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번역본 1권-신라무왕 2002/08/31 481

박성봉 고경식이 번역한 삼국유사입니다.

박성봉-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경식-경희대 국문과 교수..

이런 분들이네요..

이 책은 85년에 처음나왔고, 이 글은 93년에 나온 제 2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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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제 1 권

기이(紀異) 제 1

서술하여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들은 禮와 樂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仁과 義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날 때에는 부명(符命-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내리는 표)과 도

록(圖서적 록-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여 기록한 책, 도참과 같은 말)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보통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연후라야 큰 변화의 기회를

타서 제왕의 지위를 얻기도 하고, 또 대어을 이룰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河水에서 하도(河圖 – 옛날 중국의 복희씨 때 황하에서 길이 8자

가 넘는 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 주역의 팔괘의 근원이 됨)가 나오고

낙서(洛書 – 옛날 중국의 우왕때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새겨져 있었다는 글씨

로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기원이 됨)가 나와서 성인이 일어났다는 전설이 생

긴 것이며, 또 무지개가 神母를 둘러싸 복희(중국 고대 삼황의 한사람으로 백성들에

게 농업 어업 목축을 가르쳤다고 함) 를 낳았다든가, 용이 여등과 교접을 하여 염제

(신농씨를 말함, 火德으로 제왕이 되었다고 함) 를 낳았으며, 궁상의 들판에서 황아가

노닐 때 스스로 白帝의 아들이라 칭하는 신동이 황아와 사귀어서 소호를 낳았다는 이

야기와 이밖에 간적은 알을 삼켜 설을 낳았고, 강원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기를 낳

았으며, 요(堯 – 요순 시대의 그 요임금)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만에 요을 낳

았고, 패공(沛公 – 한고조 유방)의 어머니는 큰 연못에서 용과 교접을 하여 패공을 낳

았다는 등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를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로운 데에서 탄생하였다

고 하여 이상할것이 없다. 이 책 첫머리에 기이편을 싣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잇는

것이다.

고조선 – 왕검조선

魏書(북제의 위수가 쓴 북위의 정사)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셨는데,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

라 불렀는데 이때는 중국의 고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한다.

古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환인이 있었는데, 그 서자로서 환웅이 항상 천

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 본즉 그곳이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 곳이라, 이에 天符印 세개

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명을 이끌

고 태백산- 지금의 묘향산?-에 있는 신단수 밑으로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神市라고

한다. 이 분이 바로 환웅 천왕이라고 불리시는 분인데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

리고, 곡식과 생명, 질병, 법률, 선악등을 위시한 인간의 360여가지의 일을 주관하여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 때 곰 한마리와 범 한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사람되기를

환웅에게 기원하였다. 환웅은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 먹고 세이레(21일)동안 忌하니 여자의 몸으로 되었다.

그러나 범은 忌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

므로 날마다 단수 밑에 와서 잉태하기를 축수하였다. 이에 환웅이 임시로 사람으로 변

하여 그와 혼인하였더니 이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바로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唐高(요임금)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

년이니 즉위후 50년은 경인년이 아니고 정사년이다..)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

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후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다. 그곳을 궁흘산이라

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그는 이 곳에서 1500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나중

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당나라 배구전에 전하기를 고려는 본래가 고죽국-지금의 해주-이었는데 주나라를

봉해 주으로써 조선이라 하였으며, 한나라가 이르 다시 나누어 세 군을 설치하여 이를

낙랑,현도,대방 이라 불렀다. 통전(通典 – 당나라의 두우가 편찬한 정치제도사) 에도

또한 이와 같다. – 한서에는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한사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

서는 세군으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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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전한서 조선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처음 연나라 때부터 진번, 조선을 침

략하여 차지하고 이 곳에 관리를 두어 변방에 요새를 쌓았는데 이후 진나라가 연나

라를 멸망시키고자 요동군 변방에 이 땅을 예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서 지킬 수가 없어 옛날의 요새를 다시

고쳐 쌓고 패수를 경계로 하여 연나라에 예속시켰다.

연나라의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니, 연나라의 위만(衛

滿)이 망명하여 무리 1천여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달아 요동의 변방요새를 지나 패

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땅인 상하 변방 요새에 정착하였다. 이후 점차로 진번 조선의

오랑캐와 옛날의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을 해온 자를 예속시켜 왕이 되고 도읍을

왕검에 정했다.

위만이 군병의 위력으로써 주변의 조그만 읍들을 공략하자 진번과 임둔이 모두

항복하여 이에 종속되었다. 이로써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에 이르게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이후 손자 우거가 이를 계승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진번과

진국이 한(漢)나라에 국서를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길을 막아 통

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 2년(B.C. 109년)에 한나라에서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

거를 타일렀는데 우거는 끝까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섭하는 교섭에 실패하고 돌

아가게 되었는데, 그의 신하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는 책임자인 조선의 비왕(裨王=장

수) 장(長)을 찔러 죽인 다음 이어 패수를 건너 변방 요새를 지나 한나라로 돌아가 보

고를 했다.

이에 한나라의 천자가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섭

하를 원망하여 불시에 군사를 내어 섭하를 쳐죽였다. 이에 한나라의 천자는 누선장군

양복을 시켜 제나라의 병선을 거느리고 발해를 지나 조선을 치게 하니 군사는 5만이

었고, 또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요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우거를 공격하게 하였다. 우

거는 군사를 움직여 험한 곳에서 그들을 막았다.

누선장군은 제나라의 병력 7천을 거느리고 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우거는 성을지

키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곧 나아가 공격을 하니 누선의 군사가 패해 도

망을 했다.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속으로 몸을 피하여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좌장

군 순체도 패수 서쪽을 쳤으나 능히 깨드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이 싸움에 패했기 때문에 위산을 시켜 군병의 위력으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이에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를 보내어 말(馬)을 바

치겠다고 했는데, 이 때 태자를 호송하는 군사의 무리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머두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패수를 건너려 할때 사자(위산)와 좌장군(순체)은

혹시 이들이 무슨 변이나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미 항복한 것이니 병기를 가져오지 마시오.’하고 말하자 태자는 사신이 자기를

속이는 게 아닌가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왔다.

위산이 천자에게 이 일을 보고하니 천자는 위산의 목을 베었다. 좌장군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무찌르고 나아가 왕검성에 이르러 서북쪽을 에워쌌다. 누선

장군 또한 와서 이에 호응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우거가 성을 굳게 지키

니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고 지체되므로 옛날의 제남태수로 있던 공손수

를 시켜 가서 치게 하고, 전권을 주어 편의에 따라 일을 자의대로 처리하게 하였다.

공손수는 조선에 이르러 누선장군 양복을 묶어 가두고 그의 군사를 합쳐 좌장군의 군

사와 함께 급히 왕검성을 공격했다. 이 때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

그리고 이계상 삼과 장군 왕협은 서로 모의를 한 끝에 항복을 하려 했으나 왕은 그 말

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도와 왕협, 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만이 중도에서 죽었다.

원봉 3년(B.C. 110년) 여름에 이 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을 했다. 그러나 이즈음에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거의 대신 성기

가 한(漢)을 배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과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르 쳐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마침내 조선은 평

정되었다. 한은 이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네군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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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魏志에 기술한 바로 보면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니 조선왕 준은 궁인과 좌우에

서 그를 모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견훤이 고려의 태조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

가 일어났으며 백제는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라고 하였다. 四夷-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 중국주위의 소위 오랑캐나라들-, 九夷- 동방에 있는 아홉이민족

물론 중국기준의 이민족 즉 견이,어이,방이,황이,백이,적이,풍이,양이등-, 九韓, 예맥

(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 주나라의 天,地,春,夏,秘,冬官의 6관제를 기술한 책 –

에 직방씨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하였다고 하는 것은 동이의 종족으로 곧 구이를 말하

는 것이다.

삼국사에 기술하기를 명주는 옛날의 예국으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을

얻어 바쳤다고 하였으며, 또한 춘주는 예전의 우수주로 옛날의 맥국이라 하였다. 그리

고 지금의 삭주를 맥국이라고 하였고, 또 평양성도 맥국이라 하였다.

회남자의 註에는 동이는 아홉종류나 된다고 하였으며,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란 것은 현도, 낙랑, 고려, 만식, 부유, 소가, 동도, 왜인, 천비라고 하였다.

해동안홍기에는 구한을 일러 일본, 중화, 오월, 탐라, 응유, 말갈, 단국, 여진,

예맥이라고 하였다.

2부(二府)

전한서에 보면 소제시원 5년 기해(B.C. 82년)에 두 外府를 두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옛땅 평나와 현도군등을 합쳐서 만든 평주도독부와 또 임둔,낙랑, 등 두군의

땅에 설치한 동부도위를 말함이다.

72국(七十二國)

통전에 이르길 조선 유민은 70여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이들은 사방이 백리였

다고 한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西漢이 조선의 옛땅에 처음엔 네 군을 두었다가 나중에 二府

를 두었는데 법령이 차츰 번거로와지자 78나라로 나누었다. 이 각 나라는 萬戶였다고

한다.

낙랑국

전한 때에 낙랑군을 처음으로 두었다. 응소가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이라 하

였다.

신당서의 註에는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라 하였다. 國史에 이르길 혁거

세 30년에 신라에 낙랑인들이 와서 항복을 하였으며, 3대 노례왕 4년에는 고구려의

3대 무휼왕이 낙랑을 쳐서 이를 멸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 사람과 더불어 신라에

와서 항복을 하였으며 무휼왕 27년에 광호제가 사신을 보내어 낙랑을 치고 땅을 빼앗

아 군현을 삼으니 살수 이남의 땅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고 한다.

북대방

북대방은 원래가 죽담성으로 신라 노례왕 4년 (B.C. 27년)에 대방과 낙랑사람들

이 신라에 항복을 해왔다.

남대방

조위(曹魏)때 처음으로 남대방군을 설치하엿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하였다. 대방

의 남쪽은 바다와 접한 면이 천리나 되나 그곳을 한해(瀚海)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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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혹은 勿吉) 과 발해

통전에 이르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그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

고 스스로 진단이라고 하였다.

선쳔 연간(당의 현종때 712년)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

해라고만 불렀다. 개원 7원(719년)에 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다. 이어 세

자가 왕위를 계승하니 당현종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사

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의 큰 나라로 발전하였다. 그 땅에 5京,15府,62州가

있었는데 후당의 천성 초년에 거란이 공격하여 마침내 그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가탐의 군국지에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등 四府는 고구려의 옛땅으로서

신라의 천정군에서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도합 39驛이 이에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삼

국사에는 백제의 말년에 발해, 말갈, 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하였다.

신라사람들은 북엔 말갈이있고, 남엔 왜인이, 서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에 해가

된다고 하였고, 또한 말갈은 그 땅이 아슬라주에 연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또한 동명기에는 졸본성은 땅이 말갈에 연접하였는데 신라의 6대 지마왕 14년 을

축에 말갈의 많은 군사가 국경으로 들어와서 大嶺의 성책을 습격하고 이어 이하(泥河)

로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말갈이 바로 물길이라고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와 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와 옥저에 대해서는 도파의 지장도를 살펴보면 진한의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동명제는 왕위에 오른 지 10년만에 북옥저를 멸하였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집이 신라에 와서 투항을 하였으며 그리고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신

라에 좋은 말을 바치고 있다. 이를 보면 동옥저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장도

에는 흑룡강이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서국(伊西國)

노례왕 14년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운문사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를 보면 정관 6녕 임진에 이서군의 금오촌 영미사(

寺)가 밭을 바쳤다고 하였다. 금오군은 지금의 청도땅이니 청도군이 곧 이서국이다.

5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벽진가야), 소가야 이다. 또한 본조사략

에 의하면 태조 천복 5년(940년)에 다섯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바, 첫째는 금관, 둘째

는 고령, 셋째는 비화이다. 나머지 두개는 아라와 성산이라고 했다.

북부여

고기에 이르길, 前漢 선제 신작 3년 임술(58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에

내려왔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탔었다.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북부여라 하고 스

스로 이름하여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로서 성을 삼

았다. 왕을 위해 상제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졸본부에 도읍을 정하여 졸본부여를 이룩하

였으니 이가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동부여

북부여 왕 해부루의 대신인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을 하였다.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 이 곳에 나라를 세울 것인 즉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라. 동해의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울만한 곳

이다.’ 고 하였다.

부루는 늦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를 구하

고자 하였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

물을 흘렸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서 그 돌을 들추니 거기에 금빛 개

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

심이로다.’ 하고 그 아이르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이후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왕위

를 태자 대소에게 전했다. 그러나 지황 3년 임오에 이르러 고루려 왕 무휼이 이를 쳐

서 대소를 죽이니 이로써 나라가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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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 또는 성주라고 말을 하나 이는 모

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방면에 있었다.

국사 고려본기에 기술하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해 갔으며, 후에 부루가 세상을 떠나자

금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은

즉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내가 여러 아우들과 노닐고 있을 때

에, 남자 하나가 나타나 자기느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신산 밑 압록

강가에 있는 집 속으로 유인하여 남몰래 정을 통해 놓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으며 마침내 저를 이곳으로 귀양을 보냈습

니다.” 라고 하였다.

