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48일째 캠프 사세보, 나가사키2004/08/16 1646


우베와 하카타
야마구치현은 역대 수상을 비롯 영향력있는 정치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식민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히로시마의 중국전력회사 앞에서 핵 발전소 반대 집회를 하고 있는 분들을 뒤로 하고 우베시로 향한다. 우베시 바닷가는 짙은 옥빛자태를 내뿜고 있었지만 왠지 적막한 쓸쓸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두개의 큰 기둥이 서 있었다. 그것을 이곳 사람들은 비아라고 했다. 무슨 의미인지, 영어인지 일어인지 아니면 이곳의 사투리인지 알길은 없었다. 어쨌든 비아란 이런 것이었다. 우베시와 바다 건너편의 이이츠카나 큐슈지방에는 해저탄광이 많았다 한다.우베시는 바다 밑에 석탄광이 발견되어 해저 터널을 뚫고 들어가면서 작업을 하는데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바다위로 만들어놓은 대형환기구가 바로 비아라는 것이다. 어디나 그렇듯 전쟁을 위한 강제징용에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복지를 생각할리 없었다. 인권은 커녕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마련할 겨를없이 강행되는 작업은 반드시 대형사고를 부를수 밖에 없었다. 바다밑의 흙이 붕괴되면서 탄광의 갱도전체가 내려앉은 것이다. 낙반사고였다. 그것은 예정된 필연이었다. 이사고로 200여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중 3/4이 조선인이었다. 매년 2월이면 태평양전쟁 유족회에서 이곳을 찾아와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위령탑을 찾아 보는데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동네를 한참을 돌아 헤매인 끝에 간신히 위령탑을 찾아냈다. 한적한 누군가의 집마당에 비는 세워져 있었다. 전쟁의 모순과 노동의 모순과 민족의 모순이 켜켜이 쌓인 이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카타
하카타로 가는길에 시모노세키에 잠시들러 과거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민온 항구를 돌아본다. 이곳에 쏟아지는 짐처럼 내 던져진 조선인들은 가까이는 큐슈로 멀리는 동경이나 때로는 삿뽀로까지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사람들은 모두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군정당국도 일본인들도 이것을 자신들의 도와야할 의무로 생각치 않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작은배를 구입하여 삼삼오오 조선행을 강행한다. 보트피플이 된 것이다. 문제가 생겼다. 태풍이었다. 태풍을 피해 섬에 급히 상륙해야 했지만 일본정부도 새로이 권력을 이양받은 미군정도 이를 허용하지도 신경쓰지도 않았다. 섬에 조선인이 상륙할 경우 치안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그들의 구실이었다. 결국 섬에 상륙하지도 못한채 거대한 태풍앞에 일엽편주의 신세가 된 그들에게 기다리던 운명은 죽음이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조선인이 바다속에 수장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닷가로 떠밀려온 수많은 시체를 일본인들은 어찌할 수 없어 한곳에 쌓아 화장을 했단다. 몇날을 탔는지 알수 없지만 그 자리의 흙이 시커멓게 탄채로 오랜세월 지워지지 않았단다. 도선배가 그 곳을 처음 찾아 갔을때 까지도 그 점게 탄 흙은 그대로 남아 있었단다.

사세보
익숙한 풍경들이 다가선다. 시노자키선생님이 기다린다고 했다. 사세보기지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진 그는 날마다 들어오고 나가는 선박을 감시하며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사세보 방문에서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이 바로 시노자키와의 만남이었다.
유엔사에 대해 물은것은 내가 아닌 도선배였다. 이곳의 유엔사는 병력은 없고 사무실에 담당 직원만 있으며 3년에서 5년 단위로 유엔군사령부의 시찰을 받게 되어있단다. 시찰을 받을때는 도쿄에 있는 대사관들에서 유엔사와 관련된 담당자들이 한명씩 나와 함께 사세보기지를 시찰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이며, 시찰활동 즉 한번 기지를 둘러보는 정도라는 것이다. 유엔군사령부는 군사기구이지만 외교적 기능만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문제인것이다. 외교는 군사에 우선한다. 미 합참이 유엔사에 명령을 내리면 유엔사는 그 즉시 작통권을 장악할 수 있다. 바로 그 기능을 위해 ‘연락업무’ 란 명목하에 일본의 기지마다 유엔사 직원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를 봐도 유엔사는 유령조직일 뿐이다. 가장 저렴하게 유지되지만 유사시엔 가장 고효율을 발휘하는 기구이니 미군부로서는 이런 횡재가 어디있겠는가?
