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성(高城) 유람기-고대언어학과89학번2006/03/24 767

지난주 화요일부터 사흘간 강원도 고성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내가 만들었던 『민통선 평화기행』에도 나온 곳이지. 출발하던 날 폭우가 쏟아져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만, 수요일부터는 날씨가 참 좋더라고. 계곡에도 물이 충만해 춤을 추는 게 여간이 아니었다. 함께 간 장모님 말마따나, 이 좋은 곳을 내가 왜 모르고 살았나 싶을 정도이더군. 얼마나 하늘이 청명하던지, 처한테 아무튼 점수 좀 땄다.
휴가계획 잡지 않았다면 한번 고려해봐. 죽여준다.

첫번째 날
출발. 양평-홍천-인제-진부령 코스. 진부령 고갯마루에 있는 음식점 ‘건봉산산채’에서 산채정식으로 늦은 점심 해결. ‘산채요리연구가의 집’이란 간판에 어울릴 정도로 맛이 좋다. 고춧가루를 전혀 쓰지 않은 채 참기름, 들기름, 소금과 간장으로만 맛을 낸 산나물은 생전 먹어보지 못한 별미이지. 특히 밥 먹기 전에 한잔 내놓는 솔잎주도 ‘콜’이다. 진부령 알프스스키장 바로 밑에 있는 펜션에 짐을 풀고 미시령 넘어 척산온천에 몸을 풍덩. 이건 장모님과 처를 위한 코스였지.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뚝딱.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숙소라 무척 깨끗했다. 해발 650미터에 위치했다나?

두번째 날
밥 먹기 전에 광산초등학교 흘리분교까지 산책. 펜션 주인장 말에 따르면, 선생 셋에 학생 열여섯이라는데, 학생 전원이 스키선수라나? 아침 먹고, 건봉사로 출발. 한창 재건공사중이라 좀 어수선했지만, 큰 절다운 면모는 여전하더군(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등이 모두 이 절의 말사였단다). 충청도 어디선가 온 불교학생회 일행을 따라 귀동냥을 해가며 돌아봤다. 그러나 그들도 모르는 게 있더라고. 나도 좀 아는 체를 했지. 뭐 불이문(不二門)의 현판을 김규진이란 자가 썼다는 것, 그자가 구한말 어전(御殿)의 사진사였다는 점, 그게 한국 최초의 사진술 도입이었다는 점, 그림도 잘 그린 사람이었다는 점 등부터 불이문 아래 새겨진 문양이 금강저(金剛杵)이고 그게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무기라는 점 따위 말이지. 물론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지.
화진포 행. 다행스럽게도 날이 개기 시작. 김일성, 이기붕, 이승만의 별장을 훑어봄. 다 고만고만했지만, 역시 이기붕의 별장이 제일 떨어졌다. 아무래도 권력순인가 싶어 혼자 히죽거렸다. 김일성의 별장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자그마한 바위산 속에 지어졌고, 이승만 별장은 화진포호를 바라볼 수 있게 언덕 위에 세워졌다. 묘한 대조! 아마도 남한의 담당자들이 이승만 부부를 그곳으로 모실 때 김일성을 의식해 그곳에 세웠겠지. 바로 곁에 있는 화진포해수욕장 행. 몇시간 신나게 해수욕. 그 덕에 살갗이 씨뻘겋게 익어버렸다. 지금까지 본 바닷빛과 하늘빛 중 최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런 광경을 또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 가끔 뉴스에서 비온 뒤, 63빌딩에서 서해가 보이니,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개성 송학산이 보이니 어쩌니 했던 말을 그대로 실감했다.
통일전망대에 갔다. 전망대 매점 주인 말대로 일년에 열흘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쾌청한 날이라 정말 손에 잡힐 것 같더군. 비무장지대(DMZ) 안으로 이미 현대건설의 중장비가 들어가 남과 북의 도로를 연결하는 공사를 ‘신나게’ 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미국이 전쟁 어쩌구 해도 그곳엘 다녀오면 금세 그 생각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화진포보다 좀더 쾌청한 날씨. 저 멀리 공해에는 하얀색 여객선이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금강산기행을 마친 여행객을 태운 설봉호이겠지? 그러나 여기서도 느낀 바이지만, 남과 북을 가르는 뚜렷한 한 징표는 산의 색이었다. 북의 산은 어떻게 하나같이 누런 색깔인지 참.
돌아오는 길에 거진항에 들러 회 한 접시를 떴다. 숙소의 주인이 권한 대로 주변 밭에서 상추랑 열무를 잔뜩 뜯어와 만나게 쏘주와 회를 먹었다. 사람 수가 좀 되면, 숙소 바로 곁에서 돼지고기에 쏘주를 찌끌어도 괜찮을 성싶었다. 혼자 두 병 반인가를 먹고 잠자리로 쏙~

