첫사랑에 실패한 조봉암은 이후 사회주의운동가로서 정력적으로 일했다. 1923년 조봉암은 사회주의자로 귀국, 1924년 신흥청년동맹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시기 조봉암등 사회운동진영의 영향력은 사회주의 여성운동 부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것이었다. 조봉암, 박헌영등은 바로 그들의 아내를 매개로 여성운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여성계에서는 3.1운동이래 많은 여성단체가 조직되어 교양강연과 계몽활동을 해왔는데, 1923년경부터 사회운동의 좌익적 경향에 발맞추어 여성운동게에서도 점차 계급적 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4년 5월에는 박원희(서울청년회 김사국의 아내) 정종명, 김필애, 정칠성(신철의 아내) 주세죽(박헌영의 아내) 허정숙(임원근의 아내이며 허헌의 딸)등을 중심으로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되어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서울청년회계와 화요회,북풍회계의 대립이 그들의 아내들을 통해 조선여성동우회에까지 반영되어 이 단체는 결국 1925년초 두 단체로 분열되고 말았다. 허정숙, 주세죽등 반 서울청년회 계열이 1월18일 경성여자청년동맹을 발기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박원희등 서울청년회 계열이 2월21일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봉암의 아내인 김조이는 주제죽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의 발기인이 되었다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실제로 경성여자청년동맹은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의 여성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조이는 경남 창원군 웅천면 성일리에서 태어나서 동덕여고를 마쳤으며 1924년초 이래 조봉암의 동지이자 아내로서 활동했다. 1930년에 작성된 관헌측 자료에 의하면 1930년 당시 그녀는 27세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의 출생연도는 1903~1904년경이고 조봉암을 만났때 나이는 21세 가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정확히 언제부터 부부가 되었는지, 그리고 정식으로 결혼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924년 4월19일 신흥청년동맹 주최 인천강연회에서 이들이 나란히 연사로 등장한 적이 있으며, 또 1925년 1월에 열린 신흥청년동맹의 한 강연회에서 김조이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억함’이라는 강연을 하는등 그녀가 그즈음 여성운동뿐아니라 신흥청년동맹의 유력한 여성운동가 강연자로 활동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1924년 신흥청년동맹에서의 활동 과정에서 두사람이 맺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이들은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약칭 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함께 참여하기도 하고 적기사건에도 참여하는등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김조이는 1925년 9~10월경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하기 위해 국내를 떠나며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한 후에는 상해 만주등지에서 활동한다. 김조이는 이후 일본인 주의자와 동거하였고, 만주로 가서는 김복만(金仁國과 동일인)이라는 공산주의자와 부부관계로 지냈다. 김조이와 김복만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국내로 잠입하여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1934년 체포되었으며, 함흥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김복만은 5년, 김조이는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25년 5월 조봉암이 국내를 떠난 시기를 전후해서 김조이와의 관계는 멀어져 있었고, 이후 김조이 역시 상해에서 잠시 활동을 하긴 했으나 이들 사이에 관계나 연락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7년경 김이옥이라는 여인이 단신으로 조봉암을 찾아 상해로 건너왔던 것이다. 조봉암은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상해에 있는 동안에 내 처가 찾아와서 오년간 동거했고 딸을 하나 낳아 이름을 호정 滬晶이라고 지었는데 상해의 고명이 호滬이기 때문에 상해에서 얻었다는 뜻으로 호정이라고 했다. 호정의 모친은 김이옥인데 내가 신의주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에 귀국해서 병사했다.

김이옥이 불쑥 상해로 찾아오게 된 것인데 그녀가 어떤 계기로 상해까지 조봉암을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화여전에 다니던 김이옥이 그때 폐결핵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폐결핵은 치명적인 병이었기에 그녀는 삶에 대한 집착을 거의 포기한 채 나날을 보내다가 문득 죽기전에 조봉암을 만나보기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몰래 여비를 챙겨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상해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상해에서 만나 살림을 차리고 딸 하나를 낳았으며 또한 김이옥의 병세도 차츰 호전되어 남편인 조봉암의 활동을 적극 뒷바라지 하는 한편 스스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행복과는 관계없이 동지들 사이에서는 조봉암의 이같은 생활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었다. 혁명운동에 몸바치기로 한 공산주의자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애정행각이며 부르조아적 작태라는 것이었다. 홍남표등이 해방 후에 제기한 반조운동중 하나가 바로 김이옥과의 결혼 생활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조봉암은 아래와 같이 해명했다.

당원을 버리고 비당원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 설명하기 싫고 죄로 아오. 그러나 그 여자도 좋은 당원이 되어 중국당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또한 사실이오.

이처럼 해방까지 강화에는 이동휘인맥과 조봉암인맥이 민족운동을 주도해갔다고 볼 수 있다. 단정수립당시 투표를 막는 것이 목표였던 좌파는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게 되자 급진적인 수단으로 경도된다.
투표를 마친 대부분의 지방 좌경분자들은 각 산정에 집합하여 있었는데 목적을 알 길이 없었다.

위의 기록은 단정수립 저지에 실패하고 난 뒤의 행동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단정 수립을 계기로 분단은 공식화 되었으며 이에 대한 좌익의 저항은 테러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후 강화도 좌익계의 열성분자인 구봉회 이성국 김용백 등이 조산출장소의 우호근 순경을 살해하고, 대문출장소 근무 서기석 순경 및 선원면장 김용철 씨를 칼로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좌익단체는 아예 사회단체 및 관공서를 합법 쟁취한다고 선동하였다. 이러한 좌파의 행동은 단정수립 후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세 앞에 무너지고 만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의회에서 통과된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의 집행을 앞두고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친일파의 처벌을 극력 반대했다. 친일 극우단체들은 여러 곳에서 집회를 개최하여 법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집회의 구호는 ‘친일세력처단 반대’가 아니라 ‘반공’이었다. ‘반공구국총궐기대회’란 집회 명칭에서 친일파가 구국과 반공이란 이름 뒤로 숨어 공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관된 반공논리의 기원이다. 역사적 단죄의 대상이었던 이승만과 친일파의 리더십이 유라시아냉전체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만들어 낸 ‘반공론’이야말로 그들이 집단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회생하는데 있어서 전가의 보도가 되었으며, 유라시아냉전체제를 한반도화 하는데 완벽히 성공한 계기가 되었다. 1949년 이승만과 우익의 소위 6월공세는 반민특위 습격, 국회의원 대량체포, 김구의 암살로 이루어진 총공세였다. 척결된 것은 친일파가 아니라 척결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관제 반공데모가 휩쓸고 거대한 반공조직이자, 좌익분자전향교도사업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진다. 1949년 강화경찰서장 엄태섭은 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강화군 보도연맹은 그 사무소를 강화경찰서 구내에 두고 서장의 지휘 감독을 받게 하고 그 위원장에 황염을 두고 각 면에는 각 지서에 사무소를 두고 예하조직으로 면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이후 그들은 위장전향을 증명이라도 하듯 친공활동에 앞장섰다. 보도연맹은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가입을 요구받았지만, 어떤 지방에서는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좌익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도 가입을 강요받았다. 보도연맹의 숫자가 많을수록 반공체제의 성공을 과시하는 것이었지만 그만큼 체제에 대한 저항 세력이 많았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점에서 보도연맹은 자기분열증적 정책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다. 전쟁 전에는 체제의 품안에 거두어들이고 전쟁발발과 함께 가장 먼저 죽인 것이다.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 사건은 곧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강화의 경우에는 전쟁발발과 함께 보도연맹이 좌익의 손에 의해 빠르게 장악되었다. 처형당하는 대신 역공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이 준비된 반격이었는지 생존을 위한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위장가입이었는지, 전쟁직전 북의 대규모 후방교란작전과 연관된 것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강화군사는 전자에 혐의를 두고 있다.
지하조직인 남로당원과 보도연맹원들은 6월 27일 일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들은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강화지역은 인민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적극적인 친공활동을 전개하였다. 6월 27일 강화경찰서 경찰대원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인천 경기도 경찰국을 집결지로 정하고 눈물을 머금고 가족을 남겨둔 채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전향하겠다고 맹서하고 보도연맹에서 교도를 받아 온 좌익분자들이 약동하기 시작하여 국립경찰이 후퇴하자 관내 치안을 해야 한다고 경찰관 지서를 점거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양민을 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색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강화군은 한때 공산당원의 난무에 짓밟히게 되었다.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든 보도연맹원들의 반란이든, 이는 군대보다 강력한 이승만 지도체제의 보루로 급성장한 보도연맹 정책이 결과적으로 최종 실패한 것임을 의미한다. 자료의 진술처럼 6월 27일이 보도연맹원들의 본격적인 친공활동 시점이란 것이 확실하다면 전쟁 전 6월초부터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북측 게릴라부대들의 남쪽지역으로의 침투와 지하공작이 다른 지역과 달리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강화보도연맹의 저항과 반격은 보도연맹정책의 목적이었던 사상전향과 동원정책이 강화지역에서는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북은 보도연맹원을 변절자로 규정했지만 그러한 배신은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요구 앞에서는 사소한 것으로 되었다. 인민군은 미군의 개입과 함께 7월 초에 조선인민군의용군 본부를 만들어 전시동원정책을 시작한다. 북로당은 같은 시기 ‘의용군 초모사업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통하여 전 남로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 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을 규정하였다. 강화의 경우 동원사업이 시작되기 전 보도연맹의 반란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의용군 가입은 당연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강화지역 좌파의 득세는 일제시기 지주제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유래한 해방정국의 필연이기도 했다. 강화는 한강하구를 통하여 지방의 물자를 서울로 대량 수송하는 수로유통경제의 중심지였다. 또한 인천이 개항하면서 경기지역 주요 쌀 생산지인 강화는 미곡상인들이 미곡을 수매하여 개항장 미곡무역상에게 전매하기에 가장 용이한 지역으로 부상되었다. 따라서 개항 후 강화지역의 지주들은 미곡무역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미곡상인들도 농촌에서 미곡을 수매하여 이를 무역상에 전매함으로써 부를 모으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강화지역의 농업생산이나 지주경영은 국내외의 유통경제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개항장에는 일반적으로 한국의 미곡과 일본의 면제품을 교환하는 무역체제인 미면교환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출된 쌀은 주로 면제품 및 잡화품의 주요 생산지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의 하층노동자, 도시잡업층의 주식용으로 수요되었다. 특히 일제는 대량의 미곡반출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하여 외지에서의 투기적 유통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말, 일제하 지주제 변동문제와 관련하여 강화김씨가, 강화홍씨가의 지주경영은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또한 강화는 비록 도서지역이었지만 토지가 광활하여 경지면적으로 자작한다면 그 소출만으로도 이 지역 농민들이 3년을 호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경작지의 대부분은 소작농에 의해 경작되었고, 지주들은 고율 소작료를 수탈하고 있었다. 강화 출신인 조봉암의 주도와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로 1949~50년 사이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자유주의적 농지개혁은 일정 정도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북의 입장에서 전쟁의 정당성은 토지문제였다. 북에서의 토지혁명을 남에서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 후 북이 남측점령지역에서 실시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식 토지개혁의 성과는 강화지역의 경우 어떻게 나타났을까는 전쟁명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기준이 될 것이었다. 각 지방의 토지개혁완료 경축군중대회에서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감사문’이 쇄도했다. 강화군 송해면 신당리 토지개혁완료 경축대회에서 농민들은 토지를 준 김일성에 대해 “전쟁의 최후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경애하는 우리의 수령이신 당신 앞에 굳게 맹세합니다”고 다짐하였다. 위 북측자료만 보면 북의 전쟁명분은 정당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전쟁 전 완료된 남측의 농지개혁은 그것이 북의 기준으로는 미흡했다 해도 전쟁을 해서라도 나머지 땅을 찾아야겠다는 남측 농민들의 혁명의식으로까지 고양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점령지에서의 토지 정책은 북에서처럼 놀라운 속도로 시행되었고, 북의 계산대로라면 ‘이승만 도당’의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로 전쟁은 훨씬 빨리 끝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북이 전쟁 후 시인했듯이 남측에서 예상했던 대규모의 혁명적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1950년 5월에 완료된 남측의 농지개혁은 나름대로 이승만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국민들이 일정 정도 합의하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강화군 교동에 대한 전쟁시기 주민의 구술을 기록한 김귀옥의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구술 조사과정에서 대부분의 구술자들이 당시의 경험을 ‘토지개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동에서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이남식으로서 ‘농지개혁’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토지개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선행한 농지개혁에 의해 토지개혁의 차별성을 특별히 피부로 느끼지 못한 때문도 있을 것이다. 이는 민주개혁이라고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승만 체제에서 조봉암이란 리더십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안치되었으나 전쟁 당시에는 북이 그를 ‘변절자 조봉암’으로 낙인찍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국가건설 의제였던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은 국가정통성의 문제였다. 남북은 사회와 군대의 생성발전과정을 통해 이들 의제에 대한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북이 혁명을 통해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을 완수한 반면, 남은 친일파 척결에 실패한다. 그러나 반공논리로 친일파를 보호한 이승만조차 토지개혁만큼은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했으며 지주정당인 한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이겨야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자유주의적 농지개혁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사회분야에서의 부분적인 개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첨예한 권력투쟁의 장이었던 군대는 6월 25일 당일까지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인천상륙전까지 전선의 외곽에 불과했던 한강하구지역에서는 해방정국의 좌파우세 분위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군사제도 경제가 사회연구의 기본이라면, 군사는 국가연구의 기본이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근본문제는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사회의 첨예한 갈등이 집중되고 폭발한 곳이 군대였다는 점에서 더욱 군사는 주목을 받는다. 무어(Moore)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많은 사회에서 군사제도들(military institutions)은 그 사회를 전체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비할 데 없는 출발점을, 그것은 종종 경제적 분석보다도 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 국가가 폭력을 합법적이고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란 점에서 가장 발전된 폭력기구인 군대의 생성과 발전은 국가의 생성, 발전, 국가권력의 리더십을 형성하는 투쟁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군대는 국가의 성격을 반영하고 국가는 군대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 점에서 남과 북의 군사사상과 역사, 구조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북의 지도부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그리고 군대를 정치의 실현도구로 규정하고 있었다. 민족보위성이 발행하는 대표적인 군사잡지 ‘군사지식’의 설명을 보자
전쟁의 본질과 특성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정치의 역할에 대한 맑스-레닌주의 학설에 의하면 군대는 정치의 도구라는 것으로 된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군대의 사명과 성질을 결정한다… 전쟁은 정치의 군사적 수단으로써의 계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는 이 정치의 실천도구이다. 그러므로 군대의 면모는 무엇보다도 직접 정치의 성질, 전쟁의 내용, 그의 목적 및 의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는 정치, 군대, 전쟁의 삼각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군사론은 근본적으로 클라우제비치로부터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레닌은 클라우제비치의 군사론을 그의 혁명 전략전술에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레닌의 ‘정의의 전쟁’론은 북에 의해 계승되었다. 1980년대 경 뒤늦게 소련의 영향을 받은 미군과, 같은 시기에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던 남측 군대 역시 근본은 클라우제비치였다. 그러나 그 사상과 적용은 사뭇 달라 보인다. 정치우선을 강조한 북에 비해 남은 군사력 자체만을 강조하는 차이를 보인다. 아래 두 개의 진술을 비교해 보자. 클라우제비치는 “전쟁이란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적을 굴복시키려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전쟁에 관한 이런 정의로부터 우리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여 이를 관철시키는 것이며, 전쟁의 목표는 적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적을 굴복시키는 것, 즉 적을 섬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수단은 바로 물리력 즉 군사력이다. 조선인민군의 목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보위하는 데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인민의 재산과 이익을 옹호하며 인민의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는 인민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보위한다는 것은 곧 인민의 이익과 재산과 평화와 자유를 보위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북에서 군대의 목적은 국가의 보위이고 국가의 보위는 인민의 보위라는 논리에서 우리는 국가와 인민의 일치 및 가족과 국가의 일체화를 엿볼 수 있다. 인민의 군대이자 정치사상 우선의 군대이다. 이제 좀더 자세히 남북군대의 차이를 알아보자.
