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에 대한 한(조선)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한호석

제국주의에 대한 한(조선)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제국주의 지배체제 교체에 대한 한(조선)민족의 역사적 경험
3.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예속의식 교체에 대한 한(조선)민족의 역사적 경험
4. 일제의 ‘대동아지배체제’에서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로
5. 주한미군 철군은 ‘반공방파제’ 포기가 아니었다
6. 동아시아 정치지형을 바꾼 두 지역의 전쟁
7. 한(조선)반도 전쟁상황은 어떻게 조․미 전쟁으로 전면화되었는가
8. ‘영예로운 철군’과 ‘불가피한 정전’ 사이에서 동요한 미국
9. 한국(조선)전쟁 이후 태평양지배체제의 완성
10.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와 미․일 동맹군의 증강
11. 태평양지배체제 완성 이후 ‘불침항모’의 운명
12. 태평양지배체제 완성 이후 ‘반공방파제’의 운명
13. 태평양지배체제 변동기에 제기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 문제
14. 글을 맺으며

1. 글을 시작하며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사령부 정치위원이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가 기록한 『비망록』이 등사인쇄물로 전해지는데,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48년 4월 19일 저녁 6시,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의사진행발언을 얻은 민족주의 정치활동가 김규식(1881-1950)이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항의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 것은 비단 김규식만이 아니라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가졌던 일반적 정서였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던 1948년 4월 한(조선)반도의 정치정세는 오늘 남(한국)의 정치정세와 달리 미군정의 지배와 약탈이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었고 이승만(1875-1965)을 앞세운 미국의 단선단정책동이 극에 이른 시기였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이 그 이상 더 뚜렷하게 드러날 수 없는 현실을 직접 체험하면서도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부르지 않았다.

2004년 7월 20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열린시민공원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을 반대하는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무기한 단식농성이 시작되었다. 그 농성투쟁현장을 찾았던 사람들 가운데 황종렬 목사는 “제국주의로부터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힘찬 투쟁이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취지의 지지연설을 하였다. (인터넷 보도매체 『민중의 소리』 2004년 7월 20일자)

눈길을 끄는 것은, 1948년에 민족주의 정치활동가가 가졌던 대미관과 2004년에 진보적 종교인이 가진 대미관의 차별성이다. 전자의 대미관은 미국을 외세로 인식하는 모호성에 빠져있었고, 후자의 대미관은 명확하게도 미국을 제국주의국가로 인식하였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21세기의 남(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가장 커다란 특징은 미국에 대한 비판여론과 반미감정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한국)의 20대와 30대 청년층에서 대미비판여론과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내외 언론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것은 한국(조선)전쟁 정전 이후 50년 동안 이른바 혈맹, 동맹 또는 우방이라는 말속에 감추어졌던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이 차츰 드러나면서 생기는 사회현상이다.

강조할 것은, 남(한국) 사회의 대미비판여론과 반미감정이 맹목적 배외주의(chauvinism)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면 19세기 말 이후 우리 나라 근대사는 맹목적 배외주의를 통해서는 사회현실의 변혁과 역사의 진보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대미비판여론과 반미감정은 맹목적 배외주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인식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반제의식으로 발전되어야 사회․정치적 진보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 글은 남(한국) 사회의 대미비판여론과 반미감정이 반제의식으로 발전될 것을 전망하면서, 한(조선)민족에게 극심한 고통과 비극을 강요하였던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2. 제국주의 지배체제 교체에 대한 한(조선)민족의 역사적 경험

20세기를 지나오면서 한(조선)민족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지배하는 두 개의 제국주의국가와 차례로 대결하였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동안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지배와 수탈을 자행하였던 제국주의국가는 일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지배․수탈하기 위하여 한(조선)반도에 주둔시켰던 일본군은 육군 25만5천 명, 해군 1만6천 명이었다. 한(조선)반도를 강점한 일제침략군은 1915년 12월 23일에 창설되어 1944년 9월 일본 대본영으로 재편되기까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였던 제19사단과 서울 용산에 본부를 두었던 제20사단, 그리고 경상남도 진해의 해군 경비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한(조선)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게 빌붙어 부귀와 권세를 거머쥐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게는 일제에 대한 충성과 숭배의 감정만 있었지만, 일제 식민지사회에서 지배와 수탈을 당했던 한(조선)민족 절대 다수는 일제 식민지지배를 반대하였고, 특히 진보적인 사회정치세력은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반일투쟁을 벌였다.

돌이켜보면, 일제 식민지시기에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일제 식민지체제를 반대․배격하는 반일투쟁을 전개하느냐 아니면 일제 식민지체제 안에서 침묵․방관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로 정해졌다. 친일파들의 민족반역행위가 사회․역사적 발전을 가로막은 반동이었다면, 반일투쟁은 사회․역사적 진보였고, 침묵과 방관은 일제 식민지체제에 안주하는 보수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전개된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의 반일투쟁은 맹목적 배외주의가 촉발한 일시적인 사회현상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지배, 수탈을 반대․배격하고 사회역사의 진보를 추구한 반제투쟁이었다. 그런 뜻에서 반일투쟁은 사회․정치적 진보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지녔던 것이다.

일제가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직후인, 1945년 9월 7일 미국 극동군사령부는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할 것임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한(조선)반도 점령작전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10군의 통제를 받아왔던 제24군단을 극동군사령부 소속으로 개편하고 규모를 크게 확충하였다. 한(조선)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제24군단은 제7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96보병사단, 제10군 방공대, 제137 대공포병대, 제101 신호대대, 포병대, 제71 의료대대, 제1140 공병전투부대로 편제되었는데, 총병력은 9만1천8백 명이었다.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군정실시를 선포하였던 바로 그날, 해군 제독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G. Kinkcaid)의 휘하에 있던 미국 해군 제7함대는 서해에서 육군 중장 존 핫지(John R. Hodge)가 지휘하는 제7수륙양용부대와 합류하여 군함 25척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였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날로부터 이틀 뒤인 9월 9일 식민지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신타로(阿部信行)는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점령군사령관 핫지가 내민 항복문서에 조인하였다.

패전으로 무너진 일제 식민지체제를 대체한 새로운 지배체제가 있었으니 그것이 미군정체제다. 미군정 통치기인 1946년 3월 20일에 작성된 미국 정부의 공식문서는 “남(한국)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적어도 앞으로 몇 해 동안 미국이 고도로 위장된 지배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 기초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군정체제는, 미국 정부도 솔직하게 인정하였듯이, 한(조선)반도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미국이 고도로 위장된 지배권을 행사하는 제국주의 지배체제였던 것이다.

미군정체제는 1948년 8월 15일 남(한국) 정부를 수립해놓고 막을 내렸으나,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체제는 새로운 이름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남(한국) 정부 수립 이후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새 이름은 한․미 동맹체제다. 한․미 동맹체제는 한(조선)민족이 요구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었고, 한(조선)민족과 미국의 정치적 합의에 의해서 수립된 것도 아니었다. 그 체제는 전적으로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전략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제국주의 지배체제는 미국의 손에 의해서 ‘동맹체제’로 위장되었기 때문에 남(한국)의 일반대중은 아직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한․미 동맹체제를 수립한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 한․미 동맹체제의 명분도 변화를 거듭하였다. 지난 냉전시기에 미국의 전략가들은 북(조선), 중국, 옛 소련을 한․미 동맹의 적으로 규정하였으며, 한․미 동맹체제는 그러한 북방의 적들로부터 남(한국)을 ‘보호’해주는 가장 믿음직한 ‘안보체제’로 인식되었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에 미국의 전략가들은 한․미 동맹체제를 해체시키려는 유일한 적으로 남게 된 북(조선)을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보호’를 해치는 ‘주적(principal adversary)’으로 규정하였다. 미국의 주적론은 미국 대통령 부시(George W. Bush)의 ‘악의 축’ 발언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이처럼 한․미 동맹체제의 명분은 정세변화와 더불어 바뀌었지만, 남(한국)의 안전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워 제국주의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한․미 동맹체제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

