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15일째-유엔사해체와 미군전략의 약한고리2004/07/05 1027

유엔사해체와 미군전략의 약한고리

이시우

리듬

비오는 사구 끝 철책선 근처로 새 한마리가 이리저리 오간다. 어디로 가시려는가? 검은 휘장을 두르고 눈물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길을 나선다. 마음을 다잡고 미리 신발이며 옷을 적시니 이제는 빗길 걷기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태풍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는 사람들을 집안에 묶어 놓고 있었고 차들이 적어 차 때문에 긴장할 일도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중요한 것은 리듬이다. 리듬이 몸에 붙어 있으면 수를 뻔히 알면서도 대적을 못한다. 태껸을 배울때의 이야기다. 태껸의 리듬은 기본이 3분박이다. 쿵푸나 가라테는 2분박이어서 택껸의 단순한 동작을 뻔히 알면서도 쿵푸가 택견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보다 나의 강점을 리듬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미국의 군사전략을 공부하다 보니 느끼는 것인데 자신보다 상대가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인가에 기초해 있다. 즉 공포에 기초해 있다.

“군사전략의 근본적인 문제는 적군은 우리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적은 상대방이 약한 곳을 공격하거나 상대방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종류의 전쟁을 하려 할 것이다.”(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나?Making Strategy.p109데니스드류,도널드스노우.연경문화사)

그렇다면 미군의 약점을 이용해보자. 가장 근본적인 미군의 모순은 민군 갈등이다. 다시말하면 백악관과 군부의 갈등이다.

민군관계의 갈등

미군의 전략을 통찰하는데 있어 중심고리는 민군관계의 권력갈등문제이다. 가깝게는 이라크전도 민군권력갈등의 산물이다. 이라크전의 원인을 석유나 미국의 세계패권 음모와 연관시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이미 이라크의 석유산업은 미국에 의해 장악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미국이 이라크 때문에 냉전이후 유지 되어온 세계패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원인은 질문의 반론에 대한 답변에 속수무책이다. 오히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민군관계의 갈등 즉 백악관을 중심으로 하는 문민통제집단과 전쟁수행에 정치인의 개입을 금기시 하는 군부간의 갈등이다. 이라크전은 맥아더로부터 와인버거, 파월에 이르는 군부세력과 트루먼, 덜레스로부터 럼스펠트에 이르는 민간 정치인 집단간의 권력투쟁에 직접적으로 기인하고 있다.

한국전에 대한 대 논쟁시 상원청문회에서 조지마샬 국방장관은 말하였다.“맥아더 장군은 미국이 설정한 정책과 달리 행동해왔음이 분명하다. 즉 일반적으로 전역 사령관에게 부여된 지휘기능이 최고위 의사결정권한 이상으로 행사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크게 제기되었다.”
30년 후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였던 리지웨이 장군은 바로 그러한 말을 상기시키면서 회고하였다.“그 이후 어떠한 전역사령관도 최고 의사결정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베트남전쟁시 미국과 그 적인 북베트남 지휘관에 비해서도 분명히 비대칭적 사실로 나타났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그의 대등한 위치의 북베트남 사령관인 지압장군을 자주 보았다. 그러나 사실 미국의 지휘체계상에서 볼 때 지압은 최소 5명에 상당하는 인물이었으며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그중 한사람의 역할도 수행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베트남의 야전지휘관일 뿐이었다. 그는 호치민 철도의 공중공격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으며 베트남의 영해밖에서 수행되는 해군작전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다.
(미국의 걸프전 전략 On Stratege 2 A CRITICAL ANALYSIS OF THE GULF WAR p276~277 해리섬머스 자작아카데미)

