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르켐의 “사회분업론” 2004/11/14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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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사회분업론”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은 [사회분업론(Division of Labor in Society)]에서 분업이 사회질서의 기초임을 밝히고 있다. 분업은 단순히 경제적 효용에 그 가치가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연대를 일으키는 것으로 도덕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저서에서 뒤르켐은 사회에서 분업의 증가가 기계적 사회에서 유기적 사회로의 이동을 일으키며 사회적 연대도 그에 따라 변한다고 지적한다.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는 구성원들의 동일한 가치와 규범의 공유(집합의식: collective conscience)가 사회의 통합과 개인의 결속의 기초로 작용하는 상태이고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는 전문화된 각각의 개인들이 상호의존성에 기반하여 결속된 상태이다. 뒤르켐은 분업이 진행될수록 집합의식이 약화되고 개인상호간의 이질성이 증대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유대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개인들간의 상호의존을 증대시킨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문화되고 이질적인 개인간의 상호의존성의 증대는 집합의식의 대안적 형태로 나타난다. 곧 분업은 집합의식을 약화시키고 개인성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유기적 연대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사회분업론]의 국내 번역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해본다.

에밀 뒤르켐. 1990[1893]. 자살론/사회분업론 임희섭 옮김. 삼성출판사. pp. 387-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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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메마른 대지는
비를 사랑한다.
비가 가득찬 하늘은
소나기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서론

사회 분업과 관련된 우리의 과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첫째, 분업의 기능, 즉 분업이 어떠한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며, 둘째, 분업의 원인과 조건을 밝혀내는 것이고, 셋째, 분업의 주된 비정상적인 형태를 다룸으로써 정상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다.

분업의 도덕적 가치가 많은 논란을 가져온 것은 분업이 일반적인 도덕적 공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보게 될 사실들이 무시되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분업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그 성격과 역할,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분업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분석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우리가 착각해 온 것이다. 그런 방법은 과학적 결론을 내리게 해주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잘못으로 인해서 분업의 이론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이래로 거의 발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슈몰러(Schmoll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 애덤 스미스의 추종자들은 유용한 관념들이 결핍되어 있었으며, 그의 선례와 언급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다. 그러는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관찰의 영역을 확장하고 실제 공장에 있어서의 분업을 18세기의 작은 상점에 있어서의 분업과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그러한 방식으로도 분업의 이론은 체계적인 발전을 보지는 못했다. 경제학자들에 의한 기술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와 평범한 사실에 대한 관찰들만으로는 분업이론은 크게 발달되어질 수 없었다.” 객관적인 분업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분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념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분업을 객관적 사실로 취급하여 관찰하고 비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관찰의 결과가 흔히 우리들에게 익숙한 분업의 의미와는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 1 장 분업의 기능

우리가 목표나 목적이라는 말로 분업의 기능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 용어가 우리가 밝히려는 결과를 미리 전제하기 때문이다. ‘결과’나 ‘효과’라는 용어는 그 결과가 의도적으로 예정한 것이건, 사회의 적응이건 간에 상응의 관계가 어떠한 성격의 건인지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상응의 관계를 암시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목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전에 분업의 결과가 예정되어진 것인지 사후에 감지된 것인지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고, 분업의 존재와 그 존재의 요소들을 확정 짓는 일인 것이다.