2004년 7월 9일 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부시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 친서에서 부시는 한․미 동맹을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동맹 가운데 하나”라고 추켜세우면서 “지속적으로 한․미 동맹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양국 이익을 위해 노력하자”고 적었다. (인터넷 보도매체 『프레시안』 2004년 7월 27일자)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한․미 동맹을 가장 성공적인 동맹 가운데 하나라고 추켜세운 부시의 평가는 미국이 남(한국)에서 한․미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적 지배권을 가장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행사해 왔음을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3.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예속의식 교체에 대한 한(조선)민족의 역사적 경험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며 패전국인 일제가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조선)민족을 지배․수탈하였던 일제 식민지체제는 급속히 무너졌다.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였을 때,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은 자기의 상전을 패망시킨 미국에 대해서 적개심이나 원한을 갖지 않았다.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은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아낸 미군정을 새로운 상전으로 모시면서 그들에게 예속되었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관계에는 상전과 종 사이에서 형성되는 일반적인 주종관계로 해명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측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본질적 측면은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예속관계로 해명된다. 일제와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의 관계는 단순히 일본이라는 외세에 예속된 관계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민족반역세력의 예속관계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체제 아래서 친일파 민족반역세력의 활동을 규정하였던 것은 대일예속의식이었다. 대일예속의식이란 한(조선)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사상, 지식, 심리현상의 총체다. 대일예속의식에 따르면, 중국의 청조, 제정 러시아, 미국, 영국은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적 또는 방해자들이며 동시에 한(조선)민족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보호’를 해치는 위험한 존재로 규정되었다. 일제 식민지시기의 대일예속의식은 일제 식민지체제에 의해서 발생되고 확대재생산된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체제가 없었다면 대일예속의식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대일예속의식은 미국의 ‘보호’를 받아야 남(한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미예속의식으로 대체되었다. 대일예속의식이 일제 식민지체제가 형성시킨 사상, 지식, 심리현상의 총체라면, 대미예속의식은 한․미 동맹체제가 형성시킨 사상, 지식, 심리현상의 총체인 것이다.

남(한국) 사회의 대미비판의식과 반미감정은 명백히 대미예속의식과 모순되지만, 그것으로는 한․미 동맹체제를 해체하는 정치과업을 달성하지 못한다. 한․미 동맹체제는 그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실천활동에 의해서만 해체될 수 있다. 한․미 동맹체제를 해체하는 실천활동이란 한․미 동맹체제가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을 반대․배격하고 사회․역사적 진보를 추구하는 반미투쟁이다. 그런 뜻에서 오늘의 반미투쟁은 사회․정치적 진보성과 역사적 정당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은, 한․미 동맹체제를 반대․배격하느냐 아니면 한․미 동맹체제 안에서 침묵․방관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로 정해진다. 물론 거기에 더하여, 한․미 동맹체제에 예속되어 그 체제를 유지하는 반동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진보-보수-반동의 삼각대립구도는 한․미 동맹체제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나누어지는 사회정치구도다.

한․미 동맹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반대․배격하는 진보의 시각에서 보이는 미국은 초강대국이 아니라 제국주의국가다. 지금 남(한국) 사회에서 대미비판여론과 반미감정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일반대중은 미국을 제국주의국가로 인식하는 진보의 시각을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남(한국) 사회가 넘어서야 할 사상․의식적 한계다. 그 한계는 반제의식을 지닌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의 실천활동에 의해서 극복될 것이다.

4. 일제의 ‘대동아지배체제’에서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로

19세기 중엽 이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구도에서 언제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되돌아보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이후에 처음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었다. 그 전략은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미국 제국주의의 힘은 1869년 5월 10일 북미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는 계기를 전후로 하여 태평양으로 급속히 팽창되었다. 함대사령관 매튜 페리(Matthew C. Perry, 1794-1858)가 지휘한 미국의 동인도함대가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를 함포사격연습으로 위협하여 1854년 3월 31일에 일본의 개항을 강제하였고, 1867년 국무장관 윌리엄 씨워드(William H. Seward)가 제정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단돈 7백20만 달러에 사들여 영토확장에 성공하였고, 1879년에 알래스카에 해군을 배치하였고, 1898년에는 하와이군도, 괌, 필리핀군도를 점령하였다.

미국 제국주의의 힘은 태평양을 건너 우리 나라에까지 미쳤다. 1866년 8월 9일 미국의 무장함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침입하였다가 격침되었고, 1871년 4월 3일부터 5월 16일까지 군함 5척과 병력 1천2백 명으로 편성된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일부 군함이 조선군대와 전투를 벌인 뒤 퇴각하였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은 이처럼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나, 이 글의 서술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추진하였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으로 국한된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 시동을 걸었던 시점은 종전을 눈앞에 둔 1943년이었다. 그 시점을 1943년으로 잡는 까닭은, 1943년에 국제적인 전후처리문제(international postwar readjustment)를 논의한 세 차례의 중요한 정치협상이 연이어 열렸기 때문이다. 1943년 3월 27일 워싱턴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와 영국 외상 이든(Anthony Eden, 1897-1977)이 만난 워싱턴 회의(Washington Conference), 같은 해 11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영국 수상 처칠(Winston L. S. Churchill, 1874-1965),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이 만난 카이로 회의(Cairo Conference), 그리고 그 직후인 11월 27일부터 12월 2일까지 루즈벨트와 처칠이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과 만난 테헤란 회의(Teheran Conference)가 그것이다. 얄타 회의(Yalta Conference)는 이듬해인 1945년 1월 30일부터 2월 11일까지, 포츠담 회의(Potsdam Conference)는 1945년 7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각각 열렸다.

1943년 3월 27일 워싱턴 회의에서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정확히 10년을 채운 그 기간은 미국이 전후 태평양지배체제를 수립한 기간과 일치한다.

이 글에서 1943년부터 1953년까지 10년 동안에 미국이 추진하였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 주목하는 까닭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50년 동안 그 지배전략의 기본구도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정세가 변동하는 것에 따라서 이러저러하게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50년이 지난 오늘까지 유지되어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후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의 목표는 광활한 아시아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아시아대륙에 지배체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표는 노회한 군사전략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가 이른바 ‘앵글로-색슨 호수(Anglo-Saxon Lake)’라고 불렀던 태평양의 광활한 해역을 안전하게 장악․지배하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계속된 태평양전쟁은, 한때 태평양 지배야욕을 품었던 제국주의국가들인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의 노쇠해진 지배력을 무력으로 하나씩 몰아내었던 미국이 뒤늦게 나타난 일제의 태평양 지배야욕을 꺾고 태평양 지배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장악하기 위하여 벌인 제국주의전쟁의 전형이었다.

태평양 지배권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장악에서 더 나아가 아시아대륙을 깊숙이 침략해 들어가서 아시아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싶은 제국주의적 야욕이 미국 전략가들의 머리 속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이 그러한 엄청난 야욕을 채우려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야 하였기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미만의 야욕으로 남겨두었다.

나의 판단으로는, 미국의 전후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의 기본구도는 ‘원호형(圓弧形) 전략방위선(strategic defense line)’을 중심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호형 전략방위선’이란 무엇일까? 미국의 전후 태평양지배체제를 표시한 도면을 보면, 서태평양(the Western Pacific)에 떠있는 수많은 섬과 섬을 연결하는 매우 기다란 선이 그어진다. 알래스카의 알류샨열도(Aleutian Islands)에서 출발하여 일본열도(Japanese Archipelago), 유구열도(Ryuku Islands), 필리핀군도(Philippine Islands)를 거쳐 말래카해협(Strait of Malacca)까지 이어지는 원호형(circular arc shape) 영역계선이 그것이다.

‘원호형 전략방위선’에 관한 미국 전략가들의 발언 가운데 가장 뚜렷한 내용을 드러낸 것은, 1951년 4월 17일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가 미국 연방 상하양원 합동의회에서 진행하였던 퇴임연설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살아질 뿐”이라는 표현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퇴임연설에서 ‘노병’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전략방위선은 태평양 전역을 에워쌀 만큼 확장되었으므로 태평양은 미국을 보호하는 거대한 해자(moat,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 둘레에 파놓은 물길-옮긴이)가 되었다. 태평양은 미국과 태평양지역의 모든 자유국가들을 위한 방패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 자유우방들이 차지하고 있는 알류산열도로부터 마리아나군도(Northern Mariana Islands를 뜻함-옮긴이)를 연결하는 원호형으로 보이는 섬들의 고리(chain of islands)로 이루어진 아시아연안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을 지배하고 있다. 그 섬들의 고리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모든 항구를 해군과 공군으로 지배할 수 있고 또 태평양에 대한 적대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 (줄임) 해군과 공군의 우위, 그리고 기지를 방어할만한 적정 수준의 지상군만 있으면, 아시아대륙으로부터 미국과 태평양의 우방에 대한 전면공격을 분쇄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태평양은 평화로운 호수의 친근한 정경을 보여줄 것이며, 미래의 침략자들을 위한 위험한 길이 더 이상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맥아더가 지적한 ‘원호형 전략방위선’에서 두 군데가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러시아 영토인 쿠릴열도(Kuril Islands)와 중국 영토인 대만(Taiwan)이다. 러시아의 캄차카반도(Kamchatka Peninsula) 끝에서 시작되어 일본 혹카이도(北海道) 북방의 매우 비좁은 네무로해협(Nemuro Strait)에 있는 구나시리(國後)섬까지 이어진 쿠릴열도는 알래스카의 알류샨열도와 일본열도의 연결고리 중간을 끊어놓은 절단부분처럼 보인다. 미국은 쿠릴열도를 자기의 태평양 지배권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이 일제로부터 빼앗은 혹카이도 북방 네 개 섬들을 포함한 쿠릴열도를 미국이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 영토인 대만은 오키나와(沖繩)를 포함하는 유구열도와 필리핀군도의 연결고리 중간을 끊어놓은 절단부분처럼 보인다. 맥아더가 ‘불침항모(unsinkable aircraft carrier)’라고 불렀던 대만은, 그의 말대로 “중국 대륙을 공격하는 전략에서는 중요한 가치를 갖지만 대륙세력의 팽창을 봉쇄하는 측면에서는 중요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대만은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맥아더의 발언에는 당시 미국이 ‘원호형 전략방위선’에 대만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까닭이 드러나 있다. 대만이 제외된 까닭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점령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신생 사회주의국가로 등장한 중국의 해군력이 매우 미약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미국은 미약한 해군력밖에 없었던 중국을 굳이 봉쇄하기 위해서 대만을 점령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조선)반도는 미국의 전후 태평양지배체제에서 어떠한 전략적 가치를 가졌던 것일까?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조선)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한(조선)반도 정세를 인식하는 데서 중요한 문제다.

