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설(飛雪)과 매향(梅香)-이정희 현상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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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정희를 지지하는가
[기고] 비설(飛雪)과 매향(梅香)-이정희 현상을 보며
이시우 사진가 필자의 다른 기사기사입력 2012-12-10 오전 10:22:53

얼마 전 나의 사진전에, 친분이 있는 한국양명학회의 한 교수님께서 난초화분을 보내주셨다. 화분을 두른 띠에는 飛雪帶梅香(비설대매향)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매화향기와 더불어 휘날리는 눈’이란 뜻으로 송나라 진관의 시에서 빌려온 글이다. 전시장은 난향에 문향까지 더해졌다. 나는 매화향기와 더불어 눈이 내리는 장면을 연상하다 문득 한 글자를 수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飛雪抱梅香(비설포매향)으로 말이다. ‘휘날리는 눈송이를 매화향기가 감싸 안는다’는 뜻이다. 내겐 ‘비설’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2007년 한겨울 국가보안법 혐의로 수배생활을 시작한 나는 어느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우선 집에서 멀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당도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엔 갈 곳이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냥 서 있었다. 갈 곳 없는 처지를 숨기기엔 왠지 그게 적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눈송이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고 있었다. 고개 들어보니 무성영화처럼 함박눈이 하늘에서 소리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눈 속에서 문득 내가 갈 곳 없는 신세임을, 그 신세조차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내 존재를 가려주는 눈이 오히려 고마웠다. 어둠은 깊어가고 눈발은 점점 거세지는데 갈 곳을 정하지 못한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렇게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나의 수배생활은 내내 그와 같았다. 그리곤 그해 4월 나는 거리에서 체포되었다.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나의 변호사님께 6월까진 할 일이 있어 수배를 감수하겠다고 했는데 계획보다는 일찍 체포된 것이었다. 형사가 수갑을 채우고, 체포동의서에 서명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변호사와 통화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어쩔 수 없었던지 형사가 변호사님께 전화를 걸어 내게 건네주었다. 변호사님의 첫 마디는 “생각보다 일찍 뵙게 되었군요”였다. 나는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잡히셨군요”이거나 “체포 되셨군요”라는 말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 따뜻한 말이었다. 체포라는 단어엔 범죄자란 규정이 내포되어 있고, 그래서 체포되는 순간부터 죄인이란 틀에 스스로 갇히고 만다. 그러나 변호사님의 “다시 뵙게 되었다”는 말에는 어디에도 나를 죄인으로 의심하는 암시가 없었다. 그것은 법과 죄의 틀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아니고 친구와 이웃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언어였다. 나의 수배생활이 ‘비설’(飛雪)이었다면 그 때 그 한마디는 ‘매향’(梅香)이었다. 변호사님의 몸에 익은 그 한마디가 내가 죄인이 아님을 자각하게 했고, 나는 그 뒤 3년이 넘는 재판기간 동안 당당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단 한 번 밖에 본적이 없었던 그 변호사가 이정희변호사였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인 당통은 말했다. “당당하라. 더욱 당당하라. 항상 당당하라.” 프랑스혁명의 성취를 압축하는 구호이다. 그러나 당당하라는 말은, 말하는 사람을 당당하게 하고 듣는 사람은 오히려 주눅들게 하는 역설의 언어이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당당해지기를 바란다면 자기를 낮추면 된다. 영어의 이해한다는 말은 아래에(under) 선다(stand)는 뜻이다. 위에 군림해서는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당통의 구호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비워라. 더욱 비워라. 항상 비워라” 당당함은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의 겸손과 배려를 통한 연대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다.

