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전략의 약한고리(184매)2004/07/17 1353

아직은 미완의 원고이지만 2004년 2월27일 통일뉴스 월례모임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미군 전략의 약한고리

사진가 이시우

군사전략의 근본적인 문제는 적군은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적은 상대방이 약한 곳을 공격하거나 상대방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종류의 전쟁을 하려 할 것이다.(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나?Making Strategy.p109데니스드류,도널드스노우.연경문화사)

1. 민군관계의 갈등
미군의 전략을 통찰하는데 있어 중심고리는 민군관계의 권력갈등문제이다. 가깝게는 이라크전도 민군권력갈등의 산물이다. 이라크전의 원인을 석유나 미국의 세계패권 음모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이미 이라크의 석유산업은 미국에 의해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미국이 이라크 때문에 냉전이후 유지 되어온 세계패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원인은 질문의 반론에 대한 답변에 속수무책이다. 오히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민군관계의 갈등 즉 백악관을 중심으로 하는 문민통제집단과 전쟁수행에 정치인의 개입을 금기시 하는 군부간의 갈등이다. 이라크전은 맥아더로부터 와인버거, 파월에 이르는 군부세력과 트루먼, 덜레스로부터 럼스펠트에 이르는 민간 정치인 집단간의 권력투쟁에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다.

한국전에 대한 대 논쟁시 상원청문회에서 조지마샬 국방장관은 말하였다.맥아더 장군은 미국이 설정한 정책과 달리 행동해왔음이 분명하다. 즉 일반적으로 전역 사령관에게 부여된 지휘기능이 최고위 의사결정권한 이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크게 제기되었다.
30년 후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였던 리지웨이 장군은 바로 그러한 말을 상기시키면서 회고하였다.그 이후 어떠한 전역사령관도 최고 의사결정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베트남전쟁시 미국과 그 적인 북베트남 지휘관에 비해서도 분명히 비대칭적 사실로 나타났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그의 대등한 위치의 북베트남 사령관인 지압장군을 자주 보았다. 그러나 사실 미국의 지휘체계상에서 볼 때 지압은 최소 5명에 상당하는 인물이었으며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그중 한사람의 역할도 수행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베트남의 야전지휘관일 뿐이었다. 그는 호치민 철도의 공중공격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으며 베트남의 영해밖에서 수행되는 해군작전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다.
(미국의 걸프전 전략 On Stratege 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276~277 해리섬머스 자작아카데미)

문제는 이러한 군부 특히 육군의 판단이 미국의 문민통제원칙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듯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브람스장군의 후임 육군참모총창 웨이언드장군은 설명했다. 베트남전은 미군과 국민 사이의 특이한 관계의 재확인이었다. 미국민이 그들의 개입에 위험부담을 안고 또한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한다는 점으로 볼 때 미군은 진정 국민의 군대였다. 군이 관계하는 것에는 미국민도 관계했고 미국민이 그들과의 관계를 잃었을 때 계속 군을 관계시키려 애쓰는 것은 허사였다. 최종적으로 보아 미군은 미행정부의 군이라기 보다는 국민의 군대다. 그러므로 군은 가볍게 행동할 수가 없다. 군의 행동이 필요한 만큼 중대한 이해가 달려 있는 것이라고 국민적 합의가 있을 때에만 행동할 수 있다. (위의 책 p91)

1984년 11월 태평양에서 맥아더 장군의 수하에 있었고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던 캐스퍼와인버거(Caspar Weinberger)국방장관은 미군의 무력사용에 대한 6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원칙은 국방부의 기성세력 내부에서는 거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 6가지 원칙들은 기본적으로 민간통제보다 민과 군의 엄격한 구분을 중시하는 민군 정상이론을 구현하고 있다.
1. 미국은 국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해외에 병력을 파견해서는 안된다.
2. 일단 우리가 전투병력을 주어진 상황에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을 내리면,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의지가 없다면, 애초부터 어떠한 병력이나 물자도 투입해서는 안된다.
3. 해외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을 내리며, 분명하게 정의된 정치적, 군사적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군대가 분명하게 정의된 목표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임무수행에 꼭 필요한 병력을 확보해서 파견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치가 밝혔듯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리고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 없이는 아무도, 적어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4. 우리의 목표와 투입된 병력의 규모, 구성 및 배치 간에 존재하는 관계는 지속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조정되어야 한다. 전쟁 동안 여러 가지 조건과 목표는 예외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조건과 목표가 바뀌면, 그에 따른 우리의 전투 요구조건도 바뀌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반복적으로 답함으로써 항상 우리의 위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 전쟁은 국익에 부합하는가? 국익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 하고 무력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 대답이 예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한다. 만약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5. 미국이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기 전에 미국 국민들과 의회 의원들도 지지할 것이라는 이성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6. 미군을 전투에 파병하는 일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와인버거 원칙은 거의 지키기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무력사용에 대한 지침으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의 이상적인 원칙으로 이후의 많은 정치지도자들과 군 지휘관들이 와인버거 원칙을 신봉했다. 1990년대에 은퇴한 4성장군인 호웰 에스테스(Howell Estes)장군은 한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장교시절 나는 그 복사본을 구해다가 10년 동안이나 내 서류가방에 문자 그대로 달고 다녔다. 당시에는 그게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맨 처음 그것을 읽었을 때는 이런, 이렇게 단순한 것을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로 극적인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마침내 깨달았다….민주주의를 위해 군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military/etc/script.html)

현재의 민군갈등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키는 요소는 86년 의회에서 통과된 골드워터 니콜스 국방부재조직 법안이며, 이 법안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획득하게 된 걸프전 당시 합참의장인 파월이다. 걸프전을 통해 명성을 획득한 소위 파월 독트린은 실질적으로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거부로 나타났다.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합참의장이었던 콜린파월은 압도적 무력 overwhelming force’을 골자로 하는 자신의 지론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당한 무력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6년 의회는 합참과 합참의장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이러한 원칙들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때 이후로 미국의 민간인 지도부는 한명의 주요 군사보좌관인 합참의장이 나머지 모두를 압도하는 상황이 도래하고, 그의 뒤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합참이 포진하게 된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군사문제에 관한 전문적인 자문을 구할 곳이 한 곳 밖에 없게 되고, 합참의장은 공식적으로 군 명령계통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에 대한 군사적 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명령을 다시 군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침내 정상이론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 p309엘리엇코언.가산출판사)

