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둘째날-고려산. 군사통신혁명의 약한고리2004/09/17 1082

고려산의 미군통신시설 너머로 노을이 진다. 전파보다 장엄한 것은 빛이었다.

군사통신혁명의 약한 고리

이시우

보슬비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은 여지없이 비를 뿌린다. 보슬비다. 지나가던 길에 추녀에서 잠시 쉰다. 위에서 내리는 비만 피해도 감지덕지인데 땅까지 젖지 않은 곳을 발견했으니 금상첨화다. 만약 폭우가 쏟아졌다면 아무데나, 설령 빗길이라도 앉을 것이다. 그러나 보슬비는 사람을 조심스럽고 까다롭게 만든다. 군인이라도 폭우가 내릴 때 아무데서나 휴식을 취하게 하면 별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슬비가 오는데 아무데나 앉아 휴식하라고 하면 분명히 불만이 터질 것이다. 더 좋은데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슬비는 더 많은 병참비용을 요구한다. 나는 언젠가 프랑스를 항복시킨 디엔비엔푸 밀림의 사령부를 찾았다가 소낙비를 만나는 바람에 비를 피해 추녀에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났다. 베트남의 전장에 대해 미군은 보슬비 정도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롤링썬더(점증하는 번개)로 상징되는 대규모 공습작전에 대해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 번개와 폭우를 연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슬비는 폭우보다 강했다. 폭우를 맞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젖을 게 없어지고 일신의 안락 따위를 포기하게 된다. 이미 버린 몸. 더 버릴게 없으니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그 뿐인가 비 맞는 것을 넘어 물속으로도 뛰어든다. 베트남 민중은 폭우를 맞고 있다고 느끼는데도 미군은 보슬비나 맞는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도 뚜렷하지 않은 지루한 전쟁은 병참에 대한 요구는 증가시켰고 전투에 대한 요구는 감소시켰다. 수많은 훈장을 단 건달 장성들이 사이공의 주월사령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거나 과다한 문서에 파묻혀 있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다는 자만심은 보슬비에 자신들의 몸이 솜덩이처럼 젖고 있음을 깨닫는 것을 방해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자신들이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는 수렁을 빠져나오기에 이미 늦어 있었다. 전세계 미군재배치계획을 얘기할 때 마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단어중에 하나가 동맹피로증상이란 말이다. 이는 주한미군 뿐아니라 거의 모든 전세계 주둔미군에 해당된다. 세계적인 반미, 비미 분위기가 높아져 가고 있는 것과 연관된다. 전쟁수단들이 평화의 보슬비를 계속 맞으면서 서서히 녹슬어가고 있는 것이다. 보슬비는 군의 사기에 결정적인 요소인 분노와 적개심 대신 피로감을 가져오게 하고 있다. 피로와 무력감은 투항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군사적 결과는 같다. 때문에 보슬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슬비로 효과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 강한 폭우를 준비하려고 하면 상대방의 태도도 달라진다. 지속적인 보슬비가 필요하다. 군작전에는 심리전도 있고 저강도 전쟁 개념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군사학적 개념이기보다는 사회학적 개념이다. 군인보다는 사회학자가 더 잘한다. 군부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이들이 설자리는 없어지고, 사회학자와 시빌리언 그룹의 힘이 강할수록 군부의 설자리가 없어진다. 케네디대통령이 의도적으로 퍼트린 대게릴라전 교리도 럼스펠트장관이 주도하는 대테러전략도 군사학과 사회학까지 펼쳐진 전략의 스펙트럼에서 사회학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백악관이 군작전에 대해 문외한이란 인식만큼이나 군부 또한 정책에 문외한이란 인식도 미국에선 당연시 되어 있다. 파월의 선배인 프랑크 갈루치가 파월에게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낙태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군부에 대한 시빌리언 그룹의 이해를 상징한다. 남성적이고 속도를 중시하는 군대에게 보슬비는 알고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상대이다. 지속적인 보슬비가 내려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번으로 끝을 봐야한다. 그러고 보니 보슬비에 젖어 몸이 젖어 있다. 더 움츠려 들면 단번에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상태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한뼘 추녀밑에 숨겼던 몸을 꺼내 다시 길을 나선다.

