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명상50일째 유후인의 히주다이훈련장2005/01/24 1672


유후인湯布院
나가사키를 떠나 도착한 곳은 뱃푸 온천 옆에 유후인이란 역시 온천으로 이름이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시의원을 하는 유지씨의 집에서 3일 동안 묶기로 했다. 젊고 열정이 넘치지만 부드럽고 수더분한 인상이다. 히주다이 자위대 훈련장에 오끼나와 미해병대가 오는 것에 반대하여 히주다이 주민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그는 평화운동가 이기도 하다. 그의 사무실서재를 보니 시의원선거와 관계있을 선거관련서적과 군사분야 특히 오끼나와 관련자료는 자신의 동네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역통화와 관련된 책자도 있었다 이곳에서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는지 알수없지만 그의 고민의 범위를 알 수 있는 책이었다. 그외에도 온천지역인 유후인의 관광자원을 개발하기위한 서적들이 즐비했다. 한마디로 열심히 뛰는 팔방미인이었다.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 덥수룩한 외모, 지역을 위해 또 세계를 향해 고민하는 그는 공교롭게도 일본식 목욕탕인 후로를 경영하고 있었다. 온천에서의 사색은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온천이 있었다. 물속에 잠긴 내몸은 자연스레 물속으로 가라 않는다. 그간의 피로가 갑자기 생겨난 듯 물의 결 속으로 들어간 숨결은 잠시숨을 멈춘다. 그것이 물결과 숨결이 만나는 방식임을 몸은 잘 아는 것이다. 숨이 멎자 물결도 멎은듯 모든 것으로부터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속에서 지금까지의 몸의 수고와 마음의 피로는 완전히 소거되는 것이었다. 물속에서의 명상은 기나긴 시간을 정리해주었다. 숨이 가쁠즈음 숨결을 해방시켜주며 물속으로 고개를 떠올렸다. 물의 파문이 만들어내는 증기는 방금전의 기밀을 안개속으로 밀어낸다. 이제 그것은 나만의 것이 된 것이다. 유후산의 가쁜 절벽에 지나던 구름이 걸려 오랜동안 머물러 있다.
다음날 아침 다시 탕을 찾았을 때 인적대신 여린 증기만이 고요히 사람을 맞이하였다. 몸을 열고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스치는 상념. 여기서 이순간 죽더라고 아무런 여한이 없으리라… 몸은 물속에 잠기고 마음은 안식속에 물든다.

도선배와 아들 시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로 하여 그가 큰짐을 지게 되었으니 내 일을 접고 오직 그를 바람처럼 따르기로 했다. 유후인의 산책로를 걷는다. 안동의 하회마을같지만 그 보다는 전통의 무게로부터 가벼운듯한 이곳은 그 소담함과 잔잔한 아름다움으로하여 놀랄만한 관광지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름다음에 마음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도선배와 지금이라도 그가 연기하자고 했고, 그에 의해 조직될 것이지만 아직 한마디도 나오지 않은 2차 걷기 명상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와 나의 리듬은 달랐다. 그에겐 휴식이 필요했고 지금은 유후인의 산책로에 심취해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공항에서 헤어지면서 천천히 연락하자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선배는 그렇게 말하고도 충분히 이일을 조직할 사람이란 것을 믿고 있기에 그저 조용히 그를 따르기로 했다. 이 시간은 침묵 동행만이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도선배도 그의 휴식에 충분히 빠져들지 못하고 나를 신경쓰며 조절하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나에게 휴식을 가르쳐주고 싶어하는것 같기도 했다. 그에게 휴식은 논리 이상의 신념임을 내게 여러번 내비쳤었다. 그러나 나에게 이 시간은 어색한 시간이다. 휴식, 나는 이 조용하고 나른한 이름의 전쟁에 대해 잘안다. 서서히 긴장이 와해되고 생활의 결이 나 아닌것과 타협하게 만드는, 상대가 보이지 않는 느슨한 전쟁. 반성과 성찰만이 유일한 무기인 힘겨운 전쟁. 나는 유후인의 아름다운 산책로를 걸으며 그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온천에 온지 3일째 어김없이 새벽 나의 발길은 온천으로 나를 이끌었다. 알몸이 된채 조용히 김이 오르는 물에 발끝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온천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 몸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그 물결과 나의 살결은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애무하고 있었다. 그 살아있는 결속에서의 한없는 평화. 우리의 평화가 궁극으로 이르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상태였는지 모른다. 행복해지길 두려워 마라는 구호가 있었다. 나는 행복을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미안해했던 것이다. 세상을 향한 미안한 마음, 그 미안함으로하여 항상 겸손해지려는 마음. 지금은 그 미안함을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미안함으로부터 해방된 상태가 행복일까? 미안함의 짐을 잠시 내려놓은 상태가 행복일까? 나만의 행복은 그렇게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그 번민마저 이 평안의 상태를 유지하는 저울의 한편에 달아두기로 했다. 물턱에 몸을 누인다. 물턱을 넘어 흐르는 온천수와 서서히 식어가는 몸사이의 등감만이 서로 접촉하고 있다. 눈감은 이 순간 바람은 내게 와있다. 물결도 나에게 사로 잡혀있다. 천공과 산과 아침마다 산위의 걸린채 나아가지 못하고 머무는 구름이 모두 여기에 있다. 이제 제법 쌀쌀한 기운의 바람이 몸을 식힐때마다 팔을 뻗어 온수로 적신다. 명상의 제물 처럼 누워 있는 내몸에선 김이 피어오르리라. 방금전 어제의 영혼들은 그 증기와 함께 모두 하늘로 승천하리라.
사우나는 평화이다. 몇년전인가 문호근 주강현선생과함께 재일핀란드부대사를 만난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나라의 사우나를 공부하다가 일본의 후로(風呂)를 알게 됐고 그 뿌리를 찾다보니 한국의 목욕문화와 연관이 있는것 같은 예감을 받아 그녀의 노력으로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90년 중반은 우리가 미시문화에 대해 관심이 막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그의 생각은 놀라운 것이었다. 사우나와 평화담론을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전쟁은 남성들의 전쟁이었고 여성은 항상 전쟁에서 2중, 3중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핀란드는 구조적으로 위안부를 요구하는 전쟁터에서 독특한 경험을 보여주었다. 소련과의 전쟁때였다. 핀란드의 전통사상으로까지 승화된 사우나 문화는 군사들에게 일인용 사우나 천막을 나누어주고 개인적으로 충분히 긴장을 풀도록 하였다. 전쟁터에서의 성적감정의 왜곡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의 사우나문화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사우나를 중심으로 마을공동체가 유지되어온 핀란드의 전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것은 핀란드 뿐아니라 평화문화를 건설하고자 하는 새로운 인류의 염원에 비추어볼때 세계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찜질방 문화에 주목한바 있다. 온천을 관광지 선택의 제일조건으로 삼는다는 일본에 있어서 평화문화로서의 온천문화는 연구의 가치가 있으리라. 물론 우리에게도.