민간과 군부의사이의 주요쟁점들, 즉 전쟁을 해야하는지, 어떤 계획을 채택해야하는지, 스커드미사일을 제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등은 파월이 중간에서 모두 처리해 버렸다. 민간인 통제의 불확실성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가서야 분명해졌다. 당시에는 두가지 중요한 결정, 즉 전쟁을 언제 그만둘지와 정전협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내려져야 했다. 하지만 두가지 경우 모두 군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월은 대통령이 제시한 승리의 조건이 완전히 충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정전 권고안을 냈다. 그리고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했다. 그러나 민간인통제론자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대통령이 전쟁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 해석은 소극적이고 편협했다. 대통령의 전쟁 목표를 담은 공식적인 성명서에도 종전의 이유로서 쿠웨이트의 원상복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내용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분명히 언급한 목표이외에도 다른 불분명하고 명시되지 않은 목표가 있었다. 우선 이라크가 보유중인 대량살상 무기의 파괴와 정권 교체였다….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목표는 분명히 사담 후세인의 축출을 의미했다.
(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 p320엘리엇코언.가산출판사)
현 부시정부에서 파월은 가장 두드러진 군부인물이면서도 제대후 10년 이내엔 국방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한 문민통제 원칙에 따라 국무부 장관이 되었고, 전투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군사혁신을 강조하는 럼스펠트가 두 번째로 국방장관직에 취임했다. 86년 골드워터니콜스법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전쟁을 주도한 럼스펠트는 파월과 계속 충돌했다. 아프간전쟁에서 전쟁목표로 탈레반정권의 전복을 포함시키는 문제에서 갈등했고, 이라크전쟁에서도 파월은 전쟁목표를 대량살상무기에 초점을 맞췄고, 럼스펠트는 후세인정권 전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음을 시인한 것은 파월의 기준으로 볼 때 일관성을 가진 행동이지만 부시정부의 전쟁목표 자체를 부정한 행동으로 심각한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국방비를 지출하는 군사대국 미국에게 있어서 군부는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다. 군이 전쟁에서 정치인의 개입을 반대하는 민군정상이론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군부의 정치화를 가져오고 있다. 대통령후보가 선거에서 군부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통과의례가 되었다.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쟁을 겪으면서 민군정상이론은 더욱 강화되었고 미국에서 군에 대한 민간의 통제력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고위 장성과 정치인간의 불신은 더욱 깊어져 가고 있다. 더욱 나쁜 현상은 군부가 정치화되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999년 트라이앵글안보연구소(Triangle Institute for Security Studies)소속의 사회과학자들은 수많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정치지도자들에게 자문을 제공하고 지지를 해야되는지 아니면 무력사용의 핵심요소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해야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에 따르면 군인들은 군사작전상의 일부요소에 대해서는 자문이나 지지보다는 통제권을 요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고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그들중 50%는 군이 교전수칙을 정해야 하고, 52%는 출구전략을 수립해야 하며, 63%는 모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군부대가 투입되어야 할지 결정해야한다고 말했다.
군의 장교들이 무력사용을 포함한 정부의 여러 정책에 대해서 불만사항을 언론에 흘러 보내는 일은 이제 관행화 되었다. 1999년 유고전에 대한 군부의 노골적인 반발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미국의 민군관계 갈등은 미군전략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동맹군체제 기피현상이다.
1995년 발칸 반도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측의 수석 협상가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은 미군사령관인 레이턴 스미스Leighton Smith가 자신의 사령부를 미국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적 군대로 여겼다는 바를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내게 자신만이 부대의 안전과 복지에 책임이 있으며, 나토위원회가 자신에게 위임한 권한하에서 군사행동의 재량권을 가진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자기나름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나토군의 사령관으로서 브뤼셀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미국을 대표하여 정책을 집행하러 파견된 홀브룩에 집요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는…현재 평화유지와 제한된 형태의 군사개입정책에서 주로 이용되는 동맹군체제는 그 자체적으로 민군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상황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레이턴 스미스의 말은 한국전쟁시기 유엔군사령관이면서도 유엔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음을 토로한 맥아더의 불만을 연상시킨다.
“…나와 유엔과의 관계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나의 사령부와 내가 수행한 모든 것에 관한 전적인 통제는 나의 육군참모총장과 그 참모총장이 통제하는 나의 통신계통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유엔에 보내기 위해 정상적으로 작성한 보고서까지도 국무성, 국방성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유엔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미합참본부사 한국전쟁-상- p115, 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
또한 걸프전의 법적성격을 둘러싸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한국전 당시 유엔사와 같은 유엔차원의 군사적강제조치라는 견해에 대해 미국은 독자적인 자위권행사일 뿐이라는 견해와도 연관된다. 한국전쟁에선 자신들이 미군이 아닌 유엔군임을 강조하던 미국이 이라크전쟁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은 유엔군이 아닌 미군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또한 동맹군체계를 지속하기 어려워지는 민군갈등의 수렁에 빠진 미군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주1)
이는 장기적으로 유엔사와 한미연합사와 같은 한미동맹체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특히
77년 카터의 주한미군철수 정책에 항명했다가 해임된 싱글러브주한미군사령관이나, 99년 클린턴의 코소보전쟁을 반대하는 군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존 틸럴리주한미군사령관이나, 미군개혁의 가장 보수적인 장애물로 평가되고 있는 미 2사단의 존재등은 민군갈등의 오래된 진원지 중의 하나가 주한미군이란 사실을 확인케 한다. 역설적인 것은 용산미군기지 철수와 미군재배치를 반대하는 보수세력과 국회의원들이 미국의 민군갈등을 더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략적 우위는 선공이다. 달리 말하면 의제설정권을 누가 갖는가이다. 전략적 우위를 선점하지 못했을 때, 상대에 대한 공격이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우위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약점을 선공함으로써 나의 우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재 국면에서 민군갈등을 증폭시키고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의제 중의 하나가 유엔사문제이다.
21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체제가 전반적 위기로 돌진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세계패권을 유지하는 중심축은 급속하게 군사체계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이 군국주의화 될 수록 이를 둘러싼 민군갈등은 더욱 격렬해질 수 밖에 없다.