분업은 생산력과 노동자의 능력이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의 지적, 물질적 발전의 필요조건이다. 분업은 말하자면 문명의 원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문명에 대해서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분업의 다른 기능을 찾기 위해서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문명 그 자체는 아무런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며, 문명의 가치는 그것이 어떤 필요에 응하기 때문에 갖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분업 역시 보다 많은 노력의 대가 없이 진전될 수 없으므로 인간은 그 보상으로 문명으로부터 어떤 가치를 구하듯 분업으로부터 무언가를 구하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그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친구관계를 통해 분업의 다른 기능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벗에게서 우리에게 부족한 특질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들과 어울림으로써 어느 정도 그들의 특성에 참여하게 되어 자신의 불완전함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규모의 친목집단이 형성되고, 그 집단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알맞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서로 서비스를 교환하게 된다. 그러므로 친구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그 기능의 분담, 즉 분업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업을 새로운 조명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관점에서 분업이 제공하는 경제적 서비스는 분업이 가져오는 도덕적 효과에 비한다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즉 분업의 진정한 기능은 두 사람 이상의 개인에게 연대감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가 어떠한 방식으로 얻어지건, 분업의 목적은 친구들 사이에 유대를 일으키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있다. 부부관계 역시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분업의 가장 중요한 효과가 분화된 기능들의 산출을 증가시키는 데 있지 않고 연대를 제공하는 데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분업의 경제적인 효용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업은 경제적 이익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써 사회적, 도덕적 질서의 확립에 기여한다. 분업을 통해서 개인들은 서로 유대한다. 분업을 통해서 개인들은 개별적으로 발달하는 대신에 그들의 노력을 결합한다. 그러한 개인들의 유대는 서비스가 교환되는 일시적인 유대가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유대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분업이 보다 광범위한 집단에서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가를, 그리고 분업이 발달시킨 현대 사회가 사회의 통합기능을 수행하는가를 알고자 한다. 위에서 우리가 관찰한 사실들이 보다 넓은 폭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고, 거대한 정치사회들이 전문화에 의해서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으며, 분업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연대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업의 이러한 기능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분업을 통한 사회적 유대를 다른 종류의 유대와 비교해 보고, 분업이 전체적인 효과에서 차지하는 공헌도를 측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목적을 위해서 우선 할 일은 상이한 형태의 사회적 연대를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는 그 자체로써는 정확하게 관찰할 수도 없고, 제대로 측정할 수도 없는 완전히 정신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분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관찰할 수 없는 내면적인 사실을 대신해서 그것을 상징하는 외현적인 지표를 통해서 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 외현적인 상징은 법률이다. 실제로 법은 비물질적인 성격의 것이지만, 사회적 연대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단순한 잠재력의 상태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지표로 나타난다. 사회생활 일반은 법적 생활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확장되지 않고서는 확대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기본적 형태의 사회적 연대는 법에 반영되어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법은 사회적 연대의 중요한 형태를 나타내므로, 상이한 법의 형태를 분류하고 그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상이한 사회적 연대의 형태를 발견하면 된다. 그 중에서 분업이 원인이 되는 특정한 사회적 연대를 상징하는 형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발견된다면 분업의 역할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법의 총량과 분업을 표현하는 법규의 수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법의 규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떤 규제는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해서 손실이나 고통을 주는 형태이다. 우리는 그 규제를 억압적(repressive) 규제라고 부른다. 억압적 규제를 가지는 법은 형법이다. 또 하나의 다른 규제는 대상에 대해서 손실을 주는 것이 아니라 ‘원상대로 사물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배상적(restitutive) 규제하고 부른다. 이제 두 형태의 법규범에 상응하는 사회적 연대의 형태를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제 2 장 동류성에 의한 기계적 연대

억압적 법률에 상응하는 사회적 연대에 의한 관계는 그 관계를 파기하면 범죄가 된다. 우리는 그 정도에 관계없이 그런 모든 행동을 범죄라고 부르며, 범죄자에 대해서는 형벌이라고 부르는 반응을 보인다. 모든 성문율은 이중의 목적을 갖는다. 즉 특정한 의무를 지시하는 것과 그 의무에 부가된 제재를 규정하는 것이다. 민법은 최대한 정확하게 의무를 규정하지만, 그와 반대로 형법은 의무에 대해서 언급하기 보다는 제재를 규정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형법은 민법처럼 ‘이것이 의무이다’고 규정하는 대신에 ‘이것이 형법이다’라고 규정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법은 거의 다 형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법은 정체적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법률은 언제나 억압적이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이런 형법의 고정성은 형법이 반영하는 집합감정의 저항력을 나타낸다. 그와 반대로 순수하게 도덕적인 규범의 높은 적응성과 진화의 신속성은 그 기초가 되는 감정의 저항력이 적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규범들은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것이거나, 혹은 의식 속에 깊이 침투되어질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저항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어 심층에서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동일사회의 평균적인 시민들에게 공통된 신념과 감정의 총체는 그 자체의 삶을 갖는 확정적인 체계를 이룬다. 그것을 우리는 집합의식(collective conscience) 또는 공동의식이라고 부른다. 물론 집합의식은 그 기초가 되는 특정한 기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성격상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확산되어져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독특한 실체로서의 특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집합의식은 개인이 처하고 있는 특정한 조건과는 관계가 없으며, 특수한 조건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집합의식에 대한 이러한 개념정의로부터 우리는 범죄가 강력하고 확정적인 집합의식의 상태에 대해 유해한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한 행동이 범죄적이기 때문에 집합의식에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집합의식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범죄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한 행동을 그것이 범죄적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부정하기 때문에 범죄가 된다.

