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주문예운동에서의 주체2002/11/12

(6) 자주문예운동에서의 주체
1) 주체의 개념

주체와 객체란 개념은 헤겔로부터 레비나스까지 서양철학의 중심 화두였습니다. 여기서는 주체의 개념과 관계,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인식과 가치’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모임은 옳아서가 아니라 좋아서 오는 조직입니다. 아마 요즘 대부분의 모임이 그러할 것입니다. 80년대에는 옳기 때문에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90년대에는 좋아서 합니다. 이것은 80년대 중반 이후 대중이 사회의 주인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 검증되어 온 과정입니다. 좋아서 모임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나는 우리 조직이 좋아요”라는 말에는 두가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조직 대해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분적일 수도 있고 총체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적 측면이라고 해보겠습니다. 둘째는 우리 조직이 좋다고 하는 가치판단 입니다. 모임이 나의 요구와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대해 각자는 항상 판단을 합니다. 자기의 요구와 맞으면 맞을수록 좋아지는 것이고 안맞으면 안맞을수록 싫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치적 측면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우리 조직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사람이 좋아서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 조직의 지향점이나 목적을 깊이있게 인식하고 자기의 요구와 맞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등 차이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식과 가치의 통일성이 낮거나 높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더 좋아지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이 통일되면 될수록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며 우리 조직의 주인이 되어 갈 것입니다.
즉, 조직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회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높아지는 과정이며, 조직이 발전한다는 것은 바로 주인들의 관계가 자주성을 중심으로 공고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회원들의 자주적 요구가 맘껏 펼쳐지고 사람의 본성대로 살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됩니다.
반대로 인식과 가치의 통일성이 깨어질 때 모임은 편협해지거나, 제멋대로 흘러가게 됩니다. 노골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서로 선한 의지로 한다고 한 것이 뜻하지 않게 조직에 폐를 끼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이런 편향을 미리 새겨 봄으로서 주체적인 조직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그림을 그려보는데 도움되고자 합니다.

첫째는 인식적 편향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인식한 건 다른 사람도 무조건 해야한다는 편향입니다. 올바른 것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 주로 많이 제기 합니다. 이런 편향은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서투르기 때문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올바로 이런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뿌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은 힘입니다. 진리에 대해 안다는 것은 진실이 가려지고 폭력과 세뇌로 점철된 암울한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당히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역사의 진리이기 때문에 무조건 싸워야 된다”는 단순논리는 지금 시기엔 사람을 힘있게 움직이지 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봉건의 신성을 극복한 이성이 얼마가지 않아 새로운 억압과 통제의 이데올로기가 된 서구의 경험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부정하고 숨죽여 살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진리를 인식하고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만큼 사람관계가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양하며 수많은 진리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진리를 인식하고, 살 것인가 하는 진리의 가치기준이 문제로 나서게 됩니다.
며칠 전 등산을 좋아하는 회원과 수락산에 갔다오는 길에 당고개역에서 마주 보이는 불암산의 폭포를 보았습니다. 저 폭포의 이름이 뭘까 하며 그 회원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갖고 다닌다는 등산장비중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지도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불암산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위치에 폭포이름이 나와 있는 게 없었습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며 전문가들이 만든 지도라 거의 틀림이 없다고 누차 짚어 얘기 했습니다. 나중에는 지도에 없는 걸 보니까 이번에 비가 많이 와서 새로 생긴게 아닐까라고 까지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큰 바위가 비가 왔다고 패어서 폭포가 되었를리는 만무했습니다. 결국 지도를 믿을 것인가 눈앞에 확인된 진실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까지 얘기가 되어 서로 허허 웃고 끝났습니다.
우리는 자주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르키는 손을 보는 오류에 빠집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관계를 파악할 때 원칙이나 직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거기에만 의존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진리인식의 방법이지 목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는데 기여할 때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 기여하지 않는 진리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지금 당장 사람의 요구 실현에 정확히 복무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올바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요구 실현에 장애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가치기준의 문제가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바라보는데 세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진리를 인식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미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를 받아들이는가 안받아들이는가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 대한 정확한 반영은 진리의 가치를 규정하는 중요한 필수 전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리의 가치를 규정하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둘째는, 실천에 복무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진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집회나 행사에 참가시키기 위해서 회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하는 경우입니다.
집회나 행사 등 실천사업의 참여여부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 지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분열이 되고 회원이 모임의 주체가 아니라 많이 알고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의 대상이 됩니다. 실천은 인간활동의 한 분야일 뿐 입니다. 그런데 실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 사람이 대상화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세째는, 회원의 자주적 요구를 실현하는데 복무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파악하는 경우입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나 실천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회원들의 절박한 자주적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중심으로 할 때만 진리는 가장 값어치 있게 됩니다. 그럼, 자주적 요구는 무엇일까요? 역사적 자유의지입니다. 역사성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전제로 합니다. 자유의지는 가치판단의 문제입니다. 이 두가지가 완전히 하나로 통일 되었을 때 만 자주적인 요구가 됩니다. 그러나 역사성에 대한 일면적 강조는 당위와 전체주의로 추락할수 있으며 자유의지에 대한 일면적 강조는 소비조작으로 전락합니다.
