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루터의 직업개념” 요약2004/11/14 802

베버, “루터의 직업개념”

다음은 막스 베버의 저서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과 자본주의 정신] 중에서 루터의 직업개념을 밝히고 있는 “루터의 직업개념”과 베버의 각주를 요약발췌한 것이다(히브리어 원문은 제외). 막스 베버는 독일어로 직업을 뜻하는 Beruf가 처음으로 현재의 의미를 갖게 된 시점을 종교개혁 시기로 밝히고 있다. 그는 [시락서]에 대한 루터의 번역 중 한 구절(2장 20, 21절)에서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 같으며 영어의 calling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라는 독특한 측면이 함축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민족이나 카톨릭 민족에게서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색조의 표현을 찾아볼 수 없으며 주로 프로테스탄트 민족에게서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엘리아스(Elias, P)는 영어에서 “직업(Occupation)”이란 단어가 현재적 의미와 유사하게 쓰인 시점이 불과 500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라틴 어원과 중세 프랑스어, 고대 영어(450년∼1150년까지의 영어)에서 이 단어는 “점령군(an army of occupation)”이란 뜻으로 단지 공간의 점유(the possession of space)를 지시했으며 중세이후로 이 단어는 시간의 점유(the possession of time)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는데, 특별히 사람들이 시장 활동이나 비 시장활동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는가를 묘사하는 용어로 쓰였다고 한다(Elias, P. 1997. “Occupational Classification(ISCO-88): Concepts, Methods, Reliability, Validity and Cross-National Comparability”. [Labour Market and Social Policy Occasional Papers]. GD(97)112. Paris: OECD).

막스 베버. “문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박성수 옮김. 1988. 문예출판사. pp 16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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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직업개념

이미 독일어의 직업(Beruf)이라는 단어에, 그리고 아마 보다 분명하게 영어의 calling이라는 단어에 종교적 내용, 즉 신으로부터 받은 임무라는 것이 적어도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며, 이 말을 구체적인 경우에 강조하면 할수록 그 점은 보다 분명하게 감지된다. 그리고 그 말을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언어들과 비교하여 추적해 보면, 우선 드러나는 것은 주로 카톨릭적인 민족에게서 우리가 직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색조의 표현을 찾아볼 수 없고, 이는 고전적 고대에서도 마찬가지인 반면에 주로 프로테스탄트적인 모든 민족에게는 그러한 표현이 존재한다1).

현재와 같은 의미에서의 이 말은 성경 번역에서 유래한 것이다. 물론 성격 자체의 함축된 정신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 단어는 [시락서]에 대한 루터의 번역 중 한 구절(2장 20, 21절)에서 현재의 의미로서 처음 사용된 것 같다2). 그 이후로부터 곧 이 말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민족의 일상어에서 현재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반면에 그 이전에는 어떤 세속적 문헌에서도 그와 같은 어의에 대한 단초는 찾아볼 수 없으며, 종교문헌에서도 그러한 어의는 단지 루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한 사람의 독일 신비가 에게 서만 찾아 볼 수 있다.

단어의 의미가 그러하듯이 이 사상도 새로운 것이며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곧 세속적 직업에서의 의무이행을 도덕적 자기증명이 가질 수 있는 최고 내용으로 평가한 점이다. 이것 때문에 세속적 일상 노동이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발생했고 그러한 의미의 직업개념이 최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직업 개념에는 모든 프로테스탄티트 교파의 중심 교리가 표현되어 있다. 이 교리는 도덕적 계율을 명령과 권고로 나누는 카톨릭적 태도를 거부하고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도승적 금용주의를 통해 현세적 도덕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세적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현세적 의무는 각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곧 그의 직업이 된다.

루터에 의해서 이러한 사상은 그의 종교개혁 활동의 첫 십 년 동안에 발전되었다. 처음에 그는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듯이3) 현저히 중세적인 전통적 생각에서, 세속적 노동은 아무리 신에 의해 의욕된 것이라 해도 피조물에 속하는 것이라 보았고 마치 먹고 마시는 것처럼 도덕적으로는 무관한 신앙생활의 불가결한 자연적 토대라고 보았다. 그러나 오직 신앙뿐이라는 사상이 보다 분명하게 철저화되고 그럼으로써 악마에 의해 강제된 수도원 생활에 대한 카톨릭의 복음주의적 권고와의 대립이 점차 첨예하게 강조되자 직업의 중요성은 점증해 갔다. 수도승적인 생활방식은 이제 신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데는 전적으로 무가치할 뿐 아니라 세속적 의무를 회피한 이기적인 냉혹함의 산물로 여겨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속적인 직업노동은 이웃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여겨졌다. 물론 여기서 이웃 사랑은 세상물정과는 동떨어진 방식이었고, 특히 분업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을 위해 노동하도록 한다고 지적한 점에서 아담 스미스의 명제4)와는 대립되는 괴상한 방식으로 정초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으로 스콜라적인 정초는 곧 사라지고 점차 다음과 같은 지적이 강조되었다. 즉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모든 경우에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만이 신의 뜻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단적으로 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5).