금오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녀를 방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속을 비쳤

다.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

다. 크기가 닷되들이 말(斗)만 했다.

왕은 그것을 버려 개나 돼지에게 주려 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길에 내

다 버리게 하였더니, 소와 말이 모두 그 알을 피해서 지나갔다. 또 들에 내다버리니

새와 짐승이 오히려 덮어주었다. 이에 왕이 그것을 쪼개 보려고 했으나 쪼갤 수가 없

어 마침내 그 어머니게게 다시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

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살에 기골이 준수하니 일반

인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았다.

그 나라의 풍속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해서 그는

주몽이란 이름을 얻었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일곱이나 있었는데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그 재주가

항상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에 장남인 대소가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니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됩니

다.” 그러나 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주몽을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곧 좋

은 말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좋은 말은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을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

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사

실을 미리 알고 주몽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겟느냐. 그러니 빨리 여기를 떠나라.”

그리하여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도망하였는데 마침 엄수에 이르

렀다. 이에 그는 물을 향해 말을 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해 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솟아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그들을 건너게 한 다음 흩어

졌다. 이로써 뒤쫓아 오던 기마병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은 무사히 졸본주에 다다라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다만 비류수(沸流水)위에 집을지어 거처

하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다. 인하여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이 때의 나이가

12세 였는데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에 즉위하여 왕이라 하였다. 고구려가 제일 융성

하던 때는 21만 5백 8호나 되었다. 주림전 21권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을하였는데 상(相)을 보는 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왕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내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겠다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임신을 한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니 왕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하여 돼지 우리

에 내다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말이 젖을 먹

여 죽지를 않았다. 이 아이가 자라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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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백제

신라의 시조 혁거세가 즉위한 19년 임오에 변한 사람이 항복하여 왔다. 신당서

와 구당서에 모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에 있었다고 하였고, 후한서에는 변한은 남쪽

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었다고 했으며, 최치원은 변한이 바로

백제하고 하였다.

본기를 살펴보면 온조왕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 것은 홍가 4년(B.C.17년)이라고

한다. 그러하다면 혁거세나 동명왕의 시대보다 40여년의 뒷일이 되는데, 당서에 변한

의 후손들이 낙랑땅에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온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이 낙랑 출신으로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서로 대치했던 일이 온조왕의 이전에 있었던 것 같고, 그 도읍지가 낙랑의 북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구룡산을 잘못 알고서 변나산이라 불렀던 까닭에 고구려를 가지고

변한이라고 말을 하나 이것도 그릇된 것일 것이다. 무릇 옛날 고현(古賢-최치원)의

말을 따름이 당연하다.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고 하는 것이다.

백제의 융성기에는 호수가 1십5만2천3백호나 되었다.

진한

후한서에 이르길,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韓國에 오니 마한이 동쪽 땅을 떼

어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서로 도(徒)라고 불렀으며 마치 진나라의 말과 흡사했다.

그런 연유로 이곳을 秦韓이라고 하였다고 辰韓의 한 노인이 말을 했다고 하였다.

1만호씩 되는 12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각기 나라라고 일컬었다. 또 최치원

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시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을 하여 왔던 것으로 탁수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과 마을을 사탁,점탁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서울에 17만8천9백36호, 1천3백60방, 55리, 서른 다섯개의

金入宅- 부유한 큰 집 – 이 있었다. 이는 남택, 북택,오비소택, 본피택, 양택,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

택, 사량택, 정상택, 아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교남택, 항질택, 누

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이었다.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엔 구지택, 겨울엔 가이택에서 놀았는데

이를 사절유택이라 일렀다. 제 49대 헌강왕 때에 성 안에 초가로 된 집은 하나도 없

고 집의 처마와 담들이 이웃과 서로 붙어 있었다. 노래소리와 피리부는 소리가 길거

리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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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조 혁거세왕

진한 땅에 옛날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인데 그 남쪽은 지금

의 담엄사로서, 그 촌장은 알평이었다. 처음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는데 이가 급

량부 이(李)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

량부 정(鄭)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남사누라고 하는데 구량벌,마등오,도북,회덕

등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이니 촌장은 구례마이다. 처음엔 이산에 내려오니 여기가 점

량부 또는 모량부로 손(孫)씨의 고향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고 하는데 박곡촌 등

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지지촌 이니 촌장은 지백호이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본피부 최(崔)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통선부이다.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

한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남쪽에 옛집터

가 있는데 여기가 최후(최치원)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이니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에 내려오니 이가 곧

한기부 배(裵)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는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

촌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니 촌장의 이름은 호진이다.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

니 이 사람이 습비부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임천부로 물이촌,잉구미촌,궐

곡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피건대,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같다.

노례왕(유리왕) 9년에 비로소 여섯부의 이름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

었다. 지금의 풍속에느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

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진한 지절 원년(B.C.69년) 3월 초하루에 여섯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

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의논을 하였다.

“우리들은 아직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소. 그러니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해야 하지 않

겠소.”

이리하여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에 있는 나정(蘿

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곁에 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살펴본즉 자줏빛 알

한개가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을 추니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여졌다. 그로 인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고 이름하였다. 위호는 거슬감이라고 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 앞다투어 치하를 하

였다.

“이제 천자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당연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할 것이요.”

이 날 사량리에 잇는 알영정 주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의 갈비에서 계집아이를

낳았다. 얼굴와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의 북천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그 부리가 떨어졌으므로 그 내를 발천이라고 하였다.

남산의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사람을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가

알에서 나왓는데 그 알이 박과 같았다. 향인들은 박을 박(朴)이라 하는 연유로 그 성

을 박(朴)이라 하였다.

계집아이는 그녀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이름지었다. 두 성인이 나

이가 열세살이 되자 오봉원년 갑자에 사내아이는 왕이 되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의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고 혹은 사라 또는 사로라고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탄생을 하였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계림국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을 때 숲속에서 닭이 울었다고 하여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서 신라라고 국호를 정한 것이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후에 몸뚱

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서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

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

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작기 장사지내어 5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즉위하여 왕위를 계승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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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남해왕

남해거서간을 일명 차차웅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존장이란 칭호로 오직 이 왕만

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요,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며, 비는 운제부인

이다. 전한 평제원시 4년 갑자(A.D.4년)에 왕위에 올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 4년

갑신(A.D.2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왕이 삼황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일컬었는데, 이는 곧 진한의 말

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을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 한다. 혹 차차

웅 또는 자충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김대문이 말하기를 차차웅이란 원래 무당을

일컫는 방언으로 세상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되므로 마침내 존장이 되는 이를 불러 자충이라고 하엿다고 했

다. 이사금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을 이른 말이라고 한다.

처음 남해왕이 세상을 뜨자 아들 노례가 탈해에게 왕위를 사양하자 탈해가 말하

기를

“나는 거룩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들었다.”

하고서 서로 시험하기를 청하였다. 두 사람은 떡을 물어 시험을 하였다. 옛날부

터 이와 같이 해서 왕을 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금을 일러 마립간이라고 했다.

이를 김대문이 해석하기를 마립간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으로 궐표는 위에 따라 설치

하고 임금의 궐은 그 주가 되고 신하의 궐은 그 아래가 되니 그래서 이렇게 이름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사론에 이르길, 신라의 왕으로서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이가 한분이고, 이사

금이라 부르는 이는 열 여섯분이고, 마립간이라고 부르는 이는 모두 네 분이다.

신라 말기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을 지을 때 모두를 모왕(某王)이

라고만 부르고 거서간 등으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말 자체가 혹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함인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사실(史實)을 기록함에 있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도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모든 사람

을 갈문왕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자세하게 알수 없다.

남해왕 대에 낙랑국의 사람들이 금성을 침범하엿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

갔다. 또한 천봉 5년 무인에 고구려의 속국인 일곱나라가 항복을 해 왔다.

제 3대 노례왕(또는 유례왕)

박노례임금이 처음에 매부인 탈해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탈해가 말했다.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은 법이어서 잇금을 가지고 시험을 하여 봅

시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을 하여 보니 왕이 이가 많았으므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

로 인하여 왕을 이질금이라고 한 것이다. 잇금의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

성공 경시 원년 계미(23년)에 왕위에 올라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여서 성(姓)을 하사

하였다. 이때에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또 비로소 보습과

얼음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 18년(42년)에 이서국을 쳐서 멸하였는데 이 해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침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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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탈해왕

탈해 임금(탈해이사금)은 남해왕 때에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이를 보고 수로왕이 신하와 백성들과 북을 치고 떠들면서 머무르게 하려고 했으나

배는 급히 달아나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이때 갯가에 한 늙은

할멈이 있었는데 이름은 아진의선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그 배 안에 궤 하나가 있었

다. 길이는 스무자나 되고 넓이는 열 세 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하 일인지를 몰

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이윽고 궤를 열어보니 잘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이레동안 잘 대접하였더닌 그 사내아이는

말하였다.

“나는 본시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엔 일찌기 28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다 사

람의 태에서 났으며,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팔품의 성골이 있는데 그들은 선택하는 일이 없고 고루 왕위에 올랐습니

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

들이 없으므로 기도를 하여 7년만에 커다란 알 한개를 낳았으니 고금에 없는 일이며

이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서 나를 그 속에다 넣고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에 바다에 띄워놓고 간구하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는 축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

어 그 곳에서 아레 동안 머물면서 성 안에 살만한 곳이 있는가를 바라보니 마치 초승

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지세가 오래 살만한 곳이었다. 이내 내려와서

그 곳을 찾아가 보니 바로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아침 그 집 문

앞에 가서 말했다.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집입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므로 관가에 고했다.

관가에서 동자에게 물었다.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우리의 선조는 대장장이었는데 잠시 이웃 고을에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

아서 살고 있으므로 땅을 파서 조사를 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동자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빼앗

아 살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은 그 어린이, 즉 탈해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고

맏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니 이가 곧 아니부인이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백의는 물을 떠서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자기가 먼저 마시고 탈해에게 올

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이로 인

하여 꾸짖자 백의가 맹세를 하였다.

“이제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

여 감히 속이지를 않았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 하나가 있어 이르 세상사람들이 요내

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노례왕이 세상을 떠나자 광호제 중원 6년(57년) 6월에 탈해는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자기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빼앗은 이유로 하여 성을 석(昔)씨라고 하였다.

혹은 까치로 해서 상자를 열게 하였기 때문에 까치(鵲)라는 글자에서 새 조(鳥)를 떼

고 석(昔)씨로 성을 삼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궤를 열어서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인 건초 4년(79년)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 속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 신이 명령하기를, ‘내 뼈를 조심해서 묻어라’ 했다고 한다. 두골의

둘레는 3자 2치나 되고 몸의 뼈의 길이는 9자 7치나 되었다. 이(齒)는 서로 엉기어

서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 사이는 모두 연이어져 있었다. 이는 바로 천하에 짝이 없

는 역사의 골격이었다. 이것을 다시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를

하자 또 신이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해 두어라 하였다. 그래서 그 곳에 모시

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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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탈해왕대(代)

영평 3년(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를 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

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늘로부터 땅에 뻗치어 그 구름 속에 황금의 궤가 나

무가지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큰 광명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웠다가 곧 일

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를 알지라 이름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로 아이를 뜻하는 말이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

이 서로 기뻐하면서 춤을 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수류는 욱부를 낳고 욱부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제 8 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4년(158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에 나가 해조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연오를 보고 ‘이는 범

상치 않은 사람이다.’ 하고 그들의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안음을 괴

이하게 여기고 여기저기를 찾아보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이 있음을 보고 그곳에 있는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다시 그 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래어 왕께 아뢰니 부부가 다시 서로 만나게 되고

이로써 세오는 귀비가 되었다.

이즈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

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

고 하였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 온것도 하늘잉 시킨 일이거늘 어찌 그냥 돌아갈 수 있겠소. 나의 비

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

니 해와 달이 그 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잘 간직하여 국보로 삼

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

기야(都祈野)라고 하였다.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제 13대 미추임금은 김알지의 7대손으로 대대로 현달하였고 성덕이 있었으므로

첨해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보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능은 홍륜사의 동쪽에 있었다.

제14대 유례왕 때에 이서국의 사람들이 공격을 하여 왔다. 신라에서는 군병을 동

원하여 막으려고 했으나 장기간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 때 이상한 군사가 나타나 도

와주었는데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의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멸

하였다.

적의 잔병이 물러간 후에 그 이상한 병사는 어디로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제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주었

음을 알았는데, 이로부터 이 능을 죽현능이라고 하였다. 제 37대 혜공왕 때인 대력

14년(779년)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

람은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그리고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서 죽현능으로 들어갔다. 조금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가 들리듯하고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호소를 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진호(鎭

護)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

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렵니다.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

왕이 대답하기를

“공과 내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아무 소리 말고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을 청하였으나 왕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 바람은 이

내 돌아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 김경신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를

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

릉의 위에 두어 대묘라고 불렀다.