2. 군종간 갈등과 합동성 강화
이라크 전쟁 기간중의 다음 기사는 민군간의 갈등을 여러 측면에서 노출시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럼즈펠드 사무실의 민간인들은 야전사령관들이 요청한 연합군 병력의 우선사항과 배치 순서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생각한 우선순위를 위해 우선사항과 배치순서를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그는이에 따라 병력과 고유 장비의 도착이 일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투와 전투지원, 전투지원 부대의 적절한 혼합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1991년 제1차 걸프전때 제24보병사단을 지휘한 배리 맥카프리 퇴역장군은 자신이 전쟁 직전에 럼즈펠드의 고위 보좌관들에게 장관실이 배치 과정에 간섭하는 것을 중단하고 군사령관들에게 전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부대를 갖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같은 비난에 대해 국방부의 럼즈펠드 장관 보좌관들은 당초의 전쟁계획은 정말 형편없었다면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냉전(cold war) 계획이었는데 우리는 더이상 냉전상태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워싱턴=연합뉴스 김대영 특파원) 2003.03.31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것으로 자체평가하고 있는 미 육군의 작전술인 공지전에 대해 럼스펠트 사무실의 민간인들은 냉전시대의 작전계획으로 일축했다. 파월과 럼스펠트 모두 공감하고 있는 군사혁신의 주제는 미군의 합동성의 강화이다. 이는 미군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였던 자군 이기주의에 대한 치유책으로서 제기된다. 우선 86년 골드워터콜린스국방부재조직법 이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86년 당시 합참아래 여섯 개의 통합지휘사령부가 여전히 모든 군종을 통제하고 있었다. 또 별도로 유럽, 태평양, 대서양 및 중미 통합사령부등 각 통합 사령부안에서는 사이공 사령부가 갖고있던 모든 결함들이 하나도 개선되지 않은 채 당시까지도 그대로 도사리고 있었다.주2) 각급 통합사령부에 파견된 장교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소속된 군종의 이익, 보직의 결정이나 역할분담을 대변하게 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일은 86년 이전까지의 미국군사체제에는 합동참모제도를 정식으로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합참이나 각급 통합사령부에 파견, 근무중인 장교들은 이들 사령부로부터 직접 진급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의 진급 및 신상필벌권은 소속 군종만이 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군종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해이해 보이거나하면 파견 된 동료장교들에 의해 즉각 소속 군종에 보고되어, 진급에서 누락되는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 새로 설치할 통합 사령부의 조직이나 그내용 그리고 크고 작은 작전의 기획등이 철저히 비전략적인 절차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1979년 합참이 페르시아만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은 신속배치군(RDF)의 창설 지시를 받았을때의 일이다.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통합형태가 당시 거론되었다. 새로운 부대는 해외 상주 주둔군이 아니면서도 위기 지역에 신속히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명백히 원정적이어야만 했다. 한편 해병대는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고 그런 장비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원정군이 아니던가. 이 신속 배치군은 또 중장비의 공수가 페르시아만 같은 먼 지역에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하니 해병대야말로 해상수송에 맞아떨어지는 군종이다. 끝으로 신속군은 또 성격상 상륙전을 주로 감행할 것이기 때문에 상륙전이야말로 해병대의 주특기 아닌가. 따라서 신속배치군은 육군 및 공군의 필수요원 몇 명 정도만 거느리는 하나의 통합해병대 사령부의 모델이 당시로서는 결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합참은 당시 이 모델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합참이 이 모델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해병대가 그 임무를 몽땅 떠맡아 새로운 예산과 새로 생길 고위 보직들을 독차지해 버리게 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이공 사령부와 같은 하나의 통합구조안이 각 군종의 타협을 거쳐서 채택되고 말았다. 또 이 사령부의 골격을 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브라운 국방장관이 편성지시를 내린 지 거의 6년만인 1983년 1월에 와서야 한 육군 장성의 지휘아래, 기타 보직들은 각 군종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고루 나누어진 채 드디어 골격이 드러났다. 그 결과 균등배분의 원칙에 대한 보상으로서 문자그대로와는 달리 신속하고도 명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참모들만 우글거리는 또 하나의 사령부인 신속배치군이 탄생했다. 한편 통합사령부 체제에 대한 논란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데 작다면 작은 통합체제에서 그 진가를 입증할 기회가 또 한차례 왔다. 이란 인질 구출 작전이다.
이 계획은 1980년 4월25일 사막1착륙지의 모래바닥에서 불타는 것으로 그 종막을 내렸는데, 그 편성자체가 사이공 사령부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능까지도 어쩌면 그렇게도 충실하게 뒤따랐을까. 해안경비대를 빼고는 이 구출 작전에 모든 군종이 가담했다. 프랑스, 영국 및 이스라엘 특공대 전문가들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 대경실색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들은 20년 동안 크고 작은 특공대작전을 지휘해온 전문가들인지라 이미 오래전에 특공대원만은 성격이 다른 사람으로 구성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작전에 필요한 특수요원들이야 그때그때 가담시킬 수도 있다. 다른 군종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군종의 부대원일지라도 오랜 기간 함께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을 작전에 가담시켜서는 안된다….특공대 작전은 빠른 속도와 숨가쁜 긴장 아래서 진행되기가 허다하므로 방언이나 절차에서 보이는 조그마한 차이 및 하자나 오랜 친숙으로부터 오는 상호 신뢰감이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 같은 일은, 공군 급유기들로부터 재급유가 필요한 해병대 조종사들이 급유기가 너무 빨리 떠나지나 않을까 조바심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을 때인 사막1지점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작전진행 가운데, 서로간의 인식 부족이 8명의 생명을 앗아간 충돌 사건을 빚고 말았다.
다음통합형태 아래서는 그 규모가 아무리 작더라도 책임자가 딱 한사람 있을 수가 없게 되어있다. 그것은 체제가 갖는 당초의 전체 의의를 흩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란 인질 구출팀은 지상공격군을 거느린 육군책임자 1명, 헬기를 갖고 있는 해군책임자 1명, 사막1지역을 실제로 책임진 착륙지 책임자1명, 그리고 공군 책임자 1명등 소규모작전에 각자 독립된 책임자만 벌써 4명이나 되었다. 이같은 조정이 모둔 전투에도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특히 특공대 작전의 수행에 있어서 절대절명인 지휘통일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있다. 이 인질 구출 작전은 이 밖에도 층층겹겹의 상급 사령부들로부터의 통제를 받아야했다. 존스합참의장은 당시 별로 지휘할 일도 없는 것 같았는데도 국방성내의 국가군사지휘센타를 통제했으며 여기서부터 층층이 내려가 이 작전을 직접 지휘한 중간 지휘층은 공군부관 1명을 거느린 육군소장의 지휘아래 있던 이집트 소재 특별 통합기동타격대 사령부였다. 제임즈 보트 소장은 구출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 곧 중장으로 진급, 한국주둔 미군 군담직에 임명되었다. 사막1지역에 도착했던 특공대원 모두가 훈장을 받았다.
(국방성과 전쟁술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1986년.42~43쪽.루트웤.명지출판사)
미군의 합동성 강화문제는 군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이 명확해 질 즈음인86년 의회의 민간정치인들이 개입함으로써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골드워터-니콜스 법안은 합참의장을 대통령과 야전사령관간의 군사지휘체계상에 위치시켜 합참의장을 통하여 명령을 전달하도록 하였고 국방장관은 야전사령부의 활동을 감독하는 책임을 합참의장에게 부여하였다. 걸프전이 군종 이기주의를 넘어 최초의 합동개념에 기초한 지휘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평가하는 군부의, 특히 육군의 인식은 다음과 같다.
파월 합참의장은 제 2차대전시 마살장군과 킹제독의 역할을 재현하여 그의 민간인 상관과 밀접하게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야전의 사소한 문제에 개입없이 야전지휘관에게 전략지시를 하였다. 그 결과 슈와츠코프는 걸푸전 후에 언급하였다.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 작전은 확실하게 전통적인 합동작전이었으며 진정한 통합작전의 예를 보여주었다.(미국의 걸프전전략On Stratege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279 해리섬머스.자작아카데미)
그러나 미 공군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걸프전에서 공중작전계획은 공군참모부에서 나왔다. 공군참모부는 당시 총사령관인 노먼 슈와츠코프에게 보고를 하는 군사조직이 아니라, 공군참모총장과 작전담당비서에게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공군참모부에서 작전계획을 주도한 인물은 워든(John Warden)대령이었다. 그의 주도하에 공군참모부는 인스턴트 선더 Instant Thunder’작전을 수립했다.주3) 작전명으로 인스턴트 선더를 고른 이유는 베트남전쟁 당시 작전명인 롤링선더 Rolling Thunder’가 목표로 했던 단계적인 공격방식을 단호히 배격하겠다는 차원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육군의 공지전교리와 맞지 않았고 클라우제비츠식도 아니었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의 달성이어야하며 이에 모든 계획과 작전도 이러한 궁극적인 목적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견해를 정계, 학계, 군사계에 대하여 말로는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클라우제비츠세계에 쉽게 빠져버려 적 군사력의 섬멸을 좀더 높은 목표 달성을 위한 하나의 가능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목표로 생각한다….슈와츠코프장군과의 1차회의에서 우리는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육군을 공격하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다음날 합참의장 콜린파월장군이 우리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사담후세인과 그 추종자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도 이라크 육군에 대한 공격을 했으면 한다고 하였다. 1990년 8월에(그리고 심지어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이익 때문에 쿠웨이트주둔 이라크 육군을 공격하기를 원하였다. 결국 문제는 그 문제 발생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직접적인 해결방안으로는 육군의 공지전투기준교리에 따랐는데, 이 교리는 항공 및 포병공격으로 쿠웨이트 주둔 이라크군을 약화시킨 후에 미군과 연합군 지상군 공격으로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자면 1년여의 기간동안에 군지휘관들이 요구하는 방어자에 대한 공격자비율을 건설해야 하는데, 이는 연합군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군사적 능력(military capability)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 대통령이 매우 큰 인명의 손실을 초래하게 될 이런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합참후원 하에 1990년 늦은 여름에 실시된 인명 손실률 추정은 미국인 20.000명이었다…..실전 상황에서 사담의 실제 중심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은 바로 그의 전략적 기지였는데 이는 그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부당한 평화조건들을 받아들이게 강요하였고 또한 소수의 미국 항공인들이 미국이 설정한(우리가 요구한 것보다 훨씬 작은 것일 수도 있는) 범위내에 그를 묶어둘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항공전역 The Air Campaign p227 John Warden 연경문화사)