문제는 이러한 군부 특히 육군의 판단이 미국의 문민통제원칙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듯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브람스장군의 후임 육군참모총창 웨이언드장군은 설명했다. “베트남전은 미군과 국민 사이의 특이한 관계의 재확인이었다. 미국민이 그들의 개입에 위험부담을 안고 또한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한다는 점으로 볼 때 미군은 진정 국민의 군대였다. 군이 관계하는 것에는 미국민도 관계했고 미국민이 그들과의 관계를 잃었을 때 계속 군을 관계시키려 애쓰는 것은 허사였다. 최종적으로 보아 미군은 미행정부의 군이라기 보다는 국민의 군대다. 그러므로 군은 가볍게 행동할 수가 없다. 군의 행동이 필요한 만큼 중대한 이해가 달려 있는 것이라고 국민적 합의가 있을 때에만 행동할 수 있다.” (위의 책 p91)

와인버거원칙

1984년 11월 태평양에서 맥아더 장군의 수하에 있었고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던 캐스퍼와인버거(Caspar Weinberger)국방장관은 미군의 무력사용에 대한 6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이원칙은 국방부의 기성세력 내부에서는 거의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이 6가지 원칙들은 기본적으로 민간통제보다 민과 군의 엄격한 구분을 중시하는 민군 ‘정상’이론을 구현하고 있다.
1. 미국은 국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해외에 병력을 파견해서는 안된다.
2. 일단 우리가 전투병력을 주어진 상황에 투입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을 내리면, 승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의지가 없다면, 애초부터 어떠한 병력이나 물자도 투입해서는 안된다.
3. 해외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을 내리며, 분명하게 정의된 정치적, 군사적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군대가 분명하게 정의된 목표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임무수행에 꼭 필요한 병력을 확보해서 파견해야 한다. 클라우제비치가 밝혔듯이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리고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계획 없이는 아무도, 적어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4. 우리의 목표와 투입된 병력의 규모, 구성 및 배치 간에 존재하는 관계는 지속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조정되어야 한다. 전쟁 동안 여러 가지 조건과 목표는 예외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조건과 목표가 바뀌면, 그에 따른 우리의 전투 요구조건도 바뀌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반복적으로 답함으로써 항상 우리의 위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 전쟁은 국익에 부합하는가?” “국익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 하고 무력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만약 그 대답이 “예”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한다. 만약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5. 미국이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기 전에 미국 국민들과 의회 의원들도 지지할 것이라는 이성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6. 미군을 전투에 파병하는 일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와인버거 원칙은 거의 지키기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무력사용에 대한 지침으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의 이상적인 원칙으로 이후의 많은 정치지도자들과 군 지휘관들이 와인버거 원칙을 신봉했다. 1990년대에 은퇴한 4성장군인 호웰 에스테스(Howell Estes)장군은 한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장교시절 나는 그 복사본을 구해다가 10년 동안이나 내 서류가방에 문자 그대로 달고 다녔다. 당시에는 그게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맨 처음 그것을 읽었을 때는 ‘이런, 이렇게 단순한 것을’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로 극적인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마침내 깨달았다….민주주의를 위해 군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www.pbs.org/wgbh/pages/frontline/shows/military/etc/script.html)

파월의 의미

현재의 민군갈등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키는 요소는 86년 의회에서 통과된 골드워터 니콜스 국방부재조직 법안이며, 이 법안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획득하게 된 걸프전 당시 합참의장인 파월이다. 걸프전을 통해 명성을 획득한 소위 파월 독트린은 실질적으로 군에 대한 문민통제의 거부로 나타났다.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합참의장이었던 콜린파월은 ‘압도적 무력 overwhelming force’을 골자로 하는 자신의 지론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당한 무력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6년 의회는 합참과 합참의장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이러한 원칙들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때 이후로 미국의 민간인 지도부는 한명의 주요 군사보좌관인 합참의장이 나머지 모두를 압도하는 상황이 도래하고, 그의 뒤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합참이 포진하게 된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군사문제에 관한 전문적인 자문을 구할 곳이 한 곳 밖에 없게 되고, 합참의장은 공식적으로 군 명령계통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에 대한 군사적 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명령을 다시 군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침내 ‘정상’이론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 p309엘리엇코언.가산출판사)