번호:1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8 00:16 길이:72줄

내물왕과 김제상

제 17대 내물왕 36년(390년)에 왜왕이 보낸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

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

게 성심을 나타내기 바립니다.”

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못하였으므로 내신인 박사람(朴娑覽)을 부사로 삼아 함

께보냈다. 왜왕이 이들을 억류하여 30년 동안이나 보내지를 아니하였다.

눌지왕 3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아우 보해가 지혜와 재주의 뛰어남을 듣고 서로 가깝게 지내

기를 원하여 소신을 보내어 간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이로 인하여 화친을 하기로 하고

그 아우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로 보냈는데 이때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삼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장수왕도 이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눌지왕 10년(426년)에 왕이 친히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 호협한 사람들을

모아 잔치르 베 풀었는데, 술이 세 순배 돌게 되자 모든 음악이 시작되었다.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옛날 아버님께서는 성심으로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의 먼 곳으로 보냈다가 다시 못 보시고 돌아가셨고 내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이웃

나라의 군사가 강하여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고, 고구려가 화친을 맺자고 말했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고 아우를 고구려에 보냈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아우를 억류해 놓

고 보내지를 않고 있으니, 내 아무리 부귀를 누린다 하여도 일찍이 그 하루라도 이 일

을 잊지 않고 울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만일 두 아우를 만나보고 선왕의 사당을 보게

된다면 나라 사람에게 은혜를 갚겠소. 누가 능히 이 계책을 이룰 수가 있겠소.”

이 말을 듣고 백관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합

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삽라군의 태수로 있는 제상이 가할까 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묻자 그는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옵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

하면 그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어려움과 쉬운 것을 헤아려서 행한다

면 이는 충성되지가 못하다 할 것이며,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여 행한다면 이는 용맹

이 없다고 할것이온즉 신이 비록 불초하나 명을 받들어 행하겠나이다.”

왕은 그를 매우 가상스럽게 생각하여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아 작별했다.

제상은 왕의 앞에서 명을 받고 바로 북해로 길을 항하여 변복을 한 다음 고구려로 들

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도망할 날짜를 약속한 다음 먼저 고성의 수구(水

口)에 와서 배를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 지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

칠동안 조회에 나가지를 아니 하였다. 그러다가 야음을 틈타 도망하여 고성의 바닷가

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 일을 알고 수십명의 군사르 시켜 뒤쫓게 하였다. 고성에

이르러 따라붙었으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좌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

아올수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미해의 생각이 나서 한편으로 기쁘기 그지없고, 한편으로

는 슬펐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다.

“마치 몸에 한쪽 팔뚝만 있고 얼굴에 한쪽 눈만 있는 것 같아서 비록 하나는 얻

었으되 하나는 잃은 대로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이 때 제상은 이 말을 듣고 두번 절을 한다음 바로 율포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의 갯가에 이르렀으나 남편은 벌써 배에 올

라 있었다. 그 아내가 제상을 간절히 부르자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계림왕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제 부형을 죽였으므로 도망을 하여 온 것입니다.”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안히 거쳐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제상은 늘 미해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았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잡아서

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은 매우 기뻐하여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제상이 미해에게 말했다.

“지금 빨리 떠나십시오.”

“그럼면 같이 갑시다.”

하고 말을 했으나 제상은

“신이 만일 같이 떠난다면 왜선들이 뒤를 쫓을까 염려가 됩니다. 신은 이 곳에

남아서 뒤를 쫓는 것을 막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지금 나는 그대를 부형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만 돌아가겠소.”

제상이 말하기를

“신은 공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써 왕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

족할 뿐입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라고 말을 하고는 술을 따라 미해에게 드렸다.

이 때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를 미해에게 딸려 호송을 하게

하였다.

미해를 떠나보내고 제상은 미해의 방에 들어가서 이튿날 아침까지 있었다. 미해

를 모시는 사람들이 방에 들어와 보려 하였으나 제상이 와서 말하기를

“미해공이 어제 사냥하는데 쫓아다니느라고 몹시 피로해서 일어나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자 좌우의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다시 물었다. 이 때야 제상

이 말을하였다.

“미해공은 떠난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좌우의 사람들이 왜왕에게 달려가 이를 고했다. 왕이 기병을 시켜 그 뒤를 쫓게

하엿으나 결코 따라가지 못하였다. 왜왕이 제상을 가두어 두고 나서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보내었느냐?”

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나는 단지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했던 것 뿐이오. 어찌 이 일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겠소.”

왜왕은 노했다.

“이미 너는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 — 피부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는 벌, 코를 베는 벌, 발 뒤꿈치를

베는 벌, 불알을 없애는 벌, 목을 베어 죽이는 벌을 일컬음)을 갖추어 모두 쓸것이되,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후한 녹을 줄 것이다.”

그러나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지금

갈대의 붉은 빛깔이 나는 것은 제상의 피라고 함) 그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제상을 세워 놓고 말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와서 먼저 강구려를 시켜 나라 안에 사실을 알렸다. 눌지왕은

놀라고 기뻐서 백관들에게 명하여 굴헐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아우 보해와 더

불어 남교에 가서 맞이하였다. 대궐로 맞아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을 내리어 죄

수를 풀어 주었다.

제상이 아내를 국대부인으로 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

에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 漢나라 신하인 주가가 영양땅에 있다가 초나라 군사에게 잡힌 일이 있습니

다. 이때 항우가 주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내 신하 노릇을 한다면 만호후에

봉해 주겠다 하니 주가는 꾸짖으며 굴복치 않고 초왕 항우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번 제상의 죽음은 그에 못지 않습니다.”

처음 제상이 떠날때에 제상의 부인이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 모래위에 이르러 거기서 주저앉아 울부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여 장사

(長沙)라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을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을 때 부인

이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

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라

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

제 18 대 실성왕

의회 9년 계축에 평양주의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왕은 전왕의 태자인 눌지가 매

우 덕이 있으므로 이를 꺼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군사를 충하여

눌지로 하여금 이들을 맞이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사들은 눌지의 어짐과 그 행동

을 보고 창 끝을 위로 하여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였다.

번호:1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8 00:18 길이:65줄

사금갑(射琴匣)

제 21대 비처왕(소지왕) 10년(488년)에 천천정으로 거동을 하였다. 이 때 까마귀

와 쥐가 와서 울고 쥐가 사람말로 말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 했다.

왕이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도록 하였다. 기사가 남쪽의 피촌에 이르러

서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어 이를 한참 살펴보고 있는 동안 까마귀가 간 곳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 한 늙은이가 못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을 살펴본 즉

“이것을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가만 두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비처왕에게 이것을 바치니, 왕이 보고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느니 보다는 차라리 떼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

고 하였다.

일관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을 말함이오, 한 사람은 왕을 말합니다.”

라고 한 즉 왕은 그를 옳게 여겨 떼어보니

“거문고 갑을 쏘라!”

고 적혀있었다.

왕이 곧 궁에 돌아가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를 하

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하게 간통을 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

는 모든 일을 조심히 하고 감히 움직이는 것을 삼가하였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

忌日)이라고 하여 찬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행하고 있다.

이언에는 이것을 달도라고 하니 이는 곧 슬퍼하고 조심을 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려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노인이 나온 못을 서출지라고 한다.

지철로왕

제 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하였다. 시호는

지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 때부터 시작하였다.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이라고 한 것도 이 왕 때부터 였다.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

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사자를 三道에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는데 어느 날 사자가 모량부에 이르니 동

로수(冬老樹) 아래에서 개 두마리가 크기가 북만한 똥 한덩어리를 좌우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지라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했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여기에 눈 것입니다.”

그 집을 사자가 찾아가보니 그 여자의 신장이 일곱자 다섯치나 되었다. 이 사실

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황후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를 경하했다.

또 아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가 있었다. 이 섬

은 둘레가 2만6천7백30보였다. 섬에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

하여 조공을 하지 아니하였다.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

게 하였다. 박이종(신라장군 이사부)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했다.

“너희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섬의 오랑캐는 두려워서 항복을 하였다. 이에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그 주

의 장관인 주백으로 삼았다.

진흥왕

제 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 갈문왕의 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운명했다.

승성 3년(553년) 9월에 백제의 조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

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

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번호:1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09 23:41 길이:55줄

도화녀와 비형랑

제 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의 딸인 지

도부인이다. 대건 8년(576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4년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 어느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와서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대

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만승(萬乘)의 위엄으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

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인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다른 마음을 가지는 것은 원치를 않습니다.”

왕이 희롱으로 말하기를

“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를 놓아 보내주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는데 2년 후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협순이 지난 어느날 밤중에 홀연히 왕이 평시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하길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남편이 업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하락치를 않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부모가 말하기를

“임금의 말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하고 딸을 왕의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이 7일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후에는 왕의 자취가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

은 아내 태기가 있어 달이 차매 해산을 하려 할 때에 천지가 진동을 하는 가운데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이라고 하였다.

진평대왕은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다. 나이가 15세

가 되자 왕은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비형은 밤마다 멀리 나가서 놀곤 하였는데,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

으나 번번히 월성을 날아 넘어서 서쪽 황천 언덕 위에 가서 귓니을 데기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속에 메복하여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헤어지매 비형랑도 또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용사들이 이 사실을 왕께 보고하였다. 왕이 비형에게 불러 묻기를

“네가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의 북쪽 개천에 다리를놓아 보도록 하여라.”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를 시켜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

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신다리라고 한다.

왕이 또 묻기를

“귀신들 주에서 인간으로 출현하여 조정을 도울자가 업느냐?”

“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국정을 도울 만 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을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는 과

연 충직하기가 더할 나위 없었다. 이 때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

여 그를 아들로 삼게 하엿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홍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였더니,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에 가서 잤으므로 그문을 길달문이라고 하였다.

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가니 비형이 귀신의 무리를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

시의 사람들이 글을 지어 말하기를

“성제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 뛰는 잡귀의 무리

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아락.”

향속에 이 글을 붙여서 잡귀를 물리친다.

번호:1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0 16:53 길이:65줄

천사옥대(天賜玉帶)

제 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으로 성은 김씨인데, 대건 11년(579년) 8

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에 행차를 할때에 석제(石梯)를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

이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세의 사람들이 보도록 하

라.”

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 중의 하나이다. 왕이 즉

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말하기를

“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으니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교묘(郊廟)의 큰 제

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허리에 매었다. 그 후에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 하면서 말하

기를

“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엇인가?”

좌우가 말하기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그 첫째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처사옥대

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찬(讚)하여 말한다.

구름 밖의 하늘이 준 긴 옥대는

임금의 곤의에 마춤하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이 더욱 무거우니

다음에는 쇠로써 섬돌을 만들까 하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제 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

년(632년)에 왕위를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가지 있었다.

그 첫째가 당 태종이 홍색,자색,백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되

를 보내왔다.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과연 꽃이 피었따가 떨어질 때까지

왕의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인대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의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생각하여 왕께 고한 즉 왕은 급히 각

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교로 나아가 여근곡을 수색하면 필

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으니 부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의 군사 5백명이 거기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오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밑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고 활로 쏘아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를 않았다.

그리고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

라.”

여러 신하들이 그 곳의 위치를 몰라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다.”

하였다.

그 달의 그 날에 이르니 과연 죽었으므로 ᄉ니하가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

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아래에 세웠다. 불경

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이 죽기 전에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일이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를 묻자,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당나라의

임금이 나의 배우자가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

상이며 옥문이란 곧 여자의 음부를 말하는 것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

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니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말함이다. 또한 남근이 여자의 생식

기에 들어가면 죽게 되므로 잡기가 쉬운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신하가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감복을 하였다. 꽃을 삼색으로 보냄은 선

덕,진덕,진성으로 당제(唐帝)도 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잇는데 별기에서 이르기를 이 왕 때에 돌을 다

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번호:1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0 16:54 길이:40줄

진덕여왕

제 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친히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태옆가로 그 가사

를 수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이것을 바치게 하였다.

비단을 짜 무늬를 놓아 보냈다고 함은 청병을 한 때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여왕 때라야 옳겠다. 대개 이 때는 김흠순을 석방하여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이다.

태평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큰 당나라가 왕업을 세우니

외외(巍巍)한 황제의 계획 융성하여라.

전쟁이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수문(修文)하여 백왕의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우시(雨施)하였고

만물을 다스리니 함장(含章)을 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 같고

돌아오는 운수는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깃발은 번쩍이고 징소리와 북소리 웅장도 하다.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 거역한 자는

칼 앞에 엎드려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이 유현(幽現)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로움을 바치네

사시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화(和)하고

7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을 돌아드네

악강(嶽降)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는 충량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삼황이 덕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도가 밝게 빛나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

은 남사나에 있는 오지암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때 대호(大虎) 한 마리

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는데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

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매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

이 이처럼 세어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모든 공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을 하였

다.