이러 저러한 인식적 편향을 극복할려면 진리 인식 뿐 아니라 진리의 가치기준에 대한 관점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둘째로는 가치적 편향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판단체계,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정서, 분위기, 문화와 같은 형태로 표현 됩니다. 선후배 간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미주알 고주알 다 끄집어 내야 말이 통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니 나 믿나” “믿십니더” “그럼 됐다 술 묵자” 단 세마디로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화적인 공통성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지연, 학연, 성격차이, 세대차이와 같은 개념들의 뿌리를 이루는 것이 바로 가치의 문제입니다. 인식의 문제가 하나의 진리를 찾는 과정이라면 가치의 문제는 사람수 만큼이나 다양한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특히 대중조직은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각자의 경험과 경륜에 따라 이런 차이는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뭔가 끼리끼리의 모임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면 확 몰리다가 안될 것 같으면 소리없이 슬슬 빠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잘 나가는 분과를 보면 종교집단 같기도 합니다. 문제도 있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견해라 해도 정서적 차이나, 분위기의 차이 등 가치체계의 상이함으로 묵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수적 민족주의 - 에리히 프롬의 광기의 군중개념에서 군중은 자기의 정체성을 주장합니다. 외래문화나 외국 경제에 침략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닌 과거로부터 전해 오는 전통을 정체성으로 고착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총체성으로 자임하는 열정은 민족주의를 국수주의 또는 군중주의로 흐르게 합니다. 대상을 추종하는 관계속에 있을 때는 반드시 그 반대 급부로 또다른 대상을 무시하는 관계가 형성됨을 알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차이가 참으로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치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계는 사람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세계만물의 가치는 주체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생겨납니다. 인식의 과정이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 세계를 올바로 반영하는 과정이라면 가치판단의 과정은 사람의 요구를 중심으로 세계와 관계맺는 과정입니다.
인식에선 객관적 실재가 결정적이지만 가치판단에선 사람의 요구가 결정적 입니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를 인식과 대치되는 것으로만 바라보면 오류가 생깁니다.
담배는 객관적으로 몸에 안좋다는데도 내가 좋은디 워쩔껴 하며 먹는다면 가치는 사람에게 유해하게 작용합니다. 때문에 가치의 문제를 인식과 연결시켜보지 않으면 주관주의적인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가치평가는 과학적 인식과 구별되면서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치평가는 대상의 특성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서만 가능합니다. 가치평가의 주체는 사람이지만 평가의 대상은 사람의 요구에 의존함이 없어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 대상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하여 사람에게 유용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만큼 특성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는 것은 가치평가의 필수적 전제가 됩니다.
가치판단의 올바른 기준은 사람의 요구입니다. 사람의 요구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며 굳이 수식어를 붙이자면 자주적 요구입니다. 사람의 자주적인 요구에 입각 할 때만 가치 판단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식과 가치는 사람의 요구를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식적 편향과 가치적 편향은 생활하며 발전하려는 사람의 자주적 요구를 중심으로 할 때만이 극복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체성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 됩니다.

2) 주체의 관계
우리는 사람과 관계 맺을 때 4가지 태도를 갖습니다.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입니다..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깁니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깁니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깁니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합니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또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으며 현대에는 문화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합니다.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 할 리 만무합니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루는 배가 나온 상사한테 ‘그것도 인격’이라고 말해서 ‘그래도 자네 밖에 없어’하고 칭찬을 들었는데, 다음날엔 ‘아니 자네 날 놀리는 건가?’ 하고 꾸중을 듣습니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습니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 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합니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을 일컬어 사랑과 평화라고 합니다.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체의 발견이란 예를들면 자신의 아픔까지도 집단과 사람관계속에서 발견하고 풀줄아는데 있습니다.얼마전 병원에서 갓 태어난 딸을 선천적인 병 때문에 한달도 안되서 저세상으로 보내야 햇던 선배의 얘기가 생각납니다.누가 들어도 좋은 일이 아니어서 두 부부만 가슴아프고 말자는 생각으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조용히 화장해서 강에 뿌렸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새로 태어난 딸은 아프다더니 어떠냐,예쁘냐,이름은 어떻게 지었냐하고 자꾸 물어와서 사실을 말했답니다. 이미 자신은 다 마음 정리가 끝나서 웃으며 얘기 했는데 사람들은 그얘기를 듣고 나서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지 몰라서 만날때마다 난처해 하고 어떻게 만나야할 지를 몰라서 만나는 것조차 피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주변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짐이 생긴 것입니다. 이럴 때 남들은 다 우는데 자신은 울지 않은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것이지요. 그 형님은 결국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도 같이 나누어야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픔조차도 집단의 것임을 자각하는일, 상대방이 아픔조차 같이 할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 이것이 주체적 관계입니다. 비극은 주체를 약화시킬수 있다는 선입견을 벗고 사람을 믿고 비극미로 승화 시키려는 자세 ,사랑과 배려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전제 되어있습니다.
