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재조정을 촉구하는 걷기를 결심하며2004/06/19 1210

유엔사재조정을 촉구하는 걷기를 결심하며
이시우

미군을 주제로 한 사진작업을 하면서 걷다가 나는 주한미군문제의 새로운 결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에겐 국경으로 나눠진 한국과 일본이 미군에겐 하나의 전장터일 뿐이란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틈이 나는대로 여건을 마련하여 일본의 미군기지들을 둘러보게 된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한번은 사세보 미해군기지를 둘러 볼 때였다. 기지를 따라 걷다가 밤을 만나 기지가 바라보이는 산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기지 전체에 울러퍼지는 기상나팔 소리에 선잠을 깼다. 군인들이 점호준비등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고 8시가 되자 성조가가 울려퍼지며 성조기가 사령부 건물 앞에 게양되었다. 그 다음은 일본국가와 함께 일장기가 게양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깃대에 푸른 깃발이 소리없이 게양되고 있었다. 바람이 깃발의 잠을 깨우듯 펄럭이게 하고서야 나는 그것이 유엔군사령부를 상징하는 청성기임을 알 수 있었다. 사세보는 유엔군사령부 산하의 기지였다. 유엔사는 세계적으로 한국전쟁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설치되었다. 때문에 사세보는 주한유엔사 산하의 기지인 것이다. 일본에 유엔사의 기지가 있다니…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한유엔사의 후방지휘소에는 일본의 7개 주일미군기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도쿄의 캠프 자마(座間), 요코다(橫田)미제5공군사령부기지, 요코스카(橫須)미해군제7함대기지, 사세보(佐世保)의 미해군기지, 오끼나와의 카데나(嘉手納)공군기지, 후템마(普千間)미해병대기지, 화이트비치미해병대기지등 주일미군의 핵심기지들이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은 유엔사의 이름아래 완벽히 통합된 전투조직이었다. 이는 이미 1951년 9월 8일, 요시다-애치슨 교환서한을 통해, 유엔회원국이 극동에서 유엔활동을 하는 군대를 일본에 둘 수 있고, 일본이 시설과 역무를 제공하도록 하는데 합의함으로써 법적으로 공식화된 지 오래이다.
얼마전 미일유사법제가 통과되었지만 이 법만으로는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 전쟁에 즉각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요시다-애치슨각서는 미일의 한반도 전쟁에의 즉각 개입을 보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지역의 전쟁과 달리 한반도의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결의를 끌어내기 위한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는데 이는 정전협정에 의해 아직까지 유엔의 결의가 유효하고, 여전히 유엔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엔사의 작전지휘에 따라 즉각적인 전쟁이 가능한 것이다. 주한미군이 한강이남으로 완전히 철수하면 미군은 북의 직접공격대상에서 벗어나므로 60일간 미국 대통령이 임의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73년 미의회의 ‘전쟁권결의’는 무효가 된다. 그러나 유엔사가 존재함으로 해서 미국은 유엔사령부를 움직여 얼마든지 즉각적인 전쟁에 돌입할 수 있다. 94년 6월 15일 백악관에 의한 한반도에서의 전쟁시도는 미군이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도 않았고, 한미연합사의 통수권자인 한국과 미국대통령의 협의도 없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한국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전쟁을 형식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는 유엔사의 존재이다.
96년 한미연합사가 발행한 연합/합동작전용어집에 의하면 한미연합사령부내에 유엔군사정전위는 스텦이 전혀 없는 일개 독립부서로만 존재한다. 누가봐도 78년 한미연합사 창설과 함께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은 모두 한미연합사로 이양된 듯 하다. 그러나 ‘한미연합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교환각서’에는 “1954년 서명된 한미합의의사록 2항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약정이며, 또한 동 약정은 한미연합군사령관이 미군4성 장군으로서 국제연합군사령관 및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임하는 동안 효력을 갖는 것으로 이해함”이라고 되어 있다. 김명기 교수에 의하면 이는 국군을 유엔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두도록 한 한미합의의사록 2항의 규정을 받고 있으며, 유엔사령관을 겸임하는 한에서만 한미연합사사령관의 작전권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미연합사사령관은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지만, 유엔사령관의 직함으로는 여전히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엔사가 해체되었다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한국정부의 작전지휘권내에 있다는 말이 타당하겠지만,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유엔사는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미군사동맹에 대한 한국군부의 의존심은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면이 있다. 한미연합사의 해체가 한국군부로서는 심리적 공황상태를 불러올 주제이지만, 유엔사의 해체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북의 군사적 점령을 상정하고 있는 한국군으로서는 북 점령 후 군정을 실시해야하는 단계의 시나리오에서 심각한 문제를 발견한다. 북의 점령주체는 한국군이 아닌 유엔군사령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미연합사와는 달리 유엔사 해체문제는 미군과 국군에게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관계의 충돌을 야기할 주제이다. 한편 한국과 일본의 평화단체들에게 있어 유엔사는 다른 주제와 달리 ‘연대’가 아닌 ‘연합’ 차원의 통합을 요구하는 공통의 문제라는 이해관계가 있다. 한,미,일의 평화세력에겐 갈수록 전략적 우위를 가지게 하는 반면, 군부세력에겐 갈수록 갈등을 증폭시킬 주제인 것이다.
