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철조망 – 통일코리아 2022.가을호 기고


철조망

사진가 이시우

한국인에게 비무장지대철조망은 정전과 분단의 상징이다. 그러나 철조망은 정전협정준수의 상징은커녕 그 위반의 상징이다.
정전협정 13항 ㄱ목은 정전협정발효 3일 이내에 철거해야할 3개의 무기를 꼭 집어 특정했다. 철조망, 지뢰, 폭발물이 그것이다. 따라서 정전초기에 전장에 흩어져 있던 철조망은 제거되었다. 그럼 지금의 철조망은 누가, 언제 설치한 것일까? ‘누가’는 ‘유엔사령부’이고 ‘언제’는 1967년 12월 23일이다. 유엔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직하므로 곧 미군이며 그는 유엔이 아닌 미합참의 지휘를 받는다. 따라서 정전협정을 위반하여 철조망을 친 것은 미국이다.
그 시작은 1966년 하버드대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하버드 로스쿨의 피셔(Roger Fisher)교수는 라오스의 호치민루트와 베트남DMZ를 가로지르는 침투에 대해 고민하던 맥노튼(John McNaughton)국방차관보에게 제안서를 제출했다. 피셔의 제안은 “첨단기술장벽으로”이러한 통로를 차단하자는 것이었다. 무차별폭격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희생은 미국내 반전여론에 불을 붙였고 이런 분위기에서 장벽개념이 채택되었다.
맥나마라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침투로에 울타리나 철조망, 센서 등을 조합한 장벽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 맥나마라가 더 이상의 전쟁확대를 반대한 것이었다. 베트남의 미해병대사령부는 장벽개념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로 기동작전에 자산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대침투장벽에 대한 원래의 제안을 수정하는 선에서 수용해야했다. 해병대와 해군건설부대는 맥나마라가 장벽개념을 공개하기 전인 1967년 여름에 장벽건설을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의 완료는 1967년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단계의 완료예정은 1968년 7월이었다. 이 계획이 한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1967년 4월 27일, 존슨 대통령과 맥노튼이 함께한 회의에서 휠러장군은 현 시점에서 공세를 강화하지 않으면 남한과 베를린 등지에서 소련과 북한, 그리고 중국이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미국은 북한의 비무장지대 정전협정위반 시도를 한반도의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전 추가파병방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트남과 한국과 독일을 하나의 전선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에는 1964년까지도 뚜렷한 장애물이 없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목책이 처음 건설된 것은 1964년 한신이 지휘하는 6군단에서였다. 1967년 1월 13일 백악관은 새로운 철책건설에 대한 계획을 승인한 상태였다. 그리고 9월 7일 국방장관은 베트남비무장지대에 철조망이 건설되었음을 발표한다. 한국은 8월경부터 미군주둔지역인 파주비무장지대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1967년 12월 15일 박정희대통령도 훈령 제18호 「간첩봉쇄지침」을 하달했는데, 특히 비무장지대의 방벽구축, 경계시설강화, 감시초소, 관측초소의 방어력강화를 지시했다. 8일 뒤인 12월 23일 유엔사는 한국비무장지대에 설치한 새로운 철책선을 공개한다.
이 철조망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비무장지대 철조망의 표준형이다. 즉 Y자형 쇠기둥을 세우고 그 아랫부분에는 강력한 재질의 펜스를 대고 윗부분에는 원형 면도날철조망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비무장지대전역에 대한 철조망건설은 미국방부-미태평양사령부-‘유엔사’에 의해 추진되었다. 비무장지대출입승인권한과 작전통제권이 ‘유엔사령관’에게 있었고 물자보급도 주한미군이 책임졌으며 부족한 물자는 오끼나와 주일미군으로부터 충당했다.
당시 ‘유엔사령관’은 찰스 본스틸(C.H. Bonesteel)이었다. 그는 1945년 딘 러스크(Dean Rusk)와 함께 38선을 그은 인물이었다. 딘 러스크는 1961년부터 69년까지 미국무장관이었고 베트남과 한국비무장지대에 고엽제사용을 승인한 인물이었다. 러스크는 국무장관부임 직전까지 록펠러재단의 이사장이었고, 양대 고엽제제조회사 중 하나인 몬산토는 록펠러의 자회사였다. 미국철강(U.S. Steel)의 철조망사업체인 미국철강‧철사(American Steel & Wire)는 그가 국무장관재직기간 중이던 64년까지 클리블랜드 록펠러빌딩에 속해 있었다. 록펠러가 사회주의의 적색혁명에 맞서 실시한 녹색혁명의 농장들에는 미국철강이 만든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철조망은 군산복합체라 불리는 자본-권력융합체의 옷을 입게 되었고 미국패권의 수단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정리해보면 철책선 구축은 1967년 8월 미 제2사단 구역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철책공사는 1․21사태를 계기로 급진전되어 중부전선에서는 1968년 1월 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지세가 험한 동부전선은 6월에도 진행되고 있었다. 철조망 첫째줄 공사는 1970년에 완공되었다. 1970년부터는 김포 고촌면에서 한강하구를 거쳐 인천까지 54km에 설치되었다. 이중 고양·김포시의 강안구간은 23km이다. 강화군은 1974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78년 강화전역에 철책선 첫줄이 완공되었다. 교동은 1997년 해안가에 25.5km의 철책이 설치되었다. 서해5도는 1974년과 1975년 사이에 북한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해안선에 용치와 함께 설치되었다.
용치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진먼다오(金門島)를 시찰하고 와서 그대로 설치한 것이다. 용치(Dragon’s Tooth)는 1938년 독일제국군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접한 독일서부장벽, 일명 지그프리트선에서 처음 사용한 콘크리트 대전차 장애물에 붙인 이름이었다. 1954년부터 미군 고문의 제안으로 진먼다오에 변형된 용치가 설치되었다. 용치는 나찌의 유산인 것이다. 동해안에도 목책에 이어 철책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철조망공사는 군내부에서도 엄청난 저항에 직면해야했다. 철책건설에 반발하여 월북한 중위가 있었다.

‘당시 12사단에 근무하며 철책선 설치작업을 하던 모 육군 중위가 “누가 이러한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비무장지대(DMZ)로 나라가 분단된 것이 가슴 아픈 데 나는 양심상 여기에 철책을 치는 작업에 종사할 수 없어 떠나갑니다”라는 내용의 편지 1통을 써놓고 월북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재전구술, 김당정리, 「溫故知新(20)철책선설치 비화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