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명상 첫날- 역사의 짐. 유엔사2006/06/30 1025

걷기 명상 첫날의 기록

역사의 짐. 유엔사

이시우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이 될 수록 빗발은 더 굵어졌다. 왠만하면 하루 더 있다가 떠나는게 어떻겠느냐는 걱정들이 많았다. 예정대로 하는게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조각배의 항해에도 파문이 일 듯이 염려의 파문이 일어나는 곳은 주위사람들이다. 밤새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떠나가는 길을 막아서기라도 할 듯 하더니 거짓말처럼 떠나기 10분전에 멈추었다. 세상은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변화하기에 객관적 실재라고 하지만 우연히 사람의 의지와 맞으면 참으로 가치있는 변화가 되니 무심한 세상의 변화가 가치를 갖는 것은 뜻을 포기하지 않고 우뚝 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세옹지마의 처세보다 우보천리(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의 우직함에서 주체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바꾸지 않기를 잘했다.


짐을 생각치 못했다. 좀 무거울 거라는 정도를 예상했을 뿐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가장 무리가 가는 것은 발이었다. 마치 발처럼 역사의 짐이 무거울수록 그 하중을 고스란히 받는 것은 역시 민중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짐을 줄이든지 짐과 익숙해지든지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겐 길에다 버릴 짐은 없으므로 짐과 익숙해지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몰려있는 짐들을 좌우와 상하에 편중되지 않고 평등하게 분배해야 했다. 역사의 짐을 줄일 수 없을 때 유일한 방법은 평등한 짐의 분배이다. 고통의 현명한 분담은 어떤 수련보다 사람을 힘있게 만들며, 불평등한 고통의 분담은 고통 그 자체보다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평등은 목표일 뿐아니라 수단이기도 한 것이며, 전략일 뿐아니라 전술이기도 하다. 민족에게 가해진 역사의 짐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른 민족에게 짐을 강요하는 민족에게도 고통은 분담되어야 한다. 걷기명상을 하기 일주일전 나는 미국의 퀘이커교도 두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데이빗과 미뇽부부가 그들이다. 데이빗은 미국사회가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9.11정도가 아닌 더 커다란 고통을 당할때만 다른나라를, 다른민족들을 이해할 능력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오끼나와의 평화공원에 있는 묘지와 워싱턴의 베트남전 기념관을 비교했다. 오끼나와의 평화공원에는 오끼나와 군인과 민간인 뿐아니라, 같은 전장에서 죽은 미군 한국군등 모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베트남전 메모리얼에는 미군전사자들의 명단만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고통만을 생각하고 남의 고통에 눈감는 미국의 가치관이 오늘날 미국을 이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통의 체험이 사람을 자비롭게 할 수 있다. 나의 고통에 둔감하고, 남의 고통에 민감할 때 세상을 비로소 볼 줄 안다. 세상은 어떤면에서 보면 고통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걷기가 힘들어 입에서 단내가 날정도가 되더니 절로 노래가 나온다. 노래가 저도 모르게 그칠 즈음에 다시 걷기는 그자체로 명상이 된다. 고통을 즐길 줄 알고서야 고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광성보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130여년전 6월의 고통을 생각해본다.
무릎꿇고 포로가 되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어간 무명의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것은 세금고지서와 죽을 자유밖에 없었던 암흑의 시절이었다. 나는 당시를 상상해 볼 때마다 자꾸 걸프전 당시 이라크 민중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독재자이긴 하지만 외세의 압제를 더 심각하게 여겨 싸웠던 걸프전과 더 이상 독재자를 위해 외세와 싸우지 않았던 많은 이라크인들에게 전쟁 이후는 어떠했는가? 신미양요에 분기한 민중들은 조정과 외세 두개의 짐중 외세의 짐을 먼저 해결하는데 뜻을 모았으리라. 병인양요에서 프랑스를 물리쳤다는 자신감과 신미양요때 굴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는 결사항전의 비보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발없이 퍼져나간 입소문이 자주의식이 씨앗이 되면서 준비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짐을 분담하는데 단 한번도 평등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던 그들이 자각적 저항을 통해 역사의 짐을 덜고자 했던 그 수고스러움은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까? 그들의 희망은 반외세를 넘어 민족자주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근대적 염원이었으리라. 지금 우리의 나라는 민족자주국가인가? 통일이 되고 나서야 겨우 민족자주국가의 전국적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란다. 유엔사는 아직 한미합의의사록 2항에 의거 군작전 지휘권을 법적으로 가지고 있다. 무력에 의한 통일시 북측 지역은 유엔사가 군정을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영토조항에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항 따위는 유엔사가 있는 한 공염불이다. 이 역사의 짐을 어찌할 것인가. 첫날인데 벌써 발에 물집이 생기고 있었다.