유엔군사령부. 그것은 한미일 군사동맹의 최대관건이자 가장 약한 고리이다.

유엔사와 일본의 관계
1950년 7월 1일 일본의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군의 출동이 유엔의 경찰조치인 이상 일부의 사람들이 점령군(주일미군)의 명령의 따라 전투행위 등에 종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1950년 7월 3일의 차관회의는 한국전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방침을 결정한다.
① 미군의 군사력의 발동에 협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② 장래 일본이 유엔에 가맹하기 위하여서라도 유리하다. ③ 따라서 헌법과 법률의 범위 안에서 필요한 행정조치-선박, 육상등의 수송력의 증강, 전화통신의 가설, 해상보험의 임시조치 및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위의 방침 중에서 ③은 오늘날 거론되고 있는 신가이드라인의 원조인 셈이다.
또한 1951년 9월 애치슨-요시다교환공문을 통해 한국내 유엔행동에 참여하는 군대에 대해 시설 및 역무를 제공키로 합의한데 기초하여 6개 기지를 유엔사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 기지는 다시 [일미안보조약]에 묶여 작전출동시 사전협의가 필요한 여타 주일미군기지와 달리 사살상 자유사용이 보장되어 있다. 1954년 2월 19일, 미국과 일본은 `유엔군 지위협정’을 체결하여“유엔군의 합동회의를 통하여 일본정부의 동의를 얻어 미·일안보조약을 근거로 미국은 일본의 시설 및 구역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유엔사에 대한 기지제공의무는 유엔군철수 90일 이내에 종료하도록 되어있어 유엔사가 해체되면 유엔군의 일본내 기지 사용권도 소멸된다. 75년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유엔사해체가 결의된 이후 미국으로서는 일본내 기지사용권의 문제를 심각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언제가는 닥칠 유엔사해체에 대비하여 일본과 함께 유사법제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98년 신가이드라인의 부속협정으로 체결된 미일 물품·용역 상호제공 협정법(ACSA)에 의해 유엔사가 해체되더라도 미군의 일본내 기지 사용 문제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었다. 이들 일련의 과정은 일본이 한국전쟁 당시부터 유엔사에 대한 협력이란 미명하에 다시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과정을 보여주며 이들이 주한유엔사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유엔사의 작전지시에 따라 주일미군기지의 무력이 자동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엔사는 누구나 명목상의 기구로 이해하지만 실제 전쟁이 발발할 시에는 남한과 일본의 미군과 한국군, 자위대 일부까지도 전쟁에 참여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미안보조약 제6조는 `일본국의 안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극동에 있어서 국제평화 및 안전의 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육군, 공군 및 해군이 일본국에서 시설 및 구역을 사용토록 허용한다`라고 되어 있다. 일미방위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달리 안보의 대상지역이 `일본본토`에 머물지 않고 `극동`을 범위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상호방위조약만으로 한반도에서의 즉각적인 전쟁은 가능치 않다. 어쨌든 유엔 안보리의 결의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엔사의 존재에 의해 유엔안보리의 결의 과정없이 한반도의 즉각적인 전쟁에 미군과 자위대는 동원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일미방위조약과 요시다-애치슨교환공문에 의해 일본자위대는 유엔사의 지휘에 따라 한국전쟁에 즉각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유엔사는 가공할 무력을 행사할 권한을 지닌 셈이다. 위법적 요소를 가지고 탄생한 유엔사에게 이러한 비정상적인 무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유엔사의 위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일본 평화운동 세력과 한국평화운동세력과의 그간의 연대는 유엔사 해체 문제에서만큼은 연대가 아닌 연합적 조직체로 발전되어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유엔사 해체를 위한 걷기
