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번역본 견훤-3권 2002/08/31 481

후백제의 견훤

삼국사기 본전에 이르기를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 8년 정해(867)

에 태어났으며 원래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질그릇 견)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

지 아자게는 농사를 지어 생활했었으나, 광계 연간에 사불성-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이 넷으로 모두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중에 견훤이

훤씬 뛰어났으며 지략이 많았다고 하였다.

이제가기(이제의 家기록)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의 시호는 백융부인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 파진간 선품의 아들인 각간 작진이 왕교파리를 아내

로 맞아 각간 원선을 낳았는데, 바로 이가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

인이며,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부

훤이요, 둘째아들이 능애장군이며,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이며, 넷째 아들이 보개이며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이고, 딸은 대주도금이라고 하고 있다.

또 고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光州 북촌에 살았는

데, 하나 있는 딸의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저의 침실에 들어와 관계를 하곤 합니다.”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꿰어 두어라.”

아버지가 말하자, 그 딸은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그 실이 간곳을 찾아보니

북쪽 담 밑의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있었다. 이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사내아이를 낳

았다. 아이는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일컬었다. 경복 원년 임자(862)에

왕이라 하였으며 완산군에 도읍을 정했다. 왕위에 오른지 43년 청태 원년 갑오(934)에

견훤의 아들 셋, 즉 신검,용검,양검이 반역하므로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가서 항복했

다. 아들 금강(신검에게 살해되어 즉위하지 못했음, 신검의 잘못)이 즉위한 후 천복

원년 병신(936)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에서 싸워 패하므로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나서 젖먹이일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나르느라고 아기를 수풀 아래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주었다. 이

말을 듣자 마을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는데, 아이는 장성할수록 모습이 건장했으며, 뜻

이 커서 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비범햇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으로 가서 창(戈)을 베개삼아 적군을

기다렸다. 그의 용기는 늘 사졸의 선두에 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신라의 진성왕 재위 6년인데 이때 왕의 총애를 받은 신

하가 있어 국권을 농간하므로 기강이 문란해졌다. 거기다 흉년이 겹치므로 백성들은

이 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남몰래 반역

할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 주현을 쳤다.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려 5천의 무리가 되었다. 드디

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

로 신라서남도통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이라 했으니, 이 때는 용

화 원년 기유(889)였다. 이 때를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북원의 도적 양길의 세력이 강성하니 궁예는 자진하여 그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

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자 고을 백성들이 영접하며 위로했다. 견훤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개국한 후 600여년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을 보내니,

수군 13만명이 바다를 건너왔으며, 신라의 김유신은 모든 군사를 다 거느리고 황산을

지나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내가 어찌 나라를 세워 옛

날의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벼슬과 직책을 나누어 설치했는데 때는 광

화 3년이요, 신라 효공왕 4년(900)이었다.

정명 4년 무인(918)에 철원경의 민심이 삽시간에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햇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사자를 보내 경하하고, 공작선과 지리산

의 죽전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표면상으로는 화친하는 체햇으나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를 바치더니 3년 겨울 10월에는 3천의 기병을 거느리

고 조물성까지 이르렀으므로 태조도 역시 정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태조는 잠정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로 하여금 시일을 끌어 지치기

를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요구했다. 종제 완신을 인질로 보내자

견훤도 역시 그의 사위 진호를 보내어 교환했다.

12월에 견훤은 거서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에 사자를 보내어 번신(속국의

신하란 말)이라 일컬었다. 이에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의 벼

슬을 주고, 그전대로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이라 하고

식읍을 2500호로 했다.

4년에 갑자기 고려에 인질로 보낸 진호가 죽자, 견훤은 고려가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하여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청했

다. 태조는 웃으며 돌려보냈다. 천성 2년 정해(927)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쳐서 뺏고

그 성에 불을 질렀다. 이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가 장차 출병하려는데 견훤은 고울부-울주-를 쳐서 차지하고 족시림으로 진

군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들어갔다.

신라왕은 이 때 부인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놀고 있었으므로, 더 더욱 낭패를 당

했다. 견훤은 왕의 부인을 끌어다 강제로 욕보이고, 족제 김부로 하여금 왕위에 앉게

하였다. 그 뒤에 왕의 아우 효림과 재상 영경을 사로잡고 또 신라의 진귀한 보물이며

자제들과 여러 종류의 공인중에서 우수한 자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태조는 정예한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

의 장수인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모든 군사들이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했

을 뿐 대항하지 못했으므로 그로 하여금 낳은 죄악을 범하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

다. 전쟁에 이긴 기세를 몰아 견훤은 대목성과 경산부, 그리고 강주를 노략질하고 부

곡성을 곡역했는데, 의성부의 태수 홍술은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

을 듣자 태조가 말했다.

“나는 이제 오른쪽 손을 잃었구나.”

다음날 군사를 거둔 견훤이 순주성을 습격하자 이를 막지 못한 성주 원봉은 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이에 몹시 노한 태조는 그 고을을 격을 낮추어 하지현이라 고

쳤다.

신라의 군신들은 쇠망해 가는 사태에서 다시 부흥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 태조

를 끌어들여 사아좋게 의를맺어 후원을 삼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이 신라의

서울로 쳐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해서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 번에 국상 김웅렴 등이 족하를 장차 서울로 불러들이려 함은 별응원성(鼈

應원聲-작은 자라는 큰자라가 울면 거기에 호응하여 운다는 뜻, 큰자라는 견훤)과 같

으며 또한 안피준익(안披準翼-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는다는 뜻으로 고려를 종달새에

비유, 어림없는 일이라는 뜻) 과 같습니다. 고로 필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릴 것이며

종묘 사직을 폐허로 만들 것입니다. 나는 이런 까닭에 먼저 조편(祖鞭-진나라 사람인

조적의 말채찍)의 채찍을 쥐고, 단신으로 한월(韓鉞-수나라 장수 한금호의 도끼)을 휘

둘러 백관들에게 백일처럼 맹세했고, 6부를 의리 있는 풍토로써 설유(說諭)했더니 뜻

밖에 간신은 도망하고 임금은 세상을 떠나셨소.

이에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니 없던 임금이 이제 있게 되었소. 그런대도 족하는 나의 충고를 자

세히 살피지 않고 한갓 유언을 믿고서 온갖 계책으로 왕위를 노리고 여러 곳으로 나라

를 침범햇으나, 오히려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내 쇠털 하나도 뽑지 못했

소. 이 겨울 초순에는 도두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항복했고, 또 그 달 안에 좌장 김락

이 미리사 앞에서 폭해(전사)하였소. 이밖에도 죽인 것과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소.

이렇게 강함과 약함이 분명하니 누가 이기고 질 것인가는 알만한 일이오. 내가 목적하

는 일은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을 내 말에게 먹이는 일이오. 그러나 지난

달 7일에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와서 국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경은 오랫동안 고려와 和好를 통하고, 서로 이웃 나라의 맹약을 맺은걸로 알았

었소. 그런데 볼모가 죽은 것을 보고 마침내 화친하던 옛 마음을 잃어 버리고 서로 국

경을 침범하고 전쟁을 멈추지 않으므로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경의 本道로 가게 하고

또한 고려에도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친목하여 길이 평화를 도모하도록 할 것이오>

했소.

나는 왕실을 높이려는 의리가 두텁고,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소. 이제 오월

왕의 조칙을 듣고 즉시 받들려고 하지만, 족하가 그만두지 않으므로 그만둘 수가 없고

하여 국경에 있으면서도 싸우려는 것을 걱정하는 바요. 이제 그 조서를 베껴 보내니

유의하여 자세히 살피기 바라오. 토끼와 사냥개가 함께 지치면 마침내는 필시 남의 조

롱을 받을 것이오. 조개와 황새가 서로 버티면 또한 남의 조롱거리 밖에 아니 됩니다.

끝까지 미복(迷復-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잘못을 거듭함)을 경계하여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부르지 않도록 하시오.’

천성 2년(927)정월에 태조는 회답을 보냈다.

‘삼가 오월국의 통화사 반상서가 전하 조서 1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가 준 편

지도 받아 보았소. 화초부사(오월국의 사신을 말함)가 조서를 가지고 왔으며 척소호음

(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과 겸해서 가르침도 받았소. 지검(芝檢-오월왕의 조서)을 받

아서 비록 감격은 더했으나 편지를 펴보니 의심스러운 마음을 금하기는 어려웠소. 이

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해오.

나는 위로 천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직권을 맡아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오. 지난번에 삼한이 액운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 많은 백성들이 황건(黃巾-황건적)에 들어가고, 전

답은 적토(赤土-흉년으로 거둘 곡식이 없는 땅.)가 아닌 곳이 없었소. 풍진의 소란함

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려고 이에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으니, 과연 수

천리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을 즐기고, 사졸은 7,8년동안은 한가로이 쉬웠소. 그

후 계유년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기므로 곧 교전하게 되었소. 족하는 처음에는 적을

가벼이 여겨 곧장 전진함이 마치 당랑거철(당랑즉 버마재미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수레를 막으려 한다는 뜻)하는 것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급히 퇴진함이 마

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도 같았소. 그리고 손을 모아 공손히 맹세하기를,<오늘 이

후로는 길이 화록하리라. 혹여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내릴 것이다.> 하였소.

이에 나도 또한 전쟁을 하지 않는 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仁을 기약

하여 드디어 여러 겹으로 포위했던 것을 풀고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냄도

거절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소. 이것은 내가 남쪽의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풀었는데 어찌 맹약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봉채

지독(벌과 전갈은 독이 있어 미물이면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生民을 침해

하고, 미친 이리와 호랑이가 서울 땅을 가로막아서 금성이 궁색하고 黃屋(궁궐)을 몹

시 놀라게 할 것으로 생각했소.

대의에 의거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임에 그 누가 환문(중국 오패시대의 제나라 환

공과 진나라 문공)의 패업과 같을 수 있으며 기회를 타서 한나라를 도모함은 오로지

망탁(왕망과 동탁)의 간사람을 볼 뿐이요. 지존이신 왕으로서 몸을 굽혀 족하에게 子

라고 하게 하였으니, 높고 낮음의 지위를 잃게 되어 상하가 모두 근심하여, 원보의 충

순이 아니면 어찌 다시 나라를 편안케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소. 나의 마음에는 악이

없고, 뜻은 왕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고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

해내려 했소. 그런데 족하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좇아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

고,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고 대신들을 죽였으며, 士民을 도륙하였소. 궁녀들을

잡아 수레에 싣고 보물은 모두 빼앗아 짐 속에 넣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주왕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이란 짐승과 올빼미보다도 오히려 심했었소.

나는 붕천(崩天-임금의 죽음)의 원한과 각일(却日-노양공이 싸움할때 창을 휘둘

러 해를 뒤로 돌렸다는 고사) 의 지극한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 나라에 대한 견

마지근(犬馬之勤)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하였소. 그리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켜 두 해가

자났는데, 육로로 진격함은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리고, 수로를 치는 데는 범이나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세우며 거사하여 늘상 헛일을 하지 않았소.

윤경을 해안에서 쫓았을 때는 갑옷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추조를 성 주변에서 잡았을

때는 시체가 들판을 덮었소. 연산군 부근에서는 길환을 진전에서 베었고, 마리성가에

서는 수오를 깃발 아래서 죽였소. 임존성을 함락시키던 날은 형적 등 수백명의 목숨을

버렸고 청주현을 부셨을 때는 직심등 4,5명이 머리를 바쳤소. 동수는 깃발만 바라보고

도망했소. 경산은 구슬을 입에 머금고 항복했소. 강주는 남으로부터 귀순했고, 나부는

서로부터 와서 소속되었소. 공략함이 이와 같으니 수복될 날이 어찌 멀다 하겠소. 기

필코 저수(중국의 강이름)의 진중에서 장이(초한때 사람으로 저수에서 진여를 죽임)의

묵은 원한을 씻고, 오강(항우가 자결한 강)의 기슭에서 漢王의 일전 승리의 소원을 이

루어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그치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말게 할 것이오. 이는 하늘이 돕

는 일이니 천명은 어디로 돌아가겠소! 더욱이 오월왕 전하의 덕은 포황(包荒-멀리 있

는 사람을 포섭함)에도 흡족하고 仁은 字小(조그만 나라 백성들까지도 잘 키움)에도

깊은 바, 특히 주금(舟禁-대궐)에서 윤음을 내려 청구(우리나라)에서의 난리를 그치라

고 개유(開諭)하셨소.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으리요. 만약 족

하도 이 조서를 받들어 흉악한 싸움을 그친다면 다만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

아니라, 또한 동방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어찌 좋겠소?’

장흥 3년(932)에 견훤의 신하 공직은 옹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항복했

다.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잡아다가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인 9월에 견훤은 일길을 보내어 수군을 이끌고 고려의 예성강으로 들어와 3일동

안 머물면서 염주,백주,진주 3주의 배 1백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한다.

청태 원년 갑오(934)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였다는 말을 듣고, 갑옷 입

은 군사를 뽑아 욕식(새벽일찍 밥을 먹는다는 뜻)을 시켜 빨리 이르도록 하였는데, 미

처 진영을 설치하기도 전에 태조의 장군 유금필이 날랜 기병으로 쳐서 3천여명의 목을

베이니, 웅진 이북의 30여성들이 이 소문을 듣자 자진하여 항복하였으며, 견훤의 부하

였던 술사 종훈과 의사 지겸, 용장 상봉, 작필 등도 모두 태조에게 항복했다.

병신(936)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를 세월 지금까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

려군사의 배가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위해 가수(假

手-하늘이 돕는다는 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어찌 고려왕에게 귀순을 하여 생명을 보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의 아들 신검,용검,양검 셋은 모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제가기에는 그 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견훤에게는 9명의 자식이 있었다. 맏아들은 신검, 둘째는 태사 겸뇌, 셋째는 좌

승 용술, 넷째는 태사 총지, 다섯째는 대아간 종우, 여섯째는 이름을 알수 없으며, 일

곱째는 좌승 위홍, 여덟째는 태사 청구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인데 모두 상원부인의

소생이다.’

견훤은 처첩이 많아서 아들을 열명이나 두었다. 넷째인 금강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 했다. 그의 형들(신검,

양검,용검)잉 그것을 알고 매우 근심했다. 이 때 양검은 강주도독으로 있었고,용검은

무주도독으로 있었으며, 신검만이 혼자 견훤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강주와 무주

에 사람을 보내어 양검등과 모의했다. 청태 2년 을미(935) 3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

에게 권유하여 견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은 스

스로 대왕이라 일컬으며 나라 안의 모든 죄수를 사면해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견훤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멀리 대궐 뜰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므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아버지께 아뢰었다.

“임금께서는 연로하셔서 軍國의 정무에 어두우시므로 장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리하게 되었다고 하여 여러 장수들이 기뻐서 축하하는 소리입니다.”

잠시 후 아버지를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을 시켜 지키게 했

다. 이 때 이런 동요가 나왔다.

가련한 완산의 아이,

아비 잃고 계속 우네.

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2명, 시비 고비녀, 나인 능예남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그 후 4월에 이르러 술을 빚게 하여 지키는 장사 30명에게 먹여 취하게 한 후

고려로 도망해 왔다. 이 때 태조는 소원보향우,오담,충질 등을 보내 수로로 가서 맞아

오게 했다. 고려에 이르니 태조는 견훤의 나이가 자기보다 10년 위라 尙父라 하고, 남

궁에 편안히 거하도록 했으며, 양주의 식읍,전장과 노비 40명과 말 아홉 필을 주고,

먼저 항복하여 와 있는 신강으로 아전을 삼았다.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가 비밀히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애쓰신 지 40여년에 공업이 거의 이루어지려 했는데 하루 아침에 가족

간의 불화로 나라를 잃고 고려로 가셨소. 대체로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가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을 섬긴

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대한단 말이오. 더구나 듣자니 고려의 왕공은 인

후근검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아마 하늘의 계시로 반드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글을 보내어 우리 임금을 위안하고 겸하여 왕공에게도 은근하게 하여 뒷날의 복

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당신의 말은 바로 저의 뜻입니다.”

그의 아내가 말했다. 이에 천복 원년 병신(936)2년에 사람을 보내어 태조에게 자

기의 뜻을 전했다.

“왕께서 의기를 드시면 저는 내응하여 고려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는 기뻐하여 그 사자에게 예물을 후히 주어 보내고 영규를 치하했다.