미국의 지배전략구도에 따르면, 한(조선)반도는 미국의 아시아대륙과 태평양이 만나는 경계지대에 위치한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그 경계지대에 이른바 ‘반공방파제(anticommunist bulwark)’라는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들에게 한(조선)반도는 대륙침략의 교두보가 아니라 아시아대륙에서 일어서는 공산주의세력의 확산을 막아주는 ‘반공방파제’였던 것이다. 맥아더의 참모였던 윌리엄 크라이스트(William E. Christ)가 지적한 대로, 미국의 전략가들은 “만일 코리아가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경우, 만주와 중국과 일본은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미국의 전략가들이 한(조선)반도를 ‘반공방파제’로 삼았던 데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아시아의 사회주의화보다도 유럽의 사회주의화를 우선적으로 저지해야 하는 문제가 미국에게 급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의 ‘반공방파제’인 한(조선)반도를 지켜내야 유럽의 사회주의화를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명백하게도, 당시 미국의 주적은 서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소련이었으며, 미국의 전략적 비중은 사회주의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던 유럽에 실리고 있었다. 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에 따라 미국은 전후경제복구라는 명분으로 자본주의세계시장을 미국 주도로 재편하는 한편, 전후 사회주의세력이 강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사회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7년 7월에 ‘마샬계획(Marshall Plan)’을 채택하였고, 1948년에는 유럽의 자본주의국가들을 묶어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를 창설하였으며, 1949년에는 유럽의 제국주의 군사동맹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창설하였다.

한(조선)반도의 ‘반공방파제’를 유럽의 사회주의화 저지에 이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맥아더는 1951년 3월 20일에 열렸던 미국 연방하원의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는 한국(조선)전쟁에서 총을 들고 유럽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만일 미국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전쟁에서 패한다면 유럽의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시아의 반공전쟁에서 승리할 때 유럽은 전쟁을 피할 수 있으며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의 그러한 전략적 판단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미국의 전후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 흐르고 있었던 전반적인 기조였다. 1946년 3월 20일에 작성된 미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일차적 목표는 코리아에서 소련의 지배권을 저지하는 것이고 코리아의 독립은 부차적이므로 앞으로 몇 해 안에 코리아에 완전한 독립을 주는 것은 미국의 국익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아시아의 사회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한(조선)반도를 분할․점령하여 ‘반공방파제’로 만들고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장악하였음을 말해준다.

5. 주한미군 철군은 ‘반공방파제’ 포기가 아니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는 한(조선)반도에 주둔하는 외국군을 철군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1949년 5월 20일 미국 국무부는 한(조선)반도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에 주둔하는 미군을 철군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은 1949년 5월 28일부터 주한미군 철군을 서둘렀고 6월 29일에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로써 미군장교 약 500명이 주한미군사고문단(Military Advisory Group in Korea)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주한미군 철군은 1949년에 일어난 돌발사건이 아니다. 주한미군 철군은 1947년부터 이미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1949년은 그들이 수립한 전략이 실행에 옮겨진 시점이다.

한(조선)반도에 미군 지상군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에게 전략적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의견이 1947년부터 미국의 전략가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이것은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의 구도에서 한(조선)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한 데 근거하여 내린 판단이었다.

한국(조선)전쟁에 야전사령관으로 나섰던 미8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매튜 릿지웨이(Matthew B. Ridgway, 1895-1993)에 따르면, 1947년 9월 미국 합동참모본부에서 연합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해군제독들인 리하이(William D. Leahy, 1875-1959)와 니밋츠(Chest W. Nimitz, 1885-1966), 그리고 초대 공군참모총장 스파앗츠(Carl A. Spaatz, 1981-1974)가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지시에 따라 작성한 전략보고서는 한(조선)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킬 전략적 이익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주한미군 주둔문제와 관련하여 1947년에 미국 합동민사위원회(Joint Civil Affairs Committee)가 내린 판단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코리아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는 거의 없다. 극동에서 적대행위가 발생할 경우, 코리아 주둔 미군은 미국에게 군사적 부담이 될 것이다. 적대행위가 개시되기 이전에 미군을 근본적으로 보강하지 않는다면 미군은 지탱할 수 없지만, 그러한 보강조치는 군사적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1947년 미국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는 합동민사위원회의 판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발적 철군을 요구하였다.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공군과 해군에 의해 그 승패가 결정될 것이므로 코리아에 미군 지상군을 주둔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 코리아 주둔 미군 4만5천명은 막대한 유지비를 요구한다. 소련이 일본의 안보를 위협할 정도로 코리아에서 군사력을 강화하지 않는 한, 코리아 주둔 미군을 다른 곳에 배치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미군이 지금 자발적으로 철군하지 않고 갑자기 철군할 경우,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실추될 것이다.”

위의 자료들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군이 그들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 따라서 추진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전후 태평양지배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조선)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일본열도와 유구열도의 전략적 가치보다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였다. 미국이 전후 태평양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서 가장 중시한 것은 ‘원호형 전략방위선’이었고, 한(조선)반도의 ‘반공방파제’는 그 방위선의 외곽에 설치한 하나의 방책(barricade)이었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원호형 전략방위선’을 중시했다고 해서, ‘반공방파제’를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외곽 방책이 무너지면 방위선에 구멍이 뚫리게 될 것이므로, 미국으로서는 ‘반공방파제’를 계속 붙들고 있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에 있는 전국언론회관(National Press Club)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 Acheson, 1893-1971)이 ‘미국 정책의 시험대에 놓인 아시아의 위기(Crisis in Asia: An Examination of U.S. Policy)’라는 제목으로 연설할 때, 극동의 ‘전략방위선’을 언급하면서 한(조선)반도를 지적하지 않았던 것은 미국이 한(조선)반도를 포기한 것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원호형 전략방위선’과 ‘반공방파제’의 경중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공방파제’가 무너지면 ‘원호형 전략방위선’에 구멍이 뚫리게 되어 있는데도, 미국이 1949년에 주한미군을 철군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반공방파제’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주한미군을 철군한 미국의 행동은 겉으로 보면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한미군을 철군한 미국의 속셈은 ‘반공방파제’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니었다. 1949년의 주한미군 철군과 관련하여 지적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전략목표는 한(조선)반도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한(조선)반도가 사회주의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그러한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38도선 이북지역에 주둔하는 소련군을 철군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미국의 전략가들은 한(조선)반도의 사회주의화가 소련군 주둔으로 촉진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무력을 사용하여 소련군을 철군시킬 수는 없었으므로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련군을 철군시키기 위한 정치적 해결방도는 유엔 결의였다. 미국이 자기의 거수기 노릇이나 하고 있었던 유엔을 막후에서 조종하여 한(조선)반도에 주둔하는 외국군을 철군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까닭은, 38도선 이북지역에 주둔하는 소련군을 철군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둘째, 미국은 한국군의 군사력을 강화해놓고 나서 주한미군을 철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국 전쟁성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군사전략을 추진한 바 있으며, 1947년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특사로 동아시아를 순방하였던 미국 육군 중장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1897-1989)는 8월 26일 서울을 방문하고 워싱턴에 돌아가서 9월 9일에 트루먼에게 「대통령에게 제출하는 코리아 보고서(Report to the President: Korea)」를 보냈다.「웨드마이어 보고서(Wedemeyer Report)」로 알려진 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북(조선)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하여 남(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확대하고 남(한국)의 군사력이 강화되기까지 미군의 잠정적 주둔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웨드마이어가 지적한 대로, 미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경비대’를 발족시켰고, 체계적인 군사장비공급과 증강훈련으로 육성하여 1948년 11월 30일에는 정규군으로 개편하였다.