민간과 군부의사이의 주요쟁점들, 즉 전쟁을 해야하는지, 어떤 계획을 채택해야하는지, 스커드미사일을 제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등은 파월이 중간에서 모두 처리해 버렸다. 민간인 통제의 불확실성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가서야 분명해졌다. 당시에는 두가지 중요한 결정, 즉 전쟁을 언제 그만둘지와 정전협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내려져야 했다. 하지만 두가지 경우 모두 군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월은 대통령이 제시한 승리의 조건이 완전히 충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정전 권고안을 냈다. 그리고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했다. 그러나 민간인통제론자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대통령이 전쟁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 해석은 소극적이고 편협했다. 대통령의 전쟁 목표를 담은 공식적인 성명서에도 종전의 이유로서 쿠웨이트의 원상복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내용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분명히 언급한 목표이외에도 다른 불분명하고 명시되지 않은 목표가 있었다. 우선 이라크가 보유중인 대량살상 무기의 파괴와 정권 교체였다….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목표는 분명히 사담 후세인의 축출을 의미했다.
(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 p320엘리엇코언.가산출판사)

현 부시정부에서 파월은 가장 두드러진 군부인물이면서도 제대후 10년 이내엔 국방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한 문민통제 원칙에 따라 국무부 장관이 되었고, 전투 경험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군사혁신을 강조하는 럼스펠트가 두 번째로 국방장관직에 취임했다. 86년 골드워터니콜스법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전쟁을 주도한 럼스펠트는 파월과 계속 충돌했다. 아프간전쟁에서 전쟁목표로 탈레반정권의 전복을 포함시키는 문제에서 갈등했고, 이라크전쟁에서도 파월은 전쟁목표를 대량살상무기에 초점을 맞췄고, 럼스펠트는 후세인정권 전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음을 시인한 것은 파월의 기준으로 볼 때 일관성을 가진 행동이지만 부시정부의 전쟁목표 자체를 부정한 행동으로 심각한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국방비를 지출하는 군사대국 미국에게 있어서 군부는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다. 군이 전쟁에서 정치인의 개입을 반대하는 민군정상이론이 힘을 얻어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군부의 정치화를 가져오고 있다. 대통령후보가 선거에서 군부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통과의례가 되었다.
군의 장교들이 무력사용을 포함한 정부의 여러 정책에 대해서 불만사항을 언론에 흘러 보내는 일은 이제 관행화 되었다. 1999년 유고전에 대한 군부의 노골적인 반발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걸프전과 그 이후에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에서 군의 ‘조언’은 더 이상‘조언’이 아니었다. 이는 민간인 지도부에게 여러 가지 대안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단일안을 의미하기도 했다. 미국의 민간 지도자들은 군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에서 부시행정부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데 대해 비판했던 클린턴 행정부는 1992년 양 지역에 미군이 개입하기 위해서는 약 40만명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군의 보고를 받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정작 미군이 전쟁에 투입되었을 때 군부와 정치권과의 공조나 접촉은 거의 없었다.우드워드에 따르면, 체니와 파월은 서로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의견이 달랐다.

동맹군기피현상

미국의 민군관계 갈등은 미군전략에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동맹군체제 기피현상이다.
1995년 발칸 반도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측의 수석 협상가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은 미군사령관인 레이턴 스미스Leighton Smith가 자신의 사령부를 미국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적 군대로 여겼다는 바를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내게 자신만이 부대의 안전과 복지에 책임이 있으며, 나토위원회가 자신에게 위임한 권한하에서 군사행동의
재량권을 가진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자기나름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국을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나토군의 사령관으로서 브뤼셀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미국을 대표하여 정책을 집행하러 파견된 홀브룩에 집요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는…현재 평화유지와 제한된 형태의 군사개입정책에서 주로 이용되는 동맹군체제는 그 자체적으로 민군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상황을 조성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레이턴 스미스의 말은 한국전쟁시기 유엔군사령관이면서도 유엔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음을 토로한 맥아더의 불만을 연상시킨다.
또한 걸프전의 법적성격을 둘러싸고 유럽 특히 프랑스의 한국전 당시 유엔사와 같은 유엔차원의 군사적강제조치라는 견해에 대해 미국은 독자적인 자위권행사일 뿐이라는 견해와도 연관된다. 한국전쟁에선 자신들이 미군이 아닌 유엔군임을 강조하던 미국이 이라크전쟁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은 유엔군이 아닌 미군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또한 동맹군체계를 지속하기 어려워지는 민군갈등의 수렁에 빠진 미군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 파월은 “체니가 이라크를 알 카에다 조직과 연계시키려고 지나치게 무리했으며 부정확한 정보를 사실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파월은 “체니와 그 측근들-핵심보좌관 루이스 리비, 국방부 부장관 폴 월포위츠, 국방차관 더글러스 페이스 그리고 파월이 페이스의 ‘게슈타포’로 부른 요원들-은 별도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네오콘이 부시정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얘기였다.그 결과 부시는 이라크전을 결심하면서 파월 장관에게 사전의견을 묻지 않고 전쟁계획도 사후 통보할 정도로 ‘왕따’시켰다고 우드워드는 주장했다.