“만약 그대의 은혜를 입어 한 번 합세하여 가는 길에 막힘이 없도록 한다면, 즉

시 먼저 장군을 뵙고, 다음에 堂에 올라가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님으로 받

들어 반드시 끝까지 장군께 후히 보답하겠소. 천지신명은 모두 이 말을 들을 것이오”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이 전하께 항복해 온 까닭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반역한 자식을 죽이기 위

함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神兵을 빌어 賊子와 亂臣을 벌하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그들을 치지 않으려 함이 아니고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이에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회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했다. 가을 9월에 태조는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

으로 진군하자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막았다. 갑오일에 일이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했는데, 고려군은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방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관병(觀兵)하는데 문득 칼과 창 모양으로 된 흰 구름이 일어나 적진을 향해 갔다.

이에 북을 치며 나가자 후백제의 장군 효봉,덕술,애술,명길 등은 고려 군병의 형세가

크고 질서가 장연함을 보고는 갑옷을 버리고 진 앞으로 와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을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은 말했다.

“원수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

태조는 장군 공훤 등에게 명령을 내리니, 삼군이 일시에 진격하여 협공하니 후백

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 탄현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능환등 40

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살도록 했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일은 네 계책

인데 신하된 의리로서 그래도 마땅하단 말이냐?”

능환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못했다. 태조는 그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신검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본심이 아니고 남의 위협때문이었다. 그는 항복하여 죄

를 빌므로 그의 죽음을 면하게 했더니, 분하게 여긴 견훤은 등창이 나서 수일 후에 황

산 佛舍에서 죽었는데, 때는 9월8일로 그의 나이 70이었다.

태조는 군령이 엄하고 분명하여 군사들이 추호도 범하지 않으므로 주현이 편안하

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태조는 영규에게 말했다.

“전왕이 나라를 잃은 후 그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

었는데, 오직 경의 부부만은 천리 밖으로 글을 보내 성의를 보내고, 겸하여 나에게 아

름다운 명예를 돌렸으니 그 의를 잊을 수 없소.”

태조는 그에게 좌승이란 벼슬과 밭 1천경을 내리고,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가족

들을 맞아 오게 했으며,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건국하여 진나라 천복 원년(936)에 이르

니 45년만인 병신년에 멸망하였다.

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 되고 도를 잃어버려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

게 되었다. 이에 뭇 도적들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도적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였는

데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선조의 화상을 칼로 베기까지 했으니 그가 어질지

못함이 너무 심했다.

견훤은 신라의 평민으로 일어나 신라의 국록을 먹으면서도 나쁜 마음을 품고 나라

의 위태로움을 기화로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들을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실로 천하의 원흉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

에게 화근이 발생했으니 모두 스스로 만든 일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항우나 이밀

(수나라사람)과 같은 뛰어난 재주로도 한과 당이 일어남을 막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

와 견훤과 같은 흉인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으랴!”

견훤은 여기서 끝입니다.

제목에 “1″이라고 햇는데 1밖에 없습니다.. 한꺼번에 올렷거든요..

번호:4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1 16:50 길이:302줄

가락국기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

었다. 이 때 아도간,여도간,피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등 아

홉 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는데 모두 1백호로 7만5천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

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A.C.42)3월 계욕일(액땜을 하는 날로 목욕을

하고, 물가에서 술을마심)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산봉우리의 이름)에서

이상한 기운이 일며,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 2,3백명이 그 곳에 모였는데

사람 소리와 같기도 하지만 그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만 들려왔다.

“이 곳에 누가 있는가?’

구간(九干)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龜旨입니다.”

이에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 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므로,

이를 위하여 여기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뿌리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 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하고 노래를 부르고 뛰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너희들은 대왕을 맞이하여 기

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후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한 줄기 자주색 빛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

었다. 줄끝을 찾아가 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열어 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빛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다 함께 수없이 절

을 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걸상 위에 놓아 두고

무리는 제각기 흩어졌다가하루가 지나가고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셔

그 합을 열자, 여섯개의 알은 화하여 아기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했으며

이내 평상 위에 앉았다.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더니 10여일을 지나자 키가 9척으로 은나라 천을(天乙-은나라 탕왕)과 같

고, 얼굴이 용안임은 하나라 고조와 같았다.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 순임금

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

라 하거나 혹은 수릉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했으니

곧 여섯가야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가서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

었다. 가야는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였는데, 질박하고

검소할 따름이니 집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았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겨우 3척이

었다.

즉위한 2년 계묘(A.B. 43)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이 남쪽 신답평에 나가서 사방의 산악을 두루 바라보다가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 땅은 여뀌잎처럼 협소하기는 하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이 살만

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3을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므로 七聖(성이란 진리를 깨친사람

이라는 뜻)이 살곳으로도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근거하여 강토를 개척하여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듦이 어떻겠느냐?”

이에 1500보 둘레의 외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널리 나라 안의 장정과 인부 공장들을 불러

모아서 그 달 20일에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궁궐과 屋舍

만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하여 갑진(44)2월에 이르

러서야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으로 옮겨가서 모든 정사를 다스리며 서무에

도 부지런하였다. 홀연히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므로 알을 낳았

는데 그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는데 이름을 탈해라 했다.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

국에 왔는데 키는 3척이요, 머리 둘레는 1척이나 되었다. 그는 혼연히 대궐로 나아가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이에 왕이 대답햇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함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

하게 하려 함이다. 나는 감히 천명을 어기고 왕위를 너에게 줄 수 없으며, 또한 이 백

성들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뤄보자.”

이에 왕이 승낙하였다. 순ᄀ나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자, 왕은 변하여 독수리가

되었다. 탈해가 또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그 변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탈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또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하며 말하기를

“술법을 다투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서,참새가 새매에게서 잡히기를

면한것은 대저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인덕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왕위를 다툰다 해도 이기기는 실로 어렵겠습니다.”

탈해는 곧 왕께 하직하고 교외에 나가 가까운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 배가 와서

닿는 수로로 해서 떠났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급히 수군을 실은 배 5백척을 보내어 쫓게 했다. 탈해가 계림의 영토 안으로 달아나므

로 수군은 이내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적힌 기사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 24년 무신(48)7월27일에 구간등이 왕을 조알할 때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람하신 후로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

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궁중에 뽑아 왕비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로 삼게함도 역

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에 가서 기다

ᄅ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경기안에

있는 나라-에 가도록 했다. 문득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와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

궐로 달려와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듣고 매우 기뻐했다. 아내 구간등을 보내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배 안에 탔던) 왕후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라 수가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유사를

데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 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와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는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또 시종해 온 잉신(시집갈때 따라가는 시신)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

보,조광이었다. 그들의 아내는 모정,모량이라고 했으며, 또 노비까지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20여명이엇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의 옷과 필단,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이제 왕이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

니 왕은 친히 나아가 맞아 함께 장막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

는 자리에서 자도록 했으며,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많은 군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앙후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의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지난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

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분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

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꿈을 깨었으나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

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

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신선이 사는 곳에 열리는 좋은 과일)를 찾고, 하

늘로 가서 번도(3000년에 한번씩 열리는 복숭아)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이미 알았으므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돌려 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씩과 베 30필씩을 주

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타고 대궐로 돌아왔다.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

히 수레를 탓으며, 중국에서 나는 갖가지 물품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

어오니 시간은 오정이 가까웠다. 왕후는 궁중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노비들에게는 비어있는 두 집에 나누어 살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칸 되

는 빈관 한채를 주어 사람 수를 보아 적당히 나누어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

마다 물품을 풍부하게 주었으며,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

서 왕후의 사시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모든 벼슬의 으뜸인데 그 지위와 명칭이 다 소인이나 농부의 칭호이니

이는 높은 벼슬의 호칭이 못된다. 만약 외국 사람들이 듣게 되면 필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를 고쳐서 아궁이라 하고,여도를 여해,피도를 피장,오도를 오상이

라 했으며, 유수와 유천은 윗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 유공,유덕이라 하

고 신천을 고쳐서 신도, 오천을 고쳐서 오능이락 했다. 신귀(神鬼)는 음을 바꾸지 않

고 훈만 고쳐 신귀라 하였다. 계림의 직제를 취해서 각간 아질간 급간의 품계를 두었

고, 그이하의 관료는 주나라 규례와 한나라 제도로써 나누어 정했다. 이것은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와 집안을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더불어 사는 것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 대하여 땅이 있고, 해에 대하여 달이 있으며, 陽에 대하여 陰이 있는 것

과 같지 않겟는가? 그 내조의 공은 도산(도산의 딸이 우왕에게 시집감)씨가 하나라 우

왕을 돕고 당원(요임금의 딸 아황, 여영으로 순임금에게 시집감)이 순임금을 도와 교

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웅비지조(곰의 꿈을 꾸면 사내아이를 낳는

다는 속설)의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영제 중평 6년 기사(189) 3월 1일 왕후가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슬퍼하였으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했다.

그리고 앞으로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왕후가 처

음 배에서 내린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언덕을 능현이라 했으며,

붉은 기를 단 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이라 했다.

잉신 천부경 신보와 종점감 조광 등은 가락국에 온지 30년만에 각각 두 딸을낳았

는데 그 후 그들 부부는 12년을지나 세상을 떠났다. 그밖에 노비들은 가락국에 온 지

7,8년이 지났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로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세상

을 떠나갔으니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은 텅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며 몹시도 슬퍼하다가 25년 후인 헌제 입안4년 기묘(

199)3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함이 왕후가 돌아가시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세웠는

데 높이가 한 길이며 둘레가 300보로서 그곳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라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인 구형왕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정월 3일

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는 풍성하고 정결한 제전으로 제사 지냈는데, 대대

로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 30대 법민왕 용삭 원년 신유(661) 3월 어느 날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다. 그러므로 시조 수

로왕은 나에게는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했으나 그 묘는 아직 남아 있으

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라.’

이에 사자를 그 옛터에 보내어 묘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을 바치게 하여 제사

를 마련할 토지로 삼고,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감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을 주관하여 매년 명절이면 술과 단술

을 만들고 떡과 밥,차,과일 등 여러가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잉 정한 연중 5일을 변동하지 않아, 이에 비로소 그 정성

어린 제사는 잇게 되어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199)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후부

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 원년 신유(661)에 이르는 60년 동안에

는 가끔 이 묘에 지내는 제사가 빠지기도 했다. 이름답도다! 문무왕-법민왕의 시호-

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내니 효성스럽기도 하여라!

신라 말기에 충지잡간이라는 자가 있었다. 금관성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신라

말기에 지방호족이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스스로 일컬던 칭호)이 되었다. 이에 영

규아간이 장군의 위세를 빌어 묘향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날 제사를

지내던 중 까닭없이 대들보가 부러짐에 치어 죽었다. 이에 장군은 혼자 중얼거리기를

“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이 계시던 국성에 제사를 드리게 되

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는 그 영정을 그려 모시고 향과 등으로 받들어 신의 은혜를

갚아야 하겟다.”

마침내 교견(남해지방에서 나는 비단) 3척에 진영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촛불을 켜놓고 공손히 받들었다. 그런지 3일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

이 흘러 땅위에 고였는데 그것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너무도 두려워서 그

진영을 모시고 묘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즉시 수로왕의 직계손인 규림을 불러 말했

다.

“어제도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거듭 일어나는 것일

까? 이는 필경 묘의 위령이 내가 영정을 그려 공양함이 불손하다고 크게 노하신 것 같

다. 영규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괴이하게 생각되고 두려워, 화상을 이미 불살

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손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

사를 드림이 좋겠다.”

이에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더니 나이 88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아들 간

원이 아버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 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친

증세가 일어나니 사당에 와서 간원에게 차려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더니 삼헌(三獻-제사때 술잔을 세번 올리는 일)이채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

레 병이 일어나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재앙을 받는다.’

전에는 영규의 일이 있었고, 후에는 준필의 일이 있었으니 이들부자를 두고 이른

말인가?

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도둑

질하려고 왔다. 도둑들이 처음 이곳에 이르자, 몸에 갑옷과 투구를 쓰고 활에 화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이들 중 7,

8명을 맞추어 죽였다. 이에 도둑들은 모두 달아나 버렷다. 도둑들은 며칠이 지나서 다

시 왔는데, 길이가 30여척에 눈이 번개같은 커다란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오더니 8,

9명을 물어 죽이므로 겨우 살아 남은 자들도 모두 엎어지면서 도망갔다. 이로 보아 능

원 안팎에는 필히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겠다.

건안 4년 기묘(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의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31년 만인 대강 2년 병진(1076)까지 대개 878년이나 되었는데도 제단을 쌓은 아름

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 곳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또한 부서진 것이 없었다. 이

로 인한다면 신체부(辛替否-당나라 사람)가

‘옛날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느

냐?’

했지만, 가락국의 경우만은 옛날에 나라가 망했음은 그 말이 맞다고 할수도 있지

만 수로왕의 사당이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체부의 말은 모두 믿

을수는 없다 하겠다.

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에 이 지방사람들

과 서리,군졸들은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논다. 이

들은 동편과 서편으로 서로 눈짓하면 건강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져,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하여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에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를 향해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는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

는 것을 바라보고 황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다.

가락국이 망한 후에는 대대로 이 곳의 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신라 제 31대 정

명왕-신문왕-이 즉위한 개요 원년 신사(681)에는 금관경이라 이름하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에 우리 고려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여러 대를 지나오면서 임해현이라 하

고 배안사를 두어 48년 동안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 혹은 김해부라하여 도호부를

두어 27년을 지냈다. 또 방어사를 두어 64년 동안을 지내왔다.

순화 2년(991)에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토지의 측량을맡은 관리)로 있던 중대

부 조문선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수로왕의 능묘에 딸린 밭의 면적이 많으므로 마땅히 15결로 그전대로 제사를 지

내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府의 역정(役丁-부역을 맡은 戶丁)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관 관서에서 그 장계를 전해서 보고하자, 조정에서 명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하여 성군이 되었고, 왕위에 계시어 나이 158세나 누리

었으니 저 3皇 이후로 이에 견줄 자가 드물다. 수로왕께서 세상을 떠난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이르러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의구스러운 일이므로 허락

하지 않는다.’

양전사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옳게 여겨 그 절반은 능묘의 소속으로 하고

나머지는 그 곳의 역정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절사-양전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

에 그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府의 부역하는 호정에게 주었다. 이 일이 거의 끝

나갈 무렵에 이르러 양전사는 심히 피곤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을 꾸니 7,8명의 귀신

이 보이는데 밧줄과 칼을 가지고 와서 말했다.

“너에게 큰 죄가 있으니 목을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잠이깼다. 이내 병이 나서 남들에게 그 사

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 죽었다. 이 때문

에 양전도장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후에 사신이 내려가 그 밭을 검사하

여 보았더니 1결 12부 9속뿐으로 3결 87부 1속이 모자랐다. 이에 모자라는 밭의 가로

챈 것을 조사해서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능묘에

주도록 했으니, 또한 고금에 탄식할 일이었다.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부지런히 정치를 했으며, 참된 일을 지극히 숭상하여

시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 29년 임진 (452)에 수로

왕과 허황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했다. 또 사자를 보내어 절 근

처의 평전 10결을 측량하여 3寶(佛,法,僧)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

이 절이 생기고부터 500년 후에 또 장유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

가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3綱(상좌,사주,유나의 세가지 승적)은 왕후

사가 장유사의 시지(柴地) 동남쪽 지역 내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폐하고 장사(莊舍)

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와 마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 명은 이러하다.

천지가 처음 열리니, 비로소 이안이 밝았네,

인륜은 비록 생겼다 하나,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네

이미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둥국에서는 아직도 서울이 갈려 있었네

계림은 먼저 정해졌고,가락국은 후에 경영되었도다.

스스로 맡아서 다스릴 자 없다면, 백성을 보살필 이 누구이뇨,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들을 돌보았도다.

부명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내셨다니.

산중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속에 그 모습 감추었다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바깥도 역시 캄캄하네.

바라보매 형상은 나타나지 않으나, 귀 기울이면 소리가 있으니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이고, 춤을 추어 바치었네

7일이 지나매, 일시에 조용해졌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매, 한 오라기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설은 땅에 집과 집이 연이어 있네.

줄줄이 구경꾼들 이어지고, 우글거리며 사람들 바라보네.

다섯 분은 각 읍으로 흩어지고, 한 분만 이 성에 남아 있었네.

한 때에 나와 닮은 모습들, 아우와 형이매 한가지로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도다.

처음 왕위에 오르니, 세상은 이내 맑아질 듯 하였네.

