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의 “구별짓기” 2004/11/14 790

http://www.was.pe.kr/distinction.htm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현대사회에서 지배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지, 피지배계급이 어떻게 그들의 지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설명을 기존의 경제적 측면(“계급”)을 넘어서 문화에 관한 분석을 중심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부르디외는 객관적인 계급구조와 행위자들의 취향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발견해 낸다. 이 부분에서 부르디외의 독특한 점이라고 한다면, 구조와 행위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보다는 그 사이를 매개하는 구조로서 ‘아비투스(habitus)’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인 점이다. 이것은 기존의 이론들이 극복하지 못했던 구조와 행위의 딜레마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며 이를 통해서 부르디외는 어떻게 문화가 계급과 지위의 차이들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구별짓기]의 국내 번역문 중에서 서문을 발췌한 것이다.

삐에르 부르디외. 1995.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최종철 올김. 새물결. p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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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상품에도 독특한 논리를 가진 경제가 존재한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상품의 소비자들과 각 상품에 대한 이들의 취향이 생산되는 조건을 확인하려 하며, 이와 함께 특정한 순간에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는 이들 대상을 음미하는 다양한 방식과 함께 정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전유 양식의 구성조건을 서술하려 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협소하고도 규범적인 의미의 ‘교양’을 문화인류학적 의미의 ‘문화’의 포괄적인 맥락으로까지 확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극히 세련된 대상에 대한 미려한 취향을 음식맛에 대한 기본적인 취향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문화적 실천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는 정통적인 문화에 대한 취미나 선호를 자연의 선물로 간주하는 반면 과학적 관찰은 이러한 문화적 욕구가 양육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모든 문화적 실천(박물관 관람, 음악회 참가, 독서 등), 문학, 회화, 음악에 대한 선호도는 교육수준(학위나 학교에 재학한 횟수에 의해서 측정된다)과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출신계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문의 배경과 형식적 교육(이 교육의 유효성과 지속성은 출신계급에 크게 의존한다)의 상대적 비중은 다양한 문화적 실천이 교육체계에 의해 공인되고 교육되는 정도에 따라 다르며, ‘자유교양’이나 아방가르드 문화에서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고 할 경우 출신계급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예술 그리고 각 예술의 장르와 유파, 또는 시대의 위계에 소비자들의 사회적 위계가 상응한다. 이 때문에 취향은 ‘계급’의 지표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 획득 방식은 사용 방식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매너에 그토록 커다란 중요성이 부가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이처럼 제대로 측량하기 어려운 실천이 문화 획득의 다양하고 서열화된 양식과 각 양식을 통해 특징을 부여받는 개인들의 집단을 구분해주기 때문이다. 문화 또한 교육체계를 통해 부여되는 귀족의 칭호와 혈통을 갖고 있으며, 각 칭호와 혈통 내의 위치는 귀족에 진입한 후의 시간적 길이에 의해 평가된다.

문화적 귀족을 어떻게 규정할까 하는 문제는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서로 다른 문화관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작품에 대한 정통적인 관계방식에 대한 생각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며, 따라서 이러저러한 성향을 낳는 조건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도 크게 다른 여러 집단간에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투쟁의 핵심적인 문제이다. 심지어는 교실 안에서조차 문화와 예술작품을 음미하는 정통적인 방식에 대한 규정은 교양있는 가정이든 학교교육의 장의 바깥에서건 이전에 이미 정통적인 문화에 접근한 아동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내려지게 된다. 왜냐하면 교육체계안에서도차 너무 학술적인 지식이나 해석은 ‘너무 전문적’라거나 ‘현학적’이라고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그 대신 직접적 경험이나 꾸밈없는 줄거움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때로 전형적인 ‘현학적’ 용어로 예술작품에 대한 ‘독해’라고 불리는 행위의 논리가 위와같은 대립의 객관적인 토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경우 소비는 의사소통과정의 한 단계 즉 판독 또는 해독 행위로서, 이를 위해서는 암호나 약호에 실천적으로 통달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은 지식 또는 개념 즉 단어들에 의해 측정되며, 지식이나 개념들은 보이는 것들을 명명하며, 따라서 지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예술작품은 오직 문화적 능력, 즉 해독의 기준이 되는 약호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고 오직 그런 사람의 관심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 시기, 유파, 저자의 특징을 드러내는 스타일을 인식하고, 더 일반적으로는 미학적 향유를 요구하는 작품의 내재적 논리에 익숙해지려면 암묵적으로 은폐되어 있건 아니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건 사물을 지각하고 음미하는 도식을 의식적으로건 또는 무의식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특수한 약호를 결여하고 있는 감상자는 영문도 모른 채 음과 리듬, 온갖 색채와 선의 카오스 속에서 ‘익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각 상황에 걸맞는 성향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어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감지할 수 있는 속성’이라고 부른 것만을 주목해 사람의 피부가 부드럽다고 하거나 아니면 레이스가 절묘하게 짜여져 있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데서 그치거나, 아니면 이러한 속성이 환기하는 정서적 반향에 머물러 색채가 ‘꾸밈이 없다’거나 멀로디가 ‘흥겹다’는 평가를 내리고는 그만두게 된다. 감지할 수 있는 속성을 넘어서 해당 작품의 독특한 양식적 속성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개념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그는 ‘일상적인 체험에 기반해서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의미의 일차적 층’으로부터 ‘이차적 층’, 즉 ‘의미되는 것의 의미의 수준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예술작품과의 만남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천눈에 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감정적 융합, 감정이입도 인지 행동, 해독 작업을 전제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유산으로 물려받은 인식 방법이나 문화적 약호를 가동해야 한다.

