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통일뉴스와 함께 설정한 의제들 2026.1.3
통일뉴스와 함께 설정한 의제들
[통일뉴스 백서(2000-2025)] 돋보기④ – 이시우
기자명 이시우 입력 2026.01.03 23:02 댓글 1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5481
이시우 통일뉴스 전문기자 / 사진가
통일뉴스는 창간 25주년을 기념해 『통일뉴스 백서(2000-2025) – 민족통일 정론의 한길 25년』을 발간했다. 백서 내용 중에서 주요사안을 집중 조명한 [돋보기(1~7)]를 순서대로 싣는다. /편집자 주
조직운동을 했던 나는 의제설정을 주도하여 정부를 견인하는 적극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의제설정을 위한 기초연구작업이 가장 취약해 보였기에 나는 이 일을 하기로 자임했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를 발표할 곳으로 통일뉴스를 선택했다.
◎ 첫 번째 의제는 주한미군 핵이었다
2001년 9.11사건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이 사건으로 2003년경 한반도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맑스 『자본론』을 주제로 한 사진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강화도로 내려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나는 작업주제를 미군으로 바꾸었다. 북핵문제가 대두될 것이고 이에 대비하여 주한미군 핵을 찾아내야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그 뒤 한국, 일본, 독일의 미군기지의 거의 전부를 찾아다녔다. 엄청난 비용과 시간과 공부가 투여되었다.
그 맥락에서 작성된 기고글이 「주한미군의 핵에 대한 보고서」(2003.2.26.)였다. 이 기사는 통일뉴스 말고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이 기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스페인대사관을 통해 찾아온 바로셀로나 La Vanguardia의 기자였다. 주한미군 핵 의제는 스페인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남미국가들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 기사가 인상 깊었던 것은 댓글 때문이었다. 익명의 군사전문가가 날카롭게, 그러나 모욕적으로 기사내용을 공격해 온 것이다. 처음 당해보는 모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반박댓글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답변을 위해 더 깊게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보다 더 긴 답변이 작성되었다. 이 답변을 통해 자료와 논리는 더욱 정교해졌다. 결국 2005년 나는 진해기지에 기항하는 미 핵잠수함이 1996년 휴대용 핵미사일발사장치를 설치했고, 나아가 4척 중 1척 비율로 핵토마호크미사일이 탑재될 가능성을 계산해 냈다. 통일뉴스의 댓글 창을 통해 나의 성찰과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인한 기사였다.
◎ 두 번째 의제는 평화감시운동이었다
핵 연구로 쌓인 토대지식은 화학무기, 열화우라늄탄, 대인지뢰 등으로 확장되었다. 이는 ‘유엔사경비대 캠프 보니파스 탄약고에 화학무기보관 표식 발견’(2004.4.24.)기사로 이어졌다. 이 기사로 인해 주한미군사령부에 통일뉴스 출입기자로 등록되었던 나는 ‘바이올렛 시크릿’이라는 취재불허등급으로 낙인되었다. 역설적으로 주한미군당국은 통일뉴스를 비롯한 인터넷매체를 가볍게 보지 않기 시작했다.