궁전 구조는 옛 법을 따랐고, 土階는 오히려 평평했네

비로소 정사에 힘쓰고, 서정을 보살폈으니,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매, 오로지 하나이고 오로지 세밀햇네.

길손은 서로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농토를 서로 사양하니

사방은 모두 안정을 찾고, 만민은 태평을 맞이했도다.

풀밑의 이슬과 같아라. 문득 大椿(16000년을 산다는 나무)의 수명을 보전치

못하였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가 모두 슬퍼하였네.

그의 발자취 금과 같으며, 그이 이름 옥과 같이 빛나라.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매, 영묘의 제전은 향기롭기도 하여라.

비록 세월은 흘러갔지만, 그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번호:4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1 16:53 길이:65줄

거등왕

아버지는 수로와, 어머니는 허황후, 건안 4년 기묘(199) 3월 13일에 즉위, 치세

는 39년인데 가평 5년 계유(253) 9월 17일에 붕함.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며

태자 마품을 낳음. 개황력에는

‘성은 김씨이니 대개 시조가 금란에서 난 까닭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

고 한다.

마품왕

마품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253)에 즉위, 치세는39년으로 영평 원

년 신해(291) 1월 29일에 붕함. 왕비는 종정감 조광의 손녀 호구로 태자 거즐미를 낳

음.

거즐미왕

금물이라고도 하며, 김씨. 영평 원년에 즉위, 치세 56년 영화 2년 병오(346) 7월

8일에 붕함. 왕비는 아궁아간의 손녀 아지로 왕자 이시품을 낳음.

이시품왕

김씨. 영화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회 3년 정미(407) 4월 10일에 붕함. 왕비

는 사농경 극충의 달 정신으로 왕자 좌지를 낳음

좌지왕

김즐이라고도 함. 의회 3년(407)에 즉위, 용녀에게 장가가서 그 여자으 무리로

관리를 등용시키니 나라가 시끄러웠다. 계림이 끼를 내서 가락국을 치려했다. 이 때에

신하인 박원도가 간하기를

“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 이겠

습니까! 질서가 무너지면 사람이 어디에서 보존되오리까? 또 복사가 점으 쳐서 해궤를

얻었는데 그 궤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가 와서 도울 것이다.> 했으니 왕께선 주역의

궤를 살피시옵소서.”

이에 왕은 사례하여 옳다 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 2년 신유(421)5월 12일

에 붕함. 왕비는 도녕 대아간의 딸 복수로 아들 취희를 낳음.

취희왕

즐가라고도 함. 김씨. 영초 2년에 즉위 치세는 31년으로 원가 28년 신묘(451) 2

월 3일에 붕함. 왕비는 전사각관의 딸 인덕, 왕자 질지를 낳음

질지왕

김질왕이라고도 함. 원가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와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시조와 왕후가 처음 만나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라 하고 밭 10결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 10년 임신(492)10월 4일에 붕함. 왕비는 금상사간

의 딸 방원이며 왕자 겸지를 낳음.

겸지왕

김겸왕이라고도 함. 영명 10년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 2년 신축(521)4월 7일에

붕함. 왕비는 출중각관의 딸 숙, 왕자 구형을 낳음

구형왕

김씨, 정광 2년에 즉위, 처세는 42년 보정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 24대 진

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아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으므로 대전할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 탈지이즐금을 보내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진흥왕

때가 아니고 법흥왕 19년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김구해 충왕이 왕비 및 장

남 노종,중남,무덕 계남 무력과 함께 신라에 항복했다고 되어있다.- 왕비는 분즐수이

즐의 딸 계화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간, 둘째는 무도각간, 셋째는 무득

각간이다. 개황록에 보면,

‘양의 무제 중대통 4년 임자(532)에 신라에 항복했다.’

고 했다.

논평하여 본다. 삼국사를 살펴보건대, 구형왕은 양의 무제 중대통 4년 임자에 땅

을 바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처음 수로왕이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

18년 임인(42)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살펴본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보정 2년 임오(562)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에 30년을 더하게 되면 도합 520년이나 되는 셈이다. 여기에 두 설을 다 적어 둔

다.-법흥왕 10년(532)의 일이니 490년의 계산이 맞다.-

번호:4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4 20:04 길이:160줄

삼 국 유 사 제3권

興法 제 3

순도조려(順道肇麗)

고구려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은 곧 동진 힘안 2년이며 효뮤제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시켜서 불경과 경문을 보내고, 또 4년 갑술(374)에는

아도가 동진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375)2월에는 초문사를 세워 순도를 있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 아도를 그곳에 있게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이다.’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와 아도가 위나라에서 왔다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

은 전진에서 온 것이다. 또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

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이다.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다른 이름은 안정홀이니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인데,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이때의 국도는 국

내성으로 일연의 지리고증은 모두 틀리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송경(개성)흥국사의

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기리어 읊는다.

압록강에 봄이 깊으니 물풀은 곱고,

백사장의 갈매기들 한가로이 조네,

문득 저 멀리 들리는 노 젓는 소리,

어는 곳 고깃배인지 길손이 벌써 당도했네.

난타벽제(難陀闢濟)

벡제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384)에 胡의 중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니 맞아

들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385)에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나라에서 도첩을

내린 중 또는 도통한 중) 열사람을 두었는데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은 즉위한 대원 17년(37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를 번역하면 동학(童學)이 된다.

기리어 읊는다.

하늘의 조화는 옛부터 아득하니,

대개 잔재주의 솜씨 뵈기 어려워라.

어른들은 스스로 노래와 춤으로

옆 사람을 이끌어 눈뜨게 했네.

아도기라(阿道基羅)-아도 또는 아두라 한다.-

신라본기 제 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 19대 눌지왕 때 사문(沙門-머리깍고 불문에 들어가 도를 닦는 중)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오니 그 고을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그를

편안히 있게 하였다.’

이 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을 보내왔는데, 신라의 군신들은 그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

루 돌아다니며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더니 말했다.

“이것은 향이라고 하는데 태우면 향내가 진하게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3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축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왕녀의 병이 위중해서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하니 이내 병

이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잠시 후 그의 간 곳을 알수가 없었

다.

또 21대 비처왕때에 이르러 아도 화상이 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

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이곳에서 몇 해를 지내더니 별다른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을 강독하니 가끔 믿는 사람이

생겼다.

아도본비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며, 어머니는 고도령이다.

정시 연간(240-248)에 조위사람인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사통

(私通)하고 돌아갔는데 이 때문에 아이를 가졌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니 그의 어머니

는 그를 출가시켯다. 나이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이 강독하는 곳

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다시 돌아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아직까지도 불법을 모르지만 앞으로 3천여 달이 되면 신라에서 성

왕이 나와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의 서울에는 일곱군데의 가람터가 있는

데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이요, 둘째는 3천의 갈래요 셋째는 용궁의 남쪽이요,넷

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사천의 신유림이요,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이것은 모

두 전불(前佛-석가모니 이전에 성불한 부처)때의 가람터이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

질 곳이다. 그러하니 너는 그 곳으로 가서 대교르 전파하면 마땅히 불교의 개조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들은 아도는 계림으로 가 왕성 서쪽마을에 살았는데 지금의

엄장사이며, 때는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였다. 아도가 대궐로 들어가 불교를 전하

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라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

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미추왕 3년에 성국 공주가 병이

깊어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자 칙사를 보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이에 법사가

급히 대궐로 들어가 공주의 병을 고쳤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

는 대답했다.

“빈도에게는 아무런 청도 없사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크게 일

으켜 국가의 복을 빌 수 있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그 때의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

하므로 법사는 모옥을 지어서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

다. 그래서 그 절을 홍륜사라고 이름했다. 모록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인데,법사에

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지에 절을 짓고 살았다. 그 절을 영흥사라 했다.

얼마 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했다. 그래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든후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하여 다

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제 23대 법흥대왕이 소량(중국남조의 양나라) 천감 13년 갑오(514)에 왕위에 올

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이로 보면 고도령이 말한

3천여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여기서 보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가지 설이 서로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내가 생각하건대 양과 당의 두 승전 및 삼국본사에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동진 말년인 태원 연간(376-396)에 있었다고 했는데 순도,아도

두 법사가 소수림왕 갑술(374)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므로 이 전기는 잘못되지 않

았다.

만약에 비처왕 때에 처음으로 신라에 왔다면, 그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백년이

나 머물렀다 온 것이 되므로, 비록 대성의 행동이나 동작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모두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신라에서 불교를 믿은 것이 이처럼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만약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이는 고구려에 온 갑술(3

74)보다 백여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이때는 계림에 아직 문물이나 예교(禮敎)가 있지

않았다. 나라의 이름조차도 아직 정하지 않을 때이니 어느 틈에 아도가 아서 불법을

믿기를 청했겠는가? 그리고 고구려에도 닿지 않았는데 건너 뛰어 신라로 왔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설령 불교가 잠시 일어났다가 폐해졌다고 한대도 어찌 그 중간에

아무 소문도 없이 잠잠했으며, 향의 이름조차도 모르고 있었겠는가? 또 하나 연대는

어찌 그다지 뒤졌으며 또 한쪽은 어찌 그리 앞섰단 말인가?

생각해 보건대, 불교가 동방으로 점점 퍼지던 형세는 틀림없이 고구려,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그쳤을 것이다. 신라의 눌지왕과 고구려의 소수림왕 시대가 서로

잇대어 있으므로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이른바 묵호란 이름

도 참 이름이 아니고 그 자의 별칭이엇을 것이다.

이는 양나라 사람이 달마를 가리켜 벽안호라 하고, 진나라에서 중 도안을 조롱하

여 칠도인이라 한 것과 같을 것이다. 아도는 높은 행동으로 세상을 피하면서 자기 이

름을 말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이로써 대개의 사람들이 들은 바에 따라 묵호니 아도니

하는 두가지 이름으로 불러 마치 한사람이 두 사람인냥 전해 내려왔을 뿐이다. 더구나

아도의 겉모습이 묵호와 같다고 했으니 이것으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로 돌며 말한 것은 바로 절을 처음 세운 선후의 순서로써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전기는 잃었기 때문에 이제 여기서는 사천의 끝을 다섯

번째로 실은 것이다. 그리고 3천여달이란 것도 반드시 전부 믿을 수는 없다. 대개 눌

지왕 때부터 정미(527)까지는 무려 백여년나 되니 만일 1천여달이라 했다면 거의 비슷

했을 것이다. 성씨를 아라고 하고 외자 이름을 쓴 것은 거짓인 듯하나 자세히는 알수

가 없다.

또 원위(元魏)의 중 담시의 전기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담시는 관중사람이다. 출

가 후 이적(異迹)이 많았다. 동진의 효무제 태원 9년(384)말에 경장과 율장 수십부를

가지고 요동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여기에서 삼승(三乘-성문,연각,보살의 열반에

이르는 세가지 교법)을 가르쳐 즉시 불계에 귀의하게 했는데, 대개 이것이 고루려에서

불교를 접한 시초일 것이다.

의회 초년(406)에 담시는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삼보(한나라때 장안부근을 일컫

던 말)에 불교를 전파시켰다. 그는 발이 얼굴보다 더 희고 아무리 진흙탕 물 속을 지

나쳐도 더러워지거나 젖는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백족화상이라 불렀다

한다. 동진 말년에 북방의 흉노 혁련발발이 관중을 함락시키고 죽인 사람이 수없이 많

았다. 이 때 역시 담시도 화를 당했지만, 칼날이 그를 상하게 하지 못하자 발발이 탄

식하며, 중들을 모두 놓아주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비밀히 산택으

로 도망가서 두타의 행실을 닦았다. 척발도가 다시 장안을 쳐서 이기고 그 위세를 관

중과 낙양에까지 떨쳤다. 이 때 박릉에 최호란 사람이 있었는데 좌도를 조금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그는 지위가 위보의 재상에 올라 척발도의 신임을 받게되

자 천사(도교의 교주) 구겸지와 함께 척발도를 달래 말했다.

“불교는 아무런 이익도 없으며 오히려 백성들의 생업에 해로울 따름입니다.”

그리고는 불교를 폐하도록 전했다고 한다.

태평 말년에 담시는 비로소 척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이에 정월

초하룻날 돌연 지팡이를 짚고 대궐문에 이르렀다. 이말을 들은 척발도는 그를 베어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도 상함이 없자 척발도가 직접 베었지만 역시 상

하지 않았다. 이에 북원에서 기르던 범에게 주었지만, 범도 역시 감히 가까이 하지 못

했다. 이로써 척발도는 매우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후 문득 역

질에 걸리었다. 또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까지도 잇달아 나쁜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이 죄과가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하여, 이에 두 집의 종족을 모두 죽여 업애고 나라

안에 선언해서 불교를 크게 퍼뜨리게 했다. 담시는 그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알수없다.

논평하여 말한다.

담시는 태원말년에 해동에 왔다가 의회 초년에 관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

지만 여기에서 10여년이나 머물렀는데 어찌 동국역사에는 이런 기록이 없단 말인가.

담시는 이미 괴이하고 휼계가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인데, 아도,묵호,난타와 연대

나 사적이 모두 같으므로 필경 이들 셋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그의 변명이 아닌가 한다.

기리어 읊는다.

금교에 눈 쌓이고 얼어 풀리지 않고,

계림의 봄빛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네

어여뻐라, 봄의 신 재주 많구나,

모랑의 집 매화꽃 먼저 피게 했네.

번호:4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6 17:27 길이:141줄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厭촉(해골촉)滅身)

‘눌지왕 때로부터 백여년이나 된다.’

신라본기에 보면 법흥대왕이 즉위한 지 14년(527)에 소신 이차돈이 불법을 위하

여 자기의 몸을 죽였다. 이 때가 소량으로서는 곧 보통 8년 정미(527)로서 서천축의

달마대사가 금릉에 온 해이기도 하다.

또 이해에는 낭지법사가 또한 처음으로 영추산에서 법장을 열었던 해이기도 하다.

이로 보면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

을 알 수가 있다. 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중 일념이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지었

는데 여기에 이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대강은 이러하다.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

극전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 동쪽 부상지역을 살펴보고 말했다.

“예전에 한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불법이 동쪽으로부터 흘러 들어왔다. 내가 왕위

에 오른 뒤로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에 조신들은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로지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

을 지키고 절을 세우겠다는 신령한 생각을 따르지 않으므로 대왕은 탄식했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자로서 왕업을 이어 받았도다. 그래서 위로는 음양의 조

화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거워함이 업음이니라. 정사를 닦는 틈틈이 불교에

마음을 두었으니 누가 나와 더불어 일을 할꼬.”

이때 소신이 있었는데 성은 박씨요 자는 염촉인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부는 아진 종으로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다.

그는 죽백과 같은 자질에 수경(水鏡)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한 집안의 증손

으로서 궁안의 조아(爪牙-왕을 보좌하는 무신)가 되기를 희망했고 성조의 충신으로서

하청(河淸-황하가 맑아지면 聖王이 나와 나라가 태평해짐)에 등시(登侍)할 것을 기대

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로서 사인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

심정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추요(짐승먹이는 꼴과 땔나무)에게도 계교를 물었다

하오니 신은 큰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네가 할 일이 아니다.”

왕의 말에 사인이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오며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

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하여 신의 목을 치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왕의 말씀을 감히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해육평구(解肉枰軀) 장속일조(將贖一鳥)하려 했고 쇄혈최명(灑血최命)자령칠수

(自怜七獸)를 불상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인데 어찌 죄없는 사

람을 죽이겟느냐? 너는 오직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왕의 만류에 사인이 말했다.

“일체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지면 불일(佛日)은 다시 일어나고 성주께서는 편안하실 것입니다.”

“난새와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하늘을 뚫을 마음이 있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헤칠 기세를 품었다 하더니, 만약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

면 가히 대사(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에 대황은 일부러 위의를 갖추고 동서쪽과 남북쪽에 풍도상장(風刀霜仗-무시

무시한 형구)을 벌여놓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이를 지체시키지 않았느냐?”

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며 두려워 하여서 황망하게 맹세하고 손으로 <동쪽과

서쪽>을 가리키자 왕은 사인을 부러 꾸짖었다.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아무런 대답

도 하지 못했다.

대왕이 크게 노하여 그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하니 유산느 그를 묶어 관아로 끌고

갔는데, 사인이 맹세하는 글을 짓고, 옥리가 그의 목을 베었다. 이 때 흰젖이 한 길

이나 솟아 올랏으며 하늘은 어두워져 사양이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

어졌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를 적셨고, 재상들은 근심되어 진땀이 선면(蟬

冕-신하들이 쓰는 관)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문득 마르니 물고기와 자라가 갑자

기 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긴 팔 원숭이들이 떼지어 가며 울었다.

