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노무현의 실패, ‘이것’ 때문이었다 [서평] <법정 콘서트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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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노무현의 실패, ‘이것’ 때문이었다
[서평] 이시우·이정희의 국가보안법 대담 <법정 콘서트 무죄>
12.12.11 09:51l최종 업데이트 12.12.11 09:51l김경훈(insain)


▲ <법정 콘서트 무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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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법원은 끝내 박정근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북한의 대남기구가 작성한 인터넷 게시물을 리트윗하고, 이적표현물을 작성한 혐의였다. 북한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박정근의 항변은 묵살됐다.

11월 21일, 재판부는 “북한 체제를 상징하는 대상물을 소재로 욕설하거나 북한의 혁명가 가사를 바꾸어 표현하는 등의 방법으로 장난을 치는 듯한 내용의 게시글을 게재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반국가단체 활동에 호응하고 가세한 점이 인정된다”며 유죄 판결을 내렸다. 북한은 농담의 소재조차 될 수 없는 철저한 금기이며,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의 망령이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상징적 판결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보안법은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데 있어 ‘전가의 보도’였다. 박정근이 그랬듯 사소한 농담이나 실수도 국가보안법 앞에서는 어김없이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역사상 거의 최초로 완전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다. 무려 20개가 넘는 죄목으로 기소됐으나 “기념비적인 무죄판결”을 받은 사진작가 이시우 사건이 그것이다.

<법정 콘서트 무죄>는 저자인 최진섭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이시우 작가와 당시 그를 변호한 이정희 변호사(현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이정희와 이시우의 국가보안법 대담’이라는 부제처럼 두 사람은 ‘이시우 사건’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고, 나아가 국가보안법이 낳은 분단 체제를 논한다.

“서구식 ‘표현의 자유’로는 국가보안법 극복 못해”

2007년 4월 19일, 이시우 작가는 체포된다. 검찰은 이시우 작가가 미군기지를 촬영하고, 주한미군의 핵무기, 화학무기 등의 주제로 글을 써서 <통일뉴스>에 기고한 것 등이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그를 기소했다. 그러나 이시우 작가와 이정희 변호사는 효과적인 변론으로 마침내 2011년 10월 13일 대법원에서 공소사항 전부에 대해 완전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다.

이 서평에서 사건의 구체적 내용과 법 적용의 문제 등을 따질 생각은 없다. 검찰이 얼마나 무리한 기소를 했고, 그 과정에서 이시우 작가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이고 이시우 작가가 왜 국가보안법에 천착하는지 등은 독자들이 직접 이 책을 읽고 확인하기 바란다. 여기서는 <법정 콘서트 무죄>가 던지는 중요한 두 가지 통찰을 이야기하려 한다.

사실 국가보안법 철폐는 진보진영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조금은 식상한 주제다. 그러나 이 책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문제를 놓고 주목할 만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 첫째가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으로는 국가보안법을 극복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을 차용한다. 이를테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빌려 ‘국가안보에 명백한 위험을 끼치지 않는 한 북한체제 찬양을 법적으로 처벌할 필요는 없다’면서 국가보안법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식이다. ‘북한체제를 찬양하는 사상마저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허용되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 1월 12일 경기도 수원 남부경찰서 앞에서 박정근씨 구속수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박씨는 북 관련 트윗을 RT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찬양 및 고무’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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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정희 변호사는 “국가보안법은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 갖고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했다가 실패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 싸움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 갖고 극복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저는 한반도 상황에서 적이 눈앞에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로 존재하는 한, 또는 절반가량이 존재하는 한, 이 국가보안법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요. (줄임) 노 전 대통령은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법을 바꾸려고 했다고 봐요.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거죠.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법이 바뀌지 않습니다. – <법정 콘서트 무죄> 226p~228p

이시우 작가도 이 변호사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서구적 사상의 자유 이론만으로 국가보안법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보안법을 미국의 지배전략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빨갱이사냥은 매카시 이론이 있기 훨씬 전부터 1920년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사실은 매카시즘 자체도 중간에 일어난 작은 파도에 불과했죠. 2차 대전 이전에 벌써 독일로 이탈리아로 일본으로 수입되어 일본의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걸 거의 그대로 따다 쓴 게 한국의 국가보안법이었거든요. 국가보안법은 이승만을 비롯한 뛰어난 반공 전사들이 만든 게 아니고, 전 세계적인 기획이었던 거죠. – <법정 콘서트 무죄> 230p