공군과 공군작전에 깊은 불신을 품었던 파월은 공군참모부의 계획이 이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 마이클 듀건을 해임시키는데 있어서도 파월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개연성이 있다. 듀건은 페르시아만으로 가는 길에 동행한 기자들에게 공군의 작전이 실시된다면 기존의 군사적 목표 뿐아니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주위 인물들도 목표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가 이것이 화근이 되어 해임되었다. 하지만 행정부 내의 정치지도자들이 공군의 공습작전을 지지했으며, 지상전에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공군의 전격적인 공습작전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걸프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전으로 자리매김 했다. 지상군의 작전계획 수립은 이보다 더 늦은 속도로 진행되었다.
한편 파월의 독주를 막기 위해 체니의 군사보좌관으로 임명된 해군소장 윌리엄 오웬스는 육군과 공군 모두에 대해 비판적이다.주4) 진정한 합동을 위한 혁신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한 임무군 사이에 교신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육군은 자체 내에서는 통신이 원할했다. 그 이유는 적정한 주파수, 통신규약, 거리, 경험 및 교리를 서로 잘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이 미해병대와 교신하는 것은 훨씬 어려웠다. 지상의 해병대는 공중의 동료 해병대와는 통신을 쉽게 했다. 그러나 공군의 제트항공기와 육군의 공격헬기와는 전보를 송수신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기술적인 어려움은 작전에서도 나타났다. 지상작전시 해병대는 쿠웨이트의 독립이라는 특별한 목표가 주어졌으나 육군의 포지원이나 새로운 육군 전술유도탄체계(ATACMS)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육군은 서부전선에서 광대한 이라크 사막을 통과하면서 AV-8헤리어 전투기와 같은 해병대 근접지원항공기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미국이 정밀 비행능력을 흠잡을데 없이 보여준 항공전역은 실제로 별개의 임무영역(Building Block)에 대한 효과적인 체계였다. 사실상 그것은 공격목표를 자세하게 적은 기동명령과 그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부대간의 조화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 모든 것은 중앙지휘본부(Central Command Headquarter)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명령의 신속한 집행은 또 하나의 문제였다. 리야드(Riyadh)에서 구상한 임무명령이 해군이 6개 항모에 도달하기까지는 수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전자적이며 즉각적으로 대량의 자료처리가 가능한 해군 통신체계와 공군 상호간을 연결하는 적절한 통신 장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신수단의 보완을 위해서 해군은 항공임무명령서의 컴퓨터 출력본을 운반할 수 있도록 걸프만과 홍해에서 리야드에 이르는 군간에 매일 비행임무를 부여하였으며, 항공모함으로 다시 돌아와 빠른 속도로 복사를 한 후 다음 공습을 계획하고 있는 비행편대에 그 문서를 분배했다. 항공전역이 계속되면 해군은 주요 항공전역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고, 그들의 주어진 임무를 수정하는 대신에 그들은 항모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근접항공지원무기로서 소규모 독자 항공기를 보유한 해병대는 헤리어와 무장헬기 등이 해병대 지상작전에만 특별히 쓰인다는 이유로 해병대 항공기를 중앙지휘본부의 항공임무명령(Air Tasking Order)에서 제외했다. 이것은 공군입장에서는 해군이나 해병대의 개입을 덜 받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았다.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서 상이한 각 군을 분열시키는 요소가 강해지고 협조의 필요가 더욱 요구되었다.
항공작전의 관리는 지난 30년간 결점이 많고 경직된 정책이었다. 공군과 해군 항공기는 많은 동일한 표적을 명중시켰으나 그들은 실제로 그러한 합동작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함께 운용하지는 못했다. 해군항공모함의 전투기는 공군과 동일한 적아식별 송신기(암호화된 펄스를 다른 항공기나 레이다 수신기에 보내어 상대방을 식별하는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우발적인 격추를 방지하기 위해서 공군전투기와 가능한 멀리 있어야 했다. 그결과 미군주도의 항공전역은 합동강습부대를 구성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이라크전은 걸프전과 마찬가지로 개별 무기에서의 기술적 혁신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이를 통합시키는 시스템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아직 군사혁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공군기가 미 패트리엇 미사일 발사대를 파괴하거나 패트리엇 미사일이 미 해군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사고등이 일어났다.주5) 이들 사고는 전장에서 늘 발생하는 불확실성 중의 한 요소가 아니라 미군 스스로 설정한 내재적 목표인 군사혁신의 관점에서 보면 체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본질적인 결함인 것이다. 이는 걸프전이 군사혁신을 이룬 전쟁이란 평가와는 달리 냉전시대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 전쟁이란 평가와 연결된다.

표면상으로 페르시아 걸프전은 서로 다른 미군 사이에서의 성공적인 합동작전과 협동작전을 개발시켰다. 사막의 폭풍작전은 잘못된 통신과 부대간 경쟁 그리고 잘못 짜여진 전투교리가 비극으로 이어진 베트남전과 1980년 이란에서 대사관 인질을 구하려는 합동기동군의 잘못된 시도, 3년후 그레나다에서 서투르고 비효과적인 개입 이후, 깊고도 슬픈 일련의 군사작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방위 분석가인 쿠퍼(Jeffrey Cooper)는 당면한 세기의 미군전쟁방식이 대부분 다음의 가정에 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래전 수행과 공군 및 우주전력의 효용에 대한 미국의 현재 사고는 강력하게 필요하지만 통상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50여년간의 경험과 습관으로부터 비롯된-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가정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젠하워부터 슈와르츠코프에 이르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가치를 인정받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합동작전(통상 4개의 군으로 구성되는)그리고 국면별 순차적인 작전계획일 것이다. 비록 냉전상황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새로운 시대의 미군정책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미래전에있어서불확실성의제거LiftingTheFogOfWar.p119~126.빌오웬스.21세기군사연구소)

럼스펠트가 걸프전에 기초한 이라크전 초반의 작전계획들을 냉전시기 유물로 일축하고 나선 바탕에는 군부 내에서도 오웬스와 같은 평가가 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이라크 전의 초반은 충격과 공포작전주6)을 제안하고 주도한 해군의 역할이 부각됐으며, 충격과 공포작전이 이라크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는 커녕 분노에 불을 지핌으로서 게릴라전에 의해 곤혹을 치르도록 했고, 작전은 수정되어 육군의 공지전 교리로 다시 이행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것이 걸프전을 통해 파웰 독트린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이라크 전을 통해 럼스펠트 독트린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가 될 것이다. 이라크전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럼스펠트식 작전이 주류가 된다면 이는 한반도 작전계획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육군을 중심으로 한 주한미군사령부에서 작성하고 있는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인 작전계획 5027은 미육군의 공지전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국면별 순차적인 작전계획으로 오웬스가 표현한대로라면 전형적인 냉전시대 작전이다. 합동성 강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한미군 재배치는 육군중심주의의 극단으로까지 평가되어 온 미 2사단의 축소와 통신수단의 호환성 마련, 통합감시체계, 합동지휘체계등을 통한 군사혁신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북이 미국에 제안했던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골자로 한 잠정협정으로의 이행과정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둔기지의 공간적 이동은 앞으로의 전장에서 큰 의미가 없어졌다. 완전한 철수가 아니라면 주둔기지만의 공간적 이동보다는 미군의 지휘체계나 기능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하는 제안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핵전략

재래식 전쟁이 원칙과 지식의 어떤 부분이 적용되지 않는 두가지 특별한 경우가 있다. 혁명적인 내부분란(Insergent)과 핵전쟁은 유럽식 모델인 재래식 전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나?Making Strategy.p127데니스드류,도널드스노우.연경문화사)

핵전쟁은 전략가들에게 여전히 특수한 경우로 남아 있다 핵전쟁은 국가목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전략이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주로 군사력 사용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유일한 우발상황이다. 군사전략가에게 있어 핵전략은 지금까지도 혼란의 영역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혼란속에 빠져 있느니 아예 포기해 버리자는 생각이 걸프전에서 생겨났다. 아스타리타 그룹-1973년 아브람스장군이 베트남전 후의 전략적 환경을 조사하기 위해 만든 두뇌집단으로서 주월 군의 철수를 위한 활로를 찾는데 보트역할을 했던 에드워드 아스타리타(Edward Astarita)대령의 이름을 본떠 부른 위원회의 명칭-은 핵전략, 분란억제전략 따위의 환상대신에 상식적인 재래전 전략에 초첨을 맞추었다.

1981년 3월, 후에 합참의장이 된 존 베시 장군은 아스타리타 보고서는……베트남전 후의 군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육군은-그리고 다른군도 마찬가지로-실로 첫 출발점으로 복귀했다. 전쟁교리면에서 그것은 특히 진리였다. (미국의 걸프전 전략 On Stratege 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88~92 해리섬머스 자작아카데미)

1945년이래 전쟁수행교리와 전략은 원자시대에는 과거의 모든 군사이론과 철학들; 모든 지나간 군사이론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모든 지난 전쟁에서의 경험들이 전적을 무용지물이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민간 핵전략가들의 현란한 개념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장군들과 제독들이 아닌 오로지 이 핵전략가들만이 미래의 전쟁에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군사전략가들에게 무기력증을 가져오게 했다.

