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번역본 4권-해제 2002/08/31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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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제 4 권

의해(義解) 제 5

원광서학(圓光西學)

당 속고승전 제 13권에 실려 있다.

신라 황룡사의 중 원광의 속성은 박씨이다. 본디 변한,진한,마한의 삼한에 살았

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에 살아 조상의 풍습이 오래 계승되어

도량이 넓고 컸으며 또한 글을 즐겨 읽었고, 현유(玄儒-현학과 유학, 현학은 노장의

학문, 유학은 공맹의 학문)를 두루 섭렵하여 배우기도 했으며, 자사(子史-諸子의 書

와 史記)도 연구하니 그 문명이 삼한에 크게 크게 떨쳤다. 그러나 중국의 폭넓은 학문

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중국으로 유학하기로 작정했다. 그리

하여 배를 타고 금릉(중국 남경)으로 건너가니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때는 陳나라

시대로서 문명국이라 일컬었다. 그러므로 그전에 의심스러웠던 점들을 묻고 道를 물어

서 그 뜻을 해득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로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간의 전적을 읽었기

대문에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과 같았는데, 불교의 진리를 깨닫자 이전 것은 한낱

지푸라기와 같이 여겨졌다. 명교(名敎-불교이외의 다른 교리)를 헛되이 찾은 것은 생

애에 지극한 두려움이 된다 하여 이에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중이 되어 곧 구족계를 받고, 강석을 두루 찾아 좋은 도리를 모두 배웠

으며, 미묘한 글들을 해득하게 되어 세월을 헛되이 보냄이 없었다. 그런 중에 성실(경

전의 이름),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쌓아 간직하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연구했다. 나

중에는 또 오나라 호구산에 들어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랐으며 각관(覺觀)을 경계하

여 잊음이 없으니 중의 무리가 구름같이 임천에 모였다. 아울러 4아함경을 종합하여

읽으매 그 공효(功效)가 8정에 들어갔으며,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어그러짐이 추호도 없었다. 본래 품었던 마음과 잘 맞았으므로 드디어 평생을 이 곳에

서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를 단절하고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면

서 생각을 청소(하늘, 즉 세상밖)에 두고 영원히 속세를 사절했다.

이때 어떤 신사(信士)가 산밑에 살고 있어서 원광에게 와 강의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원광은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랐다. 처음 성실론을 말하고 나중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해석이

뛰어나고 명철하여 가문(嘉聞-좋은 명예)을 얻었으며, 또 아름다운 수사로 엮어내니

듣는 자가 모두 기뻐하며 모든 거에 흡족해 하였다.

이로 하여 예전의 법에 따라 중생을 계도하고 교화함을 임무로 삼으니, 법륜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언제나 일순에 강호(江湖-세상)를 불법으로 기울게 하였다. 비록

이역에서의 전교(傳敎)이지만 도에 묻혀 싫어하고 꺼림이 없는 탓에 명망이 널리 퍼져

영표(嶺表-중국 남방)에까지 퍼졌다. 이에 가시밭을 헤치며 바랑을 매고 찾아오는 사

람이 마치 고기비늘처럼 잇달았다. 때는 마침 수나라 문제가 천하를 다스렸고 그 위엄

은 남국(南國-陣나라)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후 진나라의 역수(曆數-운수)가 다해 수나라 군사들이 양도(楊都-진나라 서울)

에까지 들어가니 원광도 마침내 난병에 잡혀 바야흐로 살해되려는 참이었다. 이 때 수

의 대장이 절의 탑이 불타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 구하려 했다. 다가가니 불타던 광경

은 온 데 간 데 없고 단지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된 채 죽음을 당하려 할 따름이었다.

이상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긴 대장은 즉시 그의 결박을 풀고 놓아보냈다. 위기에 부딪

쳤을 때 원광이 영감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학문이 오월에서 통달하였으나 문득 중국의 북쪽 지방인 주와 秦의 문화

를 보고자 하여 개황 9년(589)에 수나라의 서울로 유학 갔다. 때는 마침 불법의 초회

(初會)를 맞아 섭론(攝論-불교의 종파)이 비로소 일어나니 文言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미서(黴緖-경전의 미묘한 실마리)를 떨치게 했다. 또 혜해(慧解-지혜의 작용으로 법을

잘 해득함)를 달려 그 이름을 수나라 서울에 떨쳤으며 이제 공업이 이루어지니 신라로

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황제

에게 돌려보내 주기를 자주 청하였다. 이에 수나라 황제는 칙령을 내려 그를 후하게

위로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수년만에 돌아오자 노소가 서로 기뻐했다.

신라왕 김씨(진평왕)는 그를 만나고는 공경하며 성인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천성

이 허휴하고 정이 많아 범애(汎愛-박애)에 이르렀으며 말할 때에는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고, 결코 노기를 나타냄이 없었다.

전표(중국과의 외교문서)나 계서(啓書)등 오가는 國命은 모두 그에 의하여 쓰여

졌다. 일우(一隅 – 온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그에게 맡겼으며 道로 교

화하는 일을 물었다.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한 사람과 달랐어도 실제는 중국의 문물을

익혀 돌아옴은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기회를 보아 훈계를 베풀었으니 오늘에까지 그

모범이 되고 있다.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가니 왕이 손수 의복과

약,음식을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혼자서만 복을 받으

려 했다니 그 감복하고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려 하자 왕은 친히 그

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것을 물으니 징상(徵祥)을 남겨 바다

구석에까지 미쳤다.

신라 건복 58년(건복은 진평왕의 연호로 49년에서 그쳤다.)에 몸이 약간 불편함

을 느꼈다. 그후 7일이 지나 간절한 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룡사 안에 단정히 앉

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 99세로 때는 당나라 정관 4년이었다. 임종할 때 절의 동북

쪽 허공에 으악 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안에 가득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들

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겼으며 그의 영감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교외에 장사

지내니 나라에서 우의(羽儀-의식때 장식으로 쓰던 새의 깃)와 장구를 내려 임금의 장

례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 후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을 때 세간에 퍼진 말로,

‘복있는 사람의 묘에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여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벼락이 사

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 일로 인해 평소 그를 공경하지 않던 이들도 그를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의 제자 원안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기를 좋

아하였으며 그윽한 곳에서 도를 구하면서 스승을 앙모했다. 이에 마침내 북으로는 구

도(九都-고구려의 옛수도)로 가고, 동으로는 불내(不耐-동예의 옛땅)를 보고, 또 서로

북쪽 북쪽 중국인 연과 위로 갔으며, 후로는 장안에까지 이르렀다. 때문에 각 지방의

풍속을 자세히 알았으며, 여러 가지 경론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익히고 미세한 뜻

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야 심학(心學-불교)에 귀의했는데 광진(光塵-세속에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계도하는 것)하는 자취가 높았다. 장안의 절에 있을 때 처음으로 도

가 높다고 소문이 나자 특진 소우(簫瑀-사람이름)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 땅에 지은

진량사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복 등 네가지를 공급하는 방법)의 공급이 6시(하루)

에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이렇게 말하여 기록했다.

‘본국의 임금이 병이 났는데 의원이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어서 원광을 청해 궁중

에 들여 별성(別省)에 있게 했다. 매일 밤 두 시간씩이나 심오한 법을 말하며 계를 받

게 하여 참회케 하더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날 초저녁 원광의 머리에 금빛이 찬

란하고 일륜의 상이 그의 몸을 따라다님을 왕이 보았다. 왕후며 궁녀들도 이를 보았다.

이후 더욱 승심(勝心-뛰어난 행실을 닦는 마음)을 발하여 원광을 병실에 머물게 하니

오래지 않아 병이 드디어 나았다. 원광은 진한과 마한에 정법(正法-부처의 교법)을 널

리 펴고 해마다 두 차례씩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했다. 또 보시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데 충당했으므로 남은 것은 오직 가사와 바리때 뿐이었다.’

또 동경(경주)의 안일호장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에 원광법사전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적혀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왕경(경주)사람이다. 중이 되자 처음에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이 되자 한가이 지내면서 수도하려고 삼기산에 홀로 살았다.

그후 4년이 지나자 한 중이 와서 가까운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그는 주술을 배우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밤 법사가 혼자

앉아 불경을 외는데 문득 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의 수행은 장하고 훌륭하십니다. 대체로 수행하는 자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이는 드뭅니다. 지금 이웃의 중을 보니 주술을 성급히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오히려 다른 이의 정념조차 괴롭히니 그가 거주하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므로 지날 때마다 매양 미운 생각이 날 지경입니다. 나를

위해 법사가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해주십시오. 만일 그가 그

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내 문득 죄업을 저질를는지도 모릅니다.”

이에 이튿날 법사가 찾아가 말했다.

“어젯밤 내가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중이 대답했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악귀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의 말에 근심

하시오?”

그날 밤에 또 신이 나타나 말했다.

“지난 밤 내가 한 말에 중이 무어라 대답했습니까?”

신이 노여워 할까 두려워 법사가 말했다.

“아직 말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이에 내 다 들었는데 어찌하여 법사는 말을 꾸미십니까? 이제 그대는 잠자코 내

하는 것만 보십시오.”

신은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밤중이 되어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법사

가 그 곳에 가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또 신이 나타나 말했다.

“법사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심히 놀랍고 두렵습니다.”

“내 나이 거의 3천세에 이르고 神術 또한 무한하지요. 이런 일이야 지극히 작은

일인데 무엇이 놀랄 게 있겠습니까. 나는 앞으로의 일도 모르는게 없으며 온 천하의

일에 다 통달해 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법사가 오직 이 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신

을 이롭게는 하겠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니, 이제 높은 이름을 내지

못한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취하

여 이 나라의 혼미한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 하지 않습니까?”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가 멀

리 막혀 있으므로 스스로 가지 못할 따름입니다.”

법사가 대답하자 신은 중국으로 가는 길과 여행에 필요한 사항을 자세히 일러 주

었다. 법사는 그에 의해 중국에 갈 수 있었으며 11년을 그 곳에 머무르며 삼장에 널리

통달하였고, 유교의 학술도 아울러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660)에 법사는 행장을 갖춰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

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신께 감사를 드리고자 법사는 전에 거주했었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이 되자 역시 신이 나타나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해륙의 먼 노정에 왕복이 어떠하였습니까?”

“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 또한 스님에게 계를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그리고 법사는 청했다.

“신의 진용을 뵐 수 있습니까?”

“만일 법사가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십시오.”

이튿날 아침이 되어 법사가 동쪽 하늘을 보니 커다란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이 되자 신이 나타나 또 물었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습니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 때문에 삼기산을 속칭 비장산이라고도 한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여도 무상의 害는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

로 얼마 후에 그 고개에 사신(捨身-자기몸을 버림)할 것입니다. 그러니 법사는 거기

와서 영원히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십시오.”

그리고 신은 그 날짜를 일러 주었다.

약속한 날이 되자 법사는 그 곳에 갔다.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옻칠한 것처럼 검

게 변해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기리기만 하더니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때 신라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

으로 모시자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범하

였다. 이에 왕은 몹시 걱정하였고 수나라(당나라)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걸병표(乞兵表-구원병을 청하는글)를 짓게 했다. 그 글을 본 수나라 황제는 친히 30만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쳤다. 이로 하여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함을 세상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명활성 서쪽에 장사했다. 또 삼국

사 열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귀산이란 어진 선비는 사량부 사람인데 한 마을의 취향

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들과 교유하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 처신하지 않는

다면 필경 모욕당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 도를 묻지

않겠는가.”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

은 찾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속사(俗士)는 우매하여 아는 바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주시어 평생의

지표가 되게 해주십시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는데 그 조항이 열 가지가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남의 신

하요 자식일 것이므로 필경 이르 다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에는 5계가 있다

.

첫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요,셋

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일이요,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을 것이요,다섯

째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는 일이니,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여서

는 아니 되느니라.”

귀산과 그의 친구는 말했다.

“다른 말씀은 알아듣겠습니다만, 다섯 번째의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말

씀만은 아직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재일(매월 8,14,15,23,29,30일)과 봄 여름에는 죽이지 않는것인데 이는 시기

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닭,개등의 가축을 죽이지 말며, 고기가 한점도 없는 細物을

죽여서도 아니되는 것이니, 이것은 物을 가리는 것이다. 이도 또한 소용될 만큼만 죽

이지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이다.”

“지금부터는 이 말씀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하고 둘은 말하였다. 그 후 두사람은 전쟁에 나갔는데 모두 나라에 큰공을 세웠다.

또 건복 30년 계유(613)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으로 왕세의가 왔다. 이에 황룡사

의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 불경을 강의했는데, 이때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논평하여 말한다.

“원종(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킨 후 비로소 진량(津梁-불교의 토대)이 설치되었지

만 아직 당오(堂奧-진리의 경지)에는 도달함이 없엇다. 그리하여 마땅히 귀계멸참(歸

戒滅懺-불교에 귀의하는 것)의 법으로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광은 자신이 살던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법회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단)를 두고 이것을 상규로 삼았다. 이때 어떤 여승이 시주하다 밭을 점찰보에

바쳤는데, 지금의 동평군에 있는 밭 100결이 바로 이것으로 그때의 기록대장이 아직도

남아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늘 웃음 띤 얼

굴이었고 노한 빛은 없었다. 그의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다.

그당시의 덕의(德義)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이 있었으나 감히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나라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 80여

세가 되어 정관 연간에 세상을 떠났는데 부도가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서는 황

룡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했는데,그 장소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아마 황룡사의

잘못인 듯한데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라 한 예와 같을 것이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 두전기에 따르면 그의 성씨는 박과 설로 되어있고, 출가

또한 동과 서로 되어 마치 두사람을 말한 것 같으나, 감히 상세하고 명확하게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두 전기를 다 적어둔다. 그리고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 이목

과 운문(모두 절이름)의 사실은 없다. 그런데 향인 김척명이 그릇 되이 항간의 말들을

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함부로 운문사의 개조 보앙스님의 사적과 뒤섞어 하

나의 전기로 만들어 놓았다. 그후 해동승전을 엮은 이도 이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기

록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때문에 이르 분별하고자 항 한 글자도

가감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둔다. 진,수의 시대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

를 거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적었으며 설혹 있었다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시는 못

했다. 원광의 후에는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계속하여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바로 길을 연 셈이 되었다.

기리어 읊는다.

바다 건너 한나라 땅 구름 헤치고,

몇 사람이 오가며 밝은 덕 배웠던가.

오직 푸르른 산만이 옛 자취를 남겼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둘다 절이름)의 일 들을 수 있네.

번호:6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0 08:26 길이:70줄

보양이목(寶壤梨木)

중 보양전에는 그의 향리와 씨족은 싣고 있지 않다. 청도군청의 문적을 살펴보면

이렇게 적혀있다.

‘천북 8년 계묘(943)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 심사순영 대내말 수문 등의 주첩(柱

貼-명단) 공문을 보면, 운문산선원 장생표(長生표-사원의 경계를 표시한 것)남쪽은 아

니점,동쪽은 가서현이라 했다. 절의 삼강의 典主人은 보양화상이요,院主는 현회장로,

貞座는 현량상좌,直歲는 신원선사다.’

또 개운 3년 병진(946)의 운문산선원 장생표 탑에 관계되는 공문서에 보면 ‘장생

이 11이니 아니점, 가서현, 묘현, 서북매현, 북저족문 등이다.’ 했다.

또 경인년의 진양부첩에는 <5도안찰사가 각 도의 선종과 교종이 처음 세워진 연

월과 그 실제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때에 차사원 동경장서기 이선이 자

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하였다.

정풍 6년 신사(1161)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에 의하면 이렇다. 청도군 전 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집에있는 옛사람들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는 치

사 상호장 김양신,치사 호장 민육,호장 동정 윤웅,前 기인(其人-중앙에 볼모로 잡혀

있는 지방호족의 자제) 진기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등의 말이 기재되어 있다. 그 때에

태수 이사로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70세 이상

이었다. 오직 용성만이 나이가 60세이상이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이 청도 군의 절로서 작갑사와 그 밖의 크고 작은 사원인 대작

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다섯 갑사가 모두 후삼한난(후삼국의 난리)에 없

어졌는데 이 다섯 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조사 지식-보양-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중간

에 이르자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이고, 불경을 외우게 하더니 금빛의 비단 가사

한 벌을 주고, 또 아들 이목을 주면서 조살르 모시고 돌아가게 했다. 그러면서 용왕은

부탁했다.

“지금 삼국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한 임금이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서 작갑에 절을 짓고 지내면 능히 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몇 해 후에는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것이오”

용왕이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였다. 그리고 이 골짜기에 다다르자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를 원광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상자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준후 이내 사

라졌다.

이에 보양법사는 허물어진 절을장차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에 올라가 바라보노라

니 뜰에 누런 5층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와 보니 그 자취가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

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러자 서해의 해룡이 작갑이라 하던 말이 생각나 그 곳을 찾아가서 땅을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는 벽돌이 없

으므로 이곳이 전대의 절터임을 알았다. 이 곳에 절을 세우고 거주하며 절의 이름을

작갑사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 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의 밭 5백 결을 합하여 이 절에 바쳤다.

그리고 청태 4년 정유(937)에는 절 이름을 내리어 운문선사라 하고 가사의 신령스러운

음덕을 받들게 했다.

이목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서 살며 법화를 음으로 도왔다.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모두 타서 마르매 보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지방이 흡족하였다.

천제는 이목이 월권하였다 하여 죽이려 하매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자

법사는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조금 후 천사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아라고 청하

자, 법사는 뜰의 배나무를 가리키므로 천사는 그것에 벼락을 때린 후 하늘로 올라갔

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나 용이 그것을 어루만지자 곧 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

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느 사람이 빗장 뭉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에 두

었다. 그 뭉치 자루에는 銘이 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이 때

는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에 모

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을 쉽게

물리칠 방법을 묻자 법사가 말했다.

“대개 개란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만 지킬 뿐 그 뒤는

잊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았더니 적은 과연 패하여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신통한 꾀

를 가상히 여겨 매년 주변고을의 租 50석을 주어 향화를 받들게 했다. 이로 인하여 2

성(二聖-고려태조, 보양법사)의 진용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라고 했다. 후에 법사

는 진용을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는 실리지 않았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전한다. <석굴사의

비허사 혹은 비허와 형제가 되어 봉성,석굴,운문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신라수이전-고려 박인량의 설화집)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

사의 탑과 이목의 사실을 원광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하였다. 또 견성의 사실을 비허

사의 전기에 넣은 것도 벌써 잘못인 데다가 또 더욱이 해동승전을 지은 사람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의 전기를 빠뜨렸기 때문에, 뒤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거나

잘못 알게 했으미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번호:6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2 16:09 길이:60줄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의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그 지팡이는 저절로 날아가 시주의 집에 가

서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는 또 이를 알고서 재에 쓸 비요을 여기에 넣었

고, 포대가 다 차면 이 석장은 다시 날아서 돌아온다. 그런 때문에 그가 거주한 곳을

석장사라고 했다.

양지는 신기하고 특이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으며, 여러

가지 技藝에도 두루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원래는 편지

라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서화 조각등의 손재주)에도 능하여 영모사 장육삼존상과 천왕

상, 또는 전탑의 기와와 천왕사 탑 밑의 8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 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고, 벽돌로 탑을 하나 만들

었으며,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

의 장육상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마음을 바르고 밝게하여 잡념에서

벗어나 法心만이 있는 경지)의 자세로 만드니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들였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인생은 슬프더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에서는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모두 이 노래를 부

르고 있는데, 대개 이 때에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을 처음 만들떼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천 7백석이었다.

논평해 보면.

‘양지스님은 가히 재주가 구비되고 덕이 풍부하였다. 여러 방면의 대가로서 하찮

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겠다.’

기리어 읊는다.

재 마치니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노압(爐鴨-향로)에 손질하여 홀로 단향(檀香)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어 할일 없으니,

소상의 둥근 얼굴 합장하고 쳐다보네.

귀축제사(歸竺諸師)

광함의 구법고승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중 아리나 발마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

政敎(불교)를 구하려 하여 일찍이 중국으로 갔는데 성인의 자취를 두루 찾아 보고픈

마음이 더했다. 그래서 정관 연간(627-649)에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을 떠나 오천에 이

르러 나란타寺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만이 읽고 패겹에 베껴썼다.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뜨니 그의 나

이 70여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혜업,현태,구본,현각,혜륜,현유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

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관화(觀化-교화를 보는것)를

보기 위해 중천축에 갔다.

그러나 혹은 도중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 남아서 그 곳 절에서 거주한 이도 있

었지만, 마침내는 다시 게귀(鷄貴-신라)와 당나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오

로지 현태스님만이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도 역시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없

다.

천축국 사람이 해동을 불러 ‘구구탁 예설라’라 하는데, 이 구구탁은 계(鷄-닭)를

말함이요, 예설라는 귀(貴)를 말한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이렇게 서로 전하여 말했다

.

‘신라에선는 계신(鷄神)을 받들어 못시는 까닭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

기리어 읊는다.