이시우 작, “고려산 _ 미군도청시설이 노을에 홀린 듯 서 있었습니다. 전파의 기교도 빛의 장엄을 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미군 당국이 해명 자체를 포기한 특종기사는 ‘오산·수원·청주 미군기지에 열화우라늄탄 3백만발 있다’(2005.12.19.)였다. 미태평양사령부의 기밀해제문서를 기반으로 한 이 기사는 큰 반향이 있었다. 증거의 힘을 깨달았다. 반핵운동의 주제가 열화우라늄탄으로 집중되어있던 일본에서의 반향은 훨씬 컸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히로시마원수폭반대 대회 전날(2006.8.7.) 마이니치신문은 1면 전체를 할애하여 이 기사를 다루었다. 사민당대표 후쿠시마 미즈호는 대회연설 후 당원들을 대동하고 내 자리까지 찾아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여 정책을 만들겠다며 정중히 자료원본을 요청했고 나는 흔쾌히 모든 자료를 그녀에게 넘겼다. 일본의 사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과 열화우라늄탄 반대운동단체들의 운동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결국 유엔총회에서 열화우라늄탄 금지를 위한 단계별 결의안을 속속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 세 번째 의제는 ‘유엔사’였다
나는 비무장지대, 민통선, 전작권 환수, 미군기지 평화감시활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균열이 ‘유엔사’라고 결론 내렸다. ‘유엔사’ 관련 모든 주제를 알리기 위해 2004년 6월 19일부터 두 달 정도가 소요된 ‘유엔사 해체 걷기명상’을 시작했다. 여기서 핵심은 걷기와 쓰기였다.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 통일뉴스 전문기자(맨 왼쪽)는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소속으로 2004년 4월 21일 판문점을 방문, 캠프 보니파스 탄약고에 부착된 화학무기 보관 표식을 발견해 특종 보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하루 종일 걸으면서 사색하고 밤이 되면 PC방을 찾아 졸린 눈을 비비며 글을 써서 통일뉴스에 송고하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초인적인 글쓰기였다. 또한 ‘유엔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소진하는 글쓰기였다. 소진이 이루어지고 나자 주장이 아닌 증명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유엔군사령부』(들녘 2013)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유엔사’ 문제는 전작권 환수와 결부되며 피할 수 없는 의제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작권 환수 선언이 있고 나서 2006년은 전작권 정국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응하는 척 하면서 꼼수로 전작권을 ‘유엔사’로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벨 사령관의 ‘유엔사’ 강화론은 연합사 작통권 대신 유엔사로 지휘하겠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작권 관련 글을 통일뉴스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자 3일 뒤인 2007년 1월 24일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내사 중이라는 신문보도가 나왔다. 이때 나는 당당하게 조사에 응하는 대신, ‘유엔사’의 의도가 드러날 때까지 글쓰기를 계속하기 위해 도피생활을 택했다. 통일뉴스 이계환 대표님은 나의 결정에 묵묵히 호응해주셨다. 힘겨운 수배생활을 버티게 했던 것은 오직 하나, 통일뉴스에 송고할 글쓰기였다.
수배기간 동안 전작권과 관련하여 가장 집중한 것은 ‘유엔사’와 깊은 연관을 가진 위기관리권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위기조치 절차를 분석하기 위해 푸에블로호 사건과 캄보디아 마야구에즈호 사건시의 위기절차를 상세히 분석했다. 그리고 검거 2일 전에 쓴 글이 「미국에게 작통권보다 중요한 것은 위기관리권」이었다. 전작권 논의과정에서 연합위기관리계획은 마지막까지 밀당이 이루어지고 있는 의제이다. 위기관리는 ‘유엔사’의 정전협정관리와 연관이 있다. 2018년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한미연합연습을 파탄 내면서까지 강경했던 것은 ‘유엔사령관’의 정전관리권 고수 문제였다. ‘유엔사’ 재활성화도 결국 실현되었다. 2004년경만 해도 낯설고 설명하기 힘들었던 ‘유엔사’는 결국 현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그 문제점에 대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이는 전 세계에서 ‘유엔사’ 의제를 가장 심도 있게 다룬 통일뉴스의 기여이다.
2007년 4월 19일 나는 통일뉴스에 글을 송고하러 가던 길 위에서 체포되었다. 50여일의 구치소 내 단식투쟁동안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통일뉴스에 써 보내는 옥중기고 때문이었다. 매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나는 『한강하구』 옥중원고를 안고 출소할 수 있었고 통일뉴스는 『한강하구』책을 출판해 주셨다. 나의 통일뉴스 기고는 글쓰기의 긴장을 강제했고 대중을 설득할 글쓰기의 방법이 무엇인지 학습하는 장이 되었다. 통일뉴스는 나의 재판 전 과정을 상세히 보도해 주었다. 일개 필진에 불과한 나를 헌신적으로 조력해준 통일뉴스의 수고에 감사를 전한다.
통일뉴스가 시작할 때 인터넷매체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매체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기사이다. 확고한 정보와 증거에 기초한 의제는 곧 시대정신의 실현이다. 통일뉴스 25년의 역사는 메신저 못지않게 메시지가 더 중요함을 증명한 역사였다. 그 기간이 벌써 4반세기라니 새삼 놀랍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이계환 대표님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가진 김치관 국장을 비롯, 이광길, 이승현 기자들은 외교통일분야의 최고전문가들이다. 이분들이 현장에서 계속 기사를 쓰고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겐 축복이다. 독자들이 통일뉴스가 주는 축복을 더 오래 누릴 수 있도록 번창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