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주문예운동에서 철학사상의 문제2002/09/09

(5) 자주문예운동에서 철학사상의 문제

우리에겐 어느샌가 모르게 자유주의적 관점이 많은 동의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왈러스타인은 ‘자유주의 그후’ 마지막 결론으로 자유주의자가 선택할 방법에 대해 다음과 정리하고 있다. “목표를 정하라 그리고 지금 내가 헤엄쳐 가고 있는 것이 그 목표와 연관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놓치지 마라. 그러나 정확한 목표를 잡으려고 너무 심사숙고 하다가는 오히려 물에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초기 조건과 목표이다. 왈러스타인은 세계는 의외로 혼돈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목표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시도 자체가 잘못된 방법이라는 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는 출발조건과 목표를 따로 보지 않았다. 출발조건과 목표는 관점의 일관된 체계란 점에서 통일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 출발조건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하나 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관점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할지의 관점이 전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조건을 알아보는일은 사실 관점을 세우는 일에서부터 시작 된다. 하나의 관점이 체계를 이루어 인식과 판단을 가능케하고, 다시 그 관점의 발전된 체계가 다음단계의 인식과 판단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출발조건에서 목표까지 일관된 관점의 체계가 수립될 때 그것을 우리는 방법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다. 우리 중에는 노골적으로 그런 일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자유주의적이거나 혼턱한 관점에 서 있을때가 있다. 조급함에서건 게으름에서건 그 이유야 사람마다 다양할수 있지만 이런 편향은 레닌이 지적했듯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골적이건 실수에 의해서건 이탈하거나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습니다. 조직의 창립은 어설프게 이루어질수도 있고 철저하게 이루어 질수도 있으며 또 너무 경직되고 편향되게 이루어 질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는 모두 자기 한계에 갇혀 오래가지 못하든지, 이상한 방향으로 가든지한다. 따라서 조직 건설에 앞서서 짚어야할 방법 즉 관점의 문제에 대해 먼저 고민이 되어야 겠다.
방법은 철학과 시대정신으로부터 나온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을 얘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우리의 공감대였던 자주문예운동은 자주시대의 정신을 가진 문예운동이었다. 우리가 발견했던 80년대 자주시대정신은 90년대 후반에도 유효한가? 같은 것은 무엇이고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북한에서 얘기하는 주체시대라는 시대의 규정과는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 정면으로 답해야 한다.

1) 자주문예운동에서의 자주시대의 규정은 아직 유효한가?
1. 상황변화
시대를 규정 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높은 철학적 사색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관념의 문제나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하나로 총화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국가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물처럼 연관되어 있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이기에 우리가 시대를 논할때는 세계적 안목을 가지지 않고서는 자칫 편견만을 양산할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주적문예운동의 저자 김형수 시인은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맑스.엥겔스이전에는 사회운동이 없었습니다. 객관세계의 합법칙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근대철학이 확립된 후에는 많은 사회운동이 있었으나, 실패햇습니다. 객관세계의 합법칙성만을 알았지 그것을 이끌어갈 주동의 방향을 몰랐던 탓입니다. 자주적 문예운동의 출발점은 그러한 한계에 대한 반성의 자리였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자주적 문예운동의 원안이 그대로 일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객관세계의 합법칙성을 이끌어갈 주동의 방향을 자각한데서 자주적 문예운동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주동은 다름아닌 사람이다. 체제간의 전쟁이전에 민중은 부당한 지배에 항거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지킨다. 68년 프랑스 5월혁명이후 포스트 모던철학자들은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했고 미국무성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냉전의 해체는 곧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외쳤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경영자의 출현으로 노동자 자본가의 대립구도는 사라졌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8ㅇ년과 87년 한국에선 가히 선진제국의 지배구도를 흔들어 놓을 만한 혁명적인 민중의 진출이 이루어 졌고, 이란에서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장기혁명 진행중이며, 남미는 서구의 지성이 역사의 유물정도로 생각했던 무장항쟁부대가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소위 1세계 선진제국의 눈에는 주변국에서 일어나는 커피잔의 폭풍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당사국의 민중들의 눈에는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혁명적 변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국의 80년대는 북한이나 중국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의 주인의 자리를 개척해간 새시대였다. 새시대라고 규정까지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민중의 진출이 단순한 경험에 머물지 않고 이론과 전망으로 제시된 시대란점 때문이다. 오랜 혼란 끝에 시대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정확하게는 91년 강경대 열사의 장엄했던 장례식 물결을 뒤로 새시대의 징후는 혼란을 경험한다. 92년 대선의 패배는 결정적으로 우리 역량의 약화와 함께 새시대가 그리도 빨리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93년초 전국연합의 30만 조직원은 군복무를 위해서,생계를 더 이상 외면할수 없어서, 전망이 없어서 반수 이상이 빠져나갔다. 이것을 이탈로 볼것인가? 새로운 준비로 볼것인가? 모두 운동의 위기를 얘기 했지만 대안은 시원챦았고, 결정적으로는 IMF를 운동권 누구도 예고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뒷덜미를 맞은 꼴이 되었다. 민족적 주체를 찾자던 제도권과 운동권 모두 자기에게 기득권이 있었다면 모두 버리고 겸허해져야 할 시점에 와있다. 제도권은 세계화를 통해 주체를 강화한다고 해 놓고 주체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개발 상태에 머물고 있는 개도국들이 세계시장을 이용해 후발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개도국에 대한 선진국들의 과감한 배려, 예를 들면 과감한 부채 탕감을 비롯해 개도국의 보호무역정책,직접투자에 대한 다양한 규제, 산업기술 이전 등의 조처들이 긍정적으로 검토돼야 한다.(황병덕 민족통일연구원 책임연구원(시평)한겨레신문 96.04.08 07면