남측 군대 남측 군대는 건군 초기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군지휘부의 친일파 장악, 좌파의 대거 침투 등의 혼란상만큼이나 군사사상과 전략에 대한 일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현재 남측 군대가 정통성의 뿌리로 삼고 있는 것은 광복군이지만 광복군조차 건군에서 배제될 만큼 친일의 잔재가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군대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창설된 광복군은 중국전선과 미국의 ‘일본과 한국에 대한 침공 및 점령을 위한 전략계획’에 의거 미국 OSS(전략정보처)와 합동특수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무선, 정보, 파괴 훈련을 실시했다.
중국 국민당정부의 눈치를 봐야했던 김구는 한편으로 1942년 8월 한미 간에 게릴라부대를 창설하자고 스틸웰 장군에게 제안했으며 워싱턴의 이승만과 이 내용을 협의했다. 당시 CIA의 전신이 되는 COI(정보조정국)-OSS(전략첩보국)는 중경에서 한국침투를 도모 중이었다. 이승만은 중국내 한인들과 미주한인들을 동원해 2만5천명 이상의 병력을 운용하자고 제안했지만 COI가 필요로 했던 것은 대규모 부대가 아니라 소수정예의 특수공작원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10여명 안팎의 한인요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미군 규정상 실현가능한 방법은 미군 소속의 외국인부대(foreign troop units)로 한인부대를 창설하는 방안이었다. 미군은 2차 대전 당시 내세이 부대로 불린 일본인 2세로 구성된 제100보병부대를 비롯해 노르웨이, 그리스, 오스트리아인 부대 등 인종별 단일부대제도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외국인부대에 편성될 수 있는 자격은 미국에 거주하는 우방국 외국인과 그 지역출신 미국시민 뿐이었다. 미군당국은 이승만이 제안한 한인자유대대의 창설을 실제로 검토했지만 하와이와 미본토에 거주하는 한인 중 징집 가능한 신체검사 예상통과자는 불과 600명에 불과했다. 소모병력보충을 예상할 때 이승만이 주장한 자유한인대대(a Korean Battalion)의 창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고, 미군은 부대원의 유지, 모병, 훈련에 있어서의 전문화, 전개대상지역에서의 제한 같은 불이익 때문에 일반전투에 이런 부대의 활용이 제한적이라고 판단해 한인부대 창설에 반대했다.
자유한인부대의 창설은 불발되었지만 한미 간 특수작전은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 1942년 초반 한미특수작전 계획안들이 모두 실현되진 않았지만 이들 계획은 OSS 핵심간부들에게 영향을 주어 1944~45년 중국에서의 독수리작전(Eagle Project), 화북작전(North China), 미국에서의 냅코작전(Napko Project)등을 통해 한인특수부대의 운용을 가능케했다. 이들 작전을 통해 훈련된 이범석 등은 1949년 해주폭동사건에 개입한다.
국무총리 이범석은 해방직전 중국 서안에서 미전략첩보국(OSS)과 광복군 합동으로 한반도 침투공작인 독수리작전을 계획 운영했던 경험이 있었다. 작전은 독수리처럼 낙하산으로 북한 산악지역에 침투해 정보수집 및 무선통신망을 구축하며 부차적으로 파괴, 전복, 방화, 암살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추천에 따라 OSS의 전신인 COI에 참가한 10여명의 한인 중에는 이승만정권 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장기영(체신장관), 이순용(내무장관), 장석윤(내무장관), 김길준(미군정장관공보고문), 정운수(대한정치공작대), 김세선(뉴욕영사), 한표욱(주미공사), 이문상, 한승엽, 황득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같이 광복군 시절부터 미군 첩보부대와 맺은 깊은 인연은 한국전쟁을 통해 결정적으로 강화된다. 국내정진군으로 명명된 이 부대가 훈련을 완료하고 발진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정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45년 12월 9일 그동안 난립하던 광복군 후원회 조직이 ‘대한민국군사후원회’로 통합되어 동대문 밖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에 본부를 두고 은하관 주인 김성자의 희사금으로 광복군 국내지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경비대를 창설하면서 1946년 1월 21일 군정법령 28호 3조에 의거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리자 광복군 국내지대도 해체되었다. 광복군은 미군정 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계속하였으나 태능의 제1연대 1대대에 입대한 상당수의 대원들은 1946년 5월 군수품의 부정처분과 좌익성 장교 및 자주성을 결여한 지휘관을 규탄하는 하극상 소요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45년 미군정청 등록 군사단체 30여개 중 가장 두드러진 단체는 좌파인 조선국군준비대와 조선학병동맹, 우파인 조선임시군사위원회와 학병단이었다. 조선국군준비대는 총사령관 이혁기, 부사령 박승환 등 간부들이 조선공산당의 당군으로서 조직되었고, 치안유지를 이유로 무장을 갖추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의 재정지원을 받아 점차 좌파 성향을 노골화시키자 이에 반발한 일부 대원들이 1945년 12월 4일 대전에서 ‘조선국군준비대 남조선전체대회’를 개최하여 “국군준비대 총사령부와 관계를 끊고 임정산하 광복군에 합류키로 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조선국군준비대는 1945년 12월 26일 계동에 있는 중앙중학교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명예회장으로 김일성, 김원봉, 이청천, 김무정이 추대됨으로써 공산당 산하 군사단체로서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냈다. 조선학병동맹은 1945년 9월 1일 결성되었다. 이들이 내세운 강령은 제국주의 타도, 신조선의 건설, 치안유지 협력과 국군창건 노력 등이었다. 왕익권(동경제대법과 상등병 출신)을 위원장으로 선출, 학병 출신이 거의 참여했으며 미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도착하자 9월 8일 학병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벌렸으며, 종로경찰서를 접수했다가 미군에게 인계하기도 하였다. 우파조직인 조선임시군사위원회는 일본육사 출신 친목단체인 계림회가 중심이 되고 원용덕 등 만주군 출신도 참여하여 1945년 8월말 경기여고 강당에서 발족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국부군과 중공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북을 회복하려면 먼저 의용군을 모집, 만주에 파견하여 국부군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이승만이 건국도 안 되었는데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의견을 제시하자 의용군 모집을 중단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중국에 머물고 있는 광복군을 중심으로 국군을 편성하는 건군안을 작성하여 임정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손원일, 한갑수 등이 중심이 되어 1945년 8월 21일 조직한 해사대가 있었는데 30여명의 대원을 선발, 해군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자금난 해결을 위해 한때 건준에 가입하였으나 건준이 좌경화되었다고 판단, 이탈했으며 미군정청 교통국 해사과장이 한국해안의 경비와 밀수출입 방지 및 조난선 구조를 임무로 하는 단체를 동협회가 주동이 되어 조직하도록 지시함으로써 1945년 11월14일 진해기지에서 해방병단(Coast Guard)을 출범시켰다. 해방 후 여러 군사단체는 정국의 태풍이었다. 미군 및 경찰은 물론 서로 끼리도 충돌하는 사태가 야기되었을 뿐 아니라 자금조달을 위해 공갈, 협박을 자행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남원에서는 ‘국군준비대’ 와 ‘인민위원회’가 합세하여 미군 및 경찰과 충돌하였고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찬탁편에 선 학병동맹과 반탁편에 선 학병단이 충돌하고, 김두한 부대가 학병동맹 및 국군준비대와 교전까지 벌였다. 이에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군사단체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경비대 창설에 즈음하여 학병동맹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1945년 11월 13일 불법 군사단체 결성을 금지하고 1946년 1월 21일 군정법령 28호에 근거하여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지방조직을 가졌던 좌익성향의 국군준비대 요원들이 도단위에 창설되는 국방경비대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남측 군대의 구조를 보면 역사는 일본, 기술은 미국, 정신과 사람은 친일파로 조합되어 있었다. 남측 군대가 구조에 있어 미군화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이승만의 맥아더에로의 작전지휘권 이양이다. 이승만은 작전권은 언제든 가져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작전권 환수를 결심한 순간은 38선으로의 북진결정 때였다. 부산에서 이승만은 직접 붓으로 명령서를 써서 3군 총사령관인 정일권에게 “대한민국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고 북진을 명령하였다. 그는 맥아더에게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들어 신중할 것을 요구하는 군간부에게 “작전지휘권은 내가 자진해서 맡긴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만 높였을 뿐 자신의 의지를 실행할 순 없었다. 1952년 미8군 사령관 테일러(M.Taylor)는 이승만 제거 계획인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작성했다. 그것은 남측 군대가 유엔군의 작전권을 벗어날 경우 반항적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며, 필요할 경우 유엔군 지휘하의 군사정부 수립도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유엔사에 이양한 작전권은 이승만의 생각처럼 쉽게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그 이후의 어떤 정치지도자들도 쉽게 작전권을 돌려받겠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북측 군대 인민군 장교의 상당수는 남쪽 출신이었다. 이는 남측 군대 장교들의 상당수가 북측지역 출신이었다는 것과 비유된다. 인민군 경력의 특징을 보면 첫째, 그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군대였다고 할 수 있다. 사병 뿐 아니라 지휘관의 경우도 동일했다. 둘째는 인민군병사들의 긴 투쟁 경력과 중국 혁명에의 참여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셋째는 소련의 진주와 점령으로부터 소련식 장비와 무기체계, 편제 및 훈련방식을 부여했다. 결국 인민군은 북을 중심으로 중국과 소련의 요소들을 흡수해 창조된 셈이다. 소련은 무기, 장비, 이론, 체제와 편제 등의 하드웨어를 제공했고 중국은 역사적 기원과 인원, 투쟁경험, 조직운용관습, 군내 인맥과 인적 관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린뱌오(林彪)가 지휘하는 제4야전군에 배속됐던 조선의용대 출신 한인사병들이 북한으로 이동했다. 1949년 하반기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공은 3만 7,000명 이상의 병력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는데, 이러한 병력이동은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공동경험 뿐만 아니라 국공내전기에 북이 제공한 원조와 지지에 따른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본군의 한국전 개입을 우려했지만 중국인 병사의 지원까지 약속할 정도로 자신만만해 했다.
주목할 점은 바로 이때 중공군이 양쯔강 도하작전에 성공했고(1949.4) 양쯔강을 도하하면 개입할 것으로 우려되었던 미국이 사실상 중국을 포기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석권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공은 자신감에 넘쳤고, 대륙 석권은 목전에 있었으며 미국은 종이호랑이 같은 존재로 비쳐졌다. 그 다음 순서는 공산주의 형제국인 북한의 차례였다. 한편, 김일성은 차관에 의한 군사원조협정이라는 모스크바회담의 결정에 따라 1949년에 4월 28일, 스탈린에게 구체적으로 필요한 무기목록을 제출했다. 6월 4일 소련정부는 대외무역성의 멘슈코프 명의로 이에 동의함으로써 북에 소련제 무기들이 대량 도입되기 시작했다. 가장 주요한 핵심요소인 사람과 정신은 북에 의해 제공되었다. 전쟁의 결정과정에서도 이같은 결합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를 테면 통일을 위한 의지와 욕망은 북의 지도부로부터 나왔고, 그를 위한 인원과 자신감은 중국혁명 후 중국으로부터 제공되었으며 무기와 장비는 소련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이같은 조합은 남쪽 군대가 미국, 일본, 이남의 합작물이었던 것에 비유된다. 체제가 변화 발전하면서 소멸하고 잔존하는 순서는 체제 생성과정의 순서일 때가 많다. 북측 군대는 외곽을 결정했던 소련의 요소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1950년대에는 중국과 북측의 요소만 남았다가 60-70년대를 거치면서는 북의 요소만이 남게 되었다. 생성과정에서의 역사적 비중의 반영이었다. 남측의 경우는 미군의 요소가 가장 강력하게 남게 되었다. 체제의 생성과정을 지배한 본질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남에서는 이제 한창 논쟁중인 작전통제권 문제가 북에서는 해방 후 불과 1년 뒤인 1946년에 해결되었다. 남북군대의 정통성에서의 불균형은 5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남측 군대에 대해 인민군은 ‘인민과 완전히 유리된 지배계급의 군대요, 미국의 침략의 도구’로 가차없이 낙인찍었다. 북에 따르면 남측 군대의 모든 반인민적 정책의 배후자는 미국이었다. 또한 “자본주의국가의 군대는 낡은 제도를 원조하며 부르조아적 질서를 견고히 하는 가장 완고한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는 도저히 강한 군대가 될 수 없으며 그가 나가는 길은 다만 와해의 길밖에는 없다”고 공격하였다. 인민군은 철저하게 당과 연결되고, 군내에는 정치조직인 민청조직과 군인회의가 조직되어 있었다. 군인회의는 각종 문제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끊임없이 상부의 지시를 침투시키는 군내학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군은 ‘민주주의적 민족간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불렸다. 인민군은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중심고리였다. 사회성원들은 인민군으로 들어갔고 인민군은 사회를 향하여 군사적 원리와 운용방법을 확산하여 체제를 군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선군사상은 그 절정이다. 인민군은 지금까지도 혁명적 사회체제의 중심이다.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전원이 항일투쟁 참가자들이었다. 이는 광복군마저 배제한 채 친일파로 이루어진 남측 군대에 대해 인민군이 보유한 강력한 정통성의 기반이었다. 북의 절멸의 위기에서 참전을 결정한 중국군은 인민군과 1950년 12월 4일 조중연합사령부를 만들었다. 북과 중국은 양군의 통일적 지휘체계에 대한 토의 끝에 중국이 정직을 맡고 조선이 부직을 맡음으로서 작전지휘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정전과 함께 조중연합군해체, 작전권 환수로 이어진다. 미소-중일-남북의 중층적인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남북군대의 건군과정에서부터 노정된 성격의 차이는 인천상륙을 전후한 과정에서 다시한번 확인되고 고착화 된다. 그것은 마치 종자가 어떤 조건을 만나 개화하고 결실하는 것과 같이 수미일관된 생성, 구조, 기능의 일치를 보여준다.

