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14일째-관광으로 유엔사가 무너지고 있다.2004/11/15 1125

관광으로 유엔사가 무너지고 있다.

이시우

강원도의 힘
서해인 강화에서 출발한 걷기명상은 오늘 동해의 끝인 고성에 도착하는 것으로 한 매듭을 짓게 됐다. 동해바다를 보며 서해바다와는 다르다는 말을 실감한다. 서해가 얕고 탁한 바다라면 동해는 깊고 청정한 바다이다. 서해의 갯벌이 바다와 육지의 중간이 아닌 독특한 생태계이듯 동해에는 석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호와 갯벌은 역시 다르다. 동에서 서로 갈때는 몰랐는데 서에서 동으로 가다보니 새로운 느낌을 갖는다. 서쪽이 비장하다면 동쪽은 즐겁다. 서비동락西悲東樂이라고나 할까? 서쪽의 걷기명상은 강화로부터 철원까지 역사와 문명이 압도했다면 동쪽의 걷기명상은 자연이 압도했다. 철원에서부터 나는 길가에서 산딸기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이 제철이지만 사태가 난 듯 한걸음마다 내 앞에 산딸기가 나타났다. 식당이 없는 시골에서도 산딸기 덕분에 허기를 면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진부령을 넘을 때는 새로운 변종인 듯한 산딸기도 발견해서 위치를 기록해 두었다. 먹으면 요강을 깨뜨린다는 산딸기를 그리 많이 먹었지만 요강대신 휴전선이나 깨뜨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혼자 빙긋이 웃기도 했다. 인진쑥도 철원부터 눈에 띄었다. 인진쑥은 그 독특하고 오래가는 향 때문에 걷기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몸의 활기를 주는 식물이다. 통일맞이에서 휴전선통일대행진을 할 때 우리조원이 인진쑥을 알려줬다. 우리조원들은 시간만 나면 코에다 인진쑥을 대고 다녀서 나중엔 원래 조이름을 바꿔 약발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쨌든 강원도라고 해서 왜 비극과 비장미가 없을까마는 나는 이 자연의 넉넉한 즐거움에서 비극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을 본다. 역사는 이제 거시사 뿐아니라 미시사도 연구가 활성화 되고 있지만 역사는 아직도 무겁다. 그리고 주로 비극이 많다. 공부해야 하고 교훈을 얻어 미래의 방향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6월항쟁과 같은 숭고한 즐거움은 많지 않다. 자연과 역사와 문명이 통일될 때 즐거움은 최선이리라 생각한다. 논어의 공자님 말씀이 적합하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당포함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고성 거진리에 당포함 전몰 전적비라는 것이 세워져 있다. 서해교전이 한국전이래 최대의 교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67년 당포함 전몰사건이 있었다. 연평도와 마찬가지로 북방한계선을 넘어 조업하려는 어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벌어진 전투에서 남측의 당포함이 북측의 실크웜 이라는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이다. 1999년 연평해전 때문에 북방한계선이 대중에 알려 졌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사회과 부도에 서해상의 백령도까지 휴전선이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이 휴전선을 넘어온 것으로 이해했고 그럴만 하다고 까지 생각했다. 바로 이 북방한계선이 서해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동해에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바로 이 당포함때문이었다. 당포함은 경남 진해에서 출동하는 배인데 한번 출동근무하면 일주일 이상 근무하기도 하는 배였다. 북에는 당시 2대의 함정이 항상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한다. 최근 금강산을 갈때 보니 북 함정은 한 대만이 바다에 떠 있었다. 연평 해전 당시 북이 67년 처럼 해안포를 발사했으면 참수리호 역시 당포함처럼 됐을 것이다. 북의 교전수칙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79명의 인명피해(전사39, 전상40)가 발생했다. 어쨌든 이 사건에서 북방한계선을 만든것도 일방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도 유엔사라는 사실을 간과 해선 안된다.

동해의 북방한계선
작년에 처음 금강산 관광 뱃길에 올랐을 때 내 관심은 온통 동해 북방한계선과 남북간의 함정과 북의 군사 시설들이었다. 배는 육지를 멀리하고 공해상으로 나가서 다시 북으로 접근해 갔다. 국제 해양법에 공해라는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생각했다. 정전협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도 공해가 있어 남북은 얼마든지 교류가 가능한 것이다. 유엔사 해체는 북방한계선 문제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왜냐하면 북방한계선은 남북이 대치하는 것 처럼 자주 묘사하지만 유엔사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것이고 이것을 해제하는 현실적인 주체도 유엔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유엔사가 아닌 국방부가 나서서 북방한계선의 군사분계선으로의 고착화 논리를 펴고 있다. 이 논리는 천안대 김명기 석좌교수의 논문에서 최초로 등장한 이래 국방부의 공식논리로 채택된 듯 하다. 아직까지 유엔사의 공식 입장은 나오지 않고 있다. 어쩌면 국방부와 지루한 실강이를 하는 것 보다 유엔사와 직접 담판을 짓는 담판식 협상이 더 효과적인지 모른다. 그것은 실세와의 협상이란 원칙에도 부합한다. 유엔사의 해체는 이 모든 문제를 원점에서 재 검토할 기회를 제공하겠지만 그 이전에는 유엔사와의 실세 담판 같은 것이 이루어지도록 여론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금강산 뱃길 관광 살리기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동해 북방한계선이 사라진다면 공해에서 연안으로 배의 항로를 단축함으로써 육로관광을 하게 된 비용문제를 일정부분 해결할 수 있으리라.