재야운동에서 진보주의를 자처했던 구조주의자들은 주체없는 구조만을 떠들며 오히려 민족적 주체를 공격했고, 현상학자들은 일상적 주체로 역사적, 민족적 주체를 대체하려 했으며, 주체사상의 주체는 힘겹게 버티기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개척했던 자주시대는 이렇게 종말을 고하고 마는가?

2. 논의
자주문예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자주시대는 현상적으로 대중의 예술에 대한 자각을 주었고,문예의 거대한 군중성을 확인시켰으며 또한 그 역작용으로서의 통속화를 초래 했다.
구조적으로는 정치와 예술의 관계 문제로 나타났다. 우리는 자주시대 즉 사람이 하늘이고 주인인 시대의 근본문제들을 점검하고 논의해 봐야 겠다. 마침 여기 이미 진행중인 논의가 있어 덧붙인다. 이것은 당연히 결론내리고자 함이라기 보다는 꺼져가는 논의가 활성화 되기 위한 화톳불이 되기 위한 것이다.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에서 공개적으로 펴내고 있는 기관지 자주의 길 2,3,4호에 실렸던 김영환 정대연씨간의 논쟁이다. 단순하게 구분하면 김영환씨는 사람이 발전이 중요하다는데에 방점이 있고 정대연씨는 제도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논쟁의 초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장1 (김영환의 견해)

사회의 발전으로 사회제도로부터의 소외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사람이 이것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갈것인가가 관건이다.
-사람의 능력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약해졌다. 따라서 사람의 지적능력, 창조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제도가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 주체인 사람의 의식적 노력이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제도가 변하지 않은 조건에서 사람의 변화 발전을 위한 운동은 의미가 없으니 중요하지 않다거나
-사회변혁이 되지 않은 조건에서 사람의 발전이란 사회변혁주체의 성립과 발전이란 측면에서만 의미 있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한다.

주장2 (정대연의 견해)

사람의 발전을 왜곡시키는 사회제도를 변혁하는게 관건이다.
-사회의 변화발전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람의 발전은 의미없다.
-자주성 쟁취를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만 사람의 인식적 창조적 능력도 발전한다.
-자주성을 위한 투쟁을 빼놓고는 사람의 변화 발전을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의 인식능력의 발전은 민중의 투쟁의 성과이자 사람의 발전을 이루는 한 구성부분이지 그것이 사람이 변화 발전하는 동인이나 원인으로 될 수는 없다.
-사회제도를 변화 발전시키는 운동,억압과 착취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과 무관하게 사람의 변화 발전이 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대한다.

필자의 견해를 먼저 얘기하자면 이 두견해는 각각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논쟁해야할 지점을 잘못 부각시켰다. 사람의 어떤활동과 사회의 어떤 관계가 이시대를 이끌어가는 동력인가를 밝히는 것이 논쟁이 중심화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편의상 필자의 논리전개를 중심으로 그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ㄱ. 사람의 발전이란

[사람의 발전이란 자신의 활동을 통해 창조물을 생산하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관계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여가는 일이다.]

우선 사람의 활동은 무엇인가에 대해 답해본다.
사람의 활동은 사람관계와 요구의 형태를 기준으로 분류할수 있으며, 크게 다섯가지로 구분할수 있다.

인식활동 : 사람이 세계의 필연적 연관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발생하며 학문의 형 태로 집중된다.
변형,개조활동 : 사람이 세계를 변화 변혁시키고자 하는 요구로부터 발생하며 자연을 변혁하 는 노동과 사회를 변혁해가는 혁명, 자신의 체력을 개조해가는 체육단련등의 형 태로 나타난다.
가치활동 : 사람이 제 나름의 가치체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따라 대상의 의미로 파악하고 자 하는 요구로부터 발생하며, 종교, 법률, 도덕, 문화적 조직활동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교제활동 :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대상화하지 않고 교제, 소통하려는 요구로부터 발생하며 언어를 중심으로 각 사회별로 형성된 기호체계가 이에 속한다.
예를들어 서로 만났을 때 악수한다든지, 코를 대고 비빈다든지 하는 풍습과 그 것을 이해시키고 전달하기 위한 소통, 보급활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술활동 : 모든 사람의 활동을 생동하게 그리고자 하는 요구로부터 발생하며 앞의 네가지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데 질적 고유성이 있다.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요구가 창작, 작품, 감상의 예술적 관계속에 들어올 때 각각의 활동은 에술적 활동으로 전화한다.

