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양민학살희생자추모제 고유문(09.10.17)

고유문
(*고유란 어떤사유가 생겼을 때 영령에게 그것을 고하는 것으로 09.3월 강화 교동도 양민학살에 대한 진실규명결정이 이루어지고 국방부와 경찰청의 공식사과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알리는 글)

영령들이시여
목매이게 불러도 대답 없는 영령들이시여.
피눈물 뿌리며 몸부림쳐도 끝내 대답 없는 영령들이시여.

얼마나 한이 깊으시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럽게 구천을 떠돌고 계시면,
또 얼마나 산사람들의 세상을 믿을 수가 없으셨으면,
미혹한 저희들을 훤히 내려다 보시면서도 답하지 않는 것이옵니까?

영령들이시여,
저희들을 항상 굽어보시는 영령들이시여,
소리 높여 답하지 않으셔도, 낮은 음성으로 다가와 희미한 숨결로 스치어가도 저희들을 지켜보는 당신들의 사랑을 압니다.

눈앞에서 당신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고서도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어 어리석고 답답한 가슴을 치며 눈보라 속을 눈감은 채 한걸음씩 더듬어 헤쳐 왔습니다.
한걸음을 내디딜 때 옆에 또 한사람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시 한걸음을 내딜 때 그 사람 곁에 또 한사람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무런 성과도, 아무런 대가도 바랄 수 없는 암흑과 절망에서도 미흡한 정성, 부족한 능력이나마 저희들은 쉬지 않고 그렇게 헤쳐 왔습니다.

긴 겨울 동토의 역사를 지나오는 사이 언 땅이 녹고 온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땅위에 우리가 흘린 눈물이 싹을 틔우고 있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참으로 다행히도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발족되면서, 2006년 강화민간인학살사건조사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조사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천 길을 달려가 증언을 채록하고 조사가 벽에 막히면 추리력을 동원하여서라도 길을 찾았습니다. 진리를 향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과학의 냉정으로 마침내 진실을 증명해주셨습니다. 유족들의 겪었던 사건이 조사관들에 의해 역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008년 국가는 강화민간인희생사건이 진실이었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2009년에는 교동민간인희생사건 역시 진실이었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우리에겐 눈에 집어넣을 만큼 생생했던 그 참혹한 순간들이, 한낱 무시해도 될 것처럼 무시당했던 사건들이, “화해가 중요하니 미래를 위해 이제 과거는 묻자”고 교묘히 협박당해야 했던 진실이 이제야 비로소 ‘사실’이 ‘사실’로 ‘진실’이 ‘진실’로 기억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실에 무게와 부피가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이 엄청난 진실의 규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점잖게 무시하고, 결정을 왜곡하고, 화해를 갈등으로 몰아가는 현실 앞에 우리의 진실은 참으로 왜소하고 초라하기만 합니다.

진실의 규명으로 기뻐서 춤을 출 줄 알았던 영령들이 여전히 침묵하고 우리의 간청에도 대답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러나 영령들이시여 아직 구천에서 동토의 칼바람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해도 마음풀고 빗장을 열어 저희와 함께 해 주십시오.
미흡한 정성 부족한 능력이지만 오늘 국가가 당신들께 국가에 의한 희생의 진실을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와 고유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의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 뿐아니라 구천을 떠도는 국민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고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천부인권이 전쟁범죄에 의해 털끝하나라도 침해될 수 없음을 확인한 제네바협약의 정신이 바로 당신들에 의해 확인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역사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화해로 나아갈 준비와 힘이 필요합니다. 갈등을 부추겨 진실마저 흔들려는 헛된 노력을 부질없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당당하게 화해의 손을 내밀어 끌어안아야겠습니다.

영령들이시여
정성 다해 제수를 마련하고 향을 피워 헌화공양하오니 모두 이리로 강림하시여 즐거이 흠향하시고 해원승천하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주고 가소서

강화도와 교동도 영령 제 신위께 옷깃을 여미고 간절한 마음으로 삼가 고유하나이다.

2009년 10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