천국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일세.

가련한 유사(遊士)들 힘써 오르느냐.

몇 번인가 저 달이 보내 외로운 배는,

구름 따라 돌아옴을 한 사람도 못 보았네.

번호:6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3 21:16 길이:102줄

2혜동진(二惠同塵)

중 혜숙이 화랑이 호세랑의 무리 중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황권(黃卷-화

랑도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숨어 지낸 지가 20여년이나 되

었다.

그때 국선 구담공이 일찍이 적선촌 들에 가서 사냥을 하는데 혜숙이 길가로 나가

말의 고삐를 잡고 청했다.

“용승(庸僧-중이 자기를 낮추는 말)도 함께 가기를 원하옵는데 어떠하온지요?”

공이 이를 허락하니 혜숙은 옷을 벗어 젖히고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서로 앞을

다투니 이를 보고 공이 기뻐했다. 앉아서 쉬며 피로를 푸는데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

로 먹기를 권하니 혜숙도 함께 먹으면서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다. 이윽고 공의 앞

에 나아가 말했다.

“지금 싱싱하고 맛있는 고기가 있으니 좀더 드시렵니까?”

공이 좋다고 하자,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소반에 놓아

올리니, 옷 위로 붉은 피가 어리어 줄줄 흘렀다. 공이 깜짝 놀라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

“내가 처음에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라, 자기 몸에 통해서 능히 物에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로지 죽

이는 것만을 몹시 즐기어 남을 해치고 자기 몸만 기를 뿐이오니 어찌 이것이 어진 자

나 군자의 행할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뜻이 맞는 무리가 아닙니다.”

하더니 옷을 뿌리치고 가벼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 하여 혜숙이 먹던 것을 보

니 소반 위의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서 조정에 이

를 아뢰었다.

진평왕이 듣고 사자를 보내었다. 사자가 그를 맞으러 가자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서 자는 것을 보이니 중사(中使-내시 또는 사자)는 이를 더럽게 여기고 그대로 돌아갔

다. 7,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다시 만났다. 사자가 혜숙에게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혜숙이 대답했다.

“성 안에 있는 시주 집에서 7일제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

중사가 돌아와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 시주집을 조사했으나 또한 사실이

었다. 그 얼마 후 혜숙이 돌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그 마을의 어떤 사람이 이현 서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이 곳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이제 다른 지방으로 유람 간다.”

하고 서로 인사하고 혜어진 후 반리쯤 가더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니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지라,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하고 무덤을 파헤쳐 보니 다만 한 짝의 짚신만 있었다. 지금 안강현 북쪽에 혜숙사

라는 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혜숙이 살던 집이라 하며, 또한 부도도 있다.

중 혜공은 천진공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인데 어릴 적 이름은 우조였

다. 일찍이 공이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이 때

우조의 나이 7세였는데 그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까?”

“가공(家公–자기집의 주인을 말함)이 몹쓸 병에 걸려 장차 죽게 되었는데 너는

아직 모르고 있었느냐?”

어머니의 대답에 우조가 말했다.

“제가 그 병을 고치겠습니다.”

그 말을 이상히 여긴 어머니가 공에게 알리니 공은 그를 불러오게 했다. 그는 침

상 밑에 앉더니 한마디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공의 종기가 터지게 되었다. 공

은 우연한 일이거니 하여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장성하여 그는 공을 위하여 매을 길렀는데 공의 마음에 퍽 들었다. 공의 아

우로서 처음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준 좋은 매를 얻

어서 임지로 갔다.

어느날 밤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므로 다음날 새벽이면 우조를 보내어 그

매을 가져오게 하려고 생각했다. 우조는 이를 미리 알고 금시에 그 매를 가져다가 새

벽녘에 공에게 바쳤다. 공은 크게 놀래어 깨닫고 그 때서야 전일에 몹쓸 종기를 치료

한 일들이 모두 측량하기 어려운 일임을 알고서 말했다.

“나는 지극한 성인이 내집에 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친 말과 예의에 벗어

난 짓으로 욕을 보였으니 어찌 그 죄를다 씻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제부터 도사가

되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마침내 공은 내려가서 예를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들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드디어 출가하여 이름을 바

꾸어 혜공이라 했다. 항상 그는 조그만 절에 살면서 늘 미친 듯이 술에 취하여 삼태기

를 지고 거리를 헤매며 크게 노래하고 춤추니 사람들은 그를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그리고 극 있는 절을 부개사라고 했으니 이 말은 우리말로 삼태기를 의미한다.

그는 또 절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을 따서 우

물 이름도 지었다.

그가 우물 속에서 나올 때는 반드시 먼저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솟아나왔으므로

절의 중들은 이로써 그가 나올 조짐을 알았으며, 그가 우물에서 나와도 옷은 젖어 있

지 않았다.

만년에는 항사사에 가 있었다. 이때 원효가 여러 가지 불경의 소(疏)를 찬술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하기도 했다. 어느 날 혜공

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었는데 돌 위에 대변을 보니 혜

공이 그것을 보고 희롱했다.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이런 일이 있은 까닭에 이 절을 오어사라 했다. 혹 어떤 이는 이 말을 원효대사

의 말이라 하지만 잘못이다. 민간에서는 그 시내를 그릇 되이 불러 모의천이라고한다.

구담공이 어느 날 산으로 놀러 갔다가 산길에서 죽어 쓰러져서 살이 부어터지고

구더기가 생긴 혜공의 시체를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했다. 그리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에 돌아오니 혜공은 몹시도 술에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

았다. 또 어느 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서 가지고 영묘사에 들어가서 금당과 좌우에 있

는 경루와 남문의 낭무를 묶어 놓은 후 강사에게 말했다.

“이 새끼줄을 사흘 후에 풀도록 하라.”

이상히 여긴 강사가 그 말에 따르니, 과연 3일만에 선덕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다.

그때 지귀(志鬼-선덕왕때의 사람)의 심화가 나와 그 탑을 불태웠지만 단지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했다.

또 신인(神印- 불교의 종파, 신인종)의 조사 명랑이 새로 금강사를 세우고 낙성

회를 열었는데, 고승들은 모두들 모였지만 오직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하였더니 잠시 후 그가 왔다. 이 때 많은 비가 내렸음에도 불

구하고 그의 옷은 젖지 않았으며 신발에도 진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했다.

“초청이 은근하여 왔소이다.”

이와 같이 그는 신령스러운 자취가 매우 많았으며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느데, 사리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가 언젠가 조론(肇論-후진의 승조가 지은 책이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글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혜공이 승조의 후신임을 알겠다.

기리어 읊는다.

초원에서 사냥하고 침상 위에 누웠으며,

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속에 잠을 잤네.

척리(-혜공이 죽은 후에 무덤에 남아있던 신발 한짝)와 부공(혜공이

죽은후 공중에 떠서 사라진 것을 이름)은 어디로 갔는가.

한 쌍의 보배로운 화중련(火中蓮-불속에서 연꽃이 핌)일세.

번호:6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4 14:44 길이:133줄

자장정률(慈藏定律)

대덕 자장은 김씨이니 본래 진한의 진골 소판 무림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청관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3보(三寶-佛, 法, 僧)에 마음

을 돌려 천부관음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축원했다.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의 진량으로 삼겠습니다.”

홀연히 그 어머니의 품 안으로 별 하나가 떨어져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바로 태

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는데, 석존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량이라 했다. 그는 정

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날로 문사에 풍부해지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두 부모를 일찍 여의자 이 후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문득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을 내어 원녕사라는 절을 세웠다.

홀로 깊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는데 조금 피곤함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치고 그 속에 발가벗

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혼미한

정신을 없앴다.

때마침 조정에서는 재상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자장이 문벌로서 물망에 올랐다.

왕이 여러번 불렀으나 그는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이에 왕이 칙령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이를 듣고 자장이 말했다.

“내 차라리 하룻동안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라도 백년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말을 듣고 왕은 그가 출가함을 허락했다. 이에 자장이 여러 바위 사이에 깊숙

이 숨어서 사니 아무도 양식 한톨 돌봐 주는 이가 없었다. 이 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와서 바쳤으므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다. 마침내 天人이 꿈에 나타나 5계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의 남녀가 다투어 찾아와 계를 받

았다.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던 자장은 중국으로 가 대화(大化)하기를

구했다. 인평 2년 병신(636)에 왕명을 받아 문인인 실 등 중 10여명과 더불어 서쪽 당

나라 청량산에 가서 성인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문수보살)의 소상이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전하여 서로 말했다.

“제석천이 공인들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기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쓰다듬으

며 범어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나 생각하니 알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나타나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는 또 말했다.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소.”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 자장은 자신이 이미 성별(성불할 것을

예언한것)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에서 내려와 태화지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로 들어가

니, 태종이 칙사를 보내어 그를 위무하고 승광별원에 거처하도록 했다.

태종의 은총과 하사한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그 번거로움을 꺼린 자장은 표문을

올리고 종남산 운제자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동안

을 수도하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으니 그 영검이 날로 많아졌다. 그 내용은 말이

번거로워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황제는 칙사를 보내 그를 위문하고 또 비단 2백필

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도록했다.

정관 17년 계묘(643)에 신라의 선덕왕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줄것을 청

했다. 이에 태종이 허락하고 궁중으로 그를 불러드린 다음 비단 1령과 잡채 5백단을

하사했으며, 또 동궁도 비단 2백 단을 내려주고, 그 밖에 많은 물건을 예물로 주었다.

본국에는 아직도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않았으므로 자장은 대장경 1부와 여러

가지 번당 화개 등에 이르기까지 복리가 될만한 것은 청해서 모두 이것을 싣고 돌아왔

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니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하니

급여와 시위는 많고 극진했다.

어느 해 여름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을 강의하게 하고, 또한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7일 낮 7일 밤 동안 강연하게 하니 이 때에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과 안개가 자욱하게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본 사중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감탄했다.

이에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불교가 우리 동방에 들어온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주지를 수봉하는 규범

이 없으므로 이것을 통괄하여 다스리지 아니하면 바로잡을 수 없다.”

이에 왕이 자장을 대국통으로 임명하여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에게 위임하여

이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를 상고해 보면 이렇다. 북제의 천보 연간에는 전국에 10통

을 두었는데 유사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를 분별하여야 하옵니다.”

라 하였다. 이에 문선제는 법상법사로 대통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으로 삼았다.

또 양,진의 시대에는 국통,주통,국도,주도,승도,승정,도유내 등의 명칭이 있었는데

모두 소현조에 소속되었다. 소현조는 승니를 거느리는 관명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을 장하게 여김이 있었고, 신라 진흥왕 11년 경오에는

안장법사로 대서성을 삼았는데 이것은 한사람뿐이었고, 또 소서성은 두사람이 있었다.

그 이듬해 신미년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를 국통으로 삼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 한 사람은 대도유내로 삼고 주통 9인과 군통 18인을 두었다. 자장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이

대각간이 되고, 김유신이 태대각간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을 두고 정법전이라 하여 大舍 1인과 史 2

인을 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이 뛰어난 자를 뽑아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한 때

에는 바꾸었는데 연한은 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율종과 다르다.

자장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아가서 불교를 널리 전파했다. 그러나

승니의 5부에 각각 구학을 더 증가시키고 보름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

는 이들을 모아 시험해서 지범(持犯-계율을 지니는 지계와 계율을 범하는 범계)을 알

게 하고 관원을 두어 이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 순사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검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히 정비하여 일정한 법으로 삼았

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함이 이때가 가장 성하였다. 이것은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서 음악을 바로잡자 아송(雅頌)이 각각 그 당위성을 얻었던 일과 같다

고 하겠다. 이때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이가 열집에 여덟, 아

홉은 되었다. 그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날이 갈수록 더욱 늘어나

니 이에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 또 자신이

태어난 집을 원녕사로 고치고 낙성회를 열어 잡화(雜花-화엄경) 1만偈를 강의하니 52

녀가 감동하여 현신해 와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게하

여 그 상서로운 자취를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라고 이름했다.

일찍이 그는 우리나라의 복식이 제하(諸夏-중국)와 같지 않았으므로 조정에 건의

하였는데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 3년 기유(649)에 처음으로 중국 衣冠을 입게

하고, 다음 해인 경술(650)에 또 정삭(正朔-정월초하루)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의 연호

를 썼다. 이 후부터는 중국에 조근할 때마다 상번(上蕃-상위의 번국, 번국은 제후의

나라.)에 열(列)하였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만년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는데, 북대에

서 본것과 같은 형상의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놀라 일어난 자장은 일찍 나가서 송정에 이르니 과연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와서

법요를 물으니 대답하였다.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

하고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더니 나타나지 않았다. 송정에는 지금까지도 가시나무

가 나지 않으며, 매와 새매 같은 새들도 와 깃들지 않는다고 한다. 자장이 태백산으로

가 그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다.”

이에 석남원 지금의 정암사를 세우고 대성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것사 한 사

람이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오더니 시자

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한다.”

“내가 건추(건은 수건, 추는 빗자루로 어른을 받든다는 뜻)를 받든 이래 우리 스

승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느냐?”

“다만 너희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여라.”

이에 시자는 들어가서아뢰니 미처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필시 미친 사람이겠지.”

문인이 나가 꾸짖어 내쫓으니 거사가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자기의 학문이나 지위를 자랑하여 남을 업

수히 여김) 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치고 삼태기를 거꾸로 들어 터니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어 그

위에 올라 앉더니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이를 들은 자장이 그제야 위의를 갖추고 빛

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로 올라갔지만,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마침내 몸을

던지니 목숨이 끊어졌다. 시체는 화장하여 유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무려 10여곳인데 세울 적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

瑞)가 나타났으므로 그르 받드는 포색(蒲塞-출가하지 않고 속가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

는 남자)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되어 완성되었다. 자장이 쓰던 도구

옷감, 버선과 태화지의 용이 바친 목압침과 석존의 유의(油衣-가사)들은 모두 통도사

에 있다. 또 헌양현에 압유사가 있는데 침압이 일찍이 이 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

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이란 중이 있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하여 함께 고향으로 돌아

와서 자장을 도아 널리 율부(律部)를 폈다고 한다.

기리어 읊는다.

일찍이 청량산으로 가 꿈깨고 돌아오니,

7편 3취(七篇三聚)가 같이 열렸네.

치소(緇素-승려와 속인)의 옷을 부끄러이 여겨

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처럼 만들었네.

번호:7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5 12:15 길이:69줄

원효불기(元曉不羈)

성사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다. 조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내내말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

군의 남쪽 지금의 장산군밑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은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이라고

도 한다. 사라수란 명칭에 대하여는 민간에서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스님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아기를 가져 이미

만삭인데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밤나무 밑에서 문득 해산하게 되었다. 몹시 급하였으

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누워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사라수라고 한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이를 사라율이라고 하고 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니 괴상히 여긴 관리는 그 밤

을 가져다가 검사해 보았는데, 한 알이 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

고 판결했다. 이런 까닭에 밤나무골이라고 했다.

스님은 출가하자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라고 했다. 또 사라

수나무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라 했다. 스님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할아버지의 본거를 따른 것이고, 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사람이라고 했다.

살펴보건대 인덕 2년 사이에 문무왕이 上州와 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를 두었

는데, 하주는 지금의 창녕군이요, 압량군은 본래 하주의 속현이다. 상주는 지금의 尙

州이니 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에 속해 있으며 바로 압량군에서 나누

어진 곳이다. 스님의 아명은 서당(새돌이)이요,또 다른 이름은 신당이다.

처음에 유성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태기가 있었으며, 해산

할 때는 오색구름이 온 땅을 덮었다. 때는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617)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이 없이 혼자 공부했다. 그의 유방(遊

方–중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행함)의 시말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자취들은 당승전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올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쓰지 않고,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가

지 이상한 일만 기록한다.

스님은 어느날 풍전(風顚-상례를 벗아난 행동)을 하여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어느날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

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지내고 있었으므로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

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이미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오고 있어 만나게 되엇다. 원효는 이때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적셨다.

궁리가 스님을 궁으로 데리고 그 곳에서 묵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여 신

라 10현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방언으로 중국과 외이의 각 지방 풍속, 물건이름등에

도 통달하고 이회하여 6경과 학문을 훈해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명경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이를 전수하여 이어 오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여 총을 낳은 후에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스님은 그 모양에 따른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無애人(부처를 이름)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

는 문귀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했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

아오니 이로 말미암아 상추옹유(가난한사람의 집),확후(몽매한 사람)의 무리들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부을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원효

란 이름도 역시 방언이며 당사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원효를 일러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항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을 끝으로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訟事로 말미암아 몸을 百松(몸이 백개의 소나무로 나

뉨)으로 나누었으므로 모든사람들은 이를 位階의 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

유로 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소를 지었으며, 붓과 벼루를 소의 두뿔위에 놓

은 연유로 각승이라했다. 이것은 또한 本始二覺(본각과 이각)의 숨어 있는 뜻을 나타

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 또한 知音하여 서로 唱和한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진용을 만들고 분황사

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사모하여 終天(한평생 슬픔을 품음)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곁

에서 예배할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 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거하던 穴寺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했다.

각승이 삼매경의 축을 처음으로 폈고,

무호는 종내 1만거리를 바람으로 걸었네

달 밝던 봄 요석궁에 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모습만 비었네.

번호:7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6 09:50 길이:68줄

의상전교(義湘傳敎)

법사 의상은 아버지가 한신이라 했으며 성은 김씨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에

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변방의 순라군이 첩자로 여겨 잡아 가둔 지 수

십일 후에야 간신히 풀려나서 돌아왔다. 영휘 초년때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어 그 배를 타고 중국에 갔다. 처음 양주에 머물렀는데 주

장 유지인이 의상을 청하여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성대하게 대접했다. 얼마 후에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을 뵈었다.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

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신주까지 와서 덮으니, 그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자 마니보주가 하나 있었으며 그 빛이 먼 곳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절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오므로 지엄

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했다.

“어젯밤 내가 꾼 꿈에 그대가 올 징조였구려.”

하며 입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隱微한 부분까지 해석했

다. 지엄은 영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터득하게 되니, 이것은 깊이 숨

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이 그 본색을막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때에 본국의 승상 김흠순

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갇혀있었다. 당나라 황제 고종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

라를 치려 하매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하여 먼저 돌아가도록 하였다. 함형 원

년 경오(670)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이 일을 조정에 알리니, 신인종의 고승 명랑에게

명하여 밀단을 가설하고 비법으로 기도해서 국난을 면하게 할 수있었다.

의봉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

고 대승을 폈더니 많은 영감이 나타났다. 종남문인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서 부본을 의

상에게 보낸 뒤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서경 승복사 중 법장은 해동신라 화엄법사의 시자에게 글을 드립니다. 한번 작

별한 지 20여년이 되었으니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 속에서 잊겟습니까. 더욱이 연기

와 구름이 1만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1천겹이나 쌓였으니,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

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오며 회포에 연연함을 어찌 말로 다하리이까. 전생에 인연을

같이했고, 금세에 함께 학업을 닦은 탓으로 이 과보를 얻어서 대경에 함께 목욕하고,

특별하신 선사의 은혜로 깊은 경전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

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무애한 연기를 선양하여, 겹

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줌이 크고 넓다고 하니 기쁜 마음

더합니다. 이로써 여래가 돌아가신 후로 불교를 빛나게 하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분은 오로지 법사이심을 알겟습니다. 법장은 발전하는 것은 하나도 없

고 주선함도 더욱 모자라니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매 선사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

직 분수에 따라 받은 것을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장소는 뜻은 풍부하오나 글이 간결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그러하와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

를 이루었습니다. 요즈음 이를 승전법사가 옮겨 써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께서는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시어서 가르쳐 주시면

행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기는 마당히 내세에선느 捨身受信하여 함께 노사나불의

이와 같이 끝없는 묘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한 보현보살의 원행을 수행한다면 남은

나의 악업은 하루 아침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바라는 바 상인께서는 옛 일을 잊지 마

시고 諸趣 한가운데서 정도로써 가르쳐 주시옵소서. 인편이 있거든 때때로 안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불비하나이다.’

의상은 이에 영을 내려 열 곳의 절에서 교를 전파했다. 태백산의 부석사,원주의

비마라사,가야산 해인사,비슬산 옥천사,금정산의 범어사,남악의 화엄사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짓고 1승의 요점을 모두 실어 천년의 귀감이 되게 하였

으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보배롭게 지녔다. 이 밖에는 달리 지은 것이 없지만, 온

솥의 고기 맛을 알고자 하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한 것이다.

법계도는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선사도 입적했다. 이

것은 마치 공자가 획린의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는 의상

은 금산보개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는 오진,지통,표훈,진정,진장,도융,양원,상원

능인,의적 등 10명의 대덕들이 영수가 되니, 그들은 모두 亞聖들이며 모두 전기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 골암사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팔을 뻗쳐서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를 지었는데,그는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문사가

정묘한 지겨에 달했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살았으며,항상 천궁을 오고갔다. 의상

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과 함게 탑을 돌았는데, 언제나 층계를 밟지 않고 허

공을 밟고 올라갔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무리들도 층계에서 3척

이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기 때문에 그 무리들을 돌아다 보며 의상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필시 괴이하다 할 것이니 가르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이 나머지는 최치원이 지은 의상의 본전과 같다.