신라에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서 의논을 하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

산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이다. 셋째는 서쪽의 피천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

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하였고, 또한 시랑 이라는 칭호도 처음

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번호:1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0 16:55 길이:67줄

김유신

호력 이간의 아들인 서현각간 김씨의 장자는 유신이며 그 아우는 흠순이다. 맏누

이는 보희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해이다. 그 아래 누이의 이름은 문희이며 어릴 때

의 이름은 아지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년)에 태어났는데 7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가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되었다. 이 때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여러해 동안 낭도의 무리에 속

해 있었다. 낭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백석이 그 모

의를 알고 공에게 말하기를

“제가 공과 함께 저들의 나라에 들어가 정탐을 한 연후에 일을 도모함이 어떻겠

습니까?”

하였다.

낭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낭이 세 여자와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낭에게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을 서로 허락하고 즐겁게 담소하면

서 자신을 실정을 이야기하였다.

여인이 말하기를

“공이 말씀하신 바는 잘 알겠아오나, 원컨대 공이 백석을 잠시 떼어놓고 수풀속

으로 함께 들어가시면 그 때 실정을 다시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으로 변하고 나서 말을 하

였다.

“우리들은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유인하여 데리고 가는데도 낭은 그것을 모르고 따라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말리

려고 여기애 온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자취를 감추었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을 하고 나와 골화관에 유숙하였을

때 백석에게 말하기를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아 함께 집에 돌아가서

가지고 오자.”

하였다. 마침내 집에 돌아와서 백석을 고문하여 그 실정을 물었다.

백석이 말하기를

“나는 본시 고구려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원래 고구려의 점장이 추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라의 경계에 있는 하천물이

거꾸로 흘러서 왕이 그에게 이에 대한 점을 치게 하였습니다. ”

추남이 말하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기운이 나타난 것 입니

다.” 하였습니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쩍게 여겼으며 왕비도 몹시 노하여 이것은 필시 요사한 여우

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께 고하기를 다른 일로써 시험하여 맞지 않으면 중

형에 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쥐 한 마리를 함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

건이냐?’고 하였습니다. 추남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쥐인데 그 수가 여덟마리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그 말이 틀린다 하여 죄를 씌워 죽이려하니 추남이 말

하기를

“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켜 버리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를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일곱마리가 있어 그제야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의 서현공 부인의

품에 들어간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다

“추남이 맹세를 하고 죽더니 과연 그렇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어 여기에 와서 이런 계획을 꾸미게 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모두 다 현신

하여 흠향하였다.

김씨댁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의 상곡에 제사를지내고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해마다 봄철에는 그 종중의 남자와 여자들이 그 골짜기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하였는데, 이때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골

짜기 어귀에 암자를 짖고 송화방이라 하였는데 이후에 원찰로 삼았다.

제 54대 경명왕 때에 공을 추봉하여 흥호대왕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 모지사 북

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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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춘추공

제 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며 성은 김씨이다. 용수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

대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비는 문명황후 문희이니

곧 유신공의 끝누이이다.

처음 문희의 언니인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데 그 오줌이 서울에

가득찼다. 다음날 그 꿈 얘기를 문희에게 했더니 문희가 듣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

하였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겟느냐?”

하자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하니 언니가

“그래”

하며 승낙을 하였다.

문희가 치마폭을 벌리고 꿈을 받을 때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의 꿈을 너에게 준다.”

하였다. 문희는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상오 기일에 자기 집 앞에서 공을 찻다.

이 때 유신이 짐짓 춘추공의 옷을 밟아 고름을 떨어뜨리게 하고 청하여 말하기를

“집에 들어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고 하니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에게 봉침(奉針)을 하라고 하니

아해는

“어찌 사소한 일을 해서 가벼이 귀공자와 가깝게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사양하였다. 이에 아지에게 명하였다. 공이 유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문희와 관계하였는데, 이후 춘추공이 자주 왕래를하였다. 유신이 그 누이가 임신한 것

을 알고 꾸짖기를

“네가 부모도 모르게 임신을 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

하고서는 온 나라에 말으 퍼뜨려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거동을 한 틈을 타서 뜰에 나무를 가득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연기가 나는 까닭을 묻자 좌우에서 시중하는 신하들이 아

뢰기를

“유신이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이는가 봅니다.”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하엿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고 물었다. 때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했다.

왕이 말했다.

“그것은 너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구하도록 하여라.”

춘추공이 임금의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구후

떴떳이 혼례를 올렸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 5년(654년)에 춘추공이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

스린 지 8년째인 용삭 원년(661년)에 세상을 떠나니 그 나이가 59세였고 애공사 동쪽

에 장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육력(戮力)으로 삼국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이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직에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저, 지경, 개원등은 모두 문희가 낳

은 아들로 당시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는 개지문 급간과 차득 영공, 마득 아간 이라 하는데 딸까지 합하면 다섯 명

이다.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660년 백제를 멸 한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들 뿐이었다. 그래도 하루를 계한하여 보면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물건 값은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6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

라고 말을 하였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 고구려를 치려고 당나라에 청병을 하러 들

어갔다. 이때 당의 황제는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을 하여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기어이 머물러 있게 하여 사위를 삼으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고 본국으로 도아왔다. 삼

국사기에 의하면 진덕왕 2년의 일로서 이 때 당제는 출사를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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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는 호왕의 원자로 영웅스럽고 용맹하고 담력이 있

었으며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해동 증자라고 불렀

다. 그는 정관 15년 신축에 왕위에 올랐는데 얼마되지 않아 주색에 빠져서 정사가 어

지럽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좌평 성충이 극력으로 이를 간하엿으나 왕은 듣지를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옥 안에 가두었다. 감옥에서 몸이 여위어 죽게 되었을 때 성충은 마지막으로 글을 올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아나하옵니다.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고 싶은 것

은 신이 일찍이 세상 돌아감을 살펴보니 반드시 큰 변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릇 용

병을 함에 있어서는 그 지세를 잘 살펴야 할 것인즉 상류에 머물러서 적을 맞이한다면

능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온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

지 못하게 하옵시고 수군은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궁거해서

적을 막아야만 할 것입니다.”

라 충언하엿으나 왕은 끝내 이르 듣지 아니하였다.

현경 4년( 659년)에 백제의 오회사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간을

돌아다녔고, 2월에는 많은 여우 무리가 의자궁에 들어왔는데 그 중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고, 5

월에는 사비수 언덕위에 큰 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고 그 고기

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

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궁의 남쪽 길에서 울부짖었다. 660년 2월에는 서울에 있는 우물

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 바닷가에 많은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은 모두 이것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또 사비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위에 몰려 들었고, 또 서울의 백성들이 이유없이 놀라서 달아나니 이는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보엿으나 이 때 놀라 자빠져 죽는 자가 백여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6월에는 왕흥사 중들의 눈에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고, 들에 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의 언덕까지 와서는 왕궁을

향하여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더니 얼마 후에 그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귀신 하나가

궁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하고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가 석 자 가량 내려가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등에 글이 써 있기를

백제는 온달(圓月輪) 이고 신라는 초승달(薪月)같다.”

하므로 왕이 무당을 불러 물은즉 무당이 말하기를

“온달이란 가득찬 달이니 곧 기울게 되고 초승달은 아직 가득 차지를 못했으니

점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노해서 그 무당을 죽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온달은 가득 찬 것이니 성(盛)한 것이고 초승달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미약

한 것입니다. 살피건대 우리 나라는 점점 더 성하여지고 신라는 점점 더 미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겟습니까?”

하자 왕은 기뻐하였다.

태종(무열왕)은 백제국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5년(660년)에 인문을 사

자로 하여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당나라의 고종은 좌호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으로 삼아 좌위장

군 유백영과 좌호위장군 방효공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치게했다.

또 신라와 춘추로서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신라의 군사로서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에 다다르니

왕은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5만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아가 아

뢰기를

“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왔고 또 수전에 약하고, 신라의 군사는 큰 나라

만 믿고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군이 이롭지 못함을 안다면 두려

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일전을 하는 것이

가할까 하옵니다.”

달솔 상영 등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군을 먼 길을 왔기 때문에 속전을 하려고 할 것인즉 그 예

봉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군사는 우리의 군사들에게 여러번 패한 바

가 있으므로 우리의 병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

책으로서는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일

부의 군사로써 신라군을 쳐 예기를 꺾은 후에 편의를 보아 합전을 한다면 군사를 하나

도 죽이지 않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번호:2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16:32 길이:64줄

왕은 망설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비지현에

귀양을 가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

하고 의견을 청하자, 대답하기를

“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누설(죄인을 결박하는 끈)중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

음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가하다고 쓸수는 없습니다.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을 따라 내려오게 하되 방주(方舟)치 못하게 할 것이며, 신라의 군사로 하여금 탄

현을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되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이런

때에 군사를 놓아서 적군을 치게 되면 닭장에 든 닭이며 그물에 든 고기와 같을 것입

니다.”

라 하니, 왕이

“그렇도다.”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신라군과 당나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왕은 장군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사나에 가서 신라

병사와 싸우게 하였다. 그는 4번 싸워서 4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부족하고 마침내 힘

이 다하여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해 진군하여 진구에 이르러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

때 홀연히 새 한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돌아다니니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면서도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니 유신이 소정방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하여 천시를 어긴다는 말이오. 하늘에 응

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하여 좋지못한 일이 따르

겠소.”

하고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긴 채 발 아래로 떨

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백강의 왼쪽 언덕에 나와서 산을 등진 채 진을 치고 싸우니 백

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조수를 타고 배와 배가 꼬리를 물고 서로 잇달

아서 북을 치고 고함지르며 쳐들어 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데리고 바로 도성으

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 때 성중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

들을 막았으나 또 패하고 죽은 자가 만여명이나 되었다.

당나라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몰아서 성에 들이닥치니 왕이 죽음을 면하지 못

함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 내 어찌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하고 마침내 태자 융과 함께 북비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남아있던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데리고 이를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가 태에게 말하기를

“왕이 태자와 같이 성을 나가 달아나셨는데 숙부께서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

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우리는 그 때 무사할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좌우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뒤를 따랐으나 태는 이

를 막을 수는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의 깃발을 세우니 태는 매우 급하게

되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이 여러 성과 함께 항복을 하였다. 소정

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및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2천8백7인을

당나라의 서울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37군200성76만호가 있었는데 이 때에 당나라는 여기에 웅진,마

한,동명,금련,덕안등 다섯 개의 도독부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랑장 왕문도로

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에 남아 있는 백성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

끌고 당나라 황제를 뵈니 황제는 그를 꾸짖기만하고 죄를 면하여 주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병이 들어서 죽었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증(贈)하고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을 하는 것을 허락하고 손호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내게 하

고 비도 세워 주웠다.

용삭 2년(662년)에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을 삼았

다가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고쳐 고구려군을 치게 하였다. 그는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깨트리고 마읍산을 탈취하여 진영을 삼고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을 양주안집대사로 삼아 토번을 평정하였다.

번호:2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21:42 길이:64줄

건봉 2년에 소정방이 죽자 당나라 황제는 매우 애도해 하며 좌효기대장군 유주도

독을 증직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다. 신라별기에 이르기르 문호왕 즉위 5년(665

년) 가을 8월 경자에 왕은 친히 대병을 이끌고 웅진성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 융과

만나서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서 맹세를 할 때에 먼저 천신과 산천의 영에게 제사

를 지낸 연후에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지난번에 백제의 신왕이 순응함과 반역함에 어두워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치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을 하고 또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

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성과 읍을 파괴하고 그 백성을 무찔러

죽임으로써 항상 편안함이 없었다. 천자는 한사람이라도 제 살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

기고 백성이 해를 입는 것을 가련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서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

일렀는데도 지세가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기화로 천경(天經)을 모반하였다. 이에 황

제가 크게 노해 삼가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에 한번 싸워 백제를 평정하였다.

마땅히 궁택(宮宅)을 무너뜨려 못을 만들어 내예를 경계하고 폐해의 근원을 아주 뽑

아 자손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귀순하여 오는 자는 회유하고 배반한 자를 정벌함은

선왕의 영전이며, 나라를 흥하게 하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함은 전철의 통규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이 사책에 전해옴으로 이로써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으

로 웅진도독을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상자를 보전하게 하노니 이후 신라

에 의지하여 길이 여국이 되어 각기 묵은 감정을 풀고 호의를 맺어 화친하게 지낼 것

이다. 삼가 조명을 받들어 영원토록 번복이 될 것이다.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권유시켜 나의 뜻을 자세

히 선포하는 것이다. 혼인을 약속하고 맹세를 거듭하여 희생을 잡아 피를 뿌리고 함께

시작과 끝을 같이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할 것이며, 은의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을 받들어 감히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한 다음에는 함께

변하지 말도록 힘쓸것이다. 만일에 이를 어기거나 배반을 하여 그 덕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것을 살려 백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자손을 기르지를 못하여 제사도 끊어지게 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

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만대 감히 어기지 말 것이며 신은

이를 들으시고, 이에 흠향하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난 다음 폐백을 단의 북쪽에 묻고 맹세한 글을 신라의 대묘에 간직하여

두었다. 이 맹세한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

또한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668년)에 신라에서 청병을 한 당군이 평양의 교

외에 주둔을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

들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

험하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

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수송하여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합세를 하고자 윳니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鸞)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 주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사람을

시켜 원효에게 청해 물으니, 해석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속히 돌이키라는 말이다.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것은 두 반절(反切)을

이른 것이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이켜 패수를 건너려 할 적에 군령으로 말하기를

“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

하였다.