인천상륙작전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에게 있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고, 소련의 한반도 점령이 시작되자 미국은 준비되지 않은 점령경쟁에 뛰어들면서 서둘러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타산하게 된다. 1945년 6월초 포츠담회담에 앞서 일본에 대한 직접공격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결정한 백악관회의에서 마샬 장군은 한국점령은 필요성이 없다는 합참의 견해를 제시했다. 킹 제독과 트루만 대통령도 이에 동의했다. 이처럼 이 시기 미국의 전쟁지도자들은 한국을 소련이 점령할 가능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고 적어도 그런 결과에 대비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포츠담회의 후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바로 조정이 필요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공식 채택된 계획들이 군정이나 4대강국에 의한 신탁통치문제로 귀결되기 전에, 한국을 점령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됐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계획 ‘블랙리스트’에 급히 한국점령계획을 추가하여 수정했고, 점령 1순위의 지역으로 서울과 인천을 정했다. 한강하구와 한강으로 연결되는 경인지역의 지정학적 가치가 주목받게 되고, 이로부터 5년 뒤 인천상륙작전에서 이같은 지정학적 가치는 다시한번 확인된다. 북 최초의 헌법에 수도를 서울로 정하고 있는 것은 한강에 대한 지정학적 역사가 연장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이같은 지정학적 사고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다. 현지부대 한 자동총 중대 책임자 이명일의 9월 12일 보고서를 보면 이것이 명확해 진다.
우리당원들로 하여금… 놈들이 기도하고 있는 경기도일대 지구 상륙을 저지하며 특히 중심지에는 서울에 현관인 인천에 놈들에 피묻은 발을 일보라도 들여노치 말게 할 것이며…
당시 인민군은 미군의 상륙지점을 인천과 남양 안중리의 세 지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서울의 현관인 인천에 놈들의 피묻은 발을 일보라도 들여놓지 말게 할 것”이라고 결의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세 지역 중에서도 방어의 중심은 인천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서울의 현관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인식은 서울이 수도가 되거나 경기지역이 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공식처럼 작용하고 있는 지정학적 인식이었다. 당시 미합참은 맥아더에게 인천보다는 군산으로 상륙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상륙작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맥아더는 미합참에까지 인천으로의 상륙계획을 알리지 않고 비밀로 할 정도였으나, 북의 방어력은 이미 인천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정보를 넘어선 선험적판단기준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한 비밀문건에 의해 미군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전쟁 발발시 한반도의 상당한 지점까지 후퇴하였다가 인천에서 다시 상륙하는 내용의 작전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 같은 작전개념은 당시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미군의 한반도 작전계획의 골간을 이루는 것으로 한반도와 같이 길쭉하게 발달한 지형과 육군 중심으로 운용되는 적,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지는 적의 보급선 등을 갖춘 조건에서의 대응이 상륙작전이 되는 것은 군사적 상식이다. 이 같은 계획의 존재 자체가 미군이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았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전쟁 계획과 유사하게 실제의 전쟁도 치러졌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단계까지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전시작전지휘와 통제권의 행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점은 병력의 배치계획이 실행되는 순간이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떠올렸다는 시점인 6월 29일, 한강방어선 시찰 때의 구상은 바로 전쟁 전의 계획에 토대를 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한강 남안에서 강북을 바라보며 인민군의 진격을 수원선에서 차단한 뒤 인천 쪽으로 부대를 상륙시켜 적의 배후를 공격하는 작전을 생각했었다. 6월 29일 이전인 26일에 이미 맥아더는 주일 총사령부에서 작전계획 SL-17을 보고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찰을 마친 뒤 맥아더는 합참에 미지상군의 투입을 건의하는 동시에 참모장인 아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동경에서는 아몬드 소장과 라이트 준장의 주도로 합동전략기획작전단(Joint Strategic Planning and Operation Group:JSPOG)이 작전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JSPOG는 한강방어선에서 상당기간 동안 적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상륙작전을 추진했다. 이른바 ‘블루 하츠(Blue Hearts)’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이어 7월 4일 미극동군 사령부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최초의 회의가 소집되는 등 준비가 진행되다가 7월 8일 블루 하츠 작전은 중지되고 말았다.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미합참의 한국전쟁 관련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2차대전 중 맥아더는 해상수송부대의 능력을 최대로 이용하여 상륙전을 실시함으로써 혁혁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이 전략에 쏠렸다. 1개의 해병연대전투단을 일본에 있는 제1기병사단과 함께 인천에 상륙시켜 후방지역에서 적을 포획하기 위한 그의 조기계획에 관한 언급이 이미 있었다. 이 작전은 7월22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적의 전진 속도가 너무 빨라 무산되었다.
이 계획된 작전의 본질에 대하여 합참은 7월 13~14일 콜린스 장군과 반덴버그 장군의 도쿄 방문 때에야 비로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보안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콜린스는 인천을 상륙장소로 선정한 것에 약간 불안을 느꼈다. 상륙정(LST)은 조수가 최소한 깊이 30피트일 때에 이 지역을 건널 수 있는데 이런 조건은 한달에 단 며칠밖에 안되었다. 이리하여 계획자들은 공격일자와 시간 선정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좁은 수로와 그 갯벌을 뚫고 항구에 도착은 하겠지만,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은 주간일지라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수로는 지형이 험하고 요새화된 것으로 알려진 작은 섬 월미도에 의해 감제를 받고 있었다.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이 섬의 위험을 감소시키려면 기습의 요소가 파괴될 것이었다. 더욱 고려할 사항은 인천이 부산방어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100항공마일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륙부대와 미8군이 계획대로 연결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 된다는 점이었다. 콜린스의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합참의 직접적인 관심은 상륙장소가 아닌, 9월 중순 특정한 마감시간까지 두 개의 주요부대-1개의 완전한 해병사단과 1개의 공정연대전투단-의 지원을 요청한 맥아더의 요구에 있었다. 그 부대 요구의 당위성에 대한 문의를 했을 때 맥아더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에 의한 상륙공격과 그 후 공수낙하작전을 결합하여 실시할 것이라는 그의 계획의 요점을 설명하였다. 정확한 D-Day는 아마도 9월 25일까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조급히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적의 후방지역에서 조기에 강력한 공격을 한다면 “적의 주요 병참선을 차단하고 결정적이며 격멸적인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 이 작전에 있어 어떠한 물자의 지원이 지연된다면 기회를 상실할 것이다”라고 그는 믿었다. 전시작전통제에서 배치계획, 배치명령은 전쟁으로의 발전도상에서 결정적 전기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워싱턴이 맥아더의 계획에 확신을 갖지 못하자 합참은 그 요원들을 도쿄에 보내 맥아더와 그의 상륙계획에 관한 토의를 갖도록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 콜린스는 10군단이 최초 인천에 발판을 획득하더라도 제8군단이 돌파를 하여 이와 연결하기 전에 바다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하였다. 이런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인천 100마일 남쪽이며 부산방어선에서 보다 가까운 군산에 상륙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곳은 인천보다 자연장애물이 적었으며, 논산과 대전으로 이르는 적의 주보급로에 가까워 위치상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제안은 셔먼 제독의 지지를 받았다. 맥아더는 1시간 동안 전쟁은 물론 언어의 마술사처럼 웅변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옹호하였다.

군산에 상륙한다면 오직 얕은 포위만이 가능하다. 적은 차단당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작전기지로 철수하고 말 것이다. 인천침공부대가 압도당할 위험은 없다. 적이 그 목적에 운용할 충분한 예비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인천의 불리한 점이 바로 기습하는 데는 유리한 점이다.
다음날 셔먼 제독은 극동해군 사령관 조이 제독 등과 회담을 갖고 상륙을 위한 보다 양호한 장소는 인천 남쪽 30마일이며 언제나 물이 깊어 상륙할 수 있는 보성면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 역시 맥아더에 의해 거절당했다. 워싱턴에 돌아온 뒤에도 합참 요원들은 여전히 유보적이었다. 그것은 8월 28일 맥아더에게 보낸 완곡히 표현된 메시지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콜린스 장군과 셔먼 제독이 휴대한 정보를 검토한 후 우리는 한국의 해안에서 인천 부근의 방어태세가 무력하다고 증명될 경우에는 인천에, 또는 발견할 수 있다면 인천 남쪽의 유리한 해변에 상륙부대에 의한 우회기동을 준비하고 실시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극동군사령관이 원한다면 군산 부근에서 상륙부대에 의한 포위준비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잠재적 목표지역의 상황에 관계되는 가용한 정보와 공세작전에 관한 귀하의 의도 및 계획에 관한 적시적인 정보를 원한다.

합참의 완곡한 표현 뒤에 숨은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사본을 합참본부로 즉각 보내지 않았으며, 8월 28일자 그들의 메시지에 대해 응신도 하지 않았다. 9월 1일 북은 부산방어선의 전 전선에서 총공세를 폈다. 제1 임시해병여단은 전선에서 철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출항 준비 중에 다시 소환되어 대구 맞은편 낙동강 중심부의 가장 위험한 돌파지역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이 경악할 사태 진전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후 합참은 극동군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이 잘못 수행되든가, 만일 신속한 승리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재앙적인 결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최후의 경고를 보냈다.
“8군의 가용한 예비가 모두 투입된다는 사실을 포함한 모든 요인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만일 계획된 작전이 예정된 대로 시작된다면 그 작전의 성공가능성과 기회에 대한 귀하의 판단을 원한다.”
당시 합참은 82공정사단을 제외한 미국에 있는 모든 가용한 훈련된 육군부대가 맥아더에게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만약 작전 실패시에는 훈련된 다음 사단이 한국에 도착하는데 4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며 거의 위협했다. 맥아더는 주저함 없이 유사한 기동에서 오랜 동안 승리에 젖어온 지휘관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답변을 보냈다.
부산방어선의 상황은 그렇게 위급하지 않다. 방어선은 어느 정도 축소될 수도 있으며 이 우발상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도 선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우리 부대가 부산 교두보에서 축출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북쪽으로부터의 포위는 즉각적으로 남쪽 방어선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게 되며, 사실 이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북으로부터의 우회기동의 성공은 8군과 10군단의 연결에 달려 있지 않다. 서울지역에 있는 적의 분배체계의 중심부를 점령함으로써 현재 이남에서 운영중인 적의 군수보급을 완전히 혼란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적으로는 그들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 공군과 해군의 절대적인 우세권의 보유로 완전한 자체 지속능력을 공히 보유하고 있는 북쪽의 우리군과 남쪽의 우리군 사이에 포위되기 때문에 적은 군수지원의 붕괴와 우리의 연합작전활동을 통하여 종국에는 분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양개군의 신속한 연결은 적의 완전 붕괴의 극적인 표상이 되겠지만, 작전의 치명적 분야는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로서, 계획되고 당신에게 보고된 작전에 있어서 계획상의 실질적인 변경은 없다.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된 그의 발표를 보고 합참은 인천작전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포기했다. 첫 부대가 해변을 공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야 합참은 그 계획의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알았다. 그는 승리의 확신에 비례하여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맥아더의 의도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기지에서 상륙작전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의 경우에는 작전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집결해야 하는 곳이 일본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북의 첩보원과 공산당원들의 감시가 가장 집중된 곳이었다. 많은 함정들이 집결해 있는 것과 보급품을 탑재하는 것, 해군과 상륙군들이 함정에 탑승하는 것을 이들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인천상륙작전이 종료된 후 1951년 5월 15일 도쿄에서 18명의 간첩들을 재판하였는데 일본에서 활동하던 북 간첩의 지도자인 요시마추 이와무라를 심문한 결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비밀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상륙 1주일 전에 체포되었다. 이처럼 상륙계획은 이미 북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어디에 얼마의 병력이 상륙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북측의 첩보활동이 상륙지점과 병력규모 등을 알아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어야 한다면 유엔사측 첩보활동은 더욱 완전한 상륙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상륙준비를 해야 하는 한강하구인근의 유엔사 첩보부대는 사람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작전 차원의 전투와는 달리 전술 차원에서 현지인들의 인간관계 속으로 복잡하게 얽히고 스며들어가야 했다. 이와 더불어 미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정보부대, 첩보부대의 독특한 구조는 세계차원의 냉전적 분열을 사회차원의 갈등으로 전화시키는 매개가 되었다. 민간인들과의 대민활동, 포섭, 동원, 테러와 학살 등이 첩보부대의 광범위한 활동영역이었다. 켈로(KLO)부대라는 명칭이 유독 한강하구와 서해지역민들에게 낯익게 들리게 된 것은 KLO의 초창기 괄목할 전과가 인천상륙작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켈로부대 KLO8240부대는 서울 명륜동에 본부가 있었지만 활동장소는 모두 한강하구와 서해지역이었다. KLO8240부대는 3개부대로 구성되었는데 위스키대(Whiskey), 썬대(Sun), 고트대(Goat)가 그것이다. 고트대는 특수공작대(Special Operations Unit) 임무를 같이 수행했다. 각 부대의 지역대는 여도, 강화도, 교동도, 초도에 있었다. 이중 썬대는 대청도, 소청도, 볼음도(강화)에 지역 분견대를 두고 있었다. 3개 부대의 KLO가 1951년 10월 단일부대인 8240부대로 개편될 당시 통합부대장은 러셀 대령, 한국인 책임자는 계인주 대령이었다. 실제인원은 섬에 나가 있는 2천명, 서울본부와 훈련캠프 및 북측지역에 침투중인 공작원을 포함해 5천명 수준이었다. KLO의 지휘관이자 인천상륙전을 사전에 준비하여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계인주의 내력은 남측 군대의 친미적 성격을 집약하고 있는 그 어떤 전형을 보인다. 일제시 만주국군관학교 출신인 계인주는 다른 친일파와 마찬가지로 미군정 치하에서 등용되었다. 1947년 의정부 경찰서장일 때 미군표위조범 검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그 뒤에는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장과 차장으로 있었으며 군 내부의 좌파 척결 작업에 전념했다. 그 뒤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전출되었다가 김포지구 위수사령관직을 임명받는다. 