기리어 읊는다.

덤불 인진(絪塵) 무릅쓰고 바다 건너니,

지상사의 문 열려 귀한 손님 대접했네.

雜花를 采采(채취)하여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이 봄빛일세.

번호:7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7 01:55 길이:44줄

사복불언(蛇福不言-사복이 말하지 않다.)

서울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없이 아이를 배어 낳았는데

그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도록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사동

-아래에서는 혹 사복이라고도 하고, 또 사과,사복이라고 썼다. 이것은 모두 사동의

이름이다.- 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효가 고선사에 있었

는데 사복이 찾아왔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없이 말했

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

냄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고 하고 같이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

(布薩-불교의식의 하나로 출가한 이에게 중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戒經을 들려주고 죄

를 참회시켜 선을 기르고 악을 없애는 일)시켜 계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

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다.

그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

죽지 말 것이니라.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이 너무 길어 번거롭다고 하자 원효가 고쳐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괴로움이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지혜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냄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읊었다.

그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사라수 사이에 열반하셨네.

그같은 이 지금 또 있어

연화장 세계로 들려고 하네.

읊기를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한 세계가 있었고,

칠보로 장식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한데 아마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같았다. 사복이 시

체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자 문득 땅이 합쳐졌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금강산의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장사라

했다. 해마다 3월 14일이 되면 점찰회(占察會-점찰경에 의한 법회)를 여는 것을 항규

(恒規)로 삼았다. 사복이 세사에 영검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뿐인데, 세간에서는 황

당한 얘기를 덧붙엿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기리어 읊는다.

잠잠히 자는 용이 다 등한할까,

임종에 부른 한 곡 간단하기도 해라.

고통스러운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 어니,

연화장(蓮花藏) 세계 넓게 보이네.

번호:7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2 길이:86줄

관동풍악발연수(關東楓岳鉢淵藪-강원도,금강산, 발연寺) 石記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출가할

뜻을 가지니 아버지는 이를 허락했다. 율사는 금산수 순제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는 사미계법을 전해 주고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며 말했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聖前에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하

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펴도록 하라.”

가르침을 받은 율사는 작별하고 물러나와 명산을 두루 다녔는데 나이 이미 27세

가 되었다. 상원 원년 경자(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고 보안현에 가서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절이름)으로 들어갔다. 쌀 다섯 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고 그 중 한 홉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

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授記(장래에 부처가 될 것을 알리는 일)를 얻지 못했다. 이

에 발분하여 바위아래 몸을 던지니 문득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로 올려 놓았

다. 율사는 다시 분발하여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고 돌로 몸을 두

드리면서 참회했더니 3일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이 되는 날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金杖을 흔들면서 나타나 그를 도와주니 손과 팔뚝이 다시 전과 같이

되었다. 그에게 보살이 마침내 가사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더 정진했다. 21일이 다 되니 곧 天眼을 얻고 도솔천중(도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 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앞에 나타나더니 율사의 이마를 만지며 말했

다.

“착하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기를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간절

히 참회하는구나.”

지장은 戒本을 주고, 미륵이 또 목간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다른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쓰여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했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곧 始와 本의 두 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鍾子)이다. 이것으로써

마땅히 果報(인과응보)를 알기가 어렵다고 할 것이니라.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궁왕의 몸을 받아 뒤에 도솔천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곧 사라졌다. 때는 임인년 4월 27일이었다.

율사가 교법을 받은후에 금산사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왔다. 도중에 대연

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용왕이 나오더니 옥가사를 바치고 8만 眷屬(8만은 아주 많은

수를 말하고, 권속은 처자등을 말함)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해서 금산수로 가니 사람들

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며칠 내로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오더니 율사에게 계법을 주

었다. 이에 율사는 시주를 권하여 미륵장육상을 만들고 또한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

법을 주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像은 갑진(764) 6월 9일에 완성하여 병오

(766) 5월 1일에 금당에 모셔졌으니 이해가 대력 원년이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향해 가다가 도중에서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탔던 사람

이 내려와 물었다.

“무슨 이유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

는 분입니까?”

“나는 금산수의 중 진표요,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서 미륵,지장

보살 앞에서 계법진생(戒法眞생-증과 간자)을 받았으므로 절을 지어 오랫동안 불법을

지키고 길이 수도할 곳을 찾으려고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나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받음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 듣고 난 그 사람이 말했다.

“짐승도 이러한 信心이 있는데 저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다시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있는 곳을 보고 표를 해두었다. 그들이 명주 해변을 돌아 천천히 가는데,물

고기며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으로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드니,

율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염송하고 되돌아왔다. 고성군에 이르러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었다.

그 곳에 거주한지 7년만에 이 곳 명주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

다. 율사는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하니 사람들이 받들어 지켜 3보에 공경을 다했다.

이때 갑자기 고성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죽어서 밀려왔다. 이것을 팔아다 사람

들은 먹을 것을 마련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 방에 도착했다. 그 뒤에는 고향으로 가사

아버지도 찾아뵙고 혹은 진문대덕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

대덕 융종,불타등이 율사를 찾아와 청했다.

“우리들은 불원천리 하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을 주시기 원합니다.”

율사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는지라, 세 사람은 복숭아 나무에 올라가

땅에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스럽게 참회했다. 그러자 율사가 敎를 전하여 관정(灌頂)

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과 간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하기를,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인데 내 이미 너희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길상초가 난 곳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

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 널리 펴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속리산으로 돌아가 곧바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

을 세우고 길상사라고 했다. 영심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도업을 닦으며 끝까지 효도했다. 율

사는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입적했다.

제자들이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니 비로소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내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났는데 세울이 오래 지나

자 말라 죽었다. 다시 한 그루 났는데 뿌리는 하나지만 지금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는 자도 있으

나 얻지 못한 자도 있었다. 이에 나는 율사의 뼈가 아예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1

197) 9월에 특별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 속에 담았는데 세 홉 가량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두 그루 소나무 밑에 뼈를 모시고 돌을 세웠다고 했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같지 않다. 때문에 영잠

의 기록만 추려서 싣는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이 기록하였다.

번호:7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3 길이:32줄

승전촉루(勝詮촉루 -촉루는 해골, 여기서는 石촉루)

중 승전의 내력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

의 강석 아래서 현언(玄言-현묘한 말, 여기서는 불법을 말함)을 받아 정미(精微)한 것

을 연구항 생각을 쌓으니, 보는 것이 슬기롭고 빼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내니

그 묘함과 깊음을 구하는데 진력했다. 이에 그는 인연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으

로 돌아올 생각을 하였다.

현수는 처음에 의상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학설에 대한 글의 뜻과 과목을 연술했다. 승전법사가 고향에 돌아갈때 글을 보

냈는데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고 한다. 그 별폭에는 이렇게 말했다.

탐현기(探玄記)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미완성이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

장등잡의 1권, 화엄범어 1권, 기신소 2권, 12문소 1권,법계무차별론소 1권을 모두 옮

겨 썼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지난 번에 신라의 중 효충이 金 9分을 갖다주

면서 上人(의상)께서 보낸 것이라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으나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 서국의 군지조관(軍持조灌-중이 가지고 다니는 물병과 대야) 한 개를

올려 작은 정성이나마 표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는 현수의 글을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의 이 글을

대하자 마치 지엄의 가르침을 천히 듣는 것 같았다. 수십일 동안을 탐구 검토하여 제

자들에게 주었으며 이 글을 널리 연술 시켰다. 이 말은 의사의 전기에 실려 있다.

살펴보면 이러하다. 이 원활하고 융통하는 가르침이 청구에 널리 펴진 것은 오로

지 승전법사의 공로이다. 그 뒤에 중 범수가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이 번역된 후분

화엄경, 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연술 했다고 한다. 이 때가 정원

기묘(799)이었다. 이 또한 불법을 구해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고 하겠다.

승전은 상주 영내의 개녕군 경계에 절을 새로이 짓고 돌들을 관속(官屬)으로 여

겨 화엄경을 개강했다. 그 후에 신라의 중 가귀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전등(傳

燈-스승이 제자에게 교법을 전해주는 것)을 계속하더니 이에 심원장을 편찬했는데, 그

대략을 보면 승전법사는 돌의 무리들과 더불어 불경을 논의하고 강연하였다고 한다.

그 곳은 지금의 갈항사다. 그 염촉 80여매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

못 신령스럽고 이상함이 있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번호:7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5 길이:91줄

진표전간(眞表傳簡)

중 진표는 완산주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는 길보랑이며 성은 井씨이

다. 나이 12살 때에 금산사의 숭제법사의 강석 밑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배우

기를 청했다.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일찍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서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배운 뒤에 오대산에 들

어가 문수보살 현신에게서 5계를 받았다.”

이에 진표가 아뢰었다.

“부지런히 수행하면 얼마나 되면 계를 얻게 됩니까?”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진표는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선계산 불사의암에 머물면서

3업(신체의 동작과 언어 의지의 작업을 말함)을 닦아서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

시키는 참회법)으로 계를 얻었다. 그는 처음 7일 밤을 정하여 5륜(두 무릎,두손,머리)

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낭떠러지로 피가 비오듯했다. 그래

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자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정하였다. 14일이

되는 날 마침내 지장보살을 뵙고 정계를 받았으니 바로 개원 28년 경진(740) 3월 15일

진시요, 진표의 나이 이 때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자씨(慈氏-미륵보살)에게 있는지라 감히 중지하려 하지 않고

영산사로 옮겨가서 또 처음처럼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했는데, 과연 미륵보살이 감

응하여 나타나더니 점찰경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果, 간자는 점을

치는 대쪽) 1백 89개를 주면서 말했다.

“이 가운데서 제 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를 비유한 것이고, 제 9간자는 구족계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과단향

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이것들은 모두 번뇌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을 가지고 세

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도록 하라.”

진표는 성별을 받자 금산사로 와서 살았으며 해마다 정성껏 단석(壇席)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함이 이 말세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풍교(風敎)와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아

슬라주에 이르렀다.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 속으로 그르 맞아들

였으므로 진표가 이 곳에서 불법을 강의하니 그 물고기와 자라들까지도 계를 받았다.

그때가 곧 천보 11년 임진(752) 2월 15일이었다. 어던 책에서는 원화 6년(811)이라 했

는데 잘못이다. 원화는 헌덕왕 때이다.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

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만7천석을 내렸다. 초정(椒庭-왕후의 대궐)과 열악(列岳-왕

의 외척)들도 모두 계품을 받았으며, 비단 5백단과 황금 50냥을 보시했다.

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다가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

는 지금도 발연사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하여 계를 주던 곳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 불법을 얻은 영수로는 영심,보종,신방,체진,진해,진선,석충등

이 있으며 모두 산문의 개조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바로 간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

에 살면서 진표의 법통을 계승한 제자인데, 그 단을 만드는 법은 점찰 6윤과는 약간

다르나 수행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와 같았다.

당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개황 13년(593) 광주(광동)에 참법을 행하는 중이

있었는데, 가죽으로 첩자 두 장을 만들고 선과 악 두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해

서 善字를 얻는 자는 길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가 박참법(撲懺法-육신을 학대하

는참회법)을 행하여 지은 죄을 없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함

부로 그 법을 받아들여 비밀하게 행하니 이 일이 청주(산동성의 동쪽지역)에까지 알려

졌다. 동행했던 官司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그들이 말했다.

“이 탑참법(搭懺法-위의 선과 악 두글자를 던져 선자를 얻으면 길하다는 참회법)

은 점찰경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에 있는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오쳰흽지하

여 마치 온 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한다.”

그때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는 내사시랑 이원찬을 시켜 대응사로 가서 여러 대덕

들에게 묻게 했다. 대사문 법경과 언종 등이 대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책머리에 보제 등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

라고 했으니 근래에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본으로 전해 오는 것도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어느 곳에

도 올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 시일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은 여러가지

경과는 다르므로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으로 이것을 금지시켯다.

이제 이것을 시험삼아 논해본다. 청주거사, 탑참 등의 일은 마치 대유가 시서발

총(詩書發塚-말세의 유학자가 학문을 빙자 악용하여 무덤을 파는 악행까지 행한다고

풍자한 것)하는 것과 같으므로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가 되었다.> 고 할수

있으니, 불타가 미리 방비한 것도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을 번역한 사람

이나 그 시일과 장소가 없다고 하여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 또한 삼(麻)을 취하기

위하여 금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단(悉

壇-부처님이 중생을 교화시키는 방법)이 길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주고 게으른 자를 격앙시킴이 이 경전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대승참이라 했다. 또한 6근(六根)이 모인 가운데서 나왔다고도 했다. 개원,정원에 나

온 두 석교록 속에는 정장으로 편입되었으니 비록 性宗은 아니나, 그 상교(相敎-법상

종)의 대승으로는 또한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이나 박참의 두 참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사리불문경에는 불타가 長者의 아들 빈야다라에게 말했다.

“네가 7일낮 7일밤 동안에 너의 전죄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

다라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정성껏 밤낮으로 행하니 제 5일 저녁이 되자 그 방안

의 여러 가지 물건이 비오듯이 내리더니, 수건,把,총채,빗자루,칼,송곳,도끼와 같은

물건들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다라가 기뻐하며 부처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

답했다.

“이것은 네가 물욕을 벗어날 징조니라, 모두 베고 쓸고 터는 물건이다.”

이 말에 따르면 점찰경에서 輪을 던져 相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

으로 진표공이 참회를 일으켜서 간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것이 허망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해서 미륵

보살이 진표 스님에게 친히 전수했겠는가? 만일 이 경을 금한다면 사리불문경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의 무리야말로 확금불견인(攫金不見人-남의 금을 훔칠때 금만 보이

고 사람은 보이지 않음)이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기어 읊도다.

요계에 현신해서 용롱를 일깨우니

영악과 선계에 감응해서 통했네

정성 다해 탑참전했다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은 어룡도 감화하였네.

번호:7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7 길이:67줄

심지계조(心地繼祖-심지가 진표조사의 뒤를 계승함)

중 심지는 진한(신라를 말함) 제 41대 헌덕대왕 김씨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

성과 우애가 있고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지학지년(志學之年-학문에 뜻을 둔 15세)

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불도에 근면히 임했다. 중악(中岳-팔공산)에 가서 살고

있엇는데, 마침 속리산에 있는 심공이 진표율사의 불골간자를 전해 받아 과정(果訂)법

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뜻을 세우고 찾아 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난 뒤여서 참례를

허락 받지 못하였다.

이에 땅에 앉아 마당을 치면서 여러 무리들과 함께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

나자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러나 심지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휘날리면서도

내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신기하고 이상스러움을 보았다. 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사양하고 거짓 병을 핑게하고 방안으로 물러앉아 당을 향하여 조용히 예배

했다.

그러자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이 일찍이 선계산에

서 피를 흘리던 때와 같았다. 그리고 매일 지장보살이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자

산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보니 옷깃 사이에 두개의 간자가 끼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심공에게 아뢰니 영심이 말했다.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하고 검사해 보니 함은 그대로 봉해 있었다. 그러나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심히 이상히 여겨 간자를 다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

는데간자가 또 옷깃 속에 있었다. 다시 돌아와 아뢰니 심공이 이렇게 말하며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부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

심지가 간자를 받아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더니 그를 인도하여 바위위에 앉게했다. 그는 바위 밑으로 내

려가 엎드려서 삼가 正戒를 받았다.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간자를 모시고자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 만으로 정할 일이 아

니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쳐 보기로 하자.”

하여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해 간자를 던지자, 간자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

이었다. 이 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저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므로 앞길이 밝아지네.

불골(佛) 간자를 구해 얻어서,

정결한 곳 찾아 정성 드려 바치네.

노래부르기를 마치고 간자를 숲 속 샘에서 찾았다. 곧 그 곳에 당을 짓고 간자를

모셨는데, 지금의 동화사 참당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이것이다.

본조 예종이 일찍이 부처님의 간자르 대궐 안으로 맞아들여 예배했는데, 문득 아

홉번째 간자 하나를 잃고 대신 牙簡으로 본사에 돌려 보냈다. 이것이 점점 변하여서

지금은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가리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牙도 아니

고 玉도 아니다.

점찰경 상권을 살펴보면 189개 간자의 이름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은 上乘을 구해서 不退二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果가 마땅한 證을 보이는

것이며,제 3과 제 4과는 中下乘을 구해서 不退位를 얻은 것이고, 5는 신통력을 구해서

성취함이다. 6은 4梵을 구해서 성취하는 것이요,7은 世禪을 닦아 성취함이라, 8은 받

고 싶은 妙戒를 얻는 것이요, 9는 일찍이 받은 具戒를 다시 얻음이고 10은 下乘을 구

하며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다음은 中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렇게 하여 제 172까지는 모

두 과거세나 현세 사이에 착하기도 하고 혹 악하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혹은 잃기도

한 일들이다. 제 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 제 174는 죽은 후에 축생(

畜生)이 이래서 아귀,수라,인,인왕,천,천왕,문법,출가,성승을 만나 보는 것, 도솔천에

나는 것, 정토에 태어남,부처를 찾아뵙,하승에 사는것,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득해탈의 제 189 등이 이것이다. 이들은 모두 3世의 선악과보의 차별의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 쳐보고 내 마음이 행하고자 하는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에 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8과 9의 두 간자는 다만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宋傳에는 이르기를

단지 108첨자라고만 했는데 어찌된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듯하다. 그리고 또 경문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것 같다.

또 살펴보건대, 본조 문사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 2권에 신라 말기의 대덕 석충

이 고려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 189개를 드렸다고 쓰여있다. 이것

이 지금 동화사에 전해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리어 읊는다.

금규(金閨)에 자라나서 속박을 일찍 벗고,

근검 총명함은 하늘이 주었네

눈 쌓인 뜰에서 간자를 뽑아,

동화산 최상봉에 갖다 놓았네.

번호:7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28 01:08 길이:55줄

현유가(賢瑜伽), 해화엄(海華嚴)

유가종의 조사인 고승 대현은 남산 용장사에 살고 있었다. 그 절에는 돌로 만든

미륵보살의 장육상이 있었다. 대현은 항상 이 장육상을 돌았는데, 이 장육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함과 분별

함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의 전량은 드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으므로 해석이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중국의 명사 백거이도 일찍이 이것을 연구하다가 다 알지는 못했었

다고 그는 말했다.

유식(唯識)은 그 뜻이 그윽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인명(因明-인도의 논리학)은 쪼

개도 열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자들이 배우고 깨우쳐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진이는 혼자

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짧은 시일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터득하여 회회유인(자

유로이 칼을 놀림. 모든 사리에 통달하여 쉽게 이치를 분석하는 모양)하였다. 이리하

여 동국의 후진들 모두가 이 가르침에 따랏고, 중국의 학사들도 간혹 이것을 얻어 안

목(眼目)으로 삼았다.

경덕왕 때인 천보 12년 계사(753) 여름에 가뭄이 심했다. 이에 대현을 내전으로

들여 금광경을 강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하루는 재를 드리는대 바리때를 벌려놓고 정

수 올리기를 가다렸지만, 공양하는 이가 정수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가 꾸짖으니 공양

하는 자가 말했다.

“대궐 안의 우물은 말라버렸기 때문에 먼 곳까지 가서 또오느라고 늦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대현이 말했다.

“왜 진작 이르지 않았는가?”

낮에 경을 강할 때 대현이 향로를 받들고 묵묵히 있었더니 잠시 후에 우물물이

솟아오르는데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절에 세우는 장대)과 높이가 같

게 되었다. 이에 궁중에서 모두 놀라워 했으며 이 우물을 금광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를 청구사문이라 했다.

기리어 읊는다.

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도 또한 따라서 돌더니

청구의 불교가 다시 중천에 이뤘네

宮井의 맑은 물 솟아오르니

향로의 한 줄기 香烟인 것 그 누가 알리

그 이듬해 갑오(754) 여름 왕은 또 고승 법해를 황룡사로 청해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친히 나아가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하기를,

“지난해 여름, 대현법사는 금광경을 강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구치게 하였

는데, 스님의 법도는 어떠하오?”

“그것은 극히 작은 일이온데 무얼 그다지 칭찬하시옵니까? 이제 창해를 기울여

동악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있노라니 잠시 후에 궁중에서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가 달려오더니 고하기를,

“동쪽 연못이 넘쳐서 이미 내전 50여간이 떠내려 갔습니다.”

왕이 놀라 망연자실하므로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동해를 기울이고자 먼저 수맥을 불린 것 뿐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더니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쳐서 불전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 때 물러갔습

니다.”

이 일로 하여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기리어 읊는다.

법해의 물결을 보니 법계를 보는 것 같구나,

四海를 늘이고 줄임도 어렵지 않네.