셋째, 미군은 주한미군을 철군한 뒤에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도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장악되어 있는데, 1949년의 상황에서는 그 장악도가 극에 이르렀을 것이다. 주한미군이 철군한 뒤에도, 미군은 한국군 사단, 연대, 대대까지 군사고문관을 조밀하게 배치하여 한국군을 지휘․통제․훈련하였다. 미국의 ‘반공방파제’가 무너지고 있었던 1950년 7월 14일 다급해진 이승만은 “현재의 적대상태가 계속되는 기간 동안(during the period of the continuation of the present state of hostilities)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한다.”는 공식서한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작전지휘권을 넘긴다는 공식서한을 보낸 그날은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기 열흘 전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오래 전부터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 공식서한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넷째,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군하면서도 이승만 정권의 이른바 ‘북벌작전’을 막 뒤에서 지휘․통제하였다. 주한미군이 철군한 1949년 한 해 동안 한국군이 38도선에서 크고 적은 무력공격을 감행한 ‘북벌작전’은 무려 2천6백17회나 되었다. ‘북벌작전’의 실질적 지휘자가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장악한 미군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6. 동아시아 정치지형을 바꾼 두 지역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동아시아대륙의 두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한(조선)반도와 중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그것이다. 미국이 ‘원호형 전략방위선’ 외곽에 배치한 ‘불침항모’와 ‘반공방파제’는 전쟁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각각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은 중국인민해방군과 국민당군이 1946년 6월말부터 재개한 제3차 내전으로 흔히 ‘국공내전(國共內戰)’이라고 불린다. 제1차 내전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제2차 내전은 1927년부터 1937년까지 각각 진행되었다. 1937년 7월 7일 일제가 조작한 ‘노구교사건’에 의해서 시작되어 1945년 9월 3일까지 진행된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중․일 전쟁이다. 중․일 전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을 반대하고 일제의 점령지를 탈환하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중․일 전쟁이 끝난 뒤에 중국대륙에서는 제3차 내전이 일어났다. 중국 내전의 기본성격은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이 충돌한 혁명전쟁(revolutionary war)이었다.

이처럼 중국대륙에서 제3차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한(조선)반도 역시 전쟁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은 38도선에서 벌어진 교전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벌어진 교전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중국대륙에서 일어난 제3차 내전과 달리 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은 미국이 지휘․통제하는 한국군과 미국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조선인민군 사이에서 벌어진 교전이었으므로 내전이 아니라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역사연구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한국(조선)전쟁 이전까지 38도선에서는 크고 적은 교전이 계속되었는데, 1950년 초에 일어난 옹진반도 전투와 개성 송악산 전투처럼 2천-3천 명 연대병력이 교전한 대규모 교전도 있었다. 그와 더불어 38도선 이남지역에서는 ‘남조선인민유격대’와 ‘군경토벌대’ 사이에서 크고 적은 교전이 벌어졌다. 38도선에서 벌어진 교전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벌어진 교전을 포함한 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에서 쌍방은 모두 합해서 약 10만 명 전사자를 내었다. 한국(조선)전쟁에 야전군사령관으로 나섰던 백선엽의 증언에 따르면, 한(조선)반도의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9년 5월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백선엽, 『군과 나』, [서울: 대륙연구소, 1989], 29쪽)

1949년부터 전개된 전쟁상황은 한국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의 동족상잔이 아니라 미군에 의해서 조직․육성되고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한국군과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을 해방하려는’ 조선인민군이 교전을 벌인 것이었다.

격화되고 있었던 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과 중국대륙의 내전에서 이승만 정권과 장개석 정권이 각각 패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1948년 11월 중국인민해방군은 만주의 전략도시 심양을 점령하였으며, 1949년 2월부터는 인민해방군의 병력수가 국민당군의 병력수를 능가하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장개석 정부와 국민당군은 대만으로 패퇴하였다. 미국의 ‘불침항모’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7월 10일 미군 합동참모본부 합동정보단(Joint Intelligence Group)이 작성한 1급 비밀보고서는 대만으로 달아난 장개석이 남(한국)으로 도피하려는 의사를 밝혔는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남(한국)이 피난처로는 적당하지 않으며 임시 피난처밖에 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월간중앙』 2003년 4월 호)

명백하게도, 미국의 ‘반공방파제’와 ‘불침항모’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반공방파제’와 ‘불침항모’를 구원하기 위해서 1949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미국의 전쟁준비는 다음과 같이 추진되었다.

1949년 초부터 백악관, 국무부, 합참본부, 극동군사령부에는 한(조선)반도 전쟁위기에 관한 보고들이 연이어 제출되고 있었다. 미국은 1950년 1월 29일에 한․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1950년 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남(한국)과 대만이 군사적 위협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출동시키라는 긴급명령을 내리는 한편, 6월 1일자로 연방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한(조선)반도의 위기상황을 지적하였다. 1950년 4월 14일자로 작성된 미국의 「국가안전보장각서 제68호(NSC-68)」는 미국의 군사력 증강을 요구하였으며, 중국을 봉쇄하고 중․소 동맹관계를 분리시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트루먼은 국무부 고문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를 대통령 특사로 ‘반공방파제’의 위기현장에 급파하였고, 덜레스는 1950년 6월 17일부터 22일까지 38도선을 시찰하고 도쿄로 가서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를 만났다. 덜레스는 맥아더와 함께 의견을 교환하였고, 트루먼에게 현황을 보고하였다.

7. 한(조선)반도 전쟁상황은 어떻게 조․미 전쟁으로 전면화되었는가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이 집필하였고 미국 육군성 출판부가 1961년에 워싱턴에서 펴낸 자료 『한국(조선)전쟁에 참전한 미국 육군(U.S. Army in the Korean War)』에 따르면, 6월 25일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교전이 재개되었고 시차를 두고 전선이 확대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1990년에 출판된 자신의 역저 『한국(조선)전쟁의 기원, 제2편(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I)』에서 당시 남(한국)의 여러 신문과 『뉴욕타임스』의 보도들, 그리고 한국군 육군본부의 발표를 종합하여 지적한 바에 따르면, 옹진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한국군 제17연대는 6월 24일에 전투를 개시하여 해주까지 북진하였다고 한다. 1949년 5월 이후 38도선 일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교전상태에 있었으므로 한국군 군부는 6월 25일에 38도선에서 대규모 교전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Chi-Op Lee, Call Me “Speedy Lee”: Memoirs of a Korean War Soldier, [서울: 원민출판사, 2001], 1쪽)

주한미국대사 고문이었던 에버릿 드럼라이트(Everett Drumright)는 1950년 7월 5일자로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북(조선)이 갑작스럽게 반격(counterattack)을 가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남(한국)이 급속도로 붕괴(collapse)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미국의 ‘반공방파제’는 1950년 6월 25일 38도선에서 재개된 대규모 교전으로 치명타를 입고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

6월 27일 밤 11시, 조선인민군 제3사단 9연대가 가장 먼저 서울에 들어섰고, 곧 이어 28일 새벽에는 제4사단이 서울에 들어섰다.

1948년 9월 9일에 선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제103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라고 명기하였으므로, 1950년 당시에 북(조선)의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북(조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를 평양으로 변경한 것은, 1972년 12월 17일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제149조에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950년 6월 25일 당시 한(조선)반도에서는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한국군과 미국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조선인민군이 수도를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북(조선)의 견지에서 보면, 조선인민군의 서울점령은 북(조선)이 자기의 수도를 무력으로 탈환한 것이 된다. 북(조선)의 전사(戰史)는 그것을 ‘서울해방작전’이라고 부르고, 6월 25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개된 제1차 작전으로 기록하였다.

세계전쟁사가 말해주듯이, 전쟁은 수도를 장악한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인민군의 수도점령은 1949년부터 계속된 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이 이승만 정부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은 수도점령 직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1950년 6월 28일 도쿄에서 군용기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내린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는 한강 이남에 형성된 전선을 둘러보며 전황을 시찰하였다. 전선을 시찰하면서 그는 ‘반공방파제’의 붕괴를 막아보려고 결심하였을 것이다.

맥아더가 한(조선)반도 전황을 백악관에 긴급 보고한 직후인 6월 30일 오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주일미군 해군 군함을 동원하여 북(조선)의 해안을 봉쇄하고, 주일미군 지상군 2개 사단을 한(조선)반도 전선에 급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전면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이었다.