시노자키 선생의 한국과 관련된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신문지상에서 발표되는 여러가지 미군재배치 계획등은 아직 구상단계일 뿐으로 언급할 것이 없으며 그보다 오히려 실질적인 미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셨다. 동의하는 바였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자료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4일전 키티호크항모가 동해로 이동했으며 사세보의 선박 2척이 오늘 아침 이동했다는 것이다. 어떤 선박이었는가를 묻자 한척은 유조선 한척은 음식등을 지원하는 지원함이었다고 한다. 또한 주목할 것은 최근 부산에서 사세보로 물자들이 이동해 왔다고 한다. 주로 MWR(Moral,Welfare,recreation)이라는 복지 부대의 물자들이다. 복지부대는 가장 쉽게, 그래서 가장 먼저 움직일 수 있는 부대중의 하나이다. 이미 지난 3월 독수리 훈련 당시 평택항에 MPS 사전배치선단이 입항하여 물자를 하역하였다. 유엔사공보관은 단순히 물자를 내리고 싣는 훈련일 뿐이라고 했지만 수백대의 트레일러 차량이 캠프험프리로 들어가는 것이 팽성주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선단이 부산을 거쳐 지금 사세보에 입항해 있다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배를 타고 사세보를 둘러보며 시노자키선생의 안내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평화대회에 참석하는 평화단체들이 중간에 사세보에 들려서 배를 빌려 그에게 안내를 부탁한 것이다. 육지에서 바라보는데 많은 한계를 느꼈던 대목들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평화단체팀들을 위한 일반적 소개이기에 나는 몇가지 가장 궁금했던 장소들에 대해 집중했다. 탄약고와 원자력잠수함부두였다. 나중에 시노자키 선생과 자세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시노자키선생이 택하고 있는 연구방법과 나의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는 현장파였다. 함정이 들어오면 그날 미군들이 쏟아져나와 술을 먹는 술집으러 가서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하며 파고 들어가는 식이었다. 생생한 정보를 얻을수있는반면 역정보나 오류를 확인하기 힘들다는 것이 단점이다. 나는 미군들의 야전교범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탄약고에 대한 토론에서 그의 방법과 나의 방법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방법에 의한 관찰을 소개하자 그는 놀라워 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추가해 주었다. 역시 정보의 가치를 잘 아는 분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오래전에 듣던 터였었고 그는 나를 처음 알게된 것이었다. 진해핵잠수함가 판문점경비대의 화학무기표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 깊이 합의를 이룬 사항은 1차자료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1차자료를 연구하는 관점과 방법에 대한 서로의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피스 사이클이란것이 있다. 일본에서는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역마다 노동조합등이 주체가 되어 자전거를 타고 평화순례를 한다. 특히 8월은 그 행동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이다. 사세보주민들이 피스사이클팀을 환영하는 교류회에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엔사해체문제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도선배의 구수한 입담과 함께 새로운 사실은 어디든 그랬지만 사세보 주민들 또한 모두 놀라워했다. 10월에 다시 걷기 명상이 시작된다는 홍보와 함께 지지를 호소했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나가사키의 군함도軍艦島
순간의 선택이란 것이 있다. 더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은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역사적 물결의 한가운데일 때 더욱 그러하다. 우연이었다. 내가 평화단체들의 평화크루즈에 참여한 것은 도선배가 다른 집회에 초청되어 나와 같이 할 수 없게 됐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시간을 보낼겸 선상여행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의미없는 여행은 싫었지만 얼떨결에 떠밀리듯 배에 타고 말았다. 그리고 배에 타서 안내자료를 받아보고서야 이배가 가는곳이 어디인지를 알게됐다. 일제때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으로 혹사 당하던 해저탄광으로 이들은 이곳에서 원폭피해까지 당한다. 다카시마高島와 하지마端島가 바로 그섬들이다. 나는 하지마를 보는 순간 온몸이 긴장되었다. 섬을 한바퀴 도는 동안 한순간도 그들 건물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군함도란 별칭답게 섬은 마치 콘크리트로 만든 요새처럼 그리고 엔진을 켜고 달려들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산하면 현대이듯 나가사키하면 미쯔비씨이다. 나가사키항 전체가 미쯔비씨에 포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함도는 바로 이 미쯔비씨가 소유한 섬이었다. 경상도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많은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왔다. 