나는 이러한 발견을 여러번 호소를 담아 글을 통해 발표했다. 주한미대사와 부대사를 만나는 기회가 있을 때나 청와대의 NSC담당자들 만나는 자리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마크민튼 주한미부대사는 유엔사해체 문제에 대해 내가 직설적으로 묻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어떤 체제든 50년간 변치 않고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다. 그래서 우리도 주한미군재배치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유엔사 문제에 대해 한국민은 잘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앞부분은 긍정적인 메시지로 해석되며 뒷부분은 부정적인 메시지로 해석된다. 그러나 외교관으로서 유엔사해체를 공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그의 말에서 상수는 후자이고 변수는 전자이다. 즉 미군정책의 변수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미 주한미군재배치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판문점을 지키는 유엔사경비대의 임무를 한국군에게 전면이양하는 방안을 논의한 적 있다.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발표는 때에 따라 이들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 질 수도 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김구선생이 광복군을 꾸려 국내 진공을 시도하는 순간 일본의 항복 발표가 있었고, 이 역사적 실기는 해방정국에서 민족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세에 운명을 맞겨야 하는 과정으로 점철되고 말았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힘이 아닌 미국의 자체 논리에 의해 어느날 유엔사해체 발표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이미 유엔사를 유지할 명분을 잃은지 오래다. 또한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원칙에 입각해서 볼 때 미국에게 있어 유엔사는 기형적인 구조임에 틀림없다. 유엔헌장에 유엔의 군사력은 유엔군사참모위원회에서 지휘하도록 하고 있고, 미국은 80년대 골드워터-니콜스 법안에 의해 합참의장을 이곳에 파견하도록 되어있다. 유엔사는 현재 미국 대통령이 아닌 미합참의장이 지휘하도록 되어있다. 만에 하나 합참의장이 대통령의 결정에 앞서 행동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맥아더처럼 말이다. 이는 미군재배치 문제보다 훨씬 상위의 정책문제이다. 최근 미국내에서도 유엔사해체이야기가 흘러나왔다가 들어간 것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유엔사는 한미연합사에 비해 한미동맹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유엔사해체요구는 한미군사동맹과 일단 별개로 갈 필요가 있다.

어쨌든 고민이 많아졌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5월 어느날인가 때아닌 봄 태풍이 불던 밤이었다. 서울에서 강화로 들어는 왔는데 이미 버스운행은 다 끝난 상태였다. 차가 다니지 않는 농로를 따라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바람은 과연 세찼다. 몸을 45도 정도 기울이고서야 바람에 맞서 걸어가는게 가능했다. 남풍이었다. 대양을 지나 이곳까지 불어오는 바람이다. 수천년동안 실크로드의 3대 간선중의 하나인 해로를 가능하게 했던 문명과 교류의 바람결이다. 한순간도 같지 않았지만 끝없는 반복은 문명교류의 바람결을 만들었다. 시속으로 뺨을 스쳐가는 바람의 결을 잡을 수는 없지만 끝없는 스침이 결을 만들 듯, 그리고 그 무수한 스침중에 한사람과 뜨겁게 만날 수 있었듯 나 또한 그렇게 해야하리라 생각했다. 바람처럼 걷기로 했다. 강화를 떠나 유엔사가 관할하고 있는 휴전선을 따라 고성까지 걷고, 거기서 다시 동해안을 따라 부산까지 가서 일본의 사세보기지로 건너가 거기서부터 동경까지 걸어 요코스카, 자마, 요코다 3개의 유엔사 기지를 돌고, 오끼나와로 내려가 카데나 후템마 화이트비치 기지를 걸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유엔사본부가 있는 용산기지까지… 3000킬로가 넘는 거리이다. 서울과 부산을 7번 넘게 오갈 정도의 거리이다. 간단치 않았다. 몇일동안 ‘유엔사 해체’를 위한 걷기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그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 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역시 반대보다 더한 것은 무관심이다. 나는 절대 무엇을 충동적으로 결정하거나 준비없이 추진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 일은 왠지 급하다. 오랫동안 미군을 관찰해오면서 얻어진 직감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몇일 고민하는 사이 나는 또 밤길 바람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우고 간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매달리지 않고 홀연히 와서는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 그것이 바람결이다. 바람과 함께 나는 다시 결심할 수 있었다.
6월 20일경 나는 강화 집을 출발한다. 별일이 없다면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이집에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