군사들의 반이 강을 건너갈 적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죽였다.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백제 고기에 이르길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그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서로 전하

여 이르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을 할지

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가 이끌고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이라 한다.”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

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문으로 전한다.

또한 신라 고전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또 신라도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유신이 그 모의를 알고 당나라 병사들을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

고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의 상주 지경에 당교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땅이라고 한다.

번호:2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1 21:43 길이:50줄

당나라의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산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잔적을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에 주둔을 하니 고구려,말갈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를 하여 서로 싸웠으나 결말이 나지 아니하였는데, 5월 11일부터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가 우험하게 되엇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하여 묻기를

“무슨 좋은 계책이 없느냐?”

하면서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이 달려와서 아뢰기를

“형세가 위급하니 인력으로는 불가하고 오직 신술러써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성부산에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자 홀연히 큰 독만한 광채가 나

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한산성 안에 있는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아니하므로 원망을 하여 서로 바라보

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적병이 이를 급히 치려고 하자 홀연히 광채가 남쪽의 하늘 끝

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서 포석 30여곳을 때려부수었다.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땅에 엎어지더니 한참 후에 깨어나

흩어져 돌아갔다. 아군도 돌아왔다.

태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머리는 하나에 몸은 둘이고 다리는 여덟 개나 되는

도야지를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의논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천하를 통일할 좋은 징조입니다.”

하였다.

이 임금 때에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장법사가 당

나라 황제에게 청하여서 가지고 온 것이다.

신문왕 때에 당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나의 성고는 어진 신하 위징, 이순풍 등을 얻어 마음을 다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던 고로 태종활제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

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람히 하고 있으니 그 뜻이 불충하

므로 속히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신라왕이 글을 올려 답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성신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태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기를 그가 저이(儲貳= 태자)로 있을 때에 하

늘에서 이르기를

“3십3천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 김유신이 되었다.”

고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한 일이 있는데 이때 이것을 꺼내보니 과연 그러한

지라 두려웁고 놀라웁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서 태종이라는 칭호

를 고치지 아니하여도 좋다고 하였다.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처음에 백제의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에 장춘랑과 파랑이 진중에서 죽었는데

후에 백제를 공격할 적에 태종 임금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신 등은 전에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지금 백골이 다 되었으나 나라를 수호

하려고 싸움터에 나가 태만하지가 않았는데,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남의 뒤만 쫓겨다

니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저희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주십시오.”

하거늘,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령을 위하여 하룻동안 모산정에서 불

경을 외고 또한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서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번호:2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2 17:48 길이:81줄

문호왕 법민(文虎王 法敏)

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661년)에 사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

데 키가 73척이나 되고 발 길이가 6척 음장(陰長)이 3척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키가

18척이라고 하였다. 건봉 2년(667년)의 일이었다.

총장(668년)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흠순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서 당군

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의 장수 이적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 당나라로

데리고 갔다.-왕이 성이 고씨이므로 고장이라고 했다.- 당서 고종기를 보면 현경 5년

(660년)에 소정방등이 백제를 정벌한 다음에, 12월에는 대장군 계여하를 패(강)도행군

총관으로 하고 소정방을 요동도대총관으로, 유백영을 평양도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또 다음해인 신유정월에는 소사업을 부여도총관으로 삼고 임아상을 패강

도총관으로 삼아 3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도록 하였다. 8월 갑술에 소정

방 등이 패강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쳤는데, 건봉원년 병인 6월에는 방동선,?고임,

설인귀, 이근행으로써 후원을 하게 하였으며, 9월에는 방동선이 고구려와 싸웠으나 패

하였다.

12월 기유에 이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여섯 총관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

려를 치게 하였다.

총장 원년 무진(668년) 9월 계사에 이적이 고장왕을 사로잡았으며 12월 정사에

황제에게 포고를 바쳤다. 상원 원년 갑술(674년)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하였다. 신라 고기의 기록에서는 육로장군 공공과 수로장군 유상으로 하

여금 신라의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여기(당서고

종기)에서는 인문과 흠순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의 일은 빠뜨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이 때 당나라의 유병(遊兵)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를

치려고 했으므로 이를알고 발병을 하여 쳤다.

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다가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

유이냐?”

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

게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조에 당 고종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에

임명하여 신라를 경략케하였으며, 또한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사실이 보

인다.- 이 때 의상법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

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의상이 곧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

을 모아놓고 그 대책을 강구할 때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하고 돌아왔으니 청하여 물어보

십시오.”

하였다.

명랑법사가 말하기를,

“낭산의 남쪽에 신유림이 있는데 그 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가할까

합니다.”

하자, 그 때 정주에서 사자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당병이 무수히 우리의 국경에 다가와서 바다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겟소?”

명랑이 말하기를

“채백(彩帛)으로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채백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신상을 만들고 유가의 명승 12사람으로 하

여금 명랑을 상수(上首)로 하여 문두루의 비밀법을 쓰게 했다.

이 때 당병과 신라의 병사가 접전도 벌이기 전에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후에 절을 고쳐서 다시 짓고 사천왕사라 이름하였

는데, 지금까지도 단석이 없어지지를 않았다.

그 후 신미 – 신미년은 문무왕 11년(671)에 해당되는데 아마 착오인 것 같다. 문

무왕이 당에 의해 파직되고 김인문이 신라왕에 봉해진 것은 문무왕 14년(674)의 일이

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참조)- 에 당나라에서는 다시 조헌을 장수로 하여 5만의 군사

로 쳐들어왔는데 역시 같은 비법을 썼더니 그 전과 같이 배가 침몰하였다. 이때 한림

랑 박문준이 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었는데 당의 고종이 문준을 불러 물었다.

“너희 나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대병이 다시 갔어도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문준이 말하기를,

“배신들은 상국에 온지가 10여년이 되었기로 본국의 일은 알지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의 사실만 들었을 뿐인데, 그것은 상국의 은혜를 많이 입어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덕을 갚고자 낭산의 남쪽에 천왕사를 새로 지어 황제의 만년수명

을 축원하며 법석(法席)을 깊이 열었다는 것입니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괴를 사자로 신라에 파견을 하여

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온다는 말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라 하

고, 그 남쪽에 따로 새로운 절을 지은 다음 사신을 기다렸는데, 사신이 이에 이르러

말하기를,

“먼저 황제의 수를 축수코자 천왕사에 가서 분향을 하겠습니다.”

하거늘,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인도하자 사신이 그 절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왕사란 절이 아니고 망덕요산의 절이오.”

하며 끝내 들어가지를 않았다. 나라 사람이 그에게 황금 1천냥을 주자 사자가 돌

아가 말하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축수를 새 절에서 할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번호:2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2 17:50 길이:78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새 절을 망덕사라 하였다. – 혹은 효소왕때의 일이라

고도 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

왕은 문준이 당나라 황제에게 말을 잘 하여 그 죄를 용서하여 줄 뜻이 있음을 알

고 강수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표문을 짓게 하여 이것을 사인(舍人)

원우에게 주니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는데,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위로하고 죄를 사하여 놓아 보냈다. 인문이 옥에 있을 때에 신라 사람들은 그

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라고 하고 관음도량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으므로 미타도량이라 고쳤다. 그 절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째인 영융 2년 신사(681)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

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왕은 평시에 지의법사에게 항상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려하오.”

하거늘, 법사가 아뢰길,

“용은 짐승의 응보이니 어찌 용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왕은,

“나는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가 오래니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

라는 바이오.”

왕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남산에 장창을 설치하였는데 길이가 50보였으며 넓이가

15보로서, 이 곳에다 미곡과 병기를 저장하였다. 이것이 우창이며, 또 천은사 서북쪽

산위에도 장창이 있으니, 이것은 좌창이라 한다.

별본에는 건복 8년 신해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천8십보라 하였다. 이

것은 진덕(평)왕 때에 처음 쌓았다가 이 때에 와서 중수를 한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부산성을 쌓았는데 3년만에 마쳤으며 안북하변에 철성을 쌓았다.

또한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를 갖추라고 명을 하였는데, 이를 의

상법사가 듣고 글을 보내어서 아뢰기를,

“왕의 정치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들은 넘

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을 오래할 수 잇습니다. 정치가 진실로 밝지가

못하면 비록 장성을 쌓는다 하여도 재해를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 글을 보고 역사를 중지시켰다. – 문무왕 21년(681)의 일-

인덕 3년 병인(666) 3월 10일에 길이라고 하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 3년 경오(670)정월 7일에는 한기부 일산급간-혹은 성산아간이라 함.- 의 여종이

한꺼번에 네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일녀 삼자였다. 나라에서는 곡식 2백석의 상을 주

었다. 또 고구려를 쳐서 그 나라의 왕손을 데리고 와서 진골의 지위에 두게 하였다.

왕이 하루는 서동생 차득공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재상이 되어서 백관을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하게 하라.”

고 하니, 차득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 하여금 재상을 삼으시려거든 신은 원하옵건대, 나라 안

팎을 잠행하며 민간무역의 괴롭고 편안함과 조세의 경중과 관리의 청탁을 알아본 연후

에 직위를 맡을까 합니다.”

하였으므로 왕은 그 말을 들어주었다.

차득공은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모양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

-지금의 명주- 우수주-지금의 춘추- 북원경-지금의 충주- 을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

에 이르렀다.

이한(里閑 -동리,마을) 을 돌아다니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이 그를 비범한 인물임

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그날 밤에 안길은 아내와 첩 세 사람을 불렀다.

“오늘밤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것이오.”

두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어찌 동침을 할 수 있갰습니까?”

한 아내가 말했다.

“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또 한 아내는 그대로 시행을 하였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 집은 황룡사와 황성사의 두 절 가운데 있고 이름을 단오 –

속언에 이르길 단오를 차의라 한다.- 라고 하니, 주인이 서울에 오게 되면 찾아주기

바라오.”

차득공은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각 주의 향리 한 사람을 서울 안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

어 지키게 하는 상수리라는 제도가 있었다.

안길이 서울에 올라와 지킬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다.

단오거사의 집을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이 오랫동안 길가에 서 있으니 늙은이가 지나갔다.

그의 말을 한참 듣고 서서 말했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궐이고 단오란 차득공인데 외군(外郡)에 잠행을 하였

을 때에 어떤 인연과 약속이 있었던 모양이지.”

안길이 사실대로 말하자 노인이 말했다.

“그대가 궁성의 서쪽 귀정문으로 가서 출입을 하는 궁녀를 기다려 사실을 말하시

오.”

안길이 그 말을 쫓아 아뢰었다.

“무진주에 사는 안길이 상공을 뵈오러 왔습니다.”

차득공이 그말을 듣고 쫓아 나와 손을 붙잡고 궁으로 들어가 공의 부인을 함께

불러내어 잔치를 열었다.

차린 음식이 50여 가지나 되었다. 이사실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성손호산-밑의

땅을 무진주의 상수리의 소목전(燒木田-궁중과 여러관청에 공출하는 연료를 채취하는

토지)으로 삼아 사람들의 벌채를 금하였다.

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하고, 경향 각지의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였다. 산 밑에

밭 30묘가 있는데 종자를 석 섬이나 뿌렸다. 이 밭이 풍작이 되면 무진주 또한 풍작이

되고, 무진주도 또한 흉작이 되었다.

번호:2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3 16:31 길이:61줄

만파식적

제 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고 성은 김씨이다. 개요 원년 신사(681)7월7

일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 – 경북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

에 사지가 있다.- 를 세웠는데 – 절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

여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한

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치고 금당 뜰 아래 동

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이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 이름은 감은사라고

하였는데 후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

이듬해인 임오 5월 초하루 – 다른 책에는 천수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에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이 아뢰었다.

“동해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바다에 떠서 감은사를 향하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일관이 말하기를,

“대왕의 아버지께서 지금 해룡이 되어서 삼한을 진호(鎭護)하시고 또한 김유신공

도 삼십 삼천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동덕(同德

)하여 성을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게 되면 값

으로 칠수 없는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

보게 하였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 형상이었다. 그 윗켠에 한간(一竿)의 대나무가 있

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 혹자는 말하기를 대

나무와 같이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해졌다고 한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니 왕은

감은사에 나아가 머물렀다.

다음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하여져서 하나가 되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가

일어나며 7일동안이나 계속 캄캄하였다. 그 달 16일이 되어서야 바람이 자고 파도는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

어서 왕에게 바치었다. 자리를 같이하여 왕이 묻기를,

“이 산에 있는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데 이는 무슨 까

닭인가?”

용이 대답하기를,

“비유를 하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것은 합해진 연후라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는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좋은 징조니다. 왕께서 이 대

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용이 되셨고 유신공은 다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으로

칠수 없는 보물을 저에게 주어 저로 하여금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웁고 기쁘기 그지 없었다. 5색 비단과 금,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보

내어 그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아니하였다.