고려산 통신
어제 화도에서 자고 양도를 지나 건평리를 거쳐 외포리로 가고 있었다. 건평리는 1년전 도장리로 이사하기 전까지 2년을 살았던 곳이다. 밤나무가 많은 이곳에서 나는 민통선 평화기행을 썼다. 눈을 감으면 돌이며 풀한포기까지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곳이다. 많은 감회와 추억이 현실로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한사람 밖에 걸을 수 없는 논길을 걷다보니 비에 젖은 진흙길은 그 자체로 빙판이다. 이런길에 지게한짐을 메고 갈때는 굿거리 가락을 흥얼거리며 거기에 맞춰 가라던 말이 생각나 이내 몸을 능청거리며 걸어본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고 서야 진흙길에 찍혀 있는 발자국들이 보인다. 할머니가 신고 지나가셨을 고무신 자국, 멋이 한참들기 시작한 학생의 것일 현란한 문양의 운동화자국, 어색한 양복을 꺼내입고 바지 밑단을 한뼘쯤 걷어올려 걸어가셨을 아저씨의 구두발자국, 그리고 누가봐도 알 것 같은 앳띤 군인아저씨의 워커발자국, 논과 길을 마구 오간 노루발자국까지 오늘 아침의 뉴스가 진흙길 위에 찍혀있었다. 통신은 절박한 사람에겐 지극히 적은 정보로도 소통 가능한 무엇이다. 그리움이든 기다림이든 생존이든 절박한 자에겐 감옥안에서의 제한된 통방으로도 높은 사상과 결의를 소통케 한다. 절박함은 희망을 향해서만 존재한다. 절망과 좌절을 향한 절박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절박함이 있어 문고리를 흔드는 바람도 우연히 들려오는 까치울음도 인과로서 설명되고 해석된다. 절박함은 일상속에서도 우주적 인과의 구성을 가능케 한다. 건평리를 지나 외포리와 황청리를 거쳐 고려산으로 향한다. 고려산에는 미군의 범세계적지휘통신체제(WWMCCS: World Wide Military Command and Control System)에 속하는 통신사이트가 있다. 1950년대 당시 미국은 미소간 우발적인 사고로 인해 핵전쟁이 유발되는 경우를 철저히 방지하겠다는 일념에서 그 해결 방안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범세계적 지휘통제체제가 1962년도에 출현한 것은 이같은 배경에 근거하고 있다. 천정에서 뒷면까지 유선형으로 이어진 차 모델을 지칭하는 fastback 이란 통신체계가 배치되어 있다. 이체계는 수원 백운산의 메디슨사이트를 중심으로 일곱개 사이트에 개별적으로 링크되어 있으며, 미육군의 세계적인 장기간 통신요구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 체계는 후방의 미군지휘소들에 비무장지대를 따라 수집된 대규모의 정보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제공했다. 이들 사이트에서 중심은 용산이 아니라 수원백운산의 메디슨 사이트이다. 언젠가 기름유출사고를 낸 곳이다. 연천의 야월산 화천의 감악산과 함께 강화도의 이곳 고려산도 미육군의 3단계에 걸친 업그레이드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더욱 향상된 기능으로 장비들이 교체되었다. 거대한 정보를 비무장지대를 따라 수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한국에만 배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군이 미군의 철수를 불안해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들 정보 통신 자산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정보와 통신자체가 군사지휘혁명의 핵심임에는 틀림없다. 유고전 이후 평가에서 한 제독은 미래의 전쟁에 대해 ‘앞으로의 전쟁은 누구의 안테나가 더 오래 서 있는가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전쟁사는 통신자체가 결정적인 승리의 요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보는 근 천년만에 출현한 통신분야의 혁신에 해당하는데, 바로 이 전보가 이 같은 갈등 요소를 증폭시켰다. 전보는 유선에 의존하고 있었다. 때문에 전보가 가능하려면 특정 지역에 전보국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전보는 공격보다는 방어에 유용한 형태의 체계였다. 전보선의 설치와 관련된 요소들은(마차 , 유선 높은 기둥,실패등)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이들 전보선을 험준한 지형에 설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전보는 주요 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전략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상대방을 포위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한 여타의 전술목적에서의 전보의 사용은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1850년대 말경에는 전보와 철도의 설치. 운영. 유지를 담당하는 군단이 창설되었는데 이들 군단은 여타 부대와 함께 합동으로 훈련을 실시하였다…
메시지를 전파하는 전파기가 마차에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들 전파기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마차는 정지해 있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사령부가 이동할 때마다 전보의 전송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같은 현상으로 인해 지휘관들은 전선의 부하들보다는 후방과 접촉할 목적에서 전보를 사용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들 일련의 발전과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1861년 당시의 오스트리아 장교는 다음과 표현하고 있다.