춘궁(春宮-태자가 거처하는 궁)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

리면서 서로 바라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 듯 이

별을 쓸퍼했다. 관을 쳐다보며 우는 소리는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모

두 말했다.

“개자추가 다리의 살을 벤 일도 염촉의 고절함에 비할 수 없고, 홍연(弘演-춘추

시대 위나라 사람, 적인이 위를 공격하여 의공을 죽이고 간만 남겨놓고 살은 다 먹었

는데, 홍연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이를보고, 자신의 배를 갈라 의공의 간을 자기

배에 넣고 죽었다고 함.)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그의 장렬함에 비할 수 있으리오. 이

것은 바로 대앙의 신력을 붙들어서 아도의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니 참으로 성자로다!”

드디어 북산 서쪽 고개에 장사지냈다. 내인들은 슬퍼하여 좋은 곳을 가려서 난야

(蘭若-한가롭고 고요하여 수행에 적당한 곳, 즉 절)를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라고 했다

.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공경하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

를 행하면 마땅히 불법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 14년(527)이지

만 불교의 공인은 이듬해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조 참조)

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544)에 대흥륜사가 이룩되었다.

대청초년에 양나라의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져오고, 천가 6년(565)에 진라라 사

신 유사가 중 명관과 함께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 법당을 세우고 범종도 달았다. 용상의 중들은 천하의 복전

(福田-복을낳게 하는 밭)이 되고, 대승 소승의 불법은 서울의 자운(慈雲-자비로운 마

음이 구름처럼 일어남)이 되었다. 다른 지방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서역의 이름난

중들이 이 땅에 오니, 이로 하여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가 합하여 한 집

이 되었다. 그러므로 덕명은 천구의 나이에 쓰이고, 신적은 성하의 물에 그림자를 비

추니 이것은 어찌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랴-세성인은 아도 법흥 염촉

을 말함- 그 뒤에 국통(신라때의 가장 높은 승직) 혜륭과 법주(고승) 효원 김상랑, 대

통(승직의 하나) 녹풍, 대서성 진서, 파진찬 김의 등이 사인의 옛 무덤을 수축하고 큰

비석을 세웠다.

원화 12년 정유(817)8월 5일은 곧 제 41대 헌덕대왕 9년이니 흉륜사의 영수선사

는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들을 모아 매달 5일에 영혼의 묘원을 위해서 단을 쌓고 법회

를 열었다.

또한 향전에는 이렇게 적었다.

“그 제삿날이 되면 언제나 고을의 노인들이 사(社)를 만들어 흉륜사에서 모임을

가졌다.”

즉, 이 달 초닷새는 곧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에 순응한 날이다. 아아! 이러

한 임금이 없었던들 이런 신하도 업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던들 이러한 공덕도

없었을 것이니, 마치 유비라는 물고기가 제갈량이란 물을 만남과 같으며,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 모인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법흥왕이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을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이룩되자 면류관을 벗고

가사을 입었으며, 궁중에 잇는 친척들을 내어 절의 종으로 삼게 하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널리 교화시켰다.

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계승한 성군으로서 임금의 직책을 이어 받고 95(임금

의 자리,역경 건괘의 95효(爻)가 인군의 상이라 함)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을 통솔하

니 호령이 다 갖추어졌다. 이내 이 절에 대왕홍륜사란 이름을 하사했다. 전황 법흥왕

의 성은 김씨요, 출가한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책부원귀(冊府元龜-송나라의 양흠약등이 역은 역대 군신의 사적을 모은 책)에 보

면 법흥왕이 성을 모, 이름은 진이라 했다. 처음 역사를 일으켰던 을묘(535,법흥왕 22

년)에 왕비도 또한 영흥사를 셍고 모록의 누이동생인 사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법흥왕

과 더불어 낙채(落彩)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묘법이라 했다. 역시 영흥사에 살더니 몇

해 후에 세상을 떠났다. 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무너지더

니 얼마 되지 않아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고 했다. 살펴보건대 진흥왕은 법흥왕

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 박씨는 모량리 영실각간의 딸이며, 역시 출가하여 중은 되

었지만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면 진(眞)자를 마땅히 법(法)자로 고치면

필경 이것은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중이 되었다가 죽은 것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절을 세우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법흥,진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이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다

스리는 교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대통 원년 정미(527)에는 양의 무제를 위하

여 웅천주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라 했다.

기리어 읊는다.

성인의 지혜는 종래 만세를 꾀하니,

구구한 여론은 지극히 하찮아라.

法輪이 풀리고 金輪이 구르니,

요순이 시절이 불교로 인해 이루어지네

이것은 원종을 찬미하여 지은 것이다.

의을 좇아 생을 버림이 놀라운 일이네,

천화(天花)와 흰 젖의 이적(異蹟) 더욱 다정해라.

어느덧 한 칼에 몸은 비록 죽었으되,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 서울을 뒤흔드네.

이것은 염촉을 찬미하여 지은 것이다.

법왕금살(法王禁殺)

백제 제 29대 법왕의 이름은 선인데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왕 10년 기미(599)에

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응전의 종

류를 놓아주게 하고, 또한 어렵의 기구를 불살라서 살생을 일체 금지시켰다. 다음해

경신년에는 30명의 도승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창건하려 했으나 겨우

터를 닦고서는 세상을 떠났다. 무왕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닦은 터에 아들이 일

으켜 수기를 지나서 완성했다. 그 절을 또한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곳이었는데, 화목의 수려하여 사시의 아름다움을

다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와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치

를 구경했다.

기리어 읊는다.

짐승을 보호하는 너그러움은 그 은혜 천구에 미치고,

돈어(돼지,물고기)에까지 흡족하니 덕택과 어짐이 사해에 미치네.

성군이 돌아가심 말하지 마오.

상방(천상) 도솔(도솔천)에는 이제 봄이 한창이리

번호:4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7 15:48 길이:83줄

보장봉노 보덕이암(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절을 옮김)

고구려 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 말기인 무덕 정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오두미교(후한 때 발흥한 종교, 삼국지에 나오지요)를 신봉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시켜 천존상(도교에서 모시는 최고의 신)을 보내고, 또 가

서 도덕경을 강술케 하여 왕이 백성들과 함께 그것을 들었다. 때는 곧 제 27대 영류왕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를 청하자, 당나라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

그 뒤에 보장왕이 즉위하자-정관 16년 임인(642)- 또한 유불도의 세교를 같이

일으키려 했다. 그 때 왕의 총애를 받던 재상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황관(도사)은 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그 때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이 도교가 불교와 맞서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

질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여러번 왕에게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으므로 신력으로 방장

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영휘 원년 경술

(650) 6월 이었다. 또 본전에는 건봉 2년 정묘(667) 3월 3일의 일이라 했다. 총장 원

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셈해 보면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에 날아온

방장이 있다는데 바로 이것이라 한다. 진락공(고려 이자현의 시호)은 그를 위해 시를

써서 당(堂)에 남겨두었고, 문열공(김부식의 시호)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

했다.

또 당서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에 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 양명이란

자가 있어서 전쟁에서 불리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 것이다.”

개(蓋)씨가 정권을 잡고 독재하자 개로 성을 삼으니 곧 양명이 이에 부합된다.

또 고구려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 임신(612)에 30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처들어 오매, 10년 갑술 (614)10월에 고려왕-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이 때 한 사람이 비밀리에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안으로 들어갔다. 양제가 표문을 들어서 읽고 있

는데 소노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이에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천하의 군주가 된 내가 이 조그만 나라를 친정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에 웃

음거리가 되었도다.”

이때 우상 양면이 아뢰었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 대신이 되어 필연코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

겠사옵니다.”

그 후 양제가 죽은 뒤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가 되니 총명하였

으며 신기한 무용이 있었다. 그때 무양왕-확실하지는 않다.-이 그의 어질다는 말을 듣

고 불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지위는 소문에까지 이르렀다. 소문은 바로 시중의 벼슬이다.

개금이 아뢰었다.

“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가 있는 법이다. 신이 보건대

이 나라에는 불교와 유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왕은 이를 옳게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청했다. 이에 태종이 서달 등 도사 8명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만들고 도사를 존경하여 유사(儒士)위에 앉게했다.

도사들은 나라 아의 이름난 산천을 돌아다니며 이를 진압시키는데, 평양성의 지세가

신월성(半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은 주문을 외워 남하의 용에게 명령해서 만월성을 더

늘려 쌓아 용언성이라 했으며, 참기(讖記-앞날의 길흉에 대해 적은 글)를 지어 용언도

또는 천년보장도라고 했다. 여기에 혹 영석을 파서 깨뜨리기도했다.

개금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쪽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이 역사는 16년

만에야 끝났는데,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보

장왕 때에 이르니 친히 6군을 거느린 당나라 태종이 쳐들어 왔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 무진(668)에 우상 유인궤, 대장군 이적과 신라 김인

문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이에 보장왕의 서

자(안승)가 4천여가(家)를 인솔하여 신라에 항복했다. 대안 8년 신미(1092)에 고려의

우세승통(대각국사 의천)잉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 가서 보덕성사의 영정을 뵙고

시를 지었다.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

우리의 스승들로부터 전해졌다고 이르네.

애석해라 승방을 날려온 후,

동명왕의 고국이 위태로웠네.

그 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미혹하여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이에 보덕법사는 승방

을 날려서 남쪽의 마이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에 신인이 고구려 마령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

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것은 모두 국사와 같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본전과 승전에 적혀 있다. 보덕법

사에게는 11명의 덕이 높은 제자가 있었다. 그 중 무상화상은 제자 김취등과 함께 금

동사를 세웠고, 적멸, 의융 두 법사는 진구사를 세웠으며, 지수는 대승사를 세웠고,

일승은 심정,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를 세웠고, 수정은 유마사를 세웠으며, 사대는 계

육 등과 함께 중대사를 세웠고,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세웠고, 명덕은 연구사를 세웠다.

개심과 보명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기리어 읊는다.

불교는 드넓은 바다처럼 끝이 없어라.

백천의 유도교 다 바 받아들이네

가소롭다. 저 여왕(麗王) 웅덩이를 막으니

와룡(초야의 큰인물)이 바다로 옮겨감을 알지 못하네.

번호:5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28 00:05 길이:126줄

탑상(塔像) 제 4

동경홍륜사 금당 10성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니소(泥塑-진흙으로 만든상)는 아도,염촉,혜숙,

안함,의상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니소는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이다.

가섭불연좌석(가섭불은 부처 이름, 연좌석은 좌선하던 돌)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제가의 전기에는 모두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월성 동쪽 용궁 남쪽에는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이 곳은 바로 前佛때의

절터이다. 지금 황룡사 터는 일곱절 중 하나다.’

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 계유(553)2월, 월성 동쪽에 신궁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왕은 의아스럽게 여겨 신궁을 고쳐서 황룡

사로 삼았다 했다. 연좌석은 불전 뒷면에 있었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돌의 높

이는 5,6척이나 되었으며 그 둘레는 겨우 세 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뚝 서 있는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후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그 곳에 쇠르 붙여 보호했다. 기려서 시를 짓는다.

불교의 침체함이 아득하여 기억할 수 없으니,

오로지 연좌석만 그대로 남았구나

몇 번인가, 桑田이 변하여 滄海가 됨이,

애달파라, 그 자리에 의연히 있구나.

이윽고 서산대병(고려 고종때의 몽고의 침입)이후에 불전과 탑은 모두 불타버렸

다. 또한 이 돌 역시 흙에 파묻혀서 지면과 함께 편편해진 것이다.

아함경(소승불교의 경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가섭불은 바로 賢劫(3劫의 하나

로 1천여불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함)의 세번째 부처다. 그는 사람의 나이로 따

지면 2만세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 의거하여 증감법으로 계산한다면 언

제나 成劫(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긴 시간의 하나, 4겁이 있는데 성겁, 주겁, 공겁, 괴

겁이다.)의 시초에는 모두 無量歲(끝이 없는 시간)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감해져서 8만세에 이르면 그 때가 바로 住劫(세계가 성립되었다가

파괴되어 空으로 돌아가는 오랜 시기를 넷으로 나눈 것의 하나)의 초가 된다. 이때부

터 또 백년마다 1세씩 감하여 10세가 되면 1減이 된다. 또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1增이 된다. 이렇게 하여 20번 감하고, 20번 증하면 주겁이 된다. 이 한

주겁 동안에 1천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인 석가불은 네 번째의 부처

가 된다. 이 네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 9감중에 나타나게 된다.

석가세존이 1백세의 수르 누린 때로부터 가섭불의 2만세를 누렸던 때까지는 벌써

2백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 시초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과거 7불중의 하나)시

대까지 이르면 또 몇만세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올라가 劫初(태초)의 무량

세를 누리던 때까지는 또한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 18년 신사(1281)까지가 이미 2천2백30년이

고 보면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 만년이나 된다.

본조(고려)의 명사 오세문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다. 이에 의하면 大金의 정우

7년 기묘(319)에서 거슬러 올라가 4만9천6백여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가 천지를 개벽

한 무인년이 된다고했다.

또 연희궁 녹사 김희령이 지은 대일역법에 의하면, 천지 개벽한 上元갑자로부터

원풍 갑자(1084)에 이르기까지는 193만7천6백41세라고 했다.

그리고 찬고도(중국의 역사책)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획린(춘추시대 노

나라의 애공이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사로잡은 때)에 이르기까지가 276만세라고 했다.

여러 경문을 살펴보면 또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겁초의 천지가 개벽한 때와는 어린애가 될 정도다. 이런 三家의 설

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천지개벽의 설에 있어서는 무

척 소홀했던 것이다.

요동성의 육왕탑(육왕은 아쇼카왕)

삼보감통록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오

색 구름이 당을 뒤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곳에는 중 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보면 중은 없어지고 멀리서 보

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곁에는 삼중으로 된 토탑이 있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만 무성할 따름이었다. 그리

하여 그 곳을 파보게 하였더니 한 길쯤 되는 곳에서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보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산스크리트어 책)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

글을 알아보고 불탑이라고 말했다. 왕이 자세히 묻자 시신은 대답했다.

“이것은 한나라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하늘에 제사지내는 부처-

이라합니다.”

성왕은 이로 인하여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이내 7重의 목탑을 세웠으며, 그뒤

비로소 불법이 전해 오자 그 시종(始終)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

이를 줄이다가 본 탑이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이 통일했다는 염부제주(불교에서 말하

는 4대주의 하나로 인도를 이렇게도 부름)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이할 것

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있었다. 행군 설인귀는 수양제가

토벌한 옛 땅에 이르렀다가 이 곳에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古老에게 물었더니 말했다.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

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고구려의 성왕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

명성제라고 하나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동명제는 전한의 원제 건소 2년(B.C. 37)에

즉위하여 성제 홍가 임인(B.C.19)에 승하했으므로 그 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

(貝葉-인도에서 종이대신에 글씨를 쓰던 나뭇잎, 즉 불경을 말함)을 볼 수 없었는데,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佛을 포도왕이라 했으

니, 서한 때에도 필경 서역문자를 아는 자가 있었으므로 범서라 했을 것이다.

고전을 살펴보건대,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들에게 명하여 인구 9억명이 사는 곳마

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염부계(인도) 안에 8만4천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번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대개 진신(眞身-부처님의 영원한 본체)의 사리란 그 감응됨을 헤아리기

가 어려운 것이다.

기리어 읊는다.

아육왕의 보탑은 진환(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어 이끼 껴서 무늬 졌네.

회상하노니 그 때 길손의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다.

금관성의 파사석탑

금관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시조 수로

왕이 왕비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48)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러나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께 그 까닭을 아뢰자 부

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때서야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

착하여 배를 댔다.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으며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

기 때문에 지금 그 곳을 주포하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곳을

능현이라 하며, 붉은 기가 처음으로 해안으로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이라 한다.

수로왕이 황후를 만나 함께 나라를 다스린 세월은 150여년이나 된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해동에는 아직 절이 세워지지 않았으며, 불법을 신봉함도 없엇으니, 대개 상

교(像敎-불교의 다른 이름)가 전해오지 않았으므로 이곳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

대 질지왕 2년 임진(452)에 이르러 그 곳에 절을 세우고, 또한 왕후사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아울러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있다.