군사사가인 러셀위글리(Russel F.Wigley)가 언급했다. 거의 모든 군사력의 사용에 있어서 국가의 군사정책과 전략이 대량 핵본부에 의존하는 것은 육군에게 자신의 정책전략상의 위치인식을 곤란하게 하였고, 민간인에게 육군 자체의 존재필요성을 애매모호하게 하였으며, 또 육군의 전 장래를 불확실하게 하였다. 그결과 군사적 사고에 있어 한세대에 걸쳐 무기력증에 가까운 현상이 일어났다.
(미국의 걸프전 전략 On Stratege 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81 해리섬머스 자작아카데미)

더욱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핵은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란 확신이 일부 군전략가들에게 베트남전을 통하면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종결될 무렵 북베트남군으로 나와 비슷한 지위에 있던 한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핵무기를 써서 북베트남을 지도에서 몇 번이라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잘알고 있다. 하지만 우린 또한 당신들이 결코 그것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일고 있다. 핵전쟁 이외의 어떤 전쟁에서도 우리가 자랑했던 핵무기의 억제능력은 치명적인 결함을 나타내었고 그것은 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의 걸프전 전략 On Stratege 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83 해리섬머스 자작아카데미)

재래전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걸프전은 그 뒤 10년간 핵전략에 대해 언급하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핵전략의 공백상태였다. 그러나 핵무기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95년 12월29일,
해군해양시스템사령부, SEA0260은 지상공격용핵장착토마호크를 위해 휴대용발사시스템의 개발과 생산을 위한 생산요구문서 N00024-96-R-6221를 지정했다. 이 휴대용발사시스템은 LA급공격형잠수함(SSN688,688I)과 버지니아급 신형공격형잠수함(NSSN/SSN774)에 장착될 것이다. 이 조달사업은 충분하고 열린 경쟁을 통해 시행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해상체계사령부, 잠수함전투체계프로그램국에 의해 지원되었다.
(http://www.fbodaily.com/cbd/archive/1995/12(December)/29-Dec-1995/12sol001.htm)

(97년)11월 말, 공격형잠수함(SSN) 보스턴은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해군무기저장소에서 핵탄두용토마호크순항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다시 탑재했다. 그러고 나서 모든 핵통제에 사용되는 미사일발사기를 잭슨빌의 발사지역으로 옮겼다. 미해군은 전술용함정으로부터 핵무기를 제거하라는 전 부시대통령의 결정을 빨리 그리고 쉽게 파기할 수 있도록 공격형잠수함을 위한 휴대용발사시스템을 구입하고 있다.
(http://www.thebulletin.org/issues/1997/nd97/nd96arkin.html)

더구나 정보자유법에 따른 기밀해제 문서에 의하면 98년 미국 서부의 세이모어존슨 공군기지에서 4전투비행단에 의해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에 입각한 핵공격훈련이 이루어 졌다. 그리고 부시정부 들어 지하시설 파괴용 소형핵폭탄 개발에 관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핵정책은 완전히 부활했음을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전략에는 항상 모순이 따른다.
핵무기에 관한 견해의 변화에 대하여 세가지 사항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실제로 핵에 관한 모든 생각이 핵억제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핵무기에 의한 전쟁의 목적에 대한 의문과 거부가 제기되어 왔다. 핵논쟁의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과연 핵전쟁은 제한될 수 있는가이다.
둘째로, 핵무기 운용의 결과에 대한 판단은 이 분야의 전략이 매우 특이하다는데 일반적인 합의를 이루어냈다. 결국 이전의 전술이나 교리와는 아주 다르거나 미미하게만 관련되는 억제라는 핵전략이 개발되었다.
셋째, 억제를 이론화하는 영역은 대부분은 민간의 몫이라는 점이다. 공중폭격 형태로 사용되는 핵무기 관련 전략은 거의 전적으로 전문군사영역의 밖에서 개발되어 왔다. 핵전략 분야는 매우 복잡한 개념과 견해들로 이루어져 있어 비핵(재래식)전략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처음 접했을 때는 거부감과 이질감이 든다.
개량탄두 설계와 결합한 수소폭탄에 의해 생겨난, 수소폭탄의 강력한 폭발력과 감소된 무게는 다른 운반수단 사용의 가능성을 높였으며, 그 운반수단의 후보자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중 독일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 전략로켓들이었다. 탄도미사일 등장 이전에는, 파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격해오는 적을 충분히 요격하는 방어전략 수립이 가능했다. 핵공격을 받는 국가는 대단한 피해를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생존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탄도미사일은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점차 미국인들은 유인항공기에 의한 폭격과 탄도미사일에 의한 폭격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근본변화는 탄도미사일에 의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 선거유세중 탄도미사일에 대한 방어란 하나의 총알로 다른 하나의 총알을 맞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국이 핵전쟁으로 인한 파괴를 피할 수 없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핵전쟁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핵억제가 핵무기 보유의 1차적(혹은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전통적인 군사이론에 의하면, 군사력의 억제목표는 다음의 두가지 위협중 어느 한가지 혹은 두가지 모두에 기초하였다. 하나는 군사력으로 적국의 공격 의도를 무력화 시킬 수 있으며, 적국의 공격을 위한 노력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을만하게 위협함으로써 잠재적 적국을 억제할 수 있었다.(거부위협) 다른하나,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응징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만하게 위협함으로써 공격하려는 적국을 단념시킬 수 있었다.(응징위협) 이 가운데 거부위협은 매우 효율적인 방어수단이나, 적의 무기에 대한 대응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비현실적인 위협이 된다. 응징위협은 파괴 보복능력에 기초한다. 두가지 모두, 아무도 대응할 수 없는 파괴적 무기보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억제위협은 응징위협이었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이 제기된 것이다. 1970년대 관성유도기술의 커다란 발전과 결합하여 MIRV(다탄두핵미사일)는 상대측의 핵무기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다. 많은 분석가들은 적의 보복 능력을 파괴하기 위하여 핵무기로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능했기 때문에 이것을 핵시대에 있어서 가장 불안정한 사건으로 본다.
핵 억제력은, 잠재적인 적국이 자신의 공격이 가공할 보복을 불러와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되는 셈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개념에 근거하였다. 이 딜레마는 자국에 대한 핵공격을 억제하는 핵무기는, 핵억제가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자국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 문장에는 분리되고 반드시 양립하지는 않는 두 개념이 담겨 있으며 이 때문에 딜레마로 불리게 된다. 이 안보딜레마의 양면중 어떤 측면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그 국가의 억제전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예를들어 핵무기의 억제력에 1차적인 강조점을 두고, 양국이 서로에게 취약한 조건이 핵억제에 기여한다고 가정한다면, 현재의 균형에 의해 핵억제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반면, 핵억제가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에 1차적인 주안점이 주어진다면, 그와 같은 핵전쟁이 발발시 검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SDI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제기되는 보호책의 대표적인 예이다.
안보딜레마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딜레마의 어느 한측면을 강조하게 되면, 다른 한측면이 희생당한다는 사실이다. 양국의 핵균형이 핵억제가 실패할 경우의 결과에 대한 양국의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핵억제에 기여해 왔다면, 그러한 결과로부터 보호하려는 활동이 핵억제를 약화시킬지도 모르며 결국 핵전쟁의 가능성을 더 높아지게 한다.

핵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믿을만하고 과학적인 측면에서 어느 누구도 양개질문(어떻게 핵전쟁은 시작되는가와, 핵전쟁은 제한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에 관한 확실한 생각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핵전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관찰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목표가 핵전쟁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략과 정책의 커다란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믿을 만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나?Making Strategy.p159데니스드류,도널드스노우.연경문화사)

핵전쟁은 제한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혹은 최소한 계획한다면 제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믿는 사람들은 케네디정부의 통제된 대응, 닉슨과 포드정부의 제한된 핵선택, 카터정부의 상쇄전략, 그리고 레이건정부의 유연반응등의 다양하게 알려진 핵전략을 선호한다. 용어와 수식어가 약간씩 다를 뿐 각 전략의 핵심은 동일하다. 핵전쟁을 제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제한적인 핵전쟁이 전면적인 핵전쟁보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한적인 핵전쟁이 역점을 두고 다루어야할 실질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핵전쟁은 제한될 수 없다는 믿음은 존슨행정부의 확증파괴전략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닉슨재임초기의 전략적 충분성과도 은연중에 연관된다. 핵전쟁의 특성에 관한 그들의 첫 번째 가정을 근거로, 이 전략의 주창자들은 핵억제가 최대의 관심사이며 모든 전략은 핵 억제라는 목표에 전적으로 집중되어야한다고 결론짓는다. 핵전쟁에서의 승리 같은 그러한 목표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해서, 이러한 전략적인 방침에 따라, 억제력을 고양시키는 어떤 것이라도 선이 되며, 억제력을 약화시키는 여하한 것이라도 악이 된다. 확증파괴유형의 전략은 안보딜레마의 첫 번째 관심을 강조하며, 핵 억제 실패의 결과를 가능한 한 무서운 것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핵억제를 도모한다. 작전상 , 그들은 토마스 C. 쉘링이 인질효과라고 명명한 것을 특히 강조한다. 이것은 확실한 보복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양측이 상호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각국은 본질적으로 상대국의 국민을 인질로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후에도 상대방에게 보복공격을 가하여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인질을 잡고 있는 셈이다. 억제위협은 적의 방어망을 돌파할 수 있는 보복전력(적의 선제공격에서 살아남과, 정확한 보복을 위해 적의 방어망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전략의 지지자들은 급속한 기술발전을 반대한다. 고도로 정확한 대응공격능력은 마찬가지로 자국 보복전략의 생존성을 저하시키고, 도시의 미사일 방어능력도 마찬가지로 상대국의 인질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동시에 이 전략의 지지자들은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살상에까지 이를 정도의 전력투입을 제안한다. 더욱이 최초 공격후에도 적국이 전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전략 또한 자살 행위이다. 보복 공격에 대한 보복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확증파괴 전략은 비도덕적이며 (일반국민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자살행위라는 점에서) 비난받았다. 확증파괴 전략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반면에 그들도 핵전쟁이 제한될 수 없다면, 사실상 핵전쟁의 결과는 양측의 파괴 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양측이 수립하는 어떠한 계획과도 무관한 바로 이 가능성 때문에 핵억제가 최우선 순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미군에게 있어서 군사분야의 혁명은… 대칭적 전쟁(재래전)에서 항상 미군에게 결정적 우세를 안겨주는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확산 대응분야의 혁명에는 비대칭적 전쟁에 여하히 대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뒤따르게 되며, 이러한 혁명은 이제 걸음마 단계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지연된 이유중 하나는 지역적 분쟁에서 적의 대량파괴무기의 사용을 억지하기 위하여 위험스럽게도 비전략적 핵무기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그런 종류의 억지를 신뢰할 수도 없고 신뢰해서도 안된다.
(예방적방위전략Preventive Defense p201~202윌리엄페리.애시튼카터.프레스21)