이정희현상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논쟁에서 상대방이 말할 때 내가 할 말을 준비하느라 상대방의 말을 정확히 듣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정희변호사는 검사의 말조차 경청했다. 검사가 준비한 수사자료 중에 압권은 내가 촬영한 미군기지의 사진과 똑같은 장소에서 찍어온 사진들이었다. 수사관들은 내가 미군기지를 찍었던 건물 옥상등을 찾아가 똑같은 장소, 똑같은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왔다. 2년동안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수사관들이 만들어낸 자료였다. 대단한 작업이었다. 나는 압도되었다. 그것이 증거로 채택된다면 나로서는 군사기밀탐지죄를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검찰이 이토록 공들인 작업은 이정희변호사의 단 두마디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정희변호사가 증인으로 나온 수사관에게 물었다. “이 사진을 찍은 건물 옥상에 군사시설이니 찍지 말라는 표식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 사진들을 찍을 때 수사관님도 누구한테 허락을 받아야 찍을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검사는 고개를 숙였다. 이정희변호사는 어떤 장황한 주장도 하지 않았다. 단지 검사측의 주장을 듣고 질문했을 뿐이었다. 결국 이 방대한 자료들은 증거로도 채택되지 않았다. 검사와 경찰들은 매우 성실했지만 그들이 시작부터 잘못된 가정과 논리위에 서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정희변호사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의뢰인인 나를 대할 때 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대하게 압도하는 권력의 주장 역시 경청하고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논리의 모순을 밝혀 성찰케 했다. 격퇴하지 않고 스스로 무너지게 했다. 소크라테스도 경탄할 변론술이다. 이정희현상을 파악함에 있어 그녀를 특정세력의 주장만을 비호하는 편협한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잘못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주체인 시민을 “지배함과 지배당함에 참여하는 자”라고 정의했다. 그 말에 헤겔의 변증법을 적용하면 “정치란 지배와 피지배를 가르는 형식”이 될 것이다. 정치의 궁극은 “자기지배” 즉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저 유명한 경구로 명시되어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말이다. 시민은 유권자, 즉 선거의 주체이기 전에 정치의 주체이다. 선거는 정치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인정하는 날은 오직 하루, 선거일로 축소되었다. 이런 현상을 정치학자 루미스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정치의)자유는 인민을 지배하는 자들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가하려는 자들에 의해 도난당했다.” 민주주의로서의 선거는 도둑맞은 시민의 정치를 얼마나 되찾아오는가에 의해서 의미를 갖는다. 민의의 대변이 투철하지 못할 때는, 선거가 아니라 정치가 위기에 처한다.
올해 내내, 모임마다 “권력의지”를 역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권력의지의 강조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을 보고 염려가 되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민중과 바른 정치에 대한 ‘간절함’이지 권력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중의 간절함을 담을 수 있는 언어는 ‘권력의지’가 아니라 ‘정치의지’이다. 정치의지 없는 권력의지는 탐욕으로 변질된다. 안철수후보의 사퇴는 권력의지가 아닌 정치의지로 설명되어야 한다. 대선후보 토론회이후 돌풍을 일으킨 이정희현상 역시 도둑맞은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국민들의 정치의지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1871년 시민의 재산을 도둑질해가는 정부군에 맞서 몽마르트의 골목을 누비며 쇠종을 울려 파리코뮌을 깨우던 루이스미셀의 경종이며, 의회에 진출하여 민중의 의지를 도둑질해가던 독일사회민주당을 비판하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이며, 도둑맞은 노동권을 찾기 위해 단식과 농성으로 맞서던 김소연과 김진숙의 절규이며, 법치주의마저 도둑질한 자본의 횡포에 맞서 철탑농성을 벌이는 최병승의 함성이다. 권력보다 정치가 먼저다.

능력있는 자에게 항상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진 자에게 항상 능력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이정희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법의 규칙을 이용하여 나의 재판을 승리로, 완전무죄로 이끌었다. 이정희후보는 한정된 선거공간에서, 이를 더욱 제한시킨 토론공간을 시민의 간절한 의지를 대변하는 정치공간으로 폭발시켰다. 주어진 기회를 탓하는데 머물지 않고, 변경할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위기를 기회로, 역경을 순경으로, 고난을 전망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성취였다. 러시아의 한 정치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동요하는 자들을 향해 “승리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이정희현상이 자기지배를 향한 ‘정치의 승리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신념으로 확산되길 바란다.

12월 4일 대선후보토론회 직후 눈 내리는 거리에서 하염없이 눈을 맞으며 유세하는 후보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과연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휘날리는 눈을 감싸 안을 매화향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