이같은 사람의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간다. 이들 각각 활동의 성격에 따라 사회관계의 속성이 변화된다. 또 한가지 활동이 발전된 반면 다른 활동은 정체 되어 있을수도 있다. 이런 총체적 관계에 의해 사람 활동의 속성이 변화된다. 어떤 때는 우세했던 활동이 다른 환경의 영향으로 열세로 돌아서기도 하고 그때문에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지위와 역할도 변화하게 된다. 환경이란 항상 변치않는 영향력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수동적인 것도 아니다. 환경은 사람의 발전과 더불어 그 관계의 변화와 함께 속성이 변화되는 존재이다. 여기서 그 변화의 중심동력은 사람에게 있다. 사람은 사회의 구성요소 이면서 사회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활동을 중심으로 환경과 만들어가는 관계는 4가지의 기본형태가 있다.

ㄴ. 사람관계란
추종하기, 배려하기, 눈치보기, 무시하기가 그것이다. 추종하기는 내가 나를 버리고 상대방과 동일시할 때 생긴다. 눈치보기는 나를 버리지도 상대의 주체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긴장속에서 생긴다. 배려하기는 나의 주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도 인정하며 연대를 통해 주체를 실현하려 할 때 생긴다. 무시하기는 나의 주체만 인정하고 상대방의 주체는 인정하지 않을 때 생긴다. 그러나 이중에서 추종과 무시는 결국 비주체화란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한다. 추종은 동일시하려는 자아의식이 너무 강해 주체를 포기한 일방적 의존이란 점에서 그렇고, 무시는 자신의 주체를 실현할 대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자아의식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는 추종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또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기주체를 포기한 추종은 과거에는 신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고,근대에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했으며 현대에는 문화 때문에 사람을 버리게 한다. 이런 자리에 사람 사랑이 존재 할 리 만무하다. 눈치는 주체화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라는 긍정성과 언제든지 비주체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기회주의라는 부정성이 혼돈되어 있는 상태이다. 눈치가 없어서 나의 주체가 무시 당하든 눈치껏 해서 나의 주체를 인정 받든 그 차이는 크지만 눈치 보는 상태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눈치보기는 나의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 주체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확신과 대상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상태는 오직 배려하기 밖에 없다. 배려하기는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나의 주체를 발견하고, 확대 실현 하기 위해 대상과 연대하게 한다. 나의 발전이 곧 대상의 발전인 상태. 이것을 일컬어 사랑과 평화라고 한다. 사랑은 그래서 주체의 발견과 성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노래방이나 열린음악회등 우리의 성과임에 분명한데 제도권으로 흡수된 문화들에 대한 입장이 불분명한 것은 눈치보기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경쟁과 투쟁이 뒤 따르기도 한다. 투쟁을 해야할때는 투쟁해야하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 된다. 그것이 사랑과 배려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사람의 지위가 확고할 때 노래방이나 골프장등은 사람을 위한 사회관계속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위한 재부로 이용된다. 이조의 하륜이 창업의 시기와 수성의 시기에 국가의 목표가 각각 다른 것이라며 고려공신을 불러들인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사람의 발전은 이처럼 양적이든 질적이든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는 사회관계의 단단한 체계인 제도에 의해 수렴되거나 견제된다.

ㄷ. 사람의 발전과 환경의 관계

과거에 어떤 사상적 경향을 가졌든 스스로 목적의식적으로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해 나가려는 사람은 높은사상의식을 가질수 밖에 없고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자주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그 창조적 능력이 점점 약해져서 나중에는 약간의 어려움에도 파멸의 길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김영환)