탑은 모난 사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하게

붉은 무늬가 있는데, 품질이 매우 좋으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

草-藥을 상중하 삼품으로 분류한 책)에 말한-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도 하나,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있다.

기리어 읊는다.

염(厭-석탑)을 실은 붉은 돛배 깃발도 가벼워라,

신령께 빌고 빌어 거친 바다 헤쳐 왔네.

어찌 황옥만을 도와 이 언덕에 왔으리오.

왜국의 천년 노경(努鯨-고래가 작은고기를 통째로 삼키는 것을 말함)

막고자 함일세.

번호:5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4/30 20:04 길이:68줄

고려의 영탑사

고승전에 보면,

“중 보덕의 자는 지법이요, 전 고려 용강현 사람이다.”

고 했다. 이것은 아래 본전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보덕은 항상 평양성에 살고

있었는데, 산방의 늙은 중이 와서 불경을 강의해 주기를 청했다. 스님은 굳이 사양했

으나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 40여권을 강의하였다.

강의를 마치자 성의 서쪽 대보산 바위굴 밑에 이르러 선관(禪觀-좌선)했다. 이때

神人이 와서 말했다.

“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석장을 그의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속에 8면으로 된 7층 석탑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땅을 파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이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

사라 하고 그 곳에서 살았다.

황룡사장육(丈六-황룡사에 있는 1장 6척되는 불상)

신라 제 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553) 2월에 용궁 남쪽에 장차 대궐을 지으

려 하였는데, 황룡이 나타나므로 고쳐 절을 지었다.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기축(569)

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하였다. 그 얼마 후에 바다 남쪽에서 커다란 한 척

의 배가 오더니 하곡현 사포- 울주 곡포- 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이 있

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축 아육왕이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장차 석가의 존상 셋을 부

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땅으로 가서 장육존상을 이루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두 개의 모형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의 관리가 문서

를 갖추어서 보고하니, 왕은 사자를 보내어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

서 동축사를 세우고, 세 불상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과 쇠는 서울로 보

네서 태건(남조 진 선제때의 시호) 6년 갑오(574) 3월에 장육존상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5천7근으로 황금 1만1백 9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백 36푼이 들었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모셨

더니 그 이듬해에 불상의 눈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 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다.

이것은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 불상이 진평왕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대향화국(고대 인도의 나라이름)에

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백년 되는 해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

한 것을 한스러이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 때 왕의 태자만이 혼자 그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은 시종을

시켜 그 이유를 물은 즉 태자가 아뢰었다.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옳게 여긴 왕은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었다. 그 배는 남염

부제(남인도)의 16개의 큰 나라와 5백의 중국,10千의 소국, 8만의 촌락, 두루 돌아다

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

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완성하니 좋은 모습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에 근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후에 대덕(大德) 자장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이 헌

신해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였다.

“너희 나라의 황룡산은 바로 석가와 가섭불이 강의하던 곳이며 연좌석이 지금도

있다. 그런 까닭에 인도의 무우왕(아쇼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으니,

1천3백여년 후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던 것이니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

불상이 다 완성된 후에 동축사의 3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서 안치했다. 사기

(寺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년 갑진(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 때에 이 절의 초

대 주지는 진골 환희사였고, 제 2대 주지는 국통 자장, 그 다음은 국통 혜훈, 그 다음

은 상률사였다.’ 고 했다.

이제 병화(兵火-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입)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

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기리어 읊는다.

이 세상 어느 곳 참 고향 아니랴만,

향화의 인연은 이 나라가 으뜸이다.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음일세.

번호:5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1 11:11 길이:76줄

황룡사 9층탑

신라 제 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 10년 병신(636)에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

하여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수법(授法)을 감응해 얻었는데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의 찰리종(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의 왕으로 이미 불기

(佛記)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중국강화지방에 살았던 종

족, 여기서는 동이가 야만이라는 뜻)의 종족과는 같지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기 때

문에 성품이 추솔하고 패려하여 사견(邪見)을 많이 믿는다. 그런 까닭에 간혹 천신이

내리기도 하나, 다문비구(多聞比丘-법문을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비구)가 나라 안에 있

기 때문에 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하다.”

말을 끝내자 이내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의 변화인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가 중국 대화지 옆을 지나는데 문득 신인이 나타나 물었다.

“무엇 하러 이곳에 오셨소?”

“보리(불타에 이르는 길)를 구하려 합니다.”

자장이 대답하자 신인은 그에게 절한 다음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이려운 일이라도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인접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두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의 침입이 종횡으로 심합니다. 이것이 백성들

의 걱정입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으니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소. 그렇기 때

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시오.”

이에 자장이 물었다.

“그럼 고국에 돌아가서 이익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룡사의 호법용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에 가서 보

호하고 있으니, 고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9층탑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고, 9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우고 나거든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또한 나를 위해 경기 남

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빌어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을 보답하리다.”

말을 마치자 드디어 옥을 바친 후 이내 사라지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사중기에

이르기를 종남산 원향선사에게서 탑을 세워야 하는 따닭을 들었다고 했다.

정관 17년 계묘(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불상,가사,폐백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을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선덕왕이 여러 신

하들에게 이일을 의논하자 신하들은 말한다.

“工匠을 백제에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 청하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왔다.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 용춘이 그 역사를 주관했다. 거느린 小匠이 2

백명이나 되었다. 이에 마음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

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

우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공장은 곧 자신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엔

이렇게 적혔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가져온 사리 1백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스님이 戒를

받는 단)과 또 대화사 탑에 나누어 모셨다. 이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탑을 세우

고 나니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감이 아니겠는가. 그후

고구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계획을 세우다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

인가?”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구려왕은 그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나라에 구정(九鼎)이 있는 까

닭에 초나라에서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기리어 읊는다.

귀신이 부축한 듯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금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이곳에 올라 어찌 구한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이 특히 편안한 것

깨닫기 시작했네.

또 해동의 명현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도는 있으되 위엄이 없으므로 구한이 침

범하게 되었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재

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1층은 일본,2층은 중화,3층은 오월,4

층은 탁라,5층은 응유,6층은 말갈,7층은 거란,8층은 여진,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

또 국사및 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이허게 되어 있다.

‘진흥왕 14년 계유(553)에 황룡사를 처음 세운 후 선덕왕 때인 정관 19년 을사(6

45)에 탑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이 즉위한 7년 성력 원년 무술(698)6월에

벼락을맞았다. 제 33대 성덕왕 경신(720)에 다시 이를 세웠으나 48대 경문왕 무자(868

)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그 임금 때에 세번째로 중수하였다. 본조 고려 광

종의 즉위 5년 계축(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 신유(1021)에

네번째 중수했다. 또 정종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

갑진(1064)에 다섯 번째 중수했다. 또 현종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으

므로 숙종 원년 병자(1096)에 여섯번째로 중수했는데, 또 고종 16년(고종 25년이 맞다)

무술(1238) 겨울에 몽고의 병화로 탑과 장육존상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

었다.’

번호:5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2 10:34 길이:115줄

생의사 돌미륵

선덕여왕 때 중 생의는 언제나 도중사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놓게 하더니 남쪽 골짜기로 와서 말

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를 파내다 고개 위에 편히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그 골짜기에 이르렀다. 표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거기에 석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진(644)

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절 이름을 생의사라고 했다.

홍륜사의 벽화, 보현(普賢)

제 54대 경명왕 때 홍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가 불에 탔는데 아직 수리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화,홍계 두 중이 시주를 받아 장차 수리를 하려 했다. 정명 7

년 신사(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

니 전탑과 풀,나무,흙,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

쪽 연못의 어룡들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며 전에는 없던

일이라 경탄하여 옥과 비단과 곡식을 시주하니 산더미를 이루었다. 장인들도 저절로

모여들어 하루가 안되어 완성됐다. 역사를 마치고 천제가 바야흐로 돌아가려 하매 이

두 중이 아뢴다.

“천제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

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소서! 또한 이로 인하여 영상을 여기에 모셔 두게

항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

이에 천제가 말했다.

“나의 원력(願力)은 저 보현보살이 현화(玄化-깊고 묘한 조화)를 두루 펴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

이다.”

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

금까지도 이 화상은 남아 있다.

삼소관음과 중생사

신라 고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중국 천자에게 총애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

기 짝이 없으므로 천자가 말했다.

“고금의 그림으로도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에게 명해 그 실제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

그 화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나라

사람으로, 양나라 천감 연간에 무릉왕국의 시랑 직비각지화사가 되었고, 우장군과 오

흥태수를 지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온 천자는 중국 양,진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傳

에 당나라 황제라 한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이라 하는 까닭에서

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를 모두 옮긴

다. 그 화공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완성했다. 그 때 잘못으로 붓을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다. 고쳐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

각하기를, 그 붉은 점은 필시 낳을 때부터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하고 그림을 바쳤다.

그 그림을 보고 난 황제는 말했다.

“모양은 실물과 똑 같으나 속에 감추어진 배꼽 밑의 점은 어떻게 알고 이것까지

그렸느냐.”

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에 처하려고 하자, 승상이 아

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무척 곧은 자입니다.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어젯밤 꿈에 내가 보았던 사람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만일 그림이 꿈과 같다면 용서해 줄것이다.”

이에 화공이 십일면관음보살의 상을 그려 바치니 꿈과 같았다. 황제는 그제야 마

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 분절과 약속했다.

“내가 들은 바 신라국에서는 불법을 우러러 신봉한다 하므로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를 닦아 인방(仁邦-동방, 곧 신라)을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겟소.”

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다. 나라 사람들

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년 천성 연간(926-929)에 정보 최은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이 절의 관음보살앞에 나아가 기도했더니 태기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석달이 채 못되

어 후백제의 견훤이 서울로 쳐들어와 성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최은함은 그 아이를 안

고 이 절에 와서 말했다.

“이웃 나라 군사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하여 누

가 겹친다면 부자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대성께서 이 아이를 주

셧다면 원컨대 큰 자비의 힘을 내리시고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가 다시 만나게 해 주

십시오.”

슬피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의 예좌(猊座-부처

가 앉아 있는 자리)밑에 감추고는 못 잊어 하며 떠났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가

자 돌아와 아이를 찾았다. 아이의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더 예뻐졌는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는데 자라면서 총명함과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은 아니었

다. 이 사람이 바로 승로인데 벼슬이 정광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 최숙을 났았으며,

숙은 낭중 제안을 낳았다.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

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는 보살 앞에 꿇어앉아서 말했다.

“제자는 이 절에 오랫동안 살면서 정성을 다해 향화를 부지런히 받들어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의 토지에서 나는 것이 없으므로 향사를 계속할 수

없으매 이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와 하직하는 바입니다.”

이 날 성태는 언뜻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이 말했다.

“법사는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넉넉히 마련해 주겠다.”

중이 깨달아 기뻐하며 마침내 그 곳에 머물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 후

13일째 되는 날 문득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닿았다. 절의 중이 나

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대답했다.

“우리들은 금주 지방 사람입니다. 지난번 한 스님이 우리를 찾아와 말하기를, 나

는 동경 중생사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4사(四事-북,음식,침구,탕약등 제사에 쓰는 네가

지 물건)가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러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

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 입니다.”

“이 절에서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시 잘못 들은 것 같

소.”

스님이 말하자, 그 사람들이 또 말했다.

“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와서 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

다.”

이에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관음대성을 쳐다

보고 절하며 저희끼리 말했다.

“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모습입니다.”

하며 놀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 까닭에 이 절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 날 저녁에 절 문간에 화재가 나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

런데, 법당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었다. 밖

으로 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그런 자가 없었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관음대성의 신령스러운 힘임을 알았다.

또 대정 13년 계사(1173) 연간에 중 점숭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

록 글은 알지 못햇으나 성질이 본래 순수하여 향화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이 때 어떤

중이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에게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를 뽑아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옳게 여긴 천사는 그 사람을 시험하려고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

다. 그러자 점숭은 그것을 받자마자 줄줄 읽었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고는

방 가운데로 물러 앉았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읽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한

자도 읽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했다.

“상인(上人-지혜와 덕을 갖춘 스님)은참으로 관음대성이 지켜주시는 이로구려.”

그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과 함께 이 절에 살던 처사

김인부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주고 또 전기로도 적었다.

번호:5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3 00:10 길이:74줄

백율사

계림 북쪽 산을 금강령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는 백율사가 있다. 이 절에는 부처

의 상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못 영험이 뚜렸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이 중생사의 관음보살을 만들때 함께 만든 것이다.”

고하였다. 또 속전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또 어떤 사람은

“부처님이 부례랑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의 자취다.”라고 했다.

천수 3년 임진(692) 9월 7일에 효소왕은 대현살찬(살찬벼슬의 대현이라는 사람)

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고, 주리(원래는 구슬장식을 단 신발인데, 여기서는

화랑의 뜻으로 쓰임)의 무리가 1천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상과는 더욱 친했

다. 천수 4년 계사(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으로 놀러갔다. 그런

데, 북명(원산만)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말갈)에게 사로잡혀 갔다. 이에 문객(門

客)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하여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상은 홀로 그를 쫓아갔는

데 이때는 3월 11일이었다. 이 말을 듣자 대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선왕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과 함께 내고

(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어쩐 연유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 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덮었다. 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 하며 조사하

게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사라졌다. 이에 왕은 말했다.

“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맡아 관리하던 김정고 등 5명을 가두었다. 그리고 4월에 나라

안의 사람을 모집하여 말했다.

“현금과 신적을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 부례랑의 부모가 백율사로 나가 불상 앞에서 여러 날 저녁을 기도했다.

그러자 갑자기 향탁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매우 기뻐하며 부모가 부례랑에게 묻자 부례랑이 대답했다.

“적에게 잡혀간 후 저는 적국의 대도구라의 집에서 말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조라니 들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문득 용모가 단정한 스님 한

사람이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면서,

“고향 생각을 하느냐?”

하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 앞에 꿇어 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그러면 나를 따라 오너라.”하여 저 바닷가까지 갔더니 그 곳에서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고 우리 두사람에게 각기 한짝 씩을 타게

했습니다. 그러자 바다 위로 날아서 순식간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왕에게 황급히 보고했다. 왕은 무척 놀라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다. 부

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금은 그릇 다섯 개씩 두 벌, 각

50량 중과 마납가사 다섯 벌, 대초 3천필, 밭 1만경을 백율사에 바쳐서 부처님의 은덕

에 보답했다.

또 나라 안의 모든 죄인을 놓아 주고, 관리들에게는 벼슬을 3계급씩 높여 주었으

며,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절의 주지를 봉성사로 옮겨 살도

록 했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을 삼고, 그아버지 대현아찬은 태대각간을 삼고, 어

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의 경정궁주를 삼았다. 안상을 대통으로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 5급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이에 일관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만만파파식적이라 책호 했더니 혜성은 이내 사라졌다. 그 후에도 신

령스럽고 이상스러운 일이 많았으나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

영랑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

번완등의 이름만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민장사

우금리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에게 장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

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에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 관음보살 앞에

나가 7일동안 기도했더니 돌연 장춘이 돌아왔다. 그동안의 연유를 묻자 장춘이 대답했

다.

“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는 깨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못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널판쪽을 타고 가다 오나라의 바닷가에 닿았습니다. 오나라의

한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이상

한 스님 한 분이 마치 고향에서 온 듯이 따뜻하게 위로를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저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문득 앞에 깊은 도랑이 있어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뛰

어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우리 시골의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

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이 곳에 와 있었습니다.”

신시(오후 3-5시)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 곳에 도착한 것이 술시(오후 5-7시)

초였다. 이 때가 바로 천보 4년 을유(745) 4월 8일이었다. 경덕왕이 이를 듣고 민장사

에 밭을 시주하고 또 재물도 바쳤다.

번호:5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4 00:05 길이:195줄

전후소장(前後所將) 사리

국사에 이르기를,

‘진흥왕 때인 대청 3년 기사(549)에 양나라에서 심호를 시켜 사리 몇 알을 보내

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

금니와 부처의 사리 1백알, 그리고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왔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사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

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

을 안치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고 했다.

속설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에서 전후로 염사(안렴사-고려때의 지방장관)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큰 구렁이가 돌 함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요사이 상장군 김공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령

을 받아 강동(낙동강 동쪽)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

하려고 하니 절의 중이 지난 일 때문에 이를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자 그 속에 작은 돌함이 있는데, 함속에도 유리통이 들어있고, 통 속에는

사리가 겨우 네 알 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 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속에 약간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

게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 때는 강도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12

35)였다.’