그가 김포로 내려갔을 때 위수사령부 요직에는 대부분 그가 정보국 3과장일 때 체포해 투옥시켰던 지난날의 고정간첩들과 좌익계 장교들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는 1949년 대대적인 군내 좌파숙청에도 불구하고 전쟁 직전까지 여전히 남측 군대에 남아 있는 현상이었다. 그는 육본에 부당한 인사라고 항의했으나 육본은 그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부에서는 좌익장교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아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충성서약을 공산주의자들의 위장술로 확신했다. 그는 머리맡에 권총을 놔두고 잠을 잘 정도로 불안감과 배신감에 싸여 있었다. 6.25 이후 그는 김포지역 방어를 위해 육본에 병력지원을 요청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대통령마저 도망간 마당에 후방지원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며칠 후 육본이 수원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니 육본은 벌써 대전으로 내려간 뒤였다. 그는 다시 대전으로 달려갔고 그 와중에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포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아예 부산으로 도망했다. 그것은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직무유기이며, 인민군이 밀려오고 있는 최전방에 휘하 장병과 장비를 놔둔 채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명백한 전선이탈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탈한 뒤 김포에 남아 있던 그의 부하들은 인민군에 투항하기는커녕 장렬히 싸웠으며 도망간 사령관을 대신해서 신임사령관에 임명된 부사령관 우병욱 중령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지자 자기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의 좌익출신 장교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기우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태에 분노한 군 지휘부는 전선이탈을 감행한 비겁한 지휘관 계인주 대령을 맹렬히 비난하며 추적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계인주는 아예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부산거리를 배회하다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로 압송되었고 전시 군사재판에서 총살형을 언도받는다. 한국전쟁이 남북전쟁이었다면 그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미 세계전쟁이었으며 이제 막 세계전쟁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운명에는 도망하던 범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체포되기 전 하늘에서 떨어진 권총을 움켜쥔 것처럼 대역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의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는 인민군을 격퇴 반격하기 위해 JOS(합동비밀작전본부)를 신설하고 거기에 2차 대전 때 부상당하고 퇴역했던 홀맨스다커 소장을 책임자로 기용했다. JOS는 작전을 위해 “인민군의 정세에 밝다”는 이유로 최규봉 당시 KLO 대장이 강력 추천한 계인주 대령을 찾고 있었다. 계인주가 대구형무소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홀맨스다커 소장은 최규봉을 군용기로 동경에 소환하여 유엔군총사령관 명의의 신임장을 내주며 무슨 수를 써서든지 계인주를 빼내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특별기를 타고 대구로 날아간 최규봉은 유엔군사령관의 신임장을 내밀고 대구 형무소장에게 계인주의 석방을 요청했지만 육본의 허락 없이는 불가하다는 답변을 듣고, 육본으로 달려가 당시 정일권 국군참모총장에게 계인주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겨우 면회 허락만을 받은 유엔사령부팀은 단 30분의 특별면회를 신청해 놓고, 계인주가 일단 유치장을 나오게 한 뒤 헌병의 감시를 따돌리고, 그를 탈출시킨다. 당시 신문은 계인주 납치사건에 대해 KLO대원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대구형무소에 난입한 것으로 보도했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계인주 대령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선 팔미도 등대 작전의 성공으로 다른 4명의 군인들과 함께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다. 남측 군대의 탈영병이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는 대목에서 미군이 필요로 하는 능력만 있으면 친일죄도, 사형죄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남측 군대는 학습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전쟁이 아닌 냉전체제 하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겐 반공만이 전쟁의 유일한 가치였다. 해방공간을 거치며 친일, 반공, 탈영병이라는 요소를 모두 함축하고 있었던 군인 계인주는 냉전의 토양과 미군의 선택만으로 일거에 운명의 역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친일을 극복하지 못한 취약한 정통성의 건군 과정이 군인들의 가치형성에 이후 어떻게 작용할지의 방향도 이미 그의 사례에서 예견되어 있었다. 남측 군대와 미군의 정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군의 울타리 안에서의 갈등일 뿐이었다. 계인주는 미국 은성훈장까지 받았지만 정전 때까지 남측 군대에서는 탈영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육군본부에서는 그를 위한 원상복귀 신청서를 국방부에 상신했다. 그러나 장관이 끝내 그것을 결제하지 않았다. 이유는 계인주를 달갑지 않게 여긴 신성모 국방장관이 군의 인사문제에 거의 백지 상태인 신임 이기붕 국방장관에게 훈수를 두고 압력을 가한 까닭이다. 그것은 지난날 계 대령이 좌익계열 소탕전을 벌일 때 신성모 장관의 불미스러운 점을 파헤친 앙금이 가라앉지 않아서였던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국방장관 자리에 손원일 제독이 부임하자 손 장관과 친분이 두터운 해군출신인 연정 중령, 즉 팔미도 작전에서 같이 참여했던 대원인 연정이 정전협정체결 한달만인 1953년 8월에 계인주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육군본부 3과장일 때의 계인주 대령은 좌익활동을 하던 연정(당시 소령)을 체포하려 했는데 연정이 일본으로 밀항하는 바람에 놓친 일이 있었다. 미군과 한국군의 갈등과 충돌, 한국군 내에서도 미국파들의 한국군 지휘부 배제와 충돌은 전쟁기간 내내 심심치 않게 일어난 일이었으며, 특히 미군직속의 첩보부대에서 그러한 현상은 자주 일어났다. 북파공작원의 대부로 알려진 김동석의 행적이 그렇다. 김동석이 중요 첩보를 한국군 지휘계통이나 관련기관에 먼저 보고하지 않고 미군첩보부대에 직보하는 일이 잦아지자 모 고위층 장성이 그를 권총으로 사살하겠다고 위협한 일이 있었다. 그 장면을 마침 리지웨이 대장이 목격하고 격노하여 그를 질책하고 김동석을 지켜주었다. 김동석의 전기는 그 같은 사건들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당시 제반 공작을 위한 작전권을 미군이 행사하고 해상투입지원도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던 바 고문관을 통하여 미군첩보부대에 먼저 보고하고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음은 물론, 한국군 계통으로 보고해 보았자 조치시간만 지연되고 비밀이 누설되는 등 역기능이 자초되기 때문에 선행보고를 하지 못하는 임무 수행상 불가피한 여건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골간을 이루고 있는 친일파와 미군의존 전통의 재확인에 다름 아니다. 이는 강화도와 한강하구를 둘러싼 전쟁사에서 유독 주목을 받은 KLO부대의 성격에 대한 단적인 증명이기도 했다. 남측 육해공군이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작전명령을 받고 있는 구조에서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했다. 즉 한국전쟁을 통하여 남측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에게 이양함으로서 건군 과정에서의 미군의존 전통은 마침내 구조화 된 것이다. 계인주와 팔미도 작전에 같이 참가한 연정의 이력은 좌익출신 군인들의 운명에 대한 또 하나의 극적 드라마를 보여준다. 연정은 일제시 학병 신분으로 해방을 맞고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좌익 계열인 학병연맹에 가입해 있었다. 말썽이 일자 해군으로 옮긴 그는 새 출발과 함께 인천지구 해군기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여기서도 좌익활동에 연루된 탓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묵호에 있는 동해안 해군기지 책임자로 자원해 옮겨갔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당시 해군의 제1인자인 실세이자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손원일 제독 모친의 친구라는 인연 때문이다. 손 제독의 부인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다닌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오르간 주자여서 대통령 가족에게 언제라도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상급 만담가인 신불출이 북의 거물간첩이라는 것이 알려져 온통 떠들썩한 와중에 그와 그 일행이 감쪽같이 종적을 감춘 사건이 일어났다. 알고 보니 그들의 탈출의 길을 터준 것이 동해지구 해군사령관 연정 소령이었다. 그런 비밀이 탄로나자 연정은 그길로 일본으로 밀항했고 도중에 사세보의 미해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밀항 중 맹장이 터진 그는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기 몸에 혼자 모르핀을 많이 주사했으므로 체포되었을 때는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연정의 이용가치를 안 미해군 정보당국은 그를 첩자로 역이용해 요코하마 해군기지 앞의 술집 바텐더로 심어놓았다. 그는 G2 휘하의 캐논첩보기관(일명 Z기관) 소속 특수정보관 신분으로 일했다. 말 재주와 붙임성이 있고 영어를 괜찮게 하는 그는 정보보고 때의 기회를 이용해 고위 제독을 비롯, 유력인사들과 교제의 폭을 넓혔다. 그럴 즈음에 한국전이 일어나자 그는 고위 제독들에게 읍소하여 전방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으니 원대복귀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졸랐다. 클라크 팀장은 그가 유능하니 한번 써보라는 고위층의 적극 추천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의 전력을 알고는 동료 미국인들과 최 대장에게 그 사실을 귀뜸해 그만은 무기를 못가지게 했고, 특히 팔미도 작전에선 개별행동을 못하게 감시해야 했다. 연정은 미국을 위해 헌신, 3개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정보원의 특성상 LA 모처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만 있었으나 2003년 한 TV다큐멘타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한쪽에서 보면 그의 생은 배신의 이력이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성공의 이력이다. 좌파와의 절연을 입증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미군에 충성을 바치게 되는 연정형의 혹은 반대의 인간유형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1946년 남로당 결성 이전부터 좌파활동에 가담했다가 1949년 숙청작업에서 검거된 박정희가 미군장교들의 탄원으로 구명된 뒤 보여준 그의 파란만장한 행보 또한 연정형 인간유형의 재확인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가 체제의 극단을 오가며 전개되고 개인만의 고유한 영역 없이 국가와 세계와 직접 연결되고야마는 이러한 연결이 낯설지 않은 데에는 전쟁이 만들어 놓은 냉전체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념과 원칙보다 시류에 부합하는 처세와 실용이 가치관을 압도함으로써 진정한 보수도 설자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또한 한국전쟁의 영향력 범위에서 아직도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제 KLO의 활동을 보자. 계인주 대령을 동경의 GHQ G-2에 인계한 최규봉 대장은 귀국 후 동래의 본부회의에 돌아와서는 여기저기의 피난민 수용소를 순방하며 피난민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8월 10일 “부산으로 내려가 백구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고 24명의 대원을 이끌고 해군함정 백구호에 승선했더니 거기에는 당시 해군정보국장 함명수 소령과 해군 정보부대원 12명도 타고 있었다. 백구호는 부산을 떠나 서해 남양만 앞바다의 덕적도로 향했다. 8월 12일 오전 5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해군소장)의 명령을 받고 남측 해군 701함(함장 이정)에 승선한 해군육전대(해병대 전신)는 인민군이 무방비로 방치해 두고 있던 서해안의 덕적도를 점령했다. 덕적도에 도착한 다음날 최규봉 KLO대장은 어선을 구해 완전무장한 간부요원 1명, 대원 3명과 어민 두 사람을 안내원으로 선발해 영흥도의 상황을 정탐케 했다. 정탐보고를 받은 남측 해군육전대가 인천항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강화만의 요충지인 영흥도에 기습 상륙, 탈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켈로팀은 남측 해군 702함을 타고 영흥도로 향했다. 파견대는 면사무소 앞에 천막 다섯 개를 쳤다. 그로부터 켈로 영흥도 파견대원들은 어부를 가장하여 주변해역의 수로, 수심, 조류의 흐름, 간만의 차, 인천항 인근에 부설된 기뢰의 수와 위치 및 해안과 내륙지방에 포진한 적의 병력 규모를 정찰하기 시작했다. 최규봉 대장(KLO Goat대 대장)이 9월 14일 쾌속정을 타고 다섯 사람과 함께, 영흥도 파견대에 나타났다. 유진 F. 클라크(Eugene F. Clarke) 해군대위, F.클라크혼(F.Clarkhorn) 육군소령, 존포스터(John Foster) 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여섯 명 중 계급이 중간급인 클라크 해군대위가 팀장인 것은 그가 GHQ 정보국에서 한반도의 해안 정보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처음부터 인천상륙작전 계획수립에 깊이 관여한 때문이다. 특히 팔미도 작전계획은 그가 주도하여 수립했고 그것을 고위층에 멋지게 브리핑하여 칭찬받는 자리에서 자기가 그 작전을 담당하겠다고 지원한 것이다. 클라크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입이 무겁고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인천상륙작전 만큼은 해양자료에 근거한 해상작전이니 해군이 주도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인천 주변의 많은 자료를 그가 갖고 있어 윗사람도 인천 얘기가 나오면 꼭 그에게 묻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지역 전문가였다. 클라크 혼 소령은 일반 대학출신이고 해양학의 공학사 학위를 가진 해저측량, 해류조사 및 분석전문가이며 신중한 성격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육군에서 전문가로 차출되어 나왔으며 국무성 정보당국과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는 지휘관 성향이 아니라 공병장교로서 전문지식이 풍부한 참모형 전문가였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인 포스터 중위는 통신공학 전공의 전형적 군인이고 클라크 대위를 보좌하여 본부와의 연락을 책임진다. GHQ에서 작전계획을 짤 때 클라크 대위와 손발이 잘 맞아 클라크가 끌어들인 인물이다. 최규봉 대장은 계인주와 함께 한국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대북 첩보활동, 군표위조범 체포 등 공로가 있어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GHQ의 G2에서는 휘하의 KLO조직망을 크게 확장하면서 기존과는 다른 성격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유격대 조직활동을 비롯 적진 교란, 역정보 유포, 인민군 후방에서의 민심교란 등 활동영역을 꽤 다양하게 넓혀갔다. 인력동원 규모는 많을 때는 1개 사단 규모를 초과할 때도 있었다. G2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조직을 전시체제로 확대 편성하였다. 부대이름을 KLO에서 8240AU.FEC/LD(극동군연락부대)로 개편하고 전쟁 후 신설된 G2휘하 JSOB(종합특별작전본부) 예하의 행동부대로 편입시켰다. JSOB 초대부장에는 2차 대전 중 유럽전선에서 부상하여 퇴역한 홈즈 K. 대거 예비역 육군소장이 임명됐다. 그에게는 8240부대와 캐논첩보기관과 연합하여 북, 만주, 중국본토와 소련의 연해주지역에까지 첩보공작활동을 넓히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한편, G2 월로비 부장의 특별지시에 의해 JSOB 직속으로 편의상 COIC(종합작전첩보대)를 임시로 편성했다. 여기에 참가한 기관은 G2, JSOB, 캐논첩보기관, 8240부대, 남측 해군정보국 등이다. 이들은 북의 평양 이북 여러 도시와 그 주변 그리고 만주의 심양, 장춘, 하얼빈, 대련, 여순, 산해관, 산해관의 연안지대, 열하성, 금주성, 안동, 산동반도(청도 일대)등 각지와 서해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 섬에도 분산 침투되어 지령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무전으로 보고하거나 귀환하였다. 이들 특수첩보요원들은 주로 낙하산으로 투하하여 잠입했다. 또 부산 동래에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 CIA(잭크부대)에서도 8240부대와는 활동양상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위에서 말한 규모로 밀파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ASIS(미공군특수첩보부대)가 서울 오류동에 본대를 설치하고 1949년 말까지 김포 미공군기지 CIC(방첩대) 대장으로 있던 도널드 니콜스 소령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꽤 폭넓은 첩보조직망을 펴고 대북 첩보공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니콜스부대는 인천, 오류동 등에 있던 교육대, 교동도, 백령도, 삼산도(석모도)등 10여개의 파견대, 약 30여개의 분견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그 산하에 숫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수백명의 침투공작원이 있었다. 니콜스부대는 미그기 잔해수거를 위해 헬기 침투 후 근거지인 숙도에 착륙하는 등 북한의 섬지역을 장악, 첩보요원과 공작요원의 전진기지로 사용했다. 니콜스 부대원으로 활동한 송원삼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정전 직후인 53년 10월 5일 첩보대, 교동도 파견대에서 선발된 7명의 별동대 일원으로 해주 부근의 북한 공산당 간부집을 기습, 간부 부부를 납치하고 기밀서류와 신문서적 등을 입수해 복귀하는 등 정전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했다.