광성보
광성보에 도착했다.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오는 사이 매표소 직원이 출근해 있었다. 지금부터는 매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매표 없이 볼 수 있는 재미가 사라졌다. 광성보를 지나치기로 했다. 수십번이나 와 본 곳이 아닌가. 비가 이젠 본격적으로 온다. 우비까지 입고 덕진진 쪽으로 향했다. 비줄기가 더욱 굵어져 비를 피할 수 있는 버스정류장에 잠시 쉬기로 했다. 광성보에 대해 생각해 뒀던 글을 몇자 적으려고 하는데 수첩이 보이질 않는다. 아뿔사 수첩을 화장실에 놓고 온 것이다. 폭우를 뚫고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내키질 않았다. 기억해서 나중에 다른 수첩에 옮겨 적을까하고 생각도 하다가 아무래도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다. 수첩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돌아오다보니 이길은 미군이 광성보를 침공하던 공격루트였다. 해안방어를 위주로 건설된 광성보가 상륙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상황이 고개마루에서 보니 눈에 선하다. 손돌목 돈대 아래쪽엔 웰빙을 예찬하는 식당과 폔션이 세워져 있었다. 간판에 적힌 상호 ‘동화속으로’… 좋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문득 ‘역사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걷기 명상의 시작으로 삼았던 광성보. 역사속에서 흘리고 온 것이 있는 민족은 반드시 그것을 찾으러 다시 역사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현재를 매번 역사에 투영해 봐야 한다는 것은 스트레스다. 그러나 그 짐을 피한다고 벗어날 수 없다. 결국 다시 찾아내어야 만 해결되는 것이다. 역사는 ‘지금’ ‘ 여기’에서 보아져야 한다. 과거에 알고 있는 지식의 집적으로만 역사를 보는 순간 실천을 추동하는 지식의 힘은 상실되고 전시장속의 화석으로 지식은 남게 된다. 수만번을 봤어도 ‘지금 여기’에서 새로이 보지 않으면 역사는 다시 현실의 발목을 잡는 스트레스가 된다. 어렵게 수첩을 되찾았다. 나는 하마터면 수첩을 분실하듯 ‘지금 여기’에 선 역사를 분실할 뻔 했다. 사진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하듯 역사도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한다.

신미양요와 민군관계 그리고 유엔사
1886년 끝난 미국의 남북전쟁은 링컨의 전시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제국군대로서의 결정적인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헌법에 근거한 문민통제의 원리와 사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5년 뒤 일어난 신미양요는 국내전쟁을 해결한 후발 제국 미국이 아시아로 제국정책을 실시하던 중 일어난 사건이다. 상륙전은 신미양요시 미군이 택한 군사전략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뒤 맥아더 유엔사령관도 한국전에서 상륙전략을 채택했으며, 현재 주한미군의 5027작전계획도 핵심은 북측 지역에 대한 상륙전략이다. 한반도에서 미군은 역사적으로 상륙전을 일관되게 채택해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광성보 전투후 미군이 퇴각한 것은 상륙전 차원에서 초지진으로부터의 보급선이 길어짐으로서 후방이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마침 첨사 이염등이 초지진을 야간에 습격하여 미군선박을 물리치는 일이 일어나자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로저스 함대가 상륙전략차원에서 성공했다 해도 미국의 함대는 전쟁이 아닌 포함외교의 일환으로 신미양요를 일으켰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클라우제비치의 군사이론에 따르면 전쟁의 목적은 정치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봤을 때 신미양요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파탄 시키지 못했고, 조선과의 통상관계수립이란 최초의 정치외교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했다. 로저스 함대의 상륙전에서의 전과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실패를 초래했던 것과 같이,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전의 전과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에 의해 해임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의 이면에는 ‘민군관계’라는 군사정책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민군갈등. 이것은 미국 군부와 백악관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한국전쟁시기 맥아더는 자신이 유엔군사령관이면서도 유엔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나와 유엔과의 관계는 대체로 형식적이었다…나의 사령부와 내가 수행한 모든 것에 관한 전적인 통제는 나의 육군참모총장과 그 참모총장이 통제하는 나의 통신계통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유엔에 보내기 위해 정상적으로 작성한 보고서까지도 국무성, 국방성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유엔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미합참본부사 한국전쟁-상- p115, 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