두루마리 화장지를 쓰다가 화장지 회사에 다니는 회원 덕분에 뽑아쓰는 화장지를 쓰게 되었다. 처음엔 아까워서 쓰는 것을 어색해 하다가 나중엔 마구 소비한다. 조건이 의지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자가용타고 다니다가 버스 전철 타기가 어려워 진다. 아파트에 들어가 생활하다보면 생활양식이 자기도 모르게 바뀐다. 거래처 사람 만날때는 상대방을 사기꾼이 아닐지 돈 떼먹고 도망갈 사람 아닌지 끊임없이 긴장하고 의심해야 한다. 자기의 그런 모습이 싫지만 어쩔수 없다. 거기에서 도덕군자 처럼 대하다가 사기 당하면 책임져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치열한 자본경쟁 사회에서 과연 인간성의 발전은 가능한가? 집에 혼자 있게된 날 동생이 나를 실험 하려고 일부러 포르노 비디오를 빌려다 놓고 나갔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고민과 사상투쟁을 했어야 했다. 포르노 테이프를 혼자 있는 방에 이미 갔다놓고 볼것인가 말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고 사상의지를 높여서 극복하라는 것은 이미 위선이다. 어쩔수 없는것이라면 몰라도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선행되어야하며 그것이 결국 사람의 사상 의식도 발전 시킨다. 외국자본과 문화가 무분별하게 개방된 상태에서 개인들의 도덕능력과 불매운동, 국산품 장려운동등으로 극복하자는 것은 이미 그자체가 선진 제국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패쇄정책을 써야할것인가? 아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이용해야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것은 버릴 수 있는 민족주체의 능력이다. 결국 환경과 주체의 관계는 어디에 동력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람이 동력이 된다는 것은 사람의 활동(인식,변형개조,교제소통,가치,예술활동)통해 환경과의 관계를 자기에 맞게 질적으로 바꿀수 있는 체계가 갖춰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동력도 환경도 체계라는 사실이다. 한 체계의 부분적 요소 (예를들면 인식활동능력이나 투쟁개조활동능력)가 바뀐다고 체계간의 관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체제간의 관계변화는 질적변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발전이 중요한가 사회(환경)의 발전이 중요한가는 몇가지 전제가 되는 문제에 대한 답이 이루어 져야 한다.
첫째, 어떤 활동과 어떤 관계가 사람과 사회를 발전시키는가에 대해 동시에 물어야한다. 사회의 내용은 사람의 활동이며, 형식은 사람활동의 질서와 관계, 즉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둘째,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발전의 방향을 규정하는 본성이 어떠한가가 물어져야한다. 요소와 구조는 그에 따르는 속성을 동반한다. 요소나 구조가 달라지면 속성도 달라진다. 그러나 속성은 연관 관계에 따라 다양하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박약한 사람보다 환경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변화시켜가지만, 환경조건을 극복하지 못하면 더 심하게 좌절하고 발전이 후퇴 될수도 있다. 이것은 의지가 강하다는 속성이 환경조건의 속성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며, 발전의 질을 담보하는 중요한 속성의 하나가 될 수는 있지만 결정적인 속성, 즉 본질적인 속성이 되진 못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다양한 속성을 규정하는 본성만이 질적 발전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어떤 활동과 관계가 본성적인가가 파악되어야한다.
셋째, 추동력이 어디에 있는가가 물어져야한다. 속성이 변했다는 것은 환경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추동력이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로 된다. ‘특별한 사람으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란 본질적인 속성을 실현할 수 있는 질적구조이다. 무엇에 의해 변화가 주도되는가는 결국 추동력있는 체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조건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가 자주적 상태이며, 동력으로서의 인간이 될 수있는것은 환경을 지배할수 있는 활동과 관계의 체계가 만들어 졌을때이다. 다음항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ㄹ. 속성의 발전과 질의 발전과의 관계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높은 수준의 의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과 잘 짜여진 조직이 있으면 얼마든지 특별한 사람으로의 발전이 가능하다. (김영환)

특별한 사람으로의 발전, 이는 사람의 질적 변화를 말한다. 사람속성의 질적인 변화를 사람의 발전이라고 해두자. 특별한 사람으로의 발전은 어떤 과정을 거쳐 가능한가?
사람의 연관 방식에 따라 다양한 속성이 발생한다. 이중 본질적인 연관이 본성적 관계로 되며 본질적인 발전으로 된다.
구조(사회)속에서의 요소(사람)자체의 질적 발전문제와 관련하여 말하면, 구조의 완성은 구조개혁이 선행하든 후행하든 요소의 발전과 구조의 발전이 통일될 때 완성된다. 구조가 앞서면 요소를 구조에 맞게 개조시켜야한다. 요소가 앞서면 요소가 구조를 개변시킨다.
또한 아무리 다양한 속성의 변화가 있더라도 그 자체가 질적변화로 되진 않는다. 김영환 씨가 얘기하는 ‘의식과 능력과 조직’은 사람의 다양한 속성중 중요한 속성임엔 틀림없지만 그 자체가 질의 발전을 일으키는 본질적 속성은 아니다. 오히려 질적 발전을 지연시키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거대한 사회체제 내의 요소에 불과한 사람과 조직이 어떤활동과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서 사회체제 까지 변화 시킬 수 있는 체계를 완성할수 있는지가 얘기 되어야 한다.