주체의 성장이란 예를 들면 사소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모습에서 표현됩니다. 사소한 약속이든 중요한 약속이든 어떤 경우에도 약속은 주체의 실현과정이며, 주체가 실현되는 만큼 주체는 성장 합니다. 약속시간 5분, 10분 늦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버릇은 상대방의 주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결여 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상대방의 시간에 대한 배려가 없는것이지요. 이때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하는 문제는 상대방의 주체에 대한 무시는 결국 자신의 주체에 대한 무시로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서로간의 주체성을 실현 확장하고자 하는 연대의 행위입니다.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나의 주체가 실현될 수 있다는데 약속이란 형태의 특성이 있습니다.따라서 상대의 주체를 무시하는가 존중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주체가 무시되기도 하고 존중되기도 합니다.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자신이든, 상대든 주체성을 퇴보시키고 병들게하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이처럼 주체의 성장은 사회적 관계의 조건에서만 가능합니다. 주체란 믿음이 전제된 배려와 사랑입니다.사랑이 전제 되었을 때 눈치와 무시는 배려가 되고 추종은 존경이 됩니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개조하고 세상을 개조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개조하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3) 주체의 방법
오랜 겨울 가뭄 끝에 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그 느낌이 참 좋아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수첩에 떠오르는 시상을 적기 시작 했습니다. ‘봄비가 내린다’라고 첫마디를 썼는데 흔들리는 차안에서 쓴지라 ‘봄’자가 ‘봉’자처럼 써졌습니다. 다시 바로 쓰기 위해 ‘ㅂ’부터 또박 또박 다시 써 내려 갔습니다. 그랬더니 또한번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이번엔 ‘뽕’자처럼 되었습니다. 한번 더 쓴 결과는 이제 글자 자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범벅이 되어 버린 데다 ‘뺨’ 자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시상은 간데 없고 스트레스만 받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고 똑바르게 되려고 할수록 본말이 전도되는 이 상황은 저를 무척 당황하게 했습니다. 정확해 지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간혹 자기의 의도와 다르게 상황이 꼬여버리고 마는 것은 그 원칙이 작용하는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이위에 삼각형을 그리면 어떤 모양이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됩니다.이것은 수 천년동안 변치 않는, 앞으로도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삼각형을 지구표면 위에 남극을 꼭지점으로 하고 적도를 밑변으로 하는 삼각형을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라 270도가 됩니다. (극점을 출발한 선이 적도에서 90도로 꺽어져 적도선을 따라 밑변을 그리고 다시 남극을 향해 90도로 꺽어져야지 남극의 출발점과 만날 수 있으며 이때출발선과 종착선이 만나는 각도는 90도이기 때문에 내각의 합이 270도가 되게 됩니다) 상황이나 조건이 질적으로 바뀌면 그에 기초한 원칙도 질적으로 바뀝니다. 어떤 시대에는 출가승이 불교전위였다가 또다른 시대에는 파계승이 불교전위가 되고 출가승이 불교의 변혁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원칙은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사람을 주체로 세우는 힘이지만 추상화된 이유로 가끔 그 원칙이 전제로 했던 조건의 변화에 대해서도 무심하거나 둔해질수 있습니다. 그런 때 원칙은 주체화의 힘이 아니라 질곡이 되어버립니다. 원칙이란 이러저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도 변함없는 철학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를 상황과 조건을 무시한다거나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만 적용하려 할 때는 방법론 정도로 떨어지고 맙니다. 원칙과 방법이 혼동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이 원칙이고 부처상을 모시거나 집어 던지는 것은 방법입니다. 원칙과 방법이 범벅이 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기는 혼란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는 차안에서 시상을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 글씨를 쓸 것인가를 연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방법
우리의 첫 번재 조건은 흔들리는 차안처럼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상황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시상은 떠올랐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글씨로 옮겨적는 과정에서 수정되면서 완성되어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때 정확하게 평가하고 검토하며 가설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불안정한 상황일수록 우리가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위험과 좌절의 가능성이 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이 두가지 조건은 두가지 과제를 안겨줍니다. 첫 번째 과제는 작은것이나 세부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확해지려 할 수록 불안정한 상황은 더욱 부정확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문맥이 훼손되더라도 원칙적 목표를 그려가는게 더 중요한 것입니다. 훼손된 문맥이나 단어는 원칙의 생명력으로 다시 복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전체 싯구가 완성되면 흔들리는 차안이라도 더 이상 우리가 그 상황으로부터 구속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