핵은 아직도 미군에게 있어 가장 취약한 전략 영역이다. 이라크와 같은 비핵국가에 대해 무자비한 재래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이 인도나 파키스탄 또 북에 대해 위협은 할지언정 재래전쟁 방식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혁명전략과 대테러전략
미군 전략에 있어서 또 하나의 미지영역이 혁명 대응전략이다. 대 분란전략으로 불리는 대 혁명전략은 군인이 아닌 사회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핵과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들의 또다른 현란한 개념들에 의해 이 무기력증은 더욱 심화되었다. 하버드 대학의 바우어벨(J.Bower Bell)은 설명하였다.
심지어 베트남전 이전에는…. 게릴라 혁명은 다양한 경력자들의 재능, 재량, 능력 그리고 경험을 요구하는 우아하고도 복잡한 방법의 멋진 혁명방식으로 치부되었다. 그 당시 미국의 지적인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베트남 사회를 변형하기 위한 복잡하고 고도로 계산된 개정작업이라는 적절한 대응책의 본질은 게릴라들을 인간의 복지를 위한 진보된 사회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는 편견과 야심에 들어찬 것이었다.
시의적절하게도 케네디행정부는 이 새로운 종류의 전쟁에 매달렸다. 테일러 장군은 퇴역하였으나 대통령의 군사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재등용되어 대분란전 노력을 감시, 평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젠 거의 정치화되어 있던 테일러외의 직업 군인은 그 활동에서 제외되었다. 그 이유는 이전의 핵전략처럼 대분란전략에는 전쟁 자체에 대한 지식은 필요없다는 것이었다.앞으로 고위직 장교로 승진하려면 대 게릴라전이나 다른 협소한 분야에서의 겸허을 내세우는 것이 결정적일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광범위한 암시를 준 결과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베트콩은 사회과학자들의 공상적인 국가건설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군과 해병대의 장비들과 해,공군의 화력지원을 받은 육군과 해병대의 저격수들에 의해 괴멸되었다. 1968년 말에는 베트콩은 효과적인 전투세력으로서 지탱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의 7년간의 전쟁은 근본적으로 북베트남군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 역시 사회과학의 대본을 따르지 않았다. 스튜어트 헤링톤(Stuart A. Herrington)은 그의 고향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처럼 북베트남도 남베트남 농부들의 정신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그들의 카드를 써서 그 실패를 만회하였다.- 그들은 남베트남을 22개 사단 병력으로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미국의 걸프전 전략 On Stratege 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81~83 해리섬머스 자작아카데미)

혁명전쟁에 있어서 재래식전쟁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양 적대자가 모두 실질적으로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군의 힘의 근원이자 생존과 확장의 열쇠는 일반 국민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있는 위장된 정치적 하부구조이다. 포위된 정부군도 궁극적으로는 일반국민의 지지와 충성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간의 전쟁에서 국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 정부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정부는 국민의 호감을 사는 대담한 반란군에게 맞서지 못한다. 결국 내부분란에 있어 양측의 중심은 모두 일반 국민내에 있다. 그러나 이들은 뒤섞여 있어서 실제로 거의 구별할 수 없다. 재래식전쟁에서 군사전문가들은 오랫동안 중심의 개념을 받아들여 왔다. 재래식 전쟁의 기본적인 군사적인 목표는 적의 중심을 파괴하고 아의 중심은 보호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에 있어서는, 중심이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에 기본 군사교리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다. 총이나 칼등의 전통적인 군사수단을 사용할 경우, 반군의 중심을 파괴하는 동시에 자신의 사활적 중심도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이다. 혁명의 두 번째 차이점은 혁명군은 실패하지 않으면 승리한다는 사실이다. 게릴라전술을 구사하는 혁명군이 소규모 전술적 차원의 교전에서 자주 패배하더라도, 그들은 분산되어 있고 소부대 단위로 행동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패배는 당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진다. 화력에서 절대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혁명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부군과 정부전체를 불신하게 한다. 혁명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의 종류는 재래식 전쟁과 정반대이다. 재래식 군사력은 특히 지난 2세기 동안,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시.공간적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방도를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다. 반면에 혁명군의 군사력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 공간적으로 분산되고, 시간적으로는 지연하는 정반대의 접근방식을 취해 왔다. 재래식 군사력은 적이 대응하는 것보다 신속하게 작전함으로써 승리를 얻고자 하는 반면, 혁명군은 적이 대응하는 것보다 오래 작전함으로써 승리를 얻고자 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적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으려 하지만, 게릴라군은 적의 인내를 시험한다. 다시말해 시간이 곧 무기인 셈이다. 80년대까지도 미국은 대혁명전쟁에 대해 초보적인 대응방법만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분란에 대응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 부분에 대한 미군의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매우 신뢰할 만한 대 내부분란 전략개념을 어느 정도는 도출해 낼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첫 번째 개념은, 성공적인 대 내부분란 전략은 다음의 세가지 접근방식을 반드시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소요의 원인은 모두 제거되어야 하며, 위장된 하부구조는 반드시 밝혀내어 파괴해야 하고, 반군의 군사력은 패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개념은 주민통제와 정보획득이 성공적인 대 내부분란전략 수행의 핵심요소라는 사실을 알려준다….게릴라는 발견하기가 무척 어렵고 전장으로 끌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장된 반군의 하부구조를 찾아내어 파괴하는데는 확인, 대조, 추적, 체포하는 범죄수사식의 정보획득 작전 수행이 요구된다. 국민들의 움직임이 빈틈없이 통제되지 않으면 정보임무수행은 더욱 어려워진다. 하부구조를 대상으로 정보작전 수행시의 핵심요소는 누가 누구이고, 누가 어디에 있어야하는지를 알고, 그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세번째 개념은 반군에 대응하는데 있어 유일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반군에게도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대 내부분란 활동은 기습적이고 결정적이어야하며, 점진적이거나 단계적이어서는 반군에게 시간만을 제공할 뿐이다.
(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나?Making Strategy.p135~137데니스드류,도널드스노우.연경문화사)

1962년 판 미육군교범에 의하면 전쟁양상(Spectrum of war)라는 개념이 도입되는데 전쟁의 양상은 냉전으로부터 제한전, 전면전에 이르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교범에 의하면 냉전과 제한전을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명확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두가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냉전’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평시의 고조된 긴장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한전’은 실제 적대행위를 하는 전시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현재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간전쟁이 마무리 된 것 같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교리상으로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잇는 것은 이 때문이다. 테러전쟁은 냉전이 아닌 수많은 제한전을 수행해야하는 과제에 당면해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의 테러전쟁은 신냉전이 아니며 세계적 차원의 제한전이다. 테러를 전쟁으로 보는가 전쟁이외의 상태로 보는가는 중요하다. 뉴욕사건 이전까지는 테러는 전통적인 전쟁이 아닌 ‘비대칭적방법’이었다.