높은 수미(須彌) 크다고 말하지 말라.

모두가 우리 스님 손 끝에 있네

번호:8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30 10:18 길이:60줄

삼국유사 제 5 권

신주(神呪) 제 6

밀본최사(密本催邪-밀본법사가 요사한 귀신을 물리침)

선덕왕 덕만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다. 홍륜사의 중 법척이 임금의 부름을 받아

병을 치료했지만 오래되어도 효험이 없었다. 이 때 밀본법사가 덕행이 나라 안에 소문

나 있었으므로 좌우 신하들이 왕께 법척을 밀본법사와 바꾸기를 청했다. 왕이 그를 궁

안으로 불러 맞이했다. 밀본은 왕의 침실 밖에서 약사경 읽기를 지극히 하더니, 가지

고 있던 육환장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서 늙은 여우 한 마리와 중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은 이내 나았다. 이 때 밀본의 이마 위로 오색의 신비

스러운 빛이 비치니, 보는 사람이 보두 몰랬다.

또 승상 김양도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 말도 못하고 수족도

움직이지 못했다. 김양도가 보면 항상 큰 귀신 하나가 작은 귀신을 거느리고 와서 집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을 맛보는 것이었다.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떼지어 온 귀신

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모욕했다. 양도가 귀신들을 물러가라고 명령하고 싶었지만 입이

붙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도의 아버지가 법류사의 중을 청해 와서 불경을 읽게 했

더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 쇠망치로 중의 머리를 때려 넘어뜨리자 중은 피

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뒤 사자를 보내어 밀본을 찾아오게 하니 사자가 돌아와서 말

했다.

“밀본법사께서 우리 청을 받아들여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여러 귀신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오면 불리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큰 귀신은 거만을 부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해로운 일이 있겠느냐?”

조금 후에 사방에서 쇠갑옷과 긴 창으로 무장한 대력신이 나타나더니 모든 귀신

들을 잡아 묶어가지고 갔다. 그러더니 수많은 천신들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조금 후에

밀본이 도착하였는데, 그가 경을 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은 다 나아서 말도 하고 몸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그는 지나간 일을 자세히 말했다. 양도는 이 일이 있은

후 한평생 게을리하지 않고 독실히 불교를 믿었다. 홍륜사 오당(吳堂-법당)의 주불인

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을 소상으로 만들고 또 그 당안에 금빛으로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일찍이 금곡사에서 살았다. 또 김유신은 늙은 거사 한 분과 교분이 두터

웠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유신공의 친척인 수천이 나

쁜 병에 걸려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공이 거사를 보내 진찰해 보도록 했다. 때마침

수천의 친구 인혜사가 중악에서 찾아왔다가 거사를 보더니 업신여겨 말했다.

“그대의 형상과 태도를 보니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남의 병을 고치

겠는가?”

그러자 거사는 말했다.

“나는 김공의 명을 받고 마지 못해 왔을 뿐이오.”

인혜가 말했다.

“그대는 내 신통력을 좀 보아라.”

그리고는 향로를 받들어 향을 피우고는 주문을 외었다. 이윽고 오색 구름이 이마

위를 둘러싸고 天花가 흩어져 날렸다.

거사는 말했다.

“스님의 신통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저에게도 역시 변변치 못하나마 재주

가 있으니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잠깐만 제 앞에서 계십시오.”

인혜는 그의 말에 따랐다. 거사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기자 인혜는 공중으로 거꾸로 올

라가는데 그 높이가 한 길이나 되었다. 한참 후에야 천천히 거꾸로 내려와 머리가 땅

에 박혀 말뚝처럼 우뚝 섰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밀고 잡아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사가 그 곳에

서 나가므로 인혜는 거꾸로 박힌 채 밤을 세웠다. 이튿날 수천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

을 알리자, 김공은 거사에게 가서 인혜를 풀어주게 했다. 그후 인혜는 다시는 재주를

부리는 체 하지 않았다.

기리어 읊는다.

홍자(紅紫)가 분분해 자꾸만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니,

슬프다, 어목(魚目-물고기의 눈은 구슬같지만 실제 구슬은 아님)도 어리석은

사람 속였구나.

거사가 손가락 가볍게 튀긴일 없었다면,

건상(巾箱-상자)속에 무부(옥과 비슷하나 옥이 아닌 돌)를 얼마나 담았을까.

번호:8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30 12:02 길이:97줄

혜통항룡(惠通降龍)

중 혜통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다. 白衣(속인)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 동구에 있었다. 하루는 집 동쪽의 시내에서 놀다가 한 마리의 수달

을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안에 버렸다.

그런데 그 이튿날 새벽에 가보니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

았더니, 뼈가 자기가 살던 본래의 굴속으로 되돌아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안고 쭈그리

고 있었다. 혜통은 그것을 바라보고 한참동안 놀라와하고 이상히 여겼다. 감탄하고 망

설이던 끝에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고 고쳤다.

당나라로 가서 무외삼장을 찾아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은 말했다.

“우이(隅夷-신라)의 사람이 어찌 法器가 될 수 있으랴.”

하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혜통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좇았다. 그래도 무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혜통은 분하고 얘가 타서 뜰에 서서

불(火)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지는데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삼장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더니 불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

지며 神呪를 외우니 상처가 아물어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王자 무늬와 같은 흉터

가 생겨졌다. 이로 말미암아 왕화상이라 불렀으며, 그의 깊은 인품을 인정하여 삼장은

그에게 인결(印訣-이심전심하는 心法의 비결)을 전해 주었다.

이 때 당나라 황실에서 공주가 병이 나서 고종은 삼장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자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명령을 받고 다른 곳에 거처하면서 흰 콩

한 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자, 그 콩이 변해서 흰 갑옷 입은 神兵이 되어 병

마들을 쫓으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그릇에 넣고 주

문을 외우니 검은 갑옷 입은 신병으로 변했다. 검은색과 흰색의 신병이 합하여 병마를

쫓으니 마침내 교룡(蛟龍)이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본국 문잉림으로 가서 인명을 몹시 해

쳤다. 그 때 정공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혜통을 만나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이 본국으로 와서 해가 심하니 속히 가서 독룡을 없애 주십

시오.”

이에 혜통은 정공과 함께 인덕 2년 을축(665)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용을 쫓아버

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하여 정공의 문 밖에 나서 자

랐다. 정공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아꼈었다. 신문

왕이 세상을 뜨자, 효소왕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임금의 무덤)을 닦고 장례길을 트는

데 정공집의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으므로 유사가 버드나무를 베려했다. 정

공은 노해 말하기를,

“차라리 내 머리를 베었지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

유사가 이 말을 임금에게 고하자 임금은 몹시 노해 사구에게 명령했다.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을 믿고 장차 불손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거스리며

제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제가 원하는대로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집을 흙으로 묻어 버렸다. 그리고 조정에서 논

의했다.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였으므로 반드시 꺼리고 싫어함이 있을 것이니, 마땅

히 그를 먼저 도모해야 합니다.”

이에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그를 잡게 했다.

혜통은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는 지붕 위로 올라가

사기병과 붉은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외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병목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말했다.

“너희들 목을 보아라.”

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서로 쳐다보며 놀랐다. 혜

통은 또 소리쳤다.

“만약 내가 이 병 목을 자르면 너희들 목도 잘라질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병사들은 궁궐로 돌아가 붉은 획이 그어진 목을 임금에게 보이며 사실을 아뢰니

임금은 말했다.

“화상의 신통력을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도모하겠느냐.”

하며 내버려 두었다.

왕녀에게 갑자기 병이 났다. 임금이 혜통을 불러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다.

임금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자 혜통은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 억울하게 나라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뉘우쳐서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해 주고, 혜

통은 국사로 삼았다.

용은 정공에게 원수를 갚고 나자 기장산으로 갔다. 거기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

독을 끼침이 더욱 심하니 백성들이 몹시 괴로와했다. 혜통은 그 산속에 들어가 용을

달래고 부살계(不殺戒)를 가르치니 웅신의 해가 그제야 그치었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해 그가 와서 주문을 외

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그러자 혜통은 말했다.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서 장인(藏人- 양민을 말함) 신충이란 자를 잘

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어 윤회환생할 때마다 보복하옵니

다. 지금 이 등창 또한 신충의 탓입니다. 마땅히 신충을 위해 절을 세우시고 명복을

빌어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라 했다. 절이 다 완성되

자 하늘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이 절을 세워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

또 노래소리 나는 곳에서는 절원당을 지었는데 그 당과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먼저 밀본법사의 뒤에 고승 명랑이 있었다. 용궁에 들어가 神印을 얻어

신유림을 처음 세우고 여러번 이웃 나라가 쳐들어 오는 것을 기도로써 물리쳤다. 이에

화상은 무외삼장의 중심 골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

을 감화시켰다. 또 숙명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를 풀게 해주니 밀교(진언밀교)

의 교풍이 그 때에 크게 떨쳤다.

천마산 총지암과 모악의 주석원등이 모두 거기에서 갈라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혜통의 속세 이름을 존승각간이라 한다. 각간은 곧 신라의 재상이다.

그러나 혜통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

아 잡았다 하나,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기리어 읊는다.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치는데,

한 지경 봄 깊어 두 언덕에 꽃이 피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음으로,

마외(魔外)를 가르쳐 서울에서 멀리했네.

번호:8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5/30 12:03 길이:40줄

명랑신인(明朗神印-명랑법사의 신인종)

금광사 본기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이 신라에 정생(挺生- 태어남)하여 당나라로 건너마 도를 배우고 돌아

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하고, 황금 천량을 보시받

아 몰래 땅 밑으로 와서 자기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어 자기집을 희사해서 절

을 만들고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했는데 광채가 빼어나게 빛났다.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라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이며, 신라의 사간 재량의 아들이다. 어머니

는 남간부인이며 혹 법승량이라고도 하는데, 소판 무림의 딸 김씨로서, 즉 자장의 누

이동생이다. 재량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국교 대덕이요, 그 다음은 의안

대덕이요, 법사는 그 막내아들이었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푸른빛 나는 구슬을 입에

삼키는 꿈을 꾸고서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 9년 을미(635)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총장 원년 무진(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그 남은 군사를 백제에 머물게 하고 장차 신라를 쳐 멸망시

키려고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설방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신인종의 시조가 되었다.

우리 태조(왕건)가 나라를 세울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했으므로 이에 안혜,낭

융의 후예인 광학,대연 두 고승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런 연유로 법사를 합하여 위로 인도의 고승 용수에

이르기까지를 9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그들을 위해 현성사를 세워 한 종파의 근거로

삼았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리 되는 곳에 원원사란 절이 있는데 세간에는 이렇게

전한다.

‘이 절은 안혜 등 4대덕이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

며, 4대덕의 유골이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혔으므로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4대덕은 모두 신라 때의 유명한 중이라고 하겠다.

돌백사 주첩주각에 쓰여 있는 것을 상고해 보면 이렇다. 경주 호장 거천의 어머

니는 아지녀이고 이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이다. 명주녀의 어머니인 적리녀의 아들

은 광학 대덕과 대연 삼중이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신인종에 귀의했다. 장흥 2년 신

묘(931)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임금의 행차를 따라다니며 분향 수도하니, 태조

는 그 노고를 포상하여 두 사람의 부모의 기일보(기일의 제사와 공양을 위한 보)로 전

답 몇 결을 돌백사에 주었다.

그렇다면 광학 대연 두 사람은 성조(태조)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으며, 안사(안혜

법사)등은 김유신과 더불어 원원사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나 광학 등 두 사람

의 뼈는 여기에 와서 안치되었을 뿐이며, 4대덕이 모두 원원사를 세웠다거나, 모두 성

조를 따라온 것도 아니다. 이것은 좀더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번호:8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2 01:29 길이:53줄

감통(感通) 제 7

선도성모 수희불사(仙桃聖母 隨喜佛事-선도성모가 불교를 좋아함)

진평왕 때에 지혜란 이름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홍사에 살

았는데, 불전을 새로이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런 어느 날 꿈 속에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아름다운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내가 바로 선도산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이 기쁘므로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존 삼상(三像)을 장

식하고 벽 위에는 53불 육류성중 및 모든 천신과 5악의 신군(神君)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 두 계절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

법회를 베풀므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아라.”

지혜가 놀라 깨어나 무리를 데리고 신사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백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를 완성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모가 이르는 대로 따랐던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

워 신라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은 편지를 소리개의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날려보내자, 이 선도산에 날아와 멈추므로 마침내

그 곳에서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를 진호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

제(望祭)의 위에 있게 하였다.

제 54대 경명왕은 매사냥을 즐겨 했는데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것 때문에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안되어 매가 날아와서 걸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으로 봉작하였다. 그

가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를 낳아 동국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

두 성군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빛으로 물들여 조복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신비스

러운 영검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에 보면 사신이 말하기를,

김부식이 정화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에 나갔더니 한

堂에 여선(女仙)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던 중국 제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

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라고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은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를 제사지낼 때 그 제문에 <어

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불타를 만들게 하고, 중생을 위하여 향화법회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다. 어찌 다

만 오래 사는 술법만을 배워 저 아득한 것에만 얽매일 것이냐.

기리어 읊는다.

서연산에 온 지가 몇 십년가,

천제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신선의 옷)을 짰네.

길이 사는 것 이상할 리 없지는 않지만,

금선(金仙-부처)을 뵙고 옥황이 되었네라.

번호:8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2 01:30 길이:51줄

욱면비 염불서승(郁面婢 念佛西昇-계집종 욱면이 염불하다 서쪽으로 가서

하늘로 올라감)

경덕왕 때 강주의 남자 신자 수십명이 서방정토를 정성껏 구하여 주의 경계에 미

타사란 절을 세우고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그 때 아간 귀진의 집

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욱면이라 불렀다. 욱면은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녀가 자신의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곡식 두 섬을 하룻밤 동안에 다 찧게 했는데,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했으며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위에

매고는 합장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신을 스스로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욱면랑은 堂에 들어가 염불하라.’

는 소리가 들렸다.

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정진하게 했

다. 그러자 미구에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은 몸이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로 가더니 해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

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오랫동안 하늘에서 그치

지 않았다. 그 당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

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동량 팔진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무리들을 모으

니 천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하고, 한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던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

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일찍이 소가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했다. 욱면은 일이 있어 하

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을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

사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햇으므로

계집종인 욱면도 따라갔고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9년 동안을 했는데, 을미년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

들보를 뚫고 올라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 곳에 보리사

란 절을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 곳에는 제2보리사를 지었다

그 전당에는 표시하기를 욱면등천지전이라 했다. 집 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되었는데도, 폭우나 세찬 눈이 아무리 내려도 집안이 젖지 않았다.

후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 1좌를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위에 모시고

그 이적(異跡)을 기록했는데, 지금도 그 방과 탑이 그대로 남아있다.

욱면이 간 후 귀진도 또한 그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하여,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어 이름을 법왕사라 했으며 전민(田民)을 바쳤다. 오랜 후 절은

허물어져 쓸쓸한 빈터가 되었다. 후에 대사 희경이 승선,유석,소경,이원장과 함께 발

원하여 절을 중건하였는데, 이 때 희경이 친히 토목공사를 맡았다. 재목을 처음 운반

하던 날 희경의 꿈에 노부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례씩 주었

다. 또 희경은 옛 신사 옆 재목을 베어다가 5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까지 더하

여 이 절은 매우 융성해졌으며 이 후 동남지방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희

경을 일컬어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논평하여 본다. 고을 안의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경덕왕 시대의 사실이다

징(徵)의 본전에 따르면 원화 3년 무자(808) 애장왕 때의 일이라 했다. 경덕왕 이 후

에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년이나 된다. 귀

징이 먼저가 되고 욱면이 뒤가 되므로 그 차례가 향전과 어긋난다. 여기에다 이 두 가

자를 다 실어 의심을 없앤다.

기리어 읊는다.

서편 이웃 옛 절에는 불등 밝은데

방아 찧고 갔다 오면 밤은 깊어 이경이네.

한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어지고,

손바닥 끈을 꿰니 그 몸 바로 잊음이네.

번호:8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3 00:22 길이:39줄

광덕과 엄장

문무왕 때에 중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으로 돌아가는 이는 마땅히 서로 알리도록 하자.”

광덕은 분황 서리에 숨어서 신 삼는 것을 업으로 하면서 처자와 함께 살았으며,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대종도경(大種刀耕)하면서 살았다.

어느 날 해그림자가 붉게 노을지고 솔그늘이 고요히 저무는데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지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은

땅까지 드리웠다.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

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광덕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지냈다. 그리고 그 부

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가 승낙하므로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밤에 잘때 관계하려 하니 그

부인은 함부로 하지 않고 말했다.

“스님께서 서방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

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랬는데 어찌 거리끼는가?”

광덕의 아내는 말했다.

“남편은 나와 십여년을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함께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이

제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

불을 불렀습니다. 혹은 16관을 만들어 미혹을 깨치고 달관하여 밝은 달빛이 창에 비치

면 때때로 그 빛 위에 올라 가부좌 하였습니다. 정성을 쏟음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

방정토에 가지 않으려 한들 어디 갈 데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천리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이 하는 짓은 동방으로 가는 것

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며 물러 나왔다. 그 길로 원효법사의 처소

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

장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뜻으로 도를 닦았으므

로 또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따.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과 해동고승전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19응신 가운데 하나였다. 광

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달아, 이제 서방까지 가시려오.

무량수불 앞에 알리어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두 손 모두어

원왕생(願往生) 원왕생 그리는 사람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두고 48대원(大願) 이루실까?

번호:8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3 00:24 길이:42줄

경흥우성(憬興遇聖- 경흥이 대성 문수보살을 만남)

신문왕 때의 고승 경흥은 성이 水씨이며 웅천주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

장에 통달하니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개요 원년(681)에 문무왕이 장차 승하하려

할 때 신문왕에게 고명(顧命)하기를,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노(國老)로 삼고 삼랑사에서 살게 했다.

경흥이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이나 되었다. 이 때 여승이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화엄경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말을 얘기했다.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해서 생긴 것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더니 열 한 가지 모습을 지어 각각 익슬스럽기 짝이 없는 춤을 추게

하니 그 모습은 뾰죽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모습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모두 너무 우스워 턱을 떨어뜨릴 지경이었다. 법사의 병은 자신도 모르는 사

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자 여승은 문을 나가 남항사에 들어가 숨었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새로이 꾸며 놓은 佛畵 11면원통상 앞에 있었다.

경흥이 어느 날 대궐에 들어가고자 했다. 시종하는 이들은 동문 밖에서 먼저 채

비를 했는데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였고, 신발과 갓 또한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가

던 행인들은 모두 길을 비켰다. 그런데 그 때 거사 한사람이 몹시 엉성한 모습에 지팡

이를 짚고 있었다.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위에서 쉬고 있는데, 그

광주리 속에는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기를,

“너는 중의 옷을 입고서 어찌 부정한 물건을 짊어지고 있느냐?”

거사는 말했다.

“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

고 있는 것을 싫어할 게 있다는 말인가?”

말을 마치자 그는 일어나 사라졌다. 경흥이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뒤쫓게 했다. 그는 남산 문수사 문 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그가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고 마른 고기는 소나무 껍질로 변해

있었다. 사자가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자 경흥은 이르 듣고 탄식하였다.

“문수보살이 와서 내가 말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구나.”

그 후 경흥은 종신토록 말을 타지 않았다.

경흥이 뿌린 덕의 향기와 맛은 석(釋) 현본이 엮은 삼랑사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일찍이 보현장경을 보고, 미륵보살이 이르기를

“나는 내세에는 염부제(閻浮提)에 나서 먼저 석가의 말법(末法)제자들을 제도할

것이다. 그러나 다만 말탄 비구승만은 제외시켜서 그들이 아예 부처를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니 어찌 경계치 아니할 것인가.

기리어 읊는다.

옛 어진이가 보인 모범 뜻 더욱 많았는데

어찌하여 아손(兒孫)들은 절차(切嵯)하지 않는가.

마른 고기 등에 진 건 오히려 괜찮으나

다음 날 용화(龍華)의 짐 어찌 하리오.

번호:8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4 00:01 길이:41줄

진신수공(眞身受供)

장수 원년 임진(692)에 효소왕이 즉위하여 망덕사를 세우고 장차 당나라 제실의

복을 받들려고 했다. 그 후 경덕왕이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

사지난(安史之亂)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당나라 제실을 위해 세운 절이니 마땅히 그 감응이 있다.”

8년 정유에 낙성회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나가 공양하는데, 몹시 허술한 모습의

한 비구가 몸을 구부리고 뜰에 서서 청햇다.

“빈도도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그에게 말석에 참석하도록 허락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조로 말했

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파암에 있습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중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하늘로 떠서 남쪽을 향해 날아갔다. 왕은 놀라웁고 부

끄러움에 동쪽 언덕으로 달려 올라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했다. 그는 남산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라고 하는 곳에 와서 돌 위에 지

팡이와 바리때를 벗어놓고 숨어버렸다. 사자가 돌아와 복명하자 왕은 즉시 석가사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각각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

졌다.