왕은 감은사에 유숙하고 17일에 지림사의 서쪽 시냇가에 다다라 어가를 멈추고

점심을 드시었다.

태자 이공 -즉 효소대왕- 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려와서 경하하며 천천히 살펴보고 말하였다.

“이 옥대의 모든 눈금이 진짜 용입니다.”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하고 왕이 말하자, 태자가 아뢰기를

“눈금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이겠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왼편의 둘째 눈금을 떼어 물에 넣으니 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은 곧 못이 되니 이러한 이유로 하여 용연이라고 불렀다.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서 월성의 천존고레 보관하여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때는 맑아

지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하였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에 이르러 천수 4년 계사(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기

이한 연유로 하여 다시 봉하여 말하기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자

세한 것은 그의 전기에 나타나 있다.

번호:2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4 11:01 길이:68줄

효소왕대(代) 죽지랑

제 32대 효소왕대에 죽만랑(죽지랑)이라는 무리 가운데에 득오(득곡)급간이 있

었다.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사진(仕進)하더니 순일(旬日)동안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죽만랑이 어머니를 불러,

“그대의 아들은 어디에 있는가”

고 묻자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당진 모량부의 익선아간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직(倉直)으로 임명을 하였습니

다. 빨리 가느라고 미쳐 인사를 못하였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들이 사사로이 그 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도 없지만,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찾아가서 대접을 해야겠소.”

이에 설병(舌餠)한그릇과 술 한병을 가지고 좌인-우리말에 개질지라고 하니 곧

노복을 말함이다.-을 거느리고 가니 낭의 무리 백 삼십 칠인이 예의를 갖추고 따랐다.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느냐?”

고 물으니, 문지기가 대답하기를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배불리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

여 함께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익선은 허락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사리(使吏)간진

이 추화군 능절의 조(租) 30석을 거두어 성중으로 수송하다가 낭이 선비를 중히 여기

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변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조 30

석을 익선에게 주고 득오실을 보내주도록 청하였다. 그래도 허락을 하지 아니하므로

또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주니 그 때야 비로소 허락을 하였다.

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하고 더러움을

씻어주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대신 그의 장자를 잡아갔다.

때는 엄동의 몹시 차가운 날이었으므로 성내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이내

얼어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명하기를,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을 한 사람은 모두 쫓아보내어

다시는 관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검은 못을 입게 하였으며 중이 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만약 중이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엿다.

칙사가 간진의 자손을 올려서 평정호손으로 삼고 특별히 표창하였다.

이 때 원측법사가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인 까닭으로 승직을 주지 않

았다.

처음에 술종공(죽지랑의 아버지)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그의 임지로 부임하러 가

려하는데, 이때에 삼한(三韓)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삼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

였다.

행렬이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길을 잘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매우

탄미하자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놀라운 것을 보고 존대하게 되어 서로가 마음으

로 존경하게 되었다.

공이 고을의 임소에 부임한 지 한달이 되었다.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부가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다음날 사람을 보내

어 그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 사실을 고하니 그 날이 꿈꾸었던 날과 같은지라, 공이 말하

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 같소”

라고 하였다.

다시 군사를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불 한

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게 하였다.

공의 아내는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았는데 이런 이유로 죽지라

이름지었다.

이 죽지랑이 커서 벼슬을 하게 되니 유신공을 따라 부수(副帥)가 되어 삼국을 통

일하였다.

진덕,태종,문무,신문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니 다음과 같다.

지난 봄 그리워 하매

모든 것이 시름하는데

아담하신 얼굴 주름살이 지시려는도다

눈을 돌릴 사이에나마 뵙도록 하리라.

낭이여, 그리워 하는 마음에 오고 가는 길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까

번호:3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4 11:02 길이:67줄

성덕왕

제 33대 성덕왕 때인 신룡 2년 병오(706)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매우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 정월 초하루부터 7월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주었

는데, 한 사람에게 1일분을 3되로 하여 일을 마치고 계산하여 보니 삼십만 오백석이나

되었다.

왕은 태종대왕을 위하여 봉덕사를 세우고 7일동안 인왕도량(仁王道場-국가의 안

위를 기원하는 법회)을 설치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시중(恃中)의 관직을 두

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수로부인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을 할 때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 있는 바위의 봉우리가 바다를 병풍처럼 들러쳐서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높이는 천장(千丈)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엿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를 둘러보고 말을 하였다.

“어느 누가 저 꽃을 꺾어다 나에게 주겠는가?”

종자들이 대답하였다.

“저 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 때 한 노옹이 암소를 몰고 그 곳을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가

지고 와 노래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수 없었다.

또 이틀을 순행하며 임해정에 다달아 점심을 먹을때 바다의 용이 나타나 홀연히

부인을 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땅을 치며 주저앉았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구삭금(衆口삭(쇠녹일 삭)金)이라 하였으니 바닷속의 짐승

이 어찌 여러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계내(界內)의 사람을 모아 노래

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그 말을 좇아 행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바치었다. 공이 바닷속

의 일을 물으니 부인이 대답하였다.

“7보(寶)로 장식된 궁전에 음식은 달고 향기로운 것이 인간의 음식은 아니었습니

다.”

부인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기었는데 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다.

수로부인은 그 용모가 세상에서 견줄이가 없었으므로 번번히 깊은 산이나 큰 못

을 지날때에는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림을 당하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해가(海歌)를 불렀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 놓아라

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만약에 거역하여 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으리.

노인의 헌화가는 다음과 같다.

붉고 짙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고

나를 부끄럽다 아니하시면

꽃을 꺽어 바치오리라.

효성왕

개원 10년 임술(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에 관문을 세웠다. 지금의 모화촌으

로 경주의 동남경에 속했다. 이것은 일본을 방어하는 변방의 요새였다.-성덕왕 21년의

일로서 효성왕 때는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고기나 지리지에도 모화군에 축성한 사실이

확인된다. 지금의 경북 월성군 외동면에 일부의 관문지가 남아있다.-

주위는 6792보 다섯자인데, 소요된 역원(役員)은 3,9262인이요, 감독하는 사람은

우너진 각간이었다.

개원 21년 계유(733)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적(北狄)을 치려고 신라에 청병을 요

청하매 사객(使客) 604인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성덕왕 32년의 일로서 효성왕

때가 아니다. 이 때 당나라 현종은 등주에 입구한 말갈을 공격하도록 당시 숙위하고

있었던 김사란을 파견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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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당에서 덕경(德經-노자의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만에 오악삼산의 신들이 간혹 모습을 나타내어 대궐의 뜰

에서 왕을 모시었다.

3월3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상에 나아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도중에서 능력 있는 스님을 한 사람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 때 마침 큰 스님이 위의를 갖추고 지나가고 있엇다.

좌우의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었다. 왕이 말을 하였다.

“내가 말하는 위의를 갖춘 스님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

다시 스님 한 사람이 납의(納衣)를 걸치고 앵통(櫻筒)을 혹은 삼태기를 걸머지고

남쪽에서 왔다.

왕은 기뻐하며 누상으로 인도하였다.

앵통의 가운데를 바라보니 다구(茶具)만이 가득하여서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왕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소” 스님이 대답하였다.

“저는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

니다.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을 하였다.

“나에게 차를 한사발 주시겠소?”

스님은 차를 다려 왕께 드렸는데 차 맛이 이상하고 그릇 속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스님께서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思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요?”

“그렇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

스님은 즉시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스님은 두 번 거듭 절하고 굳이 사

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이고

신하는 사랑을 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 지면

백성은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

나라 안의 유지됨을 알리라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는 이렇다.

헤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을 따라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구나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뜻을 따르려 하노라.

아, 잣나무 가지 드높다.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經)의 길이가 여덟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인 만월부인의 시호는 경

수태후이며 의충 각간의 딸이었다. 왕이 어느날 표훈대덕에게 말하기를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

게 하여 주오.”

하였다. 표훈은 하늘에 올라가 청하고 내려와서 왕께 말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라면 가능하고 아들이라면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원하건대 뜰을 바꾸어서 아들로 점지해 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상제께 청하니 상제께서 말하기를

“될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라고 하였다.

표훈이 하계로 내려오려고 할때 상제가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대사께서는 이웃 마을을 왕

래하듯이 천기를 누설하고 다니니 금후엔 아예 다니지 말라.” 하였다.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태자가 여덟살 때 왕이 세상

을 떠나니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혜공대왕이다. 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임조(臨朝)하였는데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막아낼 수 없

었다. 표훈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

에 오르는 날까지 언제나 여자의 놀이를 즐기며 자랐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도사)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과 김

양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16년조에 의하면, 이찬 김지정

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이를 진압하고 또한 혜공왕은 난병에게 화를 당

하였다고 한다.-

표훈은 이후에 신라의 성인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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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공왕

대력 초년에 강주 관서 대당의 동쪽 땅이 점점 꺼져 못을 이루니-어떤 책에는

대사(大寺)의 동쪽 작은 못이라 하였다.- 세로는 13척이고 가로는 7척이었다.

문득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계속하여 커지더니 못도 따라서 커졌다.

2년 정미에 또한 천구성(天狗星)이 동루의 남쪽에 떨어졌다. 머리는 항아리처럼

생겼고 꼬리는 3자 가량이나 되었으며 그 빛은 활활 타는 불과 같았으며 천지가 또한

진동하였다. 또 이해에 김포현의 5경 가량의 논 속에서 쌀이 모두 이삭을 이루어 매

달렸으며, 이해 7월에는 북궁의 뜰 가운데 별 두개가 떨어지고 또 한 개가 떨어져, 세

개의 별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이보다 먼저 대궐의 북쪽 측간 속에서 두 줄기의 연(蓮)이 나고 봉성사의 밭 가

운데에서도 연이 났다.

호랑이가 성 안에 들어온 것을 잡으려다가 놓쳐버렸다.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수없이 모였다.

안국병법 하권에 이르기를 이러한 변괴가 있으면 천하에 대병란이 일어난다 하였

는데, 이에 왕은 죄수를 사면하고 자숙 반성하였다.

7월 3일에 각간 대공이 적도(賊盜)가 되어서 일어나고, 왕도와 5도주군의 96각

간이 서로 싸워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다. -혜공왕 4년(768)의 일이다.(삼국사기 신라

본기 참조)- 대공 각간이 죽고 그 집안이 망하니 그의 재산과 보물 등을 왕궁으로 옮

겼다.

신성의 장창(長倉)이 불에 타므로 사량, 모량 등의 마을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들을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만에 그쳤는데, 상 받은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표훈의 말대로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이 이것이었다.

 

번호:3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1:34 길이:85줄

원성대왕

이찬 김주원이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차재가 되었는데 복두(귀

인이 쓰는 모자)를 벗고 흰갓을 쓰고 12현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이 깨자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니,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쓰게 될 조짐이

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 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심히 근심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이 때 아찬 여삼이 와서 뵙기

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빙자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아찬이 청하므로 왕이 이를 허

락하자, 아찬이 물었다.

“공이 근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쳤던 사실을 자세히 얘기하니 아찬은 일어나 절을 하며 말했다.

“그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약 왕위에 올라서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

을 위해 꿈을 풀어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아찬에게 해몽하기를 청하자 아찬은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있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갓을 쓴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의 왕위를 이어 받을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

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소로운 조짐입니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상위에 있을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말했다.

“비밀히 북천 신에게 제사지내면 좋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따랐다. 그 얼마 후 선덕왕이 세상을 떠나매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받들어 장차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냇

물이 갑자기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니

모든 대신들이 따랐으며, 새 임금께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이요 성은 김씨이니 대개 길몽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주원은

명주에 물러가 살았다. 그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

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다섯 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혜충태자, 헌평태

자,예영잡간,대룡부인,소룡부인 등이다.

대왕은 진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이치를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

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간직해서 왕에게 전했다. 왕은 이

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그 덕이 멀리까지 빛났다.

정원 2년 병인(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했으

나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렸다. 그리고는 사자에게 금 50냥

을 보내어 피리를 주기를 청했다. 이에 왕은 사자에게 일렀다.

“내 듣건대 상대 진평왕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듬해 7월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천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여 말했다.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다시 돌려보내겠습니다.”

왕은 지난번과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은 3천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가져온 금은 받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795)에 당나라의 사자가 서울에서 한 달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그 다음날 두 여자가 내정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동지,청지-청지는 곧 동천사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에 보면 이 샘은

동해의 용이 왕래하며 불법을 듣던 곳이요. 이 절은 진평왕이 지은 것으로서 5백성중

(聖衆)과 5층탑과 전민(田民)까지 헌납했다고 함.- 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

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남편들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

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속에 넣어 가지고 돌

아갔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그 두사람에게 명하시어 나라를 지키는 용인 우리 두 남편

을 여기서 머무르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에 왕은 하양관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희를 베풀고는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여기까지 잡아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필히 사형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세 마리의 고기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물

속에서 제각기 한길이나 뛰고 기뻐하며 뛰놀다가 가버렸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

철함에 감복했다.

왕이 하루는 황룡사의 중 지해를 대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외게 했다.

사미 묘정이 매양 금광정(金光井)가에서 바릿대를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

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므로 사미는 늘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희롱했다.