북(조선)은 미국이 전면전으로 확전하기 전에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조선해방’과 조국통일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점령 이후 사흘 동안 머물면서 정치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던 조선인민군은 미군 제24사단이 부산에 상륙한 그날, 이미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가 모두 끊어진 한강을 도하하여 기동전을 벌이면서 부산을 향하여 고속으로 남진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수도탈환’에 의하여 ‘남조선해방’과 조국통일을 실현하려 했던 원래의 작전목표가 미국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하여 ‘남조선해방’과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작전목표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당시 전범국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 제24사단 스미스(Charles B. Smith)부대는 트루먼의 전면전 명령에 따라 1950년 7월 1일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미군 병력이 부산에 상륙한 1950년 7월 1일부터는 한(조선)반도에 출병한 미군과 미군의 지휘․통제를 받는 한국군을 한편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양대 무력 사이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1950년 7월 1일한(조선)반도의 전쟁상황은 조․미 전쟁으로 전면화되었다. 국무장관 애치슨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은 한(조선)반도에서 ‘고맙고, 기다리던 전쟁(thankful and waited war)’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북(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북(조선)은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을 해방하는 조국해방전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북(조선)이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가진 조․미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 전쟁의 목적이 민족해방이 아니라 ‘국토완정’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조선)전쟁의 본질은 북(조선)의 ‘남조선해방전략’ 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8. ‘영예로운 철군’과 ‘불가피한 정전’ 사이에서 동요한 미국

미국은 한국(조선)전쟁을 벌이면서도 한(조선)반도 전역을 아시아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장악하려는 목적을 추구하지 못하였다. 한(조선)반도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951년 1월 10일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는 미군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긴급전문에서 “현재 조건에서는 남(한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힘들다. 유엔군 철군은 불가피하다. 한(조선)반도에서 철군할 것인지 계속 한(조선)반도를 지킬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적었다.

한국(조선)전쟁에서 미군 전사자가 2만 명 선을 넘어 2만1천3백 명에 이르렀던 1951년 6월말, 미국은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계속 불리해지는 전세로 궁지에 몰린 미국은 ‘영예로운 철군(honorable withdrawal)’이냐 ‘불가피한 정전(inevitable armistice)’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한국(조선)전쟁에서 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워싱턴에서는 미국이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논란이 벌어졌다. 1951년 미국 연방상원에서 열렸던 ‘극동의 군사상황(Military Situation in the Far East)에 관한 청문회’에서는 한국(조선)전쟁을 끝내는 문제가 집중적으로 토론되었다. 그 청문회는 이른바 ‘맥아더 청문회(MacArthur Hearings)’라는 이름으로 역사기록에 남아있다.

그 청문회에서 제기된 것은, 한(조선)반도에서 미군을 철군하는 것으로 한국(조선)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패배주의적 견해였다. 미군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 of Staffs) 의장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ley, 1893-1981)는 청문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미국이 코리아에서 전쟁을 벌이는 일이 없기를 늘 희망했다. 그것이야말로 미국의 코리아 점령과 관련하여 우리가 코리아에서 손을 떼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전략적으로 볼 때, 코리아는 전쟁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청문회에서 연방상원의원 존 스파크먼(John J. Sparkman, 1899-1985)이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미국이 한(조선)반도와 대만에 대하여 이해관계가 없는지를 물었을 때, 애치슨은 이해관계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4년 전만 해도 주한미군의 잠정적 주둔을 권고하는 내용의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트루먼에게 제출하였던 웨드마이어도 그 청문회에서 남(한국)에서 미군을 철군해야 하며, 미군 주둔을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라고 묘사하면서 비관적 견해를 내놓았다.

‘맥아더 청문회’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이 내놓은 종전방안은 대체로 ‘영예로운 철군’이라는 선택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미국은 ‘영예로운 철군’과 ‘불가피한 정전’ 사이에서 동요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동요와 논란은 ‘영예로운 철군’이 아니라 ‘불가피한 정전’으로 결론을 맺었다. ‘영예로운 철군’은 미국의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정전협정 체결로 ‘제국의 체면’을 살리면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 미국의 최종 결론이었던 것이다.

1951년 7월 10일 오전 11시 첫 정전회담이 개성에서 열렸다. 그날 조선인민군은 첫 정전회담에 참석하는 미군 차량에 항복을 뜻하는 백기를 달도록 하고, 미군측 회담대표 5명을 제외한 모든 미군요원들도 역시 항복을 뜻하는 백색완장을 두르게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4만4천866 명의 미군 전사자를 내었던 미국은 한국(조선)전쟁에서 그보다 훨씬 많은 5만4천246 명의 미군 전사자를 내었다. 미국은 무너지는 ‘반공방파제’를 되살리기에는 너무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하는 수 없이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고, 그로써 ‘반공방파제’를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 북(조선)의 표현을 빌리면, “현대의 가장 야만적이고 침략적인 제국주의국가”는 조․미 전쟁에서 패하였던 것이다.

9. 한국(조선)전쟁 이후 태평양지배체제의 완성

한국(조선)전쟁 이후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은 남(한국)을 미국의 ‘반공방파제’로, 대만을 미국의 ‘불침항모’로 계속 유지하면서 ‘원호형 전략방위선’을 보강․확장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반공방파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불침항모’가 침몰위기에 내몰린 뒤에 미국의 전략은 태평양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한국(조선)전쟁에서 미군의 패색이 짙어지고, 워싱턴에서 열린 ‘맥아더 청문회’에서 패배주의적 견해가 제기되었던 1951년에 미국은 아시아․태평양국가들과 연쇄적으로 동맹관계를 맺었다. 미국은 일본과 안전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필리핀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함께 3국 태평양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것이 태평양지배체제를 공고화한 첫 걸음이었다.

주목할 것은, 미국이 일본열도와 오키나와를 ‘태평양방위거점’으로 만드는 일에 나선 것이었다. 일본열도와 오키나와를 미국의 ‘태평양방위거점’으로 만드는 일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50년 9월 14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국무부에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비밀교섭을 지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 비밀교섭은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49개 나라들이 미국이 입안한 대일강화조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일전에서 전쟁당사국이었던 소련은 미국과 의견이 충돌하여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거부하였고,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도 대일강화조약 체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 따라 추진된 대일강화조약 체결은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위한 사전준비였다.

미국과 그 추종국들이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후처리를 마감한 것은,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일본을 부동의 ‘태평양방위거점’으로 내세우기 시작하였음을 뜻한다. 전범국 일본을 ‘태평양방위거점’으로 내세우려는 미국의 의도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51년 9월8일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몇 시간 뒤에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조인하였던 미․일 안전보장조약이었다. 그 조약 제6조는 “일본국의 안전에 이바지하는 것과 동시에 극동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육군, 공군, 해군이 일본국에서 시설과 구역을 사용하도록 허용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조항에서 중시할 대목은, 미국이 미․일 군사동맹의 범위를 일본열도가 아니라 극동지역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국이 한․미 군사동맹의 범위를 한(조선)반도로 국한시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 대조적인 측면은 미국의 견지에서 볼 때, 남(한국)과의 군사동맹이 일본과의 군사동맹에 종속변수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반공방파제’는 미국의 ‘태평양방위거점’에 딸려있는 종속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구도에서 볼 때, 한(조선)반도와 일본열도는 그러한 차별성을 갖는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과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1983년 1월에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표현하였듯이 “미․일 두 나라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한편, 대만은 1952년 4월 28일에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1954년 12월에는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의 ‘불침항모’라는 지위와 역할을 계속 유지하였다.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한 시점은 1957년 7월이었다. 그때 미국은 도쿄에 있던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태평양군사령부(CINCPAC)를 창설하였으며, 도쿄에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서울로 이동시켰다. 극동군사령부가 행사하였던 지휘권은 태평양군사령부 소속의 해당 구성군사령관에게 분할․이양되었다. 미국은 태평양군사령부를 창설함으로써 거대한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1950년대에 붕괴와 침몰의 위기에 몰렸던 미국의 ‘반공방파제’와 ‘불침항모’를 무력으로 ‘방어’하면서 일본을 ‘태평양방위거점’으로 내세운 미국이 거대한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한 뒤로 거의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동아시아의 정세는 질적 변화를 거듭하였다.