고기에 이렇게 적혔다.

‘사리 1백개를 세곳에 나누어 간수해 두었는데, 이제는 오직 네 개 뿐이다. 그것

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므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음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또 속설에 이르기를,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돌솥 동쪽면에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도 남아있다.’

그 때가 바로 요의 응력 3년 계축(953)이요, 본조 광종 5년으로 탑이 세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의 무의자(고려의 진각국사)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듣건대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쪽에도 틈이 없었네.’

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원 갑자(1264)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사신)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

에 절했으며, 사바의 운수(雲水-행각승)들도 몰려들어 참례했으며, 혹 돌함을 들어보

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진신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서

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기서는 이상한 향기가 강하게 풍기어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당나라 대중 5년 신미(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

의 어금니와 후당 동광 원년 계미(923) 즉, 본조 태조 즉위 6년에 당나라로 보냈던 사

신 윤질이 가지고 온 5백나한의 상은 지금 북승산 신광사에 있다. 송나라의 선화 기묘

(1119)에 입공사(入貢使)정극영,이지미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에

모셔 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전하는 얘기는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의 지상사 지

엄존자(중국 화엄종의 2대교주)에게 가서 있었다. 이웃에 선율사가 있는데 항상 하늘

의 공양을 받고 제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부엌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어느 날 선율사

가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내리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릿대만 가지고 돌아가자 그 때

서야 천사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왜 이다지 늦었느냐고 묻자 천사가 대답했다.

“온 동네에서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으므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따름을 알고는 그의 도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 이튿날 또 지엄과 의상

두 법사를 재올리는 데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말했다.

“율사는 이미 천제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이 40개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

에게 내려 보내어 복이 되게 함이 어떨까요?”

율사는 그 후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자, 천제는 7일을 기한 이

를 보내 주었다. 의상은 예를 마친 뒤에 이것을 맞이하여 대궐에 모셨다. 그 후 송나

라 휘종 때에 이르러 좌도를 받드니 그 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을 퍼뜨렸다.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

황건(도교를 가리킴)의 무리들이 일관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었다.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죽이고, 경전을 불태우고, 따로

조금나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

려 했다. 이 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천화(하눌타리)의 싹) 50령과 저포(苧布) 3배필을배를 호송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아무도 모르게 부처의 어금니만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

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니 예종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것을 십원전

왼쪽에 있는 소전에 모시어 항상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밝혀 왕이 친히 거동

하는 날에만 소전 문을 열고 예를 올렸다.

임진(1231)에 서울을 강화로 옮길때 내관들은 총망한 가운데 잊어버리고 이를 거

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 4월에 어원당(왕실의 명복을 빌던 곳)인 신효사의 중 온

광이 부처의 어금니에 예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을 시켜 궁중을 두

루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 때 백대 시어사 최충이 설신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고려의 벼슬이름)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고 했다. 내신 김

승노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궁중일기)를 조사해 보십시요.”

그 말대로 조사해 보니 일기에 이렇게 써 있었다.

‘입내시대부경 이백전이 불아함을 받다.’

이백전을 불러 물으니 대답했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게 해주십시오.”

그는 집에 가서 찾아보고는 좌번알자 김서룡이 불아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아내

어 이를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하였다. 또 김승노가 아뢰

는 대로 임진년에서 현재 병신년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과 경령전의 수직한 자들을 잡

아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밤에 김서룡의

집 담안으로 무엇인가 던지는 소리가 나매 불을 켜고 조사해 보니 불아함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침향합이고, 다음 한겹은 순금합이며, 그 다음 바깥 겹은 백은함이고

그 다음 바깥겹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합으로 각 함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에 들

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산느 죄를 물어 김서룡과 어불당과 경령전에 수직하는 사람

들을 모두 죽이려 하므로 진양부(최우의 막부)에서 아뢰었다.

“불사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하였다. 그리고 다시 십원전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을 지

어 불아함을 모시게 하고 장사들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좋은 날을 가려 신효사의 상

방(선종에서 주지를 이르는 말) 온광을 청해다가 승도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정성껏 재를 올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했던 승선 최홍과 상장군 최공연,이영장과 내시

다방 관원들은 불아전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나타나는 사리는 그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았다. 진양

부에서는 백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 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를 잃은 후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의 7일

기한이 다해 하늘로 올라 갔을까 하는 것이요, 둘째 의심은 국난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이므로 인연 있는 무사한 나라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요, 셋째 의심은

재물이 탐난 소인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요,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 집 안에 감추어 두

었으리라는 의심을 했는데 네번째 의심이 들어맞았소.”

하고 이내 소리를 크게 내어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헌수

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는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은 당시 내전에서 향를 피우며 기도하던 전 지림사 대선사 각유에거서 얻은 것

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며 날더러 기록하게 한 것이다.

또 경오(1270)에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의 난리는 날패함이 심하여 임진년

보다 더 했다. 십원전의 감주였던 선사 심감은 자신의 위태로움도 관여치 않고 불아함

을 가지고 나와 적난(賊難-삼별초의 난)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대궐에

알려지니 왕은 그 공을 크게 포상하고 큰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에 살고 있

다. 이것도 역시 각유에게 친히 들은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인 천가 6년 을유(565)에 진나라에서는 사신 유사와 중명관을 시

켜 불경의 경,논 1700여권을 보내 왔다. 또 정관 17년(643)에는 자장법사가 삼장(경장

율장,논장) 4백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에 안치했다. 흥덕왕 때인 태화 원년

정미(827)에 당에 간 고구려 학승 구덕이 불경 몇 상자를 가지고 오므로 왕은 여러 절

의 승도 등과 함께 홍륜사 앞길까지 나가 맞이하였다. 대중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

낸 사신 원홍이 불경과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는 보요선사가 두 번이나

오월국에 가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의 개산조(절이나 종파를 새

로이 연 사람)이다.

송나라 원우 갑술(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의 진영을 기리어 읊었다.

거룩하여라, 개조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어라, 저 참모습

두 번이나 오월에 가시어,

대장경을 무사히 가져오셨네.

보요라는 직함을 내리시고,

네번이나 조서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 덕을 묻거든,

밝는 달 맑은 바람과 같다 일러라.

또 금의 대정 연간(1161-1189)에 한남의 관기(管記-벼슬이름) 팽조적이 시를 지

어 남겼다.

물 구름 고요한 곳 부처님 계시는데,

더욱이 신룡이 이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것이 이와 같으랴,

불교는 처음 남쪽에서 전해 왔네.

그 발문은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가 처음으로 남월에서 대장경을 구해 돌아오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

어 조각배는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했다.

“이것은 혹시 신룡이 대장경을 이곳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드디어 주문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문득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에 수제자 홍경과 같이 연사(蓮社-절)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한남 관기 팽조적은 제(題)하다.

이 해룡왕사에는 용왕당이 있는데 자못 신령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

은 대장경을 따라와 이 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또 천성 3년 무자(928)에 묵화상이 후당에 들어가서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

며, 본조 예종 때에는 혜조국사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 갔는데 요본(遼本)대

장경 3부를 가지고 왔다. 그 한 본은 지금 정혜사에 있다.

대안2년(1086) 본조 선종 때에는 우세승통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

(천태종의 교조,관심)에 대한 책을 많이 가지고 왔다. 이밖에도 방책(方冊-서적)에 실

리지 않은 고승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며 가지고 온 것은 아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올 때 그 앞길이 양양했으니 경사로운 일이다.

기리어 읊는다.

중국과 동방은 연진(烟塵)으로 막혔는데,

녹원(鹿園-녹아원)의 학수(鶴樹-학림)는 2천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경하롭다,

동진(東震-우리나라)과 서건(西乾-인도)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된 의상전을 살펴보면,

‘의상은 영휘 초년(650)에 당나라에 가서 지엄선사를 뵈었다.’ 고 했다.

그러나 부석사 본비(本碑)에 의하면 이렇게 적혀있다.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태어나 소년시대에 출가했으며, 영휘 원년 경술(650)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가려고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 그대로 돌아왔다.

그 뒤 용삭 원년 신유(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나아가 배웠다. 총장 원년

(668)에 지엄법사가 천화(遷化-고승의 죽음)하자 함형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

와 장안 2년 임인(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의 불아를 청하던

일은 신유(661)에서 무진(668)까지의 7,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간 임진(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되었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

리천의 1주야는 인간세계의 1백세에 해당하는데,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갔던 신유

(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 고종 임진(1232)까지는 693년-571년, 다음의 730년도 60

9년-이다. 고종의 경자(124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7백년이 차며, 7일 기한이 되는 것

이다. 개경에 환도하던 지원 7년 경오(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약 천제의 말처럼 7

일 후에 천궁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가 환도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아마 진짜

불아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왕은 환도하기 전에 대궐안 제종(諸宗)의 유명한 중들을 모아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기에 정성과 성심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7일 기한이 되

어 하늘로 올라간 듯하다. 지원 21년 갑신(1284)에 국청사의 금탑을 보수했다. 이에

충렬왕은 장목왕후와 함께 묘각사에 행차하여 신도들을 모아 경하하고 찬미했다. 끝나

자 심감이 바친 불아와 낙산의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군신과 여러 신도들이 모두 함께

경배한 뒤에 금탑 안에 넣었다.

나도 또한 이 모임에 참여하여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

이는 3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일연의 제자)이 기록한다.

번호:5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5 04:22 길이:76줄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종이라고도 한다.

양나라 대동 6년 경신(540)에 즉위하였다. 백부 법흥왕의 뜻을 사모해서 한결같이 불

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도록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

이 멋스러워서 크게 신선(원화,화랑의 도)을 숭상하여 민가의 처녀중에 아름다운 자를

선발하여 원화를 삼았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려 함이었다. 이는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大要이기도했다. 이에 남모랑과교정랑

의 두원화를 뽑았는데 모여든 사람이 3,4백명이었다. 교정이 남모를 질투해서 술자리

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마시게 한후 아무도 모르게 북천으로 데리고가서 큰돌

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곳을 알지 못하므로 슬피울면서

헤어졌다.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로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부르

게했다. 이에 남모의 무리들이 듣고 그 시체를 북천 바위속에서 찾아내고는 교정랑을

죽여버렸다. 그러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제도를 폐지했다. 그후 여러해가 지났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한다고 생각한 왕은 또다시 영을내

렸다. 양가의 남자중에서 덕행이 있는자를 뽑아 그 명칭을 고쳐 화랑이라했다. 처음으

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다.그래서 명주에 비를세우

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일을 하게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五常(인,의,예,지,신) 六藝(禮,樂,射,御,書,數)와 三師(태

사,태부,태보) 六正(성신,양신,충신,지신,정신,직신)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진지왕 때에 와서 홍륜사의 중 진자가 언제나 堂의 주인인 미륵상 앞에 나가 발

원하여 맹세를 했다.

“우리 대성께서는 화랑으로 화해 이 세상에 나타나 내가 항상 수용(미륵불의얼굴)

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그 정성스러운 간절한 기원의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니, 어느날 밤 꿈속에

한 중이 나타나 말했다.

“네가 웅천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적대관계에 있었으며, 또 웅천은 백제의 구도로서 신도인

사비성 부여와 인접한 곳임을 감안하면 공주 수원사였는지 의심이다.>

진자는 꿈에서 깨자 놀라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가는데 열흘 동안 발자국마다 절

을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밖에서 복스럽고 섬세하게 생긴 한 반천(눈매가 어여쁘고

아름다운 남자)이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했다. 진자는 올라

가면서도 읍하며 말했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대접함이 이렇듯 은근한가?”

“나도 또한 서울사람입니다. 스님이 먼곳에서 오심을 보고 위로했을 따름입니다.”

잠시 후 소년은 문밖으로 나가더니 그 간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

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는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이 자기가 이곳

에 온뜻과 지난 밤의 꿈을 얘기하고는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려고 하는데 어떻겠소?”

절의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으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과 철인이 살고 있으므로 명

감(冥感)이 많다고 하니 그곳으로 가보는게 좋을게요.” 

그말을 좇아 진자가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며 말

했다.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가?”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진자가 대답하자 노인이 또 말했다.

“저번에 수원사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으면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 것인

가?” 진자는 이말을 듣고 놀라 깨달아 이내 달려서 본사로 돌아왔다. 그 후 한달이

넘어 진지왕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르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은 거짓말을 안할텐데 어찌 성 안

을 찾아보지 않았소?”

이에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았다. 그때

영묘사 동북쪽 길가 나무밑에서 파사(편안히 앉은 모양)한 소년을 만났다. 단홍(화장)

을 갖추었는데 얼굴이 수려했다. 진자는 그를 보자 놀라며 말했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이에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의 집은 어디 있으며, 성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미시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잃어 성은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

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는 화랑도들이 서로 화목하게 하였으며, 예의와 風敎가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근느 풍류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며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활르 입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해 도를 닦았는데 만년에는 그

또한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설명하는 이는 말했다.

“未와 彌는 음이 서로 같고 尸는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

운 것을 택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

뿐만 아니라 이땅에 인연이 있었으므로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을 미

시라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見朗이라하고 또

우리말로는 사여수라고 한다.

기리어 읊는다.

선화 찾는 한걸음 그 모습 쳐다보네

도처에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인데,

문득 봄은 가고 찾을 곳 없으매,

누가 알랴, 상림원(上林苑)한 대의 봄을.

번호:5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7 21:11 길이:151줄

南白月二聖, 努힐夫得과 달달朴朴

백월산 양성 성도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그산

줄기는 수백리에 연무(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는 모양)하니 참으로 큰 진산이다.’

옛 노인들은 서로 전해 말했다.

‘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팟는데, 매월 보름 전이면 달 빛이 밝

으며, 못가운데는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하게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에게 명하여 그 모양을 그려 사자를 보내

천하를 돌며 찾게 했다. 그 사자가 해동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암이 있고 산

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이 화산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

다. 그러나 그 산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므로 신발 한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발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의 이름을 백월산이라고 햇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가운데 나타났던 산 그

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

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 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미

승이었다. 또 한사람은 달달박박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이라고 불렀고, 어머

니는 범마라 했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으며 역외하상(域外遐想-속세를 초월한

높은 사상)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생의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절이름)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정신을 수련함)할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과 소불전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은 회진암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

을 양사라고도 했다. 모두 처자를 거느리고 와 살면서 산업을 경영하였으며, 서로 왕

래하며 정신을 수양하여 방외지지(方外之志-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 방외는 세상밖)

를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으나, 의식이 생각대로 생기고 저절로 배부

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한 부녀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

藏-비로사나불이 있는 功德無量 廣大莊嚴의 세계)에서 여러 부처나 앵무새 공작새와

함께 놀며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도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필연코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이제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터

인데, 이 풍진속에 파묻혀서 세속 무리들과 함께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떠나 장차 깊은 산골에 숨으려 했다. 그런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

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똑같은 꿈을 꾼지라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감탄하더니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 갔다. 박박사는 북쪽 고개

에 있는 사자암을 차지하여 판자집 8자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이라고 하고, 부득

사는 동쪽 고개의 돌 무더기 아래 물이 있는 곳에서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

방이라 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으며, 박박은

미타불(아미타불)을 경례 염송(念誦)했다.

3년이 채 못되어 경룡 3년 기유(709) 4월 8일은 성덕왕 즉위 8년이다. 바야흐로

날은 저무는데 나이 20세에 가까운 한 낭자가 매우 아름다운 얼굴에 난초와 사향의 향

기를 풍기면서 문득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며 그녀는 글을 지어 바쳤다.

갈 길은 아득한데 해지니 온 산이 저물고,

길 막히고 성은 먼데 사바이 고요하네.

오늘 밤 이 암자에 자려 하오니,

자비하신 스님이시여 노하지 마오.

박박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이곳에서 지체하지

말고, 어서 다른 데로 가보시오”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는 남암으로 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자 부

득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담연(湛然-정적의 경지, 즉 우주의 근원)함이 태허(太虛-역시 우주의 근원)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들었기로 장차 도와서 보리를 이루고자 해서일 따름입니다.”

그리고는 게(偈-불교에서 가요 성가등을 말함) 하나를 주었다.

깊은 산길 해는 저문데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松竹의 그늘은 한층 그윽하고,

골짜기의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갈 곳을 찾음이 아니라,

尊師의 뜻 인도하려 함일세.

부디 나의 청만 들어 주시고,

길손이 누군지는 묻지를 마오.