지론 제 4에는 이렇게 적혔다.

옛날에 계빈국 삼장법사가 아란약법을 행하여 일왕사에 이르렀더니 절에서는 커

다란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옷이 누추하다 하여 문지기는 문을 막고 그

를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여러 번 들어가려 했으나 추한 옷 때문에 번번히 들어가지

못하자, 그는 다른 방편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가니 문지기는 막지 않고 들어

가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 자리에 참례하게 되자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얻어 그것을

옷어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러번 왔으나 매번 들어올 수 없었는데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어

여러가지 음식을 대했으니 이 옷에게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도 같은 사례인 것 같다.

기리어 읊는다.

부처님께 향 사르고 새 불화를 보았고,

음식을 공향하고 옛 친구를 불렀네.

이제 좇아 비파암 저 달은,

때때로 구름 속 더디 못에 비치니라.

번호:8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4 00:03 길이:62줄

월명사의 도솔가

경덕왕 19년 경자(760) 4월 초 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동안이나 사

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인연있는 중을 청해서 산화공덕(散花攻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에 조원전에 정결히 단을 만들고 임금이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있는 중이 오

기를 기다렸다. 이 때 월명사가 천맥(阡陌)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은 사라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뢰었다.

“신승(臣僧)은 그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겨우 향가만 알 뿐이오며 성범

(聲梵)에는 익숙치 못하옵니다.”

왕은 말했다.

“이미 인연이 닿은 중이니 향가만 하여도 좋소.”

월명은 이에 도솔가를 지어 바쳤는데 그 가사는 이렇다.

오늘 이에 산화가를 불러,

뿌린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령을 심부름하여,

미륵좌주를 모시도다.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한 송이 꽃 청운에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 쓰는 것은,

멀리 도솔대선을 맞이하리.

지금 세간에서는 이를 산화가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는 달리 또 있는데, 그 글은 많아서 싣지 않는다.

조금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은 이것을 가상하게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 108개를 하사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한 명의 동자가 나타났다. 모양이 곱고 깨끗한 동자가 공손

히 차와 염주를 받들고 대궐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가버렸다. 월명은 이 동자를 내궁

의 사자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로 알았다. 그러나 서로 알고 보니 모두 잘못이었다.

그러자 왕은 심히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뒤를 쫓게 했더니 동자는 내원의 탑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리고 차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 미륵상 옆에 있었다. 이

와 같이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격(昭假, 가는 格과 같다.

밝게 감동시킴)시킬 수 있었다. 조정이나 세간에 널리 퍼져 이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

다. 왕은 더욱 그를 공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제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

다. 그러자 문득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지전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졌다. 향가는 이렇다.

생사의 길은, 이승에 있으매 두려워 지고

나는 가네 말도 못이르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과 같이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누나.

아, 미타찰에서 너늘 만날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은 늘 사천왕사에서 지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피리를 불면서 문

앞의 큰 길을 기나는데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멈추었다. 이로 인해 그곳을 월명리라

했고, 월명사란 이름도 이 일로 해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의 제자이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 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기리어 읊는다.

바람은 지전 날려 죽은 누이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소리 밝은 달 흔들어 항아가 머무르네.

도솔천이 하늘같이 멀다 마오.

만덕화 (萬德花) 한 곡으로 즐겨 맞았네.

번호:8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4 00:04 길이:37줄

선율환생(善律還生)

망덕사의 중 선율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을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공사

가 아직 끝나기 전에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잡혀 명부(冥府)에 이르렀다. 명사(冥司)

가 묻기를

“너는 인간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였느냐?”

“빈도는 만년에 대품반야경을 만들다가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너의 수록에 의하면 네 수명은 이미 다했지만, 무엇보다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

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 보전을 이루어 끝내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데 도중에 한 여자가 울면서 그의 앞으로 와서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신라의 남염주 사람입니다. 부모가 금강사의 논 1묘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에 잡혀와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저희 부모님께 알려 속히 그 논을 돌려 주도록 해주시어요. 그

리고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를 침구 사이

에 감추어 두었으니 부디 법사께서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

아 경폭(經幅)으로 써주시어요. 그리 하시오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

를 벗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선율은 말했다.

“그럼 네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 구원사의 서남쪽 마을이옵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되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열흘이 지나 남산 동족 기슭에 장사지냈으므로 무덤 속

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쳤다. 지나가던 목동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그러

자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냈다.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다. 여자가 죽은 지는 15년이나 되었는데 참기름과 베는 영

락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그 여자의 말대로 하여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

혼이 찾아와서 말했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놀라와 하며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

었다. 이리하여 서로 도와서 반야경을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 승사서고 안에

있다.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씩 그것을 펴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기리어 읊는다.

부럽구려, 우리 스님 인연좋아서,

영혼이 되돌아와 옛 고장에 노니시네.

혹여나 부모님이 저의 안부 물으시면,

날 위해 그 논 한 묘 돌려주라 하소서.

번호:9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5 00:01 길이:130줄

김현감호(金現感虎-김현이 범을 감동시킴)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에서 보름날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자들은

홍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했다. 원성왕때에 낭군(郎君)김현이 있었는데

밤이 깊도록 쉬지 않고 홀로 탑을 돌았다. 그 때 한 처녀도 염불을 외면서 따라 돌다

가 서로 마음이 움직여 눈을 주었다. 돌기를 마치자 그는 구석진 곳으로 처녀를 데리

고 가 정을 통했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

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가다가 서산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에 들어가니 늙은

할미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이가 누구냐?”

처녀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비록 좋은 일이긴 하나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므로 나무

랄 수도 없다.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려우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어라.”

잠시 후에 범 세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들어오더니 사람과 같이 말을 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는구나. 요깃거리가 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닐꼬?”

늙은 할미와 처녀는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됐지, 무슨 미친 소리냐”

이 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함이 너무도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

겠노라.”

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세 분 오빠들이 멀리 피해 가셔서 스스로를 징계하신다면 제가 그 벌을 대신 받

겠습니다.”

하고 처녀가 말하자,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김현에게 돌아와 말했다.

“처음에 낭군이 저희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으나 이제

는 숨김없이 감히 진실을 말씀드리겟습니다. 또한 저와 낭군은 비록 유는 다르지만 하

루 저녁의 즐거움을 함께 했으니 중한 부부의 의를 맺은 것입니다. 세 오빠의 악은 이

제 하늘이 미워하시니 저희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 은덕을 갚는 것과 같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市街)에 들어가 사람을 심히 해하면 나라 사람들로서는 저를 어찌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임금께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

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의 북쪽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낭군을 기다리고 있겠습니

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함은 인륜의 도리이지만, 다른 유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

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잘 지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함인데 어찌 차마 배필

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랄 수 있겠소.”

“낭군은 그런 말 마시어요. 이제 제가 일찍 죽게 됨은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제

소원입니다. 낭군께는 경사요, 우리 일족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번

죽어 다섯 가지의 이로움이 오는데 어찌 그것을 어기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강하여 좋은 과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게 해주신다면 낭군의 은혜는 이보

다 더 큰 것이 없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 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

사람을 해함이 너무 심하니 감히 당해 내지 못했다. 원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

렸다.

“범을 잡는 사람에게는 2급의 벼슬을 주겠다.”

이에 김현이 대궐로 나가 아뢰었다.

“소신이 범을 잡겠습니다.”

왕은 벼슬부터 먼저 주고 그를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 속으로 들어가자 범은 낭자로 변하여 반가이 웃으면서 말했

다.

“어젯밤 낭군이 저와 마음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입은 사람들은 전부 홍륜사의 孼)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 이내

나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니 곧 범이었다.

김현이 숲에서 나와 말했다.

“방금 내가 쉽사리 범을 잡았다.”

그리고 그 사유는 숨긴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범이 시킨대로 상처를 치료했더니

다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범에게 입은 상처에는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하자 서천가에 절을 짓고 호원사라 이름하였다. 항상 범망경을 강하

영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맛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한 은혜에 보답

했다. 김현이 죽을 때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것을 붓으로 적어 전하

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일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글 이름을 논호림(論虎

林)이라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칭한다.

정원 9년에 신도징이 야인으로서 당의 한주십방현위에 임명되어 진부현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

했다. 그 때 길 옆에 초가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불이 피워져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 곁으로 나아가니 늙은 부모와 한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 처녀의 나이는 십사,오세쯤 되어 보였다. 비록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

었지만, 눈처럼 흰 살결에 꽃같은 얼굴로써 동작이 아주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

징이 온 것을 보자 급히 일어나 말했다.

“손님이 차가운 눈을 무릅쓰고 오셨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쪼이시지요.”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고 눈보라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청

하기를,

“서쪽의 현까지 가려면 길이 아직 멉니다. 부디 여기 좀 재워 주십시오.”

“누추한 집안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감히 명을 받겠습니다.”

부모의 대답에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방에 들어 침구를 폈다. 처녀는

손님이 유숙함을 보자 얼굴을 씻고 곱게 단장하고 장막 사이로 나오는데 그 한아한 태

도는 처음 볼 때보다 더 나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소낭자는 총명하고 스릭로움이 남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아직 미혼이면 혼인을

청하오니 어떠신지요.”

그 아버지는 대답했다.

“뜻밖의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좋은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신도징이 사위의 예를 청했다. 그리고는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워 길을

떠났다. 임지에 도착해 보니 봉록이 너무 적었다. 그러나 아내가 함써 집안 일을 돌보

았으므로 모두들 마음에 즐거움 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1남1녀를 두었는데,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와 그는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그가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하다.

벼슬길에 나아가니 매복(梅福-사람이름)에게 면목없고,

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에게 부끄럽구나.

이 정을 내 어디에 비유할까,

냇물 위에 원앙새는 떠 있는데.

그의 아내는 이 시를 읊으며 잠잠히 화답할 듯하였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아내는 문득 슬퍼하

며 말했다.

“전번에 주신 시에 화답할 것이 잇습니다.”

그리고는 읊었다.

금슬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다.

시절이 변할까 늘 근심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걱정하누나.

그 후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가보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

음이 깊어 하루종일 울었다. 홀연 벽 모퉁이에 있는 한 장의 호피를 보고 크게 웃으면

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걸 내 몰랐구나”

하더니 곧 그것을 뒤집어 쓰니 변하여 마침내 범이 되었는데, 어흥거리며 할퀴더

니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크게 울었으나 간 곳을 끝내 알지 못했다.

슬프다! 신도징과 김현 두 분이 짐승과 접했을 때 그것이 변해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똑같다.

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그를 배반하는 시를 주고 어흥거리며 할퀴다 돌아난 점이

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는 했으나 처방을 일러줘 사람

들을 구해 주었다. 짐승도 어질기가 이와 같은데 사람으로서 짐승만도 못한 자가 지금

도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 사적의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불러 악을 징계하려고 하자 자신이 대신했으며, 신령한 약 방문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구하고 절을 세우고 불게를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짐승의 본질이 어진탓

에 그런 것이 아니고,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었으므로 능히 김현공

이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한 것 뿐이다. 그 때

복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기리어 읊는다.

산가(山家)의 세 오라비 많은 죄악에

고운 입의 한번 응낙 어찌하리오

다섯 가지 의로우니 만번 죽음은 가벼워라.

숲속에서 맡긴 몸 낙화(落花)마냥 져갔구나.

번호:91/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5 00:02 길이:26줄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제 5 거열랑 제 6 실처랑 제 7 보동랑 등 화랑의 무리 세 사람이 풍악에 놀러가

려는데 혜성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했다. 낭도들은 이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여 그 여

행을 중지하려 했다. 이 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서 부르니 별의 변괴는 사라지고 일

본 군사가 저희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임금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

악에 보내서 놀게 했다.

노래는 이렇다.

옛날 동해가의 건달바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 고 훼를 든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이 산구경 오심 듣고 달도 부지런히 빛을 펴는데,

살 별을 바라보며 ‘혜성이여!’ 하며 알린 이가 있구나

아아, 달은 저 아래로 지누나. 이봐 무슨 혜성이 있을까.

정수사 구빙녀(正秀師 救氷女-정수스님이 얼어죽게 된 여인을 구함)

제 40대 애장왕 때에 중 정수는 황룡사에 우거해 있었다. 눈이 많이 쌓인 겨울

어느 날,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삼랑사에서 돌아오다가 천엄사 문밖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는 누어 얼어 죽게 되었다.

스님이 이들을 불쌍히 보고 그녀을 안아주었더니 한참 있따 깨어났다. 그러자 옷

을 벗어 덮어주고 벌거벗은 채 절로 달려와서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세웠다. 한밤

중 궁정 뜰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황룡사의 중 정수를 마땅히 임금의 스승으로 봉하라.”

왕은 급히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하니 그 사실이 모두 왕에게 알려졌다.

왕은 위의를 갖추어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고 국사로 삼았다.

번호:92/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02:35 길이:84줄

피은(避隱) 제 8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삽량주 아곡현의 영취산에 이상한 중이 있었다. 암자에서 수십년을 살았으나 고

을에서는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며, 스님도 또한 자기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늘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신통력이 있었다.

용삭 초년에 지통이란 중이 있었는데 본디 이량공 집의 종이었다. 일곱살에 출가

했는데 그 때 까마귀가 와서 울면서 말했다.

“영취산에 들어가 낭지의 제자가 되라.”

지통은 이 말을 듣고 그 산을 찾아가서 골짜기의 나무 밑에서 쉬고 있다가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말했다.

“나는 보현보살인데 네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한다.”

하더니 계를 베푼 후 숨어 버렸다. 그 때 지통은 마음이 두루 넓어지고 지증(智

證)이 문득 두루 통해졌다. 다시 길을 걷다가 한 중을 만났다. 그가 낭지 스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중이 되물었다.

“왜 낭지를 묻느냐?”

지통이 신기한 까마귀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중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낭지인데 지금 집앞에 또한 까마귀가 와서 알리기를, 거룩한 아이가

바야흐로 스님께로 오고 있으니 마땅히 나가 영접하라고 하여 이렇게 나와 맞이하는

것이다.”

하며 손을 잡고 감탄하고 말했다.

“신령스런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내게로 오게 했고, 또 내게 알려 너를 맞이하게

하니 정녕코 상서로운 일이다. 아마 산령(山靈)의 은밀한 도움인가 보구나. 전하는 말

에 산의 주인은 변재천녀(辯才天女)라고 한다.”

지통이 이 말을 듣고 울며 감사하고 스님에게 귀의했다. 이윽고 계를 주려 하니

지통이 말했다.

“저는 동구 나무 밑에서 보현보살에게 이미 정계(正戒)를 받았습니다.”

낭지는 감탄하고,

“잘했구나. 너는 이미 보살의 만분지계(滿分之戒)를 친히 받았구나. 나는 태어난

후 조석으로 조심하고 은근히 지성(보현보살)을 만나기를 염원했지만 오히려 정성이

감동되지 못했는데, 이제 너는 이미 계를 받았으니 내가 네게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구

나.”

하며 도리어 지통에게 예했다. 이로 인해 그 나무를 보현수라 했다.

“법사께서 이 절에 계신 지가 오래 된 듯합니다.”

지통이 말하자 낭지는 대답했다.

“법흥왕 정미(527)에 처음으로 여기 와서 살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통이 이 산에 온 것이 문무왕 즉위 원년(661)이니 계산해 보면 135년이나 된

다.”

지통은 후에 의상의 처소에 가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불교의 교화에 이

바지하엿으니, 이가 곧 추동기(錐洞記)의 작자이다.

원효가 반고사에서 잇을 때 늘 낭지를 찾아가 뵈니 그는 원효에게 초장관문과 안

신사심론을 저술하게 했다. 원효가 저술을 끝마친 후에 은사 문선을 시켜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편미에 싯귀를 적었는데 이러하다.

서쪽 골짜기 사미는 공손히,

동쪽 봉우리 상덕 고암 전에 예하노라

가는 티끌 불어 보내어 영취산에 더하고,

용연에 잔 물방울 던지도다.

산의 동쪽에 대화강이 있는데 이는 곧 중국 대화지의 용의 복을 빌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용연이라 했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큰 성인이었다. 이런 두 성인으로서도

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섬기었으니 낭지 스님의 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알 수 있다.

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의 청량산에 가서 신도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는

잠시 후 곧 돌아왔는데, 그 곳 중들은 아무도 그가 사는 곳을 모르면서도 이웃에 사는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청량산 절에서 하루는 여러 중들에게 명령했다.

“항상 이 절에 사는 자는 제외하고 다른 절에서 온 중은 각기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진귀한 식물을 가져다 도량에 바쳐라.”

낭지는 이튿날 산속의 이상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 바쳤다. 그 곳의 중이 그것

을 보고 말했다.

“이 나무는 범명으로 달제가라 하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하는데, 오직 서천축과

해동의 두 영취산에만 있다. 이 두산은 모두 제 10법운지로서 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자일 것이다.”

마침내 그 행삭을 살펴 해동 영취산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스님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그 이름이 나라 안팎에 나타났다. 나라 사람들이 그 암

자를 혁목암이라 불렀다. 지금 혁목사의 북쪽 산등성이에 옛 절터가 있는데 그 곳이

그 절이 있던 자리다.

영취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낭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암자 자리는 가섭불 당시의 절터였으므로 땅을 파서 등항 두개를 얻었다.”

고 하였다. 원성왕 때에는 대덕 연희가 이 산 속에 와 살면서 낭지스님의 전기를

지었는데, 이것이 세상에 퍼졌다고 했다.

화엄경을 살펴보면 제 10은 법운지라 했으니 지금 스님이 구름을 탄 것은 대개

부처가 삼지로 꼽고, 원효가 1백몸으로 나누는 것 같은 것이다.

기리어 읊는다.

생각하니 산에 숨어 수도한 지 백년간에,

높은 이름 일찍이 세상에 아니 나고,

산새의 한가한 지저귐 못 금하는가,

구름타고 오가는 것 속절없이 알게 되었네.

번호:9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02:36 길이:36줄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취산에 숨어 살면서 항상 연경을 읽어 보현보살의 관행법

을 닦았다. 뜰의 연못에는 늘 연꽃 두 세 송이가 있었는데 사시 시들지 않았다.

원성왕은 그 상서롭고 기이한 말을 듣자 그를 불러 국사로 삼으려 했다. 스님은

그 소식을 듣자 암자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가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고 있는데

한 노인이 밭을 갈다가 스님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자 스님이 말했다.

“내 듣자니 나라에서 잘못 듣고 나를 관작으로 얽매려 해 피해 가는 중입니다.”

노인은 이 말을 듣자 말했다.

“이 곳에서 팔 것이지 왜 먼 데서만 팔려고 수고하십니까? 스님이야말로 이름 팔

기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연회는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행각하여 듣지 않고 마침내 몇 리를 더 갔다.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연회는 아까와 같이 대답하

자 노파는 말했다.

“아까 앞에서 사람을 만났습니까?”

연회는 대답했다.

“한 노인이 있었는데 나를 심히 업신여기기에 기분이 불쾌하여 그만 와 버렸습니

다.”

노파가 말했다.

“그 분이 문수보살이온데 그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어쩌시겠습까.”

그 말을 듣자 연회는 놀랍고 또한 송구하여 급히 그 노인에게로 되돌아가서 머리

를 숙이고 사과햇다.

“성인의 말씀을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이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냇

가의 노파는 누구이옵니까?”

노인은 말했다.

“그는 변재천녀이다.”

말을 마치자 즉시 숨어 버렸다. 이에 연회가 암자로 돌아오니, 조금 후에 왕의

사자가 명을 받들고 와서 그를 불렀다. 연회는 진작 받았어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임금

의 명대로 대궐로 가자 왕은 그를 국사로 봉했다.

연회 스님이 노인에게 감응받은 곳을 이름하여 문수점이라 하고, 여인을 만나본

곳을 아니점이라했다.

기리어 읊는다.

저자에선 어진이가 오래 숨기 어렵고,

주머니의 송곳끝을 감추기 어렵네.

뜰 아래 연꽃으로 세상에 나갔지.

깊지 않은 운산이 탓은 아닐세.

번호:94/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37 길이:61줄

혜현구정(惠現求靜)

중 혜현은 백제 사람이다. 일찍이 어려서 출가하여 힘써 뜻을 모아 법화경을 외

는 것으로 업을 삼아서봤낫途 기도하여 복을 청하므로 부처의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삼론을 다 배우고 수도를 시작하니 신명에 통하였다.

처음에는 북부 수덕사에 살았다. 그 곳에서 신도가 있으면 불경을 강론하고 없으

면 불경을 외웠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도 그 품격을 흠모하여 문 밖에는 항상 신발

이 가득했다.

