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무엇이 문제인가·⑥] ‘빨갱이 사냥’ 피해자가 국보법 옹호하는 역설-프레시안

“북한 말씨 쓰던 그분,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말 듣더니…”
[국가보안법, 무엇이 문제인가·⑥] ‘빨갱이 사냥’ 피해자가 국보법 옹호하는 역설
이시우 사진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기사입력 2011-12-08 오후 12:07:22

12월 1일은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날이다. 1948년 이날 대한민국 법률 제10호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여러 변천을 거쳐 올해로 63년째를 맞이한다. 그 63년 동안 국가보안법이 저지른 악행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민족통일에 역행한다는 비판은 치명적이다. 유엔만이 아니라 심지어 미국 등 주요국들로부터 폐지권고를 받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런 속에서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와 국가보안법긴급대응모임은 12월 1일을 맞아 이란 기치 하에 국가보안법 대응주간을 설정하여 국가보안법의 남용억제를 위한 행동에 나섰다. 그 연장선에서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하여 연속 릴레이 기고를 보내왔다. <편집자>

지난 화요일. 정오가 되기 전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실무자들이 피켓을 준비해서 나올 것이라는 일주일전 약속만을 믿고 나왔는데 광화문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와 만나야 하는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나와 만날 사람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건너편을 보니 이순신장군 동상 앞에 피켓을 든 시위자가 보였다. 벌써 도착하신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분이었다. 어쨌든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추운데 고생하십니다. 오늘 12시부터 일인시위하기로 한 이시우입니다.”
“누구시라구요?”
“아 그러니까 국가보안법 폐지 일인시위하기로 한….”

그러자 북한말투를 쓰는 그 여자 분은 “국가보안법 폐지요?” 하며 말끝을 올렸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던 1인 시위자

그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닫고 그분의 피켓을 다시 들여다보니 ‘국가보안법폐지 누구 좋으라고’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국가보안법폐지를 반대하는 시위자였다. 잠시 당황했다. 우선 전화통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공중전화기를 찾아 다녔지만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기다리다보면 누구든 오겠지 란 생각으로 다시 동상 앞으로 갔다.

그런데 어느새 시위자가 남자 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분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국가보안법폐지시위를 하러 온 사람입니다. 옆에 서도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내 옆에서 하십시오.”라고 했다. 역시 북한말투를 간간이 섞어 쓰는 분이었다. 나는 옆으로 다가서며 “그런데 선생님은 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북에서 내려온 지 한 10년이 됐습니다. 남한에 와서 보니까 여긴 천국이야요. 우린 북에 있을 때 항상 배운거이 뭐냐 하믄 남조선에 국가보안법만 없으면 우리가 해방시킬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국가보안법 폐지하자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럼 선생님 피켓에 쓰인 것처럼 광화문네거리에서 누가 김정일 만세를 외치면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동조해서 봉기가 일어날까요?”

“그렇지야 않겠지요. 표현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계선이 있어야 하는 거이죠.”

상투적인 논리로 시작된 대화는 개인이력을 넘나들며 점점 깊어져갔다. 산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분은 대화하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법도 없었고 나의 의견을 경청하는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의 휴대전화기가 울려서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전화를 건 상대방은 일인 시위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내라는 듯 했다.

그러자 그분은 불쾌한 듯 “그럼 직접 당신이 나와서 찍든가…” 누군가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았다. “제가 찍어 드릴게요.” 잠시 주저하셨지만 스마트폰을 내게 넘겼다.

ⓒ연합뉴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느껴진 것은 우리 두 사람의 자유에 대한 감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지나친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나는 자유를 탄압하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그분이 한국에서 좀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되고 이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작년 연평도 사건이 터진 직후 한 신문에 작은 기사가 보도되었다. 부산 사하구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한 교회가 지하철 선교를 하며 김정일을 규탄하고 있었는데 탈북자 한사람이 마이크를 가로채서 당신들은 김정일을 모른다며 김정일을 더 맹렬히 비난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듣고 있던 한 노인이 “당신 간첩 아냐”라고 한마디 툭 던졌고 그 탈북자는 거기에선 어쩌지 못하고 집회가 끝난 뒤 이 노인을 동네어귀까지 따라가 골목에서 폭행하다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었다.