부득사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 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름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오. 더욱이 깊은 산골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가라앉

히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날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마침 산고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

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서 은근히 대했다.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 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하였다.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는데 잠시 후에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풍기면서

그 물이 금액(金液)으로 변했다. 이에 부득은 크게 놀라니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못해 부득이 그 말에 좇았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짐을 느끼게 되고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다. 그 옆을 보니 문득 연대(蓮臺)가 있었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며 말했다.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은 생각했다.

‘부득이 지난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므로 가서 비웃어 주리라.’

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금빛으로 단장된 몸에서

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자 박박은 탄식하며 말했다.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불행히도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만나지 못

한 것이 되었습니다. 큰 덕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군요.

부디 지난 날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나도 함께 도와 주셔야겠습니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말하자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이 같이 무량수를 이루니 두 부처가 엄연

히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다투어 달려와 우러러

보며 감탄하였다.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지를 설명하고는 온 몸이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천보 14년 을미(755)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여 이 일을 듣고 정유(757)에 사자를

보내어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라 했다. 광덕 2년 갑진(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므로,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당금에 모시고 액자를 <현신성도미륵지전>

이라했다. 또 아마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다. 그러나 남은 금액이 모자라 몸에

골고루 바르지 못한 탓으로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에는 <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논해 말한다.

‘낭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 섭화(攝化-중생을 자비심을 가지고 보호하여 교화함)

하였다 할만하다. 화엄경이 마야부인 선지식(善知識-부처님의 교법)이 십일지(十一地

- 十地와 等覺을 말함.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位중 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십지라

한다. 이 10위는 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住持하여 흔들리지 않고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되게 함이 땅이 만물을 낳고 키움과 같아서 地라고 한다. 등각은 보살이 수

행하는 순서로서 그 지혜가 부처님과 거의 같으므로 등각이라 한다. 여기서는 보살을

마야부인과 비교하고 있다.)에 살며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환은 여

러 방법으로 코끼리 말 인물등을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살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느끼

게 하는 것.)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각산(順産)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녀가 준

글은 슬프고 간곡하며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之趣)가 있다. 아, 만일 낭자

가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를해득할 줄 몰랐다면 과연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그 글

의 끝에는 당연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오.>라고 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은 대개 세속의 말처럼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기리어 읊는다.

푸른 빛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드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이것은 북암을 기린 글이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南窓 빈 자리에 머물고 가오.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드려워라.

이것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솔그늘 10리를 한 길로 헤매다가

밤되어 招提(중들을 쉬게 만든 절)로 중앙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 날 새려 할 때,

두 아이 낳아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의 성랑(聖娘)을 기린 것이다.

번호:5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8 22:01 길이:157줄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 때에 한기리에 희명이란 여자 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태어난 지 5

년 만에 문득 눈이 멀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

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 앞에 나가 노래를 지어 아이를 시켜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마침내 보이게 되었다.

그노래는 이러하다.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니

1천손 하나를 내어 1천눈 중 하나를 덜고

둘 다 없는 이 몸에게 하나만이라도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오시면, 그 자비 얼마나 크리오.

기리어 읊는다.

竹馬에 총생(蔥笙-파로만든 호드기)으로 맥진(陌塵-시장거리)에 뛰놀더니,

하루 아침에 두 눈 잃어버렷네.

대사의 자비로움, 눈 아니 돌렸다면

버들꽃도 못 본채 몇 사춘(社春-입춘후 다섯번째의 戊日) 지냈을까.

洛山二大聖 관음.정취,조신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

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 곳을 낙산이라 이름했다. 이는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관

세음보살이 있다는 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의 진

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의상은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새벽 일찍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神將)의 시종들이 그를 굴 속으로 안내했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또한 여

의보주 한 알을 바치니 의상이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이에 관

음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했다.

“좌상의 산 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당에 불전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

법사가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

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대나무는 즉시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인

줄을 알았다. 이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가지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떠났다.

그 후에 원효 법사가 뒤이어 와서 여기에 예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앗다고 대답했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월경때 입었던 옷)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

고 청하니 여인을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 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를

불러 말했다.

“제 (醍 -원문에 한글자가 빠져있음)화상은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는문득 숨어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으므로 그제

야 하까 만난 성녀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또 법사가 성굴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이르니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중이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더니 조사에게 말했다.

“저도 또한 고향사람입니다. 집은 명주의 경계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

사께서 후일 고향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내 집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는 총석(叢席-많은 승려들이 모여있는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

(중국 항주 염관현 진국해창원에 있었던 제안禪師)에게서 법을 얻고 회창(會昌-당나라

무종의 연호, 841-846년) 7년 정묘(847, 당나라 선종 대중원년이 맞다)에 본국으로 돌

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세워서 불교를 전했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 보름날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미티에 와서 말

했다.

“지난 날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약속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는데, 어찌 이리 늦

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들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경계로 가 그가 사는 곳

을 찾았다. 낙산 아랫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으므로, 이름을 묻자 덕기라고 했다.

그 여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 겨우 여덟살이 되자 마을 남쪽 돌다리 가

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 중에 금빛이 나느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 말을 조사에게 했다. 조사는 놀래고 기뻐하며 그 아이가 함

께 놀았다는 다리 밑으로 갔다.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었다. 꺼내보니 왼

쪽 귀가 끊어져 있고 전에 만난 중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정취보살의 불상이었다. 이

에 간자(簡子-점치는 대나무 조각)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가장

좋으므로 그 곳에 불전 3간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

그후 백여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졌으나 오직 관음,정취 두 성인

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으며, 나머지는 전부 다 타버렸다. 몽고의 병란 이후

계축 갑인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모습과 두 보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몽고 군

사가 심히 급하게 공격하므로 성이 바야흐로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주지인 선사 아행

이 은으로 만든 함에 두 보주를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고 했다. 이것을 절에 있는 중

걸승이 빼앗아 땅속 깊이 묻고 맹세했다.

‘내가 만일 이 병란에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아는 사람이 없어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

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1254) 10월 22일에 이 성은 함락되었다.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

은 살아났다.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그는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 감창사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 이녹수가 감창사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 안에 간직해 두고 교대할 때마

다 서로 이어받았다. 무오(1258) 11월에 이르자 본업의 늙은 중 지림사 주지인 대선사

각유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는 국가의 신보입니다.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중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군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 창고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명주성도 지킬 수 없사오니 마땅이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했다. 야별초 10명과 걸승이 명주성에 가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에 안치해 두었다. 그 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섬씩을 주었다.

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寺)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중 조신을

보내어 장원을 맡아 관리하도록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김혼공의 딸을 좋아하여 그

녀에게 아주 반했다. 그느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

고 남몰래 기도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 이미 배필이 생겼다. 이에 그는

또 불당에 나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옷을 입은 채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문득 김씨 낭

자가 기쁜 얼굴로 찬연계치(입을 활짝 벌리고 웃음)하여 말했다.

“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갔었습니다.

이제 동혈지우(同穴之友-부부)가 되고자 하여 왔사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년간 같이 살며 다섯 자녀까지 두었다. 집은 단지 네 벽뿐인데 粗食

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낙탁(사람의 꼴이 보잘것 없어짐, 영락)하여 식구

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

이니 갈갈이 찢어진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했다.

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15세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통곡하

며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에 이르러 길 가에 모옥

을 짓고 살았다. 그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10세된 계집아이가 이릉 보다 못해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픔을 부

르짖으며 앞에 와서 눕자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인은 눈물을 씻으며

창졸히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

끗했습니다. 한가지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으며, 작은 의복이나마 당신과 나

누어 입으면서 함께 살아온 것이 어언 50년입니다. 그동안 정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

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하겟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쇠약하여 생

기는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남의 집 곁방살이나

보잘것 없는 음식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천문 만호에 걸식하는 부끄러

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이것도 미처 돌보지

못하였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

가 있어 더욱 근심이 됩니다. 조용히 옛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왔을까요? 뭇 새가 다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행하고 그침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가겟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하늘거리고 어느덧 희뿌옇게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

두 하얗게 세고 망연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이미 괴롭게 살아감도 싫어지고,마치

한평생의 고새을 다 겪고 난 듯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사라졌다. 이

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돌아와 해현에 묻는 아이를 파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이었다. 물로 씻어서

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장원을 맡은 소임을 내놓고 사재를 기울여 정토

사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論해 말한다.

‘이 전기를 읽소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니 어찌 조신사의 꿈만 그렇겠

느냐?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속세의 즐거움만을 알고서 기뻐하며 애쓰고 있으나 이것은

단지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이에 시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즐거운 일 마음에 맞아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어느덧 남모르게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梁-부귀와 공명이 더없음)이 다 익길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임을 깨달을 것을

修身의 잘잘못은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만 감아 청량(淸凉-청량산,)에 이르리

번호:5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09 21:35 길이:90줄

어산불영(魚山佛影-어산에 있는 부처님의 영상)

고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만어산(萬漁山)은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이나, 그 곁에 가라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곧 수로왕

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속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

다. 또 만어산에는 다섯명의 나찰녀(사람을 잡아먹는 악귀)가 있었는데 독룡과 왕래하

며 사귀었다. 그런 까닭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이나 오곡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것을 금해 보려고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부처를 청하여 설

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는 5戒(살생,도적질,음행,거짓말,음주를 금함)를 받아 그후로

는 재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화하여 고을 속에 돌이 가

득차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를 냈다’

또 살펴보면 대정 12년 경자(1180)는 바로 고려 명종 11년인데 이 때 만어사를

세웠다. 동량(불교에서의 고승) 보림이 위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서 말하기를,

‘이 산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 가라국 부처의 영상과 서로 같은 것 셋이 있다

.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 경계의 옥지인데 여기에도 또한 독룡이 살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운기(雲氣)가 일어나 산마루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속

에서 음악 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항상 물이

고여 마르지 않는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은 모두 보림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참례하고 보니 분명히 공경하고 믿

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고을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

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이고, 두 번째는 멀리서 보면 나타났다가 가까이 보면 보

이지 않으므로, 혹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것이다. 북천축의 글

을 다음에 자세히 갖추어 기록했다.

가자함의 관불삼매경 제 7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처가 야건가라국 고선산, 첨복화림 독룡의 옆이요, 청련화천의 북쪽인 나찰혈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 남쪽에 이르렀다. 이 때 그 구멍에는 나찰 다섯이 있어서 이

것이 女龍으로 변하여 독룡과 사귀고 있었다. 이에 독룡이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은

못된 행동을 하니 기근과 역질이 4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

지(천신과 지지)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그 때 총명하고 지혜

가 많은 범지(바라문)가 대왕께 아뢰기를,

“가비라국 정반왕의 왕자가 지금 도를 이루어 호를 석가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 예를 하면서 말했다.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어찌하여 이나라에는 오시지 않으십니까?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에게 명하여 六神通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

라왕의 불파부제의 청을 들엊기로 했다. 그 때 세존의 이마에서 빛이 솟아나와 1만이

나 되는 여러 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과 나찰녀는 온 몸을 땅에

던져 부처에게 戒룰 벋가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三歸五戒를 설법했

다. 다 듣고 난 용왕은 꿇어앉아 합장하고 세존이 항상 그곳에 머물기를 청했다.

<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아니 계시면 저에게 또 악한 마음이 생길 것이므로 아

누보리(일체의 것을 아는 경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범천왕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하고 청했다.

“파가파(석가)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들을 위하시고, 이 작은 용만을

위하지 마옵소서”

그러자 百千 梵王들도 모두 이와 같은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를 내어 여

래에게 바치자 부처는 용왕에게 말했다.

“이 대는 나에게 필요 없ᄋ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이 있는 석굴을 가져다가 나

에게 시주하도록 하라.”

이말에 용왕은 기뻐했다고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외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속에서 1500년을 지내겟다.”

말을 마치자 부처가 몸을 솟구쳐 돌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지므로 사람들이 그 용모를 볼수 있었다. 모든 용이 다 나타나고,부처는 돌속에

있으면서 밖으로 빛을 나타냈다. 이때 모든 용은 합장하면서 기뻐하여 그곳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부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세존이 결가부좌하고 석벽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때 멀리서 바라보면 보였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않

았다. 諸天이 부처의 영상을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했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부처가 바위 위를 밟으니 문득 금옥의 소리가 났다.’

고승전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혜원(중국 동진때의 고승)이 들으니 천축국에 부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

날에 용을 위해서 남겼던 부처의 영상으로, 북천국 월지국 나갈가성의 남쪽 古仙人의

석실속에 있었다 한다.’

또 법현의 서역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갈국의 국경에 다다르면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인도의 거리단위)되는

곳에 석실이 있는데, 그 곳은 박산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10여

보 떨어져 바라보면 부처의 참모습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

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의 왕들이 화공을 보내어 이것을 모사하려 했지만 비슷하게

도 그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로는 현겁(賢劫-3劫의 하나)의 1천불이 모두 다

마땅히 이곳에 영상을 남길것이다. 그 영상의 서쪽 1백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

에 살 적에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

[A 성함(星函)의 서역기 제 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젖을 바

쳤었다. 어느 날 잘못하는 바람에 꾸지람을 듣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

는데,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는 솔도파(사리나 경전등을 안치하는 축조물)에 수기(授記)하였다.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주시오.>

마침내 석벽에 가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그리고 대용왕이 되어 이 굴에 살면서 악

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가 이것을 보자 신통력을 내어서 이곳에 이르렀다. 이 용이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지고, 불살계(不殺戒)를 받으면서 청하였다.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항상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열반)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하여 내 영상을 남겨둘 것

이니 네가 혹여 독하고 분한 마음이 일거든 꼭 내 영상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독한 마

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부처는 이내 석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보면 즉시 나타나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위에 발자국을 내어 칠보로 삼았다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으로서 그 내용에는 대략 위와 같았다.

해동 사람들은 이 산을 아나사라고 이름하였으나 마땅히 마나사라고 해야 할 것

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번호:6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0 22:09 길이:125줄

대산 오만진신(臺山 五萬眞身)

산중의 고전을 살펴보면 이런 말이 있다.

“이산은 진성, 즉 문수보살이 살던 곳이라고 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때인 정

관 10년 병신(636)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 못가의 돌부터 문수보살이 있는 곳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했더니, 문득 꿈에 부처가 네 귀(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이 깬뒤

그 네 귀의 글을 기억할 수는 있었지만 모두가 범어이므로 그 뜻을 전혀 알수가 없었

다. 이튿날 아침 문득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

리때 하나, 부처의 머리뼈 한조각을 가지고 부처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어찌하여 무료

(無聊-수심에 쌓여 있는 것)하게 있는가고 물었다. 이에 법사가 대답했다.

“꿈에 네 귀의 게를 받았으나 범어이므로 풀지 못해 그럽니다.”

그러자 중이 게를 듣더니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다거야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것이 없다는 말이요, 낭가사가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알았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란 노사나불(부처의 진신에 대한 존칭)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이어 자기가 가지고 온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며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 석가세존이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보관해 가지십시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대의 조국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문수보살 1만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돌아가거든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이내 사라졌다. 법사는 보살의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는 본국으로 돌

아오려 했다. 그런데 태화지의 용이 현신하여 제를 청하고 7일동안 공양을 하더니 법

사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게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하면서 다시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이일은 별

전에 자세히 적혀 있다. 법사는 정관 17년(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했다. 그러나 3일동안이나 계속 날이 어둡고 그늘이 져서 보지 못하고 돌

아갔으며, 다시 원녕사에 가서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 보살이 법사에게 말

했다.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가라.”

법사가 그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가 바로 이곳이다. 이거도 역시 별전에

실려있다.

그후 두타(중의 칭호)신의는 범일대사의 문인으로서 이 산을 찾아와 자장법사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세상을 뜬 후로는 암자도 역시 오랫동안 헐어

져 있었다. 그리고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지금의 월정사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때 정신대왕의 태자 보천,효명 두형제에 이르자 세헌

각간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기 천명의 무리를 거느리

고 성오평에 닿았다. 여러날 유람하다가 갑자기 어느날 저녁에 두형제가 속세를 벗어

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가니 그의

시위들은 갈바를 알지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자 문득 푸른 연꽃이 땅위에 피므로 형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이곳을 보천암이라 했다.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6백여보를 가니 북쪽 대

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효명이 또한 암자를 짓고 살

면서 저마다 부지런히 업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나란히 다서 봉우리로 참례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 만월산에는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나타나 있으며, 서쪽 대 장령사나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대세지

보살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나한이

나타나 있으며, 중앙의 대 풍로산은 혹은 지로산이라 하는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보살의 진신에 일일이 참례

했다.