차차 번거롭고 시끄러우므로 마침내 강남의 달라산에 가서 살았다. 그 산은 매우

험준하여 사람의 내왕이 힘들어 찾아보기 어려웠다. 혜현은 고요히 앉아 세상을 잊고

산 속에서 생을 마쳤는데, 동학들이 그 시체를 운구하여 석실 속에 모셨다. 그㉣쨉

범이 그 유해를 먹어치우고 해골과 혀만 남겼는데, 추위와 더위가 세번 지나가도 혀는

오히려 붉고 부드러웠다. 그 후 차차 변하여 자주빛이 되더니 돌과 같이 단단해졌다.

중과 속인들이 이를 공경하여 석탑에 간직했다. 그의 나이 58세에 운명하였으니 즉 정

관 초년이었다. 혜현은 일찍이 중국에 유학간 일도 없거니와 물러가 고요히 일생을 마

쳤으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고 전기까지 쓰여 당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 고구려의 중 파약은 중국 천태산에 들어가 지자의 교관(敎觀)을 받았다. 다

만 신이한 사람으로 알려졌을 뿐 산중에서 죽었다. 당승전에도 실려있는데 자못 영험

한 교훈이 많다.

기리어 읊는다.

주미로 설법함도 한바탕 수로로울 뿐,

지난 날 독경소리 구름 속에 잠들었네.

세간에 이름을 날려,

죽어서도 꽃다운 혀 연꽃 같아라.

신충괘관(信忠掛冠)

효성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

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자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했다.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

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깜빡 잊고 명단에 넣지 않았다. 이에 신충이 원망스런 노래를

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랐다. 왕이 이상히 여겨 여러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 뻔 했구나.”

하며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자 잣나무는 그 때야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나무는 가을에도 아니 이울어져 너를 어찌 잊을꼬. 하시던

우러러 보던 얼굴은 계시건만,

옛 못의 달 그림자 가는 물살 원망하듯,

너의 모습 바라보나, 누리는 싫어라.

이렇듯 전귀는 있으나 후귀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왕, 경덕왕 두 왕조

에 벼슬하여 그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경덕왕 22년 계묘(763)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그 곳에서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며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했다. 임금의 진영을 모셔 두었는데 금

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남쪽으로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현재는 와전되

어 소화리라 한다.

또 별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자신도

또한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고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실음으로 의심하는 점

을 덜고자 한다.

기리어 읊는다.

공명은 다하지 못하고 귀밑 털이 먼저 세니,

임금의 총애야 비록 많아도 바쁘고 바쁜 한 평생이네.

언덕 저편의 푸른 산 꿈결에 자주 보이니

내 가서 향화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라.

번호:95/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39 길이:50줄

포산 2성(包山 二聖)

신라 때에 관기와 도성이란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수는 없

다. 둘이 함께 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도성은

북쪽 굴에서 살았다. 서로 10여리쯤의 거리였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서로

늘 왕래하였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 속의 나무가 모두 남쪽을 향해 굽혀 영접하는

것 같았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

면, 역시 나무가 북쪽으로 구부러지므로 도성이 관기에게 오게 되었다. 이처럼 지내기

를 몇 해, 항상 그렇듯 도성은 그가 거주하는 뒷산의 높은 바위에 좌선하고 있었다.

하루는 바위 사이로부터 몸을 빼어 나와 몸을 허공에 날리며 떠나갔는데 간 곳은 알

수가 없었다. 혹자는 수창군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자 관기도 또한 뒤를 따

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두 성사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살던 곳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

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 7년 임오(982)에 중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살았다. 그는 만일

미타도량을 열어 부지런히 50여년을 전념했는데 특이한 상서가 여러번 있었다. 이 때

현풍의 신도 20여명이 결사(結社)하여 해마다 향나무를 주워다 절에 바쳤다. 산에 가

서 향나무를 주워다 절에 바쳤다. 산에 가서 향나무를 채취하다가 쪼개고 씻어서 발

위에 펼쳐두면 그 향나무가 밤이 되면 촛불처럼 빛을 발했다. 그러자 고을 사람들은

그 향나무에게 보시하고 빛을 얻는 해라고 하며 축하했다. 이는 두 성사의 영감이거나

산신의 도움 같았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이로 일찍이 가섭불 때에 부처님의 부탁

을 받았는데 그 본서에 말하기를,

‘산 속에서 1천명의 출세를 기다려 남은 과보를 받겠습니다.’

라고 했다.

산속에서 일찍이 9聖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9성

은 관기,도성,반사,첩사,도의,자양,성범,금물녀,백우사들이다.

기리어 읊는다.

달빛를 밟고 서로 찾아 운천(雲泉)을 희롱하던,

두 노인의 풍류 몇 백 년이 되었는고,

연하(烟霞) 가득한 구렁 고목만 무성한데.

찬 그림자 어긋버긋 서로 맞는 모양일레.

반은 음이 반(般)인데 우리말로는 피나무라고 하며, 첩은 음이 첩(牒)인데 우리

말로는 떡갈나무라 한다.

이 두 성사 반사,첩사는 오랫동안 산골에 숨어서 지내므로 인간 세상과는 사귀지

않았다.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을 대신하여 추위와 더위를 겪었으며 습기를 막고 하체

를 가릴 뿐이었다. 그러므로 반사,첩사로 호를 삼았던 것이다. 듣자니 일찍이 풍악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날의 은자들의 세속을 떠난 운치가 이와 같음이

많으나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우거할 때에 두 스님의 미덕을 기린 글 한 수를 쓴 일이 있

는데, 이것을 아울러 여기 적는다.

자모와 황정으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나뭇잎,

누에 쳐 짜낸 베가 아닐세.

찬바람 쌩쌩 불고 돌은 험한데,

해저문 숲 속으로 나무해 돌아오네.

밤깊어 달 밝은데 그 아래 앉으면, 반신은 바람따라 삽연히 나는 듯.

떨어진 포단에 자노라면, 속세엔 꿈 속에도 아니 가네라.

운유는 가버리고 두 암자는 폐허인데, 인적 드문 산 사슴만 뛰노누나.

번호:9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0 길이:57줄

영재우적(永才遇賊)

중 영재는 천성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향가를 잘했다. 만년에

장차 남악에 은거하려고 대현령에 이르렀을 때 60여명의 도둑떼를 만났다. 도둑들이

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화기로운 태도로 그

들을 대하였다. 이상히 여긴 도둑들이 그의 이름을 묻자 영재라 대답했다. 평소 도둑

들도 들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노래를 짓게 햇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

내 마음의 시늉을 모르던 날은,

멀리 ()()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소.

오직 그릇된 파계주를 만나 두려워할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랴.

이 칼이야 지나고 나면 좋은 날이 새려니만,

아아, 오직 이만한 善은 아니 좋은 일 되느니라.

도둑들은 이 노래에 감동하여 비단 2단을 주자 영재는 웃으면서 이를 사양하고

말했다.

“재물이 지옥으로 가는 근본임을 알고 바야흐로 깊은 산속으로 피해가서 여생을

마치려 하는데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하며 그것을 땅에 던졌다. 도둑들은 그 말에 다시 감동되어 가졌던 칼과 창을 모

두 버리고 머리를 깎고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90이었으니 원성대왕의 시대이다.

기리어 읊는다.

지팡이 짚고 산으로 들어가니 그 뜻 한결 깊은데,

비단과 구슬로 어찌 마음 다스릴까.

녹림의 군자들아, 그거일랑 주지마라.

지옥은 다름 아닌 寸金이 근본이다.

물계자(勿稽子)

제 10대 내해왕이 즉위한 지 17년 임진(212)에 보라국,고자국,사물국 등 여덟 나

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은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

를 이끌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다. 이 때 물계자의 군공이 으뜸이

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사 그 공을 상받지 못했다. 그러자 어느 사람이 물계자

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 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내려지지 않았으니 태자께서

당신을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시오?”

물계자는 대답했다.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

“그렇다면 이 일을 임금께 사뢰는 게 좋지 않겠소?”

그가 말하자 물계자는 대답했다.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림은 지사가 할 바가 아

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

내해왕 20년 을미(215)에 골포국등 세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를

쳤다. 그러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이 때

도 물계자가 죽인 적병의 시체는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거론치 않았다.

물계자는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만나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

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생사를 돌보지 않음을 충이라고 했소. 보라와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런데도 나는 일

찍이 내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 어찌 불충이 아니겠소. 이미 불

충으로서 임금을 섬겨 아버님께 그 누가 미쳤으니 어떻게 효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충과 효의 도를 잃었는데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과 시정에 설 수 있겠소.”

이에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메고는 사체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대나무

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노래를 짓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

냇물 소리에 비겨 거문고를 타며 곡조를 붙이고 하였다. 그는 그 곳에 숨어 다시는 세

상에 나오지 않았다.

번호:97/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1 길이:30줄

영여사(迎如師)

실제사의 중 영여의 족속과 성씨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덕과 행실이 모

두 높았다. 경덕왕은 그를 맞아 공양을 드리기 위해 사자를 보내서 불렀다. 영여가 대

궐에 들어가 제를 마치고는 돌아가려 하자, 왕은 사자를 보내 그를 절에까지 모셔 드

리도록 했다. 그는 절에 들어서자마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숨어버렸다. 사자가 와

서 아뢰니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겼고, 그를 국사에 추봉했다. 또한 그 후로 다시는 세

상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그 절을 국사방이라 부른다.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

삽량주의 동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포천산이 있다. 그 곳에는 석굴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나게 아름다와 마치 사람이 깎아놓은 것같았다. 그 곳에 성명

이 자세하지 않은 다섯 비구가 와서 아미타불을 염하고 서방정토를 구하고 있었다. 그

러기를 몇 십년만에 서쪽으로부터 홀연히 성중(聖衆)이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는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오랄가다가 통도사 문밖에 이르러 머물

렀는데, 그 때 간간이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절의 중이 나와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버리더니 큰 광명을 발하면

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절의 중이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정자를 짓고 치루(置

樓)라 이름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염불사(念佛師)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피리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중이 있었다. 늘 아미타불을 염하였는데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 360방 17만호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소리는 하결같이 낭랑하였다. 그로써 그를 이상히 여기며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를 모두 염불사라 불렀다.

그가 죽자 그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

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라 했으니 마을 이름

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번호:98/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2 길이:50줄

효선(孝善) 제 9

진정사(眞定師) 효선쌍미(孝善雙美)

법사 진정은 신라 사람이다. 속인으로 있을 때는 군대에 예속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므로 장가를 들지 못했다. 군대에 복역하면서도 여가에는 품을 팔아 곡식을 얻

어서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집안에 재산이라고는 단지 다리 부러진 솥 하나가 있을 뿐

이었다.

하루는 어떤 중이 문전에 와서 절 지을 쇠붙이를 구하자 어머니는 중에게 솥을

보시했다. 이어서 진정이 밖에서 돌아왔다. 그러자 어머니는 사실을 말하고 또한 아들

의 의사가 어떤가를 살폈다. 진정은 기쁜 얼굴로 어머니께 말했다.

“불사에 시주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솥은 비록 없으나 무엇이 걱정되

겠습니까.”

그러고는 솥대신 와분(瓦盆)으로 음식을 익혀 어머니를 봉양했다.

일찍이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설법을 하여 이로움을 준다

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이내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 어머니께 말햇다.

“효도를 다한 후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불법은 마난기 어려웁고, 인생은 너무도 빠르느니라. 허니 효도를 다한후에라면

또한 늦을 것인데 어찌 내 죽기 전에 네가 불도를 깨달음만 하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야.”

어머님이 말씀에 진정은 말했다.

“어머님 만년에 옆에 있을 이는 오로지 저 뿐인데, 어머님을 버리고 차마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 어미 때문에 네가 출가하지 못한다면 너는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삼로칠정(매우 풍성한 음식물)으로 날 봉양한다 해도 어찌 효도

가 되겠느냐. 나는 비록 남의 문전에서 의식을 얻더라도 또한 천수를 누릴 것이니, 네

가 기어이 효도를 하려 한다면 그런 말을 말아라.”

어머니의 간곡한 말씀에 진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말씀을 마치자 즉

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털었다. 모두 일곱되였다. 그날 이 쌀로 모두 밥을 짓고서 어머

니는 말했다.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네 길이 더딜까 두렵다. 내 보는 아파에서 한되 밥

을 먹고 나머지 여섯 되 밥을 싸가지고 어서 떠나거라. 어서.”

진정은 흐느껴 울며 굳이 사양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만도 자식된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며칠간의 미음거리마저 모두 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어라 하겠습니까?”

하며 세번을 사양하자 어머니는 세 번 연거푸 권했다.

진정은 차마 그 뜻을어기기 어려웠다. 집을 떠나 밤낮으로 걸어 3일만에 태백산

에 도착했다.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 깎고 제자가 되었는데 진정이라 이름하였다. 그

곳에 있은 지 3년후 어머니의 부고가 이르렀다. 진정은 가부좌로 선정에 들어갔다가

7일만에 일어났다.

설명하는 이는 말했다.

‘추모와 지극한 슬픔을 견딜 수 없었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다.’

고 했다. 혹은,

‘선정으로 어머님이 환생하신 곳을 관찰하였다.’고 햇으며 또 어떤이는,

‘이것은 실리와 같이하여 명복을 빈 것이다.’ 고 했다.

선정을 마치고 나온 뒤 그 일을 의상에게 고했다.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

산 추동에 가서 초가를 짓고 3천명의 제자를모아 화엄대전을 약 90일 동안 강론했다.

문인 지통이 강론하는데 따라 그 요지를 뽑아 2권의 책을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라 하

여 널리 세상에 폈다. 강을 다 마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하였다.’

번호:99/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3 길이:60줄

대성(大城) 효(孝) 2세부모(二世父母) 신문왕대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과 같아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수 없었으므로 무자인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여 그

집에서 준 약간의 밭으로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그 때 개사 점개가 6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와 보시할 것을 권하자 , 복안은 베 50필을 주었다. 점개는

주문을 읽어 복을 빌었다.

“단월이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게 되오니 안락하고 장수하실 것입니다.”

대성이 이 말을 듣자 뛰어 들어가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졔가 문간에 오신 스님의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배를 얻

는다고 합니다. 생각하니 저에겐 숙선이 없어 지금에 와서 곤궁한가 합니다. 그러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곤란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

을 법회에 보시해서 후일의 응보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여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후 대성은 세상을 떠났다.

이날 밤 국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렸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안 사람들은 매우 놀라서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했다.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던 날이었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

이를 낳았다. 아이는 왼손을 꼭 쥐고 펴지 않더니 7일만에야 폈는데 손바닥에 대성이

라고 새겨진 금간자가 있었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모량리의 어머니를 모셔다

함께 봉양했다.

이제 장성하니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마리를 잡았는데 그

날 밤 산밑의 마을에서 유숙했다. 그날 밤 꿈을 꾸는데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

어 말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죽였느냐? 내 환생하여 너를 잡아 먹으리라.”

대성이 두려움으로 용서해 달라고 청하자 귀신은 물었다.

“그럼 네가 나를 나를 위해서 절을 세워 주겠느냐?”

대성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꿈에서 깨어보니 땀이 흥건히 나서 자리를 적시었

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기를 그치고 곰을 위해서 곰을 잡은 자리에다 장수사를

세웠다. 그로 인하여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원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이승

의 양친을 의해 불국사를 세웠으며,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세워 신림,표훈 두

성사를 청해서 각각 거주하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우며 부모의 양육한 수고에

답했으니 한 몸으로 2세(전세, 현세)의 두 부모에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보기 드

문 일이었다.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려고 커다란 돌을 다듬어 감개를 만드는데 갑자기 돌이 세 조

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해 하다가 어렴풋이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대성은 잠이 깨어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이로써 그 곳 이름을 향령이라 했다.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

한 기공이 동도(경주)의 여러 절 중에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옛 향전에 기재된 것은 이상과 같은데 절 안의 기록은 이렇다.

‘경덕왕 때에 대상,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751)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

공왕 때를 거쳐 대력 9년 갑인(774)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

다. 처음에 유가교의 고승 항마를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하게 했고 이를 계승하여 오

늘에 이르렀다.’

이렇듯 고전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알 수 없다.

기리러 읊는다.

모량 봄날에 3묘전을 보시하고

향령 가을이 되니 만금을 거두었다.

훤실은 백년 사이에 빈과 부와 귀를 보았고

괴정은 한 꿈 사이 2세를 오고 갔네.

향득사지하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 경덕왕대

능천주에 향득이란 사지가 있었다. 혹독한 흉년으로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되자 향득은 다리살을 베어 봉양했다. 고을 사람들이 자세히 이 사실을 상주하니 이에

경덕왕은 상으로 조 5백석을 하사했다.

번호:100/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06 14:47 길이:53줄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

손순은 모량리 사람이며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

께 남의 집 품팔이로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언제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이를

민망히 여긴 손순이 그 아내에게 말햇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 그런데 아이가 어

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기 때문에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오. 허니 아이를 매장시

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려야겠소.”

그리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석종을 얻었는데 기이하

였다. 그들 부부는 놀래고 괴이하게 여겨 나무 위에 잠깐 걸어놓고 두드렸더니 은은한

소리가 듣기에 퍽 좋았다.

아내는 말했다.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음은 필경 아이의 복인 듯 합니다. 허니 이 아이를 묻어서

는 아니 되겠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종을 들보에 매달아 두드렸더니 대궐에까지 종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흥덕왕이 듣더니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맑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니 보통 종소

리와는 다르다. 빨리 가서 조사해 오라.”

임금의 사자가 그 집에서 조사하더니 사실을 임금에 아뢰자 임금은 말했다.

‘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다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매 땅속에서 석종이 솟아 나왔으니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하시며 집 한채를 내리고 매년 벼 50석을 주어 극진한 효성을 숭상했다. 손순은

예전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홍효사라 하였으며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 때에 횡포한 후백제의 도적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이라 햇는데 잘못 전해져 지금은 지량평이라 한

다.

빈녀양모(貧女養母)

효종랑이 남산의 포석정에서 놀고자 하니 문객들은 모두 달려 왔으나 두 사람이

뒤늦게 왔다. 이에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20세 가량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눈이 먼 어머니를

껴안았는데 서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까닭을 물었습니

다. 그들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 그여자는 양식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여러 해 동안

봉양해 왔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의문자수(걸식하여 살아감)도 어렵게 되자 남의 집

품팔이를 해서 곡식 30석을 모아 주인집에 맡겨놓고 일해 왔었답니다. 날이 저물면 쌀

을 사와서 밥을 해 먹고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집에 가서 일을 했다

나요.

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거친음식)을 먹을 때

는 마음이 편하더니 오새 향갱(기름진 음식)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가 통곡하

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이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

란(색양을 하지 못함. 색양은 부모의 마음을 편하 하는것)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

로 껴안고 울고 있다는 것이엇습니다. 이걸 구경하느라고 늦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효종랑은 측은하여 곡식 1백곡을 보냈다. 낭의 양친도 옷 한 벌을

보냇으며, 수많은 낭들도 조 1천석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왕에게 이 일이 알려지자, 진성왕은 곡식 5백석과 집 한채를 내려주고 군사를 보

내어 그 집을 호위하여 도둑을 막게 했다. 또 그 방리를 표창해서 효양리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고 양존사라 했다.

번호:103/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16 15:15 길이:143줄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이 기 백

1. 머리말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그러하긴 하지만, 특히 사학서의 경우에는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는 크게 다르다. 가령 저술 당시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던 것이라도 현대에는 이렇다 할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가 하면 이와 정반대 되는 경우도 또한 있는 것이다. 물론 저술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

늘에도 중요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또 단일한 역사서에

있어서도 저술 당시에 중요시되던 측면이 현대에는 도리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오히

려 그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던 측면이 도리어 현대에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

한 점을 분명히 가려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강조해 말하자면 그러한

사고방법은 역사학의 생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고방식을 역사가들 자신이 무

시하고 양자를 뒤범벅해서 사람들을 혼란 속에 몰아넣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필자는 이점을 분명히 가려서 삼국유사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도록 노력해 볼까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필

자는 이를 주로 역사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역사적 의의나

현대적 의의는 곧 사학사에 있어서는 역사적 의의요 현대적 의의가 된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서로서의 성격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史書로서의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는것이 하나의 좋은 방

법이다. 이 두 사서는 150년 가량의 간격을 두고 저술된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사서

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 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

였던 데 대해서,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였다. 이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체재를 성격이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즉 삼국사기는 중

국에 있어서 정사를 편찬하는 표준적 체재인 기전체를 취하게 하였으나, 삼국유사는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재

를 갖추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체재를 무어라 불러야 좋은 것인지를 필자는 잘 모

르지만, 그것이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 인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우선 삼국유사가 지니는 첫째 특징이다.