법석(法席)이 바야흐로 끝날 무렵에 사미 묘정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가 오랜데 너는 나에게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그런지 며칠이 지나 자라는 입에서 구슬 한 개를 토해 내더니 묘정에게 주려고

하는 듯했다. 묘정은 그 구슬을 받아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 후로부터 대왕은 묘정

을 보면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 내전에 맞아들여 자기 옆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잡간 한사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 또한 묘정을 사랑하여 함께

가기를 청하매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들이 함께 당나라에 가자 당나라의 황제도 역시

묘정을 보자 매우 사랑하게 되었으며, 승상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

했다. 관상 보는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니 하나도 길한 상이 아닌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이는

필시 이상한 물건을 지닌게 틀림없습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 몸을 뒤져 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매달려 있었다.

황제는 말하기를,

“내게는 네게의 여의주가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한 개을 잃었었다.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은 구슬이다.”

하며 황제가 묘정에게 그 구슬을 갖게 된 여유를 묻자, 묘정은 그 사실을 자세히

말했다. 황제가 생각해 보니 구슬을 잃었던 날짜가 묘정이 구슬을 얻은 날과 똑같았

다. 이에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고 묘정을 돌려보냈다. 그 후부터는 묘정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에 있는데 최치원의 지은 비가 있다. 왕은 보은

사와 망덕루르 세웠으며, 할아버지 훈입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이라 하고, 증조 의

관잡간을 신영대왕이라 하였으며, 고조 법선 대아간을 현성대왕이라 했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바로 마질차갑간이다.

번호:3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8:51 길이:54줄

조설(早雪)

제 40대 애장왕 말년 무자(808)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제 41대 헌덕왕 때인 원화 13년 무술(818) 3월 14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제 46대 문성왕 기미(839) 5월 19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8월 1일에는 천지가 어

두웠다.

흥덕왕와 앵무새

제 42대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이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암놈이 죽

으므로 홀로 남게된 수놈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

에 거울을 걸어 놓도록 했다.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깨닫고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

신무대왕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 45대 신무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 궁파에게 말했다.

“내겐 이 세상에 함께 살아나갈수 없는 원수가 있다.-흥덕왕이 죽자 그의 부인

균정을 왕에 추대하려 했으나, 김명 등에 의해 제륭 희강왕이 즉위하였다. 이에 우징

은 희강왕 2년(837)에 청해진에 피신하였다. 여기에서 원수는 김명 즉 민애왕이다.-

만일 네가 나를 위해 원수를 없애 준다면 내가 왕위에 올라 네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

다.”

궁파는 이를 허락했으며,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

그 일을 성취하였다. 그 후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여

러 신하들이 극력 간하였다.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옳지않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그 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진을 지키고 있었다. 왕이 약속

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했다. 이때 장군 염장이 이 말을 듣고 왕께 아

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한 일을 도모하려 하오니 소신이 가서 이를 제거하고 오겠습니

다.”

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염장은 왕의 명령을 받들고 청해진으로 가서 인도

자를 통해 말했다.

“나는 왕께 조그만 원망이 있소. 그래서 명공에게 의탁하여 몸과 목숨을 보전하

려하오.”

이 말을 듣고 궁파는 크게 노했다.

“너희들이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폐하고, 어찌 나를 보려 하느냐?”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서 말했다.

“그것은 여러 신하들이 간한 것이오. 나는 그일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나를 혐의

치 마십시요.”

이 말을 듣자 궁파는 청사로 그를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왕의 뜻을 거슬린 일이 있었으므로 공의 막하에 의탁해서 해를 면할까 하는 것

이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

하고 궁파는 말하더니 무척 기뻐하며 술자리를 마련했다. 염장은 궁파의 긴 칼을

뽑아 그를 베어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렸다. 이에 염

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왕께 복명하여 말하기를

“이미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에게 상을 내리고 아간의 벼슬을 주었다. 신라 제 46대 문서와

8년(849)의 일이다.

번호:3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6 18:55 길이:67줄

제 48대 경문대왕

왕의 이름은 응렴이다. 나이 18세에 국선이 되었으며, 약관에 이르자 헌안대왕이

그를 불러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물었다.

“낭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무슨 이상한 일이라도 본 건 없는

가?”

“신은 행실이 아름다운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말을 나에게 들려 주게.”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이가 그 하나

요, 세력이 있고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은 검소하게 하는 사람이 둘이요, 본래부터 귀하

고 세력이 있는데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그말을 들은 왕은 그들의 어짐을 깨닫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낭의 건즐(巾櫛-수건과 빗, 이것을 든다는 것은 남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말함.)을 들게 하겟네.”

낭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낭이 사실을 부모

에게 고하자 그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며 그 자제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왕의 첫째 공주는 얼굴이 무척 초라하고, 둘째 공주는 아름답다고 하는데 둘째

를 아내로 맞이했으면 좋겠다.”

낭의 무리들 중에 우두머리인 범교사가 이 말을 듣고 낭의 집에 와서 낭에게 물

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느 공주에게 장가 들 생각입니까?”

“부모님께서는 둘째 공주가 좋겟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범교사가 말했다.

“낭이 만약 둘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

고, 첫째 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필시 세 가지의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니 경계해서 하

도록 하십시오.”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얼마 후 왕이 날을 가려서 낭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두 딸 중에서 공의 의사대로 결정하도록 하라.”

사자가 돌아와서 낭의 의사를 왕에게 보고했다.

“첫째 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나자 왕이 병이 들어 외독하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게는 아들이 없으니 내 죽은 뒤의 일은 마땅히 맏딸의 남편 응렴이 이를 계승

해야 할 것이다.”

그 이튿날 왕이 세상을 떠나매 유언을 받들어 낭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범교사

는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 아름다운 일이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공주에게

장가를 드셨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첫째요,, 예전에 흠모하시던 둘째공주

에게 이제 쉽사리 자아드실수 있게 된 것이 그 둘째요, 맏공주에게 장가를 드셨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매우 기뻐하심이 그 셋째입니다.”

그 말을 고맙게 여긴 왕은 대덕이란 벼슬을 내리고 금 1백30냥을 하사했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경문이라고 했다.

일찍이 왕의 침전에는 날마다 저녁이면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

라고 두려워 이를 쫓아내려 하자 왕은 말했다.

“만일 뱀이 없으면 내가 편히 잘 수 없으니 쫓아내지 말라.”

왕이 잘 때에는 언제나 뱀들이 혀를 날름대며 온 가슴을 덮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후 왕은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왕후며 궁인

들도 모두 이를 알지 못했으나 오로지 복두장 한 사람만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죽으려 할 때 도림사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대나무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

그러 다음부터는 바람이 불면 대나무 밭에서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처럼 생겼다.”

왕은 이 소리를 싫어해서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 나무를 심었다.

그랬더니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 하는 소리만 났다.

국선 요원랑. 예흔랑, 계원, 숙종랑 등이 금란(강원도 통천)을 유람할 때 은근히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를 짓고, 다시 심필 사지(舍

知)를 시켜서 공책을 주어 대구화상에게 보내어 노래 세수를 짓게 했다.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요, 셋째는 문군곡(文

群曲)이었다. 대궐에 들어가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며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

는 알려지지 않았다.

번호:3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7 23:44 길이:54줄

처용랑과 망해사(寺)

제 49대 헌강대왕 때는 서울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었으

며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소리가 길거리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바람과 비

는 철마다 순조로왓다. 때마침 대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주-에 놀러왔다가 돌아가려고

물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게 되었다. 왕이 괴이하

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었다.

“이것은 동해 용왕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 주어야 할 것입니

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도록 했다. 왕

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는 걷혔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을 개운포라 이름했다.

동해 용왕은 기뻐하며 아들 일곱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에서 일곱째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가 왕

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를 그의 아내로

삼게하여 그를 치하했으며, 또한 급간이란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무

척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그녀를 흠모하여 밤이면 사람으로 변하여 그 집에 가서 몰

래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다른 남자가 잠자리를 같이하

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렇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러라.

둘은 내해인데, 둘은 뉘해인고,

분디 내해지만, 앗겼으니 어이하리.

이 때 역신은 본디의 모습을 나타내며 처용 앞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렇게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하노니, 이제부터는 공의 모습이 그려진 것

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

고 경사로운 일을 맞아들이는 습속이 생겼다.

서울로 돌아오자 왕은 이내 영취산 동쪽 기슭에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우

고 망해사라 이름했다. 혹은 이 절을 신방사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왕이 또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왕에게만 보일 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신)이 나타나 춤을 추므

로 왕 자신도 이를 따라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나타내었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심상

이라고 했으며,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

산신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와서 춤을 추엇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공인에게 명하여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이라고

했다고도 한다.혹은 상염무(霜髥舞-상염은 흰수염이다.)라고도 하니 그것은 그 형상에

따라 일컬은 것이다.

또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령이라

했으며, 또 동례전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이 신의 이름

을 지백급간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때 산신이 춤도 추고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 했는

데, 도파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많은 사람들이 미리 사태를 짐작

하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

즉, 지신과 산신은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

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

과 여색을 즐김이 더욱 심했으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한다.

번호:3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8 00:51 길이:62줄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제 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녀의 남편 위홍

잡간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근심하여 이에 다라니(주문)의 은어(隱語)를 지어 써서

길에 던졌다. 왕과 권신들이 이것을 얻어 보고 말했다.

“이 글은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지을 사람이 있겠느냐?”

이에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옥에 벼락을 쳐 거인을 풀어 주었다. 이 때 지은 왕거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연단(燕丹-전국시대 연나라의 태자인 단)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 해를

뚫고,

추연(鄒衍-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의 품은 슬픔 여름 서리 내리네.

이제 나의 불우가 그들과 같거니.

어찌하여 황천(皇天)은 아무 상서로움도 아니 내리는가.

또 다라니의 은어는 이러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가리킨 것이요,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소판을 말한

것이다. 소판은 관작의 이름이요, 우우삼아간은 3,4명의 총신을 말한 것이며 부이는

부호를 말한 것이다.

이 때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궁수 50명을 뽑아서 그를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에 이르자 풍랑이 크게 일어 10여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은 이를 근심

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이 섬에 신지(神地)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았더니 못물이 한 길도 넘게 치솟았다. 그날 밤 꿈

속에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이르기를

“활을 잘 쏘는 한 사람을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으리라.”

하니, 공이 잠에서 깨어 그 일을 좌우에 알리며 물었다.

“누구를 남겨두는 것이 좋겠소?”

이에 여러 사람이 말하였다.

“나무 조각 50개에 각자의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혀 제비를 뽑으시면 좋겠습니

다.”

공은 그 말에 따랐다.

군사 거타지의 이름을 쓴 나무 조각이 물에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자 문득

순풍으로 바다가 잔잔해져 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근심에 싸여 섬위에 서

있는데 문득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오더니 말했다.

“나는 서해약(서쪽 바다의 신)이오. 해가 뜰 때면 항상 하늘로부터 중 하나가 내

려와 다라니의 주문을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

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어 먹는다오. 그래서 이제는 오로지 딸 하

나와 우리 부부만 나마게 되었소. 내일 아침도 필시 올테니 그대가 활로 중을 쏘아 주

시오.”

“활 쏘는 일은 저의 장기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고 인사하더니 물 속으로 사라지고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

튿날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과연 중이 내려와 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어먹으려 했다. 이 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순간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서 치사를 했다.

“공의 덕을 입어 내 성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공에게 아내로 드리겠소”

“저에게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참으로 원하던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용에

게 명하여 거타지를 받들어 사신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케 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

록 했다. 신라의 배가 두 마리의 용이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본 당나라 사람은 이 사실

을 황제에게 아뢰니 이에 황제는 말했다.

“신라의 사람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히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거타지는 가슴에서 꽃 가지를 꺼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번호:3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8 23:40 길이:145줄

효공왕

제 52대 효공왕 시대인 광화 15년 임신-실은 주량의 건화 2년(912)-에 봉성사 바

깥 문 동서쪽 21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 즉위 4년 을해(915)에 영묘사 안 행랑에 까치집 34개가 있었고, 까마

귀집도 40개나 되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이나 내렸고, 6월에는 참포의 물과 바닷물의 물결이 3

일동안 서로 싸웠다.

경명왕

제 54대 경명왕 때인 정명 5년 무인(918)에 사천왕사 벽화 속의 개가 울므로 3일

동안 불경을 외어 이를 물리쳤으나, 한나절이 지나서 그 개가 다시 울어 댔다.

7년 경진(920) 2월에는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뜰 안에 한달 동안

이나 거꾸로 서 있었다.

또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다 끊어졌으며, 벽화속의 개가 뜰로 달

려 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

경애왕

제 55대 경애왕이 즉위한 동광 2년 갑신(924) 2월 19일에 황룡사에서 백좌(百座

-설법의 하나)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겸하여 선승 3백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대왕

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를 세운 선교의 시초였다.