이처럼 전형적으로 주지주의적인 예술지각 이론은 문화에 대한 정통적인 정의에 가장 가까이 있는 예술 애호가들의 경험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들은 분명하게 느끼지는 못하지만 가정 안에서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정통 문화를 획득하기 때문에 그러한 획득과정을 암각한 채 문화는 마술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부추겨지게 된다. ‘안목’은 역사의 산물로, 교육에 의해 재생산된다. 현재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예술적 지각 양식, 즉 정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도록 만들어진 작품, 다시 말해 정통적인 에술작품뿐만 아니라 예들들어 과거의 원시예술이나 현대의 대중적 사진 또는 키취(KITCH)처럼 아직 성스러운 것으로 분류되지 않은 예술적 대상과 자연적 대상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자체로 또 자율적인 모습 자체로 그리고 내용과 형식 양면에 걸쳐 바라볼 수 있는 미학적 성향이나 능력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순수한’ 응시 또한 자율적인 예술생산의 장, 즉 생산물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 그 자체의 독특한 규범을 부여할 수 있는 장의 등장과 관련된 역사적 발명품이다. 인상파 회화이후의 모든 예술은 재현 대상보다는 재현 양식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예술관의 산물로, 이것은 단지 조건적으로만 형식을 요구했던 이전의 예술과 달리 형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주목을 요구한다.

예술가들은 자율성을 추구하며, 즉 자신의 생산물의 완벽한 주인길 바라는 다른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이 선험적으로 강제하는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행동거지와 언행을 규정해온 고래적 위계에 따라 귀납적으로 작품에 부가되는 해석을 거부하려 한다. 따라서 내재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다의미성을 갖도록 만들어진 ‘열린 작품’의 생산은 예술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시인드로가 이들의 궤적을 따르는 화가들이 하는 노력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생산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곧 특정한 기능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주제’나 외적인 지시 대상보다는 형식이나 양식, 스타일처럼 예술가가 주인으로서 쉽게 장악할 수 있는 요소의 자율성에 일차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시에 문제가 되는 예술분과의 특수한 조건에 각인되어 있는 필연성 이외의 다른 필연성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로부터 예술을 모방하는 예술로 이행하여, 오직 자체의 역사로부터만 독창적인 실험의 원천 그리고 심지어는 전통과의 단절의 원천을 끌어내려 한다. 따라서 점점 더 자체의 역사를 지시하게 되는 예술을 역사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또한 이 역사는 외적인 지시대상, 즉 재현되거나 지식된 ‘현실’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예술작품으로 구성된 우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특정한 장에서 생성되는 예술적 생산과 마찬가지로 심미적 지각 또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편차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즉 관계적으로 주목하는 한 필연저긍로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특정한 장, 즉 그 장의 특수한 조건 밖에서 활동하는 소위 소박한 화가가 예술가와는 외적인 관계만을 맺듯이, ‘소박한’ 감상자 또한 오직 예술적 전통의 특수한 역사와 관련해서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예술작품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극히 자율적인 생산의 장의 생산물들이 요구하는 미학적 성향은 특수한 문화 능력과 분리될 수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는 관여성의 원리로서, 즉 눈앞에 제시되는 여러 요소 중에서 모든 변별적 특징을 구별하도록 해주고 또 이를 통해 무의식적이건 아니면 의식적이건 그러한 특징을 가능한 여러 대안의 체계와 대조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 이러한 능력은 대부분 예술작품과 접촉하기만 해도, 즉 분명한 규칙이나 기준 없이도 낯익은 얼굴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면식과 유사한 암묵적인 배움을 통해서도 획득될 수 있으며, 대개는 나날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대로 행사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각 스타일의 독자성을 구성하는 여러 특징을 명확하게 구분하거나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도 스타일, 즉 특정한 시대, 문명, 또는 유파의 전형적인 특징을 이루는 표현양식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른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심지어는 전문적인 감식가들에게도 통상 이들의 판단의 근거가 되는 ‘전형적인 작품’의 양식적인 특성을 규정하는 기준은 통상 여전히 암묵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예술이 미학적 성향에 가장 커다란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은 분명하나, 실제로 기본 욕구나 충동을 순화하고, 세련화하며, 승화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 실천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의 양식화, 즉 기능보다는 형식을, 소재보다는 매너를 우선시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별볼일 없는 대상 심지어는 ‘평범한’ 대상에 미학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만큼 또는 미학을 윤리에 복속시키는 대중적 성향을 완전히 전복시켜 ‘순수’ 미학의 원리를, 예를 들어 요리나 의복, 또는 실내장식처럼 일상생활에서 가장 일상적인 선택에 적용할 수 있는 자질만큼 변별적이고 탁월한 기능을 하는 것도 없다.