범죄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처벌인데 만일 우리가 내린 범죄의 정의가 정확한 것이라면 그것은 처벌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처벌은 정열적인 반응이라는 점이다. 이 성격은 덜 발달된 사회일수록 더욱 명백하다. 원시인들은 처벌을 처벌을 위해서 가하며, 죄인을 고통받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가한다. 그들은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런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처벌이 범죄자에게서 연장되어 그의 아내와 자녀들, 이웃들 등에까지 가해졌다. 이것은 처벌이 정열을 소진함으로써만이 중지되기 때문이다. 즉 만일 직접 범죄를 일으킨 사람을 처벌하고도 아직 정열이 남아있는 경우에는, 처벌은 기계적으로 확대되어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형벌의 성격이 변화했다. 사회가 처벌하는 것은 복수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처벌이 일으키는 고통은 방지의 수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는 처벌이 어떤 만족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처벌의 위협이 악행을 계획하는 사람을 좌절시키기 때문에 처벌하는 것이다. 물론 처벌의 성격은 그 기본에 있어서는 변화되지 않았다. 다만 보복의 욕구가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더 잘 지도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앞을 내다보는 예지가 맹목적인 감정적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미개사회에서 대부분의 범죄는 공적인 것과 관련된 것이다. 즉 종교나 관습이나 권위 등에 의한 범죄인 것이다. 성경이나 마누(Manu)의 법률, 고대 이집트 법률의 유적들만 보아도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지시들은 비교적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와 반대로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의무나 의례의 소홀 등은 가장 심하게 처벌되었다. 오늘날에는 사회가 처벌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개인들로부터의 위임이다. 사회는 개인들의 대표자일 뿐이다. 사회는 아마 개인들보다 더 잘 보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개인들의 이익을 대신 보호해준다. 그리고 그 이익은 사회 자체의 이익은 아니라는 것이다. 처벌의 사회적 성격이 적을수록 그 형벌적 성격도 약해지며, 반대로 형벌적 성격이 강할수록 그 사회적 성격은 많아진다.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 의식이 있다. 하나는 우리들 자신을 특징지우는 각 개인의 개별적인 상태이고, 또 하나의 의식은 모든 타인이 전체 사회속에서 우리와 공통된다는 상태이다. 전자는 우리들 개인의 성격만을 표상하며 개인적 성격을 구성한다. 그리고 후자는 집합적 유형을 표상하며 그것 없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후자의 요소일 때에는 우리들의 행동은 개인적 이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합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서로 구별되어지는 그와 같은 두 가지의 의식은 서로 관련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결국 하나이며 유일하고 동일한 유기적 기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연대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유상성으로부터 기원하는 자생적인 연대가 나타나 개인과 사회를 직접 연결시킨다. 우리가 왜 그런 연대를 기계적 연대라고 부르는지는 다음 장에서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억압적 법률이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활력을 갖는 것이건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연대이다. 그 법률이 금지하는 행동들이 범죄인 바 범죄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그러한 행동이 행위자와 집합유형간의 심각한 불일치를 초래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행동이 집합의식을 대표하는 기관을 침해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자의 경우에도 범죄가 침해하는 힘과 범죄를 억압하는 힘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동질성의 산물이며, 그것은 그 동류성에 기초한 사회적 응집을 유지하는 효과를 갖는다. 형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힘이며, 그러기 위해서 형법은 우리에게 사회조직의 통합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동질성을 요구하고, 동시에 그와 같은 동질성을 표현하고 집약하며 보호하는 상징에 대한 존경을 요구한다.

제 3 장 분업에 의한 유기적 연대

배상적 규제의 성격 자체에 상응하는 사회적 연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배상적 규제가 다른 점은 그것이 속죄적가 아니라 단순히 ‘원상회복’을 구한다는 점이다. 법을 어기거나 법을 무시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비행에 비례하는 고통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에 동의하도록 선고된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재판관은 원래의 상태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그는 법을 말하지만 처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와 함께 억압적 법률이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데 반해서 배상적 법률은 중재재판소 등 보다 더 전문화된 기구들을 만들어낸다. 그 법률은 민법에 관련되는 가장 종합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특정한 관리들을 통해서 행사된다.