ㅁ. 사람의 본성과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관계

대중의 자주적 삶을 가로막고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 주는 근본원인은 사람자신이 아니라 이러한 고통스런 삶을 강요하는 억압적 현실과 억압세력들이다. 따라서 이런 억압 구조를 철페시키지 않는한 민중들의 자주적 삶은 보장 될 수 없으며 민중들의 자주적 삶의 조건이 보장 되지 못한 조건에서 사람의 전면적 질적 변화 발전이란 허구이다. (정대연)
정대연씨는 다른 문단에서 억압구조를 철폐하기위한 투쟁, 자주성을 쟁취하기위한 투쟁이 사람과 사회 발전의 본질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 주장에는 사람에 대한 소박한 견해가 포함되어 있다. 구조주의자들이 심심챦게 지적하듯이 사람, 민중자체가 억압적 현실과 세력의 일부일때도 있다. 민중과 억압세력은 항상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싸울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관념속의 사람이지 현실속의 사람은 아니다. 현실속의 민중은 자기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운 영웅이 육시의 형틀에 묶였을 때 어서 찢어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일때도 있고, 김영삼이 얼굴이 잘생겼다고 대통령으로 찍어주는 국민일 때도 있다. 얼굴이 잘생겼다고 김영삼 찍은 사람의 의식은 정치의식 이전에 미의식 차원에서 접근해 가야지 대화가 성공할 수 있다. 투쟁은 사람들을 급격하게 변화발전 시키지만 급격하게 후퇴 시킬수도 있다. 이것은 투쟁이 오로지 유일한 사람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활동은 앞서 얘기 했듯이 인식, 변형개조, 교제, 가치, 예술형태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면서도 연관되어 진행된다. 투쟁은 자주성 실현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투쟁을 중심으로 하더라도 거기에는 인식, 교제, 가치, 예술적 활동이 여하간에 연관결합 되어 있고, 이것이 환경과의 관계에서 조건을 극복할 총체적 속성으로 작용할때만 자주성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 선조건 후발전의 단순도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성을 이룰수 있는 활동과 관계의 총적 체계가 무엇인가가 얘기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투쟁은 ‘대립물의 대립과 투쟁’이나 ‘도전과 응전’의 상대성을 넘어 자주성이 발생, 발전, 공고화 되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ㅂ. 자주성 실현이란
자주성은 인간활동의 다양한 요소와 연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속성의 총체를 규정하는 본질적 속성이자 동력적 속성이다. 각각의 활동과 관계에서 자주성이 관철될 때 사람은 자주적 존재로 변화 발전한다. 인식적 편향과 마찬가지로 실천투쟁 위주의 편향도 극복되어야 한다. 투쟁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타부분 즉 인식, 가치, 교제, 예술적 활동이 그 안에 녹아 있어야 하며, 인식활동과 다른 활동 역시 다른 활동을 그 자체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투쟁이나 인식활동은 가치, 교제, 예술활동과 더불어 자주성을 밑받침하는 체계의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무엇이 완성된 다음에 다른 무엇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연관 속에서 총체적 체계의 모습으로 자주성을 실현해 간다. 처음엔 미숙한 인식과 투쟁에서 나중엔 세련된 인식과 노련한 투쟁으로 자주성을 발전시켜가며 그 이후엔 그것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간다. 그리고 자주적 체계의 발전 과정에서 무엇이 중심이고 중요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전체운동적 차원의 판단력이다. 반드시 싸워서 이길 일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일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세련되고 노련한 지도력을 세우므로서 가능해 진다.
문예운동 또한 예술활동만으로 절대 온실성장을 할 수는 없다. 자주성이 실현되는 거대한 체계와 긴밀히 교류되고 연관도가 높아질 때 전대협 아래서의 전대협 문화국 경험처럼 다시 자기의 시대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자주시대 없이 자주문예운동 없다.

3.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상황변화

우리의 내재적 노력과 더불어 국제적 조건과 상황의 변화 또한 중요하다. 우리운동의 외부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전과 같이 민족해방운동이 강렬하다거나 국제적 민중운동 세력이 대거 약진하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해방 운동이 멈춘 것은 아니며 더구나 끝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냉전해체로 무력 대결 정책이 사라지면서 세계의 진보민중세력은 이것을 항구적 평화 체제로 만들어 내는데 고전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선진제국의 모순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처럼 승리하고 있기 보다는, 왈러스타인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몰락 때문에 세계체제로서의 위기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다. 냉전과 관계없이 터진 LA폭동과 세계적 금융위기등이 그 징후이다. 이런 의미에서 멕시코 농민반군지도자 마르코스의 분석도 흥미롭다.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소수 투기자본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
는 가운데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는 신자유주의가
국민국가를 말살한다며 ‘4차대전이 시작됐다’는 멕시코 사파티스타민
족해방전선 지도자 마르코스의 글을 게재했다.
94년 1월 농민봉기를 일으켜 전세계를 놀라게 했고 지난해에는
‘반 신자유주의 민중연대’를 모색하는 국제토론회를 조직했던 그의
글을 요약해 소개한다.