고양시의 민간학살 피해 관련자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9월 20일 한강도하작전 성공 이후 여맹위원장이 체포되어 김포공항의 미군 정보부대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는데 그중에 일본인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군첩보조직에는 원산상륙작전시 소해부대 파견과 별도로 이미 유엔사 지휘아래 일본이 참전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교차확인이 필요한 증언이다. 한편, 미국의 전세계 도청조직인 NSA의 전신인 국군보안국도 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위수준의 음성도청(LLVI: Low-Level Voice Intercept)을 수행하는 다른 부대는 지프를 타거나 전방 근처의 벙커에서 도청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입수한 첩보는 바로 전투부대들로 송신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22개의 LLVI팀이 작전을 수행했다. 이들은 국군보안국 산하의 육군보안국 부대들이었으며, 1952년 11월 이후에는 NSA 창설과 함께 NSA 소속으로 바뀐다. 신호정보부대들의 최고 관심사는 소련의 참전, 특히 소련 공군의 참전이었다.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참전하게 되지만 소련의 참전 사실을 숨기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당시 참전 조종사로서 한 소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스몰체코프(Alexander p. smolchekov)의 증언은 그같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소련은 공군을 참전시키면서도 비행기에 소련 마크를 달지 못하게 하였다. 최초로 부대가 이동했을 때 나를 비롯한 조종사들은 아무도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주로 이동하였다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전투 중에도 관제탑과 교신할 때 한국어나 중국어를 사용하여야 했으며 군복도 소련 군복을 입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어의 내용은 금지되었다. 탑승시 한국어로 교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종사들이 익힌 한국어 실력은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해서 급박하게 전투가 수행될 때에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우리는 결국 곧바로 러시아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자신들의 참전사실을 숨기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미국의 도청부대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설픈 대신호 정보작전은 금방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암호와 위장은 끝까지 완벽해야만 상대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NSA에 도청당하는 줄 알면서도 무선통신을 사용한 것이나 빈 라덴이 위성이동통신 전화를 계속 사용한 것 등은 대신호 정보작전의 오류임이 분명할 것이다. 북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들에서 활동하던 신호정보부대들은 북, 중국 및 소련이 자국 조종사들에게 보내는 명령을 입수할 수 있었다. 도청요원들은 입수한 정보를 ‘레이더 신호’로 위장해 북 영공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미군 조종사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조종사들이 정보를 받으면 ‘공격 성공률’이 현저하게 증가했다. 위의 자료에서 북에서 떨어진 작은 섬들이란 서해의 도서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 소속부대는 국군보안국 산하의 공군보안국 부대였다. CIA 역시 이들 서해안의 섬들을 근거지로 비정규전을 수행했다.
CIA 베테랑 요원인 프라우티는 한국전쟁이 CIA를 구했다고 믿었다. 한국전쟁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전쟁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전시 상황 속에서 각군의 자원까지 제공했다. 1952년 육군소령으로서 CIA한국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던 존 싱그라웁 소장은 CIA의 독립적인 임무가 북한 내에 군사정보원, 첩보원, 저항요원들을 투입하는 일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는 “소규모의 중무장한 고속 순찰정들을 타고 해안 근처 섬들에 있는 비밀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공중투하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중투하 침투에는 당연히 비행기가 필요했다. 581ARC비행전대는 CIA의 필요에 적합한 H-19 헬기부대인 2157비행구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국정찰활동합동사령부(CCRAK)를 통한 6개월 간의 작전에서 이 구조대는 1100시간 이상의 전투시간을 기록했고, 3백 차례 이상의 정보작전과 구출작전을 수행했다. 이 구조대는 밤에만 임무를 수행했으며 한반도 해안에서 10마일, 북한전선 뒤쪽으로 60마일 떨어진 초도에서 주로 발진했다.
한편 공군소속 첩보원들은 정보수집 뿐 아니라 우익무장대들과 연계하여 후방교란전투 등도 수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KLO 문서에 등장하는 자료이다.
“SOURCE: TROUBLE RADIO AIR TEAM 두 명의 방첩대원(agent) 중에 한 명은 황주 인근에서 ANGR 9 SET와 함께 떠났던 무전기 기술자 중에 한명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방첩대원은 1950년 12월 9일에 보급품들과 함께 공수된 보충지원된 방첩대원들 중 하나였다. 그 방첩대원들 중에 한 명이 무전기와 함께 연안(연백)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 그룹의 네 번째 멤버가 1950년 12월 20일에 북과의 포격전에서 사망했다. 무전기는 발전기에 총알이 맞았기 때문에 고장이 났다.”
한편, 1950년 12월 20일 연백읍에서는 인민군과 우익 무장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북한민주통일운동사(황해도편)’와 ‘연백군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우익 무장대들은 연백의 서쪽인 해성면과 남쪽인 교동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공군소속 KLO 대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연백의 연백치안대, 홍현치안대, 금산치안대호국군 등과 같은 우익 무장대와 함께 전투를 하였고 거기서 사망했다. 공군 소속 첩보원들의 주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무전기라는 것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황주에 떨구어진 첩보원은 연안까지 오는 모든 길목에서 적(중공군과 인민군)의 위치를 파악하여 보고했고 이 정보를 토대로 미군기가 폭격을 가한 것이다. 강화 서쪽 볼음도에는 ‘제2정보사령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제2 정보사령부는 15개 이상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터도 2000평이 넘었고, 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부대 앞과 맞은편 산은 야포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701함대가 바다에 정박해 있었다. 제2 정보사령부가 어떤 편제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위의 NSA 관련자료를 통해 추정할 때, 국군보안국 소속 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KLO 부대가 한 것은 순수한 첩보활동만이 아니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던 시기와 장소마다 그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KLO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았다.

강화특공대
강화군에는 강화 특공대 말고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교동도로 후퇴했던 연백치안대를 주축으로 하는 교동해병특공대와 말도로 후퇴했던 청년방위군 제2해안지대가 있었다. 이들은 1950년 12월 말경부터 황해도 등지에서 후퇴한 우익치안대의 일부로 당시 서해안의 덕적도, 순의도, 용매도, 초도, 백령도등에도 신천유격대, 해주유격대등의 이름으로 우익치안대가 산재해 있었다. 1951년 1월6일,8일,10일 인민군 제20해안경비여단의 중화기 부대 제5대대 제3대대와 인민군 제26여단의 공격으로 해안지대에 집결하게 된 서부 황해도 일대 장연,송화,은률등 3군의 주민과 피난민들이 서해에서 활동중인 한국 해군함정에 구출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최현기의 작전일지’에 따르면 이들 우익치안대들은 한국군과 미군의 지휘,명령체계 하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먼저 육군과 우익치안대의 작전통제관계를 보면, 최현기의 전투일지 1951년 3월11일자에 따르면 “교동에서 육군 제5816부대장 안일채를 만나 수류탄 2정, 아식소총 500발을 접수하였다. 육군첩보부대(HID)김인칙 대장과 면담하여 안일채 부대와 혼성으로 연백군 봉화리에 상륙하였으나 인민군의 기습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도 첩보부대 김동석대위 에하 김영희대대로 3월24일 1개소대 병력을 파견하여 철산리를 출동하여 개풍지구로 잠입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서해안첩보부대(4863부대: 대장 김동석)의 소속원인 고00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1951년 3월에 극동군사령부소속 송해면 1대대 2중대로 편입되었는데 중대장 조명희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대부분 황해도에서 피난을 나온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2달간 훈련을 받은 뒤 1개중대 70명이 삼판 2대를 나눠타고 철산리를 출항하여 2-3차례 개풍군 해청포구로 갔다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다음 해군과 우익치안대의 작전통제관계를 보면 한국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은 “1951년 1월20일 인천경비사령관 이희정과 소령 문기섭에게 지시하여 미군과 협조해서 서해안도서에 있는 반공청년과 학생유격대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서해지구방위사령부(해병대 백령도부대의 모태)를 백령도에 설치하였으며 초대사령관으로 이희정중령, 참모장은 첩보전 베테랑 문기섭소령을 임명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함명수의 증언에 의하면 이희정 사령관과 문기섭 참모장은 미육군 맥기대령에게 우익치안대를 활용해 강력한 게릴라부대를 만들자고 건의하였는데, 맥기대령은 필리핀에서 원주민을 규합해 게릴라전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자생적 게릴라 조직을 잘 이용하면 전황을 유리하게 반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렇게 해 탄생한 것이 ’표(표범)부대‘라고 알려진 레퍼드(Leopard)부대이다. 이로서 육군과 우익치안대가 작전시 해군함정을 지원받아 개풍지역등으로 잠입한 사실을 알수있다.
미군과 우익치안대의 작전통제관계를 보면, 강화특공대 대장 최중석은 1951년 1월4일경 카톨릭 신부 윤을수박사의 소개로 서해안에서 활동중인 ‘미8군 CIC대장’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강화의 정세, 주민동향을 물었으며 강화군수 관사에서 일박을 한 다음날 최중석대장을 데리고 교동면 인사리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해군함정으로가 무기와 식량, 인민군복 수백벌을 주었다고 한다.당시 서해 해상에는 미 함대의 통제하에 701함정(백령도주둔부대장 이희정중령), PF-61함정(함장 최호용중령), PC-704함정(함장 현시학소령),YMS-304함정(함장 양한균대위),YMS-309함정(함장 유래혁 대위), YMS-313함정(함장 박태현대위)등이 정박해 있었다.그런데 이같은 한국의 육군,해군과 강화등 서해안 지역의 우익치안대간의 작전통제 관계는 결국 미군의 작전통제하에서 진행된 것으로, 1951년 7월 13일자 최현기의 ‘전투일지’에 의하면 “육군 제5816부대장 안일채가 미8군 소속 308CIC에 의해 민폐와 치호품 부정처분, 군 계급장 불법병용 등으로 구속되었다”는 기록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308지대는 1950년 7월 한국으로 이동하는 미8군과 동행하기위해 도쿄에 있었던 극동군사령부 소속 441지대(미육군방첩대CIC)에 의해 급히 조직되었다. 308지대는 첫 번째지대였으며 제8군지대인 까닭에 한국 내 방첩지대들의 통제소 역할을 하였다. 801지대는 초기에 서울,인천지역의 705지대를 돕도록 배정되었으나 후에 8군사령부의 308지대로 합류되었다.당시 미8군은 1951년 1월 15일 경 에이블(Able)계획에 따라 작전참모부 특수부내에 유격전과 설치계획을 세우고, 정보부(G-2) 소속 맥기(John H. McGee)를 작전참모부(G-3) 특수부 부장으로 승진 이동시켰다. 에이블 계획의 1단계는 유격대원을 적지 후방에 침투시켜 첩보수집을 하고, 기습전 같은 소규모 전투를 도발해 적진교란을 목표, 2단게는 유엔군이 총공격을 개시할 때 유격부대가 적 후방에서 공격을 돕게하고, 3단계 이후에는 그런 기지를 동해안까지 확장할 계획이었다.맥기는 부임하자마자 서해안의 중심지인 백령도에 윌리암 에이블(William Able)기지를 창설하여 연안도서에 집결해 있는 각 반공청년단체를 유격부대로 조직하였다. 맥기는 버크(W.A.Burke)소령을 부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백령도에 파견본부인 표(Leopard)부대를 설치하였다. 버크는 당시 서해안에 산재했던 신천, 장연, 해주, 연백, 벽성, 옹진, 개성, 평북지역의 우익치안대들을 재편하여 1951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동키1연대부터 21연대의 이름으로 백령도 표부대로 편입시켰다. 강화특공대는 1951년 3ddnjf 27일 경 육군 작전명령에 의거하여 육군 을지 제2병단(사령관 육군소령 차동준) 제20연대로 편입되어, 강화특공대 대장 최중석은 제20연대 (강화읍 관청리)의 연대장으로 강화특공대 돌모루파견대 대장 이복록은 제20연대 3대대 대장으로, 강화특공대하부조직인 소년단의 대원은 제20연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해안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군의 강력한 항의로, 1951년 8월 10일 미극동군사령부 예하 8240여단(여단장1대 이현서, 2대 박상준)으로 재편된 다른 우익치안대와 마찬가지로 육군본부직할 을지제2병단 제20연대에서 유엔군 유격대인 ‘표부대’의 동키5연대로 편입되었다. 8240여단에는 20여개의 부대가 있었는데 강화에는 울팩1, 교동은 울팩2, 다른지역에는 동키부대가 있었다.
이때부터 강화특공대등 서해안 지역의 북한 출신 우익치안대들은 미8군의 지휘통제하에 들어간다.

한강하구 첩보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 한국전쟁은 남측 군대의 미국화 등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미국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전쟁을 통한 미국의 발산과 수렴이다. 현재의 5027작전계획은 한국전쟁 전 존재하던 한반도 전쟁계획의 대강을 확정지었으며 다른 나라의 전쟁계획으로도 확장되었다. 한국전 발발 당시 난립하던 정보기관은 한국전을 거치며 중앙집권화 되었고, CIA의 부활과 1952년 NSA의 창설로 이어진다. 위에서 살펴본 한강하구와 서해지역의 첩보전은 전선 전체에서도 특별한 민감성을 지닌 것이었다. 한강하구와 서해에 큰 영향을 끼쳤던 첩보조직을 중심으로 미국 내부로 향한 한국전쟁체제의 수렴과정을 살펴보자. CIA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사령부 겸 극동군사령부와의 협조아래 복잡한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다. 맥아더 해임 전까지 이들 사이에는 마찰의 여지와 비효율성이 심각하게 존재했다. CIA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던 육군 심리전부대의 로버트 맥클루이 준장과 그의 상관인 프랭크 페이스 육군장관은 효율성 제고를 내세워 심리전의 선전부분 조정업무를 육군 통제 아래 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비밀작전과 비재래식 작전 부문에서는 합참의 합동부속기획국이 1951년 말 대통령 직속 심리전 전략위원회의 지원 아래 CIA의 통제권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합동부속기획국은 CIA 및 한국내 비밀작전에 대한 지휘권을 극동사령부사령관과 한국정찰활동합동사령부(Combined Command for Reconnaissance Activities, Korea : CCRAK)에 부여했다.
CCRAK는 극동사령관겸 유엔사령관이 모든 전선의 배후활동을 조정하기 위해 창설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한국합동자문위원회(JACK)로 위장해 활동 중이던 CIA 한국지부는 독자적인 지휘권 행사를 주장했고, 결국 극동사령관과 합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같은 지휘구조에 따라 CIA 한국지부는 CIA 워싱턴본부와 CIA 극동사령부로 이어지는 지휘계통의 승인 없이는 극동사령관 지원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냉전초기 ‘더러운 술책’을 사용하고자 하는 열망이 점점 커짐에 따라 권력이 확대되고 있던 CIA는 비밀전쟁의 총지휘권을 장악해 갔다. 국가안보회의(NSC) 훈령은 CIA가 비밀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없도록 했고, 대통령조차 CIA의 그런 기능은 NSC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CIA는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고 즉각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준비를 갖추는 거대한 역량을 창출해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전쟁은 CIA에 부활의 날개를 달아 준 것이다.