오늘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이 추진되는 범위는 1950년대에 설정된 극동지역에서 벗어나서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그리고 저 멀리 중동까지 포함하는 지구의 절반으로 확장되었다. 태평양군사령부는 태평양 연안 43개 나라와 남극, 북극까지 포함되는 지구표면의 52%에 이르는 1억6천9백만 평방킬로미터를 작전구역으로 하고, 세계 인구의 60%를 작전대상으로 삼고 있다.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의 대상과 범위를 확장한 원인과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에서 자본주의 산업생산력이 크게 발전된 사정과 관련이 있다. 아시아에서 자본주의 산업생산력이 발전되는 것은 석유자원수요와 상품교역량을 급격히 증대시켰다. 석유자원수요를 충족시켜주면서 막대한 이윤을 긁어모으려는 것은 미국의 석유독점체들의 야욕이다. 미국의 석유독점체들이 중동 산유국들에서 ‘투자’ 명목으로 약탈한 석유자원을 남(한국), 일본, 중국과 대만, 그리고 필리핀에 팔아 넘겨 막대한 이윤을 긁어모으려면 페르시아만(Persian Gulf)에서 인도양을 건너고 말래카해협을 거쳐 일본열도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해상원유수송로를 안전하게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남(한국), 일본, 대만에서 생산한 상품들과 중국, 필리핀에서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서 생산한 저가상품을 미국으로 실어가고, 미국의 상품을 태평양연안국들에게 팔려면 태평양을 횡단하는 장거리 해상교통로를 안전하게 장악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태평양 해역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원유수송로와 해상교통로는 자본주의 국제시장에서 미국 독점체들의 이윤획득을 지켜주는 전략통로이며, 미국 제국주의의 생명선이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전략구도에서 볼 때, 한․미 동맹체제와 미․일 동맹체제는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체제들이다. 다만 그 두 체제가 다른 점은, 한․미 동맹체제가 미국 제국주의와 제3세계 예속국 사이에서 형성된 지배․예속체제인 반면에, 미․일 동맹체제는 제국주의국가들 사이에 형성되는 상호결탁체제라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군사기술력이 발전하면서 해군과 공군의 작전범위가 크게 확장된 사정과 관련이 있다. 미국 해군과 공군의 작전범위가 확장될수록, 태평양지배체제의 범위도 확장된다. 그리하여 오늘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공모함 전투단과 장거리 전략폭격기를 앞세워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하여 태평양지배체제를 영구히 유지하는 것이다. 대륙침략에는 지상군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지만, 대양지배에는 해군과 공군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해양지배력은 해군과 공군에게서 나온다. 여기서 미국이 일본열도에서 유구열도로 이어지는 ‘태평양방위거점’을 계속 강화하는 까닭이 밝혀진다.

10.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와 미․일 동맹군의 증강

1990년대 이후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북(조선), 중국, 중앙아시아, 코케이서스산맥(Caucasus Mountains), 중동, 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이른바 ‘불안정의 원호(circular arc of instability)’에 대치하는 전쟁체제로 정비․보강되고 있다. 하와이의 스미스 기지(Camp Smith)에 6층 건물로 서있는 태평양군사령부의 전자통신장비는 2004년 4월 새로운 첨단전자통신장비로 전부 교체되었고, 그 건물은 ‘니미츠-맥아더 태평양군사령부 센터’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최근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강화해 가는 방향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00년 이후 미국은 해군력을 비상히 증강시켜왔다. 해군력 증강은 2002년 5월 미국 국방부가 발표한 이른바 ‘방위계획지침(Defense Planning Guidance)’에서 정립된 바 있는 미국 본토 방위, 4개 지역의 분쟁억제, 1개 전장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나머지 1개 전장에서 신속히 승리하는 새로운 전략적 전쟁개념에 의거하여 진행된 것이다.

2002년 미국 해군 참모총장 버논 클라크(Vernon Clark)는 해군 전력구조를 해상공격, 해상방위, 해상기지화의 3대 요구에 맞게 개조하는 내용의 전략지침을 ‘해양력 21(Sea Power 21)’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 전략지침은 2003년 9월 해군장관 고든 잉글런드(Gorden England)의 승인을 받아 공식 채택되었다.

2004년 6월부터 8월까지 5대양 전역에서는 미국 해군의 7개 항공모함 전투단, 전함 50척, 함재기 6백 대, 병력 15만 명이 출동하는 사상 최대의 해상훈련 ‘여름박동(Summer Pulse) 2004′가 실시되고 있는 중이다. 그 5대양 해상훈련은 미국 해군이 새로 개발한 항공모함 전술교리인 ‘함대대응계획(Fleet Response Plan)’에 따른 해상기동훈련인데, 태평양과 대서양에는 각각 항공모함 전투단 3개가 출동하였고, 페르시아만에는 항공모함 전투단 1개가 출동하였다. ‘함대대응계획’이라는 전술교리가 ‘해양력 21′이라는 전략지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사히신붕(朝日新聞)』 2004년 7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해군은 2-3년 안에 태평양에 항공모함 전투단 1개를 추가로 배치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태평양에는 2개의 항공모함 전투단이 배치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항공모함 전투단을 출동시키는 주일미해군의 요코스카(橫須賀)기지는 확장․보강될 것이다. 『아사히신붕』 2004년 7월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해군은 ‘해양력 21′에 따라 2007년부터 서태평양에 해상기지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디펜스 뉴스(Defense News)』 2004년 6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 해군은 아시아대륙에 가장 가까운 미국 영토인 괌(Guam)에 공격용 잠수함들을 추가로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해군력 증강조치에 불안을 느끼면서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는 중국이다. 미국 해군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 해군은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제1단계로 ‘근해방어전략’을 추진하였고,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제2단계로 ‘근양방어전략’을 추진하는 중이라고 한다.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중국도 태평양에 자국의 ‘전략방위선’을 그어놓았다. 중국은 그것을 ‘섬들의 고리’라는 뜻의 ‘도련(島連)’이라고 부르는데, 제1단계의 ‘근해방어전략’은 일본열도에서 출발하여 유구열도, 대만, 필리핀군도, 보르네오(Borneo)로 이어지는 제1도련, 곧 남중국해의 전략방위를 위하여 추진되는 것이고, 제2단계의 ‘근양방어전략’은 북마리아나군도, 괌, 캐롤라인군도(Caroline Islands)를 포함하는 지역까지 확대된 제2도련의 전략방위를 위하여 추진되는 것이다. 중국이 자기의 ‘전략방위선’을 계속 확장해나가는 것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2003년 10월 중국은 다른 나라 해군과 합동군사훈련을 하지 않는 전통을 깨고, 파키스탄 해군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인민해방군이 사상 처음으로 외국군대와 합동으로 실시한 군사훈련이었다. 중국은 2004년 3월에도 서해(중국 이름으로 황해)에서 프랑스 함대와 해상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둘째, 미국은 미․일 동맹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태평양지배체제를 공고화시켜왔다. 이러한 공고화 추세는 미․일 동맹군의 지속적인 증강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그 결과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해군력과 공군력이 체계적으로 강화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1986년부터 실시해온 ‘날카로운 모서리(Keen Edge)’라는 이름의 미․일 합동군사훈련은 1994년 11월에 2만6천 명이 동원된 최대규모로 실시되었는데, 훈련목표는 주일미군과 일본 자위대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증강하는 데 집중되었다.

1996년 4월 17일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과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는 미․일 동맹체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미․일 안보공동선언-21세기를 향한 동맹’을 발표하였다. 이듬해인 1997년 9월 23일 미․일 두 나라는 미․일 방위협력지침(Guideline)을 19년만에 개정하여, 일본 자위대의 작전범위를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 크게 확대하였다. 개정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 따라 1997년 11월에는 미국 제7함대와 일본 해상자위대가 동해에서 대규모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주일미군 공군과 일본 항공자위대의 합동훈련에 주한미군 공군이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현재 미․일 두 나라가 공동개발하고 있는 해상배치형 요격미사일은 2005년에 시제품을 완성하여 발사실험을 할 것으로 예견된다. (『요미우리신붕(讀賣新聞)』 2004년 7월 6일자 보도)

2004년 6월 27일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이루마(入間)기지에서 일본 방위청과 자위대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던 주일미군사령관 토머스 왜스코(Thomas Wasco)의 말대로, “일본은 방패, 미국은 창”이라는 표현이 현실로 되었다.