세계체제로서 신자유주의(네오리버럴리즘)는 새로운 영토점령전쟁이다
. 냉전이란 이름의 ‘3차세계대전’이 종식됐다고 해서 세계가 양극
체제를 극복하고 정복자의 헤게모니 아래 안정을 찾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악의 제국’의 패배는 이를 점령하기 위한 ‘4차세계대전
’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3차세계대전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본다면 4차대전은 세
계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금융중심권 사이의 싸움이다.
첫번째 희생자는 국민시장이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기초 가운데
하나인 국민시장은 전지구적 금융경제의 포격에 의해 청산된다. 그
결과 국민국가의 동력이던 정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정치인
은 기업의 관리자가 될 뿐이다. 이런 세계화는 미국식 생활방식이란
사고유형을 퍼뜨리고 국민국가가 구축해온 모든 문화는 미국식 생활방
식에 의해 파괴된다.
현재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불의와 불평등이다. 60∼70년대에
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빈곤층이 2억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90년대 초에는 20억명으로 늘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내 실업률은 66년의 3.8%에서 90년에는 6.3%로 높아졌
다. 보호를 받던 지역시장이 사라지면서 중소기업들이 초국적 거대기
업과의 경쟁에서 견뎌내지 못함에 따라 일자리들이 사라진다.
냉전기간 중 근대기업의 모습을 갖추고 개별국가의 정치경제에 깊숙
이 침투했던 조직범죄도 4차대전의 시작과 함께 활동을 세계화했다.
한편 세계화의 과정에서 물질적 기초를 파괴당하고 주권과 독립성을
잃은 국민국가는 단순히 거대기업에 봉사하는 안보장치로 전락해서 비
합법적 권력을 위해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바뀐다. 이렇
듯 국민국가를 파괴한 신자유주의는 4차대전을 이끄는 정치경제의 중
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항의 싹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멕시
코정부는 테환테펙발전계획이란 이름으로 거대한 공업지역을 건설하려
하지만, 국가의 주권수호를 반자유주의혁명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는
사파티스타민족해방전선은 풍부한 역사적 유산과 함께 석유와 우라늄의
보고인 이 지역을 국제자본의 손아귀에 넘기려는 이 계획에 반대한다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멕시코 산속에서 뿐만이 아니다. 남미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지역에서도 저항
세력이 늘어나고 있다.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소
외된 민중들이 만들어내는 이 저항집단들 속에 존재한다.
한겨레신문 97.08.06 06면

IMF에 의한 국치를 경험하기 불과 몇 개월전에 그의 논문에서 한국의 상황에 대한 예언을 보는 듯 하다. 신자유주의 세계전략에 대한 국제노동계의 연대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지구화’가 진행되면서 여러가지 새로운 변화들이 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흐름은 신선한 모습마저 보여준다. 자본의 국제화가 국가
를 매개로 폭넓게 이루어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쪽의 국제 연
대 움직임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굳이 변증법 논리를 강조
할 필요도 없이 ‘대립물의 통일’은 움직일 수 없는 이치라고나 할
까.
지난 26일과 27일 타이 방콕에서는 아시아와 유럽의 노조 교류
를 위한 워크숍이 열렸다. 독일 사민당 산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주관한 ‘아시아·유럽 노조 대화’라는 이름의 이번 모임은
아시아와 유럽 노조운동의 국제연대 강화 방안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 아시아·유럽 노조 교류 확대의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3월 타이
에서 열린 ‘아시아·유럽 정상회의’(아셈)에 대한 노조 차원의 대
응 필요성이었다. 한겨레신문 97.05.31 04면 김금수

냉전해체 이후 참패를 면치 못하던 유럽의 노동당, 사회당들도 이전의 교조적 강령,구호 대신 민중중심의 사업방식으로 변화하면서 집권당으로 전면 부상 하고 있다.

동유럽 공산권 붕괴 이후 거의 완전하게 재기불능이라는 판정을 받
았던 동·서유럽의 좌파 정치세력들, 특히 옛 공산당의 후신 정당들
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정치권에 재진입하고 있다.
지난 12월5일 이탈리아의 로마와 나폴리 시장 결선투표에서 좌파
연합후보로 출전한 로마 녹색당의 프란체스코 로텔리와 이탈리아공산당
후신인 민주좌익당 출신으로 역시 좌파 단일후보로 나선 안토니오 버
셀리니가 무솔리니의 위업계승을 선명하게 내세운 네오파시스트 정당인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의 지안프랑코 피니와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를 각각
제압하였다. 또한 같은 날 실시된 동부독일 브란덴부르크주 시군 단
위 지역자치단체 선거에서도 독일사민당과 옛 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
사당이 기민련을 제치고 각각 1, 2당으로 약진하였다.
이와 같은 좌파 정당의 도약은 이미 지난 2월 리투아니아 대통령
선거에서 반소독립운동의 선봉조직이었던 보수민족주의 계열의 사주디스
소속의 란스베르기스를 제치고 리투아니아 공산당 서기였던 브라자우스
쿠스가 압도적인 지지로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조심스
럽게 예고됐었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9월 폴란드 총선에서 “예상했던 선을 훨씬
넘어” 옛 공산당을 잇는 민주좌익연합 및 공산당 방계조직이었던 농
민당이 반공보수정당들을 제압하고 3분의2 가까운 의석을 거두어가면
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수 신민당이 당권투쟁 끝에 분당사태를 초래하여 절대다수의 지위
를 상실하면서 조기 실시된 10월의 그리스 총선에서도 “정치생명이
끊어져 관뚜껑에 못질까지 끝난” 노익장 사회주의자 파판드레우에게
절대다수표를 몰아주는 이변이 연출됐다.
(…) 그렇다면 이들의 성공요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가장 눈에 띄
는 것은 공산주의의 전면붕괴 이후 그 후신정당들이 비현실적인 교조
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남아 있는 당 하부조직을 전면가동시켜 사
회 전반의 문제에 끈질기게 대면하여 자기들이 개입할 문제들을 꾸준
하게 개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결과 아무래도 이익보다는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은 현재의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불만을 조직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 후반기 유럽에서 벌어진 일련의 총선에서 결정적으로 작
용한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적인 원칙이나 정치적 공약이 아니라 아
무런 대안이 없더라도 유권자들의 고통을 나누어 질 수 있는 후보
각 개인들의 자질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좌파의 전통적 기초인 대중 연대성이 큰 힘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이것은 곧 유럽의 좌파 정치권에서 2차대
전 이후 대중적으로 축적한 정치문화적인 역량이 이제야 비로소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93.12.13 06면