북의 대규모 공격이 이루어지기까지 몇 주 동안 한반도는 NSA의 전신인 국군보안국의 신호정보 대상국에 올라있지도 않았다. 2개의 중대사안 목록 중에서도 북은 부차적 목록에서 15위를 차지했다. 일본 카미세야의 도청기지와 기타 몇 군데 기지에서 입수한 정보의 대부분은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었다. 또한 공산화된 중국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으므로 87명의 도청요원들과 해독 전문가들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전쟁발발 당시 남측에는 단 2명의 미국도청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훗날 NSA의 분석에 의하면 “국군보안국에는 한국어 전문가도, 한국어 사전도, 통신분석 요원들도 그리고 한국어 타자기도 전혀 없었다”. 상당한 극비수준의 NSA 보고서가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국군보안국은 전쟁이 터졌을 때 엉뚱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워싱턴에 전달된 첫 번째 정보는 서울주재 특파원의 뉴스보도였다. 1949년 육해공군의 암호해독 기관들이 국군보안국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신호정보 기관들을 관리할 만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관을 만드는 대신 각각의 기관에 정보입수 및 해독활동에 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따라서 국군보안국 국장은 각 기관에 지시를 내릴 권한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국장은 현지본부에 임무를 하달할 수조차 없었다. 설령 임무가 각 첩보기관에 전달된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바뀌거나 무시되기도 했다. 국군보안국에서 러시아 정보분석을 담당했으며 훗날 NSA의 러시아 암호해독 부서를 이끌기도 했던 허버트 L. 콘리는 국군보안국장에 대해 “자신이 있는 건물 밖에서는 아무 권한도 없었다”고 말했다. 여러 첩보기관들이 각기 독자적인 체제에서 활동하다 보니 조직의 하부계통에서는 알력 따위의 마찰이 빈번했다. 이는 특수조직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종종 불합리한 분규도 생겼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였다. 정보의 혼란과 복잡함을 해결하고 서로의 협력 도모와 보다 효율적인 첩보작업을 위해 이들을 통합, 조절하는 모종의 기구가 필요하게 됐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CCRAFE(종합심사지휘본부)다. 이 부대를 8177부대라고 명명하고, 그 본부를 8240부대가 있는 서울의 태화기독교사회관 옆의 구 한국전력회사 건물에 두었다. 8177부대 사령관에는 A.W스튜어트 장군이 임명됐다. 그는 미극동군 총사령부(FEC) CIC사령관으로서 오랜 방첩 및 첩보업무의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다. 모든 첩보기관을 조율하는 조직인 CCRAFE의 우두머리를 육군에서 선발한 것은 극동군 총사령부가 유엔군 총사령부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미국에서의 정보공동체이사회의 의장에 CIA국장인 스미스 육군대장이 취임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극동지역을 관할하는 CIA의 보고는 곧바로 워싱턴의 CIA본부에 보고되어 중요사항은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도쿄의 GHQ 또는 FEC의 G2(정보참모부) 부장 책임 하에 수집되는 정보, 즉 KLO8240부대, 캐논첩보기관, JSOB(종합특별작전본부) 등의 종합적인 정보는 G2에서 선별하여 워싱턴의 JSC(합참)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서울주재 니콜스 소령의 ASIS(미공군특수첩보부대) 보고는 미공군 참모총장을 거쳐 JSC에 보고되고 마지막에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첩보부대의 노력은 전술 차원에선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전략 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1952년 6월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분명한 사실은 전쟁 종결 후 휴전기간 동안 우리는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아마도 질투심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가 너무도 힘들여 얻어냈던 첩보활동의 효율성을 대부분 상실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전에서의 우리의 첩보활동은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우리가 이루어냈던 수준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고 불만을 표했다. 이로부터 1년 후 NSA 국장인 랠프 캐나인 육군중장도 밴플리트 장군과 의견을 같이했다. 이 문제가 심각해지자 1951년 12월 국가안보회의(NSC)에 상정된다. 이 문제를 상정한 CIA의 월터베델 스미스 국장의 비망록에 의하면 그는 당시 “현재 정부가 수행하는 신호정보 활동의 효과와 보안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의 신호정보 활동이 ‘분권적 시스템과 책임소재의 다중성’으로 인해 ‘비효율적’으로 되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1952년 10월24일 트루먼은 국군보안국을 해체하고, 대신 국회와 국민은 물론 전세계 그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1월 4일 미국국가안보국(NSA)이 탄생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던 날이었다. 한국전쟁의 첩보전과 NSA의 탄생이 얼마나 직접적이고 총제적인 관계를 갖는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첩보전사에서 한강하구지역의 첩보전이 갖는 특수한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도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CIA의 강화와 NSA의 창설 등 미국의 정보전쟁정책이 한국전쟁 첩보전의 심각한 혼란과 문제의식으로부터 발단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인민군의 대응 북측이 김포에 상륙, 점령한 것은 7월 1일, 연이어 4일에는 인천을 점령한다. 그 와중에도 7월 3일 강화 수로를 경비 중이던 남측 군 50호 경비정이 북측 선박(40톤급으로 군인 만재) 4척을 격침시키는 등 해군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6일 부산에서 한미연합 해군방위사령부가 창설되고, 7월 14일에는 영국 함대가 이미 서해안 작전에 가담. 인천 부근에서 연안에 포사격을 실시하는 등의 기록으로 봐서 초반부터 제해권을 장악,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월 초부터 미해군과 공군의 인천 폭격이 시작되었다. 8월 4일에는 B26이 인천을 폭격, 1만 톤급 수송선을 격침, 8월 5일에는 미 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이 인천의 군사목표에 대해 2시간 함포사격을 실시했으며, 미5공군 B26이 야간 소이탄 공격을 실시했다. 8월 15일에는 남측 해군 초계선이 인천에 접근중인 정크 9척을 격침하고, 8월 18일 한국 해군이 덕적도에 상륙한다. 8월 20일에는 영국 해병대가 인천 팔미도에 상륙, 라디오 중계소를 파괴하고, 21일에는 한국 해병대가 인천 남서쪽 45마일의 어도 25마일의 선갑도, 이작도 등을 탈환한다. 육지에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것과 달리 바다에서는 유엔군과 남측 군대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8월 18일 남측 해군의 덕적도 장악을 시작으로 한 영국 해병대의 팔미도 상륙 등 일련의 작전은 한 달 뒤 있을 인천상륙 뿐 아니라 2차 인천상륙과 1.4 후퇴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인천상륙전 남측 해군을 작전통제한 것은 유엔군 산하 영국의 95-1기동전단이었고 남측 해군과 해병대 정보조직들은 민간인 반공유격대들과 연계되며 작전을 수행했다. 1950년 9월 12일 인천상륙작전에 돌입하면서 봉쇄와 폭격부대의 조직이 바뀌었다. 알란 스미스 제독이 딕시(AD-14)함에 승함하여 새로운 95기동부대를 맡게 되었다. 이후로 95기동부대가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봉쇄와 호송임무를 수행하였다. 95기동부대의 공식명칭은 ‘유엔봉쇄 및 호송부대’였다. 95-1기동전단은 한국의 서해안을 담당하였으며 영국 제독이 전단을 지휘하였다. 동해안은 미군이 지휘하는 95-2기동전단이 담당하였다. 서해안을 담당한 95-1기동전단은 항모 해상봉쇄 및 초계세력 그리고 서해안 도서 방어세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해안과 달리 서해안은 섬들이 많아서 게릴라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18개월은 38선 근해의 섬들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대결기간이었다. 점령한 몇 개의 섬에 유엔군은 유엔군 항공기들의 통제를 위하여 레이더를 설치했다. 일부 서해안 섬들은 손상을 입은 유엔군 항공기들의 조종사를 탐색하고 구출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일부 섬들은 정보수집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서해안 작전은 동해안과는 달리 섬을 지원하는 작전이 많았다. 섬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던 것은 유엔군의 해상봉쇄와 폭격, 근접지원 등의 전통적인 해군 임무 뿐 아니라 첩보작전과 게릴라작전 등 그 범위가 확장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섬들이 유엔군 항공기 탐색 및 구출기지로 쓰인 것은 7월 14일부터 영국 함대가 서해안 작전에 공식 가담하기 전부터였으며, 7월 12일 덕적도를 중심으로 이미 영국 함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남측 해군이 8월18일 덕적도에 상륙한 것은 이미 영국 함대에 의해 장악된 1달 뒤의 일임을 다음의 강화사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50년 7월 12일 하오 3시경 공산군진지를 폭격하고 돌아오던 미공군 B-29 1대가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 서남방에 추락하였는데 탑승한 미공군 7명은 구출하여 미해군 기지가 있는 덕적도로 후송하였고 매음리 전방에서 낙하된 미병 3명 가운데 2명은 인민군에 납치되었고 한 명은 해상에서 익사하였으나, 공군 7명이 낙하산으로 낙하하였는데 한 명은 볼음도 전방 백사장에 내려 주민 김규성, 김태흥, 김경환, 나정희 목사 등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며, 또 3명은 그곳 해상에 낙하하여 주민 전교선, 최재인, 안병섭 등이 구원하였고, 서금도 전방 해상에 내린 2명은 최재철, 박춘의, 김희선, 이원근, 황호천, 김학윤 등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석포리 전면 해상에 낙하한 한 명은 주민 문형식이 구출하여 통역이 가능한 박조원 씨 댁에 집합하여 상처입은 공군은 치료하는 등 손보았다. 다음날 13일 아침 5시에 범선으로 후송조치 하였는데 총지휘자는 방위군 소위 김태흥의 지도에 응하고 선장 이근홍, 선원 전경수, 전덕원, 통역 박조원 도합 12명이 강화 서남 해상을 거쳐 덕적도에 작전 중인 영국 구축함에 인계하였다.
이제 북측군대의 대응을 보자.
8월 27일 북의 전선지구경비사령부의 ‘전투명령 No.100’이 하달되었다
제107, 106연대는 다음과 같이 배비(배치)를 변갱(변경)할 것. 107연대본부는 32대와 함께 금포(김포)에 31대대는 강화도에 27대대는 한다리(개성남쪽 10km지점), 33대대는 봉일천리에 각각 이동할 것. 제106 연대본부와 24대대는 홍성에, 17대대는 상야리(남포남쪽 12km지점), 5대대는 서산에, 22대대는 당진에 각각 주둔할 것. 부대이동은 8.28 20:00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8.30 5:00까지 완료할 것.
이 명령을 통해 볼 때 인민군은 강화도와 개성, 김포의 한강하구와 임진강의 파주를 축으로 하여 서산-당진까지 이어지는 긴 방어선의 구축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서해 뿐 만이 아닌 한강하구 깊숙이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점이다. 북도 미군의 상륙전이 대규모가 될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대규모는커녕 유격대 규모의 작전만이 가능했던 한강하구에까지 방어선을 넓힌 것은 고도의 병력집중이 필요한 상황에서 현대 이전의 지정학적, 지군사적 사고가 작용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한강하구를 통한 보급수송을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육지의 전선이 장악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민군 107연대는 8월 14일 창설된다. 이 부대의 첫 창설 목적은 점령지역에서의 패잔병소탕과 전선수송의 보장이었다. 107연대는 경기도 일대와 천안, 아산, 진천 일대를 담당하며 31, 32, 27대대의 세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중 31, 32대대는 신편부대였다. 각 대대들은 전선부대의 후송과 수송을 보장하기 위해 내무서와 협의하여 지방주민을 교량수리 등에 동원하였다. 또한 전리품 수집 보관과 지방 내무서 기관의 경비사업 협조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특히 27, 32대대는 “해안보병려단의 해안방어조직에 참가, 감시를 조직하고 진지를 완강히 굴설하고 도서에 잔존한 패잔병 소탕을 조직 진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시점에 벌써 해안보병려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월 17일 경기도방어지역군사위원회를 설치한 것을 보면 이 시점에서 또 다른 군사적 준비를 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위원회 위원은 7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울지역 위수사령관, 경기도 인민위원장, 서울시 인민위원장, 부위원장, 경기도 내무부장, 서울시 내무부장, 서울시당 위원장, 서울시 경비사령관 등이 그들이었다. 경인지역의 군-경찰-행정-당의 최고 지도부가 총망라되어 방어위원회를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의 사령관은 서울시위수사령관이었다. 전시였기 때문에 당연히 군인이 최고직위를 맡고 당조직까지 정식으로 군사편제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어지역군사위원회의 사령관은 민족보위상에게 복종한다”고 하여 위원회는 평양의 직접적인 군사적 지휘를 받았다. 방어지역군사위원회는 구역 군면리위원회는 물론 직장자위대, 일반자위대 돌격대(무장자위대)에 이르기까지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방어’위원회는 지역 내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방어지역위원회는 총 6개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1구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양 등이 포함됐고, 2구역은 인천을 중심으로 강화, 김포 등이 포함되었다. 면과 리의 방어위원회에는 경비조, 감시정찰조, 통신연락조, 공작조, 구로조, 소방조, 수송조, 돌격조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8월 15일 이전에 매우 치밀한 지역방어조직이 구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7연대도 8월 21일부터는 작전명령의 내용이 현저히 바뀌고 있었다.
적은 50.8.20 6:00 령흥도, 대구도에 함포사격 엄호 하에 미군과 국군 패잔병 약 1개 중대가 상륙하였으나 령흥도를 경비하는 내무원들과 의용군에 의해 일부역량이 소멸되었다. 계속 함포(사격)를 가하면서 상륙을 기도하고 있다. 해안으로부터의 적의 침입을 불허하고 그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부대를 변갱(변경)할 것. 107연대의 31대대의 1개 중대를 안중리에 배치, 아산에 주둔한 27대대의 구분대와 아산만 방면으로부터의 적의 침습을 불허할 것. 32대대는 남양에 주둔 남양만 방면으로부터의 적의 침습을 불허할 것, 1개 중대는 대구도와 령흥도에 완강한 해안방어를 조직할 것… 이상의 부대배치는 8월 21일 야간 중으로 이동 완료할 것.
이 명령을 보면 북은 아산만으로부터 영흥도에 이르기까지 긴 해안 방어선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이 하달된 당일로 바로 부대배치를 완료하라는 것으로 봐서 매우 긴박한 대치상황으로 돌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부대로서 사단이나 군단의 지휘를 받지 않고 직접 전선지구 경비사령부의 지휘를 받던 107연대 앞으로 8월 26일 18:00에 하달된 ‘전투명령 No.94’에 의하면 본격적인 상륙에 대비,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적의 패잔병들은 해안에 산재한 도서들에 상륙하여 가진 만행을 감행하며 해안선까지 상륙을 기도하고 있음으로 제 107연대와 관하 각 대대들은 다음과 같이 이동배치할 것을 명령한다. 제 107연대본부는 32대대와 같이 부평 게양산(계양산) 일대에, 31대대는 강화도에, 27대대는 남양에 각각 1950.8.28. 5:00까지 이동할 것.
상륙기도에 대비하여 북은 병력을 강화도와 대구도 등 인천 앞바다에까지 전진 배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조치에는 아직도 남측 군대의 간헐적인 소도서 상륙을 차단하려는 의도와 앞으로 있을 대규모 상륙을 대비하려는 의도가 혼용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8월 28일에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8월 2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직접 지시에 근거한 ‘전투명령 No.1’에 의하여 ‘인천방어지구사령부’가 창설된다. 상륙작전 20일전에 북의 최고사령부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거의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9월 9일 미군과 남측 군이 본격적으로 인천지구에 대한 사전정찰을 실시하던 시점에서 인민군 박훈일 사령관은 ‘전투명령 No.4’를 내리는데 상륙시점이 9월 15일 전후가 될 것이란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3. 각 지역 방어책임 부대장은… 자기지역 내의 방어시설을 이미 지적된 9월 15일까지 완성할 것. 4. 영구화점, 토목화점, 음폐호 등을 반드시 적의 맹렬한 항공폭격과 함께 함포사격에서 피해를 면할 수 있게 견고하게 설비할 것 5. 방어작업 진행정형에 대하야 매일 1차씩 보고할 것이며 9월 18일까지 방어작업 완료에 대한 서면 및 략도보고를 제출할 것.