본 작가는 프랑스군에 대항해 이탈리아에서 지휘하고 있던 야전군사령관인 헤스가 비엔나에 잇던 규레이와 전보를 이용해 직접 교신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같은 방식으로 군사회의가 부활되지나 안을까 걱정하였는데 이는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이들 방식으로 후방으로부터 통제받는 지휘관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이 같은 지휘관은 전선의 적 뿐아니라 후방에 위치한 또 다른 적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일부는 우연적 요소로 인해, 그리고 일부는 의도적인 요인에 의해 이들 지휘관은 휘하 군사력뿐아니라 독자성을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전보에 의한 폐해를 방지하려면 매우 우수한 수준의 왕자가 국가를 통치 하든 가 추후 문책을 당할수도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본국에서 보내온 훈령을 무시한 채 행동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한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기차와 마찬가지로 전보는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나 전술가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술가들은 이들 전보와 기차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의 경고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군을 동원배치하고 야전사령부와 후방에 있는 최고사령부간의 교신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와는 달리, 전보를 이용해 야전에서 지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에 내재해 있는 ‘안개(FOG OF WAR)란 요소를 전보를 이용해 크게 줄일 수는 없었다. 1866년 프러시아 군이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부터 60여년전의 나폴레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신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서의 지휘, 연경문화사 P181,182)

그 ‘방법’은 참모제도의 창안이었다. 독일군의 참모제도는 독일의 민간사회가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체제로 경도되고 있을 때 군은 오히려 유연하고 민주적인 체제로 틀잡아가는 과정과 함께 탄생했다. 기술과 전쟁수단에 대한 집착 대신 조직이란 요소에서 지휘의 혁신을 이룩한 것이다.

정보와 통신에 대한 또 하나의 교훈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시에 일어났다. 인공위성을 통해 날마다 이라크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미군의 정보망은 어느날 이라크의 탱크들이 쿠웨이트 국경으로 집결하는 것을 목격했다. 파월은 보고를 상세히 받고 그것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려는 의도라는 견해를 일축했다. 그의 군사적 상식으로 봤을 때 이라크가 전쟁을 하려는 것이면 후방에 보급선이 튼튼하게 건설되어 있어야 하는등 기본적인 준비가 필요한데 공격부대만 전방에 배치해 놓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그의 강고한 군사적 상식을 깨고 쿠웨이트를 침공했으며 미국은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었다. 정보의 폭주는 오히려 중요한 정보를 가리게 하며 정확한 판단을 방해한다.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현장을 방문한다든가 하는 일을 하는 대신에 폭주하는 정보와 보고서에 파묻혀 있어야 했다.
정보와 통신을 주도할 지휘자의 가치관 지식과 전통적인 습관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에로 자신을 열어놓으려는 절박함이 없는 상황에서 정보는 오히려 짐이다. 안되는줄 알면서도 집착하고,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린다. 지식을 얻는 것은 좋은 것이며, 가치관을 얻는 것은 더욱 좋은 것이며, 리듬을 얻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 생활화된 리듬으로서의 정보를 상대할 정보는 없다. 절박함과 고통과 인내가 만들어내는 생활의 결은 일반적인 정보체계와 달라 낯설다. 쉬워 보이지만 똑같은 과정을 체험하고 느껴보지 않고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가깝고도 먼 정보가 결이다.

수정 2004.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