2) 자주시대라는 규정과 북한의 주체시대라는 규정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위의 글에서도 주체라는 표현을 몇번 썻다. 이 정도면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에 저촉되는지 자기 검열을 해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사는 글쟁이들의 수렁이기도 하고 긴장을 잃지 않게하는 채찍이기도 하다. 나는 주체란 단어가 곧 주체사상이 되어 버리는 현실을 우습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단어가 곧 사상으로 오해되는 것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유명론과 공자의 정명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낡은생각이며 뿌리 깊은 사상 탄압 방식중의 하나이다.
주체란 정부에서 흔히 사용하는 [국민이 주인되는...]이나 기업에서 사용하는 [고객중심] 학교에서 사용하는 [수용자 중심의 교육]등과 어떤 차이도 없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발견한 것은 자유주의 민족국가의 공통된 성과이다. 국가는 국민을 기본으로 해서 성립된다. 그러나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합의에 의한 국가’가 아니라 거꾸로 ‘국가의 질서에 합의한 국민만이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자유주의 국가체제의 모순이 발생한다. 창작의 자유 따위는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것이 되어버리고 대한민국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감옥 갈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되었다.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취해진 이런 조치들은 과연 국민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에 대해 자문케 한다. 소설 태백산맥이 백만권이상이 팔렸고 돌려본 사람을 최소 두명씩만 잡아도 300만명이상이 보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태백산맥은 국가보안법 위반 소설이 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소설이란 사실을 알고도 책을 탐독한 사람들을 처벌하는게 합리적일지, 국가보안법을 창작에 적용시키지 않는게 합리적일지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때문에 자유주의 국가 최고의 성과물인 [국민]의 존재에 대한 확인은 다시 필요한 것이고, 저항없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란 없다. 현재 합법화 되어 있는 민예총의 많은 예술인들이 저항적 예술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저항만으로 주체의 완성을 얘기 할 순 없다. 저항과 더불어 합리성이 결합될때 주체는 온전한 모습을 띈다. 근대 사상사는 이것을 화두로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인간을 발견한 루터의 양심법 사상은 어떤 논리나 탄압에 대해서도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저항하는 주체를 확인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성주의가 아니다. 그가 ‘이성이 나를 생각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보여지듯이 ‘나’이외의 사유, 행위 주체는 없다. 그의 철학은 존재철학이나 정신철학이 아니라 주체의 철학인 것이다. 프랑스 현상학자 레비나스에 따르면 주체(subject)는 사회,국가의식과 자아에 길들여지기 이전의 자기존재 자체이다. 그는 주체가 향유, 노동, 에로스등을 통해 타자와 세계를 어떻게 소유하고 지배하게 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헤겔 또한 개인주체와 일반이성이 어떻게 결합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주제를 두고 있다. 근대사상은 신이나 국가이성에 저항함으로서 억눌린 주체를 해방하고, 타자에 대해 사랑과 연대로 결합하는 문제를 고민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저항과 합리적 이성을 통일하는 개념이다. 기세춘씨는 주체를 ‘인간은 공공영역과 사적 영역을 동시에 자기 삶터로 하는 사회적 존재’로 보고 ‘공공성과 개별성을 공유하는 유적 존재이며, 이들 두영역에서 자유를 요구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자주성과 창조성을 실현하는 행위자’로 본다.
우리사회는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주의에서 근대산업주의, 민주화이념과 서구의 자기해체적 문화주의가 용광로처럼 끓어 오르며 충돌하고 있다. 이들 사상의 차이와 연관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주체에 대한 연구는 한국식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이념를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귀중한 단초가 될 것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주체는 수령과 당 대중의 일치를 통해서 이룩되는 개념이다. 북의 주체개념에는 역사와 집단주의가 중심을 이룬다. 요즘 신세대들의 ‘나는 나니까’와 같은 개념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세워야할 주체는 ‘나는 나니까’에 대해서도 관점을 세울 것을 요구받는다. 주체사상에서 결론 내리고 있는 [주체]의 개념은 세계철학사에서 논의 되어온 [주체]라는 주제의 북한적 완결이다. 거기에는 어느 사상이나 그렇듯이 존중되어야 할 것과 비판되어야 할 것이 있다. 김용옥교수는 [전통과 현대]라는 잡지 창간호에 해석학적 입장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글을 쓰며 ‘우리나라에는 사상의 연구자는 있을지언정 사상의 저자는 없다’고 개탄해 하면서 주체사상의 논리적 완결성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실제 실천과정에서 어떻게 전제주의화 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기세춘씨는 현상학적 입장에서 쓴 [주체철학 노트]에서 주체사상을 ‘수령유일체제로 전락하면서 오히려 [주체]의 소외와 수령의 신비화로 이색종교의 교리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유학의 입장에서도 주체사상이 연구되고 있다. 어쨌든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미 우리나라의 지성들에 의해서도 나름대로 해석되고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바람직한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주체사상을 비판하는데 지나친 정력을 소비하기 보다는 우리식의 주체의 개념을 세워가는데 집중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비판을 통해 북이 자신들의 이념을 포기 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우리의 이념적 주체성을 하루 빨리 찾아 나가는 것이 국민적 힘을 결집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시대라는 말을 쓴것도 이러한 차원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자주시대는 87년 6월 항쟁이 기점이 된다. 세계적 차원에서 역사의 종언이 얘기 되고 있을 때 우리는 6월항쟁을 통해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필자는 주체시대와 자주시대의 가장 큰 차이를 세가지로 본다.
첫째, 주체시대는 북한의 혁명전통으로 꼽는 1926년 타도제국주의 동맹의 결성시기를 기점으로 삼는데 비해 자주시대는 87년 6월항쟁이 기점이다.
둘째, 주체시대는 주체사상을 창시한 수령의 존재가 전제 되어 있다. 그러나 자주시대는 수령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 한국사회운동에서 유일한 지도자로서의 수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흔히 오해되듯 북한 수령의 지도나 지시를 받아 운동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제발로 서서 우리의 현실로부터 운동하는 것이다.
셋째, 주체시대는 사회주의 체제를 전제로 한다. 김정일은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는 가운데서도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라며 사회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역설한다.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가 실패했음에도 북한식 사회주의가 과학일수 있는 근거가 바로 주체사상에 입각한 체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자주시대는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운동를 전제로 하고 있다. 결론을 향해 일방적으로 달려가는 운동이 아니라 다양성과 역동성의 활력을 가진 운동이다. 역사발전의 필연적 귀결점으로 사회주의를 보는 북한과는 달리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다.