이처럼 미국이 주도하여 미․일 동맹군을 체계적으로 증강하는 가운데, 미․일 두 나라는 사실상 사문화한지 오래 되었지만 전쟁포기를 규정한 일본 헌법을 개정하는 요식행위만 남겨두고 있다. 전범국의 전쟁수행권을 명실공히 복권시키기 위한 마지막 절차인 일본 헌법 개헌은 이제 시간문제인 것이다. 2003년 8월 일본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는 자민당 창당 50주년이 되는 2005년 11월까지 일본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였다. 2004년 7월 21일 미국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L. Armitage)는 워싱턴을 방문한 일본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전쟁포기를 규정한 일본 헌법 제9조가 미․일 동맹관계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하였다. (『연합뉴스』 2004년 7월 22일자)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대로, 지금 미국은 주일미군사령부를 미국의 아시아․태평양지배전략을 수행하는 전선사령부로 개편하고 있는 중이다. 『요미우리신붕』 2004년 7월 20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지금까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아온 주일미군사령부에게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줌으로써 미․일 동맹군의 작전능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한다. 『아사히신붕』 2004년 7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2003년 10월 주일미군 미사와(三澤) 기지에 신설된 초계정찰항공사령부는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군사령부의 기능을 넘겨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미국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 더글러스 페이스(Douglas Feith)가 밝힌 대로, 미국은 주일미군사령부를 아시아․태평양의 전선사령부로 개편하는 것과 더불어 오스트레일리아와 싱가포르에 신속기동군 실전훈련기지를 건설할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붕(日本經濟新聞)』 2004년 2월 22일자) 나의 판단으로는, 그가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와 더불어 남(한국)과 필리핀에도 신속기동군 실전훈련기지를 건설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것으로 보인다.

11. 태평양지배체제 완성 이후 ‘불침항모’의 운명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을 해방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던 1958년 8월 심각한 위기에 빠진 대만은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의 금문도(金門島)에 44일 동안 50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붓는 집중포격을 가했으며, 미국의 군수뇌부는 중국에 대한 제한적인 핵공격을 논하였다.

그 이후 ‘불침항모’의 침몰위험은 줄어들기는커녕 증가되어왔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미국은 자기의 교전상대국으로서 적대관계를 유지해왔던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불침항모’의 침몰위험을 가중시켰다. 중․미 관계의 정상화는 곧 미국․대만 동맹체제의 파기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9일 중국 총리 주은래(周恩來, 1898-1976)가 중․미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Henry A. Kissinger)와 만난 회담에서 미국에게 세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요구는 미국이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둘째 요구는 대만 주둔 미군을 철군하는 최종시한을 설정하라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쟁이 끝나는 대로 곧 대만 주둔 미군병력 가운데 3분의 2를 철군할 것이며, 미․중 관계가 개선되는 것에 따라 나머지 병력도 철군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셋째 요구는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키신저는 이 요구에 대해서 “역사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변하였다.

키신저는 역사가 해결할 것이라고 모호하게 답변하였으나,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 폐지는 결국 현실로 되었다. 중․미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미국은 미국․대만 동맹체제를 유지하려고 버텼으나, 중국의 강력한 요구에 밀리는 바람에 1979년 1월 1일 중․미 국교를 수립하는 것과 더불어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을 폐지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대만에 설치해놓았던 첩보작전기지를 상실하였다.

1979년에 출판된 자서전 『백악관의 나날들(The White House Years)』에서 키신저는 대만 주둔 미군이 대만의 안보나 서태평양지역에서 진행되는 미군의 군사작전를 위해서 전략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애써 과소평가함으로써 상실과 패배를 은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대만과의 동맹체제를 폐지한 뒤에도 ‘불침항모’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공작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Jane’s Defence Weekly)』가 2001년 초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대만 동맹체제가 폐지된 뒤에도 미국 통신회사의 대만지사 직원으로 위장한 미군정보요원들이 대만군 양밍산 기지의 전자정보전 작전능력을 보강하는 작업을 비밀리에 담당하였다고 한다.

대만이라는 ‘불침항모’는 패권적 진출을 다그치는 중국의 거대한 힘 앞에서 침몰위기에 빠지고 있다. 만일 중국이 미국의 ‘불침항모’를 침몰시키고 대만을 통합한다면,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중국과 대만의 충돌위기, 그리고 미국의 무력개입은 계속되고 있다.

1995년 12월 19일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호와 호위함 4척이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이 폐기된 이후 17년만에 처음으로 대만해협에 출동하였다. 이것은 당시 중국이 ‘남경전구(南京戰區)’를 창설한 것에 자극을 받은 미국이 취한 군사행동이었다. 남경전구란 중국인민해방군의 기존 7개 군구(軍區)와는 별도로 창설되어 3군을 통합적으로 지휘하는 특별군구로서, 대만공격을 준비하는 대규모 실전부대다. 중국언론보도에 따르면, 남경전구는 대만공격을 담당하는 복건성, 절강성, 강서성을 제1분구로, 후방지원을 담당하는 강소성, 안휘성을 제2분구로 하여 편성되었는데, 제1집단군, 제12집단군, 제13집단군 병력 48만 명을 지휘하며, 대만해협을 봉쇄하기 위한 동해함대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중국은 대만 동부지역에 우회공습을 가하기 위하여 최신예 전투기 수호이 27기를 동남연안에 집중 배치하였다.

1996년 1월 중국언론은 조국을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대만과의 전쟁을 요구하는 중국인민해방군 군인들의 서한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쇄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1996년 한 해 동안 대만침공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훈련을 8차례나 실시하였다. 그 군사훈련은 1996년 3월 8일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주변 공해상 2개 해역에서 엠(M)-9 지대지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개시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 중국인민해방군은 3월 12일부터 대만해협 중앙선을 넘어서 해공군 합동 실탄사격훈련을 실시하였고, 3월 13일에도 대만을 겨냥한 지대지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강행하였다. 19일 새벽 중국인민해방군은 대만에 딸려있는 섬에서 1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무인도를 점령하는 3군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같은 날 미국 연방하원은 중국의 침공을 받을 경우 대만을 지원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며, 미국 연방상원은 3월 29일 대만과의 관계를 격상시키고 대만을 지원하는 ‘국무원대외관계수권법안’을 통과시켰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교전 직전 상황까지 가게 되자, 미국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와 니미츠호를 각각 주축으로 하는 두 개의 항공모함 전투단으로 구성된 특별전투함대가 필리핀 수빅만(Subic Bay)과 페르시아만을 각각 떠나 대만해역에 출동하였고, 일본도 해상자위대 소속 구축함 3척으로 구성된 특별순찰함대를 대만해역에 출동시켰다. 오키나와 가데나(嘉手納)기지에서 출격한 미군 전자정찰기 알씨(RC)135기는 중국에 대한 집중적인 정찰활동에 들어갔다.

1996년 7월부터 10월까지는 중․일 조어도(釣魚島)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면서 긴장의 파고를 높였다. 미국은 대만에게 패트리어트 요격미사일을 판매하였고, 일본은 항공자위대 전투기 발진기지를 대만과 가까운 지역으로 차츰 남하배치하였다. 대만도 60만 명 병력을 37만 명으로 줄이고 기술집약적 군대로 개편하는 등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미국 국방부가 2002년 4월에 공개한 ‘중국의 항공우주작전(Aerospace Operation)’이라는 보고서는, 앞으로 5-10년 안에 대만해협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 중국인민해방군은 재래식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거점을 타격하는 속전속결식 기습공격을 가해 미국의 대응조치가 나오기 이전인 48시간 안에 대만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은 2004년 7월에도 ’212 공정실험(工程實驗)’이라는 3군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군사훈련은 대만을 공격하기 위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에 맞서 대만도 3군 합동상륙작전훈련을 실시하였다.

언론들은 대만이 2006년에 헌법을 개정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 분리독립을 선언하려는 속셈을 가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에 대비하여 중국도 늦어도 2020년까지 대만을 통합한다는 전략목표를 세워놓았다.

12. 태평양지배체제 완성 이후 ‘반공방파제’의 운명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설치한 ‘반공방파제’는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되자 ‘반공(反共)’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하였다. 지난 시기 미국이 한(조선)반도에서 내세웠던 ‘반공’이라는 명분은 한(조선)반도가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진영으로 흡수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사회주의진영이 해체되었으므로 미국의 ‘반공방파제’는 더 이상 반공을 명분으로 하여 존립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미 동맹체제를 말할 때, 미국은 ‘반공’을 강조하지 않고 ‘북(조선)의 남침위협’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2000년 6월 15일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그에 따라 남북 사이에 화해, 교류, 협력이 확대되자, ‘북(조선)의 남침위협’이라는 명분마저도 차츰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6.15 공동선언에 의거하여 화해, 교류, 협력이 확대되면서 조국통일운동이 활성화된 오늘, 미국이 설치해놓은 ‘반공방파제’의 성격은 한(조선)반도의 통일을 막는 ‘반통일방파제’의 성격으로 대체되었다.

일반적으로, 군사동맹체제란 동맹체제로 결탁한 당사자들이 공동의 적을 설정하는 것으로 수립된다. 지난 시기 한․미 동맹체제가 설정하였던 공동의 적은 북(조선), 중국, 소련이었다. 그 공동의 적들 가운데서도 미국의 주적은 소련과 중국이었고, 남(한국)의 주적은 북(조선)이었다.