세번째 날
오늘은 흘리분교 반대편에 있는 알프스리조트 입구까지 산책. 돌아오는 길에 펜션 텃밭에서 상추하고 열무를 또 뜯었다. 식은 밥에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백담사로 떠났지. 날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목요일이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꽤 많더군. 입장료에 버스값까지 이것저것 내는 게 많아 다들 짜증을 좀 부렸지만, 백담사로 향하는 계곡을 보고는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좋긴 정말 좋더군. 아내는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하고 열을 냈지만, ‘이런 곳’이라기보다는 ‘이런 날씨’라고 해야 옳을 듯. 그 날씨와 장소의 조합이 참으로 절묘했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을 듯. 그러니 권한다 하더라도 그런 광경을 또 볼 수는 없을 거라고 현지인들이 입을 모은다. 버스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사람들 말로는 한 삼십분이라고 했지만, 네살박이 김휘(내 아들)를 대동한 처지라 그놈을 걸리고 업고 하느라 그 시간에 도착한 것도 감지덕지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간 데 없고 만해(萬海) 한용운과 일해(一海)전두환의 자취가 덕지덕지 붙어버린 데에 상해버린 마음은 언젠가 출판계 친구들과 동행한 수경스님의 실상사(實相寺)처럼 너른 가람의 배치와 주변을 호위하듯 서 있는 설악의 준봉들, 그리고 마치 동네 어귀의 시냇가처럼 가깝고도 깊은 산의 계곡처럼 장쾌한 백담계곡을 보느라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그러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다시한번 발동하는 순간을 보았다. 경상도 말씨를 쓰는 일군의 관광객들과 전라도 사투리를 입에 달고 있는 또다른 일군의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백담사에는 전두환이 기거했다는 조그마한 방이 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지. 그자가 정말 그곳에 기거했다고 생각하는 짓이야말로 그자가 광주의 학살을 진정 반성했다고 믿는 것보다도 훨씬 바보같은 짓이지. 그런데 흥미롭고도 슬픈 사실은 전라도와 경삼도의 상반된 반응이었다. 전라도 사투리들은 하나같이 둘러보곤 손가락질이었는데 반해, 경상도 사투리들은 또 하나같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것이었다. 아, 이 즐거워야 할 여행길에서 발견해버린 지역감정. 너무도 뿌리 깊은 그 감정. 그곳에 앉아 그 노릇을 보고 있자니, 새삼 오기가 솟았다. 불당 앞에서 그 무슨 불경스런 노릇이겠냐마는.
계곡을 내려와 황태구이로 배 불리 점심을 먹고 홍천 쪽으로 향했다. 양구읍을 가로지나 이십분 정도를 달리면 산남휴게소(?)가 나온다. 그 바로 앞에 선착장이 있지. 내륙에 무슨 선착장이냐고? 내 고향 춘천에서 양구까지 육로로는 세 시간 이상이 걸리는데,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면 한 시간이면 양구까지 올 수 있다. 그 배가 닫는 선착장이지.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양구에서 대처(?), 춘천까지 유학온 친구들 얼굴이 신기하게도 떠오랐다. 이름도 또렷하게 생각나더군. 이 비상한 기억력 운운하며 농을 걸자, 아내는 정말 그렇다고 나를 추어올리더군, 으 쪽팔려~

김휘군이 갑자기 떼를 썼다. 그자를 달래는 데는 내가 선수이지. 나라기보다는 내 주머니가 선수이지. 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38휴게소에 또 차를 세웠다. 말 그대로 38선 위에 있다는 휴게소이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전쟁 전까지 ‘적군의 땅’을 유람하고 온 셈이다. 좋은 세상이라고 말해야 할까? 불량식품 몇봉지와 별사탕이 담긴 팔랑개비 하나를 녀석에게 안겨줬다. 그 덕에 돌아오는 내내, 녀석은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팔랑개비를 날리느라 연실 ‘와, 이것 봐 이것 봐’만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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