이 시기 방어시설을 완성하기 위한 주민동원은 강화, 교동주민들의 증언에서 거듭 확인되는 사실이다. 3,5번 항목은 상륙개시일을 9월 15일경으로 거의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주며 4번 항목은 단순한 상륙전이 아니라 대부대와의 전면적인 결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비는 하였으되 낙동강에의 전력집중과 시간의 촉박함, 장비와 부대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실제의 준비는 완전하고 충분치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인천상륙작전 역시 노르망디상륙작전처럼 쌍방 지휘관이 비슷한 수준이고, 상대방의 작전을 거의 인지한 상태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 성공 여부는 작전시점과 군사역량, 즉 기동의 문제였다.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9월 18일 경으로 조금만 늦어졌으면 인민군은 인천지역에 철의 요새를 구축했을 것이고 상륙의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판단이 설득력을 갖는다. 이는 미군이 인천상륙에 성공한 이후에도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지 못하고, 인민군과 의용군의 거센 방어와 혈전에 직면하여, 13일이나 늦은 9월 28일에야 서울에 진주할 수 있었던 것에서도 확인된다. 비슷한 수준의 지휘, 통제, 정보력을 갖춘 상대일수록 승패를 결정하기 위한 노력은 더욱 섬세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미군측 또한 상륙장소와 날짜를 기만하기 위해 전력투구를 해야 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인천 상륙을 성공하려면 월미도를 먼저 점령하여야 했다. 계획단계에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공격하는 날 아침에 폭격하면 될까? 그렇게 하면 상륙의 기습효과를 높일 수 있지만 2차대전의 경험에 비추어 충분한 폭격의 효과를 달성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스트러블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미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9월 10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루블 제독이 지휘하는 96-8기동전단 항공기들의 네이팜탄을 이용하여 섬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9월 13일과 14일에 선견부대가 공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천공격 당일 아침에 폭격할 것이다… 전진을 계획할 때 나는 서해안 전반에 항공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적군이 인천에 대하여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따라서 항모 항공기들은 월미도와 인천지역 뿐만 아니라 남쪽의 군산지역과 북쪽의 평양지역도 공격하였다. 그리고 9월 7일에 군산지역에 기만 상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상륙지점을 9월 13일 첫 폭격 전까지만 숨길 수 있다면 그 이후에 적들이 우리의 상륙지점이 인천이라는 것을 알아도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북은 총력을 다해 상륙을 막고자 했고, 9월 14일에는 미군의 구축함을 지상포 사격으로 파괴시켰다. 그러나 이는 스트러블 제독의 유도전술이었다.
“우리의 구축함들이 정지상태에서 월미도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토론한 결과 적의 포격을 유도해서 그들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조 및 예인함의 함장이었던 레들 중령은 이 작전을 위한 준비실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적의 공격 등으로 손상된 함정을 예인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또한 구축함들의 위치가 섬과 너무 가까워 갯벌을 건너서 함정에 침입하는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수리팀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훈련을 시켰다.” ‘드헤븐’ 구축함은 적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갑판 위에 헝겊으로 옷을 입힌 마네킹을 세워놓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월미도는 맹렬한 폭격에 앙상하게 변해버렸다. 기록은 당시 “월미도에 약 400명의 인민군이 저항했으나 108명 사살, 150명 이상 생매장의 피해를 남긴 채 15일 11:15에 점령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한 인민군 소대장의 기록에 의해 9월 17일까지도 미군이 완전히 상륙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화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보자. 강화에는 7월 이후 민주청년반공돌격대, 반공지하결사대, 대한정의단, 일민주의청년동지회, 백민돌격대, 향토단 등의 우익무장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 일민주의청년동지회(일청)가 눈에 띈다.
강화읍 신문리 218번지 지하실에서 애국청년학생들은 결사적으로 투쟁할 각오 하에 동 7월 4일 일민주의 청년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주창하던 일민주의 이념으로 3천만 민족이 함께 뭉칠 것을 주장하며, 구체적 활동 방침을 세워 죽음으로써 적구소탕에 나서기를 맹서하였던 것이다. 회장에 곽노웅을 추대하고 동지 구민서로 하여금 정치보위부에 침투시켜 비밀을 탐지케 하는 한편, 소년동지 4인으로 하여금 강화읍 신문리 홍종문 댁을 점거중인 공산군에게 노래를 배운다는 구실을 붙여서 잠입시켜 정보를 얻어, 9월 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당황한 공산군이 무기고의 감시를 게을리하는 틈을 이용하여 동일 12시경 소총 3정 탄환 5백여발을 입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민주의는 안호상에 의해 체계화된 이승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념으로 이 조직은 이념을 중심으로 뭉친 조직이란 점에서 다른 조직과 차별성을 보인다. 여느 조직들과 달리 공작 방법이 대담하고 치밀했다. 일청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공유격대를 통합하여 치안대를 만드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10월 2일 일민주의청년동지회는 조양회사(조양방직)에서 치안대를 조직, 10월 2일부터 결사적으로 잔여 괴뢰군과 그의 주구를 추격하였다. 이때 양사면 철산리에는 괴뢰군 1000명이 집결하여 있었고 강화읍 월곳리 포구에 20여명이 후퇴하려 집결 중이었다. 10월 3일 일민주의청년동지회, 대한정의단, 민주청년반공돌격대 간부들이 회합하여, 강화군 치안대를 편성하여 회장에 홍재승, 부대장에 곽노웅, 최중석을 추대하여 조직을 강화하였다.
조직 결성 장소는 조직의 물적, 경제적 기반과도 직접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강화의 주력산업은 직물업이었으며 경기지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조양방적은 강화도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였던 것이다. 당시 신문에서 조양방적 관련기사를 찾을 수 있다.

조양방적주식회사의 총 출자금액은 50만원, 건평은 150평으로 강화지역의 부호인 홍재묵, 홍재용 형제와 정주의 이정근의 출자로서 설립되었다.
치안대장인 홍재승은 조양방적 출자자인 홍재묵, 홍재용 형제와는 같은 가문으로 해방 후에도 대지주였다. 홍재용은 군수를 지냈으며 9월 28일 내무서에 잡혀 있다가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납북된다. 이러한 가문의 사연은 홍재승이 치안대의 대장직을 맡게 되는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경제관계나 봉건적 인간관계가 군사관계를 통해 집약되어 표출되기 때문이다.
강화군사에는 일민주의청년동지회의 구민서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보위부에 직접 침투하여 정보활동을 했던 대담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에 대해 더 이상 밝혀진 것은 없지만 다음의 사실은 구민서가 유격대와 유엔군 서해안 작전부대를 연결하는 인물임을 추측케 한다.
덕적도에 파견하였던 구민서가 귀환하여 그의 보고를 듣고 조직부장 경종오와 통신부장 송윤석을 인천에 있는 강화경찰대에 연락케 했다. 10월 10일 강화경찰대가 귀환하게 되어 사무를 인계한다.
덕적도는 영국군 함대의 서해작전 근거지이자 남측 해군이 장악하고 있던 섬이고 KLO부대 등 첩보부대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덕적도의 지시를 구민서가 전달함으로써 강화경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강하구와 서해지역의 민간유격대는 KLO부대 등을 통해 미군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김포에서도 치안대와 군조직의 긴밀한 관계는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인민군 보고서를 보자.
김포군의 인민들은 각 정권기관이 없기 때문에 반동파 치안대가 조직되어 분산된 아군을 발견만 하면 무조건 총살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연락병도 파견하기가 곤란한 형편에 있습니다… 또한 적정을 요해할 결심으로 지방인민과 전투원과 같이 파(견)하여도 치안대들의 경비에 발견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진격할 목적으로 행군을 출발하였다면 즉시로 적에다 연락을 조직하여 적은 만단의 전투준비로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강화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9월 17일 북측 군대가 철수하였다가 다음날인 18일 다시 돌아온 것이다. 개성 남쪽에 위치해 있던 제107보안연대는 1개 대대를 예비로 두고 부평, 김포읍 그리고 강화 부근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전개하였다. 이들의 이동상황은 9월 17일 미공군의 공중정찰에 의해 관측되었으며 9월 18일 이후 김포반도에서 체포된 포로에 의해 단대호가 확인되었다. 9월 18일 인민군이 김포와 낙동강 전선에서 급속도로 후퇴하던 시점에서 강화 전선에로의 복귀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당시 인민군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북으로의 후퇴 아니면, 제2전선 형성, 즉 적후방에서의 게릴라 활동이었다. 강화의 전선지도부는 후퇴 대신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김포와 서울축선에서의 만만치 않은 저항과 강화에서의 전선의 부활이 이 기간 한강하구 전황의 특징이다. 그러다가 10일 뒤인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 점령과 함께 강화도에서도 인민군의 철수가 시작된다. 보도연맹위원장 구안모가 강화 장날인 9월 28일 조리를 돌리고 처형당하는 중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황과 일치한다. 그러나 강화군사는 10월 2일까지도 1000명의 인민군이 강화에 잔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육지보다 완강하게 지속된 저항을 설명할 수 있는 환경조건은 강화가 유엔군의 진격축선으로부터 벗어난 섬이란 점도 한 몫 할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 전 한강하구지역 첩보부대들의 비밀공작과 민간유격대의 연결은 세계 차원의 냉전체제가 국가를 지나 민간영역에까지 관철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같은 계기가 한강하구체계에 미친 영향은 정전 이후 한강하구지역 곳곳에 세워진 전적기념비의 무게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중국군 참전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은 1949년 10월 1일 건국한지 1년 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로서는 힘든 결정이었다.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지시, 추동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참전을 피했다. 모택동은 신중했지만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항일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혁명적 의리를 앞세워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참전을 결정한다. 모택동은 한번 결정하자 대담하게 움직였고, 만주는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에 이어 세 번째로 조중공산당의 연대를 상징하는 성지가 되었다. 이제 전쟁은 미국-중국의 전쟁으로 정확히 변화해갔다. 서로가 피하려 했던 세계전쟁이 된 것이다. 2차 대전에서 성공한 ‘무조건 항복’과 절멸주의의 승리에 도취한 맥아더는 후방보급선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한 진격을 계속하고 있다가 중국군이 참전하자 낙동강에서 북이 퇴각하듯, 파죽지세로 밀리기 시작했다. 팽덕회의 노련하고 신중한 전략은 밖으로는 유엔군을 유인, 섬멸하며 1,2,3차 대공세를 승리로 이끌었고, 안으로는 중국군 내부의 조급성과 승리에의 도취증을 비판하며 병력집중, 분할포위, 각개격파의 지도원칙을 수립해가고 있었다. 조중연합군은 계속전진을 중단하고 후방과 전선을 다시 추스렸다. 승리지상주의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하던 맥아더와는 다른 전략이었다. 워커 중장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에 취임한 릿지웨이(Mathew B. Ridgeway 중장)는 지역이나 방어선을 점령하기 보다는 연결된 전선을 유지하면서 과감한 철수작전을 통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면서 우세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강타하여 공산 측의 피해를 극대화 하고, 중공군이 휴식과 재정비를 제대로 하기 전에 공세를 취하며 이들의 전력을 더욱 고갈시킨다는 작전방침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미련 없이 철수하였으며, 공산 측의 공세가 끝날 때쯤인 1월 15일 과감한 위력수색작전을 시작으로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에 공산측은 유엔의 대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2월 4차 공세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모택동은 1951년 1월 28일 제4차 공세를 앞두고 팽덕회의 원칙과는 달리 강경한 지시를 내려 보냈다.
4차 공세작전 준비에 즉각 착수할 것. 대전-안동 북부지역을 점령할 것. 제물포와 서울 그리고 한강 이남을 확고히 장악한 뒤 전선을 남하시킬 것. 중국군-인민군 병력을 15~30km 후퇴시킨 뒤 휴전협상에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함. 적들은 우리 병력이 북쪽으로 후퇴하고 한강을 자기들이 장악한 뒤에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임. 4차 공세 이후 적들은 조선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협상을 제의할 것임… 아군이 대전-안동 북부지역을 점령한 후 2-3개월의 휴식과 준비기를 거친 뒤 결정적인 마지막 5차 대공세를 감행할 것임.
그러나 전선의 현실은 팽덕회가 더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음이 곧 확인되었다. 2월 5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에서 “아군은 최선을 다하여 적의 진격을 막고, 착실하게 전국戰局을 타개하며, 아울러 각 방면의 준비를 강화하여 장기적으로 힘든 계획을 수행한다”는 방침을 전했고 이는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강은 다시 전략기준선이 되었다. 중국은 한강근처에서 정전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위 전보에서 “4차 전역이 마무리 된 후 적이 아측에게 한국문제를 해결하도록 화해의 담판을 하고자 할 때 담판을 진행하는 것이 중국과 북한에 유리할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미 2월 17일에 이르러서 전선은 한강하구로부터 양평, 횡성, 진부리 선으로 밀리고 있었다. 전세는 불리해지고 있었고 팽덕회의 방문을 받은 뒤 3월 1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내야 했다.
조선전장에서 최근 진행된 공세작전에서 적의 대부분이 소멸되지 않아, 조선으로부터 물러나게 할 수 없었으며, 그리고 그 적을 대규모로 소멸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전쟁은 장기화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는 적어도 2년간의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팽덕회의 회고록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었다.
적의 계획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유인하여 자신들의 강력한 진지를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연후 우리가 지친 다음에 우리를 향하여 정면공격을 개시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부대를 우리의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우리의 측방으로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병참선이 길어짐에 따라 보급문제도 매우 어려워졌다. 전투와 비전투 요인에 따른 손실로 인해 우리의 병력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재차 공격에 앞서 병력보강, 휴식, 그리고 재정비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모택동의 한강의 가치에 대한 정책판단과 팽덕회의 전략판단은 400여년 전인 1627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일어났던 후금과 조선의 전쟁인 정묘호란에서 후금이 후방공격과 병참선이 길어지는 이유를 들어 진격을 멈추고 한강하구와 염하수로가 만나는 강화도 연미정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한강하구에 작용하는 지정학적, 지군사적 가치는 시대와 전략목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환경요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4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강하구의 연미정은 정전의 현장이 되었고 지금, 그 앞에는 남측 해병대 초소가 경계를 서고 있다.
중국군의 참전과 함께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상정했고, 다음날 국회는 큰 논란없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화에서도 국민방위군이 소집되었고, 12월 19일 이들은 강화를 출발한다. 강화도의 거의 모든 청장년이 국민방위군에 끌려감으로서 전투력을 가진 인원은 거의 강화를 비운 상태가 된다. 당시를 서술한 기록을 보자.
청장년들의 결속은 가장 중요시되어 청년방위군을 계속 재정비하야 강화군은 제3지대로서 지대장으로 송정헌이 임명되었으며 본도를 3개 편대로 편성하고 각면에는 중대를 두어 장정 훈육과 방위 결속에 주력하여 왔다. 이 청년 방위군은 전원 내가면 외포리에 집결시켰다. 당시 국회의원 윤재근 씨의 주선으로 선박 13척과 미군용 상륙정 LST를 내가면 외포리로 보내어 청년방위군(제2국민병)과 일반인 등 5000여명을 남하시키는데 서해안 각 도서를 지나쳐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하여 고산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는데 그 동안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장정이 쓰러졌다. 이 실정이 알려져 51.3.20일 교육대는 해체되고 곧 귀향 조치하였으나 도중에서 병사자는 많이 있었다. 이 교육대 부정으로 책임자등 6명은 처형되었다.