실제로 현실이나 허구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허구와 이들 허구가 빚어내는 현실을 믿게 되는 다양한 방식은 각 방식의 전제조건을 이루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사회 공간에서 각 요소들이 차지하는 여러 위치와 밀접하게 관려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게급과 게급분파마다 특이하게 나타나는 성향의 체계(아비투스 Habitus)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다양한 분류법에 의해 구분되는 사회적 주체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탁월한 것과 천박한 것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의 탁월함을 드러내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가 객관적 분류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표현되고 드러난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통게자료를 분석해 보면 문화적 실천에서 나타나는 구조상의 대립이 식품 소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과 질, 화려하게 꾸민 식사와 격의없는 식사, 실내용물과 형식 간의 대립은 필수품에 대한 기호, 즉 가장 “영양가가 많으며” 가장 경제적인 식품을 선호가기 마련인 기호와 자유소비재 또는 사치품에 대한 기호 즉 매너를 강조하며 기능을 부정하고 양식화된 형식을 선호하는 취향 간의 대립과 상으하여, 생활필수품으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취향과 문화 소비를 연구하는 과학은 전혀 미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침범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시작한다. 즉 음악이나 음식, 회화, 스포츠, 문화과 헤어스타일에 대한 선호도처럼 얼핏 보기에는 전혀 같은 잣대로 잴 수 없어 보이는 ‘선택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는 관계를 이해가능한 형태로 드러내려면 정통 문화를 고립무원한 독립된 우주로 분리시키고 있는 성스러운 경계선을 없애버려야 한다. 이처럼 야만적이지만 억지로라도 미학적 소비를 일상적 소비의 세계로 재통합시키게 되면, 칸트이래로 고급스러운 학문적 미학의 토대를 이루어온 ‘감각의 취향’과 ‘반성의 취향’ 그리고 감각의 쾌락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안이한’ 쾌락과, 쾌락 자체가 순화된 쾌락으로 도덕적 탁월함의 상징이자 진정 인간적인 사람을 재는 잣대가 되는 승화능력을 가리키는 지표인 순수한 쾌락 간의 대립을 폐기할 수 있다. 이러한 마술적 구분으로부터 유래하는 문화는 성스러운 가치를 갖게 된다. 문화적 성화 의식은 각 의식이 손대는 대상과 사람과 상황에 카톨릭의 성체변화와 유사한 일종의 존재론적 승격을 부여해준다.(…)

저급하고 조잡하고 천박하며 타산적이고 비굴한, 한 마디로 자연스러운 기쁨을 부인하는 것, 바로 이것이 문화의 성역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것은 은연중에 세속의 천한 사람들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승화된 즐거움, 세련되며,무사무욕적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우아하고 단순한 예술과 문화 소비가 애초부터 사람들이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또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혀 상관없이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