히주다이 日出生台 자위대 훈련장
히주다이 훈련장은 유후인湯布院 구수玖珠 九重 길까지 포함하면 安心院등 4개의 마을에 걸쳐 있고 면적은 4,900ha 길이는 남북 5km, 동서 16km에 달한다. 홋카이도에 이어 두번째로 큰 훈련장이다(홋카이도는 23km, 9km) 1년에 330일 훈련이 있다. (일본은 1월의 설, 5월의 황금주간, 8월의 추석을 제외한 전부) 이중 실탄연습은 230일에 달한다.
이곳은 1898년부터 일본의 육군이 훈련장으로 썼으며, 1946년부터 11년동안 미군과 한국군의 합동연습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훈련을 마친 병력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6만 한국군이 4천이라고 했다. 과거의 이러한 지리군사적 위치때문에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자위대와 일미 군사훈련은 한반도 전쟁을 염두에 둔 야전 훈련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설명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곳 훈련장에 미해병대가 처음 나타난것은 1999년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일미군사연습은 몇차례 있었다. 1991년 96년 2001년 이렇게 세번, 96년 당시의 연습명은 킨스워드였다고 한다. 오끼나와의 미해병대는 이와 관계없이 독자적인 훈련을 위해 온 것인데 1995년 오끼나와에서의 소녀성폭행사건으로 일본정부가 오끼나와에 대한 미군주둔 부담을 전국적으로 분산시킨다는 차원에서 시도된 것으로 분석한다. 그결과 홋카이도北海島, 동후지東富士, 북후지北富士, 미야기현의 오조지마하라王城寺原 그리고 이곳 유후인에서 미해병대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후지연습장은 이전부터 미군의 연습지였고, 베트남전쟁때에도 파월하는 미군이 훈련한 곳이었다. 작년에는 미군만을 위한 샤워시설이 건설되었다. 미군은 일본군과 목욕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친절한 배려때문이라고 했다. 일년에 단 몇일와서 훈련하고 가는 미군을 위한 자상한 배려에 대해 지역주민들은 대부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유후인의 관광협회에서는 ‘관광을 위한 미국인은 환영하나 전쟁을 위한 미국인은 거부한다는 공식문서를 발표했단다. 히주다이를 들러오는 길에 우연히 길에서 히주다이 미군반대 투쟁의 주민 대표를 맡고 있는 에토우씨를 만났다. 그는 매향리투쟁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다. 도선배는 바로 매향리 비디오를 처음 이곳에 소개한 사람이었다. 어제 판문점을 방문하고 돌아온 유지씨의 부인과 인사를 하는데 그녀는 내게 판문점 북쪽 민둥산의 사진을 보여주며 히주다이 훈련장과 너무 비슷한 풍경이어서 놀랐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히주다이는 철원 대성산인근의 풍경과 매우 유사하다는 답변을 건냈다. 히주다이훈련장이 한반도유사에 대비한 훈련장이 아니길 바라지만, 불행히도 오끼나와 해병대는 유엔사의 작전통제에 따라 움직일 부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