자주시대와 자주정신은 우리의 이념적 좌표가 될 진보적이고 민족적인 사상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 자주시대는 필자의 판단으로는 진행형이지 완성형은 아니다. 진행과정에서는 종종 투박함과 서툼이 보이기도 한다.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것 같은 용어들이 많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 사상의 자유로 볼 때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다. 항상 기존 사상을 모방하고 혁신하는 가운데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가 안보이데올로기로 통제되는 사회에서 원칙만을 걸고 싸우는 것은 서로에게 불필요한 손실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들 용어의 사용이 좀더 유연하고 풍부해지길 기대한다. [인간해방]의 구호와 [홍익인간]의 구호는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간해방이 서구적 구호로 현대에 들어온 개념이라면 홍익인간은 우리의 구호로 오천년 넘는 역사를 가진 개념이다. 무엇을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가? 이는 단순히 탄압의 빌미를 갖지 말자는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의 외연의 틀을 넓히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인간해방의 구호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과 홍익인간의 구호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을 생각해보면 비트겐쉬타인의 얘기처럼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관의 한계이다.’ 그러나 언어 사용의 투박함이 투박함일지언정 부정이나 왜곡은 아니다. 그것은 배려와 비판으로 더 높은 세계관으로 이끌어 줄때는 가치 있는 것이지만 말 꼬투리를 잡아 비열하게 걸고 넘어질 때는 중세의 낡은 사상을 취하는 것이다.

3) 맺음말
조직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생명체를 만드는 일이다. 육체적 생명이 아닌 정신적 생명을 씨앗으로 하여 그것이 장성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정신을 연구하는 것은 자신이 뿌리내릴 토양과 대지를 일구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꽃처럼 화려했던 과거 조직의 영광을 거름으로 꽃에서 부터가 아니라 씨앗과 뿌리에서부터 시작 해야한다. 또한 솔직해야 한다. 솔직해져야 대중적 힘도 생긴다. 피해가지 말자. 우리만큼은 언제나 정면으로 가자. 君子之 大路行의 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