그러나 법규들은 어느 정도 집합의식의 외부에 있는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개인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배상적 법률은 사회적 연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법률이 규제하는 관계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간의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친구관계처럼 단순한 사생활에 있어서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이 분야의 법적 생활에서도 사회는 절대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그 자체의 활동을 통해 스스로 간여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간여하기 위해서는 이해 당사자들이 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일단 요청을 받게 되면, 사회의 간섭은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가 된다. 왜냐하면 그 기능은 사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배상적 규제를 가지고 있는 협동적 법률과 그 법률이 표현하는 사회적 연대는 분업에 의한 결과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협동적 관계는 다른 종류의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사실상 집합의식의 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기능들뿐이다. 왜냐하면 공공의식의 대상이 되는 첫째 조건은 모든 의식에 존재해야 하고, 모든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공통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능들이 어느 정도의 일반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누구나 그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특수화되어 있는 기능일수록,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적어진다. 따라서 그 기능들은 공동의식에 대해서는 보다 주변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그 기능들이 규정하는 법규들은 침해에 대해서 속죄를 요구할 만큼 강력한 힘과 초월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다. 그 법규의 권위도 역시 형법과 마찬가지로 여론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론은 사회의 제한된 영역에 한정되어진 여론이다.

이 법은 분명히 유기체에 있어서의 신경체계가 수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신경체계는 사실상 유기체의 상이한 기능들이 조화되도록 규제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경체계는 생리학적 분업에 의해서 유기체가 달성하는 집중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들의 진화의 수준을, 신경체계의 발달에 상응하는 집중의 정도에 의해서 측정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사회적 분업에 상응해서 사회가 달성하는 집중의 정도를 배상적 규제에 의존하는 협동적 법률체계의 발달에 의해서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 종류의 연대를 구분하고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 첫 번째 연대는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공통된 관념과 경향이, 각 성원의 개인적인 관념과 경향보다 더 그 양과 정도에 있어 강한 것일 때에만 강력해질 수 있는 연대이다. 이러한 연대가 힘을 발휘할 때에는 우리의 개성은 성격상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기보다는 집합적인 생명이 된다. 그 응집되어지는 사회적 분자들은 마치 무기체의 분자들처럼 자체의 행동이 없을 때에만 함께 행동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 형태의 연대를 기계적 연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용어는 그 연대가 기계적이고 인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은 생명체의 요소들이 결합하는 유대와는 반대되는 무기체의 요소들이 결합하는 유대에 그것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업이 만들어내는 유대는 전혀 다르다. 앞에서 말한 형태는 개인들이 서로 유사할 것을 전제로 하지만, 분업에 의한 유대는 개인들이 서로 다를 것을 전제로 한다. 전자는 개인의 성격이 집합적인 성격 속에 흡수되어짐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후자는 각 개인이 그 고유한 행동의 영역, 즉 성격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집합의식이 규제할 수 없는 특수한 기능들을 위해서는 개인의식의 일부를 남겨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영역이 확장될수록 그 연대로 인한 응집은 강해진다. 사실상 노동이 분화될수록 개인은 사회에 더욱 철저하게 의존하게 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이 특수화될수록 각 개인의 활동은 더욱 개인적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연대를 유기적 연대라고 부른다.

결론

우리는 도덕적 규범들을 두 형태로 나누었는데, 그 하나는 확산된 것이건 조직된 것이건 억압적 강제력을 가지는 규범들이며, 다른 하나는 배상적 강제력을 가지는 규범들이다. 우리는 전자가 동질성에서 나오는 자생적 연대의 조건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를 기계적 연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후자는 소극적 연대의 조건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유기적 연대라고 불렀다.

우리는 후자와 전자가 서로 다른 성격의 것이 아니라 다같이 도덕적이라는 것과, 전자의 일반적 특성이 개인을 사회화시키는 데 있어 점점 더 불충분해지고 있기 때문에 후자의 역할이 계속 증대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오늘날 도덕은 진정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앞서의 논의는 도덕의 병리적 상태의 성격과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구조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형태에 상응하던 도덕은 약화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의 의식에 생겨난 공백을 메워줄 새로운 도덕이 신속하게 형성되고 있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고 우리의 전통은 그 지배력을 상실하였다. 개인적 판단은 집합적 판단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변화로 인해서 혼란하게 된 제 기능들이 서로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런 아노미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지금도 서로의 부적응으로 인해 낭비되고 있는 기관들을 서로 조화될 수 있게 하는 길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 과제는 도덕률을 우리 자신에게 맞게 하는 일이다. 그 과업은 조용히 연구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과업을 요구하는 내적 원인의 압력에 의해서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사상이 제공할 수 있는 봉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정해주는 일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일이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