삼국유사의 편목(篇目)중에는 중국의 양,당,송 3고승전의 체재를 방불케 하는 것

들이 있다. 이에 근거해서 삼국유사가 중국의 3고승전의 체재를 따른 것으로 보는 견

해가 있다. 일연이 중국의 3고승전에서 편목을 취해온 대목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러나 탑상(塔像)과 같은 편목은 중국 고승전에는 없다. 게다가 불교관계가 아닌 史話

를 편집해 놓은 편목이 王曆과 杞異의 둘이 있으며, 그 분량은 전체의 반이나 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중국의 고승전들의 체재를 기본으로 하고, 역경(譯經)같은 편목

이 빠지기 때문에 10科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왕력이나 기이를 첨가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따르기 힘들다. 삼국유사는 일반사화나 불교사화를 가리지 않고, 저자 일연의

관심이 가는 사화들을 수집하여 이를 적절히 분류 편집하였다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

을 가미시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사로서의 성격상 왕실 중심, 통치자 중심의 사

료가 주된 편집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민중관계 사료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은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러한 제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귀족

이나 민중이나 간에 일연은 아무런 제약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 사료들을 수집하여 수

록하였다. 이 점에서도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

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극히 적은 분량인 사론을 뺀다면 어디까지

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편찬자의 의견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운 서술방법을 취하였다.

원칙적으로 삼국사기가 기존사료의 편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때로 필요에 따라서 본

문의 서술 자체를 편찬자의 목적에 맞추어 수정가필(修正可筆)하고 있다. 이것은 해동

고승전이나 역옹패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른 독특한 서술방법을 취하고 있다. 가령 기이

편의 첫 조목인 고조선조를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위서(魏書), 고기(古記),구당서

배구전(裵矩傳)의 세 인용문으로 되어있다.

(1)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도를 아사달에 세

우고……”

(2) 고기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3) 당 배구전에 이르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즉 고조선조를 구성하는 (1),(2),(3)의 세 부분은 곧 세 인용문이다. 일연은 자

신의 의견을 협주(挾註)로 기입하여 인용문과는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양자를 혼동할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원칙은 대개 관철되고 있다. 그러나 때로 일연은 자기의 의견을 본문 속

에서 말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그것이 협주로써 만족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경우

에 특히 그러하다. 이러 때에도 일연은 그것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밝혀두곤 했다.

그 하나의 예를 권 3 흥법편의 아도기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신라본기 제 4에 이르기를 “제 19 눌지왕 때에 사문 묵호자가 고려로부터 일

선군에 이르렀는데 군인 모례가 집안에 굴실(堀室)을 만들고 안치하였다…”

(2) 아도본비를 살피건대, 이르기를 “아도는 고려인이다. 어머니는 고도령인데.”

(3) 이에 의하건대 본기와 본비의 이설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다.

(4) 일찌기 이를 시론하건대 양,당의 이승전(二僧傳)및 삼본국사가 모두 고루려,

백제 2국의 불교의 시작을 실었는데….

(5) 또 원위(후위)의 석담시전을 살피건대 이르기를 “始는 관중인인데 출가한 이

후 많은 이적(異迹)이 있었다…….”

(6) 논의하여 말하건대 담시는 대원 말에 해동에 와서 의회 초기에 관중으로 돌

아갔은즉 여기에 머물기 10여년 이었으니 어찌 동사에 기록이 없겟는가…

(7) 찬하여 이르기를……

이에 의하면 (1)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로부터의 인용이고, (2)는 지금은 망실된

아도본비의 인용이다. 그리고 이어 (3)에서 위의 두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

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일연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일연은 자기의 견해

를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차이의 지적보다도 (4)이하는 바로 일연

이 신라 불교 초전(初傳)의 인물과 시대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나타낸 당당한 고증이

고, 그 결론은 현대의 역사가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명쾌한 탁설(卓說)이다. 이어 일

연은 석담시전을 인용하고(5), 또 그 내용에 대해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6)

마지막 찬(讚)(7)은 역시 일연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때에

그는 항상 <상시론지><議曰> 등으로 분명히 자기의 의견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삼

국유사의 편찬은 전거(典據)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다만 유감인 것은 본문의 인용문 중에는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들도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일연의 편찬방침과 어긋나는 이러한 대목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근거로 위의 원칙이 처음부터 일연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할 사

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당시에는 거의 출처를 밝힐 필요가 없

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고, 따라서 너무 자주 출처를 밝혀야 한느 번거로움을 피한 때

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데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

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세째 특징이다. 그가 수집한 사료들 중에

는 감산사조상기 같은 금석문이 있다. 그 협주에 “글은 그 뜻이 분명히 않으나 단지

고문을 보존할 뿐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남이 베껴놓은 조상기를 다시 베낀 느낌도

있기는 하지만 아마 그가 직접 조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가 직접 각처의

유적을 답사한 관찰기가 나오는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가령 일연이 경주 황룡사지에

있었다는 가섭불연좌석에 대하여,

일찌기 한번 보았는데, 돌의 높이가 5,6척이나 되었고, 둘레는 겨우 세발이었다.

우뚝히 섰는데 위는 편편하였다.(권 3 탑상)

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불국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감산사에도 그는 직접 가 보았

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고문서도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 경종때 경순왕 김부에 대한 책

상부고(冊尙父誥)를 들 수 있다.(권2 기이편, 김부대왕조) 이 책상부고는 원문을 처음

부터 끝의 서명부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베껴놓았으며, 서명을 한 것과 안한 것 또

관직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경우까지도 밝혀놓고 있다.비록 이 고문서 자체는 다시 대할

길이 없겠지만 이 인용만으로써도 훌륭한 고문서 자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고문서 중에는 많은 사지(寺誌)들이 포함되며, 그 밖에 도전장(都田帳)같은 관청의 공

문서도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향전(鄕傳)과 같은 민간 전승기록을 전하여준 것은 특기할 만

한 일이다. 이 향전은 바로 민중의 견해를 말하여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

컨대 법흥왕이 이차돈을 사형에 처한 것을 흔히는 법흥왕의 위신을 손상하지 않은 방

향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향전은,

촉이 왕명이라 하여 공사를 일으켜 절을 세울 뜻을 전하였는데, 군신이 와서 간

하였으므로 왕은 이에 촉에게 책임지어 노하고 왕명을 거짓 전햇다는 이유로 처형하였

다.(권3, 흥법)

고했다. 이를 보면 마치 법흥왕이 이차돈에게 배신한 것 같은 느낌을 풍겨주고 있다.

이것은 향전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면이고, 또 아마 이것이 진실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일연은 현대 역사가들의 사료수집을 연상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

한 노력은 물론 자기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짧은 기간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삼국유사의

저술을 위하여 오랜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말하여 준다. 일연은 여러 사료를

널리 수집하여 그들 사료 사이에 개재되는 차이점을 가리고 나아가서 자기의 고증을

첨가함으로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3. 역사적 위치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삼국유사의 특색은 저자 일연이 어떤 강한 목적의식을

갖고 이를 저술하였다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일연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선택된 주제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전거

에 의하여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다. <유사(遺史)>라는 겸손한 책제(冊題)로 인하여 이를 한낱 한가한 여업(餘業)의 성

과로서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적어도 삼국유사의 저술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하는

데 소요되었을 때 노력만도 적은 일이 아니었을 것임은, 그런 작업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를 통하여 저자가 하고 싶은 이

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점은 삼국유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성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데 대해서 비합

리적인 사실을 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삼국유사에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리적 서술

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된 관심은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에 놓

여있었다. 가령 태종무열왕에 관한 대목에서,

왕이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먹더니,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뒤에는 점심을

그만두고 단지 조석뿐이었는데, 그러나 계산함ᄂ 하루에 쌀 6말, 술 6말, 꿩 10

마리였다.(권 1 기이편)

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는 따위이다. 더욱 재미있는 경우는 김유신에 관한 기사이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전기가 무려 3권에 걸쳐 있고, 그 대부분이 통일을 위한 전쟁

기사로 메워져 있는 데 대해서, 삼국유사에는 다만 가족관계와 출생에 대한것, 삼산여

신과의 관계, 재매부인과 송화방에 대한 이야기, 홍무대왕 추봉과 그의 무덤의 소재만

이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분량의 대부분을 삼신여신과의 이야기를 기록하는데

소비하고 있다.

이 점을 일연 자신은 신이(神異)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의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알 수 있다.

그런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그 신이가 제편의 처음에 실린 까닭은 그 뜻이 여기에 있다.(권 1 기이)

이에 의하면 기이라는 편명은 <신이를 기록한다>는 뜻인 것임이 분명하게 된다.

그러나 비단 기이편만이 아니라 “삼국유사” 전체가 바로 이러한 방침 아래 저술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의 9편으로 되어있다.

이를 크게 분류하여 보면 연표인 왕력과, 역사적인 신이사를 적은 기이와,그 밖의 불

교 관계 기사를 실은 7편과로 3대분할 수가 있다. 만일 왕력이 원래 독립된 1서이던

것이 삼국유사의 일편으로 첨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국 두번째와 세번째의 둘

로 양대분되는 셈이다. 그런데 기이편과 같이 그 내용에 대한 풀이를 저자 스스로가

해주지는 않고 있지만, 종교적인 신앙을 북돋아주기를 바라고 잇는 불교 관계 기사

들도 바로 신이의 기록 그것인 것이다. 이차돈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순교함으로써

여러 기적을 낳게 하여 불교를 공인하게 하였다. 혜숙이 죽어서 촌인들이 이현 동쪽에

장사를 하였는데, 고개 서쪽으로부터 오던 사람이 도중에 혜숙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

다. 또 욱면이라는 여비(女婢)는 신앙의 힘에 희하여 산 육신의 몸으로 지붕을 뚫고

하늘을 날아 서방정토로 왕생하였다. 김대성은 자기집 용전을 법회에 보시함으로써 가

난한 집으로부터 재상가에 전생(轉生)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는

세번째 부분이 곧 신이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지나친 표현일 수가

없다.

이렇게 보면 결국 삼국유사 전체가 신이의 기록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삼

국유사의 기사 내용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신이란 바로 비합리적인 사실

들을 말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였다고

하겠다. 그러면 일연이 이렇게 신이만을 적고자 한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

까.

그것은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고려후기에

접어들면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이 풍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관은 특히 관찬

사서(官撰史書)를 중심으로 지배적인 풍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항하고

나선 것이 삼국유사 였던 것이다. 일연이 유교의 합리주의에 비판적 이었던 것은 그가,

대체로 옛날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교(敎)를 베푸는 데 있어

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는 바였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 함

에 있어서는 부명을 받고 도록를 받아 반드시 남과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 후에

야 능히 대변(大變)을 타고 대기(大器)를 쥐어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라고 하여,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데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써 알 수가 있다. 다 아

는 바와 같이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며, 이 정

신은 후대의 유교에 일관된 정신이었다.

이 동일한 입장은 효선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일연은 현실적으로 효할

뿐만 아니라 신앙면에서 선하기도 해야, 즉 효선쌍미해야 내세에 가서도 효할 수 있는

것이 되며, 그럼으로써 가장 지극한 효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

므로 진정사가 가난한 홀어머니를 버리고 입산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효가 아니었

다. 진정산느 의상에게 부탁하여 화엄경을 강하게 함으로써 그 어머니를 천상계에 전

생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불교적 입장은 분명히 유교의 현세주의 합리주의에 비

판적이라고 할 밖에 없다. 이 같은 입장이 앞서 지적한 두 가지 주제로 나타났던 것이

다.

첫째 주제인 일반적인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요컨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

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

는 중국이 아닌 천(天)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이 천상에 계

신 환인의 손자였다든가, 신라 호국삼보의 하나인 옥대는 천사가 주었다든가, 또 통일

신라의 평화의 상징인 만파식적이 문무왕의 변신인 해룡과 김유신의 후신인 천신이 합

심하여 만들어준 것이었다든가 한데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연은 한국사의 기원에 대하여 고조선-> 위만조선->마한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움으로써, 그것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또 신이한 것임을 자랑스

러이 기술하였다. 원의 정치적 간섭이 불가피했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민족적 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주제인 불교적 신이에 대한 서술은 요컨대 신앙의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

불교 관계 기록은 우선 양적으로도 전체의 반을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적 잘 정리된 불교문화사인 것이다. 흥법편은 일종의 불교 미

술자료집이며, 의해편은 고승전이며, 신주편은 밀교사이며, 감통편은 신앙상의 기적기

이며, 피은편은 신앙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효선편은 신앙과 가정과의 문제에 대한

기록들이다. 이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은 모두 현실세계의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

가능한 신앙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의 세계는 석가불 이전의 가섭불과도

연결되고, 혹은 또 미래불인 미륵불과도 연결되는 세계였다.

이같이 신이의 설화로써 합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설화들이 틀림없

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술이 전거를 중요

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삼국유사의 세계는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의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였다. 이 세계

는 당시의 사학계가 이루어놓은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진적인 자세와는 다른 복

고적인 것이었다.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볼때에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성격을 지닌

삼국유사의 위치는 이같이 규정지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4. 혀대적 의의

삼국유사가 사서로서 지니는 여러가지 측면들을 검토해본 결과, 그가 지니는 역

사적인 위치를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유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의까지가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는 반

대인 것이다. 그러면 삼국유사가 현대 한국사학에서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이는 다

음의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전거를 밝

혀주었음으로 해서 그러하다. 전거를 제시한 인용문은 일연이 이를 자의로 변경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는 달리 소박한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서 전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무한한 가치

를 제공해주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원전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

히 그러하다.

다만 일연은 반드시 원사료의 전문을 충실히 인용하는 방법을 스고 있지를 않다.

가령 “감산사조상기”는 원문의 몇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오독(誤讀)으로 인

한 많은 잘못이 있다. 또 고조선조에 인용된 구당서 배구전의 글도 완전히 문장이 일

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인용문의 자구의 변탈(變脫)에 별로 개의치

않음이 삼국사기와 취재표준이 다르다고 보기도 한다. 분명히 일련의 인용문에는 자

구의 탈락과 변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탈락이거나 오독이나

필사의 잘못에 의한 것이지, 내용의 변개는 아니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기사가 삼

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 나올때 삼국유사가 흔히 원사료의 본 모습을 더많이 전해주

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이전의 원사료명의 제시는 그 사료적 가치를 크게

더해주는 것이다.

둘째로는 유교의 더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이것은 근대사

학도 마찬가지로 짊어지고 있던 과제였다. 근대사학은 정치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적 경제적 및 문화적인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

적인 정치사관의 극복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폭넓은 문화사적 측면을

제시해준 삼국유사는 특히 문화사가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될 수 밖에 없었다. 가령 위

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는 풍부한 신화의 세계, 민속의 세계가 전개되고 있

다. 삼국유사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국 원시문화의 숲을 헤쳐가는 듯한 기분을 누구

나 맛보게 된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이들 신화와 민속의 세계는 근대사학의 보고와 같

이 비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또 문학적 측면이 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에는 단 한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는 향가가 10여편이나 수

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국유사가 불교문화사로서 독자적 지위를

갖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였다. 그러므로 도덕의 선악과 정치의 흥망과를 직결시켜

생각하는 좁은 안목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

사학은 궤를 같이하는 것이고, 따라서 삼국유사는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세째로는 삼국유사가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한 존중은 곧 그것이 민족적 자주성의 표시였다. 더구

나 우리나라 역사의 시발점을 고조선에 두고, 단군왕검의 건국신화를 적음으로써 한국

의 역사가 天과 연결되는 독자적인 것임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위씨

조선,마한을 거쳐 삼국으로 연결되는 민족사 발전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민족적인 자각이 커가면서, 배외적인 경향을 띤 중국 중심의 사관에 대한 비판

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점도 근대사학과 삼국유사는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사학에서 삼국유사가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대한 이와 같은 근대사학의 평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그러

나 이와 같은 평가에도 제약이 있다는 점을 잊을 수는 없다. 우선 사료적 가치는 그것

이 애초에 사료집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연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에 속

한다. 만일 원사료들이 망실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면, 사료적 가치에 대한 문제

는 거론되지 않을 성질의 것이다. 가령 감산사의 두 조상명(造像銘)은 실물이 남아 있

어서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원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약기(略記)되었을 뿐만 아니

라 잘못된 판독조차 섞여 있는 삼국유사의 인용문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또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이란 점에서 삼국유사와 근대사학이 궤를 같이하지만, 그렇

다고 삼국유사에서 제시된 신이사관(神異史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가 없다

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이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새로이 시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반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대사학에서 삼국유사가

지니는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기가 힘들 것이다.

5. 끝맺는 말

필자는 위에서 주로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삼국유사를 생각하여 보았다. 보는 사

람의 현재적 입장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비추어서 삼국유사를 평가하는 것에 필자는 비

판적이었다. 그 결과 삼국유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의의를 구분하여 고찰

하게 되었다. 본고의 제 3장과 제 4장이 각기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법이 역사가가 취해야 할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이 역사가들에 의해서조차 종종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다.

이러한 이해를 위하여는 사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는 삼국

유사의 사서로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한 작업이 본고의 제

2장에 해당한다. 이에 더하여 사학사의 조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이는 제 3장과

제 4장에서 각기 언급되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삼국유사가 사학사에서 지니는 역사적 위치가 전진적이기보

다는 복고적이었지만 현대에서 지니는 의의는 도리어 크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떻

든 삼국유사도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소산이요 또 현재에도 그 생염이 살아 있는 하나

의 사서인 만큼, 그 긍정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이 아울러 학문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번호:106/107 토론자:S0712 수신자:ALL 토론일시:95/06/22 00:03 길이:100줄

삼국유사에 보이는 일연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김 태 영

1. 서언

“삼국유사”는 고려후기의 충렬왕 7년(1281)경에 완성된바 승 일연의 사찬(私撰)

이다. 그리고 이는 대체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140년 뒤에 각훈의 해동고승전

보다는 70년 뒤에 편찬된 불교신앙 관계를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이다.

“삼국사기”는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유신(儒臣)이 왕명에 따라 당시까지의 전존사

료(前存史料)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사관(史官)의 위치에서 삼국 및 통일신라의 역

사를 편찬한 이른바 정사이다. 해동고승전 역시, 경북오관산 영통사 주지 교학사자사

문이란 직계를 가진, 당시의 대표적인 교학승(敎學僧)이 역시 왕명에 의하여 가능한

편의를 제공받아 편찬한 일종의 불교사이다. 그러니 이 두 사서는 각기 삼국시대의 사

회일반과 불교계에 관한 두 가지 정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사가 엄존하는

데도 일연은 어째서 다시 승,속의 사실을 혼성하여 “삼국유사”를 새로이 찬하게 되었

던 것일까.

그야말로 선열(禪悅)의 여가에 “다만 일사유문”을 편의해 찬집(纂集)”한 것이었

을까. 그러나 그처럼 <불용의(不用意)한 일만록(一漫綠)>이기에는 너무나 광박(廣博)

한 고증의 각고가 여기에 기울여져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불과 5권

에 인용된 고증서목(考證書目)은, 오히려 “삼국사기” 50권의 것보다 그 다양함이나 치

밀함에 있어서 전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더구나 이 가운데에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목도점검(目覩點檢)한 것도 상

당수에 달한다. 이같이 광범한 사료의 수집은 싸 장기간에 걸친 용의주도한 노력을

요한다. 이 노력이 더구나 30년의 처절한 대몽항전과 화맹에 잇대어진 난세 속에서 경

주되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여러움을 딛고 선 서사는 필연코 어떤 새로운 인식의 산물이었으리라 할

밖에 없다. 결국 “삼국유사”는 저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자

국의 역사전통에대한 찬자 일연 자신의 어떤 새로운 인식에서 우러난 의돛岵 서사였

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이 새로운 인식은 어디서 발원한 것이었을까.

2.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고려 의종연간에 와서 폭발한 무인정변은 전통적인 문벌중심,문치편중의 귀족정권

을 붕괴시킴으로써 고려사회의 전개방향을 크게 전환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제 이

른바 고려후기 사회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후기의 학자적

관료인 신진 사인(士人)층이 역사 추진세력으로서의 새로운 의의를 지니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무인의 집권을 계기로 고려 불교에는 저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창

도한 바 교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선종의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는 사실을 주목할 필

요가 있다.

고려중기에 와서 극성을 보이게 된 문신 귀족정권은 왕도중심,중앙귀족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지배체제는 지방저 호족적인 사회세력의 정치참여를

거부하는 방향의 독선을 자행함으로써 점차 기층사회와의 괴리를 크게 해갔는데, 이에

복무한 것이 유교적 전제정치의 이념이었다. 유교이념에 의거한 중앙 귀족정치의 전제

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사이의 유리가 보다 크게 초래된 것이다. 뿐아니

라 이러한 유리의 필연의 귀결은 오히려 그 지배체제 내부의 반목과 전통적인 자주의

식의 상실이었다. 귀족 지배체제는 사회와 민중으로부터의 이질적인 유리에 따른 자체

의 취약성을 도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체제내의 반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 야

만시해온 여진에 대한 신사(臣事)도 부득이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비록 현실성에 있어

서는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여진을 제압한다고 표방하고 나선 묘청 등의 칭제건

원 운동과 이 운동의 가능지반이었던 전통적인 자주의식마저 잔해하는 독선을 자행하

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러한 유교적 전제적 문신 귀족정권의 독선적인 승리

의 기념물과 같은 것으로 편찬되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의할 바는 이러한 문

신귀족의 지배체제와 공생공영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것이 화엄,천태로 대표되는 귀

족적인 교종의 불교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뒷날 화엄종사 각훈의 “해동고승전”도 이

러한 번영의 여광의 산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무인의 정변과 집권은 이러한 문신귀족의 지배체제를 도되시키기는 하였다.