우선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가 없는 것은 예컨대 루터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 왔던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정신과 유관하든지 혹은 내면적으로 유사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종교개혁의 업적을 열렬히 찬양하고 있는 현재의 교파도 대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든 자본주의의 동조자가 아니다. 아마 루터, 스스로도 분명히 벤자민 프랭클린에게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생각에 대한 모든 유사성을 단적으로 거부할 것이 분명하다.

광신자와 농민폭동에 대항해 싸우고 난 후 루터에게는 각자의 신으로부터 지정 받은 객관적인 역사적 질서가 점점 신의 뜻의 직접적인 현시로 되어 갔다. 각자는 근본적으로 신이 일단 정해 준 그 직업과 신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며, 지상의 노력은 주어진 삶의 지위가 정해 준 한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적 전통주의가 처음에는 바울적인 무관심의 산물이었다. 나중에는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주어진 처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과 동일시하는 점차 강화되던 섭리신앙의 결과였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는 루터가 근본적으로 새롭거나 원칙적인 근거에 입각하는 직업노동과 종교적 원리의 결합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루터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단순한 직업사상은 현재 알려진 한에 있어, 우리가 탐구하는 것에 대해 기껏해야 불확실한 중요성밖에는 갖지 못한다. 그렇다고 종교생활을 루터주의적 형태로 재편성한 것이 우리의 고찰 대상에 아무런 실천적 중요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단지 이 중요성은 분명 세속적 직업에 대한 루터와 그의 교화가 갖는 태도에서 직접적으로는 도출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프로테스탄티트 교파에서 가능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쉽게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생활실천과 종교적 출발점간의 관련을 루터주의보다 쉽게 탐구할 수 있는 형태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고찰하는 것이 좋다. 이미 앞에서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점하는 캘빈주의와 여러 프로테스탄티트 교파의 현저한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루터가 츠빙글러에게서 자신과는 다른 정신이 살아 숨쉬는 것을 보았듯이 루터의 정신적 후예들은 특히 캘빈주의에서 그러한 것을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옛날부터,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카톨릭은 캘빈주의를 진정한 적으로 여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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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어 중에는 오직 히브리 어만이 유사한 어조의 표현을 갖고 있다. 우선 “근무”라는 말이 그렇다. 이는 성직자의 기능에 대해 사용되었다(<출애굽기> 35장 21절; <역대 상> 9장 13절; 23장 4절; 26장 30절). 그리고 왕을 섬기는 일(특히 <사무엘 상> 8장 16절; <역대 상> 4장 23절; 29장 6절), 궁정업무(<에스더> 3장 9절; 9장 3절), 노동관리업무(<열왕기 하> 12장 12절), 노예의 일(<창세기> 39장 11절), 농경노동(<역대 상> 27장 26절), 수공업(<출애굽기> 31장 5절; 35장 21절; <열왕기 상> 7장 14절), 상업(<시편> 107편 23절) 등에 사용되었으며 곧 언급하게 될 Sir. 11, 20에서는 모든 “직업노동”에 사용되었다.
이 말이 이집트의 부역관료제와 이집트를 모방한 솔로몬의 부역국가의 어휘에서 유래한 것임은 앞서의 인용에서 분명한 것 같다. 이전에 A. 메르크스가 필자에게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이미 고대에 이 어간 개념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말은 모든 “노동”에 대해 사용되게 되었고 실제로 “직업(Beruf)”이란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이전에 종교적 기능에 사용되던 특색을 잃게 되었다.
<시락서> 11장 20절에도 나오고 70인 번역에서 “과업”(=지정된 일, 할당된 일, 과제)이란 표현도 부역관료제의 어휘에서 유래된 것이며 “업”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이 말은 <시락서> 11장 20절에서 신의 계율 이행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따라서 독일어의 “Beruf”와 유사하다. <시락서>의 이 부분에 관해서는 스멘드(Smend)의 유명한 예수 시락 연구서를, 그리고 동저자의 [Index zur Weisheit des Jesus Sirch] Berlin 1907을 보라(주지하다시피 <시락서>의 히브리어 원본은 소실되었다가, 쉐흐터에 의해 재발견되어 부분적으로는 탈무를 인용하여 보완한 것이다. 루터 당시에는 원본이 없었고 따라서 그의 어휘 사용에는 이 두 히브리 어 개념이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잠언> 22장 29절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조).
희랍어에서는 윤리적 색조를 갖는 그 독일어에 해당하는 표현이 전혀 없다. 라틴 어에는 “직업”이라 번역되는 단어, 즉 (대체로) 인간에게 소득의 원천이자 지속적인 경제적 생존의 근거가 되는 지속적인 분업적 활동으로 번역되는 것이, 특수한 함축이 없는 “opus”가 있지만 그밖에도 독일어의 윤리적 내용과 어느 정도 유사한 색조를 갖는 것은 officium(opificium에서 파생. 따라서 원래는 윤리적인 내용이 없으나 나중에 특히 세네카의 [de benef] IV, 18에서는 직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는 munus-고대 시민공동체의 부역에서 파생된 말이다-등이 있고 마지막으로 professio가 있는데, 이 말은 바로 공법적 의무, 즉 이전의 시민의 조세신고의무에서 유래되어 이런 의미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는 특히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업(professio bene dicendi)”에 사용되었고 이러한 좁은 범위에서는 독일어의 “Beruf”란 말과 모든 점에서 상당히 유사한 전체적 의미를 갖는다. 제정시대에 “수공업”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ars”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인 희랍어 성서(Vulgata 번역)는 앞서 나온 [예수시락]의 구절을 한 군데는 opus로 다른 곳은(21절) locus로 번역했다. 이 후자는 여기서 “사회적 지위” 따위를 의미했던 것 같다.
로마계 언어중에서 오직 스페인 어의 “vocacion”만이 내면적인 “부름(Beruf)”과 같은 뜻을 일부 갖는다. 이 말은 사제직에서 전화된 것으로 독일어의 의미와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함축을 갖지만 외적인 의미에서의 “beruf”라는 뜻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2) 모든 사전들에 나타나 있고 또 필자의 동료인 브라우네(Braune)와 호프스(Hoops)가 친절히 확증해 주었듯이 루터의 성서 번역 이전에는 독일어 “Beruf”, 네덜란드어 “beroep”, 영어 “calling”, 덴마크어 “kald”, 스웨덴 어 “kallelse” 등이 현재와 같은 세속적 의미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Beruf와 같은 발음의 중세 고지 독일어, 중세 저지 독일어, 중세 네덜란드 어 등은 모두 오늘날 독일어의 Ruf와 같은 뜻이었으며, 특히-중세-성직 수여권자가 한 후보자를 성직에 “임명”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는 특수한 경우로서 스칸디나비아 어의 사전에도 특히 잘 드러난다. 루터도 그 말을 이런 의미로 종종 사용한다. 그러나 이 말의 이러한 특수한 사용이 그 말의 어의변화를 일으키는 데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어쨋든 근대적인 “직업” 개념의 성립은 언어상 성서 번역에 근거하는 것이며 그것도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번역에 근거한다.
영국의 경우 크랜머의 성서 번역이 Beruf=trade라는 의미에서 청교도의 “calling” 개념의 근원임은 이미 머레이(Murrary)가 지적한 바이다. 16세기 중엽부터 calling이 그런 뜻으로 사용되엇고 이미 1588년에는 “unlawful calling”이라는 말이 쓰여졌으며 1603년에는 고위직이라는 의미로 “great calling”이란 말이 사용되었다.