2011년 5월 12일자 <조선일보>는 천안함 사건 이후 식당종업원으로 근무하는 여성탈북자에게 손님들이 ‘당신 북한에서 왔어’라고 물으면 무조건 중국에서 왔다고 한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남한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자기존재까지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말 안하고 있으면 북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목청 높여 북을 비판하면 오히려 오버하는 것을 더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태에 있는 것이다. 김정일이 싫어 목숨을 걸고 탈북한 이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간첩’, ‘빨갱이’란 말은 벼랑 끝으로 내모는 폭력이다. 공안기관은 탈북자들을 자유주의체제승리의 상징으로 홍보하지만 공안기관이 만들어 놓은 국가보안법은 그들을 언제라도 결박할 수 있는 그물망인 것이다.

서북청년단과 빨갱이

우리 역사에서 빨갱이 만들기의 절정은 1948년 제주4.3항쟁에서이다. 우선 1948년 7월 2일자 <강원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자.

제주도에서는 반역의 낙인과도 같이 사용하든 “빨갱이”라는 말은 일체 쓰지 않기로 결정하여 실시 중에 있다. 즉 지난 1일에 개최된 도내 군읍면장 합동회의 석상에서 각 읍면장은 무고한 도민의 감정을 저해하는 “빨갱이”라는 말을 각 관청에서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 것을 임지사는 즉석에서 채택 실시키로 하여 관하에서 말하였다 한다.

4.3항쟁이 1차 진압되는 국면인 7월에 제주의 읍면장이 회의를 열어 공식 건의할 정도로 ‘빨갱이’란 말은 단순한 단어를 넘어선 첨예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간절한 도민의 염원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빨갱이 공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서북청년단은 1948년 11월 9일 물자보급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을 연행, 서청 사무실에서 고문하다 살해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 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다버려 끝내 절명케 한다. 제주도 행정의 2인자까지도 보급품 지급에 협조 안한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것이다. 서청은 이번에도 자신들의 죄상을 덮는 주무기로 무조건 상대를 빨갱이로 몰았다. (‘제주 4.3 항쟁과 서북청년회’ 참조)

어떤 행위의 특징 때문에 빨갱이로 호명되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라고 호명하면 빨갱이가 되는 것이다. 반공검사조차 이 수난을 피해가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호명의 주체는 절대권력을 행사한 이승만과 그의 위임을 받은 서북청년단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위임을 취소하는 순간 서북청년단장 김성주조차 죽음을 면치 못했다. (박태균, ‘조봉암연구’,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5), pp.202-207참조)

북한청년들은 빨갱이 사냥의 전위부대로 이용되었고 빨갱이란 덫에 걸려 결국 숙청당하였다. 이처럼 빨갱이란 호명은 누구라도 당장 국가와 국민의 ‘적’으로 만들 수 있는 마이다스의 손이었던 것이다.

빨갱이 사냥의 역사는 192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된다. 쿨리지 대통령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상무장관 허버트 클라크 후버는 일찍이 금광 채굴왕으로 ‘러시아ㆍ아시아콘솔리데이트’와 ‘인터시베리아신디케이트’라는 회사를 지배하며 시베리아지역에서 광대한 광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으로 이들 재산을 잃게 된 후버는 상무장관이 되자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을 추진한다. (廣瀨 隆 Hirose Takashi, ‘億萬長者はハリウッドな殺す’, (東京: 講談社, 1986)/이규원 역, ‘제1권력’, (서울: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 1쇄), pp.137-138참조)