미국이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였고, 소련의 계승국인 러시아와 관계를 정상화하였으며, 남(한국)이 러시아와 중국과 각각 관계를 정상화한 이후, 한․미 동맹체제가 설정한 적으로 남은 것은 유일하게 북(조선)밖에 없다. 그리하여 미국은 북(조선)을 한․미 동맹체제를 위협하는 적으로, 동시에 핵무기 확산을 촉발시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핵확산금지체제(non-proliferation regime)를 위협하는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은 알카에다와 같은 반미테러조직들에게 북(조선)이 제조한 무기급 핵물질이 비밀리에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조선)은 한․미 동맹체제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핵확산금지체제를 동시적으로 위협하는 것에 비해서 중국은 대만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핵확산금지체제가 무너지고 대만이 중국에게 통합되면, 태평양지배체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지금 미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북(조선)의 ‘핵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의 대만통합을 저지하는 것이다.

지난 시기 중․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미국․대만 동맹체제의 폐지를 요구하였던 것처럼, 오늘 북(조선)도 ‘핵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군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북(조선)이 미국에게 주한미군을 철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한․미 동맹체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주목할 것은, 북(조선)이 ‘핵문제’를 주한미군 철군 문제와 결부시켜놓았다는 사실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활동을 재개한 북(조선)은 ‘핵문제’를 해결하려면 주한미군을 철군하라고 요구하면서 미국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대만의 분리독립책동에 자극을 받은 중국은 대만을 군사적으로 계속 압박하고 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의 ‘반공방파제’와 ‘불침항모’가 각각 붕괴와 침몰의 위기에 빠졌던 1950년의 정세와 유사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미국에게는 북(조선)이 재개한 핵활동을 시급히 중지시키고 중국의 대만공격계획을 저지하는 것이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로 나섰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1950년의 이중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국의 대응전략은 침몰하는 ‘불침항모’를 구원하는 것보다는 무너지는 ‘반공방파제’를 구원하는 것에 힘을 집중시켰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이중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국의 대응전략도 중국의 대만통합계획을 저지하는 것보다는 북(조선)의 핵활동을 중지시키는 것에 집중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북(조선)이 ‘핵문제’와 주한미군 철군문제를 결부시켜놓았으므로 미국이 북(조선)의 핵활동을 중지시키려면 주한미군을 철군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군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서 북(조선)의 핵활동을 중지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50년 전 ‘영예로운 철군’이냐 ‘불가피한 정전’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밀려갔던 미국이 오늘은 ‘영예로운 철군’이냐 북(조선)의 핵활동 중지냐 하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밀려간 것이다. 주목할 것은, 북(조선)은 미국이 ‘영예로운 철군’을 택하는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할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는 사실이다.

13. 태평양지배체제 변동기에 제기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 문제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대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에게 제시한 ‘핵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2004년 6월 8일자 보도에 따르면, 일본 총리 고이즈미는 선진 8개국(G8) 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5월 22일 평양에서 열렸던 조․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명백한 목표로 제시하였다고 말했다.

주목할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개념이 북(조선)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다음과 같이 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란 북(조선)과 남(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대한 핵전쟁위협을 포기하는 것이다. 핵전쟁위협 포기란 주한미군 철군과 더불어 적대정책 포기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둘째,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란 북(조선)과 남(한국)이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영세중립화(permanent neutralization)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한․미 동맹체제를 해체하는 한(조선)반도의 비동맹화(nonalignization)를 뜻한다.

셋째, 민족사적 측면에서 보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란 주한미군 철군으로 한․미 동맹체제가 해체된 영세중립 연방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자주적 평화통일의 지름길이다.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4년 5월 22일 평양에서 열린 조․일 정상회담에서 일본 총리 고이즈미에게 “6자회담에서 미국과 이중창을 부르고 싶다. 목이 쉴 때까지 미국과 노래하겠다. 주변나라들은 관현악으로 반주해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주변나라들의 관현악 반주에 맞춰 목이 쉬도록 미국과 이중창을 부르고 싶다는 문학적 표현에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 문제를 반드시 미국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북(조선)이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상대로 해결하려는 초미의 문제는 주한미군 철군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미국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경우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한(조선)반도가 비핵화되는 경우, 미국은 한․미 동맹체제를 잃어버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얻는 것밖에 없다. 미국은 위태로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핵확산금지체제를 안정화시킬 수 있으며, 태평양지배체제의 불안정한 요소도 제거할 수 있다.

대만을 통합한 중국의 팽창력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겠지만, 영세중립화된 통일국가는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협하는 주된 요인은 미․일 동맹군을 증강하여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지배전략과 대만을 통합하여 미국의 ‘전략방위선’을 뚫으려는 중국의 팽창전략이 충돌하는 것이다.

영세중립화된 통일국가는 충돌하는 중국과 미국의 경계지대, 중국과 일본의 경계지대에 놓인 것으로 하여 중․미․일 세 나라 사이에서 정치․군사적 완충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통일된 한(조선)반도의 정치․군사적 완충역할은 ‘태평양시대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요인이 될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시한 ‘핵문제’ 해결책인 한(조선)반도의 비핵화 방안을 미국이 받아들이고 주한미군을 철군함으로써 장차 한(조선)반도에 영세중립 통일국가가 건설되면, 그 새로운 통일국가는 미국의 표현을 빌리면, 동아시아의 긴장관계를 조절하는 ‘균형자’가 될 것이다. 21세기 동아시아의 균형자는 주한미군이 아니라 통일된 한(조선)반도다.

14. 글을 맺으며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은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변화된 정세에 맞게 정비․보강하는 기간이다. 미국의 정비․보강 공정은 2004년 7월 현재 거의 절반 정도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공정은 2007년부터 마무리 단계에 들어갈 것이다.

주목할 것은, 태평양지배체제의 정비․보강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정치․군사적 상황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물론 그 변화의 기본방향은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권과 독점체들의 경제적 이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증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 정비․보강은 한(조선)민족의 자주권과 이익에 전면적으로 배치된다.

현실이 말해주는 것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정비․보강하는 미국이 여전히 한․미 동맹체제를 장악한 채 제국주의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미국의 지배권에 예속된 친미예속세력 역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는 대로, 부시 정부는 한국군을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노무현 정부는 그 지령을 충실히 집행하는 중이다. 미국의 하위동맹국 스페인도 이라크에서 철군하였고, 남(한국)처럼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에 묶여있는 필리핀조차도 철군하였는데, 노무현 정부는 민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병강행에 나섰다.

요즈음 노무현 정부의 말과 행동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미국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면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일 동맹군의 작전능력을 확대․증강시키는 미국의 책동이 북(조선)을 자극하면서 한(조선)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격화시키고 있는데도,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우방과의 안보협력’을 마치 신성불가침영역처럼 여기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남(한국)의 금융부문, 기간산업부문, 농업부문, 서비스업부문 등에 침입한 미국의 거대자본들이 마구 긁어모아 해외로 빼돌리는 이윤수탈이 극점으로 다가서고 있으며, 그 결과 노동자와 농민, 서민의 생존이 전면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자신이 이른바 ‘내수경기 부진’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주한미군 기지이전사업에는 국고를 털어서 천문학적 비용을 아낌없이 퍼주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일부 민간단체의 조문방북을 가로막아 6.15 공동선언 실현에 장애를 조성하면서, 미국 연방하원에서 ‘대량탈북’을 유도하기 위한 이른바 ‘북(조선) 인권법안(North Korea Human Right Act)’이 통과되는 때에 맞춰 동남아시아에서 떠돌던 ‘탈북자’들을 서울로 대량수송하고 나서 ‘조용한 외교의 성과’를 자축하였다. 이것이 참여정부가 서있는 현주소다.

노무현 정부의 말과 행동은, 친미예속적이고 반민중적인 정권을 자주적 민주정권으로 교체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한(조선)민족의 자주성을 완성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충분조건’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다. 자주적 민주정권의 힘으로 한․미 동맹체제를 해체할 수 있으며, 6.15 공동선언 실현과업을 완수할 수 있으며, 남(한국)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주적 민주정권 수립은 자주적 통일국가 건설의 지름길이며, 남(한국) 민중이 사는 길이다.

이처럼 남(한국)에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고 한(조선)반도에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하여야 할 한(조선)민족에게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정비․보강되는 10년은, 그 기간에 기필코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고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943년부터 1953년까지 10년 동안 제국주의 지배체제가 교체되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정치․군사적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일제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된 한(조선)민족은 새로운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대동아지배체제’를 태평양지배체제로 교체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책동에 의해서 한(조선)반도는 분할․점령되었고, 한국(조선)전쟁을 겪어야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 정비․보강으로 정치․군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한(조선)민족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 민주정권을 수립하고 자주적 통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의 기회를 내일의 승리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한(조선)민족 자신의 노력과 투쟁에 달려있다. (2004년 7월 2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