미국의 민군관계 갈등은 미군전략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동맹군체제 기피현상이다.
1995년 발칸 반도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측의 수석 협상가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은 미군사령관인 레이턴 스미스Leighton Smith가 자신의 사령부를 미국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적 군대로 여겼다는 바를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내게 자신만이 부대의 안전과 복지에 책임이 있으며, 나토위원회가 자신에게 위임한 권한하에서 군사행동의 재량권을 가진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자기나름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나토군의 사령관으로서 브뤼셀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미국을 대표하여 정책을 집행하러 파견된 홀브룩에 집요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는…현재 평화유지와 제한된 형태의 군사개입정책에서 주로 이용되는 동맹군체제는 그 자체적으로 민군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상황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선 자신들이 미군이 아닌 유엔군임을 강조하던 미국이 이라크전쟁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은 유엔군이 아닌 미군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또한 동맹군체계를 지속하기 어려워지는 민군갈등의 수렁에 빠진 미군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
이는 유엔사와 한미연합사와 같은 체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77년 카터의 주한미군철수 정책에 항명했다가 해임된 싱글러브주한미군사령관이나, 99년 클린턴의 코소보전쟁을 반대하는 군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존 틸럴리주한미군사령관이나, 미군개혁의 가장 보수적인 장애물로 평가되고 있는 미 2사단의 존재등은 민군갈등의 오래된 진원지 중의 하나가 주한미군이란 사실을 확인케 한다. 역설적인 것은 용산미군기지 철수와 미군재배치를 반대하는 보수세력과 국회의원들이 미국의 민군갈등을 더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략적 우위는 선공이다. 달리 말하면 의제설정권을 누가 갖는가이다. 전략적 우위를 선점하지 못했을 때, 상대에 대한 공격이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우위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약점을 선공함으로써 나의 우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재 국면에서 민군갈등을 증폭시키고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의제가 유엔사문제이다.
21세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체제가 전반적 위기로 돌진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세계패권을 유지하는 중심축은 급속하게 군사체계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이 군국주의화 될수록 이를 둘러싼 민군갈등은 더욱 격렬해질 수 밖에 없다. 신미양요 당시 지휘선은 아세아 함대였다. 지금의 한미연합사의 지휘선은 태평양사령부이다. 그러나 유엔사의 지휘선은 미합참의장이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지휘선은 갈수록 강화되어온 것이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역사의 스트레스는 눈덩이처럼 불어 유엔사까지 와 있다. 130여년간 우린 무엇을 한 것인가?

사진 설명

이맘때 쯤, 짙은 해무가 밀려온 다음날 건평리 집마당에 서면 햇살이 미쳐 닿기 전에 나뭇가지 마다 걸려 있던 혼무魂霧들이 서서히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곤 했다. 햇살이 그 안개를 걷어 내고야 나무는 다시 나무가 된다. 그 뒤로 가지에선 잎이 나고 꽃이 벌어져 온 동네는 비릿한 향에 몇일간을 젖어 지내야 했다. 그 향에 취한 남정네들은 여인에게 아이를 갖게 했고 그렇게 해서 명년 봄에 아이들이 태어난다고 했다. 밤나무 많은 건평리는 아마 지금쯤 짙은 해무에 잠겨 먼산은 더 멀어지고 파도소리에 실려온 혼무들. 성금성금 가지 마다 매달려 있으리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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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폐리제독이 일본을 개국시킬 때 가장 중요한 목표는 노포크를 출발하여 대서양을 횡단할 경우 유럽국가들이 중국까지 134일 걸리는데 5일 더 걸리는 항로를, 증기선을 이용 태평양으로 향하므로서 단축시킬려는 의도였다..중국과의 조약으로 미국의 면공업 진출 가능해지자 증기선의 중간 석탄저장고 필요했고 그것은 일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