요컨대 사상의 자유 이론이 크게 발달한 미국이 사실은 ‘빨갱이’ 사냥에 가장 앞장섰으며, 국가보안법 역시 미국이 주도한 반공주의 열풍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공산 진영에 맞선 자유 진영의 리더였음을 떠올리면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그래서 서구, 특히 미국식 사상의 자유 이론만으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수 없으며, 남북관계를 튼튼한 평화 체제로 바꿔나가는 현실의 변화 위에서만 국가보안법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남북관계는 주변 상황에 관계없이 6·15선언의 기초 위에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확실하게 각인되었어야 해요. 그래야만 미국의 정책방향에 따라 우리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가닥 잡는 게 가능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남북 사이의 평화정착 기조가 대결 상태에서 화해 단계로 들어섰다고 보여줘야,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만들어지는 거죠. – <법정 콘서트 무죄> 227p

“‘빨갱이’, 국가폭력을 합리화하는 백지수표”

이 책이 보여주는 두 번째 통찰은 국가보안법 문제를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시작된 국가폭력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시우 작가는 국가보안법의 탄생이 1948년 제주 4·3항쟁과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흔히 국가보안법의 탄생을 그해 10월의 여수·순천사건과 연결 짓지만 국가보안법의 모체인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은 그 전에 발의됐고, 그 배경에는 제주 4·3항쟁이 있다는 것이다.

4·3항쟁 당시 군경과 극우단체 서북청년단(서청)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제주도민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빨갱이’와 거리가 먼 사람들도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 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고 설사 죽더라도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면 잡혀간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빨갱이’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법적인 폭력을 합리화하는 백지수표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 <법정 콘서트 무죄> 315p

4·3항쟁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 ‘거리의 철학자’ 김상봉은 함석헌의 철학을 빌어 국가를 뜻의 공동체로 정의한다. 프랑스 공화국이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 아래 건국됐고, 독일 연방 공화국이 통일, 정의, 자유로 묶인 공동체이듯 국가는 어떤 이념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 2월 15일 ‘쪽팔린다, 폐지하라! 국가보안법’ 기자회견에 참여한 각계 인사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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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런 이념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유민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 속에서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이념이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앙상한 반공주의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폭력이었다.

다시 말해 무엇이 국가의 정당한 기초입니까? 오직 민중의 공유된 뜻이고 이상입니다. 그 때만 자발적인 만남에 기초한 국가공동체가 가능한 거지요. 그런데 그런 뜻과 이상이 없이 국가를 세우려한다면 가능한 방법은 폭력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4·3사건입니다. – <당신들의 대통령> 50p

즉, 대한민국은 폭력을 통해 건설됐고, 폭력의 근거를 제공한 중요한 기제가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이 누군가를 ‘빨갱이’로 규정하면 국가는 그를 향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으로 건설된 국가는 이후에도 폭력을 체제유지의 주요수단으로 삼았다. 때로는 어두운 남영동 대공분실 지하에서, 때로는 햇빛 쏟아지는 1980년 5월의 광주 금남로에서, 국가폭력은 다양한 층위로 수없이 되풀이됐다. 폭력이 자체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이시우 작가의 통렬한 지적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 국가폭력의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제주에서 학살자가 급증한 시점이 유격대의 저항이 증가한 때가 아니라 오히려 양측 간의 교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 이후였고, 미군에 의한 지원으로 ‘서북청년단’과 경찰 등의 물리력이 증강된 시점이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희생은 저항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폭력의 강도와 비례했던 것입니다. 베버의 표현대로 국가폭력이 합법적 폭력이라면 왜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의 폭력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지 않고 그와 정반대였을까요? 이 같은 현실이 반성되지 않을 때 그것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 <법정 콘서트 무죄> 329p

이명박 정권 5년, 국가보안법 위반 검거자 ’482명’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불편했다. 소위 종북주의 논란에 대한 이 책의 관점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최진섭은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라는 책에서 통합진보당 사태를 둘러싼 언론보도를 비판한 바 있다. <법정 콘서트 무죄> 역시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를 종북세력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마녀사냥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이고,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다소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을 읽지 않을 알리바이로 작용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종북주의를 다룬 대목이 책의 본질은 아니거니와 오늘날에도 국가보안법을 사유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국가보안법 자체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결코 박정근이나 이시우 작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된 사람이 482명에 달한다. 이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도 국가보안법의 위협이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둘째, 국가보안법과 연결된 국가폭력의 문제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쌍용에서, 강정에서, 용산에서, 그밖의 수많은 현장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은 국가보안법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안보를 위해 정부에 반대하는 ‘빨갱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의 논리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통해 유지·강화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은 이중의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국가보안법을 사유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 엄존하는 국가폭력의 문제를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달성하지 못한 과제, 국가보안법 철폐를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끈질기고 집요하게. 여전히 문제는 국가보안법이다.

덧붙이는 글 | <법정 콘서트 무죄> 최진섭 씀, 창해 펴냄, 2012년 10월, 360쪽,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