매일 이른 아침이면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인 진여원에 이르러 36가지의 모양으

로 변하여 나타났다. 어느 때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나타났고, 어느 때는 보주 모양

이었으며, 혹은 부처의 눈모양이기도 하고, 혹은 손또는 보탑 모양이기도 했으며, 혹

은 만불두 모양이 되기도 하거나, 만등(萬燈-부처에게 공양드리기 위한 조명기구)모양

이 되거나, 혹은 금교 모양이 되고, 혹은 금고(金鼓-여러사람을 부를때 사용하는 악기)

모양, 혹은 금종 모양, 혹은 신통 모양, 혹은 금루 모양, 혹은 금륜(金輪)모양 혹은

금강저(金剛杵-승려들이 授法할때 쓰는 도구)모양,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

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오색 광명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의

모양이거나, 혹은 길상초(吉祥草-풀이름)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모양, 혹은 금전(金

田-절)모양으로도 되고, 은전(銀田-도량)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발 모양으로,

혹은 뇌전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이 솟아나

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모양으로, 혹은 금오(金烏)모양으로, 혹은 말이 사자

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었으며, 혹은 닭이 봉을 낳는 모양으로, 혹은 청룡의 모양으로,

혹은 백상의 모양으로 혹은 까치 모양이거나 혹은 소가 사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었

으며, 혹은 유저(遊猪)모양으로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모양으로도 나타나기도 하였다.

두 태자는 항상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기 자

기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의 아우가 왕과 왕위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명의 장군을 보내어 산에 가서 이들 두 태자를 맞아 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먼저 효

명의 암자 앞에 닿아 만세를 불렀다. 그때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서 노부(임금의 儀仗)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

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은 울며 이를 사양했으므로 효명을 받들어 돌아와서 왕위에 오

르게 했다. 그는 여러해 나라를 다스렸다.

신룡 원년 을사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을 고쳐 세웠다. 이때 왕은 배관들을

친히 데리고 산에 와서 전당을 세우고, 또한 문수보살의 소상을 만들어서 당에 모셧다.

이 곳에 지식, 영변등 다섯명으로 하여금 화엄경을 오래 전독(轉讀)하게 하고, 화엄사

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비용을 대었는데,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으

로부터 창조(倉租) 1백석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도록 규칙으로 정했으며, 진여원

에서 서쪽으로 6천보쯤 되는 모니점 고이현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과 밤

나무밭 6결, 좌위(坐位) 2결을 내어서 장사를 세웠다.

보천은 항상 그 영동의 물을 길어다가 마셨으므로 만년에는 몸이 허공을 날아서

유사강 밖 울진국 장천굴에 이르러 그 곳에 머물어 수구다라니경을 외는 것으로써 밤

낮의 과업을 삼았다. 장천굴의 신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다.

“내 이굴의 신이 된지 이미 2천년이나 되었으나 오늘 처음으로 수구다라니경의

진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은 보살계를 받기를 청했다. 계를 받고 난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 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

로 돌아갔다. 이 곳에서 또 50년 동안이나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의 신이 三時로

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성인이 사는 다섯가지 천국)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바쳤으며

성인 40명은 10척위의 하늘을 날면서 그를 항상 호위해 주었으며, 그의 지팡이는 하루

에 세번씩 소리를 내며 방을 세바퀴씩 돌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

했다. 어느 때는 문수보살이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부처가 제자들의 성불

할것을 예언함)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원적(입적)하는 날, 후에 나라를 이롭게 할일

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서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의 큰 줄기인데, 각대에는 항상 진신이 있는 곳이다. 靑色(東)

방위인 동대 북각 아래와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을 두어 원상의 관

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관음보살상을 그려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8권의 金經

(나라를 수호하는 경전)과 인왕반야경,천수주를 읽고, 밤에는 관음경 예참(禮讖-삼보

를 예배하고 그 경을 찬탄함)을 염송하고 그곳을 원통사라 일컬으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 남쪽 면에는 지장방을 두어 원상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

린 8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지장보살을모셔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

과 금강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점찰경 예참을 염송하고 그 곳을 금강사라 일컬으라.

백색방위인 서대 남쪽면에는 미타방을 두어 원상 무량수불과 흰바탕에 그린 무량

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을 모시게 하라. 여기는 복전승 5명으로 하여

금 낮에는 8권의 法華를 읽고, 밤에는 아미타불 예참을 염송하며 수정사라고 일컬으라.

검은빛 방위인 북대 남쪽면에는 나한당을 두어 원상 석가불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나한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을 두고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게하고, 밤에는 열반경 예참을 염송케 하며 백련사라 일컬으라.

황색 방위인 중대의 진여원에는 가운데에 니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

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36문수보살

을 모시고,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화엄경과 6백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문수

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그 곳을 화엄사라 일컬으라. 보천암을 고쳐 세워서 화장사라 하

고, 원상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문장경을 읽

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염송케 할 것이며, 매년 백일 동안 화엄회를 베풀고 그 곳을

법륜사라 일컬으라. 이 화장사를 5대사의 본사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에게 명하여 향화를 길이 계속하게 하라. 그리하면 국왕은 오래사실 것이며.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

갑사를 배치하여 사의 도회로 삼게하라. 여기에는 복전승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

엄신중의 예참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도내 8주

의 조세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일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의 임금이 잊

지 않고 준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고 하였다.

번호:6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2 22:50 길이:58줄

명주 오대산 보즐도(寶叱徒) 태자 傳記

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즐도-보천- 는 아우 효명태자와 함께 하서부의 세헌각간의

집에 이르러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대령을 넘어 각기 1천명씩 거느리고 성오평에서

며칠을 놀다가 태화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왜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무리들 중에서 시위하는 자들은 그들을 찾지 못한 채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형인 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의 진여원 자리 아래 산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

고 그 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형제는 부처님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햇으며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에 나가서 공경하고 예배했다. 청색 방위인 동쪽대

의 만월형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 1만이 항상 있었으며, 적색 방위인 남쪽 대

의 기린산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항상 있었고, 또한 백색방

위인 서쪽 대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이 항상 있었

으며, 흑색방위인 북쪽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 대아라한이 항

상 있었다. 또 황색 방위인 중앙대의 풍로산은 한편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있다. 그리고 진여원에는 문수보살

이 매일 이른 아침에 36형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매일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1만 진신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때 정신태자의 아무 부군이 서울에 있어 왕위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했다. 나라

사람들은 네 명의 장군을 보내니 그들은 오대산에 이르러 효명태자를 만나매 만세를

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7야 동안 빛을 발

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려 했다. 그러나 보즐도 태자는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

아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20여년 있었다. 신룡 원년(705) 3월 8일에 처음 진

여원을 세웠다 한다.

보즐도 태자는 언제나 골짜기의 신령한 물을 마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몸이 공중

에 떠서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다 다시 오대산 신성굴

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인데 각

대에는 항상 진신이 있다고 한다.

대산 월정사, 오류성중(本物을 따라 다니는 다섯 성자)

절안에 전해 오는 고기를 살펴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자장법사는 처음 오대산에

이르러 진신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을 짓고 살았으나 7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 그 후에 신효거사라는 이가 있었으며, 혹은

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했다. 그의 집은 공주에 있었는데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여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기 위해 돌

아다녔다.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자 활로 쏘았더니 한 마리의 깃 하나가 떨어졌을

뿐, 학은 다 날아갔다. 거사는 그 깃을 주워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들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그래서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드렸다.

그후 그는 중이 되었는데,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효가원이다.

거사가 경주 경계에서 하솔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들을 보았더니 그제야

사람들이 모두 인간의 평상이었다. 이에 그곳에 머물러 살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

은 부인을 만나게 살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살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이내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그것이 관음보살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즉시 성오평을 지나서 자장법사가 처음 모옥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잠시 후에

다섯 명의 중이 오더니 말했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자 중이 또 말했다.

“그대가 주워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내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곳에 갖다 대니 꼭 맞았는데 그것

이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다섯 성중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에는 모옥을 지었으며, 다음에는 신효거사가 와서

살았고,그 다음에는 범일의 문인 신의 두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다. 후에 또 수

다사의 장로 유연이 와서 살았다. 이로 하여 점점 큰 절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다섯

성중과 9층으로 된 석탑은 모두 성자의 자취다.

상지자(相地者-지관)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 중에서 이 곳이 가장 좋은 곳으로 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번호:6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15 00:05 길이:139줄

남월산

이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금당주 미륵존상화광

의 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개원 7년 기미(719) 2월15일에 중아찬 전망성이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

길간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 부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감사사의 돌미륵 하나를

만들고, 이에 겸하여 개원 이찬과 아우 간성 소사 현도사, 누이 고파리, 전처 고노리

후처 아호리와 서형(庶兄) 급한 일길찬, 일당 살찬, 총민 대사와 누이동생 수힐매 등

에게까지도 미치게 하기 위해 이 선을 베풀었다. 돌아가신 어머리 관초리 부인이 고인

이 되자 동해유우변산야라 했다.’

미타불화광 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중아찬 김지전은 일찍이 상의봉어(尙衣奉御-관직명)와 집사시랑으로 있다가 나

이 67세에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학로 물러남)하여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國主 대

왕과 이찬 개원,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 양

성, 사문 현도, 죽은 아내 고로리,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 또 아내 아호리 등을 위해

서 감산의 장전을 내놓고 절을 세웠다. 또 석미륵 하나를 만들어서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받들었는데, 그가 고인이 되므로 동해유우변산야라 했다.’

천룡사

東都(경주)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이를 사람들은 고위산

이라부른다. 산의 남쪽에는 절이 있는데 속칭 고사 혹은 천룡사라고 한다.

토론삼한집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계림에는 두 줄기의 客水(다른곳에서 흘러온 물)와 한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

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에 이른다.’

또 민가에서는 다음과 같ᄋ 전해지고 있다.

‘역수는 이 주의 남쪽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시내인데 이 물은 그 근원이 천

룡사이다. 중국에서 온 사자 악붕귀가 와서 보더니 말하기를 <이절을 파괴하면 곧 나

라가 망할 것이다.> 라 했다.’

또 서로 전하여 말해 오기를

옛날 단월(시주하는 사람)에게 두딸이 있었는데 이름을 천녀,용녀라 하였다. 부

모는 그 두 딸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을 따서 천룡사라 이름했다.’

이곳은 경지가 이상하여, 불도를 닦는 도량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폐허

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젖먹여 기른 최은함의 아들은이름이

승로였다. 승로는 숙을 낳고 숙은 시중 제안을 낳았는데, 제안이 이 절을 중수하여 없

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그리고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여,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다시

신서와 원문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들을 많이 나타내었다.

그 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주국 최제안은 쓴다. 경주 고위산의 천룡사

는 쇠잔하여 파괴된지 몇 해가 지났다.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히 성수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낭각과 방사,주고를 모두 이룩하고, 또 석조

불과 이소불상 몇 구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새로이 설치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수리하여 세웠으므로 관가에서 절의 주지를 정해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주지를 교대할 경우는 도량의 중들이 안심할 수가 없었다. 희사한 토

지로써 사원의 충족함을 보면, 팔공산의 지장사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백결이었

고, 비슬산에 있는 도선사는 20결이었으며, 서경 사면에 있는 산사들도 각각 20결씩이

었는데, 모두 유직 무직을 막론하고 모름지기 계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서 절의 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수도함을 상례로 삼았다.

제자 제안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또한 절의 중들 중에

서 재주와 덕이 모두 뛰어난 고승으로 동량이 될만한 사람을 뽑아서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수도하게 하려 한다. 이를 문자로 갖추어 자세히 기록하여 강사(剛司-중의 직명)

에게 맡겨 두었으니, 지금 맡고 있는 주지를 처음으로 삼아 유수관의 공문을 받아 도

량의 여러 승려들에게 이르 보일 것이며, 여러 승려들은 각자 모두들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중희 9년 6월 어느날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했다.’

살펴보건대 중희는 거란 홍종의 연호이며, 본조 정종 7년인 경진(1040)이다.

무장사 미타전

서울(경주)의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암곡촌 북쪽에 무장사가 있었다. 신라 제

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대아간 효양,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는 너무도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듯하다. 그 곳은 깊숙

하고 어두침침하므로 저절로 허백(虛白-마음이 비면 절로 순백이 일어남)이 생길 것이

므로, 참으로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윗쪽으로는 아미

타의 고전이 있다. 곧 소성대왕의 비 계화황후가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므로 왕후는

근심이 가득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극도의 슬픔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상했

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에 아미

타라는 대성이 있는데 지성으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맞이해 준다는 말을 듣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자신을 속이겠는가!”

하고는, 아에 육의(六衣-왕후가 입던 여러가지 옷)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9부

(九府-재화를 맡은 관청)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모두 내어 名匠들을 불러들여 아미

타불의 상 1구를 만들게 하였으며 아울러 신중(神衆-신의무리)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먼저 이 절에는 한 노승이 있었다. 어느 날 꿈에 진인이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노승은,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않고 마음 속에 숨겨 두고 있었다. 그

런데, 그 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시냇물을 물살이 급해서 工人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으

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

을 얻게 되어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도 같았다. 그래서 보는 이들

은 깜짝 놀라며 좋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近古에 와서 미타전은 허물어졌으나

절만은 아직도 홀로 남아있다.

세간에 전하는 말에는,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무장사라 했다.’

고도 한다.

백엄사 석탑사리

개운 3년 병오(946) 10월 29일 강주계(진주) 임도대감주첩에 이렇게 적혀있다.

‘선종의 백엄사는 초팔현에 있으며, 절의 중 간유 상좌는 나이 39세라 했다. 절

을 처음 세운 때는 알 수 없다.’ 고 했다.

그러나 고전에는 이렇다.

‘전대인 신라 때에 북택청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지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헐

려 폐지되었다가 지난 병인년 중에 사목곡 양부 화상이 고쳐 지어 그곳의 주지가 되었

다가 정축(103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에 희양산의 긍양화상이 와서 10년 동안 살

다가 을미년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탁 화상이 남원 백암수에서 이 절로 와 전에 정한 법대로 주지가 되었다.

또 함웅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 석수림이 절의 상규 10조를

정했다. 또 새로이 5층 석탑을 세워서 진신 불사리 42알을 모셨다. 또 사재로 寶를 세

워서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이었던 엄흔,백흔의

두 명신과 근악 등 3위 앞에 보를 모아 공양할 일, 금당 약사여래 앞의 나무 주발에

매달 초하룻날 공양미를 갈아 놓을 일 등을 정했다. 이하 조목은 기록하지 않는다.'

영취사

절의 고기에 이런 기사가 있다.

'신라 진골 제 31대 신문왕 때인 영순 2년(683)에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 온천에

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쉬었다. 문득 한 사람이 매을

놓아 꿩을 쫓으니, 꿩은 날아서 금악을 넘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방울 소리

를 듣고서 찾아 굴정현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우물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는데 매도 또한 측은히 여겨서 인지 감히 꿩을 낚아채려 하지 않았다. 공이 이

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았더니 가히 절을 세움직하다고 했

다.

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뇌어 그 현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취사라 했다.'

유덕사

신라 대부각간 취유덕이 자기의 개인 집을 내놓아 절을 삼고 이름하여 유덕사라

했다. 그의 원손 삼한공신 최언위가 유덕의 진영을 이곳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

다고 한다.

오대산 문수사 石塔記

뜰가의 석탑은 대개 신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그 제작기법은 비록 순박하여 정

교하지는 못하지만 자못 영검이 있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여러 노

인들에게 들은 한 가지만 기록해 둔다.

'옛날 연곡현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때 문득 탑

하나가 배를 따라 오니, 그 그림자를 본 물고기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문에

어부는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여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림자를 따라서 찾

아가니 이 탑이 있었다. 이에 그 탑을 도끼로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

이가 모두 떨어진 것이 이 까닭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자 놀라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그 탑의 위치가 동쪽

에서 약간 당겨서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겨, 이에 현판을 쳐다보니 이렇게

씌여 있었다.

'비구인 처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20여

년 동안은 잠잠하게 아무 영검이 없었다. 일자(日者-지관)가 터를 구하여 이곳에 와서

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자리가 아닌데 어찌하여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

가?>하였다. 이에 중들이 깨닫고 다시 옛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

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의 위신이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로베 함이 이처럼 빠른 것을 보고서 어찌 불자로서 잠잠히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때는 정풍 원년 병자(1156) 10월의 일인데 백운자(일연의 제자)는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