“재앙적테러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생명과 재산에 대하여 매우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례 없는 피해를 가하는 것이다.(예방적방위전략Preventive Defense p221윌리엄페리.애시튼카터.프레스21)

테러를 전쟁으로 규정하는가 안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 군부는 월남전 당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오류로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당시 행정부는 냉전과 제한전의 엄연한 차이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월남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과의 불신을 초래하게 되었다.(미국의 월남전전략.p92.해리섬머스.병학사)

즉 테러를 전쟁이 아닌 일상의 위협상태로 보게되면 선전포고를 할 수 없다. 1998년 케네디연구소의 21세기통치전망프로젝트에 의해 1997년 설립된 재앙적테러에 대한 대학 연구그룹의보고서에는 재앙적 대테러의 위협을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례없는 피해를 가한다고 하여 전쟁과 구분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테러를 전쟁으로 규정했고 테러리스트라는 비대칭적 대상에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면서도 아프간에 대한 테러보복전쟁에 대해서는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전쟁양상에 대한 교리의 혼란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의 대게릴라전 정책을 보자. 케네디는 당시 육참총창인 데커가 게릴라에 대해 ‘용감한 군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게릴라들을 충분히 맞설 수 있다.’고 맞서자 케네디는 ‘게릴라와의 전투는 재래식 전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특수한 기술’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리고 대 게릴라전이라는 새로운 교리와 전술의 필요성을 역설한 서한을 육군에게 하달한다. 군부가 보기에는 대 게릴라전이 전혀 새로운 임무인 대민활동, 학교 및 공공의료기관의 건설, 경찰에 대한 지원등’ 민사활동’과 같은 임무로 보였다.

이를 반영하여 68년판 작전 요무령에는 ‘미군의 근본목적은 정부의 각 기관이 합법적인 법률에 의해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거나 회복 도는 창조하는데 있다’고 기술되었다. 월남전 이전의 교리 즉 ‘적성국가를 지원하고 있는 군대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하여 격멸하는 것이다’라는 정의와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월남전 전략 p103 해리섬머스.병학사)

게릴라전 전술교리는 독자적으로 인기를 더해 갔고 세련되고 복합적인 방법에 의해 대처해야 하는 각계각층의 관심이 집중된 과제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모든 관계전문가들의 재능과 활동영역, 능력 및 경험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였기에 1967년에 이르러 각종 대 게릴라전문위원회와 특별대책 연구팀에서는 이견이 백출하여 마치 인민전쟁의 존속이 관료간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처럼 보였다. 테러전쟁이전인 테러대응에서도 이러한 혼선은 빚어진다. 애틀란타 올림픽 테러 당시 재앙적 테러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 지역 치안요원들로는 손쓰기 어려운 매우 심각한 사안일 수 있다는 판단에 대해 국방부가 취한 조치를 보면, 연방군의 배치를 승인하고 외국정부와의 관련 가능성을 찾기 위해 국방부 부장관이던 CIA의 도이치를 합류시킨다. 연방 보안관, FBI요원, 조지아주 경찰, 그리고 지방 경찰들이 합동작전을 폈다. 그러나 FBI도 그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다룰 때는 사건의 일차적 책임이 지방경찰에게 있으므로 행동의 제약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경찰은 법집행에 대해 훈련받지 못했을 뿐아니라 특히 민병대 법에 의해 법집행이 금지된 군부대와 일하는 것을 꺼려한다.
베트남전에서 게릴라전=인민전쟁이란 도식은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폭동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서 잘못된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게릴라들은 미군과 월남군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고 월맹정규군은 재래전으로 결정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군부의 결론은 월남의 국내문제는 월남인 자신들에게 맡기고 미군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만 전념하게 했다면 대 게릴라전 교리는 미군사작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점이다.
비대칭전쟁으로서의 테러전은 게릴라전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교리의 혼란은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때문에 테러전쟁 교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의 테러전이 상대국가의 정규군과 함께 동맹국가의 게릴라와도 싸워야 할 상황에 닥치면 이는 테러전의 약한고리가 될 것이다.
특히 게릴라의 형태가 이전과 같지 않고 더욱 ‘비대칭적’일 때 더욱 그러하다.

공포
비대칭위협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대칭위협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한 결과는 공포의 증가이다. 공포는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 대해서도 사기를 저하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인도한다.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경험하며 생긴 공포는 미군으로 하여금 월남전에서도 당연히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란 예측을 하게 하고 그것은 스스로 전쟁수단을 제한함으로서 전쟁의 패배를 가져왔다. 이러한 공포는 사고의 마비를 불러오고 실제적인 위험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그 원인을 kautsky 교수는 자기실현적예언(self-fulfilling prophyecy)이란 말로 분석한다.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 새로운 행동을 유발시키고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최초의 그릇된 판단 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예를들면 월맹을 중공의 앞잡이라고 믿어버린 것이 현실에서 중공이 참전할것이란 공포로 나타났고 그것은 결국 중공의 개입을 기피한 제한적 전쟁을 하게 했고 그 결과 실패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러전에 대한 공포가 심화되는 가운데 일어난 이태리에서의 테러경보는 이와 같은 경우이다. 2002.3.27일 로마의 미국대사관이 세부사항은 생략한 채 극단주의 테러그룹이 부활절을 겨냥, 베네치아와 피렌체, 밀라노, 베로나의 미국인을 상대로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한다. 특히 미국인이 많이 모이는 클럽이나 식당, 종교시설, 실외 오락 이벤트 등을 대상으로 지목했다. 전 주미 이탈리아 대사 세르지오 로마노는 “테러리즘이 불안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이번 경고는 알 카에다에게 총 한방 쏘지 않은 승리라는 선물을 안길 것(일간지 ‘카리에레 델라 세라’)”이라고 비판했다. 만우절의 탄저균발견 거짓 제보가 테러대응기관을 마비시킨 경우도 이와 같다.
옛 소련군 대령으로 생물무기 개발자였던 케냐잔 알리벡코프는 ‘만약 테러 공격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면 미국 사회 내부의 저항과 공포감이 확산되고 이에 따라 미국의 국제문제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정치인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질 수 있다’ 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다. 9.11사건 전부터 예견됐던 재앙적 테러에 대한 우려는 현재 거의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만약 재앙적 테러 사건이 미국에서 발생 한다면, 공격을 미연에 막지 못한 권위의 파멸과 심각한 규모의 대량 학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무능력이 헌정질서에 대한 신뢰감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1970년대와 1980년대 독일에서의 테러리스트들의 목표였다. 즉, 기존의 공적질서를 치욕스럽게 만들고, 정부로 하여금 대중적인 지지를 손상시킬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내에서 재앙적 테러가 발생할 경우, 대중적인 격렬한 항의와 재발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가 분출할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미국인들이 향유하였던 권리와 자유를 다소 양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안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그리고 재앙적테러로 말미암아 범죄와 관련된 집단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써 보다 큰 국제적 분쟁이 야기될 수도 있다….이러한 위협은 정말 초국가적인 것이며, 재앙적 테러를 국가와 국제적 안보 위협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또다른 요소인 것이다….
재앙적 테러가 발생할 것으로 보는 마지막 이유는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독보적인 세계적 지도력과 미 군사력의 전통적인 우월성이다. 이러한 점들이 미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재앙적 테러와 같은 비전통적인 비대칭적 방법이야말로 미국의 힘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미국인들을 매력적인 목표로 삼게 만드는 것이다….
재앙적 테러와 싸우기 위한 노력은 사회에 대한 파괴적인 위협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국가안보 패러다임과 치안 패러다임간의 모순에 빠질 위험이 있다….자유와 사생활 보호, 생명과 재산의 보호 사이에서 미국은 전통적으로 균형을 유지하여 왔지만, 재앙적 테러에 의한 공포와 분노의 분위기로 인해 이러한 균형은 깨어지고 자유와 사생활보호라는 가치가 급작스럽게 포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재앙적 테러에 의한 물리적 파괴 그 자체보다도 훨씬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앙적 테러는 국가안보패러다임과 치안 패러다임 사이의 큰 골을 이어주는 제 3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방적방위전략Preventive Defense p221~225윌리엄페리.애시튼카터.프레스21)