3) 왜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의 신분적, 직업적 분류를 신의 뜻이라 주장했을 때 그는 사회를 객관적으로 조화된 우주라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이 일정한 하나의 “직업(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토마스 자신은 ministerium 또는 officium이란 말을 사용했다)”에 지정돼 있다는 사실은 “자연적 원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와 똑같은 평가는 예컨대 “직업”에 대한 파스칼(Pascal)의 평가인, 직업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이라는 말에서도 나타난다(파스칼에 대해서는 A. Koster, [Die Ethik Pascals]. 1907. 참조). 토마스주의적 직업개념과 프로테스탄트의 직업개념과의 대립은 매우 분명하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 대해서는 이만 줄이고 나중에 다시 카톨릭의 사고방식을 평가하겠다.

4) “도축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은덕 때문에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웃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들의 이익에 대해 말한다([Welth of nations] I, 2).

5)이러한 사상은 루터에 앞서 종교적 “직업(Ruf)”과 세속적 직업을 가치상 동등시하는 타울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토마스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는 독일 신비주의와 루터가 공통적이다. 이러한 대립이 표현되는 점은 토마스가-말하자면 명상의 도덕적 가치를 확고히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탁발승단의 관점에서도- 바울의 말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를 자연법에 불가결한 노동이 인류 전체에게가 아니라 단지 개개인에게만 부과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이다. 농민의 “농노노동”을 최하위로 하여 이루어지는 노동평가의 계층화는 물질적인 이유 때문에 도시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던 탁발승단의 특수한 성격에 관련된 것으로서, 모든 직업을 동등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신분질서를 신의 뜻이라 강조한 농부의 아들인 루터나 독일 신비가들에게는 모두 낯선 것이었다