관광은 정치
나는 설봉호가 장전항에 들어설 때 감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전항은 한눈에 봐도 지리군사적 요새였다. 러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쓰시마해전시 일본의 도고제독함대가 출동했던 사세보에 비견될만한 요새이다. 일부러라도 숨겼어야 할 장거리포가 잔전항에서 금강산가는 길 오른편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봐도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란 글발바위가 장전항을 내려다보는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 것을 봐도 그러한 생각은 설득력을 얻어갔다. 관광을 위해 장전항을 내어주면서 북의 군부를 설득해낸 정치적 권위와 힘에 대해서도 생각케 했다. 장전항의 군사적 가치를 이해한다면 북이 돈 몇푼 벌자고 금강산을 열어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6.15선언을 잘 보면 1항과 2항을 제외하면 관광과 교류사업이다. 김대중대통령은 관광이 곧 정치라는 사실을 평화학적 토대와 남쪽의 현실로부터 어렵지 않게 체득하고 있었을 것이며 김정일 위원장은 젊은 시절 사상사업의 일환으로 여행관련 사업에 대한 일대 개조에 손을 댄 바가 있었다. 관광이 정치라는 화두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전제된 대표들이었기에 관광사업에 대해 합의 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유엔사 해체 문제도 관광의 정치적 요소로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유엔사는 전쟁의 산물이다. 역사의 가장 깊은 비극이 전쟁인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비장함에서만 찾으려는 것은 구도가 좋지 않다. 1차원의 문제를 풀 때는 2차원적 시각에 필요하다. 비극의 역사로부터 비장감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1차원적 출력이다. 이 비장감을 한차원 높은자리에서 전망하기가 필요하다. 2차원적 시각은 즐거움이다. 관광은 유엔사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비장감을 품어안으면서 뛰어넘을 수 있게 할 2차원의 즐거움이다. 관광도 상품이다. 값싸고 질좋고 구미에 맞아야 잘 팔린다. 경제 저해요소가 있으면 국가는 그것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막히지 않고 돌아간다.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다. 별 이유를 다 대도 궁극적으로 유엔사가 저해요인이다.

금강산 뱃길관광을 살리자는 운동의 내용중의 하나를 보면 금강산뱃길관광이 동해에서의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막아왔다는 것이다. 왜 똑같은 북방한계선이고 어부들이 어로활동을 하는 곳인데 서해에선 교전이 일어나고 동해에선 일어나지 않는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금강산 뱃길관광이라고 생각한다. 동해의 평화적 상상력은 평화적 현실로 전화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노골적인 전쟁이 아니라면 사소한 충돌이나 소규모 국지전에 대한 기획은 억제된다. 즐거움의 힘으로 비극의 역사를 뛰어넘기. 유엔사 해체에도 적용될 공식이다.

2004.11.15 추가
1972년 4월 17일 내무부장관부령 제 109호 선박안전조업규정(Regulations for the Safty of Shipping Operations)에 의해 특별해역이 서해와 동해 두 수역에 설정되었다. 동해의 경우 북위 37도 27분과 38도 30분 사이의 위치에 울릉도 북단과 같이 놓여 동서 150해리, 남북 74해리에 걸쳐 있다.(朝日新聞 1975년 10.29 조간 1면에 지도가 실렸고 미국 CIA의 한국해양분쟁 지도5(1978년판)에 실려있음)
각 수역의 외측경계는 한국이 주장하는 최대한의 해상경계선인 평화선까지 확장되어 있다. 이 수역설정의 가장 큰 목적은 한국의 어선들이 북한에 의해 피납되는 것을 막고 북측 간첩의 해상침투를 막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다. 따라서 안보수역(Security Zones)이라 칭해지기도 한다.(한국과 해로안보 법문사 p571)
이는 1973,1974,1976,1978,1980년에 개정되었다.
북은 1977년 8월1일 인민군최고사령부이름으로 ‘해상경계선’을 설정한다고 선언하였다. 그 적용 범위는 동해에는 50해리, 서해에는 경제수역 경계선으로하며 규제 내용은 군사경계선 구역 내의 수상, 수중, 공중에서 외국인, 외국 군용함선, 외국군용비행기의 행동을 금지하며 민용선박, 비행기등은 사전합의 또는 승인하에서만 항행 및 비행이 가능하고, 민간선박과 항공기라도 군사적 목적을 가진 행동과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활동은 금한다는 것이다.

당포함사건 이후 69년경 마차진리 주민중 어민 이주시킴, 농사만 가능케 됨, 마차진리가 38도 30분선 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 그뒤 어민요구로 38도 33분으로 올라갔고, 북방어장의 경우는 38도 35분까지 올라감
nll은 통일전망대로부터 4마일 밖에 북의 연안포사정거리를 고려하여 계단식으로 설정되엇다고 함
68년 당시 강원 도지사의 말에 의하면 원산앞까지 해군배를 대동시켜 어선을 보냈다고 함 당시 북에서도 이를 굳이 문제삼지 않음.
납북어부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민감함 과거를 무용담처럼 말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임
당포함 부함장 (70세)도 당시 상황 말하기를 거리고 해군 정훈쪽 허락을 맡고 오라고 할 정도, 해군에서는 인권위등에서 자꾸 문제삼아 말 그들이 보는 앞에서 3년전(2001년경)자료를 소각했다고 함. 당시 납북됏다거 조합장까지 햇던 분의 경우 연좌제 등 아무피해 없엇는데도 찾아오지 마라 손짓. 어민 팔아 승진한 경찰있다고 비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