비대칭전쟁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비대칭적 위협이었던 테러에 대한 전쟁이 대칭적 개념의 전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95년부터 미국정부의 공식문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비대칭개념은 처음엔 항공과 지상, 항공과 해상등 상이한 전력간의 교전이란 의미로 단순하게 사용되었다.
97년 국방태세보고서에서 재래식군사영역에서의 미국의 지배는 적들로 하여금 미국의 이익,그리고 미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비대칭적수단 사용을 고무시킬 것이라고 하여 주목하기 시작했다. 99년 Joint Strategy Review는 공식적으로 비대칭을 광범위하게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이 예상했던 작전방법과는 완전히 틀린 방법으로 미국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시도’ 들이다.
Joint Vision 2020에서는 비대칭적접근방법을 가까운 장래에 미국이 직면할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였으며 2001국방태세점검보고서 서문에는 미국은 과거의 위협기반(threat-based)모델보다는 능력기반(capabilities-based)모델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습, 기만, 그리고 비대칭전쟁에 의존할 적들을 억제하고 물리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갖춰야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비대칭적적인 테러집단에 대한 테러전쟁의 개념은 악의 축 발언과 함께 대칭적 적인 국가에 대한 전쟁개념으로 환원됐다. 또한 비지정학적 전략에서 전통적인 지정전략으로 환원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처럼 전통적, 대칭적 개념은 강화되면서 본래의 비대칭적 전쟁과 위협에 대한 대처는 갈수록 혼동되고 있다.
예를들면 탄저균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실패, 신뢰할 수 없고 잦은 테러경계발령에 의한 불신, 민간인에 대한 사찰과 감시를 합법화시킴으로서 발생하는 시민자유권에 의한 저항, 수많은 지역에서의 테러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책임의식 결여등 뉴욕사건 이전까지 추진되어 온 제한된 권한에 대폭 힘을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대한 공포감만 증가 시켰다.
군사학 박사로 러시아 현역 육군소장인 블라디미르 슬리프첸코는 비대칭적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비대칭적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의 미국처럼 재래식 또는 최첨단 무기를 이용해 전지구적 테러리즘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한겨레신문2001.12.1)
테러전은 간단한 위협만으로도 미국의 시민사회를 파괴하는 전략이다. 혁명전쟁, 게릴라전 테러전등은 여전히 미군에게 취약한 전략분야이다. 미군전략의 약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주1)유럽의 국제법교수와 실무자들은 탈 냉전적 상황에서 안보리상임이사국들의 입장이 일치된 가운데 이루어진 대 이라크 군사행동을 냉전시기 사문화되었던 제7장의 규정에 따른 군사적 강제조치의 최초의 적용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대다수의 미국교수들은 유엔헌장 제43조의 특별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제42조의 군사조치가 법적으로 발동이 불가능하므로 대 이라크 군사행동을 제42조의 군사조치로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며 또한 문제의 군사행동이 유엔의 여하한 통제도 받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이는 유엔의 행위 즉 강제조치라고 볼 수 없으며 문제의 군사행동의 법적 정당화는 이를 헌장51조에 의한 집단적 자위권행사로 볼 때에 가능함을 역설한다.(걸프전의 법적성격 p105 김석현논문 국제법학회 논총37권2호)

주2)
월남주둔군의 전투병력을 크게 앗아갔던 장본인인 관료적 결함에 대한 치유약 만은 그때도 지금도 없다. 겹겹층의 사령부들, 그 많은 참모들, 각종 부대에 따른 그 엄청난 지원병들 정비병들 이것저것 모두 떼어버리고 나면 직접 손에 총을 잡고 싸우는 전투병은 얼마되지 않았다. 1968년말 월남주둔 미군은 모두 53만 6천명이었는데 보병부대에 배치된 병력은 8만명이 채 못되었으며 이밖에 근접전투에 참가하던 육군의 공중기갑비행승무원 들, 공정대원들, 해병대원들, 특수군병력등 모두 합해야 보병 전투병 수의 두배가 못되었다. 월남전 자체는 단순성을 요구했는데 군사체제만은 복잡성을 강요했다. 즉 국가는 군인이 되도록 군대에 인력을 공급해 주었는데 군사체제는 그 인력으로 진정한 군인은 만들지 않고 행정서기, 심부름꾼, 기술자 및 판매원들을 만들어 버렸다.
제도적 방종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이 전쟁에서만이 많이 나돌던 훈장을 장교들이 마주보고 서로 달아주던 너그러움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베트남에 근무했던 장성 수백명 가운데 전사자가 단지 4명이었는데도 장성들의 절반 이상이 훈장만은 받았다. 이 전쟁 중, 장교와 하사관들이 받은 훈장들을 합치면, 엄청난 것이어서 베트남전에서 또 하나의 기록인 훈장 인플레가 일어났음을 알 수가 있다. 1968년 한해동안, 전사자는 모두14.592명에 훈장을 받은 군인은 416,693명이며, 1968년보다 주월병력도 크게 줄어들어 20만영 선이었던 70년에 전사자 수도 줄어들어 3.946명인데 수훈자는 522.905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이런 악폐는 이로서 끝나지 않고 그레나다 섬에까지 이어져 상륙작전이 끝난뒤 육군은 이 상륙작전에 끼친 공로로 7천명이 채 안 넘는 그레나다 섬 주민수보다 더 많은 8.612개의 훈장을 달았다. 몸에 밴 전술 차원의 방종에 비할 때 업무 절차의 번거로움 따위 정도는 차라리 지엽적인 문제였다. 게릴라들이 정말 숨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는 오두막집들에 대한 전폭기들의 일제공습, 저격병 몇명을 침묵시키겠다는 일제 포사격, 그리고 숲들을 쓸어버리기나 하려는 듯 헬리콥터의 문턱에 걸터앉아 1백만 달러어치의 포탄을 단숨에 쏘아대는 등등. 이 전쟁에서의 이와 같이 불필요한 엄청난 화력의 낭비가 드디어 주요 문제로 떠올라, 이 장면들이 본국의 TV화면에 비쳤을 때, 곧장 반전감정에 불을 당기고 말았다. 그리고 턱없는 화력의 낭비는 미 군사체제가 전쟁 수단을 집중통제할 일관된 전략을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국방성과 전쟁술The Pentagon and The Art of War.1986년.26~32쪽.루트웤.명지출판사)

주3) 워던에 의해 제안된 병행전parallel war은 냉전시기까지 부정확한 무기와 목표물 중심의 공습으로 이루어진 순차적 일련적 방식과 달리 적국인 이라크를 하나의 체계로 보고 체계의 중심인 지휘통제기구로 부터 기반시설등을 동시에 정밀폭격하므로써 체계를 일시에 붕괴시키는 항공전역개념이다. 그는 과거의 무차별 대량폭격과 달리 민간인들에 대한 재난을 줄이고 목표물을 정밀하게 타격하기 때문에 수량개념에 의해서가 아닌 효과개념에서 이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4)윌리암 오웬스제독은 걸프전 당시 6함대사령관으로 참가했다. 또한 콜린파웰 합참의장의 걸프전 독주를 막으려던 당시 체니국방장관과 함께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93년 살리 카시빌리 합참의장과 함께 합참차장으로 활동하며 미군의 합동성 강화를 위한 개혁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부군관련업체와 군주요인사들에 의해 차기 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주5) 4월 3일 이라크 중부에서 이라크 탱크를 조사 중인 5군단 소속 미군 병사 1명 사망
2일 밤 미군 F-15E 이글 전투기, 미 지상군을 향해 발포, 육군 1명 사망, 수명 부상
2일 밤 미 해군 F-18C 호넷 전투기, 미 패트리엇 미사일로 격추(조사 중)
2일 밤 미 육군 블랙호크 헬리콥터 추락해 7명 사망, 4명 부상(조사 중)
3월 28일 바스라 인근에서 미군기 A-10의 오인 공습으로 영국군 1명 사망, 4명 부상
27일 나시리야 인근에서 미 해병대 간 교전으로 37명 부상
25일 바스라 인근에서 영국군 챌린저2 탱크 간 교전으로 2명 사망
24일 미군 F-16 전투기가 미 패트리엇 미사일 발사대 파괴
23일 영국 토네이도 전폭기, 미 패트리엇 미사일에 격추, 조종사 2명 사망

주6)
2003 년 3월 20일부터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대하여 미군이 공중 폭격을 했다이 공중 폭격 계획은 “Shock & Awe(충격과 공포)”라고 불리고미국 국립 방위 대학에서 개발된 구상에 근거해 있다다량의 무기를 단숨에 투입함으로써적의 군사력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 보다오히려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겨누고 있다.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점은 엄청난 폭격 그 자체가 아니라 정밀폭격을 이용하여 지휘체계를 동시에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지휘부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상태를 만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