그들이 배에 실려 도착하면서 이섬을 보았을때의 느낌이 어땠을까 지금 관광을 하며 보고 있는 나의 느낌이 이러할 진대…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섬은 도망갈수 없도록 콘크리트로 된 해안 절벽과 숙소와 공동목욕탕 두가지 목적으로만 세워져 있다. 이들 섬위의 지상건물은 지하로 해서 해저로 연결되는 탄광을 위한 건물로 지상 건물들은 지하해저탄광을 위한 부속시설일 뿐이었다. 조선인과 중국인은 서로 보지 못하도록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고 중국인들의 피해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아침 7시와 저녘 6시 두번씩 맞교대로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지급된 식사는 현미와 보리밥 반종지에 된장같은 국물 한그릇이 다였다. 임금은 지급되지 않고 통장에 입금되었다. 결국 피폭으로 사망한 조선인과 가족들에게 이들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45년 8월9일 또다른 제국 미국에 의해 나가사키 중심지에 핵폭탄이 투하됐다. 나가사키의 다른 탄광과 군수공장에 징용되었던 조선인들과 함께 군함도의 조선인들도 원폭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배가 흔들린다. 군함도는 쉽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을 기세인듯 요지부동이지만 유일한 조선인 탑승자인 나는 흔들리는 배안에서 어찌할줄을 모른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감시

도선배가 한 집회를 마치고 다른 집회로 바쁘게 이동하고 있었다. 도선배가 말했다. 경찰이 따라오고 있어… 어디에라고 반문하듯 고개를 돌리자 증명을 할테니 보라는 듯 일부러 한블럭을 더 돌았다. 과연 우리가 시험삼아 멈추면 따라 멈추며 서툴게 바로 뒤를 따라오는 차량이 있었다. 이들의 감시는 사실은 이미 사세보부터 시작되었었다. 시노자키선생을 만나 배에 오르기 위해 부두에 서있을 때 건너편에서 서너명의 선그라스들이 한명의 사진기를 숨긴채 우리를 열심히 찍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그 많은 사전집회를 마치고 길을 이동할때마다 이들 어설픈 감시조들은 과도한 야근에 시달리며 우리의 뒤를 밟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커튼을 슬쩍 들춰보니 두명의 그림자가 숙소앞 자판기의 조명을 환하게 받으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의외였다. 일본은 공산당을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평화단체들을 이토록 밀착감시한다니 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데, 물론 그들이 나를 감시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한국을 떠나기전 박선생님의 염려와 일본에 도착해서 도선배의 우려가 모두 현실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왜 그리도 선배들께서 준비를 강조했는지 이젠 알게 되었다.

히로시마와 다른 나가사키
히로시마평화 박물관에서의 몇가지 불쾌한 문구들에 대해 이야기 한적이 있었다. 일본이 원촉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논리의 바탕에 가해자의 반성이 결여되어 있음으로 해서 생긴 묵운 감정들이었다. 나가사키는 달랐다. 조선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나가사키피폭지공원 안에 중요한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히로시마는 공원다리 건너 한쪽 구석에 위령비가 위치해 있던 것을 민단이 총련을 제치고 공원안으로 이동시켰다. 조선인이 아닌 한국인위령탑으로 위령비가 서있었다. 나가사키는 조선인이란 이름으로 위령비가 서 있었다. 다음날인 8월 9일 맨 첫 행사도 조선인원폭피해자위령제였고 일본의 평화단체들은 물론 매스컴도 히로시마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동원되어 높은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조선인피폭문제가 일본의 피폭문제보다 중요한 문제임을 누구나가 자각하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히로시마와는 다른것이었다. 위령제는 물론이고 전체 평화집회에서도 재일조선인2세라고 소개하는 도선배는 매우 중요한 연사였다. 모든 자리에서 현재의 한일연대의 새로운 과제로 유엔사 해체 문제가얘기 되었다. 히로시마에서부터 집회에 참석해온 단체들은 이제 이 문제를 거의 정확히 알정도가 되었다. 걷기명상전에 광화문 여중생추모집회에서 만났던 나가사키 평화단체분들을 다시 만난 것도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분들은 이곳에서 거의 핵심으로 일하는 자원활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소개로 유엔사 해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된 평화학교수님을 소개받기도 했다. 만나게 되 나가사키의 작은 사설 평화박물관인 오카선생의 평화박물관이 있었다. 비록 작고 전시물들이 세련되진 않았지만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이기전에 가해자임을 통렬히 반성하는 내용들이었다. 그곳엔 일본인 피폭자보다 조선인과 중국인 피폭자들의 고단했던 역사가 살아 있었다. 2층엔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신문기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이라면 미국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다. 그리고 격에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