그러나 무인정권의 폭압 역시 사회와 역사의 바른 질서의 회복을 실현하는 길과는 거

리가 멀었다. 새로운 무단의 살육과 독재가 계속하는 가운데 문화의 암흑기를 초래한

것은 물론이요, 중기 문신귀족의 횡행이래 발달하기 시작한 사적대토지 횡탈에 따른

농장은 이에 이르러 한층 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남북 각처에서는 농민 노예의

반란이 잇따르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에 강포한 이민족의 침략이 닥쳐왔다. 고종 18

년(1231)이래 계속된 몽고의 야만적인 침랴과 지배는 참절무비의 민족적 분노와 좌절

을 체험케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 같은 문무의 독선적인 정권이 자행한 폭압을 겪으면서 그리

고 몽고와의 30년 항쟁을 치르면서 그 체험의 최전선을 직접 담당하였던 민중 속에서

직접 양성될 수 밖에 없는 분노와 저항의 의식이 축적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돌파구를 봉쇄당한 민중의 분노와 저항의식은 곧 역사전통에 대한 민족적 의식으로 심

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화된 민족적 의식이, 보다 지방적이며 보다

민중 속에서 성장해온 신진 사인층이나 신흥의 선승들에게서 더욱 구체적인 인식을 보

이게 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몽고의 침략 이전, 고려 조계종의 2세종주 혜심(1178-1234)은 “선문염송집”

을 찬하면서, “더구나 怡나라는 조성의 삼한 통합이래 선도로써 국운을 떨치고 교학

으로써 인병을 진압해왔으니, 여기 종지(宗旨)를 깨치고 도를 논구할 전자(典資)가 지

금과 같이 절급할 수가 없다. 종문학자들이 목마름에 마실 것을 바라며 배고픔에 먹을

것을 생각하듯 함이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학도들의 역청(力請)을 입고 조성의 본회

(本懷)를 생각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불법에 보비(補裨)함이 있게 하기 위하여”라

고 그 편찬의 동기를 밝히었다.

경도에의 요치를 위한 최씨 무인정권의 갖가지 역청에는 불응한 채 평생을 산간

에서만 마쳤던 그로서도 여기 그다지 절급하게 의식되었던 것이 조성(祖聖)에서 전승

되어 온 역사전통의 새로운 발견과 그 회복을 위한 국가사회적인 요청이었음을 주의할

일이다.

동시대의 신진 사인 이규보(1168-1241)는 저 고구려 창국의 영웅 동명왕의 사적

을 읊으면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그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자국의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의식의 체현이었다 할 것

이다. 문신 무인을 막론하고 사회와 민중으로부터 유리된 독선적인 귀족정권의 파벌적

인 체질과는 달리, 이들 신흥의 지식층은 보다 넓은 국가적인 차원의 민족의식, 자기

의 역사전통에 대한 긍정의 새로운 인식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곧 이러한 의식의 전승에서 빚어진 산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전승에서가 아니라, 흉포한 몽고를 상대로 한 30년 민족의 대항전 속에

서 더욱 발전적으로 심화되고, 마침내 뿌리칠 수 없게 된 이민족의 압제라는 현실의

제약하에서, 신흥의 고려 조계종과 일체 관계에 있던 선승 일연(1206-1289)의 손을 빌

어 민족의 역사에 관한 일대 서사를 낳게 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동시대의 소

산인 “제왕운기”가 현실사회에서는 좌절을 면치 못하고 마침내 벽지로 은둔할 수 밖에

없었던 신진 사인 이승휴(1224-1300)의 손에서 이루어진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할 것이

다.

3. 전통의식의 내연(內燃)과 그 발전적 부활

“삼국유사”의 편목은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동,피은,효선의 9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왕력은 간단한 제왕의 연대기이다. 기이는 불교신앙에 관한 서사를 다소 포함하

고는 있으나 주로 국가와 사회에 관한 역사를 싣고 있는데, 이 한편의 내용이 무척 커

서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흥법 이하 효선에 이르는 7편은 불교신앙의 사실

이 중요한 바탕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신앙 그 자체보다는 국가사회 속에서의 그것

으로 파악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그래서, “삼국유사” 전편에 담겨진 내용은, 국가사회

의 것과 불교신앙관계의 것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며, 더구나 양자는 혼융(渾融)의

일원적인 사안(史眼)으로 파악되고 있음이 큰 특징이다.

“삼국유사”의 편목이 저 중국의 3고승전의 그것과 다소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는 하나, 이가 그와 같은 한갓 불교문화사이기에는 국가사회의 역사를 너무나 크게 다

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삼국유사”는 그 선행의 “해동고승전”과는 기본적으

로 입장을 달리한 편찬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물론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편찬된 것은 아니었

다. 이는 어디까지나 산승(山僧)으로서의 일연이 당시의 현실의식에서 출발하여 새로

이 인식한 바 자국의 역사전통에 관한 선택적인 기록이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아니된

다. 그리고 선택적인 기록이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찬자 자신의 의식이 좀더 크게 반영

되어 있다고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 “삼국유사” 전편에 흐르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불국토 사상이다. 가령

그 기이편의 초두에 실린 바 국사의 시작을 알리는 단군의 출처부터가 불국천인 환인

제석으로 되어 있음이 그것을 말한다. 신라의 왕통이 불타의 종성인 찰리종이라는 설,

신라의 고도에 남아 있다는 가섭불연좌석의 전불시대 유허설, 황룡사 장육상의 조성에

보이는 불국유연설등은 모두 신라가 곧 전세불시대 이래의 불국토였음을 긍정하는 기

사다. 그리고 진신사리의 감응에 따라 요동성의 아육왕탑이 출현하였다거나, 신인의

지시에 의하여 평양성 서쪽에서 영탑을 찾아내었다는 설화는 고구려가 유연의 불국토

였음을 말하는 기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지리상으로는 일찌기 우리 민족의 생

활무대였던 남북 각지가, 역사상으로는 단군 이래의 고대사 전체가 곧 유연의 불국토

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불국토는 단지 부처의 독선과만 유연한 곳은 아니었다. 가령 신도성

모는 원래 도가류의 소양을 지닌 자였지만, 그러나 이는 다만 장생하는 신선의 술법을

배워 아득한 독선 속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산신이 되어 국가를 진호하고,

한 가난한 여자의 소원을 들어 불상의 조성을 성취시킴으로써 널리 민중을 위한 제도

의 길을 열어 놓기에도 이른, 보살행을 다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 또 원래 불국토인

아유타국의 공주 황옥이 황천상제의 명에 따라 도가의 선물인 반도를 예물로 가지고

와서 마침내 수로왕비가 되고 치세를 이루었다는 설화도 불,선,혼융의 불국토사상을

말해준다. 뿐 아니라 “삼국유사”에는 거의 전편에 걸쳐 귀천,빈부,승속의 인간은 물론

천지 산천의 자연이나 용호(龍虎),신귀(神鬼), 나아가서는 조수(鳥獸) 초목의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성분을 달리하는 대립투쟁의 존재로서보다는, 다 함께 선량한 이

웃으로서 불국토 질서의 실현에 참여하는 존재로 파악되어 있다. 일연에 의하면 자국

의 고대사는 이들 다양한 존재들의 혼융의 총화로 엮어지는 장엄한 대행진으로 의식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같은 의식은, 고려중기에 와서 경화되었던 유교적

인 귀족주의의 독선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바였다할 것이다.

다음으로 “삼국유사”는 그 서술의 차례부터가 국가와 왕권의 비중을 크게 말하고

는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강렬한 서민적 생활의식으로써 그 내용을 점철하고 있음이

큰 특징이다. 가령 무진주의 상수리인 안길이 왕제요 재상인 차득공과 직접 연결을 가

졌다는 기사는 지방세력의 중앙진출을 긍정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또 분황사의 천수

관음은 한 이름없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 그 먼 눈을 뜨게 하며, 민장사의 관음보살은

한 가난한 여자의 소원을 들어 만리 밖에 표류해간 그 아들을 데려다준다. 황룡사의

승 정수는 눈 깊은 겨울밤의 길가에서 아이를 낳고 일어죽어가는 거지 모자를 자신의

체온으로 살려내고 자기의 옷으로 구해주고는 하늘의 지시에 따라 국사가 된다. 이량

공의 가노였던 지통이나 아간 귀진 집의 비녀였던 욱면은 그 주인인 귀족이나 혹은

사장(師丈)보다도 먼저 성불의 길에 오른다. 그리고 가난한 품팔이 생활로 어머니를

봉양하던 대성이 마침내는 재상으로 환생한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효선 전편의 내용은

비록 빈곤 무탁의 신분으로써도 그 효선에 따라 대성을 응보받는다는 서민들의 생활설

화로 되어있다.

삼장을 통달한 고승이요 신문왕대의 국로로 존숭받던 경흥이 말을 타고 의장을

갖추어 예궐(詣闕)하는 도중, 건어(乾魚)가 든 광주리를 짊어진 거지 행색의 한 거사

를 만나자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는 승의를 입고서 어찌 부정한 물건을 짊어지고

다니느냐” 늙은 거지는 말한다. “두 다리 사이에 생육을 끼고 다니는 것보다 시장에서

파는 마른 고기를 등에 짊어진 것이 뭐 잘못이냐.” 반계급적 의식의 서민설화라 할 것

이다. 이 같은 반계급의 의식에서 귀납되는 것은 벌거숭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엄

의 염이다. 의식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의 가치를 자국의 역사전통 속의 서민생활에서

도출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이러한 서민설화를 고려후기의

것 까지도 아울러 채록하고 있다. 가령 무식했으나 본성이 순수한 중생사의 점숭은,

“이 절은 국가에서 기은봉복(祈恩奉福)하는 곳이므로 마땅히 文,疏를 해독하는 자가

맡아야 한다.”는 유식승의 간계를, 관음대성의 호위를 받아 물리치고 만다는 설화와

같다. 또 수백년을 전승해온 낙산사의 보주를 고종 41년(1254) 몽고군의 침략 앞에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켜낸 자는 그 주지승이 아니라 사노인 걸승이었다는 설화도 마

찬가지다.

뿐아니라 “삼국유사”에는 비록 왕공 귀족의 일이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서민

생활과의 일체의 정조(情調)위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통일을 완수한 문

무왕이 세간의 영화를 싫어하고 호국을 위해서는 축생도에 떨어지는 것도 사양치 않았

다는 사례가 그 하나다. 강릉태수 순정공의 부인이요 자용이 절대한 수로가 해룡의 약

거(掠去)한 바 되었을 때에 이를 구해낸 자는 어느 영웅적인 개인 혹은 귀족적인 권력

이 아니라, 바로 “쇠도 녹인다.”는 뭇 서민들의 의사를 함께 하는 입에서 나온 가창의

힘이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유사”가 소박하며 기본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영탄인, 그리고 뭇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전승되어온 향가를 특히 채록하고 있는 것도

그 한 사례가 될 것이다.

결국 “삼국유사”는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사회와 민중생활과 인간의 옹호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양자간의 조화를 역설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려

중기 이래 문,무 귀족정권의 독선적인 지배와 횡포에 대한 반발의 의식을 내포한 것이

었다고 생각된다.

“삼국유사”에는 다음으로 민족사의 자주성과 그 문화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관념

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다. 우선 국사의 시작을 단군의 고조선으로 잡아 중국역사의 시

조라는 요와 동시대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이를 또한 직접 천에 연결시키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국조로서의 단군에 관한 설화는 “삼국유사”이전의 오래전부터 전

승되어 온 바라 생각되지만, 이는 고려 지배층의 공인하는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지배층은 이른바 유교적인 예교의 시초를기자에서 찾고, 그럼으로써 국사의 시작을 은

연중 중국에 연결시키려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국사인식은 이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기자를 단군의 고조선 속에 흡수시켜 놓고 있는 것

이다. 즉 기이편에서 삼국이전의 여러 국가들을 각기 별개의 조항으로 기술하고 있지

만, 기자에 관한 조항은 따로 없고, 다만 단군의 고조선조 말미에서 약간 언급하고 있

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단군 이후 동족국가들의 계승관계나 그 편년을 분명히 밝히지

는 않았으나, 대체로 고조선-위만조선-부여,마한으로 연결되는 국사의 계통을 잡고,

삼국시대를 대체로 이 뒤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국의 역사가 하늘과

직결된 신성한 것이며, 또 그 자주의 전승이 유원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는 의식의 소산

이었다 하겠다. 이 같은 의식은 일연과 동시대의 신진 사인 이승휴에 있어서는 한층

더 포괄적이며 구체화하고 있다. 즉 “제왕운기”에 있어서는 단군이 요와 동시대의 대

등한 국조로 파악되고 있음은 물론 나,여,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 등 동방의 모든 동

족국가가 이 단군을 공통의 시조로 하는 국사의 체계속에 들어 있으며 종래 도외시 되

어온 발해까지도 국사의 권내로 맞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나 “제

왕운기”가 다 같이 중국에 대한 자국의 역사의 대등성, 그 유원한 자주성을 역설하고

있음은, 이 민족의 압제를 뿌리칠 수 없게 되어 있던 당시의 현실하에서는 곧 저항적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에 있어서 이 같은 저항의식은 갖가지로 나타난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신명을 바친 장춘랑과 파랑의 혼은 당수 소정방의 위세에 핍박을 받아 항상

남의 뒤에만 쫓겨다님을 국왕에게 호소하고 있는데, 이는 동맹이라는 이름아래 자행되

고 있던 당군의 유형 무형의 자세와 횡포를 말함이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장차 신

라마저 쳐서 멸망시키려> 하는 당군을 상대로 신라는 명랑법사의 비법까지 동원하는

거국의 항전끝에 드디어 격퇴하고 말았음을 또 전한다. 원래 33천의 1인으로서 하강한

김유신의 위훈을 하늘이 당제에게 계시함으로써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간섭 못하게 하

였다는 기사는 신라의 자주성이 불국천과 바로 연결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문

무왕은 현세간의 왕자로서, 김유신은 33천의 한 아들로서 태어나, 살아서는 통일을 끝

내었고 죽어서는 다시 각기 동해의 용과 천신이 되어 만파식적을 후세에 남겼으니,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한우(旱雨), 풍랑이 고르게 되었다

는 기사는 포란의 현실속에서 자주와 평온을 갈구하는 염원의 표현이다. 금관성의 파

사석탑은 아유타국의 공주 황옥이 유연의 땅에 항도하는데 수신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싣고 온 것이었지만, 이 탑은 다만 황옥을 도와 수로왕비가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년 동안 남으로 왜의 침략을 막아 왔다.”고 일연은 찬하고 있다. 또 황룡사의 장육

상과 9층탑은 외적의 진압을 위한 무상의 대보로서 수백년을 우뚝히 보존해왔으나, 마

침내 몽고의 병화가 이들을 모조리 소신시켜 버렸음을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국

가사회의 자주와 평화를 수호해온, 그리고 야만인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이들 무상의

문화재를 파괴해버린 이민족의 잔학에 대한 간접의 지척인 것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삼국유사” 전편에 실린 사실에는 신이가 또한 그 바탕이 되어 흐르고

있다. 우선 그 기이편의 서두에서부터 일연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합

리주의를 반대하여, “장차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부명과 도록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남보다 다른 일이 있음”을 전제하고, 중국 고대 제왕들의 신이한 일들을 소개한 후 ”

그런즉 우리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에서 탄생한 일이 무엇이 괴이하랴”고 하여, 중

국에 비한 자국의 역사전통의 독자적인 대등성을 말하고 있다.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표현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새로운 인식이 일연과 거의 동시대의 신진 사인들에 있어서도 공

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특히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바다. 이규보는 그의 “동명왕편

서”에서, 내외의 사책(史冊)에 기재되고 세인들이 흔히 말하는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

을 처음에는 귀(鬼)와 환(幻)인 줄로 여겨 믿기 어려웠으나, 깊이 탐미하여 그 근원에

젖어들어 보매, 마침내 귀가 아니라 신(神)이요 환이 아니라 성(聖)이었음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고, 이 창국의 영웅의 신성한 사적을 천하에 알려 자국이 본래 성인의 도

읍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동명왕편”을 짓는다고 하였다. 이승휴에 있어서도 마찬가

지였다. 그는 고래의 사적 가운데에서 <부사(浮辭)를 제거하고 정리(正理)>로 인식되

고 있음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이규보나 이승휴는 기본이 이른바 합리적이라는 유학의 전공자였다. 이 같은 유

자에 있어서도 역사 속의 신이는 실재와 결코 모순되지 아니하는 혼융의 일체로 인식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삼국유사”의 경우 더욱 현저하다. “삼국유

사”는 창국의 시조들뿐만 아니라 그 수성의 군왕, 나아가서는 일반 서민의 일에 이르

기까지, 기이에서 효선에 이르는 전편의 서사를 기본적으로 신이의 바탕 위에서 전개

하고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소박하나마 민족의식에 충만하였던 이들 고려후기의 신

흥계층에 있어서 자국의 역사 속의 신이에 대하 이해와 인식이 거의 공통이었다는 사

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들은 이 신이한 사실들이야말로 자국의 역사를 전개시켜온 큰 추진력이었다고

인식하였음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문신,무인을 막론하고 중

기 이래 합리를 표방하면서도 폭압을 자행하며 혹은 일종 역사의 암흑을 초래하는, 그

러면서도 고식과 경화 속에서 사회와는 유리된 독선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귀족정권에

대한 반발에서도 나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보다 더 외세의 제압에 대한 민족적인 저

항의식의 소산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현실의 합리적인 물리력으로써는 당하기 어려

운 강포한 외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의식, 그 강렬한 극복의 의욕이 이들로 하여금

자국의 역사 속의 신이한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케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4. 결언

“삼국유사”는 현실의 세계와 불교신앙의 세계, 국가정치와 서민의 생활,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천지자연의 혼연일체의 조화 속에서 자국의 역사가 전개되어 오

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설하여 전한다. 또한 그 역사전통의 유구성과 신성함에 대한 새

로운 인식을 통하여 시대적인 난파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래서 권력의 독선과 야만인 이민족의 횡포에 저항하는 전통적인 자주와 인간

의 회복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그러한 전통의 원형을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원형 그대로의 소박한

표현을 많이 빌려쓰고 있다. 이것이 사서로 편찬된 글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정사가

외면해버린 여러 사실들-단군기, 여러 동족국가들, 가락국기 그리고 향가 등-을 널리

채록하고 있는 사실이라든가, 그밖에도 이 책에 실은 모든 사실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그 세밀한 인증도, 바로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서의 전통의 원형을 그대로 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에서 나왔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삼국유사”가 호소하는 바 전통적인 자주성과 인간의 회복은 어느 면에서는 복고

적인 자세와도 통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복고적인 자세가 단순한 전통의 묵수

(墨守)를 지향한 것이었다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 자주와 인간의 회복에

대한 열망은, 앞서 말한 대로 고려중기 이래의 지배체제가 자행해온 바 사대와 모방과

독선에의 접근에 저항하는, 그리고 미증유의 외세의 압제에 저항해야 하는, 새로운 힘

의 원천으로서의 자기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상통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규

보나 이승휴와 같은 유자가 이른바 그 유교적인 합리로써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국의

역사적인 신이를 새로이 인식하고 서사하게 된 사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보여진다. 그

리고 이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저 “삼국사기”의 역사인식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

리하였다 할 것이다.

“삼국유사”가 말하는 바 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그 후에 물론 그대로 계승되

어지지는 아니하였다.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국내에 있어서는 우선 사회의 지배이

념으로서의 불교의 시대가 점차 지나고 유교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외적인 요인으로

서는 100년에 걸치는 원(元)제국의 압제가 고려사회의 전통적인 독자성을 그 의식의

면에 있어서까지 크게 위축시켜 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

운 인식이 그냥 사라져버리게 된 것은 물론 아니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

려후기에 있어서의 신흥계층의 인식이었으며, 이들의 계기적인 성장이 장차 사회의 지

배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사대부층의 성장

인 것이다. 이들의 성장은 급기야 원제국의 압제를 물리쳐내는 주체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며, 또 이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성리학은 전통 유교에 비하여 보다 이지적이며 민

족적인 경향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활용되는 것이다. 일연과 같은 선승과 성리학을 하

는 사대부층과는 사회 체질상으로 많은 상이한 속성을 지녔다 하겠지만, 그러나 양자

가 등질의 시대적인 요청의 선상에 살면서 자기 역사에 대하 인식면에 있어서도 상통

하는 바가 많았다고 보여진다. 그것은국조 단군 이래의 자기 역사의 유원성과 독자성

에 대한 긍정의 민족의식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