위의 서술은 국민방위군의 모집과 후퇴, 해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하고 있다. 후퇴에 미군용 상륙정이 동원될 만큼 인천상륙 이후 강화를 비롯한 인근 섬에서 미군과의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서술자는 국민방위군을 청년방위군, 청년방위대와 혼동해서 쓰고 있다. 청년방위대와 국민방위군의 관계는 이렇다. 1948년 국방경비대의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우익청년단체를 국군의 기간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우익청년단체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난립해 있던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1년 뒤에는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청년방위대는 사설단체였지만, 한국전쟁 발발 중에는 국가기구를 대신해 모병과 후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면서 이 부대의 운영을 사설단체에 불과한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년방위대에 맡겼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은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고스란히 국민방위군의 지휘부를 맡게 되었다. 이들 지휘부는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기아로 인한 아사자,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속출하였는데, 사망자 수만도 90,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참상은 국회에서 폭로되어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고, 이시영 부통령은 사임서에서 국민의 의혹을 풀기 위한 국회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였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7월 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 12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인민군은 그들의 교재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는 도저히 강한 군대가 될 수 없으며 그가 나가는 길은 다만 와해의 길밖에는 없다”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비판이 모든 자본주의 군대에 대한 비판으론 적합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익조차 경악해마지 않았던 국민방위군 사건에 이르러서 북의 비판은 저주에 찬 예언처럼 적중하고 있었다. 유진오는 헌법초안서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쓴바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가기구가 반체제적 국민이 아니라 충성스런 국민을 향해서까지 반인권적 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방위군 스스로의 비참한 말로와 더불어 국민방위군 동원으로 남성부재의 사회가 된 강화 등 도서지역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1950년 겨울 전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할 무렵, 강화와 교동에는 피난민과 ‘특공대’라고 불렸던 일군의 이북 피난민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10대말 20대초의 젊은이들로 한복바지를 입고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 낯선 사람들은 황해도의 우익치안대, 대한청년단(서북청년회), 학도대, 유격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만 남은 섬에서 힘의 공백 기간이었던 6개월간 그들은 ‘법’이었고 ‘질서’였다. 1951년 6월경 통폐합된 유격대인 ‘타이거여단’은 강화에선 두려움의 존재였다.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사람(유격대)들은 쌀을 주면서 쌀을 한말이나 한 달에 한 말을 줬나? 그리 주면서… 한 집에 하나씩 맽겨서 밥을… 근데 인제 그 분들이 여기서 근무하면서 주민들을 피해를 많이 입힌 거는 나무, 불 땔 나무 뭐 이런 거를 자꾸 가져오라 그래서- 그게 줄 게 있어야지… 지붕을 이렇게 해서(벗겨서) 갔다 줘야지 안 그러면 큰일나- 그래서 우리 동네는 그 때 당시에 얼마나 어려웠나면 반장을 한달 반장, 한달 반장 처음에는, 한달 반장해도 한달 동안 너무 고생하니까 안 되겠다, 일주일 반장으로 하자. 일주일 반장이 하루 반장이 됐어요. 하루 반장. 맨날 반장을 바꾸는 거야. 왜 바꾸냐면 그, 그 사람들이 원하는 일 감당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xxx수염이 허연 사람들이 반장을 하는데 그 사람들한테 매 맞고 그래요. 말 안 듣는다고, 주로 ‘황해도’ 침투 들어가는데 인원동원 안 해준다고. 인원동원 들어가서 죽고 그래… 그래서 그거 안 해 온다고 그냥, 그 굉장한 피해를 줬어, 그 분들이…”
이들 유격대의 배후는 미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육군첩보부대였다.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는 이들의 전적비가 서 있다. 그 내용을 보자.
육군 제4863부대(육본소속) 제 1지대장 김동석 대위는 보병 제 1사단에 배속되어 임무수행 중 1951년 2월 중순 강화 교동 등지에서 지방출신 단위로 무장대를 조직, 산발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 연백지구 반공 청년단체들과 접선. 그들 인적자원으로 제 5816부대 강화유격대 창설을 지원하는 한편 그 일부는 수하의 무장호위대로 흡수통합하여 유격부대로 확대개편, 1951년 3월 9일 강화 철산리에 배치했다. 이후 5816부대와 합동 작전 비롯 개풍군 연백군 일대에서 대소 40여 면의 침투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주전선 후방을 교란하면서 주임무인 서부전선 전투전략정보 수집에 크게 공헌하였다. 1951년 7월 26일 육본 작명 제7호에 의거 을지병단으로 통합되어 교동도로 이동 을지병단 제23연대 기간조직으로 재편되었다.
1951년 1.4후퇴 당시 김동석은 중국군의 진격으로 전선이 대전 부근까지 남쪽으로 밀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육군 첩보부대 1지대장으로서 파주군 송탄리에 본부를 두고 강화도 양사면 철산리에 공작거점을 운용하면서 제17연대에 귀순한 인민군 105전차사단 1대대장 김영(김홍으로 개명)을 공작 소대장으로 영입, 임명하여 대북 공작을 전개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린다. 육군 첩보대는 1948년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육군 정보국 3과(특별조사과)가 미 CIC업무를 수행하였다. 1948년 11월1일 특별조사과가 SIS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 10월20일 CIC로 개칭되면서 정보국 2과로 분리되었다. 1950년 10월 21일 방첩대를 정보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육본직할 특무부대를 창설하였고 1951년 3월25일 정보국 3과에 있던 첩보대가 육본직할 첩보부대로 변경, 창설되었다.
황해도 연백군 일대는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정 하에 있었으나 전선이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1.4후퇴 이후론 북측지역이 되어 있었다. 주민 중 일부가 남쪽으로의 탈출 기회를 노리며 석산치안대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대장은 박재엽이었다. 6.25 당시 옹진반도 육군1사단에 근무하다 한강폭파로 남하하지 못하고 패잔병으로 낙오된 장기락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은신하던 중 석산 치안대의 무장대를 지휘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박재엽은 강화도에 육군 첩보부대의 공작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야간 간조시에 배를 타고 건너와 김영 공작소대장과 접선되었다. 김영의 공작대와 석산결사대가 합세하여 공작을 하기로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석산결사대원 20여 명이 야간에 북을 탈출, 강화도에 도착하게 된다. 제1지대 공작소대는 1951년 초부터 그해 가을까지 지상전투가 현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를 이루는 동안 이들 원주민을 대동하고 황해도 대동반도 일대의 장단, 조산, 개풍, 개성, 금천, 흑교, 평산, 남천 등 8개 지역으로 진입하여 지하 거점을 구축하고 인민군 병사와 내무서원을 사살하고 생포해 오는 등 40여회의 작전을 수행했다.
강화특공대장 최중석은 2월말경 강화군 송해면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첩보대 소속 서해파견대장 김동석과 만났다. 당시 김동석은 최중석에게 “왜 김인칙에게만 포로를 넘겨주고 우리에게는 포로를 주지않냐”라며 따지듯 협조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김인칙은 1951년 1월10일 육군특무대 소속 서해파견대장이라며 강화경찰서에 나타났다. 김인칙은 신분증을 보여주며 ‘대북공작 임무를 하고 있으니 서로 정보를 교환하자면서, 포로를 잡아오면 특무대에서 조사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고 한다. 따라서 1951년 1월 14~15일경 강화특공대장 최중석은 “돌모루포구와 철산포구로 들어오는 강화군 월북자들을 생포하여 육군 특무대 소속 김인칙대위에게 넘겼는데 김인칙은 이들을 강화면 신문리 소재 일반주택에서 심문을 하였고, 이들 일부는 훈방되었고, 일부는 강화특공대가 배를 내주어 여러차례 육본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미군과 김동석의 인연의 깊이는 파주 광탄면 창만리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에서 다시 확인된다. 이것은 1978년 미2사단에서 처음 세워준 것이다. 2002년 한국전 전쟁영웅으로 선정, 미2사단 전쟁박물관에 맥아더, 리지웨이, 백선엽과 함께 김동석 영웅실이 설치되었다. 이 전공비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되어 관리되고 있는 데서도 이 부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1997년 11월 30일 창만리 이장, 광탄면장, 파주군수 강도희, 국회의원 박명근에 의해 다시 세워진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곳 창만리 두만동은 6.25사변 중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정월 대공세로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1월 4일 두 번째 서울이 함락되는 시점에 적진 후방에서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가 반공청소년들과 1951년 4월 초순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연합군의 3월 반격계획인 ‘리 타’ 작전의 기여로 혁혁한 전공을 남긴 터전이다. 당시 지대장은 육군소령 김동석이다. 그는 나철호를 특별 공작대장으로 하고 공작조원 허지신, 정선모, 유조화로 하여금 이곳 반공청소년 25명과 규합하여 항전결사대로 점조직하여 파주군내와 임진강변을 주로 한 적정감시체제를 수립 24시간 적 동태를 파악 보고하고 특히 야간에만 행동하는 부대와 물자의 남하를 추적 탐색하고 때로는 기습공격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지연시키고 퇴각하는 적 부대는 매복함으로써 그들의 대오를 함락케 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으로 전력 약화를 초래케 하는 한편 임진강 북방 개풍군에는 육군 중위 김진수를 유격대장으로 하는 공작조 육군상사 강성식, 김홍, 홍순문을 잠입시켜 작전범위를 장단, 개성까지 넓혀 행동하면서 연합군의 공세에 맞추어 황해도 평산에 침투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약 100일 간의 작전은 적 행동의 감시와 더불어 기습과 매복이 50여회, 생포 37명을 밀로로 후송하였고 그중 중공군 소대장 1명 인민군 장교 2명이 아군작전에 직접 참여 한 바 있다. 기간 중 적 사상자 및 물자 손실은 막대하였다. 우리측 피해는 1951년 4월1일 평산에서 전개된 격심한 유격전에서 희생된 자를 포함 전사 4명, 전상 10여명이었다.중공군의 보급, 병참선이 길어지면 팽덕회의 예측대로 유엔군은 후방상륙을 시도할 것이었고, 다시 그 지점은 한강하구를 기준으로 한 인천지역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 때문에 가장 친미적인 군인사중의 하나로 분류되는 김동석과 그 부대는 적진 한가운데서도 완강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월3일부터 시작된 서울 탈환작전과 2월10일, 2차 인천상륙에 성공함으로써 정전시까지 한강하구지역은 가장 중요한 정보기지가 된다. 북한 신문인 ‘조선인민군’에 의하면 ‘강화도 해방전투’제하의 기사에서 “박승달 구분대 전투원들은 1951년 1월17일 24시 만조시간이 되자 3척의 배로 1000m의 거리를 가진 건너편 만수산 비탈의 강기슭을 향하여 은밀히 출발하였다… 다음날인 1월 18일 12시 제2차도하를 승리적으로 수행…중대장 최광영은 제1소대를 강화서 정면으로 공격하게 하고 제2소대를 좌측 산에 제3소대를 우측산에 배치하여 동일 하오 3시 강화시를 비롯한 동도의 10개면을 완전히 해방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가능성
안순
안순은 원래 좌익운동을 하였던 사람이다. 평소 안순은 인품이 좋고 공부도 제법 한 사람이라 지역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양도면 인민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안순은 인민위원장을 하면서 인민군을 설득하여 우익반공인사들을 색출하여 학살하는 일을 막는데 주력하였다고 한다. 인민군과 지역좌익들이 지주나 우익인사들을 잡아오면 “이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니까 풀어줘”라고 하는 등 여러차례 희생을 막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좌익사상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인민위원장에서 내몰리듯 몰려났다. 인천상륙작전이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들어오지 전에 이미 강화에는 특공대라는 우익반공세력이 생겨났고 부역자처리에 혈안이 되었다. 집에 있던 안순은 특공대에 체포되어 강화경찰서를 거쳐 인천경찰서로 넘어갔다. 결국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지역주민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탄원을 하는 바람에 안순은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된 후 칩거하고 있던 안순은 1951년 1월 4일 특공대에 붙잡혀 건평리에 있는 특공대 지서에 끌려가 해안가에서 총살당했다. 또한 양도면 인산리에는 인민군이 넘어왔을 때 안영식이 구장을 봤는데 그는 구장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주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안순과 안영식의 노력으로 인산리에서는 정작 자신들과 김봉천 3명만이 피해자가 되었다.

윤성근, 윤재근
윤성근은 이동휘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화도면에 보창학교을 설립한 윤명삼의 아들이다. 만주 봉천대학을 수료하고 향리로 돌아와 청년운동의 기수로서 화도면 면장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힘을 기울인 의혈에 넘친 지사였다. 그는 항상 정의와 결백을 신조로 하며 불의와 사우는 과감한 의리의 사나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6.25동란에 즈음하여 독자적으로 화도특공대를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모종의 정보를 듣고 단신으로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강화읍에 잠입하여 적진 가까이 정세를 살펴보고 특공대로 하여금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퇴각시켰으며, 또한 강화특공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훈련을 쌓은 공산군과 대항할 수 없게 되자 작전상 전원 삼산면 석포리를 거쳐 석모리로 일시 후퇴하여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때 삼산 매음리 앞 들판 위엔 이미 남녀노소 40여명이 총살되어 잇는 참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특공대에 가담하였든 낙오군인이 지방 불온분자의 사주에 의하여 대량살상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이윽고 그는 삼산면 사무소 별실에 면민 50여명을 구금시키고 즉결시키려는 특공대의 비인도적 계획을 알게 되었다. 한편 그곳 면 특공대장은 위 무지한 면민을 구출하여 달라고 애원하는 말을 전하여 왔다. 그는 곧 강화특공대 책임자와 면담 1시간여의 논쟁을 벌인 끝에 별다른 사고를 내지 않고 석발시켜 생환시켰으니 그 순간 이분이 없었다면 큰 참극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뿐이랴 강화 서남단 고도 장봉도로 피난갔던 화도면민 300여명이 굶주림에 지쳐 아사상태에 느려져 있는 사실을 알고 면인님위원장과 단독 면담하고 박해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고 식량을 갖고 건너가 구출하였으며 득공대가 무단히 삼림을 남벌한 사건이 있어 길상면민 유지 몇사람과 충돌한 사실로 말미암아 주민 수명이 무수한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다. 이는 특공대 책임자와 면담 격론 끝에 석방시키도록 하여 사경에서 구출하였다. 생각하건대 법질서가 없는 혼란한 시기에 수다한 인명이 억울한 죽엄을 얻는 것은 비일비재일 것이다. 그러나 단독 용렬하게 싸워서 여러사람을 곤경에서 또는 죽엄의 순간에서 구출하였다는 것은 특히 찬양할 바 있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하여 화도면에는 면특공대와 소년단 150여명이 조직되어 있었다.
특공대장 윤성근은 청년방위군출신으로 특공대 조직과 관련하여 형 윤재근과 상의하였다. 화도면 소년단원이었던 한00의 진술에서 좌익성향의 김00이 9.28수복 후 개풍으로 피신하였다가 가족의 생사를 염려하여 1.4후퇴 시 화도로 왔었고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윤성근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돌아간 것 만은 확인하였다. 그런데 화도면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좌익성향의 김00과 우익성향의 윤성근면특공대장이 서로 사상은 달랐지만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듣고 존중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1951년 1월 3일경 저와 안상섭이 길상면 초지포구에 도착하자 미리 와서 기다린 듯한 10대 후반 소년 4명과 30대 후반 남자 1명에게 연행되었습니다. 우리는 길상면 우체국으로 이동하여 구금되었는데 그때가 오후였습니다. 같이 구금된 사람 가운데 화도면 사람들은 국회의원 윤재근이 빼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