1925년 JP모건이 무솔리니에게 거금을 융자하던 시절 그의 오른팔이던 앨버트 게리는 전국범죄위원회를 결성한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따로 진행되던 파시즘을 일거에 결합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때부터 빨갱이 사냥은 거대자본의 힘을 빌어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미국에서는 챨리 채플린과 제인 폰다,

마릴린 몬로 등이 빨갱이 사냥의 희생자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유대인 사냥이 뉘른베르크법으로, 일제 시대에는 빨갱이를 뜻하는 ‘아까’사냥이 치안유지법으로, 한국에서는 48년에 국가보안법으로 옷만 갈아입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수단이 되었다. 이제는 그 대상이 ‘테러범’ 사냥으로 바뀌기도 하고 더 은밀한 사생활까지 감시ㆍ통제하는 통신감청법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1935년 통과된 뉘른베르크 법은 한 개인의 부모를 거슬러 3대까지 올라가 한명이라도 유대인의 핏줄이 섞여 있으면 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로써 유대인사냥의 법적체제가 완성되었다. 1939년 2만 명의 유대인을 검거해 집단수용소에 감금하였다. 39년 이전까지 유대인들은 몸값을 지불하면 독일을 떠날 수 있었으나 39년 이후에는 전 재산을 바쳐야했고 10만의 유대인이 거지가 되어 독일을 떠났다. 독일은 남은 유대인 20만을 인질삼아 세계 유대공동체에 15억 마르크의 몸값을 요구하며 제네바에서 협상을 벌이는 파렴치한 행동을 벌였다. 이때는 이미 뉘른베르크 법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뒤였다.

슬라보예 지젝이 유대인 사냥에 대한 연구에서 사용한 개념을 인용하면 국가보안법 류의 법은 ‘가까이 있는 적’ 혹은 ‘내부의 적’ 만들기를 통해 권력을 집중 시켜간다. 연평도사건 직후 해병대전우회장은 광화문규탄대회에서 김정일보다 김정일을 따르는 우리 내부의 적을 척결하자고 주장했다.

그 뒤로 소위 왕재산 사건을 비롯한 국가보안법사건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광풍의 기간 동안 놀랍게도 정부가 북에 정상회담을 구걸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정부가 바로 최대의 종북 행위를 한 것이다. 정부가 하면 로맨스고 국민이 하면 스캔들이란 조롱을 피할 길이 있겠는가? 국가보안법의 적은 북한이 아니다.

그때그때 다른 ‘내부의 적’

국가보안법은 북을 이롭게 하는 행위나 이적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일까? 국가보안법은 국가의 이상과 국민의 행복을 훔쳐가려는 ‘가까이 있는 적’을 상상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란 상징과 기호를 사람들이 동일시하여 스스로를 국민으로 상상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사회에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대립물을 제치고 가까이 있는 적으로서 빨갱이, 간첩, 종북세력을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집착한다. 빨갱이나 종북세력의 범위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때그때 다르다.

일인시위를 끝낼 시간이 되었을 때 그분의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피켓에 글자가 잘 나오지 않았으니 다시 찍어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번엔 그분이 내게 먼저 스스럼없이 스마트폰을 건네며 사진을 부탁했다. 사진을 찍어드리고 “제가 사진가인데 다시 찍어 보내라고 한 걸 보니 상당히 수준 높은 사진을 요구하시나 봐요?” “아 그러셨습니까? 하하하.”

나는 그분과 인사를 하고 헤어지며 다시 만날 약속을 했다. 나는 서북청년단 김성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국가보안법의 횡포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탈북자들이다. 최근 대법원의 새로운 풍경 중 하나는 시민단체에서 전혀 모르는 국가보안법 사건 판결이 많다는 것이다. ‘누구시지?’ 하고 묻는 사건은 거의 모두 탈북자들 사건이다. 이들은 찾아와 줄 방청객도 없다. 국가보안법사수를 위해 일인시위를 하던 그분들이 국가보안법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11208105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