김부대왕-경순왕

제 56대 김부대왕의 시호는 경순이다. 천성 2년 정해(927) 9월에 후백제의 견훤

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자,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했는데, 구원벼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은 그해 겨울인 11월에 신라의 서울을 쳐들어 갔다. 이 때 왕

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처들어

오는 것도 모르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

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붙잡혔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

기를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그리고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도록 했는데,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

를 군중으로 끌어다가 왕은 강제로 자결토록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인 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

운 것이 되었다. 이가 경순왕으로서 그는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아치하

고 여러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 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928) 봄 3월에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이르자 왕

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서로 대좌해서 정의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화란(禍亂)을 불러일으켰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우리 나라를 망쳐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이내 눈물을 흘리며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태조도 역시

눈물을 흘렸다. 이 후 태조는 수십일을 머무르다 돌아갔는데, 부하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의 사녀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했다.

“지난 번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이제 왕공이 오

니 마치 부모를 만난 것 같다.”

고 하엿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어 금삼과 안장 얹은 말을 주고, 또한 여러 관료와 장

사들에게도 그 서차에 따라 물건을 주었다.

청태 2년 을해(935) 10월에 사방의 땅이 모두 남의 나라 땅이 되고, 국력은 약해

지고 형세가 외로우므로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여러 신하들은 의견이 분분하여 시끄럽고 논의

는 끝나지 않았다. 황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 의사들과 더불어 민

심을 수습하여 힘을 다해본 후에야 그만 둘 일입니다. 어찌 1천년의 사직을 남에게 쉽

사리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왕이 말했다.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므로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길도

없고, 더 이상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참혹한

죽음)케 함은 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 김봉휴를 시켜서 국서를 태조에게 보내 항복하기를 청했다. 태자는 울

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바위로 집을 삼고 삼베 옷을 입고, 풀

뿌리를 캐어 먹으며 지내다 세사을마쳤다. 그의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들

어가 부도(중혹은 불교)가 되었는데 승명은 범공이라 했으며 후에 법수사와 해인사에

있었다 한다.

신라의 국서를 받은 태조는 태상 왕철을 보내어 맞도록 했다.왕은 여러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께로 귀순했다. 향차보마(수레와 말)가 30여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

으로 꽉 막혔으며, 구경꾼들은 담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이들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대궐 동쪽의 한 구역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의 아내로

주었다.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하여 난조(鸞鳥)에 비유하

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라 고쳤다. 시호를 효목이라 했다. 왕을 정승으로 삼으니

자리는 태자의 위이며, 녹봉 1천석을 주었다. 시종 관원,장수들도 채용해 주었고 신라

를 고쳐 경주라 하였으며, 이 곳을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 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며 후한 예로 대접하

여, 사람을 시켜 말했다.

“이제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그 은혜를 받음이 매우 큽니다. 원하건대 왕의

종실과 혼인하여 구생의 좋은 의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내 백부 억렴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

니면 내정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조가 그녀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 김씨다.

태조의 손자 경종,주는 정승공 김부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이가 헌승황

후이다. 이에 정승공을 봉하여 상부를 삼았다. 그리고 태평 흥국 3년 무인(978)에 세

상을 뜨니 시호를 경순이라 했다. 상부로 책봉하는 고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칙을 내리노니 희주(주나라)가 나라를 연 초년에는 먼저 여망(강태공)을 봉했

고 유한(한나라)이 나라를 세운 때에는 먼저 소하를 봉했다. 이로부터 대정환구(천하

를 평정함)하고 널리 기업을 열었다. 용도(龍圖-제왕출현의 징조)는 30대를 세워서 섭

린(攝麟-국운) 4백년을 이으므로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비록 무위(無爲- 덕으로 나라를 다스림)의 군주로서 시작하였으나 역시 보좌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천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았고 벼슬은 왕작을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속세를

초탈하였으며, 문장은 땅을 진동시킬 만한 재주가 있었다. 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으

며, 貴는 모토(茅土-제후를 봉할때 주는 땅, 봉토)에 거했으며, 육도삼략은 가슴에 들

어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전략이 탁월하고 군기가 철저함을 말함)을 손바닥 안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니, 선대의 여풍(餘風)

을 이내 깨달아 부마의 인의를 맺으니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했다. 나라는 이미 통일

되고 군신이 완전히 삼한에서 합쳤으므로 좋은 영예는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은 빛

났다. 상부도성령의 호를 더해주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주어 훈봉은 전기같

이 하고, 식읍은 전후를 합하여 1만호로 하였다. 유산느 날을 가려서 예를 갖추어 책

명하노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 8년(975) 10월 일.’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 신 격선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을 들고 직첩이

도착하면 즉시 봉행하라.’ 개보 8년 10월의 일.

시중 서명(이름을 씀),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무서(이름을 쓰지않음)

병부령 무서,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 무서, 내봉시랑

서명, 군부경 무서, 군부경 서명, 병부경 무서, 병부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부도성령상주국 낙랑도왕식읍 1만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이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부신이 도착하는대로 봉행하라.

주사 무명, 낭중 무명, 서령사 무명, 공목 무명 개보 8년 10월 일에 내림.

사론(史論)에느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는 황금 상자 속에 들어서 하늘에

서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황금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도 하는데,이는 더욱

황당하여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단

지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위에 있는 자는 자신의 몸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

는 너그러웠다. 관직을 설치하는 것도 간략했으며 행사는 간소했다. 성심껏 중국을 섬

겨 사신이 제항(육로와 수로)으로 서로 잇달아 끊어지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을 중국

에 보내어 숙위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들여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

도를 이어받고, 오랑캐의 풍속을 개혁시켜서 예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그 땅을 취하여

군현을 삼았으니 성세라 이를만 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여 그 폐단을 깨닫지 못하

고 마을마다 탑과 절이 즐비해져, 백성들은 치갈(승려를 말함)이 되니 군대와 농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날이 나라가 쇠퇴하여 가니 어찌 어지러워좋 않겠으며 망하지 않겠

는가? 이런 때에 더욱이 경애왕은 함부로 음란한 짓을 하고 놀기에 급급하여 궁녀며

좌우 근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이 오는 것도 알

지 못햇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나 누각위의 장려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

조께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하여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 있다. 만약

힘껏 싸우다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 반항하였다면 힘은 꺾이고 기세도 다하여 필

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무죄한 백성들에게까지 화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를 봉하고, 군현의 이름을 기록하여 귀순하였

으므로 조정에 대하여는 공로가 있고,백성에 대해서는 덕이 있음이 매우 컸던 것이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송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은 그를 충신이라 하였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으며 그 자

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니겠는가”

신라는 이미 국토를 바치므로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 신회는 외직을 그만두고 돌

아왔다. 이에 도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노래를 지었

는데,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수 없다.

번호:4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19 00:07 길이:94줄

남부여와 전(前)백제와 북부여

부여군은 전백제의 도읍인데, 혹은 소부리군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의 성왕 26년-16년이 맞다- 무오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국호를 남부

여라 했다.’

하고 주에 이렇게 말했다.

‘그 지명은 소부리이다.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다. 소부리는 부여의 다른 이름

이다.’

또 양전장적(토지대장)에 보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옛 이름을 되찾은 셈이다. 백제왕

이 성이 부여씨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혹 여주라고도 부르는 것은, 군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 고좌에 수놓은 장막이 있

는데 그 수놓은 무늬에 쓰이기를,

‘통화 15년 정유(997) 5월에 일 여주 공덕대사의 수장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옛적에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그 때 도적(圖籍)중

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

라고도 한다.

백제 지리지에는 후한서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삼한이 대개 78개 국인데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북사(北史-북조 네나라의 역사서)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가 끝이며 서남쪽에는 큰 바다가 끝이고, 북쪽은 한강을

경계로 했다. 도읍은 거부성 또는 고마성이라고 하며 이밖에 오방성이 있다.’

통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경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구당서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중국의

강소성등)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 그 왕

이 거처하는 곳으로 동서의 두 성이 있다.’

신당서에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와 경계를 이루었고, 남쪽에는 왜구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야 한다. 북쪽은 고구려이다.’

삼국사기 본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요, 그의 아버지는 추

모왕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난리를 피하여 북부여에서 졸본부여에 이르렀

다.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오직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인

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그 얼마 후 부여주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했다. 주몽은 아들 둘을 두

었는데 맏아들이 비류이며, 둘째 아들은 온조다. 그들은 후에 태자(주몽의 태자 유리)

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등 10여명의 신하들과 더불어

남쪽으로 가니, 많은 백성들도 이들을 따랐다. 드디어 한산에 닿아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으 찾아 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가서 살자고 했다. 이에 10명의 신하들이

반대하여 간했다.

“이 하남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했으며, 남

쪽으로는 비옥한 못을 바라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놓여 있으므로 천험과 지리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

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했다.

때는 한 나라 성제 홍가 3년(B.C.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그 곳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었다. 이에 마침내 부끄러이 여기고 후회하여 죽으므로,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왔다. 그 후 백성들이 올때에 기뻐했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를 해(解)라고 했

다. 그 뒤 성왕 때에도읍을 사비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군이다.-미추홀은 인주고 위

례는 지금의 직산이다.(하지만 이 직산설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고전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B.C.18)

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겨 왕이라고 일컬었다. 14년 병진(B.C.5)에

도읍을 한산-지금의 경기도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낸 후 13世 근초고왕 때인 함안

원년(371)에 고구려의 남평양(지금의 서울)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지금의 양주)으로

옮기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이 즉위하던 원휘 3년 을묘(475)에는 도읍을 웅천

(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63년이지난 후, 26세 성왕 때에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

호를 남부여라 했다.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나라 현경 5년(660)은 의자와 재위 20년이다. 이 때 신라 김유신이 소정방과

백제를 쳐서 평정했다. 백제에는 우너래 다섯 부가 있어서 37군,200성,76만호로 나뉘

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두고, 그

추장들을 도독부의 자사로 삼았으나, 얼마 후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합쳤다. 그런 다

음 웅주,전주,무주 등에 세 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또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다. 이는 조정에서 재상의 후보들을 천거하

여 장차 뽑힐 사람 3,4명의 이름을 적어 상자에 넣어 봉하여 바위 위에 올려 두었다가

얼마 후 그 상자를 열어 이름위에 도장이 찍힌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으므로 정사암이

라 했다.

또 사비하 가에는 한 개의 바위가 있다. 일찍이 소정방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아 내었으므로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 앉았던 자리가 있다. 그래서

그 바위를 용암이라 한다.

또 고을 안에는 세 개의 산이 있는데 각각 일산,오산,부산이라 한다. 백제가 번

성하던 때에는 신들이 그 산에 살면서, 조석으로 날아서 서로 왕래함이 끊임없었다.

사비수 언덕에는 또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명이 앉을 만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가서 부처께 예를 드리려 할 때에는 먼저 그 돌위에서 부처를 향해 절을 하니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하여 그 돌을 돌석(지금의 自溫臺)이라고 한다.

또 사비하를 양쪽 언덕은 흡사 그림 병풍 같았으므로 백제왕이 늘 그 곳에서 잔

치를 열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까닭에 이 곳을 지금도 대왕포라고 한다.

또 시조 온조왕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몸이 건강하고, 효도와 우애가 있었

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다. 또 다루왕은 너그럽고 후했으며 위엄과 인망이 있

었다. 또 사비왕-혹은 사이왕- 은 구수왕이 세상을 떠 난 후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

이가 어린 탓에 정사를 보살필 수 없었으므로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혹은 말

하기를 낙초 2년 기미에 사비왕이 세상을 떠나니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번호:4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0 03:11 길이:47줄

무왕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살

았는데 그 못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게 되었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라 불렀

는데, 재주가 뛰어나고 도량이 넓어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다 팔아 생계

를 꾸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라벌로 가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며 친하게 지냈다. 아이들이 그를 따르게 되니 동요을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

였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어러두고

서동방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널리 퍼져 대궐에까지 들리게 되므로 백관들이 임금에게 간곡히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도록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하자 왕후는 순금 한 말

을 주어 노자에 쓰도록 했다. 공주가 얼마 후 귀양터에 다다르게 될 즈음 서동이 나타

나 공주에게 절하며 모시기를 청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

딘지 모르게 믿음직하겝 보였으므로 이를 허락했다. 서동은 공주를 따라가게 되었으며

동요가 불리워진 연유를 알게 되었다. 서동과 함께 백제로 와 모후가 준 금을 꺼내놓

고 살아갈 계획을 세우려 하는데, 서동이 껄껄 웃으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요?”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평생 부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처럼 많이 쌓아두었소.”

이에 공주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그것은 천하 제일의 보배이니 그대가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그것을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게 어떻겠습니까?”

“좋소”

이에 금을 산더니처럼 쌓아놓고는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이것을 실

어보낼 방법을 묻자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한 도의 힘으로 보낼 터니 이리 가져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쓴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 앞에 옮겨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그 금을 하룻밤 동안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그를 더욱 존경했으며, 늘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이로부터 서동

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무왕)

어늘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닿으니 미륵

삼존이 못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십시요. 진실로 저의 소원입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했다. 이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게 미륵삼존

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國史에는 왕흥사라 햇다.- 진평왕이 여러 工人들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돕도록 했

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