럼스펠트

이라크 전쟁의 프랭크스 사령관은 비록 지상전을 신봉하는 전통적인 군인으로 훈련을 받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공중전의 위력을 실감했던 터라 럼즈펠드 장관이 첨단기술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그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럼즈펠드 장관과 프랭크스 사령관은 이때부터 잇단 작전계획 수립 회의를 통해 서로의 힘과 성격을 조화시켜 나가기 시작했으며 종종 함께 식사하면서 교분을 다졌다.럼즈펠드와 프랭크스 사령관의 잇단 작전 수립회의에 거의 모두 참석했던 피터페이스 합참 부의장은 럼즈펠드 장관이 프랭크스 사령관에게 자기 임무를 모르거나 전문적이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설정한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자기와 잘 지낼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항상 요구사항이 많았었다고 전했다. 럼즈펠드 장관은 이같은 회의를 통해 프랭크스 사령관에게 조지 w.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민간 지휘부가 보다 공격적인 사령관을 원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켰으며 프랭크스 사령관은 첨단기술을 접목한 군사작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이라크전은 군사적으로 문민통제의 원칙을 확인시키려는 강력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파월은 이라크 전이 잘못된 전쟁임을 시인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갈등은 더 깊어졌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이라크전쟁 개전 당시 자신이 미국 중앙정보국(CIA)등 정보당국들이 제출한 잘못된 정보를 믿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던 도중에 한 보좌관이 인터뷰를 방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16일 순반중이던 요르단에서 위성통화를 통해 미국 NBC방송 프로그램인 ‘Meet the Press’와 인터뷰를 하던 중 카메라가 갑자기 파월이 아닌 다른 쪽으로 돌려지며 잠시 인터뷰가 지체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런일을 벌인 인물은 파월의 언론담당 부보좌관인 에밀리 밀러로 파월의 보좌관이면서 파월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인듯 하다. 국방부는 국무부에, 국무부는 국방부에 그런 식의 인사를 배치하는 경우가 관행화 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이날 인터뷰를 통해 파월은 이라크전쟁을 일으킨 자신에 대한 사죄는 물론 행정부나 정보조직 내에서 누군가가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려고 정보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가뜩이나 40%대로 지지도가 떨어진 조지 부시 대통령을 궁지로 몰고 있다.(노컷뉴스2004-05-17 )

유엔사

민군갈등으로부터 비롯된 동맹군기피현상은 장기적으로 유엔사와 한미연합사와 같은 한미동맹체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특히 77년 카터의 주한미군철수 정책에 항명했다가 해임된 싱글러브주한미군사령관이나, 99년 클린턴의 코소보전쟁을 반대하는 군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존 틸럴리주한미군사령관이나, 미군개혁의 가장 보수적인 장애물로 평가되고 있는 미 2사단의 존재등은 민군갈등의 오래된 진원지 중의 하나가 주한미군이란 사실을 확인케 한다. 전략적 우위는 선공이다. 달리 말하면 의제설정권을 누가 갖는가이다. 전략적 우위를 선점하지 못했을 때, 상대에 대한 공격이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자충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우위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약점을 선공함으로써 나의 우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재 국면에서 민군갈등을 증폭시키고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의제 중의 하나가 유엔사해체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